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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느닷없는 마음

등록일 2024-11-19 18:21 게재일 2024-11-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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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중 하나가 베트남에 사막이 있다 이야기했고 사막에 샘이 하나 있는데 요정의 샘이라고, 이름이 너무 예쁘지 않냐고…. /언스플래쉬

연은 무이네를 다녀온 뒤 인에게 헤어지자는, 느닷없는 통보를 했다. 인은 무척이나 당황했고 당황한 만큼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왜? 라고 묻지도 못했다. 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 라는 짧은 답뿐이었다. 인은 자리로 돌아와 입고된 책을 확인하고 주문일자와 주문자를 찾아 종이 가방에 나눠 담았다. 어휴, 인은 매대에 깔린 도서를 정리하다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인은 사다리에 기대서서 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왜?’

인과 연은 이 년 전 만났다. 지역에서 열린 도서축제에서였다. 해변을 주 무대로 한 축제였기 때문에 출판사나 책방들의 천막들이 해변을 따라 나란히 자리를 잡았고 인의 책방 또한 그들 틈에 끼었다. 축제 전날부터 바람이 세게 불었고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졌다. 인은 천막 앞으로 차양을 길게 내고 매대 앞쪽의 책에 비닐을 씌웠다. 인의 목덜미에는 바람이 품은 소금기과 뭉친 땀이 끈적이듯 흘렀다. 아직 세상은 여름의 끝자락에 머무르고 있었다. 인은 천막의 뒤를 가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나마 불어오는 바람을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지만- 막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천막 뒤로 들이치는 빗방울도 없었고 천막 뒤쪽에는 책을 진열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세 번째 날이었다. 날씨 탓인지 이번 축제에는 예전보다 방문객이 적었다. 방문하는 이들도 가족 단위, 아이들 체험학습이나 기념품 구매 등이 목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만은 젊은이들, 연인들이 제법 많이 몰려들었다. 메인 무대에서 열릴 예정인 초청 공연의 영향이었다. 공연 두세 시간 전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행사장이 북적거렸고 줄지어선 천막들을 둘러보며 책을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 게 중 더러는 책을 사기도 했고 더러는 책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만 했다. 인은 그들을 비난하거나 쫓지 않았다. 북적거리는 천막이 그저 좋았다. 그것도 잠시, 곧 공연이 시작된다는 알림에 모두들 메인 무대로 몰려갔다. 인은 아무도 없는 천막에서 어질러진 책을 정리하다 뒤를 보았다. 마침 썰물이었고 수평선 넘어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도서축제에 랩이라니. 인은 메인 무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알아듣기 힘든 랩을 견디며 천막 앞으로 고개를 빼 무대 쪽을 보았다. 번쩍이는 조명 아래 객석을 가득 메우고 넘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왔지? 궁금해 할 즈음,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란 물방울 원피스를 입은 단발머리였다. 공연을 안 보는 사람이 있네. 인은 고개를 살짝 숙였고. 이어서 안녕하세요, 책방 수북입니다, 큰 소리로 말했다. 단발머리는 멍하니 있다 곧 아, 안녕하세요, 하고 대답을 하고는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연이었다. 단발머리는 잠시 진열된 책을 만지작거리다 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화번호 주세요.

- 신기하지 않아? 내 이름이 인이고 자기 이름이 연이니. 이런 것을 두고 인연이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신기하기는 하지만 진짜 인연일지는 아직 모르지. 이름으로 대충 때워 넘어가려고 하지 마.

-아니, 전화번호를 먼저 물어본 쪽은 자기잖아. 이제 와서 이러나?

둘이 손을 맞잡던 날, 인이 물었다.

-그런데 나 어디가 좋아서 내 전화번호를 물은 거야?

연은 아마도 노을 때문이었을 거라 대답했다. 노을? 인이 되물었고 연은 응 노을, 하고 대답했다.

-글쎄 천막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지나치는데 자기가 보였지 뭐야. 그런데 그 순간 자기밖에 안 보이더라고. 그런 것 있잖아. 자기만 선명하게 들어오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흐릿해지는 그런 것,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막…. 느닷없이 자기를 갖고 싶은 마음이…. 정말 느닷없었다니까.

연은 아마도 노을이 자기 등 뒤에서 뿜어낸 빛들이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고, 그런데 노을을 등진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냐고, 아마 그 시각, 그 자리, 그 각도에 인이 서 있었던 것 이런 모든 조화가 만들어 낸 것이지 않겠냐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자기 번호를 얻어야겠다 마음먹었지. 그래서 물어본 것이고. 자기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더라. 누구든 아무나 번호 물어보면 다 줄 것 같던데? 그렇지? 자기는 내가 아니라도 번호를 줬을 거잖아.

둘은 느닷없는 입맞춤을 했고 연인이 되었다.

연은 지난 달 친구 세 명과 베트남으로 여행을 갔다. 갑작스레 가게 된 여행이었다. 다 같이 있던 자리, 누군가의 생일 파티를 명목으로 모인 자리에서 친구 중 하나가 베트남에 사막이 있다 이야기했고 사막에 샘이 하나 있는데 요정의 샘이라고, 이름이 너무 예쁘지 않냐고, 그리고 사막에서 맞이하는 해넘이가 그렇게 멋지다 한다고 덧붙였다. 핸드폰으로 검색한 지명이 무이네라는 것을 또 다른 친구가 찾아냈고 모두들 무이네의 사막 사진에 와아, 하고 감탄을 하던 중 생일이었던 친구가 말했다.

-우리 가자. 무이네. 동네 이름도 이쁘네. 무이네.

호치민에서 판티엣으로 그리고 무이네로. 연과 친구들은 차량을 렌트해서 달렸다. 출발한 지 세 시간, 네 시간 쯤 지났을까 무이네에 들어섰다. 무이네에서만 3박을 예정하고 있었기에 급하지도 않았고 웬만한 것은 모두 둘러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연과 친구들은 티격태격 댔다. 두 명은 활동적인 일정을 가지기를 원했고 두 명은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연은 조용한 쪽이었다. 연은 무엇보다 지치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해넘이를 보고 싶었다.

결국 둘째 날은 두 명씩 짝을 지어 따로 셋째 날은 다 같이 지내기로 일정을 짰다. 연과 친구가 찾은 곳은 사막이었다. 화이트 샌듄과 리틀 그랜드 캐니언, 요정의 샘을 걸으며 시간을 보내면서 연은 틈만 나면 시계를 보았다. 친구가 뭘 그리 보느냐 물었고 연은 해넘이를 놓치기 싫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모래썰매를 탔지만 몇 번 탄 후 둘은 기진맥진했다.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것은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지만 썰매를 들고 모래 언덕을 오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맑은 하늘과는 달리 바람은 거셌고 바람에 날리는 모래 알갱이들이 팔과 다리, 얼굴을 괴롭혔다. 연은 지친 상태로 해넘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연이가 말했다. 그만 타자. 이제 그만 레드 샌듄으로 가야겠어.

모래 언덕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붉은 물결 같은 모래무늬 뒤로 짧은 그림자가, 모래 언덕 뒤로는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는 짙고 연한 어둠을 만들었고 그 위로 햇살은 막 떠오르는 해와 같이 밝고 붉게 빛났다. 연은 작은 모래 언덕 기슭에 앉아 큰 모래 언덕 너머로 넘어가는 해를 보았다. 해가 언덕 너머로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셋째 날 연은 모든 일정을 친구들에게 양보했다. 무엇이든 친구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겠노라고. 단 한 가지, 한 번 더 해넘이를 볼 수 있게 해 달라 했다. 그날 저녁 연과 친구들은 해넘이를 보았다. 친구들이 이리저리 위치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은 동안 연은 전날 앉았던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해넘이를 보았다. 그들은 다음날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은 인에게 이제 그만 만나자는 느닷없는 통보를 했다.

그날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즈음, 연으로부터 답은 오지 않았고 인은 일찍 문을 닫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은 여전했으나 연을 찾아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연으로부터는 답을 들은 후에, 그런 후에야 무엇을 할지 결정할 참이었다. 밖에 내어 놓았던 입간판을 책방 안으로 들여놓고 있을 때 연으로부터 답이 왔다.

‘그곳에 네가 없었어. 두 번을, 한 참 동안 가만히 찾았는데 네가 보이지 않더라. 일부러 애쓰지는 않았어. 널 처음 본 그 순간처럼 네 모습이 그냥, 아무런 예고 없이 보였으면 했는데, 보이지 않더라고. 내 속에 네가 없는 거지. 네 잘못은 아니야. 그냥 느닷없는 거, 느닷없는 마음, 내 마음 때문이야. 원래 사랑이 그런 거잖아. 느닷없는 것. 우리도 느닷없이 시작했잖아. 끝내는 것도 느닷없자, 우리.’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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