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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이기전(李己傳) <하편>

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희수는 전학을 갔다. 희수는 전학을 간다고 기에게 따로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희수가 결석을 했다고 이야기했고 담임선생님은 희수가 전학을 갔다고 대답했다. 그즈음 희수와 기는 짝이 아니었다. 여름방학 이후 둘은 멀어졌다. 그 해 여름, 비가 자주 그리고 많이 왔다. 여름 방학, 반 별로 야영을 가기로 되어있었다. 기의 반이 야영을 가기로 한 날 전날에 비가 왔다. 계곡마다 물이 많이 불어났다. 결국 기의 반은 학교 운동장에서 야영을 했다. 네 명씩 한 조가 되어 텐트를 쳤다. 기와 희수는 같은 조였다. 희수는 멀뚱히 서 있는 기를 끌고 와 밥 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쌀은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물은 얼마나 부어야 하는지. 몇 개의 조를 합쳐 팀을 만들었고 팀별 대항전으로 게임을 하고, 캠프파이어를 했다. 그리고 취침 시간이 되었다. 그 시간에 자는 아이들은 없었다. 어두운 와중에 축구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몇몇은 학교를 빠져나가 오락실로 향하기도 했다. 기와 희수와 같은 조였던 다른 두 명이 그랬다. 한 명은 축구를 하러 갔고, 한 명은 오락실로 갔다. 기와 희수만이 남았다. 기는 희수에게 우리도 축구하러 가자고 이야기 했지만, 희수는 그냥 텐트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둘은 누웠다. 텐트 천장에 매달아 둔 랜턴이 이리 저리 흔들렸다. 랜턴의 빛은 기를 비추기도 했고 희수를 비추기도 했다. 운동장 바닥이라 그런가? 잠자기에 불편한데 하고 기가 생각할 즈음, 혹시 잠들었어? 하고 희수가 물었다. -저기 있잖아. 기야. -왜?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기가 고개를 돌려 희수를 보았다. 흔들리던 랜턴의 불빛이 잠시 멈췄다. 희수의 뺨을 비췄고 하얀 희수의 뺨은 발갛게 물들었다. -기. 너. 내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어떻게 할 건데? 발갛게 물든 희수를 바라보던 기는 일어나 앉았다. 랜턴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말했다. -랜턴 건전지를 갈아야 할까봐. 어두워진 것 같아. 희수가 기를 따라 일어나 앉았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봐. 기수는 랜턴을 풀어 내렸다. 가방을 뒤졌다. 건전지를 꺼내 랜턴 옆에 두고는 전구가 있는 부분을 돌려 풀면서 대답했다. -니 녀석이 날 좋아하는 건 잘 알지. 그러니까 내 옆에 붙어서 따라다니지. 희수는 기의 무릎에 손을 얹었고 기의 무릎을 흔들었다. -아니. 그런 거 말구. 사랑 같은 것 말이야. 기는 랜턴의 건전지를 꺼냈다. 새로운 건전지를 넣으려는데 건전지가 손에서 자꾸 빠져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건전지를 주우려했지만 어두워서 그런지 잘 잡히지 않았다. 건전지를 찾아서 바닥을 더듬던 손에 희수의 손이 와 닿았다. 희수가 말했다. -내가 여자라면, 내가 언젠가 여자가 된다면 날 사랑해줄 수 있겠어? 다음날 둘은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영 이후 방학이 끝나는 날까지 기는 희수를 만나지 않았다. 희수가 편지를 보내고 찾아오기도 했지만 기는 희수를 만나지도 답장을 하지도 않았다. 개학을 하는 날 기는 희수 옆에 앉지 않았다. 희수가 가방을 들고 다가와 기의 옆에 앉으려 했다. 기가 희수에게 말했다. -저리 가. 쳐다보지도 가까이 오지도 말을 걸지도 마 -언제 들어도 멋진 노래이지요. 멋진 날에 멋진 노래입니다. 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디제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사과데이가 사과를 재배하시는 분들의 영농조합이나, 사과가 유명한 지방의 지방자치단체가 처음 제안했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런 곳과는 관계가 없이 시작되었더라고요. 2002년 ‘학교폭력 대책 국민협의회’를 비롯한 시민단체가 학생, 교사, 학부모를 대상으로 화해와 용서의 운동을 벌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월에 둘(2)이 사(4)과 한다는 의미로 날짜를 정했답니다. 학교 폭력이 계기가 되었다지만 어디 학교만의 문제겠습니까? ‘나’로 인해 마음 아팠을 사람들에게 일 년에 한 번 사과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자. 그런 취지의 내용이라면 우리 모두가 동참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사과 농사 하시는 분들께 도움도 되고, 기회를 놓쳐 하지 못했던 사과도 하고, 서로 마음도 풀고. 나쁜 것은 지우고 좋은 것만 남기고. 오늘은 혼자서 좀 길게 떠들었습니다. 쉬었다 가겠습니다. 노래 하나 더 들어야지요. 참. 사과를 받으신 분은 꼭 사과를 하신 분 앞에서 사과를 크게 베어 물어야 한답니다. 그래야 사과를 받아준 것이 된다 하네요. 명심하십시오. 그게 핵심입니다. 한 반에 오십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생활을 하다 보면 비밀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누가 누구와 친한지, 누구와 누구의 사이가 안 좋은지. 그리고 이런 놈도, 저런 놈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놈들, 저런 놈들 중에 나쁜 놈들이 있었다. -어이. 희순. 희수 말고 희순 이라고 하자. 기랑 헤어졌다며. 이제 나랑 사귀자. 응. 뽀뽀도 좀 해주고. 이리 와봐. 나하고 사귀는 거다. 나쁜 놈들 중 한 녀석이 희수를 건드렸다. 희수를 자기 옆자리로 강제로 데리고 갔다. 희수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온 힘을 다해서 저항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누구도 나쁜 한 녀석과 맞서려 하지 않았다. 기 또한 뒤돌아보지 않았다. 희수를 위해 뭐라도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와 희수는 한데 엮일 것이 분명했다. 둘이 사랑이라도 하는 거냐. 희수가 너의 여자친구인거냐.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까 두려웠다. 기가 희수를 외면하는 동안 희수는 나쁜 녀석의 장난감이 되었다. 그해 가을 희수는 전학을 갔다. 녀석을 피해서였다. 학교를 옮겼다고 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쁜 녀석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법이었고, 옮겨간 학교에도 나쁜 녀석들은 있었다. 희수에 대한 이야기는 금방 퍼졌고 희수는 그곳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다. 기에게는 평온이 찾아왔다. 희수가 사라졌다거나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깊지 않은 계곡위로 놓인 작은 다리를 지났다. 건너편 숲 나무들 사이로 청록의 슬레이트지붕이 보였다. 다리를 지나 제법 경사진 비탈길을 올랐다. 비탈길을 넘어서자 평지가 나왔고 평지의 끝에 청록의 대문과 청록의 슬레이트지붕을 가진 단층집이 있었다. 길 끝에는 청록의 대문이, 대문옆 벽에는 망원사라 적힌 현판이 매달려 있었다. 한자가 아닌 한글 현판이었다. 망자는 무슨 망자며 원자는 무슨 원자인지, 기는 궁금했지만 대문 앞에서 머뭇거리지는 않았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청록 슬레이트지붕 아래의 허름한 법당에서 향내가 흘러나왔다. 마당 한구석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공양주가 일어서서 기 쪽으로 다가왔다. 어찌 오셨냐. 그녀가 물었고 기는 스님을 만나러 왔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먼저 부처님께 인사를 드려야 스님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기는 운세를 보거나 상담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공양주의 안내대로 법당에 들어갔다. 백팔 배 정도는 해야 부처님께 인사를 한 것이고 절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라고 부처님께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며 공양주는 불상 아래에 놓인 불전함을 가리켰다. 기는 백팔 배를 시작했다. 희수라면 어쩌지? 내가 기다. 이렇게 말하고 웃으며 손을 잡아야 하나. 그러면 희수가 그래 맞네. 우리 기네. 이렇게 다시 보게 되었네 하고 말하며 반길까?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모르오. 나는 희수가 누군지도 모르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니 찾지 마시오. 세상과 연을 끊었다며 돌아가라 말할까? 그래. 너 잘 만났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이 다 네 탓이니 책임을 져라.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 하느냐. 탓을 할까? 이런 생각들이 땀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무슨 싸움 하듯 절을 하누. 보고 있는 부처님이 어지러우시겠어. 스님을 보러 왔으면 스님 볼 힘은 남겨둬야지. 부처님께 인사만 하다 갈 건가? 뒤에서 보고 있던 공양주가 기를 멈춰 세웠다.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른 후 기는 불전함에 지폐 몇 장을 넣었다. 불전함에 지폐를 넣는 것을 확인한 공양주가 스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공양주가 기를 불렀다. 기와 스님은 마주서서 합장을 했다. -서 계시지 말고 앉으시지요. 스님은 ‘ㄱ’자로 손가락을 구부려 오른쪽 귀 뒤 머리를 긁으며 앉았고 기는 소반을 사이에 두고 스님과 마주 앉았다. 스님은 기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텅 빈 소반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염주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천천히 염주 구슬이 엄지손가락을 넘어 갔다. 스님은 염주를 돌렸고 기는 그것은 보았으며, 공양주는 차를 들고 들어오다 멈춰 섰다. 염주가 세 번 돌았다. 정확히 오십 네 개의 염주 구슬이 엄지손가락을 지나갔을 때 스님이 헛기침을 했다. -아니, 스님을 보러 오셨으면 이야기를 해야지. 뭐하시나. 무슨 이야기든 해보세요. 우리 스님이 다 들어주신다니까. 공양주가 소반에 차를 내려놓으며 기에게 말했다. 기는 네 라고 짧게 대답했지만 말을 잇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멈춰버린 염주를 쳐다보았다. 염주를 쥔 손이 고왔다. -오늘은 제가 먼저 이야기하지요. 스님이 기의 잔에 차를 따르며 입을 열었다. 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낯이 많이 익습니다. 처사님 얼굴이. 아마도 전생에 처사님과 제가 제법 사연이 있었나 봅니다. 나쁜 인연은 아니겠네요. 이렇게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다시 만났으니까요. 하하. 아이고. 별 일이시네. 우리 스님이 먼저 이야기를 다 하시고, 옆에 있던 공양주가 방석을 가지고 와 자리를 잡았다. -부처님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도 기억하는 전생이 딱 하나 있습니다. 전생에 저는 버섯이었습니다. 꽃을 피우고 싶어 하는 버섯이었지요. 옆에 핀 예쁜 꽃들을 보며 버섯은 왜 꽃이 피울 수 없는지 억울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 피고 지는 꽃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꽃이 별 건가. 별과 나비가 찾아와 같이 놀아주면 그게 꽃이 아닌가. 그때부터 버섯은 자기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색깔도 빨강으로 바꾸고 향기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나비 한 마리가 찾아왔지요. 버섯은 너무나 기뻐서 가지고 있던 모든 향을 뿜어내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바람이 불어오는 척, 바람에 흔들리는 꽃인 척 몸을 흔들었지요. 하지만 버섯의 빨강 머리에 앉았던 나비는 잠시 후 버섯이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전생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뒤에 버섯이 어찌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뒷이야기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전생인데. 옆에 앉아 있던 공양주가 하이고. 세상 살다 살다 별일이네. 별일이야. 내 앞에서는 전생이야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으시더니. 우리 스님한테 그런 전생이 있었어요? 하이고. 자신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하이고 하이고를 반복했다. -이제 해결되셨습니까? 꼭 자기 이야기를 해야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술술 일이 풀려나가는 경우도 있지요. 하하. 그런데 처사님. 가지고 오신 종이가방에 든 것은 무엇입니까? 기는 아. 예. 하며 종이가방에 넣어 두었던 사과를 꺼내어 소반위에 올렸다. 공양주가 어. 사과네. 하며 스님을 쳐다보았다. 스님은 물끄러미 사과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의 빛깔이 참 곱네요. 빨강이네요. 처사님. 빨강의 보색이 뭔지 아십니까? 기는 스님의 얼굴을 보며 대답 없이 웃었다. 공양주는 스님과 기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스님은 공양주에게 종이를 가져다 달라 했다. -사과는 다시 저기 놓아두시고 제 글이나 하나 받아 가십시오. 우리 절에 오시는 분들에게 드리는 저의 답이지요. 스님은 글을 써내려갔다. 청산은 나를 보고…….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2-17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이기전(李己傳) <상편>

옆집 아이였다. 청록의 치마를 입은 아이는 빨간 사과 한 알을 들고 서 있었다. 빨간 사과를 내밀었다. 아이의 어깨에 두 손을 얹은 아이의 엄마가 고개를 살짝 숙여 기에게 인사를 했다. -저번 주 금요일 저녁에요. 아저씨께서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실 때 제가 버튼을 잘못 눌렀어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버렸어요. 아저씨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셨고요. 죄송합니다. 기는 사과를 받아들고 아이의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날 일이 마음에 걸렸나 봐요. 사과데이에 꼭 옆집 아저씨께 사과를 드려야 한다고 해서. 아이의 엄마가 이야기했다. 덧붙여 그녀는 주먹을 들어 사과를 한 입 베어 무는 시늉을 했다. -아. 기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아이에게서 받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이도 환하게 웃었고, 기와 아이의 엄마는 다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야. 니 희수라고 기억나나? 그 왜 있잖아, 학교 다니다가 전학 갔잖아. 전학 가서 얼마 안 지나서 자살했다고 소문났던 녀석. 위로는 누나만 세 명인 데다가 곱상하게 생겼었는데. 기, 니가 제일 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가 니들 둘이 사귀냐 면서 놀렸지 않았나? 글마가 살아있더라. 한 달 전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서 동기 한 녀석이 기의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소주 한 잔 따라봐라. 빈 잔을 기 앞으로 내밀었다. 기가 따라준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는 기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엄마가 용한 스님이 있다는 절을 하나 소개 받았다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이 요즘 조금 잘 안 되거든. 엄마도 애가 탄 거지. 하도 성화를 부리기에 따라나섰어. 별로 멀지도 않아. 국도를 따라가다 보니 금방이더라고. 차로 사십 분 정도 걸렸나. 절 이름이 망원사야. 망원사. 제대로 된 절도 아니야. 법당이라고 하나 있는 것도 그냥 슬레이트 지붕으로 덮어 놓았고, 스님이 지내는 방도 컨테이너를 개조해서 만든 방이었어. 스님이랑 나이든 공양주 한 분이랑, 그렇게 둘만 있더라고. 이런 데가 알고 보면 진짜로 용한 곳이라는 거야. 엄마 말이. 기는 언제쯤 희수가 등장할까 궁금했지만 녀석의 말을 굳이 중간에 끊고 싶지는 않았다. 빈 소주잔을 내려놓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녀석의 모습이 제법 진지해보였다. -손주들한테 만 원짜리 한 장 주는 것에도 손을 벌벌 떠는 양반이 글쎄 불전함에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넣는 거야. 깜짝 놀랐지. 내가 이 할매가 왜 이러나 싶어서 우리 엄마 얼굴을 쳐다보았다니까. 이 정도 넣어야 그 스님을 볼 수 있다 카더라. 내가 쳐다보는 걸 우째 알았는지, 부처님 얼굴만 똑바로 보고 있던 엄마가 돌아보지도 않고 이야기하데. 그제야 이해를 했지. 조금 있으니까 공양주 할머니가 들어오라 하더라고. 컨테이너 방에 들어가서 스님이랑 마주 앉았어. 나는 입도 뻥긋 안 하고 엄마만 스님하고 이야기를 했지. 내가 뭘 하다 망했는지 지금은 뭘 하는지. 우리 엄마가 별 필요도 없는 이야기까지 다 말하는 거야.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스님은 그냥 주구장창 듣기만 하는 거야. 엄마가 지칠 때까지. 아이고,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숨이 다 차네. 이제 스님이 뭐라고 말씀 좀 해 주시오. 엄마가 이렇게 말 하고 나니까 스님이 입을 열더라. 딱 두 가지. 이제부터는 잘될 겁니다. 글 하나 써드릴 테니 머리맡에 두고 틈나는 대로 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화선지 한 장을 펼치고 붓으로 글을 쓰는 거야. 엄마는 아이고 글씨가 너무 이쁘데이, 너무 좋데이 하면서 연신 박수를 쳤지. 글씨는 나름 나쁘지는 않더라. 그런데 내용이 뭔지 아나? 그 왜 있잖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우짜고 하는 흔한 그거. 그건 기라. 확 하고 열이 올라오는데, 불전함을 뒤집어가 오만 원짜리 두 장 찾아 들고 나오려다가 참았다. 그래도 기가 찬 거는 기가 차는 거라서 스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지. 그런데 한참 보다 보니까, 낯이 익은 얼굴인거야. 어디서 봤지? 누구더라? 이렇게 고민하다가 엄마가 이제 가자고 해서 내려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이 났는데. 그 스님이 희수인거야. 와. 소름 돋데. 기는 녀석의 빈 소주잔에 소주를 부어주며 말했다. -그러면 그 스님이 자기 입으로 내가 희수다 하고 말한 것은 아니네? 녀석은 소주잔을 입에 대어 반쯤 마시다가 내려놓았다. -니, 내 말 못 믿나? 내가 사람 얼굴 하나는 정말 잘 기억하거든. 희수 맞다. 여전히 예쁘데. 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익은 돼지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녀석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믿지. 믿어. 혹시나 하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그리고 내 기억에 희수는 교회를 다녔던 것 같아서. 기가 준 돼지고기와 구운 마늘을 상추에 올려놓고 쌈을 만들던 손을 멈추고 녀석이 말했다. -그래? 하긴 기, 니가 제일 잘 알겠지. 그라모 희수가 아닌가? 얼굴은 희수 맞는데. 희수.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이다. 곱상하게 생겼었다. 눈이 컸다.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햇빛 보는 것을 싫어했다. 위로 누나가 세 명 있었다. 분홍 필통, 색지로 된 공책을 좋아했고, 여러 가지 색의 펜을 구별해서 쓰는 것을 좋아했다. 옆에서 보다보면 색칠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빨간 색의 보색이 뭔지 아니? 희수의 색칠놀이를 구경하던 기에게 희수가 물었다. 희수 덕분에 기는 보색이라는 게 무언지 처음 알았다. 희수 덕분에 처음 안 것은 보색만이 아니었다. 영어라고는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 밖에는 모르는 기와는 달리 희수는 팝송을 좋아했다. 쉬는 시간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점심을 먹고 교실에 엎드려 있으면 희수는 워크맨에 이어폰을 꼽고, 한 쪽 이어폰은 자신의 귀에 다른 한 쪽은 기의 귀에 꽂아주었다. 이거는 보이 조지고, 이거는 신디 로퍼고. 희수는 ‘ㄱ’자로 굽힌 손가락들로 스포츠형 짧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팝송의 내용과 가수에 얽힌 사연까지 설명해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제법 오래된 팝 가수들의 음악이지만 당시 기로서는 처음 듣는 멜로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기가 집에 돌아와 가방을 정리하다 보면 희수가 쓴 편지가 들어 있기도 했다. 주말에 뭘 했는지, 누나들이랑 본 영화가 어땠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희수가 쓴 자작시가 들어 있기도 했다. 기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기가 답장을 쓰지 않는다고 희수가 화를 낸다거나 답장을 써 달라고 조르는 일은 없었다. 기가 편지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날이면 희수는 들릴 듯 말듯 이야기했다. 편지는 내가 쓸 게. 너는 읽어주기만 해. 시청각 교육을 위해 단체로 극장에 가는 날이었다. 시내에 있는 극장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러 갔다. 각자 알아서 정해진 시간까지 극장으로 가야 했다. 희수가 기의 집으로 찾아왔다. 극장까지 가는 동안 버스를 타는 시간을 제외하고 희수는 기의 손을 놓지 않았다. 희수는 기에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줄거리와 여주인공인 ‘비비안 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지만 기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희수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기는 희수의 손이 무척 부드럽고 따듯하다고 느꼈다. 정거장에 내려서 극장이 가까워지고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이 보일 즈음에서야 둘은 손을 놓았다. 희수는 기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기는 꺼내어둔 사과를 종이 가방에 챙겨 넣었다. 망원사를 찾아 가볼 생각이었다. 희수가 아니어도 된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희수가 아니더라도, 희수를 닮은 얼굴에 사과를 하고 싶었다. -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 여러분. 오늘은 시월 이십 사일입니다. 그리고 일요일이지요. 망원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기는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디제이가 사과데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 무슨 날일까요. 그렇지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주위의 누군가에게 사과를 드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 맞습니다. 오늘은 사과 데이입니다. 저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무슨 무슨 데이라 불리는 날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몇몇 기업체나 장사꾼들의 상술 같기도 하고, 그 상술에 덩달아 동조하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사과 데이에 대해서만은 생각이 다릅니다. 저도 이날만큼은 꼭 챙기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우리나라의 사과 데이가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과 데이는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요? 아시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혹시라도 모르고 계신 분들이 있을까봐 제가 직접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요. 일단 노래 한 곡 듣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월이지요. 시월의 어느 좋은 날에. 들려드립니다. (계속)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2-03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느닷없는 마음

연은 무이네를 다녀온 뒤 인에게 헤어지자는, 느닷없는 통보를 했다. 인은 무척이나 당황했고 당황한 만큼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왜? 라고 묻지도 못했다. 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 라는 짧은 답뿐이었다. 인은 자리로 돌아와 입고된 책을 확인하고 주문일자와 주문자를 찾아 종이 가방에 나눠 담았다. 어휴, 인은 매대에 깔린 도서를 정리하다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인은 사다리에 기대서서 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왜?’ 인과 연은 이 년 전 만났다. 지역에서 열린 도서축제에서였다. 해변을 주 무대로 한 축제였기 때문에 출판사나 책방들의 천막들이 해변을 따라 나란히 자리를 잡았고 인의 책방 또한 그들 틈에 끼었다. 축제 전날부터 바람이 세게 불었고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졌다. 인은 천막 앞으로 차양을 길게 내고 매대 앞쪽의 책에 비닐을 씌웠다. 인의 목덜미에는 바람이 품은 소금기과 뭉친 땀이 끈적이듯 흘렀다. 아직 세상은 여름의 끝자락에 머무르고 있었다. 인은 천막의 뒤를 가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나마 불어오는 바람을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지만- 막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천막 뒤로 들이치는 빗방울도 없었고 천막 뒤쪽에는 책을 진열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세 번째 날이었다. 날씨 탓인지 이번 축제에는 예전보다 방문객이 적었다. 방문하는 이들도 가족 단위, 아이들 체험학습이나 기념품 구매 등이 목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만은 젊은이들, 연인들이 제법 많이 몰려들었다. 메인 무대에서 열릴 예정인 초청 공연의 영향이었다. 공연 두세 시간 전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행사장이 북적거렸고 줄지어선 천막들을 둘러보며 책을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 게 중 더러는 책을 사기도 했고 더러는 책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만 했다. 인은 그들을 비난하거나 쫓지 않았다. 북적거리는 천막이 그저 좋았다. 그것도 잠시, 곧 공연이 시작된다는 알림에 모두들 메인 무대로 몰려갔다. 인은 아무도 없는 천막에서 어질러진 책을 정리하다 뒤를 보았다. 마침 썰물이었고 수평선 넘어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도서축제에 랩이라니. 인은 메인 무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알아듣기 힘든 랩을 견디며 천막 앞으로 고개를 빼 무대 쪽을 보았다. 번쩍이는 조명 아래 객석을 가득 메우고 넘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왔지? 궁금해 할 즈음,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란 물방울 원피스를 입은 단발머리였다. 공연을 안 보는 사람이 있네. 인은 고개를 살짝 숙였고. 이어서 안녕하세요, 책방 수북입니다, 큰 소리로 말했다. 단발머리는 멍하니 있다 곧 아, 안녕하세요, 하고 대답을 하고는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연이었다. 단발머리는 잠시 진열된 책을 만지작거리다 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화번호 주세요. - 신기하지 않아? 내 이름이 인이고 자기 이름이 연이니. 이런 것을 두고 인연이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신기하기는 하지만 진짜 인연일지는 아직 모르지. 이름으로 대충 때워 넘어가려고 하지 마. -아니, 전화번호를 먼저 물어본 쪽은 자기잖아. 이제 와서 이러나? 둘이 손을 맞잡던 날, 인이 물었다. -그런데 나 어디가 좋아서 내 전화번호를 물은 거야? 연은 아마도 노을 때문이었을 거라 대답했다. 노을? 인이 되물었고 연은 응 노을, 하고 대답했다. -글쎄 천막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지나치는데 자기가 보였지 뭐야. 그런데 그 순간 자기밖에 안 보이더라고. 그런 것 있잖아. 자기만 선명하게 들어오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흐릿해지는 그런 것,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막…. 느닷없이 자기를 갖고 싶은 마음이…. 정말 느닷없었다니까. 연은 아마도 노을이 자기 등 뒤에서 뿜어낸 빛들이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고, 그런데 노을을 등진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냐고, 아마 그 시각, 그 자리, 그 각도에 인이 서 있었던 것 이런 모든 조화가 만들어 낸 것이지 않겠냐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자기 번호를 얻어야겠다 마음먹었지. 그래서 물어본 것이고. 자기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더라. 누구든 아무나 번호 물어보면 다 줄 것 같던데? 그렇지? 자기는 내가 아니라도 번호를 줬을 거잖아. 둘은 느닷없는 입맞춤을 했고 연인이 되었다. 연은 지난 달 친구 세 명과 베트남으로 여행을 갔다. 갑작스레 가게 된 여행이었다. 다 같이 있던 자리, 누군가의 생일 파티를 명목으로 모인 자리에서 친구 중 하나가 베트남에 사막이 있다 이야기했고 사막에 샘이 하나 있는데 요정의 샘이라고, 이름이 너무 예쁘지 않냐고, 그리고 사막에서 맞이하는 해넘이가 그렇게 멋지다 한다고 덧붙였다. 핸드폰으로 검색한 지명이 무이네라는 것을 또 다른 친구가 찾아냈고 모두들 무이네의 사막 사진에 와아, 하고 감탄을 하던 중 생일이었던 친구가 말했다. -우리 가자. 무이네. 동네 이름도 이쁘네. 무이네. 호치민에서 판티엣으로 그리고 무이네로. 연과 친구들은 차량을 렌트해서 달렸다. 출발한 지 세 시간, 네 시간 쯤 지났을까 무이네에 들어섰다. 무이네에서만 3박을 예정하고 있었기에 급하지도 않았고 웬만한 것은 모두 둘러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연과 친구들은 티격태격 댔다. 두 명은 활동적인 일정을 가지기를 원했고 두 명은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연은 조용한 쪽이었다. 연은 무엇보다 지치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해넘이를 보고 싶었다. 결국 둘째 날은 두 명씩 짝을 지어 따로 셋째 날은 다 같이 지내기로 일정을 짰다. 연과 친구가 찾은 곳은 사막이었다. 화이트 샌듄과 리틀 그랜드 캐니언, 요정의 샘을 걸으며 시간을 보내면서 연은 틈만 나면 시계를 보았다. 친구가 뭘 그리 보느냐 물었고 연은 해넘이를 놓치기 싫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모래썰매를 탔지만 몇 번 탄 후 둘은 기진맥진했다.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것은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지만 썰매를 들고 모래 언덕을 오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맑은 하늘과는 달리 바람은 거셌고 바람에 날리는 모래 알갱이들이 팔과 다리, 얼굴을 괴롭혔다. 연은 지친 상태로 해넘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연이가 말했다. 그만 타자. 이제 그만 레드 샌듄으로 가야겠어. 모래 언덕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붉은 물결 같은 모래무늬 뒤로 짧은 그림자가, 모래 언덕 뒤로는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는 짙고 연한 어둠을 만들었고 그 위로 햇살은 막 떠오르는 해와 같이 밝고 붉게 빛났다. 연은 작은 모래 언덕 기슭에 앉아 큰 모래 언덕 너머로 넘어가는 해를 보았다. 해가 언덕 너머로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셋째 날 연은 모든 일정을 친구들에게 양보했다. 무엇이든 친구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겠노라고. 단 한 가지, 한 번 더 해넘이를 볼 수 있게 해 달라 했다. 그날 저녁 연과 친구들은 해넘이를 보았다. 친구들이 이리저리 위치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은 동안 연은 전날 앉았던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해넘이를 보았다. 그들은 다음날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은 인에게 이제 그만 만나자는 느닷없는 통보를 했다. 그날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즈음, 연으로부터 답은 오지 않았고 인은 일찍 문을 닫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은 여전했으나 연을 찾아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연으로부터는 답을 들은 후에, 그런 후에야 무엇을 할지 결정할 참이었다. 밖에 내어 놓았던 입간판을 책방 안으로 들여놓고 있을 때 연으로부터 답이 왔다. ‘그곳에 네가 없었어. 두 번을, 한 참 동안 가만히 찾았는데 네가 보이지 않더라. 일부러 애쓰지는 않았어. 널 처음 본 그 순간처럼 네 모습이 그냥, 아무런 예고 없이 보였으면 했는데, 보이지 않더라고. 내 속에 네가 없는 거지. 네 잘못은 아니야. 그냥 느닷없는 거, 느닷없는 마음, 내 마음 때문이야. 원래 사랑이 그런 거잖아. 느닷없는 것. 우리도 느닷없이 시작했잖아. 끝내는 것도 느닷없자, 우리.’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1-19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같이 가자 해놓고

그러게. 같이 가자, 하지 않았어요? 한 날 한 시에 손 꼭 잡고 눈길 한 번 맞춰보고 고개 한 번 끄덕이고 그러고 가자, 하지 않았어요? 애들 번거롭지 않겠다. 문상객들도 편하겠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아니지, 아니지. 나는 무조건 당신 다음에 가야지. 그래야 당신 가는 길에 꽃도 뿌리고 향도 피우고 내 그동안 당신한테 못해준 것, 잘못한 것 다 갚지는 못해도 꽃도 뿌리고 향도 피우고 그거라도 해야지. 그래야지. 난 무조건 당신 다음에 가야지. 그러지 않았어요? 결국은 또 말 뿐이었네요. 당신 귀에 인이 박히도록 했던 말, 내가 수없이 내뱉었던 그 말, 맨날 말만하고 바뀌는 게 없다는 그 말을 내가 또 하고 있어요. 준연은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그저 입안을 맴도는 말 덩이들을 꾸역꾸역 삼키는 중이었다. 허리께를 더듬어 닦을 것을 찾았으나 손에 닿는 것이 없었다. 그저 흐르는 것은 흐르는 대로 둘 수밖에. 하긴 언제 이렇지 않았던 때가 있었나. 애들은 괜찮을 거예요. 해준 것 없이 잘해온 애들이니. 내딛는 걸음마다 걸리는 것 없이, 바로가든 돌아가든 지들 가고 싶은 곳으로 잘 걷는 것 보았잖아요. 첫 걸음을 뗄 때 알아보았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저 우리 같을까 싶어, 넘어질까 싶어 그저 엉덩이를 받힌다 어깨를 잡는다 호들갑을 떨었지요. 넘어지면 그게 또 뭐 대수라고. 그래도 대견하지 않아요? 당신도 그랬잖아요. 참 대단한 녀석들이라고. 애들은 잘 할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여긴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해졌어요. 검고 붉은 감나무 잎이 모란 아래 쌓였어요. 당신이 참 좋아했던 모란인데. 십칠 년쯤 되었다고 십칠만 원에 샀었지요. 지금은 오십만 원쯤 되겠네요. 이제는 제법 꽃이 많이 핀답니다. 자주 빛 빌로오드 꽃이 활짝 필 때면 어쩔 줄 몰라 하던 당신이었는데. 라탄 의자에 앉아 모란을 보며 담배를 피던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나 당신이 담배 피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그 모습 하나는 조금 좋았어요. 아니 그 순간 당신은 제법 멋졌어요. 모란과 당신과 하얗게 피어오르던 담배 연기와…. 그런 것들로 가득했던 봄. 참, 올해는 유채도 활짝 피었어요. 몇 해 전부터 집 옆 공터에서 보이더니 이번 봄은 장관이었어요. 길 가던 사람들이 사진 찍겠다고 줄을 섰다니까요. 유채를 보며 당신, 아니 우리를 생각했어요. 그 해 봄, 파랑과 노랑 사이에 우리가 있었지요. 화산석 돌담을 사이에 두고 당신은 노란 유채밭을 등지고 있었고, 나는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었어요. 당신과 나 사이 현무암 담장 틈을 오가는 바람이 당신 옷자락을 흔들었어요. 이리 오라, 당신이 손을 뻗어 나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지요. 하지만 난 쉽게 발을 떼지 못했어요. 바다가 항상 자기 자리에 있는 것처럼, 제가 서 있던 자리는 익숙하고 오래된 제 자리였거든요. 봄이 되어야 피어나는 유채꽃,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유채꽃. 당신은 제게 그런 어떤 존재였어요. 알지요? 저는 결혼이란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었다는 것도. 얘기했지요? 그때의 저는 한 곳에 머물지도, 한 사람에게 책임을 다하고 싶지도 않았다는 걸. 그때 제가 제법 모질었지요.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지금 서로를 어루만지고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은 순간의 감정이라고.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지요. 미안해요. 우리가 다시 마주 한 순간이었어요. 화산석 돌담은 접견실 유리창인 양 놓여있었고, 어색한 눈빛과 말끝을 흐리는 안부인사가 이어졌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아쉬운 거예요. 당신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마음이 제 속을 채우는 거예요. 유채꽃이 예쁘네. 나, 사진 한 장만 찍어주면 안될까? 사실 당신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고 담장을 넘어 갔지요. 담장 틈 사이로 바다 내음이 들어왔고 우리는 같이 사진을 찍었어요. 손을 마주 잡았고 그렇게 우리는 평생을 약속했고요. 어제는 조금 덜 익은 감을 몇 개 따다 식탁에 올려두었어요. 좀 두었다 맛이나 보려했지요. 그냥 두었다가는 직박구리들이 다 쪼아 먹을 것 같았거든요. 걱정 말아요. 손이 닿는 곳 위로는 따지 않았으니. 따지도 못해요. 사다리든 무엇이든 밟고 올라서는 일은 이제 못한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몇 계단 밟고 오르지도 못할 거면서 뭔 애를 그리도 썼을까요? 그때 그 시절 우리 말이에요. 암튼, 작년에는 해갈이를 하는지 감이 별로 열리지 않더니 올해는 제법 많이 달렸어요. 그러니 새들 걱정은 안 해도 되요. 그러니까, 우린 이게 문제였던 거예요. 알아서들 잘 사는데 굳이. 그렇지 않아요? 거긴 어때요? 따듯하고 좋아요? 듣던 대로 즐겁고 기쁜 일만 가득합니까? 뭔 재밌는 일이 있을까, 나는 별로 기대는 안 합니다. 그저 당신 얼굴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기는 해요.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면 말이에요. 창을 열어두었나? 준연은 마룻바닥을 타고 오르는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집안의 창들을 떠올렸다. 아침에 환기시킨다고 열었던 창 중에 닫지 않은 것이 있는지, 1층부터 2층까지 머릿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아닌데, 다 닫았는데. 어디서 들어오는 냄새지? 자동차 매연이나 먼지 냄새는 아닌데, 고소한데, 누가 뭘 고나? 아. 장어. 이젠 정말 갈 때가 되었나 봐요. 금방 했던 일인데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글쎄 둘째 아이 목소리가 조금 안 좋더라고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풀이 좀 죽은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당연히 말하지 않을 것이고, 말한다 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고. 그러니 내가 뭘 했을 것 같아요? 알지요? 시장에서 민물장어를 사다 고았지요. 뭐든 해야 했거든요. 아파도 장어, 피곤해 보여도 장어, 슬퍼해도 장어, 만병통치약 같은 장어. 당신이 리듬까지 붙여가며 노래를 불렀잖아요. 장어들이 튀어나올까봐 곰솥 냄비 뚜껑을 손으로 누르고 있는 나를 돕지는 않고 놀리듯 노래만 불렀지요. 아니에요. 가끔 도와줬다는 것도 기억해요. 아무튼 장어를 사다 고았어요. 식혀서 기름덩이를 걷어내려고 뚜껑을 열어두었는데, 그 냄새가 이리 흘러 들어왔네요. 작은 통에 나눠담아야 하는데. 내가 이러고 있네요. 조금은 졸린 것 같기도 하고. 냄비 뚜껑이라도 덮어두어야지. 준연이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나마 답답했던 가슴은 조금 나아졌다. 아니 답답하지 않았다. 발끝의 저림도, 욱신거리던 종아리의 아림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뻐근하던 허리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허리가 없어진 것처럼. 냄새도 창도, 빛도 사라졌다. 벌써 밤인가? 내가 언제 일어났더라? 여기가 어디더라? 간다는 게 이런 건가 봐요. 당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아니었을 거예요. 당신이 가는 길옆에는 제가 있었으니까. 당신 이마며 눈꺼풀이며 입술이며 내 이 두 손으로 다 한 번씩은 쓰다듬었으니까. 다행이었어요. 조금은 부럽기도 하고. 그래요. 할 말은 해야겠어요. 같이 가자 해놓고. 한 날 한 시에 손 꼭 잡고 눈길 한 번 맞춰보고 고개 한 번 끄덕이고 그러고 가자 해놓고. 무조건 나 다음에 간다 해놓고. 나 가는 길에 꽃도 뿌리고 향도 피우고 나한테 못해준 것, 잘못한 것 다 갚지는 못해도 꽃도 뿌리고 향도 피우고 그거라도 해놓고 간다 해놓고. 그렇게 말해놓고. 그럴 줄 알았어요.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맨날 말만. 당신 귀에 인이 박히도록 했던 말, 내가 수없이 내뱉었던 그 말, 맨날 말만하고 바뀌는 게 없다는 그 말을 내가 또 하고 있어요. 거기서 기다려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고. 나 지금 가니까. 가서 또 말할 테니까. 말만 하는 당신이라고.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1-05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I가 명주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지만 명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주는 소파 반대편 벽면을 차지한 스크린을 쳐다보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I도 명주를 따라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고 황량한 땅과 그 땅을 가로지르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내가 스크린 속에 있었다. 사내는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길 위에 돌아서 서 있었다. I는 사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것인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명주에게 묻지 않았다. 명주가 DVD방 주인에게 말했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를 틀어주세요. 명주는 앞장서 방으로 들어갔고 I는 그런 명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방에서 나온 명주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DVD방 주인이 음료수와 재떨이를 가져다주고 나가자 명주는 I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대고 좌우로 돌리며 비볐다. I는 모든 상황이 낯설고 당황스러웠으며 명주가 왜 이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명주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서로의 숨결을 잡아당겼다 불어 넣었다. 숨결은 체온 그대로를 서로에게 전했고 전해진 체온은 몸과 마음을 덥혔다. I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이 빨아 당겨 담배 끝이 빨갛게, 회색으로 타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명주의 입에 담배를 물리고 새 담배를 꺼내어 다시 불을 붙였다. 영사기에서 나오는 불빛이 연기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사내의 모자와 얼굴만이 흔들리는 연기 사이로 나왔다 들어갔다 반복했다. 사내는 아직 길 위에 서 있었다. 명주는 A 그리고 B와 함께 술을 마시고 오는 길이라 했다. 이것저것 말을 하다 보니 I이야기가 나왔다고. 명주, 네가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해야 해. B가 말했고 A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야. A가 다시 한 번 강조했고 A와 B는 I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 모두를 위해 명주가 마음을 정해야 한다고 명주를 몰아붙였다고 했다. 아니 니들이 왜 그래? 명주가 다시 물었고 A와 B가 우리는 동기니까, 명주 너를 아니까, 하고 대답했다. 지들이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좀 웃기지 않아? 넌 어떻게 생각해? DVD방에 가기 전 I와 만났던 찻집에서 명주는 A와 B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하며 I에게 물었다. I는 명주가 동의를 구하는 것인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A와 B가 했던 충고를 받아들여 마음을 정했고 그 마음을 지금 말하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너와 나는 아닌 것 같아. 이미 2주 전, I가 명주에게 고백을 한 그날 명주는 I에게 답을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인 건지,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I는 글쎄, 하고 대답을 했고, 명주는 I의 컵에 담긴 물을 자신의 컵에 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내 말만으론 네가 그 상황을 다 알 수 없겠지. 어두운 찻집 안이었지만 명주는 얼굴이 붉었다. 그런데 나 왜 불렀어? I는 애써 차분한 척 명주에게 물었다. 아니 걔들이 그러니까 살짝 화가 나는 거야. 이상하게. 그런데 걔들한테 화를 내지는 못하겠고. 그냥 니 생각이 나더라고. 우리는 뭘까 싶기도 하고. 명주는 I의 얼굴을 지나쳐 I 뒤로 보이는 창밖을 살피며 대답을 했다. 명주는 자기 입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두 번째 나왔다는 사실을 알까? I는 자신의 얼굴 옆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두고 있는 명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I는 들뜬 마음으로 나왔다. 명주가 먼저 연락을 해왔고, 찻집에서 만나자 했으니까.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너랑 나는 아닌 것 같다, 말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학생 회관 옆 벤치에서 나누었던 입맞춤이, 딱딱거리며 부딪혔던 앞니와 달고 따듯했던 명주의 타액이, 너 처음이구나 하고 웃으며 I의 뺨을 꼬집던 명주의 손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던 그날 밤이 I의 구애에 대한 명주의 성의 표시와 I의 객기가 만들어낸 한 차례 우연한 밤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영화보고 싶어.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놓으며 명주가 말했다. 영화? 지금 시내로 나가자고? I가 물었고 아니 그냥 DVD방에나 가자, 하고 명주가 대답을 했다. 좀 전에 마신 술이 깨버렸어. I, 네가 한 잔하고 싶다면 옆에 앉아 있어주기는 할게. 내가 나오라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겠지. 그런데 술이 깨고 나니 머리가 아프네. 어디든 들어가서 쉬고 싶어서 그래. I와 명주는 찻집을 나와 DVD방으로 올라갔다. 카운터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DVD와 영화 포스터를 번갈아 살피고, 인기 대여순위 1위부터 30위까지 제목을 읽어 내려가던 I 뒤에 서 있던 명주가 주인에게 말했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를 틀어주세요” 시작은 I가 집을 나오면서부터였다. 축제가 한창인 봄이었다. 학교 후문 가까이 방을 구했다. 시장에 가서 싸구려 레이온 이불을 샀다. 가스버너와 양은 냄비, 수저를 구했고, 라면 박스에 포장지를 입혀 책상과 밥상을 대신했다. 축제는 끝났지만 축제와 같은 밤은 계속되었다. I는 낮에는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학회실에서 시간을 보냈고, 저녁에는 기웃거리며 사람들을 만났고 술을 마셨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들, 새벽까지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끼어들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러다 흩어지는 모든 자리에 I가 있었다. 미처 하지 못한 말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말들이 남아 있는 밤이면 자취방을 지나쳐 후문으로 들어갔다. 학회실로 들어가 책상위에 놓인 모둠일기에 그 말들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괜한 짓을 했어, 다음 날이면 후회를 하곤 했지만 써놓았던 글을 지우거나 일기장을 찢지는 않았다. 뭐, 어쩌라고.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모둠일기가 네 일기장이냐? 선배들이 가끔 I에게 던지듯 말을 했다. 그렇게 많은 답 글이 달리는 일기장 보셨습니까? I는 선배들이 던지는 말을 그렇게 받아쳤다. I가 써놓은 글 아래로 여러 말들이 달렸다. 밤새 써놓고 방으로 내려간 뒤 아침에 등교를 하면 답 글이 쓰여 있었고, 거기에 답 글을 쓰고 수업을 듣고 오면 다시 답이 달려 있었다. 몇 번을 그렇게 주고받다 보면 격한 단어가 오고 가기도 했고, 때로는 동지를 만난 듯 서로를 향한 밝은 마음이 전해지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마무리는 술자리였다. I는 하루하루가 좋았다. 그 하루들 중 하루였다. 학생회관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I 앞에 명주가 와 섰다. 앉아도 돼? 명주가 물었고 I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와 크림빵 하나를 들고 앉은 명주가 무국에 말은 밥을 떠먹는 I를 바라보다 말했다. “참 단아해.” 하마터면 I의 입안에 있던 밥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네 글들 말이야. 글들이 단아하다고. 우연히 들른 학회실에서 책상에 놓인 I의 글들을 읽었다고 했다. 지난 1년간의 모둠일기를 모두 꺼내어 I 글만 찾아 읽었다고 명주가 말했다. I는 무어라 대답을 할지 고민했고 그러다 시간이 지났고 결국은 답을 하지 못했다. 크림빵을 다 먹은 명주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갔다. 명주는 약간은 허술해 보이는 듯한 행동들-이를 테면 강의실에 들어오다 강의실 문턱에 걸려 넘어지거나, 시험시간을 잘못 알고 들어와 앉아 있다든지, 종종 백팩의 지퍼를 열고 돌아다녀 동기들이 장난삼아 휴지나 빈 종이컵을 넣어도 모른 채 깡총거리며 달린다든지·로 인해 간혹 화젯거리가 되는 동기였다. 나사가 하나 정도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명주는 비웃음이나 비아냥보다는 재밌다는 이야기, 유쾌하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아이였다. 그녀의 호탕한 웃음과 무슨 일이든 개의치 않는 시원한 대답들이 어우러진 탓이었다. 모두들 명주와 함께 있는 시간들을 즐거워했다. I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학생 회관에서 만난 이후로 I는 명주와 이전보다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복도를 지나치다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하거나, 강의실에서 마주쳐 간단한 안부를 묻는 것은 이전과 같았지만 어감도 표정도 달랐다. 학회실 모둠일기에 글을 쓸 때에도 최대한 단아하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 잘 읽었어, 역시, 하고 명주가 답 글이라도 달아 놓는 날이면 I는 자신이 쓴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해 초여름, 햇볕 쨍쨍 내리쬐는 안동에 가본 적 있니? 라고 명주가 물었다. I는 대답 없이 명주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명주는 I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우리 내일 안동 가자. 내가 도시락 싸올게. 다음날 둘은 기차를 타고 안동에 갔고, 버스를 갈아타고 햇볕 쨍쨍 내리쬐는 하회마을에 들렀다. 조용했다. 낮은 담을 양쪽으로 한 좁은 골목길에서 둘은 어깨를 스치며 걸었다. I는 명주의 손을 잡아볼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명주에게 들키기 싫었다.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의 하얀 모래밭에 ‘명주와 I, 20세기가 끝나가는 더운 여름날 안동에 왔다 가다.’라는 글귀를 남겨둔 채 둘은 돌아왔다. 뒤풀이를 해야 한다고 명주가 고집을 부렸다. 이미 시간이 늦었다 말해야 했지만 I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명주와 I가 들어간 곳은 I가 즐겨 들르던 호프집이었다. 여기 계란말이가 정말 푸짐해. I는 먼저 나온 생맥주잔을 명주의 잔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명주는 그래? 하하핫, 하며 특유의 웃음을 보였다. 학과 이야기, 책 이야기, 안동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동아리 이야기도 했다. 명주의 동아리는 봉사 동아리였다. 봉사라는 것이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아주 세련되거나 아주 지독한 자기애의 산물이 아닌가 하고. 물론 애초에 동기가 무엇이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살기 좋게 만드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지.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야. 그냥 그 근원에는 자기애가 숨겨져 있다는 말이지.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고 숨어서 하는 봉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자기만족, 뭐 그런 것이 근원적인 욕구가 아닐까. I는 뭔가 심오한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했고, 명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I의 이야기를 들었고 I는 명주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이건 서비스. 마른안주를 가지고 나온 호프집 사장이 보기 참 좋다, 라는 말을 테이블위에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I였다. 우리 사귈까? 명주는 생맥주잔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생맥주잔 바깥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다 이내 무거워져 아래로 흘렀다. 달싹거리는 명주의 입술을 쳐다보던 I의 이마에서도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명주가 입을 열었다. 하하핫, 너 긴장하는 구나. 땀 좀 봐. 명주는 냅킨으로 I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생맥주잔을 들어 I의 잔에 부딪히고는 맥주를 마셨다. 너와 나는 아닌 것 같아. 친구지. 좋은 친구. “웃기네.” 그날, 명주는 수박씨를 뱉어 내듯 말을 뱉었다. 그때 I는 고개를 숙여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는 명주의 얼굴을 내려 보았다. I는 무엇이라 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했고, 고민을 하는 동안 시간이 제법 지나가버렸고 어떤 답을 하든지 우습게 되어버렸다. 결국 I는 답을 하지 못했다. 한동안 둘은 그렇게 있었다. 지하철 끊긴다며 명주가 일어났고 둘은 영화가 계속 비춰지는 스크린을 둔 채 그냥 나왔다. 둘이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었다. 김강 소설가·내과의 그해 가을 I는 휴학을 했다. 겨울에 입대를 했고, 제대를 하고 학교에 돌아왔을 때 명주는 학교에 없었다. I는 명주와 함께 갔던 DVD방을 찾아가 그해 가장 길었던 영화를 찾아 달라 말했다. 주인은 알 수 없다는 말과 거기에 딱 맞는 표정을 지었다. I가 영화 속 한 장면을 주인에게 설명했다. 넓고 황량한 땅과 그 땅을 가로지르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내가 한 명 있어요. 그 사내는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길 위에 돌아서 서 있는데, 사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것인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어요. 아니에요. 지금 생각하니 그 사내가 서 있는 곳은 길의 끝이었던 것 같아요. 지나간 길을 뒤돌아보고 있었네요. 맞아요. 그랬어요.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0-22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가로등이 깜빡거릴 때

빈소는 2층에 있었다. 민성이 계단과 승강기 사이에서 머뭇하는 사이 아버지는 계단을 올랐다. 아버지는 접객실을 힐끗 본 뒤 빈소로 들어갔다. 민성은 빈소 입구에 세워진 화환 두 개를 살피다 빠른 걸음으로 아버지를 쫓아갔다. 아버지와 민성은 욱이 삼촌의 영정과 마주했다. 웃고 있었다. 민성에게 코트를 사주던 시절 욱이 삼촌의 얼굴이었다. 욱이 삼촌, 저 왔습니다. 욱이 삼촌의 얼굴을 보던 민성이 혼잣말을 했다. 아버지가 민성의 소매 끝을 잡아당겼고 아버지와 민성은 엎드려 절을 했다. 아버지는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언제 일어나시려나? 아버지를 살피다 정작 욱이 삼촌에게 한마디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후우, 숨을 내쉬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일어났다. 민성과 민성의 아버지는 빈소에서 나와 접객실 한쪽 모서리 테이블에 앉았다. -아주버님,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하셨지예. 민성이 니도 오느라 수고 많았제? 니가 아버지 모시고 왔나? -네. 숙모님하고 동생이 힘든 일 감당하시는 것에 비하겠습니까? 아이고. 고개를 숙이며 혼잣말을 내뱉는 숙모의 손등을 사촌이 쓰다듬었다. -멀리서 이렇게 와 준 것만 해도 고맙다. 뭣 하나 제대로 준 것 없는 삼촌 아이가. 하긴, 그래도 조카 중에는 니하고 젤로 가깝지 않았나? 민성이 어릴 적 욱이 삼촌은 명절이나 제사, 때로는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도 간간이 민성의 집을 찾아와 한참을 앉아 있다 가고는 했다. 약간은 낯선 듯 혹은 약간은 겁먹은 듯 두리번거리다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 중 한 명이 요즘은 어찌 지내는지 물으면 그제야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지만 욱이 삼촌이 말을 잇는 사이 어머니는 주방으로 아버지는 화장실로 갔다. 그러면 욱이 삼촌은 민성을 앞에 두고 비밀인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민성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런 밤들 끝에 욱이 삼촌은 항상 현관에 서 있었다. 민성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내민 돈을 머뭇거리지 않고 받았다. 바지주머니에 넣고 고맙습니다,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민성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현관을 나서는 욱이 삼촌을 보며 민성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왜 욱이 삼촌에게 자고 가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지 가끔 궁금했다. 어떤 날은 아버지나 어머니 누구도 욱이 삼촌에게 돈을 주지 않기도 했는데 그런 날 욱이 삼촌은 제사음식이 든 종이 가방을 든 채 말없이 현관을 나섰다. -제수씨가 고생이 많습니다. 오늘만이 아니고 시집와서 지금까지. -제가 뭘요. 한 게 뭐 있습니까. 하긴, 솔직히 말해서 아주버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합니다, 아주. 이제야 끝났나 싶기도 하고요. 숙모는 쟁반에 있는 음식을 상 위로 옮기며 아주버니는 한잔 하셔도 되는 것 아니냐 물었고 민성의 아버지는 잔을 내밀었다. -술 때문이지예. 뭐,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꺼? 욱이 삼촌이 죽던 날 숙모는 다른 곳에 있었다. 벌여 놓은 일이 많아 일주일에 사오일은 다른 곳에서 지냈다고 했다. -일이 벌어지기 이틀 전 얼굴을 본 것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더. 그날 좀 심하게 다퉜어예. 술 때문이었다. 욱이 삼촌이 만성 췌장염과 알코올 중독으로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뒤로 숙모는 집안에 술병이 보이면 개수대에 모두 비웠다. 그날도 그랬다. -처음에는 고마 술을 마시게 두는 게 제가 편하더라고요. 술버릇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 그카다가 조용히 잠을 자니까. 근데 이게 병이 되고 병원을 왔다갔다해야 되고, 또 병원에 가만히 있으모 되는데 퇴원하겠다고 난리를 부리고, 그러니까. 온전히 제 몫이 된 거지예. 집안을 구석구석 뒤지는 것, 집을 비웠다 돌아온 숙모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었다. 소주 병뚜껑이나 술이 포함된 마트 영수증을 찾아내는 날이면 삼촌과 심하게 다퉜다. -울고불고 그러지는 않았으예. 니 죽고 나도 죽자, 이렇게는 못 살겠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젤로 심한 말이었지예. 최근 한동안은 잠잠했다. 숙모가 동네 마트와 편의점을 찾아가 삼촌에게 술을 팔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까이 있는 몇몇 삼촌의 친구들을 불러 부탁을 한 뒤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라예. 삼촌 밥을 챙겨주고 반찬이라도 몇 가지 만들어 두려고 집에 들른 숙모가 쓰레기봉투에서 찢어진 마트 영수증을 찾아냈다. 걸어서 한 시간은 떨어진 다른 동네의 마트였다. 숙모는 신발장 낡은 구두와 장화 안에서 소주를 찾아냈다. -다퉜다기보다는 제가 일방적으로 화를 낸 거지예. 대꾸를 하기도 했지만 아주버니도 알다시피 그 사람 성질은 순하다 아입니꺼. 그렇게 집을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숙모는 괜한 마음에 전화를 했지만 삼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또 어디선가 술을 사와서 마시나, 싶었지만 될 대로 되라 하는 마음에 몇 번 더 전화를 하다 말았다. 오륙 년 전 민성은 욱이 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소식을 듣지 못한 지 꽤 많은 해가 지난 뒤였다. 민성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네. 네. 아, 네. 하다 통화가 끝났다. 이후 이삼 개월 간격으로 욱이 삼촌이 전화를 했다. 췌장이 안 좋아 입원을 했다는, 대상포진에 걸려 고생을 했다는, 술을 끊으려 입원을 했었는데 잘 안되었다는 전화가 이어졌다. 술에 취한 듯 어눌하고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아프고 외롭다는 전화가 왔을 때 민성의 머릿속 기억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돈을 달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리던 삼촌의 눈빛, 아버지께 듣기 싫은 말 한마디를 들은 날이면 민성을 매몰차게 내던졌던 레슬링, 할머니가 남긴 얼마 안 되는 유산을 누가 가져갔느냐며 어머니를 몰아세우던 저녁, 자기는 받은 것도 없고 배우지도 못했으니 형들이 누나들이 책임지라며 엎었던 제사상이 앞, 뒤 구별 없이 부딪히고 섞였다. 할부금을 내지 않고 사라져 아버지가 대금을 지불했던, 집 담벼락 아래 서 있기만 하다 어디론가 팔려간 검정 세단 자동차. 그 자동차를 두고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오갔던 고성이 귓가를 스쳤다. 민성은 아버지에게 욱이 삼촌의 전화 이야기를 했다. 네게도 전화를 했더냐?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네게는 전화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한 번 이야기해야겠다. 너한테는 전화하지 말라고 일러둘 테니 혹시 다음에 다시 전화가 오거든 받지 마라.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후로도 몇 번 욱이 삼촌으로부터 전화가 왔었지만 민성은 아버지의 말을 잘 따랐다. -다음 날 저녁에 삼촌이 전화를 했더라. 숙모의 말을 듣던 아버지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서자 숙모는 민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날 내가 많이 바빴다. 삼촌이 벌이를 못하니 내가 해야 안 되겠나. 이곳저곳에 열어놓은 가게들도 챙겨봐야 하고. 가게라고 해봤자 내 가게도 아니지만. 숙모가 다른 사람한테 월급 받고 관리하는 가게가 몇 개 있거든. 근처 촌에. 뭐, 자세한 것은 민성이 니가 알 필요는 없고. 무슨 일 있으면 또 전화를 하겠지 싶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까지 전화가 없는 거라. 받지도 않고. 숙모는 타지에서 살고 있는 아들에게 연락을 하려다 말았다. -바쁜 아를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뒤에 들어보니까 자한테도 여러 번 전화가 왔었단다. 하필이면 자도 그날 회사 회식이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네. 전화도 못 받았고. 그때 이 사단이 난 거라. 가로등이 휙휙 지나갔다. 다가오는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렸다. 저렇게 깜빡거리다가 언젠가는 빛을 잃을 터였다. 지금 뭘 할 수 있겠어. 결국 누군가 알게 되겠지만 역시 뭘 하지는 않겠지. 세상도 그대로일 것이고. 민성은 네비게이션 화면의 도착 예정시간을 확인한 뒤 힐끗 옆자리의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벨트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고 있었다. 민성은 스피커의 볼륨을 낮췄다. -무슨 일이냐? 비스듬히 누워있던 아버지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주무시는 줄 알고. -잠이 오면 자려 했는데 잠이 안 오네. 민성은 아버지의 말에 대꾸를 하려다 말았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들어온 컨테이너 트럭 때문에 브레이크를 살짝 밟아야 했다. -그날 욱이가 전화를 했더라. 두 번. 벨이 울렸는데 안 받았다. 조금 피곤했거든. 그저 똑같은 전화거니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이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부재중 전화가 세 통 더 와 있더라. 눈을 감은 채 민성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게 마음에 걸린다. 전조등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날벌레들이 앞 유리창에 부딪혔다. 툭툭 터지는 소리가 났고 앞 유리창이 흐려졌다. 민성은 와이퍼를 움직여 유리창을 닦아냈지만 닦이지 않았다. 눈을 한 번 세게 깜빡이고 나서야 시야가 맑아졌다. -전화를 받으셨어도 할 수 있으신 게 없었을 겁니다. 그 전화가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저 항상 그랬듯 한 잔 마시고 횡설수설 늘어놓으려 했을 겁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래도, 후우. 너는? -예? -너한테는 전화 안 했더냐? 민성이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민성의 차가 흔들리며 2차선으로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앞이 안 보여서요. 방금 마주 오던 트럭이 상향등을 켰더라고요. 아버지,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잘 못 들었습니다.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0-01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시험에 들게 하라

모퉁이 뒤쪽에서는 인기척이 없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사이에 내게로 왔거나 얼굴을 내밀어 나와 마주 보고 있을 테지. 지금까지 기척이 없는 것은 저 뒤에…. /언스플래쉬 사거리, 내리막이다. 이 길로 내려가면 큰길로 들어선다. 나를 제외한 일행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왼쪽 모퉁이를 돌아서 몇 걸음, 그들은 전파사를 지나 세탁소 앞을 지나고 있다. 따라갈 걸. 나는 이제 혼자다. 어디로 가지.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큰길, 거기서 오른쪽으로 100미터만 가면 지하철역이다. 승객이 별로 없는, 종착역에 가까운 역이지만, 오늘은 삼일절. 사람들은 충분히 많을 것이다. 등산을 하려고 아침부터 배낭을 메고 나선 사람들,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사람들. 운이 좋다면 서 있을 자리도 없겠지. 저들을 따돌리기에는 충분하다. 갈까? 다음은? 다음은 어디로 가지? 우리는 이런 상황에 대해 약속해 놓은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오늘이지?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왜 오늘일까? 담배를 두고 나왔다. 담배연기 한 모금이면 쿵쾅거리는 심장도, 정리 되지 않는 이 상황도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싶은데. 일단 담배부터 한 대 피우는 거다. 전봇대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횡단보도 맞은편에 럭키슈퍼가 보인다. 한 개비 꺼내어 입에 물고 천천히 돌아선다. 태연해지자. 아무렇지 않은 듯. 한 모금 깊이 빨아 당긴다. 가슴 깊숙이 들어간 연기가 덩굴처럼 감고 올라가 머리 안을 하얗게 채운다. 내뱉은 연기는 안경 안팎을 쓰다듬고 올라간다. 머리의 안과 밖이 다 하얗다. 어지럽다. 두 번, 세 번 급하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에 눈 안까지 아려온다. 심장소리가 작아졌다. 다행이다. 머리를 둘러싸고, 안과 밖을 채우던 하얀 연기도 사라졌다. 담배연기는 이제 입과 기도만을 왕래할 뿐이다. 지저분한 유리창을 청소하듯, 담배연기는 유리세정제처럼 머리를 닦아내고 나갔다. 누군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퉁이 뒤쪽에서는 인기척이 없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사이에 내게로 왔거나 얼굴을 내밀어 나와 마주 보고 있을 테지. 지금까지 기척이 없는 것은 저 뒤에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저들은 내게 관심이 없는 걸까. 정은이 왔을 때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며 한 참 동안 웃던 중이었다. 일본 영화였다. 시대극.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멈췄었다. 일본 방송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았고 누구도 다른 것 찾아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일본무사가 꿇어 앉아있었다. 주군이 죽었고 전쟁에서 졌다. 적장은 자기편이 되겠냐고 물었다. 무사는 핏발 선 눈으로 적장을 보다 한 마디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명예로운 죽음을 허락하라. 오네가이시마스! 적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는 옷을 단정히 하고 앉아 칼을 빼내겠지. 하늘을 향해 나지막이 혹은 침을 튀기며 몇 마디 말을 하겠지. 그리고는 자신의 배를 찌를 것이다. 배를 찌른 뒤 옆으로 배를 가르는 거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것. 뻔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눈을 떼지 못했다. “난 일본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저런 거는 멋있단 말이지. 주군을 따라 명예롭게 죽는 것, 또 그 죽음을 허락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 않아?” “딱 봉건주의적 사고방식이지. 저게 뭐가 멋있냐?” 우리가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무사는 칼로 자기 배를 찔렀다. 남은 것은 칼을 옆으로 돌려 배를 갈라야 한다. 그런데, 칼을 뺐다. 아악, 비명을 지르더니 찔렀던 칼을 빼내 집어던지고 배를 잡았다. 바닥의 뒹굴며 소리를 질렀다. 이따이 이따이. 텔레비전 안에서 그리고 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리얼하지 않아? 저건 리얼 그 자체야.” 그때 정은이 왔다. “정은이 왔네. 그러면 이제 올 사람은 다 왔으니 담배 한 대만 피고 회의 시작하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한 대씩 물고 앉아 연기를 뿜어냈다. 담배연기로 가득 찬 방안은 안개가 낀 듯했고, 그 속에 둘러앉은 우리는 말없이 기도하는 수행자들이거나 결전을 앞둔 전사들이었다. 결연한 의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다짐이 담배연기와 섞여 방안을 채웠다. 문득 좀 전에 보았던 일본 방송이 떠올라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정은이 물었다. “선배, 왜 웃어요?” “내가 언제?” “방금 ‘씨익’ 하고 웃었는데요.” “아, 그냥. 너 오기 전에 봤던 게 생각이 나서.” 정은이 궁금해 하며 말해 달라 보챘다. 좀 전에 보았던 무사 이야기를 해줬지만 정은은 웃지 않았다. “그게 뭐가 재밌어요? 그런데 오면서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뭔데?”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꼭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았어요. 집에서 나와서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중간에 내려서 택시 타고, 지하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지하철 타고 이리 왔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이상하게 중간에 똑같은 아저씨를 2번 봤어요. 버스에서, 그리고 지하철 종착역에서.” “야. 그 이야기를 지금하면 어떻게 해.” “아까 하려고 했었는데.” “들어오면서 그 이야기부터 했어야지.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 동네에 사는 아저씨가 등산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근데 등산복차림이 아닌 거예요.” “어휴. 그러면 네 녀석이 이리 들어오면 안 되지. 그냥 집엘 갔어야지.” “지금 그런 이야기 할 때야? 그건 나중에 얘기 하고 밖에 한번 나가 봐라.” 공휴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집 앞 골목은 조용했다.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며 힐끔거렸다. 건너편 골목에서도 누군가 나를 힐끔거렸다. 청바지에 흰색 운동화. 주황색 티셔츠. 각진 얼굴에 스포츠머리. 그들이다. 우리는 모두 방에서 나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고 갈림길에서 둘로 나뉘었다. 담배 두 개비를 피는 동안 저 전봇대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다. 나를 쫒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내 방을 뒤지고 있다면? 일단 여기를 피했다가 며칠 뒤에 다시 와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럴까. 나는 수배자도 아닌데, 이렇게 피할 필요가 있나? 다시 방으로 돌아가야 하나. 왜? 걸음을 옮긴다. 방금 건넜던 횡단보도를 향한다. 보행자 신호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우측으로 돌아 나왔던 전봇대를 다시 좌측으로 돌아 올라간다. 쌀집이다. 쌀집 아저씨가 아주머니랑 내 방 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말하고 있다. 평소 웃으며 ‘초옹가악’하고 부르던 아주머니가 눈을 피한다. 집 앞은 아무 일 없는 공휴일 아침처럼 평온하다. 주인집과 분리된 내 방의 바깥문을 열고 들어선다. 누군가 내 방 창으로 상반신을 집어넣고 있다. 아래에는 그를 받치는 또 한 사람. 저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나는 왜 다시 이리로 온 거지. 눈이 마주쳤다. 결정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이번에. 결정을 짓겠다. 나는 누군가를 붙잡고 창에서 끌어내린다. 그를 붙잡고. 밑으로, 밑으로 내려갈 것이다. 이제 칼을 옆으로 돌릴 시간이다.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9-10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물을 주다

나무들은 뿌리가 깊으니까 아래에 있는 흙에서 물을 당겨올 수 있지만 꽃이나 풀들은 뿌리가 얕아서 조금만 비가 안 와도 힘들다며,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물었다. /언스플래쉬 상사화 꽃대가 잘렸다. 하루에 한 뼘 이상 솟아오르던 꽃대의 허리가 두 동강이 났다. 자줏빛 꽃을 기대하던 K는 아연실색.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오늘 아침에 동네 전체에 약을 쳤거든. 약 치시던 분이 가지치기를 해 주겠다 하더라고. 고맙다 했지. 그런데 저렇게 해뒀더라고. 뭐라고 말도 못하겠고.”작년에는 황칠나무의 몸통을 자른 분이다. 다행히 옆으로 새 가지가 나오기는 했지만.“이 땡볕에 약 친다고 고생했을 텐데 뭐라 할 수도 없고.”K는 바닥에 널브러진 꽃대를 들고 서서 또 다른 이상은 없는지 주위를 살펴보았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 해서 상사화라 부른다지. 꽃과 K가 만나지 못하는 여름이 되어 버렸다.“이리 줘.”S는 내 손에서 꽃대를 빼내 집으로 들어갔다. 긴 유리잔에 물을 받고 꽃대를 담았다.다행히 꽃이 피었다. 하루 이틀의 간격으로 봉오리들이 자줏빛 꽃잎을 펼쳤다.“고마운 일이네.”“얘가 조금 빨리 나왔어. 조금 있으면 옆에서 다른 애들이 올라 올 거야. 너무 마음아파 하지마.”S가 위로를 했고 K는 가만히 상사화를 들여다보았다.며칠 뒤부터 한동안 비가 왔다. 이 비는 언제 그칠까? 이 정도 비면 땅 속 깊이까지 충분히 젖겠지.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해 서 있던 K는 이제 막 영글기 시작한 단감의 개수를 헤아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땡볕 더위가 이어졌다. 2주? 3주? 내일이면 조금 시원해질까 싶었지만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살은 이른 아침부터 초저녁까지 이어졌다. 축 늘어지고 말라가는 잎을 보며 물을 줘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너무 더운 탓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가 있을 때 물을 주면 잎이 다 타버린다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핑계 삼아 저녁에 물을 주겠다 다짐했지만 그저 변명일 뿐이었다. K는 약속이 많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물을 주는 것은 S였다.일요일 아침이었다. 밤새 더위로 뒤척였지만 K는 평소처럼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묵직한 두통과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 앉았다. 멍하니 있다가 지난 밤 남겨놓은 수박을 찾아내 몇 조각 먹고는 믹스 커피를 탔다. 커피 잔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잔디는 아직 견디고 있는 듯 보였고 국화와 나팔꽃 잎은 바싹 쥐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될 것 같았다. 늘어지고 말라비틀어진 고추 줄기와 잎 사이로 천천히 오가는 벌레들이 보였다. 약을 줘도 소용이 없네. 하지만 K는 호스를 끌어와 물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일쯤 비가 오면 좋겠는데. 비가 온다 하지 않았나? 생각만 하고는 돌아서는데, 상사화 꽃대 두 개가 보였다. 저건 언제 올라왔지? 그런데 힘이 없어 보였다. 꽃봉오리도 마찬가지 끝부분이 말려들어가고 생기가 없었다. 물을 없나? 올해는 제대로 된 상사화를 보기 힘들겠네. K는 남아있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처마 아래 그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바람은 조금 시원해진 듯 했다. 이제 곧 가을인가? 그런데 왜 이리 더운 거야. K가 혼잣말을 하는 사이 S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침 일찍 운동을 나갔던 S였다.“상사화 꽃대가 올라왔어. 두 개나”K는 일어나 S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그런데 말라가네. 힘도 없어 보이고.”“물을 주지 그랬어.”S는 상사화를 살피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친 꽃들, 풀들은 이제야 제 주인을 만났다는 듯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지금 물 줘.”“해가 있을 때는 물주면 안 된다고 했는데.”“다 죽을 판인데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도 주고 저기도 주고. 돌단풍도. 봐봐. 여기 정상인 게 있어.”K는 감나무와 소나무, 단풍나무를 가리키며 재들은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 것 아니냐고 대꾸했고 S는 나무들은 뿌리가 깊으니까 아래에 있는 흙에서 물을 당겨올 수 있지만 꽃이나 풀들은 뿌리가 얕아서 조금만 비가 안 와도 힘들다며,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물었다. K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다 물 호스를 쥐었다.“돌단풍, 상사화, 나팔꽃, 고추, 국화만 주면 되는 거지?”“이왕 주려고 마음먹었으면 다 줘. 근근이 버티고 있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잖아. 알면서 왜 이래?”K는 괜한 고집을 부렸다. 나무 밑 그늘에 있는 애들은 괜찮아 보이지 않냐고, 잔디는 잘 견디고 있는 것 같고, 돌단풍은 원래 낮이면 저렇게 풀이 죽어 있지 않았냐고.“물을 너무 많이 줘도 안 되는 거잖아. 필요한 아이들만 주면 안 돼?”K가 볼멘 목소리로 말을 했다. S는 기가 찬다는 듯 K를 보다 한 마디 내뱉고는 집으로 들어갔다.“아, 마음대로 해.”K는 집으로 들어가는 S의 뒷모습을 보며 잔에 남은 커피를 마신 후 한숨을 잠깐 내쉬고는 따라 들어갔다. S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고 K는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지금 뭐하는 거야? 거부권이야? 자기도 누구처럼 거부권이라도 행사하려는 거야?”주방에 들어갔다 나온 S가 말했다.“아니야. 하려고 했어.”K는 현관으로가 긴 팔 작업복을 꺼내 입었다. 모자까지 찾아 썼다.“다 주란 말이지?”“그래,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야? 정이 많은 사람이 왜 그래? 다 쓰러지고 말라비틀어진 뒤에 물을 주면 뭣해. 거름 만들 거야? 큰 나무들은 괜찮다 쳐. 우리 정원에 큰 나무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럴 거면 전부 벽돌이나 시멘트로 발라버리면 되지.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한 게 자기잖아. 정원이란 것이 나무도 꽃도 풀고 돌도, 심지어 벌레도 있어야 한다고 한 게 자기 아니야? 그런데 왜 그래? 한 두 시간 물주고 와서 샤워 한 번 하면 될 것을.”“알겠어. 알겠다고.”K는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수도꼭지를 열고 호스에 있던 더운 물을 모두 빼낸 후 물을 주기 시작했다. 반쯤 주었을 때 S가 물이 담긴 유리컵을 들고 왔다. 시원한 물이었다. K는 땀을 훔친 후 컵을 받아들었다.“물주니까 좋잖아. 집도 시원해지고.”“나무도 줘? 그 아래 그늘에 있는 팔팔한 놈들도?”“뭐라고?”K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은 S가 컵을 받아들며 말했다.“자기도 참, 이럴 땐 애 같아. 어휴. 정말 힘들면 나무는 안 줘도 돼. 재들이야말로 잘 견딜 수 있을 테니까. 지난번에 내린 비로 아직까지는 아래 흙은 촉촉할 테고, 또 다른 것들에게 물을 충분히 주면 그 물이 아래까지 가겠지. 그늘도 그래. 이 땡볕에 나무들이 만들어주는 그늘은 소중하기는 하지. 하지만 그게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더운 날씨를 모두 감당하지는 못해. 잘 알면서. 오늘 자기 좀 이상하다.”물을 다 주고 들어온 K는 샤워를 했다. S와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었고 담배 한 개비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뜨거운 햇살에 금방 땀이 배어나오기는 했지만 바람은 조금 더 시원해진 듯 했다. 늘어져있던 나팔꽃 잎이 조금은 펴졌고, 색을 되찾은 고춧잎 사이 매달린 초록 고추가 반짝였다. 상사화 꽃대는 힘을 찾았는지 내일은 십 센티미터는 더 올라올 듯 보였다. 덩달아 감나무 잎도, 소나무 잎도 더욱 푸르렀다.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8-27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마음은 이미 라면으로 향해 있다. 가능한 빵이나 라면, 국수 등 탄수화물 섭취는 줄이시고 단백질 섭취를 늘이세요. 짜게 드시지 마시고. 아파트 같은 동 옆집에 살고 있는 의사가... /언스플래쉬 탄수화물과 염분의 문제다. 입술을 혀로 적시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 초조함은 단순히 배가 고픈 것과는 다른 것이다. 전일 저녁 먹다 남겨놓은 사과 한쪽을 집어 먹거나, 저번 주에 선물 받고는 아직 개봉하지 않았던 호주산 다크 초콜릿을 입에 넣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냉동실의 식빵을 떠올렸지만 마음은 이미 라면으로 향해 있다. 가능한 빵이나 라면, 국수 등 탄수화물 섭취는 줄이시고 단백질 섭취를 늘이세요. 짜게 드시지 마시고.아파트 같은 동 옆집에 살고 있는 의사가 출근길 승강기 안에서 말해준 기계적인 답변이 떠올랐지만 어차피 안다고, 들었다고 다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난번 마트에서 마주쳤을 때 그 원장의 장바구니에는 라면이 들어있었다. 지금 내 속엔 ‘뭐 어때?’ 하는 마음이 더 크다. 그럼에도 선뜻 라면봉지에 손이 가지 않는 것은 최근 들어 잦아진 속쓰림 때문이다. 지금 라면을 먹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더부룩해지고 명치 부위가 타들어가듯 아려올 것이 분명하다. 입이 원하는 것과 속이 거부하는 것 사이. 나의 선택은 라면이다. 입이 원하는 것은 지금의 일이고, 속이 거부하는 것은 이후의 일이다.라면에 만두까지 넣어 끓여먹는다. 이제는 냉장고 문을 열고 닫던 손길을 멈출 수 있다. 그리고는 부푼 배를 감싸 안고서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나의 휴가 셋째 날 아침은 라면으로 시작되고 티브이로 이어진다.보험광고는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늦은 저녁이나 새벽 시간에 주로 보이던 것들이 요즘은 아침나절에도 보인다. 예전에도 이랬을지 모른다. 내 눈에 이제야 들어오기 시작한 것일지도. 팔십이 뭡니까, 백세를 준비해야죠. 홈쇼핑 보험 판매 호스트의 말에 그렇지, 하다가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하며 채널을 돌리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채널을 고정한 채 티브이 앞에 앉아 있다. 가입해둔 보험들이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보험증서를 꺼내어 살펴보지는 않는다.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어차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뒤에야 살펴볼 것들이다. 보험에 가입할 무렵, 그러니까 친구나 옛 동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보험회사를 다니던 때에는 요즘과는 달리 사망 이후에 대한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무엇보다도 그들, 친구들이나 옛 동료들에게 십시일반, 상부상조하듯 보험가입을 하던 시기였다. 물론 그들은 자세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설명을 했지만, 애초에 나는 내용에 관심이 없었다. 말이라도 잘 들어 둘 걸. 후회되지만 그렇다고 지금 보험증서를 꺼내어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조건들을 살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음에 한 번에 몰아서 살펴봐야지, 다짐을 반복하는 정도. 어떻게 죽어야 보험금이 잘 나올지를 살피기에는 아직 젊다. 잘 살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아내나 아이들이다. 그들 삶의 문제이니까. 그들이 살펴야 할 것들은 또 있다. 마침, 상조. 상조회사의 선전들이 이어진다. 주로 노인들의 시청시간-오전이나 늦은 밤-에 맞추어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상조회사가 대신 해줄 일은 노인들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노인들의 자식들 문제이지. 사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고 가라는 뜻일까?채널을 돌린다. 이번에도 보험이다. 지겹지만 그럼에도 치매나 뇌졸중 등을 다루는 보험 상품이나 암의 진단과 치료에 대한 보험, 그리고 실손 보험에는 눈길이 간다. 그것들은 입을 맞춘 듯 묻는다. 요즘 세상에 암이 대숩니까? 발달된 치료법으로 치료할 수 있지요. 하지만 늘어난 치료비은 어쩌시려고요? 가족들은요? 어쩌면 벌써부터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 일이었을 지도.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병원 신세를 져본 적이 없는 나는 아쉬운 적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이들 보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일주일간의 휴가 덕분이다. 어떻게든 연차휴가를 모두 사용하라는 회사 방침 덕분에 모처럼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그러나 혼자만의 휴가일 뿐. 가족들이 다 같이 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혼자라도 어디든 다녀오세요. 말들은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혼자서 여행을 다닌 적도 없었고 그런 여행을 상상해본 적도 없다.나의 선택은 ‘집에서’다. 늦은 아침 일어나 모두들 나간 텅 빈 집에서 빈둥거리다 친구들이 직장에서 돌아올 즈음 약속해둔 장소에서 친구들을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 만나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지만, 절대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집이다. 그 시간을 티브이와 함께 한다. 긴 시간 나와 함께 해 주는 것은 보험광고만이 아니다. 내 건강을 걱정해주는 프로그램 또한 너무나도 많다. 시간대만 잘 조절한다면 하루 종일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제 겨우 휴가가 삼 일 지났음에도 전문가부터 연예인 패널까지, 질병으로부터 회복하고 살아 돌아온 이들의 수기가 곁들여져 쏟아지는 건강정보는 내가 평생 들었던 건강에 관한 정보를 넘어선다. 당신의 혈관은 어떠십니까? 가끔씩 온몸에 힘이 빠지듯 어지럽거나 시야가 흐려지지는 않습니까? 예전에는 분명히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이름들은 없으십니까? 묻는 티브이 앞에서 나는 애써 기억하지 않았던 일들을 떠올리거나, 침침해지는 눈이 눈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나, 가끔씩 뻐근해오던 목 뒷덜미를 만지며 자신의 혈관 속을 상상하는 것이다.고무관 같은 갈색의 벽을 가진 혈관이다. 혈액의 붉은 파도를 타고 놀던 노란색 튜브, 콜레스테롤들의 수가 점점 많아진다. 갈색의 벽에 들러붙고 서로를 붙잡아 혈관을 막기 시작한다. 이윽고 혈관은 막혀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혈액들과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혈액들이 서로 뒤엉켜 아우성을 지른다. 그러다 제풀에 쓰려져 혈전이 되거나 부풀어 오른 혈관의 약한 곳을 뚫고 쏟아져 나간다. 운이 좋아 혈관이 터지지 않아도, 혈전으로 막힌 혈관 뒤쪽으로는 말라버린 저수지 바닥처럼 하얗게 변한 뇌 세포들이 살려 달라 아우성을 지르다 쓰러진다.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린다.“에이씨.”채널을 돌린다. 다음 채널에서는 허리가 아프지는 않은지, 오른쪽 발가락 끝에 찌릿한 전기가 오지는 않는지 묻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보험광고가 나올 것이다. 보험광고가 끝나고 나면 상조광고가. 상조광고 이후에는 간간히 난민이나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주자는 캠페인광고가 이어진다.잘 짜여진 이야기다. 당신은 건강한가? 자신 있는가? 감당할 수 있는가? 보험에 가입하라. 그럼에도 결국은 죽을 것이니 사후를 준비하라. 충고에 충실했다면 이제 착한 일을 하라. 마음의 평안을 얻으라.첫날은 불편했고, 두 번째 날은 기억할 수 있었고, 세 번째 날인 오늘, 지금 나는 1588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다. 해당 지역 담당 설계사가 전화를 할 것입니다. 곧 전화벨이 울린다. 설계사다. 그에게는 익숙한 만남이다. 보험에 가입을 하지 않는다면 닥쳐올 불행에 속수무책으로 맞서야 할 것입니다. ‘만일’이 아니다. 무겁고 섬뜩한 예언이었다. 보험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평안한 마음을 얻을 것이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큰 문제없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그는 나를 사장님으로 만든다. 이틀 후 휴가가 끝나기 전에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이게 뭐하는 짓이람. 후회하는 마음이 약간은 들지만 그래도 이제는 챙길 나이가 되었다, 스스로 다독인다.“사장님, 최근에 건강검진에서 이상한 결과라든가, 병명이 있는 질환을 진단 받았다던가 하신 적은 없으시지요?”“아. 병원에 가본 적이 없어서.”사실이 그렇다. 감기 정도로 병원에 가지는 않는다. 검진을 받으라, 직장 담당부서가 몇 번 재촉을 하기는 하지만, 잠깐의 재촉일 뿐 그 시간에 일하고 있는 나를 비난하거나 압박을 주지는 않는다. 나는 아픈 적이 없었나? 어딘가 아팠던 것 같기도 하다. 왼쪽 어깨가 결린 적이 있었고 엉덩이 위쪽 허리가 묵직했다. 소화가 안 되고 헛배가 불러와 하루 종일 굶은 적도 있다. 체중도 좀 주는 것 같고. 병원에 가야하나? 아니지. 병원 내원 기록이 있으면 보험 가입이 거절되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래, 보험 가입 먼저 하고. 그리고 병원에 가봐야겠다. 보람찬 휴가.“그래요? 그런 분은 잘 없으신데. 사장님 연배면 보통은 적어도 한두 번은 병원에서 검진을 받으시거나 하시는데. 하여튼 병원 내원 기록이 없으신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8-13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장미의 꽃을 기억하다

공이 형산을 지나는 중이었다. 낙동을 따라 내려오는 길, 동쪽 끝에 포(浦)라는 곳이 있다고 했다. 강과 바다가 만나고 너른 들판이 있는 곳이니 능히 사람을 낳고 기르기 적당한 곳이며 넉넉함과 모자람 모두 없으니 인, 의, 예, 지를 갖춘 이들이 모여살기 좋은 곳이라 들었다. 공은 포에서라면 자신이 꿈꾸었던 세상을 펼쳐 보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공의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스승님, 이번 일정은 무척 서두르시는 것 같습니다.”공의 뒤를 따르던 제자가 물었다. 많은 제자들을 내보낸 뒤 오직 한 명, 따르길 허락한 제자 기였다.“이번 길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구나. 그러니 마음이 급해지는 것 같다. 힘드냐? 여기서 조금 쉬었다 가자.”공과 제자 기는 회화나무 그늘에 앉았다. 언덕 아래 형산 옆으로 흐르는 강이 내려다보였다. 기가 봇짐을 풀어 건포를 꺼내 공에게 올렸다. 공은 건포의 반을 떼어내고 남은 것을 기에게 건넸다. 둘은 건포를 우물거리며 그늘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즐겼다.“시원하구나.”“네. 그런데 물기를 품은 바람인 듯합니다. 강을 지나온 바람인지, 그렇지 않으면 곧 비가 오려는지. 포라는 땅에 도착하려면 아직 많이 남았을까요?”“글쎄다. 나도 초행이니 답해줄 수가 없구나. 마침 저기 누가 오는 구나. 한 번 물어보자꾸나.”언덕 아래에서 한 사내가 수레를 끌고 올라오고 있었다. 여름인데다 해를 가리는 그늘이 없는 길이었다.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사내의 뺨과 등을 타고 흐르는 땀이 보이는 듯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는 언덕 아래로 내려가 수레의 뒤를 잡고 밀었다. 사내는 잠시 멈칫 하다 이내 미소를 보이며 묵례를 했다. 수레는 크지 않았으나 수레에 담긴 것은 꽤 무거웠다. 거적으로 덮어 놓은 것이었는데 기는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언덕을 다 오르고 난 후 물어볼까, 혹시 요기할 만한 것이면 조금 나누어 달라 말해볼까 생각하며 두 발로 땅을 박차고 두 팔로는 힘껏 수레를 밀었다.수레가 언덕위로 거의 다다랐다. 공은 두 팔을 들어 얼른 이리 오라 손짓을 했다.“이쪽이오, 이쪽. 그늘 아래로 와 쉬시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이니 조금 났겠지만 다리가 풀리면 수레의 힘을 감당하기 힘들 터이니 쉬었다 가시오.”사내는 그늘 아래에 수레를 세운 뒤 공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그늘이 내 것이 아닌데 무엇이 감사하단 말이오. 그나저나 수레에 든 것이 무엇이기에 이 더운 여름날 땡볕 아래 언덕을 오르고 계셨소?”회화나무 기둥에 기대 땀을 훔치던 기는 먹을 것들의 이름이 나오길 기대하며 사내의 입을 보았다.“시신입니다. 지난 밤 명을 다한 한 노인의 시신입니다.”사내는 시신을 언덕너머 내리막 길 옆 계곡 아래에 버리기 위해 옮기는 중이라 했다.“아니,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명을 다한 지 하루 만에, 그것도 장례를 치르지 않고 깊은 계곡 아래에 버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오? 포의 풍습이 그러하오?”“사연이 있지요. 죽은 지 하루만에, 계곡 아래에 버릴 만한 사연이 있습니다.”사내는 고개를 들어 중천에 뜬 해를 가늠하고는 시신을 버리고도 마을로 돌아갈 시간이 충분하다며 공에게 시신의 사연을 들어보겠는지 물었다. 공은 시신과 사내의 사연을 듣고 나면 굳이 포로 발걸음 할 이유가 없어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말해보시오. 들어나 봅시다.”시신의 주인은 교(交)라는 사람이었다. 교는 포에서 태어나 70여 년을 지낸 뒤 전일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가업으로 이어오던 의업을 물려받았다. 이미 약관에 침술에 있어 근방에서는 따를 자가 없었다. 또한 대대로 물려받은 약제에 관한 방대한 비방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 없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세상사에 대한 식견 또한 낮지 않아 인근의 여러 사람들이 질병이 아닌 다른 문제가 생길 때에도 찾아와 상의를 하고는 했다. 식견에 못지않게 의협심이 깊었고 긍휼의 마음은 넓었다.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몰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여럿의 제자를 두고 의원을 확장하여 ‘지민원(志民院)’이라 이름을 붙인지 서너 해가 지난 즈음이었다. 이미 전 년부터 흉년이 들었던 데다 가뭄으로 그 해 농사도 곡식의 수확이 적어 다른 이유가 아닌 먹을 것이 없어 쓰러지고 엎어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는 자신의 곳간을 열고, 지민원의 자리를 내어 사람들을 구제하려 했으나 자신만의 힘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교는 지역의 부호인 저(猪)를 찾아갔다. 교가 저에게 말하길, 가뭄으로 많은 사람들이 곤경에 처했으니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곤경에 처한 이들이 곧 어르신의 이웃이며 어르신 부의 원천이 아닙니까? 일단 이들이 살아야 어르신과 어르신의 일가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창고를 열어 인정을 베푸시길 청합니다. 낮으나 명확한, 겸손하나 추상같은 교의 말을 못 들은 척 할 수 없었던 저가 답하기를, 교의 말이 틀리지 않으이. 내 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도록 하지. 다만 공으로 나누어 줄 수는 없으니 빌려간 곡식의 3할을 이자로 받아야 하지 않겠나. 저의 말을 들은 교는 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 뒤 이렇게 다시 말하였다. 어르신의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다만,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나니 문득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생각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알고계시겠지만 저희 지민원의 모든 힘을 다하여 사람들을 돕고 있어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하여 저 어르신의 일가와 식솔들이 행여 아프거나 질환으로 고통 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저희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해주십시오. 혹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조금 멀겠지만 저기 형산 넘어 있다는 작은 의원을 불러 스스로를 돌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제서야 이 사람 교,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게. 3할은 받아야 하나 인정상 또 어찌 그렇게 하겠나. 빌려간 만큼만 돌려받을 테니 모쪼록 상황이 힘들더라도 우리 일가와 식솔의 고통을 외면하지는 마시게. 하였다. 사람들은 넉넉하지는 않으나 큰 피해 없이 그 해를 넘길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화타나 편작이 살아온다 해도 그리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며 교를 칭송했다.“그런 훌륭한 이의 시신을 깊은 골짜기 아래에 버리려 한단 말씀이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소.”기가 사내를 보며 큰 소리를 내었다. 공이 손을 들어 말리지 않았다면 기는 아마도 사내와 드잡이를 했을 것이다. 사내가 기에 못지않은 큰 소리로 말했다.“그 훌륭함이 30년을 가지 못했다 이 말입니다.”“그건 또 무슨 말이오. 어서 말해보시오.”약관에 의술을 시작한 교가 마흔이 되었을 즈음, 교의 의술은 더욱 깊어졌고 그를 따르지 않는 의원이 없었다. 인근 삼백 리 내 모든 의원은 지민원의 분점이 되었다. 그때 교가 변했다. 어떤 사연인지 알 수 없으나 교가 가졌던 의협심과 긍휼함은 사라졌다. 환자의 상황에 맞추어 받던 치료비와 약값을 일괄하여 거두기 시작했다. 치료를 시작하기 전 환자의 여력을 살펴 그가 치료비나 약값을 제대로 낼 수 없다 판단이 되면 환자를 거두지 않았다. 손을 대면 살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대로 된 대가가 없다면 움직이지 않았다. 제자들에게 환자의 치료를 맡기는 일이 잦아졌고 그만큼의 시간에 저와 저의 친구들과 함께 하며 놀고 마시고 처자를 희롱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교에게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 믿었고 교의 변화와 관계없이 존경의 마음으로 교를 대했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포에 역병이 돌았다. 이전에도 역병은 심심치 않게 발생했지만 포의 사람들은 역병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교가 있었고 지민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병이 발생하면 교는 지민원의 의원들과 함께 밖으로 나와 환자를 찾아 치료하고 환자가 아닌 자들이 환자가 되지 않도록 힘썼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교는 저와 저의 친구들의 일가, 식솔들을 불러 지민원을 채운 뒤 지민원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고 울부짖으며 도와달라 하였지만 교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미 환자로 꽉 차 더 이상 받을 수가 없으니 알아서들 잘 대처하라는 글을 내걸었을 뿐이었다. 포의 사람 태반이 역병으로 사라진 뒤에야, 더 이상 역병 환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교는 지민원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것은 역병으로 죽은 이들의 가족들로부터 그들의 토지를 싼 값에 사들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지민원(志民院)을 지민원(地泯怨)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교(交)는 교(狡)가 되었다. 이후 지민원은 가파른 내리막을 향했다. 제자들과 의원들은 지민원을 나와 자신들의 의원을 열었고 지민원은 결국 문을 닫았다. 교는 사두었던 토지를 산 가격보다 더 싼 값에 넘겨 그 돈으로 식솔들의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교는 이후 죽을 때까지 젊은 날의 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돌아갈 기회를 그 누구도 주지 않았다.“남아 있는 식솔들은 죽은 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지요.”포의 사람들은 교의 장례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를 두고 회의를 했다.“논의의 결론이 계곡에 버리는 것이란 말이오? 그게 옳소? 비록 그가 뒤에 와서 사람답지 않게 살았다고는 하나,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기는 하나 그 이전에 마을 사람들을 위해 행한 선한 일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기가 다시 사내에게 물었다 조금 전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불만이 섞여 있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비록 역병에 태반이 죽었지만 젊은 날의 교 덕분에 그 만큼이라도 살았고 살아남은 사람도 교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자가 없으니 교의 죽음을 그냥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장례를 나누어 치르기로 했습니다. 지금 마을에서는 교의 오일장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계곡에 버려질 이 시신은 마흔 이후의 교입니다. 마을에서 치러지는 장례식은 젊은 날의 교를 위한 것이고. 아이고, 늦었습니다. 저도 이것 빨리 버리고 돌아가야겠습니다. 허기도 지고.”사내가 언덕을 넘어 수레를 끌고 내려갔다. 기는 도와줄까 어쩔까 망설이는 눈으로 공을 보았지만 공은 묵묵히 형산 아래 강만 볼 뿐이었다.“스승님, 어찌할까요?”기가 물었다. 공이 답했다.“장미의 꽃을 기억하는 곳이구나, 이곳 포는. 좋다, 좋아.”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7-30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까마중과 헛기둥

무릎까지 자란 까마중 무리를 헤치며 나아갔다. 까마중은 좁고 깊은 골을 따라 양쪽으로 나 있었다. 골 바닥은 물기가 많아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진흙이 신발 바닥에 붙거나 뒤로 튀었다. 까마중 열매가 식용이라는 이야기를 누가 해줬더라? 나는 눈으로 최의 장딴지를 쫒으며 까마중 이야기를 누가 해줬는지, 자신이 까마중의 이름을 어찌 알고 있는지 떠올렸지만 어렴풋한 기억조차 없었다. 나는 재채기를 하려다 못한 것처럼 답답해져 도리질을 했다.“얼마나 더 가야하는 거지?”최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길잡이를 자처했던 박이 급한 일이 생겼다며 산에서 내려간 뒤로 우리는 기댈 곳이 없었다. 지도가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우리는 지도의 바깥에 있었다.산행 이튿날 아침 박이 지름길을 안다, 지름길로 가자고 했을 때 아무도 말리거나 거부하지 않은 탓이었다. 박을 믿은 탓이기도 했다. 그때 물었어야 했다. 왜 지름길로 가야 하는지?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산을 즐기러 온 것인데 지름길로 갈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왜 서둘러야 하는지? 우리는 묻지 않았다. 그저 지름길이라는 단어에 홀린 듯 그래? 지름길이 있다면 그리로 가야지, 했다.박은 길을 만드는 사람처럼 걸어갔다. 두 시간, 세 시간 동안 마주 오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자 우리는 박을 탓하기 시작했다. 박은 우리가 번갈아가며 얼마나 남았느냐? 길을 아는 것은 맞느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냐를 물어대자 지도를 꺼내 지금 우리가 있는 위치와 기존의 등산로, 그리고 산장이 있는 곳, 산장까지 가는 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던 중요한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며 너희들끼리 다녀오라 말을 남기고는 내려가 버렸다. 차라리 욕을 하거나 화를 내었다면 맞서거나 달래거나 했을 텐데, 박은 차분히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 뒤 돌아섰다. 되돌아가는 박을 멍하니 보던 우리는 박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저 자식 혼자 내려간 거야?”우리는 잊고 있었다. 녀석의 별명이 ‘나안해’였다는 것을.“그러니까, 지금 저 녀석이 ‘나안해’ 한 거야? 그런 거지? 개새끼.”한동안 우리는 없는 박을 놓고 욕을 했다. 하지만 이내 의미 없는 일이란 걸 알아차렸다. 돌아갈지, 앞으로 갈지. 선택해야 했다.“아직 오전이니까 밤이 되려면 멀었잖아. 우리가 빈 몸으로 온 것도 아니고 산행 준비해서 왔는데, 일단 가보자고.”아침에 출발했던 곳까지 되돌아가서 그곳에서부터 정식 등산로를 따라가자는 의견과 그렇게 되면 날 저물기 전에 다음 산장에 도착하기 힘들 것이고 야간 산행을 해야 하는데 야간 산행이야말로 위험하니 가까운 등산로를 찾아보자는 의견으로 나뉘었지만 우리는 의외로 침착했고 서로를 존중했다. 박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보였다. 무엇이 좀 더 합리적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시간에 쫒기지 않는다는 것, 함께 하는 산행이 목적이라는 것에 동의한 우리는 되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여차하면 지난 밤 묵었던 산장에서 하루를 더 보낸 뒤 다음날 출발해도 된다는 것까지. 어설프고 고집 센, 속 좁은 길잡이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미 뭔가를 보여준 듯한 뿌듯함이 가슴속을 채웠다.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옅은 홍조를 띤 채, 가끔은 노래를 부르고 가끔은 끝말잇기를 하며. 한 시간여가 지났을 즈음, 우리는 조용해졌다. 앞 사람의 장딴지만 내려다보며. 이따금씩 말을 했는데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여기가 맞아? 이것 본 적 있어? 처음 등산로를 벗어나 지름길로 들어선 지점까지 가는 것이 관건이었다. 우리는 오는 동안 보았던 것들을 기억해내며 걸었다. 처음에는 모두의 기억이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름길이라는 것이 애초에 길이 아니었던 탓에 그 흔한 산악회 리본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까마중을 보았다.골을 따라 양쪽으로 자란 까마중 무리 뒤쪽으로 너른 바위가 보였다.“저기서 좀 쉬었다 가자. 방향도 정하고.”아직 해가 지기에는 남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산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당황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리가 주는 평온함 속에 있었다. 박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하지만 신호가 간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했다. 언제든지 119에 전화하면 되는 것이니. 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김은 영상에서 본 오지에서 살아남는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는 박의 지난 ‘나안해’ 만행을 하나씩 짚어가며 늘어놓았고 최는 미국 주식시장과 한국 주식시장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했다. 나는 녀석들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아니, 흘려들렸다. 까마중 무리를 살펴보느라. 내가 아는 무리들은 항상 앞서거나 이끄는 존재가 있는데, 하다못해 박 같은 놈이라도 생기는 법인데, 까마중 무리엔 그런 놈들은 없을 것 같았다. 그저 똑같은 흰 꽃과 똑같은 까만 열매를 달고 있을 뿐.“이 근처가 밭이었나 보다. 화전민이나 뭐, 그런”최가 꺼낸 삼성전자 주가 이야기를 끊으며 내가 말했다.“그걸 어떻게 알아?”이가 물었다.“저기 보이는 녀석들이 까마중이거든, 물론 산에서 자랄 수도 있기는 한데 주로 밭에서 자라는 녀석들이야. 게다가 1년생이고. 하나도 아니고 저렇게 무리지은 것을 보면 대대로 여기서 살아온 것 같아서 말이야. 좀 오래 전에 화전민이나 그런 사람들의 밭이었다가 지금은 숲이 된.”“그렇다면 길이 연결된 곳이겠네. 흔적이 있을 수도 있고. 캬, 우리가 잘 찾아왔네.”우리는 주위를 살펴보기로 했다. 길을 찾는 목적도 있었지만 호기심이 더 컸다. 오래 전에 누군가 살았던 곳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최가 모두를 불렀다.“여기 뭐가 있어.”군데군데 파이고 검게 썩은 나무기둥과 돌멩이가 온전히 몸을 드러낸 흙벽, 부서지고 구멍이 난 석면 슬레이트 지붕. 예전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쓰던 창고 같았다. 반쯤 부서진 문 앞, 풀 사이로 바스라진 석면 슬레이트 조각들이 제법 보였다. 기둥이었을 것 같은 통나무도 몇.“야, 기둥이 쓰러졌는데도 건물은 그대로다 그지? 어설프기는 해도 옛날에 지은 것들은 튼튼하단 말이야.”이가 통나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발이 닿는 곳마다 부스러기가 떨어졌다.“저건 헛기둥이야, 헛기둥.”김이 말했다.“기둥은 기둥인데 기둥이 아니야. 멋을 부리거나 부수적인 용도로 쓴 거지. 없어도 건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박가놈 같은 거네. 누군가 말했고 우리는 모두 웃었다. 그리고 이어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창고 뒤편으로 어슴푸레 보이는 길을 보았다. 풀로 덮여있기는 했지만 나무들 사이로 이어지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없는 너비를 가진, 예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걸어 다녔을. 아카시 나무들이 침범하지 못했고 소나무 뿌리들이 조금씩 드러나 있는 것이 분명한 길이었다. 어디론가 이어져있을 길이었다.우리는 어디론가 이어져있을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이라 믿고 걷기 시작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걸으면서 점점 더 확신이 생겼다. 풀이 덜 자란 길바닥이 보였고 간혹 계단처럼 보이는 너른 돌판도 보였다. 김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고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따라 우리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처럼 앞뒤로 팔을 흔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나뭇가지에 묶인 빨간 산악회 리본을 발견했다. 노란 리본, 파란 리본이 뒤를 이었다. 숲을 벗어나 등산로에 발을 내디뎠다. 마주 오는 등산객이 보였고 등산객은 자신이 온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오늘 가려했던 산장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해 저물기 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고. 우리는 돌아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원래의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우리는 까마중 같은 녀석들이었다. 박이 없어도, 헛기둥이 없어도, 제 갈길 알아서 잘 가는.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7-16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이것은 복권이야기

김은 오랜만에 복권을 샀다. 복권 명당이라 불리는 판매소 근처 식당이 약속장소였고 약속시간보다 조금 빨리 도착한 덕분이었다. 횡단보도에서 보행신호를 기다리던 김은 문득 맞은편 보도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느긋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곧 두 발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신호기를 쳐다보며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단거리 육상선수들. 뭐지? 뒤로 돌아선 김은 무려 마흔 두 번이나 복권 1등 당첨자가 나왔다는 현수막을 보았다. 복권을 판 수수료만으로 건물을 샀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 그 판매소인가? 보행신호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김은 복권을 살 생각이 없었지만 문득 어떤 의무감, 혹은 조바심 같은 것이 들었다. 자칫하면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 뒤쪽에 서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잖아. 김은 서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지갑에서 오천 원 권 지폐를 꺼내 손에 쥐었다. 지난 밤 꿈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나? 꿈에 그녀가 나왔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시내 중심가를 걸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뭔가를 먹기도 했는데, 사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그녀가 꿈에 나왔다는 것만이 정확한 기억이다.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어린 여가수의 꿈을 꿨다는 것이 왠지 부끄러워 주위에 말하지도 않았다. 글쎄, 소주 몇 잔이 들어가면 우스갯소리로 꺼낼 만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복권 판매대 앞에 서니 혹시 하는 마음이 일었다.자주는 아니지만 김은 꿈을 핑계로 가끔 복권을 샀었다. 왕이나 북쪽의 김씨가 꿈에 나오거나 용을 보거나, 팔색조가 노래를 부르거나 똥을 밟는 꿈을 꾸었을 때는 부러 복권판매소를 찾아갔다. 물론 결과는 형편없었다. 왕도 아니고 용도 똥도 아닌데 뭐. 개꿈이네, 개꿈. 그 날 아침, 그녀가 나온 꿈을 되새기던 김이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그랬던 김이 복권을 샀다. 그저 복권 명당이라 불리는 가게 근처 식당이 약속장소였고 약속시간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고 마침 그 날이 그녀가 나온 꿈을 꾼 날이었던 덕분이었다.술을 마시는 동안 김은 복권을 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사내 셋이 어울려 마시다 보니 거나하게 취했다. 흰소리들,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후회와 이렇고 저렇고 하는 한탄과 이렇다면 저렇다면 하는 헛된 희망들이 술잔 사이를 오갔다. 그러다 박이 대뜸 요즘 아내와 각 방을 쓴다며 한 숨을 내쉬었고 김과 홍은 그러면 그동안 한 이불을 덮고 잤던 거냐며 부러움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대단하다는 말을 한 것 같다. 누구도 한 잔 더 하러 가자, 자리를 옮기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박이 술값 계산을 했다. 김은 얼마라도 보태기 위해 지갑을 열다 반으로 접힌 복권을 보고서야 자신이 복권을 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김은 휴대폰으로 꿈에 나왔던 그녀를 검색했다. 이름과 그녀의 히트곡 몇 개의 제목을 알았고 걔 중 한두 곡의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는 있었지만 꿈에 나올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궁금했다. 그래, 넌 왜 내 꿈에 나온 것이냐? 그녀의 사진을 보며 김이 물었다.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뒤를 보며 대답했다.네? 손님 뭐라고요?아, 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김은 검색화면을 덮으려다 그녀 사진 옆 프로필에 쓰여 있는 그녀의 생년월일을 보았다.‘1993년 5월 16일’516이네. 재밌네. 그런데 이거 5, 16 어디서 봤는데. 5, 16. 이거….김은 지갑에서 복권을 꺼내 복권 속 숫자를 살폈다. 5도 있었고 16도 있었다. 19도 9도 3도. 김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빈속에 소주를 들이켰을 때 느끼는 그런 달아오름과는 달랐다. 쿵쿵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얼굴은 뜨거워졌다. 동시에 머릿속은 이상한 감각들로 차기 시작했는데 조이는 듯 답답한 듯, 하지만 아프지는 않은 그런 감각이었다. 그러면서도 어지러웠고 눈앞은 캄캄해졌다가 또 부셨다가.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몇 번 눈두덩을 문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집에 들어선 김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방으로 들어가 지갑에서 복권을 꺼냈다. 읽고 있던 소설책 사이에 복권을 끼우고 책을 덮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치킨을 먹고 있었다.“많이 먹었겠지만 이리 와서 한 조각이라도 드세요.”아내가 옆 자리를 비우며 말했다. 김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아내의 옆자리에 앉았다.“배불러. 그건 그렇고. 여보, 복권 샀어.”“복권 처음 사는 것도 아닌데, 웬 호들갑?”“그게 내가 엊저녁에 아이유 꿈을 꿨거든.”“걔가 왜 자기 꿈에 나와? 당신 아이유 좋아해?”“싫어하는 건 아니지. 꼭 꿈 때문만은 아닌데 아무튼 복권을 샀거든. 그런데 오면서 보니까 아이유 생년월일에 들어 있는 숫자가 내가 산 복권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야. 신기하지 않아? 1등 당첨되면 어쩌지?”아내는 치킨 기름이 묻은 손을 물휴지로 닦고는 손을 내밀었다.“정말? 어디 봐요.”“책에 꽂아두었지. 쫙 펴지라고. 접어서 지갑에 넣었었거든.”김은 전날 밤의 꿈과 횡단보도에서 맞은 편 사람들을 보며 느꼈던 어떤 의무감과, 조바심,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살 수 밖에 없었던 복권,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확인했던 번호들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내는 정색을 하고 마주 앉아 김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은 아내의 볼이 약간 붉어졌다고 생각했다. 치킨을 다 먹은 아이들이 방으로 돌아가자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김의 옆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당신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복권 1등 당첨이 됐다고 쳐. 그 돈으로 뭐할 거야?”“1등? 하하. 당신도 내 말이 솔깃한가 보지? 사실 나도 긴장되기는 해. 뭐할 지는 당첨금이 얼마냐에 따라 다르겠지. 요즘은 예전처럼 많지는 않더라고. 그래도 적은 돈은 아니지. 토요일 발표니까 아직 삼 일 남았네. 당첨되고 생각해도 되는 것 아닌가?”“무슨 소리야, 지금 생각해둬야 적어도 삼 일 동안 행복할 거잖아.”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술이 깨는 것인지 의식이 또렷해졌다. 당첨이 되면 뭘 하지? 직장은 계속 다녀야겠지. 1등은 서울까지 가서 당첨금을 받는다던데 하루 연차를 써야겠네. 세금 때문에 1등 당첨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그 사람들은 어디가야 만날 수 있지? 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김은 이리저리 뒤척이다 결국 일어나 앉았다. 등을 돌리고 누워있던 아내가 돌아누우며 말했다.“자기도 잠 안 오지? 나도 잠이 안 오네. 오늘 이상하네.”아내는 베개를 고쳐 베며 말을 이었다.“당첨되면 말이야, 그걸로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사자.”“아파트?”김은 우리가 사는 곳이 P시이고 서울에 살 일도 없는데 서울 아파트가 무슨 필요가 있냐며 되물었고 아내는 꼭 사람이 살기 위해 아파트를 사는 것은 아니지 않냐, 나중에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또 지방 아파트야 몇십 년이 지나도 가격이 그대로지만 서울은 다르지 않냐며 ‘서울 아파트 사자’를 반복했다. 김은 그게 바로 투기라면서 그런 생각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된 것이라며 핀잔을 주었다. 김은 자신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느꼈지만 굳이 목소리를 낮추고 싶지 않았다. 아파트라니, 그것도 서울 아파트라니.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충분히 좋은데 그 큰돈을 달랑 아파트 한 채를 사는데 다 써버리자니. 김은 화가 났다.“복권 사는 것은 투기가 아닌가. 뭐.”“암튼 서울 아파트는 절대 안 돼. 그러느니 차라리 기부를 해버릴 거야. 전부.”“기부? 우리가 기부 받아야 하거든. 암튼, 어찌되건 당첨금 절반은 내 몫이야. 부부니까. 그렇게 알아둬. 전세를 끼는 한이 있더라도 난, 서울 아파트 살 거야. 마음 정했어.” 김강 소설가·내과의 아내는 다시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아니, 당첨이 된 것도 아닌데 벌써 왜 이래? 포항 앞바다에 기름이 나온 것도 아닌데 벌써 부자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랑 똑같네. 똑같아. 기름이 있다 쳐. 그걸 꼭 꺼내 써야 하나? 그냥 좀 두면 안 되나? 그동안 환경이니 미래니 떠든 건 다 뭔데?”김은 아내의 등 뒤에 대고 말을 했다. 아내는 이불을 당겨 덮었다. 그러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거기서 포항 앞바다 기름이야기가 왜 나오나? 복권이야기 하다 뜬금없이. 할 말 없으면 항상 저런 식이지. 어린 가수 꿈이나 꾸는 주제에. 당첨만 돼봐라. 무조건 절반은 내꺼다. 끝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7-02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사람들은 그저 무심했다

K가 A의 의도를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결과를 예측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판단해야 했다. 참고인으로 소환했으나 수사기관에서는 K를 어떤 방식으로 대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한쪽에서는 굳이 수사 대상을 확대하여 일을 번거롭게 만들 필요가 없지 않느냐, K는 단순히 사익을 취한 판매자일 뿐 A의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쪽에서는 K가 A의 행위에 관련된 제반 상황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고 자신이 A에게 제공한 도구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될 지와 그 결과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책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가 문제이지 책임의 유무는 이미 판단 대상이 아니라는 태도를 견지했다.참고인으로 소환된 K가 A4용지 10매에 달하는 진술서를 제출했으나 그 내용은 대부분 사건과는 관련이 적은 K 과거에 대한 회상이었다. 진술서 중간 중간에 A와 피해자들 사이에 전개되었던 저간의 사정들을 써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 수사기관이 확보한 내용과 다르지 않은 ‘사실’을 서술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K의 과거에 대한 회상 부분은 이번 사건에서 K의 위치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단지 진술서의 페이지를 늘리려는 얄팍한 수로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K가 이번 사건과 관련한 법적 책임을 져야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면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K 스스로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과거를 돌아본 기록은 다른 사람은 공감할 수 없고 진위 여부를 따질 수 없는 그저 개인의 회상이었으니.일부에서는 진술서에 서술된 내용만으로도 K가 이번 사건의 전개와 결과에 대해 예측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했지만 그 주장은 반대측을 설득하지 못했다. 다만 진술서 끝부분, K가 그날 취한 이득으로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취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수사기관 대부분의 구성원이 동의했다. 하지만 도덕적인 비난이 법적 책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도덕적인 비난마저도 할 수 없다는 의견을 견지하는 일부의 구성원도 있었다.사실 K에 관한 것은 그저 지나갈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범죄자가 범행에 사용한 도구를 어디서 구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 몇 문장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문제를 확대시킨 것은 수사관 김이었다. 그는 범죄의 발생을 사전에 막았을 수 있는 몇 가지 단계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다. 그가 평소 일상의 모든 측면을 문장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문장들 사이의 관계와 앞 문장이 뒤 문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반복적으로 사고 실험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이라면 당연히 수사관 김은 그렇게 할 사람이라고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그가 하루를 마무리하며 노트에 정리하는 문장들을 보며 단순히 일기 같은 것이라 생각했고, 일기 같은 귀찮은 작업을 해내는 수사관 김을 좋게 보면 독특하고 나쁘게 보면 정상적이지 않은 별종이라 취급했기 때문에 수사관 김의 문제 제기에 대해 짜증을 냈다. 쉽게 말해 빨리 정리하고 다른 사건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을 이상한 놈이 이상한 방식으로 건드려 모호하고 덩치가 큰 사건, 상황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수사기관 상부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수사관 김의 문제 제기는 없던 일,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수사기관 상부는 이 문제 제기에 흥미를 보였다. 수사관 김의 문제 제기에 대한 결론이 자신들의 평판과 행보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수사관 김이 문제 제기를 한 다음날 바로 어느 정도 입증되었는데 김과 친한 기자 한 명이 김의 문제 제기에 대한 기사를 썼고 무척 지루해 보이는 내용이었음에도 대중의 호응이 제법 있었다. 김이 제기한 문제는 댓글의 수와 공유의 횟수가 평소 범죄 기사의 서너 배를 넘었고, SNS상에서 주요한 토론 주제가 되었다. 토론의 제목은 이랬다.‘범죄행위에 사용된 도구의 제조 및 판매자의 법적, 도덕적 책임에 관하여.’인기 있는 토론 주제 순위를 매기는 한 사이트에서는 ‘K방산, 경제를 살리는 또 하나의 효자 종목,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누르고 9위에 랭크되었다. 실수와 무능으로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문제 제기와 그 해결의 방향으로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이 수사기관 상부의 의식과 의지를 고양시켰다. 수사기관 상부는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한 팀을 구성했고 수사관 김을 전권을 가진 책임자로 지명했다. 김은 사전에 자신이 작성했던 노트를 팀원들과 공유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수사를 진행했다.범죄의 발생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던 몇 가지 단계에 대한 수사관 김의 기술은 아래와 같았다.1. 주차장에서 발생한 사건·세발자전거를 타던 아이를 시야에서 놓쳐버린 피해자의 실수와 그에 대한 A의 반응.2. 이후 발생한 A와 피해자 가족들 사이의 사소한(아파트 동 현관 입구에 자전거 따위의 물건을 놓아두는 것에서부터 잘못 배달된 택배의 소재를 따지는 것, 현관 청소를 한 물이 서로에게 흘러들어오는 등등) 다툼과 이를 둘러싼 이웃들의 자세.3. A가 아파트 동 현관 앞 잔디밭에 조성한 텃밭과 이에 대한 피해자 가족의 이의 제기, 관리사무소의 해결 방안과 그에 대한 A의 대응.4. A가 K의 가게로 와 얇고 뾰족한, 비교적 긴 칼을 요구했을 때 K의 판단과 행동.김은 각 번호의 문장 뒤에 볼펜으로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놓았다.1. 주차장에서 발생한 사건·세발자전거를 타던 아이를 시야에서 놓쳐버린 피해자의 실수와 그에 대한 A의 반응.-작은 그러나 위험했던 해프닝에 대한 당사자들 각각의 대응에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발생한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각각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감당한 것으로 판단한다.2. A와 피해자 가족들 사이의 사소한(아파트 동 현관 입구에 자전거 따위의 물건을 놓아두는 것에서부터 잘못 배달된 택배의 소재를 따지는 것, 현관 청소를 한 물이 서로에게 흘러들어오는 등등) 다툼과 이를 둘러싼 이웃들의 자세.-사소해 보이지만 당사자들의 감정의 악화를 불러일으킨 사안들이다. 여타의 정황과 이웃들의 진술을 종합할 때 이웃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합리적인 중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핵심은 당사자들인데 당사자 간 묵은 감정을 점진적 혹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아닌 이웃들에게 법적,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3. A가 아파트 동 현관 앞 잔디밭에 조성한 텃밭과 이에 대한 피해자 가족의 이의 제기, 관리사무소의 해결 방안과 그에 대한 A의 대응.-당사자들, 특히 A의 분노발작을 유도한, 가해자로서 A를 있게 한 사건이다. 통념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전적으로 A의 잘못이다. 그러나 이의 제기를 당사자 중 한 쪽인 피해자가 했다는 점이 아쉽다. 피해자가 아닌 제3자 혹은 관리사무소에서 선제적인 제지, 혹은 해결 방안을 강구했다면 A의 분노가 피해자를 향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이것을 가해자가 아닌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4. A가 K의 가게로 와 얇고 뾰족한, 비교적 긴 칼을 요구했을 때 K의 판단과 행동.-수사관이 보았을 때 이번 사건의 가장 결정적인 지점이다. K는 A와 피해자 사이에 있었던 저간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 또한 K의 진술서를 참고하자면 K는 어렴풋이 혹은 명확하게 A의 의도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안이한 판단, 사적인 이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범죄에 사용된 결정적인 도구를 A에게 제공했다. 판매를 거부했다거나 혹은 판매 후 피해자와 경찰에 연락을 취했더라면 끔찍한 결과를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K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판매 대금을 사용하여 자신의 가족과 여유로운 일상을 즐겼다. 도덕적인 책임은 당연히 면할 수 없으며 법적인 책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수사관 김의 확고한 의지에 의해 K는 주요한 조력자 혹은 방관자로 지목되었고 그에 따라 법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어갔다. 다시 한 번 수사기관으로 불려가 이전에는 받지 않았던 심문 과정을 거쳤고 두 번째 진술서를 작성했다. 과거의 이야기는 쓰지 말 것과 이번 사건에 대해서만 기술할 것을 요구 받았고 K는 충실히 따랐다. 그는 자신의 무고함을 설명하게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김과 그의 논리에 따라 심문하는 수사관들의 추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물론 구속 수사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김의 팀이 결론을 내고 K에 대한 기소 의견을 정리할 즈음 여론의 변화가 있었다. 조력자 혹은 방관자로서 K를 향했던 비난 여론은 주요 일간지 중 한 신문에 실린 사설-그렇다면 K방산은 칼이고 대한민국은 A인가, 미래 먹을거리 이렇게 날려버리나-이 나온 이후 방향을 바꿨다. 김강 소설가·내과의 ‘수사기관의 논리에 따른다면 지구 각지의 현실적, 잠재적 분쟁지역을 중심으로 판매 대상을 넓혀가고 있는, 가격과 성능 면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출 효자 K방산은 전쟁으로 인한 살인과 피해의 조력자, 방관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도덕적인 잣대로 모든 문제를 바라본다면 죄인이 아닌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중략-별개의 문제라 말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가치에 대한 문제다. 자영업자의 합법적 행위, 생계와 부의 축적을 위해 물건을 파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근본이 아닌가? 그 결과까지 책임지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유대한을 부정하는 행위와 같다. 무리하고 부당한 수사를 멈추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수사기관 상부는 대통령실과 국회로부터 전화가 오기 전 이미 방침을 바꿨다. 그저 일개 범죄 수사로 생각했던 사안이 국가의 가치관에 대한 문제로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 관심은 자신들의 행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결국 김의 수사팀은 해체되었다. 김이 끝까지 항변해 보았지만 조직 내의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다. K는 혐의 없음이라는 통보를 받았고 수사기관 상부는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날 K방산은 모 국가와 1조5천억 원 상당의 판매 계약을 했고 언론들은 일제히 대서특필을 했다. 정치권은 앞다투어 환영의 논평을 내어놓았고 사람들은 그저 무심했다.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6-18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닭의장풀

점심을 먹는 동안 소나기가 내렸다. 시원해질까 싶었는데 오히려 습도만 높아졌다. 식당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오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제 비가 내렸나 싶게 말갛고 파란 하늘이었다.“아이고 더워라. 여서 뭐합니까? 그늘에 가서 좀 쉽시다. 담배도 한 대 피우고.”검고 붉은 피부를 가진,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크고 깡마른 사내가 내 옆으로 와 섰다. 오늘부터 나와 한 조가 된 사내였다. 우리는 식당 처마 옆 그늘진 곳으로 가 앉았다. 사내는 두 손에 들고 있던 생수병 중 하나를 자기 얼굴에 문지르면서 남은 하나를 내게 건넸다. 냉동고에서 막 꺼낸 생수병이었다. “이 일 한지 오래입니까?”“오래 되고 말고가 있습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데. 내가 전기 기술자도 아니고. 어제 처음 해 본 일입니다. 어제 하루 하고 말 줄 알았는데 다행히 오늘 또 나오라 하더라고요.”태양광 발전 패널 설비 공사 현장은 처음이었다. 공사 현장이 집에서 비교적 먼 곳이라 어쩔까 했지만 일당이 나쁘지 않았고, 현장이 산이라 하니 마음이 갔다. 오후 작업을 시작한 후에도 사내는 계속해서 말을 걸거나 자기 이야기를 했다. 손놀림을 멈추거나 쉬지는 않았다. 입을 통해 노동의 무게를 내뱉고 덜어내는 것 같았다. 사내의 목소리가 조금 컸었는지 공사 감독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잠시 조용하다 싶었는데 감독이 사라지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이거, 이거 이름이 뭔지 압니까?”보랏빛 꽃이었다.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뭉쳐진, 주위를 둘러보니 공사 부지에 지천으로 깔린 풀이었다. 사내가 가리킨 꽃으로부터 눈길이 닿는 곳까지 퍼져나간 보랏빛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아니오, 이름이 뭡니까?”“이게 바로 닭의장풀. 닭장 옆에서 잘 자란다고 해서. 달개비라고 하면 들어 보셨을라나? 예쁘지요? 봄에 나는 것은 먹기도 했는데.”사내는 꽃을 하나 꺾어 머리에 꽂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렸다.“이것들이 예쁘기는 한 데 풀은 풀이거든요. 그래서 웬만하면 보는 족족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주 엉망진창이 됩니다. 생존력이 엄청 나거든요. 여기 뽑아 놓으면 저기서 나고 저기서 뽑아 놓으면 저쪽 어딘가에서 또 나고 있고. 약으로도 쓰인다 듣긴 들었는데, 그렇다고 이걸 약으로 쓰겠다고 캐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은 없으니.”4, 5일정도 평탄 작업이 끝난 후 콘크리트 작업이 시작됐다. 태양광 패널을 올리고 고정할 자리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설명을 듣고 흩어져 막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보랏빛 꽃이 보였다.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꽃이라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쓰였다.“왜요? 무슨 일입니까? 그 잡초 꽃 때문에요? 아이고, 보기보다 마음이 여리시네.”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사내가 삽으로 땅을 내리찍었다.“이 녀석들은 어디서든 잘 살아낸다 했지요. 걱정 마십시오. 죽었나 싶어도 다시 머리를 내밉니다. 자, 하지요. 오늘 좀 많이 파야 하던데.”하지만 한 번 간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작업을 하는 동안 가능한 꽃을 피해 삽질을 했다. 사내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지만 더 이상 입을 대지는 않았다. 땅을 파는 작업은 그전 작업보다 힘이 많이 들었다. 오전 일을 마칠 즈음 우리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땀에 젖은 옷 때문인지 몸이 무겁다 느껴졌다.일주일이 지났다. 전날부터 태양광 전지 패널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넓고 큰, 검은 판들이 땅을 덮었다. 설치는 전문업체의 사람들이 했고 나와 사내는 보조 일을 했다. 주로 장비, 도구를 가져오라는 심부름이거나 패널을 고정하는 동안 흔들리지 않게 잡고 있는 일이었는데 검은 전지판에 반사된 빛에 내내 눈이 부셨다. 그날따라 사내는 말이 없었다. 나는 사내가 입을 여는 것을 기다리다 먼저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싸구려 선글라스라도 하나 가지고 오는 건데. 말이라도 좀 해 주지. 안 그래요?”연철은 부러 툴툴거렸다.“오늘 마치고 한잔 합시다. 술 하지요?”사내가 말했다.일을 마치고 둘은 식당에 남았다. 삼겹살과 소주 몇 병 준비해줘요,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에 식당 주인에게 부탁을 해놓았었다.“이건 내가 낼 게요.”“아이고, 고맙습니다. 잘 마실 게요. 하하. 자, 한 잔 받으십시오.”사내는 내 잔에 술을 따랐다. 둘은 공사가 얼마나 이어질지, 어느 어느 지역에 열린다는 큰 공사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가끔 티브이에 나오는 정치인이나 대통령 얼굴을 보며 욕을 해대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문득 사내가 했던 말이 떠올라 내가 말을 꺼냈다.“그, 닭의장풀인가 하는 것들 말인데, 패널들이 다 올라가고 나면 햇빛을 못 받을 텐데 괜찮을까요? 오늘 보니 패널 밑은 완전히 응달이던데. 햇빛도 못 받고 비가 온다해도 빗물들이 스며들려면 오래 걸릴 텐데. 쟤들도 꽃이 피려면 해도 보고 비도 맞고 해야 할 텐데.”“글치요. 햇빛을 아주 못 받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받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 겁니다. 물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위에서 흘러 내려오거나 땅속으로 흘러든 빗물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전만 못 하겠지요. 뭐,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그래서 잡촌데. 잡초가 제일 강하다 안 합니까.”“그렇겠지요? 하긴, 우리가 잡초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몰랐으면 몰라도 알고 보니. 꽃이 예쁘더군요. 자꾸 보니까.”“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카는 말도 있다 아입니까. 무슨 유명한 시에 나온다 하던데. 하하.”나는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오늘 왜 말이 없었는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었다. 사내는 소주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고는 한숨을 쉬었다. 사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재건축이 된다고 했다.“오늘 회식은 내가 쏠 일이 아니네. 듣고 보니.”“그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입니다.”재건축 이야기는 제법 오래 전부터 나왔다. 하지만 재건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파트 주민들 중 상당수는 전세나 월세로 입주해 있는 사람들이었고 자가로 살고 있던 사람들도 막상 재건축을 위해 집을 비워야 한다는 생각에 들면 막막했다. 재건축을 위한 투표에서 찬성표는 번번이 60%를 넘기지 못했다.“다들 말만 재건축, 재건축 했지 실제로 벌이지는 못했거든요.”이번에는 달랐다. 외지의 한 부동산 업체가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사들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더니 재건축을 위한 투표 공고가 붙었고 투표 결과 찬성률이 60%를 넘었다. 사내도 찬성표를 던졌다. 재건축조합이 결성되었고, 시행사와 건설사 입찰이 시작되었다.“저야 뭘 압니까. 마누라가 이번에는 꼭 재건축을 해야한다 해서. 그런데 어제 웬 서류가 집에.”재개발 후 지어질 아파트의 대략적인 평수, 호수와 조합원이 부담해야 할 자가 분담금에 대한 안내서가 왔다고 했다. ‘평당 건축비는 천만 원 정도 예상하고 있으며 기존 조합원의 경우 크기별로 기존 아파트의 가치를 산정해서 건축비에서 기존 아파트의 가치, 늘어나는 세대의 분양이 다 된다는 가정 하에서의 이익을 조합원 수로 나눈 가치 등등을 뺀 금액이 자가 분담금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경제성을 따져보니 아파트 층수를 기대만큼 높이지는 못한다. 이러저러하니 조합의 이익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 양해 바란다.’ 는 내용이었다.“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이 열다섯 평인데 작은 것을 고른다고 해도 스물여덟 평이니 거의 두 배가 되는 셈입니다. 그것만 해도 건축비가 이억 팔천이라는 말인데 절반만 낸다 해도 일억 사천을 제가 감당해야 한다. 이런 엿같은 계산이 나오더라 이 말입니다. 시발.”그것 때문에 아내와 심하게 싸웠다고 했다.“마누라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돈 못 버는 제 잘못이지요. 헛바람 불어넣으며 돌아다닌 나쁜 놈들 탓이지요.”사내는 물잔의 물을 바닥에 부어 버리고는 소주를 물잔에 따르더니 벌컥거리며 마셨다.“뭐, 어찌 되겠지요. 안 되면 팔고 또 이사 가면 됩니다. 우리가 한두 번 돌아다닌 것도 아니고. 아이들도 외지에 나가있으니 마누라하고 나하고 둘이야 어디든 누울 곳이 있겠지요.”불판의 고기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술병은 쌓여갔다. 나는 이것저것 이야깃거리를 찾아 건넸지만 사내는 취한 탓인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일이 많아졌다. 간혹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알아듣기 힘들었다. 시발시발 욕지거리만이 분명하게 들렸다. 욕설이 사내의 술버릇이었는지 이번만 유독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거슬리지 않아 나는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가끔 욕을 따라 하기도 했다. 사내가 시발하면 내가 따라서 시발, 사내가 지랄하면 또 따라서 지랄. 한동안 식당은 시발 지랄거리는 욕설로 가득했다.사내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려나 싶었다.“혼자 가도 괜찮겠어요? 넘어질 것 같은데.”사내는 손을 들어 안심하라는 듯 휘휘 젓고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 나갔던 사내가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서 잠이 든 것인지, 비탈을 굴러 아래쪽에 처박힌 것은 아닌지, 잠시 고민을 하다 나는 사내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아직은 달빛이 남아 있는 밤이었다. 그 달빛을 배경으로 누군가 연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였다. 사내는 대뜸 들고 있던 검은 비닐봉지를 내게 건넸다.“아무래도 안 되겠더라고. 시발. 쟤들도 살아가는 놈들인데. 햇빛은 볼 수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비도 맞아야 하고. 아이, 시발. 미안합니다. 그라고 이건 선물입니다. 아니다 숙제인가. 볕 잘 들고 물기 많은 곳에 심어 주세요. 거기서 또 어떻게든 살아가게.”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6-04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② 규동의 기도

스토리가 아닌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단편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말한다. “한정된 짤막한 시간 안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선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소설이란 문학 장르 중 가장 짧은 형식인 ‘엽편소설’ 역시 그렇다. 원고지 25매 안팎의 문장으로 세상과 사람,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꿈과 환멸을 드러내기 위해선 본질을 보여주기 위한 ‘긴장’과 ‘에너지’가 필수. 문학을 통한 세계 해석과 심미적 위안이 사라진 21세기. 경북 포항에서 내과의사로 일하며 괜찮은 소설을 쓰기 위해 악전고투 중인 작가 김강(52)이 ‘엽편소설 연재’라는 간단찮은 도전을 본지를 베이스캠프 삼아 진행한다. 격주로 게재될 김강의 엽편소설이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인지 궁금하다. 아직 문학과 소설이 가진 사회적 힘을 신뢰하는 독자들의 관심과 질책을 더불어 기대한다. - 편집자 주 그날 신(神)이 규동의 기도를 들었다.수십 억 명으로부터 올라오는 기도들 중 어느 하나를 콕 집어서 들을 수 없어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공평하다 여겼다. 간혹 제사장들이 골라낸 기도를 듣기도 하고 답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일, 드문 일이었다.아니, 지들이 기도를 하면 내가 들어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지들한테 기도하라 그랬어? 찬양하라 그랬지, 숭배하라 그랬지. 내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것도 의미 없지. 내 뜻을 이해하든 말든,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니지. 내가 행하는 모든 것 그 중 어느 하나 지들의 생각에, 지들의 기준에 부합하는가 안 하는가에 나는 관심이 없단 말이지. 나는 행하고 지들은 받아들이고 그런 거잖아. 그런데 쟤들은 왜 그러는 걸까?평소 주위 몇몇이 인간들의 기도에, 인간들의 세상에 관심을 가져주십사 청하면 신은 이렇게 답했었다. 예전에는 그들의 기도를 즐기지 않으셨습니까? 누군가 물었다.그때야 인간들이 몇 명 되지 않았잖아. 그러니 들을만 했지. 한꺼번에 다 들을 수는 없어도 찬찬히 살펴보고 듣고 또 답을 주고 하는 것이 나름 재미있기도 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재미가 없어졌어. 일단 시끄러워. 인간들이 많아지니까 그렇겠지. 그렇다고 예전처럼 엎을 수도 없고. 지금 하는 꼴을 봐서는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지들끼리 숫자를 조절할 것 같기도 하니 말이야. 게다가 누구한테 하는 기도인지 알 수가 없어. 나는 하나고 주소도 하나인데 수신자명이 다 달라. 그리고 기도가 너무 길어. 이건 뭘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데,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뭐,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 안 들으면 되니까. 그런데 답을 안 준다고 욕하는 놈들도 있단 말이지. 아니, 내가 답을 주겠다 약속한 적 있나? 아아, 자꾸 묻지마. 짜증나니까.이랬던 신이 그날 규동의 기도를 들었다.기도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다. 계절의 변화, 낮과 밤, 인구 연령의 변화, 인구의 이동, 남반구와 북반구, 기술의 변화 등의 여러 요인이 기도의 양과 흐름에 영향을 준다. 이런 요인들이 얽혀 최고 지점과 최저 지점을 반복하는 유형의 파동을 만든다. 인류의 수가 어느 정도에 이른 후부터는 기도의 파동은 일정한 유형을 유지해 왔다.그런데 그날은 모든 인자들이 파동의 아래쪽으로 향했다. 지구를 뒤덮은 전염성 질환에다 북반구는 최악의 한파로, 남반구는 겪어보지 못한 고온으로 제법 많은 인간들이 생명을 잃었고, 그들 대부분이 기도에 익숙한 연령이었고, 가장 규칙적이고 열렬한 기도를 하던 두 그룹은 서로 싸우느라 신을 잊어버렸고, 가상공간의 기도들은 SNS 계정이 없는 신에게 닿지 못했다. 기도의 파동은 아래로 향해갔다.그날은 북반구 인구가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지역의 깊은 밤이 일 년 중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는 날이었다. 그 중 가장 깊은 시각 새벽 세 시 반에 규동이 소리 내어 기도를 했다. 신의 유일한 이름으로, 네 개의 음절만으로. 3차까지 이어진 회식 후 돌아오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며.“신이시여, 행복하게 해 주소서.”신은 그날 규동의 기도를 들었다.다음날 신의 사자 A가 규동의 직장으로 규동을 찾아왔다. 유리 칸막이 넘어 면역화학검사기에 혈액 샘플을 넣고 있는 규동을 발견하고는 곧장 규동에게로 향했다. 칸막이를 돌아 규동의 앞에 서려던 순간 사자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에게 제지를 당했고 그는 사자를 데리고 데스크 앞으로 갔다. 사자는 엉겁결에 누군가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대야만했다.“대기실에 앉아 기다리시면 이름을 부를 겁니다.”사자는 한동안 대기실에 앉아있었어야 했고 유니폼을 입은 이가 이끄는 대로 진료실에 들어갔고 우물쭈물 앉아 있는 사자의 얼굴을 보던 의사가 사자의 결막을 확인했다.“빈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검사하고 결과 나오면 다시 뵐게요.”의사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사자는 규동과 대면할 수 있었다.“음, 오른쪽 팔을 이리 내밀어 이 쿠션 위에 편하게 놓으십시오.”“어떻게 하면 행복해 지겠느냐?”규동은 사자의 말에 사자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사자의 윗팔에 고무줄을 감았다.“자, 주먹을 쥐시구요.”사자는 규동의 말에 따라 주먹을 쥐었다. 소독솜으로 사자의 팔을 몇 번 문지른 규동이 채혈바늘로 사자의 팔을 찌르려던 순간이었다. 사자는 팔을 빼며 일어섰다.“뭐하는 것이냐?”“검사를 하려면 피를 뽑아야지요, 어르신.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시 앉으세요. 최대한 안 아프게 해드릴게요.”“어젯밤 행복을 빌지 않았더냐? 나는 신이 보낸 사자다. 네게 행복을 물으러 왔다. 누구의 행복이냐? 너의 행복은 무엇이냐?”규동의 기도를 들은 그날 신은 급하게 사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규동의 기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인간의 기도를 들었고 웬만하면 들어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규동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사자들에게 물었다. 신의 무관심을 충실히 따르던 사자들이었다. 최근의 인간들에 대해 알지 못했던 그들은, 그러나 최근이나 옛날이나 혹은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시절이나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항상 그래왔으니까.부를 가져다주면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황금을 쏟아주면 되는 것이냐? 안 됩니다. 황금은 바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횡재는 시기와 다툼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세금도 많이 내야 할 겁니다. 그러면 행복이 사라질 것입니다. 차라리 그에게 신선한 생각과 가능한 상상력을 주십시오. 요즘 인간 세계에서는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물건이 곧 부를 뜻합니다. 안 됩니다. 어느 세월에 상상하고 생각하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낸단 말입니까? 차라리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를 수 있는 권력을 주시지요. 권력이라,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이냐? 저 헤라클래스처럼. 아닙니다. 지금 세상은 헤라클래스의 힘을 가진 자가 힘을 쓸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 자는 권력을 가진 자의 종이 될 뿐입니다. 요즘 세상은 부가 곧 권력이고 기술이 곤 권력입니다. 부와 기술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이 녀석들이!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그때 사자 A가 앞으로 나섰다.먼저 다시 인간에게 관심을 가져 주신 신께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그나마 가끔씩 인간 세상을 둘러보던 사자 A였다.신께 한 말씀 올리려합니다. 살펴보건데 이 기도의 해법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첫째, 행복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저희는 명확한 기준 혹은 예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준 혹은 예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도를 올린 그자의 행복과 같은 것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어찌어찌 신께서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더라도 그 행복의 유지 보수까지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신께서 넓고 깊은 사랑으로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으나 그가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찌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그의 행복이 다른 인간의 불행을 전제로 한다면 그 또한 안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그 인간의 기도가 구체적이지 못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심지어 목적어도 없습니다. 누구를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는 건지.말을 마친 사자 A는 약간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오오, 다른 사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긴 소매 끝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동안 물끄러미 사자 A를 바라보던 신이 입을 열었다.그래서? 그래서 어쩌자고? 가만 보면 넌 말은 많은데 답이 없더라. 어쩌란 말이냐. 하지 말자는 말이야?사자들은 치켜세운 엄지손가락을 소매 안으로 숨기고 고개를 숙였다. 약간의 미소와 함께.제 말씀은….아, 필요 없고, 너, 내려가 봐. 내려가서 물어. 뭘 바라는지, 뭘 해주면 행복할 건지. 그 인간에게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지.규동은 채혈 주사기를 들고 사자 A를 쳐다보았다.“어허, 이놈이 빨리 말하지 못하느냐? 너, 이 녀석, 행복이 뭔지는 아는 것이냐?”“잠시만요.”규동은 한참 동안 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전자 의무 기록지를 살폈다.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보드에 손을 얹었고 자판을 두드려 진료실로 메모를 보냈다.‘아무개 환자, 채혈 거부, 횡설수설. 7층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요망.’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5-21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① 영양제와 매미 애벌레

◆연재를 시작하며=스토리가 아닌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단편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말한다. “한정된 짤막한 시간 안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선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소설이란 문학 장르 중 가장 짧은 형식인 ‘엽편소설’ 역시 그렇다. 원고지 25매 안팎의 문장으로 세상과 사람,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꿈과 환멸을 드러내기 위해선 본질을 보여주기 위한 ‘긴장’과 ‘에너지’가 필수. 문학을 통한 세계 해석과 심미적 위안이 사라진 21세기. 경북 포항에서 내과의사로 일하며 괜찮은 소설을 쓰기 위해 악전고투 중인 작가 김강(52)이 ‘엽편소설 연재’라는 간단찮은 도전을 본지를 베이스캠프 삼아 진행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향후 격주로 게재될 김강의 엽편소설이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인지 궁금하다. 아직 문학과 소설이 가진 사회적 힘을 신뢰하는 독자들의 관심과 질책을 더불어 기대한다. - 편집자 주 맥주캔 꺼내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이번에는 찻장을 열었다.“자. 이거.”영양제다. 25가지 비타민과 미네랄의 과학적 처방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어드밴스’라는 단어가 덧붙여진 영양제. 살색 영양제 한 알은 25가지의 비타민과 미네랄의 단순한 복합체가 아니다. 이것은 격려와 칭찬이다. 그녀가 순신에게 영양제를 챙겨주는 날은 순신이 하는 짓이 그녀의 마음에 든 날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양제는 없다. 처음에는 그녀가 영양제를 주지 않으면 오늘은 왜 안 주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에게서 영양제를 받지 못한 날이면 순신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해야 할 일을 안 한 것이 있는지 먼저 생각하고 반성하기 시작했다. 영양제는 순신에게 평화와 안도의 상징이다. 긍정과 부정의 되먹임 기전의 매개다. 예외적으로 영양제를 주는 경우가 있다. 그녀가 순신에게 최후의 부탁을 하는 경우다. 이번에도 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없다.순신의 손바닥에 영양제를 올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내일 별일 없으면 아이들 데리고 가서 매미를 잡아줘. 아니면 잡는 시늉이라도 해. 애들이 매미 잡고 싶다고 말한 게 언제야? 저번 주부터 매미, 매미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데 어째 그렇게 꼼짝을 안 해? 부탁이야.”그를 처음 만났을 때, 미경은 이미 몇 번의 선과 연애를 해 본 뒤였다. 학창 시절 몇몇의 연애를 제외한다면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은 제법 그럴싸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번듯한 직장이 있거나, 집안의 재산이 대단하거나, 둘 다였다. 그럼에도 미경이 그들 중 하나와 결혼 하지 않은 것은 굳이 그들에게 기댈 이유가 없어서였다. 이미 많은 것을 갖춘 그들에게 미경은 갖추어야 할 또 하나의 무언가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했다. ‘부인은?’ 이라는 질문에 ‘네, 약사인데, 집에서 쉬고 있어요. 굳이 와이프까지 밖에서 일하는 것 원치 않거든요.’라고 대답하며, ‘멋져요.’라는 반응을 기다리는 그들의 허영에 보탬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는 달랐다. 어렴풋이 속이 비치는 번데기 같았다. 껍데기 속에서는 뭔가 계속해서 움직였다. 미경은 그를 만날 때마다 껍데기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어떤 때는 찰랑거리는 동전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날은 호령하듯, 가다듬듯 ‘아, 아’하고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와 일곱 번째 만나던 날 미경은 카페의 조명에 비친 껍데기 속에서 날개 같은 것을 보았다. 형광의 푸른색, 곧 껍질을 찢고 튀어나와 하늘로 날아 오늘 것 같은. 어릴 적 보았던 청띠제비나비의 날개.“미경 씨, 나는 말이지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글도 쓰고 싶고요, 기회가 된다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좋을 것 같아요. 나무와 꽃을 기르는 일도 해야겠어요. 물론 돈도 많이 벌어야겠지요.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다 보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겠어요? 인생이 길지 않으니 그 중 어느 하나만 정해서 깊이 파고 들어가라고 다들 이야기하는데, 내 생각은 달라요. 길지 않은 인생에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능력만 된다면. 함께.”‘능력만 된다면’ 이라는 전제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미경 씨랑 함께.’라는 말에 가슴이 흔들렸다. 청띠제비나비의 날개를 붙잡아 곁에 두고 싶었다.번데기에서 나오면 나비가 될 줄 알았는데, 매미였던 건가. 아니면 아직 번데기 속에 있는 걸까. 영양제를 받아먹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식기를 정리하는 그를 보며 미경은 생각했다.영양제는 정확히 오 년 전 등장했다. 그 해 순신은 회사를 그만뒀다. 순신은 작은 책방을 열고 싶었다.“정치와 철학, 예술에 관한 책들만 취급하는 책방. 아이들 문제집이나 입시 혹은 수험서들, 처세에 관한 책, 사전 등은 취급하지 않는 ‘말 그대로’ 책방을 가지고 싶어. 한편에는 작은 강의실을 두고 매주 작은 강의를 열거야. 벽에는 스크린을 달아놓고 매일 저녁 혹은 정해진 시간마다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거야.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찰리 채플린 주간입니다. 이렇게 미리 공지하는 거지. EBS 다큐 프라임 중에서 좋은 것들을 다시 틀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사람들이 그 시간에 맞춰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드는 거지.”순신이 미경에게 말했을 때, 사업자금은 충분한지, 퇴직금으로 가능한 것인지, 운영비는 어떻게 할 것인지 미경이 물었고 순신은 대답하지 못했다.“자기 보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을게. 이유가 있겠지. 이미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돈 벌어오라고 말하지도 않을게. 내가 벌고 있으니 그 정도면 우리 가족이 사는데, 풍족하지는 않아도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대신 앞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획을 세웠으면 좋겠어. 빠른 시간 내에 말해줘. 가능하면 문서로.”다음 날 저녁, 자기 전 미경은 순신에게 영양제 한 알을 건넸다.“뭐야?”“영양제.”“무슨 뜻이냐고?”“뜻은 무슨 뜻. 이제 우리도 몸을 챙기면서 살아야 할 것 같아서 퇴근할 때 하나 가지고 나왔어. 사람들은 열심히 사 먹는데, 정작 약사인 나는 영양제 한 알도 못 먹고 있네 싶어서 들고 나왔지. 하루 한 알씩 챙겨 먹자.”이후로 오 년이 지났고, 순신은 아직 계획서를 제출하지 못했다. 미경은 재촉하지 않았고, 순신은 전업주부 역할을 맡았다. 순신은 어쩌면 가사노동이 자신의 찾던 직업일 수 있다 여기기 시작했고 미경 또한 순신이 많지 않은 월급을 벌기 위해 직장에 다니는 것 대신 집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며 집안일을 해주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을 쓰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다.오전 10시 아이 둘을 데리고 순신은 아파트 뒤 소운동장으로 향했다. 더 더워지기 전에 빨리 잡고 돌아와야 했다. 느티나무, 감나무, 벚나무들에 둘러싸인 소운동장 사방에서 ‘메엠맴’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과 실눈을 하고 소리가 나는 곳을 올려보며 매미를 찾았다.“저기요, 저쪽 매미 소리가 제일 커요.”제법 밑동이 굵은 감나무를 가리키며 아이들이 달려갔다. 순신은 느린 걸음으로 따라가 나무 아래에 섰다. 아이들은 감나무 잎 사이로 내리는 햇빛에 눈부셔하면서도 매미를 찾아 감나무를 빙빙 돌았다. 순신은 아이들을 따라 나무를 올려보다 눈이 부셔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땅이다. 저 흙 아래에서 매미 애벌레는 7년을 기다렸을 것이다. 긴 세월을 기다리다 땅속에서 나왔겠지. 망설임 없이 나무를 타고 올라갔겠지. 드디어 짝을 만나고, 길어야 2주 남짓한 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을 텐데.“아빠. 찾았어요. 저기. 저기 있어요.”잠시 아래를 보고 있는 사이에 큰 아이가 매미를 찾아냈다. 아래에서 2.5m정도 높이에 감나무에 바짝 붙어있었다.“빨리요. 아빠. 날아가기 전에 빨리 잡아요.”그러고 보니 매미가 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저 녀석들은 날 수 있기는 하는 걸까. 날개는 멋으로 혹은 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해놓고, 사실은 나무에 기어올라 바짝 붙은 채 그저 소리만, 소리만 우렁차게 울어대는 것은 아닐까.감나무는 두 팔로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두 팔과 두 다리로 나무를 감싸 안았다. 아기가 배밀이를 하듯 팔로 한 번 당겨 오르고 다리로 한 번 밀어서 오르고, 반복하면서 나무를 올랐다. 쉽지 않았다. 해 본 적 없었으니. 아이들은 ‘아빠, 빨리요.’를 재촉했지만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많이 올라가지도 못했다. 내가 무슨 매미도 아니고 이게 뭐람. 이럴 줄 알았으면 긴소매 옷을 입고 오는 건데, 바지마저 반바지에 이게, 이게 뭐야. 팔과 다리에 묻은 땀이 더 힘들게 만들었고 아팠다. 지면에서 2m 정도 올라갔을까. 나무 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뭐하는 겁니까?”경비 아저씨였다.“매미 잡으려고요.”작은 아이가 대답했다.“매미를 잡는다고?”“네.”“그 불쌍한 것을 잡아서 뭐하려고. 이 동네 매미는 다 똑같아. 참매미야. 참매미. 잘 들어봐. ‘매엠 매엠 매엠 매에에에에’ 이렇게 울잖아. 이렇게 우는 것은 백 프로 참매미야. 확인할 것도 없어,”순신은 난감했다.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더 오르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쳐다보고 있다. 이대로 내려간다면 실망할 텐데. 오늘 저녁, 아니 내일까지 영양제를 못 얻어먹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올라가는 거다. 순신은 경비 아저씨의 말을 못들은 채 하며 두 다리로 몸을 밀어 올렸다. 눈앞에 매미가 있다. 이제 손만. 손만 뻗으면 된다. 그때 경비 아저씨가 소리를 쳤다.“거기 아저씨 내려오소. 불쌍한 아이들 괴롭히지 말고 내려오소. 빨리.” 매미가 울음을 멈췄다. 왼손의 힘이 빠졌고, 하필이면 불어온 바람에 잎이 흔들려 햇살이 눈으로 들어왔다.이 모든 것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매미의 울음이 멈춘 것과 바람이 불어온 것과 눈부신 햇살과 이리 내려오라는 주문 같은 경비 아저씨의 말이. 본지에 엽편소설을 격주 연재할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끝

202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