毛는 그들에게 홍위병(紅衛兵)이란 이름을 붙여주며 “부르주아 반동사상을 박멸하고, 구린내 나는 지식인을 처단하고, 기존의 사상 문화 풍속 관습을 근본부터 뜯어고치자. 반항과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선동했다. 그렇게 세뇌된 홍위병 1천100만명이 전국 각처로 흩어져 분탕질을 치기 시작했다.
모택동을 비난하는 어머니를 고발해서 맞아죽게 만든 자도 있고, 대학 강단에 선 교수를 끌어내려 린치를 가했다.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노학자들이 제자에게 뺨을 맞고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공자묘 등 문화유산을`기존의 문화`란 이유로 파괴했다.
유소기는 맞아죽고, 등소평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부인은 종일 포탄을 운반했고, 맏아들은 홍위병이 3층에서 밀어떨어뜨리는 바람에 척추가 부러졌다. 홍위병의 광란이 무장투쟁으로까지 번지자 毛는 인민해방군에게 “홍위병을 진압하라” 부탁했고, 홍위병에게는“농촌에 가서 배우라”명령을 내려 해산시켰다. 이것이 이른바`문화대혁명`인데, 그 광란의 역사는 1966년부터 10년간이나 이어졌고, 중국인들은 “그 암흑의 역사는 중국의 발전을 30년 늦췄다”고 평가한다.
올해는 `문혁`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홍위병에 가담했던 10대들은 지금 환갑을 훨씬 넘긴 노년이 되었고, 회한에 가슴을 뜯는다. “우리는 중국판 운동권이었다. 그때는 옳은 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미쳐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많다.`미친 시대`의 산물이다.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