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참 빠르다. 어수선한 시국 따라 시간은 더 가파르게 흐른다.
안후이성, 난징에 갔다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주일 훌쩍 넘겼다. 다녀오고 나서는 한 이틀 끙끙 앓았고, 그 사이에 이효석 축제에 학술대회 지원 못 해준다는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토요일에는 탈북작가와 함께 하는 ‘나도 작가다’ 창작교실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난 해에 이어 두번째,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새롭게 하고자 했다. 북한에서의 삶의 문제는 나의 중요한 문학 주제 가운데 하나다.
그 사이에 어느 아침에 갑자기 혈뇨가 빨갛게 흘러 이곳저곳 병원을 알아보기도 했다. 건강하시던 부친은 돌아가실 때까지 암을 무려 네 개나 앓으셨는데, 그 중 하나가 신장암이셨다.
일요일에는 ‘길 위의 인문학’. 폭염 속에서 나와주신 분들 서른다섯 분은 될 것 같은데, 서촌 ‘이상의 집’에서 ‘윤동주 하숙집’ 지나 ‘윤동주 문학관’, ‘환기 미술관’으로 순례를 한다. 지금 서울은 폭염. 저녁에는 한증막이요, 아침부터 불볕더위다. 수화 김환기의 파란 추상화 앞에 서자 이제야 마음이 차분함을 얻은 듯한 느낌.
그러자 이제서야 중국 떠나기 직전 집에 배달되어 온 소포 하나가 생각난다. 영문 모를 큰 박스가 부쳐져 왔는데, 최근에는 ‘북아일랜드’에서 청계천 책들 주문한 것 외에는 박스가 올 일이 없다.
어렵사리 무거운 소포를 들여놓고 열어보니 금방 밭에서 따낸 것 같은 옥수수가 한가득. 이게 뮌가, 하면서도 금방 떠오르는 얼굴은 강원도 정선 사는 시인 친구, 시집 ‘사랑의 환율’을 펴낸 이다. 갓 밭에서 따낸 푸른 잎 옥수수를 보기 얼마 만이던가.
옥수수 하면 떠오르는 것은, 옛날 대전 변두리 태평동에 59평 밭을 어렵게 장만하신 아버지가 옥수수, 감자, 깨 같은 농사를 지으셨던 일. 어렸을 때 참외밭 같은 작물 가꾸던 솜씨로 어느 해 옥수수가 얼마나 탐스럽게 다닥다닥 열렸는지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고는 이상의 수필 ‘산촌여정’에 등장하는 옥수수. “옥수수밭은 일대 관병식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여기서 ‘갑주’란 갑옷과 투구. 옥수수들 늘어서 있는 것 보고 군인들의 관병식, 곧 열병식을 떠올리는 작가 이상의 ‘문명스러움’이라니.
나면서부터 쭉 시골에 살아 ‘옛날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들은 얼마나 귀한가.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곳으로 이민 가 억척스럽게 새 삶을 개척해 오면서도 습속이나 가치관은 옛날 60년대나 70년대나 80년대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귀한가. 서울을 경험하고도 옛날 고향으로 돌아가 잃어버릴 수도 있을 ‘옛날 스러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귀하디 귀한가.
손수 농사 지은 것을 멀리 있는 사람 생각나 우체국을 찾아 보낼 수 있는 ‘옛날 사람’을 생각하면, 하루하루 번잡하기만 한 서울의 생활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이냐.
그러고 보니, 나는 저 논산에 내려가 농사 지으며 살아가는, 북에서 떠나온 귀한 옛날 사람 작가도, 한 분, 알고 있었다.
논산 사람의 그 묵직한 ‘옛날스러움’이 더없이 귀해 보이는 날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