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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역 · 니은 · 디귿

`ㄱ`을 `기윽`으로 읽지 않기. 입에 착착 감길 때까지 `기역`으로 연습하기.`ㄷ`을 `디??으로 착각하지 않기. 입술에서 술술 나올 때까지 `디귿`으로 기억하기. `시옷`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글을 배운 이래로 자모의 명칭이 왜 그렇게 일관성이 없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답을 아는 선생님들도 어린학생들에게 설명하기 난감한 나머지 무조건 `기역, 니은, 디귿, …. 시옷 ….`으로 알고 외우라고만 가르쳤다. `기역, 니은, 디귿….` 표기의 뿌리는 한글 창제 백 년 쯤 뒤에 발간된 최세진의 `훈몽자회`이다. 세종 당시 자음 발음은 여러 정황 상 `기, 니, 디, 리…`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한다.기역, 니은, 디귿 등과 달리 `훈몽자회`에서도 `ㅋ, ㅊ, ㅍ….`은 세종 당시의 발음인 `箕(키), 治(치), 피(皮)….`로 읽는다.최세진 당시 초성과 종성에 함께 쓸 수 있는 여덟 글자의 활용 예를 보여주기 위해 `기` 대신 `기역`, `니` 대신 `니은`, `디` 대신 `디귿` 으로 표기했다. `ㅋ, ㅊ, ㅍ….` 등은 당시 종성으로는 활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두 글자로 표기할 이유가 없었다.기역(其役), 디귿(池末), 시옷(時衣)으로 어렵게 발음하는 이유? 괄호 안처럼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기윽`, `디??, `시읏`에 해당하는 한자 발음이 없어서 `훈몽자회`에서는 가장 비슷한 소리의 한자로 표기했다.후대 사람들이 문헌에 충실하다 보니 차츰 그렇게 굳어져 버렸다. 한자로 표기만 빌렸을 뿐, 당시에는 기윽, 디?? 시읏으로 발음했을 것을 생각하면 아쉽기만 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북한에서는 `기윽, 디?? 시읏`으로 제대로(?) 읽는단다.작년부터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한글 사랑을 실천하려는 입장에서는 반갑기만 한 일이다. 이참에`기윽, 니은, 디?? 표기법까지 되찾을 수 있다면. 아니, 기왕이면 세종 당시처럼 `기, 니, 디, 리`로 자음 표기법을 바꾼다면. 그렇게 되면 상징적으로라도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한글 홍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4-10-08

가장 멀리 있는 별

이성적·논리적 근거보다 감성적·정서적 정보에 우리 심상은 먼저 반응한다. 아무리 깨끗한 우물이라도 내 맘에 들지 않으면 구정물로 보이고, 아무리 더러운 우물이라도 내 맘에 차면 샘물 맛이 난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가장 잘 이해되지만, 자기가 싫어하는 상대방은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세상은 이해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 따위로 구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성적으로 그걸 알면서도 인간은 감성을 지향할 때가 많다. 객관성을 표방하는 척하면서도 감성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중성. 나무에 못 박히면 장도리 들고 빼려 하고, 이웃에 불이 나면 물동이 들고 달려가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나무가 쓰러지면 도끼 들고 달려가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을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가장 멀리 있는 별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가장 멀리 있는 별끼리 모인 게 사람인지라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게 모순인지도 모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리 지른다. 가까이 가본다. `정의`를 위해 소리친다고 당사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제 삼자 입장에선 그것이 정의로 보이지 않는다.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악다구니로 보일 때가 더 많다.타자를 위한다고 큰 소리 칠수록 실은 나를 위하는 것이다. 절실하게 누가 나를 원할 때 아니오, 라고 단박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이기적인 게 아니라 한없이 자유롭고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타자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이기적 자아 소유자일 수도 있다. 상대를 환대하는 인간의 본능 속에는 이타성이 있지만 자기애도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밝음과 어둠 어느 한 쪽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 둘이 뒤섞인 채 욕망은 본성을 부추기고, 본성은 자아를 다독이거나 분열시킨다. 그 틈새의 갈등에서 우리는 조금씩 성숙해나간다. 미로처럼 뻗친 양면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날마다 갈고 닦지만 결코 완성에 이르지 못하는 삶의 길./김살로메(소설가)

2014-10-07

삶 자체로 살아가기

병아리 한 마리를 키웠을 뿐인데 닭이 되고, 닭이 거위가 되고, 거위가 자라 양이 되고 양은 자라 궁극의 소가 된다. 그 절정의 소는 양으로 변하고, 양은 거위로 작아지고 거위는 닭이 되었다가 닭은 병아리가 되었다가 종내는 병아리조차 없어진다. 온갖 은유와 직유를 가져와 설명한다 해도 `인생`에 대해 이보다 직접적이고 확실한 답문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중국 작가 위화가 말하는 삶이란 이처럼 병아리에서 소가 되었다가 소가 다시 병아리, 아니 무(無)로 이행되는 것을 말한다. 그의 소설 `인생`에는 선대의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한 주인공 푸구이가 나온다. 호방했던 아버지가 재산의 반 토막을, 나머지를 아들인 푸구이가 보기 좋게 말아 먹는다. 원하는 대로의 삶을 원 없이 탕진해본 푸구이는 자신이 지주였던 땅의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몰락이 지주 처단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를 비껴가게 하는 행운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나머지 푸구이 삶의 대부분은 비련과 불행의 연속일 뿐이다. 병 든 아내, 수혈해주던 아들의 죽음, 농아가 된 딸의 출산과 죽음, 사위와 외손자의 잇단 죽음 등 극한으로 치닫는 삶을 푸구이는 꿋꿋이 감내한다. 소를 잃어 본 자가 다시 병아리를 키워 소로 만드는 일의 어려움을 보여주듯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가족사가 푸구이 앞에 이어진다.개인사를 중국의 근현대사에 엮은 이 소설은 살아간다는 것의 비장함과 지난함과 절절함에 대한 보고서로 이루어져 있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보낸 중국의 단면을 푸구이의 운명에 빗대어 말하고자 하는 위화의 작가정신이 돋보인다. 공산주의 사회의 급진성과 문화 대혁명의 시기, 다시 자본주의 체제로의 변화 등을 겪으면서 중국 민중들은 삶과 죽음의 곡예를 넘나들어왔다. 죽음보다 더한 절망의 시간을 견딘 푸구이 같은 사람이 살아남아 이렇게 인생의 곤고함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가 모든 삶의 비의를 설명해준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김살로메(소설가)

2014-10-06

버섯피자

오페라 `버섯피자`를 보았다.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의 하나로 포항오페라단이 마련한 무대였다. 좋은 분들과 함께 지역 음악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창하고 웅장한 것이 오페라라는 보편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터라, 이번 공연은 발췌 형식인 `갈라(gala) 오페라`겠지 하고 넘겨짚었더랬다.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었던 데다 전통 오페라 공연장으로는 무대가 좁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공연을 보면서 오페라에 대한 그간의 내 무지와 편견을 조금이나마 깰 수 있었다. 오페라라고 다 위용 서린 대작만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잘 알려진 라보엠이나 라트라비아타 등은 모두 막간도 길고 오케스트라도 대동하는데다 무대 세트와 의상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종합 예술을 지향한다. 한데 이번 `버섯피자`는 대작이 아니다. 달랑 네 명의 등장인물만이 무대를 장식한다. 그렇다고 축소판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작곡가 세이무어 바랍(Seymour Barab)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한 완제품이다. 적은 경비, 소박한 무대로도 오페라라는 예술 형식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버섯피자`의 매력이다. 평범한 관객을 위한 대중 지향적 오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버섯 피자`는 불륜, 질투, 출생의 비밀, 배신, 욕망 등등 소위 막장 드라마의 모든 요소를 갖췄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그런 설정이면 욕하면서 본다지만 오페라가 그런 설정일 때는 웃으며 봐도 좋다. 본질적으로 이 작품은 코미디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심오하게 살피는 대작 오페라도 괜찮지만, 일상에 찌든 보통 사람들이 재미와 웃음을 사갈 수 있는 이런 힐링용 오페라도 좋다. 클래식이 꼭 어려워야 할 이유가 없듯이 오페라도 꼭 무거워야 할 이유가 없다. 뮤지컬과 연극이 대세인 틈새시장에서 신선한 발상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버섯피자 같은 작품이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맛깔스럽고 웃음을 선사하는 이 공연에 객석이 다 차지 않았다는 점은 약간 아쉬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03

꽃은 거름에서 핀다

가을 들녘을 지나면 구린내가 진동한다. 은행나무 열매 익는 냄새인가 싶었는데 거름냄새란다. 닭똥 등 동물분이 섞여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모양이다. 지독한 냄새는 여전한데, 그것이 똥이 아니라 거름에서 나는 냄새라는 걸 알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저 거름더미에서 향기로운 국화가, 고소하고 단단한 배추나 무가 나온다고 생각하니 참을 만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향기 진하고, 자태 아름다운 장미일지라도 그 출발은 냄새나는 퇴비더미이다. 결실을 위해서는 거름냄새를 견뎌야 한다. 하지만 그 거름이 자신이 뿌린 보석인지도 모른 채, 코 막고 남의 똥 보듯 하는 이들도 있다. 잎 나고 꽃피고 열매 맺어도 거름 덕인지를 알지 못한다. 도리어 냄새 난다는 그 이유만으로 제가 삭인 거름마저 부정한다. 막상 꽃피고 열매 맺으면 맨발로 뛰쳐나가 그 꽃과 열매가 제 것이라고 설레발치기 바쁘다. 그러다 무성의하게 거름 내지 않은 채 씨를 뿌려, 농사를 크게 망치고 나서야 그 거름이 보석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것이 정치하는 사람들의 속성이다. 그 어떤 눌변가라도 자기변호 앞에서는 달변가가 된다. 목소리가 커지고 조금 알수록 그게 전부인양 소리친다. 소리친 열배의 낭패를 당하더라도 일단 내질러놓고 본다. 이 역시 정치인들에게 어울리는 비유이다.여린 잎으로 피어나 푸름 짙어지는가 싶다가도 끝내 떨어지고 마는 게 인생이다. 무성할 때 낙엽을 내다보고, 강할 때 쇠락을 미리 읽을 수 있어야 사람이다. 그간의 역사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오늘의 허세나 교만은 내일의 수렁이나 자책을 예견한다고. 세상엔 말로 할 수 있는 허상의 것보다 말할 수 없는 본질의 것들이 더 많다. 비열한 사람들은 자신의 들보만한 잘못은 숨기고 티눈만한 타인의 실수는 잘도 말한다. 겸허한 사람들은 자신의 티눈은 자책하고 타자의 들보는 보듬는다. 후자의 성정을 지닌 자들이 정치를 관장하면 좋으련만 세상은 언제나 바라는 것의 거꾸로 될 때가 많다.꽃은 거름에서 시작하고 거름은 냄새가 나야 거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02

옥병엔 얼음 같은 맘

가을비 오신다, 맞춤하게 내린다. 주차된 차 위로 물기 서린 누런 잎들이 떨어진다. 무성했던 벚나무 가로수도 연못 속 푸르렀던 연잎도, 저 먼 우주의 한 줌 먼지가 되기 위해 성급히 내려앉고 있다. 이 비 그치면 더 비워 넓어지려는, 그러나 어딘지 쓸쓸해져가는 물상들의 춤사위가 넘쳐나리라. 청명하고 공활한 하늘이 그 고립된 자유를 드높이고 위무해주리라. 그때 문득 잊고 지낸 이름 하나 불러내 저 높고 환한 허공에다 새겨 넣어도 좋으리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라고 대시인조차 허락한 계절이질 않은가. 당나라 시인 왕창령(王昌齡)이 지방관으로 은거하고 있을 때 친구 신점(辛漸)이 찾아와 하룻밤 머물렀다. 낙양으로 떠나는 신점을 부용루에서 송별하며 왕창령이 시를 읊었다. 이름하여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 `찬 비 강 따라 밤새 오나라로 들고, 그대 보내는 새벽 초나라 산들이 외롭구나. 낙양 벗들 내 소식 묻거들랑, 한 조각 얼음 같은 맘 옥항아리에 있다 전해주게.`마지막 일곱 마디 `일편빙심재옥호`(一片氷心在玉壺)가 독자의 애를 끊는다. 가을 정서와 딱 맞아 떨어지는 시구다. 일편단심이 열정과 뜨거움의 절개라면 일편빙심은 냉정과 차가움의 의지이다. 피처럼 들끓는 마음도 좋지만 얼음처럼 투명하게 가라앉는 마음도 그 진정성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얼음 같은 마음만 해도 깨끗한데, 그것을 투명한 옥항아리에 담았으니 얼마나 더 하자 없을 것인가.강직한 마음 때문에 중앙의 부름을 받지 못한 채, 한직에 밀려나 은거했던 왕창령. 마음만은 거리낄 것 없었던 시인이 부른 깨끗하고 당당한 노래. 세상을 향한 불변의 지조와 영원한 우정을 묘사해 줄 말로 `얼음 같은 맘을 옥항아리에 담는` 것보다 나은 게 있을까. 투명함 속의 투명함, 이중의 자기 확신을 선포하는 시인의 절창 앞에 결점 많은 일상을 엮어가는 스스로가 부끄럽기만 하다. 가슴을 파고드는 옛 시 한 편 앞에서, 투명하게 깊어가는 가을이 서러우면서도 반갑기도 한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01

너무 빼지 않기

외국에서 온 철없는 동서를 한없이 품는 탈북 출신 맏며느리 이야기가 방송에 나온다. `밉상`인 동서를 보듬고 챙기는 그녀를 보면서 절로 존경심이 인다. 천성이 고운데다 북한 및 탈북 과정에서의 특수한 경험이 그녀를 단단하고 큰 사람으로 만들었을 거라는 짐작을 해본다. 한 가계를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밝은 천성의 그녀도 때론 힘든가 보다. 눈물을 흘리며 몰래 맘 삭이는 장면에선 짠하다 못해 화가 난다. 누군가의 일방적 희생으로 한 가계의 행복을 얻는 구조라면 그 희생자가 아무리 자신의 선행이 즐거움이라고 우긴다 해도 동의하기가 싫다. 맑고 밝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따뜻이 엮어나가는 건 맞지만 그들이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 곁에서 위안 받고, 사람 곁에서 상처 받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 한쪽만의 헌신이나 사랑으로 이루어진 방식은 옳은 관계법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을 때는 서로 상승 기운을 좇을 때이다. 겸손한 자 곁에 있으면 절로 겸손해지고, 순한 사람 곁에 있으면 절로 순해진다. 기 센 사람 곁에 있으면 절로 드세어지고, 별난 사람 곁에 있으면 같이 별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그 어떤 환경에서도 무조건 베푼다는 건 어렵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 패턴은 상대적이다. 기를 빼앗기보다 서로 기를 돋우는 사람, 웃음을 앗아가기 보다는 서로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 대개는 그런 관계를 꿈꾼다.“너무 빼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불러줄 때가 적기입니다. (….)준비가 다 됐을 때는 막상 아무도 부르지 않습니다. 너무 빼지 말고 도전하십시오.”혜민 스님의 한마디를 보면서 혼자 밥 떠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빼는 것도 민폐이다. 너무 빼지 않고 불러 줄 때 가는 것이야말로 염치를 아는 것이다. 불러도 나가지 않기 전에, 먼저 부르는 삶이 되도록 할 것. 망설이며 누군가의 등에 기대려 하기 전에, 먼저 환히 불러내 같이 성장할 수 있을 것. 어차피 완벽한 준비는 없으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9-30

박범신의 행복론

`포항시 올해의 원북` 행사의 하나로 박범신 작가 초대 강연이 있었다. 살뜰한 문우 한 분께서 정리해서 보내온 것을 내 식으로 재편집했다. 강연장에 오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독자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버지와 나의 세대는 광풍의 질주시기였다. 개별자의 꿈보다 공동체의 희망을 위해 야수적으로 일만 했다.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라는 사회적 명령에 저항할 틈조차 없었다. 아버지들이 바친 헌신으로 우리는 이만큼 누리고 산다. 하지만 아버지 세대의 눈물과 땀의 결과가 오늘날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부권은 내려앉고, 가족은 해체되기 직전이다. 물질에 오염된 환자만 양산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했지만 그것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각자 내면의 소리를 듣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야 행복하다. 세상이 주입해준 삶이 아니라 하루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누구든 행복해질 준비는 되어 있다. 다만 우리가 불행한 것은 더 가진 자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벽 넘고, 달 뒤엔 무엇이 있을까. 늘 삶의 이면에 대해 의심하며 탐구해야 한다. 표면 구도 너머의 욕망이 없으면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눈앞에 출렁이는 황금물결의 완벽함이 이 세계의 완벽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허기와 결핍의 문 앞에 서성여 본 사람은 그 이면의 눈썰미도 발달하기 마련이다. 내 안엔 짐승이 우글거린다. 이 짐승들은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들을 잠재우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창작품을 쏟아낸다. 창조적 자아가 발현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자기 갱신, 자기 변혁에 대한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늙어도 젊다. 청춘은 내부의 명령이지 표피적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내 안의 창조적 짐승 한 마리를 끊임없이 키워라. 결국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사는 존재이다. 사랑의 불모지에서 헤매는 우리, 사랑의 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랑의 끝은 결국 사랑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29

보따리 단상

기숙사에 가져갈 딸의 여름이불을 꾸릴 때였다. 이불 케이스나 쇼핑백에 넣지 않고, 별 생각 없이 이불을 보자기에 쌌다. 보기 흉하거나 거북살스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중에 보따리를 발견한 딸이 놀라는 눈치였다. “이불을 보자기에 싸니 이상해.”하면서 쇼핑백으로 바꿔 이불을 넣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따리를 든 채 거리를 헤매는, 행색 초라한 노파 이미지를 떠올렸나 보다. `보자기에 물건을 싸서 꾸린 뭉치`가 보따리이다. 사실 보따리의 이미지는 볼썽사납거나 추레한 느낌만 있는 게 아니다. 전통과 품위가 있는 자리에 보따리는 필수였다. 함을 들고 날 때도 선물을 주고받을 때도 보따리를 꾸린 채였지, 맨살 그대로의 물건을 드러내는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최대의 정성 깃든 포장`이 보따리인 셈이다. 보자기가 품위 있는 짐 꾸리기에만 머물지 않고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그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 온 겨레의 포장법인 보따리가 우아함과 추레함을 아우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부산 사는 할머니 한 분이 보따리 두 개를 들고 서성이는 걸 경찰이 발견하고 딸과 만나게 해드렸다는 소식이 뜬다. 슬리퍼 차림에 두 개의 보따리를 품은, 그야말로 추레한 행색의 할머니. 할머니는 딸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저 밥보따리가 식을세라 꼭 품은 채 딸이 병원에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보따리에는 미역국과 나물반찬, 흰밥이 들어 있었다. 식은 미역국 보따리를 풀어헤치며`어여 무라`는 할머니의 사랑 앞에 병실의 누군들 함께 울지 않을 수 있었을까.정신이 허물어져가도 가슴만은 살아 자식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그 마음, 통증이 되어 가슴팍을 콕콕 찧는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보따리는 결코 추레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가슴이 부르는 마음을 언제든지 보따리에 담아 건넬 수 있는 사람, 그 위대한 이름 부모. 노심초사 속보따리 겉보따리 바리바리 싸는 늙어가는 엄마에 비해 내가 당신에게 쌀 수 있는 보따리는 얼마나 미욱하고 보잘것 없는지./김살로메(소설가)

2014-09-26

군맹모상(群盲摸象)

인도의 경면왕이 신하들과 진리에 대해 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코끼리 한 마리를 몰고 오게 하더니 맹인 여섯 명을 궁으로 들였다. 각 맹인들에게 코끼리를 만져 보게 했다. 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모두 코끼리를 만져보았는가? 코끼리는 무엇과 닮았던고?” “코끼리는 무와 같습니다.” 상아를 만진 맹인이 먼저 말했다. “아닙니다. 코끼리는 돌과 같습니다.” 머리를 만져본 장님이 반박했다. “곡식을 까부는 키와 같습니다.” 이번엔 귀를 만진 맹인이 큰소리를 냈다. “절구통 같습니다.” 다리를 만진 장님이 맞받아쳤다. “들마루 같았습니다.” 등을 만진 맹인도 지지 않았다. 이어 배를 만진 맹인은 큰항아리 같다고 언성을 높였고, 꼬리를 만진 맹인은 굵은 동아줄 같았다고 우겼다. 여섯 명의 말을 끝까지 들은 왕이 말했다. “진리는 하나이다. 하지만 맹인마다 다르게 느끼고 자기 식대로 말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남의 의견을 수용하지도 않는다. 진리를 밝히는 일도 이와 같다.”불교 경전 `열반경`에 나오는`군맹모상` 대목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사물을 자기 주관대로 판단하거나 그 일부밖에 파악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것으로`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란 속담과 연관이 있는 말이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상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만물의 영장인 똑똑한 인간은 그것이 내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우선 따진다. 내게 손해이고 내 억울함을 위무해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개선이 필요한 사항이라 해도 선뜻 발 벗고 나서지 못한다. 코끼리라는 하나의 진리는 너도 알고 나도 안다. 하지만 여섯 맹인이 느낀 그 실체에 대한 감도는 다 다르다.아는 만큼 본다고 했다. 아니 아는 만큼만 보려고 하는 게 사람이다. 공무원 연금 개혁을 둘러 싼 각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개혁 자체에 대한 국민적 공감은 얻었으되, 구체적 방법론에 있어서는 좀처럼 합의점을 이루기 힘들다. 경면왕이 아무리 진실은 하나라고 외쳐도 다 같이 맹인인 우리는 매양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을 연출할 것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25

실패하더라도 시도하기

완벽한 계획을 세운 뒤 실행하는 게 나을까, 이것저것 재지 않고 일단 실행하는 게 나을까. 살면서 해결해야 할 여러 일들과 직면한다. 그때마다 우리는 개인의 성정이나 취향에 따라 그 일에 다르게 대처한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은 충분히 계획을 한 뒤에 뛰어들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달려들든다. 꼭 맞는 답은 없지만, 그래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후자를 택하겠다. 애초에 완벽한 계획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계획은 불완전을 전제로 한다. 프로젝트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변수가 생길 수도 있고, 그에 따라 계획은 얼마든지 변경하게 된다. 대개 소심하거나 여린 영혼들은 자신이 세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사안에 대해 실천하기를 저어한다. 웬만해선 전면에 잘 나서지도 않는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주변의 눈길, 자기 불신 등이 그들을 망설이게 하는 진짜 이유인데, 완벽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여건이 좋아질 때까지 실천을 잠시 미룬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완벽할수록 완벽주의자와는 멀어진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영원히 완벽에 가닿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완벽한 계획주의자보다는 어설픈 실천주의자가 좋은 열매를 딸 확률도 높다. 대추 열매를 따려면 일단 가지에 손을 뻗어야지, 열매 따는 계획만 잔뜩 세워서는 곤란하다. 세상일은 언제나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실패가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망설인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 계획만을 세울 순 없다. 완벽하지 않아도 시도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미덥다. 도전하는 패기가 물러서는 신중함보다는 보시기에 좋다. 자신감 충만한 허풍쟁이가 강박에 휩싸인 완벽주의자보다는 낫다.좋은 열매를 따려면 실력이 아니라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유폐된 자괴의 다른 이름인 완벽주의보다는 드러난 자만의 선물인 자신감이 훨씬 건전할 수도 있다. 시도하지 않는 무결점보다는, 실패하더라도 시도하는 결점이 더 많은 결실을 낳는다. 두려움 없이 저지르기, 결실의 계절이 내게 던진 화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24

정직한 패배자

이 세상엔 세 부류의 작가가 있다. 칼을 칼이라 부르고 꽃을 꽃이라 부르는 작가, 칼을 막대기로 보고 꽃을 천사로 보는 작가, 칼을 총으로 느끼고 꽃을 칼로 느끼는 작가. 독자로서 셋 다 괜찮지만 때론 세 번째 방식의 작가에게서 큰 울림을 받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같은 소설을 펼칠 때는 작가 편에 동조해 저도 모르게 묘한 긴장감이 서리곤 한다. 날 것의 인간 심리를 드러내는 작가는 흔하다. 하지만 스스로를 솔직하게 도마 위에 올리는 작가는 드물다. 인간의 솔직함이란 얼마나 이기적이던가. 타인을 객관화시켜 솔직하기란 쉽지만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밝히기란 얼마나 어렵던가. 더구나 그 솔직함이 자기경멸이나 비열함 같은 거라면 누군들 자신에 대해 쉽게 솔직할 수 있을까.인간은 판단하기를 좋아하고 위선 떨기를 밥 먹듯 한다. `인간 자격이 없는 어린아이` 자아를 지녔다고 고백하는 주인공 요조. 그는 인간에 대한 끔찍한 공포를 일찍이 경험했다. 사소한 예를 들면 정당 연설회에 참석한 이웃들은 돌아오는 길에 모두 그 연설이 형편없었다고 깎아내리기 바쁘다. 하지만 연사로 참석했던 아버지가 `연설이 어땠냐`고 객실에 사람들을 초대해 물었을 때 하나 같이 `오늘 밤 연설회는 대성공이었다고`천연덕스럽게 말한다.어린 요조는 그 모습을 보고 서로 속이면서도 전혀 상처 입지 않고, 어쩌면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산뜻하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 존재에 서려있음을 알게 된다. 신용이라는 껍질을 닫고 있는 인간. 이런 것에 대한 공포가 요조로 하여금 인간실격으로 떨어지게 했을 수도 있다.정직한 패배자, 솔직한 고백자로서 요조는 자신 또한 얼마나 나약하며, 얼마나 타인만큼 위선 덩어리인지를 낱낱이 고백한다. 요조에게 인간은 난해한 그 무엇이다. 그런 인간을 이해하는 소설 마지막 한 구절은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23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백가흠 소설가의 모 신문 오늘 자 칼럼 한 구절. 소설가는 문단 대선배 황석영 작가를 만나 하룻밤을 지냈다. 새벽녘 자리에서 일어서며 후배 작가 어깨를 툭 치며 건넨 대작가의 말은 이랬다. “작가로 살려면 어떻게든 써야만 해. 작가로 사는 시간이 흐르면 쓰는 것도 자연스럽게 나아질 것 같지만 전혀 아니야. 잔머리 굴려 봐도 소용없어. 다른 방법도 없고.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천하의 잘난 작가 누구라도 앉아서 엉덩이로 쓰는 거야.”애오라지 작가로 살아온 이에게도 특별한 `쓰는 재주` 같은 건 없다. 천하의 작가도 앉아서 엉덩이로 쓴다. 모든 알려진 작가는 끈질기고 성실하다. 하기야 `끈질기고 성실하다`는 말은 잘 나가는 작가들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SNS나 블러그에 지속적으로 제 일상을 올리는 것도 재바르고 부지런해야 가능하다. 부담없는 일상적인 일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면서 글쓰기라는 일생일대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자만하는 건 착각일 뿐이다.황석영 작가의 저 몇 마디 말에 글 쓰는 자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모두 들어 있다. 우리는 오해한다. 잘 쓰는 작가 대부분은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났을 거라는 것과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글을 술술 생산해낼 것이라고. 절대 그렇지 않다. 쓰는 데서는 이등 가라면 서러워할 작가에게도 잔머리는 통하지 않는다. 더구나 시간이 지난다고 절로 글이 나아지지도 않는다.글 쓰는 방법? 그런 건 없다. 그냥 쓰는 거다. 황석영 작가의 저 명쾌한 충고를 따르기만 하면 누구나 잘 쓸 수 있다. 언제나 실천이 문제일 뿐. 작가의 말대로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또 위에서 아래로 내려 쓰고, 그 누구라도 앉아서 엉덩이로 쓴다.우선 쓰려면 스스로를 유폐시켜야 하고, 그 갇힘 안에서 제 부지런함을 채찍질해야 한다. 고독의 성안에 갇힌 공주, 지옥의 감옥에 갇힌 죄수 그것부터 되지 못한 중생 하나, 새벽마다 의자에 앉긴 잘한다. 다만 늘어나는 엉덩이 치수에만 설워하니 글은 언제 될꼬./김살로메(소설가)

2014-09-22

이기는 토끼

“이 세계는 힘센 자들의 것이에요. (….) 토끼는 자연법칙이 정해준 제 역할을 받아들이고 늑대를 강한 자로 인정합니다. 자신을 지키려 교활해지고, 수세에 몰리면 도망갑니다. 늑대와 싸우려 대드는 일이 없지요. 그게 현명한 걸까요? 그럴까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주인공 맥머피가 정신병동에 갇힌 동료들을 향해 깨어 있으라고 각성시키는 대목 중의 한 부분이다. 힘 있는 늑대 한두 마리가 약한 천 마리의 토끼 무리를 조종한다. 그게 세상이다. 실체는 없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는 억압 조직체 `콤바인`. 그 행동대장인 늑대가 이끄는 고만고만한 토끼 조직원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불합리와 불의가 횡횡하고, 정직과 정의가 실종된 세계가 펼쳐져도 `토끼`로서 늑대에게 할 수 있는 무난한 처세는 순종일 뿐이다. 적극적 저항을 하지 않는 이유? 힘도 없고, 귀찮기도 하고, 절실하지도 않고, 이대로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누군가가 나타나 저 무소불위의 늑대를 응징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호기롭게 나타난 토끼는 애석하게도 희생양의 수순을 밟기 마련이다. 절대 질서에 반항하다 결국은 뇌전두엽을 절제 당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맥머피처럼.대개의 우리는 불의를 보면 꾹 참는다. 승산 없는 명백한 싸움에서 보통의 토끼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서 저항하다 끝내 파국을 맞는 그들은 진 게임을 한 것일까? 불합리나 불의에 항거한 그들이 남긴 꿀 덕에 우리는 이나마 달게 산다. 인류 전체로 보아 그 희생이 헛되지 않았으니 이긴 게임이 아닐까.여전히 크든 작든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용감한 토끼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보고 `나댄다`며 주제넘은 훈수를 둘 수는 없다. 체면 깎아가며 나댄 그들이 피운 꽃술에, 입술 디밀어 꿀물 빨아먹는 것은 비겁한 우리가 아니었던가. 깡충깡충 지금도 분주히 뛰어다닐 그들 토끼에게 필요한 것은 훈수가 아니라 응원이다. 나대다 죽은 맥머피 덕에 별생각 없던 브롬든이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9

에멜무지로

언니는 자주 카톡 문자를 보내온다. 길고 지루한 출퇴근 지하철 안, 책을 읽다 발견한 의문 사항들을 보내온다. 안부를 대신하는 질문형 문자의 대부분은 순우리말에 관한 거다. `곁섬 털다` 가 뭐야? `듬쑥하니`는? `타울거리다`는 또 무슨 뜻이야? 나는 즉각 대답을 하지 못한다. 내 어휘 깜냥으론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매번 스마트폰 검색으로 답을 보낸다. 언니가 질문을 해오는 것은 답이 궁해서가 아니다. 문학적 긴장감을 놓치지 말라는 언니 나름의 배려이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바쁘거나 귀찮을 땐 `검색의 생활화도 모르나. 언니가 그냥 찾아 봐`라며 퉁을 내기도 한다. 오늘도 예의 질문형 문자가 왔다. `에멜무지로`가 뭐야? 나로선 처음 보는 말이다. 스페인어 쯤 되는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순우리말이다. `단단하게 묶지 아니한 모양`이나 `결과를 바라지 아니하고, 헛일하는 셈 치고 시험 삼아 하는 모양`을 일컫는단다. `거리가 가까우니 그냥 에멜무지로 안고 가라`라거나 `에멜무지로 한 일이 그렇게 잘될 줄은 몰랐다`라는 쓰임새로 활용할 수 있다.검색해서 알게 된 모범 답을 전송한다. 이어지는 언니 말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쓰던 말 중에 `이말무지로`가 있었단다. `이말무지로 논두렁에 심은 팥이 실하게 영글었다`라거나 `이말무지로 산 닭인데 달걀을 많이 낳더라`는 식의 화법을 엄마가 즐겨 썼다나. 검색해보니 `이말무지로`는 `에멜무지로`의 방언이다. `에멜무지로`만 표준어로 삼는다고 규정에 명시되어 있다.여기서 얻은 결론 하나. 보수적 언어 습관을 지닌 엄마 세대의 언어도 어김없이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는 것. 언어의 소멸과 생성 및 변화 속도는 생각이상으로 빠르다. `이말무지로`냐, `에멜무지로`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숱한 순우리말의 생명력 자체가 약해진다는 게 문제이다.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해도 고이 쓰이던 낱말들이 너무 쉽게 사라지는 안타까움. 에멜무지로 쓰던 우리말이 다시 피는 꽃처럼 살아나기를 바라는 건 역시 무리일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9-18

참수와 IS

얕은 둔덕이 보이는 황량한 사막. 아래위로 오렌지색 복장을 한, 서방 출신의 인질이 카메라를 향해 최종 발언을 한다. 양팔은 묶이고 무릎은 꿇린 채다. 화면 오른쪽에는 번득이는 두 눈동자만 드러낸, 전신을 검은색 복장으로 휘감은 괴한이 서있다. 그는 흉기를 들었고, 인질은 곧장 참수될 것이다. 낯선 한자어 어감 때문에 그 흉포함이 덜 전해져서 그렇지 참수(斬首)가 무언가. `목을 베는 것`을 말하지 않던가. 저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죄 없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극단주의 집단 명칭은`IS`(Islam State·이슬람국가)이다. IS의 만행은 쉬 멈출 것 같지 않다. 납치한 참수 대기자만도 수십 명에 이른다는 보도가 나온다. 서방 국가와 중동사회가 연합해 IS를 격퇴하자는 오바마의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민간인 희생자 수는 늘어날 것이다. 근간의 세계정세에서 IS는 가장 강력한 질서 파괴 단체 중의 하나로 떠올랐다.`알 카에다`의 이라크 지부로 출발한 IS는 시리아 내전을 통해 세력을 키웠다. 그 잔혹성 때문에 알 카에다도 그들과 선을 그었다지만 세력을 키운 IS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도 없어 보인다. 소위 알 카에다는 지는 해, IS는 뜨는 해라 할 만큼 국제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했으니. 알 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이 주 무대이고, IS는 시리아와 이라크 땅에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게릴라성 테러 활동을 지향하는데다 중동쪽 요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알 카에다에 비해, IS는 전문적인 군사조직으로 무장해있고 조직원도 범 세계를 아우른다. 세계 도처에서 몰려든 희망자 속에 한국인 출신도 있다는 외신 보도가 완전한 헛말이 아닐 수도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그 어떤 이유로도 테러나 학살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참혹한 슬픔 앞에서도 역사적·정치적 입장을 동원해가며 그들 단체를 연민하는 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극악무도한 만행은 인간 존엄에 앞설 수 없다. 오렌지색 복장을 한 선량한 사람의 공포 서린 눈빛, 더 이상 화면에서 만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7

안개 자욱해도

“우리가 안전하게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우리를 안개 밖으로, 발각되기 쉬운 탁 트인 바깥으로 끄집어내려고 계속 애를 쓴다.” 켄 킨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한 장면이다. 편한 수감 생활을 원하던 맥머피는 미치광이로 위장하는 바람에 정신 병원에 위탁된다.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권위와 억압의 상징인 수간호사를 상대로 그는 끊임없이 저항한다. 농아(聾啞) 행세를 하는 브롬든은 내레이터로서 그 둘의 갈등이 주축이 된 병동 생활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소심하거나 허세에 쩐 수용인들은 자신들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콤바인으로 명명되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폭압에 길들여져 있었음을 맥머피가 벌이는 적극적 투쟁을 보면서 알아차린다. 교묘한 학대와 부당한 처우 속에 치유불능 상태가 되어가는 수용자들. 그들에게는 분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전기충격이나 전두엽 절제술이라는 무시무시한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존엄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들에게 맥머피는 쉼 없이 `깨쳐라, 일어나라`를 강조한다. 위기관리에 구멍이 생길 때 병원 측에서 쓰는 안전한 방법이 저 안개 요법이다. 흡입구를 통해 몽롱한 안개가 쏟아져 나오면 거칠고 흥분했던 환우들은 모호함 속으로 제 존재를 숨겼다. 저항할 수 없는 굴욕 앞에 숨을 수 있다는 위안만큼 효과적인 약도 없었다.그토록 `탁 트인 바깥으로 끄집어내려고` 애썼던 맥머피는 스스로 전기충격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맥머피 도발의 종착역은 패배였지만 그것이 소설의 패배를 말하는 건 아니다. 그의 영향으로 브롬든이 탈출을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위엄은 그 어떤 억압과 폭력 보다 윗자리임을 브롬든이 알게 된 것은 맥머피의 통찰 덕이었다. 거대한 억압체인 뻐꾸기 둥지를 바꿀 수 없다면 그 둥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밖에 없다. 소설 머리말에 나오는 인디언 동요처럼 안개 자욱해도 `한 마리는 동쪽으로, 한 마리는 서쪽으로, 나머지 한 마리는 뻐꾸기 둥지 위로` 그렇게 날아올라 보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6

먹은 밥은 시가 되고

볕 좋은 오후였고, 가까운 곳에서 갈바람이 불어왔다. 안절부절못할 만큼의 견딜 수 없는 풍요의 바람이라면 피우는 자만이 누리는 자가 될 터였다. 모의하지 않는 곳에 신화가 만들어질 리 없고, 저지르지 않는 곳에 전설이 피어날 리 없다. 가을의 전설과 바람의 신화를 꿈꾸는 지인들 몇몇 맘 내키는 대로 모였다. 하늘은 더없이 공활했고 그 아래 떠도는 구름 빛마저 가을을 예고했다. 마당 넓은 집 테이블에는 결실을 증명하는 갖가지 먹거리들이 차려졌다. 배고픔을 가장한 사랑에 허기진 사람들, 바쁜 손놀림으로 투덕투덕 익어가는 삼겹살을 뒤집거나 아귀아귀 서로의 입을 벌려 갓 싼 쌈을 먹여주곤 했다. 쑥부쟁이무침에 지나는 바람 한 점 얹어, 웃음보에 싸먹는 이 순간이 천국이라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좋은 사람들끼리의 눈길은 헤플수록 무죄였다. 한 잔의 차로 부른 배를 달랠 즈음에야 마당 앞의 길고 팽팽하게 당겨진 빨랫줄이 눈에 들어왔다. 쪽물 들인 천을 말린다는 주인장의 심지 굳은 표정처럼 서있는 바지랑대, 툭툭 잘린 기억처럼 매달려 있는 빨래집게 위로 이른 별이 뜨고 있었다. 아쉬울 때 자리를 뜨기 좋은 시간이었다.주인장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고는 하나 설거지거리만 잔뜩 남긴 채 헤어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안현미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 나는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 // 서둘러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 점심시간 // 내가 먹은 밥은 그곳에 있다 / 나는 그게 시라고 쓰고 싶다”갓 차려낸 따뜻한 밥상은 판타지이자 동화이고, 물리고 난 밥상은 삶이자 시이다. 발랄한 평화로 그 판타지를 누리는 것은 손님의 책무요, 무연한 뒷정리로 그 판타지를 되새김질하는 것은 주인의 기쁨이렷다! 판타지의 향연을 낸 자리에 시의 알곡이 남았으니, 객으로서 설거지를 하지 못한 미안함은 주인을 위한 사려 깊은 배려였다고 자위해도 될라나. 이 가을 설거지 못하고 떠난 자의 맞춤한 변명은 시인이 대신해준다. - 우리가 먹은 밥의 모든 흔적은 시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5

또 하나 별빛이

추석 연휴가 끝났다. 뿔뿔이 흩어지는 게 현대 가족의 숙명이라도 되는 걸까. 한 이틀 얼굴 마주한 식구들은 아무 일 없었단 듯이 저마다의 터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나이 들수록 가족끼리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어른들이 매양 하시는 `너들도 내 나이 돼봐라, 부모 마음 알게 된다`는 그 말씀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자식들은 빨리도 자란다. 어느 날 문득 눈 비비고 돌아앉으면 훌쩍 자란 자식은 그럴듯한 독립체로 저만치 물러나 있다. 시시콜콜한 부모의 입김이 잔소리가 되고, 도리어 지들이 부모 걱정을 하는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자식이 성인으로 성장해갈수록 부모는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이 저 밑바닥부터 샘솟는다. 겪어보지 않으면 부모 마음을 모른다는 앞선 이들의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이다.더 이상 부모 영역 안에 머물지 않게 된, 성장한 자식들을 보면서 맘이 다급해진다. 각자의 자리가 있으니 가족이라 해서 맘먹은 대로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여건이 될 때마다 많은 추억거리를 공유해야 한다는 강박이 맘 한쪽을 지배하게 된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부러 웃을 거리를 만들고, 색다른 경험을 하며, 공유할 관심거리를 찾아 나선다.명절의 가장 긍정적인 해석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합법적으로 배려 받는 것` 쯤이 될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어찌 빛나기만 하는 별이겠는가. 박형준의 시처럼 `통증`과 `상처`의 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포용되고 기어이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그 시간을 위해 우리는 다음 명절을 기다리게 된다.“이 저녁에 또 하나 별빛이 통증처럼 뻗어나온다 / 나는 말하지 않으련다, 아물지 않는 상처가 /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 / 굴뚝에 오르는 연기를 따라 가면 / 밥상처럼 차려져 있는 달 / 먼 집, 대답 없는 날들이 대문이 빼곰 열린 마당 / 서늘한 우물에 어지럽게 떠 있다” 식구들 뿔뿔이 흩어진 자리에 우두커니 남아 박형준 시인의 `이 저녁에` 한 구절을 웅얼거려 보는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2

기다리는 수고

사는 건 갈등과 결정의 연속이다. 사소하게는 휴일 늦잠에서 깨어나 세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부터 크게는 직장에 사표를 낼 것인가 말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은 갈등과 결정의 순환과정이라 해도 별 무리가 없다. 온갖 갈등을 지속적이고 원만하게 해결해나가는 과정 그것이 곧 삶이다. 모든 갈등은 내면의 문제로 돌아온다. 혼자만의 심리적 고민이든, 표면적 사회 문제이든 갈등은 필연적으로 자신 고유의 결정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하던 일을 말아야 하나 계속해야 하나, 저 사람을 계속 사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갈등은 하루아침에 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이 혼란스러운 내면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만도 없다. 뭔가의 결론을 내기는 내어야 한다. 스스로와 합의한 그 결정이 쓴 열매가 아니라 `단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다. 흔히 `홧김에` 라는 말을 쓰는데 심리적 갈등의 끝자락에서 홧김에 라는 말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섣부른 판단이 일을 그르치고 성급한 결정이 후회를 부른다. 내면에 갈등이 생기면 어떤 식이든 결정을 하는 게 옳다. 고민거리를 두고 언제까지나 미적거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중해야 한다. 한 번 내린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데다, 스스로 내린 그 결정이 옳았다고 자부하려면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게 좋다. 잘못 선택한 결정 때문에 한 톨 먼지 같았던 영혼의 흠집이 폭우 속 거센 물살 같은 정신의 파괴로 이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단순명쾌한 답이 없는 상태에서 내면의 갈등을 해소하는 가장 그럴듯한 방법은? 진득하니 기다리고 뻔뻔하게 견디는 것. 견딜만한 갈등은 다른 말로 하면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과 같다. 참고 견디면 뜻밖의 행운이 보상으로 따를 수도 있다. 누군가 말했다. 행운을 부르는 진짜 주인공은 `기다림`그 자체라고. 행운을 만나고 싶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뻔뻔하게 그것이 올 때를 기다리면 된다. 최선을 다한 뒤의 뻔뻔함으로 기다리는 행운은 무죄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