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이 물음 앞에서 생각해 본다.
일제 강점이 말기로 접어들어 1940년이 되자 신체제론이 대두된다. 생산과 소비를 국가주도로 행한다는 것인데, 천황을 극점으로 해서 개인이 국가의 수족이 되는 체제를 구축하려 한 것이었다. 이 일본식 통제경제가 당시의 한국인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는가는 채만식이나 김남천의 몇몇 사소설 계열 작품에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는 강점기 내내 조선총독부는 사회주의자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그들의 조직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염상섭의 ‘무화과’나 심훈의 ‘불사조’ 같은 장편소설에 검열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경찰서 내 고문 같은 가혹행위 장면이 나타난다. 박헌영이나 제4차 공산당수 차금봉 같은 이들이 혹독한 고문 끝에 실성 단계에까지 이르고 또 죽어버리기까지 한 것은 그 시대의 야만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도 사회주의를 적대시하고 추적하고 적발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들의 천황제 파시즘이라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이 추종한 레닌이즘의 좌익 전체주의와 양상이 얼마나 달랐던가는 미지수다. 생산과 유통 소비에 이르는 과정을 국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한다는 것, 계획통제한다는 점에서 천황제 파시즘이라는 국가자본주의는 소비에트 국가사회주의와 다를 바 없었지 않을까? 그때 천황제 파시즘 아래서 사람들은 어떤 실질적인 자유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자본주의는 그 통제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국가사회주의와 다를 바 없어진다. 나중에 백군을 진압한 레닌은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구사했다. 그것은 전시공산주의의 철저한 통제를 풀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좌익 전체주의 정권이 시장 원리를 도입하면 적어도 외견상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와 완전히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된다.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라면 오늘날의 한국사회도 얼추 이에 들어맞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이른바 변혁론이 유행할 때 그 논자들 중에는 한국사회가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도 말했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체질상 확실히 국가 주도적 성격이 강했고, 지금 그 성격이 변화되고는 있지만 대기업, 재벌기업도 아직까지 국가가 이렇게 저렇게 불러낼 수 있는 것을 보면 국가자본주의에서 크게 멀지 않다.
문제는 이 국가자본주의 한국사회의 권력 구성 방식에 지금 심대한 변화가 야기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변화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고 결코 내적, 자율적이지만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1987년의 국민주권 혁명으로 획득한 자유가 무척 컸고 세대에서 세대로 그 자유를 충분히 누려왔기 때문일까. 자유에 ‘취한’ 국민들은 어떤 기이한 선거 ‘절차’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세상이 변한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런 이들이 많다.
확실히 지난 6월 3일의 이상한 일까지 경험한 작금의 한국 사회는 바야흐로 ‘국가적 자본주의’를 넘어 어디로 가는지 모를 길에 접어든 느낌조차 없지 않다. 무섭고 두려운 느낌. 이것은 단지 몇몇 사람들만의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