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열 시. 장소는 보신각 옆 할리스커피. 스물 남짓한 ‘창작교실’ 사람들이 일찍부터 모였다. 날씨는 그 뜨거운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선선하다. 가끔 비도 뿌린다는 예보다.
오늘은 청계천 문학기행 날이다. 보신각이 기행의 출발점이다. 채만식 소설 ‘냉동어’에서 주인공 대영이 보신각을 가리켜 낡은 시대가 새로운 시대와 동거를 하고 있는 궁상스럽고 초라한 꼬락서니라 했다. 그러나 오늘 보신각은 한결 늠름하다.
종로 네거리 보신각 길 건너편에는 종로타워 33층짜리 빌딩이 높이 솟아 있다. 그곳이 옛날 ‘민족자본’ 화신백화점 자리다. 또 다른 길 건너편에는 전봉준이 두 팔을 묶인 채 앉아 있다. 죄인을 가두는 전옥서가 영풍문고 자리에 있었고 여기서 전봉준이 저형당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광교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광교 건너편에는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생가가 있었다. 다옥정 7번지, 그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지금은 청계천이 넓혀져 이 번지수는 청계천 속에 들었다. 구보는 한낮에 청계천변 다독정 집에서 나와 광교 건너 보신각 있는 종로 네거리 쪽으로 걸어가게 된다.
광교에서 우리는 계단으로 천변 아래로 내려간다. 가는 비가 흩뿌리는 청계천은 한결 운치가 있다. 수표교 쪽에서 다시 천변 위로 올라서 다리를 건너자 오늘 순례의 주된 장소라 할 전태일 기념관이다.
청계천은 문학사적으로 세 개의 심상(이미지)을 갖는다. 먼저, 청계천은 특히 북악산 밑 백운동 계곡과 청풍계 쪽의 백운동천, 인왕산 아래 수성동 계곡에서 발원한다.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이 청풍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청계천은 청풍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문인들의 문학적 흐름과 관계가 깊다.
다음, 청계천은 작가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나 장편소설 ‘천변풍경’을 통해 구축한 불결함과 가난, 그리고 이를 매개로 연결된 서민들의 ‘공동체’적 삶과 관련이 깊다. 이러한 청계천 이미지는 해방 후, 6·25 전쟁 후에까지 연결된다.
마지막 하나가 전태일의 청계천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과 대구, 부산 등에서 성장한 전태일은 청계천 평화시장에 ‘시다’로 취직하게 되면서 운명적인 길을 걷게 된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84년은 그의 뜻을 계승하고자 한 ‘청계피복노조’가 합법성 쟁취를 위한 싸움을 가열차게 벌이던 때였다. 뜻도 제대로 모르고 시위를 나갔다 전경에 쫓겨 고가도로 밑으로 뛰어내린 기억이 선명하다.
어렵고 어지러운 때면 이 전태일이라는 존재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 어째서 그의 죽음은 여전히 숭고하게 느껴지는가? 희생을 ‘내세운’ 다른 흔한 죽음들과 달리. 이것이 나의 지속적인 질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나고 죽는 것만큼 근본적인 문제가 없다. 인간은 아직까지는 반드시 죽어야 할 존재이므로,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전태일기념관을 나와 세운상가까지 걷다가 버스를 타고 버들다리(전태일다리)로 간다. 다리 위 전태일 반신상을 ‘참배’하는 것이 마지막 코스다. 세 시간 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다시 배우고 생각한 길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