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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를 찾은 반기문

서동훈(칼럼니스트)
등록일 2016-06-01 02:01 게재일 2016-06-0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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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외교·안보분야 인물이라면 신라 김춘추, 고려 서희, 조선 유성룡, 그리고 유엔사무총장 반기문을 든다. 김춘추는 당의 힘을 이용해 삼한일통을 이뤄냈고, 서희는 거란족의 위협을 외교력으로 방어하며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내 강동6주를 얻어냈고, 서애(西厓) 유성룡은 임진왜란때 영의정 겸 국군총사령관으로서 내치(內治)와 외치(外治)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이 인물들은 한결같이 `명석한 국제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들이 역사를 만들었다.

서애는 퇴계의 `성학십도` 정신을 내치에 사용했고,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외치에 활용했다. 이순신과 권율의 능력을 미리 알아보고 파격적인 승진을 시켰는데, 정읍 현감(지금의 면장)이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형조좌랑이던 권율을 의주 목사로 올렸다. 그 덕분에 한산대첩과 행주대첩을 이룰 수 있었다. 서애는 16세기 말의 동남아 정세를 정확히 읽고 있었고, 일본의 야심을 꿰뚫고 있었다. 서애는 임진왜란때 두 개의 적과 싸워야 했다. 암군(暗君) 선조는 내부의 적이었고, 왜군은 외부의 적이었다.

시기 질투심 많은 선조의 협량(狹量)을 알아챈 왜군은 끝없이 밀정을 보내 선조를 조정했고, 왕은 첩자들의 농간에 휘둘렸다. 임금의 진군명령을 거역한 죄로 이순신이 삭탈관직 당해 권율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했고, “전쟁 끝나면 이순신을 반드시 죽이겠다” 선조가 이를 갈았으나, 원균의 무모한 공격으로 수군이 거의 전멸되다 시피한 것도 왜군의 `이순신 제거작전`이 성공한 경우지만, 서애는 이순신의 목숨을 살려 재기용함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후 관직에서 물러난 서애는 선조의 부름을 사양하고 `징비록` 집필에 몰두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입구에 주목(朱木)을 기념식수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나무의 제왕`인데, 엘리자베스 2세가 심은 구상나무와 나란히 서 있다. 반 총장이 서애의 발자취를 찾은 뜻을 알만하다. 북핵문제와 통일문제를 풀 열쇠가 되기를….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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