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희수는 전학을 갔다. 희수는 전학을 간다고 기에게 따로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희수가 결석을 했다고 이야기했고 담임선생님은 희수가 전학을 갔다고 대답했다. 그즈음 희수와 기는 짝이 아니었다. 여름방학 이후 둘은 멀어졌다.
그 해 여름, 비가 자주 그리고 많이 왔다. 여름 방학, 반 별로 야영을 가기로 되어있었다. 기의 반이 야영을 가기로 한 날 전날에 비가 왔다. 계곡마다 물이 많이 불어났다. 결국 기의 반은 학교 운동장에서 야영을 했다. 네 명씩 한 조가 되어 텐트를 쳤다. 기와 희수는 같은 조였다. 희수는 멀뚱히 서 있는 기를 끌고 와 밥 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쌀은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물은 얼마나 부어야 하는지. 몇 개의 조를 합쳐 팀을 만들었고 팀별 대항전으로 게임을 하고, 캠프파이어를 했다. 그리고 취침 시간이 되었다. 그 시간에 자는 아이들은 없었다. 어두운 와중에 축구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몇몇은 학교를 빠져나가 오락실로 향하기도 했다. 기와 희수와 같은 조였던 다른 두 명이 그랬다. 한 명은 축구를 하러 갔고, 한 명은 오락실로 갔다. 기와 희수만이 남았다. 기는 희수에게 우리도 축구하러 가자고 이야기 했지만, 희수는 그냥 텐트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둘은 누웠다. 텐트 천장에 매달아 둔 랜턴이 이리 저리 흔들렸다. 랜턴의 빛은 기를 비추기도 했고 희수를 비추기도 했다. 운동장 바닥이라 그런가? 잠자기에 불편한데 하고 기가 생각할 즈음, 혹시 잠들었어? 하고 희수가 물었다.
-저기 있잖아. 기야.
-왜?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기가 고개를 돌려 희수를 보았다. 흔들리던 랜턴의 불빛이 잠시 멈췄다. 희수의 뺨을 비췄고 하얀 희수의 뺨은 발갛게 물들었다.
-기. 너. 내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어떻게 할 건데?
발갛게 물든 희수를 바라보던 기는 일어나 앉았다. 랜턴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말했다.
-랜턴 건전지를 갈아야 할까봐. 어두워진 것 같아.
희수가 기를 따라 일어나 앉았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봐.
기수는 랜턴을 풀어 내렸다. 가방을 뒤졌다. 건전지를 꺼내 랜턴 옆에 두고는 전구가 있는 부분을 돌려 풀면서 대답했다.
-니 녀석이 날 좋아하는 건 잘 알지. 그러니까 내 옆에 붙어서 따라다니지.
희수는 기의 무릎에 손을 얹었고 기의 무릎을 흔들었다.
-아니. 그런 거 말구. 사랑 같은 것 말이야.
기는 랜턴의 건전지를 꺼냈다. 새로운 건전지를 넣으려는데 건전지가 손에서 자꾸 빠져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건전지를 주우려했지만 어두워서 그런지 잘 잡히지 않았다. 건전지를 찾아서 바닥을 더듬던 손에 희수의 손이 와 닿았다. 희수가 말했다.
-내가 여자라면, 내가 언젠가 여자가 된다면 날 사랑해줄 수 있겠어?
다음날 둘은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영 이후 방학이 끝나는 날까지 기는 희수를 만나지 않았다. 희수가 편지를 보내고 찾아오기도 했지만 기는 희수를 만나지도 답장을 하지도 않았다. 개학을 하는 날 기는 희수 옆에 앉지 않았다. 희수가 가방을 들고 다가와 기의 옆에 앉으려 했다. 기가 희수에게 말했다.
-저리 가. 쳐다보지도 가까이 오지도 말을 걸지도 마
-언제 들어도 멋진 노래이지요. 멋진 날에 멋진 노래입니다. 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디제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사과데이가 사과를 재배하시는 분들의 영농조합이나, 사과가 유명한 지방의 지방자치단체가 처음 제안했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런 곳과는 관계가 없이 시작되었더라고요. 2002년 ‘학교폭력 대책 국민협의회’를 비롯한 시민단체가 학생, 교사, 학부모를 대상으로 화해와 용서의 운동을 벌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월에 둘(2)이 사(4)과 한다는 의미로 날짜를 정했답니다. 학교 폭력이 계기가 되었다지만 어디 학교만의 문제겠습니까? ‘나’로 인해 마음 아팠을 사람들에게 일 년에 한 번 사과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자. 그런 취지의 내용이라면 우리 모두가 동참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사과 농사 하시는 분들께 도움도 되고, 기회를 놓쳐 하지 못했던 사과도 하고, 서로 마음도 풀고. 나쁜 것은 지우고 좋은 것만 남기고. 오늘은 혼자서 좀 길게 떠들었습니다. 쉬었다 가겠습니다. 노래 하나 더 들어야지요. 참. 사과를 받으신 분은 꼭 사과를 하신 분 앞에서 사과를 크게 베어 물어야 한답니다. 그래야 사과를 받아준 것이 된다 하네요. 명심하십시오. 그게 핵심입니다.
한 반에 오십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생활을 하다 보면 비밀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누가 누구와 친한지, 누구와 누구의 사이가 안 좋은지. 그리고 이런 놈도, 저런 놈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놈들, 저런 놈들 중에 나쁜 놈들이 있었다.
-어이. 희순. 희수 말고 희순 이라고 하자. 기랑 헤어졌다며. 이제 나랑 사귀자. 응. 뽀뽀도 좀 해주고. 이리 와봐. 나하고 사귀는 거다.
나쁜 놈들 중 한 녀석이 희수를 건드렸다. 희수를 자기 옆자리로 강제로 데리고 갔다. 희수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온 힘을 다해서 저항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누구도 나쁜 한 녀석과 맞서려 하지 않았다. 기 또한 뒤돌아보지 않았다. 희수를 위해 뭐라도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와 희수는 한데 엮일 것이 분명했다. 둘이 사랑이라도 하는 거냐. 희수가 너의 여자친구인거냐.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까 두려웠다.
기가 희수를 외면하는 동안 희수는 나쁜 녀석의 장난감이 되었다. 그해 가을 희수는 전학을 갔다. 녀석을 피해서였다. 학교를 옮겼다고 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쁜 녀석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법이었고, 옮겨간 학교에도 나쁜 녀석들은 있었다. 희수에 대한 이야기는 금방 퍼졌고 희수는 그곳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다. 기에게는 평온이 찾아왔다. 희수가 사라졌다거나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깊지 않은 계곡위로 놓인 작은 다리를 지났다. 건너편 숲 나무들 사이로 청록의 슬레이트지붕이 보였다. 다리를 지나 제법 경사진 비탈길을 올랐다. 비탈길을 넘어서자 평지가 나왔고 평지의 끝에 청록의 대문과 청록의 슬레이트지붕을 가진 단층집이 있었다. 길 끝에는 청록의 대문이, 대문옆 벽에는 망원사라 적힌 현판이 매달려 있었다. 한자가 아닌 한글 현판이었다. 망자는 무슨 망자며 원자는 무슨 원자인지, 기는 궁금했지만 대문 앞에서 머뭇거리지는 않았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청록 슬레이트지붕 아래의 허름한 법당에서 향내가 흘러나왔다. 마당 한구석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공양주가 일어서서 기 쪽으로 다가왔다. 어찌 오셨냐. 그녀가 물었고 기는 스님을 만나러 왔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먼저 부처님께 인사를 드려야 스님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기는 운세를 보거나 상담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공양주의 안내대로 법당에 들어갔다. 백팔 배 정도는 해야 부처님께 인사를 한 것이고 절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라고 부처님께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며 공양주는 불상 아래에 놓인 불전함을 가리켰다. 기는 백팔 배를 시작했다. 희수라면 어쩌지? 내가 기다. 이렇게 말하고 웃으며 손을 잡아야 하나. 그러면 희수가 그래 맞네. 우리 기네. 이렇게 다시 보게 되었네 하고 말하며 반길까?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모르오. 나는 희수가 누군지도 모르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니 찾지 마시오. 세상과 연을 끊었다며 돌아가라 말할까? 그래. 너 잘 만났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이 다 네 탓이니 책임을 져라.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 하느냐. 탓을 할까? 이런 생각들이 땀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무슨 싸움 하듯 절을 하누. 보고 있는 부처님이 어지러우시겠어. 스님을 보러 왔으면 스님 볼 힘은 남겨둬야지. 부처님께 인사만 하다 갈 건가?
뒤에서 보고 있던 공양주가 기를 멈춰 세웠다.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른 후 기는 불전함에 지폐 몇 장을 넣었다. 불전함에 지폐를 넣는 것을 확인한 공양주가 스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공양주가 기를 불렀다.
기와 스님은 마주서서 합장을 했다.
-서 계시지 말고 앉으시지요.
스님은 ‘ㄱ’자로 손가락을 구부려 오른쪽 귀 뒤 머리를 긁으며 앉았고 기는 소반을 사이에 두고 스님과 마주 앉았다. 스님은 기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텅 빈 소반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염주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천천히 염주 구슬이 엄지손가락을 넘어 갔다. 스님은 염주를 돌렸고 기는 그것은 보았으며, 공양주는 차를 들고 들어오다 멈춰 섰다. 염주가 세 번 돌았다. 정확히 오십 네 개의 염주 구슬이 엄지손가락을 지나갔을 때 스님이 헛기침을 했다.
-아니, 스님을 보러 오셨으면 이야기를 해야지. 뭐하시나. 무슨 이야기든 해보세요. 우리 스님이 다 들어주신다니까.
공양주가 소반에 차를 내려놓으며 기에게 말했다. 기는 네 라고 짧게 대답했지만 말을 잇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멈춰버린 염주를 쳐다보았다. 염주를 쥔 손이 고왔다.
-오늘은 제가 먼저 이야기하지요.
스님이 기의 잔에 차를 따르며 입을 열었다. 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낯이 많이 익습니다. 처사님 얼굴이. 아마도 전생에 처사님과 제가 제법 사연이 있었나 봅니다. 나쁜 인연은 아니겠네요. 이렇게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다시 만났으니까요. 하하.
아이고. 별 일이시네. 우리 스님이 먼저 이야기를 다 하시고, 옆에 있던 공양주가 방석을 가지고 와 자리를 잡았다.
-부처님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도 기억하는 전생이 딱 하나 있습니다. 전생에 저는 버섯이었습니다. 꽃을 피우고 싶어 하는 버섯이었지요. 옆에 핀 예쁜 꽃들을 보며 버섯은 왜 꽃이 피울 수 없는지 억울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 피고 지는 꽃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꽃이 별 건가. 별과 나비가 찾아와 같이 놀아주면 그게 꽃이 아닌가. 그때부터 버섯은 자기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색깔도 빨강으로 바꾸고 향기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나비 한 마리가 찾아왔지요. 버섯은 너무나 기뻐서 가지고 있던 모든 향을 뿜어내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바람이 불어오는 척, 바람에 흔들리는 꽃인 척 몸을 흔들었지요. 하지만 버섯의 빨강 머리에 앉았던 나비는 잠시 후 버섯이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전생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뒤에 버섯이 어찌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뒷이야기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전생인데.
옆에 앉아 있던 공양주가 하이고. 세상 살다 살다 별일이네. 별일이야. 내 앞에서는 전생이야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으시더니. 우리 스님한테 그런 전생이 있었어요? 하이고. 자신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하이고 하이고를 반복했다.
-이제 해결되셨습니까? 꼭 자기 이야기를 해야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술술 일이 풀려나가는 경우도 있지요. 하하. 그런데 처사님. 가지고 오신 종이가방에 든 것은 무엇입니까?
기는 아. 예. 하며 종이가방에 넣어 두었던 사과를 꺼내어 소반위에 올렸다. 공양주가 어. 사과네. 하며 스님을 쳐다보았다. 스님은 물끄러미 사과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의 빛깔이 참 곱네요. 빨강이네요. 처사님. 빨강의 보색이 뭔지 아십니까?
기는 스님의 얼굴을 보며 대답 없이 웃었다. 공양주는 스님과 기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스님은 공양주에게 종이를 가져다 달라 했다.
-사과는 다시 저기 놓아두시고 제 글이나 하나 받아 가십시오. 우리 절에 오시는 분들에게 드리는 저의 답이지요.
스님은 글을 써내려갔다. 청산은 나를 보고…….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