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계절이 엇갈리는 대륙의 초입에 서 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머물렀던 뉴욕은 새로운 계절의 활기로 가득했다. 거리마다 활기가 넘실거렸고, 기운이 부드럽게 감돌았다. 하지만 긴 비행 끝에 도착한 페루 리마는 이미 차가운 가을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뚜렷한 사계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반대의 계절이 시작되는 낯선 땅에서 나는 묘한 떨림을 느꼈다.
밤의 공항은 낯설었고, 언어와 표정 또한 생경했다. 그 낯섦은 내 안의 고요마저 흔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낯섦 속에서 오히려 오랜만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익숙한 공간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기운이었다. 아마도 자발적 고립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에너지일 것이다.
나는 이번 여정을 ‘자발적 고립’이라 명명한다. 가족을 떠나 홀로 다른 대륙을 밟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내는 늘 내 곁에서 삶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던 소중한 동반자였다. 그녀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은 그 자체로 용기가 필요했고, 동시에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했다. 체력의 한계를 핑계 삼아 늘 익숙한 일상에 안주하려 했던 아내와는 달리, 나는 이번에는 홀로 떠나는 길을 택했다. 그 고립 속에서 잊고 지냈던 ‘진정한 나’와 마주하고 싶었다.
자발적 고립이라는 표현은 다소 쓸쓸한 울림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도피가 아닌 귀향이다. 익숙한 이름과 역할,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잊고 지냈던 내 안의 진실한 목소리를 되찾기 위한 귀향. 그 목소리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는 시간이 바로 이번 여정이다.
정든 가족의 품을 떠나 홀로 떠나는 트레킹이나 여행과 같은 자발적 고립은 일상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 자발적 고립의 가장 큰 장점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가족이나 타인의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과의 대화에 몰두하며 내면을 깊이 성찰할 수 있다. 또한, 일상에 지친 심신을 평온함 속에서 재충전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홀로 떠나는 여행은 자신감과 독립심을 키워준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 예상치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까지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한다. 낯선 환경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은 독립심을 길러주고 “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준다. 더불어 평소에는 미처 몰랐던 자신의 장점과 단점, 진정한 취향 등을 발견하며 한층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정신 건강을 증진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트레킹이라는 활동 자체가 지닌 치유력과 고립된 자연 환경이 긍정적인 시너지를 발휘한다.
디지털 기기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 속을 거닐며, 외부의 자극 대신 오감을 통해 자연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 이는 마음챙김(Mindfulness) 능력을 향상시키고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웅장한 자연 경관과 고요함 속에서 걷는 것은 심신을 안정시키고,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특별한 치유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므로 자발적 고립을 통해 떠나는 혼자만의 트레킹은 단순한 여행을 넘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내면을 성장시키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대학에서 수십 년간 학생들을 가르쳐온 교육자이다. 그 길은 책임과 헌신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후회는 없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오면서 언제부턴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잊고 살았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교수로서의 역할은 분명했지만, 그 모든 가면을 벗어던진 ‘본래의 나’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페루의 땅은 낯설지만, 묵직한 침묵이 감도는 곳이다. 잉카의 돌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오래된 돌벽에 새겨진 고요와 조우한다. 그 고요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이곳까지 왔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문득 가족을 떠올린다.
가족이란 과연 무엇일까? 과거에는 주저 없이 ‘헌신’이라고 답했다.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희생하는 것이 가족의 의미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가족은 단순히 전통과 의무라는 무거운 짐만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각자 고유한 리듬으로 살아가는 작은 우주와 같다. 내가 그들을 보듬는 방식 또한 이제는 ‘헌신’뿐만 아니라 ‘경청’이어야 함을 깨달았다.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따뜻한 마음, 그것이야말로 가족의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그 해답은 아마도 이 여정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거창한 깨달음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잉카의 산책길 위를 스치는 바람처럼, 혹은 낙엽처럼 조용히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작은 깨달음 하나하나가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하나로 이어줄 것이다. 고립은 더 이상 고통스러운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나를 회복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떠남은 끝이 아닌, 진정한 나를 되찾기 위한 새로운 시작임을 잉카의 돌길 위에서 깨달아간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고립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가장 깊고 진실한 귀향임을. 떠남은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아닌,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 과정임을.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길 위를 걷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역설적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