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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시험에 들게 하라

등록일 2024-09-10 18:06 게재일 2024-09-1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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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뒤쪽에서는 인기척이 없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사이에 내게로 왔거나 얼굴을 내밀어 나와 마주 보고 있을 테지. 지금까지 기척이 없는 것은 저 뒤에…. /언스플래쉬
모퉁이 뒤쪽에서는 인기척이 없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사이에 내게로 왔거나 얼굴을 내밀어 나와 마주 보고 있을 테지. 지금까지 기척이 없는 것은 저 뒤에…. /언스플래쉬

사거리, 내리막이다. 이 길로 내려가면 큰길로 들어선다. 나를 제외한 일행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왼쪽 모퉁이를 돌아서 몇 걸음, 그들은 전파사를 지나 세탁소 앞을 지나고 있다. 따라갈 걸. 나는 이제 혼자다.

어디로 가지.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큰길, 거기서 오른쪽으로 100미터만 가면 지하철역이다. 승객이 별로 없는, 종착역에 가까운 역이지만, 오늘은 삼일절. 사람들은 충분히 많을 것이다. 등산을 하려고 아침부터 배낭을 메고 나선 사람들,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사람들. 운이 좋다면 서 있을 자리도 없겠지. 저들을 따돌리기에는 충분하다. 갈까? 다음은? 다음은 어디로 가지? 우리는 이런 상황에 대해 약속해 놓은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오늘이지?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왜 오늘일까?

담배를 두고 나왔다. 담배연기 한 모금이면 쿵쾅거리는 심장도, 정리 되지 않는 이 상황도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싶은데. 일단 담배부터 한 대 피우는 거다. 전봇대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횡단보도 맞은편에 럭키슈퍼가 보인다. 한 개비 꺼내어 입에 물고 천천히 돌아선다. 태연해지자. 아무렇지 않은 듯. 한 모금 깊이 빨아 당긴다. 가슴 깊숙이 들어간 연기가 덩굴처럼 감고 올라가 머리 안을 하얗게 채운다. 내뱉은 연기는 안경 안팎을 쓰다듬고 올라간다. 머리의 안과 밖이 다 하얗다. 어지럽다. 두 번, 세 번 급하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에 눈 안까지 아려온다. 심장소리가 작아졌다. 다행이다. 머리를 둘러싸고, 안과 밖을 채우던 하얀 연기도 사라졌다. 담배연기는 이제 입과 기도만을 왕래할 뿐이다. 지저분한 유리창을 청소하듯, 담배연기는 유리세정제처럼 머리를 닦아내고 나갔다.

누군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퉁이 뒤쪽에서는 인기척이 없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사이에 내게로 왔거나 얼굴을 내밀어 나와 마주 보고 있을 테지. 지금까지 기척이 없는 것은 저 뒤에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저들은 내게 관심이 없는 걸까.

정은이 왔을 때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며 한 참 동안 웃던 중이었다. 일본 영화였다. 시대극.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멈췄었다. 일본 방송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았고 누구도 다른 것 찾아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일본무사가 꿇어 앉아있었다. 주군이 죽었고 전쟁에서 졌다. 적장은 자기편이 되겠냐고 물었다. 무사는 핏발 선 눈으로 적장을 보다 한 마디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명예로운 죽음을 허락하라. 오네가이시마스! 적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는 옷을 단정히 하고 앉아 칼을 빼내겠지. 하늘을 향해 나지막이 혹은 침을 튀기며 몇 마디 말을 하겠지. 그리고는 자신의 배를 찌를 것이다. 배를 찌른 뒤 옆으로 배를 가르는 거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것. 뻔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눈을 떼지 못했다.

“난 일본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저런 거는 멋있단 말이지. 주군을 따라 명예롭게 죽는 것, 또 그 죽음을 허락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 않아?”

“딱 봉건주의적 사고방식이지. 저게 뭐가 멋있냐?”

우리가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무사는 칼로 자기 배를 찔렀다. 남은 것은 칼을 옆으로 돌려 배를 갈라야 한다. 그런데, 칼을 뺐다. 아악, 비명을 지르더니 찔렀던 칼을 빼내 집어던지고 배를 잡았다. 바닥의 뒹굴며 소리를 질렀다. 이따이 이따이.

텔레비전 안에서 그리고 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리얼하지 않아? 저건 리얼 그 자체야.”

그때 정은이 왔다.

“정은이 왔네. 그러면 이제 올 사람은 다 왔으니 담배 한 대만 피고 회의 시작하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한 대씩 물고 앉아 연기를 뿜어냈다. 담배연기로 가득 찬 방안은 안개가 낀 듯했고, 그 속에 둘러앉은 우리는 말없이 기도하는 수행자들이거나 결전을 앞둔 전사들이었다. 결연한 의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다짐이 담배연기와 섞여 방안을 채웠다. 문득 좀 전에 보았던 일본 방송이 떠올라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정은이 물었다.

“선배, 왜 웃어요?”

“내가 언제?”

“방금 ‘씨익’ 하고 웃었는데요.”

“아, 그냥. 너 오기 전에 봤던 게 생각이 나서.”

정은이 궁금해 하며 말해 달라 보챘다. 좀 전에 보았던 무사 이야기를 해줬지만 정은은 웃지 않았다.

“그게 뭐가 재밌어요? 그런데 오면서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뭔데?”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꼭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았어요. 집에서 나와서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중간에 내려서 택시 타고, 지하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지하철 타고 이리 왔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이상하게 중간에 똑같은 아저씨를 2번 봤어요. 버스에서, 그리고 지하철 종착역에서.”

“야. 그 이야기를 지금하면 어떻게 해.”

“아까 하려고 했었는데.”

“들어오면서 그 이야기부터 했어야지.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 동네에 사는 아저씨가 등산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근데 등산복차림이 아닌 거예요.”

“어휴. 그러면 네 녀석이 이리 들어오면 안 되지. 그냥 집엘 갔어야지.”

“지금 그런 이야기 할 때야? 그건 나중에 얘기 하고 밖에 한번 나가 봐라.”

공휴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집 앞 골목은 조용했다.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며 힐끔거렸다. 건너편 골목에서도 누군가 나를 힐끔거렸다. 청바지에 흰색 운동화. 주황색 티셔츠. 각진 얼굴에 스포츠머리. 그들이다.

우리는 모두 방에서 나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고 갈림길에서 둘로 나뉘었다. 담배 두 개비를 피는 동안 저 전봇대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다. 나를 쫒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내 방을 뒤지고 있다면? 일단 여기를 피했다가 며칠 뒤에 다시 와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럴까. 나는 수배자도 아닌데, 이렇게 피할 필요가 있나? 다시 방으로 돌아가야 하나. 왜?

걸음을 옮긴다. 방금 건넜던 횡단보도를 향한다. 보행자 신호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우측으로 돌아 나왔던 전봇대를 다시 좌측으로 돌아 올라간다. 쌀집이다. 쌀집 아저씨가 아주머니랑 내 방 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말하고 있다. 평소 웃으며 ‘초옹가악’하고 부르던 아주머니가 눈을 피한다. 집 앞은 아무 일 없는 공휴일 아침처럼 평온하다. 주인집과 분리된 내 방의 바깥문을 열고 들어선다. 누군가 내 방 창으로 상반신을 집어넣고 있다. 아래에는 그를 받치는 또 한 사람. 저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나는 왜 다시 이리로 온 거지. 눈이 마주쳤다. 결정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이번에. 결정을 짓겠다. 나는 누군가를 붙잡고 창에서 끌어내린다. 그를 붙잡고. 밑으로, 밑으로 내려갈 것이다. 이제 칼을 옆으로 돌릴 시간이다.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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