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군맹무상(群盲撫象)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지난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작년 12월 3일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초토화된 한국 사회에 단비가 내렸다.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자의 사악한 행위가 몰고 온 파국적인 상황에 최초의 마침표가 찍힌 것이다. 무려 123일 동안 이어진 극심한 분열과 혼란 양상이 어느 정도 진정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가 저지른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야만적인 살육이 있은 지 45년 만에 불시에 터진 비상계엄 사태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까지 진행되었다. 내란 수괴(首魁)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정당 대표와 그 수하 국회의원들의 4개월 동안의 기행(奇行)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나는 이번 사태 진행 과정을 청도 촌구석에서 조용히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사태의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먼저 생겨난다. 나는 그것을 불교 경전인 ‘열반경’에 나오는 고사성어 ‘군맹무상’에서 찾고자 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는 우리 속담으로 잘 알려진 고사성어가 군맹무상이다. 고대 인도의 왕이 맹인(盲人) 다섯 사람을 불러서 코끼리를 만지게 했다고 한다. 코끼리를 처음 접한 그들은 각자 다른 부위를 만지고 나서 왕에게 소감을 말한다.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자는 코끼리가 기둥 같다고 했으며, 귀를 만진 사람은 부채 같다고 했다. 코를 만진 자는 뱀과 같다고 했으며, 등을 만진 사람은 벽 같다고 했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밧줄 같다고 했다. 맹인들의 말은 모두 맞지만 동시에 모두 틀린 것이다. 그들은 일정 부분을 정확히 지적했지만,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를 보지 못한 채 부분에 함몰된 맹인들은 각자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이른바 ‘확증편향’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부분적 사실과 전체적인 맥락은 상호 보완적일 때에만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 요즘처럼 지식과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는 균형 잡힌 시각과 안목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편향과 호오(好惡)가 있기 때문이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고, 받는 것도 없이 좋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살아온 내력이나 경험 혹은 지역 관계 속에서 자기의 입장을 확립한 사람은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 휩쓸리기 쉽다. 더욱이 개인적인 취향과 믿음, 고집에 가까운 소신을 철석같이 가진 사람은 그야말로 요지부동이다. 정보와 지식의 원천을 특정 유튜브에 두고 있었다는 자의 망상과 궤변, 끝없는 거짓말과 자기변명은 21세기 정보사회의 실체와 한계를 여실히 폭로한다.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해 온 자의 말로(末路)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선사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통치했던 무능한 자와 어리석은 추종자들의 행악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이다. 부분과 전체, 사실과 진실, 역사와 미래를 두루 통찰하고, 반성적(反省的)인 자세로 우리 시대와 문제와 과제를 깊이 숙고해야 할 시점이다.

2025-04-13

구미 국가산단의 변신

우정구 논설위원 산업단지 노후화 문제는 우리보다 산업화가 먼저 일어났던 서구에서는 오래된 과제였다. 노후산단으로 산업이 쇠퇴기를 맞고 청년들이 떠나면서 도시의 몰락을 경험한 도시들은 해외에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런 도시 가운데 노후산단의 부흥을 통해 새로운 기업을 유치하거나 관광산업 등을 진작하면서 도시의 재기에 성공한 경우도 또한 적지 않다. 빌바오 효과로 유명한 스페인의 빌바오시는 철강산업이 무너진 위기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하면서 관광산업도시로서 유명해졌다. 영국 맨체스타 트레퍼드파크 산업단지는 1890년대 조성된 세계 최초 산업단지다. 그러나 영국의 섬유산업이 쇠퇴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80년대 추진한 재생사업으로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지금은 전성기 이상의 활황 경기를 구가하고 있다. 최근 구미 국가산업단지가 전국 최초로 국가지정 1호 문화산단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이다. 대한민국 1호 국가산단이 1호 문화산단으로 지정되면서 갖는 역사적 의미도 있거니와 문화산단으로 변신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문화산단이란 노후산단을 혁신해 문화와 산업이 공존하는 미래형 융합산단을 이르는 말이다. 구미시는 이번을 계기로 1조9000억원을 투자해 구미산단 전체를 문화산업 복합형 미래산단으로 확 바꿀 계획이라 한다. 일본의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 신도시를 모델로 삼겠다고 한다. 미나토미라이는 1980년대 동력을 상실한 조선 중심의 도시를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대기업을 유치하고 일본 3대 미항으로 변신한 곳이다. 구미시의 문화산단 지정과 이에 따른 사업 구상이 일본 미나토미라이를 넘어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산단 성공 사례로 남길 기대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4-13

시는 맛있어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시는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어린 애순이는 ‘개점복’이라는 시로 백일장에 입상한다. “허구안날 점복 점복/ 태풍 와도 점복 점복/ 딸보다도 점복 점복/ 꼬루룩 들어가면 빨리나 나오지/ 어째 까무룩 소식이 없소/ 점복 못봐 안나오나/ 숨이 딸려 못 나오나/ 똘내미 속 다 타두룩/ 내 어망 속 태우는/ 고놈의 개점복/ 점복 팔아 버는 백 환/ 내가 주고 어망 하루를 사고 싶네/ 허리 아픈 울 어망/ 콜록대는 울 어망/ 백 환에 하루씩만/ 어망 쉬게 하고 싶네”(오애순, ‘개점복’). 목숨 걸고 물질하는 엄마를 걱정하는 감동적인 시다. 1967년 문학소녀 애순이가 교복을 입고 ‘창작과 비평’ 창간호(1966. 1)와 ‘현대문학’ 과월호를 읽는 장면은 문학사적 고증을 잘 해냈다. 무엇보다 ‘폭싹 속았수다’는 험하고 가파른 생을 산 애순이 노년에 쓴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를 좋아한다. 선배 시인이 고모네 아파트에 갔다가 반상회 자리에 불려갔는데 아파트 동 하나에 사는 주민들이 전부 시인이라며 명함을 내밀더란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시가 적혀 있고, 신춘문예 경쟁률은 1000대 1 수준이다. 이토록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회에서 온갖 혐오가 넘쳐흐르는 건 의아하다. 시가 정서적 액세서리나 팬시 상품 정도로만 가볍게 소비될 뿐 대중들의 의식에 내면화되지는 않아서일까. 파괴적이고 전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영향일까. 그래도 여전히 시의 생산자와 소비자들 사이 신뢰할 수 있는 거래의 지표는 서정성이다. 서정의 본질은 조화와 화해, 그리고 합일이므로 시를 사랑하는 사회엔 미움과 시기, 차별과 소외가 점점 줄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부터다. 맛집을 판가름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려 한다. 벽면에 시가 붙어 있거나 걸려 있거나 새겨 있거나 갈겨져 있다면 그 집은 ‘찐맛집’이다. 시인이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시 옹호론’을 펼치는 게 아니라 경험상 진짜 그렇다. 윤동주의 ‘서시’나 기형도의 ‘빈 집’, 이형기의 ‘낙화’ 같은 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름난 유명 시인의 시 말고 대표메뉴 음식을 찬양하는 시나 식당에 바치는 헌시가 있으면 제대로 된 맛집이다. 수업을 마친 월요일 저녁마다 안양중앙시장의 허름한 순대국집인 ‘대구식당’엘 간다. 거기 거울에 ‘나그네 온달’이라는 한 방랑시인이 쓴 시 ‘골라서 먹는 순대국집’이 붙어 있다. “안양중앙시장/ 중앙통로와 4번 출입구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순대국만 전문으로 하는 나란한 여러집 중 한 집 대구식당/ 상호는 대구식당인데 대구는 없고/ 1번 머리고기만/ 2번 머리고기와 내장/ 3번 머리고기와 순대/ 4번 머리고기에 내장과 순대 등의 맞춤식으로/ 구성을 취향대로 골라서 주문하는 특별한 메뉴판이 있는 딱 한 집/ (중략) 땀 흘려 일하고 보충하는 막걸리엔 필수요 자동인 콤비 순대국/ 시민들의 정서와 애환이 녹아 있고/ 고객 중심 맞춤식으로 배려 깊은 아지매의 풋풋한 정이 배인/ 노가다나 주당들의 단골집 대구식당” 당장이라도 들어가 앉아 순대국에 막걸리를 시키고 싶어지지 않은가? 이 시는 문학적 과장이 아니라 리얼리즘 그 자체다. 동대문 생선구이 골목에서 30년 가까이 장사하는 ‘아내의 밥상’에는 주인인 유미화 씨가 쓴 십여 편의 시가 식당 안팎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표메뉴인 꼬막비빔밥을 소재로 한 ‘꼬비’는 소리내 읽으면 입안에 참기름 밴 양념장의 매콤함과 통통 쫄깃한 꼬막살의 식감이 느껴진다. “오동통 살이 오른 청정지역 벌교 꼬막/ 펄펄 끓는 뜨건 물에 멍울지게 살짝 삶아/ 속살을 발라낸 후 목욕재계 시킨 후에/ 새콤달콤 양념장에 싱싱야채 함께 섞어/ 참기름 깨소금도 솔솔 뿌려 버무린 후/ 양푼에 담아내어 윤기 잘잘 쌀밥 함께/ 쓱싹쓱싹 비벼주니 맛깔난 그 모습에/ 눈이 먼저 달려가서 시장기를 유혹하네/ 입안에서 꼴깍꼴깍 군침돌며 침 삼키는/ 예쁘면서 맛도 좋은 네 이름이 꼬비렸다” 시의 맨 밑에는 “꼬비는 우리집 메뉴”라는 각주가 달려 있다. 음식 냄새와 함께 사람 냄새도 물씬 풍기는 시, 한 식탁에 여럿이 둘러앉아 꼬막비빔밥 먹고 싶게 하는 시다. 서정시의 원리인 조화와 합일 그 자체다. 이런 시가 “반포래미안퍼스티지 천년의 보금자리” 어쩌고 하는 천박한 시보다 천배 만배 낫다. 정현종 시인이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라고 노래했던가. 그 문장을 나는 “맛집에는 시가 있다/ 그 시를 먹고 싶다”로 바꿔본다. 시가 있는 식당에서 음식은 시가 되고, 시는 맛있다.

2025-04-13

시작하는 마음

비 내리는 토요일 오전, 일찍 일어나 동네 한 바퀴를 산책했다. 비 때문인지 아직 다 피지 못한 벚꽃 나무의 꽃잎들이 거리에 지저분하게 내려 앉아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다가도 미처 다 피지 못한 잎들이 떨어져, 온몸으로 밟히고 있단 사실이 조금 울적해지기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대체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겠는 마음으로 두 시간 여를 넘게 같은 곳을 빙빙 돌았다. 집에 가면 이삿짐을 마저 싸야 하고, 필요 없는 물건을 버려야 하고, 겨울 이불 두 세트를 세탁하고 건조를 시켜야 하며, 냉장고에 있는 음식물들을 모조리 먹거나 또는 처리해야만 했다. 몸은 걷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집에서 처리해야할 목록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었고, 결국 몸과 마음 모두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결국 집에 오자마자 잠에 빠져 들었다. 이사는 너무 갑작스럽게 정해졌다. 그간 9평 남짓한 오피스텔에 혼자 살면서 이곳은 살긴 좋지만 월세가 부담스럽고 또 너무 좁아서 답답하다는 불만을 달고 살았다. 내 이야기를 일년 반 째 듣던 막내 동생이 그럼 같이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동거 제안을 했고, 정말 우연히도 조금 더 넓은 집을 보게 되어 한순간 함께 살게 되었다. 그렇게 이삿날을 잡아두고 잠깐 잊고 살았더니, 어느새 나는 내일인 일요일 오전에 이사를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새로운 회사의 입사를 앞두고 있던 터라, 급작스런 변화에 이 모든 것이 정말 꿈이거나 엔딩을 앞둔 게임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사실 이사하는 곳도 지금 살고 있는 곳과 오분도 걸리지 않는 건물이고, 결국 이 동네에 사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어딘가 아주 머나먼 곳에서 리셋을 앞두고 있는 것만 같다. 새로운 시작은 설레기도 하지만 동시에 두려운 마음이 크다. 또다시 마음이 흔들려 방황할 때면 인스타그램을 켜서 아이패드 드로잉 작가인 여유재순님의 그림을 본다. 거의 매일 올라오는 그녀의 그림은 투박하다. 나는 그림을 잘 볼 줄 모르지만, 따스한 색감과 깔끔한 구도로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준다. 그녀가 주로 그리는 그림은 꽃과 식물, 나무가 있는 풍경이다. 여유재순 작가님의 나이는 92세. 친구들은 모두 노인정에 가서 시간을 보낼 때에 자신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코로나 때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자 작가님은 무작정 아이패드를 사고, 유튜브를 보며 그림을 그렸다. 처음엔 펜을 들고 선을 긋는 것도 못했지만 인터넷에서 그림을 찾아 따라 그리고, 유튜브로 강의를 들으며 모르는 것은 메모를 하며 하나씩 배웠다. 그 그림을 본 손녀딸이 인스타그램에 그림을 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모여든 것인데, 벌써 여유재순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은 1705개의 그림 게시물을 발행하였고, 9만 팔로워나 모여 있다. 작가님은 현재까지도 그림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꿈을 그린다. 동시에 아주 담백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20대에서 30대로, 나이를 먹으며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고 도전하는 일이 두려웠던 때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이 일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건 아닐지, 또는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만 하며 현실과 타협했을 때 그녀는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그러한 불안감은 내 안의 가능성을 잠재우는 소모적인 요소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아주 늦은 나이에도 컴퓨터 학원에 다니며 배움을 지속했다. 당시 반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배움의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집에 가면 안 되겠느냐고, 컴퓨터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겠느냐는 말을 들었지만, 꼭 배워야 하겠다고 대답하며 끝까지 수업을 들었다. 옆에 있는 친구들이 ‘넌 바보짓을 퍽도 잘한다’라고 말해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통해 배움을 지속한다. 또한 처음은 누구나 잘 알 수 없는 거기에 부끄러움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부끄러움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면 그 기쁨과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나는 작가님의 인터뷰 영상을 점차 돌려보며, 꿈꾸는 사람은 늙지 않고 영원히 젊음으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현재 새로운 시작 앞에서 걱정만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부끄럽게 비춰졌다. 그러면서 시작 앞에서 두려울지라도, 언제고 그저 시작하면 되는 것임을, 단순함에서 오는 용기와 지혜 앞에서 나는 무수한 위로를 받았다.

2025-04-13

사람도 기계도 노후화… ‘산불 진화시스템’ 개선 필요할 때

황인무 대구 본사 산불 진화 체계 전반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올해만 벌써 2건의 충격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달 26일 경북 의성과 지난 6일 대구 북구에서 벌어진 사고. 각각의 산불을 진화중이던 헬기가 추락해 조종사 2명이 목숨을 잃었다. 구체적인 상황을 들어보면 더욱 안타깝다. 지난 6일 북구 서변동 헬기 추락사고의 정확한 원인 규명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당시 사고를 목격한 이는 헬기가 저수지에서 물을 담은 뒤 저공비행을 하다 잠시 멈췄고, 물주머니가 위로 튀어 오른 직후 꼬리 날개가 비닐하우스에 걸린 뒤 추락했다고 전했다. 지난 7일 국토부 등으로 꾸려진 합동조사단이 사고 현장에서 헬기 잔해물 분포도, 인근 폐쇄회로(CC)TV, 전소된 보조 기억 장치,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감식을 다각도로 진행했으나, 사고 헬기의 고도나 속도를 추적할 수 있는 장비를 찾지 못했다. 해당 장치는 불에 타 소실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답답한 마음이 가득한 가운데, 전문가들은 기체 노후화를 헬기 추락 원인으로 꼽고 있다. 통상 헬기는 운항 기간 20년이 넘으면 ‘경년 항공기(기령이 일정 기간을 초과한 항공기)’로 분류돼 국토교통부가 특별 관리하지만, 도입 헬기의 내구연한을 제한하는 규정은 없다. 대구지역 산불진화 헬기 역시 노후화된 것으로 알려져 불안감이 커진다. 지역에는 대구소방안전본부가 2005년식, 2019년식 헬기 2대를 보유하고 있고 달성군청, 동구청, 군위군청, 수성구청이 각 1대의 산불진화 헬기를 민간에서 임차해 운용하고 있다. 임차 헬기는 각각 1975년, 1981년, 2001년, 2010년에 제작됐다. 짧게는 15년부터 최대 50년이 지난 노후 헬기들이다. 이들 노후된 헬기로 산불 위험 기간인 1월∼6월, 11월∼12월 사이에 산불예방활동, 산불진화, 기타(재난 등) 등을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매년 임차비용도 지자체들에게는 부담이다. 정부는 산불 진화가 지자체 소관이란 이유로 국비 지원을 해주지 않고 있다. 매년 10억원이 넘는 예산이 기초지자체로서는 부담인 것이다. 여기에 헬기 정비를 민간업체가 전담하다보니 지자체가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다. 지자체가 정비 내역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조종사의 나이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자체가 운영하는 산불 진화 헬기조종사 90% 이상이 육해공군 출신 퇴역 조종사인 것으로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산불 현장은 특히 연무가 끼어 시야가 나쁜데다 돌풍이 부는 경우도 있어 70대 조종사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소중한 목숨이 잃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이제는 당국이 나서 산불진화에 현실적인 대응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him7942@kbmaeil.com

2025-04-10

대구와 광주의 영원한 승리를 위하여

신광조​​​​​​​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대구와 광주는 상당히 유사한 면이 많다. 한쪽은 정치 성향이 우측으로 기울어져 한쪽은 좌측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 둘 다 본질적으로 자존심이 세고 변화에 저항하고 고집이 세다. 두 도시 미래 발전전략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여러 훌륭한 대구시장이 있지만, 대구발전을 이끈 최고의 대구시장으로 이상희 시장과 문희갑 시장을 들겠다. 이 시장님은 대구 도시계획 근간인 신천대로를 왕복 8차선에 녹지를 갖춘 형태로 구상하였고, 칠성시장 인근 구간은 시장 정비 후 지상이나 지하도로로 계획하였다. 낙동강을 대구한강으로 만들겠다는 포부에도 찬사를 보냈었다. 문희갑 시장은 대구 곳곳에 600만 그루 나무를 심어, 대구를 폭염의 도시에서 탈출시킨 분이다. 난 대구를 벤치마킹하여 ‘광주 천만 그루 나무 심기 운동’을 벌였으니, 문 시장님은 전 국토 푸르게 최고 수훈자인 셈이다. 대구와 광주는 내륙도시 한계로, 수출 전진기지가 될 수는 없다. 대신 대한민국 빛나게 하는 지혜의 도시는 될 수 있다. 시대정신은 늘 변한다.‘불과 금속과 돌’의 시대에서 ‘나무와 꽃과 물’의 시대로 변했다.‘기계와 땀’의 시대에서, ‘인간과 눈물’의 시대로 변했다. 대구와 광주에게 부여된 시대적 명제는 무엇일까? 도시를 ‘생명, 자유, 평화’의 꽃이 만발하는 극락도원으로 바꾸어 달라는 것이다. 대구와 광주는 가장 부자인 도시가 될 수는 없으나, 가장 살기 좋은 도시는 될 수 있다. 그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가장 살기 좋은 도시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담은 도시다. 이런 이념을 추구하는 도시를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티모시 비틀리 교수는 ‘바이오필릭 시티(biophillic city)’라고 부른다. 난 이런 도시를 ‘자연사랑·인간사랑·세상사랑 삼중주 도시’로 명명한다. 핀란드는 유치원 때부터 자연으로부터 ‘배움’을 내면화·생활화했다. 덥고 습해서 짜증 나는 도시 싱가포르는 지도자와 시민들의 지혜로 ‘바이오필릭 시티’ 개념을 도시디자인에 전면 도입, 도시는 부강해지고 시민은 행복해졌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 대구시장·광주시장 이하 두 도시 공무원들이 바이오필릭 시티에 미치기만 하면, 두 도시는 승리의 도시가 된다. 우선 두 도시 새로 생긴 공항 이전 적지 250여만 평에, 바이오필릭 시티 조성 사령탑을 만들자. 그리고 이 ‘자연사랑·인간사랑·세상사랑’ 도시 만들기 수법을 대구·광주 전 지역에 확산시키자. 서울을 비롯한 전 세계인들이 대구와 광주를 찾아올 것이다. 호기심 많은 홍준표 시장이 묻는다. “빵 문제, 경제발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요?” 걱정할 것 없다.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자연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청색 경제 기술도시 요람 만들면 된다. 미국에서 개발한 상어피부 모방 항균 표면은 항생제나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병원 내 감염율을 80%까지 줄인다. 청어 비늘 구조를 모방한 태양광 패널 코팅 기술은 기존 태양광 패널보다 15% 더 많은 빛을 흡수한다. 청년 일자리 창출 무궁무진하다. 경제 중흥한다. 미국 메이요 클리닉 센터나 플로리다 암 센터 같은 공익 의료 시설을 대구는 군 공항 이전 적지에 광주는 바이오필릭 시티 배경으로 화순에 만들면, 세계 최고 의료 힐링 도시 된다.

2025-04-10

관세 싸움에 새우 등 터질라

우정구 논설위원 미국과 중국의 관세 전쟁이 어디까지 뻗칠지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9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대중국 상호관세를 84%로 높이는 행정명령에 또다시 서명했다. 미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미국은 이제 중국에 모두 104%의 관세를 부과하게 된 셈이다. 이러자 10일 중국도 미국산 수입제품에 대해 또다시 84%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밝혔다. 두 나라 간 관세전쟁이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는 두 나라의 관세 전쟁을 핵전쟁에 비유하기도 한다. 치킨게임은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한 자동차 게임이다. 서로 마주보며 달려오는 게임으로 어느 한쪽이 포기하지 않으면 양쪽 다 크게 다치는 게임이다. 1950년에서 1980년대까지 미국과 소련이 군비경쟁을 한창 벌일 때, 세계는 두 나라의 경쟁을 치킨게임이라 불렀다. 역사상 국제사회가 서로 양보하지 않고 치킨게임을 벌인 사례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이런 이유로 전쟁에 휘말린 경우도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힘센 강자들 싸움에 아무 관계없는 약자가 손해를 보는 경우를 표현한 말이다. 미중의 관세전쟁에 지금 세계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한국증시도 9일 패닉 상태에 빠졌다. 미국과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다. 수출로 살아가는 한국은 두 나라의 치킨게임 영향력 안에 있는 나라다. 중소업체들은 중국산 저가 제품의 국내시장 공략을 벌써부터 걱정한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가 우리 처지 아닐까. 나라든 기업이든 단단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4-10

물모이와 물모아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기후변화가 일상이 된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물 부족과 산불이라는 두 가지 큰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특히 지난 3월, 경북에서 일어난 역대 최악의 산불은 큰 인명 피해와 막대한 재산 손실을 가져왔다. 당시 산불의 직접적인 원인은 입산자의 작은 부주의였지만, 피해를 키운 근본 원인은 따로 있었다. 메마른 산림과 오랜 가뭄으로 인한 물 부족, 초기 대응의 한계, 그리고 절실히 기다렸던 비조차 내리지 않은 환경이 더 큰 비극으로 이어졌다. 결국 많은 공무원과 산불 대응 인력이 밤낮없이 산불 진화에 투입되었으며, 심지어는 입산 자체를 통제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해야 했다. 이제 산불은 봄철 일부 지역만의 일이 아니다. 최근 10년을 되돌아보면 산불 발생 빈도는 뚜렷하게 증가했다. 과거 산불은 주로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 집중되었으나, 현재는 계절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대형 산불 피해가 빈번해지고 있어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고온 건조한 날씨가 늘고 강풍이 자주 불게 되면서, 불에 약한 소나무림 중심의 산림 구조는 더욱 취약해졌다. 산불 초기 대응은 여전히 어려움이 많다. 급격히 퍼지는 산불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운 데다, 헬기의 야간 투입 제한, 장비의 노후화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산불특수진화대의 인력 부족과 열악한 근로 환경 또한 큰 걸림돌이다. 초기 진화가 늦어지면 결국 산불은 더 커지고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산불 대응의 현실적인 해법은 무엇일까? 이제는 ‘물모이’와 ‘물모아’를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먼저 ‘물모이’ 운동이란 산 속에 흙과 돌, 나무 등을 활용해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빗물을 모으는 방법이다. ‘물모이’를 통해 주변의 습도를 유지할 수 있고, 산불이 났을 때 초기 진화를 위한 소중한 물을 확보할 수 있다. 슬로바키아의 경우, 대형 산불 이후 약 10만 개 이상의 ‘물모이’를 조성해 산림 생태계 복원과 산불 피해 감소에 큰 효과를 거둔 사례가 있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물모아’ 시스템이라는 국가물관리 통합 플랫폼(mulmoa.go.kr)을 구축하고 있다. 산림뿐 아니라 농업, 도시 생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물 정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이 시스템은 가뭄이나 홍수 같은 극단적 재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모아’ 시스템을 통해 신속하게 지역의 물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활용한다면, 장기적으로 산림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기후 변화 시대, 산불은 이제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체계적인 물 관리 시스템인 ‘물모아’ 구축과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물모이’ 운동은 지속가능한 산불 예방책이다. 우리의 숲을 지키고 소중한 인명과 재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건강한 숲 조성으로 탄소 흡수 능력을 높여 기후 위기 대응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이제는 모두가 지혜를 모아 작은 실천부터 시작할 때다.

2025-04-10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노병철수필가 어떤 때는 한 대 패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자기가 손해 보는 짓은 죽어도 하기 싫고 자기 생각만 옳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싸가지 없는 전형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인간은 모든 인간 삶 자체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고 있는 듯했다. 세상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가듯이 나도 다른 사람 인생에 디딤돌은 못될망정 걸림돌은 되지 않아야겠다 싶어 대충 맞춰주고 사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막가파 인간들에겐 왠지 그런 마음이 사라진다. 혹자는 종교인이라면서 어찌 마음을 그렇게 나쁜 방향으로 먹느냐고 수양이 덜 됐다고 나무라지만, 수양은 수양이고 성질은 성질인 것 같다. “난 그 쪽 보다 이 쪽으로 가고 싶어.”“밥은 무슨 밥 그냥 허기만 달래면 되지.”어떤 때는 내가 제 놈의 ‘심부름꾼’이 된 느낌마저 들어서 혼자 여행길을 잡은 지가 꽤 된다. 동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나의 규칙에 따라줘야 하기에 처음 몇 번은 맞춰주더니만, 서로가 불편하니까 이젠 같이 가자는 말도 잘 안 한다. 그 지방 특색 있는 음식은 모조리 다 먹고 와야 하고 어지간하면 내가 보고 싶은 곳은 다 다녀야 하는 나의 특유의 여행습관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 스스로 혼자 여행하는 인간형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의 지병이 혼자 여행하는 것을 막았다. 운전대만 잡으면 잠이 쏟아지는 이상한 병이 내게 있다. 당뇨로 인한 졸음 현상이 심했다. 그래서 운전대를 오래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나 편하자고 운전만 해 달라는 여행 동반자는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관광버스 여행이었다. 아주 저렴하고 운전은 안 해도 되면서 음주가무는 전혀 없는 그런 여행만 전문으로 하는 관광버스들이 생겨났기에 정말 편했다. 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혼자 아닌 혼자 여행을 즐기는 것이다. 요즘은 목적 여행을 시작했다. 목적이 같은 사람끼리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무리가 생겼다. 하지만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고 판단되면 같이 여행을 가지 않았다.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이상한 인간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나를 변하게 했는지 주위 좋은 사람들이 나를 바꿔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인식에 변화가 왔다. 우리가 자주 듣는 이야기 중 여행을 가장 즐겁게 하려면 동행자가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백번 동감한다. 하지만 이는 나 중심적 사고방식이다. 나를 기준으로 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린다. 이게 맞는 것일까? 동행자에게 나의 여행습관까지 포기하면서도 맞춰줄 수는 없는 것일까? 이제야 깨달았다. 남들이 보았을 때 ‘나’라는 인간도 이기적이고 싸가지 없는 인간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론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결정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부터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사람이 옆에 온다는 진리를 말이다. 사람이 사는데 네 가지 ‘연’이 있단다. 혈연, 학연, 지연 그리고 ‘인연’이란다. 그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은 내 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세월이 알게 해 주었다.

2025-04-10

대통령이 없는 나라

장규열 고문 대통령이 없어졌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결정은 역사의 한 장면을 강렬하게 새겼다. 최고권력자가 법의 심판을 받았고, 국민은 거리에서 침묵과 함성으로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체념과 분노 그리고 마지막 남았던 희망도 사그라진 시간이었다. 대통령이 없는 나라에서 허전함은 곧 혼란으로 남았다. 책임을 못다한 권력의 잔해들로 남았다. 대통령이 없는데도 낡은 권력과 그 잔재는 아직도 곳곳에 살아서 꿈틀거린다. 부패한 권력체계는 단순히 대통령의 퇴진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국정농단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일부 세력은 아직도 기득권을 붙들고 움직이고 있다. 경제는 멈췄고 민생은 외면되며 외교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이후, 한미 간의 대화는 자취를 감췄고, 보호무역주의적 경제공세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 관세폭탄이라는 현실 앞에 대응은 커녕 방향조차 잡지 못하는 게 아닌가. 무책임한 정권이 남긴 그림자가 깊고도 어둡다. 시대를 잘못 짚은 비상계엄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지만 국민은 지혜로왔다. 우리는 달랐다. 대통령이 사라진 날에도 아이는 학교에 가고 지하철은 정시에 달렸으며 국민은 법을 지켰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것은 대통령 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라를 지탱하는 힘은 결국 국민에게 있었다. 우리는 과도기의 한복판에 섰다. 두 달도 못미칠 권한대행 체제는 한계가 있다. 나라가 스러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정권 때문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자정능력과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의 회복탄력성 덕분이다. 그렇기에 더욱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의 책략이나 술수에 나라를 맡기지 않는다고. 잘못 사용된 군경의 위협과 ‘장난같은 게엄’이라는 터무니없는 궤변 앞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던 국민이기에 이제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자격이 있다고. 조기대선은 단지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이벤트가 아니다. 우리는 혼란의 끝에서 진짜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누구를 위한 나라를 만들 것인가.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더 이상 ‘적당히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책임질 줄 알고 공감할 줄 아는 리더를 요구해야 한다. 선택은 단지 희망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사라졌지만, 국민은 깨어 있다. 혼란 속에서도 상처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길을 찾는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온 세상을 향해 말을 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아니,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온 나라가 한마음이 되었다고. 온 세상이 혹 거꾸로 달린다 해도 대한민국은 국민이 자유롭고 풍요할 내일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라고. 국민은 많이 배웠다. 자유와 민주의 고귀함과 헌법을 지켜야 할 까닭에 관해 분명히 깨우쳤다. 주권자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는 권력자는 언제든지 버려질 것이라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경탄하는 중이다. 지난 몇 달이 모두의 위기였지만, 나라의 역사 위에는 오히려 빛나는 시간으로 새겨야 한다. 국민이 살아있어 나라가 안전하다.

2025-04-09

치매와 결혼의 상관관계

홍성식(기획특집부장)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불가피하게 주목받는 병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치매’다. 대뇌 신경세포의 손상이 지능, 의지, 기억 따위를 상실시키는 치매는 대부분 노인들에게서 발병한다. 증상에 따라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대여섯 살 철부지 아이처럼 행동하며, 심지어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는 치매는 세상 누구도 걸리고 싶지 않은 병이 아닐까. 이와 관련, 최근 미국에서 발표된 조사 결과 하나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이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낮다’는 것.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 연구팀은 2만4107명을 대상으로 결혼 여부와 인지 장애의 연관성을 오랜 기간 조사했다. 인지 상태에 대한 신경 심리학적 검사와 임상의의 평가가 겸해진 18년 동안의 추적·관찰에 의하면 사별·이혼·미혼인 사람들이 배우자와 함께 생활하는 이들보다 치매 발병 위험성이 40%가량 낮았다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한 사람보다 친구, 이웃과 사회적 교류가 활발했고 보다 자립적이었다. 이런 게 인지 능력 유지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게 연구팀의 부연. 만성 스트레스는 뇌의 신경세포를 손상시키고 사멸을 불러와 치매 위험성을 높인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결혼이란 관계를 불화 없이 유지시키기 위해선 적지 않은 스트레스 속에서 인내해야 한다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결혼을 꺼리는 세태에 더해 과학적 조사 결과까지 나왔다니 앞으론 “나는 치매에 걸리기 싫으니 결혼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을 듯하다. 이래저래 결혼이 홀대받는 시대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4-09

연극을 보고 나서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취미란에는 어김없이 책이나 영화를 즐긴다고 적는다. 글눈을 뜨면서부터 책을 찾아 읽더라는 부모님의 말씀도 자주 들었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도 어딘가 구석진 곳에서 책을 보고 있던 아이로 나를 기억해 주니 나의 독서벽은 꽤나 오래된 것임에 틀림없다. 영화를 즐기는 것도 역사가 깊다. 아버지와 함께 간 극장에서 본 ‘콰이강의 다리’가 여전히 선명하다. 대입 공부를 치열하게 하던 고3 때에도 TV 주말의 명화극장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연극을 처음으로 본 건 고2 때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오빠가 안톤 체호프 작품인 연극에 배우로 등장한다면서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객석을 채워 주라고 했다. 오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가까이 지내는 친구 몇을 데리고 극장을 찾았다. 어두컴컴한 무대 앞에 몇 되지 않은 의자가 깔려있었다. 무대에 조명이 밝아지자 전통 러시아식 흰옷에 붉은 허리띠를 매고, 목 긴 가죽장화를 신은 오빠가 구부정한 채로 등장했다. 흰머리에 흰 수염을 붙이고 과장적으로 노인 분장한 오빠의 모습이 매우 생경해서 난 괜히 친구들에게 부끄러웠다. 무대 위의 오빠 모습은 이렇게도 기억에 선명한데 그 연극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도 국문과의 밤이라는 축제를 하면 당연히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고, 학과의 선후배들과 친구들이 밤낮으로 연습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 가까이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행사 후 찍은 단체사진에 분장한 채로 웃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잠시 부러웠지만 그 정도였다. 연극은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나 보다. 이화회 회원들과 ‘친정엄마와 3박4일’을 본 적이 있었다. 워낙 티켓파워가 있는 배우들의 연극이라 볼 만하다고 관람한 거였다. 잘 아는 내용의 연극에, 배우의 연기는 훌륭했으나 무대가 너무나 큰 극장은 연극 감상을 심히 방해했다. 비교적 앞자리에 앉았음에도 도저히 몰입되지 않아 성에 차지 않았다. 연극의 묘미는 무대 가까이에서 배우의 숨소리와 땀방울을 느끼고 보는 것인데. 지난달 배달된 대구문화 소식지에서 대구연극제 뉴스를 접했다. 연극 일정을 꼼꼼히 살폈다. 안톤 체호프의 ‘고니의 노래’를 택해 맨 앞자리를 예매했다. 원래 희곡은 두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15분짜리 단막극이나 실제 공연은 60분이었다. 지방 작은 극장 68세의 노배우가 연극이 끝난 뒤 프롬프터와 함께 연극 인생을 회고하는 내용인데, 각색이 많이 된 듯했다. 확인하고 싶어 도서관에서 ‘체호프 희곡 전집’을 빌려 읽기도 했다. 힌트가 될 만한 무대 장치, 젊은 배우의 서툰 분장과 연기에서는 오히려 노배우의 노쇠함 대신 청년극단의 활기가 전해졌다. 그러나 앞자리에서 직관한 배우의 땀방울, 거친 숨소리와 먼지내 나는 무대는 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엔 충분했다. 극장을 나서며 오랜만에 오빠와 통화했다. 52년 전 오빠가 공연한 연극 제목이 뭐냐고 물었더니 안톤 체호프의 ‘곰’이라며 첫 대사를 또렷이 기억해 들려준다. “좋지 않습니다. 마님, 몸만 상하실 겁니다….” 전화 너머로 건너온 오빠 목소리에서 아주 잠깐 연극배우의 포스가 느껴졌다. 그 옛날 20대에 늙은 배우를 연기한 오빠는 지금 73살이다.

2025-04-09

한방으로 다스리는 호흡기 건강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코와 기관지는 현대인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호흡기 문제 중 하나로 미세먼지와 대기오염 바이러스로 인한 감기 같은 요인들이 원인으로 작용한다. 건조한 환경과 실내 공기 질의 저하도 호흡기 건강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호흡기 질환은 폐와 관련된 문제로 보이는데 폐기능이 떨어지고 담(痰)이 쌓이면 기침, 가래, 호흡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본다. 폐는 본래 건조한 것 보단 적절한 습도를 유지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장기이므로 습도가 부족한 환경이나 찬바람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호흡기가 쉽게 손상될 수 있다. 한의학에선 호흡기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활용한다. 한약 처방이 대표적이며 폐의 기운을 보강하는 맥문동탕이나 갈근탕 같은 처방이 자주 사용된다. 맥문동탕은 폐를 윤택하게 하여 마른기침을 완화하고 갈근탕은 폐에 쌓인 열을 내려 염증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담이 많고 가래가 끈적거리며 배출이 어려운 경우에는 반하후박탕을 활용하여 담을 제거하고 기침을 줄일 수 있다. 기관지 질환은 증상이 유사하더라도 환자의 체질과 병력에 따라 원인이 다를 수 있으니 반드시 한의사의 진료를 통해 맞춤 처방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코 안의 염증인 비염 축농증 같은 류의 병들엔 한약뿐만 아니라 약침 요법을 활용 할 수도 있다. 약침 요법은 한약 성분을 직접 경혈에 주입하여 치료 효과를 높이는 방법으로 특히 초음파를 활용하면 정확한 위치에 약침을 투여할 수 있고 또 면역력을 높일 수 있는 자율신경까지 조절할 수 있다. 비염과 축농증 등으로 코가 막히는 질환은 익구개 신경절에 직접 약침을 주사하면 코와 눈 주변의 자율신경이 조절되어 막혀 있는 코가 뚫리고 잘 낫지 않는 비염이 개선된다. 성상신경과 미주신경에 약침을 주입하면 자율신경이 조절되어 피로함이나 수면장애 소화 장애 등이 개선되어 면역력이 향상 된다. 생활습관 개선도 호흡기 건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 실내 습도를 적절히 유지하고 먼지나 곰팡이 등의 유해물질을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뜻한 차를 자주 마시는 것도 호흡기 건강에 도움이 되며 도라지차와 배즙은 폐를 보호하고 가래를 삭이는 효과가 있다. 생강차나 귤껍질차도 호흡기를 따뜻하게 하고 기침을 완화하는데 사용된다. 냉 음료 섭취를 피하고 찬바람을 직접 맞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도 중요하다. 평소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 폐활량을 키우고 면역력을 증진시키는 것도 호흡기 건강 유지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한의학에선 질병을 단순히 증상만으로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몸 전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호흡기 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평소 폐의 기운을 강화하는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유산소 운동으로 심폐기능을 강화 하고 아프면 한약과 약침 치료 등의 한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만 아니라 올바른 생활 습관을 같이 실천한다면 호흡기 건강을 효과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 건강한 폐와 기관지는 단순히 호흡기의 문제를 넘어 신체 건강과 면역력 향상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기관지 건강을 위한 꾸준한 관리와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2025-04-09

입암서원(立巖書院)

가사천 물소리 맑으니 과연 세거(世居)할 만한 곳이다 안과 밖으로 닦아 문장(文章)과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이렇게 교차하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향나무 냄새 쑥떡보다 깊다 우리가 불천위(不遷位)를 바라는가 망연한 불후(不朽)를 꿈꾸지 않고 오직 실용적으로 살자고 다짐한다 형식적인 솟음이 아니라 의지의 표상으로 뜻을 세움이라 헛것에 들썩이지 말고 오직 정좌(正坐)하여 정진하며 읽고 또 읽으리라 뼈에 새겨 각고라 했으니 성리(性理)가 사람의 길에 삐끗한다면 새로이 갈아치울 기개를 배우고 시대에 동참하는 열린 생각을 배우는 것이 학문의 길이 아니겠는가 귀 기울여 듣고 마음 낮추고 후세를 두려워하여 오늘을 직시하는 선비가 되는 것이 눈 밝은 조상의 가르침인 것을, 헌 신짝처럼 신념을 개량할 수 있는 것도 교조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길일 것이다 그리하여 동천(洞天)에 머물고자, 그래서 입암(立巖)이다 그래서 선비는 위태로운 사람이다. 어느 들판에서 쓰러지리라. 그 들판이 되어 벌떡 다시 일어나리라. 입신양명은 당대의 것이 아님을 명심하여 후세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이 중요하다. 오늘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님을 진력을 다해야 한다. 보조 지눌이 말했다. 땅으로 쓰러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4-09

언제나 최소한의 품위

정미영 수필가 며칠 전,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했다. 한 중형차와 오토바이가 부딪힌 사고였다. 다행히 큰 부상자는 없는 듯했지만, 오토바이 운전자는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차량 운전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있었기에, 주변에서 누군가가 구급차를 부르는 듯했다. 그런데도 차량 운전자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최소한의 품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종종 품위를 ‘고상함’이나 ‘우아함’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품위라는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사고가 난 상황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다친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운전자는 자신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채 피해자를 몰아세우고만 있었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사고를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조차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려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분명 차량 운전자도 놀라고 화가 났겠지만, 그 감정을 무작정 쏟아내며 피해자를 윽박지르는 모습은 나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에서 ‘어떤 처지에서도 인간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기를’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사고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야 말로 품위라고 생각한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편함과 불쾌감을 주며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무례함은 순간의 감정에서 비롯되지만, 그 흔적은 오래도록 남는다. 내가 아무리 억울하고 답답하더라도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교통사고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감정을 다스리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성숙해지는 길일 것이다. 그 운전자가 아무리 감정이 북받쳐도 잠시 숨을 고르고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면, 피해자에게도 덜 상처를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쾌감을 주지 않았을 것 같다. 그날의 장면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과연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 감정의 민낯이 자주 떠올라 부끄러웠다. 사회생활에서는 그럭저럭 감정을 절제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가정생활에서는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기 힘든 나날이 많았다. 나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내 자녀에게는 엄격했다. 자녀를 키우면서 욕심이 앞선 탓에 아이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킨 적이 많았다. 감정이 격해지면 쉽게 표정을 찡그렸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참다운 어른으로서의 태도나 부모로서의 품위를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품위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상황이 불편하더라도 감정을 억누르는 등의 사소한 행동들이 모여 사람다움을 만드는 것이리라. 품위와 배려,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김용균 감독의 영화 ‘소풍(2024년)’이 떠올랐다. 삶보다 죽음이 가까운 나이에 병이 든 몸이지만, 끝까지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고 주인공들은 노력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배우의 내면 연기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 당시에도 죽음을 앞둔 인간으로서의 품위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 자신에게 물었었다. 거친 갈등보다는 조용한 방식으로 인간의 따뜻함과 배려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품인 것 같아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네 삶은 생각보다 짧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런 삶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나와 타인을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나 스스로에게 언제나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라고, 야무지게 당부해 본다.

2025-04-09

대전서 배우자

우정구 논설위원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대전광역시의 혼인 건수는 모두 7986건이다. 전년도 보다 53.2%가 증가했다. 증가폭만 보면 전국 평균치(14.8%)의 3.6배나 된다. 대전은 인구 1000명당 혼인 건수를 계산한 혼인율도 남성이 12.6건, 여성이 12.4건으로 전년보다 모두 4.3건씩 증가했다. 전국 시·도 가운데 혼인 건수와 혼인율 모두 당연히 1위다. 1990년 혼인관련 통계 작성 후 혼인율 1위는 대기업이 많은 서울과 경기, 울산이었다. 이후 행정수도가 이전해 공무원이 많이 사는 세종이 9년간 1위 자리를 유지해 왔으나 지난해는 대전이 세종시를 꺾고 1위에 등극했다. 서울과 수도권으로 인구가 몰리는 인구추이 속에 대전의 혼인율 증가는 뜻밖의 소식이다. 인구소멸을 걱정하는 지방도시가 타산지석으로 삼아 살펴볼 내용은 무엇이 있을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0대와 30대 청년층 유입이다. 대전시 관계자는 “SK온이나 글로벌 바이오기업 머크사 등이 대전으로 옮겨오면서 청년층이 늘었다”고 한다. 대기업의 지역유치가 관건인 셈이다. 지금 대전은 대기업 자회사와 상징기업 등이 늘면서 기업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한다. 대기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상대적으로 집값이 저렴한 것도 젊은이가 오는 중요 포인트다. 대전시는 신혼부부에게 일시에 500만 원을 지원한다. 또 전세자금 대출이자 지원도 은행과 협력해 돕는다. 그밖에 임산부 배려문화 조성 등도 혼인 증가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젊은이가 빠져나가 소멸 위기를 느끼는 전국의 지자체들이 본받을 내용이다. 좋은 기업이 있고 살기좋은 환경만 되면 서울이 아니더라도 젊은이가 찾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4-08

TK당원들의 선택이 국힘 미래 결정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제21대 대통령 선거일이 6월 3일로 확정되면서 57일간의 조기 대선레이스가 시작됐다. 국민의힘은 지지율이 한자릿수인 후보 13~15명이 난립하는데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을 둘러싼 당내 갈등이 아직도 심각해 대선전략을 두고 고민이 많다. 부자 돈 걱정하듯이, 이재명 대표의 일극체제에 대한 비판론 확산을 우려하는 민주당과 대비된다. 한국갤럽이 지난 4일 발표한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를 보면, 국민의힘 대선주자 중 김문수 전 장관은 9%, 한동훈 전 대표 5%, 홍준표 대구시장 4%, 오세훈 서울시장 2%로, 4명을 모두 합해도 20%다. 민주당 이 대표(34%)에 비해 14%포인트나 낮다. 특히 중도층에선 보수진영 주자의 지지율 합계가 14%로 이 대표(38%)와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는 게 갤럽 분석이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국민의힘은 지난 7일 황우여 전 비대위원장을 당 선거관리위원장으로 선임하고 대선체제로 전환했다. 일각에선 지명도가 높은 주자들이 많아 경선 흥행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오지만, 당내 분위기는 가라앉은 모습이다. 절대 강자가 없는데다 당 내분도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내에서는 끊임없이 탄핵 찬반을 둘러싼 책임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친윤(윤석열)계 일각에서는 탄핵에 찬성했던 인사들을 배신자로 낙인찍으며 “경선에 나와선 안 된다”는 주장까지 하는 모양이다. 윤상현 의원은 지난 6일 의원총회 자리에서 당 차원의 탄핵반대 집회를 거부한 당 지도부를 향해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향후 당내 경선과정에서도 ‘탄핵 찬·반’이 주 이슈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민주당 이 대표가 가장 바라는 일이 지금 국민의힘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젠 자연인으로 돌아간 윤 전 대통령의 ‘사저정치’도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4일과 5일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과 권성동 원내대표, 나경원 의원을 관저에서 만났다. 조기대선 얘기도 나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6일엔 변호인을 통해 “늘 여러분 곁을 지키겠다”며 대국민 메시지도 냈다. 당연히 당 안팎에서 조기 대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후 치러진 조기대선에서 친박계 인사들이 박 전 대통령 사저를 연이어 방문하면서 ‘박심(朴心)’ 논란이 인 것과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의 사저정치는 ‘배신자론’ 등장으로 당 내분을 가져올 뿐 아니라, 그의 탄핵에 찬성한 유권자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당별 경선이 끝나고, 본선이 치러지게 되면 보수·진보 강성 지지층은 전에 없이 결집할 것이다. 역대 대선처럼 승패는 중도·무당층이 결정하게 된다. 국민의힘이 본선에서 승리하려면 우선 윤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 대립을 통합해 낼 수 있는 인물이 경선에서 승리해야 한다. 당내 경선 선거인단 수가 서울 다음으로 많은 TK지역 당원들의 선택이 보수정당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변수가 될 것이다.

2025-04-08

화재를 막기 위한 안간힘, 화재막이 풍수

지난 달 21일부터 영남지방에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발생하여 열흘 가량 전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는 유래 없는 재난을 겪었다. 가히 단군 이래 최악의 산불로 기록된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는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집과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이 타죽고, 국가문화유산을 간직한 천년 고찰이 속수무책으로 소실되는 장면을 보면서 모두가 공포에 떨었고, 대재앙 앞에 선 인간의 무기력함에 탄식을 쏟아내야 했다. 불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잘못 다루면 한 순간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재앙이 되고 만다. 그래서 화마(火魔)라 했다. 그러기에 먼 옛날부터 조상들은 화재를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왔다. 서울 광화문 앞에는 돌로 조각한 해태 한 쌍이 있다. 이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다. 조선초 경복궁을 지을 때 풍수지리설에 의해 만들어 세운 것이다. 경복궁의 정남향인 관악산이 불꽃 형상이어서 궁궐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므로 관악산 꼭대기에 연못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넣어 두는 한편, 화기를 잡아먹는다는 전설상의 동물인 해태를 관악산을 향해 세워 둔 것이다. 불은 물로 다스려야 한다. 관악산의 모양이 불꽃 형상이니 꼭대기에 연못을 파고, 수신인 용을 만들어 넣는 한편, 대궐 앞에는 관악산을 향해 화기를 억누르는 해태상을 세움으로써 이중, 삼중의 방재 장치를 해 둔 것이다. 산꼭대기에 소금을 묻어 화기를 누르는 곳도 있다. 해인사가 내려다보이는 매화산 남산제일봉(1100m)에 소금단지 묻는 전통이 그러한 예이다. 불꽃 형상인 해인사 남쪽 남산제일봉의 화기가 사찰로 날아들어 불이 자주 난다는 풍수설에 따라 해인사에서는 1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단오에 맞춰 바닷물로 불기운을 잡는다는 뜻에 따라 소금단지를 묻어오고 있다. 해인사에서는 1695년부터 일곱 번의 화재가 났다. 특히 여섯 번째인 1817년 화재 때에는 팔만대장경이 들어 있는 장경판전을 제외한 모든 건축물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해인사에서 화재를 막기 위해 사용하는 소금은 바닷물을 증발시킨 후 남는 물질이다. 이는 곧 바닷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포항시 흥해읍 북송리는 화재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마을 남쪽 산꼭대기에 간수를 묻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정월 보름날 달이 뜰 무렵, 마을 앞산 정상에 묻혀 있는 간수병을 파내어 간수를 채워 넣는 의식을 행한다. 이러한 의식이 생긴 것은 다음과 같은 유래 때문이다. 조선 철종 때 마을에 큰 불이 나 가옥들이 전소되다시피 했는데, 한 풍수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남쪽 동산이 ‘불 화(火)’자 형상이어서 마을에 불이 자주 나며, 불이 나면 반드시 연이어 세 번 난 뒤에야 그친다”고 했다. 주민들이 어떻게 하면 화재를 막을 수 있느냐고 묻자, 산 정상에 구덩이를 파고 간수를 묻어 화기(火氣)를 눌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해마다 정월대보름 날 저녁에 산으로 올라가 간수병에 간수를 채우고 달맞이를 하게 되었다 한다. 이 유래담에 의하면 마을에 자주 발생하는 화재의 원인을 마을 앞산에서 내뿜는 화기 때문으로 여기고, 그러한 화산(火山)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간수를 묻는다는 것이다. 마을의 화재를 막기 위해 간수나 바닷물을 병이나 단지에 묻는 의식은 포항시 송라면 광천리, 영덕군 남정리 등지에서도 발견된다. 북송리에서는 지난해 대보름날 묻은 간수병을 이듬해 대보름날 파 보는데, 병 속의 간수가 많이 줄었을 경우 지난 해 많이 가물었다고 인식하며, 앞으로 시절이 좋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그런 해에는 마을 사람들이 특별히 행동을 조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간수 묻기가 방화(防火)와 함께 한해(旱害)를 막기 위한 기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화재와 가뭄은 다 불의 기운이 강한 데서 생기는 현상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서는 풍수상 화기가 강한 곳에다 바닷물을 묻어 화기를 눌러야 한다는 의식이 반영된 모습이다. 박창원수필가 사람들은 바닷물이 화기를 누르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간수가 늘 차 있어야 한다고 보고, 해마다 정월 보름에 간수를 보충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간수는 소금에서 추출한 물이지만 엄연히 바닷물이다. 그러나 간수병에 들어가는 간수는 평범한 바닷물이 아니다. 그 물은 용의 신비스런 생명력을 간직한 신격화된 물이다. 따라서 간수는 살아 있는 용으로서, 비를 내려 마을에 풍요를 가져다주고 화재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신격의 의미가 있다. 그렇게 보면 간수병은 이 마을을 화재와 가뭄으로부터 지켜 주는 수호신 구실을 해온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신앙도, 현대의 과학화된 장비도 이번의 산불 확산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산불이 번지면 산림에 인접한 어떤 마을도, 그 어떤 사찰도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또 50년 이상 땀흘려 가꾼 울창한 이 땅의 산림이 도리어 재앙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 앞에서 우리는 혼란스럽다.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5-04-08

포어스(4us), 포스코와 한동대의 아름다운 교육기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청명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완연한 봄날이 온 듯하다. 겨울의 초입에 별안간 내려진 12·3 비상계엄령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던 나라가,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현직 대통령 탄핵 인용으로 파면시키자 혼란과 불안이 종식되고 하나씩 제 자리를 찾아가면서 봄날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탄핵 찬반의 대치가 극에 달하고 돌연한 화마의 상흔이 참혹한 가운데 사필귀정의 결정이 내려져서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이제는 암울과 갈등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도와 평온의 일상 속에 저마다 본연의 역할과 과업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본다. 날씨가 맑고 밝아 좋아서 청명(淸明)이라 했던가? 청명절에 날씨가 좋으면 봄에 막 시작하는 농사일이나 고기잡이가 수월해지고 잘돼 그 해의 풍작과 풍어를 점치며, 들판에서는 봄 논, 밭갈이를 하고 어촌에서는 그물코를 손질하는 등 본격적인 생업활동을 펼치게 된다. 일이 비록 작더라도 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듯이(事雖小 不作不成), 봄에 밭을 갈아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곡식이 없어 후회한다(春不耕種 秋後悔)는 의미를 되새기며 시기와 때에 맞춰 일을 하고 준비하곤 했었다. 학업의 시기도 비슷하여 때를 놓치지 않고 배우고 익혀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배워서 남주나’는 말도 있지만, 사람의 일생은 어쩌면 배움의 과정으로 다양한 학습을 통해 성장·성숙하고 나아지며, 배움을 체득하면서 결국 그 자신의 삶을 바꿀 수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배움의 모티브(motive)는 긴요하고 중대하여 어떤 계기나 기회에 배움의 실마리를 찾아 탐구하고 궁구하여 학습효과를 배가시키며 변화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진정 의미 있고 가치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측면에서 지난 주말, 포스코와 한동대가 산학협력을 통해 2년째 펼치고 있는 ‘글로벌 교육기부 프로그램 포어스 제2기 발대식’은 상당히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다문화가정이나 취약계층 청소년들의 진학과 취업을 지원하는 ‘포어스(4us)’ 프로그램은 포스코1%나눔재단의 기부금과 한동대학교의 교육 인프라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고교생 멘티와 대학생 멘토의 1:1 멘토링을 중심으로 학습 및 취업 지원, 진로체험, 방학 진로캠프 등 다양한 테마로 학습활동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즉, 포어스는 서로가 만나 배우고 알아가는 성장 과정으로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고 꿈을 구체화시키며 가능성을 열어가는 큰 힘이라 할 수 있다. 배워서 나눌 수 있고 그러한 나눔의 가치는 더욱 빛나게 된다. 포어스는 배움과 깨달음으로 새로운 꿈을 찾아 함께 떠나는 가능성의 여정이다. 그것은 곧 병아리와 어미닭이 알의 안과 밖에서 부리를 모아 동시에 껍질을 깨어 새 생명이 탄생되는 즐탁동시(559E啄同時)의 계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조력으로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참여와 헌신의 동시성으로 함께 성장, 변화하여 포항지역과 철강분야의 미래 인재육성에 기여하는 포어스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25-04-08

빈국에서 부국의 희망으로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한 나라의 문화와 사상은 혁신의 중요한 토양이 된다. 혁신은 사람의 생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불교가 뿌리 깊이 내린 나라로 국민의 삶과 정신세계,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민의 88%가 테라와다(상좌부) 불교를 믿으며, 태국, 라오스, 스리랑카 등과 함께 남방불교의 기반을 두고 있다. 수도 양곤에 지상 60m의 황금탑으로 유명한 쉐다곤 파고다는 시민들의 휴식처이고, 이승의 고단함은 잠시일 뿐 영생의 행복을 기원한다. 이런 사회문화에 변화와 도전을 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가 P사 미얀마법인을 컨설팅 갔을 때 거리의 모습은 우리의 70년대 수준 정도였다. 트럭에 매달려 출근하는 광경과 동자승들이 줄지어 상가를 들러 보시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다나(dana)’ 사상으로 대표되는 보시와 자선의 미덕이 강조되고 불교 사원과 승려를 지원하는 문화가 강했다. 불교의 업(業) 사상과 무상(無常) 사상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명상 수행이 일반적이고 자기 성찰과 내면 수양이 중시되는 감성적 문화로 보였다. 새마을 운동이 도입되어 밀림의 밀짚으로 지은 초가를 일반 도금판으로 바꾸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미얀마 법인의 제품은 대형 트럭이 줄을 잇고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작업 환경은 열악하고 위험이 상존해 ‘안전하고 깨끗한 작업장 만들기’라는 기치를 걸고 시작했다. 개선 마인드 셋을 위한 교육 때 일 방향 보다 다양한 질문을 통해 공감대 형성에 집중했다. 변화에 지극히 소극적이든 사람들이 ‘나와 동료를 위한 개선 활동’이라는 인식이 들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 직원들을 5~8명씩 활동팀을 조직하고 자신의 작업장을 깨끗하고 안전하게 개선하는 활동들을 사진으로 공유하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활발히 움직여 공장 전체 Clean 작업장을 이룰 수 있었다. 월급을 받으면 한 달 살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법인장이 ‘지금 이 시대에 한국에 태어나 살고 있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라’라는 말에 조금은 의아해 생각했다. 자동차를 자체 생산하지 못하는 미얀마 경제 구조에 인근 국가의 중고차를 사들여 이동 수단으로 삼는 현실이었다. 수도 양곤에서 22년된 차를 타고 비포장 도로 1시간 40여 분 달리니 시골 마을이 나왔다. 외국인에 호의적이었으나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니 수질과 거주 환경 등이 열악했고 평균 수명이 세계에서 짧은 나라에 속한다고 했다. 사회 의료시스템이나 먹는 물과 생활 환경, 경제적 한계 등이 수명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양곤 수도 시내 큰 호수 두 곳이 있고, 호수 언덕에서 저녁을 맞이하는 분위기는 색다르게 느꼈다. 하늘은 별이 초롱초롱 하고 고요한 호수 분위기는 우리 시골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람과 조직을 변화하는 일도 잊은 채 미얀마의 시골 정취에 취했다. 기업 혁신은 종교, 사상 등 구성원의 생각을 지배하는 요인이 토양이 되고 토양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혁신은 성공 할 수 없다.

2025-04-08

문제는 경제야, 바보

지난 수개월 우리 국민들은 근래에 없었던 정치적 혼란으로 극심한 심적·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국내에서는 대통령 탄핵문제가 온 나라를 뒤흔드는 동안 정치·외교적 난제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우리가 잃었을 ‘기회비용(국익)’은 계산 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다. 국외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다 미얀마 지진까지 덮쳤다. 무엇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전쟁 버전2.0’의 본격화로 세계 주식시장이 팬데믹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하고 있다. 7일에도 주식시장은 오전부터 경제의 불확실성을 우려한 투매로 한때 매도사이드카가 작동하는 등 혼란속에 마감했다. 코스피와 코스닥 모두 전일 대비 5% 넘게 하락했다. 주가 하락은 단지 투자자의 손실에 그치지 않는다. 그로인한 기업의 가치가 떨어지면 신사업 추진이나 투자·고용의 여력도 줄어들어 다시 경기가 악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제 국민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돼 공석이 된 대한민국의 사령탑을 조만간 뽑게 될 것이다. 대선에 뛸 많은 여야 인사들이 거론되지만, 지난 6개월을 돌아볼때 국가의 최대 핵심 난제가 경제라고 알고있던 사람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현재 세계 지도자들의 최우선 행동강령은 ‘경제’다.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당시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조지 부시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된 가장 핵심 키워드를 꼽으라면 역시 “문제는 경제야, 바보”(It’s the economy, stupid)일 것이다. 때로는 ‘경제야, 바보(The economy, stupid)’란 말로도 사용됐다. 이 캐치프레이즈는 당시 미국 유권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경제였다는데 착안한 당시 클린턴 선거캠프의 전략가 제임스 카빌(James Carville)이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최대의 난제는 무엇일까. 당연히 트럼프 관세폭탄이 촉발한 세계적인 경기불황의 가능성 등 ‘경제문제’이다. 우리 경제는 중국과 미국의 파워경쟁에 시달리면서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질 정도다.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바보’다. 이번에 대선 주자들은 또 어떤 공약을 내세우며 국민들에게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읍소할 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경제의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고 즉시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경제공약들이 어느 선거캠프에서든 꼭 나오길 기대한다.지금의 난관을 극복해 기업과 가계, 다시말해 국민경제를 되살릴 대안이 절실하다. 한국의 대내외 경제 상황이 어떤지는 국내외 투자자들이 시장을 통해 계속 말하고 있다. 지난 1일 코스피는 2521.39로 마감된 이래 7일까지 4영업일 연속 하락세를 지속했다. 7일 오후 3시 30분 코스피 지수는 2328.30으로 4일간 7.7% 빠졌으며, 코스닥 시장도 같은 기간 5.8% 하락했다. 외환시장의 원·달러환율은 분기별 종가 기준으로 보면 1400원대로 정착되고 있다.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우리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보다 더 심각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선 주자들이 공약을 내세우기에 앞서 반드시 이 말 한마디는 기억했으면 한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

2025-04-07

윤석열과 ‘불치하문’

홍성식(기획특집부장) 4월 4일 오전 11시 22분부로 윤석열 씨는 이름 앞에 ‘전 대통령’이란 단어를 붙이게 됐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 후 최고 권력자에서 필부(匹夫)의 한 사람으로 돌아간 것. 늦은 나이에 사법시험을 거쳐 검사가 되고,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국민적 관심을 모았으며, 영화를 방불케 하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 대통령에 오른 그는 임기 5년을 채우지 못하고 권좌에서 밀려났다. 지난해 12월 3일 밤 갑작스런 비상계엄 선포와 이어진 국회의 탄핵 의결, 탄핵 찬성과 반대를 놓고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국민들, 그리고 마침내 헌법재판소의 판결. 어느 때보다 긴장감 넘치는 숨 가쁜 시간이었다. 적지 않은 미래 계획과 발전 정책을 세우고 시작된 윤석열 정부가 허망하게 무너진 이유는 뭘까? 국민들로선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을 터.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윤 전 대통령의 통치가 ‘귀’가 아닌 ‘입’으로 행해졌다는 게 아닐지. 남의 이야기를 진지한 자세로 듣고 거기서 배울 것을 찾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인의 기본이다. 그래서다. 중국 고대 철학자들은 “백성의 고충을 듣는 귀를 가지는 것이 권력자의 최고 덕목”이라 설파했다. 명령하는 ‘입’이 아닌 듣는 ‘귀’를 가지기 위해선 불치하문(不恥下問)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묻는 걸 부끄러워해서는 현명한 왕도, 좋은 대통령도 될 수 없는 법. 아집과 독선만으론 타인을 설득할 수 없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불치하문의 태도’를 가졌던가? 돌아보니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모든 몰락에는 이유가 있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4-07

어지러움 속에서, 시간을 들여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12월 3일부터 4월 4일, 넉 달의 시간이 흘렀다. 나 또한 평온한 일상만을 살아갈 수 없었다. 일상 속에 어떤 비극의 기운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늘 함께 한 나날들이었다. 어지러움 속에서 어떻게든 해야 할 것은 해내야 했기에 공부든 글이든 전에 없이 무겁고 어렵게 다가오기도 했다. 12월, 김윤식의 카프 연구에 대해서는 끝내 완결된 글을 쓸 수 없었다. 아제르바이잔에 가서 발표한 동아시아론에 대해서도 주석을 붙일 여유를 얻지 못했다. 12월에서 1월까지 앞이 캄캄하다시피 했다. 나라의 앞날이 그렇게 암울해 보일 수 없었다. 2월에 간신히 ‘맹목과 통찰-임화의 해방공간’을 쓰고, 시인 김규동을 김기림에 연결지어 발표한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임화의 해방공간의 활동에 대한 조명은 지금이 곧 해방공간을 방불케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 교훈과 힌트였다. 김규동은 김기림 문학이 해방과 6·25 전쟁 이후의 문학사에 연결되는 중요한 고리요 매개 역할을 했다. 하나 더, 가람 이병기 선생이 해방 직후에 펴낸 ‘가루지기 타령’ 교주본을 검토해 본 것은 현대 소설사 인식에 더할 수 없는 도움이었다.‘가루지기 타령’의 ‘리얼리즘’은 ‘소설’이 시대를 어떻게 투영할 수 있는지, 그 수사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어지러움 속에서 억지로 쥐어진 것 같은 공부들을 해나가는 가운데 한 가지 얻은 생각이 있다. 역시 공부는 공부대로 침잠하는 시간 없이는 충분한 논리와 증명에 이를 수 없음이다. 어떤 빛살 같은 영감을 얻었다 해도 이에 빛나는 형체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무를 유로 변신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시간을 충분히 들이지 못한 논리와 증명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다. 결국 그 미진함에 애를 태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간을 쓸만큼 써 매달리지 않는 한 허점은 언제까지나 제대로 메울 수 없다. 이제 모든 것이 막막해진 시점에 나는 최근 공부의 ‘마지막’ 주제에 도전한다. 카프카의 작품들에 대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 권말에 일종의 비평적 주석을 가했다. 카뮈에 따르면 카프카 문학은 현대의 인간조건을 ‘상징’으로 제시하는 소설적 문법의 한 전통을 가리킨다. 이 소설적 문법을 익히 알고 있던 한국의 작가는 장용학과 최인훈이었는데, 아주 최근에 이 소설적 전통에 접맥된 한 사람의 남성 작가가 나타났다. 이 비평적 주제를 충분히 소화해 내려면 카프카와 카뮈를 새롭게 읽는 작업을 피할 수 없다. 지난 해는 그렇지 않아도 카프카 서거 100주년이었다. 난공불락의 요새 카프카의 ‘성’, 여기서 카뮈의 ‘이방인’으로 연결되는 계선에 대한 공부 없이 제대로 된 글은 쓰이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카뮈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 문학의 진로를 막아섰던 난해한 ‘성채’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느낌, 그 시절 거기에 카프카도 함께 서 있었다. 다시 한번 시간을 실하게 들여 공부해야 하리라. 지독한 시대의 어지러움 속에서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2025-04-07

사유의 부재, 그 위험한 종착역

한때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는 존재였다. 말에는 질문이 깃들었고, 눈에는 의심의 빛이 머물렀다. 그러나 이제 말하되 묻지 않고, 듣되 반성하지 않으며, 결론을 구하되 성찰하지 않는다. 도시는 여전히 북적이지만, 그 안의 정신은 고요히 사라졌다. 우리는 정보를 삼키지만, 그것을 씹지도, 되새기지도 않는다. 진실은 속도의 희생양이 되었고, 깊이는 비효율이란 이름으로 밀려났다. 이제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가 보다 누가 말했는가에 반응하고, 무엇이 진실인가 보다 나의 기분에 맞는가를 묻는다. 우리는 진영이 요구하는 확신 속으로 조용히 길들여지고, 수용되고, 마침내 사라진다. 생각! 인간이라는 종들로 하여금 창백한 푸른 점의 주인으로 우뚝 서게 한,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이 신비한 능력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생각은 나를 천국과 지옥을 하루에도 수천 번 왕래하게 하는 환상특급이다. 내가 생각이요, 생각이 나다. 환상특급의 승객에게는 티켓예약이 필요 없다. 목적지도, 승하차 시간도 랜덤이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탑승하고, 하차하게 된다. 휴게소에 들러도 쉴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출발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다음 역에서 내려야 돼요!’라는 절규를 들어주는 승무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도 풍경도 알 수 없는 이 정거장에서 저 정거장으로, 빛의 속도로 돌아다닐 뿐이다. 생각이라는 환상특급에 승차하지 않을 권리 따위는 민주공화국 헌법 조항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대부분은, 생각이라는 환상특급의 ‘승객’으로, 가끔씩은, ‘기관사’로 탑승한다. 환상특급의 기관사는 어떻게 열차를 운전하여야 하는가. 기관사로서의 역할이 주어진 경우의 생각. 그것은 ‘열차를 안전하게 목적지로 운행하기 위하여,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리라. 바른 생각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견해를 내려놓고 생각하기!’ 이것이 전부이다, ‘견해들-이데올로기, 편견, 개똥철학, 증오, 시기, 따위들’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견해로부터 시작한 생각은 이해타산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라. 견해라는 기초위에 세워진 생각이라는 건축물은 욕망과 집착이라는 이름의 방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된다. 그 방을 떠도는 증오, 폭력, 잔인성이라는 유령들을 보라. 사유의 부재라는 열차는, 편견과 증오를 자양분으로 피어난 악의 꽃밭을 지나 폭력과 잔인성으로 물든 종착역에 도달한다. 한나 아렌트가 본 악은 왜 그다지도 ‘평범’하였을까. 600만 유대인을 살상한 전체주의의의 근원은 사유의 부재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분노가 진정 나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흘린 독을 받아 삼켜서인지 사유해야 한다. 편견과 증오로 범벅된 몰염치의 광장에서 탈출하자. 질문하고, 의심하고, 천천히 결론에 이르는 길. 이 길만이 우리의 환상특급을 안전하게 목적지로 데려갈 수 있으리라.

2025-04-07

생명의 등불

강길수 수필가 1시간만 지나면 2025년 4월 3일이 된다. 우리나라의 올해 3월은 지금껏 겪은 같은 달 중에 ‘가장 잔인한 달’이 되고 말았다. 역대 최악의 산불 때문이다. 미국 시인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그의 시 ‘황무지’에서 읊었다. 이제 한국은, ‘3월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속말이 올라온다. 산불 피해자와 진화대원, 봉사자, 공무원, 온 국민이 함께 절규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잔인한 3월을 우리 사회가 만들고 말았다는 사실 앞에 멍할 뿐이다. 보도에 따르면, 3월은 24일 오전 6시까지 전국에 43건의 산불이 났다. 하순에 접어들며 21일 산청, 22일 울주, 23일 의성 순으로 큰 산불이 발생했다. 산불 진화에 연일 사투를 벌인 결과, 월말이 되며 주불은 순차적으로 다 끄고 잔불 정리에 단계에 들어갔다. 4월로 바뀌며 잔불 재발화 소식이 없으니 이젠 다 껐나 보다. 우리 경북의 경우, 4월 2일 밝힌 잠정 산불 피해 집계현황은 사람 사망 26명, 산림 4만5157ha, 주택 3766동, 농작물 3414ha, 시설 하우스 364동, 축사 212동, 농기계 5506대, 어선 16척, 문화재 25개소로 밝혔다.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 규모다. 불길에 유명을 달리한 분들, 다친 분들, 집과 농작물, 어선을 잃은 분들의 불행을 어떻게 위로, 치유해 나아가야 한단 말인가. 사람들의 사소한 실수, 방심, 무심, 건조한 날씨, 거센 바람, 또는 알 수 없는 원인이 모여 역대 최악의 초대형 산불로 커지고 말았다. 우리 사는 세상은 왜 이리도 처절한 인과(因果)로 얽혀 있을까. 기상학자 로렌즈(Lorenz, E. N.)의 ‘나비효과’란 말이 대변해 주듯 지구상 아니, 온 우주의 모든 것은 한둘의 사소한 요인이나 실수, 의도가 엄청난 해악을 끼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교의 원죄 교리만큼이나 인간에겐 억울한 현상이다. 엘리엇은 시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1차 세계대전 후 유럽 문명의 붕괴와 인간 존재의 허무를 다루며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더하여 전통과 현대의 충돌, 신화와 현실의 교차를 통해 정신적 황폐와 구원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반면, 우리 박목월은 시 ‘4월의 노래’에서 멀리 떠나와 비를 타거나, 별을 볼 때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렇다. 사람은 지구촌에 생긴 이래 끊임없는 자연재해와 인재(人災)의 재난을 겪으며 생존, 발전해 왔다. 재난을 그냥 당하며 존재해 왔을 뿐인 동식물과 다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삼킬 듯이 불탔던 산불로 죽을 만큼 쓰라리고, 괴롭고, 슬퍼도 우리는 다시 4월을 맞는다. 4월에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또 힘을 내어 일어나야 한다. 불탈 때부터 시작된 각계의 온정의 손길들이 희생자, 부상자들과 재산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도와주고 있다. 엘리엇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같이 되어버린 우리의 ‘가장 잔인한 3월’. 피해자들을 돕는 봉사자들 손길이 번지며 치유의 4월이 되고 있다. 이 땅에, 목월과 우리가 염원하는 ‘생명의 등불을’ 계속 밝혀 들기 위하여….

2025-04-07

아직 ‘계엄의 바다’ 못건넌 TK… 현안은 어쩌나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선고로 대구경북(TK)은 정치·경제적으로 아노미 상태에 직면해 있다. TK 현역 의원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친윤(윤석열)계로 분류되는데다, 대부분 지역민들도 아직 ‘계엄의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있다. TK지역의 이러한 강성 보수성향은 두달 뒤로 다가온 조기대선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고, 이 지역 인적·물적 자본확충을 위한 각종 사업과 정책추진에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조기대선이 현재 거론되는 대로 6월 3일 치러진다면 당장 다음달 12일부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뽑는 당내경선은 다양한 변수가 있겠지만, 본선에선 중도층 민심이 판세를 좌우할 것이라는 사실은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일찌감치 ‘중도·보수’를 표방하고 나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그동안 탄핵정국 때처럼 강성지지층을 의식해 중도층 민심 흐름을 외면하다가는 이번 4·2 재보궐선거에서 나타난 ‘TK지역만의 승리’라는 성적표를 또 받게 된다. 국민의힘 경선 후보들이 윤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보수·중도층의 찬반 대립을 어떻게 통합해 낼지는 모르겠지만, TK지역 당원들의 표심은 경선결과에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TK지역이 탄핵 소추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견지한 주자(안철수·오세훈·유승민·한동훈)들과 탄핵 반대를 고수한 주자(김문수·이철우·홍준표)들 중 어느 편에 설지 주목된다. 윤 전 대통령 파면으로 TK지역의 미래가 걸린 사회간접자본(신공항건설, 대구 군부대이전사업, 포항 영일만 앞바다 유전개발 등) 확충과 규모의 경제(TK 행정통합) 실현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 지역 현안추진을 주도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된데다, 홍준표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마저 대선출마를 위해 사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홍 시장은 그동안 조기 대선 시 ‘시장직 조기 사퇴’를 여러 차례 밝혔고, 이철우 지사도 지난 5일 SNS를 통해 “자유우파가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저부터 온몸을 바치겠다”며 출마의지를 드러냈다. TK 행정통합은 탄핵·계엄정국 속에서 브레이크가 걸린 지 오래됐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올해 말을 TK행정통합 특별법 제정 마감 시한으로 잡고 있지만,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와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진전이 없는 상태다. 17조4000억 원이 들어가는 신공항 건설 사업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재원마련을 위한 법적 근거인 ‘TK신공항특별법 2차 개정안’은 국회 국토위 교통법안심사소위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거대 야당을 설득하기가 어려운데다, 재원확보의 결정권을 쥔 기획재정부도 난색을 표명하고 있는 상태다. 대구 도심 군부대 이전 사업도 직격탄을 맞게됐다. 사업 성격상 국방부와의 긴밀한 협조가 필수적인데, 계엄 사태로 김용현 전 장관이 면직된 상태라 사업추진이 불투명하다. 포항 영일만 앞바다 가스전 개발사업(대왕고래 프로젝트)도 좌초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첫 시추공 주변의 다른 6개 유망구조에 석유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추가 시추를 이어나가겠다는 방침이지만, 민주당은 프로젝트 자체가 사기극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현안들은 TK지역으로선 미래가 걸린 문제지만, 조기 대선 정국에서 유력 대선주자들이 적극적으로 공약하지 않으면 해법을 찾기가 어렵게 됐다. 가장 큰 문제는 사실상 국정을 장악한 민주당이 대놓고 TK지역을 패싱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북 북동부지역의 끔찍한 산불피해 지원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안 처리를, 민주당이 ‘받고 더’ 식의 포커게임 하듯이 제동을 건 게 단적인 사례다. 만약 산불피해가 ‘야당텃밭’에서 발생해도 민주당이 이런식의 태도를 취하겠느냐고 섭섭해하는 TK지역민이 많다. 이번 조기대선 당내 경선과정에서 TK지역 유권자들이 어떤 후보를 선택하느냐가 이 지역 미래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2025-04-06

교양과 권력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보스턴과 뉴욕에서 출간된 ‘웹스터 사전’(1995)에 나오는 교양(culture)의 두 가지 정의(274쪽)는 다음과 같다. “교육을 통해 사회적, 도덕적, 지적인 능력을 발전시키는 행위”가 그 하나이고, “지적이고 미학적인 훈련으로 형성된 고도의 세련과 취향”이 그 둘이다. ‘우리말 큰사전’에 나오는 교양의 정의는, 미안한 말이지만, 너무 터무니없기에 도저히 인용할 수 없다. 첫 번째 정의에 따르면, 교양은 가정과 교육기관이 담당하며, 세 가지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에 주안점이 있다. 사회적 능력은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영위 능력을 가리킨다. 나와 내 아내, 자식들만 소중한 게 아니라, 남과 그 가족 역시 같은 정도의 가치와 의미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을 전제해야 사회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능력은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최소한의 양심과 윤리를 소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와 내 아내와 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동물적’ ‘가축적(家畜的)’ 사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지나친 탐욕과 억제할 길 없는 분노(격노)를 자제하여 타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지적인 능력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21세기는 지식과 정보가 지구촌 전체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자리하고 있는 경이로운 시대다. 사유와 독서, 토론과 글쓰기 같은 작업을 일상적으로 유지해야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의미의 지적인 능력이 교양에 속한다. 두 번째 교양의 정의는 각자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이기에 논외로 한다. 새삼 내가 교양을 운운하는 데에는 분명 까닭이 있을 터다. 지난 4일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인 전원일치로 현직 대통령을 파면했다. 이로써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파면 이후 8년 만에 다시 한국 대통령이 파면되는 우울하고 참담한 헌정사 기록이 남게 되었다. 더욱이 수인번호 503호 박근혜 이전의 이명박은 2018년 각종 비리로 투옥되어 수인번호 716호를 부여받고 감방살이를 하다가 2022년 특사(特赦)로 풀려났다. 이른바 자칭 보수 출신 전직 대통령 2인이 파면당하고, 1인이 징역 17년을 선고받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왜 이들 최고 권력자는 파면과 형사재판 그리고 구속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일까?! 그들의 공통점은 무교양,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했다는 사실이다. 권력의 사유화를 통해 물적인 이권을 취하고(이명박), 세월호 대참사로 고교생 딸 유민을 잃어버린 아버지 김영오씨의 대면 요청을 차벽(車壁)으로 막아버리는 냉혹함을 과시하고(박근혜), 입만 벌리면 구라로 일관하면서 검찰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흔든 파렴치한(破廉恥漢)(윤석열). 저급하고 부도덕하며, 불의하고, 역사의식도, 국민을 최우선으로 받드는 공동체주의도 없는 자들을 수장으로 떠받들어 온 타락한 정치세력의 중핵 역시 똑같은 수준의 인간들이다. 이참에 진짜 사회 대개혁을 실행하여 최소한의 교양을 갖춘 이들만을 정치 지도자로 삼았으면 한다.

2025-04-06

경제가 먼저다

우정구 논설위원 탄핵 정국이 막을 내렸지만 한국 경제가 걱정이다. 한국 경제의 비관적인 전망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OECD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1.5%로 수정 발표했다. 이는 작년 12월 발표한 전망치 2.1%보다 0.6% 포인트 하락한 수치다. 그럼에도 최근 글로벌 투자은행인 JP모건은 한국경제의 성장률을 1.2%에서 0.9%로 낮추었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확산되면서 경제 전문기관의 경기 전망치가 수시로 바뀌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1.8%로 제시한 바 있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 이 선을 지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난 5일부터 트럼프 대통령 발 관세전쟁이 시작됐다. 미국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주요국을 상대로 25%의 상호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발표로 세계가 비상이다. 세계경제 성장 전망치가 0.49%나 떨어질 거란 예측도 나왔다. 한국 경제계도 초비상이다. 한국은 GDP의 40%를 수출에 의존하는 나라다. 미국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수출시장이다. 지난해 무역흑자만 557억 달러가 발생한 나라다. 이번 조치는 미국과의 무역마찰 수준을 넘어 한국경제에 충격적 타격을 준다는 면에서 긴장감이 높다. 정치적 혼란을 겪는 한국경제는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윤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경제계는 “경제위기 극복에 힘을 모아달라”고 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특히 소상공인단체는 내수부진으로 속절없이 무너지는 소상공인을 도와 달라고 했다. 국민에게 민생없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보다 경제가 먼저임을 알아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4-06

노래는 늙지 않는다

어느 가을날, 한 문화재단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노인을 대상으로 한 작사 클래스를 함께 개발하고 운영해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해 주셨다.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지역의 문화재단이니만큼 지역에 거주하는 예술인들의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있을 텐데, 어째서 그들이 아니라 타지역에 사는 나에게 그러한 제안을 건네는 것인지. 재단 직원은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이 노인들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맡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고 말했다. 남들이 마다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나는 잠시 생각해보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고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두 가지 정도가 떠올랐는데 첫 번째는 세대차이로 인한 소통의 문제였고, 두 번째는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보다는 배움의 속도가 느리다는 문제였다. 그런데 내게는 그것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먼저 소통의 문제는 내가 우리 할머니와 오랜 시간 같이 살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극복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배움의 속도가 느리다는 점은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진행하면 수업의 회차는 늘어날 것이고 그렇다면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강의료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재단의 제안을 수락했고, 총 16주에 걸친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첫 시간, 수강생들을 처음 만나며 느낀 점은 생각보다 젊다는 것이었다. 나는 노인이라고 하면 우리 할머니처럼 등이 굽고 머리가 새하얀 분들을 생각했는데, 딱 우리 아버지 연배인 65세부터 75세 사이의 분들이 주로 모여 주셨다. 사실 우리 아버지도 따지고 보면 노인으로 분류가 될 연세이신데 내가 그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많게는 80대 초반의 수강생도 계셨는데, 옷차림도 세련되고 활력도 넘치셔서 전혀 그 연배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려온 노인의 이미지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노인은 과거 우리가 생각하던, 맥없이 떠날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전히 젊은이들 못지않은 에너지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내가 새로 만난 노인 수강생들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차근차근 노래를 만들어갔다. 개강 전에는 사실 선생님들께서 어떤 이야기를 가져오실지에 대해서 큰 기대가 없었다. 대부분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거나 무색무취한 일상의 나열일 뿐이겠지. 그런데 그것 역시 나의 오산이었다. 선생님들이 가져 오신 이야기들은 그들의 삶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한 선생님은 자신의 이상형 배우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가사로 만들어 오셨다. 또 어떤 선생님은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다시 한 번 헌신적으로 사랑을 해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시기도 했다. 노래를 만들던 시기가 가을이어서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노래하신 선생님들도 있었다. 외롭다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열망이다. 노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여성이고 남성인 이 분들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청춘들에게 뒤지지 않는 뜨거운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젊은 나로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깊이 있는 이야기들 들려주신 선생님들도 있었다. 사별한 남편에게 건네고 싶은 말들을 적어 내려간 노래는 내가 쓴 어떤 이별이야기보다도 절절했고 한편으로 뜨거웠다. 어떤 선생님은 하늘에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며 자신이 경험했던 전쟁의 참혹함을 떠올리셨다. 그리고 지금 한가로이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는 평화로움에 감사하는 내용의 노래를 만드셨다. 수많은 경험들이 켜켜이 쌓이지 않는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노래가 되었다.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이다. 노인 복지는 아주 중요한 이슈이다. 나는 노인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노인들을 떠날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로 여기고 있다. 아무런 동력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사회가 떠안아야 하는 비용으로 취급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만난 노인들은 여전히 젊은이들 못지않은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면서, 젊은이들은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 분들이었다. 아직 맡을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이 있는 분들이다. 나는 사회가 이런 분들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서로에게 배우자는 취지에서였다. 우리는 정말로 서로에게 가르칠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 내가 만난 노인들은 가르치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어떤가.

2025-04-06

희망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지난 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인용했다. 멈춰 있던 제도가 다시 작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는 이 사회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나아가 민주주의가 더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발화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감각할 수 있었다. 언제나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온 주체였다. 광장에서, 일상에서, 제도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그렇게 축적된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결정 또한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에겐 여전히 오래된 피로와 불신이 남아있다. 법적 판단이 우리 앞에 놓인 모든 불안을 해결해줄 수는 없다. 신뢰는 단번에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끝이 아니라 이야기를 시작하는 자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돌고 돌아 다시 출발선에 섰다. 신발끈을 꽉 묶고, 앞으로 다가올 다음 장을 펼쳐야 한다. 그것은 글을 쓰는 과정과도 닮아 있다.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언제나 도입부에선 망설임이 먼저 떠오른다. 막상 쓰기 시작한 서술도 자꾸 지우게 된다. 적확한 표현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마음과 언어 사이의 거리감은 좀처럼 좁히기 힘들다. 본격적인 흐름으로 나아가기까지는 무수한 시행 착오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만큼은 다르다. 마침표가 가까워졌다는 확신은 이전에 쌓아 올린 문장들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무언가를 끝냈다는 안도와 함께 해방되는 듯한 감정이 따라온다. 우리는 오늘의 장면을 마지막처럼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정말 마침표를 찍어도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일까? 누구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겨우 첫 문장을 넘긴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불안하고 막막한 것은 당연하다. 방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무게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은 구체적인 상상에서 시작된다. 더 나은 사회를 떠올리는 바람. 아직 오지 않은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태도다. 상상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바꿀 수 있다’는 상상은 증명되었다. 그것은 낙관이 아니라 일종의 증거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제도의 권위가 아니라 결국 시민의 손이라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오랜 시간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해왔다. 추운 날 광장에서 함성을 보탰고 조용한 일상에서도 무게를 견뎠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말 없는 연대 안에서 지난한 시간을 보내왔다. 실망과 피로가 반복되며 어떤 희망에도 쉽게 기대지 않는 태도가 굳은살처럼 마음에 자리잡을 때도 있었다. 그것은 냉소였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태도였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회복을 다시 배워야 한다. 들끓는 다음은 이성의 테두리에 담아내고 무뎌진 감정은 날카롭게 벼려야 한다. 상처는 질문이 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의문을 쏟아냈다. 사유가 공론의 언어로 이어지고 제도로 연결될 때 희망은 지속된다. 정치가 제때 응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반복되는 피로 속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시민이 쓴 문장을 정치가 지워서는 안 된다. 사사로운 욕망이 우리의 언어를 가로채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대통령이 헌재 판결로 물러난 것은 우리 헌정사에서 두 번째다. 그 숫자의 무게를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단 한 번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결코 가벼운 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숫자는 우리가 마주한 실패의 수가 아니다. 쉽지 않은 세상을 쉽지 않게 바꿔 가는 시민이 존재해 왔다는 증거다. 법이 움직이기 전 움직인 것은 언제나 우리들이었다. 동시에 우리는 어떤 결론도 쉽게 믿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마지막 문장은 계속하여 번복되어 왔고 너무 자주 진실이 지연되어 왔다. 가끔은 말보다 침묵이 더 정직하다고 믿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써 내려갈 것이다. 그것은 환호도 단죄도 아니라고. 결국 일상의 지속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단어를 놓아갈 뿐이다. 우리 사회의 다음 장면이 희망의 형태를 띠고 있기를 바란다. 바꿀 수 있다. 바로 이 첫 문장을 토대로 우리는 다음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희망은 언제나 이러한 문장들 위에서 시작되었다.

2025-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