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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편파의 기준을 생각한다

유영희 작가 며칠 전부터 KBS에서 편파 논란이 한창이다. 지난 12일, 제26대 KBS 사장으로 취임한 박민은 임명된 지 하루만에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를 대폭 교체하고 프로그램도 개편하였다. 하차 당한 사람 중 뉴스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된 인물은 KBS 뉴스 9의 이소정과 주진우 라이브의 주진우이다. 2TV 시사토크 프로그램인 더 라이브는 아예 폐지되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조치라 당분간 예능 등 다른 프로그램을 송출할 예정이라고 한다.그 다음 날 박민 사장은 과거 KBS에서 편파 방송을 했다며 사과하였다. 그가 편파보도라고 예시한 사례들은 한동훈 관련 ‘검언유착’ 오보, 고 장자연 씨 사건 관련 후원금을 모금하고 도피한 윤지오 씨 출연, ‘오세훈 시장 생태탕 의혹’ 관련 보도 등이다. 그가 직접 언급한 이 세 가지 사례는 모두 여당 또는 보수 언론에 불리한 사건들이다.그러나 편파의 기준은 상대적이라 박민 사장의 행보 역시 편파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박민에 대한 기사에는 ‘이제 편파 방송 하겠다는 거지?’ 하는 댓글도 많이 보이고 시청료 거부 운동까지 일어나고 있다.누가 편파적이고 누가 공정한가를 객관적으로 결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중국 고대 춘추 전국 시대에도 백가가 다투는 혼란한 시기에 장자는 다툼을 해소하기 위해 제물론을 주장했다. 장자는 애당초 객관적 공정성은 불가능하다면서 모든 주장이 동등하다고 한다.“내가 자네와 논쟁을 했다고 가정해보세. 자네가 나를 이긴다면, 자네가 옳고 내가 옳지 못한 것일까? 내가 자네를 이긴다면, 내가 옳고 자네가 옳지 못한 것일까? 어느 한 쪽이 옳고, 다른 한 쪽은 그른 것일까? 우리가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일까? 만약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더러 판단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미 자네와 의견이 같은데,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그렇다고 나나 자네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어찌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나아가 장자는 모든 주장이 다 주관적이므로 나의 주장을 고집하지 말라고 한다. 이런 장자의 말은 귀 기울일 만하기는 하나, 모든 주장에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의심한다’의 저자 보 로토는, 인간의 지각 능력은 근원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신경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나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는 ‘내가 본 것이 객관적 실재인지 의심하라. 멈추고 그냥 보라.’고 한다. ‘그냥 보기’ 위해서는 낯선 곳에 가보고, 평소 하던 것과 다르게 해봐야 한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것, 내가 싫어하는 것과 기꺼이 만나는 일이다.절차와 협약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만 관철시키면 또 다른 편파 시비를 불러온다. 정말 편파를 시정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을 의심해야 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그냥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편파를 줄이는 지름길이다.

2023-11-19

마라톤과 혁신의 공통점

김종찬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이 건강하게 사는 삶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회자되고 있는데,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국립노화연구소, 국립암연구소가 참여한 연구결과가 JAMA 저널에 발표됐다. 이 내용은 하루에 8000보를 걸으면, 수명이 길어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연구원들은 하루에 4천보(약 3㎞를 걷는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하루 8천보(6㎞)를 걷는 사람들은 심혈관 질환과 암을 포함한 어떤 이유로든 앞으로 10년 안에 사망할 가능성이 절반 정도라는 것이다. 많이 걸을수록 사망 위험이 낮아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셈이다.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웹툰 작가 겸 방송인 기안84가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해 화제가 됐고, 지난 10월에 춘천마라톤에서 정치인 안철수 의원이 풀코스를 완주하기도 하면서, 풀코스 마라톤에 더해 5㎞, 10㎞, 21.0975㎞(하프 마라톤) 등 다양한 거리의 마라톤 코스에 일반인의 참여도가 높아지고 있다.완주라는 결과로 얻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은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마라톤과 기업의 혁신이 묘하게 닮아 있음을 발견하였다.첫 번째, ‘지속적인 노력’이다. 마라톤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혁신 역시 지속적인 노력과 확고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마라톤은 주어진 거리를 완주하기 위해 꾸준한 훈련과 개인의 노력이 필수이며, 혁신은 기존의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현하기 위해 조직적이고 명확한 방향이 필요하다. 두 번째, ‘일관성’이다. 마라톤은 주어진 거리를 연속적으로 달리는 것이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힘의 배분과 전략이 필요하다. 혁신 또한 지속성을 바탕으로 일관성 있고 꾸준한 실행이 필요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현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일관성이 중요하다.세 번째, ‘도전과 극복’이다. 마라톤은 신체적인 한계에 도전하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다. 혁신 또한 기존의 관행과 제약에 도전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는 것이다. 마라톤이 경쟁상황에서 동기를 부여하고 한계를 극복하는 것처럼 혁신도 경쟁 상황에서 동기를 부여하고 기존의 한계를 극복해야 시장을 지킬 수 있다. 네 번째, ‘목표의식’이다. 마라톤은 주어진 거리를 완주하는 것이 목표다. 본인의 체력에 맞게 오버 페이스가 되지 않도록 시간 목표를 정하고, 혁신 또한 최종 목표에 영향을 주는 서브 목표를 세밀하게 설계하여 달성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성공체험’이다. 마라톤에서는 완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고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혁신에서도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삶의 에너지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혹은 기업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인해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프로는 시간의 20%를 시합에, 80%를 훈련에 투자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우리에게 보이는 결과는 하이라이트만 보여 화려하지만 훈련 과정에 고통을 연료로 써서 얻어진 것이다.

2023-11-19

이스라엘의 보복전쟁은 즉각 멈춰야 한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개전 한 달이 지났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일방적 점령이라 볼 수 있다. 하마스의 무리한 이스라엘 축제장 난입과 200여 명의 인질이 전쟁의 발단이다.이스라엘군은 탱크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가자시티를 점령해 버렸다. 정확한 팔레스타인의 피해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벌써 민간인 1만여 명이 피살되었다. 며칠 전 이스라엘군은 가자시에서 가장 큰 알시파병원까지 점령했다. 병원 바닥에서 피를 흘리는 어린 환자, 전기마저 끊긴 병원에서 신생아까지 죽어가며 팔레스타인 부상자는 넘쳐나고 있다.이집트 국경 남부 라파 쪽으로 밀려가는 피난민 행렬은 우리의 6·25를 연상케 한다. 유엔의 구호품마저 전달되지 않는 이 전쟁의 참상은 전 세계인들을 경악케 한다. 이 전쟁은 누가 뭐라던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보복 전쟁이다. 하마스의 무모한 인질극을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귀중한 생명을 앗아가는 이스라엘의 보복 전쟁이 즉각 중단되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먼저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보복 전쟁은 인도주의에 근본적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외형적으로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침범과 인질극에서 비롯되었지만 양측 갈등의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전 세계 디아스포라가 되었던 유대인들은 2차 대전 후 1948년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한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수십 세기에 걸쳐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 버리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현재 이스라엘 외곽으로 밀려나 철조망 안에서 갇혀 사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들 간의 영토 논쟁은 닭과 계란처럼 시작도 끝도 없다. 이번 전쟁은 결국 현대적 장비를 갖춘 이스라엘의 30만 정규군과 3만명으로 추산되는 하마스 간의 전투이며 처음부터 승부가 결정된 전쟁이다. 탱크와 첨단장비를 갖춘 이스라엘군은 이미 1만여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군사작전은 국제법에도 어긋나며 반인도적 전쟁 범죄일 뿐이다.둘째, 국제 여론도 이스라엘의 침략행위를 비난하고 있다. 미국만이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교전중단을 요구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15개국 중 12개국이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만이 기권했을 뿐이다. 다행히 우리 정부도 유엔 총회 결의안에서 미국편을 들지 않고 기권하였다. 이스라엘 정부 입장을 무조건 옹호하는 미국의 처신도 점차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계 여러 곳의 유대인들은 어디서나 성공했지만 그들의 행위는 시기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서든 그들 유대 교회에 나가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상류층에 진입해 있다. 아인슈타인도 미국의 헨리 키신저도 현 미국 국무장관 블링컨도 모두 유대인이다. 미국에서는 월가를 장악하였고, 프랑스에서는 언론까지 장악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수전노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이웃과의 공생의 원리를 잃고 있다. 반유태주의가 퍼지고 국제 여론이 나쁜 이유이다.셋째, 이 전쟁은 이스라엘 현 총리 벤야민 네타나후의 정치력과도 결코 무관치 않다. 전쟁 전부터 그의 보수 강경 노선은 이스라엘 어디에서나 인기가 없다. 이 전쟁은 그가 유발한 전쟁이라는 비판이 따르는 이유이다. 하마스의 이번 인질극을 네타나후는 그의 실추된 정치력 회복 계기로 삼는 듯하다. 실각 위기에 놓인 그의 정치적 입지를 하마스에 대한 전쟁으로 만회하려는 것이다. 여느 독재자처럼 그는 내우를 외환으로 극복하려는 무리한 술책을 쓰고 있다. 그의 꿈은 이번 전쟁을 가자 지구를 장악하여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의 기회로 삼으려는 듯하다. 이스라엘은 이미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 서안지구(West Bank)나 골란고원을 점령해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이번 전쟁도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집트의 시나이 사막으로 쫓아버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으려는 의도일 것이다.그러나 이스라엘 총리 네타나후의 꿈은 실현될 수 없다. 우선 이 보복 전쟁에는 수많은 팔레스타인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으며 세계의 여론도 점차 그들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 다윗의 별을 상징하는 이스라엘국기가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바 있다. 유대인들이 인접 반 이스라엘세력을 무력으로 응징하듯 우리도 북한을 강력히 응징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의 일부 극우 편향 종교 집단의 무모한 의도이며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우리 속담에도 ‘짐승도 도망칠 구멍을 두고 쫒으라’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의 강력한 무력에 의한 잔인한 팔레스타인 복속은 인륜에 반하는 잠정적 조치이기 때문이다. 장기전이 되면 인접 이슬람 국가들의 동맹을 강화시켜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배척하는 ‘눈은 눈, 이는 이’라는 일부 이슬람의 동태 복수법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야훼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이스라엘은 일단 전쟁부터 멈춰야 한다.

2023-11-19

녹색쾌락주의

이원만 시인 “현대 경제의 살 길은 소비패턴의 생산시스템에의 대거 반영이고 그 소비패튼은 여성 소비판단력의 우수성에서 기인하며 그 여성 소비판단력이 경제 대원리를 좌우한다.”위의 말은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임마뉴엘 윌러스틴과 폴 크루그먼의 주장이다. 다양한 생물종의 멸종만이 아니라 인간의 멸종에 대한 경제대책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여성소비판단력의 우수성’이라는 말에서 왜 ‘여성’이고 ‘소비판단력’일까? 또 ‘우수성’이 뭘까? 이런 질문 끝에 ‘대안쾌락주의’ ‘녹색쾌락주의’라는 말들을 떠올리게 된다.지금의 생물다양성의 위기, 인간멸종의 위기라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들이 지금의 문명이 주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원시시대로의 회기하자는 것이거나 자본주의 파괴와 새로운 사회체제를 세우자는 등 따라하기가 어려운 비현실적인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또 다른 대안으로 제시되는 텀블러로 에코빽으로 지구를 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풍력발전, 태양광발전 등 생태적인 에너지정책을 잘 받아들였던 독일국민들이 겨울철 난방을 위해 정부가 내놓은 히트펌프정책을 반발하고 나섰다.가스, 석유보일러들을 히트펌프로 서서히 교체하자는 것인데 그 비용이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열효율이 좋고 이산화탄소의 배출도 줄이지만 정부가 지원한다고 해도 가계가 부담해야되는 히트펌프가격만 2천만원 수준인데다 거기에 설치비, 난방효율을 높이는 건물수리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져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법에 의해 의무적으로 히트펌프를 써야하는 기간을 피하기 위해 새로 짓는 집을 짓는 이들은 가스, 석유 보일러를 미리 설치한다고 난리라고 한다. 거기에다 기계도 기계설치인원도 아직 부족해서 언제 설치될지도 모르고 기다려야하는 등의 불편까지 감수해야하니 원성이 자자할 만하다. 기후위기 대처에 적극적인 독일의 녹색당은 히터펌프정책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고 기후위기를 과장된 종말론으로 여기는 세력들에게 권력을 넘겨줄지도 모르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기후위기에 잘 대응한다고 하는 유럽의 중심국가인 독일의 이런 사례를 보면 탄소중립과 기후위기의 극복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아무리 방향이 좋다고 하더라도 나의 노후대책을 무너트리고 세입자나 노인가구의 부담을 고려하지 않는 정책은 외면받는다. 디테일이 중요한 것이다.‘여성 소비판단력의 우수성’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에는 이런 정치적인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이 깔려있다. 그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내용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있다.집안 일이든, 음식이든, 소비든 여성들의 판단력이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그 여성의 소비판단력이 우수해야 하는 것이다. ‘우수성’이라는 말에 ‘녹색쾌락주의’라는 말을 넣어본다면 우리는 어떤 소비미학을 가지게 될까?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게 될까?-얼마든지 비행기를 타도 상관없다, 우리의 식습관을 줄일 수 있다면!-핫 플레이스로 붐비는 여행지보다는 고즈넉한 힐링이 낫지 않겠는가!-친환경 유행을 따라 에코빽을 더 사느니, 그냥 소비를 좀 줄여보자!-개나 고양이만 예뻐하지 말고, 한 번쯤 돼지의 입장도 생각해보자!‘텀블러로 지구를 구한다는 농담’이란 책에서 쇤부르크가 주장하는 고품격 녹색의 삶에 대한 몇 가지 제안들이다. 불편하지 않고, 맛을 즐길 기쁨도 놓치지 않고,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드레스스타일을 유지 하고, 여행도 즐기고, 스포츠도 즐기는 녹색의 삶은 불가능할까?그런 녹색쾌락주의자들이 많아져 소비가 그런 기준으로 진행되면 자본은 어디에 투지를 할까? 육식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지구열대화를 위한 엄청난 기여를 할 수 있다. 거기에다가 생태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소와 닭과 돼지를 개와 고양이 수준으로 사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정치가 제시하는 정책방향도 중요하지만, 그 정책이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디테일하게 만족 시키는 정책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우리의 고품격 녹색의 삶, 녹색쾌락주의자들의 지갑이 어디에 열리는가가 결정한다. 그것말고 다른 대안들은 솔직히 비현실적이다. 불편해서, 희생을 강요해서 싫은 것이다.세계는 전쟁중이고 선진국들의 생태정책들은 후퇴하고 있다. 가능성이 낮지만 만약에 선진국들이 높은 수준의 규격을 만들어 낸다면 가난한 나라들은 그것을 따라하지 못해 많은 손해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인 문제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모든 것들을 꿰뚫는 것은 ‘여성 소비판단력의 우수성’이다. 디테일하고 현실가능하지만 품격도 높은 녹색의 삶, 녹색쾌락주의가 앞으로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야 한다.

2023-11-19

울릉도 지원 특별법

우정구 논설위원 울릉도에서 마지막으로 화산이 폭발한 시기를 학계는 대략 5천년 전으로 보고 있다. 섬 곳곳에서 발견된 고인돌과 무문토기 등으로 미뤄보아 외딴섬이지만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전 일로 짐작을 한다.역사 기록으로는 신라시대 때 처음 등장한다. 우산국으로 불렸고 지증왕 13년에는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이곳 정벌에 나섰다는 기록도 있다. 1900년 10월 대한제국 칙령 41호로 군으로 승격됐고 1914년 강원도 관할에서 경북으로 편입됐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포항시의 생활권이다.2022년 기준 울릉도의 인구는 8천900명 정도. 1975년 2만9천명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초중고 학생수는 447명이다. 인구 대비 5%다. 고령화 지수는 전국 평균 3배며 작년에 출생한 신생아가 겨우 스무명이다.주요 생업수단인 어업도 옛날 같지 않아 울릉주민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큰 문제는 울릉도에 살고 있는 학생들 대다수가 장차 육지로 떠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울릉의 앞날은 암울하다.단지 2026년 울릉공항이 개항되면 외지인이 많이 찾아와 섬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은 그나마 희망적 요소다. 울릉군은 공항이 개항되면 현재 40만명 정도 찾는 관광객이 100만명까지 는다고 본다.울릉도를 행·재정적으로 지원할 특별법이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 특별법은 섬 주민의 생활개선과 관광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하는 법안이다. 군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법안이다.특별법은 그동안 두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21대 국회기에 통과하지 못하면 또다시 폐기돼야 한다. 울릉군민의 관심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11-16

정치인의 품격

홍석봉 대구지사장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입이 험해진다. 품격이라곤 찾아 볼래야 찾을 수가 없다. 시장바닥에서나 들을 법한 거친 말들이 난무한다. 상대방 입장과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상스러운 말을 마구 뱉어낸다. 그것도 공식석상에서. 요즘 우리 정치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품격(品格)’은 사전적 의미로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또는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다. 그런데 이 품격이 우리 사회에서 점차 낯선 말이 되고 있다. 특히 정치판의 저질 발언과 행동은 국가 품위를 좀먹는다. 국민들은 모멸감마저 느낀다. 자긍심은 형편없이 망가진다.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출판기념회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어린 놈” “건방진 놈”이라고 호칭해 물의를 빚었다. 검찰 수사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송 전 대표는 자신의 돈 봉투 사건과 관련, “이게 무슨 중대한 범죄라고 6개월 동안 이 지랄을 하고 있는지. 미친놈들 아니냐”고도 했다. 며칠 동안 한 장관에게 험한 말을 퍼부었다. 한 장관에 대한 원념이 느껴진다.여기에 다른 민주당 의원들까지 한 장관을 겨냥한 거친 표현을 하며 가세하는 형국이다.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부산의 토크콘서트장을 찾은 인요한 혁신위원장에게 ‘Mr. Linton’이라고 부르며 “당신은 오늘 이 자리에 올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면박줬다. ‘혐오 정치’라는 말이 나왔다. 이 전 대표는 이틀 뒤 ‘앙숙’인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과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칸막이 하나를 두고 식사하다 자신을 비난하는 안 의원에게 “조용히 좀 하라”고 고함 질렀다가 비난을 샀다. 이 전 대표는 ‘인성’ 문제와 함께 ‘싸가지’ 없다는 평가를 달고 다닌다.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당 대표까지 지냈다. 우리 정치판의 현주소다. 매사에 모범을 보여도 부족한 판국에 천박한 언행으로 눈총받고 있다.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품격을 보여준다. 고맙다고 인사할 줄 알고, 자신의 실수엔 고개 숙이며 상대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품격과 가치를 갖춘 사람이다. 그런데도 말을 함부로 하는 이들이 많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최고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다. 정치인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사람이다. 언행과 일거수일투족이 항상 대중 앞에 노출된다. 그만큼 조심하고 사려 깊은 행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막말로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리기 일쑤다. 정치인 전체가 매도당할 수 있는 그런 언행이 곧잘 터져나온다. 절제와 포용, 정직, 신의, 배려는 품격의 전제조건이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와 행동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4류 한국 정치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성과를 여지없이 깎아내리고 있다.조선 후기 학자이자 문신인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내면의 수양이 부족한 자는 말이 번잡하며 마음에 주관이 없는 자는 말이 거칠다(內不足者,其辭煩,心無主者,其辭荒)”고 설파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품격 있는 정치인, 존경받는 정치인을 과연 볼 수 있을까.

2023-11-16

국가와 국민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지난달 7일(현지시간) 가자지구를 거점으로 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수천 발의 로켓포를 발사하며 대규모 공격에 나섰다. 가자지구 인근 지역에 진입한 하마스 무장대원들은 주민 수백 명을 살해하고 수십 명을 인질로 잡았다. 즉각 보복에 나선 이스라엘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가자지구에 쳐들어가서 하마스 소탕전을 벌이고 있다.로마군의 침공으로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천구백 년 동안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2차 대전 중에는 히틀러 나치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당하는 대참사를 겪기도 했다.그러다가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끝난 날인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지구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유대인의 영토이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을 계승한 국가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하지만 기왕의 팔레스타인 거주민들과 아랍 국가들의 저항과 공격으로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랍 국가들과 팔레스타인의 공격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응징했다. 다시는 나라 없는 민족이 되지 않겠다는 피맺힌 결의가 아니겠는가.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5년 동안 우리도 식민지 백성이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는 약소국의 수모와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고려는 몽골의 침략으로 수난을 겪었고, 조선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왕위를 책봉 받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 세계가 놀란 기적이 일어났다. 중국과 일본에 더 이상은 굴욕을 당하지 않을 만큼 국력이 부강해진 것이다.이제는 대한민국 국민과 대통령은 세계 어디에 가도 괄시 받지 않고 당당하게 행세할 수 있게 된 것이다.전쟁이 할퀴고 간 초토에서 외국의 원조를 받아가며 보릿고개를 넘어온 세대들로서는 이게 꿈인가 싶게 놀라운 현실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오늘(11월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의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하거나 헌신한 선열들에 대한 추모와 존경을 표하는 날이자 그들의 독립정신 및 호국정신을 기리는 날이다. 미국의 원자폭탄 위력 앞에 일제가 항복을 했기 때문에 맞이한 해방이지만, 나라를 잃은 35년 동안 우리의 얼과 맥을 이어온 것은 일제에 저항하고 맞서 싸운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참으로 안타깝게도 오늘의 정치판에는 우국충정을 가진 정치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온통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에 혈안이 된 정치모리배들만 득시글거린다. 어찌 정치꾼들뿐이겠는가.선전선동에 현혹되고 그릇된 이념과 포퓰리즘에 눈이 멀어 표를 몰아준 국민들이 자초한 일이다.망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국민이지만,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도 국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 좌우로 갈려 존망이 걸린 내홍을 치르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의 각성과 결단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2023-11-16

수능시험을 치르며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이 되면 대학수학능력시험 즉, ‘수능’이 치러진다. 1994년도부터 실시해 오고 있고 문이과 통합 수능으로는 세 번째이며 전국 84개 시험지구의 1천200여 개의 시험장에서 치러졌다. 그동안 몸과 마음을 다해 공부한 50만4천여 명 수험생은 이제 긴장을 풀고 본인이 원하는 대학지원에 온 정신을 쏟아야겠지. 이중 N수생(재수 이상 수험생) 및 검정고시 출신이 17만8천여 명으로 35% 이상이 되어 28년 만에 최고라고 하는데, 최고 상위권 학생의 ‘의대 열풍’과 킬러 문항 배제 소식에 반수생(半修生·대학을 다니다가 중간에 재수하는 학생)들이 가세한 탓이라고 본다.수능 과목의 국어, 수학, 사회·과학 탐구는 상대평가이고 한국사, 영어 또는 제2외국어, 한문은 절대평가인데 한국사는 우리 역사에 대한 기본 교양 평가이며 미응시자는 전 과목이 무효 처리된다. 이번 수험생들이 약간 혼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는 지난 6월 입시 비리 관점에서 불거진 ‘사교육 카르텔’ 논란으로 대통령이 사교육 경감방안을 요구하며 소위 초고난도 문제라는 킬러 문항 배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수능 출제 위원과 학원 사이에 출제 문항의 정보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로 학원가에 빨간불이 켜지기도 했다. 이에 오히려 ‘물수능’이 되지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지만 사교육비를 줄이려는 계획이라는 말에 그 연관성에 약간의 의문을 갖게한다. 그러나 사교육이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 공교육 중심의 공정한 수능을 실현하여 고교 이상 학력이면 여태껏 배운 실력으로 유추하여 해답을 얻는 정도의 문제이면 족하리라 본다. 수능성적은 대학마다 과목·영역별 반영 비율이 다르므로 지원할 때 잘 파악하여 불이익이 없도록 해야 한다.근래 와서 대학은 반도체 및 첨단과학 관련 학과를 신설하거나 증원하려 하고 의대 쏠림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올해의 수시 모집에서 보여준 의대 경쟁률은 수도권이 61대 1이고 지방의 29개 대학은 18대 1인 것을 보면 의약학 계열 지망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나아가 우리 국민의 교육 의식을 엿볼 수 있다.‘말이 나면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말이 있다. 제주도에서 키운 말이 품질이 좋듯 인재도 서울에 몰리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 평준화…. 참 어려운 말이다. 천재는 천재로 키워야 하지 않을까. 근래 4년간 SKY대학 정시합격자의 70%가량이 수도권 출신이라는 통계가 있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지방 대학 소멸 위기가 닥쳐오는데 이에 대한 국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영유아 10명 중 6명 이상이 사교육 즉, 선행 학습을 받는데, 연간 3개 이상 사교육을 받는 영유아는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3배 이상이고, 전국 초등 1학년 학부모 1만1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연간 300만원 이상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집이 약 26%라고 하니 온갖 희생을 감수하고 자식들 교육에는 최선을 다하는 우리 국민의 교육열은 아마 세계 최고가 아닐까!코로나 확진자, 유증상자도 같이 치른 이번 수능으로 독감 환자가 늘고 있는 겨울의 초입에 우리 사회도 별 탈이 없기를 바란다.

2023-11-16

수능날 다시 생각하는 교육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어김없이 수능의 날이 밝았다. 날씨와 상관없이 마음이 추워진다. 해마다 겪으면서도 이날은 새삼 스산하다. 청년들의 내일은 수능보다 훨씬 넓고 깊고 높다. 그럼에도 오늘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쌓은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길 바란다. 실력도 답안지 위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후회없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수능과 대학입시. 이거 너무 오래 되지 않았을까. 입시제도에 문제가 있다거나 바꾸어야 한다는 논의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수능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가 바뀌고 저출산고령화로 인구추이도 바뀌어 학생숫자가 급격하게 줄었다는데 수능은 그대로다. 이제는 미래지향적이며 글로벌한 교육을 생각한다면서 수능은 수십년 째 같은 모양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우리가 기르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문과와 이과. 문과형 인간과 이과형 인간. 책 제목에도 등장한다. 모방하고 추격하며 겨우겨우 헤쳐왔던 시절에는 그런 구분이 필요했다. 과학과 기술에 능한 인재와 문화와 역사에 집중하는 사람을 길러내어 얼른 우리도 잘 살아야 했다. 사회 각계에 분야마다 권위자들과 실력자들이 있어야 했다. 세월이 바뀌었다. 이제는 다르다. 공교육이 문과와 이과를 가르는 건 거의 위험하다. 사람을 이과형 또는 문과형으로 길러내면, 사회적 불균형을 초래하고 문화적 갈등을 깊게할 터이다. 수학적 논리와 과학적 사고를 하면서도 문화와 역사와 철학을 이해하는 인간을 길러야 한다. 세상을 과학기술의 눈으로만 보면서 역사에 무지한 인간을 길러야 할까. 문화적 상상력만 넘치고 논리적 사고에는 맹탕인 사람을 상상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특성이 다를 수 있겠지만 교육이 나서서 차이를 넓힐 필요는 없다.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는 태도를 탈피해야 한다.유네스코(UNESCO)도 교육이 관심가져야 할 덕목으로 네 가지 소양을 설정한다. 협력(Collabora tion), 소통(Communication), 창의(Creativity)와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더 이상 홀로 존재하는 사람도 없고 고립되어 존재하는 직업도 없다. 세상은 모두 ‘협력’을 바탕으로 움직이는데 독야청청 뛰어난 실력은 의미가 없다. 대면하여 나누는 소통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소통방식이 다양해 졌다. 효과적으로 효율성 높게 ‘소통’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다. 새롭게 바라보고 다르게 연결하는 상상력을 길러야 한다. 정답제시를 위한 기억력보다 문제해결을 위한 ‘창의’가 요청되는 까닭이다. 새로운 무엇을 쌓으려면 우선 존재하는 것들에서 문제를 발견해야 한다. 매사를 분석적으로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으로 승부해야 한다.문제는 과목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문과적 소양과 이과적 덕목을 균형있게 버무려 통합적 사고와 획기적 돌파를 해낼 수 있는 인간을 길러야 한다. 상상과 창의로 승부하는 다음세대를 길러야 한다. 고작 문과와 이과의 차이를 발견하는 미시적 접근에서 탈피해야 한다. 과학적 사고에도 능하면서 문사철(文史哲)에도 이해가 깊은 통합적 인성을 길러야 한다. 교육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2023-11-15

‘대구인’ 이육사기념관

홍석봉 대구지사장 이육사는 일제치하 저항정신의 상징 인물이다. 그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인의 가슴 속 깊이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했고 지조를 지켰다. 1927년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 투옥돼 3년간 옥살이를 했다. 당시 수인번호 264가 그의 필명이자 이름이 됐다.도쿄, 베이징 등 유학시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그는 줄곧 대구에서 살았다. 1932년까지 대구에서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며 활동했다. 육사는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이육사기념관이 16일 대구 중구 남산동에 문을 열었다. 그는 고향인 안동에서 대구로 이사한 후 6차례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현재 기념관이 들어선 곳은 1922년 이육사와 가족이 살았던 곳이다. 그가 살던 가옥은 재개발로 철거됐고 시공사가 기념관을 지었다. 기념관은 다양한 기록과 사진, 영상 등을 갖춰 이육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도록 했다. 이육사의 고향 안동에는 2004년 개관한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이곳에는 문학 및 연극, 음악회 등과 각종 강좌를 개설, 육사의 문학과 정신을 면면히 계승하고 있다.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대구의 정신을 빛낸 그의 기념관이 그가 살던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고 하겠다. 이육사의 예술 행적과 독립 활동을 조명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대구사람 이육사’라고 말할 정도로 속속들이 대구인으로 살고 대구를 사랑한 이육사다.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는 독립운동 역사 교육장과 전시공간이 되길 바란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1-15

혼자 걷는 시간

정미영 수필가 영일대 호수공원에 가을이 깊다. 붉게 물든 나뭇잎을 보며 물가를 걷고 있으니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아침노을 빛이 스며든 호수의 색채가 내 마음으로 옮겨와 은은하게 번진다.얼마 전, 지인이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의 저서를 읽었다고 했다. 올레길은 제주도 방언으로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데, 서명숙 이사장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나서 구상한 것이다. 책을 읽고 난 뒤에 올레길 코스를 모두 걷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이 충족되지 않아 생각을 접었단다.그러던 어느 날, 해파랑길부터 걸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해파랑길은 동해의 상징인 떠오르는 해와 푸르른 바다색인 파랑, ~와 함께라는 조사 랑을 조합한 합성어다.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소리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을 의미한다. 지인은 본인이 거주하는 포항의 구룡포 앞바다를 떠올리는 순간 곧장 실행에 옮겼다.포항과 울산에 위치한 해파랑길을 벌써 몇 코스나 걸었단다. 혼자 걸으니 어촌의 고즈넉한 풍광과 사람들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어 좋고,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행복하다며, 창공에 반짝이는 햇살처럼 새뜻하게 웃었다.지인을 보며 최초의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이 떠올랐다.“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수행자가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으려면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묵묵하게 자기만의 걸음으로 걸어가야 한다. 나는 지인 또한 혼자 걷는 시간에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자신이 소중한 사람임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어느덧 나는 인생시계의 가을에 머물고 있다. 봄, 여름의 계절에 혼자라는 낱말을 떠올리면 외롭다가 연상되었다. 그 감정에 휘말리기 싫어 대부분 친구나 가족 등 누군가와 함께했던 기억이 있다. 오죽하면 학창시절에 즐겨 불렀던 광고 음악이 ‘오리온 초코칩 쿠키’였다. “초코가 외로워 쿠키를 찾네. 쿠키가 외로워 초코를 만났네.” 노랫말이 마음에 들어 용돈을 모아 과자를 자주 사먹었던 추억이 있다.이제는 혼자라는 낱말을 떠올리면 독립이 연상된다. 독립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낱말인지 체득했다. 학부모를 대상으로 자녀 교육 강의를 하러갈 때, 대부분 부모들은 자녀 교육의 목표를 내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자녀 교육의 목표는 독립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부모가 존재하지 않을 때를 대비해 사랑하는 내 자녀가 스스로의 인생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홀로서기를 준비시켜야 결국은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연한다.나는 독립의 첫 걸음으로 자녀에게 혼자 걷는 시간을 줘보라고 권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에 심부름을 시켜본다든지, 집 앞을 산책하고 오라든지, 자녀가 자신을 믿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나무 그늘 아래에 서 있으니 바람이 불어온다. 제법 쌀쌀했다. 나는 잔소름이 오스스 돋은 팔뚝을 손으로 쓸며, 그윽하게 둘레길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호숫가에 좀 더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모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산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둘레길을 걸을 것인지, 잠시 고민한다.산 위에서 호수로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산길에는 낙엽이 제법 두텁게 쌓여 있겠지? 문득 낙엽을 밟고 바스락 소리를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연달아 니체가 인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괴테의 명언도 떠오른다. ‘타협하지 말고 온전히 자신의 모습으로 아름답고 당당하게 살아라.’ 나는 문구를 활용해 스스로에게 들려준다. ‘고민하지 말고 온전히 자신의 모습으로 아름답고 당당하게 걸어라.’ 자꾸만 혼자 걷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만든다.둘레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나뭇가지가 무성하다. 가만히 살펴보면, 나무들도 저마다 혼자서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혼자 걷는 시간은 나무에게도 필요한가 보다.

2023-11-15

소설(小雪)과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20번째가 소설(小雪)이다. 태양이 황경 240도에 위치하며, 입동과 대설 사이다. 올해는 11월 22일(음력 10월 10일)이 소설이다. 소설(小雪)의 의미는 이날 첫 눈이 내린다는 뜻이다.소설은 순음(純陰)의 달인 해월(亥月 음력 10월)이라 날씨가 황급히 추워지는 시기다. 얼음이 얼고, 첫 눈이 내리는 등 첫 겨울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아직 따뜻한 햇볕이 간간이 내리쬐어 소춘(小春)이라고도 한다. 11월 말까지 약간의 따스함이 남아있어 농촌에서는 야외에서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겨울이 빠르게 오건 늦게 오건 소설(小雪) 때가 되면 비가 눈이 되면서 겨울이 성큼 다가온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다. 나무의 겨울나기를 위한 자연의 순리다. 어촌에서도 배를 띄우려 하지 않는다. 날씨도 추워지는데, 이를 ‘손돌추위’라고 한다. 산짐승이 먹이를 찾아 밭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까치와 텃새들이 유난히 설치는 절기가 소설이다.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겨울이 덜 춥다고 하지만, 정도의 차이지 춥기는 매한가지다. 계절의 흐름 속에서 소설의 추위는 다음 해의 농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날씨가 춥지 않으면 병충해가 늦게까지 창궐해 보리농사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는 속담이 있다.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된다는 뜻이다.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기원전 179~122)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 권5 ‘시칙(時則)’의 핵심은 시령(時令)사상이다. 시령사상이란 통치자가 1년 열두 달마다 그달에 나타나는 자연계의 여러 변화를 일일이 주목하면서 자연의 변화에 합당한 정치를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음력 10월이 되면 방위는 북쪽이고, 숫자는 6이다. 이때부터 물과 땅이 얼어붙기 시작하며, 꿩이 바다로 들어가 무명조개가 되고, 무지개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천자는 북쪽 교외로 나아가 겨울을 맞이한다. 돌아와서는 국가를 위해 죽은 자들의 자손에게 상을 내리고, 홀아비와 과부들을 보살핀다. 신위(神位)에 기도하고, 거북점과 시초점을 치고, 주역 괘의 조짐을 관찰해 길흉을 살피게 한다.이달에는 크게 술을 마시면서 겨울 제사를 지낸다. 천자는 하늘의 신에게 내년의 복을 빌고, 토지신에게도 정성스럽게 빌고 제사를 지낸다. 이 일들이 끝나면 조상신에게도 제사를 지내고, 농부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휴식하게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러한 풍습은 농경사회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우리 농촌에서는 입동과 소설이 드는 음력 시월에 지난 한 해 동안 함께 수고하고 보살펴준 가축, 사람, 자연 등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행사가 있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한 뒤 마을의 안녕에 감사하면서 햇곡식과 햇과일로 제사를 지낸다. 나라에서는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각 가정에서는 한 해 농사를 무탈하게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 가신(家神)과 조상들에게 감사의 예를 올린다.음력 시월은 가장 풍요로운 시기이므로 열두 달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달이라는 뜻에서 상달(上月)이라 불렀다. 상달에 이르면 함께 애쓴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빚진 것을 갚는다.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과 눈에 보이지 않는 천지의 모든 존재와 죽은 이들, 신령들을 모두 챙기는 행사다. 유교 제례의 하나인 시제(時祭)도 지낸다. 이는 5대조 이상의 선조들에게 지내는 제사로 묘소에서 지낸다.상달고사는 여성들이 주관하는 큰 행사였다. 고사를 지낼 때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는 조상단지, 성주단지, 터주단지 같은 신주단지에 추수한 햇곡식을 갈아 넣는다. 이곳을 책임지는 신령들에게 시루떡과 물을 올리며 지난 한 해 무사히 지낸 것에 감사하고 다음해의 안녕을 기원한다.그리고 봉양을 받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모든 혼백에게도 조금이나마 가을의 풍요로움을 같이 나눈다. 이렇게 상달에 이르면 정성이 들여지고, 겨울나기를 위한 김장까지 끝나면 비로소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된다.시월상달, 해월에 시작되는 겨울의 시간은 외부활동 대신에 수공예와 같은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열중하고, 겨울이 깊어질수록 정신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명리에서도 겨울은 죽음과 같은 시간이라고 하지만, 활발한 신체활동을 멈추고 쉬게 하는 의미도 있다.추울 때 벽에 틈이 생기면 찬바람이 들어와 감기에 걸리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魔)가 들어와 고통을 초래한다. 항상 흔들림 없는 경(敬)의 마음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2023-11-15

탄소중립과 바다 지키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바다는 늘 출렁이며 깨어 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거칠게 철썪이고, 바람 한점 없이 고요하면 고요한대로 바다는 뭍을 향해 조근조근 속삭이듯이 찰랑대고 있다. 때로는 거센 너울로 짙푸른 근육을 보이며 포효하듯 흰 포말로 부서지기도 하고, 때로는 잔잔한 호수마냥 흰돛단배가 평온하게 떠가는 여울로 살랑거리기도 한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는 지구표면의 70%를 차지하여 뭍에서 버려지는 온갖 쓰레기와 혼재물을 받아들이면서 삭힐 것은 삭히고 지울 것은 지우며 밀어낼 것은 밀어내고 있다. 자신을 낮추어 모든 강줄기와 하천을 받아들이기에 ‘바다’라고 하는지도 모른다.그러한 바다가 수십년 전부터 몸살을 앓고 있다. 바다에 넘쳐나는 쓰레기 때문이다. 해양쓰레기의 대부분이 플라스틱으로 해양생물을 위협하고 있으며, 침적되거나 부유되는 해양쓰레기로 인해 해안경관 훼손, 해양생태계에 악영향을 초래하고 있다.전세계적으로 해양쓰레기 심각성은 커져서 한국 면적의 16배에 이르는 거대한 쓰레기섬이 북태평양 공해상에는 해류를 타고 몰려들고 있다 한다. 국내 해안도 최근 중국 등에서 떠내려온 쓰레기가 전국의 해변에 쌓이는가 하면, 제주 해안에서 플라스틱을 먹은 바다거북의 사체가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끊임없이 몰려드는 해양쓰레기도 심각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해 해양환경이 파괴되고 해양생태계의 먹이사슬조차 위협 받아 지구환경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즉, 무분별하게 버려진 쓰레기로 인해 바다가 신음하고, 바다숲과 온갖 생물들의 생태환경이 파괴되고 균형이 무너짐으로써 해양생물의 순환구조에 이상현상이 나타나 결국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후에 영향을 줘서 이상기온과 기후변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이는 곧 육상생태계에서 식물이 광합성으로 흡수하는 그린카본(Green Carbon)이 중요하듯이, 고래나 산호초, 해중림처럼 해양생태계에 저장되는 블루카본(Blue Carbon)의 생성과도 연관성이 있어서 결국 쓰레기는 탄소중립에 직결되는 중요사안이라 할 수 있다.현대 인류는 지구 온난화에 의한 기후위기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제사회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 중의 탄소를 줄여야 한다고 합의하며 저탄소·탈탄소·탄소중립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고 있다. 즉, 인간의 활동으로 배출되는 탄소는 최대한 줄이고, 배출된 탄소는 블루카본이나 그린카본이 흡수하거나 탄소 포집·이용·저장기술(CCUS)로 제거하여 실질적인 탄소 배출량을 ‘0’ 수준으로 낮추는 것을 탄소중립이라 한다. 그래서 각국에서는 탄소 배출 없는 제품유통과 탄소중립 모빌리티, 재생 에너지, 자원순환, 에너지 효율화 건물 등으로 지속가능한 자연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이러한 측면에서 해양환경을 지키며 탄소중립의 작은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포스코의 영일만해양지킴이봉사단의 활동은 나름 의미와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해양환경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비치코밍과 플로깅 등의 활동을 매월 펼치면서 캠페인과 의식함양 교육, 체험활동에 솔선수범을 보이고 있어서 참으로 고무적인 일로 여겨진다.

2023-11-15

엄마의 재봉틀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엄마는 예쁜 옷을 잘도 만드셨다. 자잘한 꽃무늬가 있는 무명천을 떠서 종이로 본을 만들어 소매 풍성한 원피스를 입혀서는 이리저리 돌아보라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살 아래 남동생의 옷도 척척 만들어 입혔다. 마치 사립학교 교복을 닮은 흰색 깃을 단 그 옷을 단정히 입은 동생의 사진이 아직도 있다. 엄마의 손재봉틀은 혼수로 장만해온 거라고 들었다. 방바닥에 앉아 오른손으로는 손잡이를 돌리며 왼손으로 천을 박음질하는 엄마의 솜씨는 어린 내 눈에는 신기였다. 반짇고리에 있는 색색의 천들을 이어 조각보를 만들기도 했던 엄마의 바느질은 그저 우아한 취미였고, 우리들의 옷을 손수 지어 줄 수 있는 기쁨이었다. 그때까지는….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풍비박산되자 엄마의 재봉틀은 생계수단이 되었다. 이웃 누군가의 옷을 지어주기 시작했다. 크고 멋진 기와집에서 옮긴 작은 방 한 칸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엄마는 밤새도록 재봉틀을 돌렸다. 단 하루 치의 먹을 것이라도 나올 곳은 엄마의 재봉틀뿐이었다. 엄마의 솜씨는 입소문을 타고 번졌고, 일감이 많아질수록 엄마의 밤샘일은 늘었다. 그래도 다섯 식구 입에 풀칠하고, 삼 남매 학교 치레는 만만치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엄마는 큰맘 먹고 손틀을 발틀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터를 방안에서 난전으로 바꿨다. 부끄러움을 떨치고 세상으로 나갔다.매서운 바닷바람, 거친 바닷사람, 그리고 따가운 햇빛에 훤히 노출된 엄마, 그리고 엄마의 재봉틀 덕에 우리는 산골짜기 초가집에서 시내로 이사할 수 있었다. 학교와 좀더 가깝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의 바느질 솜씨는 삯바느질에서 옷 수선으로 바뀌어도 솜씨가 뛰어났던지 주변의 같은 업종의 아주머니들에게서 시샘과 부러움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엄마는 그만큼 더욱 고달팠다. 밤이면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끙끙 앓았다.그때까지 거친 세파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두 분이었다. 사업 실패 이후 아버지는 포기하셨던 듯 무력해지셨으나 엄마는 강하게 맞섰다. 부잣집 마님의 취미였던 솜씨좋은 바느질을 생계수단으로 삼을 정도로 엄마는 악착같고 독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온전히 엄마의 뒤에서 무기력했던 아버지는 엄마 대신 집안일을 좀 거드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엄마의 일터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처음엔 엄마의 일을 보조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엄마의 일을 배워 엄마의 재봉틀 옆에 아버지의 재봉틀을 하나 더 두고 같이 일을 하셨다. 그렇게 두 분은 참으로 열심히 일하셨다.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중학교부터 큰 도시로 유학할 수 있었다. 주말엔 셋이 번갈아 내려가 두 분의 일을 거들곤 했다. 무서우리만치 뜨거운 두 분의 교육열에 보답하듯 우리도 치열하게 공부해서 보답하려고 애썼다. 엄마의 교육열만큼이나 뜨겁게 일했던 엄마의 낡은 재봉틀은 오빠가 잘 간직하고 있다. 며칠 후 엄마의 기일에 가면 엄마 보듯 만져보고 쓰다듬을 수 있겠다.

2023-11-15

‘동성로 캠퍼스타운’이 대구이미지 바꾸길

심충택 논설위원 첫 유럽여행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학도시’였다. 30여 년 전 여행한 독일과 영국의 대학들은 당시 우리나라 대학과는 달리, 캠퍼스가 없이 도시 전체에 단과대학이 흩어져 있어서 이색적이었다.하이델베르크 대학 인문·사회과학부가 있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시 구시가지의 경우, 도시 전체가 대학 캠퍼스 같았다. 학생들이 수업을 듣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단과대 건물 여기저기를 삼삼오오 다니는 모습이 나에겐 문화적 충격이었다. 우리 일행은 마크 트웨인과 존 웨인이 단골이었다는 하이델베르크 한 식당에 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자유분방한 학생들의 모습을 부럽게 바라봤다. 도시 전체가 지성과 낭만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대구시가 최근 중구 동성로를 유럽의 대학도시와 비슷한 ‘캠퍼스 타운’으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동성로는 1960년대 이후 40여 년 이상 대구시민의 쇼핑 중심지였다.그러나 2000년대 들어 온라인 상거래 발달로 청년들의 발걸음이 줄어들면서 쇼핑상가에 큰 타격을 줬다. 동성로의 상징이었던 대구백화점도 불황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 이러한 동성로를 대학캠퍼스로 바꾸겠다는 대구시의 발상은 놀랍다.이 뉴스를 듣고 대구 대학생들이 유럽처럼 강의실과 상가, 광장이 조화를 이룬 동성로를 오가며 자유스럽게 공부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캠퍼스 타운은 경북대, 계명대, 대구대, 대구가톨릭대, 대구한의대 등 대구 지역 12개 대학이 총장협의체를 구성해 대구시와 같이 추진한다. 대통령 직속인 ‘국가건축정책위원회’도 후원기관이다.캠퍼스 타운 사업이 현실화되면 동성로 빈 상가는 대학 공동 기숙사, 통합강의실, 학습·연구공간, 전시·행사·이벤트 공간, 동아리방, 커뮤니티 공간, 직장인 강의실 등으로 활용된다. 빈 상가에 대학 음악동아리가 입주하면 수업 뒤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고 버스킹도 할 수 있다. 외식학과는 빈 건물에 조리실을 만들어 실습실로 활용할 수 있고, 동성로에서 시식회도 열 수 있다. 학생들이 동성로에 거주하면서 공부하고, 창업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 대구시 목표다. 건물을 임대하는 비용은 교육부 재원으로 마련할 계획이고. 부족하면 시비도 투입된다.동성로 캠퍼스 타운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시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포틀랜드시는 70여 개의 포틀랜드 주립대학 건물이 도심 곳곳에 흩어져 있어 도시 전체가 대학이다.포틀랜드시는 학생·시민이 많이 찾는 건물들 사이에 광장을 만들고, 대중교통(버스와 경전철, 스트리트카)이 모두 광장주변을 지나도록 함으로써 접근성을 최대화했다. 대학에서 진행하는 모든 수업과 연구는 지역 공동체와 함께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인기를 누리는 예술대학은 1층 한쪽 면을 유리로 만들어 지나다니는 시민이 학생들의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했다.앞으로 동성로 캠퍼스 타운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대구 이미지가 유럽 대학도시나 포틀랜드시처럼 지성과 낭만이 넘치는 젊은도시로 바뀌길 기대한다.

2023-11-14

막말의 뒤끝

우정구 논설위원 스포츠 용어로 잘 쓰이는 트래쉬 토크(Trash Talk)는 상대 선수에 대해 모욕적인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트래쉬 토크를 우리 말로 직역하자면 ‘쓰레기 토론’ 정도다.운동 선수들이 상대방을 자극하기 위해 언론 인터뷰나 SNS 등에 모욕적이고 비난성 짙은 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경기를 앞두고 심리전에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행위다. 또 시합을 앞두고 상대와 심한 비방성 발언을 주고받음으로써 경기의 흥행을 끌어올리려는 의도도 숨어 있는 것이다.상술의 하나로 노이즈 마케팅이 있다. 상품의 품질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상품을 팔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구설수를 만들어 인지도를 높이는 판매 방식이다. 트래쉬 토크든 노이즈 마케팅이든 대중의 이목을 끌거나 돈을 벌기 위해 부정적 이미지도 감수하는 일종의 타깃 마케팅 방식이다.그런 점에서 정치인이 쏟아대는 막말은 목적도 없고 정치적 이익도 없는 허무맹랑한 일이다.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는 서양의 격언이 있다. 말을 신중히 하라는 뜻이다.우리나라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동서고금을 통해 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경구(警句)는 수도 없이 많다. 특히 고위층이나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면 말을 골라가며 하는 지혜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송영길 민주당 전 대표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향해 던진 시정잡배 수준의 막말이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사람의 언행을 보면 내일의 나를 본다고 했다. 말 잘못해 역사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이 어디 한두 사람인가. 5선 관록이 무너져 내린 모습에서 막말의 뒤끝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1-14

한 번 더 질풍 같은 용기를, 싱어게인!

JTBC 예능 프로그램 ‘싱어게인 3’의 인기가 뜨겁다. 과거에 활동을 했지만 무대에서 멀어져 잊혀진 가수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불러 목소리는 익숙한데 이름과 얼굴은 알려지지 않은 이른바 ‘얼굴 없는 가수’들, 그리고 대중의 주목과 관심이 없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묵묵히 자기 음악을 해온 무명 뮤지션들이 싱 어게인(sing again), 다시 노래 부를 기회를 얻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신인을 발굴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재기를 위한 무대라는 점에서 일종의 패자부활전인 셈이다.화제가 된 참가자들이 있다. 우선 1회에 출연한 참가번호 5번 가수다.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깊고 묵직한 허스키 음색으로 주목을 끌더니 전설적인 블루스 아티스트 B.B.킹을 연상시키는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블루지 기타 연주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을 자신만의 색채로 완벽하게 소화한 그는 경연 최초 ‘올 어게인’(모든 심사위원의 합격표)을 받으며 2라운드로 진출했다.그의 정체는 실력파 뮤지션 김마스타다. 홍대를 중심으로, 또 전국을 돌며 노래를 부르는 방랑가객이다. 무대에서 보여준 뛰어난 음악성, 가을에 어울리는 짙은 음색도 여운을 남겼지만 무대 전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은 큰 울림을 줬다.“다들 요즘 음악을 너무 목숨을 걸고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목숨 걸고 안 합니다. 인생을 걸고 하는 거지. 목숨은 하나지만 인생은 기니까.”꿈을 위해, 성공을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다 실패했을 때, 다시 도전할 의지를 잃은 채 꿈에서 멀어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속적 성공을 못 이루면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절망하는 이들 또한 많다. 그런 세태 가운데 인생을 걸고 온전히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게 최종 목표라는 김마스타의 말은 아름다운 잠언, “speaking words of wisdom”(비틀즈, ‘Let it be’)으로 들린다.며칠 전 방영된 3회에서는 2030세대의 애국가나 마찬가지인 만화 주제가를 부른 가수가 등장했다. 참가번호 74호. 1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몹시 긴장한 그는 호흡도 제대로 못하고 몸을 떨었지만 전주와 함께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대한민국 전체를 전율시켰다. 그가 부른 노래는 바로 응원가로 익숙한 ‘질풍가도’. 특히 2030세대는 청소년기와 사회초년생 시절 이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면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다.“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그래 이런 내 모습 게을러 보이고 우습게도 보일 거야. 하지만 내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에 나는 다시 태어나 싸울 거야. 세상에 도전하는 게 외로울지라도 함께해 줄 우정을 믿고 있어.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5년 만에 다시 잡은 마이크임에도 엄청난 성량과 단단한 고음으로 완벽한 무대를 선보였다. 결과는 올 어게인. 심사위원 선미, 코드쿤스트, 규현, 사회자 이승기 등 ‘질풍가도’와 함께 성장한 세대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방송 영상은 하루만에 370만 조회수가 넘고, 댓글 1만개가 달렸다. 하나 같이 “신나고 힘이 나는 노래인데 왜 눈물이 나는 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되돌려준 노래, 또 누군가에게는 실패를 극복하게 해준 노래, 힘겨운 시절에 많은 이들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준 노래가 다시 울려 퍼졌다. 코드쿤스트는 “이 노래로 저희에게 용기를 주셨으니, 이젠 용기를 받으실 차례”라며 74호 가수를 격려했다.유정석. 애니메이션 주제가 외에 별다른 활동을 못한 무명가수다. 만화 방영 후 7년이 지나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유명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식도암에 걸린 누나를 간병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누나도 세상을 떠나고, 그 자신도 루게릭병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중 전신마비와 우울증을 앓다 겨우 회복했다. 그 슬프고 아픈 시절을 지나 15년 만에 “질풍 같은 용기”를 우리에게 외친 그의 무대야말로 ‘싱 어게인’이다. 최종 우승자를 가릴 때까지 경연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희망의 노래를 다시 들려준 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은 이미 ‘올해의 방송’이다. 오랜 어둠을 딛고 일어나 다시 노래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질풍 같은 용기 있기를!

2023-11-14

삶의 틈 속에서

수요일 오후 반차를 쓰고 집 근처 카페에 앉아있다. 한참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이 많은 수요일 오후에 왜 한가롭게 이곳에 앉아 있느냐 하면, 오늘따라 유독 하루를 버텨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요즘 들어선 잠을 도통 잘 못자고 있다. 어떤 꿈을 꾸고 일어나는 것도 같은데 일어나면 그 꿈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기분 나쁜 찝찝함이 남아 있을 뿐. 오후 반차를 쓴 김에 밀린 잠을 자볼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좋기도 하고 햇빛을 좀 쐬어야 할 것도 같아 집 근처 카페에 와 있다. 이 카페는 5년 전부터 자주 찾는 곳으로, 통유리창이 있는 고층 카페에 커피도 맛있어서 꽤 좋아하는 곳이다.수많은 버스,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짧은 주기로 바뀌는 신호등과 흔들리는 나무, 형형색색 커다란 간판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얼마나 적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북적이는 대도시의 거리를 동경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도 어느 날은 내가 얼마나 작은 인간인지 지나치게 화려하게 비춰지는 탓에 씁쓸해지기도 했었다.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다보니 일순간 유리창에 스무 살 중반의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일하느라 더러워진 흰티를 두터운 외투 속에 꽁꽁 숨겨 놓고 시집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 줄 씩 읽어 내려갔던 오기의 순간이.그리곤 지금 다시 멍하니 내가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벌써 이곳에 자리 잡은 지 5년이 흘러가고 있었고, 20대 중반이던 나는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다. 서른을 앞둔 지금, 나는 조금 더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워졌을까? 생각하다보면 잘 모르겠다. 그저 기차 탑승 시간을 자꾸만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반복적으로 나의 어떤 부분이 변화했는지, 또 어떤 게 변하지 않은 것인지 거듭 생각하며 초조해지고 있는 것이다.지금 카페 테이블 위엔 최지은 시인의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가 놓여 있다. 빛 속에 잠긴 활자들은 슬프고 아름답다. 내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고 들어갈 수 없는 뜨겁고 후덥지근한 세계. 몇 편 읽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딴청을 피우고 만다.어린 날 내가 꿈꾸었던 글쓰기의 열망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바뀐 건 어떠한 희열도 바람도 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 두 번째로는 무거운 뒷목과 굽은 등, 자꾸만 앞으로 말리는 어깨 등 못난 몸의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최근 5년 전 친하게 지냈던 사람에게 오랜만에 안부를 물었다. 추억을 이야기하는 동안은 잠시 반갑고 기쁘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 사이의 큰 공백이 생기며 아주 많은 부분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사이의 변하지 않은 신뢰나 배려, 특유의 말버릇 같은 것에 대해 찾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고, 결국 머쓱하게 웃으며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른 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다시금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이곳도 알게 모르게 많은 곳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지인이 일하던 휴대폰 매장은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바뀌었고, 눈물이 많던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 했던 호프집은 화려한 헬스장이 들어섰다. 조금씩 달라지는 이 풍경이 처음은 흥미롭다가도 과거가 지워지는 것만 같아 쓸쓸해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앞자리가 바뀌는 나이 때문일까. 오늘은 왠지 잠이 오지 않아 벽에 기대어 멍하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내게 다가와 잠의 안부를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다. 근래 가장 크게 변화한 건 이렇게 다정하게 물어봐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고, 덕분에 성급한 불안감을 아무렇지 않게 잠잠히 눌러 볼 수 있다는 것이다.별다른 대화 없이 그가 좋아한다는 영화 한 편을 튼다. ‘우리도 사랑일까’의 마지막 장면엔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Life has a gap in it, it just does. You don‘t go crazy trying to fill it.”(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 사람처럼 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순 없어.) 삶의 권태를 느끼는 주인공 마고에게 언니 제럴딘은 삶은 본질적으로 결핍을 느끼기 마련이고, 허망하고 부족한 부분을 느끼면서도 감내하고 채워가는 게 인생이라는 걸 마고에게 알려 준다.지금 잠시 꿈과 이상, 그리고 열정을 잃어버렸다 한들 인생엔 틈이 있기 마련이니 더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심란해지지 않아도 된다. 삶은 완벽하지 않고 이 또한 작은 해프닝이 될 테니까.

2023-11-14

연예계와 대중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인공지능 개

강지우 SF평론가 최근 ‘최애의 아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었다. 오프닝 곡에 안무를 따라 하는 SNS 챌린지가 유행할 정도로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았다.주인공이 ‘아이’라는 아이돌의 아들로 환생한다는 판타지적인 설정으로 시작하지만, 주로 다루는 내용은 연예계의 뒷사정이다. 아이돌이 당하는 스토킹 범죄, 연예인에게는 사치로 여겨지는 사생활, 연예계에서 거물 PD가 행사하는 영향력, 연애 리얼리티 쇼 출연자에 대한 악플 공격과 언론 폭력 등 지금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이슈가 되는 주제가 연이어 등장한다.2023 문윤성 SF 문학상 장편 대상을 받은 단요 작가의 ‘개의 설계사’도 연예계의 화려하고도 비틀린 속성을 소재로 삼았다. 최정상급의 인기를 누리는 슈퍼스타, 슈퍼스타가 기르는 로봇 개, 그 로봇 개의 인공지능을 설계한 설계사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로봇 개는 대중의 관심에 시달린 슈퍼스타 소녀의 정신적 방황과 일탈을 지켜보며, 전 애인의 자살이라는 거대한 스캔들에도 관여한다.한편으로 이 작품은 인공지능을 축으로 삼아 인간의 감정이 무엇인지 깊이 파고든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며 기본소득이 정착된 사회, 그러나 일부 인간은 더 풍족한 삶을 위해 여전히 일을 한다. 주인공은 인간의 친구가 될 감정형 인공지능을 설계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설계사 본인에게는 일반적인 도덕관념이 결핍되어 있어서, 문제없이 사회생활을 하려면 상대의 반응을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해야 한다. 일상 대화 속에서조차도 무엇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대답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설계하는 인공지능과도 닮은 모습이다.그의 고민을 따라가며 독자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감정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새삼스레 발견한다.인터뷰에 따르면 작가는 감정과 애정의 ‘본질적인 징그러움’이 윤리와 어떻게 뒤엉키는지를 그려내고 싶었다고 한다. 대중이 연예인의 사생활에 보이는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생각하면 ‘징그러운 애정’이라는 표현이 단번에 와닿기도 한다.연예계를 둘러싼 엔터테인먼트 사업과 인공지능은 언뜻 생소한 조합이다. 그러나 소설은 징그러울 정도로 뒤틀린 감정들이 증폭되는 현장을 인공지능의 관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SF의 미덕인 ‘낯설게 보기’를 선사한다. 외로워하던 슈퍼스타를 그의 인공지능 로봇 개만이 위로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더불어 작가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작품처럼, 기존 사회에 견고한 도덕이나 질서를 아랑곳하지 않는, 또는 부러 그 틈새를 집요하게 공략하고 비틀어 엶으로서 세계를 확장하는 과감함도 고유한 매력이다.연예인의 사생활이 예능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는가 하면, 일반인의 연애사가 리얼리티 쇼로 화제를 끄는 요즘이다. 관심을 먹고 사는 사업이라는 미명 하에 개인에게는 잔인한 폭력이 가해지기도 한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며 인간성이 무엇인지 되묻는 시대에, 우선 우리의 감정이 무엇에 바탕하고 있는지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2023-11-14

행복 연습을 습관처럼

최선희 경운대 교수 늦가을 정취를 즐기기 위해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 한 켠에는 올 여름 우리사회를 공포로 몰아놓은 묻지마 무차별 살인사건과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살인예고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함이 남아 있을 것이다. 끔찍한 흉기난동과 살인을 저지른 범인들은 오히려 본인이 억울한 피해자라고 하며 궤변에 가까운 범행 동기를 늘어놓고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기까지 했다.일부 가해자는 타인의 행복한 모습에 분개해 살인을 했다며 사회를 향한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스스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는 무서운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으로 사회적 고립 속에 자신을 가두고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 증오의 싹을 틔웠던 것이다.행복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인가. 행복에도 조건이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경제적 기반, 개인과 사회의 조화, 사색을 통한 자기발견을 행복의 요소로 본다. 경제적 기반은 의식주의 해결이 우선일 것이고 개인과 사회의 조화는 나와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정립이며 자기발견은 자아실현과 같은 내적 성취와 만족과 감사를 느낄 줄 아는 건강한 의식일 것이다.행복의 조건을 자세히 천착해보면 노력으로 우리 모두 행복감을 가질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답이 나온다. 특히 사색을 통한 자기발견은 우리 마음에 자리한 중요한 행복요소라 할 수 있다.편안하게 자신의 모습과 마주해 스스로를 깊게 들여다보며 나를 긍정할 때 행복은 가까이 있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가꾸어 나갈 때 찾아오는 것이다. 즉, 행복은 멀리서 갈구하고 쟁취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올 3월 OECD에서 발표한 한국인의 행복순위는 OECD 정회원국 38개 중에서 35위에 그쳤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며 IT같은 과학기술,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의 스포츠 대회 성적에서 상위권에 들어가는 우리나라가 행복순위 꼴찌에 가깝다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는 국민인가. ‘행복한 국민’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위해 모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이다행복도 연습하면 습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행복연습! 인위적이라며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진정한 행복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오래전 한 유명한 국회의원 딸이 자신의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급히 TV를 켜고 개그 프로를 보며 행복해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이렇게 행복은 우리의 작은 일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오늘부터 나 자신을 바라보며 ‘나다움’에 감사하고 호젓한 낙엽 길을 걸으며 가을 햇살을 느껴보자. 그리고 현재의 소소한 즐거움에 집중하며 행복을 연습해보자. 습관처럼 행복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행복감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작은 행복이 상대에게 전염되어 큰 행복으로 넘쳐나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은 지나친 낙관일까.

2023-11-14

백두대간수목원의 숨은 가치

홍석봉 대구지사장 경북 봉화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5천179ha의 넓이에 4천 종의 자생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아시아 최대이자 전 세계 수목원 중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한다. 수목원엔 기후변화로 사라져가는 자생식물과 고산식물을 수집·연구하는 등 백두대간 생태계 보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호랑이숲’과 ‘알파인하우스’ 등 39개의 전시원이 방문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 불리는 종자 영구보존 시설은 세계 단 두곳 뿐이다. 볼거리 많고 의미 있는 수목원은 한번쯤은 가봐야 할 명소가 됐다.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개최하는 ‘2023 백두대간 봉자페스티벌’이 세계축제협회의 ‘2023 피너클어워드 한국대회’에서 ‘영상오디오’ 부문 은상, ‘지역활성화형 축제’ 부문 동상을 각각 받았다. 지난해 ‘홍보디자인’ 부문 은상에 이어 2년 연속 수상이다.봉화의 ‘봉’자와 ‘자생꽃’의 ‘자’를 따온 봉자페스티벌은 지역상생 먹거리부스 같은 판매장터를 운영해 지역 소상공인에게 판로를 제공한다. 지역 예술인들에게는 수목원 내 문화 활동 공간을 제공, 지역활성화에 기여도가 높다. 특히 자생식물과 방사된 호랑이를 구경하려는 방문객들이 연중 줄을 잇는다.우리나라에서 꽃을 내세운 축제가 적잖다. 대표적인 것이 진해 벚꽃과 마산 국화, 신안 튤립축제다. 하지만 자생식물을 활용한 꽃 축제는 봉자페스티벌이 유일한 듯 하다. 그만큼 희소성이 있다. 백두대간수목원과 자생식물이라는 전국 유일의 자원을 활용, 우리나라 대표축제로 키워나가야 할 터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성공도 괄목할만하지만 관련 콘텐츠를 추가 개발, 축제의 깊이와 의미를 더해야 할 것이다. 봉자페스티벌이 세계적인 페스티벌로 우뚝 서길 기대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1-13

수도권 메가시티와 남부거대경제권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연구본부장 최근 여당과 서울시는 더 큰 ‘메가시티’ 조성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려 한다. 이 계획은 경기도의 김포, 구리, 광명 등 주변 도시의 편입을 포함하며, 교통개선, 항구도시로의 변화, 경제성장 등의 이점을 목표로 한다.반면, 경기도민 대부분은 이러한 계획에 반대하고 있으며, 지역적 특성의 상실과 균형 있는 발전의 저해를 우려하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기도민의 약 66.3%가 반대 의견을 표명했으며, 특히 젊은 층과 화이트칼라 직업군에서 반대가 두드러졌다고 한다.일반적으로 ‘메가시티’는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투자와 일자리를 집중적으로 유치할 수 있고, 대규모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인프라가 집중되어 관리와 투자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유리한 면이 있다.아울러 다양한 문화적, 교육적 기회가 제공됨으로서 인재 유치와 지식기반 경제성장의 촉진을 기대할 수 있다. 반면에 ‘메가시티’에 자원과 기회가 집중되면서 다른 지역과의 격차가 커질 수 있고, 인구과밀과 함께 환경오염, 교통혼잡, 주거문제 등이 심화될 수 있다.아울러 지역적 특성과 다양성이 희석되어 문화적 단일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국가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메가시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광역도시연합’이 제시된다. ‘광역도시연합’은 인접한 도시들이 협력하여 공동의 인프라, 교통, 환경 관리 등을 공유함으로써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지역 간 격차를 줄이는 데 중점을 둔다. 이를 통해 각 도시의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메가시티’의 경제적,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또한, 공동의 문제해결과 정책결정 과정에서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지역 간 상호 의존성을 증가시키고 균형 잡힌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이와 같이 ‘광역도시연합’은 중복 투자를 방지하며, 인적·물적 교류를 촉진해 상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중립성과 자율성으로 인해 지역에 대한 책임이 약화되고, 난립으로 인한 행정 효율성 저하의 위험이 있다. 국내에서는 대구·경북, 부산·울산·경남, 광주·전남 등 다양한 지역에서 행정 통합을 통해 ‘광역도시연합’을 추진한 사례가 있다. 국제적으로는 일본의 간사이권광역연합, 독일의 슈투트가르트광역연합, 미국의 미네소타 트윈시티광역정부 등이 광역도시연합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이들 ‘광역도시연합’지역에서는 재정수입을 공동 활용하여 첨단산업, 연구개발, 녹색기술에 집중하며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고 교통, 환경관리, 지역개발 등에서의 협력을 통해 효율적인 도시운영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모색할 수 있었다. 서울의 ‘메가시티’ 추진과 함께 더 비대해질 수도권에 대응하여 대구·부산·울산·광주 등의 광역시와 경북, 전남, 전북, 경남도, 제주특별자치도 등 영호남지역의 ‘광역도시연합’이 형성하는 ‘남부거대경제권’이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특히 2030년 ‘대구경북신공항’과 ‘대구·광주 달빛고속철도’ 개항과 개통으로 대구·경북은 ‘남부거대경제권’을 선도할 것으로 전망한다.

2023-11-13

까슬까슬한 벽면 위 만화, 울진 매화벽화거리

바닷물의 짠 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울진 매화벽화거리는 19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하는 이현세(1954~)의 만화가 마을 골목을 수놓은 곳이다. 까슬까슬한 종이 위에 그려진 만화가 거친 담벼락을 따라 피어나 옛 추억을 불러들인다. 학교에서 선생님 몰래 읽었던 아슬아슬한 순간들, 만화방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만화책장만 넘기던 시간들, 다음 편이 나오지 않아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린 날짜만 기다리던 그 시절은 세월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당시 만화책은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마음껏 상상의 세계를 탐험하게 해주는 여행티켓이었다. 신화·사랑·영웅·성공 등 그 속에는 무엇이든 다 있었다.울진 매화벽화거리는 ‘공포의 외인구단’(1983~84)과 ‘누구라도 길을 잃는다’(2017), 다수의 단컷 만화벽화, ‘남벌’(1993)을 소재로 한 카페를 찾아볼 수 있다. 매화이현세만화공원·매화역사관·매화박물관·만화도서관·영동이네 옛집 등 마을 곳곳에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매화벽화거리는 만화책 속 작은 네모 상자를 골목의 담벼락에서 찾고, 그 안에서 캐릭터 까치·마동탁·엄지가 튀어나올 듯 그려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꺾이며 이어지는 골목의 만화 속 장면들이 발걸음을 따라 조롱조롱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공포의 외인구단’이 그려진 골목은 마을 외곽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러브로드’다. 사실 원작 만화의 줄거리는 사랑보다는 스릴 막장에 가깝다. 주인공 오혜성은 짝사랑하는 엄지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한다. 라이벌이자 엄친아이자 권력자인 마동탁으로 인해 엄지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오혜성은 부상으로 야구마저 포기할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그는 외인구단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야구 타자로써 부활하여 마동탁과 엄지 앞에 나타난다. 위기를 느낀 마동탁은 아내 엄지를 이용하여 혜성을 흔들고, 혜성은 두 눈을 상실하면서까지 마동탁의 승리를 원하던 엄지의 소원을 이뤄준다. 엄지는 충격으로 정신병을 앓고 이혼당한다. 혜성이 엄지를 찾아와 서로 포옹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지금도 상상치도 못했던 결말에 얼떨떨했던 당시의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하다. 원래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이 작품은 충격적인 결말만으로도 결코 잊힐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공포의 외인구단’은 공포정치를 하던 군부가 대중들의 눈을 정치가 아닌 곳으로 돌리기 위해 스포츠를 키우던 사회 분위기에 맞춰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1980년대는 국가가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무력 진압하고, 사회 안정·정의 구현·국민 순화라는 명분으로 감시와 통제를 일삼았다. 국가권력은 대중들의 요구를 컬러티비 보급·야간통행금지 폐지·교복 자율화·스포츠 활성화 등의 정책을 통해 억눌렀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탄탄한 줄거리·엄청난 반전·속도감 있는 전개와 승리에 대한 집착·신체 훼손·과장된 정서적 표현이 특징적이다. 특히 사회 약자들이 영웅이 되는 스토리는 억압받던 80년대의 독자층을 매료시켰다. 나중에는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이나 드라마 ‘2009 외인구단’(2009)으로도 제작되었다.‘남벌’은 열차 카페의 테마로 즐길 수 있다.‘남벌’의 주인공 오혜성은 일본 내 재일교포다. 인도네시아 석유로 인해 한일전쟁이 발발하자 재미교포들은 수용소로 강제 이송된다. 아우슈비츠에 버금가는 그곳에서 가족을 잃은 그는 탈출하여 한국으로 건너가 한일전쟁에 선봉을 서서 한국군의 승리에 공헌한다. 붙잡혔던 엄지도 구출하여 남은 가족과 한국에 정착해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이 작품은 가족과 주변인의 비극적인 죽음·운명적인 사랑·애국심과 민족주의·강한 남성상과 약한 여성상 등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1990년 김영삼 정부의 정책 ‘일제 잔재 청산’에 힘입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냉전이 완화되고, 해외여행이 증가하며, 국제 문화 교류가 증가하던 세계 흐름에서 대중이 느꼈던 일본과의 격차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식민 통치로 인한 과거 청산, 독도 영유권 주장, 경제적 격차로 인한 무역 불균형, 재미교포의 차별 등 일본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반일감정을 과열시켰다. 대중은 작품 속 가상의 한일전쟁에서의 승리에서 현실의 억압된 반일감정을 해소했다. 2023년 기준으로 한국은 일본과 상당한 부분을 극복했고 위기나 경계심도 낮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부분은 남아있다.이현세의 작품은 만화가 어린이나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이 향유하는 대중문화라는 인식을 마련했다.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 비극적인 사랑과 주변인의 죽음, 극단적인 갈등과 과격한 장면, 과도한 감정표현은 소설처럼 스토리에 빠져들게 했으며, 스포츠·판소리·전쟁·SF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소재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작품을 만들었다. 울진의 매화벽화거리에 가면 ‘천국의 신화’·‘국경의 갈가마귀’·‘활’·‘지옥의 링’·‘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블루엔젤’·‘카론의 새벽’·‘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아마겟돈’ 등 이현세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만화가 가득 그려진 골목을 거닐며 까슬까슬한 만화책의 질감을 떠올려 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11-13

육십년대식의 사랑, 육십년대식의 위로

겨울이 오는 듯, 스산한 바람이 들기 시작하면, 왠지 대학 시절 읽었던 김승옥의 작품 속 문장들이 생각난다. 그때는 그 사소한 문장 한 줄이 대학에서 교수가 전해주는 지식보다도, 매일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셔주던 친구들보다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 같은 기분을 주었다. 누구에게나 가끔씩 찾아오는,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온통 잿빛으로 가득한 그 문장이 내 마음에 손을 내밀어 모종의 위로를 주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없는 문장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렇게 겨울 공기에 섞인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기의 기운을 맡곤 했다.비록 구십년대의 대학생이었던 나는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바라보고 있던 긴박된 시대의 분위기를 함께 느끼지 못했고, 그 속에서 조금씩 불어오고 있던 자유의 비린 냄새도 함께 맡을 수 없었다. 그러니 비장한 태도로 유서를 쓰고, 어딘가로 떠나고 있는 김승옥 소설의 주인공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오만한 수사나 합리화에 불과할 것이다. 육십년대를 호흡하는 김승옥의 허무와 감수성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것이고, 내게 그것은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이나 지식의 대상이었으니 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십년대의 공기를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내가 김승옥의 문장을 읽을 때 들었던 그 위로와 씁쓸한 공감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문득 들었던 느낌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어려워 혀끝에서 맴도는 감정들을 굴리고 있을 때, 누군가 툭 바로 그 단어를 떨어뜨려 두고 간 것만 같은 감각이 김승옥의 소설 속에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시 아직 어렸던 내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나의 문장이 삶에 주는 영향 같은 것에 대해 말하기도 했고, 글로 써보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김승옥이라는 계기를 통해 확인한다. 내가 김승옥을 통해 전혀 본 적이 없었던 육십년대식의 분위기를, 육십년대식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고 내가 향유했던 구십년대식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듯, 이천이십년대의 누군가도 그에 마땅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온갖 종류의 유사-감각들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시대지만, 마음 깊이 존재하는 우리의 감정에 다가가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지 않은가. 어떤 문장은 여전히 그런 힘이 존재한다.그렇게 보면 인간이 영위하고 있는 삶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공기 내부 속에 있을 때는 너무나 빠르고 급하게 변해서, 당장은 마치 저 멀리까지 떠나가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나갔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계절의 변화와 사람의 변화를 노래했던 이제는 그 문자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시가의 언어들도 새삼스러워지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문명과 시대의 변화는 기술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수성의 영역은 언제나 한계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계절은 어김없이 변하고, 그 시대를 호흡하는 인간의 감정은 그에 따라 어김없이 피었다가 졌다가 한다.어느새 겨울이 오고 있다. 코끝이 시큰한 겨울의 냄새를 맡으며, 오랜만에 김승옥의 소설집을 펼친다. 빛이 들어 책표지는 바랬고, 그 문장은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잿빛투성이지만, 그 문장은 여전히 반짝거린다. 분명 시대는 많이 변했지만, 지금도 어딘가의 여관에 허무로 갈 길을 잃어버린 잿빛 청춘들이 그렇게 두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위로를 위한 것도 무엇도 아니지만, 읽는 누군가에게는 분명 위로가 된다. 그 분명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육십년대식의 위로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간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11-13

순천처럼 하세요

김규인 수필가 1천만 관광객이 찾는 행복한 여행지, 순천만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대한민국 제1호 국가 정원과 람사르 습지에 지정된 것을 계기로 순천시는 생태 브랜드화 이미지를 굳히는 데 힘을 모은다. 눈길을 끄는 것은 흑두루미 수백 마리가 순천만 습지에 왔다는 사실이다. 조심스러운 동물이라 사람이 가까이 가면 늘 경계하고 환경이 나쁘면 찾지 않는다. 흑두루미 수가 늘었다는 것은 그만큼 동물이 살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는 뜻이다. 지구의 환경이 오염만 되어가는 세상에서 그래도 동물이 살기 위해 찾아드는 곳이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신문만 펼쳐 들면 지구가 망가지는 기사가 나온다. 나무가 우거진 지역은 몇 달째 불에 타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끌 수가 없고,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먹이를 찾는 코끼리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쓰레기를 태우면서 나오는 연기는 앞을 보기도 힘들고 우리의 미래도 연기 속에 싸여 실루엣처럼 희미하기만 하다.바닷물에 떠밀려 해변으로 밀려난 고래의 배를 가르면 플라스틱과 비닐봉지가 쏟아진다. 더는 고래가 살 수 없는 바다에 사람들은 온갖 쓰레기를 쏟아붓는다. 멈추지 않는 인간의 행위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생명을 줄인다. 그런데도 지구를 괴롭히는 인간의 행동은 멈추지를 않는다. 이제는 달라져야 하는데도 나는 아직 살만하다고 여기며 그러한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순천은 다르다. 순천시는 흑두루미를 부르기 위해 높이 솟은 전봇대를 지하로 숨기고, 지역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농약을 치지 않고 논의 피를 뽑게 한다. 열심히 지은 농작물을 겨울철 흑두루미의 먹이로 준다. 순천 사람들이 곡식을 주어 흑두루미가 살아가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핀다.람사르 습지 지정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습지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관청과 주민들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역 주민들의 이해를 얻고 생활의 불편함을 덜어주며 시의 정책에 함께하는 계기를 마련한 결과다. 자연 친화적인 생태관광 도시로 만들려는 순천시의 노력 덕분이다.순천만의 수백 마리의 흑두루미는 노력한 인간에게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몇 마리에 불과한 흑두루미를 수백 마리로 불려준다. 듬성하던 갈대 군락이 바닷가까지 늘어난다. 갯벌에서 게는 뛰어다니고, 땅이 제대로 숨을 쉬고 땅에 기대어 사는 생물의 수가 늘어난다. 물속에서도 삶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사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살아있는 것들의 어울림이 주위를 가득 메운다.“환경을 살리는 생태관광, 지역 주민에게 이익이 되는 지역 기반 관광으로 여행의 콘셉트와 가치가 다른 최고의 순천을 만들어 가겠다”고 한 순천시장의 말보다 앞선 행동이 오늘의 순천만을 만들었다. “순천처럼 하세요”는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순천을 돌아보고 느끼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번 가을은 순천만의 갈대를 보고 싶다. 흥겨움에 겨워 춤을 추는 갈대 사이에서 오염된 자연을 벗어나 자연의 조화를 느끼고 싶다. 순천만의 아름다운 낙조를 보며 절박한 마음으로 지구를 위해 따뜻한 손을 내밀기를 기대한다.

2023-11-13

동빈내항과 포항운하 이야기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필자가 포항을 처음 방문한 것은 몇 년 전, 동해안 자전거 종주 때였다. 최북단 고성에서 출발해 4박 5일 동안 동해안 자전거길을 달려 포항에 이르렀다. 영덕과 흥해 지역을 지나면서 파란 동해 바다와 전원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포항 시내에 진입한 것은 밤 열 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모텔이 밀집한 지역에 숙소를 잡았다. 돌이켜 보면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였던 듯하다. 죽도시장에서 생선회로 저녁을 먹으려 했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열려 있는 식당이 없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당시에는 ‘동빈내항’이라는 이름조차 몰랐지만, 은은한 조명이 새카만 수면에 아름답게 반사된 야경이 실망한 나와 일행을 위로해 주었다. 그때의 광경은 내게 포항의 첫인상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포항에 살며 동빈내항이 과거 번창했던 항구였음을 배웠다. ‘포항운하 역사관’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동빈내항은 일제강점기와 1950, 60년대 동안 경북 일원에 식량을 공급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했던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매립으로 인해 형산강과 동빈내항을 잇는 물길이 기능을 상실했고, 주변부는 난개발이 이루어져 낙후된 주거지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양학천, 칠성천의 생활하수가 동빈내항으로 그대로 유입되어 수질 또한 심각하게 오염되었다고 한다. 잘 정비된 지금의 동빈내항과 포항운하 일대를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포항운하는 형산강과 동빈내항 사이의 물길을 복원하여 수질오염을 개선하고, 시민들이 여가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수변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2012년부터 조성 공사를 시작해 2014년에 완공되었다. 현재 이 지역은 포항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꼽힌다. 송도동에 있는 포항운하관에 가면 동빈내항과 포항운하 지역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 운하 공사 당시의 사진 등 다양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형산강이 내려다보이는 전시관 내 카페에 앉아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리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그런데 포항운하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포항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도, 전시자료도, 멋진 전망의 카페도 아니었다. 전시관 외벽에는 운하 공사에 삶의 터전을 내어줘야만 했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주자의 벽(壁)’이 설치되어 있다. 이 벽에는 지금의 포항운하 자리인 매립지에서 살았던 827세대 주민들의 이름과 집의 위치가 지도상에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다.도시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와 같다는 말이 있다. 도시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와 요구들이 존재하고, 그에 호응해 도시공간 자체가 지속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추억하듯, 도시도 이러한 기록과 기억의 작업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화려하고 말끔한 모습은 도시가 간직한 이야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된 이야기, 잊혀 가는 이야기들을 사랑한다. 포항운하관 ‘이주자의 벽’이 들려준 이주민들의 이야기가 내 기억 속에도 오래 남아 있을 것 같다.

2023-11-13

사법 절차 보호해야 부패 정치 막는다

김진국 고문 민주주의는 불안한 제도다. 주권자가 맑은 눈을 가져야 제대로 작동한다. 눈을 감은 사람이 있을 수 있어도 눈이 밝은 사람이 더 많다는 믿음 위에 민주주의가 서 있다. 그래도 위험은 찾아온다. 집단적인 편견이 있다. 숫자는 적어도 목소리가 커 과대 대표되는 세력도 있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비극으로 끝났다. 집단 편견은 여러 형태로 우리를 덮친다. 오랜 숙제인 지역감정도 그런 것이다. 정치인을 연예인처럼 추종하는 문화의 확산도 영향을 미친다. 열성 팬은 노래가 나올 때마다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냉정하게 비교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가수는 무조건 1등이다.축구·야구팬이 1등 팀에만 몰리지는 않는다. 팬의 사랑을 받는 다양한 가수와 팀이 무대에 올라 다양성을 유지한다. 거기까지가 정상이다. 그러나 상대팀을 공격하는 훌리건으로까지 나가면 스포츠와 문화·예술을 파괴한다. 더구나 정상적인 숫자로만 비교되는 것도 아니다. 앨범 사재기가 있다. 소수라도 목소리가 큰 악착같은 세력이 있다. 억지를 부리는 세력이 과대 대표된다면 정치를 난장판으로 만든다.민주주의의 중심은 의회다. 민주주의의 요체인 대화와 타협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문제는 부패다. 가장 부패하기 쉬운 곳이 정치권이다. 주권을 위임한 것은 국민의 이익을 지켜달라는 주문이다. 그런데 이 권한을 사익을 추구하는 데 쓰는 정치인이 많다. 선출된 권력이지만 사법제도가 막아야 한다. 지난 정부에서 공수처를 만든 명분도 그런 것이다. 부패 정치인의 눈에는 이것이 눈엣가시다. 정치가 사법 질서를 흔들면 부패를 막을 길이 없다. 사법의 신뢰도도 추락한다.1976년 2월 4일 미국 상원 공청회에서 록히드사가 200만 달러(약 26억 원)를 일본 정계에 뿌린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에게 5억 엔(약 50억 원)을 준 사실도 드러났다. 그는 총리이던 74년 자기 가족 기업 땅에 건설성이 공사를 시작하면서 땅값이 수십 배 폭등하는 등 비리가 드러나 사임한 상태였다. ‘청렴한 미키’라는 별명이 붙은 후임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총리는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 그러자 다수파였던 다나카파는 ‘표적수사’, “너무 까분다”라고 비난했다.도쿄지검 특수부는 다나카를 체포해 정치부패를 막는 보루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6개월 수감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다나카는 여전히 정계의 배후 실력자로 활동했다. 83년 1심 재판에서 다나카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만 상고가 진행 중이던 93년 사망하면서 재판이 끝났다. 최대의 파벌을 형성한 다나카는 ‘금권정치’, 파벌정치의 한계를 보여줬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정적에 대해 불법 침입·도청을 한 ‘워터게이트사건’을 수사하던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하려 했다. 그러나 해임을 지시받은 법무부 장관과 차관이 차례로 이를 거부하며 사임했다. 결국 장관 직무대행인 차관보를 통해 특검을 해임했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비난 여론이 거세지면서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사법 방해행위는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민주당은 9일 이재명 대표 수사를 총괄하는 이정섭 수원지검 2차장검사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고, 10일 공수처에도 고발했다.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를 철회해 표결이 무산되고, 자동 폐기될 처지였는데, 이를 철회하고, 30일 본회의에서 꼼수로 재추진하겠다고 한다. 편법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사법 방해다. 이 차장검사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 헌법재판소 심판 전까지 직무가 정지된다. 헌법재판소가 탄핵 결정을 하지 않더라도 그때까지는 ‘쌍방울 대북송금 대납’ 의혹, ‘경기도청 법인카드 사적 유용 묵인’ 의혹 등 이 대표 수사가 모두 중단될 수밖에 없다. 명백한 사법 방해다. 민주당이 탄핵 이유라고 적시한 의혹을 보면 처가 고용인 범죄기록 조회, 스키장 리조트 이용 청탁, 처가 운영 골프장 부정 부킹, 위장전입 등이다. 이게 국회가 나서서 검사를 탄핵할 이유가 되나. 팬심에 매달리면 극단 정치로 갈 수밖에 없다. 유권자가 눈을 뜨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1-12

제국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진홍부국장 인류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국주의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최초의 제국은 BC 2250년 메소포타미아의 사르곤 대제가 다스렸던 아키드다. 오늘날 이라크와 시리아 대부분, 이란과 터키 일부 지역을 지배했다. 뒤를 이어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 힛타이트, 페르시아 등이 메소포타미아 고대 제국의 바통을 받았다.BC 550년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은 ‘피정복민들은 우리 신민이 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남겼다. 아마 키루스 대왕은 대제국에 병합되면 ‘당시 중소 민족·국가들간 치열했던 생존 전쟁 위협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한 것으로 보인다.제국주의의 요건은 무엇일까? 다른 문화 정체성을 가진,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다민족·다국민들을 지배하면서 영토 확장에 공격적인 국가로 규정할 수 있다. 때문에 제국들은 단일 정치체제로 수많은 민족과 지역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가치와 다양성, 개방성, 표준화 등을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로마제국을 예를 들면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기 전까지, 다신교를 신봉했다. 또 피정복민들에게도 일정 세월이 지나면 로마 시민권을 부여할 정도로 개방적인 사회였다. 심지어 48년 클라우디우스황제 때가 되면 피정복민 골족 출신이 권력 핵심 원로원에 입성했고 2세기에는 식민지 이베리아반도 출신이 잇따라 황제까지 된다.식민지에 대해서도 세금과 국방을 일부 부담하는 조건으로 지방자치를 허용했다. 다만 로마제국은 3·4세기 2차례 기독교 탄압으로 기독교인 수천명이 죽음으로써 매우 폭압적인 체제로 비쳐지는 오명을 썼다. 하지만 당시 다신교였던 로마제국은 일신교인 기독교가 체제 유지에 부담이 됐던 것으로 분석된다. 또 기독교의 인류 평등의 가치는 신분제 붕괴를, 군 복무에 부정적인 태도 등도 문제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중·근대 유럽의 신·구교 종교전쟁으로 기독교인 수백만명이 서로 학살하거나 죽임을 당한 점을 감안하면, 로마가 패쇄적인 체제라고 볼 수는 없다.우리 현대인들은 제국주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아마 과거 제국들이 식민지 정복 과정에서 보인 참혹한 전쟁과 노예화, 대량 학살 등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근·현대사에서 서구 열강들의 무자비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식민지 수탈과정은 여전히 많은 분노를 자아낸다.그럼에도 불구, 제국의 속살과 후세에 미친 영향 등을 돌아보면 긍정적인 면이 없지도 않다.최소 수십년이 걸렸던 피정복민들의 동화과정이 고통스러웠지만, 제국들은, ‘세계적인 통합과 협력’을 이뤄냈다. 인류 첫 문명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3천여년동안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하는 제국들을 중심으로 이합집산 하면서 ‘통합 문화’를 만들어냈다.BC 7C∼AD 5C 고대 세계 중심지였던 지중해의 수많은 민족들도, 폐르시아·그리스·카르타고·로마 등에 병합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닮은 꼴이 돼 갔다.중국의 경우 BC 20C경 상나라가 통치한 황허강 주변 사람들만 한족(漢族)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변방 이민족들까지 한족(漢族)으로 동화 돼 갔다. BC 221년 진시황이 중국대륙을 통일했으나, 본래 한족(漢族) 입장에서 진제국 역시 중국 북서쪽에 위치한 변방 이민족이 만든 나라에 불과했던 것.중국은 이후 2천년 동안 또다른 수많은 이민족·지역들을 정복 했으나, 현재 중국인 90% 이상은 스스로 한족(漢族)으로 여기고 있다.또 인류의 중요 문화 유산들이 제국의 잉여경제에서 생산 됐음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영어는 로마제국의 라틴어에서, 동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은 현재 과거 자신을 정복했던 한나라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중세 유럽 합스부르크제국은 주변 지역을 지배하며 얻은 잉여 경제력으로 모차르트와 하이든에게 월급을 주고 작곡케 했다.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깔끔하게 분리하는 것도, 인도 역사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사실 불가능하다. 고대 인더스문명을 만든 드라비다족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침입해 온 아리아족에게 정복됐다. 카스트제도와 힌두교 등을 믿었던 아라아족 왕조는 16C초 중앙아시아에 발흥한 이슬람 무굴제국에게 멸망 당했다. 다시 무굴제국은 1857년 대영제국에게 정복되면서, 인도의 정복과 피정복 역사는 뒤죽박죽 돼 버렸다.인류사에는 정의가 없었다. 정복과 피정복의 끝없는 반복 뿐 이었다. 제국주의는 우리 사피엔스종의 이기적 본성, 끝없는 탐욕 때문에 탄생했다.역설적이게도 그 탐욕이 인류사에 많은 발전도 가져왔다.

2023-11-12

“종점에서 처음으로”

이희정시인 일찌감치 배추를 뽑고더는 밭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알량한 텃밭이다그래도 봄이면 쌈채 모종을 심거나 씨를 뿌리면서무슨 우주 같은 농사꾼인양 했다그리고 가을이 왔다쌈채 농사 끝나고 배추를 심어 구십일도 되기 전벌레한테 모두 먹히기 전일찌감치 뽑아내 입에도 한 잎 집어넣는 일요일 오후가을처럼 하느님이 왔다―고운기, ‘종시(終始)’전문 (고비에서, 2023)움직이지 않는 자는 다치지 않는다. 고운기(1961~)의 시편을 읽으며 상처받은 언어의 모습을 떠올린다. 시인은 최근 시집 ‘고비에서’자신의 투병에 대한 씁쓸한 고백과 담담한 상념을 총 6편의 시집과 같은 제목의 연작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병(病)중에 겪은 여러 고비에 대해 어떤 의미의 가벼움과 무거움도 가늠하지 않고 있다. 병을 앓고 난 후의 심경이 그렇다. “그 어떤 기대치의 높낮이도 자리할 수 없음은 깨달은 자의 미학적 실천에 해당한다.”는 최현식의 말처럼 한 인간이 생의 고비에서 최고점(Over the hill)을 찍고 난 후라면 시업(詩業)과 생업(生業)의 현장 정서는‘알량한 텃밭’으로 여겨지지 않겠는가. 그렇다, 시인에게 병을 앓기 전과 후의 대상은 다른 지평으로 놓인다. 그것이 일이든 사물이든 병을 앓기 전에 우주처럼 경작하던 모든 것들이 대수롭지 않은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는 정제된 미의식으로 삶의 의미를 꿰뚫고, 자연의 순환과 경이를 다잡는다.암 투병으로 인해 생과 사를 다투던 시인은 제목을 종시(終始)라고 달았다. 제목을 좇아보면 “종점(終点)이 시점(始点)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고 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노래했던 시인 윤동주의 산문 종시(終始)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의 1955년 오리지널 디자인을 증보한 시집(2022) 속의 산문 첫 구절이 그렇게 시작된다. 병을 앓고 난 후 다시 시업으로 돌아온 고운기 시인이 종시를 불러온 연유가 여기에 있음이리라.위 시 속의 화자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보다 높이 있는 ‘가을(하느님)’의 일부이며, 그것보다 아래에 있는 ‘배추’의 일부이다. 고운기 시인에게 ‘배추’는 거대한 몸이고 ‘밭’은 경작지이다. “일찌감치 배추를 뽑고 // 더는 밭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소위 자연의 문법이다. 자연이 크고 단순한 걸음으로 지나갈 때 그동안은 순종하는 농사꾼처럼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으며 “무슨 우주 같은 농사꾼인양 했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시를 짓는 일이든 대학에서 학생을 경영하는 일이든, 밭을 경작하는 일이든 매한가지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현실은 그것 너머의 어떤 것 때문에 존재하므로,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는 결과인 현실 속에서 원인인 궁극을 읽는다. 벌레가 와서 배추를 파먹는 지극히 단순한 풍경 속에서 시인은 배추가 사라지는 “우주”를, 그 순간의 ‘초월’을 그려낸다. “가을”은 그런 초월이 성취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 제목에서도 그는 ‘종시’라고 시를 직조할 때부터 그는 저 하느님의 눈으로 저 아래 지상의 사물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다시 하늘이라는 가을로 되돌린다. 지상의 사물들은 대자연의 구현물이므로 같은 속성을 지닌다. 시인은 지상의 사물과 초월적 자연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다.의식이 자신을 비우고 겸허해질 때 화자는 전유(專有)의 위협에서 벗어난다. 화자는 공포가 사라진 순수의 공간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몸의 언어는 모든 현재를 과거로 만든다. 그것은 자신의 몸이 암이란 병에 먹힌 때처럼“쌈채 농사 끝나고 배추를 심어 구십일도 되기 전 // 벌레에게 먹히기 전”“일찌 감치 뽑아 // 내 입에도 한 잎 집어넣는”다고 했다. 그는 평화로운 안식일을 그렇게 맞고 있다. 시인에게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종점, 이미 겪어본 벌레의 역습으로 인한 투병의 경험이다. 몸의 언어는 채워지지 않는 시작점의 언어, 병마 후의 언어이므로 동시에 유토피아의 언어이다. 그렇게 시인에게 가을이 다시 왔다.“내 입에도 한 잎 집어넣는 일요일 오후, 가을처럼 하느님이 왔다”

2023-11-12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유영희 작가 연일 터져나오는 여당 발 현대사 쟁점에 등 떠밀려 역사를 공부하는 국민이 많을 것 같다. 육사 안에 있던 홍범도 흉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에 자유시 참변을 공부하게 하더니, 백선엽의 친일 기록을 삭제해 간도특설대를 다시 들춰보게 된다. 백선엽은 1943년 간도특설대에 참여해 독립군을 토벌한 행적으로 친일행위자로 이름이 올랐다.백선엽의 친일 행적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만, 이번 논란의 계기는 노무현 대통령 직속으로 설립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와 관련이 있다. 이 위원회는 5년 간의 활동을 마치며 친일반민족행위자 1천6명을 발표했는데 현충원 안장자 중 백선엽을 비롯한 12명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백선엽은 99세 나이로 2020년에 사망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는데, 당시 국가보훈부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 12명의 안장 정보에 모두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라는 문구를 기록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백선엽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시작되어 백선엽 추모식을 챙기더니, 지난 6월에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설립했고, 7월에는 백선엽 안장자 기록에서 이를 삭제했다. 이에 대해 지난 10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유기홍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를 비판하자,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국립묘지에 전과기록을 기재한 사람이 없다”면서, “최초 기재 행위 자체가 법적 근거 없이 이루어졌다”고 대답한 것이다. 알고 보니, 다른 11명의 기록은 삭제하지 않았다.이런 기록이 부당하다면 12명 친일 기록을 다 삭제해야 할 텐데 왜 백선엽 기록만 삭제했는지도 의문이고, 아무리 전 정권의 결정이라고 해도 이미 오래 전 사회적 공감대가 이루어진 조사 결과에 대해 법적 근거가 없다면서 한순간에 뒤집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이런 결정은 국가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문제인데, 이렇게 합의 과정 없이 졸속으로 그것도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처리한 것이다.친일행위자로 판정되었으면서 현충원에 안장된 인물을 둘러싸고 여권에서는 기존 친일 평가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고 나섰고, 민주당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금지하고 현재 친일 묘지는 이전하라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라 접점 찾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역사의식을 가지면, 지금 현실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선택들을 고뇌하고 번민하게 된다”는 어느 언론인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정치인들은 자신이 지금 하는 선택이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갈지 고뇌해야 한다. 윤동주처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보는’ 자아 성찰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국민의 행복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라면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번민해야 한다. 국가경쟁력은 해마다 떨어지고, 하루하루의 삶이 팍팍하기만 한 민초는 정쟁에 갇힌 정치인의 행태가 부끄럽기만 하다.

202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