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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

반려 인구 1500만의 시대, 이제 우리도 인구 셋 중 하나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동물보호와 동물복지를 위한 제도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개 식용금지법이 2027년 2월부터 전면 시행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2월, 이전보다 강화되는 동물보호 방안들이 담긴 ‘동물복지 종합 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세부적인 동물보호 방안들을 아우르는 법 개정안이 하나 있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를 규정한 민법 개정안이다. 21대 국회 본회의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되었던 이 법안은 작년 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다시 발의되었지만 여전히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이 한마디가 법전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법률관계를 구성하는 권리라는 것을 다룬다. 우리 민법은 이 권리의 주체를 자연인과 법인으로, 권리의 객체는 물건으로 한정한다. 도롱뇽이 원고가 되어 제기되었던 천성산 터널 소송이 각하되었던 이유도 도롱뇽은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권리의 객체는 유체물 및 전기 기타 관리할 수 있는 자연력인데, 이것을 민법은 ‘물건’이라고 칭한다. 동물은 법률적으론 권리의 객체 곧 물건일 뿐인 것이다. 동물이 책상, 탁상시계와 같은 물건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주인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던 요크셔테리어를 차량으로 충격해 피해 견이 평생 치료받아야 할 뇌 손상 상해를 입은 사건에서 법원은 가해자에게 해당 연령의 요크셔테리어 종의 시가 약 100만 원과 정신적 손해배상금 50만원을 지급하라고 명할 뿐이었다. 피해 견은 15년 이상을 함께 산, 주인에게는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반려견이 평생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어도 해당 견종의 시가를 넘는 치료비는 배상받을 수 없다. 물건을 손괴했다면 물건의 시가를 넘지 않는 한도에서만 수리비를 배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과 동물을 똑같이 취급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의 상실로 정신적 고통을 겪더라도 그저 식탁 다리가 하나 부러진 것과 마찬가지로 취급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를 민법에 규정하면 동물은 단순한 권리의 객체인 물건도, 권리의 주체인 자연인도 아닌 독자적 지위를 얻게 된다. 그러면 동물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피해에 대한 배상도 실제 입은 고통에 보다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고, 동물이 물건 지위에서 벗어나는 만큼 동물보호나 생명존중을 위한 다양하고 창의적인 제도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네덜란드 등 선진국에서는 법에 동물의 법적 지위를 물건이 아닌 것으로 규정한지 오래다. 미국은 주인이 사망할 경우 남겨진 반려동물의 돌봄을 위한 유산 신탁 제도까지 법제화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 민법에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말을 넣을 때가 되었다. 그리고 더 나은 동물보호를 위한 단계로 차근차근 나아가면 된다. 가장 약한 생명인 동물에 대한 존중과 인식 변화는 곧 사람의 생명에 대한 귀히 여김으로, 또 우리가 사는 지구와 생태계에 대한 귀히 여김으로 나아갈 것이다. /김세라 변호사

2025-07-03

억울한 법에 대한 보수

필자는 5년째 경북도청 행정심판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경북도청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행정심판위원회에선 보통 20건에서 30건 정도의 사건이 처리되는데, 매번 빠지지 않고 여러 건이 올라오는 사건 유형이 있다. 바로 청소년에게 술을 판매해 행정처분을 받게 된 사건들이다. 하지만 불법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것이 청소년들이 신분증을 변조하거나 도용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증명사진도 보정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신분증상의 사진으로 실물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점을 청소년들이 악용하곤 했다. 길에서 주운 신분증을 친구들끼리 돌려가며 사용하고, 언니나 형의 신분증을 도용하거나, 심한 경우엔 신분증의 사진 부분을 변조하기도 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런 경우에도 일단 청소년임을 알지 못한 채 주류를 판매한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고 보는 구조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사업주들이 더욱 철저히 미성년자 연령 확인을 할 것이라는 입법 목적이었겠지만 실제로는 억울한 사업주들이 생겨났다. 청소년에게 주류를 판매한 것이 단속에 적발되면, 경위를 묻지 않고 일단 행정처분이 부과되었고, 사후적으로 청소년보호법 위반으로 고발된 형사 사건에서 무죄나 선고유예 판결이 나와야 행정처분 취소가 가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업주들은 이를 모른 채 몇십만 원 수준의 벌금형은 일단 받아들이고 영업정지 같은 행정처분에 대해서만 불복을 시도했기 때문에, 행정심판까지 왔을 땐 벌금형의 형사처벌이 확정된 경우가 많았다. 설사 형사처벌 확정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대부분이 소상공인인 사업주들에겐 변호사 비용을 들여 형사재판에 대응하고 무죄 혹은 선고유예 판결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몰라서 안하고 돈이 없어 못했다. 결국 형사처벌이 확정되면 법률상 행정처분도 취소될 수 없는 악순환이었다. 변조·도용한 신분증을 들이민 청소년에게 속은 사업주들이 1개월 이상의 영업정지 또는 그 영업정지 기간 매출에 상응하는 과태료 처분을 맞고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필자 역시 행정심판 주심으로 심판할 때 이런 사건은 너무 억울해 보여 최대한 구제해주고 싶었지만, 법률이 명문으로 행정처분을 못 박아 놓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억울한 자영업자들에 대한 구제책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드디어 작년 관련된 법이 개정되었다. 판매자가 청소년의 신분증 위·변조, 도용으로 청소년인 사실을 알지 못했거나 폭행 또는 협박으로 신분증 확인을 하지 못한 경우엔 행정처분을 면제할 수 있도록 식품위생법 등이 개정된 것이다. 이제라도 법 개정이 이루어져 다행이지만, 선량한 자영업자들의 생계를 옭아매는 억울한 법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자영업자 폐업률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자영업자 대출 연체율도 1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민생 회복을 위해선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역화폐를 통한 내수 진작도 필요하겠지만, 자영업자들의 억울한 피해를 발생시키는 이런 법률들을 찾아내고 보완하는 일도 내수 진작 못지않게 중요할 것이다. /김세라 변호사

2025-06-26

사회를 피폐하게 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이재명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분열의 정치가 아닌 양보하고 타협하는 정치를 하길, 내란을 종식하고 사회통합과 경제성장을 이루는 대통령이 되시길 희망한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가장 절실한 것 중 하나는 사회통합이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근거 없는 음모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포항시 북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직을 5년째 맡고 있다. 사실 필자처럼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선관위 위원직은 시간적으로 부담이 되는 일이다. 이번 대선처럼 큰 선거가 있으면 선거 몇 달 전부터 정기적으로 위원회가 있기 때문에 수시로 선관위 건물에 가 위원회 의결에 참여한다. 위원들이야 위원회만 참석하면 된다지만 선관위 직원들은 선거 몇 달 전부터 매일 야근을 하며 선거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선거일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엄격하게 관리되던 투표함들이 개표 장소로 모이고 선거관리 위원들과 선관위 직원들 그리고 개표사무원 수백 명이 모여 밤새 개표를 한다. 개표사무원들의 개함과 개표· 개수를 거친 투표용지들이 바구니에 담겨 전달되면 선거관리위원들은 차례차례 이를 검수하고 최종적으로 선거관리위원장의 확인을 마치면 개표 결과가 확정되어 공표된다. 필자는 2021년 포항시 북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으니까 이번 6월 3일 대선으로 벌써 네 번째 밤을 새웠다. 20대 대통령 선거와 2023년 지방선거, 2024년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고, 이번 보궐 대선을 치렀으니 말이다. 바쁜 가운데에서도 이 선거관리위원직을 수행하는 데엔 이 직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가 큰 원동력이 되었다. 고향인 포항의 선거관리위원회에 소속되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공정하게 치를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그렇기에 아무리 바빠도 어떤 일보다 선관위를 우선으로 하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선관위 위원직을 수행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총선 때부터 스멀스멀 활개를 치기 시작한 부정선거론은 이 자부심을 흔들기 시작했다. 선관위 위원이라고 하면 부정선거 어쩔 거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확정된 판결로 부정선거가 없었음이 여러 번 밝혀졌다고 설명해도 이미 부정선거 음모론에 심취한 사람들은 선관위 위원들마저 부정선거에 연관된 사람으로 취급하며 비아냥거렸다. 대한민국의 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지고 있다는 음모론은 선거를 공정하게 만드는 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의 불신과 의심을 키우며 선거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를 깨뜨렸고,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흐려지게 했다. 필자와 같이 맡은 자리에서 사명감으로 일하던 사람들을 맥 빠지게 했다. 음모론은 많은 사람들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게 만들고, 다수의 국민이 선출한 정부에 대한 정당성을 흔든다.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을 자극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폭력적 집단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지난 12월 3일부터 벌어졌던 일들을 통해 이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지 않았던가. 내년 지방선거를 치르면 필자의 선관위원으로서의 임기는 끝날 것 같다. 부디 내년 지방선거만큼은 다시 명예롭게, 자부심을 느끼며, 개표일 밤을 새울 수 있길 바라본다. /김세라 변호사

2025-06-12

유발지진은 맞는데 인과관계는 없다니

필자처럼 숫자에 약한 사람도 이 날짜는 잊히지 않는다. 지진 났던 날. 2017년 11월 15일. 평소처럼 점심을 먹고 오후 재판이 있어 기록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법원 언덕길을 올라 법원에 들어섰다. 7호 법정에 들어가 재판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때 두둥하고 작은 울림이 느껴졌던 것 같다. 내 재판 순서가 되어 원고대리인 석에 앉았다. 판사님의 질문에 무언가 답변을 하려는 순간 5.4 규모의 지진이 났다. 법정이 크게 흔들리고 전산에 오류가 난 듯한 삐 하는 소리 속에서 법정에 있던 사람들은 3초 정도 침묵 속에서 서로를 쳐다보다가 얼음땡이라도 한 듯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외벽이 일부 무너져 내린 법원 건물 옆에서 넋이 나가 서 있는데 저 멀리 우리 직원이 울면서 뛰어오고 있었다. “변호사님, 저 지금 집에 가볼게요!” 당시 포항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자가 겪은 이런 일을 겪었을 것이다. 지진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후 공포와 트라우마가 더 무서웠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을 서울 시댁으로 일주일간 피난을 보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여진에 다른 가족들도 여차하면 바로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한 상태로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재판을 가면 법정 뒤엔 피난용 안전모가 놓여있고 집과 사무실 벽엔 금이 가 있었으며 한동안 깨진 화분과 액자들을 잔뜩 버렸다. 몇 달 뒤 가족여행으로 갔던 평창올림픽 폐회식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포항에서 왔다고 말하는 아홉 살 아들에게 대뜸 “아~ 거기 지진난 데?”라고 하는 것에선 무언가 모를 지역 비하까지 느껴졌다. 지진 때문에 우린 이렇게 힘들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 배우자가 외도하거나 누군가에게 맞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린 피해를 보았고 정신적 고통을 느꼈다.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금이 위자료라면 우린 잘못한 누군가에게 위자료를 받을 수 있어야 했다. 이런 고통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부가 밝혀내겠다고 나섰다. 1년이 넘는 조사를 거쳐 정부조사단은 2019년 3월 20일 포항 지진이 정부가 지은 지열발전소에 의해 유발된 촉발 지진이었다고 발표했다. 정부조사단의 공식 발표가 이러하니 피해자들 일부가 위자료 소송을 제기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4년 뒤 1심 법원도 지열발전소를 짓고 운영한 정부가 잘못한 것이 맞다며 포항 시민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했다. 법원까지 이렇게 판결을 내리니 포항 시민 45만 명이 소송에 참여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이번에 2심 법원인 대구고등법원은 포항 지진이 유발 지진이고 시민들이 정신적 고통 입은 것도 다 맞긴 한데 여기에 정부 과실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며 위자료를 몽땅 취소해 버렸다.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는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 · 법적 인과관계는 없어 보인단다. 나라가 세운 시설로 지진이 나서 국민이 고통을 입었고 나라가 나라 잘못이 있었다고 인정하길래 소송을 제기했더니 나라가 위자료를 주랬다가 다시 주지 말랬다가 한다. 포항 시민들은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가. 7년쯤 지났으니, 지진의 고통이 다 잊힌 줄 아는 것인가. 가해자는 원래 피해자의 아픔을 다 알 수 없는 법이다.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김세라 변호사

2025-05-22

대법원의 자기 얼굴에 침 뱉기

“변호사님 상고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의뢰인들이 있다. 1심과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이 대법원까지 가 조금이라도 형을 줄여보고 싶다거나 결백을 입증해 무죄판결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상고를 해도 소용이 없다. 사실판단과 법률판단 모두를 할 수 있는 1심, 2심과는 달리 3심 상고심은 법률판단만을 할 수 있는 법률심이고 상고 사유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 제383조가 정한 상고 사유는 네 가지이다. 첫 번째, 판결에 영향을 미친 헌법ㆍ법률ㆍ명령 또는 규칙의 위반이 있는 때, 두 번째, 판결 후 형의 폐지나 변경 또는 사면이 있는 때, 세 번째, 재심청구의 사유가 있는 때, 네 번째,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가 선고된 사건에 있어서 중대한 사실의 오인이 있어 판결에 영향을 미친 때 또는 형의 양정이 심히 부당하다고 인정할 현저한 사유가 있는 때이다. 이 중 재심사유는 판결에 쓰인 증거가 위조되는 등의 극히 드문 경우이고, 사실판단이 잘못되었다거나 형이 무겁다는 이유로 상고하는 것은 10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가 선고된 사건만 가능하므로 결국 대법원이란 곳은 형이 무겁다고 상고할 수 없고, 나는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데 1·2심 법원이 사실을 잘못 보았다는 이유로 상고할 수도 없는 법원인 것이다. 이처럼 대법원 상고심의 벽은 매우 높은 산이다.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상고심에서 파기환송 판결을 받으면 평생 자랑할 만한 성공 사례로 남기도 한다. 사실판단이나 양형문제로는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이 날 리가 없고 결국 매우 제한적 상고사유 중에서도 판결에 영향을 미친 헌법·법률 위반이 있었다는 것을 변호사가 밝혀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판단과 법률판단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를 들면 말의 존재와 그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사실판단의 문제이고 그것이 어떤 범죄에 해당하는지는 법률 판단의 문제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은 한 대선주자 정치인인 피고인에 대해 사실판단을 하며 파기환송 판결을 했다. 피고인은 지난 대선기간 “마치 제가 골프를 친 것처럼 사진을 공개했던데, 제가 확인을 해보니까 전체 우리 일행 단체 사진 중 일부를 떼서 보여줬더군요. 조작한 거죠”라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2심 법원은 “골프를 치지 않았다”는 뜻으로 좁게 해석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존재하는 말에 대한 해석은 사실판단의 문제이며 항소심 법원은 이 사실판단을 끝낸 것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것을 골프를 치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다른 사실판단을 해버리더니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뒤엎었다. 사건이 접수된 지 한 달 만에 전원합의체 회부, 심리, 판결까지 끝내버리는 전례 없는 신속성까지 더해서 말이다. 대법원은 이렇게 특정 정치인에 대해서만 다른 피고인들과 다른 법 적용과 속도· 절차로 재판해서 사법부가 선거에 개입한다는 소리를 듣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대법원은 스스로 자기 얼굴에 침을 뱉고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고 있는 수많은 다른 법관들의 얼굴에도 먹칠을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대법원장이 픽한 특정 정치인만을 위한 대법원을 따로 만들라는 이야기까지 나올까봐 겁난다. /김세라 변호사 ………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5-05-08

새로 생긴 공중협박죄와 공공흉기휴대죄

2023년 7월 온라인상에 길이 30센티가 넘는 칼을 구입한 구매 내역과 함께 “수요일에 신림역에서 여성 20명을 죽이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신림역 흉기 난동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신림역 인근 주민은 물론 전 사회가 공포에 떨었다. 글을 올린 용의자가 긴급체포되어 구속기소 되었지만 올해 1월 대법원에서는 최종적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이 확정되었다. 기소된 정보통신망법 위반죄와 협박죄 일부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문언을 반복적으로 도달하게 하면 성립하는 정보통신망법 위반죄와 피해자에게 해악을 고지함으로써 공포감을 일으키게 하여 성립하는 협박죄는 피해자별로 성립하는 범죄인데 ‘신림역 인근 상인들 및 주민들‘이 피해자라고 하기엔 너무 범위가 넓어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게 법원 판단이었다. 한국인 여성을 대상으로 혐오와 증오를 표출하는 글을 1700여 건 작성한 것도 ‘한국인 여성’의 범위가 넓어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았다. 다만 해당 날짜 신림역 인근을 방문하거나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20~30대 여성들을 살해할 목적과 특정성은 인정되어 이들에 대한 협박 및 살인예비 혐의만이 유죄로 인정되었다. 어쨌든 피고인은 실형을 면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온라인상에는 이런 범죄를 예고하는 글들이 일 년에도 수백 건 이상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협박이나 범죄 예고를 해도 피해자가 특정되어야 하는 기존 범죄들의 구성요건적 한계 때문에 처벌이 어려운 면이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흉기를 소지하거나 드러내어도 경범죄 처벌법으로 밖에 처벌하지 못해 법정형이 벌금 10만원 이하로 처벌 수위가 낮고 현행범 체포나 긴급체포 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최근 형법에 공중협박죄와 공공장소 흉기휴대죄가 신설되어 지난달부터 시행되고 있다. 신설된 형법 제116조의2 공중협박죄는 불특정 또는 다수의 사람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가할 것을 내용으로 공연히 공중을 협박한 사람에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처하는 죄이다. 실제 지난달 라이브 방송 중이던 유튜버가 “누구 한 명 죽이고 싶네”라고 말했다가 이 공중협박죄로 입건되었다. 형법 제116조의 3의 공공장소 흉기소지죄는 정당한 이유 없이 도로·공원 등 불특정 또는 다수의 사람이 이용하거나 통행할 수 있는 공공장소에서 사람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흉기를 소지하고 이를 드러내 공중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킨 사람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죄이다. 이 죄 시행 첫날 서울에서 행인을 향해 흉기를 꺼내 든 중국인이 검거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설 범죄들이 생긴 이상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묻지마 범죄와 모방범죄를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가 있겠지만, 수사기관도 적용 대상과 한계를 명확히 하는 적절한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불의의 피해와 혼선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세라 변호사 .………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5-05-01

법률의 언어, 법률가의 언어

25년 전 법대에 입학해 첫 수업으로 민법총칙이라는 과목을 수강했다. 해당 수업의 교과서는 민법서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곽윤직 교수의 “민법총칙”이었다. 법대생이 되었다는 부푼 마음으로 교과서를 펼쳤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교과서의 대부분이 한자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법전을 펼쳐 보았으나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한자였다. 시간은 흘러 시험기간이 되었지만, 교과서를 이해하기는커녕 제대로 읽을 수조차 없으니 큰일이었다. 옥편을 들고 고군분투하다가 급한 마음에 포항 집에 SOS를 쳤다. 성경도 한자 성경만 보시던 아버지가 법대 간 딸이 혹시 시험을 망칠까 봐 걱정하시며 “민법총칙” 교과서의 시험 범위 부분을 복사해 한자 밑에다 색깔 볼펜으로 한글을 써 보내주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중간고사를 보게 되었고 칠판에 크게 적혀있던 시험문제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法源. 이 한자 두 글자가 법대에서의 첫 시험 문제였다. 그렇게 그때는 교과서도 법전도, 법대의 수업과 시험문제도 한자가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법전의 한글화 작업이 진행되어 지금은 법학 교과서도 법전도 모두 한글로 쓰여 있다. 그러나 여전히 법률용어 중엔 일상생활에서는 잘 쓰지 않는 일본식 한자 단어가 많다. 문장 면에서도 법원의 판결문들을 가만히 보면 부정문의 부정문 같은 어려운 문장이 많다. 변호사들이 쓰는 서면도 마찬가지다. 15년째 변호사 생활을 하다 보니 몸에 베인 것인지, 내 입장에선 평범하게 쓴 서면이라 생각했는데도 나중에 의뢰인으로부터 이게 무슨 말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여전히 법률가들의 말은 일상에서 쓰는 말과 괴리가 있는가보다.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이 있었다. 이 때 헌법재판소가 낭독한 결정문에 대해 “쉬운 말로 간결하게” 쓴 “논리정연한” 명문이라는 평이 많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법원 판결문을 많이 들어봤는데 중간에 휴대폰을 한 번도 안 쳐다보고 들어보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또 요즘 필자는 처음으로 지인들로부터 “나도 법대 갈걸 그랬다” “자녀에게 법 공부해 보는건 어떻겠냐 제안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늘 판사, 변호사하면 AI 시대에 제일 먼저 없어질 직업 아니냐는 소리만 듣다가 이런 긍정적 이야기들을 들으니 신기하다. 며칠 전 이국종 교수의 “조선반도는 입만 터는 문과 놈들이 해 먹는 나라다. 떠나라”라는 신랄한 비판에 마음이 아팠던 터라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번 헌재 결정이 그나마 긍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 논리가 쉽고 편안하게 국민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리라. 헌재는 대통령 파면 결정이라는 결과물을 쉽고 간결한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 내어주었고, 이에 국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받아들였다. 20년 전 한문에서 벗어나는 한 단계를 넘은 법률, 법률가의 언어는 쉽고 간결한 말과 문장으로 나아갈 두 번째 단계를 넘을 시기에 다다른 것 같다.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5-04-17

한 사람만을 위한 법 해석이 가능한 나라

김세라 변호사 형사소송은 크게 수사와 공판 절차로 나누어진다. 수사기관이 수사를 해 범죄 혐의를 밝혀낼 증거를 확보하면 피의자를 기소하고, 공판이 시작된다. 수사 방법 중 체포·구속·압수·수색 같은 강제수사는 국가의 힘으로 국민의 신체를 제압하고 재산권을 제한하는 것이기에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강제수사의 요건을 엄격히 정하며, 체포·구속 기간도 명확히 정해두고 있다. 형사절차에서 기간이 문제될 때 법률에 시(時)를 기준으로 규정한 것이 있고, 일(日), 월(月)을 기준으로 규정한 것이 있다. 예를 들어 피의자를 체포한 때부터 48시간 이내에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하는 것이 시(時) 기준이라면, 검찰 구속기간에 대해 최대 20일이라고 정해놓은 것은 일(日) 기준, 기소 후 법원의 구속기간을 2개월 단위로 정한 것은 월(月) 단위 규정이 되겠다. 이런 시, 일, 월 단위의 기간을 어떻게 계산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우리 법은 자세히 규정한다. 일, 월, 연 단위로 규정해 놓은 것은 역(曆)에 의해 계산하되 구속기간의 경우 초일을 산입하라고 한다. 밤 11시 59분에 구속되었어도 1일 구속한 것으로 치라는 뜻이다. 또 피의자가 법원에 체포·구속 적부심을 청구하면 그 적부심 재판을 위한 기간은 체포 구속기간에 넣지 말라고 한다. 수사기관의 수사기간을 보장하고 피의자가 적부심 청구를 남발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다. 이상의 내용들은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이래 70년 이상 수사기관과 법원에서 별다른 이견 없이 적용되어 온 것이고, 이를 통해 수많은 피의자가 구속 또는 석방되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취소 사건에서 법원은 이와 전혀 다른 판단을 하였다. 검찰단계에서 피의자 구속기간은 20일이라는 일 단위로 규정되어 있지만 이를 시간 단위로, 그러니까 480시간으로 해석하라는 것이다. 적부심 청구로 법원에 계류된 시간도 시간을 재서 480시간에서 빼라고 했다. 결국 이 새로운 해석에 따라 구속이 취소되었고 윤석열 대통령은 석방되었다. 구속기간 관련한 법원의 첫 해석이자, 그에 따라 석방된 최초 사례가 되었다. 물론 법령의 최종 해석 권한은 법원에 있는 것이므로 이제는 판례가 바뀌었다 볼 수도 있었다. 검찰이 구속취소 결정에 대해 항고해서 대법원에서도 동일한 판단이 내려졌다면 앞으로 구속 피의자들의 구속기간은 시간 단위로 계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례적으로 쿨하게 항고를 포기하고, 전국 검찰청에 종전 방식대로 구속기간을 ‘시’가 아닌 ‘일’ 단위로 계산하라는 공문을 보내기에 이른다. 구속기간을 시간 단위로 계산한 이 해석이 오로지 윤석열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한 해프닝이었음을 검찰 스스로 인정한 꼴이다. 필자는 한동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형사소송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검찰 구속기간을 20일이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480시간이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이 법이라는 것이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단 한번만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는 것이라고는 차마 가르치지 못하겠다.

2025-04-03

김민희와 홍상수, 그리고 그들의 아이

김세라 변호사 25여 년 전 필자는 쎄씨, 키키 같은 하이틴 패션 잡지를 즐겨 보던 여고생이었다. 어느 날 잡지에 서 하굣길에 길거리 캐스팅 된 매력적인 고등학생 모델을 보게 되었고,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서울에서의 생활과 그녀의 매력에 대한 동경을 담아 팬레터를 보냈는데, 놀랍게도 답장을 받았다. 귀여운 글씨체의 손편지엔 네가 먹어보고 싶다던 계란빵은 서울에서는 홍대에 놀러갔을 때 먹어보니 꽤 맛있었다는 이야기와 남자친구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모델은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했다. 바로 배우 김민희 씨다. 지금은 홍상수 감독과의 관계로 인해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필자는 여전히 그의 팬으로 남아 있다. 배우로서의 그녀의 재능뿐만 아니라, 한때나마 직접 소통할 수 있었던 첫 연예인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75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가 경쟁 부문에 진출해 화제가 됐지만 더 화제가 된 것은 홍 감독의 옆에 있던 임신한 김민희였다. 홍 감독의 아이를 임신한 김민희는 지금은 만삭으로 올봄 출산 예정이라고 한다.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 씨의 관계는 약 9년 동안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불륜으로 간주된다. 홍 감독에게는 배우자가 따로 있으며, 그는 2019년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으나 실패했다. 이는 우리나라 법원이 재판 이혼 시 유책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책주의는 배우자가 부정한 행위를 하거나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만 이혼 청구가 가능하며, 이러한 사유가 있더라도 혼인 파탄의 주된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원칙적으로 이혼 청구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상대방 배우자가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없거나 혼인 파탄의 유책성이 크지 않은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유책 배우자도 이혼 청구가 가능하다. 하지만 홍 감독의 아내는 이 예외 사유에 해당하지 않아 법원은 그의 이혼 청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9년간 동거하며 아이까지 갖게 된 지금 사실혼 관계는 인정될 수 없을까? 혼인생활의 실체를 갖추었더라도 중혼적 사실혼은 사실혼이 아니다. 법률상 배우자가 따로 있다면 부부 공동생활의 외관을 갖추었다 해도 사실혼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김민희 커플은 사실혼 부부도 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제 둘 사이에서 곧 아이가 태어난다. 부모의 관계가 법적 보호 밖에 있는 것과 다르게 이 아이의 경우는 홍 감독의 친자로서 법적 보호를 받는데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혼외자로 태어나겠지만 생부와의 인지 절차를 밟으면 친자 관계로 전환된다. 아이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떼면 모는 김민희, 부는 홍상수로 나올 것이다. 자녀로서 홍 감독 재산 상속도 받는다. 우리 법은 법률상 배우자가 있는 이상 그 밖에 있는 남녀 관계를 혼인제도라는 울타리로 보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불륜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권리는 외면하지 않는다. 김민희는 홍상수의 아내가 아니지만 태어날 아이는 홍 감독을 아빠라고 부르며 살 수 있다. 어른들이 문제지 아이에겐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말이다.

2025-03-20

‘하늘이’를 잃고 우린 무엇을 고치려 하는가

김세라변호사 최근 여덟 살 아이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피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정치권과 교육부는 ‘하늘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법안을 제시하고 있다. 여당은 교원 임용 전후 정신질환 검사를 의무화하고, 증상이 발견되면 업무에서 배제하고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반면 야당은 정신질환을 이유로 휴직 및 복직 시 엄격한 심사 기준을 적용하고, 별도의 면담 및 평가 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또한, 교사의 직무 수행 적합성을 평가하는 위원회에 학생과 학부모가 참여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지만, 안그래도 교권침해 이슈가 큰 요즘 교사들의 반발이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이 ‘하늘이법들’의 내용을 보면 하늘이 사건의 본질을 잊은 것은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다시 사건으로 돌아와 보자. 하늘이 사건의 첫번째 원인은 돌봄교실 운영지침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돌봄교실 운영상 돌봄학생은 돌봄교실 종료 후 그 보호자 또는 대리인에게 인계되어야 하는데 그 지침이 지켜지지 않았다. 지침이 지켜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건 지키지 않아도 별다른 제재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하늘이는 돌봄교실이 끝난 늦은 오후 홀로 교실에 남아 있었고, 가해교사의 눈에 띄어 범행이 이루어진 시청각실까지 유인되었다. 돌봄교실 학생, 특히 하늘이 같은 저학년 학생들에 대한 보호자 등 대면 인계 조치가 철저히 지켜졌더라면 하늘이는 평소와 다름 없이 미술학원 차를 탔을 것이다. 두 번째, 이 사건은 가해 교사의 정신질환은 밝혀내지 못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거의 정신질환은 오히려 아주 충분히 드러나 있었다. 우울증을 이유로 이미 8차례 이상 휴직과 복직을 반복한 사람이었고, 2024년 12월 복직하자마자 학교에서 동료 교사를 폭행하고 컴퓨터를 부수는 등 폭력성과 반사회성을 여러번 드러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교육청에 그에 대한 휴직처리를 요청할 정도였지만 교육청에서 그를 휴직시키지 않았다. 성인에 대해서 폭력성 등을 충분히 드러낸 교사가 어린 학생들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학교에 버젓이 출근을 해 돌아다니는데도 이를 막을 수 없었던 시스템이 이번 사건의 원인인 것이다. 하늘이를 잃고서야 우린 외양간을 고치려 하고 있다. 아프고 부끄럽지만 하늘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린 그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부서진 외양간을 고치는 것에 집중해야할 이 시점에 외양간 옆의 부엌, 옆집의 지붕을 고치는 일 따위에 시간과 비용을 낭비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아이들이 등교부터 하교까지 철저히 안전할 수 있도록 돌봄교실 운영지침과 이에 대한 준수 강제가 정비되어야 한다. 폭력성과 반사회적 인격장애성 등이 드러난 학교 구성원에 대해서는 즉시 분리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하며 학교 복도에 씨씨티비도 촘촘히 설치되어야 한다. 학원차량기사가 하늘이가 차를 안탔다고 연락했을 때 학교에서 바로 하늘이가 사라진 동선을 파악할 수 있었다면 하늘이는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다시는 하늘이를 잃지 않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눈을 똑바로 떠야 할 것이다.

2025-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