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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비결

`작가란 무엇인가`시리즈 세 권이 독서계를 강타하고 있다.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한 모음집인데, 뉴욕 발 문학 잡지인`파리리뷰`에 게재된 세계적 작가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우선 1권부터 사서 읽기 시작했다. 움베르토 에코에서 윌리엄 포크너까지 각 작가들은 나름의 진솔한 어법으로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과 삶에 대한 태도를 풀어 놓는다. 소설보다 인터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와 진중성을 동시에 확보한 책이다. 나머지 두 권도 별 망설임 없이 사게 될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편의 한 예가 눈길을 끈다. 짧은 답 몇 개를 이어가는 그의 태도에 확신이 서려 있다. 얼핏 무신경하게 보이는 그 답변이 희한하게도 울림도 주고 따끔거림도 준다. 책이 처음 출간되고 유명해질 때 다른 작가들을 만나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요, 전혀.” 당시에 작가 친구는 있었느냐는 질문에도 `한 명도 없었다`고 대답한다. 나중에 친구나 동료가 된 작가가 있느냐는 물음에도 역시`아니요,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오늘날까지 작가 친구는 한 명도 없느냐고 인터뷰어가 재차 묻자 “없다고 생각돼요.” 라고 짧게 답한다.`주변 정리가 되어야 제대로 쓸 수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알고는 있었지만 저처럼 단호하게 확인까지 해주니 쓰라린 울림이 올 수밖에.성공한 작가가 되고 싶은가? 비결은 간단하다. 혼자이기를 즐기면 된다. 일단 친구 만날 시간에 책상에 앉아야 한다. 찻잔 마주하며 인간사 궁금해 할 시간에 펜을 놀리면 된다. 괜찮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자기 암시로 무작정 써야 한다. 하루키의 확신에 찬 저 단답은 이렇게 말한다. 혼자 견디며 독하게 쓸 자신이 없으면 작가되기를 포기하라고. 그런데 철저하게 혼자이기만 하면 되는 이 쉬운 방법이야말로 실천하기엔 가장 어렵다. 뭔가에 일가를 이루지 못했다면 그건 혼자만의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몰입도 최상인 그 순간을 유지하려면 친구조차 들이지 않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내 글쓰기가 한참 먼 이유를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04

경험 안에서의 문화

가장 호의적이고 흥분할 만한 안동에 대한 이미지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안동식혜`를 택하겠다. 열두 살, 고향인 그곳을 떠난 이후로 안동식혜 맛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나이 드는 탓인지 어릴 때 접했던 그 맛이 몹시 당겼다. 궁하면 구하고 급하면 나서렷다. 난생 처음 안동식혜 담그기에 도전해봤다. 늙은 엄마에게 달려가 부탁하기에는 염치없고, 솜씨 좋은 올케나 언니는 너무 멀리 있고. 일단 급한 대로 전화통을 붙잡고 언니에게 제조법을 물었다. 그래도 못미더워 인터넷 검색까지 보탰다. 고두밥을 짓고 무와 당근은 채 썰었다. 불려 치댄 엿기름물에다 고춧가루와 생강도 우려냈다. 썬 재료와 뜨신 밥을 엿기름물에 섞어 설탕 간을 한 후 하루를 삭였다. 놀라워라, 어릴 때 먹던 그 향과 식감이 코와 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납작하게 썬 배와 사과를 곁들이고 볶은 땅콩까지 고명으로 얹으니 얼추 식혜 모양새가 나온다.한데 나보기에 만족스런 첫 작품이 아들에겐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 먹는 시늉만으로 완곡하게 거절한다. 비주얼 면에서 안동식혜는 그리 산뜻한 편은 못 된다. 심하게 말하면 `꿀꿀이죽` 같다거나, 걸러서 표현해도 `물김치` 같다고 하는 이가 있을 정도로 식욕을 자극하는 모양새는 아니다. 접할 기회가 없었던 아들에게 부담스런 음료인 것은 당연하다. 가자미식해나 삭힌 홍어를 첫 대면할 때의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 그 맛에 적응하게 되면 좋아지게도 된다. 그 과정을 거친 남편이 비교적 잘 먹어줘 다행이지만, 내 식욕에 겨워 한 통이나 담근 식혜 앞에서 아들 입맛을 접수하지 못한 건 못내 아쉽다.문화란 그런 것이다. 태생과 함께 한 것이라면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나중에 경험한 문화가 껄끄러우면 일단 저어하게 된다. 거기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강요의 눈총 대신 배려의 눈길로 기다려줘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거기서 그쳐야 한다. 완벽히 타자를 이해하거나 이해시킨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후천적 문화 경험 앞에서 언제나 취향이 우선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03

그대 안의 진실, 내 안의 허구

확신과 객관성은 동거하지 않는다. 자신할수록 거짓에 가깝고, 고집할수록 본질에서 멀어진다. 본질은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다. 별은 별이고, 달은 달이다. 다만, 존재하는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세상에 다 보여주지는 못한다. 별과 달을 어떻게 새기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반짝이는 별을 보고 누군가는 훌쩍인다고 말하고, 비치는 달을 가리켜 어떤 이는 숨는다고 느낄 수 있다. 원피스 한 벌 때문에 색깔논쟁이 붙었다. 인터넷 상, 그 줄무늬 옷은 사람에 따라 흰색과 금색 또는 청색과 검은색으로 달리 보인단다. 호기심에 동참해보았다. 별 짓을 다해 봐도 내 눈엔 흰색과 금색 옷으로만 보인다.하지만 청색과 검은색으로 인지하는 사람도 거의 삼십 퍼센트에 이른단다. 어떤 사람들은 둘 경우의 색이 다 보이기도 하고, 다른 어떤 이는 제 삼의 색깔로 보이기도 한단다. 놀랍게도 그 옷의 원래 색깔은 청색과 검은색이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래 색과 다른 색으로 그 원피스 색깔을 인지한다는 뜻이다.사실 그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 조명의 차이, 시신경이나 망막의 상태, 빛에 대한 적응 정도 등에 따라 사람의 눈은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어차피 색깔이라는 것도 사람이 정한 것이고, 그 색깔 개념을 사람마다 똑 같이 받아들이라는 법도 없다. 미묘한 유전적 차이 또는 처한 심신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색깔로 인식할 수도 있다.세상을 보는 눈 역시 마찬가지다. 진실은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눈은 이쪽저쪽 다를 수 있다. 진실 앞에서조차 다르다고 틀린 건 아니다. 똑 같은 원피스라도 내 눈에는 흰색으로, 네 눈에는 청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 눈에 비치는 그것만이 옳고, 네 눈에 보이는 그것은 그르다는 생각 자체이다. 보이는 대로 보는 타자의 현실이 곧 자아의 현실이다. 다만, 그 속에서 내가 보는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훈련만은 하고 또 할 일이다. 섣불리 확신하거나 함부로 고집하는 일에서는 멀수록 좋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02

엽총과 치안 강국

비교적 치안 강국에 속한다. 우리나라를 두고 한 말이다. 개인의 총기 소지를 금하는데다 방범 시스템도 이만하면 족하다. 가장 무서운 흉기인 총으로부터 자유로운데다, 웬만한 골목엔 CCTV까지 설치되어 있다. 금상첨화로 치안 담당 공권력도 동네마다 둥지를 틀었다. 국민 안전을 지켜주는 체계로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다. 그에 비해 치안 공백인 나라는 어떠한가. 잘못 엮이면 흔하디흔한 총구 앞에서 제 목숨을 씨름해야 한다. 치안에서만큼은 선후진국 구별이 안되는 나라도 많다. 못 살면 못 사는 대로 공포에 떨고, 잘 살면 잘 사는 대로 불안에 겨워한다. 치안은 총기류 개인 소유 허·불허 정책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총기류 개인 불허국에 해당하는 우리나라가 이만한 안전망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국민 된 복에 속하는 일이다.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새다. 우리도 더 이상 총기로부터 안전한 국가가 아니다. 끔찍한 엽총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죄 없는 세 사람이 어이없는 죽임을 당했다. 사냥용총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맘만 먹으면 누구나 총기류를 손쉽게 만질 수 있다는 현실에 분개한다. 치안에서만큼은 어느 선진국 못지않게 한수 위라고 자부했던 그 마음을 철회하고 싶을 만큼 불안하고 불편하다.엽총은 그 위력에 있어, 공기총에 비할 바가 아니란다. 큰 멧돼지도 한 방이면 즉사시킬 수 있을 만큼 화약 성능이 강한데다 연발까지 가능하단다. 나쁜 맘을 먹기만 한다면 충분히 인명 살상용 무기로 변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총포 화약에 관한 단속법이 있으면 뭐하나. 악용하려는 자 앞에 무용한 지침은 있으나마나다. 평범한 사냥용 총이 살상용 범죄에 활용될 수 있는 시스템이라면 그 체계를 점검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 엽총 관리 시스템이 아무리 합법적으로 운용된다 해도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소용없다.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16만 자루의 총기가 전국을 누비는 나라, 이 때문에 더 이상 치안을 자랑하지 못하는 현실이 되어선 곤란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27

슬픔의 위로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마사코 가방에 들어 있던 것은 버섯이었다. 지나치듯 잡힌 그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건 그것이 영화 속에서 슬픔을 씻어 주는 매개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조주인공인 마사코는 공항에서 가방을 잃고 무작정 카모메 식당에 합류한다. 상처 있는 자들의 안식처인 그곳에서 다른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음식과 대화와 마음 나눔으로 위안을 받는다. 식당 주인이자 단아하고 상냥한 주인공 사치에, 눈을 감고 손가락이 지도를 짚어준 대로 이곳 헬싱키로 떠나온 미도리, 일상의 짐이란 무게에 지쳐 과감하게 일탈을 감행한 마사코. 조화롭게 변주되는 이들 셋의 일상에 헬싱키 사람들의 호의적인 호기심이 보태지면서 카모메 식당은 서서히 분주해진다.상처 없는 성장 없고, 슬픔 없는 열매 없다. 그 핍진성의 울타리 안에 비춰지는 모든 등장인물이 다 나 같고 이웃 같다. 그래도 가장 위로해주고 싶은 인물은 마사코이다. 오래 간병한 부모를 잃은 상실감,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한 수치심 등이 상처가 되어 유리병의 잼처럼 눌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사코. 그미에게 삶은 곧 `짐`이다. 그 짐을 부려놓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짐을 잃어버리는 슬픔의 아이러니. 핀란드 말을 모르지만 슬픔으로 술에 쩐 동년배 헬싱키 여자를 성심껏 위로해줄 줄도 안다. 통하는 건 말이 아니라 마음이기에.핀란드 사람들이 평화로워 보이는 건 슬픔이 없어서가 아니라 숲이 그 슬픔을 위무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게 된 마사코는 숲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야생버섯을 줍는다. 나중에 가방을 찾게 되었을 때 그 안에는 노란 버섯이 가득하다. 슬픔의 위로를 숲, 구체적으로 버섯에다 비유한 걸게다. 소란스럽고 탐욕스러운 것이 아니라 소담스럽고 자연적인 것을 가슴에 담음으로써 슬픔을 정화하는 상징성.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 내 맘에만 있고, 핀란드에는 없을 것 같은 슬픔 따위는 없다. 우아한 사치에의 말을 빌리자.“물론이죠. 세상 어딜 가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고,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법이지요.”/김살로메(소설가)

2015-02-26

배우기와 가르치기

“배우는 것은 적에게서 배우는 것마저도 항상 안전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친구를 가르치려는 것마저도 안전한 경우가 거의 없다.” 콜턴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란다. 무척 공감이 가는 터라 따로 포스트잇에 적어 놓았다. 사람들은 가르치려 드는 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한수 가르쳤음을 인정받으면 좋아하게도 되는 게 사람이다. 적에게 배우는 것조차 안전하다는 말은 적 입장에서 보면 한수 가르쳤음에 대해 뿌듯해하는 것이 되고, 친구를 가르치려는 것마저 안전하지 않다는 말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가르치려드는 자 앞에서는 영원한 친구로 남기 어렵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얼마나 가르치기를 좋아하면 적의 안전을 담보해가며 가르치려 들 것이며, 얼마나 가르치려는 사람을 싫어하면 친구의 안전을 위협해서라도 가르치려는 것을 방어할 것인가.저 명언을 이제 `배우기`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것보다 누군가에게서 배우겠다는 태도가 훨씬 맘이 편하다. 적에게서도 배우겠다는 자세는 겸허함에서 나온다. 악의 없이 오로지 배울 것을 선언한 사람에게 불안이나 공포를 선사할 적은 없다. 친구에게도 마찬가지다. 배우겠다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으면 가르치려 들던 친구조차 그 배우겠다는 아우라에 흡수되어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만다.인용한 명언의 내 식 결론은 이렇다. 사람에게는 가르치려드는 나쁜 본성이 있다. 가까운 친구 앞에서도 그 태도는 안전하지 못하다. 그러니 그 본성을 누르고 수련해라. 누구를 만나든, 특히 약자 앞에서 한수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가르침의 허세로 인정받기보다 배우겠다는 진심으로 다가서는 일이 언제나 우선이다. 공평한 신의가 있는 사람은 배우려하고, 지혜롭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가르치려 든다. 타인을 통해 배움을 얻으려 하는 자는 실로 지혜롭고, 먼저 나서서 가르치려 드는 자는 실은 가장 바보 같다. 뭐, 이런 단상을 얻었다. 적고 보니 이조차 가르치는 풍월이다. 부끄러워라, 내 인품도 어지간히 뻔뻔하도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25

담배가 뭐기에

정조 임금은 애연가였다. 나쁘게 말하면 골초였다.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의하면 담배는 만병통치약이었다.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소화와 변을 도우며, 시문을 엮고 담소를 나눌 때도 필요할 정도로 유익하지 않은 점이 없다고 했다. 얼마나 담배를 좋아했는지 흡연 장려를 하는 책문을 내리고, 대학자들을 모아놓고 `담배`를 주제로 시험을 치르게 할 정도였다. 백성에게도 적극 권했다. 이 풀이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하니 담배를 백성들에게 베풀어 그 혜택을 함께 누리고자했다.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남령초(담배)만한 것이 없다며 백성을 상대로 예찬론을 폈다. 몸 편하고 맘 녹일 수 있다면 온 백성이 흡연가로 거듭나도 좋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담배에 대한 상식이 오늘과는 달랐던 시대이니 왕의 논지는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왕이 주도한 흡연의 시대가 끝까지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담배의 폐해를 직시한 신하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거기에도 굴하지 않고 담배를 고수하던 왕이었지만 사회 문제로 인식되자 한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쌀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수익성을 좇아 담배농사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담배 농사 금지 조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왕은 담배가 얼마나 유익한데 농사를 금해야 하느냐, 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술 못지않게 담배를 좋아했던 정조 임금이 단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국민 건강 증진 목적의 일환으로 담뱃값 인상을 실시했던 취지가 무색하게 국회 한쪽에서는 저가 담배 검토론이 흘러나온다. 흡연자 건강보다는 포퓰리즘에 영합하는 게 표밭 일구기에는 더 유리한 모양이다. 금연정책의 진정성에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국민(특히 저소득층) 부담을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미리 다른 방법을 모색했어야지 지금 와서 딴 소리다. 담배가 뭐기에 국민을 상대로 장난치나. 담배의 폐해에 대해서는 몰랐으나, 담배를 권장함으로써 백성을 위하려 했던 정조 임금의 진정성부터 배워라./김살로메(소설가)

2015-02-24

분기점에서의 선물

몸은 공장이다. 온통 새 부품으로 시작하는 공장은 잘도 돌아간다. 고장도 없다. 쉼 없이 공산품을 생산한다. 공장주의 뜻에 따라 품목을 바꿔가며 창의적인 제품들을 잇달아 내놓는다. 하지만 천년만년 지속될 것 같은 그 작업도 어느 일정 시점에 이르면 정체 현상을 빚거나 삐걱거리게 된다. 쌩쌩하던 기계는 헐떡이게 되고, 마모된 흔적으로 가동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심한 경우엔 엔진 이상이 생겨 시스템 자체가 돌변하기도 한다. 사람 몸이 꼭 그러하다. 건강할 땐 `제 몸이란 기계`에 이상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호흡이 달리지도 않고, 마모도 되지 않으리라 착각한다. 하지만 청춘은 짧고 노년은 길다. 체력은 어느 순간 급격이 떨어진다. 몸의 기갈은 마음 성능까지 갉아 는다. 몸이 곧 마음이니 창의력과 의욕도 반감된다. 말 듣지 않는 몸이 부리는 정신은 허공에 뜬 구름 같다.몸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분기점을 50대로 보고 있다. 생물학적 나이 50이 넘으면 대체로 신체적 여건에 급격한 변화가 온다. 공장 가동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꾸준히 몸 관리를 해온 사람은 이때가 닥쳐도 육체적·정신적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최선의 부지런을 다한다. 그때그때 부속품을 갈아 끼우고 자주자주 기름칠을 해왔기 때문에 분기점이 와도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게으른 나 같은 사람은 제 몸이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도 노력은 하지 않고 그들을 부러워만 한다.100세 시대라고들 한다. 단순히 100세까지 오래 산다는 의미라면 저 말은 소용이 없다. `건강한` 100세가 아니라면 그 평범한 시대가 온다 해도 불행일 수밖에 없다. 단순히 오래살기가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살기에 방점이 찍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오래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사는 한 건강했으면 좋겠다. `건강하게`의 여러 요강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은 자기 관리의 달인이다. 건강이야말로 욕심 있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다. 노력 없는 값진 선물이 어디 있으랴./김살로메(소설가)

2015-02-23

명절엔 칼등

면도용 양날 칼이 있다. 어렸을 땐 흔히 상표명인 `도루코`로 불렸다. 전기면도기가 보편화된 요즘은 보기 힘들어졌지만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도루코 하나씩은 거울 선반에 놓여 있곤 했다. 눈에 잘 띄었기에 급하면 연필깎이용으로도 쓰였다. 필통 안에 있어야 할 학용품용 칼이 없으면 별 생각 없이 도루코를 집어 들곤 했다. 손잡이도 없는데다 얇고 양날인 칼은 어린아이가 만지기에는 위험했다. 예쁘게 연필을 돌려 깎을 욕심에 무리하다가 손끝이 베이고 손톱 끝을 날리곤 했다. 두렵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아쉬우니 자꾸 손이 가곤 했다. 그 와중에도 의아했던 것. 손잡이가 없어도, 칼날이 얇아도 참을 수 있는데 왜 도루코 칼날이 아래위로 양면일까. 홑 날이면 손가락을 안 다칠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면도를 하기에 나름 최적화된 효율적 방식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그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크면서 자연스레 그 의문은 해소되면서 덤으로 이런 단상 하나를 얻었다.칼이 제대로 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칼등이 받쳐 줘야 한다는 생각. 즉 칼은 칼등이 있기 때문에 제 칼날을 빛낼 수 있다. 아무리 잘 드는 칼이라도 칼등이 없으면 위험하다. 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칼등이라는 보호대가 있기 때문에 맘 놓고 칼 손잡이를 쥘 수 있다. 한쪽 날마저 잘 드는데 등마저 날렵한 칼날로 이루어져 있다면 아무래도 잡기가 저어된다. 양날 도루코로 연필 깎다 손끝 베던 것처럼 움찔하게 된다. 필요악인 칼날은 칼등이 있기 때문에 칼잡이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양날 달린 시퍼런 칼날로 옳고 마땅한 이야기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뭉툭하고 덤덤한 칼등이 감싸는, 좋고 그러려니 한 이야기도 나쁠 것은 없다. 칼날이 바른 이야기라면 칼등은 좋은 이야기이다. 칼날이 이성이라면 칼등은 감성이다. 칼날에 칼등이 따르는 이유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설날이다. 바르고 이성적인 것도 괜찮지만 좋고 감성적인 보따리들을 더 많이 펼치는 명절 연휴가 되기를 바라본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18

옵션 인생

친구가 새 차를 샀단다. 해외에 사는 친구인데 망설이다 국산차를 샀단다. 비슷한 연비의 도요타나 혼다에 비해 조금 싼 것도 있고 애국도 하고 싶어 그렇게 했단다. 친구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었다. 국내에서보다 싼 가격인데다 서비스에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십여 년 이상 그 차종을 몰았던 남편도 별 불만이 없더라는 말로 나는 무조건 잘 샀다고 응원을 했다. 그런데 친구 말이 의미심장하다. 차를 사긴 했는데 찜찜하단다. 알람 장착하고 방수 코팅하고 등등, 약간씩 업그레이드할 때마다 차 값이 올라갔기 때문이란다.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지만 당연한 현실이므로 나는 이런 카톡 문자를 전송했다.“기본으로 시작해 옵션으로 마감하는 게 삶이다.”그렇다. 짧은 여행에서도 그런 걸 느낀다. 패키지여행의 최대 묘미는 싼 값에 편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거다. 항공료도 싸고 숙박비도 할인이 된다. 자유 여행에 비해 움직임이 타이트하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자유여행에서 느껴야 할 불안이나 압박에 비하면 참을 만하다.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고 여행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는 패키지여행만큼 편리한 것도 없다. 하지만 패기지 여행의 최대 약점은 바로 옵션이다. 관광지마다 상점을 순회하는 것이 애교 섞인 불만이라면, 관광 코스를 덤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뭉근한 압박이 된다. 이럴 경우 나는 심리적·신체적 위해가 걱정 되지 않는 한 무조건 옵션을 선택한다. 어차피 여행사에는 옵션 항목 전제하에 일정을 짠다. 그러니 옵션 사항보다 나은 일정을 감행할 자신이 없으면 그 일정을 따르는 게 속편하다는 걸 몇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옵션은 기본에 없는 쾌락이나 즐거움을 수반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옵션을 택할 이유도 없는 게 인생이다. 내 책무를 줄이고 싶을 때 기본을 속삭이고, 내 위안을 구하고 싶을 때 옵션을 외치는 게 삶이기도 하다. 기본 없는 시작 없고 옵션 없는 마감 없는 게 생이더라. 중요한 건 기본이든 옵션이든 한 번 택했으면 그걸 즐기면 그만이라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5-02-17

1달러 단상

캄보디아에서는 1달러의 힘이 세다. 앙코르와트의 도시인 씨엠립에서는 적어도 그렇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1달러의 위용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비자와 입국을 담당하는 심사대를 통과하려면 1달러의 웃돈이 필요하다. 일렬로 앉아 있는 담당자들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원딸라`를 외친다. 입국 수속 때 웃돈이 필수처럼 따라붙는 곳이 이곳 캄보디아란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은 터라 요구하는 그들에게 1달러씩을 헌납해야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다. 입국을 하려는 누구나 그런 과정을 겪는다. 웃돈을 주지 않으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입국 지연을 시키기 때문에 팁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불합리한 관행조차 그 나라의 문화려니 하는 마음이 있어야 편한 여행이 된다. 캄보디아에서 1달러는 어디서건 유효하다. 호텔 매너 팁은 당연한 거고, 급할 때 도움을 주던 현지 보조 가이드에게도 1달러,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꼬마 악동에게도 1달러, 수상가옥촌 배 위에서 앵벌이하던 아기에게도 1달러. 그렇지, 전신 마사지하던 안마사에게는 고마운 나머지 5달러의 팁을 건네기도 했구나. 그러고 보니 입국 심사 때만 강제적 팁이지 나머지는 스스로 우러난 팁의 행렬이었다. 단 며칠간의 씨엠립 여정은 그렇게 1달러에서 시작해 1달러로 끝나는 느낌이었다.누군가는 말한다. 버릇 되는데다 자생력을 잃게 하니 팁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과연 그럴까. 자생력은 정치적 여건이 만든다.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을 다그칠 수는 없다.`기브미 초콜릿`을 외치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때도 초콜릿을 건네는 쪽이 옳았지, 자생력 운운하며 때 묻은 고사리 손을 외면한 쪽이 옳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구조적 가난과 부패 앞에서 백성은 언제나 무죄이다. 오직 정치에 그 죄를 물을 일이다. 애절하게 구걸하든 교묘하게 강탈하든 그들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단죄의 제일 대상은 백성을 방치하거나 그 상황을 즐기는 정치세력일 뿐이다. 잠시 본 캄보디아는 1달러의 힘에 갇혀 있는, 아직은 가난한 나라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16

웃을 수 있을까

늙는 것도 서럽다는데 노년을 제 의지대로 가꾸는 분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이듦의 애상을 말해주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 세 가지`라는 우스개가 강한 페이소스가 되어 귓전을 때린다. 자기 연민이 가득한 문구 앞에 서니 언젠가는 맞이할 노년의 풍경이 예고 영화처럼 스친다. 노령화 사회에 어설피 방치된 노년 자신들의 현실 감각을 들여다보노라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이것이 나와 당신의 미래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노년에게 중요한 세 가지 중 첫 번째가 이러면 병신된다, 라나. “모든 재산을 자식들에게 미리 주고 타 쓰는 사람, 재산을 부인 또는 남편에게 다 주고 타 쓰는 사람, 재산이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죽는 사람.” 어찌 이리 맞는 말만 하는지.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노년의 미래를 담보하는 확률은 (있기만 하다면!) 재산이 높지 자식이나 마누라가 높은 게 아니다. 애석하게도 그것이 현실인데도 우리 시대 어른들은 여전히 자식 앞에서 배우자 앞에서 약하다. 내리사랑이나 가족 이데올로기가 이런 행동을 강화시킨 측면도 있을 것이다.두 번째가 이러면 바보된다, 이다. “자식에게 미리 상속하는 사람, 손주 봐주려고 큰집 장만하는 사람, 손주 봐주려고 친구모임에 빠지는 사람.” 이 말도 어쩜 이리 콕콕 찌르는지. 특히 손주 봐주려고 큰집 장만하고 친구 모임에 빠진다는 대목에서는 울컥해진다. 절대 손주 봐주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치다가도, 닥치면 결국 총대를 메게 되는 이는 할배·할매가 아니던가. 육아를 책임져주지 않는 사회에서 안심하고 맡길 여력 중 제일 순위가 가족 노년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는 잠재적 대기 상태자가 된다.마지막 하나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한다, 이다. “참을 걸, 즐길 걸, 베풀 것!”정말 맞는 말이도다. 이건 노년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참고, 즐기고, 베푸는 일의 숭고함은 만사의 진리이다. 한데 이조차 기본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일이니 다소 버거운 실천 요강이긴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13

표준어의 범위

표준어일까 아닐까. 사전에 오르지 않은 좋은 단어를 만날 때 이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혼자 에너지를 소모하곤 한다. `벗장이`라는 순우리말을 예로 들자. 낯선 낱말을 발견했으니 검색은 필수. 포털 사이트의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대신 네이버용 `지식in 오픈국어` 사전을 검색하니 설명이 나온다.`일에 익숙하지 못한 바치(장인), 또는 뭔가 배우다 그만둔 사람`이라고 친절히 안내해준다. 여기서 갈등이다.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고, 특정 사이트용 오픈사전에 나오는 낱말은 표준어인가 아닌가? 내 식 방법으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의지하기로 한다. 역시 올라있지 않은 단어이다. 의문은 깊어진다. 공인된 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는 표준어인가, 아닌가?우선 표준어 개념부터 정리하기로 한다. 전 국민이 공통적으로 쓸 공용어의 자격을 부여받은 말로, 우리나라에서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고 규정되어 있다. 어느 정도 한정 지은 개념인데도 애매하기만 하다. 모든 단어 하나하나를 표준어다, 아니다로 구분해 주지 못하는 한 이런 표준어에 대한 혼란은 계속될 것 같다. 1장 총칙이 규정한 표준어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은 단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단어들 중 공인된 사전에 오르지 못한 단어는 표준어가 아닌 것일까, 이런 의문이 꼬리를 문다. 다시 `벗장이`라는 예의 낱말로 돌아가자. 벗장이는 표준어인가 아닌가. 나로선 모르겠다. 사전에 나오지 않으면 표준어가 아니라는 말도 이상하니 표준어라고 봐도 좋을 것 같고,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 아니니 비표준어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오픈사전에 나올 정도의 말이면 표준어로 봐도 좋다고 생각한다. 모든 신조어가 무분별하게 표준어 자격을 획득하는 것은 반대지만, 죽어가는 순우리말 중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사전에 등재하고, 표준어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준어의 범위를 모르니 갑갑하고 헛갈리기만 한다. 사전에 오르지 않은 벗장이 같은 낱말은 표준어인가, 아닌가?/김살로메(소설가)

2015-02-12

나보코프 찬미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만큼 흡인력 있는 작가도 드물다. `롤리타`에서 `절망`에 이르기까지 그가 꾸린 글의 향연에 취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가버린다. 나보코프라는 문장의 블랙홀에 빨려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풍부한 어휘가 정제된 문장이 되고 그것이 서늘한 통찰로 다가올 때, 등장인물들이 겪는 욕망과 상처는 금세 내 것이 되고 만다. 교훈적인 소설은 읽지도 쓰지도 않는, 적나라한 솔직함으로 진군해오는 그를 미워하려도 미워할 수가 없다. 최근에 그의 자전 에세이 `말하라, 기억이여`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가 새로운 잔재미까지 발견했다. 내용에만 치중했을 때는 지나쳤던 나보코프의 소설가적 감수성이 잘도 보였다. 책 중간에 수록된 가족사진에 주석을 단 나보코프의 표현이 솔직함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페테르부르크의 집 정원에서 찍은 가족사진에는 자신을 비롯해 여덟 명이 등장한다. 부모 외에도 동생 세 명과 친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보인다. “친할머니는 내 두 여동생들을 장식용으로 불안정하게 안고 있는데, 실제로 사는 중엔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다. (….) 이모는 부모님이 여행을 간 동안 우리를 돌보아 주었고 조언자가 되어 주었다. 남동생이 이모의 왼쪽 팔꿈치에 달라붙어 있고, 이모의 다른 쪽 팔은 나를 안고 있다. 나는 내 칼라와 스트레사를 미워하면서 벤치의 팔걸이에 올라 앉아 있다.”한 장의 사진으로도 그려낼 수 있는 한 집안의 미시적 가계사라니. 작가 덕에 독자는 그의 친할머니는 인정이 메마르고, 이모할머니는 다정다감하며, 엄마는 두 어른에게 자식을 양보(?)한 채 가족과 동떨어져 카메라를 무서워하는 개나 보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달갑지 않은 차림새로 카메라를 응시해야 했던 어린 작가의 심사도 이해하게 된다. 나보코프 같은 당사자이자 해설자를 만나야 가능한 일이다. 사진 속 생명력은 포장되고 과장된 낭만이 아니라, 진솔하고 적나라한 기억으로 작동한다. 천상 소설가인 나보코프에게 그런 `찌름`을 전하는 일은 눈 비비고 책상에 앉는 일처럼 습관화된 쉬운 일이었으리라./김살로메(소설가)

2015-02-11

네 가지 덕

조선시대 천재 수학자라는 어떤 소개글에서 최석정이란 이름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앞서가는 수학자가 있었다니. 기분 좋은 충격으로 관련 자료를 검색한다.`구수략`이란 수학서를 저술했는데 기존 지식과 더불어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수학 이론이 정리되어 있단다. 수학도 모르고 한문도 모르니 책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 놓은 글도 나로서는 독해불가하다. 수학에 관련한 그를 알기는 포기하고 인간 최석정을 살짝 들여다본다. 그는 영의정을 지낸 최명길의 손자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영의정까지 지낼 정도로 학식과 덕망이 있었다. 문신 학자답게 자식을 훈육한 네 가지 덕목이 전해지는데 내용이 담박하면서도 직설적이다. 수학자로서의 위용보다 수신제가하는 아비로서의 모범적 면모에 눈길이 더 간다. 네 가지 덕목은 마음수련이 필요한 나 같은 이에게 유용한 말씀들로 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기본은 인간이 되는 것, 옮기는 동안엔 공부가 된다. 겸손도, 근면도, 세심도, 안정도 이렇게 어려운데, 콕콕 찌르니 뜨끔하다.“네 가지 덕을 지녀라, 경계한다. 너는 교만하지 말라. 교만하면 덕을 손상하게 된다. 어찌해야 교만하지 않을까? 핵심은 겸손에 있다. 경계한다. 너는 게으르지 마라. 게으르면 직분을 망치게 된다. 무엇으로 게으름을 없앨 것인가? 요점은 부지런하고 삼가는 데 있다. 경계한다. 너는 성글게 하지 마라. 생각이 성글면 새게 마련이다. 무엇으로 성근 것을 다스릴까? 자세히 살피면 된다. 경계한다. 너는 경박하게 굴지 마라. 기운이 뜨면 날리게 마련이다. 어찌해야 경박함을 누를까? 고요 속에 잠기면 된다.풀이한다. 겸손은 덕의 기초다. 근면함은 일의 줄기다. 꼼꼼함은 일의 핵심이다. 고요함은 마음의 본체다. 군자가 겸손을 지키면 덕을 높일 수 있다. 능히 부지런하면 하는 일을 넓힐 수 있다. 자세하고 신중하면 정사를 세울 수 있다. 차분히 고요하면 마음을 보존할 수 있다. 군자가 이 네 가지 덕을 행한 뒤에야 자신을 간직하고 사물에 응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을해년(1695) 겨울에 쓰노라.”/김살로메(소설가)

2015-02-10

쿨하게 도다리

밤 잔 원수 없고 날 샌 은혜 없다, 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원망도 은혜도 한가지로 희미해진다. 아등바등 일희일비하는 것의 무소용함을 깨쳐주는 말이렷다! 요즘의 `쿨하다`라는 말도 이 속담과 일맥상통하리라. 지인들과 아침 바닷가에 나갔다. 사진도 찍고 해풍도 느낄 겸 떠난 짧은 여행이었다. 흐린 날의 포구는 고즈넉했다. 자맥질과 날갯짓을 번갈아하는 살찐 갈매기들만이 그 적요를 기분 좋게 깨우는 정도였다. 방파제 입구, 그물을 손질하는 할머니의 등이 보였다. 바다를 향해 앉은 초로의 등짝에 고달픔의 흔적이 서렸다. 앞섶이 투영된 삶이 곧 등의 생애가 아니던가. 그물에 낀 바다풀을 걷어내는 할머니의 비껴 앉은 등짝에 대고 조심스레 셔터를 누른다. 찰칵, 소리에 놀란 할머니가 돌아보았다. 렌즈를 들이댄 무례가 들킬세라 괜스레 말을 걸어본다. 도다리 잡는 그물을 손질한다고 했다. 도다리는 겨울이 제 철이라고 했다. 그물만 현처럼 뜯고 있던 할머니는 헤퍼진 객들의 추임새에 맞춰 잘도 설을 풀어놓는다. 내친 김에 도다리를 먹어볼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기 뭐 어렵나, 있는 밥에 회 쳐서 묵으면 되지.`한다.작업복을 훌훌 벗어던진 할머니가 댁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후하게 친 회와 매운탕을 후딱 끓여주고 바쁘다며 다시 나가버렸다. 알아서 먹고 가란다. 따신 배를 두드리며 만찬 값을 치르러 포구로 나갔더니 그물 있던 자리에 할머니는 없다. 차려준 일만 기억하지 값 받을 생각은 멀리도 두었다. 한참 뒤에 나타난 할머니는 그새 바다에 나갔다 왔단다. 값을 치르든 말든 참으로 쿨하시다.바다 앞에 서면 몸은 바지런해지고 맘은 헐거워지나 보다. 오래 일렁이고 자주 질척여 본 자만이 흔들림에서 자유롭다. 그 고비를 넘기면 만선의 기쁨조차 영원한 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밀려드는 파도를 마주하지 않은 생이 어디 있을까. 바다의 온갖 의성어를 가슴에 가두어 `쿨함`의 의태어로 키워낸 오도리의 할머니. 아무리 봐도 쿨함은 생의 파랑주의보를 맛본 자의 여유다. 잠 설치고 나온 보람이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09

꽃보다 답시(答詩)

유희춘보다 송덕봉이다. 조선 중기 학자인 미암 유희춘이 현대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된 것은 `미암일기` 덕이 크다. 미암일기의 가장 큰 매력은 당시의 일상사를 미시적 시선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나 학문 및 인격 수양 등에 관한 내용을 넘어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한 생활상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는 물론 독자에게는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해준다. 큰 웃음을 주는 부분 중의 하나가 유희춘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 내용이다. 하도 재미있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감으로 써먹곤 한다. 시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당시 정치인들처럼 유희춘도 유배 및 기타 사정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편지였다. 유희춘이 안부를 물으면 송 부인이 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당대 여류 문장가로 손색이 없는 송덕봉 여사의 유머 코드 및 카리스마는 무척 현대적이라서 통쾌하다.꽃 흐드러지고 음악 소리 쟁쟁해도 좋은 술 어여쁜 자태엔 흥미 없더라, 참으로 맛있는 건 책 속에 있더라, 뭐 이런 내용의 유희춘 시에 대한 송덕봉 여사의 답장은 이렇다. “봄바람 아름다운 경치는 예부터 보던 것이요, 달 아래 거문고 타는 것도 같은 한가로움이지요. 술 또한 근심을 잊게 하여 마음을 호탕하게 하는데 당신은 어찌 책에만 빠져 있단 말입니까!” 한 마디로 `놀고 있네, 잘난 척 하지 말고 즐겨야 할 땐 즐길 줄도 알아라.`고 남편에게 일갈한다.관직 생활한다고 서울에 올라갔을 때는 홀로 서너 달 지내면서 일절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은혜 입은 줄 알라면서 편지로 생색을 낸다. 이때 송 여사의 답시.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당연한 일인데, 겨우 몇 달 독숙했다고 고결한 체하며 은혜를 베풀었다 하시오. 당신은 아무래도 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병폐가 있는 듯 하오.”암만 봐도 미암보다는 덕봉이다. 아니다, 이런 치명적인 매혹을 지닌 아내를 기록한 이는 미암이니 선생의 승리인가?/김살로메(소설가)

2015-02-06

욕먹어야 도움 된다

욕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길지도 않은 생, 좋은 말만 듣기도 모자라는데 흠 잡히는 말까지 들으며 살고 싶은 이가 몇이나 될까. 하지만 꼭 좋은 말만 주고받아야 건전한 관계가 유지되는 건 아니다. 욕 좀 먹고 쓴 소리 좀 들을수록 자기성장에 도움 될 때도 있다. 가령 글쓰기 모임의 합평 시간이 그렇다. 몸에 좋으려면 쓴 약을 마다하면 안 되듯이 습작에 도움이 되려면 쓴 말도 받아들여야 한다. 오랜만에 에세이 한 편을 써서 합평자리에 나갔다. 자신이 없었다. 늘 글을 쓰면서도 글을 두려워하는 쪽인데다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운 분야가 에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내용상으로는 자신을 까발려야 하는데다, 문체상으로는 고도의 미학성까지 확보해야 한다. 말이 쉽지 여간한 내공이 필요한 분야가 아니다. 밑바닥까지 까고 싶다, 라는 무장해제하는 마음과 어느 정도의 장막은 치고 싶다, 라는 최소의 자존 사이의 타협물이 에세이다. 무장해제하자니 자존에 생채기가 돋고, 자존을 챙기자니 재미와 감동이 반감되는 분야가 에세이다. 그러니 에세이 쓰기가 어려울 수밖에.초고라 각오는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많은 욕을 먹었다. 소설체 문체다, 호흡이 길다, 가르치려든다, 풀어졌다, 문장 간 유기성이 없다 등의 진솔한 평가가 이어졌다. 내 식으로 그 말들을 이어본다. `소설처럼 호흡이 긴데다, 풀어 쓴 글은 문장이 따로 놀고 꼰대기질까지!` 웃자고 한 소리다. 내 약점을 아는지라 합평해준 이들 마음이 곧 내 마음 같았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했던 그 말씀들을 감사히 받자왔다.완벽하지 않아도 쓰는 게 행복한 사람은 써야 한다. 히라노 게이치로가`소설 읽는 방법`에서 말했다. “아무튼 계속해서 써나간다는 저돌적인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쓰고 쓰고 또 쓴 끝에 덜어낼 것은 모두 덜어내고 단지 문장만 남은 글이라는 게 작가로서 이상적인 문체가 아닐까.” 쓰는 과정에서 합평이 필요하고 욕(쓴 소리)은 쓰는 이를 크게 한다. 모두 덜어내고 문장만 남은 글의 팔 할은 욕이 만든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05

자격미달

까마귀는 효의 화신이다. 새끼가 자라면 늙은 어미를 위해 기꺼이 먹이를 물어온다. 우리 정서 상 긍정의 의미보다 부정의 의미로 더 자주 쓰이는 까마귀도 `효`에서만큼은 그 어떤 대상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미물인 까마귀도 효를 본능적으로 실천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효를 모른대서야 되겠는가, 라고 빗대 말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반포지효`를 들먹인다. `안갚음`이란 말이 있다. 반포지효의 순우리말 버전쯤이 되겠다. 이때 `안`은 부정의 뜻을 지닌 동음 부사와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길게 발음해야 한다. 안갚음에서 `안`은 마음이나 가슴을 일컫는다. `저 물도 내 안 같을까`라는 예의 쓰임처럼 여기서 `안`은 곧 마음이다.효에 대해서 말하려다 사설이 길었다. 안갚음의 주체는 자식이고 대상은 부모이다. 재미있는 것은 안갚음의 대상인 부모의 입장에서 효를 말하는 순우리말도 있다는 것. 바로 `안받음`이다. 즉, 부모께 효도를 하는 것은 안갚음이고, 부모가 효도를 받는 것은 안받음이다.`안받음` 이라는 말 때문에 이 글을 쓸 생각을 했다. 내리사랑과 효는 같은 맥락이다. 가족 간의 사랑이라는 면에서는 둘 다 같은 의미를 지닌다. 다만 내리사랑은 효에 비해 더 본능적이다. 오죽하면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이 있겠는가.그런데 내리사랑도 내리사랑 나름이다. 실천력이 딸리는 내리사랑도 사랑이 맞기나 한 걸까. 요 며칠 자괴감만 늘어났다. 방학을 맞아 모처럼 집에 있는 아들녀석의 먹거리조차 제대로 못 챙기는 나날이 이어졌다. 한결 같은 핑계는 바쁘다는 것. 괜히 미안해서 조기 한 마리 달랑 구워주고도 맛있냐고 묻고, 떡볶이 한 접시 해주고도 엄마 솜씨 괜찮지, 라며 리액션을 구걸한다. 엄마 마음을 아는 아들 왈, `어머니 자학하지 마세요. 동의를 구하지 않으셔도 엄마는 소중한 제 엄마입니다.`한다. 눈물 난다. 누가 내리사랑이라고만 했나. 나 같은 불량엄마는 `안받음`자격이 없다. (자학 모드로) 아들아, 네 안갚음을 안 받을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04

눈 내리던 날

낮에는 친구들과의 점심 모임에 나가고, 오후에는 모처럼 딸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내켜하지 않는 아이들을 구슬려 예매를 하고 일단 점심 모임에 갔다. 저들은 저들대로 시내에서 볼일을 본 뒤 영화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을 나서는데 진눈개비가 날린다. 설마 쌓이는 눈으로 변하랴 싶었다. 오늘따라 주차 공간이 없다. 상가 동네를 두 바퀴나 돌아도 마땅찮다. 슬슬 짜증이 돋는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니 다행히 저 안쪽에 빈 공간이 보인다. 얼른 주차를 한 뒤 우사인 볼트처럼 달린다. 여전히 진눈깨비는 날린다. 이십 분이나 늦었다. 그래도 괜찮다. 다른 친구들 사정도 비슷했으니.점심을 먹으며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내린다, 교통 흐름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내린다면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그때 아들에게서 문자가 온다. 눈이 많이 내리니 조심해서 오란다. 영화관까지 가는데 몇 발자국이라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상영 시간에 딱 맞춰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차 지붕마다 함박눈이 쌓였다. 그런데 웬 걸, 내 차 뒤에 누군가 호기롭게도 대각선 주차를 떡하니 해놓았다. 앞 유리에 쌓인 눈을 걷어내고 연락처를 찾으니 전화번호 쪽지가 아래로 쏙 빠져 있다. 번호를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영화를 포기할 수 없어 택시라도 잡기로 한다. 눈 오는 날 택시 잡기는 공중을 지나는 제트 비행기를 세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 포기하고 다시 내 차로 돌아온다. 몰골은 이미 옷 입고 사우나 한 꼴이다.영화도 못 보고 집에도 못 가고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그제야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112를 누른다. 친절한 대한민국 경찰이라니! 차 번호를 댔더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란다. 얼마 뒤 차주인이 나타났다. 내 편견대로 여성 운전자다. 민망해하는 표정에다 대고 버럭 소리를 질러 본다. 조금 분이 풀린다. 그 와중에 김여사인지 박여사인지 왈, 어떻게 경찰이 내 전화번호를 알았지, 한다. 나는 대답대신 속으로 대한민국 경찰은 전지전능하거든요, 라고 대꾸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