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남달랐던 ‘천재 아티스트’가 그의 노래 ‘아침이슬’처럼 홀연히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하늘이 보내준 보물, 큰 산과 같은 어른, 세상이 빚진 분, 시대를 노래한 음유시인, 어둠을 밝혀준 성자” 등 찬사가 끊이질 않는다. 문화예술계는 물론이고 정계와 법조계, 수많은 시민들까지 그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했다.
이러한 존경과 감사는 사랑과 헌신으로 일관한 청죽(靑竹)같은 삶의 결과였다. 엄혹했던 시절,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 시위에서 불렸다는 이유로 ‘운동권 학생’으로 낙인찍혀 엄청난 고초를 겪으면서도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버리지 않았다. 독재정권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생계를 위해 봉재공장과 탄광에서 일할 때, 그리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때에도 언제나 사회적 약자를 먼저 생각한 그의 삶에는 변함이 없었다.
‘영혼이 아름다운 어른’이 남긴 가르침은 너무나 크다. 무엇보다 큰 감동은 그가 우스갯소리로 했다는 ‘뒷것’ 정신이다. 그는 무대 뒤에서 일하는 자신을 ‘뒷것’이라 낮추고, 무대 앞의 배우들을 ‘앞것’이라 높이면서 묵묵히 뒷바라지 했다. 사재를 털어 만든 소극장 ‘학전(學田)’은 그의 말대로 가난한 예술가들을 키우는 ‘못자리’였으며, 이곳에서 설경구·황정민·장현성·김광석·박학기 등 수많은 스타들이 배출되었다. 앞것에 환호하고 서로 앞것이 되려고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그의 ‘뒷것 정신’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뒷것 정신’은 양지가 아니라 음지,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서는 정신이다. 그의 노래 ‘상록수’는 공장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선물한 것이었고, ‘봉우리’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해 낙담한 선수들을 위해 만든 노래였다. 공연 4000회를 기록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었고, 수익성 없는 ‘아동극’을 무대에 올린 것도 돈이 아니라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서였다. 이러한 것들은 그가 이미 대학시절 달동네 판자촌에서 봉사했던 ‘신정야학’과 ‘해송유아원’의 연장선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만약 그가 돈을 벌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재능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권유와 정권의 유혹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맑은 뒷것 정신’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늘 사회의 명암(明暗)을 균형 있게 보아야 하며, 밝음(강자)만 찾고 어둠(약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처럼 ‘맑은 눈’과 ‘고운 마음’이 있어야 돈·권력·명예의 아귀다툼으로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한평생 꿈과 희망을 심고 가꾸었던 상록수였다. 고인의 영정이 33년을 함께했던 학전(현재 아르코 꿈밭극장)을 떠날 때, 제자 이인권이 색소폰으로 연주한 노래 ‘아름다운 사람’은 바로 김민기였다. 약자의 아픔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었던 ‘큰 어른’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위대한 뒷것 정신’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