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언제나 옳기만 할 수는 없다. 그의 생각, 결정, 행위에는 늘 제대로 되지 못한 것들이 뒤섞여 있게 마련이다. 진리였던 것이 환상임이 밝혀지고 환영 속에 가려진 진실이 폭력의 장막을 찢고 밝은 제 모습을 나타낸다.
벌써, 시월도 넷째 주씩이나 되었다니. 그토록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답답한 시간이,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여 벌써 12월도 한 달 몇 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니. 그는 그 세월을 다 어떻게 견뎠을까. 세상이, 진실이 거꾸로 뒤집힌, 피가 거꾸로 솟아도 시원찮을 세월을 어떻게 다 참아낼 수 있었을까. 바깥을 버젓이 돌아다니는 사람도 이렇게 고통이 폐부를 찌르는데, 그 추운 겨울과 뜨거운 여름의 거짓과 적반하장을 어떻게 다 참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가을이 깊어가자, 바야흐로 세상은 다시 바뀌고 있다. 시작인가 싶던 게 끝이 보이고, 영원히 감추어져 있을 것만 같았던 게 어느새 바닥이 드러나 보인다. 화려한 화장이 벗겨지고, 사람들은 거짓된, 추악한 ‘맨 얼굴’을 드디어 알아차리고들 있다. 그 사이에, 가담과 추종과 배신과 비겁과 움추림의 몸짓들, 표정들이, 거짓 ‘언어술사’들의 분식조차 무력화된 자리에서, 벌거벗은 제 알몸을 부끄러워들 한다.
고독은 참 좋은 친구이지만 벌써 내 곁에서 떠나갈 채비를 한다. 어느 것 하나 진짜인 게 없는 이 가짜 체제, 세상 속에서 벌써 그게 가짜임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반갑지 않다. 진정으로 좋은 것은, 진실에 가까운 것은, 하늘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아주 적은 것처럼, 진실을 깨닫고 믿는 사람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 좋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마치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써놓고 혼자서만 입안에서 공 굴리며 기뻐하다 단물이 다 빠져서야 남들 보라고 내놓는 외로운 시인처럼, 나는 더 오래, 황홀한 고독에 머물러 있고 싶다.
그 겨울에서 이 가을에까지 나는 지독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것은 증오와 반목의 힘으로는 세상을 옳게 세울 수 없음을, 불의로는 정의를 이룰 수 없음을 말해온 것뿐이었다. 세상은 언제까지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싸움을, 폭력을, 거짓을 동원할 텐가? 어찌하여 이상이라는 이름 아래 자유가 짓밟혀야 하고, 구원이라는 목표 아래 복종이 강요되어야 하고, 진실이라는 선전 속에 거짓이 설파되어야 하는가? 그 비속한 위선이 어찌하여 수단을 얻고 조력을 받아 풍랑 속에 든 배를 가라앉히려 하는가?
어느새 미친 폭풍우 불어닥치던 바다에 많고 밝은 기운이 감돌고 있으니, 이는, 비의(秘意)의 알레고리처럼 느끼 수 있는 자만 느끼는 것인가? 나만 이 기운을 느끼는 것인가?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 반대로 기대에 찬 눈빛을 주고받는 것, 태평양 넓은 바다 너머에서, 남지나 해상의 소문 너머에서 이곳을 향해 불어오는 새 바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새벽까지 올해 작고한 김영현을 읽었다. 그의 ‘열세 번째 사도’(푸른역사, 2023)를 다시 넘겨보며 그도 무척이나 외로웠으리, 생각한다. 자신이 믿고 추구한 것들이 보물의 사상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그는 ‘예정된 악인’ 유다의 운명을 안타깝게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잠깐 눈 붙이고 새로 뜨니, 계절이 정녕 새로워지려는가. 어둡고 우울하던 하늘이, 반짝, 개어 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