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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안 보고 내린 판결이라지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25-10-30 17:53 게재일 2025-10-3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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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라 변호사

“변호사님, 판사님이 저희가 낸 서면을 안 보신 거 같은데요”

변론 기일에 법정을 나오며 의뢰인으로부터 흔히 듣는 말이다. 준비서면에 적어 낸 것인데 판사가 이를 모른 채 묻는다거나, 이미 낸 증거인데 이에 대해 판사가 모르는 듯 보이면 당사자들이 묻곤 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판사님들이 사건이 많으신데다 우리가 서면을 낸 지도 얼마 안 돼서 그렇다고, 판사님들은 판결문 쓰시기 전엔 무조건 모든 서면과 증거를 꼼꼼히 보시니까 우린 그전까지 유리한 주장과 증거를 잘 내면 아무 문제 없다고 의뢰인을 다독이곤 한다. 이런 나의 판사를 위한 변론은 정말 그렇다. 재판 중엔 판사들이 기록과 증거를 확인하지 못한 듯 보였던 사건도 나중에 판결문을 보면 최종 판단의 근거가 된 증거와 주장이 무엇인지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렇듯 대부분의 판사들은 당사자가 낸 서면과 증거들, 변론전체의 취지를 정밀히 검토해서 판결하고 판결 이유를 구성한다는 것을 필자는 13년의 변호사 생활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의뢰인들이 이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판사는 기록 안 보고 판단한다면서요. 우리도 저 판사랑 잘 아는 전관 변호사나 연수원 동기를 선임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대법원 판사들도 기록 안 보고 판결하던데요’

할 말이 없다. 더 이상은 변호사 입장에서도 판사님을 위해 변론을 펼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판사 중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대법원 판사들이 기록을 보지 않고 판결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만 전 국민이 보고 말았으므로.

지난 대선기간 지지율 1위를 달리던 한 대선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기록이 인계된 지 이틀 만에 평결을 내렸다. 평결은 최종 판단을 끝내는 결정이다. 종이로는 트럭 한 대에 가득 실릴 양이라는 6만페이지가 넘는 기록이 온 지 이틀만에 최종 판단을 했다는 것은 기록을 안 보고 판단했음을 자인하는 꼴이었다. 심지어 민사소송법상 법률적 판단만 가능한 대법원이 사실심 판단이 의심되는 판단을 한 것이었고, 무려 항소심 법원의 무죄 판단을 유죄로 180도 뒤집는 내용의 판단이었다. 그런 중차대한 판단을 기록도 안 보고 이틀 만에 해버린 것이 잘못이라는 걸 대법원 스스로도 알긴 알았던 것일까. 처음엔 당당하게 “대법관들이 전자기록으로 다 보고 한 평결이다”라고 했던 천대엽 대법관은 최근 “대법관들이 기록을 다 봤다는 것은 나의 추정이었다”라고 말을 바꿨다. 얼마 전 국회 법사위에 나온 대법원장은 기록을 언제 보았냐는 국회의원의 질문엔 입을 꾹 다물고,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다가 갔다.

변호사 입장에선 꽤나 절망적이다. 판사가 기록을 안 보고 판단한다면 무엇을 믿고 재판을 받아야 하나. “내가 목숨 걸고 악착같이 붙들어야 할 것은 그 무엇이 아니라, 법정에 있고 기록에 있는 다른 무엇이라 생각합니다”라고 한 고 한기택 법관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도 아직 우리 법원엔 이렇게 “목숨 걸고 재판하는 법관”이 더 많을 것이라고 믿어보는 것이 지금의 유일한 희망이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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