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말 시험을 끝으로 한 학기는 끝이 난다. 꽁꽁 잠들어 있던 겨울 캠퍼스를 깨워낸 건 그들이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대학생이었던 것처럼, 학교라고는 대학밖에 모른다는 듯 자유롭고 씩씩하게 온 학교를 누비고 다니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들은 미처 고등학생 티를 다 벗지 못한 신입생들이었다. 빈 강의 시간을 주체 못하고, 식사메뉴를 혼자서 결정하는 일도 금방 걱정거리가 되던 스무 살 그들에겐 기류변화가 극심했다. 가족과 집을 떠나와 룸메이트도 과동기생을 사귀는 일도 치러내야 하는 일이었다. 먼저 다가가고 인사 건네고 그것이 설령 사랑일지라도 풍덩 빠지기를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도서관에서부터 영역을 확보하길 무엇보다 꼭 새겨주고 싶었다. 4년 후 혹은 10년 또 30년 후 어디에 있고 싶은지, 누구와 어떤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가끔씩 혹은 자주 생각해보며 그곳으로 다가가는 하루하루를 살기를 그래서 그 길을 도서관에서 찾아내기를 제일 먼저 말해주고 싶었다.동아리방도 학과 사무실도 지도교수 연구실까지도 어려워하지 말기를, 분위기 좋은 카페도 찾아내기를, 어느 구석에선가 분명 어머니를 느끼게 하는 단골 밥집도 개척하기를, 캠퍼스 으슥한 산책로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끊임없이 말해주고 싶었다.장학금을 향한 비장한 각오를 숨기지 않던 여학생이 깨알같은 글씨로 가득 메운 답안지를 내고 돌아선다. 문득 그 작은 어깨를 안아주고 싶어진다. 굳이 괄호를 열고 밝히지 않아도 필자는 여선생이다. 남학생이라 하더라도 어깨 두드리며 가볍게 허그해주는 일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장성한 아들도 있음을 독자 제위께서는 알아주셨으면 한다.저들은 내일쯤 방을 빼리라. 별것 없을 줄 알지만 꺼내놓으면 결코 적지 않은 물건들, 자신을 따라다니는 소유들이 소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을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더하여 어떻게 자신을 증명해 낼 것인지 여름볕 아래서 더 단단히 여물어 왔으면 좋겠다. 하늘이 높아지고 가을빛이 선연할 때쯤 다시 만날 기대로 벌써 설렌다./윤은현(수필가)
2015-06-29
프롤로테라피(Prolotherapy)는 증식(Proliferation)과 치료(Therapy)의 합성어로 세포재생치료법이다. 흔히 인대강화주사라고 알려져 있다. 인대의 염증부분에 주사하여 인위적인 염증반응을 유도하고 재생세포의 증식을 유발해 강화 및 치료를 하는 통증클리닉에서 많이 시행되는 비수술적 치료방법이다.상처가 생긴 조직에 주사액을 주입하면 삼투작용에 의해 염증이 유발되었다가 조직이 회복되도록 도움을 주는데 프롤로 치료를 받으면 일시적인 아픔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인대 혹은 힘줄 자체가 강화된다는 것이다.오래전 무거운 짐을 옭기다가 팔꿈치를 인대에 이상이 생겨 6개월 이상 고생을 하였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기도 하고 한방에서 침을 맞기도 했다.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벌침을 맞기도 했다. 그래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시내 큰 병원에 가서 MRI를 한번 찍어 검사해 보자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비싼 값을 주고 검사할 필요도 없고 별 뾰족한 치료도 없다고 했다. 수술을 해도 완치가 쉽지 않다는 절망적인 얘기를 듣고 계속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주변에 운동을 하다가 팔꿈치를 다친 분이 수술을 하기도 했는데, 완치의 확신도 없지만 나도 수술을 해야 하나 생각중이었다.그러던 중에 어떤 분이 우연히 내게 알려준 치료방법이 포롤로테라피이다. 치료효과에 대해서는 치료 후에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완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최근 `힐링`이란 말이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다. 어찌 팔꿈치 뿐이겠는가? 내 인생의 여러 부분에 프롤로테라피가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성도 회복되어야 한다.인간의 희랍어 `안드로포스`는 `머리를 하늘로 향한 존재`라는 뜻이란다. 영적인 세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영성의 목 근력을 키워야겠다. 인간은 지성적인 존재, 감성적인 존재이므로 인 인생의 여러 근육들을 강화해야겠다. 비수술적 치료로서 환치율이 높은 근본치료라는 프롤로테라피에 대한 기대와 내 팔꿈치의 통증의 완화를 넘어 내 인생의 근력을 키워보기를 희망한다./곽규진(목사)
2015-06-26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23일 중동 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참담한 심정, 책임을 통감` 그래서 `머리 숙여 사죄한다`며 카메라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국민들은 감동받기보다는 사과한 저의를 궁금해 한다. 참 나쁜 국민들이라고 욕하기 전에 그도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11일 국회 메르스 대책 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삼성이 메르스 확산에 대해서 문제의식도 없고, 뚫린 것 아니냐”는 한 의원의 질문에 삼성병원 감염내과 과장은 이렇게 답했다. “국가가 뚫린 것이다”라고. 그 당당함에 놀랐던 국민들이니, 이 정도의 사과가 생뚱맞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따지고 보면 삼성(병원)도 억울할 것이다. 방역당국이 초기 대응을 적절하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원망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삼성은 병원으로서의 전문적인 판단과 신속한 대처를 다 했던가. 책임추궁을 떠나서 `우리(삼성)가 뚫린 게 아니라 국가가 뚫린 것`이라고 온 국민이 지켜보는 국회에서 눈도 깜짝하지 않고 말하는 태도는 무엇인가. 그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국민들이 의아해 하는 까닭은 그 말의 힘이다. 그 과장이 국가와 정부의 개념을 혼동한 것은 차치하고, 순간적으로 나온 말의 힘, 여기서 국민은 삼성의 권력을 본 것이다.이런 가운데 삼성그룹의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니 미덥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여전히 경제논리와 기업 이미지가 뒤에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볼 뿐이다.“미안/ 아깐 내가 너무 욕심부렸나봐// 짝의 한마디에/ 달콤한 초콜릿처럼/ 사르르 녹아 버린 내 마음// -아이, 부끄러워라” -윤이현, `말 한마디` 전문한 마디 말에 사과를 한 사람도 받은 사람도 `달콤한 초콜릿처럼` 마음이 풀어지는 것은 아이들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국민들은 `삼성의 무게`를 뺀 사과를 기대하고 있다. 위 동시에서 보듯이 전제가 없는 사과야 말로 받는 사람을 되레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김종헌(아동문학가)
2015-06-25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도심과 재래시장은 한산해졌고 관광업계는 직격탄을 맞았으며 유통업계와 중소기업, 소상공인업자와 농민 등 계파와 계층을 막론하고 휘청거리지 않는 곳이 없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침병(侵病) 이후 월여 동안의 풍경이다.언제나 무능과 무지가 축(軸)을 같이한다. 정부는 “낙타 만지지 말고, 사람 많은 곳 피하고, 손 깨끗이 씻으라는”무소신의 한심함으로 초기 대응을 그르쳤다.정보 공개로 방침을 바꾼 뒤에도 정부는 허둥거렸다. 접촉면을 차단 개미 한 마리도 지나치지 않겠다던 장담은 `메르스 병원명단`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여기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사람들마저 나타났다. 늦은 밤 개선장군처럼 불확실성 정보를 공개한 어느 시장이 그러하고, 국회에서 국가를 탓하며 회피성 발언을 한 어느 의사가 또한 그러하다.묵묵히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도 있다. 의료진들은 무게 3~10kg의 방호복을 착용하고 각자 위치에서 매일매일 힘든 사투를 벌여 왔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어느 아파트에서는 “우리 아파트에 소방관이 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방송을 했고, 어느 학교에서는 의료진의 자녀들을 강제 귀가시켰다고 한다.아름다운 소식도 들린다. 평택에서는 대학생들이 시민들에게 마스크와 손 세정제를 나누어주며 캠페인을 하고, 서울에서는 환경미화원들이 저소득층 메르스 환자를 위한 성금을 보내왔으며, 울산과 구미에서는 공무원들이 특별 헌혈 행사를 가졌다.절에서 승려들이 다투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당간지주의 깃발을 보고 한쪽 편에서는 바람이 흔들린다고 했고 다른 편에서는 깃발이 흔들린다고 했다.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15여 년의 은둔 생활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내는 혜능(慧能)선사의 제일성이었다.그렇다. 이제는 바람과 깃발을 내려놓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위기에서 어김없이 빛을 발하는 대한민국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眞易 전병덕(수필가)
2015-06-24
때로 윤리학 수업을 하다보면 받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왜 윤리, 도덕을 공부해야 하나요? 학생들의 말에는 은연중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분들이 청문회 등에서 보여 준 말과 행동은 윤리, 도덕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당연히 좋은 대학도 나오고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인데 그들의 삶은 윤리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윤리, 도덕을 공부한다고 도덕적이지 않다면 윤리, 도덕을 배울 이유가 있을까? 윤리, 도덕을 실천학문이라 한다. 이 말은 윤리, 도덕은 그 이론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직접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윤리, 도덕을 배우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까?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윤리와 도덕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학생들에게 왜 윤리적으로 행동해야 하냐고 물어보면 대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면 누가 좋을까? 효도해라, 거짓말하지 말라!와 같은 것을 실천하면 누구에게 좋을까? 먼저 나에게 좋고 부모님이 좋고 남들도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윤리, 도덕의 목적은 결국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좋은 삶을 주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윤리와 도덕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그렇다면 학생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인 `공부 열심히 해라!`는 윤리와 도덕일까?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부 열심히 해라`는 윤리, 도덕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하면 누가 좋을까? 먼저 내가 좋고 부모님이 좋고 선생님이 좋고 우리 사회가 좋아하지 않을까? 윤리, 도덕의 다른 말처럼 `공부해라`도 결국 좋은 삶을 위한 것이다. 부모들은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가고 좋은 대학가면 좋은데 취직해 돈 많이 벌고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기에 자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고 말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 사회가 착한 사람이 돈을 많이 번다면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착하게 살아라!`를 제일 많이 말할 것이다. 착한 사람이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다면!/이상형(철학박사)
2015-06-23
지인들과 영화보기 모임을 만들었다. 독서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하나쯤은 늘 소속되어 살고 있지만 세상이 많이 변했다. 인쇄술이 보급되고 오랫동안 그 가치를 누리고, 인류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던 책은 이제 그 위상을 다른 매체들과 나누고 있다. 지금이라고 책이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어렵게 구해 읽던 만큼의 오롯한 감동을 느끼지는 못하는 것을 고백한다. 몇 번을 보아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보이는 일이 놀랍다. 함께 보는 이가 누구인가도 상관된다. 지나간 영화를 혼자서 다시 보기는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같이 보는 일은 기대가 되고 그의 반응 또한 궁금해진다. 모두가 같은 장면을 보는데도 관점과 해석이 다른 것도 참 신기하다.그는 주옥같은 대사에 감동하고, 또 다른 그는 주인공과 배우에 빠진다. 주인공의 늙은 얼굴이 분장이 아니라 세월이 준 무늬임을 자신의 나이에서 증명해낸다.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배우의 모습이야말로 따뜻한 힘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낯선 도시의 풍경에 마음을 홀딱 빼앗긴다. 지도 속에 동그라미를 치고 언젠가 훌쩍 저 도시를 향해 떠나고 저 돌길을 걸어보리라 계획한다.하나의 이야기가 각자의 가슴에 제각각의 빛깔로 스며든다. 주인공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되리라, 아니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 똑같은 장면을 보고 함께 있지만 다르게 예측한다. 이미 자기의 스펙트럼으로 여과해낸 것이다. 잊고 있었던 내 경험과 감정이 연상되고, 나와 다르게 보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관점이 확장되고, 혼자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세상을 보게 된다.함께 있지만 달라서 좋다. 그의 다름이 참신하게 다가온다. 같으면 같은 대로 다르면 다른 대로 강요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우리들만의 편 가르기일까. 세상 모든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잃지 않고 그들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고, 그들과의 행복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며, 세상 모든 그들 또한 그럴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 현실은 흑백이 아닌 여러 명암의 불확실한 구분임을 인정한다. 한낮의 열기를 조금씩 덜어내며 지나가는 초여름 밤의 바람이 신선하다./윤은현(수필가)
2015-06-22
`격대교육(隔代敎育)`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 소녀를 맡아서 교육하는 것을 말한다. 대가족제도 하에서는 3대(三代)가 한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산업화로 인해 부부 중심의 핵가족 제도로 바뀌어 갔고, 교육의 주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서 젊은 부부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 농촌에는 조부모에게 맡겨진 아이들이 많다. 그동안 조부모들은 농사일로 바쁘기도 하고 교육정도가 낮아서 손자녀를 교육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점차로 교육을 많이 받은 젊은 조부모들이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교육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고 손자녀를 돌보기 시작하는 추세이다.부모들이 자기의 아이를 키우고 교육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하다. 하지만 그 동안 아이들의 양육은 현실적으로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거의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시기와 부모가 사회에 진출하여 열심히 일해야 하는 시기가 맞물려 있다. 어떤 형태로든 조부모의 도움이 절실하다.외국에도 격대교육의 성공적인 사례가 있다. 빌 게이츠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경우이다. 부모 모두 사회활동에 바빠서 외할머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빌 게이츠는 외할머니로부터 독서와 기부의 습관을 익혔다. 두 살 때 부모가 이혼한 오바마도 외조부모의 격려와 지원으로 청소년시절의 어려움을 잘 극복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오랜 전통의 성공적인 사례들이 많다. 조선시대 명문 가문들은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문중에서 직접 서당을 짓고 좋은 스승들을 모셨다. 최근에 초등학교 방과후 교실 등에서, 은퇴한 할아버지 할머니 전문가들을 활용하는 예는 그 전통을 잇는 좋은 사례다.마을과 지역 사회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교육역량을 잘 활용하자. 경로당에 할아버지 학교를 개설하고 문화강좌에 격대교육의 미래를 모색하는 프로그램들을 도입하자. 시간적 여유와 삶의 지혜를 가진 조부모의 격대교육의 활성화는 우리 사회의 미래교육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이다./곽규진(목사)
2015-06-19
어릴 적 캄캄한 골목길을 걸을 때면 불안과 공포가 밀려온다. 무엇이 나타날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나를 헤치려고 숨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둠 때문에 주위를 분간할 수 없어서 그렇다. 어둠은 불안과 공포를 유발한다. 작은 손전등이라도 하나 들면 그나마 인심이 되는 것은 그 불빛이 주변을 분간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근 한 달 동안 퍼지고 있는 메르스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어둠` 때문이다. 우리는 메르스 바이러스 자체에 대해서 잘 모른다. 또 충분한 연구 결과를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당국이 발표하는 대책은 어둠 속에서 떠도는 듯하다. 메르스는 공기감염이 안 되고, 또 지역전파도 없을 것이라 했다. 즉 병원 내 감염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병원이 아닌 보성의 한 농촌마을을 통째로 통제 했다. 이 대응이 이상하고 불안하다.삼성서울병원의 한 이송요원은 메르스 증상이 나타난 뒤에도 9일간이나 근무를 계속했다. 또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30대 의사도 확진판정을 받았지만 격리되지 않고 2주 동안이나 진료를 했단다. 이 의료진들이 이른바 슈퍼 전파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국민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반면 전남 보성의 한 마을은 일주일 가까이 통째로 출입이 통제되었다. 메르스 확진환자가 살았다는 것이 이유이다. 지금 이 마을에는 의심 증상을 보이는 주민도 없다고 한다. 국민들이 보기엔 이상하기 짝이 없다.병원은 바이러스 감염 경로를 잘 아니까 알아서 할 것이고, 농촌마을 주민들은 그것을 잘 모르니까 그런 것일까. 아니면 보성의 한 농촌은 통째 격리해도 우리나라 농산물 수급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인가. 개방농정이 이를 잘 조절해 주니까. 반면 삼성서울병원을 통째 격리하면 환자들이 모두 사경을 헤매고 혼란에 빠질까봐 그런가. 아직 의료진 수입을 할 수 있는 개방의료행정이 시행되지 않고 있으니까. 무지와 안일함을 넘어 자본의 논리로 대응하는 것은 아닌지, 도통 캄캄하기만 하다. 손전등이라도 하나 있으면 그 속내를 비쳐보고 싶다./김종헌(아동문학가)
2015-06-18
교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처음 종교를 대한 것은 지금부터 반세기 전,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인문학 강의 시간이다.골목길로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빵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따라 홀린 듯 성당으로 들어갔다. 스테인드글라스의 황홀경에 멍하니 서있는데 하얀 옷차림의 수녀가 나타나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맛있는 빵과 예쁜 수녀 누나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고등학교 때 친구의 꼬임에 넘어갔다. 성가대 활동과 토론회 등 여학생들과의 교류로 시작된 교회의 매력은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동운동 금지를 어기고 유인물을 만들다가 담임목사에게 들켜 그만 교회를 떠나게 된다.`불교 학생회`주관 수련회에서였다. 송광사에서 구산스님과 법정스님을 만났다. 해맑은 미소를 간직한 구산 노스님의 설법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비유하며 법문을 전하는 법정스님의 가르침은 경이와 감동 그 자체였다.스님의 배려로 암자에서 학승과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학승은 박학다식했다. 그러나 얼마 후 경외심은 깔보는 마음으로 바뀌고 말았다. 전화로 동생에게 “너 임마, 엄마 속 좀 그만 썩이고 말 좀 잘 들어라.”라든가, 어머니에게 “누구에게 이야기해 놨으니 돈 빌려 쓰세요.”라는 등의 말은 중생인 나와 별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속내를 털어놓자 학승은 단번에 시인을 했다. “내가 수도승이라고 하지만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좀 더 부처님 세계에 가까워지려고 노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중생들과 다른 점은 어떤 결정을 할 때 50대 50의 싸움에서, 겨우 51대 49로 선(善)을 택하는 결정이 좀 더 많다는 것뿐이다. 중생들이 3:7이라면 나는 7:3의 비율은 된다.”생각이었을까. 말을 맺는 교수의 둥근 얼굴에 고승의 미소가 번진다. 가슴속이 대번에 환해졌다. 왜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몰랐을까. 1%의 사색이 그야말로 번갯불처럼 선명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다. 한 조각 마음이 바로 차안(此岸)의 그 너머 피안(彼岸)인 것을./眞易 전병덕(수필가)
2015-06-17
화분 하나를 선물 받았다. 나무 하나와 그 나무에 핀 꽃 하나 있는 화분이다. 홀로 있는 작은 나무를 보니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 우리는 함께 있지만 결국 혼자 사는 것이니. 나무의 삶은 목적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은 목적이 분명하다. 연필은 쓰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잘 쓰이는 연필은 자신의 목적을 잘 수행하는 것이고 탁월한 삶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연이나 인간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나무는 왜 사는 것일까? 우리 인간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니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만약 내 삶의 목적을 알 수 있다면 내 삶도 그 목적을 잘 수행할 때 나는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우리네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 삶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노동과 상호작용. 내 밖의 외부세계와 마주쳐 나의 생존을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을 노동이라 말할 수 있다. 내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 등은 모두 노동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동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많은 일들이 발생한다. 학교에서 공부도 하지만 친구를 사귀고 직장에서 선후배, 상사와 일 외의 인간관계를 맺게 된다. 우리는 일을 잘 못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인간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한다.내가 직업을 선택하고 노동하는 이유, 목적은 무엇일까? 오늘날 아마 많은 이들은 돈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돈 때문에 일을 하나? 아니면 일을 하다 보니 돈이 따라 오나? 만약 돈 때문에 일한다면 그 일은 돈으로 보상받을 때만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한 달에 한번 받는 월급을 위해 노동의 수고와 힘듦을 참고 견딘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노동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끝나고 난 뒤의 시간, 즉 여가, 휴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라 규정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아닐까?그러나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많은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노동으로 삼는 것. 나무도 나무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할 때 행복하지 않을까?/이상형(철학박사)
2015-06-16
볕이 잘 닿지 않는 보도 블럭 사이에 이끼가 웃자랐다. 마치 초록 융단처럼 부드러워 보여서 쓰다듬어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엘리베이터 없이는 가능하지 않을 소위 고층에서 살고 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육교 위 먼지 틈에도 뿌리 내려 꽃을 피우는 풀꽃이 가슴 아프고, 베란다까지 날아온 풀씨가 귀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화분 귀퉁이 괭이풀을 그대로 두기도 했다.이끼가 자라는 사이 아파트 담벼락 밑으로는 잡초들도 제법 자라고 있었다. 익숙한 들풀이긴 하지만 그들이 눈에 띈 것은 분명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로수가 심어진 흙바닥에도 조금, 어쩌다 용기를 낸 몇 포기는 인도의 제법 가장자리까지 진출해 있었다. 되도록 그들을 피해서 발을 내딛던 마음은 역시 고층에서 이십년 넘게 살고 있는 삭막한 배경 탓일까. 그렇게 가끔씩 눈에 혹은 마음에 들어오던 것들이 오늘은 모두 파헤쳐져 연약한 실뿌리를 다 드러내고 누워 있다. 올 것이 오고 만 것,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잘 정돈된 것만을 누리고 싶은 인간의 욕심이 지금까지 참아 넘겨준 것만도 용하다고 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인도 한가운데 성가시고 고집 세게 자라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 파악 못한 채 잔디 정원 가운데서 유난을 떤 것도 아니고, 아파트 울타리 밑으로 바싹 붙어 눈치 보며 자리 좁혀 자라던 것들. 그것도 초록이라고 귀하고 애처롭게 바라보던 눈길과 마음도 그들과 함께 테러를 당하고 말았다.우리는 산을 깎아서 콘크리트를 높이 세워서는 허공에다 칸을 나누고 도장을 꾹꾹 찍어 다 차지했다. 그것도 모자라 길 끝까지 아스팔트를 깔고 인도에도 빈틈없이 블록을 꼭꼭 덮어놓았다. 도장 하나 갖지 못한 순박한 주인들은 어디까지 쫓겨난 것일까.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청설모며 두더지며 개미들까지 온갖 나무며 들풀과 함께 집을 짓고 살던 터전이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고 이주했을 것이다. 풀들은 숨조차 쉴 수 없는 깜깜한 틈사이로 고개 내밀다 오늘은 뿌리째 뽑혀났다. 백 년 쯤 머물다 갈 세상에 너무 대단한 것들을 세워놓은 건 아닌지 문득 돌아본다./윤은현(수필가)
2015-06-15
우리는 매 순간마다 선택하며 살아간다. `무엇을 먹을까?`, `어디갈까?`, `누구를 만날까?`모든 삶이 선택이다. 선택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우선 순위이다. 모든 판단에는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이 작용한다.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일과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 중요하지 않지만 빨리 처리해야 할 일과 중요하지도 않고 빨리 처리하지도 않은 일 등을 잘 구분할 수 만 있다면 선택은 용이하다.그러나 정작 중요한 일들이 나의 선택과 관련없이 주어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시점과 장소, 나의 부모, 나의 유전적인 특질 등은 내가 선택한 것들이 아니다.내가 왜 아프리카나 유럽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났고, 신라시대나 조선시대가 아닌 이 시대에 살고 있는가? 질병의 원인들도 나의 생활태도 보다도 유전적인 특징으로 부터 더 많이 기인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의 우선순위는 개별적인 상황의 선택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야 한다.토기장이와 그릇 이야기가 있다. 모든 진흙덩이가 그렇듯이 진흙은 질그릇으로서 최고의 작품이 되어서 왕궁의 식탁이나 부잦집의 장식장에 올라가는 꿈을 꾼다. 다행인 것은 토기장이가 이 나라 최고의 장인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만든 그릇들은 거의 다 왕궁이나 부잦집으로 팔려갔다. 어느 날, 토기장이가 진흙을 반죽했다. 진흙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작품으로 태어날 모습을 떠올리며 흥분했다. 그러나 조금 지난 후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다. 불가마에서 나온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이 토기가 된 진흙이 도착한 곳은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다. 농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토기는 또다시 놀랐다. 그 농부는 두 손이 잘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농부는 이 토기를 보고 너무 기뻐했다. 이 토기는 두 손이 잘린 사람이 사용하기 용이한 변형된 토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진흙은 자신을 흉측하게 빚은 토기장이의 생각을 깨닫고 그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나무 하나하나를 볼 수 있는 위치에서는 숲 전체를 볼 수 없다. 사람이나 진리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삶의 우선 순위이다./곽규진(목사)
2015-06-12
요 며칠 사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확산 공포가 나를 텔레비전 앞에 끌어 앉혔다. 평소 지상파방송을 통해서 뉴스를 듣고 나면 종편으로 채널을 돌려 그 `종편스런` 평론(해설, 독설, 섬어 등)을 나름대로 즐기면서 듣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게 아니다. 불안한 마음은 그 어떤 섬어조차 괜스레 솔깃해진다. 이런 차에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장관, 그리고 여러 공무원들이 입은 노란 점퍼가 눈에 띈다. 메르스 확산방지 비상회의, 기자회견, 국무회의 등 모든 회의 때마다 그들은 노란점퍼를 입고 나왔다. 그런데 그 점퍼의 노란색이 새뜻해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연의 색깔이 아니라 비상상황임을 보여주기 위한 대국민용 맞춤 색깔이어서 일까. 아니면 사태의 긴박함이나 다급한 대응이 없어서일까. 그들은 늘 입고 있던 양복저고리를 벗어 버리고 노란점퍼로 바꿔 입고는 대책마련에 분주하다.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안정과 안심은 보이지 않는다. 그 노란색에는 혼선과 불안만 보인다.노랑은 눈의 피로를 줄이고, 정서순화와 안정성을 높여준다는 심리학적 분석이 있다. 흰색이 순수함의 이미지라면, 노랑은 포근함으로 우리의 가슴에 닿아 있다. 노랑의 따뜻함과 배려가 함께 어울릴 때 주변은 풍성해 진다. 이른 봄 거뭇한 울타리에 핀 노란 개나리가 주변을 환하게 하며 희망을 몰고 오듯이. 가을하늘 아래 노랗게 물든 황금들판이 풍성하고 넉넉함으로 다가오듯이. 그리고 횡단보도 앞에서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유치원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꼬마아이의 노란 원복이 앙증맞고 귀엽게 보이듯이. 또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노란리본의 물결이 저민 가슴을 달래주듯이. 색깔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닿아있다.다시 먼 훗날, 우리가 국가적인 재난이나 비상사태에 빠졌을 때 공무원들이 입고 나오는 그 노랑점퍼에서 우리는 그들의 `다급함`과 `땀`을 보고 `안심`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땐 국민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함이 배어 있는 노랑이기를 기대한다./김종헌(아동문학가)
2015-06-11
자유에 대한 사유가 자못 깊어진다. 나이가 들었다는 표증이리라. 자유를 사전에서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로 풀이하고 있다.매주 목요일 대구시립중앙도서관에서 `목요철학 인문포럼`이 열린다. 30여 년 전통의 인문학 강좌로 특히 인상적인 것은 200여 명의 수강자 중 상당수가 ― 남녀 할 것 없이 육칠십 대의 고령이라는 점이다.주관자인 노교수는 풍재(風裁)가 남달랐다. 단순히 동안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된 호기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감동으로 바뀌었다. 십여 년을 초월한 젊음보다는 예의와 겸양이 일상화된, 말 그대로 퇴연(退然)함이 물 흐르듯 하는, 해맑은 표정과 몸에 밴 화사한 겸손의 절제된 자유 의지가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노교수는 주어진 일상의 하루하루가 수도였으며 지행합일을 실천하는 자유인의 삶 자체로 보였다.노교수와의 만남은 자유에 대한 사유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자유를 `자타의 다름을 인정하고 비교 분석하지 않으며 투쟁에서 놓여나는 일, 비우고 내려놓는 일이다. 비운다는 것은 멸시와 배척, 회한에 머물지 않는 것이며 내려놓는다는 것은 연민과 동정, 안타까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라는 말로 새롭게 정의를 내렸다.두 사람의 자유인을 만났다. 한 사람은 목요철학 인문포럼의 노교수이고 또 한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생이다. 그 동창생은 “친구란 하루 열 번 만나도 경제력 있는 사람이 돈을 써야 된다”라는 말을 아주 당연하게 주장하는 색다른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 또한 진정한 자유인임에 틀림없다.자유는 일정 부분 도(道)와 공통분모를 지향한다. 일상 속에서의 개념이 그러하고 대중 속에서의 개념이 또 그러하다. 거기에 공유(空有)의 개념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속을 전제하지 않는 자유는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유란 홀로 걸어가며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다. 자타가 함께 평형을 이루어, 군중과 함께 중화(中和)의 호흡을 하는 가운데 자유 본연의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다./眞易 전병덕(수필가)
2015-06-10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점차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많은 국민들이 불안해하며 어느 때보다 건강에 조심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아들은 퇴근해 집에 들어갈 때마다 손 씻으라 재촉한다. 우리는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때 불안하며 그것에 대해 두려워한다.인류사를 계몽의 역사라 부르는 이유 중 하나도 모르는 것을 차츰 알게 됨으로써 인류의 지식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아주 예전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자연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연을 숭배하거나 신화를 만들어 우리가 이해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다.합리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미신이나 신화를 우리의 이성이 납득하도록 만들었다는 의미이다.따라서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의미한다. 자유와 비판적 정신, 과학의 힘으로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인간의 이성이 어둠을 정복해나가는 역사이다.예전에 아버지와 나 둘만이 산에 간적이 있다. 텐트를 치고 밤에 홀로 산길을 올랐다.그러나 깜깜한 밤에 처음가본 그 길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나의 상상력에 의해 나무의 그림자는 거인이나 귀신이 되고 풀벌레의 작은 소리는 신음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결국 얼마 못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다음 날 아침 다시 올라간 그 길은 너무도 평범한 산길이었다. 환한 빛 아래 어떤 상상의 여백도 남겨 놓지 않은 공간은 두려움이나 불안과는 거리가 멀었다.메르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우리가 그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며 불안해한다. 제대로 된 정보와 지식이 필요한 시기이다.왜냐하면 계몽은 언제든 다시 미성숙이나 야만으로 회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상형(철학박사)
2015-06-09
기차를 타고 작은 역을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남자는 수화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연인에게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얼마나 화사하게 오직 웃기만 하던지. 남자의 손은 도대체 얼마나 재미난 이야기를 하기에 연인을 저렇게 아름답게 웃게 할 수 있는지, 할 수만 있다면 다가가 엿듣고 싶을 지경이었다. 역사 마당엔 오래된 벚나무가 있고 신록은 꽃보다 더 찬란하게 반짝이고, 연인들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보는 이의 마음을 찌르며 빠르게 전파되었다. 기차 안이 조금씩 환해지고, 누구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웃어주고 싶어졌다. 자신을 망가뜨려서라도 여러 사람을 웃게 해주는 지인이 있다. 채신 좀 지키고 조용히 해주길 바란 적도 있었다. 그것이 그의 배려이며 친절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웃지 않고서야 알게 되었다. 어색하고 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면서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 그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알게 되었는데, 갑자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진 그는 몇 달 째 웃음을 잃고 있다. 눈치만 살피며 그가 다시 부산하게 웃어주길 기다리느라 살얼음판을 건넌다. 그가 온 몸으로 녹이고 깨어주던 얼음이었을 것이다.웃음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호르몬을 조절하여 스트레스를 날리고, 여러 개의 근육을 활용하는 운동효과를 주고, 혈액순환을 도와주기도 한다.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주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좌절과 분노의 배출구가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바보로 만들거나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개방하여 사람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유머는 신뢰이며 관심과 애정에서 우러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던질 수 있는 편안함이야말로 자신감과 여유가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넝쿨 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반칠호 시인의 시 구절이다. 중동에서 출발한 흉흉한 것보다 우리의 웃음이 이리저리 담을 넘고 더 빨리 날아 다녔으면 좋겠다./윤은현(수필가)
2015-06-08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곳이다. 작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곳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을 따 교황명을 지었다 해서 더욱 그러하다.1253년 완공된 성당 역시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리고자 건립됐다.이 성당은 1997년 9월26일 두차례의 강진으로 크게 붕괴되고 조토 등 유명화가의 벽화들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하지만 2년 정도의 짧는 기간 안에 거의 완벽하게 복원되어, 5년이 지나고도 복원의 헛점을 드러낸 숭례문 복원과 대비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향력은 건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800년 세월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고 끊임없이 전설이 되었다.아시시 수호성인을 넘어 심지어 반려동물들을 축복하는 환경보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어 축일인 10월 4일 세계의 애완견들이 성당으로 모여든다.성서에 기록된 `전대를 갖지 말고 빈손으로 전도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감동받아 걸식수사가 된 프란치스코는 1210년 동료들을 데리고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알현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1198년 37세의 젊은 날에 교황에 올라 교황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교회사에 크게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교황은 프란치스코의 남루한 옷을 보고 무시하는 자세로 그를 시험코자 “형제, 돼지들한테나 가 보시오. 그들과 함께 구르며 당신이 그렇게 훌륭하게 만들어 놓은 수도회칙을 돼지들에게 설파해 보시오”라고 했다. 프란치스코는 나중에 돌아와서 “성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황은 그 수도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해 주었고,그로 인해서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생기게 되었다. 그가 서거한지 8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세계에는 그의 영향력이 상상할 수 없이 지대하다.사람의 영향력은 두 종류가 있다. 계급과 지위가 주는 권력의 영향력과 인품과 섬김이 주는 권위의 영향력이 있다. 우리 인생은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 본질적인 힘은 선한 영향력이다. 좋은 영향을 끼치자./곽규진(목사)
2015-06-05
“한 쾌의 혀가 /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 막대기 같은 생각 /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최승호 `북어` 부분)지난 토요일, 서울역사(驛舍)를 빠져 나오는데 풍물소리가 신명나게 들렸다. 광장에는 만장 같은 깃발이 펄럭이고, 한 무리 풍물잽이들의 가락에 뜨거운 햇살도 출렁출렁 흔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광장에는 두 무리만 있었다. 머리띠를 두르고 노란 조끼를 입은`그들`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신명도 나고 시끄럽기도 한 그 풍물소리를 들은 척 만 척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최승호 시인의 `북어`라는 시가 떠올랐다. “자갈처럼 죄다 딱딱”해 진 혀와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그리고 “빳빳한 지느러미”를 가진 식료품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북어.`사람들`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여기저기 걸어 둔 현수막의 글귀로 봐서`그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회원들이다. 그들은 얼마 전 헌재가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판정한 것에 대한 규탄 시위를 벌이는 모양이다. 그간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전교조가 교사들의 단체라는 것은 안다.`그들`이 불법단체의 회원이라면 과연 이것이`그들`만의 문제일까. 교사는 학생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다. 학생은 우리의 아이들이고. 이 단순한 도식은 교사의 문제는 우리(또는 우리 아이들)와 직결된 문제이다. 그런데도 `그들`만이 모여서 뜨거운 햇살을 출렁이며 분풀이 하듯 신명나게 풍물을 두드리고 있다. `그들`만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치고 싶은 것일까. 북어가 소리친다. 귀가 먹먹하도록.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귀 닫고, 눈 감고 사는 `사람들`이 시끄럽고 복잡한 서울역 광장을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그 광장을 빠져나왔다. 말없이. 헤엄쳐야 하는 것은 “꼬챙이에 꿰어진 북어”가 아니라 광장을 오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김종헌(아동문학가)
2015-06-04
유월이다. 유월이 되면 짙푸른 녹음이 절정을 이룬다. 그 녹음이 새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 때문인지도 모른다.짙푸른 녹음 속 특별히 경건해지는 곳이 있다. 호국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그 현충원에 2012년 5월, 소방공무원들의 오랜 숙원인 소방공무원묘역이 별도로 조성되었다. 경찰공무원들이 1985년부터 별도 묘역에 안장된 것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길고 긴 각고의 세월이었다.소방 조직은 부침을 거듭해 왔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경찰 산하에서 개청된 조직은 1975년 다시 민방위본부 산하로 흡수되었고, 200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립 기관인 소방방재청으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세월호 참사로 인한 해양경찰청의 해체와 더불어 2014년 본의 아니게 국민안전처로 통합되고 만다.현재 대한민국에는 18개 소방본부, 200개 소방서에서 4만여 명에 이르는 소방공무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묵묵히 `안전한 나라, 행복한 국민`이라는 비전 아래 일제히 공동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최근 5년간, 매년 평균 6명의 소방공무원이 순직하고 325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현실이 숨어 있다.소방공무원은 분명 품위 있는 직종이 아니다. 더욱이 소방공무원은 세상의 중심도 아니고 세상의 주인공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칭찬해 주지 않아도 묵묵히 그 소임과 사명을 다해 왔다. 재난과 자연재해의 절박한 현장, 그 어느 곳에서도 그들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소방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았던 것이다.모든 일에는 변환의 시점이 있다. 또한 독립관청만이 지고선일 수도 없다. 그러나 소방의 변천사와 소방공무원묘역 등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왠지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중심축 가시권 핵심 분야에서 언제나 동떨어져 온 소방의 이정(里程)에 우직한 소방공무원들의 자화상이 클로즈업 되기 때문이다. 호국보훈의 달, 그 짙푸른 녹음 아래서 바라본 소방의 얼굴이다./眞易 전병덕(수필가)
2015-06-03
대한민국이 갑질공화국이라고 말하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대기업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이 올해 6백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은 갑을관계나 갑질의 횡포에 점점 많은 사람들이 놓여 있다는 소리이다. 아무래도 법에 의해 상대적으로 엄격히 보호받는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은 고용주의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용주에게 감히 불평할 수 없는 피고용인뿐만 아니라 빈곤과 파멸을 피하기 위해 채권자나 은행직원의 관대함에 의존해야만 하는 채무자, 그리고 집주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세입자도 이런 갑질에 놓여 있다. 오늘날 어떤 공화주의자들은 이런 현상을 새로운 지배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예전에 있었던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이제 모두가 주인이 된 세상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물론 예전처럼 주인과 노예라는 사회제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일상에서 새로운 지배와 노예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생존을 위해 경제적 관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오늘날 고용주는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는 경험하는 것은 지배의 일상화인가?지배와 예속의 반대는 자유이다. 그렇기에 현대 공화주의자들은 지배받지 않을 자유를 외치고 이 자유를 위해 법과 규칙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법이나 규칙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갑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삶을 살 수 있다. 인치가 아니라 법치가 존재할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이라는 것도 법에 의해 지배받는 사람들이 그 법을 만들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사마천의 `사기`에도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10배 많으면 헐뜯고, 100배 많으면 두려워하고, 1천배 많으면 그의 심부름을 하고, 1만 배가 많으면 그의 종이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전과 오늘날의 사람관계는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평등한 국민, 모두가 주인인 회사, 서로가 존중하는 가정을 꿈꾸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이상형(철학박사)
2015-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