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같이 가자, 하지 않았어요? 한 날 한 시에 손 꼭 잡고 눈길 한 번 맞춰보고 고개 한 번 끄덕이고 그러고 가자, 하지 않았어요? 애들 번거롭지 않겠다. 문상객들도 편하겠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아니지, 아니지. 나는 무조건 당신 다음에 가야지. 그래야 당신 가는 길에 꽃도 뿌리고 향도 피우고 내 그동안 당신한테 못해준 것, 잘못한 것 다 갚지는 못해도 꽃도 뿌리고 향도 피우고 그거라도 해야지. 그래야지. 난 무조건 당신 다음에 가야지. 그러지 않았어요? 결국은 또 말 뿐이었네요. 당신 귀에 인이 박히도록 했던 말, 내가 수없이 내뱉었던 그 말, 맨날 말만하고 바뀌는 게 없다는 그 말을 내가 또 하고 있어요. 준연은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그저 입안을 맴도는 말 덩이들을 꾸역꾸역 삼키는 중이었다. 허리께를 더듬어 닦을 것을 찾았으나 손에 닿는 것이 없었다. 그저 흐르는 것은 흐르는 대로 둘 수밖에. 하긴 언제 이렇지 않았던 때가 있었나. 애들은 괜찮을 거예요. 해준 것 없이 잘해온 애들이니. 내딛는 걸음마다 걸리는 것 없이, 바로가든 돌아가든 지들 가고 싶은 곳으로 잘 걷는 것 보았잖아요. 첫 걸음을 뗄 때 알아보았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저 우리 같을까 싶어, 넘어질까 싶어 그저 엉덩이를 받힌다 어깨를 잡는다 호들갑을 떨었지요. 넘어지면 그게 또 뭐 대수라고. 그래도 대견하지 않아요? 당신도 그랬잖아요. 참 대단한 녀석들이라고. 애들은 잘 할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여긴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해졌어요. 검고 붉은 감나무 잎이 모란 아래 쌓였어요. 당신이 참 좋아했던 모란인데. 십칠 년쯤 되었다고 십칠만 원에 샀었지요. 지금은 오십만 원쯤 되겠네요. 이제는 제법 꽃이 많이 핀답니다. 자주 빛 빌로오드 꽃이 활짝 필 때면 어쩔 줄 몰라 하던 당신이었는데. 라탄 의자에 앉아 모란을 보며 담배를 피던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나 당신이 담배 피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그 모습 하나는 조금 좋았어요. 아니 그 순간 당신은 제법 멋졌어요. 모란과 당신과 하얗게 피어오르던 담배 연기와…. 그런 것들로 가득했던 봄.
참, 올해는 유채도 활짝 피었어요. 몇 해 전부터 집 옆 공터에서 보이더니 이번 봄은 장관이었어요. 길 가던 사람들이 사진 찍겠다고 줄을 섰다니까요. 유채를 보며 당신, 아니 우리를 생각했어요. 그 해 봄, 파랑과 노랑 사이에 우리가 있었지요. 화산석 돌담을 사이에 두고 당신은 노란 유채밭을 등지고 있었고, 나는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었어요. 당신과 나 사이 현무암 담장 틈을 오가는 바람이 당신 옷자락을 흔들었어요. 이리 오라, 당신이 손을 뻗어 나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지요. 하지만 난 쉽게 발을 떼지 못했어요. 바다가 항상 자기 자리에 있는 것처럼, 제가 서 있던 자리는 익숙하고 오래된 제 자리였거든요. 봄이 되어야 피어나는 유채꽃,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유채꽃. 당신은 제게 그런 어떤 존재였어요. 알지요? 저는 결혼이란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었다는 것도. 얘기했지요? 그때의 저는 한 곳에 머물지도, 한 사람에게 책임을 다하고 싶지도 않았다는 걸. 그때 제가 제법 모질었지요.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지금 서로를 어루만지고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은 순간의 감정이라고.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지요. 미안해요.
우리가 다시 마주 한 순간이었어요. 화산석 돌담은 접견실 유리창인 양 놓여있었고, 어색한 눈빛과 말끝을 흐리는 안부인사가 이어졌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아쉬운 거예요. 당신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마음이 제 속을 채우는 거예요.
유채꽃이 예쁘네. 나, 사진 한 장만 찍어주면 안될까? 사실 당신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고 담장을 넘어 갔지요. 담장 틈 사이로 바다 내음이 들어왔고 우리는 같이 사진을 찍었어요. 손을 마주 잡았고 그렇게 우리는 평생을 약속했고요.
어제는 조금 덜 익은 감을 몇 개 따다 식탁에 올려두었어요. 좀 두었다 맛이나 보려했지요. 그냥 두었다가는 직박구리들이 다 쪼아 먹을 것 같았거든요. 걱정 말아요. 손이 닿는 곳 위로는 따지 않았으니. 따지도 못해요. 사다리든 무엇이든 밟고 올라서는 일은 이제 못한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몇 계단 밟고 오르지도 못할 거면서 뭔 애를 그리도 썼을까요? 그때 그 시절 우리 말이에요. 암튼, 작년에는 해갈이를 하는지 감이 별로 열리지 않더니 올해는 제법 많이 달렸어요. 그러니 새들 걱정은 안 해도 되요. 그러니까, 우린 이게 문제였던 거예요. 알아서들 잘 사는데 굳이. 그렇지 않아요?
거긴 어때요? 따듯하고 좋아요? 듣던 대로 즐겁고 기쁜 일만 가득합니까? 뭔 재밌는 일이 있을까, 나는 별로 기대는 안 합니다. 그저 당신 얼굴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기는 해요.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면 말이에요. 창을 열어두었나? 준연은 마룻바닥을 타고 오르는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집안의 창들을 떠올렸다. 아침에 환기시킨다고 열었던 창 중에 닫지 않은 것이 있는지, 1층부터 2층까지 머릿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아닌데, 다 닫았는데. 어디서 들어오는 냄새지? 자동차 매연이나 먼지 냄새는 아닌데, 고소한데, 누가 뭘 고나? 아. 장어. 이젠 정말 갈 때가 되었나 봐요. 금방 했던 일인데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글쎄 둘째 아이 목소리가 조금 안 좋더라고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풀이 좀 죽은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당연히 말하지 않을 것이고, 말한다 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고. 그러니 내가 뭘 했을 것 같아요? 알지요? 시장에서 민물장어를 사다 고았지요. 뭐든 해야 했거든요. 아파도 장어, 피곤해 보여도 장어, 슬퍼해도 장어, 만병통치약 같은 장어. 당신이 리듬까지 붙여가며 노래를 불렀잖아요. 장어들이 튀어나올까봐 곰솥 냄비 뚜껑을 손으로 누르고 있는 나를 돕지는 않고 놀리듯 노래만 불렀지요. 아니에요. 가끔 도와줬다는 것도 기억해요. 아무튼 장어를 사다 고았어요. 식혀서 기름덩이를 걷어내려고 뚜껑을 열어두었는데, 그 냄새가 이리 흘러 들어왔네요. 작은 통에 나눠담아야 하는데. 내가 이러고 있네요. 조금은 졸린 것 같기도 하고. 냄비 뚜껑이라도 덮어두어야지. 준연이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나마 답답했던 가슴은 조금 나아졌다. 아니 답답하지 않았다. 발끝의 저림도, 욱신거리던 종아리의 아림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뻐근하던 허리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허리가 없어진 것처럼. 냄새도 창도, 빛도 사라졌다. 벌써 밤인가? 내가 언제 일어났더라? 여기가 어디더라? 간다는 게 이런 건가 봐요. 당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아니었을 거예요. 당신이 가는 길옆에는 제가 있었으니까. 당신 이마며 눈꺼풀이며 입술이며 내 이 두 손으로 다 한 번씩은 쓰다듬었으니까. 다행이었어요. 조금은 부럽기도 하고. 그래요. 할 말은 해야겠어요. 같이 가자 해놓고. 한 날 한 시에 손 꼭 잡고 눈길 한 번 맞춰보고 고개 한 번 끄덕이고 그러고 가자 해놓고. 무조건 나 다음에 간다 해놓고. 나 가는 길에 꽃도 뿌리고 향도 피우고 나한테 못해준 것, 잘못한 것 다 갚지는 못해도 꽃도 뿌리고 향도 피우고 그거라도 해놓고 간다 해놓고. 그렇게 말해놓고. 그럴 줄 알았어요.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맨날 말만. 당신 귀에 인이 박히도록 했던 말, 내가 수없이 내뱉었던 그 말, 맨날 말만하고 바뀌는 게 없다는 그 말을 내가 또 하고 있어요. 거기서 기다려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고. 나 지금 가니까. 가서 또 말할 테니까. 말만 하는 당신이라고.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