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 오랜만에 복권을 샀다. 복권 명당이라 불리는 판매소 근처 식당이 약속장소였고 약속시간보다 조금 빨리 도착한 덕분이었다. 횡단보도에서 보행신호를 기다리던 김은 문득 맞은편 보도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느긋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곧 두 발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신호기를 쳐다보며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단거리 육상선수들. 뭐지? 뒤로 돌아선 김은 무려 마흔 두 번이나 복권 1등 당첨자가 나왔다는 현수막을 보았다. 복권을 판 수수료만으로 건물을 샀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 그 판매소인가? 보행신호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김은 복권을 살 생각이 없었지만 문득 어떤 의무감, 혹은 조바심 같은 것이 들었다. 자칫하면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 뒤쪽에 서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잖아. 김은 서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지갑에서 오천 원 권 지폐를 꺼내 손에 쥐었다.
“당신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복권 1등 당첨이 됐다고 쳐. 그 돈으로 뭐할 거야?”
“당첨금에 따라 다르겠지. 요즘은 예전처럼 많지는 않더라고. 그래도 적은 돈은 아니지. 토요일 발표니까 아직 삼 일 남았네. 당첨되고 생각해도 되는 것 아닌가?”
“무슨 소리야, 지금 생각해둬야 적어도 삼 일 동안 행복할 거잖아.”
지난 밤 꿈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나? 꿈에 그녀가 나왔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시내 중심가를 걸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뭔가를 먹기도 했는데, 사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그녀가 꿈에 나왔다는 것만이 정확한 기억이다.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어린 여가수의 꿈을 꿨다는 것이 왠지 부끄러워 주위에 말하지도 않았다. 글쎄, 소주 몇 잔이 들어가면 우스갯소리로 꺼낼 만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복권 판매대 앞에 서니 혹시 하는 마음이 일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김은 꿈을 핑계로 가끔 복권을 샀었다. 왕이나 북쪽의 김씨가 꿈에 나오거나 용을 보거나, 팔색조가 노래를 부르거나 똥을 밟는 꿈을 꾸었을 때는 부러 복권판매소를 찾아갔다. 물론 결과는 형편없었다. 왕도 아니고 용도 똥도 아닌데 뭐. 개꿈이네, 개꿈. 그 날 아침, 그녀가 나온 꿈을 되새기던 김이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그랬던 김이 복권을 샀다. 그저 복권 명당이라 불리는 가게 근처 식당이 약속장소였고 약속시간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고 마침 그 날이 그녀가 나온 꿈을 꾼 날이었던 덕분이었다.
술을 마시는 동안 김은 복권을 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사내 셋이 어울려 마시다 보니 거나하게 취했다. 흰소리들,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후회와 이렇고 저렇고 하는 한탄과 이렇다면 저렇다면 하는 헛된 희망들이 술잔 사이를 오갔다. 그러다 박이 대뜸 요즘 아내와 각 방을 쓴다며 한 숨을 내쉬었고 김과 홍은 그러면 그동안 한 이불을 덮고 잤던 거냐며 부러움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대단하다는 말을 한 것 같다. 누구도 한 잔 더 하러 가자, 자리를 옮기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박이 술값 계산을 했다. 김은 얼마라도 보태기 위해 지갑을 열다 반으로 접힌 복권을 보고서야 자신이 복권을 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김은 휴대폰으로 꿈에 나왔던 그녀를 검색했다. 이름과 그녀의 히트곡 몇 개의 제목을 알았고 걔 중 한두 곡의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는 있었지만 꿈에 나올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궁금했다. 그래, 넌 왜 내 꿈에 나온 것이냐? 그녀의 사진을 보며 김이 물었다.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뒤를 보며 대답했다.
네? 손님 뭐라고요?
아, 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김은 검색화면을 덮으려다 그녀 사진 옆 프로필에 쓰여 있는 그녀의 생년월일을 보았다.
‘1993년 5월 16일’
516이네. 재밌네. 그런데 이거 5, 16 어디서 봤는데. 5, 16. 이거….
김은 지갑에서 복권을 꺼내 복권 속 숫자를 살폈다. 5도 있었고 16도 있었다. 19도 9도 3도. 김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빈속에 소주를 들이켰을 때 느끼는 그런 달아오름과는 달랐다. 쿵쿵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얼굴은 뜨거워졌다. 동시에 머릿속은 이상한 감각들로 차기 시작했는데 조이는 듯 답답한 듯, 하지만 아프지는 않은 그런 감각이었다. 그러면서도 어지러웠고 눈앞은 캄캄해졌다가 또 부셨다가.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몇 번 눈두덩을 문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집에 들어선 김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방으로 들어가 지갑에서 복권을 꺼냈다. 읽고 있던 소설책 사이에 복권을 끼우고 책을 덮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치킨을 먹고 있었다.
“많이 먹었겠지만 이리 와서 한 조각이라도 드세요.”
아내가 옆 자리를 비우며 말했다. 김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아내의 옆자리에 앉았다.
“배불러. 그건 그렇고. 여보, 복권 샀어.”
“복권 처음 사는 것도 아닌데, 웬 호들갑?”
“그게 내가 엊저녁에 아이유 꿈을 꿨거든.”
“걔가 왜 자기 꿈에 나와? 당신 아이유 좋아해?”
“싫어하는 건 아니지. 꼭 꿈 때문만은 아닌데 아무튼 복권을 샀거든. 그런데 오면서 보니까 아이유 생년월일에 들어 있는 숫자가 내가 산 복권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야. 신기하지 않아? 1등 당첨되면 어쩌지?”
아내는 치킨 기름이 묻은 손을 물휴지로 닦고는 손을 내밀었다.
“정말? 어디 봐요.”
“책에 꽂아두었지. 쫙 펴지라고. 접어서 지갑에 넣었었거든.”
김은 전날 밤의 꿈과 횡단보도에서 맞은 편 사람들을 보며 느꼈던 어떤 의무감과, 조바심,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살 수 밖에 없었던 복권,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확인했던 번호들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내는 정색을 하고 마주 앉아 김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은 아내의 볼이 약간 붉어졌다고 생각했다. 치킨을 다 먹은 아이들이 방으로 돌아가자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김의 옆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복권 1등 당첨이 됐다고 쳐. 그 돈으로 뭐할 거야?”
“1등? 하하. 당신도 내 말이 솔깃한가 보지? 사실 나도 긴장되기는 해. 뭐할 지는 당첨금이 얼마냐에 따라 다르겠지. 요즘은 예전처럼 많지는 않더라고. 그래도 적은 돈은 아니지. 토요일 발표니까 아직 삼 일 남았네. 당첨되고 생각해도 되는 것 아닌가?”
“무슨 소리야, 지금 생각해둬야 적어도 삼 일 동안 행복할 거잖아.”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술이 깨는 것인지 의식이 또렷해졌다. 당첨이 되면 뭘 하지? 직장은 계속 다녀야겠지. 1등은 서울까지 가서 당첨금을 받는다던데 하루 연차를 써야겠네. 세금 때문에 1등 당첨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그 사람들은 어디가야 만날 수 있지? 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김은 이리저리 뒤척이다 결국 일어나 앉았다. 등을 돌리고 누워있던 아내가 돌아누우며 말했다.
“자기도 잠 안 오지? 나도 잠이 안 오네. 오늘 이상하네.”
아내는 베개를 고쳐 베며 말을 이었다.
“당첨되면 말이야, 그걸로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사자.”
“아파트?”
김은 우리가 사는 곳이 P시이고 서울에 살 일도 없는데 서울 아파트가 무슨 필요가 있냐며 되물었고 아내는 꼭 사람이 살기 위해 아파트를 사는 것은 아니지 않냐, 나중에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또 지방 아파트야 몇십 년이 지나도 가격이 그대로지만 서울은 다르지 않냐며 ‘서울 아파트 사자’를 반복했다. 김은 그게 바로 투기라면서 그런 생각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된 것이라며 핀잔을 주었다. 김은 자신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느꼈지만 굳이 목소리를 낮추고 싶지 않았다. 아파트라니, 그것도 서울 아파트라니.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충분히 좋은데 그 큰돈을 달랑 아파트 한 채를 사는데 다 써버리자니. 김은 화가 났다.
“복권 사는 것은 투기가 아닌가. 뭐.”
“암튼 서울 아파트는 절대 안 돼. 그러느니 차라리 기부를 해버릴 거야. 전부.”
“기부? 우리가 기부 받아야 하거든. 암튼, 어찌되건 당첨금 절반은 내 몫이야. 부부니까. 그렇게 알아둬. 전세를 끼는 한이 있더라도 난, 서울 아파트 살 거야. 마음 정했어.”
아내는 다시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아니, 당첨이 된 것도 아닌데 벌써 왜 이래? 포항 앞바다에 기름이 나온 것도 아닌데 벌써 부자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랑 똑같네. 똑같아. 기름이 있다 쳐. 그걸 꼭 꺼내 써야 하나? 그냥 좀 두면 안 되나? 그동안 환경이니 미래니 떠든 건 다 뭔데?”
김은 아내의 등 뒤에 대고 말을 했다. 아내는 이불을 당겨 덮었다. 그러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거기서 포항 앞바다 기름이야기가 왜 나오나? 복권이야기 하다 뜬금없이. 할 말 없으면 항상 저런 식이지. 어린 가수 꿈이나 꾸는 주제에. 당첨만 돼봐라. 무조건 절반은 내꺼다.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