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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등록일 2024-08-13 18:42 게재일 2024-08-1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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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이미 라면으로 향해 있다. 가능한 빵이나 라면, 국수 등 탄수화물 섭취는 줄이시고 단백질 섭취를 늘이세요. 짜게 드시지 마시고. 아파트 같은 동 옆집에 살고 있는 의사가... /언스플래쉬
마음은 이미 라면으로 향해 있다. 가능한 빵이나 라면, 국수 등 탄수화물 섭취는 줄이시고 단백질 섭취를 늘이세요. 짜게 드시지 마시고. 아파트 같은 동 옆집에 살고 있는 의사가... /언스플래쉬

탄수화물과 염분의 문제다. 입술을 혀로 적시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 초조함은 단순히 배가 고픈 것과는 다른 것이다. 전일 저녁 먹다 남겨놓은 사과 한쪽을 집어 먹거나, 저번 주에 선물 받고는 아직 개봉하지 않았던 호주산 다크 초콜릿을 입에 넣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냉동실의 식빵을 떠올렸지만 마음은 이미 라면으로 향해 있다. 가능한 빵이나 라면, 국수 등 탄수화물 섭취는 줄이시고 단백질 섭취를 늘이세요. 짜게 드시지 마시고.

아파트 같은 동 옆집에 살고 있는 의사가 출근길 승강기 안에서 말해준 기계적인 답변이 떠올랐지만 어차피 안다고, 들었다고 다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난번 마트에서 마주쳤을 때 그 원장의 장바구니에는 라면이 들어있었다. 지금 내 속엔 ‘뭐 어때?’ 하는 마음이 더 크다. 그럼에도 선뜻 라면봉지에 손이 가지 않는 것은 최근 들어 잦아진 속쓰림 때문이다. 지금 라면을 먹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더부룩해지고 명치 부위가 타들어가듯 아려올 것이 분명하다. 입이 원하는 것과 속이 거부하는 것 사이. 나의 선택은 라면이다. 입이 원하는 것은 지금의 일이고, 속이 거부하는 것은 이후의 일이다.

라면에 만두까지 넣어 끓여먹는다. 이제는 냉장고 문을 열고 닫던 손길을 멈출 수 있다. 그리고는 부푼 배를 감싸 안고서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나의 휴가 셋째 날 아침은 라면으로 시작되고 티브이로 이어진다.

보험광고는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늦은 저녁이나 새벽 시간에 주로 보이던 것들이 요즘은 아침나절에도 보인다. 예전에도 이랬을지 모른다. 내 눈에 이제야 들어오기 시작한 것일지도. 팔십이 뭡니까, 백세를 준비해야죠. 홈쇼핑 보험 판매 호스트의 말에 그렇지, 하다가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하며 채널을 돌리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채널을 고정한 채 티브이 앞에 앉아 있다. 가입해둔 보험들이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보험증서를 꺼내어 살펴보지는 않는다.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어차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뒤에야 살펴볼 것들이다. 보험에 가입할 무렵, 그러니까 친구나 옛 동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보험회사를 다니던 때에는 요즘과는 달리 사망 이후에 대한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무엇보다도 그들, 친구들이나 옛 동료들에게 십시일반, 상부상조하듯 보험가입을 하던 시기였다. 물론 그들은 자세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설명을 했지만, 애초에 나는 내용에 관심이 없었다. 말이라도 잘 들어 둘 걸. 후회되지만 그렇다고 지금 보험증서를 꺼내어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조건들을 살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음에 한 번에 몰아서 살펴봐야지, 다짐을 반복하는 정도. 어떻게 죽어야 보험금이 잘 나올지를 살피기에는 아직 젊다. 잘 살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아내나 아이들이다. 그들 삶의 문제이니까. 그들이 살펴야 할 것들은 또 있다. 마침, 상조. 상조회사의 선전들이 이어진다. 주로 노인들의 시청시간-오전이나 늦은 밤-에 맞추어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상조회사가 대신 해줄 일은 노인들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노인들의 자식들 문제이지. 사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고 가라는 뜻일까?

채널을 돌린다. 이번에도 보험이다. 지겹지만 그럼에도 치매나 뇌졸중 등을 다루는 보험 상품이나 암의 진단과 치료에 대한 보험, 그리고 실손 보험에는 눈길이 간다. 그것들은 입을 맞춘 듯 묻는다. 요즘 세상에 암이 대숩니까? 발달된 치료법으로 치료할 수 있지요. 하지만 늘어난 치료비은 어쩌시려고요? 가족들은요? 어쩌면 벌써부터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 일이었을 지도.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병원 신세를 져본 적이 없는 나는 아쉬운 적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이들 보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일주일간의 휴가 덕분이다. 어떻게든 연차휴가를 모두 사용하라는 회사 방침 덕분에 모처럼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그러나 혼자만의 휴가일 뿐. 가족들이 다 같이 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혼자라도 어디든 다녀오세요. 말들은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혼자서 여행을 다닌 적도 없었고 그런 여행을 상상해본 적도 없다.

나의 선택은 ‘집에서’다. 늦은 아침 일어나 모두들 나간 텅 빈 집에서 빈둥거리다 친구들이 직장에서 돌아올 즈음 약속해둔 장소에서 친구들을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 만나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지만, 절대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집이다. 그 시간을 티브이와 함께 한다. 긴 시간 나와 함께 해 주는 것은 보험광고만이 아니다. 내 건강을 걱정해주는 프로그램 또한 너무나도 많다. 시간대만 잘 조절한다면 하루 종일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제 겨우 휴가가 삼 일 지났음에도 전문가부터 연예인 패널까지, 질병으로부터 회복하고 살아 돌아온 이들의 수기가 곁들여져 쏟아지는 건강정보는 내가 평생 들었던 건강에 관한 정보를 넘어선다. 당신의 혈관은 어떠십니까? 가끔씩 온몸에 힘이 빠지듯 어지럽거나 시야가 흐려지지는 않습니까? 예전에는 분명히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이름들은 없으십니까? 묻는 티브이 앞에서 나는 애써 기억하지 않았던 일들을 떠올리거나, 침침해지는 눈이 눈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나, 가끔씩 뻐근해오던 목 뒷덜미를 만지며 자신의 혈관 속을 상상하는 것이다.

고무관 같은 갈색의 벽을 가진 혈관이다. 혈액의 붉은 파도를 타고 놀던 노란색 튜브, 콜레스테롤들의 수가 점점 많아진다. 갈색의 벽에 들러붙고 서로를 붙잡아 혈관을 막기 시작한다. 이윽고 혈관은 막혀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혈액들과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혈액들이 서로 뒤엉켜 아우성을 지른다. 그러다 제풀에 쓰려져 혈전이 되거나 부풀어 오른 혈관의 약한 곳을 뚫고 쏟아져 나간다. 운이 좋아 혈관이 터지지 않아도, 혈전으로 막힌 혈관 뒤쪽으로는 말라버린 저수지 바닥처럼 하얗게 변한 뇌 세포들이 살려 달라 아우성을 지르다 쓰러진다.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린다.

“에이씨.”

채널을 돌린다. 다음 채널에서는 허리가 아프지는 않은지, 오른쪽 발가락 끝에 찌릿한 전기가 오지는 않는지 묻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보험광고가 나올 것이다. 보험광고가 끝나고 나면 상조광고가. 상조광고 이후에는 간간히 난민이나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주자는 캠페인광고가 이어진다.

잘 짜여진 이야기다. 당신은 건강한가? 자신 있는가? 감당할 수 있는가? 보험에 가입하라. 그럼에도 결국은 죽을 것이니 사후를 준비하라. 충고에 충실했다면 이제 착한 일을 하라. 마음의 평안을 얻으라.

첫날은 불편했고, 두 번째 날은 기억할 수 있었고, 세 번째 날인 오늘, 지금 나는 1588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다. 해당 지역 담당 설계사가 전화를 할 것입니다. 곧 전화벨이 울린다. 설계사다. 그에게는 익숙한 만남이다. 보험에 가입을 하지 않는다면 닥쳐올 불행에 속수무책으로 맞서야 할 것입니다. ‘만일’이 아니다. 무겁고 섬뜩한 예언이었다. 보험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평안한 마음을 얻을 것이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큰 문제없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그는 나를 사장님으로 만든다. 이틀 후 휴가가 끝나기 전에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이게 뭐하는 짓이람. 후회하는 마음이 약간은 들지만 그래도 이제는 챙길 나이가 되었다, 스스로 다독인다.

“사장님, 최근에 건강검진에서 이상한 결과라든가, 병명이 있는 질환을 진단 받았다던가 하신 적은 없으시지요?”

“아. 병원에 가본 적이 없어서.”

사실이 그렇다. 감기 정도로 병원에 가지는 않는다. 검진을 받으라, 직장 담당부서가 몇 번 재촉을 하기는 하지만, 잠깐의 재촉일 뿐 그 시간에 일하고 있는 나를 비난하거나 압박을 주지는 않는다. 나는 아픈 적이 없었나? 어딘가 아팠던 것 같기도 하다. 왼쪽 어깨가 결린 적이 있었고 엉덩이 위쪽 허리가 묵직했다. 소화가 안 되고 헛배가 불러와 하루 종일 굶은 적도 있다. 체중도 좀 주는 것 같고. 병원에 가야하나? 아니지. 병원 내원 기록이 있으면 보험 가입이 거절되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래, 보험 가입 먼저 하고. 그리고 병원에 가봐야겠다. 보람찬 휴가.

“그래요? 그런 분은 잘 없으신데. 사장님 연배면 보통은 적어도 한두 번은 병원에서 검진을 받으시거나 하시는데. 하여튼 병원 내원 기록이 없으신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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