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 꽃대가 잘렸다. 하루에 한 뼘 이상 솟아오르던 꽃대의 허리가 두 동강이 났다. 자줏빛 꽃을 기대하던 K는 아연실색.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오늘 아침에 동네 전체에 약을 쳤거든. 약 치시던 분이 가지치기를 해 주겠다 하더라고. 고맙다 했지. 그런데 저렇게 해뒀더라고. 뭐라고 말도 못하겠고.”
작년에는 황칠나무의 몸통을 자른 분이다. 다행히 옆으로 새 가지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 땡볕에 약 친다고 고생했을 텐데 뭐라 할 수도 없고.”
K는 바닥에 널브러진 꽃대를 들고 서서 또 다른 이상은 없는지 주위를 살펴보았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 해서 상사화라 부른다지. 꽃과 K가 만나지 못하는 여름이 되어 버렸다.
“이리 줘.”
S는 내 손에서 꽃대를 빼내 집으로 들어갔다. 긴 유리잔에 물을 받고 꽃대를 담았다.
다행히 꽃이 피었다. 하루 이틀의 간격으로 봉오리들이 자줏빛 꽃잎을 펼쳤다.
“고마운 일이네.”
“얘가 조금 빨리 나왔어. 조금 있으면 옆에서 다른 애들이 올라 올 거야. 너무 마음아파 하지마.”
S가 위로를 했고 K는 가만히 상사화를 들여다보았다.
며칠 뒤부터 한동안 비가 왔다. 이 비는 언제 그칠까? 이 정도 비면 땅 속 깊이까지 충분히 젖겠지.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해 서 있던 K는 이제 막 영글기 시작한 단감의 개수를 헤아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땡볕 더위가 이어졌다. 2주? 3주? 내일이면 조금 시원해질까 싶었지만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살은 이른 아침부터 초저녁까지 이어졌다. 축 늘어지고 말라가는 잎을 보며 물을 줘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너무 더운 탓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가 있을 때 물을 주면 잎이 다 타버린다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핑계 삼아 저녁에 물을 주겠다 다짐했지만 그저 변명일 뿐이었다. K는 약속이 많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물을 주는 것은 S였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밤새 더위로 뒤척였지만 K는 평소처럼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묵직한 두통과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 앉았다. 멍하니 있다가 지난 밤 남겨놓은 수박을 찾아내 몇 조각 먹고는 믹스 커피를 탔다. 커피 잔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잔디는 아직 견디고 있는 듯 보였고 국화와 나팔꽃 잎은 바싹 쥐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될 것 같았다. 늘어지고 말라비틀어진 고추 줄기와 잎 사이로 천천히 오가는 벌레들이 보였다. 약을 줘도 소용이 없네. 하지만 K는 호스를 끌어와 물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일쯤 비가 오면 좋겠는데. 비가 온다 하지 않았나? 생각만 하고는 돌아서는데, 상사화 꽃대 두 개가 보였다. 저건 언제 올라왔지? 그런데 힘이 없어 보였다. 꽃봉오리도 마찬가지 끝부분이 말려들어가고 생기가 없었다. 물을 없나? 올해는 제대로 된 상사화를 보기 힘들겠네. K는 남아있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처마 아래 그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바람은 조금 시원해진 듯 했다. 이제 곧 가을인가? 그런데 왜 이리 더운 거야. K가 혼잣말을 하는 사이 S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침 일찍 운동을 나갔던 S였다.
“상사화 꽃대가 올라왔어. 두 개나”
K는 일어나 S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런데 말라가네. 힘도 없어 보이고.”
“물을 주지 그랬어.”
S는 상사화를 살피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친 꽃들, 풀들은 이제야 제 주인을 만났다는 듯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
“지금 물 줘.”
“해가 있을 때는 물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다 죽을 판인데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도 주고 저기도 주고. 돌단풍도. 봐봐. 여기 정상인 게 있어.”
K는 감나무와 소나무, 단풍나무를 가리키며 재들은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 것 아니냐고 대꾸했고 S는 나무들은 뿌리가 깊으니까 아래에 있는 흙에서 물을 당겨올 수 있지만 꽃이나 풀들은 뿌리가 얕아서 조금만 비가 안 와도 힘들다며,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물었다. K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다 물 호스를 쥐었다.
“돌단풍, 상사화, 나팔꽃, 고추, 국화만 주면 되는 거지?”
“이왕 주려고 마음먹었으면 다 줘. 근근이 버티고 있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잖아. 알면서 왜 이래?”
K는 괜한 고집을 부렸다. 나무 밑 그늘에 있는 애들은 괜찮아 보이지 않냐고, 잔디는 잘 견디고 있는 것 같고, 돌단풍은 원래 낮이면 저렇게 풀이 죽어 있지 않았냐고.
“물을 너무 많이 줘도 안 되는 거잖아. 필요한 아이들만 주면 안 돼?”
K가 볼멘 목소리로 말을 했다. S는 기가 찬다는 듯 K를 보다 한 마디 내뱉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아, 마음대로 해.”
K는 집으로 들어가는 S의 뒷모습을 보며 잔에 남은 커피를 마신 후 한숨을 잠깐 내쉬고는 따라 들어갔다. S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고 K는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거부권이야? 자기도 누구처럼 거부권이라도 행사하려는 거야?”
주방에 들어갔다 나온 S가 말했다.
“아니야. 하려고 했어.”
K는 현관으로가 긴 팔 작업복을 꺼내 입었다. 모자까지 찾아 썼다.
“다 주란 말이지?”
“그래,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야? 정이 많은 사람이 왜 그래? 다 쓰러지고 말라비틀어진 뒤에 물을 주면 뭣해. 거름 만들 거야? 큰 나무들은 괜찮다 쳐. 우리 정원에 큰 나무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럴 거면 전부 벽돌이나 시멘트로 발라버리면 되지.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한 게 자기잖아. 정원이란 것이 나무도 꽃도 풀고 돌도, 심지어 벌레도 있어야 한다고 한 게 자기 아니야? 그런데 왜 그래? 한 두 시간 물주고 와서 샤워 한 번 하면 될 것을.”
“알겠어. 알겠다고.”
K는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수도꼭지를 열고 호스에 있던 더운 물을 모두 빼낸 후 물을 주기 시작했다. 반쯤 주었을 때 S가 물이 담긴 유리컵을 들고 왔다. 시원한 물이었다. K는 땀을 훔친 후 컵을 받아들었다.
“물주니까 좋잖아. 집도 시원해지고.”
“나무도 줘? 그 아래 그늘에 있는 팔팔한 놈들도?”
“뭐라고?”
K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은 S가 컵을 받아들며 말했다.
“자기도 참, 이럴 땐 애 같아. 어휴. 정말 힘들면 나무는 안 줘도 돼. 재들이야말로 잘 견딜 수 있을 테니까. 지난번에 내린 비로 아직까지는 아래 흙은 촉촉할 테고, 또 다른 것들에게 물을 충분히 주면 그 물이 아래까지 가겠지. 그늘도 그래. 이 땡볕에 나무들이 만들어주는 그늘은 소중하기는 하지. 하지만 그게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더운 날씨를 모두 감당하지는 못해. 잘 알면서. 오늘 자기 좀 이상하다.”
물을 다 주고 들어온 K는 샤워를 했다. S와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었고 담배 한 개비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뜨거운 햇살에 금방 땀이 배어나오기는 했지만 바람은 조금 더 시원해진 듯 했다. 늘어져있던 나팔꽃 잎이 조금은 펴졌고, 색을 되찾은 고춧잎 사이 매달린 초록 고추가 반짝였다. 상사화 꽃대는 힘을 찾았는지 내일은 십 센티미터는 더 올라올 듯 보였다. 덩달아 감나무 잎도, 소나무 잎도 더욱 푸르렀다.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