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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혐오 표현이 용납되는 사회

한 정당의 대변인이 유튜브 방송에서 시각장애인 국회의원인 김예지 의원을 겨냥해 장애인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 “장애인을 너무 많이 할당해 문제라고 본다, 왜 국민의 힘에서 공천 달라고 구걸을 하냐, 민주당에 널리고 널린 게 김예지과라 민주당 가면 공천 안 줄 것 같으니까”라고 하더니,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주체성을 가지는 게 아니라 배려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친 것”이라고도 했다. 제1 야당의 대변인이 현직 국회의원을 향해 공개적으로 혐오 발언을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만 해당 발언을 한 대변인은 김 의원에게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그 정당의 원내대표도 “왜 굳이 자그마한 일을 가지고 기사화하려고 하느냐”라며 이를 ‘자그마한 일’로 치부하고 도리어 기자들 탓을 했다. 혐오 표현이란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바탕으로 경멸, 비하, 모욕, 위협 등을 담는 언어적, 비언어적 행위를 말한다. 이런 혐오 표현은 오랜 기간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주로 이루어진다. ‘병신’, ‘장애인처럼’, ‘저능아’ 와 같은 단어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표현들은 장애인을 하자 있는 존재로 보는 그릇된 인식을 생산하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강력한 장애인 혐오로 작용한다. 이런 직접적 비하 표현이 아니더라도 장애인을 불쌍히 여기거나 부당하게 혜택받는 집단으로 치부하는 표현 또한 혐오 표현에 해당한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야당의 대변인이 한 말이 전형적이 예이다.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단 세 명에 불과한 장애인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대해 그는 역량과 자격도 안되는데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국회의원 자리를 구걸해 받았다 식으로 말했다. “눈 빼면 기득권”이라는 막말을 하고도 반성과 사과가 없다. 이런 장애인 혐오 표현은 장애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런 표현들을 제재 없이 용납하는 사회는 장애인들이 겪는 차별을 심화시키고 그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와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이런 혐오 발언에 대해선 지금의 법상으로는 처벌 방법이 없다.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있지만 혐오 발언 자체를 처벌하는 것은 아니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조치에 대해 처벌할 뿐이다. 혐오 발언으로 피해를 입어도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수밖에 없다. 나치 과거에 의한 뿌리 깊은 반성 의식을 갖고 있는 독일은 사회 통합을 방해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매우 엄격히 처벌한다. 플랫폼 사업자는 혐오 발언이 들어간 콘텐츠를 24시간 이내에 삭제할 의무가 있고 혐오 발언은 그 자체만으로 형법상 징역형이나 벌금형으로 처벌된다. 우리는 어떠한가. 관광지에서 ‘중국인 out’이라는 팻말과 욕설이 가득한 거리 시위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제1 야당의 대변인이라는 자가 공공연하게 장애인 혐오 발언을 한다. 내면의 증오와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고 싶다는 이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소수자들의 인권보호와 사회적 통합이라는 법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가?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11-20

생의 종결에 대한 자기결정권

영화 ‘노트북’에서 평생을 사랑하며 산 노아와 앨리는 요양원에서 손을 잡고 잠든 채로 함께 세상을 떠난다. 이런 영화와 같은 일이 얼마 전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다. 미국 워싱턴주에 살던 90대 노부부가 손을 잡고 한날한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안락사를 통해서였다. 말기 심장진환을 앓던 아내 에바는 낙상사고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수술 대신 삶의 마지막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고 싶다며 안락사를 결심했고, 아내의 결정을 들은 남편 드루스 역시 아내가 없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며 안락사를 신청했다. 드루스 역시 뇌졸중 병력이 있었기에 부부는 의료진으로부터 안락사 승인을 받을 수 있었고, 부부는 딸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마지막 날로 정한 8월 13일 음악이 흐르는 방 안에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손을 잡은 부부는 약이 든 칵테일을 마시고 함께 영면에 들었다. 이렇듯 워싱턴주를 비롯한 미국 10개 주는 의료적 조력 안락사가 합법이다. 작년엔 1982년까지 네덜란드 총리를 지낸 판 아흐트 전 총리가 뇌졸중이 악화되자 안락사 허가를 받아 아흔 세 살의 동갑내기 아내와 손을 잡고 함께 숨을 거두는 일도 있었다.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나라이다. 불치병을 앓고 있어야 하고 의사 두 명이 안락사가 적합하다고 판단해야 하는 등 엄격한 요건이 있지만 네덜란드는 매년 8000명 이상이 안락사를 선택하고 있다고 한다. 안락사의 뜻을 풀면 ‘편안하고 즐거운 죽음’이다. 주로 가망 없는 불치병 환자, 중환자가 대상이 되는데,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약물을 주입해 사망하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약물이나 음식물 투입 등의 처치를 하지 않는 소극적 안락사가 있다. 우리는 이런 안락사가 모두 불법이자 범죄이다. 불치병으로 극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라고 해도 약물 제공 등 안락사를 돕는 경우 자살방조죄나 촉탁살인죄로 처벌될 수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선 안락사를 꿈꾸는 사람들이 스위스로 안락사 여행을 떠난다. 스위스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외국인에게도 안락사 및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나라이다. 지금까지 열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스위스로 가 실제 안락사를 시행했고, 안락사 순서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인 한국인들도 2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선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으니 사람들은 편안하지 않고 러프한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무작정 고통 없는 자살을 허용해 주자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인간의 생명을 조건부의 가치로 취급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죽지 못해 사는 비참한 상황을 강요할 권리가 과연 타인과 사회에게 있는 것일까.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었던 인간은 어떻게, 언제 죽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도 전혀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이제 우리 국민도 76%가 안락사에 찬성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안락사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다. 존엄한 죽음에 대한 결정권 말이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11-13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명예훼손

버추얼 아이돌은 ‘가상 아이돌’ 혹은 ‘사이버 가수’이다. 컴퓨터 그래픽이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캐릭터로 활동하며 팬들과 소통하는 아이돌로, 아바타로 활동하기 때문에 외모와 이름 등 모든 것이 가상이다. 하지만 버추얼 아이돌도 목소리만큼은 실제 사람의 목소리다. 활동하는 캐릭터 뒤에서 실제 노래하는 본체 가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버추얼 아이돌은 이제 지상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하고 콘서트 티켓 수만 장이 오픈하자마자 매진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버추얼 아이돌은 모든 공개적 활동이 가상 캐릭터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사생활 침해 피해나 멤버의 건강 이슈가 없어 활동이 안정적이다. 하지만 이런 특성 때문에 버츄얼 멤버에 대해 지어낸 사실을 퍼뜨리고 모욕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버추얼 아이돌을 향한 악플은 명예훼손이나 모욕죄가 될 수 있을까? 형사 범죄의 피해자는 자연인과 법인만이 가능하다. 누군가 고양이에 대해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지나가는 사람이 내 반려견을 모욕한다고 해도 피해자가 없는 행위이므로 명예훼손죄나 모욕죄로 고소할 수 없다. 버츄얼 아이돌도 마찬가지이다. 플레이브의 멤버 누군가에 대해 키가 작다, 예전에 누구와 동거했다더라와 같은 내용의 댓글을 달고 욕설을 해도 명예훼손죄나 모욕죄가 성립할 수 없다. 버츄얼 아이돌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가상의 존재여서 법률적 권리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민사적 배상 책임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포된 사실의 내용이 가상 멤버 뒤에 있는 본체 가수, 혹은 소속사인 회사에 대한 연결로 인정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헌트릭스 멤버 루미의 목소리가 고음 처리한 기계음이라더라는 사실을 유포한다면 이야기를 한다면 이는 실제 그 목소리를 노래한 가수 이재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가 될 수 있고, 루미 목소리를 그런 식으로 방출시킨 바 없는 제작사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얼마 전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모욕행위를 본체 가수에 대한 것으로 보아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하급심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A씨는 SNS에 버추얼 아이돌그룹 멤버들의 외모를 비하하고, 이들을 연기하는 실제 인물들을 조롱하는 글을 여러 차례 게시했다. 이에 본체 가수 B씨 등은 A씨를 상대로 피해에 대해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과정에서 A씨는 “실제 인물이 아닌 가상의 캐릭터이고, 신상이 비공개여서 가상 캐릭터와 원고 사이에 동일성이 인정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메타버스 시대에 아바타는 단순한 가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사용자의 자기표현, 정체성, 사회적 소통 수단”이라며 “아바타에 대한 모욕 행위 역시 실제 사용자에 대한 외부적 명예를 침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라고 하며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버추얼 가수의 활동은 앞으로 더 활발해질 것이다. 악플 피해에 있어서는 권리 주체서에 관한 판단을 너무 엄격히 보지 말고 이번 법원의 판결처럼 피해의 범위를 넓게 보는 것이 필요하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11-06

기록을 안 보고 내린 판결이라니

“변호사님, 판사님이 저희가 낸 서면을 안 보신 거 같은데요” 변론 기일에 법정을 나오며 의뢰인으로부터 흔히 듣는 말이다. 준비서면에 적어 낸 것인데 판사가 이를 모른 채 묻는다거나, 이미 낸 증거인데 이에 대해 판사가 모르는 듯 보이면 당사자들이 묻곤 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판사님들이 사건이 많으신데다 우리가 서면을 낸 지도 얼마 안 돼서 그렇다고, 판사님들은 판결문 쓰시기 전엔 무조건 모든 서면과 증거를 꼼꼼히 보시니까 우린 그전까지 유리한 주장과 증거를 잘 내면 아무 문제 없다고 의뢰인을 다독이곤 한다. 이런 나의 판사를 위한 변론은 정말 그렇다. 재판 중엔 판사들이 기록과 증거를 확인하지 못한 듯 보였던 사건도 나중에 판결문을 보면 최종 판단의 근거가 된 증거와 주장이 무엇인지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렇듯 대부분의 판사들은 당사자가 낸 서면과 증거들, 변론전체의 취지를 정밀히 검토해서 판결하고 판결 이유를 구성한다는 것을 필자는 13년의 변호사 생활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의뢰인들이 이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판사는 기록 안 보고 판단한다면서요. 우리도 저 판사랑 잘 아는 전관 변호사나 연수원 동기를 선임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대법원 판사들도 기록 안 보고 판결하던데요’ 할 말이 없다. 더 이상은 변호사 입장에서도 판사님을 위해 변론을 펼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판사 중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대법원 판사들이 기록을 보지 않고 판결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만 전 국민이 보고 말았으므로. 지난 대선기간 지지율 1위를 달리던 한 대선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기록이 인계된 지 이틀 만에 평결을 내렸다. 평결은 최종 판단을 끝내는 결정이다. 종이로는 트럭 한 대에 가득 실릴 양이라는 6만페이지가 넘는 기록이 온 지 이틀만에 최종 판단을 했다는 것은 기록을 안 보고 판단했음을 자인하는 꼴이었다. 심지어 민사소송법상 법률적 판단만 가능한 대법원이 사실심 판단이 의심되는 판단을 한 것이었고, 무려 항소심 법원의 무죄 판단을 유죄로 180도 뒤집는 내용의 판단이었다. 그런 중차대한 판단을 기록도 안 보고 이틀 만에 해버린 것이 잘못이라는 걸 대법원 스스로도 알긴 알았던 것일까. 처음엔 당당하게 “대법관들이 전자기록으로 다 보고 한 평결이다”라고 했던 천대엽 대법관은 최근 “대법관들이 기록을 다 봤다는 것은 나의 추정이었다”라고 말을 바꿨다. 얼마 전 국회 법사위에 나온 대법원장은 기록을 언제 보았냐는 국회의원의 질문엔 입을 꾹 다물고,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다가 갔다. 변호사 입장에선 꽤나 절망적이다. 판사가 기록을 안 보고 판단한다면 무엇을 믿고 재판을 받아야 하나. “내가 목숨 걸고 악착같이 붙들어야 할 것은 그 무엇이 아니라, 법정에 있고 기록에 있는 다른 무엇이라 생각합니다”라고 한 고 한기택 법관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도 아직 우리 법원엔 이렇게 “목숨 걸고 재판하는 법관”이 더 많을 것이라고 믿어보는 것이 지금의 유일한 희망이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10-30

세기의 이혼과 불법원인급여

재산분할 1조3808억원, 위자료 20억원으로 세기의 이혼이라 불리우던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이 지난 16일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대법원은 이혼과 위자료 20억원은 그대로 유지했지만, 불법원인급여의 법리를 들어 재산분할에 관한 항소심의 판단을 파기하며 다시 판단하라고 돌려 보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태원 회장이 소유한 SK 주식을 특유재산으로 볼 것이지 여부였다. 특유재산은 혼인 전부터 개인이 소유하거나 증여 상속 받은 재산으로 재산분할 대상에서 제외되는 재산을 말한다. 최 회장이 보유한 SK 주식회사의 주식은 1297만5472주로 가치가 2조800억원에 달했고, 당연히 이 주식이 재산분할대상이냐 아니냐는 재산분할금을 정하는 핵심 쟁점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1심 법원은 SK 주식을 최 회장의 특유재산으로 보아 재산분할에서 제외하면서 지급할 재산분할금을 665억원만 인정했다. 그러나 항소심 법원은 노 관장의 부친인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최 회장의 부친에게 300억원 상당의 돈이 유입된 것을 인정하며 이 자금이 지금의 SK그룹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면서 SK 주식을 특유재산이 아닌 부부공동재산으로 인정했다. 다만 회사의 성장 과정에서 최 회장의 경영적 기여도를 고려해 최 회장의 재산분할 비율을 65%, 노 관장은 35%로 인정했다. 이렇게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지급할 재산분할금이 1조3808억원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대법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돈 측에 지원했던 300억원이 불법적으로 조성된 비자금이기 때문에 재산분할 산정에 반영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300억원은 뇌물이라는 ‘불법적인 원인’으로 만들어진 돈이고, 우리 법질서는 불법적인 행위로부터 파생된 이익이나 권리를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불법적 돈을 가지고 재산 형성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민법 제746조 불법원인급여의 법리는 불법적인 원인으로 재산과 노무를 제공한 때엔 그 이익의 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도박 자금으로 쓰라고 빌려준 돈을 갚으라거나 뇌물을 준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 줬던 뇌물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재판은 불법원인급여 자체를 돌려달라는 소송이 아닌 30년에 걸쳐 이루어진 재산형성의 기여도를 주장하는 소송이었음에도 대법원은 불법원인급여 법리를 적용한 것이다. 대법원은 민법상 불법원인급여의 법리를 처음으로 재산분할에 적용했다. 앞으로 이혼소송에서 재산분할을 따질 땐 과거 재산 형성의 출처와 그 불법성까지 입증해야 할 것 같다. 한편으론 의문이 생긴다. 배우자 한쪽이 재산형성을 하며 저지른 불법성 때문에 재산분할 요구를 못하는 건 이해가 되는데 재산형성 과정은 적법하더라도 수십 년 전 제공된 종잣돈의 출처까지 범죄인지 아닌지를 따져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일반인들에게 가능할까. 또한 제공한 쪽의 불법성 때문에 불법적 돈을 지원 받은 쪽은 그로 인해 증가된 어마어마한 반사적 경제이익을 누리게 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여러모로 의문이 든다. /김세라 변호사

2025-10-23

변호사 공장

변호사는 공익을 위한 직역인가, 사익을 위한 직역인가. 변호사법 제1조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 변호사는 단순히 개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리인’이 아니라 사법 정의 실현에 참여하는 공적 전문가이다. ‘법’은 우리 사회가 약속한 정의의 최소 단위이고, 변호사는 그 ‘법’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자로서 법을 수호하고 시민의 권리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형사사건은 성공보수를 못 받는다. 대법원은 형사사건의 본질은 피고인의 인권보호와 형사사법의 실현에 있는데, 유·무죄의 결과를 기준으로 한 보수 약정은 변호사의 직무윤리에 반하고 사회질서에 위반되어 무효라고 판시했다. 한편 변호사는 사익을 위한 대변자이다. 변호사는 개별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하며 그가 주는 수임료를 받아 생계를 꾸린다. 나라에서 나오는 공익 수당 같은 건 없으므로 개업 변호사들은 사건 수임을 많이 하고 수임한 사건 의뢰인에게 승소를 안겨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변호사의 사익 추구가 공익적 역할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피고인의 절차적 방어권을 보장하며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 누군가 떼인 돈을 소송을 통해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법과 권리를 지키는 공익적 행위이기도 하니까. 결국 변호사는 사익을 매개로 공익을 실현하는 직업이라 할 수 있겠다. 매달 사무실 운영비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 변호사의 입장에선 사실 이런 역할의 구분이 쉬운 것은 아니다. 변호사 수가 크게 늘어난 요즘은 특히.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변호사들은 의뢰인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되, 법질서와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려 애쓰고 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새로운 유형의 로펌, 변호사들이 등장해 많은 부분을 흔들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법률서비스 피해 구제 신청 건수가 최근 4년 사이 5배 급증했다. 피해 사유는 주로 위임 계약의 불성실 이행, 법무법인의 미흡한 대응으로 인한 계약 해제 및 환불 요구, 불성실한 법률 대리에 따른 착수금 전액 환급 등이었고, 신고된 곳들의 대부분은 소위 마케팅 펌, 네트워크 펌이었다. 이런 펌들의 기본 방향은 법을 잘 모르고 변호사 인맥이 없는 사람들이 변호사가 필요해 인터넷 검색을 했을 때 가장 먼저 볼 수 있도록 포털사이트 상단에 뜨게 하고, 전관이나 대단한 경력의 변호사들이 사건에 관여하는 것처럼 광고하는 것이다. 광고의 가장 큰 목적은 수임이다. 승소보다는 대량 수임에 광고 목적이 맞추어져 있기에 매년 엄청난 광고비를 포털사이트에 지불한다고 한다. 의뢰인들은 대형 로펌에 맡기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실제 사건 처리는 고용된 각 지점의 어쏘 변호사들이 한다. 그렇기에 사건과 변호사와의 연결성, 애착관계가 없다. 변론 때마다 출석하는 변호사가 다르고, 사건 때문에 의논할 게 있어 전화를 해도 담당변호사가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는 경우도 많다. 장인인 것처럼 광고하나 실질은 공장인 것이다. 이런 변호사 공장, 공장형 변호사의 등장은 과연 변호사의 공익성에 맞는 것일까. 오늘도 법원에서 마케팅 펌 변호사의 변론 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김세라 변호사

2025-10-16

법이 제 역할을 찾을 때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보장적 기능과 보호적 기능이다. 보장적 기능은 법이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지만 그에 저촉하지만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보장해 주는 것이다. 보호적 기능은 법이 개인의 권리와 사회 공동체의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법이 보장적 기능도, 보호적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영역이 있었다. 문신시술을 의료행위로 보아 의료인 아닌 자들을 범죄자로 만들어 왔던 것이다. 필자가 만난 의뢰인 중에 포항 남구에서 미용샵을 운영하던 싱글맘이 있었다.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시술은 눈썹 문신이었다.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 중엔 의사도 있었다. 어느 날 시술을 받고 간 손님 한 명이 부작용이 생겼다며 환불과 치료비를 요구했다. 들어보니 시술 후 사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염증이 발생한 것이었다. 요구하는 치료비 액수도 터무니 없었다. 환불과 치료비 지급을 거절하자 이 손님은 샵 원장을 의료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결국 이 원장에겐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전과자가 됐으니 다음에 또 이런 손님이 나타나 고발을 하면 이젠 징역형으로 처벌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사들도 눈썹 문신을 받으러 오던 이 미용샵의 사장은 의사가 아닌데 눈썹 문신 시술을 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범죄자가 되었다. 1992년에 대법원이 문신을 의료행위라고 판단한 이후 30년 넘게 이런 일은 계속해서 발생해 왔다.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가 타투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세계적 명성의 타투이스트 김도윤씨도 전과자가 된 지 오래다. 다른 잘못은 한 것이 없다. 그러나 타투 시술이 범죄로 취급되는 유일한 나라인 대한민국에선 누군가 신고하면 세계적 타투이스트라도 전과자가 되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현실에선 완전히 보편화 된 문신시술을 법과 법원은 의료행위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작정 처벌하기만 하니 문신 시술업은 위축되었다. 이 업을 하며 생계를 꾸릴 수는 있었지만 신고하겠다는 고객들이 무서워 돈을 뜯기고 협박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생겼다. 여성 타투이스트들은 시술 과정에서 성범죄를 당해도 신고가 두려워 고소를 할 수가 없었다. 타인에 대한 법익침해가 없는데도 법은 문신 시술업자들의 활동을 보장하기는커녕 억압하고 위축시켰다. 법이 보장적 기능을 손 놓은 것이었다. 소비자들에게도 피해가 있었다. 문신을 그저 범죄행위로만 보니 시술 과정에서의 위생 및 감염관리 가이드를 마련할 리 없었다. 무조건적인 불법화는 음성화를 부추길 뿐이었고 결국 법은 문신을 받는 소비자들을 보호하는 보호적 기능도 하지 못했다. 보장적 기능도 보호적 기능도 하지 못하던 법의 역할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게 됐다. 지난 9월 25일 비의료인의 문신시술을 허용하는 문신사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문신사법은 앞으로 2년 후 본격 시행된다. 그러면 이제 문신 시술은 의료행위가 아니고, 국가시험에 합격해 면허를 취득한 문신사라면 할 수 있는 행위가 된다. 시술 과정에서의 위생 및 안전관리 지침과 의무사항도 마련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문신 시술을 하는 사람들도, 받는 사람들도 법에 의해 보장과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김세라 변호사

2025-10-09

종교적 가스라이팅에 의한 의사표시 취소

경기도 가평 신천지 평화의 궁전 앞엔 매주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71세의 김태순씨가 있다. 지인 소개로 1989년 신천지에 들어간 김씨는 30년간 노역에 시달리다 2020년 신천지를 탈퇴했다. 사역이라는 명분 하에 전도, 밥 짓기, 전단지 붙이기 등 온갖 일을 했지만 30년 믿음 생활의 결과는 헌금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남은 수천만 원의 빚과 풍비박산 난 가정이었다. 그는 신천지의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에 세뇌당해 벌어진 일이라며 신천지 교단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30년 세월이 원통해요. 지금도 젊음 사람들이 세뇌당해 인생을 낭비당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김씨를 보면 늦게라도 세뇌에서 벗어나게 된 그가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탈을 쓴 악덕 교주의 세뇌에 빠져 가정과 재산을 잃고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니 말이다. 민간인 폭도들이 법원을 부수고 침탈한 전대미문의 서울서부지법 폭동 사건도 종교적 가스라이팅과 연관되어 있다. 전광훈 목사는 폭동 사태가 일어나기 하루 전 집회에서 마이크에 대고 “만약 구속영장이 발부된다면 초헌법적 권리인 국민저항권을 통해 국가기관이나 그 기능에 대해 물리적 타격을 가하는 것도 정당하다”, “서부지방법원 주소를 한 번 띄워주세요. 빨리 이동해야 되니까 오늘 내로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을 찾아와야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실제 그 법원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사건이 커지자 목사가 한 말이 참 씁쓸했다. 그는 “나는 국민저항권 밖에 말한 게 없다, 법원에 들어간 애들은 우리 단체가 아니다. 우리하고는 관계가 없다”라고 했다. 내 말은 진리이지만, 내 말로 인해 벌어진 일과 아픔들에 대해 책임질 생각은 없다. 이런 수준의 교주들이 참 많은 세상이고, 결국 책임은 약자인 신도 개인의 몫이 된다. 2018년 신천지를 탈퇴한 사람들이 신천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2심 법원은 “신도로 포섭된 이후 친절과 호의가 순식간에 사라져 외톨이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심리 등을 이용했다”라며 피해 일부를 인정했지만 대법원이 이를 뒤집었다. 대법원은 종교적 가스라이팅에 대해 “종교를 선택하기 전·후 태도나 생활변화 등 여러 가정을 고려해 개별적·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이 사건에서는 피해 행위들이 “강압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만한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처럼 종교적 가스라이팅은 뒤늦게 스스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더라도 협박과 폭행 같은 명백한 강압이 없었던 이상 법적으로 배상을 인정받기가 힘들다. 그나마 이런 심리적 지배에 따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도록 법률 개정이 추진된다고 하니 다행이다. 법무부는 지난 2월 ‘부당한 간섭에 의한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한 민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지금까지는 민법상 사기와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만이 취소 대상이었지만, 부당한 간섭에 의한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게 되면 교주와 신도 같은 심리적 지배가 이루어지기 쉬운 관계에서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내린 의사표시도 취소할 수 있게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종교적 가스라이팅에 의한 재산 피해는 돌려받을 길이 열리게 될까? 지켜봐야 겠다. /김세라 변호사

2025-09-25

법정에 내민 증거, 독이 되기도

법과 제도는 끝없이 변한다. 새로운 범죄가 생기고, 예전엔 아무 문제도 없었던 행동들이 범죄로 취급받는다. 반대로 범죄였던 행위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닌 게 되기도 한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쫓아가거나 집 앞에 선물을 두는 행동은 범죄가 아니었다. 그로 인해 많은 피해자들이 생겼고 2021년 스토킹 범죄 처벌법이 제정됐다. 지금은 이런 스토킹 피해를 신고하면 바로 접근금지명령이 떨어지고 스토킹 범죄는 징역형으로 처벌된다. 길을 가다, 혹은 유튜브 방송을 하다 누군가가 센 척을 하고 싶어 “아 누구 오늘 하나 찌르고 싶네”라고 말해 버렸다고 하자. 공중협박죄가 올해 3월부터 시행되고 있으니 이제 이런 행동은 범죄다. 판례가 변하기도 한다. 제정 민법 이래 70년간 무효 혼인으로 취급되었던 8촌 이내의 결혼은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이제 무조건 무효는 아닌 것이 되었고, 간통죄, 혼인빙자간음죄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끝없는 변화의 물결 가운데 변호사는 더욱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법의 생성과 폐지, 변화에 가장 예민하게 귀를 귀울여야 한다. 변호사가 달라진 법률과 범죄를 몰라 소송에서 증거를 잘못 내면 의뢰인을 범죄자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송 상대방으로 만난 한 변호사는 우리 의뢰인의 잘못을 입증하겠답시고 의뢰인의 차량에 단 위치추적기에 찍힌 위치와 시간 정보를 준비서면에 빼곡히 적어 냈다. 한술 더 떠 그 장소에 잠복하며 찍은 의뢰인의 사진까지 증거로 냈다. 동의 없이 그 사람의 위치 정보를 수집하고 수집한 위치 정보를 이용해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 건 위치정보보호법 위반과 스토킹 범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법을 모르는 당사자가 그런 증거를 가져왔더라도 법률전문가인 변호사가 내지 말았어야 했다. 제출하는 것 자체로 범죄를 자백하는 꼴이 되니 말이다. 상대방 변호사는 그것이 범죄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그 로펌을 선임한 사람은 전과자가 되었다. 외도를 입증하기 위해 은밀한 신체 부위가 촬영된 파일을 모자이크 처리 없이 증거로 내는 일도 여전히 많다. 몇 년 전 외도 현장을 급습해 촬영한 상간녀의 나체 동영상을 법원 전자소송 사이트에 증거로 업로드했던 소송 상대방이 성폭력처벌특례법에 따른 카메라 촬영 등 범죄로 징역 2년의 전과자가 되는 것도 보았다. 역시 소송대리인인 변호사가 새로 생긴 성범죄에 대한 지식 없이 증거를 제출해 발생한 일이었다. 얼마 전엔 우리 의뢰인과 친구가 식당에서 밥을 먹는 모습이 촬영된 식당 cctv 영상 캡처본이 증거로 나왔다. 식당 사장과의 친분으로 cctv 영상을 확보한 듯싶었다. 그런데 사진에 찍힌 손님의 모습은 개인정보다. 식당 운영자는 영업상 취득한 손님의 개인정보를 그 동의 없이 제공한 것이 되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처벌된다. 역시 상대방에 변호사가 선임된 사건이었기에 안타까웠다. 증거도 법리적 검토를 거쳐 조심히 내야 한다. 그렇기에 소송을 의뢰할 땐 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 개인의 경력과 실력을 잘 따져봐야 한다. 인터넷에 도배되는 마케팅 펌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화려한 광고만 보고 변호사 선택을 잘못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니 안타깝다. /김세라 변호사

2025-09-18

AI와 상담한 소년이 죽었다

요즘 의뢰인들이 챗지피티로 검색한 자료를 갖다 주곤 한다. 얼마 전엔 소송을 하면서 법리적으로 풀리지 않은 쟁점이 있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해당 사건의 의뢰인이 “변호사님, 우리에게 딱 맞는 판례를 찾아냈어요”라며 챗지피티로 검색한 자료를 보냈다. 적혀있는 판례들은 정말 이 사건에 딱 맞으면서도 유리한 판례들이었다. 판례 번호까지 적혀 있길래 당장 판례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았지만 그런 판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사한 내용의 하급심 판례조차 없는 상태였다. 우리 법의 법리나 판례 면에서 AI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법률전문가가 AI 정보의 오류를 잡아낼 수 있지만 AI 가 99% 정확해지는 세상이 되면 오히려 1%의 잘못된 정보는 누가 찾아낼 수 있을까 싶었다. 누군가 그 1%의 오류를 찾아내도 사람들은 AI의 허위 정보를 더 신뢰하지는 않을까. AI의 잘못된 정보는 그 수요자의 인지 수준이 낮은 경우 더 큰 문제가 된다. 지난 대선기간 한 학습지 업체의 태블릿 패드의 질문란에 대선후보 한 명의 이름을 입력하니 ‘사형입니다’ 라는 답변이 나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언론에 이를 보도한 제보자는 “저 같은 경우 (아이에게) ‘이건 잘못된 거다’라고 얘기해 줬지만, 이건 저희 아이들만 쓰는 게 아니라 많은 아이가 쓰고 있고 그중에는 이걸 그냥 받아들이는 아이도 있을 것”이라며 우려했다. AI의 위험성이 객관적 정보에 대한 진위를 따지는 수준에서 끝나면 다행인데, 이제는 AI가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지배하는 단계까지 간 것 같아 문제다. 작년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14세 소년이 AI 챗봇과 대화를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소년은 챗봇과 주로 성적인 대화를 나누었는데 챗봇은 마지막으로 소년에게 “사랑한다, 가능한 빨리 내게로 와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얼마 뒤 소년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소년의 부모는 챗봇 개발사를 상대로 불법행위에 의한 사망 소송을 제기했고 플로리다 중부 연방지방법원은 “이러한 해로운 상호작용은 AI챗봇의 설계 결함 때문에만 가능하다”라고 판단하며 AI 개발사 측의 책임 가능성을 인정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16세 소년이 챗지피티와 대화하며 자살 계획을 구체화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이 있었다. 이렇게 심리 상담과 관련한 부작용 사례가 계속해서 발생하며 미국은 심리 치료를 목적으로 한 AI 사용을 제한하거나 사용자의 위험 징후를 감지하면 AI가 전문적 정신건강 서비스를 권고하도록 의무화하는 등 관련 제도 마련을 시작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AI 윤리에 관한 규제는 아직 무방비 상태다. AI챗봇과의 대화는 개인 간 통신에 해당해 이용자의 신고 없이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규제기관이 감독하기도 어렵다. 새 정부가 한국을 ‘세계 3대 AI 강국’으로 도약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다양한 AI 발전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어떤 분야든 발전과 성장은 안전· 보호와 함께 가야 오래갈 수 있는 법이다. AI 윤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아이들이 AI 친구와 대화하다 목숨을 잃는 일이 우리나라에선 없었으면 한다. /김세라 변호사

2025-09-11

학교폭력, 사과의 시효

배우 송하윤이 과거 고등학교 시절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의혹에 휘말리며 연예계와 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피해자는 당시 90분 동안 폭행을 당했고 이로 인해 송하윤씨가 강제 전학까지 갔다고 주장하는 반면, 송하윤씨 측은 사실무근이라며 강경한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누구 말이 진실인지는 수사를 통해 가려져야겠지만 이번 사건은 학교폭력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 하나를 상기시킨다. 적정한 시기에 사과와 합의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법적인 구제수단은 공소시효나 소멸시효라는 한계가 있다. 폭행죄, 상해죄에 적용되는 공소시효는 5년 또는 10년이고 민사적 손해배상청구권도 10년의 소멸시효가 있다. 송하윤 배우의 사건처럼 십수 년이 지난 사건이라면 피해자는 더 이상 법적인 구제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법률적 시효가 지나도 피해자의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의 기억은 또렷해지고 사과조차 받지 못한 억울함은 더욱 단단해진다. 학창시절 나에게 폭력과 고통을 안겼던 가해자가 수십 년 뒤 배우가 되어 좋은 이미지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활동하는 것을 보는 피해자의 고통이 어떠하겠는가. 연예계에는 학폭 논란으로 활동을 중단한 인물들이 많다. 배우 지수, 르세라핌 전 멤버 김가람 등이 대표적이다. 학폭의 가해자였다는 점 외에도 이들의 공통점은 사과와 합의의 시기를 놓쳤다는 점이다. 학폭을 가한 이후, 혹은 의혹 제기 후에라도 피해자와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누고 사죄와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피해자들이 “제때 사과만 있었더라면 공론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하소연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과하지 않았던 이들에겐 결국 법의 심판 대신 사회적 심판이 내려졌다. 실제 학교폭력 사건에서도 가해자 학생과 부모의 사과 한마디만 있었더라도 결과가 완전히 바뀌었을 것 같은 사건들이 있다. 변호사라는 게 결국은 법으로 해결해야 하는 직업이지만 여러 형사사건, 학교폭력 사건을 다루다 보면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이 담긴 사과였구나 싶어지는 것이다.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사고 직후 가해자의 내가 뭘 잘못했냐는 말 한마디에 울분이 맺혀 합의는커녕 가해자와 끝까지 만나려 하지 않기도 한다. 자녀가 학교폭력을 당했어도 아이들 일이니 가해 아이가 사과하면 문제 삼지 않으려 기다리다가 결국은 어떤 연락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학폭신고를 접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과와 합의가 이루어진 사건은 그렇지 않은 경우와 처벌의 수위도 천지차이다. 물론 피해자가 입은 고통의 잔여 정도도 천지차이일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사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어떤 사람들에겐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이 참 어려운 일인가 보다. 뉴질랜드와 캐나다는 학교폭력 같은 청소년 범죄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직접 대화하고 화해하는 것을 돕는 회복적 사법 절차를 제도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형사사건에서 형사조정절차가 있듯 학교폭력 사건에서도 사과와 합의를 도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학폭 사건을 징계 수위로만 볼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장래와 이후 학교생활을 위한 회복과 화해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때론 사과의 타이밍이 정의이다. /김세라 변호사

2025-09-04

혼전계약(프리넙)에 관하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두 번의 이혼을 했다. 지금의 영부인 멜라니아는 세 번째 결혼의 상대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혼을 할 때 늘 혼전계약, 그러니까 나중에 이혼을 하게 되는 경우 재산분할에 대해 미리 정해두는 계약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을 혼전계약, 흔히 프리넙(prenuptial agreement)이라고 한다. 트럼프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상대방은 원하지 않았으나 나는 프리넙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그것이 결혼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밝혔다. 미국은 대부분의 주에서 프리넙의 효력을 인정한다. 과거엔 미국도 혼전계약이 이혼을 조장하고 혼인의 가치를 훼손한다며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혼전계약이 부부 사이의 분쟁을 예방하고 혼인관계의 보호와 가정의 행복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떨까? 우리도 민법에 혼인 전 부부재산계약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긴 하다. 민법 829조는 부부가 혼인 전 서로의 재산 귀속, 관리 방식, 이혼 시 재산분할 방식에 대해 합의할 수 있고 혼인 후엔 법원의 허가를 받아 변경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이 있긴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혼전계약을 체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법원이 이혼 시 혼전계약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혼전계약을 규정한 민법 829조는 사문화된 규정으로 평가된다. 법적 효력이 인정되지 않긴 해도 이혼소송에서 혼전계약서는 판결의 중요한 참고자료로 사용된다. 따라서 재산이 많거나 복잡하다면, 혹은 상속재산이나 차명재산 등 특정 재산이 부부공동재산으로 혼입되는 것을 막고 이혼할 때 재산분할에서 빼고 싶다면 미리 혼전계약을 체결해 두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 우리도 차차 혼전계약 체결 사례와 관련 판례가 누적되며 프리넙 문화가 생길 것이라고 본다. 이혼전문 변호사로 많은 이혼 사건을 다루고 있는 필자는 혼전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결혼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고 본다. 여전히 결혼 전 모은 재산, 부모에게 받은 재산은 재산분할을 안 해줘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법원은 특유재산이라도 혼인 기간이 어느 정도 지속되었다면 배우자도 그 재산을 유지 보존하는데 기여했다고 보아 재산분할 대상으로 삼는데, 그것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재산분할을 대비하고 있지 않다가 이혼을 하며 예상치 못한 난관을 겪고 재산 문제로 치열하게 싸우곤 한다. 이혼하고도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 사람들이 재산 문제로 원수가 되기도 한다. 어떤 법률관계도 처음 관계를 시작하며 계약을 할 때 계약 내용을 철저히 정하고, 문구와 단어 하나하나까지 치열하게 고민해 계약서를 쓰는 것이 더 큰 분쟁을 예방하는 현명한 방법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충 계약서를 썼다간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싸움부터 날 수 있다. 일이 시작되어도 불필요한 마찰과 오해가 잦아질 것이고, 관계를 청산해야 할 땐 더 큰 분쟁으로 번지기도 한다. 서로 가장 호의적인 시기, 관계를 시작하는 시기에 합의 내용을 철저하게 정해두는 것이 관계의 안정적 유지와 본업의 집중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는 결혼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혼전계약의 효력을 점차 인정하는 방향으로 갈 필요가 있다. /김세라 변호사

2025-08-28

촉법소년

어렸을 때 필자는 장난전화를 많이 했다. 재밌었다. 포항 청림동에 살고 있었는데 심심하면 아무 번호나 눌러 장난전화를 걸고 끊어버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애 장난전화 단속 좀 시키라고 연락이 왔다. 청림동은 군부대 아파트라 집집마다 전화 추적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땐 부모님께 된통 한번 혼나고 말았지만 지금 같으면 이렇게 원치 않는 전화를 계속 거는 것은 스토킹 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 처음 고백하는 건데 조금 더 어렸을 땐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훔쳐 먹은 적도 있다. 더 고백할 것들이 많지만 여기까지만 하겠다. 어쨌든 만약 필자가 그때 스토킹 처벌법 위반과 절도로 전과자가 됐으면 어땠을까? 아마 인생은 암울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변호사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준법의식과 인지능력이 성숙하기 전에 저지른 일을 무조건 형사처벌 하자는데 동의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소년의 교화와 보호, 사회비용 면에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촉법소년 제도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 형법은 만 14세 미만인 자는 어떤 행위를 해도 형사처벌 하지 못하도록 규정한다. 이 14세의 촉법소년 기준은 1953년 제정 형법에서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얼마 전 서울 한 대형 백화점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글이 인터넷에 반복적으로 올라와 그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백화점 본관 건물 1층에 폭약을 설치했고 오후 3시에 폭파될 예정이라는 꽤나 구체적인 협박 글이다 보니 경찰 특공대와 소방대가 투입되었다. 백화점 이용객 4천여명이 대피하고 백화점 영업은 3시간 동안 중단됐으며 인근 상가들도 문을 닫고 대피했다. 이 일에 따른 영업손실은 백화점 측의 추산으로만 6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범인을 잡고 보니 제주도에 사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공공이 모이는 특정 장소를 폭파하겠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은 형법상 공중협박죄가 되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하지만 범인은 만 14세가 안된 촉법소년이므로 형사처벌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촉법소년을 개정하자는 목소리가 다시 나오고 있다. 촉법소년 제도는 필요하지만 그 연령 기준을 개정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70년 전 14세와 2025년의 14세는 육체적 정신적 성숙도가 다른데 1953년에 만든 기준으로 여전히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 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인 촉법소년이라면 형사처벌은 못 해도 소년법상의 보호처분은 가능하다. 소년법상 보호처분은 최대 소년원 구금까지 가능한 처분이므로 청소년을 무조건 전과자로 만들기보다는 지금의 촉법소년제도를 유지하되 소년법의 적용이나 다른 방법으로 교화 기능을 대신하자는 반대 의견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아이들에게 법과 범죄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다. 이 중학생이 협박글을 올리는 것은 공중협박죄라는 중범죄 행위이고 인터넷에 올려도 다 추적이 가능하며 너의 부모가 큰 돈을 물어줘야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학교에서 미리 배웠다면 어땠을까?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학교에서 영어 수학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보이스피싱, 중고사이트 사기, 성범죄, 스토킹, 명예훼손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좀 가르칠 필요가 있다. /김세라 변호사

2025-08-21

양육비를 받기 위한 방법

“나중에 양육비를 안 주면 어떡하죠, 변호사님?” 10년 넘게 이혼전문 변호사로 일하며 필자가 의뢰인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이다. 실제로도 힘들게 협의이혼이나 재판이혼을 하고 나서도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양육비를 받지 못해 고생하는 의뢰인들이 많다. 이혼 소송의 의뢰인이 다시 양육비 지급을 강제하기 위한 소송의 의뢰인이 되기도 한다. 민법 제913조에 의해 부모는 자녀를 보호하고 교양할 권리·의무가 있으므로 이혼하고 자녀를 키우지 않고 있는 부모에겐 양육비 지급 의무가 지워지는 것이다. 양육비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주는 것으로 정해진다. 그런데 이렇게 정기적으로 보내야 하는 양육비를 3번 이상 안 보내면 감치에 처해질 수 있다. 감치는 30일 이내의 기간 동안 채무자를 교도소 등 장소에 구금시켜 놓는 것이다. 양육비 채무자가 정기적 급여를 받는 근로자인 경우 양육비 채권자가 다니는 회사에 직접 양육비를 청구하는 방법도 있다. 그럼 회사가 채무자의 월급에서 양육비를 떼서 양육비 채권자에게 직접 보내준다. 이것이 양육비 직접지급명령 제도이다. 양육비 미지급자에겐 출국금지 처분과 운전면허정지 처분도 내려질 수 있다. 나아가 양육비 채무자의 이름과 나이 직업, 주소 근무지 등을 공개하는 신상정보공개 처분이 내려지기도 하고 양육비를 일시금으로 지급해야 하거나 법원에 양육비 지급을 담보하기 위한 일정 금액의 담보금을 공탁해야 할 수도 있다. 형사처벌도 된다. 양육비 미지급에 따른 감치 결정을 받고도 1년 동안 여전히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징역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양육비를 안 주다간 전과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금전채무도 이런 많은 제재 수단을 가지는 것이 없다. 아이들의 생계, 기본권과 관련된 양육비 채무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많은 강제 수단들이 있으므로 사실 정상적 경제활동을 하는 비양육자들은 양육비를 잘 보낸다. 문제는 자기 이름으로 받는 급여도, 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도 없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경제활동을 하며 사는 비양육자들이다. 그 자들에 대해서도 감치와 형사고소 등 위 수단들을 취할 수 있겠지만 여기엔 알아볼 시간과 노력, 또 법률 비용이 든다. 양육비를 못 받으며 홀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 대부분은 생계를 꾸리는 데 바쁜 사람들이기에 양육비를 받기 위한 강제수단이 많다는 법률 정보를 정확히 알기 힘들거나 알아도 법률 비용을 쓸 여유가 없다. 몰라서 못하고 알아도 못한다. 정부와 법원의 소극적 대응도 문제이다. 부모 명의 회사에 다니며 떵떵거리며 살면서도 양육비를 보내지 않고 있는 남성에 대해 감치 결정을 받았지만 법원은 감치 집행에 너무나 소극적이었다. 특히 대상자의 소재가 불분명하면 감치 집행이 거의 불가능했다. 모든 사회적 문제가 그렇겠지만 특히 양육비 이행 문제에서는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제도들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미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 양육비 이행을 위한 강제수단과 제도들이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실무 집행자들의 의지와 노력이 더해졌으면 한다. /김세라 변호사

2025-08-07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18세의 말자씨를 남 몰래 좋아하던 세 살 많은 남성 노 씨는 어느 날 할 말이 있으니 잠시 만나자며 말자씨 집을 찾아왔다. 거절해도 한참을 집 앞에서 버티고 있던 노씨가 그럼 가는 길이라도 알려달라고 조르자 그를 빨리 보내기 위해 말자씨는 집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큰 길까지 함께 걸어갔다. 으슥한 골목 어귀에서 별안간 노씨는 “키스만이라도 하자”라며 말자 씨를 덮쳤고, 넘어진 말자씨의 입을 강제로 맞췄다. 반항하는 과정에서 말자씨는 노씨의 혀를 물고 말았고 노씨의 혀는 1. 5센티미터가량 절단되었다. 말자씨의 행동은 정당방위일까, 중상해죄의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이는 1964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다. 당시 검찰과 법원은 말자씨를 중상해죄의 범죄자로 판단했다. 심지어 말자씨는 노씨보다 더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다. 노씨는 강제추행 또는 강간 미수의 혐의가 적용되지도 않은 채 특수협박 및 주거침입죄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되었지만, 중상해죄로 기소된 10대 소녀 말자씨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말자씨를 조사하던 검사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으니 책임져야지, 결혼해야겠네” 법원은 한 술 더 떴다. 남자가 덮친 데엔 길을 같이 걸어가 준 말자씨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했다. 이 최말자씨 사건은 당시 우리 사회의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과 성차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중상해죄 전과범으로 60년을 살아 온 말자씨는 8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단지 자신에 대한 불법적 폭력과 성범죄에 대항해 자기 몸을 지키려 했을 뿐이었던 10대 소녀는 자신에게 내려진 부당한 법의 잣대에 순응하지 않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며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성범죄에 대한 정의가 변해갔다. 비슷한 사건들이 발생했지만 성범죄에 저항하다 남성의 혀를 절단하고 만 여성들은 모두 정당방위로 무죄 판단을 받았다. 78세가 된 말자씨는 ‘56년 만의 미투’를 단행해 법원에 재심 청구를 했고, 5년의 쉽지 않았던 재심 청구 과정을 거쳐 결국 대법원의 재심 결정을 받아냈다. 지난 7월 23일 열린 재심 재판의 마지막 변론에서 검사는 말자 씨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그리고 검사는 “성폭력 피해자로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했을 최말자씨에게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드렸다. 사죄드린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1960년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사건들이 말자씨의 사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용기 있는 여성은 굴하지 않았다. 자신의 결백함을 위해, 또 후손들은 성폭력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조금이나마 실현하기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성폭행 당한 사건이 자신의 이름을 딴 사건으로 불리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고 재심 개시를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결국 재심 재판과 검사의 무죄 구형을 받아냈다. 살다 보면 저렇게 늙고 싶다 생각이 들게 하는 멋진 할머니들이 있다. 최말자 할머니 같은 멋진 할머니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일그러진 편견을 여전히 품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김세라 변호사

2025-07-31

이혼 후 배아이식을 결정한 엄마의 마음

배아는 정자와 난자의 수정이 이루어진 수정란이다. 사전적 의미로 수정 후 8주까지의 수정란을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 헌법재판소는 수정 후 2주 이내의 초기 수정란을 ‘배아’로, 그 이후의 단계는 ‘태아’라고 하며 배아와 태아를 구분한다. 배아와 태아를 구분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생명권의 주체로서의 권리를 수정 후 언제부터 인정할 것인지 문제 되기 때문이다. 2004년 부산의 한 부부는 병원에서 인공수정으로 배아 개체 3개를 얻었다. 이 가운데 하나가 부인의 몸에 착상됐고, 나머지 2개는 폐기되거나 생명공학 연구에 쓰일 처지가 되었다. 부부는 인공수정으로 힘들게 얻은 배아를 차마 실험실로 보낼 수 없어 “인공수정 배아를 인간이 아닌 세포 덩어리로 규정해 연구 도구로 취급하고, 보존기간이 지나면 폐기하도록 한 생명윤리법은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태아는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로 국가가 보호할 의무가 있지만, 수정 후 2주 이내의 배아는 헌법상 생명권이 인정되는 독립된 생명체가 아니라고 하며 수정된 배아를 불임이나 질병 치료 연구에 이용하고 수정 뒤 5년이 지나면 폐기하도록 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의 조항은 “인간의 생명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며 재판관 9명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했다. 배아와 태아의 구분을 수정 후 2주로 잡은 이유에 대해 헌재는 수정 후 ‘원시선’이 나타나기 전 초기배아는 인간으로 볼 수 없는데 이 원시선이 수정 후 14일쯤 지나 형성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정란의 원시선은 나중에 아기의 척추를 형성한다고 한다. 배우 이시영씨가 이혼 후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인공수정 했던 배아를 이식해 임신한 것이 화제이다. 전 남편의 동의 없이 아이를 가진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가, 전 남편이 아이에 대해 부양의무를 지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한창인 것 같다. 배아를 생성할 땐 배아의 생성과 이식에 대한 대상자 배우자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하고 이 동의는 사후에 철회할 수 있지만, 아마 이시영씨 부부는 5년 전 생성해 보관 중이던 배아의 처리 문제에 대해 따로 생각하지 못하고 이혼을 했던 것 같다. 이혼 후 배아의 보관기간 만료가 임박했고 이시영씨는 혼자 이식을 결정하고 임신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생부가 인지하거나 아이가 생부에게 인지 청구를 하면 된다. 인지가 되면 아이와 친부 사이에선 부자 관계에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주장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양육비를 받을 수 있고 아빠는 아이를 면접 교섭할 수 있으며, 상속도 이루어진다. 아이 둘의 엄마인 필자는 이 사건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과연 이시영씨가 이 배아를 폐기되어도 어쩔 수 없는 세포 덩이로 인식할 수 있었을까? 보관기간이 만료되어 이식하지 않을 거면 배아를 폐기하겠다는 병원의 통보를 받았을 때 “이혼했으니 폐기해주세요” 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엄마가 과연 몇이나 될까. 부모에겐 배아도 자식과 마찬가지일 수 있다. “수정 후 2주 이내의 배아는 생명권이 인정되는 독립된 생명체로 볼 수 없다”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사실 부모의 마음과는 조금 먼 곳에 있다. /김세라 변호사

2025-07-24

‘케이팝 데몬 헌터스’

몇 주 전부터 초등학생인 딸이 “엄마, 진짜 재밌는 만화가 나왔어, 꼭 봐”라고 해 보게 된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요즘 전 세계적 흥행으로 41개국에서 글로벌 영화 부분 1위를 기록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다. 줄여서 ‘케데헌’. ‘케데헌’ OST 6곡이 빌보드 핫 100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하더니, 그중 ‘골든’은 가상 아티스트 최초로 빌보드 1위라는 기록을 썼다. ‘케데헌’은 K-POP 그룹 ‘헌트릭스’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다.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의 혼을 빼앗아 온 악귀들을 물리쳐 온 헌터들은 아름다운 춤과 노래로 악귀를 물리치고 백성들의 혼을 지켜 온 히어로들이었다. 헌터들은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대를 이어 이어 왔고 현대에 들어와선 가수의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이번엔 악귀들이 이이제이로 근사한 보이 그룹의 모습으로 나타나, 멋진 외모와 춤, 귀에 쏙쏙 박히는 노래로 사람들의 혼을 빼앗으려 하고, 현재의 헌터스인 헌트릭스가 이를 막으려 싸우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다. 이 영화는 미국 자본과 일본 제작사에 의해 만들어진 미국 영화지만 케이팝 스타와 한국인, 한국 문화, 거리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이질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 리더 루미가 몸이 허해져 삼계탕을 먹으러 간 식당에선 숟가락과 젓가락이 냅킨 위에 놓여 있고, 삼계탕엔 파채가 들어가 있다. 주인공 루미와 진우는 낙산공원 성곽길과 북촌마을에서 만난다. 헌트릭스 멤버들이 콘서트에서 에너지를 쏟기 전 먹는 김밥과 떡볶이, 순대, 컵라면과 같은 분식들도 잘 표현되어 있고, 멤버들이 일상생활에선 수면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까지 한국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인가 싶을 정도로 우리의 실생활과 문화를 잘 묘사했다. 주인공 루미와 진우의 메신저 역할을 해주는 호랑이와 까치는 우리 민화 ‘호작도’에서 따온 모습인데, 이런 흥행을 짐작하지 못했던 제작사에서 굿즈 제작을 하지 않은 탓에 국립중앙박물관 민화 호랑이 굿즈가 엉겁결에 대박을 터뜨렸다는 소식도 있다. 한국의 모습 그대로가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세계를 열광하게 하는 세상이 되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국의 모습 그대로이기만 해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음이 이번 ‘케데헌’ 열풍으로 증명됐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을 창출하여 세계의 모범이 되는 나라가 되기를 희망한다” 라는 김구 선생의 말씀이 떠오른다. 칼로 이긴 것은 이긴 자도 진 자 모두 행복할 수는 없고, 힘으로 이긴 것도 소외되고 짓밟히는 누군가를 남기기 마련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인 미국의 대통령은 요즘 돈으로 다른 나라를 이겨보려 하는 듯한데, 미국의 이 관세 쇄국 정책은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힘들게 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통보 받은 관세 시한을 앞두고 고심 중이고, 트럼프의 말 한마디에 전 세계 환율과 증시가 출렁거린다. 문화로 이기는 것만이 모두가 행복하게 이기는 길인가 보다. 대한민국이 계속해서 문화로 이기는 나라가 되길 희망한다. /김세라 변호사

2025-07-17

양육비 선지급제

양육비란 미성년 자녀를 보호·양육하는데 필요한 비용으로, 주로 이혼한 부모 중 비양육 부모가 양육 부모 일방에게 지급한다. 양육비는 아이가 먹고 입고 자는 기본적 생활을 누리며 자라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다. 간혹 양육비를 아이를 키우는 전처나 전 남편에게 주는 돈으로 생각하며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차피 애 엄마가 다 쓸 텐데 양육비를 보내는 건 애 엄마 배만 불리는 짓이라고 말하는 의뢰인이 있으면 단호하게 말한다. “아이를 위한 돈입니다. 무조건 줘야 하는 걸로 생각하세요” 아이를 직접 키워보면 월 소득의 20% 선에서 정해지는 양육비가 사실 대단히 큰돈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성과 고뇌와 육체적·정서적 노동에 더해 꽤 많은 돈까지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는 양육비 지급 이행률을 높이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법과 제도를 마련해왔다. 지금 양육비 지급 채무는 다른 금전채무와는 완전히 다르게 취급된다. 불이행 시 비양육자의 근무 회사에 바로 청구할 수 있고, 교도소에 감치나 과태료 부과, 형사처벌, 운전면허 정지와 출국금지, 신상정보공개까지 다양한 제재수단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양육비 지급 이행률은 낮은 수준이다. 최근 양육비 지급을 위한 새로운 강제수단이 하나 더 생겼다. 양육비 선지급제도가 이번 달 1일부터 시행된 것이다. 양육비 선지급제란 양육비를 못 받고 있는 한 부모 가정을 대상으로 국가가 자녀 1인당 월 20만원을 먼저 지급해주고 추후에 비양육자에게 회수하는 것이다. 양육비 선지급을 받기 위한 요건은 첫째, 양육비 채무자가 선지급 청구를 하기 직전 3개월 혹은 과거 3회 연속해서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았어야 하고, 둘째, 양육비 채권자가 속한 가구의 소득 인정액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중위소득의 150% 이하여야 한다. 2인 가구 기준으로 중위소득의 150%는 약 589만 원이다. 셋째, 그동안 양육비 채권자가 못 받은 양육비를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어야 하는데, 양육비이행관리원에 양육비 이행확보에 필요한 법률지원을 신청했거나 가사소송법 등에 따른 양육비 이행확보 절차를 진행한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면 양육비를 받지 못하던 양육자는 국가로부터 미성년 자녀가 성년에 이를 때까지 자녀 1인당 월 20만 원 한도의 양육비를 선지급 받게 된다. 양육비를 못 받고 한 부모 가정의 입장에서 국가의 양육비의 선지급은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겠지만 허점도 존재한다. 양육비채무자가 1회 아주 소액이라도 양육비를 지급하면 연속 3회 양육비 미지급 요건이 충족되지 않고, 나중에 양육비가 지급되면 국가의 선지급은 중단되기 때문에 또 신청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런데 사실 실제 양육비를 못 받는 사람들은 소송비용이 없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기존에 있던 양육비 제재 수단을 하나도 취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청 비용을 지원하거나 양육비 채무자의 재산조회를 쉽게 할 수 있게 해주는 방안, 또 실제 집행에서 거의 사문화되다시피 한 감치의 실효성 확보가 필요하다. 좋은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원래 있던 좋은 제도들을 잘 활용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김세라 변호사

2025-07-10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

반려 인구 1500만의 시대, 이제 우리도 인구 셋 중 하나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동물보호와 동물복지를 위한 제도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개 식용금지법이 2027년 2월부터 전면 시행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2월, 이전보다 강화되는 동물보호 방안들이 담긴 ‘동물복지 종합 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세부적인 동물보호 방안들을 아우르는 법 개정안이 하나 있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를 규정한 민법 개정안이다. 21대 국회 본회의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되었던 이 법안은 작년 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다시 발의되었지만 여전히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이 한마디가 법전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법률관계를 구성하는 권리라는 것을 다룬다. 우리 민법은 이 권리의 주체를 자연인과 법인으로, 권리의 객체는 물건으로 한정한다. 도롱뇽이 원고가 되어 제기되었던 천성산 터널 소송이 각하되었던 이유도 도롱뇽은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권리의 객체는 유체물 및 전기 기타 관리할 수 있는 자연력인데, 이것을 민법은 ‘물건’이라고 칭한다. 동물은 법률적으론 권리의 객체 곧 물건일 뿐인 것이다. 동물이 책상, 탁상시계와 같은 물건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주인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던 요크셔테리어를 차량으로 충격해 피해 견이 평생 치료받아야 할 뇌 손상 상해를 입은 사건에서 법원은 가해자에게 해당 연령의 요크셔테리어 종의 시가 약 100만 원과 정신적 손해배상금 50만원을 지급하라고 명할 뿐이었다. 피해 견은 15년 이상을 함께 산, 주인에게는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반려견이 평생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어도 해당 견종의 시가를 넘는 치료비는 배상받을 수 없다. 물건을 손괴했다면 물건의 시가를 넘지 않는 한도에서만 수리비를 배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과 동물을 똑같이 취급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의 상실로 정신적 고통을 겪더라도 그저 식탁 다리가 하나 부러진 것과 마찬가지로 취급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를 민법에 규정하면 동물은 단순한 권리의 객체인 물건도, 권리의 주체인 자연인도 아닌 독자적 지위를 얻게 된다. 그러면 동물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피해에 대한 배상도 실제 입은 고통에 보다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고, 동물이 물건 지위에서 벗어나는 만큼 동물보호나 생명존중을 위한 다양하고 창의적인 제도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네덜란드 등 선진국에서는 법에 동물의 법적 지위를 물건이 아닌 것으로 규정한지 오래다. 미국은 주인이 사망할 경우 남겨진 반려동물의 돌봄을 위한 유산 신탁 제도까지 법제화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 민법에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말을 넣을 때가 되었다. 그리고 더 나은 동물보호를 위한 단계로 차근차근 나아가면 된다. 가장 약한 생명인 동물에 대한 존중과 인식 변화는 곧 사람의 생명에 대한 귀히 여김으로, 또 우리가 사는 지구와 생태계에 대한 귀히 여김으로 나아갈 것이다. /김세라 변호사

2025-07-03

억울한 법에 대한 보수

필자는 5년째 경북도청 행정심판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경북도청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행정심판위원회에선 보통 20건에서 30건 정도의 사건이 처리되는데, 매번 빠지지 않고 여러 건이 올라오는 사건 유형이 있다. 바로 청소년에게 술을 판매해 행정처분을 받게 된 사건들이다. 하지만 불법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것이 청소년들이 신분증을 변조하거나 도용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증명사진도 보정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신분증상의 사진으로 실물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점을 청소년들이 악용하곤 했다. 길에서 주운 신분증을 친구들끼리 돌려가며 사용하고, 언니나 형의 신분증을 도용하거나, 심한 경우엔 신분증의 사진 부분을 변조하기도 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런 경우에도 일단 청소년임을 알지 못한 채 주류를 판매한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고 보는 구조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사업주들이 더욱 철저히 미성년자 연령 확인을 할 것이라는 입법 목적이었겠지만 실제로는 억울한 사업주들이 생겨났다. 청소년에게 주류를 판매한 것이 단속에 적발되면, 경위를 묻지 않고 일단 행정처분이 부과되었고, 사후적으로 청소년보호법 위반으로 고발된 형사 사건에서 무죄나 선고유예 판결이 나와야 행정처분 취소가 가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업주들은 이를 모른 채 몇십만 원 수준의 벌금형은 일단 받아들이고 영업정지 같은 행정처분에 대해서만 불복을 시도했기 때문에, 행정심판까지 왔을 땐 벌금형의 형사처벌이 확정된 경우가 많았다. 설사 형사처벌 확정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대부분이 소상공인인 사업주들에겐 변호사 비용을 들여 형사재판에 대응하고 무죄 혹은 선고유예 판결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몰라서 안하고 돈이 없어 못했다. 결국 형사처벌이 확정되면 법률상 행정처분도 취소될 수 없는 악순환이었다. 변조·도용한 신분증을 들이민 청소년에게 속은 사업주들이 1개월 이상의 영업정지 또는 그 영업정지 기간 매출에 상응하는 과태료 처분을 맞고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필자 역시 행정심판 주심으로 심판할 때 이런 사건은 너무 억울해 보여 최대한 구제해주고 싶었지만, 법률이 명문으로 행정처분을 못 박아 놓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억울한 자영업자들에 대한 구제책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드디어 작년 관련된 법이 개정되었다. 판매자가 청소년의 신분증 위·변조, 도용으로 청소년인 사실을 알지 못했거나 폭행 또는 협박으로 신분증 확인을 하지 못한 경우엔 행정처분을 면제할 수 있도록 식품위생법 등이 개정된 것이다. 이제라도 법 개정이 이루어져 다행이지만, 선량한 자영업자들의 생계를 옭아매는 억울한 법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자영업자 폐업률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자영업자 대출 연체율도 1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민생 회복을 위해선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역화폐를 통한 내수 진작도 필요하겠지만, 자영업자들의 억울한 피해를 발생시키는 이런 법률들을 찾아내고 보완하는 일도 내수 진작 못지않게 중요할 것이다. /김세라 변호사

2025-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