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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는 우상

등록일 2024-06-16 19:38 게재일 2024-06-1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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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김경아 작가

바위는 그냥 두면 돌덩이일 뿐이다. 네모지게 깎으면 다듬잇돌이 된다. 돌을 깎아 농사를 지으면 온 식구가 배를 불리고, 가락바퀴에 실을 꿰어 옷을 지어 입으면 매서운 겨울을 이겨낸다. 돌을 쌓아 성을 쌓으면 적군을 막아주는 요새가 되고, 쇠줄을 갈아가며 돌을 잘라 만든 편경은 국보급 악기가 되었다. 인간들은 돌에 의미를 부여했다. 고기 잡으러 나간 아버지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돌탑을 쌓아 자식의 앞날을 밀어주는 조상신으로, 아이들이 아프거나 아이를 낳고 싶을 때 두 손을 비비면 자식을 점지해주는 삼신할미로, 가족의 앞날을 맡겼다. 내일이 불투명할 때, 누군가는 바위에 부처를 새겼고 누군가는 경배를 올리며 불심으로 이겨내길 기원했다.

못난이 부처 사진을 보고 고령으로 차를 몰았다. 개포리 시리골은 동네를 둘러싼 골짜기 모양이 마치 떡시루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도로에서 골짜기로 들어가면 기와를 얹은 집들이 보이고 유형문화재 표지판이 도로에 우뚝 서 있다. 석조관음 보살좌상은 배 모양의 평평한 돌에 새긴 고려시대 불상이다. 전체적인 윤곽은 돋을새김이고, 옷의 주름이나 연꽃무늬 등은 선으로 긋는 기법이다. 머리에 쓴 관은 여타 불상과 달리 丁(정)자 모양이다. 얼굴은 둥글넓적하고 좁은 코, 작은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이 풍겨졌다. 어디로 보나 대웅전에 정좌한 부처의 모습이 아니다. 금박을 입혀 고급스럽게 빛나지도 않는다. 르네상스 시대의 빼어난 조각상에 비하면 비례도 엉성하다. 양어깨에 걸친 옷의 주름은 물결선처럼 대강 처리하여 남루하고 대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조각이 간결하지 못하고 생동감도 없다. 솜씨 좋고 불심 깊은 석공의 작품이 아니라 망치와 정을 들고 오며 가며 새긴 작품 같다.

뒷면에 ‘옹희(雍<7155>) 2년(985) 을유 6월 27일’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조각에 잔잔히 흐르는 고려인들의 삶의 자취를 반추해 보게 한다. 거란족의 거듭된 침입으로 민생은 피폐해졌다.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쳐도 빈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마음 둘 곳 없는 백성은 정치권력 이외의 의지처를 찾았다.

불완전한 인간은 수많은 우상을 만들었다. 우상은 무결점이어야 했다. 아주 균형 있게, 반듯하게, 형상도 미끈하게 빚었다. 자신만의 상(像)을 만들어 떠받들고 환상의 세계를 덧입혀 정신의 언어를 쏟아내기 위해 완벽을 추구했다. 석조관음 보살좌상은 외모에서 우상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균형도, 선도 고르지 않다. 마치 우리들의 일그러진 우상처럼 어설프다. 정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불상은 범접이 어렵다. 인간 크기를 능가하는 불상은 선뜻 다가서기 꺼려진다. 하지만 석조관음 보살좌상을 마주 보면 눈높이가 같아진다. 온화한 표정과 투박한 몸짓, 헐렁하고 정감 가는 미소에 왠지 동질감이 느껴진다. 언제든 다가서면 중생의 괴로움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 줄 것만 같다.

짧은 목 아래로 얕게 가슴골이 드러난다. 오른팔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형식이고, 왼손에서 뻗어 나온 연꽃 양 끝에는 각각 꽃이 피어 있다. 옷 주름은 구불구불한 몇 가닥의 선으로 간략하다. 결가부좌를 튼 하체는 상체에 비해 더욱 왜소하다. 숙련된 장인이 깎아낸 게 아니라 비포장 인생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원을 바위 위에 성스럽게 새겨 놓은 듯하다. 허술한 모습에 나도 더 가까이 다가선다. 말라버린 들꽃이 시간을 머금고 있듯 불상 앞에 서니 남편의 건강과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손을 모았던 엄마들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 차마 목 놓아 부르짖지 못하고 조용히 머리만 조아렸을 중생들의 향기를 찾는다. 허술한 옷을 입고도 미소를 잃지 않는 불상의 모습이 친근하다.

인간들은 정말 완벽한 우상을 원했을까. 인간들이 구하는 것은 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십자가의 형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상의 형상이 부처의 자비를, 디오니소스의 형상이 다산과 풍요의 대체품이 될 수는 없다.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함에 대한 결핍을 자신이 좋아하는 형상으로 채우고 싶었을 것이다.

삼촌 같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나와 괴리가 없는 친근한 우상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마음에 큰 물결이 일면 찾아가 독백의 언어를 뱉을 수 있는 인상 좋은 우상이 필요했다. 우상 앞에 선 사람들의 해진 마음을 다독여주는 듯하다.

부처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고 내려오는 길, 완벽하지 않은 우상을 바라본다. 이웃집 삼촌이 편안한 옷을 입고 손짓하는 것 같다. 편안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으면 다시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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