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

등록일 2024-10-22 18:15 게재일 2024-10-23 17면
스크랩버튼
DVD방 주인이 음료수와 재떨이를 가져다주고 나가자 명주는 I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대고 좌우로 돌리며 비볐다. I는 모든 상황이 낯설고 당황스러웠으며... /언스플래쉬
DVD방 주인이 음료수와 재떨이를 가져다주고 나가자 명주는 I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대고 좌우로 돌리며 비볐다. I는 모든 상황이 낯설고 당황스러웠으며... /언스플래쉬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I가 명주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지만 명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주는 소파 반대편 벽면을 차지한 스크린을 쳐다보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I도 명주를 따라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고 황량한 땅과 그 땅을 가로지르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내가 스크린 속에 있었다. 사내는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길 위에 돌아서 서 있었다. I는 사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것인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명주에게 묻지 않았다.

명주가 DVD방 주인에게 말했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를 틀어주세요. 명주는 앞장서 방으로 들어갔고 I는 그런 명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방에서 나온 명주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DVD방 주인이 음료수와 재떨이를 가져다주고 나가자 명주는 I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대고 좌우로 돌리며 비볐다. I는 모든 상황이 낯설고 당황스러웠으며 명주가 왜 이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명주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서로의 숨결을 잡아당겼다 불어 넣었다. 숨결은 체온 그대로를 서로에게 전했고 전해진 체온은 몸과 마음을 덥혔다.

I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이 빨아 당겨 담배 끝이 빨갛게, 회색으로 타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명주의 입에 담배를 물리고 새 담배를 꺼내어 다시 불을 붙였다. 영사기에서 나오는 불빛이 연기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사내의 모자와 얼굴만이 흔들리는 연기 사이로 나왔다 들어갔다 반복했다. 사내는 아직 길 위에 서 있었다.

명주는 A 그리고 B와 함께 술을 마시고 오는 길이라 했다. 이것저것 말을 하다 보니 I이야기가 나왔다고. 명주, 네가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해야 해. B가 말했고 A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야. A가 다시 한 번 강조했고 A와 B는 I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 모두를 위해 명주가 마음을 정해야 한다고 명주를 몰아붙였다고 했다. 아니 니들이 왜 그래? 명주가 다시 물었고 A와 B가 우리는 동기니까, 명주 너를 아니까, 하고 대답했다. 지들이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좀 웃기지 않아? 넌 어떻게 생각해? DVD방에 가기 전 I와 만났던 찻집에서 명주는 A와 B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하며 I에게 물었다. I는 명주가 동의를 구하는 것인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A와 B가 했던 충고를 받아들여 마음을 정했고 그 마음을 지금 말하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너와 나는 아닌 것 같아. 이미 2주 전, I가 명주에게 고백을 한 그날 명주는 I에게 답을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인 건지,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I는 글쎄, 하고 대답을 했고, 명주는 I의 컵에 담긴 물을 자신의 컵에 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내 말만으론 네가 그 상황을 다 알 수 없겠지. 어두운 찻집 안이었지만 명주는 얼굴이 붉었다. 그런데 나 왜 불렀어? I는 애써 차분한 척 명주에게 물었다. 아니 걔들이 그러니까 살짝 화가 나는 거야. 이상하게. 그런데 걔들한테 화를 내지는 못하겠고. 그냥 니 생각이 나더라고. 우리는 뭘까 싶기도 하고. 명주는 I의 얼굴을 지나쳐 I 뒤로 보이는 창밖을 살피며 대답을 했다. 명주는 자기 입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두 번째 나왔다는 사실을 알까? I는 자신의 얼굴 옆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두고 있는 명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I는 들뜬 마음으로 나왔다. 명주가 먼저 연락을 해왔고, 찻집에서 만나자 했으니까.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너랑 나는 아닌 것 같다, 말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학생 회관 옆 벤치에서 나누었던 입맞춤이, 딱딱거리며 부딪혔던 앞니와 달고 따듯했던 명주의 타액이, 너 처음이구나 하고 웃으며 I의 뺨을 꼬집던 명주의 손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던 그날 밤이 I의 구애에 대한 명주의 성의 표시와 I의 객기가 만들어낸 한 차례 우연한 밤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영화보고 싶어.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놓으며 명주가 말했다. 영화? 지금 시내로 나가자고? I가 물었고 아니 그냥 DVD방에나 가자, 하고 명주가 대답을 했다. 좀 전에 마신 술이 깨버렸어. I, 네가 한 잔하고 싶다면 옆에 앉아 있어주기는 할게. 내가 나오라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겠지. 그런데 술이 깨고 나니 머리가 아프네. 어디든 들어가서 쉬고 싶어서 그래. I와 명주는 찻집을 나와 DVD방으로 올라갔다. 카운터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DVD와 영화 포스터를 번갈아 살피고, 인기 대여순위 1위부터 30위까지 제목을 읽어 내려가던 I 뒤에 서 있던 명주가 주인에게 말했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를 틀어주세요”

시작은 I가 집을 나오면서부터였다. 축제가 한창인 봄이었다. 학교 후문 가까이 방을 구했다. 시장에 가서 싸구려 레이온 이불을 샀다. 가스버너와 양은 냄비, 수저를 구했고, 라면 박스에 포장지를 입혀 책상과 밥상을 대신했다. 축제는 끝났지만 축제와 같은 밤은 계속되었다. I는 낮에는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학회실에서 시간을 보냈고, 저녁에는 기웃거리며 사람들을 만났고 술을 마셨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들, 새벽까지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끼어들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러다 흩어지는 모든 자리에 I가 있었다. 미처 하지 못한 말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말들이 남아 있는 밤이면 자취방을 지나쳐 후문으로 들어갔다. 학회실로 들어가 책상위에 놓인 모둠일기에 그 말들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괜한 짓을 했어, 다음 날이면 후회를 하곤 했지만 써놓았던 글을 지우거나 일기장을 찢지는 않았다. 뭐, 어쩌라고.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모둠일기가 네 일기장이냐? 선배들이 가끔 I에게 던지듯 말을 했다. 그렇게 많은 답 글이 달리는 일기장 보셨습니까? I는 선배들이 던지는 말을 그렇게 받아쳤다. I가 써놓은 글 아래로 여러 말들이 달렸다. 밤새 써놓고 방으로 내려간 뒤 아침에 등교를 하면 답 글이 쓰여 있었고, 거기에 답 글을 쓰고 수업을 듣고 오면 다시 답이 달려 있었다. 몇 번을 그렇게 주고받다 보면 격한 단어가 오고 가기도 했고, 때로는 동지를 만난 듯 서로를 향한 밝은 마음이 전해지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마무리는 술자리였다. I는 하루하루가 좋았다.

그 하루들 중 하루였다. 학생회관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I 앞에 명주가 와 섰다. 앉아도 돼? 명주가 물었고 I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와 크림빵 하나를 들고 앉은 명주가 무국에 말은 밥을 떠먹는 I를 바라보다 말했다.

“참 단아해.”

하마터면 I의 입안에 있던 밥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네 글들 말이야. 글들이 단아하다고. 우연히 들른 학회실에서 책상에 놓인 I의 글들을 읽었다고 했다. 지난 1년간의 모둠일기를 모두 꺼내어 I 글만 찾아 읽었다고 명주가 말했다. I는 무어라 대답을 할지 고민했고 그러다 시간이 지났고 결국은 답을 하지 못했다. 크림빵을 다 먹은 명주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갔다.

명주는 약간은 허술해 보이는 듯한 행동들-이를 테면 강의실에 들어오다 강의실 문턱에 걸려 넘어지거나, 시험시간을 잘못 알고 들어와 앉아 있다든지, 종종 백팩의 지퍼를 열고 돌아다녀 동기들이 장난삼아 휴지나 빈 종이컵을 넣어도 모른 채 깡총거리며 달린다든지·로 인해 간혹 화젯거리가 되는 동기였다. 나사가 하나 정도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명주는 비웃음이나 비아냥보다는 재밌다는 이야기, 유쾌하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아이였다. 그녀의 호탕한 웃음과 무슨 일이든 개의치 않는 시원한 대답들이 어우러진 탓이었다. 모두들 명주와 함께 있는 시간들을 즐거워했다. I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학생 회관에서 만난 이후로 I는 명주와 이전보다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복도를 지나치다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하거나, 강의실에서 마주쳐 간단한 안부를 묻는 것은 이전과 같았지만 어감도 표정도 달랐다. 학회실 모둠일기에 글을 쓸 때에도 최대한 단아하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 잘 읽었어, 역시, 하고 명주가 답 글이라도 달아 놓는 날이면 I는 자신이 쓴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해 초여름, 햇볕 쨍쨍 내리쬐는 안동에 가본 적 있니? 라고 명주가 물었다. I는 대답 없이 명주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명주는 I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우리 내일 안동 가자. 내가 도시락 싸올게. 다음날 둘은 기차를 타고 안동에 갔고, 버스를 갈아타고 햇볕 쨍쨍 내리쬐는 하회마을에 들렀다. 조용했다. 낮은 담을 양쪽으로 한 좁은 골목길에서 둘은 어깨를 스치며 걸었다. I는 명주의 손을 잡아볼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명주에게 들키기 싫었다.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의 하얀 모래밭에 ‘명주와 I, 20세기가 끝나가는 더운 여름날 안동에 왔다 가다.’라는 글귀를 남겨둔 채 둘은 돌아왔다. 뒤풀이를 해야 한다고 명주가 고집을 부렸다. 이미 시간이 늦었다 말해야 했지만 I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명주와 I가 들어간 곳은 I가 즐겨 들르던 호프집이었다. 여기 계란말이가 정말 푸짐해. I는 먼저 나온 생맥주잔을 명주의 잔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명주는 그래? 하하핫, 하며 특유의 웃음을 보였다. 학과 이야기, 책 이야기, 안동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동아리 이야기도 했다. 명주의 동아리는 봉사 동아리였다. 봉사라는 것이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아주 세련되거나 아주 지독한 자기애의 산물이 아닌가 하고. 물론 애초에 동기가 무엇이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살기 좋게 만드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지.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야. 그냥 그 근원에는 자기애가 숨겨져 있다는 말이지.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고 숨어서 하는 봉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자기만족, 뭐 그런 것이 근원적인 욕구가 아닐까. I는 뭔가 심오한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했고, 명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I의 이야기를 들었고 I는 명주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이건 서비스. 마른안주를 가지고 나온 호프집 사장이 보기 참 좋다, 라는 말을 테이블위에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I였다.

우리 사귈까?

명주는 생맥주잔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생맥주잔 바깥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다 이내 무거워져 아래로 흘렀다. 달싹거리는 명주의 입술을 쳐다보던 I의 이마에서도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명주가 입을 열었다. 하하핫, 너 긴장하는 구나. 땀 좀 봐. 명주는 냅킨으로 I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생맥주잔을 들어 I의 잔에 부딪히고는 맥주를 마셨다. 너와 나는 아닌 것 같아. 친구지. 좋은 친구.

“웃기네.”

그날, 명주는 수박씨를 뱉어 내듯 말을 뱉었다. 그때 I는 고개를 숙여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는 명주의 얼굴을 내려 보았다. I는 무엇이라 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했고, 고민을 하는 동안 시간이 제법 지나가버렸고 어떤 답을 하든지 우습게 되어버렸다. 결국 I는 답을 하지 못했다. 한동안 둘은 그렇게 있었다. 지하철 끊긴다며 명주가 일어났고 둘은 영화가 계속 비춰지는 스크린을 둔 채 그냥 나왔다. 둘이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었다.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 소설가·내과의

그해 가을 I는 휴학을 했다. 겨울에 입대를 했고, 제대를 하고 학교에 돌아왔을 때 명주는 학교에 없었다. I는 명주와 함께 갔던 DVD방을 찾아가 그해 가장 길었던 영화를 찾아 달라 말했다. 주인은 알 수 없다는 말과 거기에 딱 맞는 표정을 지었다. I가 영화 속 한 장면을 주인에게 설명했다. 넓고 황량한 땅과 그 땅을 가로지르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내가 한 명 있어요. 그 사내는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길 위에 돌아서 서 있는데, 사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것인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어요. 아니에요. 지금 생각하니 그 사내가 서 있는 곳은 길의 끝이었던 것 같아요. 지나간 길을 뒤돌아보고 있었네요. 맞아요. 그랬어요.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