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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제는 선행 기사가 줄을 잇기를

김규인수필가 한 사람은 수레를 끌고 다른 사람은 우산을 씌워주며 나란히 걸어간다. 자신의 한쪽은 비를 맞으며 우산을 씌워주는 여인의 따뜻한 마음이 뜨겁게 다가온다. 수레를 끄는 노인의 느린 속도에 맞추어 함께 한참을 걷는다. 남을 위해 함께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몸은 비에 젖어도 마음은 따뜻한 선생님의 선행에 우리는 감동으로 물든다.그동안 여당과 야당의 양보 없는 줄다리기로 피로감은 늘어나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우리의 삶을 더 팍팍하게 한다. 거기에 더하여 미국과 중국의 경제 패권 다툼은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경제를 힘들게 한다. 그런 가운데에도 정치가 권력만을 바라볼 때 서민들의 삶은 기댈 곳을 잃는다.이제는 감정 노동자가 되어버린 교사는 점점 죄어오는 족쇄를 풀고자 거리로 나선다. 동방예의지국이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는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방해하는 집요한 일부 학부모들의 요구는 교사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하는 교사들의 현실에 우리는 너무 무기력하다. 학생들의 잘못한 행동마저도 지적할 수 없는 교사의 오늘이 그저 참담하기만 하다.방송과 신문은 연일 새로운 기사를 쏟아낸다. 신문 지면을 가득 메운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건으로 채워진다. 하루를 살아가기도 벅찬 서민들에게 ‘묻지마 살인’, ‘성폭력을 위한 폭행과 살인’은 마음마저 움츠러들게 한다. 수없이 달린 감시 카메라를 피해 사건은 줄을 지어서 일어난다.서이초 교사의 죽음에 이어 일어나는 교사들의 잇따른 자살.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어린 학생들의 학교 앞 횡단보도 위에 드러눕기. 공공장소에서의 살인 예고는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가 됨으로써 각종 범죄의 학습장이 되는 느낌이다. 여기에 언론의 보도에 문제는 없는 것일까. 독자들이 보고 읽도록 만드는 자극적인 표현이 범행을 자극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선행 기사를 찾아보니 길에 쓰러진 응급 환자를 구조한 버스 기사,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조한 해군과 축구 코치, 꾸준하게 봉사와 후원을 아끼지 않는 인기 연예인들의 기사가 줄을 잇는다. 그들의 기사를 조금 더 비중을 두고 싣는다면 사람들의 관심도 늘어나고 선행도 늘어나리라 믿는다. 신문과 방송에 실린 기사는 우리의 시선을 선행으로 쏠리게 하고 우리가 남을 위해 도와주는 것을 친숙하게 만든다.찾아보면 선행도 사건과 사고에 뒤지지 않게 많다. 물론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기사는 쓰기 나름이 아닐까. 선행이 다 같을 수는 없고 돈 많은 사람이 하는 선행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선행이 더 많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신문 지면을 아름답게 채울 수 있지 않을까.작은 일 하나에도 소망을 품고 서로를 보듬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아닌가.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서민들이 더 많이 웃기를 빈다. 함께 사는 세상이 더 밝아지면 서민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나리니. 이번 한가위에는 이웃과 풍성함을 나누는 그런 명절이기를 소망한다.

2023-09-18

‘저영향개발’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연구본부장 대구경북지역에는 9월 15일 전후와 이어진 주말동안 50㎖ 이상의 많은 가을비가 내렸다. 그리고 일최고 30℃ 이상의 날도 점차 줄어들면서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고 있다. 아마도 2023년 여름은 역대 유례가 없는 극한의 집중호우와 산사태 그리고 폭염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해로 기록될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달갑지 않은 역대급 기록은 내년에도 여지없이 깨질 것으로 우려된다. 계속 악화된 기후변화 문제가 완화될 여지는 별로 없고 반대로 무분별한 개발압력은 계속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파멸의 길로 내달리는 폭주 기관차의 방향을 바꾸고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희망의 길을 내고, 브레이크를 작동해야 하듯 탄소중립이라는 새로운 길은 내고 ‘저영향개발(LID)’이라는 신형 브레이크를 작동해야 한다.‘저영향개발’은 도시발전 과정에서 자연환경과 생태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전략이다. 빗물관리, 자연적 물의 침투 및 증발, 그리고 토지의 원래 생태계 복원을 중심으로 설계된다. 이를 통해 홍수위험 감소, 수질향상, 도시 열섬효과 완화 등 우리가 부딪친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더 나아가 ‘저영향개발’은 지역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홍수피해 감소와 물관리 비용을 줄여 인프라 유지비용을 절감하고, ‘저영향개발’ 구역은 더 나은 생활환경과 자연경관 제공으로 주택 및 상업용 부동산 가치를 높인다. LID 관련 프로젝트는 건설 및 유지보수 분야에서의 일자리를 제공하며, 자연환경 복원은 관광산업도 활성화시킨다. 환경 지속가능성에 중점을 둔 기업들은 LID 지역에 투자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이처럼 ‘저영향개발’은 지역경제의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의 촉진을 기대하게 한다.‘저영향개발’은 특히 물순환 관리에 보다 핵심적인 영향을 미친다. LID는 지표수의 자연적 침투를 통해 지하수 재충전을 강화하며, 지표면 처리를 통해 홍수 위험을 줄이며 빗물 유출을 제어한다. 자연스러운 여과 과정으로 오염물질을 제거하여 물의 질을 개선한다. 아울러 습지의 보호와 복원을 통해 자연의 물순환을 지원한다. 결국 LID는 물의 지속 가능한 관리와 지역 생태계의 건강을 향상시킨다.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시는 빗물정원, 침투지와 같은 LID 기술을 도시 곳곳에 구현하여 홍수와 물 오염을 줄였으며, 워싱턴주 시애틀시는 ‘도시의 녹색 인프라’ 계획에 LID 프로젝트를 도입하여 물 순환을 향상시켰다. 호주 멜버른시는 도시내 빗물을 수집, 재사용하고, 녹색공간을 확장하여 도시 열섬효과를 줄였다. 이처럼 이들 도시는 ‘저영향개발’ 전략을 도입하여 환경적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며 도시의 생활 품질을 향상시켰다.이들 도시처럼 대구경북에 ‘저영향개발’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서는 법적기준 제정으로 LID지침을 확립하고, 도시계획에 LID를 통합하여 초기개발부터 반영해야 한다. 아울러 재정지원 확대를 통해 LID 프로젝트 활성화, 시민교육 및 홍보강화, LID 프로젝트 성과 모니터링 및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

2023-09-18

‘경북 해녀협회’의 탄생

홍석봉 대구지사장 경북은 제주에 이어 전국 두 번째 많은 해녀·해남이 활동하고 있다. 해녀·해남은 ‘나잠 어업’을 하는 이들을 말한다. 산소 공급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바닷 속에서 호미와 칼 등을 이용해 해산물이나 어류, 해초류 등을 잡거나 따는 일을 한다.경북도가 지난해 나잠어업 현황 조사결과 2021년 말 기준 경북지역 해녀·해남의 숫자는 1천370명이다. 제주의 3천437명에 이어 국내 2위다. 40년 이상 종사자들이 3분의 2이다. 고령화·소득 감소 등의 영향으로 경북의 해녀·해남이 점점 줄고 있다. 해녀·해남이 고령화로 인한 관절염과 근골격계 질환을 앓는 이들이 75%다. 이들은 조만간 물질을 그만둘 것이라고 한다.경북의 해녀·해남은 제주도에서 온 이들에서 비롯됐다. 제주 한림읍 출신 30, 40명의 해녀들이 1950~60년대 독도에 진출해 조개 등을 채취하며 생활한 기록이 있다. 경북의 해녀는 이들이 독도와 울릉에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주 수입원은 미역이다. 이어 성게, 전복, 해삼 순으로 많이 잡힌다.제주 해녀문화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경북 해녀도 제주 해녀와 못잖은 역할을 한다. 양자 교류 필요성이 높다.‘경상북도 해녀협회’가 최근 창립기념식을 갖고 공식 출범했다. 포항과 경주, 영덕의 해녀 100여 명이 모였다. 해녀들의 교류와 지원, 해녀 문화의 보전 등이 목적이다. 해녀협회는 해녀학교 등을 운영하고 가족단위 관광객을 대상으로 미역말리기, 해양생태교실 등 다양한 행사를 마련, 6차 산업화를 꾀하고 있다. 해녀문화의 전승보전과 활성화를 위한 다각적인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 고유의 해녀 문화, 잘 지켜나가야 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9-18

상스 대성당과 초기 고딕건축의 발달

12세기 중반 출현한 고딕건축은 유기적 연결성이라 새로운 접근법으로 중세 건축을 혁신했다.천장에 설치된 교차형 늑재궁륭은 하중을 안정적으로 분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촘촘하게 맞물려 있는 늑재들은 다발을 이루며 벽을 타고 내려와 기둥으로 연결된다. 건물 외벽에 튼튼한 부벽을 설치해 팽창하는 힘을 지탱했고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플라잉 버트레스’ 공중부벽을 설치했다.그물처럼 견고하게 엮인 늑재와 외부에서 든든하게 힘을 상쇄시키는 공중부벽 덕분에 두꺼운 벽이나 육중한 기둥이 불필요해 졌다. 고딕 건축가들은 오히려 벽의 넓은 면을 유리창으로 대체했다. 더 많은 빛이 실내로 유입되면서 실내공간은 한 층 밝아졌다. 넓은 유리창들은 형형색색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되었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은 신비로운 색을 발하며 교회를 채웠다.1144년 6월 11일 고딕으로 새롭게 단장한 생 드니 교회의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왕후와 함께 축성식에 참여했고 외국에서 온 축하 사절은 물론 프랑스 각 지역 주교들도 자리했다. 고딕양식으로 개축된 생 드니 교회의 축성식은 파리를 비롯해 일 드 프랑스 지역에 초기 고딕이 확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120km 떨어진 곳에 상스(Sens)라는 도시가 있다. 상스에 지어진 생 떼띠엔느(Saint-Etienne) 대성당은 생 드니와 함께 초기 고딕 건축구조가 정착하는데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상스 대성당 건축이 시작된 것은 1135년이다. 공사가 시작된지 30여 년이 지난 1164년 경 주제단이 있는 내진 부분이 완성되었다. 1175년과 1180년 사이 회중석이 있는 주랑과 좌우 통로인 측랑이 만들어졌다. 완성된 교회의 전체 길이는 122m에 달했고 13.5m의 폭에 높이가 무려 24.5m나 되었다.상스 대성당의 벽면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구조가 조금 독특하다. 첨두형 아치로 연결된 아케이드가 아래층을 구성하고 그 위로 트리포리움(Triforium)이 나타난다. 트리포리움은 주로 아케이드 층 위에 마련된 열린 공간으로 작은 아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측랑의 지붕 위에 마련된 좁은 공간으로 외부로 창이 나있지 않아 항상 어둡다.2층에 나타나는 트리포리움 위로 넓은 고측창이 설치되어 있어 밝은 빛이 실내로 들어온다. 12세기 초기 고딕성당들은 대개 아케이드, 트리뷴(Tribune), 트리포리움, 고측창으로 구성된 4층 구조를 보인다. 상스 대성당은 넓은 공간의 트리뷴을 생략하는 대신 트리포리움을 설치하고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외부에 공중부벽을 설치했다. 트리뷴을 없앤 것은 더 넓은 고측창을 확보하기 위한 건축적 실험으로 보인다.상스 대성당의 견고한 늑재궁륭은 십자형의 4분할 대신 세 개의 늑재가 교차한 6분할 형식을 채택했다. 급한 경사를 보이는 궁륭을 교차해 가로지르는 늑재들은 벽면으로 연결되어 벽면을 타고 내려온다. 새로운 공법이 적용된 초기 과정이라 교회 내부에서 수려한 장식적 요소를 찾을 수는 없다. 발견되는 장식이라고 해야 건물을 단단히 잡아주기 위한 크고 작은 둥근 기둥들이 배관처럼 천장에서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는 정도가 전부이다. 한 세기나 지나야 등장하는 발달된 고딕의 화려함과 비교한다면 투박하고 소박한 로마네크스에 가깝다 하겠다.이런 무뚝뚝함이 신경 쓰였는지 아래층 기둥 위 아케이드의 연속된 형태가 트리포리움에 그대로 축소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동일한 형태의 첨두형 아치가 다시 고측창에서 확대된 크기로 등장한다. 연속된 아치가 만들어낸 수평적 움직임 그리고 약간의 변주가 가해진 형태의 수직적 반복이 살짝 리듬감을 불어 넣어 기계적으로 복잡한 실내공간에 옅은 표정을 불어 넣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09-18

따스한 ‘권정생 동화 나라’

짧은 검은 머리를 한 몽실이가 아이를 업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전쟁에 나간 아버지, 재가하여 다른 지역에 사는 엄마네 가족, 식모살이하며 함께 지내는 새로운 가족, 입양 보낸 동생 등. ‘몽실언니’의 표지 속 몽실이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사실 누구든 정몽실은 따지지 않고 따스함을 나눠줬을 것이다. 그저 바보같이 주어진 삶을 업고 묵묵히 돌봤을 것이다. 사랑만을 전할 뿐 그 무엇도 바라지 않던 권정생(1937~2007) 작가처럼 말이다.권정생 작가는 일본 도쿄 변두리 지역인 시부야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아버지가 가끔 주워 오던 동화책을 보며 자랐다.해방 후 한국에 돌아오지만, 전쟁과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만 하다가 주변인을 하나·둘 떠나보내고 안동에 정착한다. 1967년 일직교회의 종지기로 살면서 집필활동을 한다. 1969년 ‘강아지똥’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여 이후 무수히 많은 작품을 남긴다.초기에는 주로 ‘강아지똥’과 같은 동화를, 중기에는 ‘몽실언니’와 같은 성장소설을, 후기에는 ‘랑랑별 때때롱’처럼 생태 의식이 깃들여진 판타지 소설과 여러 산문을 집필했다.30세부터 눈을 감던 순간까지 교회의 종지기로서 작은 흙집에서 검소하게 살다가 2007년 어린이들을 위해 모든 유산을 남기고 평소 자주 오르던 빌뱅이 언덕에 조용히 잠든다. 2009년 작가의 유고에 따라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되고, 2014년에는 ‘권정생 동화 나라’가 만들어졌다. 이후 지금까지 그를 기억하는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권정생 동화 나라’에 가면 작가의 작품들이 책 밖으로 나와 실질적인 사물이 되고, 공간이 되고, 사진의 배경이 되어 손님들을 맞이한다.1층은 작가의 유품과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귀한 초판본이나 원고지에 써 내려간 작가의 필체도 확인해 볼 수 있다.도서관은 판매를 겸하고 있으며, 체험관은 어린이들을 환상의 세계로 데려갈 징검다리로 충분하다. 구연연구소나 여러 포토존 등도 즐길 수 있다.2층은 회의실과 작가에게 대여하는 창작실, 숙소가 있어 현지의 작가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권정생 동화 나라’의 당초 설립 계획이 모두 지켜지지 않았고 축소되었으며, 실내 공간이 예상보다 작은 편이었다. 운동장의 여러 포토존을 둘러보고, 벽화를 따라 인근의 권정생 생가와 교회를 돌아보고, 빌뱅이 언덕을 올려다보면서 아쉬움을 달랜다.‘권정생 동화 나라’에는 작가의 작품을 동상으로 만들어 둔 곳이 여럿 있다. ‘몽실언니’도 그중 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입체적으로 표현된 ‘몽실언니’표지 동상을 보면서 예전에 ‘몽실언니’를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가난에 떠밀린 어린 소녀가 어쩔 수 없이 짊어질 수밖에 없던 삶의 무게가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식모살이와 구걸, 어린 동생 돌봄과 입양, 이혼과 재혼 가정에서의 학대, 주변인의 죽음 등 말문이 막히는 장면이 너무도 덤덤하게 이어졌다. 작가는 ‘몽실언니는 제가 너무도 어렵게 쓴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쓴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끝까지 읽어주세요.(1984년 4월)’라고 했지만 읽는 내내 좀처럼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우선은 왜 하필 어른도 아닌 어린 존재가 삶의 짐을 떠안고 구원자가 되어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해방과 전쟁이 휩쓴 그때는 사회적 약자가 배려받지 못하는 세상이었겠지만 어른들은 무엇을 한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다.둘째, 주인공은 불행에도 굴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마치 부처의 가운데 토막이나 예수의 재림처럼 담담하기만 하다.슬픔을 이겨내고 마음이 성장하면,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이나 아픔을 견뎌야지만 만들어지는 진주가 되는 것일까.셋째, 작품의 배경에 깔린 소외된 이웃의 삶이 너무도 진솔하게 전달되어 독자의 마음에 쉽게 전이된다. 진솔한 이야기가 가지는 힘이 세월과 세대를 뛰어넘어 독자의 공감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권정생 작가와 그의 작품은 지금도 사랑받고 사랑받는다.넷째, 도시보다는 자연이 살아있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다. 판타지 작품 ‘랑랑별 때때롱’에서는 자연과 멀어지고 있는 현 인류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려놓았다. 돌고 돌아 결국 자연의 품에 안기는 나약한 존재가 인간인데 자연을 외면하는 오만한 모습에 일침을 가한다.안동의 ‘권정생 동화 나라’는 여러 문학관과는 달리 작가의 작품을 하나의 체험적 공간으로 조성하고 녹여내었다.이것은 독서를 통해 책 속을 여행하던 ‘정적인 활동’을 방문하여 즐기는 ‘동적인 활동’으로 바꾸는 행위이며, 독자를 일상에서 벗어난 환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행위이다.힘겨운 삶을 담담하게 업은 정몽실의 동상을 살포시 안고 눈을 감아본다. 사랑과 희망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몽실이가 내게도 따스함을 나눠주는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9-18

짜깁기한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김진국 고문 부끄럽고, 부끄럽다. ‘윤석열 커피’ 보도는 명백한 잘못이다. 기자도 실수한다. 그러나 실수와 알고도 잘못 보도하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윤석열 커피’ 기사는 훈련받은 기자가 할 수 있는 실수가 아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의도가 개입했다고 의심해도 할 말이 없다.지난해 대통령 선거를 사흘 앞두고 뉴스타파는 ‘박영수-윤석열 통해 부산저축은행 사건 해결’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이 대장동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김만배 씨의 녹취에서 윤석열 후보를 의심하기 좋게 짜깁기해 보도했다. 요지는 김만배 씨가 박영수 전 특검을 통해 윤석열에게 로비해 조우형 씨를 수사하지 않고 풀어주게 했다는 내용이다.검찰은 초대형 금융비리사건인 부산저축은행 사건을 조사하면서 조우형 씨를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조 씨는 뒤에 대장동 사업 자금을 조성하는 데도 관여했다. 민주당은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이 조 씨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아 대장동사건이 터졌다며, ‘커피게이트’라고 이름 붙이고, 윤 대통령이 대장동 사건의 몸통이라고 주장했다. 이재명 후보는 대선 후보 토론에서 “조우형에게 커피는 왜 타 줬느냐”고 조롱했다.뉴스타파 기사가 보도에 인용한 한 대목을 보자.(신학림)누가? 박○○검사가?(김만배)윤석열이가 ‘니가 조우형이야?’ 이러면서….(신)윤석열한테서? 윤석열이가 보냈단 말이야?(김)응. 박○○(검사가) 커피 주면서 몇 가지를 하더니(물어보더니) 보내주더래. 그래서 사건이 없어졌어.(신)박영수 변호사가 윤석열 검사와 통했던 거야?(김)윤석열은 (박영수가) 데리고 있던 애지.(신)데리고 있었기 때문에?(김)통했지. 그냥 봐줬지. 그러고서 부산저축은행 회장만 골인(구속)시키고, 김양 부회장도 골인(구속)시키고 이랬지.이 대목을 읽어보면 어떤가? 윤 검사가 부하 검사에게 커피 타 주게 하고, 사건을 덮어버렸다고 읽히지 않는가? 그 뒤에 붙은 다음 대화는 보도에서 빼버렸다.(신)조우형은 박○○하고 커피 마시고 온 거야? 윤석열하고 마시고 온 거야?(김)아니 혼자. 타주니까 직원들이…. 어떻게 검사와 마시겠어.(신)검사? 검사 누구 만났는데?(김)박○○ 만났는데. 박○○가 얽어 넣지 않고 그냥 봐줬지….이게 뭔가. 조우형은 윤석열 검사를 만나지도 않았다. 커피를 타 준 것도 검사가 아닌 직원이라고 말한다. 정상적인 기자라면 의미가 분명하지 않으면 다시 물어 확인한다. 들었다고 그대로 보도하지도 않는다. 사건 관련자와 증거들을 교차 검증해 확인한 뒤 보도한다. 그런데 다 나와 있는 말도 자르고, 왜곡했다.JTBC는 대선 직전 두 번이나 “윤석열 후보가 검사 시절 조우형 씨에게 커피를 타 주고 대장동 관련 조사를 하지 않았다”라는 남욱 씨의 말을 보도했다.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보도 전에 조우형 씨로부터 “윤석열 검사를 만난 적이 없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그 기자는 “의혹 당사자인 조 씨보다 제삼자인 남 씨 진술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라고 주장했다. 최소한 같이 보도했어야 한다. 그는 곧 뉴스타파로 옮겼다.기자는 진실이 생명이다. 사건 윤곽이 뚜렷해도 꼭 반론을 듣고, 기사에 붙인다. 이들은 녹취한 대로 보도했으니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을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하면 이미 진실이 아니다. 같은 기자로서 낯이 뜨겁다. 아니 그들을 기자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 더구나 신 씨는 인터뷰 직후 김만배 씨로부터 1억6천500만 원을 받았다. 책값으로 받았다고 한다. 돈은 정직하다. 신 씨는 책값이라고 자신을 속였는지 모르지만, 김 씨 생각은 달랐다고 확신한다.JTBC는 그나마 사과했다. 뉴스타파는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했다. 기자는 가난해도 자존심과 사명감을 먹고사는 직업이다. 진실을 포기하면 기자가 아니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9-17

처절한 인류의 기원, 미래에도 인본주의 가치를

박진홍 부국장 인류의 기원을 찾아, 세월을 거슬러 올라 가 보자. 현대 과학은 ‘지구는 46억년 전에 생성됐고 생명체는 38억년 전에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그 후 지구에서 모든 생물체들이 얽히고 섥키며 살아 오면서, 그 억겁의 세월을 관통하는 대원칙은 ‘생존 경쟁’이었다. 그 생존 경쟁을 자세히 풀어 설명한 것이,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에서 제시한 ‘자연선택설’이다.‘변화 무쌍한 자연 환경에 적응한 생물은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지만, 그렇지 못한 생물은 도태 돼 사라진다’는 것.4억6천만년 전 생존의 필요성에 따라 어류가 육지로 올라 온 후 양서류와 파충류로 진화했다.공룡은 2억6천만년전에 출현했다가 6천5백만년전에 멸종한다.거대 운석 충돌이나 기후 변화, 화산 폭발 등이 멸종 이유로 거론되지만 결국 공룡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인류는 600만년전 침팬지·고릴라 등 유인원과 분기 되면서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원시인이 공룡을 피해 달아나는 헐리웃 영화가 ‘엉터리’임을 확인하고 실소를 금할 수 없다.반면 현대과학은 유전자 분석을 통해 ‘인간과 침팬지 유전자 98.4% 일치’를 증명했다.불과 유전자 1.6% 차이가 직립 보행과 뇌 크기, 언어 능력, 골반 헝태, 독특한 성생활 등 엄청난 차이를 결정하는 것.진화생물학자들은 “해부학적으로, 침팬지는 원숭이 보다 인간과 더 가깝다.”라며 “혈액의 헤모글로빈 단위 숫자까지 287개로 똑같을 정도.”라고 밝히고 있다.혹자는 “1970년대 유명 영화 ‘혹성탈출’처럼 만약 침팬지가 ‘만물의 영장’이 됐다면 요즘 사람이 동물원에 갇혀 있을 것”이라는 역발상적 시각도 내놓는다.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진화를 거듭한다.400만년전 뒷발을 딛고 서서 걷기 시작 하면서 두손을 사용한다.200만년전을 전후해 석기를 사용하는 호모 하빌리스(솜씨 있는 사람)가, 170만년 전에는 호모에렉투스(직립인간)가 출현한다.이후 네안데르탈인이 나타나고 30만년전 드디어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가 등장한다.이 대목에서 고고인류학자들은 ‘인류들이 2차례 치열한 생존투쟁을 벌였다’고 추정하고 있다.300만년전 초식성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우버스투스가 출현했으나 120만년전 쯤 멸종해 버렸다.이에 ‘큰 뇌와 도구를 사용했던 잡식성 호모 에렉투스가, 초식성 인류들을 먹잇감으로 사냥해 멸종 시켰다’고 보고 있다.또 40만여년전 서남유럽 등지에서 살았던 네안데르탈인 역시 3만년전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상대적으로 지능이 높고 무리의 수가 많았던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들을 사냥해 멸종 시켰다’고 추정한다.현생 인류가 ‘전쟁을 즐기는 징후’가 이때 표면화된 것 아닌가 싶다.동시에 ‘인류와 동물간 생존 경쟁’도 벌어진다.인류는 처음에 맹수들을 피해 나무 위에서 생활했으나 나무 아래로 내려 오면서 직립 보행을 시작한다.이어 수백만년 동안 소형동물이나 열매 채집으로 연명했다.당시 석기는 조잡해 멧돼지나 코끼리 등 대형 동물 사냥은 불가능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호모 사피엔스의 사냥 도구 역시 100만년 전이나 별 차이 없었다.그러나 4만년전 현생인류 크로마늉인은 화살촉과 창, 작살 등을 사용하면서 대형 동물 사냥이 가능해졌다.이는 기술과 조직력 등을 갖추면서 확고한 포식자로 자리매김 했다는 얘기다.흥미로운 대목은 인류가 호주 대륙에는 5만년전, 아메리카에는 1만5천년전에 진출했는데 얼마 뒤 양 대륙의 대형동물들이 사냥으로 모두 멸종했다는 사실이다.또 3만년전 늑대가 인간의 가축인 개로 진화하면서, 현재 ‘개가 지구상 동물 가운데 생존 경쟁의 대표적 성공 사례’라는 시각도 있다.지구 생명체의 역사는 잔인하고 처참한 생존 경쟁이었다.그중 사람만이 유일하게 그 이기적인 본성을, 문화와 교육 등으로 갈무리한 존재다.미래에도 인본주의가 인류 최고 가치로 존중 되길 바란다.

2023-09-17

거울 밖을 거닐다

거울을 꺼내 나를 비춰본다. 화장이 지워진 여자가 거울 바깥의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여자도 가끔은 거울 바깥의 내가 궁금해서 바깥을 내다볼지도 모른다.스마트 폰을 열어 날씨를 확인한다. 강수 확률 50%다. 바깥을 내다보니 하늘이 새파랗고 단단해 보인다. 저 하늘이 깨져 물방울이 된다는 것은 상상 바깥이다. 짐이 될까 싶어 우산을 내려놓는다.고민은 또 있다.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차를 가져갈까, 버스를 탈까. 캐리어를 들까, 작은 가방을 멜까. 평소에는 하지 않을 고민이 겹겹이다. 일상에 이러한 고민이 많다니, 그냥 하던 대로 하던 것을 막상 작심하니 하나를 선택하기 쉽지 않다.카드 하나를 쥐고 버스를 탄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내린다. 바다 뒤로 마을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무작정 걷자니 500년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도 보이고, 한없이 바다만 바라보는 등대도 보인다. 눈에 담기는 것들과 한없이 느리게 늑장을 부리고 싶다해변에는 화려한 무대나 환호하는 군중이나 빛나는 조명도 없다. 반겨주는 이도 알아보는 이도 없다. 잘 익은 밀이삭을 닮은 황금빛 모래사장에 앉아 물멍에 들고 지나온 삶의 대본들을 불러 모은다. 주어진 자유에는 내가 주인공이다.혼자만의 놀이에도 배가 출출해진다. 따뜻한 매운탕을 먹을까, 시원한 물회를 먹을까. 바다를 옆에 두고 보니 매운탕과 물회라는 갈림길이 있다. 시원한 물회 한 그릇 먹고 나자 따뜻한 차 한잔 생각난다. 쌉싸래한 커피를 마실까. 달짝지근한 홍차를 마실까.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시고 나니 나른한 피로가 몰려든다. 조는 풍경을 연출할까 하다가 마음 내키는 대로 선택하는 자유를 더 누리고 싶어 바닷가를 거닌다갑자기 후둑 후두둑 물방울이 떨어진다. 물방울은 하나, 셋, 열, 점점 굵어지더니 금세 장대비로 바뀐다. 접이식 우산 하나가 무에 그리 무겁다고, 얄팍한 선택을 탓하면서 비를 피할 곳을 찾는다. 허둥대는 사이 이미 마음속까지 축축하게 젖어 든다. 젖은 신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담근다. 내가 젖는지 바다가 내게 젖는지. 물방울을 발로 차며 뛰는데,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아이, 청년, 어른, 엄마 역할로 숱한 나날을 살았으면서 한 번도 연출해보지 못했던 이 낯선 역할, 나는 속박에서 탈출한 여인이 비를 맞으며 자유를 만끽하는 영화의 주인공이다. 바쁜 일상과 중년만이 지니는 무게가 다 씻어진 듯 상상하지 못했던 쾌감이다. 만약 우산을 가져왔다면 이러한 혼자만의 낭만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면 내가 누리지 못한 풍경과 마주친다. 혼자 산길을 걷다가 영문 모르게 눈이 마주친 다람쥐의 눈동자, 따끈한 커피 한 잔 들고 산사 툇마루에 앉아 들어보는 풍경소리,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발 너머로 펼쳐지는 한 폭의 수채화, 도심 골목을 지나다가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옛사랑의 연가, 우연의 길목에서 건진 풍경들이다. 김경아 작가 살면서 늘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하며 살았다. 그 길에서 낭패를 보더라도 내 판단이 옳았다며 위안했다. 이 이기적인 생각은 선택받지 못한 일은 무용하다는 확증 편향에 나를 빠트리곤 했다. 거울 바깥에 더 넓고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모른 채 거울 안만 보다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는지.우리는 때로 관습에 의지하여 삶의 해답을 풀어간다. 홀짝으로 겨루는 구슬 따먹기처럼, 내가 선택하는 것에는 50%가 아니라 100%의 신뢰를 보냈다. 맞춘 쪽은 100이 되고 못 맞춘 쪽은 0이 되는 모순. 하지만 이든 저든 모호할 때, 무작정 하나를 선택해도 오늘처럼 뜻밖의 행복을 누리는 쾌감을 맛볼 수 있다.혼자만의 놀이가 슬슬 따분해진다. 어느새 강수 확률이 낮아지더니 드문드문 햇빛이 내린다. 비에 젖은 몸이 후줄근하다. 따뜻한 홍차를 주문한다. 이 일탈적 선택의 따뜻함도 새롭다.거울을 꺼내 나를 비춰본다. 화장이 지워진 여자가 거울 바깥의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여자도 가끔은 거울 바깥의 내가 궁금해서 또 다른 외출을 꿈꿀지도 모른다.

2023-09-17

북러 교류가 정부 탓?

우정구 논설위원 “잘되면 내탓이고 잘못되면 조상탓”이란 속담이 있다. 잘된 일에 대한 공은 자신에게 돌리고 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은 남에게 돌리는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먼저 살펴보라는 교훈이 담긴 속담이다.1990년 고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 교계와 함께 “내탓이오”라는 사회 운동을 펼쳤다. 우리사회에 만연한 남탓으로 돌리는 나쁜 풍조를 고쳐보려는 운동으로 시작해 당시 국민적 호응도 비교적 좋았다. 사회의 한 풍조가 캠페인 하나로 쉽게 바꿔지지는 않지만 김 추기경이 벌인 ‘내탓이오 라는 운동’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남의 눈 티끌은 보면서 내 눈의 들보는 못본다”는 우리 속담처럼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삐뚤어진 편견과 남탓이 유행한다. 그 해의 시대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가 뽑혔고, 우리 정치권에서 출발한 내로남불(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은 미국 언론에도 소개될 정도로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한국사회를 풍자하는 대표적 용어가 됐다. 우리 정치와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이라 할만하다.북한과 러시아가 전방위 군사협력에 나선 것을 두고 더불어 민주당이 윤석열 정부 탓이라 주장했다. “윤 정부의 경직된 대북정책과 균형 잃은 외교정책의 패착”이라 말했다. 정치권의 네탓 공방이 도를 넘어선 것은 알지만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협력을 현 정부 탓으로 말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과도한 발언이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익을 내다버린 비이성적 주장이다.핵미사일로 우리를 위협하는 북한에 대해 공동 대응하지는 못할지언정 네탓으로 돌리는 속 좁아진 우리정치 현실이 실망스럽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9-17

가을장마

김규종 경북대 교수 처서(處暑) 백로(白露) 지나 추분(秋分)이 코앞인데 날마다 비가 내린다.예년 이맘때면 가을바람 소슬하고 일기 쾌청하여 교외(郊外)로 나가기 제격이었는데, 요즘 날씨는 종잡기 어렵다. 언론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지구 자연환경을 파괴한 결과를 마주하는 듯하다. 그래선지 ‘인류세(人類世)’라는 어휘가 낯설지 않다.인류세는 1980년대 미국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와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제안한 개념이다. 그들은 인류의 산업활동 때문에 지구 환경이 극단적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런 사실을 지질시대에 포함하고자 인류세를 제안한 것이다. 명칭에 담긴 것처럼 인간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자연에 유의미한 변화가 초래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지질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류는 약 1만1천700년 전 시작된 ‘홀로세’에 살고 있다.하지만 불과 250년 전에 시작된 산업혁명의 결과 지구의 물리와 화학 시스템이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함으로써 지구는 새로운 지질시대에 들어섰다는 게 인류세 주창자들의 논거다.여러 주장이 난립하고 있지만, 1950년대를 인류세 기점으로 보는 것이 대세라고 한다.지질학적인 논의가 어떻게 끝날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혜로운 인간’이란 의미를 가진 호모 사피엔스가 초래한 자연생태의 가공할 파괴양상은 지구촌 곳곳을 덮치고 있다.칠레와 캐나다 산불, 버몬트, 르완다와 남수단 폭우, 인도의 몬순 홍수와 열대성 폭풍 마와르의 일본과 괌, 대만, 필리핀 강타 등 열거하기 어려운 지경이다.올해가 인류에게 가장 시원한 해로 기록될 것이라는 뉴스까지 나왔다 한다. 언뜻 들어도 섬뜩하지만, 그럴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먹고사는 문제로 분망한 대중에게 지구촌의 과거와 미래는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직 지금과 여기에 함몰돼야 가까스로 삶의 터전과 가족의 생계가 보장되니 말이다.그러나 지식인 계층이나 상층권위를 가진 자들은 지구촌 문제를 외면하면 안 된다. 인간이 하루살이로 전락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오직 돈과 권력과 명예에 목숨을 거는 짓은 식자층의 몫이 아니다. 그러하되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기사를 보노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숨과 비탄을 자아내는 글로 도배되어 있다.그냥 넘어가기에는 안타깝고 답답한 이 나라 정치 현실, 완전히 실종된 미래기획, 젊은 세대를 위한 꿈과 희망의 실종, 끝없이 지속되는 남과 북의 대치와 대립…. 거명(擧名)하려면 한도 없고 끝도 없는 캄캄절벽의 연쇄가 우리 앞에 산적(山積)해 있다. 이런 난제를 쾌도난마(快刀亂麻)로 풀어낼 희대의 영웅은 어디 있는가?!지루한 가을장마를 견디면서 언젠가 울려 퍼질 명랑하고 쾌활한 종소리를 기다린다.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탐진치 삼독(三毒)에 물든 남루하고 비루하며 거칠기 짝이 없는 양아치 정치를 일거에 소탕하여 창천(蒼天)의 밝은 태양을 누가 보여줄 것인가?!

2023-09-17

이런 청문회를 보고 싶다

유영희 작가 지난 13일 윤석열 정부는 2차 개각을 단행하면서 국방부 장관에 신원식, 문체부 장관에 유인촌, 여성가족부 장관에 김행을 임명했다.신원식은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을 촉발한 인물로, 2021년에는 홍범도 장군을 찬양했다가 2022년에는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의 주역이라며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에 불을 지폈다. 유인촌은 이명박 정부 때 문체부 장관을 하면서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과 기자를 향한 막말 영상으로 문화계의 수장 자격을 의심받고 있다. 김행 역시 박근혜 정부 대변인을 지낸 인물로, 최근에는 입시와 관련된 킬링 캠프 허위 뉴스를 인용하여 망신을 당했다.그러나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윤석열 정부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보여주기식 개각을 지양하고 오직 국민과 민생을 위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정부를 구성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속도감 있게 이끌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는 부분에 고삐를 당겼다”고 논평했다. 이번 개각의 키워드는 ‘효율성’과 ‘속도감’인 셈인데, 이번 인선을 두고 실전형이니 전투형이니 하는 평가와 통하는 말이다.그러나 세 인물의 과거 행적을 보자니, 이념 논쟁으로 국가 에너지를 탕진할까 걱정되고, 자유가 가장 보장되어야 할 문화계의 질식이 눈에 보인다. 헌재가 인정한 낙태권을 반대하는 신임 여성가족부 장관이 여성의 권리 향상에 어떤 역할을 할지도 의문이다.이런 개각에 2주일 넘게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민 삶을 돌보지 않는 정권만을 위한 개각이라면서, 국민이 용납할 수 없는 ‘개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불어민주당에서도 MB 시즌 2라면서 ‘구한말 인사’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어떤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다. 먼저, 이들이 말하는 국민은 같은 국민이 아니다. 국민의힘이 위한다는 국민과 더불어민주당이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국민은 다른 사람이다. 이미 자기편을 지지하는 국민을 전제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두 번째 구한말 인사라는 비판의 의미가 불분명하다. 구한말은 대한제국 시기를 말하는데, 당시 고종 황제가 구성한 관료들은 왕실 측근 세력 등 보수파였는데, 이때 등용된 이완용, 민병석, 박제순, 고영희, 이병무, 한규설 등은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 경술국적 명단에 올랐다. 이런 역사를 고려하면, 이번에 임명된 세 인물을 구한말 인사라고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의문이다. 단순히 구시대적 인물이라는 뜻이라 해도 주관적인 평가로 치부될 수 있다. 이런 태도로 청문회에 임한다면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이다.장관 임명이 대통령 소관이라고 해도 청문회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게 비판하느냐에 따라 영향은 충분히 줄 수 있다. 호통치고 삿대질하는 청문회로는 자질을 제대로 검증하기 어렵다. 전 국민에게 중계되는 청문회이니만큼, 더 많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냉철하고 엄정하게 검증해서 의미 있고 생산적인 청문회 문화를 보여주기 바란다.

2023-09-17

퇴계선생 좌우명 따라하기?

배성길 한국국학진흥원 부원장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묻지마 폭행과 엽기적인 사건, 극단적 선택 등이 메인 뉴스를 차지한다. 가족이 함께 볼 때는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이럴 때 마다 우리는 묻곤 한다. 왜 우리 사회는 이런 걸 해결하지 못할까? 이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위인이라도 다시 나타나야 하는 걸까? 퇴계 선생이 다시 오신다면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나는 이곳 도산 계곡에 거주하면서 퇴계 선생의 발자취를 자주 찾아 다니고 있다. 도산면 소재지 퇴계태실이 있는 노송정 앞 개울을 바라보면서 퇴계 선생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본다. 노송정 주변 산기슭이나 오솔길을 다니면서 봄에는 쑥도 캐고, 가을에는 주인 없는 밤과 대추를 따먹으면서도 퇴계 선생의 흔적을 두리번거린다.선생의 자취와 향기를 더 깊게 느낄 수 있는 도산서원은 사무실에서 5분 거리에 있어 더 자주 간다. 도산서원 마당 앞에 서서는 하염없이 냇가와 건너편 들판을 쳐다보기도 했다. 조선의 수많은 선비들이 퇴계 선생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그 선비들이 보이는 듯했다.지금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지만 당시는 건너편 들판이 솔숲이었고 조선시대 정조 임금의 지시로 특별과거시험이 있었던 이곳에 1만 명이 모였고 영남선비 7천228명이 응시했다고 한다. 그 당시를 상상하면서 퇴계 선생의 흔적을 찾아 킁킁거리기도 했다.선생은 매일 24시간 끊임없이 은밀한 곳이든 혼자 있는 곳이든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이든 항상 경계하며 엄숙을 지켰다.진정한 인격수양과 학문완성을 통해 후세에 삶의 길을 제시하고자 했으며, 흐트러짐이 없이 성인의 길을 가고자 노력했다. 다산 정약용은 ‘도산사숙록’에서 퇴계의 인간적 품격과 겸허한 인격에 무한한 존경심을 밝히기도 했다.퇴계 선생은 상대가 누구든간에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삶을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선생은 ‘사무사(思無邪·간사한 생각을 품지 마라)’, ‘무자기(毋自欺·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무불경(毋不敬·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라)’, ‘신기독(愼其獨·혼자 있을 때도 행동을 바로 하라)’ 등 네 가지 좌우명을 해서체의 친필로 써서 벽에 걸어두고 하루에도 수차례씩 바라보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한다.공자 이후 성인은 퇴계가 유일하다는 평가도 있으니 우리는 퇴계 선생을 따라 성인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인간답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마침 한국국학진흥원이 이벤트를 진행한다. 11월 12일까지 주말에는 도산서원에서, 평일에는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서 퇴계 선생의 좌우명 목판인출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곧 추석 연휴가 시작되고 가을 여행철이다. 자녀들과 함께 방문해서 퇴계 선생의 좌우명을 직접 인출하여 마음에 담았으면 하고 바란다. 액자에 넣어 잘 보이는 데 걸어 두면서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도 좋을 것 같다.

2023-09-17

선동과 기만에 휘둘리는 사회

홍석봉 대구지사장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를 주장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정부·여당을 향한 공세가 집요하다.윤석열 정부 심판까지 외치고 있다. 민주당은 수산물을 먹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경고장을 마구 날린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먹거리 안전을 강조한 이벤트성 수산시장 행사에 “세슘 우럭 너희나 먹으라”고 저주한다. 이재명 대표는 “태평양 연안 국가에 대한 전쟁 선포”라고 규정했다. 당 지도부는 한술 더 떠 우리 수산물이 안전하다고 하면 친일 매국 행위라고 했다.합리와 과학은 오간 데 없다. 이랬던 민주당이 정작 목포의 활어횟집을 찾아 식사하고 “참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고 방명록에 서명까지 남겼다. 이 대표가 무기한 단식집회에 들어가기 바로 전날 한 일이었다.국민은 어안이 벙벙하다. 겉 다르고 속 달랐다. 국민의힘은 이 대표를 겨냥해 “국민 몰래 잡순 ‘날 것’들은 입에 맞으셨나”며 비아냥댔다. 민주당은 대구에서도 후쿠시마 원전 방류를 외치며 서명운동을 펴고 있다. 하지만, 지역민들의 반응은 그다지 탐탁치 않아 한다. 비과학적인 주장에 기대어 국민을 선동하는 모습으로 비친 탓이다.‘대장동 허위 인터뷰 의혹’도 일파만파다. 대장동 주범인 김만배와 언론노조위원장 출신의 신학림이 허위 인터뷰 보도로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를 ‘대장동게이트’의 몸통으로 만들려 했다는 가짜뉴스를 보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민의힘은 선거를 3일 앞두고 언론들이 이 가짜뉴스를 발표, 윤 후보가 해명할 시간과 기회를 박탈했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국기를 흔든 사안이라며 검찰의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윤석열 후보가 대선 일주일 전 10% 정도 이기고 있었는데 막판에 0.7% 차이가 난 것은 가짜뉴스 영향 때문이라고 했다. 후폭풍이 어디로 번질지 예사롭지 않다.역대 대통령선거에서 가짜뉴스가 선거판을 흔든 경우가 있다. 이회창과 김대중이 맞붙은 15대 대선 때는 김대업의 병풍사건 여파로 김대중이 당선됐다. 16대 대선에선 이회창의 두 아들 병역면제와 30만 달러 금품 수수설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역전, 노무현이 당선됐다. 김대업과 뇌물 수수설을 퍼뜨린 당사자는 한참 뒤 처벌 받았다. 하지만, 가짜뉴스가 유력 후보를 낙선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정부·여당은 좌파가 괴담(세월호·사드·후쿠시마 오염수)을 확산시켜 국민을 불안케 하고 가짜뉴스를 살포, 국민을 속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라를 흔들고 있다고 비난한다. 선동과 기만은 좌파가 곧잘 쓰는 수법이다. 나중에 진실이 가려지긴 하지만 선동과 기만의 폭발력은 엄청나다. 자칫 나라의 기강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흔든다.선동과 기만은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선동과 기만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들은 호시탐탐 우리 사회의 허점을 노린다. 이를 뿌리뽑지 않고서는 나라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양두구육은 이들의 단골 메뉴다. 선동과 기만이 국민의 속을 헤집어 놓는다. 부화뇌동하지 않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까. 속에 천불이 난다.

2023-09-14

사과값이 금값

우정구 논설위원 경북은 전국 사과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사과 주산지다. 청송과 안동, 영주, 문경, 의성 등이 자체 브랜드를 내세우며 사과 경쟁을 벌인다. 생산량에서는 청송이 으뜸이다. 특히 청송사과는 꿀사과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농촌진흥청이 전국 사과 주산지의 사과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청송사과가 당도가 가장 높게 나타나 이런 이름을 붙였다.청송사과가 달고 맛있는 것은 지역의 환경이 사과 재배에 특별히 좋기 때문이다. 청송은 해발 250m 이상의 내륙산간 지역으로 비가 적게 온다. 또 4∼11월 사이 일조시간이 풍부하고, 높은 일교차로 사과의 육질이 치밀하고 색깔이 깨끗하고 당도를 높이는 데 유리하다. 꿀사과란 보통 사과 안에 꿀처럼 보이는 노란색 무늬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것이 실제로 당도를 높이는 이유는 아니라고 한다.이는 일종의 갈변현상으로 사과 안에 있던 효소가 공기와 만나 사과의 색깔을 갈색으로 변화시키면서 나타난 현상. 배와 바나나 등 다른 과일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꿀이 박힌 사과가 꿀이 없는 사과보다 더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사과 당도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다.추석을 앞두고 사과값이 작년보다 2∼3배 폭등하고 있다. 이달 초 올해산 첫 사과가 공판장에서 20kg당 평균 낙찰가격이 11만7천원을 기록, 작년 같은 기간 보다 2배 이상 올랐다. 올해 내내 이어진 기온 변화로 상품 가치가 있는 사과 수확량이 급감한 탓이라 한다.사과값은 금값만큼 폭등했지만 생산농민은 반갑지 않다. 수확량이 감소한 데다 비싼 가격으로 소비가 위축, 수입은 작년 절반이기 때문이다. 사과 값이 금값인들 빛좋은 개살구 격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9-14

역사의 현장에서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역사를 말하는 사람은 많다. 역사학자는 물론 인류학자, 정치가, 사상가, 종교인, 군사전문가, 경제학자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나름의 식견과 주장으로 역사를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이 오류일 때가 많고 예측과 전망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을 정도로 빗나가기 일쑤였다. 한 마디로 인류의 역사는 상당수가 돌발적인 것이었다.한반도의 현대사는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연속이었다. 일제의 침탈로 식민지가 된 것도, 미국의 원폭으로 해방이 된 것도 예측한 일이 아니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 되고,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에 유엔군의 참전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고 밀리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국토가 초토화 된 채 휴전을 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고, 5·16 쿠데타로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을 것을 예상한 역사학자가 있는가. 그로부터 60여 년 한반도의 남쪽은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세계 10위권의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데 비해 북쪽은 거지꼴의 불량국가로 전락하게 될 것을 내다본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토록 극명해진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맹목적 이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자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역사가들은 무엇이라 말하는가?나름의 주장과 논리로 제법 이름깨나 얻은 논객들도 시대파악이나 현실인식에 맹점과 오류가 적지 않은 걸 본다. 제 딴엔 날카로운 비판이라고 소위 ‘모두까기’식 양비론이나 들이대다가 결국에는 소통이니 협치니 하는 원론적인 결론을 내놓는 게 고작이다. 그러니 지금의 시국이 국운이 걸린 내전상태라는 위기의식이 있을 리 없다. 대다수 국민들이 좌·우로 갈라져서 사활을 건 선전선동의 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걸 모르거나 외면하는 식자들이 많은 것이다.역사를 예측할 수는 없어도 돌발사태는 사실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윤석열이란 인물이 대통령이 될 거라고 예견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문재인 정권이 적폐청산이란 명목으로 전 정권 인사들을 모조리 사법처리해 놓고 정작 자신들의 비리는 덮으려고 ‘검수완박’이라는 철면피한 꼼수를 쓰지 않았다면, 추미애와 박범계 두 법무장관이 윤석열 검찰을 무력화하고 대신 제 발바닥을 핥는 충견들로 검찰을 장악하지 않았다면, 윤석열은 역대 여러 검찰총장들 중 한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서로 극렬하게 대립하는 상태에서 패자가 되면 모조리 적폐청산의 대상이 되고, 승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는 것이 좌파들의 정책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는 문재인 정권 5년이었다. 대화든 타협이든 일단은 싸움을 이겨놓고 생각할 일이라는 것이 좌파들을 상대하는 최선의 전략임을 명심해야 한다.역사의 미래를 예측하긴 어렵지만, 오래지 않은 과거와 당면한 현실의 파악은 불가능한 게 아니다. 눈이 밝고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이 내전이나 다름없는 위기상태라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철저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일거에 패망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 지난 정권에서 배운 역사의 교훈이다.

2023-09-14

단식투쟁은 ‘양날의 검(劍)’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8월 3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취임 1주년이 되는 날 “무능 폭력 정권을 향해 ‘국민 항쟁’을 시작하겠다.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고 외치며 국회 앞에 천막을 치고 무기한 단식투쟁을 시작한 지 2주일이 지났다. 단식투쟁(斷食鬪爭)은 ‘정치적 시위 또는 특정 사항 관철 등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단식을 하는 비폭력 저항 행위’로 자신의 건강과 목숨을 걸고 하는 자해나 자살과 같은 의미가 짙다.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목적을 위해 그 정당성과 인간 권리를 앞세워 특성 이슈를 부각하려는 것이기에 대중에게 설득력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서 그 가치를 판가름하게 된다.단식투쟁의 효과는 원인과 목적, 추진 맥락,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르다. 이번 이재명 대표의 경우는 정부에 대한 직접공격 대신에 단식을 선택하여 검찰 소환에 항의하려는 듯한 회피성 투쟁이고 조건 없는 단식이라는 조롱과 위로가 엇갈리고 있다. 단식 중단의 명분도 없고 자신의 사법 리스크에 물타기 한다는 둥 실리도 챙기지 못하고 대여(對與) 투쟁만 시끄럽게 한다. 우리 인간은 물 없이는 3일, 음식을 먹지 못하면 3주가 적정생존 기간이고 4주가 넘으면 위험하게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3일 이상 음식을 안 먹으면 체내 포도당이 소진되고 칼륨의 손실이 커지게 되어 1주일 넘기면 몸에 이상이 발생한다는데, 단식 13일째 검찰 조사받으러 가는 모습에 의사도 놀란다. 밤에는 천막을 떠나고 토·일요일에는 쉰다는 것에 ‘출퇴근 단식’이니 ‘웰빙 단식’이니 하는 말도 나돌지만 건강 악화로 당내의 우려도 커져 국회 당 대표실로 장소를 옮겼다.단식하면 떠오르는 인물에 인도의 성웅 간디가 있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비폭력 무저항으로 3주간 옥중 단식투쟁을 했다. 집단 투쟁으로는 1981년 영국과의 갈등으로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 200여 명이 1, 2차 60여 일간 단식으로 10여 명이 사망했다는 역사도 있다. 단식투쟁이 유난히 많은 우리나라 정치사의 경우, 1983년 가택연금 중에 대통령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한 김영삼은 23일간, 1990년 지방자치제 실현을 주장한 김대중은 13일간, 2014년 세월호특별법 국회 통과를 두고 문재인은 9일간 단식을 하였고, 5·18특별법으로 수감 중이던 전두환과 영수회담을 제안하며 8일 단식한 황교안은 정신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갔었다. 또 비정치인과 학생운동가들도 단식투쟁을 감행했었고 올해만 해도 3월 간호법 반대의 대한의사협회, 6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7월 양평고속도로 백지화 철회와 9월 새만금 예산 삭감 항의 등의 단식규탄도 계속되었다.단식투쟁은 시작하기는 쉬워도 끝내기는 어렵다고 ‘양날의 검’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진정한 태도로 상대방의 이해와 합의를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번 이재명 대표의 경우 무표정한 여당의 아량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2023-09-14

기념식수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모두의 집에 풀과 꽃과 텃밭의 채소만 있는 건 아니다. 나무가 더 많다. 아니 더 많이 심었다.원래 제법 큰 대추나무가 마당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감나무, 가죽나무, 뽕나무, 사철나무도 있었다. 그러나 집과 터의 규모에 비해 전체적으로 휑뎅그렁했다. 고택엔 역시 소나무라며 남편이 제일 먼저 사다 심은 여섯 그루의 소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고, 기념식수로 심은 나무들도 몇 그루 있어 볼 때마다 기껍다.남편이 손주와 함께 석류나무를 사왔다. 그리고는 손자에게 이 나무는 건이 나무야. 그러니까 물도 주고 잘 키워. 나무팻말에 제 이름을 쓰게 했다. “석류나무, 이 건, 2022년 6월 10일” 기념식수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었다. 작년 여름 사흘을 묵고 간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기념식수를 제안했다. 신박한 제안에 무조건 콜! 조경회사에 전화해서 여름에 심어도 잘 자랄 나무로 추천한 보리수를 심었다. 꽃삽 들고 사진도 찍고 팻말도 써서 박았다. “초등학교 친구들, 김정숙, 김현숙, 박창희, 최금순, 이정옥, 2022년 8월 10일” 한 친구는 저 닮은 홍매화 한 그루 더 심겠다며 우겨 우물가에 심었고, 거기에도 나무팻말을 박았다. 올봄 가장 이르게 붉은 매화를 피웠길래 사진으로 꽃소식을 전했다.위덕대 자율전공학부 24학번 성인학습자들의 모임이 있다. 매년 스승의 날에 나이가 더 어린 나를 스승이랍시고 꼭 청해서 식사를 함께하고 선물도 주신다. 작년 스승의 날에도 어김없이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인사 삼아 모두의 집에 초대했다. 용인, 청도, 대구에서 각기 바삐 사시는 분들임에도 귀한 걸음을 주셨다. 집들이선물을 걱정하시길래 기념식수 얘기를 했다. 좋은 방법이라며 배롱나무를 꼭 사 심어 달라시며 나무 팻말을 미리 써 두셨다. “아름다운 동행, 유복혜, 박영희, 오순옥, 2022년 8월 23일” 가을에 배롱나무를 사 심고 팻말을 박았다. 올여름 분홍색 꽃을 피웠길래 사진을 올려드리며 감사함을 전했다.5월엔 선덕여왕경모회원 14명이 1박2일의 워크숍을 했다. 뜻있고 값진 나무로 기념식수를 해야 한다기에 단아하되 멋스러운 수형의 향나무를 사서 미리 심어두었다. 다같이 기념식도 하고 팻말을 망치로 박는 퍼포먼스도 했다. “선덕여왕경모회 방문 기념. 2023년 5월 22일”44년 전 딱 한 해, 소선여중 교사로 만난 인연으로 아직도 연락을 이어 온 선생님들 모임이 있다. 만발한 백일홍꽃을 단톡방에 올려 꽃구경 오시라고 초대했다. 7월 어느 날, 서울, 부산, 함양, 대구에서 5분이 태풍을 뚫고 오셨다. 흰 꽃이 탐스러운 목수국으로 기념식수를 했다. “소선회 방문 기념, 박종선, 송경숙, 유진숙, 이숙화, 임신영, 2023년 7월 15일”지난주 울릉도에 일이 있어 갔다. 베리의 죽음 후 울적함을 달랠 겸 남편도 동행했다. 남편이 울릉도의 주황색 열매가 예쁜 마가목숲을 보고 난 후 그 나무에 꽂힌 듯했다. 기어이 세 포기 사서 배에 싣고 왔다. 오늘 마가목을 심었다. 셋 중 가장 튼튼해 보이는 나무를 정성스레 심더니 한마디 했다. “이 나무는 베리 나무야.” 남편은 베리를 위한 기념식수를 한 거였다.

2023-09-13

다산처럼 읽고 쓰자

최선희 경운대 교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한다는 처서(處暑)가 지나면서 귀뚜라미가 풀밭에서 나오기 시작했지만 더위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그런데 자연의 섭리는 놀랍다. 밤 기온이 내려가 풀잎마다 ‘흰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가 찾아오며 아침저녁 시원한 바람의 손길을 느낄 수 있으니, 가을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것 같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독서의 계절이다.9월은 독서의 달이다. 1994년 시민들의 독서문화 정착을 위해 제정된 독서의 달을 맞아 올해 2023년 슬로건 공모 이벤트가 열렸다. 총 164편의 슬로건이 접수되어 ‘펼쳐보자 책도, 꿈도’, ‘책으로 눈 맞춤, 미래로 발맞춤’, ‘책은 한 장 한 장, 꿈은 성큼성큼’ 등 20건의 슬로건이 최종 선정되었다. 이 중 눈에 띄는 구절은 ‘책은 한 장 한 장’이다. 다산 정약용의 독서법을 생각나게 하는 문구이다.다산의 독서방법은 세밀하게 읽으며 깊이 생각하는 정독(精讀)이다. 그는 자신의 지인과 자녀에게 정독의 방법으로 다섯 단계의 초서독서법을 설명했다. 독서 전 단계인 입지(立志), 실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며 뜻과 의미를 찾는 해독(解讀), 읽은 내용을 능동적으로 고찰하고 자신의 뜻과 비교하여 취사선택하는 판단(判斷),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이나 교훈을 받은 부분을 기록하는 초서(抄書), 읽고 생각하고 기록한 모든 것을 통합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견해로 지식을 확장하고 창조하는 의식(意識)의 단계가 그것이다.다산 정약용은 자신이 강조한 다섯 단계의 초서독서법을 몸소 실천하면서 18여 년간의 강진 유배생활 동안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유배라는 처절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날 정도의 과골삼천(8E1D骨三穿)을 겪으며 수 만권의 책을 정리하며 편집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18세기 조선의 한 지식인이 자신만의 독서법으로 21세기 정보화시대에 걸맞을 정도로 세상의 정보를 필요에 따라, 요구에 맞게 정리해낸 것이다. 그의 고뇌어린 왕성한 지적 의욕과 실천하는 자세가 너무나 경이롭고 존경스럽다.다산의 초서지법(抄書之法)은 눈으로 빨리 읽는 일반 독서에 비해 엄청난 시간과 함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때문에 무엇이든 바삐 진행되는 요즘시대에 맞지 않는 독서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독서, 즉 책 읽기의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생각하기’가 아닌가. 남들보다 다른 생각, 어제보다 더 나은 생각으로 경험과 지혜를 쌓을 때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 몸의 근육이 단련되듯이 독서를 하면 생각의 근육이 단단해져 사고력이 강화됨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곧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秋分)이 다가온다. 밤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음을 실감할 것이다. 이 가을에, 천고(天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과 같이 천천히 읽고 써보자.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은 빨리 바뀌고 있지만 읽기와 쓰기도 그에 맞춰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2023-09-13

정치, 그 책임의 무거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탄핵의 위기를 맞았다. 아들의 사업에 부적절하게 관련된 혐의가 제기되었다. 하원의장 케빈 맥카시(Kevin McCarthy)는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하고 공권력을 방해하였으며 권력을 부패하게 한 흔적이 짙다면서 의회가 탄핵 소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또한, 그는 대통령이 가족이 부당하게 연루된 일에 대하여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대통령의 심각한 일탈에 동조하며 방관하는 백악관 당국에도 심각하게 경고하면서, 미국 의회가 즉각 대통령 탄핵 절차에 돌입할 것을 요청하였다. 바이든 대통령 측은 직접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않은 정치적 공세에 대처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반응했지만, 미국 시민의 절반 정도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고 전해진다.국내의 한 도지사가 국민소환의 위기에 처했다. 최근 있었던 수해 상황에서 있었던 지하차도 사고에서 그가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인명의 손실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해당 지역에서 주민소환의 요건인 서명인 확보가 시작되었으며,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정치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소환을 주장하는 측은 ‘도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책임져야 할 지사가 참사 당시 직무를 유기하고 부적절하고 무책임한 언행으로 일관해 도정의 신뢰가 사라졌다’고 한다. 물론, 안정적인 도정의 지속적인 진행을 위해 소환을 반대하는 시민들도 있다. 뽑아준 유권자의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선출직 공직자의 업무수행은 크나큰 도전을 받는다.선출직 공직자는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의 눈길을 피할 길이 없다. 시민들의 소환압박은 물론, 매서운 언론의 눈초리는 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공인으로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정직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 충분한 전문성을 가지고 성실하고 유능하게 매사에 임해야 하며, 모든 일의 진행과 결과는 한 치도 빠짐없이 공개되고 공정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주어진 임기 내내 비판과 평론이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겉으로는 균형을 잃지 않는 공직자의 모습을 지켜야 한다. 세평에 휘둘리지 않고 이념에 따라 편파적이지 않으며 국민과 시민만을 위하여 봉사하며 섬기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국민의 혈세를 봉급으로 받으며 일하는 공직자의 가치를 날마다 증명해야 한다. 실로 어려운 일이지만, 국민은 때가 되면 다시 누군가를 뽑아 세워 일을 맡긴다.철학자 플라톤(Platon)은 지도자의 무지(無知)가 공동체 건설에 있어 최악의 조건이라 하였다. 무식한 지도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지도자, 알아야 할 사항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지도자가 가장 나쁜 지도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인간인 이상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실정(失政)의 책임(責任)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지도자가 되면 위험하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사회에서, 더 많은 국민이 인간다운 삶과 행복한 일상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문제는 심각하다. 정치는 그 책임의 무거움을 알고나 있는가.

2023-09-13

‘청년이 아프다’

홍석봉 대구지사장 요즘 청년들이 많이 아프다. 경북의 청년 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다. 2037년이면 경북도민 10명 중 청년은 2명이 채 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됐다. 출생 인구가 줄면서 청년 인구도 함께 줄고 있다. 유입 보다 유출이 더 많다. 교육환경이 좋고 일자리가 풍부한 수도권으로 계속 빠져나간다. 직업이 가장 큰 이유다. 가족, 교육 등이 다음 순위다.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는 ‘청년 백수’가 126만 명이라는 통계도 있다. 졸업자 열 명 중 3, 4명은 백수다. 아예 구직활동을 포기하고 그냥 쉰다는 청년도 32만 명이라고 한다. 속칭 ‘니트족’이다.취업은 결혼과 출산에도 영향을 미친다. 청년 3명 중 1명 만이 결혼을 긍정적으로 본다. 청년 중 절반 이상은 결혼해도 자녀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청년들의 결혼관과 자녀관이 크게 바뀌었다. 결혼하지 않는 이유로는 경제 문제를 첫 손 꼽는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과 ‘빚투(빚내서 투자)’로 빚더미에 올라 인생을 저당잡히는 이들이 적잖다. 청년들의 현주소다.청년 유출은 지방소멸과 직결된다. 정부 차원에서도 지방소멸과 균형발전을 위해 여러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매년 9월 셋째 주 토요일(올해 9월 16일)은 ‘청년의 날’이다. 청년 문제에 관심을 높이기 위해 2020년 법정기념일로 지정됐다. 경북도가 12일 경주에서 청년의 날 행사를 열었다. 지역 청년들이 참여하는 각종 이벤트가 마련됐다. 청년들의 고민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도 가졌다. 이철우 도지사는 “청년이 모이고, 지방에 살아도 희망 가질 수 있도록 대전환을 이루겠다”고 했다. 청년들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9-13

돌확

윤명희 수필가 주말이면 농막에 간다. 산이 둘러쳐진 그곳에는 이제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잎만 무성한 수국은 아직 꽃대를 밀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에는 대신 쥐똥나무 꽃이 하얗게 내려앉아 있다. 나는 옮겨 심은 꽃들을 살피며 물을 준다. 그 꽃들은 그녀와 함께 남편의 친구인 K씨의 고향집에서 왔다.고향집 골목에 들어서자 빈집 냄새가 났다. 첫 집을 시작으로 옆집도 앞집도 비어있었다. 귀퉁이가 내려앉은 흙 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담쟁이가 눈치도 없이 새순을 틔웠다. 낡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문 옆에 먼지 앉은 유모차가 오지 못하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붉게 핀 목단 옆에는 작약이 꽃망울을 달고 둥굴레와 금낭화가 작은 등을 켜고 있다. 물기를 흠뻑 채운 장미가 지붕위로 발돋움 하고, 큰 화분에는 수국이 난초와 세력다툼을 하고 있다. 봄이면 다시 채워질 거라 기대했던 빈 화분들이 풀쑥 쓰러진다.마지막까지 고향집을 지키던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자 빈집들이 흉물처럼 남았다. 곧 허물 거라는 말에 남편과 나는 꽃나무를 가지러 먼 길을 갔다.우리는 하나도 남기지 않을 요량으로 괭이와 삽질을 해댔다. 지렛대를 이용해 수국이 든 큰 화분을 대문 밖까지 가져가는 일에 온 힘을 실었다. 아래채 뜰에 남보랏빛 꽃이 한 송이 피어있었다. 실금이 간 시멘 바닥 사이에 가냘프게 앉아있는 그것이 허물어지는 빈집을 홀로 지키게 할 수는 없었다. 괭이로 바닥을 깨 조심스레 뿌리를 거두었다.쉬었다 하자는 소리에 나는 돌확이 가까이 있는 뜰에 앉아 장갑을 벗었다. 집에 들어설 때부터 눈이 갔지만 관심 없는 척 했던 것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돌확에서 장례식장 영정 사진으로 뵈었던 K씨 어머니가 어른거렸다.이른 아침, 어머니는 장독대를 반질하게 닦고, 돌확에 들깨를 갈아 국을 끓였을 것이다. 학교에 늦겠다는 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 문을 두드린다. 서너 번의 재촉에 잠이 깬 아들이 눈을 부비며 방문을 연다. 머릿수건을 한 어머니는 텃밭에 나가고, 차려놓은 밥상이 기다린다. 마당 가운데 있는 살평상에 누워 못다 깬 잠을 떨친 아들은 엄마의 밥상 앞에 앉는다. 따뜻한 쑥국 향을 배에 채운 그는 책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선다. 어스름 해가 지면 된장국 냄새가 풍기는 대문을 들어선다.시집 와 평생을 살았던 어머니의 집을 허물 수밖에 없는 아들의 마음을 보지 않으려고 나는 가져갈 것만 욕심내고 있다. 나는 친정엄마가 남긴 물건을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 일찍 돌아가신 탓이라 해보지만, 결국은 손때 묻은 물건의 의미를 챙기지 못한 까닭이다. 이제 남의 집 처마 끝에 매달아둔 치자에도 눈이 가고 벽에 걸어둔 둥근 채까지 손이 간다. 이것도 아깝고 저것도 아깝지만 눈이 자꾸만 말없이 앉아 있는 돌확에 머문다. 차마 달라고 하기가 뭣해 에둘러 던졌다.“저건 어디 갖다 두려고?”가져가라는 말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나는 벌써 놓을 자리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내 속을 들여다 본 듯 했다.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어둑해서야 농막에 도착했다. 내려놓고 보니 배불뚝이 큰 항아리가 일곱 개나 된다. 옆집에서 버려둔 것까지 욕심낸 게 다 모였다. 나는 농장에 갈 때마다 돌확이 먼저 보이라고 입구에 있는 쥐똥나무 아래에 내려놓았다. 외롭지 않게 부레옥잠을 안겨주고, 함께 집을 떠나온 꽃들을 둘레둘레 심어주었다. 따라온 이웃집 항아리도 서로 마주보게 놓고 그 위에 화분을 올려두었다.보름달이 은은한 밤, 농막에 누워 전깃불을 끈다. 주중의 피곤함이 노곤히 내려앉는다.달빛 속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주앉은 항아리들이 맞장구를 치고 먼저 이사 온 쥐똥나무가 넌지시 돌확의 어깨너머로 끼어든다. 나도 모로 누워 바깥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얘기가 자장가가 된다.

2023-09-13

무오일주(戊午日柱)

육십갑자 중 오십다섯 번째는 무오(戊午)다. 천간(天干)의 무토(戊土)는 황토색을 가진 높은 산이다. 지지(地支)의 오화(午火)는 봉화대의 횃불 같다. 동물로는 누런 말이다.무오일주는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는 화산의 물상이다. 겉으로 보기에 침착한 선비의 모습이다. 마음속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정함을 가지고 있다. 생각이 많아 복잡한 내면의 소유자다. 우직하고 자존심이 강하지만, 변덕스럽지는 않다.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모르며, 거짓말은 하지 않는 편이다.친구를 좋아하며 신용과 의리를 중요시 여긴다. 허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호불호가 분명하여 타인에게 미움을 사기도 한다. 겉으로 보면 속이 드러나지 않아 우직한 곰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두뇌 회전이 빠르다. 또한 스태미나가 넘치기에 운동선수를 하거나 취미로 운동을 하면 좋다.장점으로는 독립심과 자존심이 남다르고 강건한 기상으로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을 갖춘 지도자 모습이다. 주어진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감 있어 일을 추진할 때 지속 능력이 좋지만, 주변 사람들과 갈등과 고통이 수반된다. 그렇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결능력이 탁월해 잘 대처하며, 주변 사람들도 도와주는 타입이다. 하지만 강압적이고 독단적이며 폭력적인 이중적 모습도 보여준다.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이 1939년에 발표한 ‘분노의 포도’가 있다. 1929년에 경제대공황이 시작되고 미국 중부에는 극심한 가뭄과 모래폭풍이 덮친다. 옥수수 농사를 망친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경제 파탄과 자연재해에서 트랙터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여 저소득층은 실업자로 전락하고 만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이야기의 주인공 톰 조드는 실수로 살인하여 4년을 복역한 뒤 가석방 된다. 돌아오는 도중에 어릴 때 목사였던 케이시를 만나 동행하면서 고향의 소식을 듣는다. 집은 가뭄과 은행 빚에 의해 쫓겨나기 직전이다. 구직광고를 보고 낙원의 땅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로 결정한다. 케이시도 함께한다.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까지는 수 천 킬로미터가 되는 먼 길이었다. 서부로 가는 인파 행렬 속에서 조부모가 세상을 뜨고 톰의 형과 임신한 여동생의 남편이 자기 살 길을 찾아 사라져 버린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가족들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거기도 일하려는 사람은 많고, 기업화된 농장들은 담합해서 임금이 턱없이 낮아져 있다. 굶주린 아이들은 병들어 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결국 노동력 착취에 반발해 노동자들은 조합에 합류하기 시작하고, 파업을 이끌던 케이시가 삽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톰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어 가족 곁을 떠나게 된다.작가는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라고 쓰고 있다. 톰의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잃더라도 가족만은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난에 허덕이며 절망하면서도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만은 놓지 않으려 애쓴다. 소외 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앞장서 싸울 사람으로 성장해 나간다. 희망의 가능성은 여전히 공동체, 즉 가족에게 있음을 톰의 어머니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무오일주 여자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활발한 활동성을 가지며 일의 추진력이 좋아 여장부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잘 꾸미기도 하지만, 배우자의 외모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남자는 겉으로 보면 마초 같은 모습과는 달리 알뜰하게 챙기는 성향이 있다. 미인과 인연이 많아 연애를 잘하는 편이다. 공명심이 있어 쓸 필요가 없는 곳에 돈을 쓰기도 한다. 남녀 공히 성적 유혹에 빠질 위험성이 있어 자신을 다스리는데 노력할 필요가 있다.무오일주는 만물의 생명력이 깃든 광활한 땅의 이미지를 하고 있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의 모습이다. 말이 하늘의 기운이 가장 무성한 무(戊)를 만났으니 조화롭고 활기찬 기운이다. 마치 큰 산 위를 뛰어 달리는 말과 같다. 진취적이고 정열적이며 화끈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야생마 같은 물상으로 어디에 구속되기보다는 자유 분방함을 즐긴다.또한 말은 깔끔한 동물이다. 발정도 일 년에 한 번만 하고, 인공수정도 안 된다. 그런데 말이 문제가 좀 있다. 우리가 머리 나쁜 사람을 보고 ‘말대가리’라고 하는데, 이 말은 주인을 몰라본다는 것이다. 그냥 올라타는 놈이 주인이다.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다. 미래나 과거가 아닌 현재에 충실하다. 어떤 규격이나 틀도 없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각종 제약에서 벗어나는 성향이다. 하지만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한 힘과 정열을 어디에 쓰느냐가 관건이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조선시대에 4대 사화(士禍)가 있다. 첫 번째가 무오사화다. 1498년(연산군 8년) 무오년에 벌어진 일이다.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단종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라는 이유로 훈구세력이 사림의 대표 김종직 일파를 처단한 사건이다. 김일손은 처형되고, 그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권력 다툼에는 항상 피 냄새가 난다. 훈구파를 비판하며 등장한 세력이 사림파다. 권력을 뺏기 위해 지키기 위해서는 반대파를 숙청하는 일이다. 김일손은 춘추의 필법으로 사관의 책무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선은 특별히 명분을 중시하는 사회였다. ‘선비를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라는 말은 체통과 명분을 중시했던 사회였기 때문이다.지금도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처리하고 있다. 명분이 정의롭다면 그들의 도덕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연 시행자들은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람일까라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의와 부당함에 분노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침묵하면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2023-09-13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

우정구 논설위원 봄과 가을은 기온은 비슷하지만 날씨의 변화는 확연히 다르다. 봄철에는 소나기 등이 자주 내리기도 하고 계절 내내 심한 바람도 많이 분다. 반면에 가을은 바람이 불어도 산들산들 불고, 청명한 날씨가 며칠씩 이어지는 등 얌전한 날씨가 특징이다.음양오행설은 이런 계절의 차이를 기운(氣運)으로 풀이한다. 봄은 온갖 만물이 소생하는 것처럼 발산하는 기운이 가득하고, 가을은 결실을 맺는 수렴의 기운이 세다고 한다. “봄바람 났다”는 말은 있으나 “가을바람 났다”는 말이 없는 이유다.등화가친(燈火可親)은 “등불을 가까이할 수 있다”는 뜻으로 가을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 중국의 문인 한유(韓愈)가 독서를 권장하는 시에서 한 구절 따와 유래가 됐다고 한다.옛 우리 선비들도 가을이 오면 한여름 무더위에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글 읽기에 정진했다. 특히 수확이 풍성한 가을은 마음이 안정돼 공부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로 꼽았다.우리나라 국민의 독서율이 인터넷, 스마트폰 등의 보급으로 갈수록 저조하다. 문체부가 조사한 국민독서실태 조사(2021년 기준)에서 국민의 연간 독서율(전자책, 오디어북 포함)은 47.5%에 그쳤다. 성인 두명 중 한명은 1년간 책을 한 번도 읽지 않는다는 의미다. 읽은 사람의 연간 독서량도 9.5권에 그쳐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독서는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다. 복잡한 세상에 사리분별력을 키워주는 데도 도움이 된다. 특히 성장기 어린이의 사고발달에 매우 유익하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책은 한권 한권이 하나의 세계다”고 말했다. 가을의 길목에서 독서의 세계로 빠져보자./우정구(논설위원)

2023-09-12

정치인의 ‘거친언어’, 유머로 바꿀 수 없나

심충택 논설위원 정치인들의 험한 말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마디마디에 지성은 찾아볼 수가 없고 살벌한 기운만 넘친다.정치인들의 막말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지켜야 할 선이 있는데 최근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진영을 극도로 의식하면서, 중간지대에 있는 국민은 안중에 없다. 이런 정치문화가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면서, 정치인이 이제 독버섯 같은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치인들의 거친 언행들이 사회병리의 토양을 만드는 것이다.민주당 박영순 의원이 최근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을 향해 “북한에서 쓰레기가 나왔어, 쓰레기가”라고 내뱉은 것은 탈북자에 대한 그의 증오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행위다.박 의원은 전대협 부의장 출신이다. 지난달 말 민주당 전남도당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서영교 최고위원은 “일본의 대변인 노릇이나 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국민의힘은 일본 총독부보다 더 못된 짓을 하고 있다”고 했고, 장경태 최고위원은 “당장 멈추지 않으면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국민적 운동이 용산총독부를 향할 것임을 경고한다”고 했다. 지난주에는 최강욱 의원이 대정부 질문 중 대통령을 일컫는 자리에서 “윤석열씨”라고 했다. 지난달엔 김은경 민주당 혁신위원장이 “‘윤석열 밑’에서 임기를 마치는 게 치욕스러웠다”고 했다. 국민이 선거로 선출한 대통령까지 일상의 조롱거리로 삼는 것이다. 기본적인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의회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 등 공인에 대해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민주당내에서 이처럼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러한 난폭한 언행은 내년 4월로 예정된 총선이 다가올수록 더 심해질 것이 뻔하다. 강성팬덤의 입맛에 맞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말을 사용하다보니 언어가 계속 더 험악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당 정치인 지지자들이 SNS나 커뮤니티에 쓰는 말들도 난폭하기 짝이 없다.온갖 조롱과 멸시, 저주에 가까운 글들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이데올로기 전쟁’이 지금처럼 일상화 한 적이 있었나 싶다.정치인들은 지금 추석명절을 앞두고 특히 고물가로 고통받는 서민들의 싸늘한 민심을 회복하는 데 집중해야 할 때다. 지난 주말에는 전북 전주의 한 빌라 원룸에서 생활고를 겪은 듯한 4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된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숨진 여성 곁에는 한동안 먹지 못한 듯 쇠약한 상태의 4세 남자아이가 있었다니 충격적이다. 올해 하반기는 취업문이 더 좁아져 기업채용공고를 기다리는 청년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은 지금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정치인들은 지금부터라도 위기가정과 청년취업 등 민생을 돌보는데 집중해 주길 바란다. 사회분위기를 황폐하게 하는 거친 언어들은 다수 유권자의 반발과 환멸을 불러올 뿐이다. 선거 판세에도 당연히 도움이 안된다. 국민은 자기와 이데올로기가 다른 상대까지도 유머로 감싸 안는 그런 정치인을 보고 싶어 한다.

2023-09-12

공교육의 몰락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종종 누구는 어디를 가서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의아했다. 방학을 이용해서 갈 수도 있을 텐데, 학기 중에 결석까지 하며 갈 이유가 무엇일까? 이 주제로 아내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개근 거지’란 단어를 알게 되었다. 단어의 어감에서 짐작하듯 학교를 빠지지 않고 다니는 학생을, 가난해서 학교만 다닌다고 비하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 옛날 개근상이 근면 성실의 상징이었다면 이제 개근상은 가난한 집안 환경을 드러낼 뿐이다.물론 부모 책임하에 학교를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 체험활동의 교육적 의미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것이 현실에서 부모의 재력에 따른 교육 차별과 맞닿아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집도 학기 중에 어디를 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스템은 개인의 (무)의식을 파고든다. 그리고 그 결과 학부모들에게 공교육은 신뢰하고 따라야 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별적으로 이용하는 대상이 되었다. 현장학습 제도가 오롯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매개가 된 것은 분명하다.서이초 선생님의 극단적 선택 이후 안타깝게도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연이은 비극적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각기 조금씩 구체적 사연은 다르지만, 학생 그리고 학부모와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으며 학교 당국의 무관심이 커다란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특히 서이초 선생님의 사건이 보도되고 우울증이 심해졌다는 기사를 통해 보건대, 언론의 보도가 도화선이 되어서 그간 잠재되어 있던 분노 혹은 억울함의 감정이 폭발된 것이다. 지금의 공교육은 좋은 선생님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라는 어느 교사의 인터뷰가 가슴에 꽂힌다.우리 사회는 공교육의 붕괴라는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하다. 해결을 위한 첫 단계인 원인 분석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서이초 선생님의 49재에 연가 혹은 병가를 쓰는 선생님을 징계하겠다는 교육부의 태도나 선생님의 자살이 정신력 문제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 사회가 공교육의 현실을 외면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공교육의 권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아졌는데, 선생님들에게는 이전 시대의 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 지금의 공교육은 교육 서비스업의 하나가 되었다. 이미 대학은 오래전부터 ‘소비자 만족도 조사 1위’를 홍보문구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영향은 초등·중등교육 현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대학 입시에 영향을 주는 생활기록부 작성이 끝나자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아 정상적인 학사 운영에 어려움이 생기는 현실은 또 다른 사례이다. 이제 선생님은 월급을 받고 지식과 정보를 알려주는 대상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 현장을 지키라는 교육부의 외침은 공소하게 들려올 뿐이다. 교권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교육을 대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습화된 교육 시스템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될 수 있다.

2023-09-12

가을의 어귀에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하루가 다르게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백로(白露) 지난 한낮의 가을볕은 노염의 여세를 몰아 여전히 따갑게 내리쬐지만, 살랑살랑 실바람은 산과 들판을 쓰다듬으며 선들선들 가볍게 지나간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초가을, 무엇을 해도 좋을 시기라서 그런지 아침 저녁으로 산책로 등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많아졌다. 삼삼오오 다니면서 얘기꽃을 피우거나 애완견을 데리고 걸어가는 사람, 운동삼아 뛰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가는 사람 등을 둘레길이나 해변, 강변, 공원 등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마치 가을 마중이라도 하듯이 간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산보하는 모습들이 여유로워 보인다. 특히 휴일의 아침산책이나 산행 등은 느긋한 마음으로 자연을 접하며 일상에 절여진 심신을 이완할 수 있기에 필자도 간혹 즐기는 편이다. 쳇바퀴 돌 듯하는 빠듯한 일상의 쉼표같은 휴식이나 멍때리기, 걷기 등은 어쩌면 숨가쁘게 살아가는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위안 삼는 ‘자락(自樂)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렇게 지난 주에 이어 이번 휴일도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포도(鋪道)를 조금 걷다가 야트막한 산길의 입새부터는 신발을 벗어 두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즐겨한다는 맨발 걷기를 지척의 동네 뒷산에서도 할 수 있다니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다. 진흙과 백토, 풀잎, 낙엽 등으로 이어지는 숲길 초반의 촉감은 부드럽고 매끈하고 약간 간지럽게 다가왔다. 거침없이 내딛는 빠른 발길보다는 땅바닥을 살피며 보폭을 작게 하고 조심스럽게 걷는 느린 발걸음으로 차츰 숲에 접어들면, 숲과 나만의 은밀한(?) 대화와 교감이 시작된다.해뜨기 전 숲의 고요를 깨는 것은 온갖 풀벌레들의 울음이다. 간간이 새들의 지저귐도 들려오지만, 일정한 음률과 리듬으로 울리는 풀벌레들의 합창은 이른 아침부터 귀를 맑게 해준다. 조금 지나니 댓잎을 가볍게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한여름의 햇살 받아 한껏 푸르던 잎새들이 녹음에 지쳐서 물들 채비를 하는 듯 황록색과 담록으로 어우러지니 눈 호강이 따로 없는 듯하다. 거기에 참나무가 즐비한 숲길 여기저기에 떨어진 도토리가 앙증스럽게 반기니 숲은 언제나 이처럼 같은 자리에서 다른 듯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데, 늘 무엇인가에 쫓겨 안절부절 허둥대는 자신은 언제쯤 숲의 여유와 안식을 배울 수 있을런지 발바닥을 따갑게 자극하는 돌부리가 채근하는 듯했다.그렇게 2시간여 산길을 맨발로 오가다 보니 서늘함 속에서도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다. 길을 나서면 이처럼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들이 많아지듯이, 사람 사이에도 가끔씩 왕래와 소통이 있어야 잡풀 무성한 산길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살이의 교분이나 정의(情誼)도 결국 자신이 하기에 달린 것이다.

2023-09-12

불멸이 된 ‘좀비 정찬성’

지난 8월 26일 밤, 대한민국의 뭇 남성들은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정신없었다. 나도 마찬가지.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줄줄 새는 눈물에 ‘정신적 수도세 폭탄’을 염려해야 할 정도였다. 여성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울었다. “누가 옆에서 양파를 까고 있는 거지?”라는 서양식 유머가 SNS에 돌았다. UFC 은퇴 경기를 치른 정찬성 때문이다.본명보다 ‘코리안 좀비’라는 링네임이 더 유명하다. 이 별명이 그의 화끈한 경기 스타일을 말해준다. 아무리 맞아도 쓰러지지 않고 끊임없이 상대를 향해 전진하는 ‘좀비 스타일’은 팬들을 열광시켰다. 좀비가 세계 무대에 진출한 2010년, 그해 격투기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굿즈 상품이 ‘코리안 좀비’ 티셔츠다.경북 포항 출신의 무명 선수가 세계 무대에 진출해 강자들과 뜨거운 난타전을 벌이며 커리어를 쌓는 동안 격투기는 마이너한 서브 컬처에서 주류 스포츠 산업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다. 레너드 가르시아, 마크 호미닉, 더스틴 포이리에 등을 꺾고 당대 최강의 챔피언 조제 알도와 타이틀전을 벌인 게 2013년이다. 경기 중 어깨가 탈구되는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아쉽게 패배했지만,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빠진 어깨를 직접 끼워 맞추려는 투혼을 보였다. 이후 부상 치료와 군 복무 등으로 3년여 공백이 있었지만, 다시 돌아와 이길 때나 질 때나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명경기를 펼쳤다. 그의 경기는 격투기 그 자체였다.어느덧 서른 후반이 된 정찬성이 절대 강자인 맥스 할로웨이와 붙었다. 할로웨이의 압도적 우세가 예상됐다. 좀비는 모든 걸 다 걸고 후회 없이 싸우겠다고 했고, 정말 그렇게 싸웠다. 최고의 타격가인 할로웨이를 1라운드에 몰아붙였다. 2라운드에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펀치에 관자놀이를 맞고 쓰러졌고, 목조르기 기술인 ‘아나콘다 초크’에 걸렸다. 기절한 듯 보였다. 그런데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한 그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좀비는 좀비였다.인생의 마지막 라운드라는 걸 직감했을까? 3라운드 공이 울리자마자 전성기 때의 ‘좀비’로 돌아가 할로웨이에게 돌진했다. 싱가포르 경기장이 터질 듯 끓어올랐다. 20초 동안의 엄청난 난타전. 단 0.1초 차이로 할로웨이의 강력한 카운터가 정찬성의 안면에 먼저 꽂히면서 경기가 끝났다. 마침내, 좀비가 쓰러졌다. 쓰러지는 순간까지 허공에 대고 두 방의 주먹을 더 휘둘렀다. 모든 것을 불태운 산화였다. 할로웨이는 정찬성을 일으켜 세운 뒤 마이크를 잡고 “좀비는 진정한 레전드다. 좀비를 위해 더 크게 소리지르라”고 외치며 존경을 표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만 할게요. 4, 5등 하려고 운동하는 게 아니거든요. 후회 없이 준비했는데… 챔피언이 될 수 없으니 그만 해야죠.” 좀비의 17년 격투 인생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언제나 화끈한 난타전을 펼친 탓에 이제는 상대의 주먹을 견딜 내구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불구덩이로 뛰어든 것이다. 은퇴 발표 후 옥타곤을 나서는 순간, 그의 테마곡인 ‘더 크랜베리스’의 ‘Zombie’가 울려 퍼졌다. 패배한 선수의 음악을 트는 건 이례적인데, 은퇴하는 레전드를 위한 UFC의 경의였다. 처절한 싸움에 삶을 다 바친 남자의 마지막 무대. 때로 어느 스포츠의 한 장면은 그 종목보다 위대하다. 모든 관중들이 ‘좀비’를 부르는 함성 속에 싸움을 내려놓은 그가 아내와 포옹하는 순간이 그랬다.“돈을 벌거나 안전한 승리에만 관심 있는 선수들과 달리 그는 이 스포츠의 실제 모델이다”, “좀비는 챔피언 벨트를 얻지 못했지만 더 위대한 불멸을 얻었다” 정찬성의 은퇴 영상에 달린 해외 팬들의 댓글이다.좀비의 마지막 상대가 될 수 있어 영광이었다는 맥스 할로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방패를 든 채로 쓰러지는 것보다는 언제나 칼을 든 채로 쓰러지는 것을 택한다”고.사람들은 묻는다. 모든 걸 불태우면 뭐가 남느냐고. 정찬성이 답한다. 감명과 영감, 그리고 작은 불씨들이 남는다고. 그게 다른 이들의 생으로 옮겨 붙어 빛과 열기가 된다고. 나는 앞으로 용기와 꺾이지 않는 마음이 필요할 때면, 죽을 걸 알면서 온몸으로 온 생애로 죽음을 향해 돌진한, 그렇게 영원히 살게 된 정찬성의 장렬하고 아름다운 산화를 떠올릴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코리안 좀비!

2023-09-12

일요일과 토마토 수프

주말 아침, 깨끗이 씻은 복숭아를 잘라 그릇 가장자리에 담는다. 금요일 퇴근길에 사온 그릭 요거트를 수저로 크게 퍼서 가운데에 담고 그 위에 메이플 시럽을 뿌린다. 요즘 다시 식이 조절 중이라 과자를 먹지 않으려 하지만 오늘은 주말이니까, 괜스레 너스레를 떨며 달달한 과자 조각도 듬뿍 올린다.빠른 손놀림으로 그릭 요거트를 만들어 냈다면 미리 끓여 두었던 뜨거운 물로 녹차를 우린다. 투명한 물에 연둣빛 분말이 점차 퍼지는 걸 지켜보며 아침의 부산스러움을 조금 낮추어 본다.식사를 마치면 그간 애써 흐린 눈으로 외면하곤 했던 집안의 상태를 살핀다.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 정돈되지 못한 각종 생활용품들, 한가득 쌓인 설거지, 밀린 빨래들, 비에 젖어 퀘퀘한 냄새를 풍기는 운동화까지 그야말로 무질서와 대혼란의 종결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잠깐 딴청을 부려보지만 마음 속 깊이 어서 움직여야 한다는 조급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우선 암막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그 후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통에 갖다 놓으며 밀린 설거지를 처리하고, 그 다음은 가스레인지와 그 주변부에 베이킹소다와 식초를 섞은 주방 세제를 뿌려 기름때를 불린다. 음식물을 처리하면서 냉장고 안도 비우고, 마찬가지로 만들어둔 세제를 뿌린 후 마른 걸레로 닦아낸다. 주방이 얼추 마무리 되었다면 다음은 바닥을 청소한다. 바닥 다음은 책상 위, 그 다음은 빨래, 그 다음은 각종 쓰레기 정리 등등 7평 남짓한 좁은 원룸이지만 발길 닿는 대로 청소하다보면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꾸준한 속도로 달려 나가는 마라토너처럼 길고 묵묵한 수행을 꾹 참으며 나아가다 보면, 다행히 저 멀리 결승선이 보이기 시작한다,청소가 마무리되어갈 때쯤이면 다시금 배가 고파진다. 이제는 가을을 앞두고 꼭 생각나는 음식인 토마토 수프를 만들 차례다. 냉장고에서 금요일 저녁에 사둔 버섯과 양파, 당근, 브로콜리, 토마토, 소고기를 차례대로 꺼낸다.양파와 토마토를 손에 쥘 때면, 언제나 듬직한 모양새로 안정감 있게 자리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당근과 브로콜리도 차례대로 찬 물에 깨끗이 씻어내며 몸의 열기는 물론, 반복되는 일상 위로 쌓인 무료함도 탈탈 털어낸다.청소는 숨이 가쁘게 정신없이 움직였다면, 칼질하는 시간만큼은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빠른 속도와 효율성만 보고 움직였다간 다치기 쉽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도마를 두드리는 칼질 소리와 함께 주방을 채우다보면 다시금 집 안의 온기가 훈훈히 도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안정된다.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면 브로콜리의 머리 부분을 30초 정도 데쳐둔 후 작게 손으로 떼어내어 큰 그릇에 손질한 재료를 한 데 담는다. 여기까지 마쳤다면 큼지막한 프라이팬에 동물성 버터를 한조각 올리고, 버터가 녹으면 지방이 적은 부위의 소고기를 굽는다. 어느 정도 고기의 핏기가 가시면 당근, 버섯, 양파, 브로콜리, 그리고 큼지막하게 썰은 토마토 7~8개 정도 차례대로 넣어준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다음은 재료가 잠길 만큼 물을 넣어준 후 월계수 잎, 카레 가루 2스푼 정도 넣어 향과 감칠맛을 더한다. 냄비 뚜껑을 닫고 2~3시간 정도 푹 끓여주면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이맘때 딱 먹기 좋은 토마토 수프가 완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다른 재료보다 토마토의 양을 훨씬 많이 넣어야 한다는 점이다. 토마토의 갯수를 더 늘려도 되고, 시중에 파는 토마토 퓨레를 4~5 수저 더 넣어 토마토의 맛과 향을 강하게 내면 더욱 좋다.준비한 재료를 썰어 넣어 푹 끓이기만 하면 돼서 그리 복잡한 요리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보며 끓여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많은 주말 오후에 시도해야 하는 요리다. 대량으로 만들어 놓고 소분 후 냉동실에 넣어두면 원하는 때마다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기도 좋고, 무엇보다 소화가 빠르고 속이 편해서 기운 없을 때 먹으면 좋은 음식이기도 하다.아직 대낮의 태양은 뜨겁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퇴근 후 창문을 열고서 선선한 바람과 함께 토마토 수프를 먹다 보면 여름 내내 끈적하게 쥐고 있던 지난 미련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사소하지만 부지런히 가꾸어 나가는 일상의 습관으로 다시금 보통의 월요일로 나아가 본다.

2023-09-12

‘1-3 일동’ 감사 연꽃

강길수 수필가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 곁에 연꽃 한 송이가 있다. ‘1-3 일동’ 감사 연꽃이다. 아까워 못 마시는 작은 혼합 음료병이 변신한 연꽃이다. 벌써 3주가 지났다. 연꽃엔 명함보다 조금 큰 종이쪽지가 붙었다. 쪽지에는 이런 글귀가 쓰였다.“항상 저희를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1-3 일동”큰 글씨 세 줄로 쓴 감사 글 아래 왼쪽 공간에, 분홍 하트 눈을 가진 토끼를 그렸다. 토끼 왼쪽과 오른쪽에 위아래로 분홍 하트가 각각 두 개씩 그려져 있다. 그 오른쪽엔 1학년 3반 일동 표시 글을 써넣어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쪽지에는 모두 7개의 하트가 있다. 사랑과 행운의 하트가 틀림없으리라.8월 중순 금요일, 흐리고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이었다.이웃 시 S 여고에서 일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마칠 시간이 가까워 교사(校舍) 입구에 놓은 시료 채취기 앞에서 기다렸다. 안에서 여학생 네댓 명이 나오더니, 내게 쪽지를 붙인 혼합 음료 두세 병을 내밀며 말했다. “저, 이것 좀 받아 주실 수 있으세요?”예상치 못한 상황에 엉거주춤, 한 병을 받으며 말했다. “응. 한 병이면 돼. 고마워!” 교내 종교모임 학생들인가보다 여기며, 붙은 쪽지의 글은 읽지도 않고 음료병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학생들은 내게 해맑은 웃음을 덤으로 선물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시간이 되어 시료 채취기를 철거했다. 빨리 가고픈 마음에, 음료는 꺼내 보지도 않았다.집에 돌아와 조끼 주머니에서 음료병을 꺼냈다. 비로소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래. 세상은 역시 살만한 거야!”하고 속말이 튀어나왔다. 쪽지는 종교모임 학생들이 쓴 게 아니라, 1학년 3반 ‘Z세대’들이 쓴 것이었으니까. 더운 여름날 교내에서 일하는 이들을 어린 딸들이 분별(分別)하고, 뜻을 모아 감사의 마음도 함께 담아준 음료병…. 아까워 음료를 마실 수가 없다.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분별을 안 하거나, 못하는 사람들이 휘젓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정치, 행정, 사법, 언론, 학계, 종교계 등 사회 대부분 분야가 분별력을 잃고 좌충우돌한다. 때문에, 묻지 마 강력범죄가 퍼지지 않겠는가. 한데, 이 학교 1-3 어린 학생들은 어찌하여 근로자를 분별(分別)하고 감사하게 되었을까.지금 고1이면 거의 홑 자녀일 테고, 동기간(同氣間)이 있어도 두셋일 것이다. 그러니, 이 고운 딸들이 그저 예쁘고 기특하기만 하다.S 여고 1-3반 학생들의 분별력이 감사로 태어나, 내게 다가온 날…. ‘디지털 원주민’으로도 불리는 ‘Z세대’ 고1 소녀들. 그들은 내 마음에 ‘1-3 일동 감사 연꽃’으로 피어났다. 양심 저버리고 분별력 잃은 기성세대의 검은 마음. 그 검은 마음에 1-3 일동 감사 연꽃 씨앗이 뿌려져, ‘분별의 연꽃’으로 활짝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불의와 부정, 조작과 선동을 몰아내고, 진실과 정의와 사랑이 도도히 흐르는 분별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2023-09-11

그런 과학은 없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동해는 천혜의 어장이며 수산업은 포항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산업 중 하나다. 따라서 포항 지역사회는 바다 건너편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에 대해 대단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지난 8월 24일 오전‘일본 후쿠시마오염수방류반대포항시민행동’은 죽도시장 개풍약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원전 오염수 방류를 강행하는 일본 정부, 그리고 반대와 견제는커녕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우리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방류를 앞두고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정화 시설(ALPS)을 거친 원전 오염수는 방류해도 안전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으며, 일본 정부 또한 이를 오염수 방류의 ‘과학적’ 근거로 삼고 있다. 다소 황당하게도 우리 정부가 국민의 세금인 예산을 들여 이 ‘과학적’ 논거를 홍보하는 광고를 제작ㆍ방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 결과 상식과 안전의 문제여야 하는 것이 정쟁의 소재가 되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은 반증 가능하기 때문에 비로소 과학성을 확보한다고 보았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자 지식 체계이지만, 결코 그 자체로 완벽한 진리는 아니다. ‘ALPS로 걸러진 원전 오염수는 방류해도 안전하다’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주장 또한 지속적으로 반증되고 확인되어야 하는 가설이자 이론에 불과한 셈이다. 방류된 오염수가 중장기적으로 해양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해양생물들의 먹이사슬에는 얼마나, 어떻게 축적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다.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은, 이번 오염수 방류가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서가 아니라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사회는 일찍이 산업 폐수의 무분별한 방류로 인해 이타이이타이병이나 미나마타병 같은 공해병을 겪은 바 있다. 미나마타병은 수은 중독에 의해 발생하는 병이다.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 위치한 신일본질소비료 공장에서 1950년대부터 중금속인 수은이 포함된 공장 폐수가 바다에 무단으로 방류되었고, 그것이 먹이사슬을 따라 축적되어 어패류를 섭취한 사람들이 신체 마비, 정신지체 등의 심각한 증상을 겪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983년, 울산 온산공단 인근 주민들이 겪어 왔던 전신 통증과 마비 증상의 원인이 공단에서 바다로 흘러나온 중금속 때문임을 밝힌 ‘온산병’이 대표적인 공해병 사례로 알려져 있다. 쉽고 저렴하게 산업 폐수를 처리하려던 시도가 수년~수십 년 뒤 무서운 질병으로 돌아온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가 ‘과학적으로’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인 태도가 아니다. 과학은 결코 100%를 이야기하지 않으며, 과거에는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것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건 실험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옳다. 과학의 이름으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아가 저지할 수 있도록 과학계와 시민사회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2023-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