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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단정하고 아름다운 배웅

두루미 날아간다지인의 모친상에조의금 오만 원 담아 두루미 날아간다늦가을 슬픈 표정은상가에 다 모이고발인은 내일모레장지는 하늘공원목깃이 새까매진 다저녁 산마루 위울면서 조문을 가는희고 빈 봉투 하나―고영민,‘부의 봉투’(‘가히’ 가을호, 2023)여기 늦가을 슬픈 표정이 상가에 다 모여 있다. 대저 “생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가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 존재의 소멸은 참으로 사람을 유정(有情)하게 한다. 상가에 모인 조문객들의 슬픈 울음이 내 안에서도 일어나는 듯하다. 이 시가 그대로 내 가슴속에 들어와 어쩌면 내가 그 실경(實景) 속의 주인공이나 된 것 같다. 고영민(1968~) 시인의 ‘조의 봉투’가 그리는 풍경이 그렇다.이 시는 한 마리의 두루미로 시작된다. 죽음의 슬픔을 조문의 풍경으로 그려내는데 그 특정한 경험을 두루미가 견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두루미일까? 두루미는 우리나라 휴전선 언저리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다시 러시아에 있는 아무르강으로 떠나는 철새다. 죽음이 거느리는 의미의 본질을 제목인 ‘조의 봉투’가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실제 두루미의 모습은 몸뚱이가 희고 목덜미와 다리는 검고, 날개에도 검은 깃털이 있다. 시에서 “다저녁 산마루”를 “목깃이 새까매진”으로 묘사하며 사실적 이미지를 심상의 풍경으로 병치하고 있다. 여기서 ‘새까매진 목깃’이란 조문 시 매는 검은색 넥타이를 비유한다.이 시에서 ‘빈 봉투’ ‘두루미’는 같은 자격임을 알 수 있다. 제목 ‘조의 봉투’라는 한 대상이 다른 대상 ‘두루미’ ‘화자’라는 대상들과 포개지며 의미론적 자질을 성공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부고장을 받고 “조문을 가는” 두루미라는 존재는 ‘조의 봉투’이고 동시에 조문을 하는 화자 자신을 상징하기에 이 대상들이 주는 효과는 그림처럼 선명하다. 또한 “조의금 오만 원” “발인은 내일모레” “장지는 하늘공원”이 주는 구체성은 시적 은유와 현실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게 한다. 우리가 아는 고영민 시인이 주는 시의 질감이 그렇다. 일상의 진정성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는 방식은 어느 때나 편안히 등을 기댈 수 있게 한다. 이희정 시인 하지만 고영민 시인에게 이 시는 색다른 시편일 수 있겠다. ‘문학의 경계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가’라는 시험지에 응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등단 장르가 아닌 정형시의 형식에 맞추어 쓰였기 때문이다. 정형시를 전문으로 쓰지 않는 시인이 처음으로 썼다고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닐 테지만, 장르의 특성이 주는 작법은 그 방식이 사뭇 다르기도 하기에 시인에게 있어 이 작품은 조금 주의가 필요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혹자는 자유시는 펼쳐서 그리는 회화에 가깝고 정형시는 최대한 깎아내는 조각에 가깝다고도 그 차별성을 설명했다. 한 시인이 오랫동안 체화되었던 방식을 벗어나 다른 방식을 대면했을 때 오는 당혹감이 있었을 법하다. 형식 면에서도 지켜야 하는 글자 수와 제한된 보법이 있기에. 그럼에도, 시인은 출제자의 의도를 탁월한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현대정형시는 예전의 고시조와는 다르며 대부분 감상자가 느끼는 차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화와 서양화가 변주되고 있는 것처럼.요약하면, 시의 장면은 두루미로 시작해서 희고 빈 봉투로 그림처럼 마무리된다. 세상을 떠나는 망자에게 바치는 마지막 인사가 이처럼 단정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가 택한 두루미는 피상적인 오만 원의 조의금을 담고 있지만, 가없이 단아한 인사로 배웅하고 있다. 그래서 한 생의 무게가 그 슬픔보다 존귀하게 느껴진다.“울면서 조문을 가는 희고 빈 봉투 하나”

2023-11-26

포항역은 정녕 사라졌는가?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포항역은 지금 어디 있는가?포항이 어촌에서 해병대 기지가 설치되고 군인들이 오가고 포항제철로 철강도시가 되고 다시 포스텍을 기반으로 첨단과학의 도시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대로 함께 한곳이 포항역이다. 필자가 포스텍의 정년 퇴임을 하기전인 7년 전 하루아침에 폭파되어 사라진 포항 역사를 기억하면 잠이 안 올 정도로 지금도 괴롭다.해외 출장을 다녀온 후 그 정겨운 역이 사라지고 도로가 휑하니 휑하니 뚫린 걸 보았다. 더구나 고풍 건물이 즐비한 유럽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기에 그 충격은 엄청나게 다가왔다. 포항역사가 보존이 안되고 길을 내기 위해 부순다는 걸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었기에 나의 두 눈을 의심했다. 포항의 눈물과 기쁨, 그리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포항역이었다. 일제시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해 해방과 함께 건축된 포항역사는 거의 100년 가까운 포항의 산증인이다.그러나 순식간에 포항역은 사라졌다. 폐철도 공원 조성 시 축소된 모형을 건립한다고 시장은 약속했었는데 지금 축소된 모형이라도 만들어졌는지? 설사 만들어진들 그런 모형이 감동을 줄 수 있을까?시장을 찾아가 물었다 “왜 포항역사를 부순 것인가?” 답은 간단했다 “역사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가치란 무엇인가? 건축양식이 아주 특이해야만 역사적 가치를 가져야만 하는가? 포항의 주민들의 수십년 손때가 묻은 문고리 하나도 소중하다. 그 역사가 가진 수없는 사연과 눈물겨운 그리고 즐거운 추억들이 모두 소중한 것이다.왜 한국은 역사를 무시하고 부수고 없애는 것일까?옛 건물들과 유적지들은 사라지고 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 늘 지나다니곤 했던 종로2가에 있던,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은 화신백화점 건물도 사라졌다. 일제시대에 건축되어 옛 건축미를 가지고 있던 그곳은 초현대 건물로 바뀌었다. 중앙청 건물은 일제의 잔재라고 하여 폭파시키고 해체하였다. 단성사 국도극장 등 보존가치가 높은 건물들이 이젠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유럽의 도시들, 파리나 런던, 바르셀로나나 리스본 등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으로 형성되어 있다. 옛 건물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그러한 역사적 건물들은 관광자원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자부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치욕의 역사적 건물, 부서진 역사적 건물도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후세들에게 교훈으로 삼고 있다. 역사와 전통이 마구잡이로 파괴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다. 포항의 역사와 포항시민의 애환이 깃든 역사적 건물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는 데 대해 옛 건물의 역사적 의미를 되찾고 미래의 소중한 유산으로 보존하기 위한 한 방안을 세워야 하고 역사적 건물들은 복원되어야 한다. 지역을 상징하는 건물들, 포항역사, 청룡회관, 포항 문화원, 옛 포항시청사들은 보존되어 관광객을 충분히 끌 수 있는 자원이 되었을 것이다.구룡포에 있는 일본인 거리는 옛 건물들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이같은 유산들이 시민들의 의견 수렴을 충분히 하지 않은채 공무원들의 판단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시민들의 향수와 자긍심도 훼손되고 있다. 시민들의 삶과 궤적을 함께 해온 유서깊은 건물들이 지역사회와 한마디 상의 없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진정한 역사의식과 충분한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 지역의 역사성이 깃든 건물 등 유·무형 자원에 대한 아카이브(기록보관소)도 구축해 이들 자원에 대한 체계적인 보존과 홍보가 이뤄져야 한다. 역사적 유물들을 철거하기 전에 ‘지역문화유산보존심의위원회’같은 별도기구를 두고 시민들과 합의해 결정해야 한다. 80년대 초 일본의 역사도시 교토(京都)의 철도역 복합개발을 두고 보존과 개발이라는 가치가 충돌한 예가 있었다. 교토부는 10년간의 지루한 공방 끝에 개발로 결정했고, 그 과정에서 역사보존과 개발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논의가 이뤄진 사례가 있다.현대의 첨단정보통신사회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가 미래의 변화에 얼마나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에 우리의 생존이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계획도 중요하고 경제적 효용도 가치가 있겠지만 미래도시에서의 삶과 도시의 모습도 함께 그려보는 지혜가 우리들 모두에게 절실히 요구된다.거창한 문화재 보존이 아니더라도 우리 시만의 축적된 도시의 역사, 이야기, 기억이 스민 곳이라면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민과 전문가들이 모여 ‘역사유물 보존 및 회복 시민위원회’같은 것을 만들어 역사적 유물들의 보존방안을 포항시에 요구해야 한다.사라진 포항역사를 대신하여 뚫린 그 길로 정말로 차를 몰고 가기 싫다. 포항에 들를 때면 그 도로에서 눈길을 돌려 우회 길로 달리는 필자의 심정은 아마 지금 포항의 역사를 그리워하는 시민들의 심정과 같을 것 같았다.찻집으로 단장한 옛 포항역사에서 차 한잔을 마시면서 코스모스 하늘 거리는 옛 철길을 걷는 그런 낭만을 포항시는 시민으로부터 앗아갔다.포항역은 정녕 사라졌는가? 나의 가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역사를 잃어버린 포항시민들의 눈물일 것이다.

2023-11-26

대한민국 도전과 혁신의 Pioneer(파이오니어), 포항

김진홍 포항지역학연구회 연구위원 다양한 형태의 사건, 운동 등 사회적 현상에는 늘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그 실체는 시대적 조류에 흐르는 정치·사상·철학적 가치관 등 정신적 에너지다.□ 2·28 정신의 DNA와 경북인의 기질2·28 민주운동에는 어떤 에너지가 있었을까. 경북인의 DNA, 기질 속 정신에너지였을 것이다. 과거 대구는 경상북도에 속했다. 대구인=경북인이며 그 기질과 DNA는 같다. 경북인의 복합적인 기질은 역사적 사건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 준다.고대 포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은 ‘개척정신, 선구 정신’을, 신라의 ‘화랑도’는 호국정신을, 조선시대에는 선비와 자비 정신을, 임진왜란 때는 조선 최초의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를 개발하여 나라를 지킨 창의 정신이 있었다.구한말 의병들은 불굴의 저항정신을, 국채보상운동에서는 민족자결과 독립 정신을, 6·25 전쟁 당시 경북인의 DNA에는 호국, 화랑정신의 계승을 확인하였다. 전후 재건 과정에서도 선도성과 개척정신을 보였고, 원전, 방폐장, 사드 배치 등을 수용한 ‘공익, 대의 정신’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경북인의 복합적인 정신, 철학, 기질이 융합되어 일어난 사회 현상의 하나가 2·28 민주운동이었다.□ 2·28 이전 포항의 2·28 DNA 스펙트럼포항이 대한민국의 도전과 혁신의 파이오니어라는 근거로 가장 오래된 역사적 사건은 개척, 도전정신으로 고대 ‘왜’로 건너가 ‘신’이 된 연오랑의 이야기다. 현대 일본에는 연오랑이 타고 왔다는 돌배(岩船)가 많고, 연오랑 즉 ‘스사노오노미고토(素6214嗚尊)’를 기리는 신사도 많다.2·28의 170년 전에는 자비심으로 구휼미를 공급하는 ‘포항창진’을 운영하였다. 1808년 영국 지도에 호미곶이 표기될 정도로 포항은 지경학, 지정학적 요충지였기에 조선 후기에는 ‘포항진’이 설치된 적도 있었다.2·28 50년 산남의진의 의병이 일제에 저항한 중심지도 포항이었다. 특히 2·28 불과 10년 전 6·25전쟁, 사회·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이 적화통일을 위해 동족을 학살하자 자유 대한과 국민을 지키려 항전한 그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포항의 학도병들이 나섰다. 그때의 산증인들이 지금 보훈단체에 있다.당연히 그분들의 정치이념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우익, 우파’다. 그분들의 정책 성향은 개혁을 꺼리는 ‘보수’가 아니라, ‘개혁, 진보, 혁신’ 그 자체다. 그러하기에 안전한 집을 나와 총을 잡고 북한군에 맞선 것이다.정치이념, 사상에 우리 헌법은 우익만 인정한다. 대구, 경북, 포항이 ‘보수’라는 말은 왜곡된 표현이다. ‘과감한 개혁, 도전, 혁신적인’ 정책 성향을 지녔고, 피로 지킨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치이념이 ‘우파, 우익인 본거지’가 올바른 표현이다. 포항이 호국도시로 불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포항인, 경북인의 정책 성향가운데 ‘진보와 혁신과 개혁과 도전’ 성향은 ‘보수’ 성향보다 더 강하다. 그러한 개혁, 진보의 정책성향을 가졌기에 포항은 수많은 최초의 기록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10년 뒤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학생 민주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과 10년 선배 학도병들이 피로 지켜낸 자유 대한민국이 각종 부패와 비리로 망치는 이승만 독재정권을 용납할 수 있었겠는가.포항은 2·28 DNA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한강의 기적’을 선도하였다. 1971년 9월 17일 고(故) 박정희 대통령과 전국 도·시군의 장들이 문성리 새마을 현장에 모두 모였다. “전국 시장 군수는 문성동과 같은 새마을을 만들라”라는 지시가 나왔다. 포항이 새마을을 선도한 것이다. 포항종합제철 착공 당시 세계가 어렵다고 했지만 1973년 한국 최초의 일관제철소를 완공시켰다.□ 2·28정신을 계승한 포항의 미래상향후 포항은 2·28정신을 계승하며 지방시대, 환동해 시대도 선도할 것이다. 포항은 이미 많은 최초 기록으로 입증하였다.1914년 경북 최초 자동차교통, 1917년 한반도 최초의 포도원, 1928년 남한 최초 연어 인공부화, 1931년 동해안 최초 어선경기, 1932년 조선 최초 어류생태조사, 1950년 한반도 최초 미군상륙작전. 1968년 국내 최초 기업연수원, 1977년 국내 최초 대학생요트대회, 1990년 국내 최초 축구전용구장, 1995년 세계 5번째 3세대 방사광가속기, 1999년 국내 최초 지능로봇대회, 2016년 세계 3번째 4세대 가속기, 2017년 국내 지자체 최초 여성통계, 2022년 국내 최초 세계등대문화유산 선정 등. 대한민국의 도전과 혁신을 선도한 파이오니어 포항의 증명서다.1950년대 청어 등 수산자원으로 로컬을, 1990년대까지 산업의 ‘쌀’로 내셔널을, 2010년대까지 첨단과학기술로 글로벌을 극대화한 포항은 이제 글로컬의 극대화를 위해 달릴 것이다.

2023-11-26

인터넷 정치참여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내년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이 ‘2030’세대를 겨냥해서 만든 현수막 문구 중 하나다. 그 현수막이 공개되자 당 안팎에서 ‘청년비하’라는 비판이 잇달았다. 비이재명계 모임인 ‘원칙과 상식’은 “당의 설명대로라면 민주당은 청년 세대를 정치와 경제에 무지하고, 개인의 안위만 생각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라는 논평을 내 놓았고, 민주당 청년당원 의견그룹 ‘파동’은 “감 없는 민주당, 청년세대가 바보인가. 근래 민주당의 메시지 가운데 최악이며, 저질”이라고 비난했다. 국민의힘 신주호 상근부대변인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젊은 세대와 함께 고민하고 아픔을 나눌 생각도, 청년을 위한 정책과 대안도 없이 무시의 의미가 담긴 문구”라고 비판했다.어떤 경로로 그런 문구가 채택되었는지 모르지만, 다수의 2030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불만이라는 전제에서 나온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젊은이들의 주의를 끌고 환심을 사보려는 얄팍한 계산이 빤히 보이는 처사다. 젊은이들이 정치를 모르거나 무관심한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고학력의 젊은 세대가 적어도 국가 정체성이 무엇이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최소한의 양식과 관심은 가져야 이제 겨우 당도한 선진국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잘 살고 싶은 것이 젊은이들의 바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도 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 해 주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세대인 것이다. 물론 젊은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모든 국민이 내가 바라는 나라, 내가 원하는 사회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최근 몇 십 년 동안 인류는 실로 개벽이라 할 만큼 엄청난 삶의 변화를 겪고 있다. 인터넷의 상용화로 인류는 이제 새로운 문명, 새로운 역사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의 양상도 변할 수밖에 없다. 구태의연한 제도나 사고에 묶여 있어서는 선도적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반 국민들의 정치참여도 그중 하나다. 상당수 국민들이 이미 전과는 다른 형태로 정치에 가담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인터넷을 통한 정치참여다. 이제는 선거 때 투표권이나 행사하는 소극적 정치참여의 시대가 아닌 것이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각종 언론매체들에 접속해서 ‘좋아요’를 누르는 것에서부터 부지런히 기사를 퍼 나르거나 댓글을 다는 것 등의 적극적인 의사표현으로 실시간 여론 형성에 가담을 하고 있다.지금은 여론정치 시대다. 여론에 따라 정치의 향방이 달라진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여론몰이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언론매체와 인터넷을 통한 가짜뉴스 유포나 여론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자칫하면 국정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가 열어 놓은 새로운 가능성을 최대한 펼쳐가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장치와 함께 국민 각자의 각성과 의지가 필요한 이유다.

2023-11-23

동해선 무궁화호 열차의 꿈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붉은 가을의 막바지, 푸른 바다 동해안의 블루로드 산길을 걷고 싶어 영덕행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포항역에 가서 열차 시간표를 보니 하루 5회 왕복, 요금은 어른 2천600원, 어린이는 반값이고 경로는 1천800원이다. 영덕까지 4개 역 모두 승차요금은 같다.플랫폼에서 만난 디젤 전동열차는 좀 낡아 보여도 오히려 옛날 완행열차의 추억이 되살아 올라 친근감이 든다. 2018년 1월에 개통되고 2개월 후 타봤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여 열차 내로 들어가니 승객은 적고 좌석 사이가 넓어 편안히 앉았다. 곧 출발해 ‘경북의 바다 역’- 월포, 장사, 강구를 지나는데 시골 역이라 승객은 거의 없고, 플랫폼도 좁고 여러 개의 터널도 지난다. 이따금 트이는 바다를 보며 40여 분을 달려 영덕역에 도착해 보니 역 건물이 홀로 잘난 듯 현대적이다.역 바로 옆에 뚫린 작은 시멘트 터널 두 개를 지나 안내도를 따라 고불봉(高不峰·235m)으로 오른다. 차가운 바람이 살살 부는 산길을 오르며 빨간 망개나무 열매도 만져보며 정자가 있는 산마루에 선다. 영덕읍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이곳, 동해에 보름달이 떠서 봉우리에 걸쳐지면 두 개의 달이 보인다는 일명 망월봉에서 목을 축인다. 동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북쪽에는 풍차들이 돌고 있는 이 봉우리는 경치가 아름다워 유배를 온 고산 윤선도 선생이 쓴 시가 정자 앞에 놓여있다. 전망 좋은 고개마다 쉬어가며 나무 계단도 오르며 숲을 지나노라면 좁은 산길에 소복이 떨어져 있는 도토리들…. 이 산에는 다람쥐도 청설모도 없나 보다. 금진 구름다리를 건너 강구항이 보일 때쯤 잠시 쉬어가는 산막의 ‘숲속 도서관’에는 열댓 권의 책이 꽂혀있다. 축구장이 있는 생활체육공원을 내려다보며 산길 입구로 내려오니 ‘바다를 꿈꾸는 산길’ 10㎞를 4시간쯤 걸었다. 대게의 맛내음이 물씬 풍기는 항구에 오니 시장끼가 돌아 작은 식당에 들어가서 물가자미회에 해물탕 시켜놓고 일행들과 하산주를 한 잔 했다.해그름의 강구에서 포항행 직행버스를 타려다가 열차보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차비도 훨씬 비싸서 무궁화호를 타려고 역을 찾았는데, 20여 분이나 걸었다. 한적한 역에 올라가니 매표 창구는 운영하지 않고 자동발매기를 이용하던가 승차 후 승무원에게 구입하란다. 한참을 기다려 탄 야간열차는 여행의 끝맺음을 느긋하게 한다.동해중부선의 시작인 포항역을 나오며 생각해 본다. 2020년 12월에 착공한 영덕에서 삼척까지 2단계 사업은 당초에 단선 비전철로 계획되었으나 2019년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로 선정되어 강원 동해까지 172㎞ 전 구간을 전철화로 바뀌었고 현재의 철도 시스템 및 통신공사가 마무리되는 2025년 1월에 완공 예정이다. 전철이 연결되면 철도이용 서비스 확대로 동해안으로의 접근성이 향상되어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부한 영덕 지방의 관광객 증가와 더불어 지역 균형발전을 기대해 본다.그리고 강원 고성까지 백두대간 등줄기 종단 철도가 완성되면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금강산을 지나 북으로 연결되고 함경도를 거쳐 중국과 러시아까지 연결되는 유라시아 횡단 철길을 꿈꾸어 본다.

2023-11-23

김장철이 돌아왔다

우정구 논설위원 과거에는 입동(立冬)을 기준으로 김장담그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기온이 올라가면서 요즘은 12월 초까지도 김장을 담그는 가정이 많다.겨울에 담아 이듬해 봄까지 먹는 김장김치는 담그는 과정에 손이 많이 가 매우 번거롭다. 배추와 무, 고춧가루, 젓갈 등 어느 하나도 들어가지 않으면 제맛을 낼 수가 없다. 과거 우리 조상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집집마다 돌아가며 김장을 담그는 품앗이 행사도 벌였다.보통은 봄까지 김장을 먹으나 지역에 따라 여름철까지 먹는 경우도 있다. 배추와 무를 거의 양념 없이 소금에만 절여 음지의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이듬해 3월부터 먹기 시작한다. 이를 짠지형 김치라 불렀다.유네스코는 우리나라 김장 담그는 풍속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판소리, 종묘제례, 강강수월래, 아리랑 등과 함께 한국의 독창적 문화임을 세계가 인증한 것이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민의 90%가 아직도 김치를 담가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한국인은 냉장고 속 김치만 파먹어도 3년은 버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에게 김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가격 전문조사기관인 한국물가정보는 올해 4인가족 김장비용을 30만원대로 예상했다. 20포기 기준으로 재래시장은 30만1천원, 대형마트는 36만6천원 정도다. 작년보다 조금 내렸거나 비슷한 수준이다. 김장담는 번거로움으로 예년보다 김장족이 줄고 있다고 하나 여전히 김장을 담그는 일은 명절만큼이나 우리에겐 소중한 일이다.김장을 다 담아놓고 가족끼리 둘러앉아 삶은 돼지고기 등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추억의 행사가 바로 지금부터 시작된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1-23

윤 대통령, 무소의 뿔처럼 가라

홍석봉 대구지사장 윤석열 대통령이 지지율 덫에 빠졌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지금까지 30%대 지지율에 갇힌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낮은 지지율 탓에 국정 운영의 동력을 찾기가 쉽잖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치와 정책 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지율이 높으면 정책을 뜻대로 추진할 수 있다, 반면 낮으면 마음대로 못한다. 게다가 거대야당은 머릿수로 밀어붙이며 윤 정부의 각종 정책에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서슴없이 민감한 문제에 달려들고 있다. 외국 언론마저 상식과 반대로 가는 윤 대통령을 주목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디플로맷’은 ‘윤 대통령이 보편적인 통념과 거꾸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이 30% 대의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 한국의 병폐를 해결하겠다며 나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높은 지지율과 여당이 과반을 넘어 안정적인 정국 운영이 가능했는데도 이를 피해간 문재인 전 대통령과 비교했다.윤 대통령이 잘 못했다간 본전도 찾기 어려운 국민연금, 의료, 교육 등 3대 국정과제를 손보겠다고 덤벼들고 있다. 3대 국정과제는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문제들이고 후손들을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그런데도 지난 정권에선 이를 방치했다. 건드려서 득 볼 일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여러 집단의 이해가 난마 같이 얽혀있고 이해 조정이 쉽잖다. 잘못 건드렸다간 욕먹을 일 밖에는 없다. 정치적 비용과 후폭풍이 만만찮아 역대 대통령들도 섣불리 다룰 수 없다고 판단, 후임자들에게 떠넘긴 뜨거운 감자였다. 민감한 이슈는 현상유지가 가장 손쉬운 처방이다. 물론 후손들이야 죽건 말건 상관않는다면 말이다. 문제는 미룰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꼬여 해결에 노력과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는 점이다.윤 대통령 3대 개혁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인기는 없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했다. 의대 정원 확대도 대통령이 밀어붙이고 여론이 뒤를 받쳐주면서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결국 힘이 있나, 없나가 아닌 의지의 문제였다. 의사집단의 강경한 반발도 숙지는 분위기다. 더이상 반대만을 위한 반대는 어려운 상황이다. 여론을 등에 업은 대통령의 저돌적인 밀어붙이기에 강경 노조와 의사집단이 고개 숙이고 있는 것이다.윤 대통령은 선거를 불과 4개월 여 앞두고도 표 떨어질만한 문제를 자꾸 건드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이 원하고 방향이 맞다면 윤 대통령의 저돌적인 정책 추진이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 말고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유희나 오락 혹은 쾌락에 젖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숫타니파타’라는 경전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다.윤 대통령의 거침 없는 행보에 많은 국민들이 박수를 보낸다. 국민만 보고 무소의 뿔처럼 가라.

2023-11-23

수능 다음 교육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지나갔다, 수능이. 한 해 내내 속을 태웠던 그날이 흘러간 지 벌써 일주일이다. 수험생에겐 1년이 아니라 살아온 평생을 깎아 넣었을 그 하루를 살아낸 지금, 당신의 소감은 어떠신가. 고3 교실의 오늘 풍경은 어떨 것인지 궁금하다. 대학입시에 모든 걸 걸은 듯 보이는 우리 교육의 모습은 처연하다. 공교육의 목표가 대입은 아니라지만 현실은 언제나 같은 자리가 아니었을까.성패의 비결이 그날의 시험으로부터였음을 아는 청년들은 수능을 여전히 무겁게 만난다. 수험생뿐인가. 자녀들의 장래가 걸린 수능 날에는 부모와 온 가족이 비상이다. 고3 담임교사와 학교도 긴장하긴 매한가지. 그런 하루를 보낸 지금, 모두들 어떤 날들을 보내고 있을까.교육의 진정한 모습을 발휘할 시간이다. 수능의 긴장에서 풀려난 오늘, 20대를 눈앞에 둔 청년들이 이제야말로 미래를 생각할 시간이 아닌가.시험과 점수의 압박을 벗은 오늘, 살아갈 내일을 상상하며 비전을 세우고 꿈을 만들어야 한다. 세상에 눈을 뜨고 이웃을 살피기 시작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어깨를 펴고 어른이 될 준비에 나서야 한다. 학교와 교실에 묶였던 시선을 넓혀야 하고, 남들과 함께 사는 어른의 일상을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 체험의 폭을 확장하고 만남의 범위도 넓혀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비로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품을 단초를 깨우쳐야 한다. 공교육의 틀을 벗어나 스스로 공부할 준비에 나서야 한다. 읽고 묻고 의심하고 토론하는 환경에 익숙해야 하고, 정답을 찾기 보다 질문을 지어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수능이 지나간 오늘, 수험생 개인뿐 아니라 학교와 가족은 자녀의 미래에 시동을 걸 출발점에 선다. 고교졸업과 대학입학이 형식적인 과정이지만, 준비를 위한 태도의 조율은 지금부터 작동해야 한다. 풀어진 긴장에 익숙해진 나머지 준비없이 대학생활로 접어들지 말아야 한다.온라인과 SNS가 대세라지만, 지식과 트렌드의 핵심은 여전히 책 속에 있다. 교과서를 벗어나 폭넓은 독서에 나서야 한다. 지식인 선배들이 먼저 깨우친 발견과 생각 가운데 내게 필요한 가닥을 얼른 챙겨 익혀야 한다. 주변의 국내 소식도 알아야 하지만 이제는 멀리 나라 밖 환경에도 다가가야 한다. 가까운 이슈들도 챙겨야 하지만, 기후와 인구 등 거대담론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수능 다음 교육’에 관하여 우리 학교는 잘 준비하고 있을까. 통합교과와 생활교육에 교육계가 분발해야 한다. 청년들이 미래환경에 익숙하도록 이끄는 일을 학교가 맡아야 한다.수능이 지났다고 교육이 할 일을 다한 게 절대로 아니다. 공교육이 누려야 할 ‘유종의 미’를 ‘수능 다음 교육’으로 거두어야 한다. 자칫 풀어졌을 학생들의 긴장을 흥미로운 주제와 관심으로 다시 잡아내야 한다. 학생들이 학교에 머무는 마지막 날까지 교사의 할 일이 남아있어야 한다.수능과 함께 모든 고삐를 던져버리는 실수는 학생도 교사도 피해야 한다. 수능이 지나가도 교육은 자리를 지켜야 한다.

2023-11-22

‘까치밥’과 ‘횡재세’

홍석봉 대구지사장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서울 조카아이들이여/그 까치밥 따지 말라/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 주는/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송수권의 ‘까치밥’이라는 시의 일부다.인정이 살아 있는 고향 동네에 겨울 철 굶주린 새들을 위해 남겨놓은 홍시를 따는 아이들의 동심과 매정함을 빗대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풍습을 아쉬워하며 쓴 글이다.초겨울 한파가 닥쳤다. 가로수는 이파리를 모두 떨군 채 가지만 앙상하다. 시골집 한쪽 모퉁이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 몇 개가 바람에 춤을 춘다. 까치밥은 ‘감나무 열매 중 따지 않고 까치 따위의 날짐승이 먹으라고 남겨 놓은 감’을 뜻한다. 나는 새까지 배려한 조상들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말이다. 하지만 차츰 잊혀져가는 말이 됐다.정치권에 ‘횡재세’ 논란이 한창이다. 횡재세란 뜻밖의 대외 변수 등으로 가만히 앉아 추가 이익을 거둔 기업에 물리는 세금을 말한다.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번 돈은 사회에 되돌려줘야 한다는 취지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막대한 수익을 낸 석유기업들을 경고하며 부각된 말이다. 국내에선 은행이 타깃이 됐다. 5대 은행의 작년 이자이익은 36조2천억원으로 2년 전보다 36%가량 증가했다. 작년 상여금 총액도 20%가량 늘었다. 경기 침체 속에 은행만 이자이익으로 배를 불렸으니 민심이 좋을 리가 없다. 여야간 이견이 있지만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모양새다. 은행들이 ‘까치밥’의 의미를 되새기고 고통 분담에 동참해야할 터이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1-22

백일홍 가을걷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뭐 대단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니 가을걷이라 할 것은 없다. 풀이 자라도록 버려두기엔 넓은 터가 아까웠다. 온갖 풀들은 일주일만 눈길을 안 주면 기세등등 자란다. 풀을 이기기엔 꽃만 한 게 없다. 또 잘만 자라주면 더없이 아름다울 것. 봄날 며칠을 고생하며 풀과 씨름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백일홍꽃씨를 잔뜩 흩뿌렸었다. 6월 초부터 꽃 피우기 시작한 백일홍은 10월 말까지 일록달록 피어있었다. 100일 붉게 피는 꽃이라 백일홍일 텐데 거의 다섯 달을 핀 셈이다.백일홍 덕분에 지난 여름이 참 즐거웠다. 매주 바뀌는 꽃밭 풍경은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사진을 찍어 여기저기 퍼나르며 마구 자랑을 해댔다. 찍은 꽃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바꾸었다. 첫날 핀 한 송이 꽃, 일주일 지난 후 제법 어우러진 꽃밭, 동네 모든 나비가 우리집에 온 듯 나비에게 아낌없이 꿀물을 내어주는 꽃, 비오는 날 빗소리에 취해 흐드러진 꽃 등등의 사진을 본 친척과 지인들이 찬탄하며 답장을 주었다.‘꽃멍하러 오세요.’ 꽃밭으로의 초대 러시가 시작되었다. 서울의 손녀들이 왔다. 대구의 손주들과 합해, 꽃밭에서 나비를 좇으며 놀았다. 조용하던 육신사 골목이 청량한 애들 소리에 모처럼 시끌시끌해졌다. 꽃이 좋다는 후배는 꽃멍만 했다. 한여름 태풍을 뚫고 오신 지인들은 하룻밤을 같이 지내며 회포를 풀었다. 백일홍꽃밭을 배경으로 그네에 앉아 온갖 포즈의 사진을 따로 또 같이 찍었다. SNS의 프로필 사진을 바꾼 분도 있었다. 90이 넘으신 외삼촌 내외도 모처럼 모실 수 있었던 것도 백일홍 덕분이었다. 백일홍이 저렇게 흐드러진 것은 80평생 처음 본다며 감탄하시는 청도의 어르신을 모시고 왔으며 꽃구경하러 집에 들어오세요. 팻말도 붙여놓았다.지난 10월, 퇴직 후로는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학회에 모처럼 참가했다. 학회 후 간담회에서 이런저런 얘기 중에 하빈 묘골이 친정이라는 교수님이 말했다. “지난 여름 모처럼 친정엘 갔는데 꽃밭을 예쁘게 가꾼 집이 있는 거예요. 너무 예뻐서 주인이 안 계시는 걸 알면서도 마당 안으로 들어가서 백일홍 구경을 실컷 했답니다.” 내가 주인장이며 내가 가꾼 꽃밭이라는 대답에 기이한 인연도 있다며 크게 웃은 일도 있었다.올해의 꽃은 단연 백일홍. 앞으론 이 꽃 저 꽃 고민 말자. 이제 우리 집을 백일홍 꽃집으로 하자. 남편과 합의했다. 그러려면 꽃씨를 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주말마다 꽃씨를 채취했다. 시들어 마른 꽃씨를 가위로 따 모았다. 그때까지도 색을 버리지 않은 꽃은 그대로 두었다. 갑자기 추위가 닥치자 조바심이 났다. 과연 꽃들은 다 졌고 누렇게 변해있었다. 남편은 대궁이를 뽑아 눕히고 난 쭈그리고 앉아 꽃씨를 땄다. 그렇게 하루종일 백일홍 가을걷이를 했다. 산처럼 쌓인 대궁이를 어쩌나 고민하다가 마당 한켠에 모아 발효액을 넣어 비닐을 덮어 둘 참이다. 내년에 퇴비로 쓸 수 있을까 해서다. 어쩌면 그 두엄더미에서도 백일홍이 피지 않을까 고운 상상을 해본다.

2023-11-22

비염관리와 치료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코 속 점막에 염증이 생겨서 콧물 재채기 콧물 등이 과도하게 발생해 고생하는 것을 비염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비염이라고 하면 알러지성 비염을 뜻하며 만성적이고 잘 낫지 않는다. 많은 수가 축농증으로 진행된다. 감기와 같이 오는 경우가 있고 감기 끝에 낫지 않는 경우, 감기와 무관하게 급성으로 비염이 오는 경우가 있으나 이런 경우 보통 치료는 쉽게 된다.급성으로 오는 비염은 한의원에서도 감기에 준해 한방 감기약을 처방한다. 계지탕이나 갈근탕 마황탕 등의 초기 감기약을 쓰고 일반적인 감기 치료의 기간과 비슷하게 낫는다. 감기 끝에 콧물이나 코막힘이 한 두달 안 나아서 고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한의원에 가서 처방을 받는 것이 낫다. 이런 경우 병원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데 대부분 환자의 면역이 떨어져서 그렇다. 한의원에 달여놓은 상비약으로 일주일 정도면 많이 개선되고 상비약으로 힘든 경우 보름이나 한달 정도를 환자의 몸에 맞게 면역을 올리는 처방을 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된다.이런 건 크게 어렵지 않은 경우로 감기 끝에 2~3달 고생하는 경우는 환자 몸에 맞는 면역을 올리는 처방으로 쉽게 개선된다. 알러지성 비염이나 6개월 이상 된 만성 비염의 경우는 치료가 어렵다. 보통 한의원에 비염으로 내원 할 때는 이런 경우이며 여러 병원을 다녀도 호전이 없어 찾아 온다.만성 알러지 비염은 환자의 상태에 맞는 처방을 잘써야하며 즉효하면 큰 효험을 본다. 정말 처방이 맞아 버리면 오래 고생한 경우도 3개월 전후로 많이 좋아진다. 처방은 콧물 코막힘 재채기 후비루 등 비염의 증상과 더불어 환자의 수면 소화 대소변을 살펴야 한다. 증상을 종합해서 계지탕, 소청룡탕, 대청룡탕, 사간마황탕 등 인체 상부의 습을 날리는 처방과 면역을 올리는 처방을 섞어서 쓴다.마르고 약한 경우는 소청룡탕이나 계지탕 계통으로 들어가고 체력이 보통이상이고 잠 문제가 크게 없으면 대청룡탕 마황탕 계통의 약으로 처방을 한다. 축농증이 심한 경우는 도라지 즉 질경이를 넣어 인체의 농을 빼는 처방을 쓰는데 이때 쓰는 질경은 성질이 강한 매운 질경으로 써야 농을 빼는 작용을 볼 수 있다. 배농탕이나 배농산급탕이 질경이 들어간 처방이고 단독 혹은 다른 처방과 섞어서 쓴다.오래 됐지만 증상이 심하지 않고 잠을 잘못자면서 약한 사람은 시호계지탕같은 약을 쓴다. 어떤 약이든 효과는 나며 환자에게 맞는 처방은 탁효를 낸다. 약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음식과 생활 관리도 신경을 써야 한다. 먹으면 콧물이 나는 매운 음식과 뜨거운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 추워지면 콧물이 더 심해지는 경우는 항상 긴 옷으로 피부 노출을 막아줘야 한다. 몸에 열이 많다고 피부를 노출하고 다니면 찬바람이 불 때마다 심해지니 얇은 옷이라도 피부노출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전에 소금물로 코를 헹구는 것이 좋다. 유튜브나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따라 하면 된다. 어릴수록 치료 효과가 크니 어릴 때 치료를 하는 것이 좋다.

2023-11-22

윤명희 수필가 책을 읽다가 예전에 본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박카스 할머니 얘기로만 치부했던 내용이 책 때문인지 다른 시각으로 다가온다. 노년에까지 성을 팔아야 살아가는 여자. 그녀는 자기만큼이나 늙은 집에 방 한 칸 세 들어 산다. 일수를 갚아야 할 만큼 빈곤한 살림살인데도 길고양이를 거두고, 말도 통하지 않는 코피노 아이까지 보살핀다. 이웃과 어울려 살아가는 그녀 뒤에 홀로 고단하게 살아가는 남자들의 삶이 보인다. 그들 속에 아버지가 있다.아버지는 예순 중반에 혼자가 되었다. 사형선고 같은 병명을 들은 엄마는 당신이 먼 길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 보다 혼자 남을 아버지를 걱정했다.그는 안방 텔레비전 앞에서, 저녁밥을 준비하느라 바쁜 엄마에게 리모컨을 찾아달라고 하는 남자다. 양말이라는 말이 떨어지면 손수건까지 앞에 있어야 했고, 발 씻고 나오면 밥상이 차려져야했다. 인부들에게 줄 돈을 찾는 일도 엄마가 했다.그런 아버지가 혼자된다는 것은 남은 가족들에게 부담이었다. 자식들에게 기대지 말라는 엄마의 유언 때문인지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다. 당신의 일정에 맞춰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안심했다.어느 날, 아버지는 지나는 말로 죽는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 했다.무슨 말씀이냐고 묻자, 그런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노라 했다. 엄마의 빈자리에 푸른곰팡이가 발을 뻗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고층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서 술이 불콰해진 아버지는 베란다로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고 했다. 난간만 넘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은 벌써 뛰어내렸는데, 난간을 훔켜잡은 손이 당최 놓지를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술자리에 앉아있더라고 했다.영화에서, 혼자 남은 노년의 생활은 길 잃은 삶처럼 보였다.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것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부자는 돈으로 해결 할 수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하겠지만, 김치찌개 속의 고깃덩이를 건네며 잔소리하는 마누라가 있는 남자가 더 좋아 보였다.화면에, 정신은 멀쩡한데 몸은 꼼짝 못하는 한 남자가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는 나무토막에 이불을 덮어 놓은 것 같다. 그는 문병 온 박카스 할머니에게 어렵사리 도움을 청한다. 먹으면 죽는 약을 입에 넣어달라고. 한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 남자의 손을 꼭 쥐어주는 그녀의 손이 대답했다.두 번째 남자, 치매기가 있는 그는 아직은 본 정신일 때가 더 많다. 그는 입고 있는 색 바랜 러닝셔츠보다 더 비참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죽여 달라는 그 말은 도와 달라는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이 장면은 뭘까? 분명 친구와 셋이서 산을 올라왔는데 정상에서 친구는 먼저 산을 내려간다? 바위산에 그 남자와 여자만 남겨둔 채 말이다. 돈으로 성을 해결하듯이 바위산에서 밀어주는 것까지 바란다고? 평생을 돈 버는 일밖에 몰랐던 그들은 돈으로 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인가?혼자 죽지 못하는 남자가 또 있다. 먼저 산을 내려갔던 그 남자다. 아내의 제사를 지낸 다음날, 박카스 할머니를 찾은 남자. 성장을 한 그는 그녀와 성찬 앞에 마주 앉았다. 와인을 마시고 한껏 분위기에 젖은 그는 여자를 호텔방으로 들인다. 그는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있어 달라고 한다. 혼자 죽기가 너무 무섭고 외롭다는 것이다. 더는 외로움을 이길 자신이 없는 남자는 한 움큼의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었고, 여자의 입에도 한 알 넣어준다. 남자는 먼 길을 떠나고,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그 이후의 일들을 떠안아야했다. 그녀는 마지막 가는 남자들의 손을 잡아준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함께 할 누군가의 손이 간절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에는 혼자가 된다.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던 그녀의 뒷모습에 자꾸만 눈이 간다. 공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녀의 하늘이 오늘따라 더 깨끗하게 보인다.

2023-11-22

대설(大雪)과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21번째가 대설(大雪)이다. 태양이 황경 255도에 위치하며, 올해는 12월 7일(음력 10월 15일)이 대설이다. 대설(大雪)은 다른 때보다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 날씨와는 잘 맞지 않다. 그 이유는 중국 역법이 화북지방의 계절적 특징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대설(大雪)은 한자의 뜻, 그대로 큰 눈을 의미한다.대설에 눈이 오면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상서로운 눈이라고 해서 좋아한다. 한겨울이 오기 전인 12월에 내리는 눈이 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대설(大雪)에 눈이 많이 내리면 눈이 보리를 덮어 보온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동해(凍害)를 적게 입어 보리 풍년이 든다고 하여 ‘눈은 보리의 이불’이라는 말이 있다. 대설 때 눈이 많이 오면 푸근한 겨울을 난다는 속설도 전해진다.이 시기는 물이 얼어붙고, 점점 추워지는 완연한 겨울이다. 겉으로는 음기가 충만해 보이지만, 땅속은 양기를 잉태하고 있다. 만물에 음기가 가득 차면 변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마치 밤이 있어야 낮이 있는 이치다. 눈이 쌓이면 이불 역할을 해주어 땅속의 양기를 보호한다. 사람들도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휴식하며 안으로 양기를 길러 다음해를 준비하는 것이다.대설부터 본격적인 농한기에 들어가기 때문에 농사일이 없다. 농가에서는 농사일을 마치고 한가한 시기다.이때 콩을 삶아 메주를 쑨다. 장맛은 메주가 좋아야 하므로 이 시기에 집집마다 한 해 농사를 결정짓는다고 할 만큼 정성을 들인다. 인간의 삶이 계절의 변화와 긴밀한 이유다.대설은 자월(子月)의 시작에 해당하는 절기다. 자월은 대설과 동지가 포함된 달로, 12월 7일경부터 1월 8일경까지다. 사주명리에서 자(子)는 오행으로 수(水)이며, 동물로는 쥐다.자(子)는 주역 괘로 보면 지뢰복(地雷復) 괘에 해당한다. 땅을 상징하는 곤괘가 위에 있고, 우레를 상징하는 진괘가 아래에 있다. 땅속에 우레가 잠겨 있다는 것은 땅속에서 생명의 기운이 활발하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맨 아래에서 양효(陽爻)가 있고, 나머지 5개는 음효(陰爻)로 이뤄졌다. 맨 아래의 초구가 양효(陽爻)이므로 천지가 음(陰)의 기운으로 가득 찬 가운데, 이제 막 양기가 다시 시작하는 효다. 비록 떠나 있으나 멀리 간 것은 아니며, 다시 돌아오니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지뢰복(地雷復)의 복은 회복하다고 할 때의 복(復)자를 썼다.명리에서 지지 자(子)는 어둠이 깊어져도 생명의 싹을 품고 있다.지뢰복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존재하는 왕성한 생명력과 희망을 나타낸다. 결국 아무리 추워도 결국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마치 몸살을 심하게 앓고 난 뒤 몸조리를 하듯이 삶의 에너지가 땅속에 묻혀 있는 겨울에는 휴식하면서 기운이 흩어지지 않도록 양생하는 시기다.사주에 자가 있거나 자월에 태어난 사람은 총명하고 감추어진 재능을 가지고 은밀하게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낭비를 싫어하고 실용적인 성격이다. 생명력과 성적 에너지가 넘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어둠 속에서도 싹트는 힘에서 비롯된 성향이다.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기원전 179~122)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 권5 ‘시칙(時則)’에 보면 중동(仲冬)의 달, 11월이 되면 초요(招搖·북두칠성 자루 끝에 있는 별)가 자의 방향(서북쪽)을 가리킨다. 얼음은 점점 단단해지고 땅은 얼어 터지기 시작하며, 간단(鳱鴠)이 울지 않고 호랑이가 교미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간단’은 산새의 이름이다. 이달에는 음기가 극성하므로 울지 않는다. 호랑이는 양 속의 음이다. 음기가 무성하게 되면 무리끼리 서로 발정하게 된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이 시기는 해가 짧아지면서 음양이 다투는 시기이니, 군자는 목욕재계하고 조용한 곳에 머물며 몸을 고요히 하고 음악과 여색을 멀리하여 욕망을 억제한다. 그리하여 신체를 안정시키고 심신을 편안하게 한다.통치자는 위로 하늘에 순응하고 아래로 토지의 생산력에 힘쓰되, 시절에 맞는 일을 행하므로 백성은 그것에 따름으로써 그날의 길흉을 알고 각기 지니고 있는 용기(龍忌)를 나타낸다고 한다. 다시 말해 천인감응(天人感應)설을 표현한다. 인간의 생활도 자연과 조화로운 가운데 풍요로움과 안락이 있음을 말한다.복(復)은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다.나라의 주권은 기득권층에서 백성으로 돌아오는 정책을 펴야 존립할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기득권층의 빗나간 탐욕과 부정부패 때문에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한 명분으로 발생한 것이다. 결국은 백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통치자는 사회가 다시 정의롭게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023-11-22

대구서 ‘정치적 대중성’ 입증한 한동훈

심충택 논설위원 한동훈 법무장관이 내년 총선판세의 핵심변수로 부상했다. 지난주 대구를 찾아 처음으로 대중들과 스킨십을 가진 한 장관은 며칠 만에 팬덤을 형성할 정도로 성공적인 정치데뷔를 한 것 같다.지난 17일 대구를 방문한 한 장관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한 장관이 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몰려들면서 마치 중견정치인 선거 유세장을 방불케 했다. 한 장관도 바쁜 일정을 미루면서까지 시민들과 즉석 사인회를 열고, 사진 촬영 요청에도 일일이 응했다. 동대구역에서는 시민들의 사진촬영과 사인요청으로 예매해둔 서울행 기차표를 취소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한 장관이 이날 대구시민을 감동시킨 것은 ‘대구시민을 존경하는 이유’에 대한 그의 발언이었다. TK(대구경북)지역은 최근 총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인들로부터 기분이 상하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TK의 지원을 받아 국민의힘 대표까지 지낸 이준석은 요즘 다양한 좌파매체에 출연해 대구의 보수성을 공격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호남출신인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은 TK를 비롯한 영남지역을 ‘낙동강세력’이라고 명명하며 적대시했다. 민주당 정치인들의 TK조롱 사례는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반면, 한 장관은 이날 “대구시민들은 6·25전쟁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적에게 도시를 내주지 않고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싸웠다. 그리고 전쟁의 폐허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산업화를 진정으로 처음 시작했고 다른 나라와의 산업화 경쟁에서 이긴 분들”이라고 했다. 나는 ‘TK의 아이덴티티(정체성)’에 대해 이만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외지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한 장관이 말한 것처럼, TK지역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를 극복하는데 앞장서왔다. 6·25전쟁 당시 이 지역에서는 지게꾼까지 나서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했다.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대구고교생들의 2·28 민주운동은 이 나라 민주화의 횃불이 됐다. 삼성을 태동시키고 포항제철소를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시키며, 우리나라 산업화의 산실이 된 곳도 TK지역이다.한 장관의 대구방문 이후 그의 정치 데뷔는 기정사실로 된 것 같다. 국민의힘에선 조만간 있을 개각에서 그를 총선출마 후보군으로 합류시킬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 장관에게 수도권 위기론을 돌파할 역량이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한 장관은 그동안 극단성향이 강한 야당 정치인들과의 논리싸움에서 밀린 적이 없는 여권 내 유일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문무(文武) 모두를 겸한 ‘조선제일의 검’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한국갤럽이 이달 초(7~9일) ‘선호하는 장래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 결과, TK지역에서는 한 장관이 14%로 1위를 기록했다. 그다음이 홍준표 10%, 이재명 9%였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이 여론조사 결과는 그의 정치적 대중성을 입증하고 있다. 보수지지층에다 중도·청년층까지 외연을 확장하고 있는 한 장관의 ‘지방순회 행보’가 내년 총선판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2023-11-21

횡재세 논란

우정구 논설위원 횡재세는 정상범위를 넘어선 기업의 초과이윤에 부과하는 세금을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여러 국가가 이 제도를 도입, 높은 세금을 부과해 전비(戰費)로 사용했다. 전쟁을 명분으로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들였기 때문에 별다른 논쟁은 없었다.이후 횡재세에 대한 논의가 없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유럽국가 중심으로 다시 도입 논의가 활발하다. 우크라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면서 석유가스 기업들이 막대한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국내서도 횡재세 도입을 둘러싼 논쟁이 달아올랐다. 야당이 고금리로 생긴 금융기관의 초과이익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주장에 맞서 시장경제를 무시한 포퓰리즘이라는 여당의 주장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횡재세 부과 대상이 된 은행권의 경우 3분기 누적 이익이 무려 40조원에 이른다. 주로 이자 장사로 돈을 번 이들 은행은 직원들에게 1억원이 넘는 연봉을 주고, 성과급 잔치까지 벌였다. 대통령이 “소상공인이 종노릇 한다”고 한 발언은 소상공인에게 높은 이자를 받아 성과급 잔치를 벌인 금융권을 두고 한 비판이다.무엇보다 은행이 피땀 흘려 이익을 낸 것이 아니라 정부의 금리정책에 따라 손쉽게 이익을 냈다는 점에서 국민 정서에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공정하지 않게 번 돈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자는 국민적 여론이 높은 이유다. 그러나 횡재세가 이중과세되는 모순이 있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면서 궁극적으로 그 부담이 다시 국민 몫이 된다는 비판도 무시할 수 없다.금융기관이든 어느 기업이든 시장 변화로 생긴 막대한 이익은 사회로 환원하는 선순환 구조로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며 횡재세 논란을 잠재우는 방법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11-21

글로컬 시대, 리터러시 교육의 필요성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문학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리터러시(Literacy)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읽고 쓰는 능력이란 정의가 보여주듯 리터러시는 ‘문자문화’ 시대의 산물이며, 그런 만큼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는 그 수명이 다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전국적으로 ‘국어국문학과’의 간판이 사라지고 쇼츠(Shots) 문화가 대세가 된 지금, 리터러시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리터러시는 텍스트를 깊이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문학과 영화, 더 나아가 ‘삶’이란 텍스트의 현상이 아니라 그 이면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현상의 이면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그 필요성은 무엇일까. 잊을 만하면 화제가 되는 20대 문해력 논란을 생각해 보자. ‘심심한 사과’ ‘사흘’ 등 한자어를 모르는 20대의 어휘력을 비판하는 것보다 중요한 점은 그런 현상이 생겨나는 원인을 진단하는 것이다. 제대로 원인을 파악해야 올바른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최근 수업 시간에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 ‘큐티클’을 읽었다. 이 소설은 이제 막 취업을 한 20대 여성 주인공이 그간 사치로 여겼던 소비 행위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과정을 담아낸다. 그렇지만 그녀의 소비는 네일아트를 받거나 유기농 음식을 구매하는 등 평범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위일 뿐이다.이 소설을 읽은 학생들의 반응은 좀 더 비싼 제품을 향한 욕망을 표현하는 주인공에 대한 적당한 비판과 ‘합리적 소비’를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주인공 여성과 나를 분리하는 시각도 굳건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소비 행위를 통해서 자기 위안을 삼고자 했던 이유를 질문하는 것이 어려웠던 까닭이다.여기서 핵심은 학생들이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구조를 질문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이유를 파악하는 일이다. 소비 자본주의가 일상이 된 시대에 그 구조를 질문할 여력이 되지 않는 현실과 질문에 익숙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 등 여러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논의는 문학이란 범위를 넘어서는 간학제적인 일이 된다.‘글로컬 대학 30’ 사업의 지원을 받는 10개 대학이 발표되었다. ‘글로컬 대학 30’ 사업은 학령 인구 감소에 따른 지방 대학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대학과 지방 정부, 그리고 지역의 산업체가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지역에 밀착한 인재 양성을 추구한다. 우리 대학은 ‘우주항공 방산분야 선도대학’을 비전으로 제시하여 10개 대학에 포함되었다. 이제까지 지적된 많은 문제점을 넘어서 지역에 정주하는 20대를 만드는 사업이 되길 기원한다.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학생들의 리터러시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지역 산업의 육성과 함께 대한민국의 위계화된 구조를 상대할 수 있는 인식력을 갖춘 인재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업이 끝난 5년 뒤에 지역은 더욱 황폐해질 가능성이 높다. 지역의 위기라는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이 발생하는 구조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2023-11-21

만추 서정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며칠 간 바싹 추워진 날씨 탓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눈이 귀한 부산에선 11월에 첫눈이 내리고 전국 곳곳에 얼음이 얼면서 절기의 명분(?)을 찾기라도 하듯 세찬 강풍이 옷깃을 여미게 하고있다. 단풍이 채 들지 못해 푸르뎅뎅한 잎새들은 화들짝 놀라며 돌풍에 시달리다가 떨어져 포도 위를 뒹굴고, 사람들은 두꺼운 옷차림에 종종걸음으로 흩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하나씩 정리하고 점검하며 겨울채비를 하는 미틈달의 오후 햇살이 갈수록 짧아지고만 있다.긴 목을 뽑아 바람에 서걱이는 억새는 가을을 보내는 아쉬움인지 겨울을 맞이하는 환호인지 일제히 은빛 손을 흔드는 듯하다.산자락에서 파도의 외침으로 일렁이는 은빛 여울은 조락(凋落)의 스산함을 달래주고, 바람 결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풍엽(楓葉)의 군무는 한껏 만추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성장하여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익게 하고는 스스럼없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계절, 늦가을은 늦지 않았고 그것이 또 무슨 거리낌이 있을까(晩秋不晩 又何妨). 처음과 시작을 위한 순환과 설렘의 만추가 아닐 듯싶다.높은 가지에 듬성듬성 매달려 대롱거리는 감들이 대낮에도 주홍빛 전등을 켜며 떠나가는 가을날을 배웅하는 듯하다. 떫고 신산했던 인고의 시간을 지나 속까지 정갈하게 채워가고 익어가면서 가을날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까치밥으로 남겨진 몇 개의 감들은 배려와 공생의 매개 마냥 환하고 넉넉하기만 하다.작은 것 하나라도 아끼고 나누면서 베풀고 챙겨줄 때 한결 온기가 스미고 아름다운 향기가 피어날 것이다. 온갖 자연에 나타나는 현상이나 세상살이의 천태만상이 별반 다르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수확을 끝낸 들판엔 텅빈 충만이 서리는 것 같다. 푸르름과 황금물결로 일렁이던 논배미엔 어느새 ‘볏짚 원형 곤포 사일러지’가 휑해진 들녘을 일명 ‘공룡알’이 심심찮게 지키고 있다. 들판 군데군데 움막처럼 봉긋하게 쌓았던 예전의 짚가리가 요즘엔 ‘마시멜로’같은 사일러지로 변모하여 뒹굴고 있으니, 이 또한 이색적인 가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이처럼 바뀌고 변하면서 세월의 바퀴가 굴러가는 것이리라.“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 나태주 시 ‘11월’전문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세상에 나눠줄 것이 많다는 듯이 헐벗은 몸이 되면서까지 나뭇잎을 하나씩 아래로 떨구어 낸다. 예쁘게 물든 단풍이 짐짓 낙엽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는 11월,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낙엽의 이불’처럼 비우고 베풀며 내려놓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석지고 그늘진 곳의 따스한 이불이 될 수는 없을까? 더 많이 사랑하고 정을 나눠야 할 11월이다.

2023-11-21

Long live the King

그는 자신의 직감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직감을 다시 되찾을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고, 다른 선수들이 자신을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는 세간의 평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6년 ‘플레이어 트리뷴’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부담감에 대해 토로했다. 그의 이름은 이상혁, 본명보다는 페이커라는 닉네임으로 더 유명한 리그 오브 레전드의 프로게이머이다.사실 나에게 페이커는 동시대의 스타는 아니다. 삼십대 중반의 아저씨에게 이상혁은 왠지 다음 세대의 스타 같다는 느낌이다. 내가 한창 리그 오브 레전드를 보던 2013년 무렵, 페이커는 갓 데뷔한 신인이었다. 다만 좀 남다른 신인. 데뷔 첫 해에 리그와 롤드컵을 모두 재패하고 리그 MVP를 석권한 천재 신인의 등장. 하지만 페이커의 등장이 나에게 썩 달갑지만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의 등장은 세대교체의 순간과도 같았고, 이 게임의 판도는 완전히 바뀔 거라는 선언과도 같았으니까. 실제로 페이커의 등장 이후 평균 데뷔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기 시작했고 프로게이머들의 평균 연령 역시 급속도로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통계를 보자면 그 느낌이 마냥 느낌뿐이었던 건 아닌 것 같다.이후로 나에게 페이커는 단지 어린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한 프로게이머에 불과했다. 내가 좋아했던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이십 대 중반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정말 달랐다. 평균 연령이 극도로 낮아진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프로 씬에서 이제 그는 고령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며 SK T1이라는 강팀의 주장 겸 파트 오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 그는 세계 최초의 첫 30대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를 바라보고 있다.이쯤에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가 더 이상 평범한 선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명실상부한, 리그 오브 레전드를 비롯한 모든 E스포츠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다. 진정한 프랜차이즈 스타는 종목에 국한되지도, 자신에 대한 호불호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마치 조던이 시카고 불스의 프렌차이즈 스타이면서 NBA를 대표하고, 궁극적으로는 농구라는 종목 자체를 대표하는 스타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걸 넘어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전해준 사람이었던 것처럼.내가 그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자신의 말을 증명하고자 항상 노력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의 선수 생활이 항상 탄탄대로였던 건 아니다. 매년 그는 슬럼프 설에 시달려야 했고, 이제는 퇴물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모든 선수가 그를 노리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가 항상 승리했던 건 아니다. 그는 때때로 패배했고, 눈물을 흘려야만 했으며, 때로는 길을 잃기도 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시 시작했다. 자신의 직감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순간에도,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순간에도, 다른 선수들이 자신을 앞질러 가고 있다는 평가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했다. 부담감에 시달리고 자신을 향한 부정적 평가와 의견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매순간 노력할 뿐이다. 그렇기에 2016년에 그가 쓴 기고문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여전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건 그가 단지 천재 선수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여전히 최선을 다한다는 것, 우리와 똑같은 부담감과 고뇌 속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번민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컴퓨터 게임에 국한된 스타가 아니다. 그는 세대를 대표하고, 시대를 대표하고, 어쩌면 지금 모든 시련에 빠진 모든 사람들조차 대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메시지이다. 우리를 둘러싼 부정적인 메시지에 결코 휘둘리지 말라고, 너는 너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고, 지금의 패배가 너를 규정짓는 게 결코 아니라고.잠시 후면 그의 통산 여섯 번째 롤드컵 결승 경기가 펼쳐진다. 아마 이 글이 게재될 무렵에는 우리 모두 결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가 패배하더라도 혹은 승리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그의 마지막이 아니니까. 그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고, 그의 행보는 계속될 것이다. Long live the king. 언제까지고 그의 삶을 응원한다.

2023-11-21

자신에게 안녕을 고할 때

요즘 아버지는 자주 마지막에 관해 말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퇴직이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반평생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온 힘을 다해 일궈왔던 세계에 안녕을 고하는 마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나에게는 헤쳐 나가야 할 것들이 많다.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보단 주변부를 두리번거리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손에 쥔 것이 없기에 놓을 것도 없다. 나는 시작을, 아버지는 끝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아버지는 후련해 보이기도 아쉬워 보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선 떠나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고 매시간 후회 없이 보냈다는 아버지. 그렇기에 일터를 벗어나는 것이 섭섭하지만 귀하고 기쁘다고 했다. 그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미래의 나 역시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나의 세계에 안녕을 고할 수 있을까?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답을 찾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고 내놓은 마지막 작품으로 개봉 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마케팅을 하지 않는 마케팅으로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영화 개봉 이후에 평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도 꽤 흥미롭다. 은퇴작이라는 표제를 내어놓은 만큼 자기의 세계관을 정리하는 태도에 감명 받기도 하고, 이전 작품들만큼 난해하고 매력적이지 않다든가 전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영화라는 평도 있다.미야자키 하야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는 이번 작품을 무척이나 애틋하게 감상했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아쉬운 점은 분명 있었지만, 이제 정말 그를 보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마지막을 준비하고 정리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전쟁 중인 일본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전개된다.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도쿄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으로 오게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을 하게 된 것이다. 현실이 탐탁치 않은 마히토는 정체불명의 왜가리 한 마리를 만나고, 탑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던 중 사라진 새어머니를 찾아 탑으로 향하게 된 마히토는 새로운 세계에서 일련의 놀라운 사건을 겪는다.작품에서는 전반적으로 죽음에 관한 기조가 흐른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여주는 도입부터 주인공인 마히토가 향하는 낯선 세계 역시 시공간이 완전히 뒤엉킨,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죽음의 이미지는 조금 더 거시적으로 느껴졌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개인의 실존적인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것은 마히토가 빠져나온 탑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그 세계로 갈 수 없다는 전언과도 같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서서히 잊어갈 것이라는 왜가리의 말 역시 의미심장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떤 세계가 닫히면 또 다른 세계는 열리게 되어 있다. 탑의 이야기는 끝났고 마히토는 다시 도쿄로 돌아가게 된다. 앞으로 소년이 만나게 될 세계는 결코 이상적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계속될 것이며 도처에 악의의 흔적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마히토에겐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나갈 힘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친구를 사귀는 일이라는, 소년의 외침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늘 ‘함께 있음’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는 모두 이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원이며 그렇기에 모두는 특별하고 소중하다. 동시에 내 옆에 있는 누군가도 역시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다. 서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것은 자신의 마지막이 누군가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마지막이 있기에 시작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나의 아버지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청년 시절 소진하지 못한 열망의 불씨가 조금씩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일터를 떠나는 일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아버지처럼, 또 마히토처럼 언젠간 나 역시 나의 세계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나 역시 스스로가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떻게 마무리를 할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2023-11-21

혼란스러운 마음을 리셋한다

김규인 수필가 인공지능은 일상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인공지능이 알려주는 일기예보를 듣고 경제전망을 보고 물가를 예측한다. 초기의 인공지능과 대결해 1승을 거둔 이세돌의 승전보는 벌써 옛이야기이다. 인공지능을 모티프로 한 영화 ‘나의 마더’는 이미 2019년에 상영됐다.인공지능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다. 미국 팔란티어의 인공지능 고담은 위성과 열감지기, 정찰용 드론, 각종 첩보와 적군이 사용하는 휴대전화 감청 정보, 각종 인터넷 정보를 종합하여 작전 정보를 제공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다.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항복 방송, 불에 타는 미국국방부 건물인 펜타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체포 영상은 모두 인공지능을 이용해 조작했다. 인공지능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국민의 삶이 달린 경제 문제, 일기예보, 기후변화를 논하는 자리에 조작된 정보가 입력된다면 일 초에 백경 번을 연산한다는 인공지능을 둔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조작된 자료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손해는 그 자료를 믿고 따른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신입사원을 뽑는 면접에서 사람들에 의한 불평등한 점을 해소하고자 채택한 인공지능 면접도 사람이 뽑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먼저 신입사원을 뽑은 면접관들이 공정하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 그 면접관들이 뽑은 자료를 토대로 인공지능에 입력하여 선발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편견도 없는 공정한 자료를 입력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매일 쏟아지는 자신들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노조의 데모와 정권만을 잡으려는 정치인들의 주장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쩌면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일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말을 한다. 조금만 더 사회를 둘러보고 남을 배려하는 말을 할 수는 없는지. 그 틈바구니에 끼인 국민을 생각할 여유는 없는 것인지.무섭게 오르는 물가와 집을 매개로 사기를 펼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전화 사기마저 극성을 부린다. 이런 와중에도 국가는 국가대로 바쁘다. 인공지능이 나라의 미래를 바꿀 게임 체인저라며 이러한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쟁을 서두른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국민이나 국가나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추운 날씨 탓인지 며칠 전에는 금방 태어난 아기 마음 같은 하얀 눈이 내렸다. 눈처럼 하얀 정보만을 입력할 수는 없는 것인지. 그러기 위해서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순수해져야 할까. 무너진 아파트 지하 기둥에 콘크리트가 들어갈 자리에 박힌 벽돌처럼 정직하지 못한 일은 지위의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많이 퍼져 있다.그런데도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것은 죽지 않은 양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치매에 걸린 노인에게 따스한 손길을 건넨 김선 씨의 선행을 보며 이제까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리셋한다. 우리 사회에 아직 정확한 자료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이런 날은 인공지능이 그리는 밝은 내일을 상상하기도 한다.

2023-11-20

글쓰기의 어려움과 기쁨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내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글로 쓰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지난 18일, 포스텍 캠퍼스에서 열린 ‘제2회 포스텍 SF DAY’에서 김초엽 작가, 김겨울 작가의 ‘SF 북토크’를 찾은 포항 시민들과 포스텍 학생들이 작가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한겨울을 방불케 하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130명이 넘는 청중이 강연장에 모였고, 두 시간이 넘는 강연과 대담 시간 동안 놀라운 집중력으로 두 작가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김초엽 작가는 “‘쓰고 싶은 나’를 발견하는 읽기의 여정”이라는 주제로 화학을 전공하는 과학도였던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6년 차 SF 작가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정표가 되어 준 책들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상세히 소개해 주었다. 또한 김겨울 작가는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청중을 대신해 김초엽 작가에게 질문을 던지고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냈다.김초엽 작가의 강연과 두 작가의 대담도 물론 훌륭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청중들의 질문이었다. 20분 남짓 예정된 질의응답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고, 두 작가는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현장에서 이 장면을 전부 지켜본 나로서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사람들이 아직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새삼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소설, 시, 드라마,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있지만, 엄정한 형식과 객관성을 요구하는 학술논문과 같은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글쓰기는 자기표현, 즉 ‘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나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쓰는 것이 자기표현적 글쓰기의 본질은 아니다. 글로 쓰는 순간 모든 글쓰기는 잠재적인 독자를 갖게 된다. 나의 이야기가 다른 ‘나’들, 즉 독자들에게 전달되어야만 좋은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글쓰기는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작업이며, 다른 배경을 지닌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글쓰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 나와 타인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지평, 즉 글쓰기의 문법을 익혀야 한다. 지루한 국어 시간이나 논술 수업 같은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장르, 예컨대 소설이면 소설, 에세이면 에세이의 장르적 특성과 창작 방법을 익힘으로써 해당 장르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공부를 말한다. 행사장에서 김겨울 작가가 한 질문자에게 조언했듯,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를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들을 발견하고 거기서 출발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김초엽, 김겨울 작가의 북토크와 같은 문화행사 또한 누군가에겐 독서와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포항을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이러한 문화행사가 더 자주 열리기를, 글쓰기를 통해 확장된 세계를 감각하는 기쁨을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2023-11-20

영원히 빛나는, 한 장군과 여원무

“행객이 길 멈추고 노도 소리 듣고선/ 왜구들 죽이는 장군을 대하는 듯/칼자욱은 어제일 같이 반석에 남아있고/장한 업적은 천추에 빛나리//당시의 공열은 세상을 진동했고/그 충정 천년토록 늠름도 하네/지금까지 장군의 이 전하고 있어/단오 때의 여원무는 영원히 빛나리”경북 경산 자인면에서는 지역을 수호하는 신으로 ‘한 장군’을 모시고 제의를 지내고 있다. 자인면 서부리의 진충묘에서는 ‘한장군대제’, 마곡리·현내리·광석리 3개 마을에서는 ‘한묘제사’, 자인면 원당리·용성면 대종리와 가척리 등에서는 ‘한당제사’로 불리는데, 모두 한 장군과 그의 누이를 기리는 유서 깊은 행사이다.9세기 전후 신라 때 자인의 도천산에는 왜구들이 성을 쌓고 기거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혔다. 한 장군은 그의 누이와 함께 버들못가에서 꽃관을 쓰고 여원무와 배우잡희의 놀이판을 벌이고, 못에 배를 띄워 호사스러운 광경을 연출했다. 성의 왜구들은 신비한 놀이판에 유인되어 칡으로 만든 그물과 한 장군의 칼에 섬멸되었다. 지금도 버들못가에는 왜구의 목을 자를 때 남은 칼자국이 돌에 남겨져 있는데, 이를 검흔석 혹은 참왜석이라 부른다. 한 장군이 죽은 후 자인면에서는 여러 사당을 세워 수호신으로 모셨으며, 여원무를 통해 한 장군 남매를 기리고, 죽은 왜구를 위무하는 제의를 이어갔다. 진충묘는 주민들이 도천산의 서쪽 기슭에 한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신당이다. 그러나 일제 당시 철거당하고 그 자리에 일본 신사가 세워졌다. 광복 이후 북서리에 있던 한당을 이건하여 진충묘로 삼았다. 현재 자인계정숲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북서리에서 이건된 진충묘와 자인중고등학교에서 발굴 후 만들어진 한 장군 묘소를 자연스럽게 둘러볼 수 있다. 1968년 8월 자인면에서는 제법 큰 규모의 석실묘가 발견되었다. 두개골이 포함된 유해와 은으로 장식한 갑옷·투구·녹슨 철제창·많은 토기류가 발굴되었는데, 한 장군의 묘소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민들은 이듬해 자인계정숲 내에 유해를 모시고, 유물은 박물관에 보관하였다.매해 음력 5월 5일이 되면 자인계정숲을 중심으로 한 장군과 관련된 제의-한묘대제·여원무·호장굿·자인팔광대·큰굿-가 치러진다. 한묘대제는 한 장군의 묘소와 그의 사당에서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여원무는 한 장군 남매를 기리고, 죽은 왜구를 위무하는 춤으로 커다란 화관으로 유명하다. 호장굿은 호장을 앞세워 한 장군과 관련된 장소를 돌아다니는 가장행렬이다. 자인팔광대는 8명의 광대가 3막을 구성하는 자인만의 전통 탈춤이다. 양반의 이중적인 모습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다른 지역의 탈춤과 달리 양반의 권위와 조강지처에 대한 가부장적 사상이 드러난다. 큰굿은 무속인들이 시중당 앞에 모여 부정굿·산신맞이굿·천왕맞이굿·칠성맞이굿·조상축원굿·장군맞이굿·사자풀이굿을 지내는 것이다.여원무는 한 장군이 여장을 하고 누이와 함께 춤을 추어 왜구를 섬멸했던 춤이다. 제의적 의미에서 자인면에서는 오랫동안 이어온 기록이 남아있으며, 현재는 1969년 무보를 마련하면서 복원된 것이다. 여원무은 악사들의 풍악에 맞춰 10척(3m)이나 되는 화관을 한 장군과 누이가 들고 중앙으로 나오면서 시작된다. 남매는 중앙에서 덧배기가락에 맞춰 춤을 추다 화관 속에 숨는다. 뒤를 이어 여장한 무동 두 명과 무부들이 화관 주위를 돌며 굿거리장단에 맞춰 원을 그린다. 무동은 한 손에 꽃가지를, 다른 손에는 박을 들었다. 무동춤이 이어지다가 다시 화관에 숨어 있던 한 장군 남매가 나와 도드리장단에 맞춰 화관무를 춘다. 한 장군은 오른쪽에서 누이는 왼쪽에서 양손으로 화관을 잡고 회전하면서, 화관의 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동작을 크게 하며 춤을 춘다. 회전을 반복하는 춤을 춘 후 다시 화관에 숨는다. 이어 다른 무부들이 등장하여 굿거리장단에 맞춰 다른 원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전체 등장인물이 춤을 추며 원무를 그린다. 대개 여원무는 3개의 동심원을 그리는데 그 크기가 18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쓰이는 2개의 화관 무게는 30~40kg 정도이며, 5종의 꽃으로 8개의 가지를 부채꼴로 만들어 500여 개의 종이꽃을 달아 크고 화려하게 만든다. 덕분에 한 장군과 누이는 여원무에서 화관에 가려지고, 사람보다는 꽃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의 전 화관은 신성하게 여겨 접근이 금지되어 있지만 제의가 끝이 나면 남녀노소가 풍년·제액·치병을 위해 꽃을 따다 집안에 두었다고 한다.자인면의 수호신 한 장군은 신라와 고려 사이의 인물로 보인다. 그가 왜구를 물리친 이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온 제의는 경산 자인의 특색을 알리는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화려하고 커다란 꽃관이 커다란 원무를 그리는 무부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꽃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여원무가 지역을 대표하는 춤이 되어 영원히 빛나는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1-20

회화에서의 공간과 시간문제

그림은 보는 것에서 시작해 그리는 것으로 종결된다. 화가는 끊임없이 보는 사람이다. 보는 것은 시각과 시선의 문제이며, 생각과 관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일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화가의 시선에 따라 그림은 다른 것을 보여준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이 그림의 매력이다.화가의 시선에 따라 동일한 대상도 달리 보여진다. 어떤 화가들은 바깥 세계를 내다본다. 또 어떤 화가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다. 빈센트 반 고흐가 내면을 들여다본 화가라면 데이비드 호크니는 밖을 내다보는 화가이다. 막셀 뒤샹처럼 훔쳐보거나 르네 마그리트처럼 뒤집어 보길 즐긴 이도 있다.호크니는 보는 것을 즐기는 화가이다. 달리 보는 것을 즐기고 달리 본 것을 즐거이 그린다. 화가라면 누구나 공간, 시간, 시점의 문제와 대결한다. 본 것이나 보는 것을 그리려면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서구회화는 오랫동안 르네상스의 발명품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에 의존해 공간문제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화가들은 우리 눈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대상을 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도 시야에 들어온 모든 대상을 동시에 명확하게 볼 수 없다. 시야에 들어온 대상들 중 오로지 눈이 향한 것만 선명할 뿐 나머지는 상(像)으로 인지될 뿐이다.직접적으로 경험한 대상을 즉각적으로 그림에 옮긴 인상주의의 등장으로 선원근법은 해체되었다. 하지만 호크니는 실제 시각경험을 그림에 담기 위해 원근법의 문제를 다시 소환했다. 러시아 종교철학자 파벨 플로렌스키가 쓴 ‘시각을 넘어서(beyond Vision)’라는 제목의 책에서 호크니는 역원근법(reverse perspective)이란 개념을 접한다. 선원근법의 소실점이 화면 안에서 발견된다면 역원근법의 소실점은 그림 밖 감상자의 뒤쪽에 위치한다. 화면 속 소실점이 그림 속 환영의 공간(가상공간)을 불러일으킨다면 화면 밖 감상자의 뒤 공간으로 소실점이 옮겨지면 그림 속 공간이 그림 밖 현실 공간으로 확장된다.보는 것의 문제가 공간의 문제라면 본 것을 그리는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보는 행위는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문학은 시간의 순차적 흐름에 따라 사건을 전개한다. 정지된 한 장면만 보여주는 회화는 그렇지 못하다. 실감나는 공간, 설득력 있는 묘사나 표현보다 내용 전달이 중요했던 중세미술은 공간성과 시간성에 있어서 보다 유연했다. 논리성에 구애받지 않았던 중세 그림에서는 빈번하게 하나의 화면에 여러 장면이 함께 그려졌다.르네상스 이래로 재현과 모방이 추구되면서 중세적 유연성 대신 논리적 화면구성이 중요해진다. 그 결과 하나의 화면에는 하나의 장면만 그려졌다. 2018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를 찾은 호크니는 11세기 초 제작된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를 감상했다. 길이 70m의 태피스트리에는 노르만의 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역사가 자수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호크니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소실점이 없고 그림자가 그려지지 않았다. 시간에 따른 사건의 전개는 존재하나 공간이 부재하는 그림이다.‘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시간성 문제의 실마리를 찾은 호크니는 90m가 넘는 길이의 작품 ‘A Year in Normandie(노르망디에서의 일 년)’을 완성했다. 아이패드로 그린 노르망디 풍경 220장을 출력해 이어붙인 그림이다. 이 그림은 멈춰 서서 보도록 그려지지 않았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시선을 던지며 보는 그림이다. 호크니는 90m 길이의 초대형 파노라마 풍경화를 굴곡진 벽면에 이어붙이면서 감상자를 움직이게 했다. 감상자의 움직임으로 회화가 지녔던 시간의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호크니의 이러한 발견을 ‘moving perspective(움직이는 원근법)’ 혹은 ‘움직이는 초점(moving focus)’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11-20

서울공화국 vs 국가균형발전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총선용 포퓰리즘 광풍이 불고 있다. 보선 참패로 수도권의 싸늘한 민심을 확인한 여당이 총선전략으로 ‘메가시티(megacity) 서울’을 띄웠다.이미 정치·경제·사회·문화가 고도로 집중된 ‘서울공화국’인데 ‘메가시티 서울’은 또 무엇인가? 지방은 소멸위기인데 헌법 제123조에 규정되어 있는 ‘국가균형발전’의 헌법적 가치를 수호할 의지는 있는지 묻고 싶다.서울은 ‘너무나 메가’해서 주택·교통·교육·직장·과잉경쟁의 부작용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전국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지방은 역대 정권의 ‘균형발전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쟁력은 오히려 약화되어 고사 직전에 있다. 그동안 지방 인구를 빨아들여 버텨온 서울공화국이 멀지 않아 지방이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그럼에도 여당이 또 다시 서울공화국에 매달리는 이유는 뻔하다. 지방인 영남과 호남의 표심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총선 승패를 결정짓는 수도권은 가변성이 크기 때문이다. 수도권의‘떠난 표심’을 되돌리기 위해 극약 처방을 한 것이지만, 이것이 ‘승부수’가 될지 ‘자충수’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서울확장론’이 서울과 지방, 인접도시의 서울편입 여부, 그리고 서울에서도 지역적 편차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메가시티 서울’과 ‘지방시대’의 양립은 희망에 불과하며 현실에서는 충돌한다. 서울이 집중화될수록 지방소멸은 더욱 가속화 될 뿐이다. 양자관계에서 우선은 ‘헌법적 가치인 국가균형발전’이다. 최근 한국은행 보고서도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방 거점도시의 경쟁력을 키우는 균형발전전략이 우리의 활로라고 지적하고 있다.따라서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은 서울을 확장하기 전에 문제의 발생 원인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국민의힘 5선의 서병수 의원은 “이미 ‘슈퍼 울트라 메가시티’인 서울을 더 ‘메가’하게 만든다는 건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서울은 메가시티가 아니라서 문제가 아니라 이미 너무 메가시티라서 문제인 것이다.설사 서울의 확장필요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서는 ‘지방의 부활’ 다음이다. 지방소멸을 막는 것이 서울확장보다 훨씬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지방이 죽으면 서울도 죽는다.지방 부활의 전제조건은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이다. 따라서 대선공약인 ‘500개 공공기관의 2차 지방이전’부터 조속히 실행해야 할 것이며, 메가시티도 서울이 아니라 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 여수·순천·광양처럼 지방에서 먼저 추진되어야 한다.국가발전전략은 면밀한 연구와 공론화 과정이 필수라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김대기 대통령실장은 ‘메가시티 서울’에 대해서 “대통령실과 여당의 사전 협의는 없었다”고 했으니 어이가 없다. 정부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총선용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오죽하면 여당의 유정복 인천시장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정치 쇼”라고 비판했겠는가.총선만 생각한 정략적 접근으로서는 서울의 문제도 지방의 문제도 결코 해결할 수 없다.

2023-11-20

‘오자서’와 ‘웜비어부부’의 복수

홍석봉 대구지사장 초나라 사람 오자서(伍子胥)는 아버지 오사와 형 오상을 억울하게 잃었다. 복수를 다짐한 오자서는 홀로 초나라를 탈출했다. 심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오나라로 달아난 그는 훗날 ‘오왕 합려’로 불리는 공자 광(光)을 만난다.오자서는 갖은 책략을 동원해 광을 보위에 올렸고 오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기원전 506년, 오나라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했다. 3개월여 만에 수도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오자서의 원수인 평왕은 이미 죽은 뒤였다.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헤쳤고 시신을 꺼내 구리 채찍으로 300대를 내리쳐 형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만든 후에야 매질을 멈췄다.원한이 사무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쳤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자 오자서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말을 남겼다.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이다. 복수의 화신 오자서의 한 서린 고사다.북한에 억류됐다가 아들을 잃은 미국 웜비어 부부가 최근 북한 자금 29억원을 회수했다. 웜비어 부모는 6년이 지나도록 복수를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엔 북한의 새 자금원인 가상화폐까지 뒤지고 있다고 한다.웜비어 부부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2018년 워싱턴DC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 5억 달러의 손해배상액을 인정받았다. 부부는 이 판결을 근거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북한 자산을 추적해 압류하거나 동결시켰다. 집요한 복수 행각이다. 웜비어 부모는 “죽는 순간까지 악랄한 김정은 정권과 싸우겠다”고 했다. 김정은 정권의 패악이 세계인에게 복수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 좋은 결말을 보지 못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1-20

윤핵관, 왜 여론이 외면하나

김진국 고문 험지(險地) 출마, 퇴진이란 말이 쏟아진다. 여야가 따로 없다. 총선이 얼마 안 남았다. 그동안 다져온 지역구를 포기하고 낯선 곳에 출마하는 건 떨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 험지 출마는 정계 은퇴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그렇지만 정치신인은 아직 선거판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있다면 지금 시작하는 게 굳이 늦은 건 아니다. 따뜻한 온실에 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들판에 나서려니 서러울 뿐이다. 이런 판 갈이가 낯설지는 않다. 카리스마가 있는 당 총재나 대통령이 흔히 밟아온 과정이다.선거 때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도 흔들었다. 3김 청산도 요구했다. 대통령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동안 3김이 이끄는 정당에서 다른 목소리는 파묻혔다. 조금만 다른 목소리를 내도 정(釘)을 맞았다. 지역주의에 기초한 줄 세우기,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 여기에 반발한 젊은 정치인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했다.그렇지만 3김씨 가운데 두 사람은 대통령이 됐다. 다른 한 사람은 내내 이인자로서 힘을 유지했다. 이들은 지역주의 정치의 책임을 벗어나기 어렵지만, 한편으론 지역의 정서, 한(恨)을 대변하는 정치적 상징이기도 했기에 이루어낸 성과다.그들은 ‘대통령 병(病)’에 걸렸다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경쟁을 벌이느라 의정 활동을 독려하는 역할도 했다. 호남과 영남이라는 온실에서 편하게 당선된 의원들 가운데 나태하고, 지역민들의 원성을 받는 의원들은 과감하게 교체하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지역할거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이철승 전 의원처럼 지역에 뿌리가 깊은 거물 정치인들도 맥을 못 추고 쓰러졌다.물갈이의 긍정 효과와 함께 비주류는 발을 못 붙이고, 총재에게 충성경쟁을 하는 비민주적 정당 문화를 뿌려놓았다. 대통령이나 당 대표의 권위가 그때만은 못하다 해도 극심한 진영화의 영향으로 양대 정당의 공천이 당락의 필수조건처럼 작용한다. 유권자보다 공천위원이 당락을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니 국민의힘에서 나오는 ‘윤핵관’과 영남 다선 의원의 험지 출마론, 민주당의 86정치인 용퇴론, 친명(親明) 험지 출마론이 본선보다 더 치열한 싸움판이 되고 있다. 사실 권력자와의 친소(親疏) 관계, 출신 지역이나 나이, 성별을 이유로 선거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라는 건 옳지 않다. 나이가 어려도 생각이 고리타분한 인사가 있는가 하면 나이가 많아도 합리적이고, 활동적이며, 사고가 자유로운 사람이 있다. 정치권을 취재하다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절감할 때가 많다.문제는 ‘윤핵관’이나 86 정치인들을 공격하는 말이 왜 여론의 호응을 얻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의 문제는 모두 윤 대통령의 책임이다. 그렇지만 정치 경험이 없는 윤 대통령 가까이에서 조언을 해온 ‘윤핵관’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소통이 막히고, 독단적으로 흘러간 임기 초반의 시행착오는 사실 정치를 모르는 윤 대통령보다 조언자들의 책임이 크다. 적어도 윤 정부의 정치 향방을 좌우할 요직에서는 물러나라는 여론이 비등한 이유다.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 평민당 의원들에 대한 호남의 불만이 팽배했었다. 평민당 공천만 받으면 말뚝을 꽂아놔도 당선된다고 하던 시절이다. 나를 안 뽑으면 누구를 뽑을 거냐는 오만하고 나태한 의정 활동이 지역민의 감정을 건드렸다. 김 전 총재도 과감하게 물갈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이 되려면 더 열렬한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남도 마찬가지다. 일부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는 지역도 있지만 국민의힘 공천은 본선보다 더 어려운 관문이다. 최근 윤 대통령의 정치 행보에 변화가 생겼다. 선거가 가까워졌다는 절박감,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받은 충격, 지지부진한 여론 지지율 등 바뀌지 않을 수 없는 요인들이 많았다. 어떤 요인에 따른 것이든 바뀌는 만큼 지지율이 움직인다. 선거 전략은 따져봐야 하지만, ‘윤핵관’이건, 영남 지역 의원이건, 여론이 인요한 혁신위원장을 주목하는 이유를 새기고, 반성해야 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1-19

꼼수 물가인상

우정구 논설위원 물가가 올라가면 인플레이션, 물가가 내려가면 디플레이션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는 물가가 올라가면 경제가 상승세를 타는 것으로 보고 긍정적 신호로 여긴다.하지만 물가가 급등하면 돈의 가치가 떨어져 서민경제가 괴로워지기 때문에 정부가 물가관리에 더 신경을 많이 쓴다.물가 상승과 서민 고통은 비례한다. 특히 정부가 밝히는 물가지수보다 서민이 느끼는 체감물가가 많이 오르면 서민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하늘을 찌른다.국제통화기금이 올해 한국의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3.6%로 내다봤다. 지난 10월 제시한 3.4%보다 0.2%포인트 올랐다. 내년도 물가상승률 전망치도 기존보다 0.1% 포인트 오른 2.4%를 제시했다. 정부의 물가관리에 비상이 걸린 셈이다.최근 정부는 물가관리 대책회의를 열고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한 실태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슈링크플레이션은 줄인다는 뜻의 슈링크(shrink)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가격은 그대로 두고 제품의 물량을 줄이는 꼼수인상을 말한다. 정부의 물가인상 억제 정책에 동조하는 척하면서 꼼수로 가격을 올리는 행위다. 소비자를 기만 행위로 당연히 단속돼야 한다.슈링크보다 한수 위의 꼼수가 있다. 스킴플레이션(skimflation)으로 가격과 용량은 그대로 두고 원재료를 줄이는 수법이다. 품질을 낮추며 가격인상 효과를 내는 것이다.연말쯤에는 물가가 안정될 것이란 정부의 전망이 빗나갔다. IMF의 예상대로라면 물가와의 전쟁이 길어질 수 있다. 정부의 물가대책이 더 긴요해진 요즘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1-19

길상천(吉祥天)을 아시나요?!

김규종 경북대 교수 며칠 전에 울산에 사는 친구가 단톡방에 낯선 식물 사진을 올린다. 단톡방 참가자들은 서울과 청도 그리고 울산에 산다. 궁금한 두 사람이 ‘뭐야?’ 했더니 ‘길상천’이란 답변이 돌아온다. 길상천이란 글자를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는 청송(靑松) 인근의 ‘길안천(吉安川)’이 떠오른다. 언젠가 청송에 살던 선배 교수를 찾았다가 만난 길안천이 기억난 것이다. 그래서 ‘청송’ 부근에 갔는지 물었더니, 친구에게는 대꾸가 없다.나와 서울에 사는 친구는 길상천이 당연히 어디 ‘지명(地名)’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꽤 늦게 돌아온 답변은 ‘용설란’이었다. “거대하고 보기 힘든 놈이라 사진으로 보낸 것”이란 해설이 추가된다. 폭과 높이가 각각 75에 40년 정도 묵었다는 설명도 보탠다. 나는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어디 있는 길상천인데?” 묻는다. ‘멕시코’라는 답변이 날아든다. “시방 멕시코 갔나?” 했더니 마음만 갔다 왔다는 전갈이 온다.다시 사진을 보니 두툼한 어른 손바닥 크기의 식물 이파리가 겹겹이 엉켜있고, 날카로운 가시가 하늘로 향해 있다. 어찌 보면 거대한 초록 연꽃이 하늘을 향해 벙그는 것 같기도 하다. 참, 이상하게도 생겼군, 하고 혼잣말하는데, 휴대전화가 ‘웅~’ 하고 울린다. 울산 친구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아는 화원(花園)에 2년 넘도록 방치된 길상천이 보기 좋아서 내게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다.실물로 보면 훨씬 더 대단한 녀석이어서 일찍이 보지 못한 ‘대물(代物)’이라는 말도 덧댄다. 울산에서 청도까지 어떻게 하려고, 했더니 마음만 정하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결국 지난 목요일(11월 16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뿌리는 가운데 문제의 길상천을 싣고 그의 거대한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이 도착한다. 후진해서 가까스로 마당 안으로 들어온 차 안에서 길상천은 유유자적인 자태로 앉아 있었다.굵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1시간 반 넘도록 나와 친구는 길상천의 오랜 뿌리를 잘라내고, 거기 덕지덕지 달라붙은 낡은 흙을 털어내면서 악전고투를 거듭한다. 다행히 마당이 넓고, 작업하기에 편리하게 수도가 비치돼 있고, 두 사람의 손발이 착착 맞았기에 분갈이 작업은 착착 진행된다.젖어가는 청바지와 웃옷은 물론, 모자를 쓴 얼굴에도 빗물과 땀이 뒤섞인다. 마침내 길상천을 새 화분에 앉히고, 거실로 집어넣는 데 성공한다.이어지는 ‘은성(殷盛)’한 뒤풀이 자리에서 우리는 입을 모아 오늘의 성공적인 작업을 자축한다. 어떻게 그런 거대한 화분을 선물할 생각을 했느냐, 하는 내 물음에 그는 멋쩍게 웃으며 예술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인 생각 아니겠어, 화답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나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을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그의 담대함과 실행력에 새삼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길하고 상서로운 식물, 길상천!죽기 전에 딱 한 번 꽃피우고, 행운과 복락을 가져다준다는 길상천을 우중(雨中)에 가져와 작업해준 친구의 말처럼 대운이 들어올 모양이다. 길상천과 나라의 안녕을 함께 기원한다!

2023-11-19

스포츠 관광문화 도시로 도약하는 문경

신현국 문경시장 문경새재가 자리하고 있는 문화와 관광의 도시. 국군체육부대가 위치하고 2015 세계군인체육대회를 유치·개최한 스포츠 체육도시. 사과와 오미자의 주산지. 문경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대표 이미지이다.연간 4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문경새재와 철로 자전거, 에코랄라 등 풍부한 관광자원은 중부내륙 최대의 관광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여기에 전국 최고의 스포츠 인프라와 우수한 문화·관광자원을 연계한 융복합 스포츠 산업 육성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문경시는 전국 최고의 문경 국제소프트테니스장, 시민운동장, 배드민턴 전용 경기장, 온누리 스포츠센터, 국제클라이밍센터, 문경야구장, 파크골프장 등 스포츠 관광도시의 명성에 걸맞은 다양하고 우수한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또한, 문경시 마성면 남호리에 설치 중인 다목적 야외씨름훈련장은 야외 공연도 겸할 수 있는 다목적 훈련장으로 올해 10월에 준공을 앞두고 있다. 호계면 호계리에 조성 중인 필드하키장은 내년 10월에 사업을 완료해 필드하키 국제대회를 유치, 전 세계에 스포츠 도시 문경을 홍보하기 위해 조성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최근 급증하는 테니스 이용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 부족을 해소하고 이상 기상 여건에 따른 제약을 해소하기 위한 ‘실내테니스 경기장 조성사업’ 추진하고 있다. 사업부지 전체 토지 보상은 지난 5월 완료했으며, 내년 1월 실시설계용역 후 25년 12월에 준공할 계획이다.문경시는 전국 어디에서나 2시간대에 접근이 가능한 대한민국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이다. 국제규격의 최신시설을 갖춘 국군체육부대를 비롯해 전국 최고의 스포츠 인프라도 갖추고 있다. 우수한 문화·관광자원을 연계한 융복합 스포츠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각종 스포츠대회와 전지훈련의 성지로 거듭나 국내·외 스포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면 코로나로 인해 움츠렸던 지역경제에 불을 지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1%의 가능성에도 도전한다는 긍정의 정신으로 한국체육대학, 대한체육회, 국민체육진흥공단 등 체육 관련 공공기관 및 유관단체를 집중적으로 유치해 문경을 스포츠의 요람으로 만들 계획이다.이를 위해 아시아하키연맹 정기총회, 전국단위 육상·유도·탁구·테니스·태권도·씨름 등 70여개 각종 대회를 47억 원의 예산을 들여 국군체육부대 및 지역 체육시설에 분산 개최를 통해 정치권은 물론, 체육인 및 동호인에게 스포츠 도시 문경을 각인시켜 나갈 것이다.문경시는 올해 아시아하키연맹 정기총회와 전국단위 육상·유도·탁구·테니스·태권도·씨름 등 국제대회 2개, 전국대회 45개, 도 단위 대회 19개, 시 단위 7개 등 총 73개 대회를 유치했다. 73개 대회의 절반이 올해 신규로 유치해 개최되거나 개최될 예정이다.또한, 2015 세계군인체육대회 성공적 개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2024년에는 세계 60여 개국 6천여 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하는 세계 최대의 태권도 축제인 ‘2024 세계태권도 한마당’과 ‘2024 아시아 유·청소년 유도대회’, ‘2024 국무총리배 세계 바둑선수권 대회’ 등 굵직한 국제대회 3개를 이미 유치했으며, 2025 아시아소프트테니스선수권대회와 2031 세계군인체육대회 유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올해로 25회째 맞는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명예 관광 축제인 2023 문경찻사발축제 기간에는 ‘문경새재배 파크골프 대회, 전국 생활 체육대 축전, 동아일보기 전국 소프트테니스대회’ 등이 개최됐다. 경기 관계자 4천여 명 정도가 축제장을 방문해 생활자기 및 명품 도자기 경매에도 참여해 ‘문경찻사발축제 경제효과 137억 돌파’에 일조했다.공공기관 이전을 위한 정치권에 대한 호소는 물론, 관련 부처와 기관 설득 작업에 모든 전력을 쏟을 것이다. 아울러, 지역발전을 위한 개발 사업들과 산적해 있는 여러 과제들과 각종 행정절차를 긴장감을 갖고 속도를 내어 분명한 결과를 이끌어 낼 것이다.마지막으로 문경시의 슬로건이 ‘긍정의 힘 yes 문경’이다. 긍정적인 마인드와 최고의 친절정신으로 공공기관 유치와 문경 발전을 위한 개발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문경의 백년대계를 다질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할 방침이다.

2023-11-19

누룽지

며칠 전 친정 엄마가 누룽지를 보내왔다. 일찍 출근하는 남편이 입맛이 없다기에 끓여 주었더니 고소하다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좀 더 구하고 싶어 전화를 했더니 집에서 손수 만든 것이라며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냉동실에 오랫동안 두었던 찬밥 덩어리를 꺼냈다. 알알이 흩어져 먹을 수 없는 식은 밥을 프라이팬에 올렸다. 중간 불에서 밥을 주걱으로 꾹꾹 눌렀다. 어느 정도 눌으면 약한 불에서 은근히 굳히면 된다. 노르스름하게 누룽지가 만들어지는 재미에 식은 밥을 자꾸 올렸다. 외출 준비를 하면서 나갈 때 ‘가스 불을 끄고 가야지’ 해놓고 백지 상태로 그냥 나가 버렸다.까마득히 잊은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백화점에서 즐거운 시간에 빠졌다. 아이들 옷도 사고 우리 옷도 사고 화장품도 구경했다. 쇼핑을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까페에서 커피도 한잔 하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나지 않는 수다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배에서 어김없이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백화점 식당가로 갔다. 친구와 나는 알밥을 시켰다. 진동 벨을 받아들고 우리 번호가 뜨길 기다렸다. 잠시 후 식사가 나왔다. 알밥을 받아들고 지글지글거리는 눌은밥을 비비는 순간 집에 켜 두고 온 가스 불이 생각났다. 머리가 하얘졌다. 아무리 필름을 되돌려 보아도 불을 끄고 온 기억이 없다.쇼핑한 모든 것을 친구에게 집어 던져두고 비비다 만 알밥도 팽개치고 주차장까지 마냥 달렸다. 차에 비상등을 켰다. 빨간 신호등을 마구마구 지나쳤다. 좌회전을 해야 하는 차선에서 직진 차량에 막혀 갈 수가 없었다.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나에게 이전부터 따라 왔던지 경찰차가 막아섰다. 경찰 한 분이 다가와 내 차의 창문을 내리라는 손짓을 보냈다.“무슨 일이십니까?”잔뜩 긴장했던 나는 경찰을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뭔가 해결을 해 줄 것 같았다.“아저씨…. 우리 집에 불났어요”집이 어디냐고 묻고는 경찰차를 따라 오라고 했다. 호루라기를 꺼내 사거리 중간에 서서 모든 차를 다 막아 세웠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다른 경찰 한 분이 차량 지붕에 빨간 등을 꽂더니 갑자기 사이렌 소리를 내며 창문으로 손을 꺼내어 뒤로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경찰차가 막힌 길을 뚫어주었다. 나는 경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집까지 왔다. 가는 동안 조금씩 정신이 들면서 문뜩 ‘혹시 내가 가스 불을 끄고 왔으면 어쩌지’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온 아파트가 불길에 휩싸여 소방차가 와 있으면 어떡하나 했던 염려는 잠시 뒤로 미뤘다. 생각보다 평온한 공기에 안심하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주방 바닥이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몇 번의 경보음이 났겠지만 아무도 들여다 봐 주지 않았으니 주방 스프링클러가 작동해 불을 진정시켜 놓았다.대학을 졸업한 후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었다. 바쁘게 돌진하며 살더보니 배터리 다 된 네온사인마냥 깜빡거리니 겁이 살짝 나기도 했다. 오후 내내 주방 바닥의 물기를 닦아냈다. 이전 같으면 물기 묻은 주방 바닥이 일어나 있는 것도 속상하고, 집에 불 냄새가 나는 것도 싫었을 텐데 그냥 한 번 실컷 웃고 말았다. 김경아 작가 꽉 막힌 도로를 달려오며 맥없이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지만 두려움의 불길을 지나면서 다시 한 번 삶의 모습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값비싼 화장품 하나 사는 것으로, 명품 가방 하나 사는 것으로 나의 세련됨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마흔의 끝자락에서 조금씩 깨달아 간다. 일류 스테이크가 아니고 눌어붙은 누룽지처럼 은근히 또 기억나게 하는 깊은 속이 진정 나이 들어가는 것임을 조금씩 알 것 같다.눈이 좀 침침하고 기억이 좀 깜빡거려도 사람들 속에 묻혀 주변의 꽃과 풀도 눈에 담을 줄 아는 느림이 세련된 것임을 알 것 같다. 피곤하면 어디든 앉아 쉬고 누군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낼 줄도 아는 여유를 알아가며 익어가고 싶다. 다른 이의 탁한 목구멍을 뻥하고 뚫어주며 불편한 속을 달래주는 누룽지처럼 깊은 맛을 내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2023-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