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와 교육, 임상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던 한국 의료시스템이 망가지고 있다. 대규모 의대증원을 둘러싼 의정갈등이 7개월째 지속되면서 환자와 수련병원, 의과대학 모두 패닉상태다. 중환자들은 생명을 위협받고, 병원과 학교를 떠난 전공의와 의대생 3만명은 돌아올 기미가 없다. 지친 의대교수들도 병원을 떠나고 있다. 입원·외래환자가 반토막난 수련병원들은 경영난으로 간호사 채용을 못하고 있다. 의대생, 전공의, 전문의로 이어지는 의사배출 시스템이 붕괴 직전인 시점에 경찰은 박단 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을 조사하기 위해 출석요구서까지 보내 의정갈등을 키우고 있다.
지금 의료시스템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전공의들을 병원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현재 전공의들은 의대증원 철회 없이는 병원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고수하고 있다. ‘의사들을 악마화 한다’면서 정부에 대한 감정도 지극히 좋지 않은 상태다. 수련병원들이 지난달 하반기 전공의 모집을 마감했지만, 지원자가 거의 없었다. 미복귀 전공의 대다수는 미용성형을 주로 하는 병의원, 요양병원 등의 일반의로 취업하거나 미국 의사 면허 취득 등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련병원에서 전공의가 사라지면 전문의와 의대교수들도 배출될 수 없다. 내년 전문의 배출이 평소의 10분의 1 정도로 줄어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가 전공의에게 의존했던 수련병원을 전문의 중심으로 전환한다는 대책을 발표했지만, 의사 배출이 꽉 막힌 상황에서 실효성이 의문이다. 경북대병원의 경우, 올 상반기에만 의대교수 21명이 진료와 업무에 지쳐 사직했다.
전국 의과대학 재학생들의 수업거부가 몰고 올 사회적 파장도 만만찮다. 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교육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22일 기준 전국 40개 의대 재학생 1만8217명 가운데 출석하고 있는 학생은 495명에 불과하다. 내년 1학기까지 의대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유급이 확정된다면, 2025학년도에는 현재 1학년과 신규 입학생(7500명)이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들은 동시에 진급하기 때문에 6년 내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다. 현 의대 교육여건상 수업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이와함께 의대 본과 4학년들이 의사 국가시험 지원을 계속 거부하게 되면, 내년에는 신규의사도 배출되지 않는다. 최근 마감한 의사 국시 실기시험 접수자는 364명으로 지난해(3212명)의 11.3%에 불과하다.
국가 의료시스템 마비현상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전공의에 대해 “기계적으로 법을 집행할 것”이라며 강경방침을 고집하고 있다. 의료계에선 “내년도 의대 신입생이 전공의가 되는 2031년이 돼야 의료공백 사태가 정상화될 수 있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 문제는 현 정부입장으로선 전공의 복귀를 위해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는 점이다. 만약 의사를 양성하는 국가 의료시스템이 지금처럼 서서히 붕괴돼 중환자들을 치료할 의사가 급격히 줄어든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