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까지 자란 까마중 무리를 헤치며 나아갔다. 까마중은 좁고 깊은 골을 따라 양쪽으로 나 있었다. 골 바닥은 물기가 많아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진흙이 신발 바닥에 붙거나 뒤로 튀었다. 까마중 열매가 식용이라는 이야기를 누가 해줬더라? 나는 눈으로 최의 장딴지를 쫒으며 까마중 이야기를 누가 해줬는지, 자신이 까마중의 이름을 어찌 알고 있는지 떠올렸지만 어렴풋한 기억조차 없었다. 나는 재채기를 하려다 못한 것처럼 답답해져 도리질을 했다.
“얼마나 더 가야하는 거지?”
최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길잡이를 자처했던 박이 급한 일이 생겼다며 산에서 내려간 뒤로 우리는 기댈 곳이 없었다. 지도가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우리는 지도의 바깥에 있었다.
산행 이튿날 아침 박이 지름길을 안다, 지름길로 가자고 했을 때 아무도 말리거나 거부하지 않은 탓이었다. 박을 믿은 탓이기도 했다. 그때 물었어야 했다. 왜 지름길로 가야 하는지?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산을 즐기러 온 것인데 지름길로 갈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왜 서둘러야 하는지? 우리는 묻지 않았다. 그저 지름길이라는 단어에 홀린 듯 그래? 지름길이 있다면 그리로 가야지, 했다.
박은 길을 만드는 사람처럼 걸어갔다. 두 시간, 세 시간 동안 마주 오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자 우리는 박을 탓하기 시작했다. 박은 우리가 번갈아가며 얼마나 남았느냐? 길을 아는 것은 맞느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냐를 물어대자 지도를 꺼내 지금 우리가 있는 위치와 기존의 등산로, 그리고 산장이 있는 곳, 산장까지 가는 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던 중요한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며 너희들끼리 다녀오라 말을 남기고는 내려가 버렸다. 차라리 욕을 하거나 화를 내었다면 맞서거나 달래거나 했을 텐데, 박은 차분히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 뒤 돌아섰다. 되돌아가는 박을 멍하니 보던 우리는 박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저 자식 혼자 내려간 거야?”
우리는 잊고 있었다. 녀석의 별명이 ‘나안해’였다는 것을.
“그러니까, 지금 저 녀석이 ‘나안해’ 한 거야? 그런 거지? 개새끼.”
한동안 우리는 없는 박을 놓고 욕을 했다. 하지만 이내 의미 없는 일이란 걸 알아차렸다. 돌아갈지, 앞으로 갈지. 선택해야 했다.
“아직 오전이니까 밤이 되려면 멀었잖아. 우리가 빈 몸으로 온 것도 아니고 산행 준비해서 왔는데, 일단 가보자고.”
아침에 출발했던 곳까지 되돌아가서 그곳에서부터 정식 등산로를 따라가자는 의견과 그렇게 되면 날 저물기 전에 다음 산장에 도착하기 힘들 것이고 야간 산행을 해야 하는데 야간 산행이야말로 위험하니 가까운 등산로를 찾아보자는 의견으로 나뉘었지만 우리는 의외로 침착했고 서로를 존중했다. 박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보였다. 무엇이 좀 더 합리적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시간에 쫒기지 않는다는 것, 함께 하는 산행이 목적이라는 것에 동의한 우리는 되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여차하면 지난 밤 묵었던 산장에서 하루를 더 보낸 뒤 다음날 출발해도 된다는 것까지. 어설프고 고집 센, 속 좁은 길잡이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미 뭔가를 보여준 듯한 뿌듯함이 가슴속을 채웠다.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옅은 홍조를 띤 채, 가끔은 노래를 부르고 가끔은 끝말잇기를 하며. 한 시간여가 지났을 즈음, 우리는 조용해졌다. 앞 사람의 장딴지만 내려다보며. 이따금씩 말을 했는데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여기가 맞아? 이것 본 적 있어? 처음 등산로를 벗어나 지름길로 들어선 지점까지 가는 것이 관건이었다. 우리는 오는 동안 보았던 것들을 기억해내며 걸었다. 처음에는 모두의 기억이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름길이라는 것이 애초에 길이 아니었던 탓에 그 흔한 산악회 리본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까마중을 보았다.
골을 따라 양쪽으로 자란 까마중 무리 뒤쪽으로 너른 바위가 보였다.
“저기서 좀 쉬었다 가자. 방향도 정하고.”
아직 해가 지기에는 남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산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당황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리가 주는 평온함 속에 있었다. 박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하지만 신호가 간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했다. 언제든지 119에 전화하면 되는 것이니. 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김은 영상에서 본 오지에서 살아남는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는 박의 지난 ‘나안해’ 만행을 하나씩 짚어가며 늘어놓았고 최는 미국 주식시장과 한국 주식시장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했다. 나는 녀석들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아니, 흘려들렸다. 까마중 무리를 살펴보느라. 내가 아는 무리들은 항상 앞서거나 이끄는 존재가 있는데, 하다못해 박 같은 놈이라도 생기는 법인데, 까마중 무리엔 그런 놈들은 없을 것 같았다. 그저 똑같은 흰 꽃과 똑같은 까만 열매를 달고 있을 뿐.
“이 근처가 밭이었나 보다. 화전민이나 뭐, 그런”
최가 꺼낸 삼성전자 주가 이야기를 끊으며 내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이가 물었다.
“저기 보이는 녀석들이 까마중이거든, 물론 산에서 자랄 수도 있기는 한데 주로 밭에서 자라는 녀석들이야. 게다가 1년생이고. 하나도 아니고 저렇게 무리지은 것을 보면 대대로 여기서 살아온 것 같아서 말이야. 좀 오래 전에 화전민이나 그런 사람들의 밭이었다가 지금은 숲이 된.”
“그렇다면 길이 연결된 곳이겠네. 흔적이 있을 수도 있고. 캬, 우리가 잘 찾아왔네.”
우리는 주위를 살펴보기로 했다. 길을 찾는 목적도 있었지만 호기심이 더 컸다. 오래 전에 누군가 살았던 곳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최가 모두를 불렀다.
“여기 뭐가 있어.”
군데군데 파이고 검게 썩은 나무기둥과 돌멩이가 온전히 몸을 드러낸 흙벽, 부서지고 구멍이 난 석면 슬레이트 지붕. 예전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쓰던 창고 같았다. 반쯤 부서진 문 앞, 풀 사이로 바스라진 석면 슬레이트 조각들이 제법 보였다. 기둥이었을 것 같은 통나무도 몇.
“야, 기둥이 쓰러졌는데도 건물은 그대로다 그지? 어설프기는 해도 옛날에 지은 것들은 튼튼하단 말이야.”
이가 통나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발이 닿는 곳마다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저건 헛기둥이야, 헛기둥.”
김이 말했다.
“기둥은 기둥인데 기둥이 아니야. 멋을 부리거나 부수적인 용도로 쓴 거지. 없어도 건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박가놈 같은 거네. 누군가 말했고 우리는 모두 웃었다. 그리고 이어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창고 뒤편으로 어슴푸레 보이는 길을 보았다. 풀로 덮여있기는 했지만 나무들 사이로 이어지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없는 너비를 가진, 예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걸어 다녔을. 아카시 나무들이 침범하지 못했고 소나무 뿌리들이 조금씩 드러나 있는 것이 분명한 길이었다. 어디론가 이어져있을 길이었다.
우리는 어디론가 이어져있을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이라 믿고 걷기 시작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걸으면서 점점 더 확신이 생겼다. 풀이 덜 자란 길바닥이 보였고 간혹 계단처럼 보이는 너른 돌판도 보였다. 김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고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따라 우리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처럼 앞뒤로 팔을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나뭇가지에 묶인 빨간 산악회 리본을 발견했다. 노란 리본, 파란 리본이 뒤를 이었다. 숲을 벗어나 등산로에 발을 내디뎠다. 마주 오는 등산객이 보였고 등산객은 자신이 온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오늘 가려했던 산장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해 저물기 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고. 우리는 돌아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원래의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우리는 까마중 같은 녀석들이었다. 박이 없어도, 헛기둥이 없어도, 제 갈길 알아서 잘 가는.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