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쓰신 작품 가운데 장편소설 ‘박명’이 있다. 조선일보에 1938년 5월 18일부터 1939년 3월 12일까지 연재했다. ‘박명’이라 함은 팔자가 기구하다, 복이 적다, 요절할 운명이다 같은 뜻을 갖는다.
이광수 소설 ‘재생’의 주인공 이름과 이 소설 주인공 이름이 같다. 순영이다. 저 강원도 인제 가평 사람이다. 어려서 어머니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고생하며 큰다. 은인을 만난 줄 알았더니 서울 사람 송 씨는 기생도 아니 만들고 인천 색주가에 순영을 팔아넘긴다.
옛날식 주인공이어서 순영은 아름답고 지순한 여성이다. 색주가라 해도 함부로 처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사이에 순영은 ‘꽃샘’에 걸렸다고들 한다. 이름하여 매독이다. 손바닥에 엿이 묻었다고들 한다. 손님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낸다는 것이다. 이 둘이면 벌써 순영은 사람 행세를 할 수 없다.
이 인천 색주가는 세상의 축도다. 세상은 사람들 모여 사는 곳이다.
옛날 어렸을 적에는 이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진 줄로만 알았다. 이것을 가리켜 ‘내 맘 같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가며 그렇지 않은 줄 알게 되니, 이것을 가리켜 ‘내 맘 같지 않다’고 한다. 세상에는 이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 일들이 많다.
세상은 또 서로 돕고 수긍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살아보면 그렇지 않은 일이 많다. 그래서 너나없이 좋은 세상 만들자는 염원을 갖지만 정작 그것이 내 일이 되고 보면 어떻게든 자기 이익과 목숨을 위해 사생결단이라도 낸다.
살아야 하기에, 더 낫게 살려고, 편을 짓고 일을 도모하다 못해 없는 일까지 지어내는 일도 많다. 옛날부터 소설에 그렇게 억울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도 현실의 일로 깨닫지 못하고 내 일 아니라 생각을 했건만 리얼리즘을 믿으면서도 정작 소설이 현실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었다. 여럿이 작당을 해서 있는 일을 없다 하고 없는 일을 있다 하는 일이 그렇게도 많다. 자신들이 옳다고 여겨서 그러기도 하지만 옳지 않은 줄 알고 느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을 벌인다. 그런 때에야말로 그네들의 수법은 교묘하거나 그악스럽고 악착스럽게 된다.
소설에서 순영은 억울하게도 누명을 쓴 것이었다. 새로 들어온 순영의 생김새며 마음씀이 먼저 있던 이들의 시샘을 산 것이었다. 말은 지어내기도 쉽고, 여러 사람이 다 그렇다 하면 꼼짝없이 몰리고 마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 함이 딱 그럴 것이다. 순영은 끝내 억울함을 안고 차라리 죽어버리려 한다. 하지만 작가는 순영을 살려 그 억울함은 풀지만 또 다른 시련에 휘말리도록 한다.
어째서 만해는 이렇듯 순영으로 하여금 박명(薄命)한 삶을 살게 한 것일까? 먼 이후의 일들도 미리 짚어본 것일까?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의 일을 놓고 한쪽으로 몰아간다. 그런 ‘흉책’은 분명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도 살았다. 더 무서운 일들도 있었겠다. 그렇게 위안을 삼으려 해도 세상이 지금 끔찍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도 버팅키고 살아가야 하겠다. 우리 모두.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