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 청일전쟁 당시 많은 군사시설이 설치되었던 히로시마 성을 떠난 우리 일행이, 히로시마의 명물 오코노미야키로 점심을 해결하고 향한 곳은 구레시(吳市)였습니다. 히로시마가 근대 일본의 육군도시로 유명한 곳이라면, 구레는 해군도시로 유명한 곳인데요. 히로시마에서 남동쪽으로 20㎞ 떨어져 있는 구레는, 히로시마에서 열차를 타고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해안가 도시입니다. 히로시마에서 구레까지 가는 열차에서 바라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풍경은 너무나 잔잔하여 마치 커다란 호수처럼 보였습니다.
구레가 일본을 대표하는 해군도시로 성장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1889년 해군 진수부(해군 함대의 개장, 수리, 무장, 보급을 담당하는 후방사령부)가 설치되면서부터인데요. 구레에 진수부가 설치된 이유는 파도가 잔잔하고, 수심이 깊으며 입구가 넓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구레는 일본 해군과 함께 성장하였고, 일본에서 첫째가는 조선소가 건설되는 등 군사도시로서 크게 발전하는데요. 특히 구레는 일본이 본격적인 군국주의로 나아가기 시작한 만주사변(1931년) 이후부터 크게 발전합니다. 이후 수많은 함정, 항공기, 항공모함, 잠수함 등을 생산하였는데, 1937년부터 1941년 사이에는 매년 평균 일곱 척의 함정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일본의 최첨단 기술이 모였던 구레를 상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야마토함입니다. 당시 일본이 추구한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의 상징이기도 한 야마토함은 실로 거대한 함포를 가진 큰 전함이었습니다. 야마토함의 길이는 263m이고 높이는 54m에 이르렀으며, 사정거리는 무려 42㎞에 이르렀습니다. 1941년에 완성된 야마토함은 당시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가장 큰 전함이었는데요. 일본이 국운을 걸다시피 하며 극비리에 만들었던 야마토함은 사실 그 존재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해전의 주역은 이미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옮겨가고 있었으니까요. 해전에서의 공격은 이전처럼 함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모를 떠난 비행기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야마토함의 군사적 효용은 그렇게 높을 수가 없었는데요, 더욱 허무한 것은 1945년 4월 7일 오키나와로 이동하던 도중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싸움다운 싸움도 못해보고 ‘불침함(不沈艦) 야마토’는 침몰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야마토함에 대한 일본인들의 향수는 대단한 것이어서, 구레시가 2005년에 건설한 구레시해사역사과학관(吳市海事歴史科学館)의 이름은 아예 ‘야마토 뮤지엄’일 정도입니다. 이 곳에서는 군항으로서 발전해 온 구레의 역사, 구레가 보유했던 제강과 조선 등의 기술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지만, 이곳의 주인공은 단연 야마토여서, 박물관의 현관에 해당하는 곳에는 야마토함을 10분의 1로 축소해 놓은 모형이 방문객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전쟁 당시 구레는 야마토함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표적인 해군도시이자 공업도시이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로 해서 미군의 엄청난 공습을 받기도 했습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의 한 구석에서’는 히로시마에서 구레로 시집간 스즈라는 어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전쟁 당시 구례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이 작품에서 스즈가 주로 하는 일은 전망 좋은 곳에서 바다 위에 떠 있는 전함을 바라보는 것과 공습경보가 울리면 대피호에 숨는 일입니다. 이러한 작품의 상황은 구레의 실제 역사적 상황에 그대로 부합되는 것인데요. 안타깝게도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조카 하루미는 즉사하고, 스즈는 오른손을 잃고 맙니다. 선량하기 이를 데 없는 스즈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가 그림 그리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른손의 상실은 스즈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었을 겁니다. 이외에도 ‘이 세상의 한 구석에서’는 구레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데요. 스즈의 눈을 통해 바라본 구레 사람들은 대부분 해군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아가고, 구레 시내는 당시의 군수경기로 인해 흥청망청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착하고 순박한 스즈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오른손을 잃고 수많은 가족을 잃습니다. 이런 스즈를 통해 바라본 2차 대전이란 죄없는 스즈(일본인)가 누군가(미군)에 의해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아무리 스즈에게 감정이입을 하더라도, 이 전쟁 당시 ‘이 세상의 다른 구석’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에 의해 죽어갔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야마토 뮤지엄을 관람한 우리 일행은, 근처의 다른 해군 관련 전시관도 둘러보았는데요. 히로시마가 어떠한 군사시설도 없는 평화도시로 남은 것과 달리, 구레는 지금도 일본의 대표적인 군항도시로 남아 일본해상자위대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레 답사를 마치고, 히로시마로 돌아오며 저는 미처 들르지 못한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구레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1898-1959)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서, 우장춘은 구레중학교의 5회 졸업생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1857-1903)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도피한 인물이지요. 그가 1903년 고영근에게 암살된 곳도 바로 이곳 구레였으며, 우범선의 묘는 지금도 구례에 남아 있습니다. 우장춘은 말년에 홀로 귀국하여 조국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그런 공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우장춘이 죽기 3일 전에 문화포장을 수여하는데요, 우장춘은 그 훈장을 받고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우장춘의 눈물 속에는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던 자신이 드디어 조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기쁨과 더불어, 아버지 우범선이 자신을 통해 조국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기쁨도 담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