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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미역줄기

미역줄기. “따르릉”전화벨이 울린다. 대부분 저녁을 회사에서 먹고 오는 남편이 오늘은 집에서 먹고 싶다며 일찍 온다고 한다. 오늘따라 아이들도 일찍 와서 오랜만에 가족이 다 모였다. 갑자기 내 손이 분주해졌다. 얼른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올려놓고 반찬을 하려니 아무것도 없다.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빠른 걸음으로 집 앞에 있는 시장에 갔다. 겨울바람에 가지는 잎을 다 내어주어 앙상했다. 이곳저곳에 시린 손을 비비며 할머니들이 무와 배추 그리고 미역을 놓고 입김을 내고 있었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벌써 가로등은 다 켜졌는데 할머니들은 언제 따뜻한 식탁으로 돌아갈까 못내 마음이 쓰인다. 미역줄기와 배추를 사서 집에 왔다. 나의 손은 바빴다.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뚝배기에 멸치를 넣고 물을 우려냈다. 미역을 미지근한 물로 조물조물 씻다가 늘 이맘때면 나오는 미역을 보니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무뚝뚝하시며 집안일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지만 막내딸인 나에게 만큼은 늘 따뜻한 서울 남자였다. 따뜻한 봄이면 함께 토끼풀을 뜯으러 다녔고 클로버, 국화꽃, 제비꽃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처음 배운 두발자전거에 토끼풀을 잔뜩 실어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어부처럼 마냥 신났고 겨울엔 강가에 모닥불을 피워 돌멩이를 주워 모아 물수제비 놀이에 하루해가 기울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시장에 들러 항상 미역줄기를 사오곤 했다. 내가 결혼을 하겠다고 남자를 데리고 갔을 때, 아버지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남편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었다. 가슴시리도록 아까운 딸을 떠나보내기 싫어서 종일 우울해 하셨다. 결혼식 날 조용히 방에서 밤새 앨범만 뒤적였다고 하셨다. 앨범속의 나는 아버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행복하게 웃고만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를 낳고도 음악학원을 계속했다. 늘 바빴다. 학원이 친정과 가까이 있어서 마치면 거의 친정에 들렀다. 아버진 팔십이 넘은 나이에도 내가 갈 때마다 아랫목에 앉혔고 동그란 상에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여와 아버지 사랑만큼 따뜻한 저녁을 차려 주셨다. 아버지가 끓여준 된장찌개에는 늘 미역줄기가 들어 있었다. 미역줄기를 좋아 하는 딸에게 주는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어느 여름날 뜨거운 햇볕 아래 해변을 걷던 중, 파도가 밀려오면서 모래 위에 널브러진 미역 줄기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냥 흔한 해초로만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다에서 얼마나 긴 여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에 감탄이 일었다. 부서진 조개껍데기와 작은 돌에 수십 번을 긁혔겠지만 끝내 이곳까지 온 미역 줄기를 보며 유연함을 떠올렸다. 김경아 작가 바람을 거슬러 싸우기보다 흐름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다듬어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지혜를 배우게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마흔에 얻은 막내딸이 삶의 강물에서 고이지 않고 잘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역줄기를 넣어 찌개를 끓여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무리 끓여 보아도 그 맛은 나지 않았다. 미역 줄기처럼 곧고 탱탱하시던 아버지가 미역 잎처럼 힘이 없고 약해지셨지만 늘 상을 들고 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선명하다. 된장찌개의 향은 밥상 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 깊이 말뚝처럼 박혀 있다. 하지만 그 향기가 한편을 아리게 한다. 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앉아 밥을 먹던 시간이 언제였던가. 가끔 내가 기대고 싶을 때 미역줄기가 든 아버지의 된장찌개는 그림처럼 떠오른다.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운 단풍처럼 세월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사랑은 더욱 그윽하게 다가왔다. 아버지의 사랑을 미역 줄기에 담아 나도 오늘 저녁 된장찌개에 넣어본다. 거센 파도가 와도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고 흩날리며 파도와 함께 춤추는 미역줄기처럼 우리 아이들도 세상의 바다에서 강하게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미역 줄기의 향이 아버지의 손맛과 함께 식탁 위에 그윽하다.

2024-12-22

씬짜오, 언니

오빠와 나는 9살 차이가 난다.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돌잔치를 하고, 아장아장 걸을 때에도 오빠는 결혼을 하지 못했다. 수십 번, 수백 번의 맞선을 보았지만 오빠 나이 마흔이 넘도록 성사 되지 못했다. 부모님은 나이 들어가는데 오빠는 손자는커녕 결혼을 하지 못했다. 결혼 하는 걸 못 보고 돌아가실까 봐 엄마는 자나 깨나 걱정이 많았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 가는 것도 괜히 눈치가 보여 발길이 뜸해졌다. 특히 명절이 되면 오빠의 친구들은 본가며, 처가며 가는데 늘 방안에 혼자 있는 오빠를 보는 것이 마음의 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는 다른 나라에서 아가씨를 한 명 데리고 왔다. 오빠가 장가가는 것이 최고의 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피부색과 다른 언어, 다른 문화의 올케언니를 맞이하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씬짜오” 이 한 마디로 겨우 인사를 나누었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국의 문화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피부색이 다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어떻게 학교생활을 적응해 나갈지, 혹이나 왕따 같은 것은 당하지 않을지, 부부모임에서 어떻게 오빠를 내조할지, 부모님은 어떻게 모시고,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한국 음식은 어떻게 등등의 걱정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을 이어갔다. 오빠는 나보다 10살이나 어리고 얼굴색이 다른 사람과 결혼식을 올렸다. 걱정이 앞섰던 가족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은 봄날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결혼을 한 후 올케 언니는 부지런히 적응해 갔다. 다문화인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겨 무료로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올케 언니는 오자마자 한글을 금방 익혔다. 열심히 공부를 하더니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을 하였다.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도 가고 가까운 식당에 가서 맛있는 것도 사 드리고 살뜰히 챙겼다. 바쁘다는 핑계로 늘 잘하지 못했던 딸들을 대신해 올케 언니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애를 썼다. 부모님의 생신 때는 손수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한국 전통 음식인 갈비찜, 잡채. 나물도 금방 익혀 한가득 차려냈다. 언니가 한 음식에는 엄마의 맛이 났다. 엄마에게서 배운 음식이라 맛이 있었다. 부모님의 시름은 조금씩 사라져 갔다. 올케 언니는 아들을 둘 낳았다. 부모님이 가장 기뻐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아빠를 닮았다. 제 엄마와 아빠가 하는 모습들을 보며 아이들은 할머니의 무거운 짐도 잘 들어주고 재롱을 피우며 잘 자라주었다. 학교생활도 너무나 밝게 잘 적응해 갔다. 김경아 작가 엄마가 침대에서 떨어져 고관절이 부러졌다. 한 달 가까이 병원에 있었다. 거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늘 옆에 있어야 했다. 우리는 힘드니까 간병인을 쓰자고 했지만 올케 언니는 ‘엄마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며 손수 엄마의 간호를 맡았다. 페트병에 물을 떠와서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의 머리를 감겼고 엄마의 대소변을 받아냈다.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엄마를 부러워했고 엄마는 고마워했고 뿌듯해했다. 지금 언니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한국 여성들에게 학교 방과 후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당당하게 자기의 꿈을 펼쳐 나가고 있다. 작년에는 베트남 부모님이 한국에 오셔서 한 달 동안 한국에 머물렀다. 올케 언니의 부모님에게 엄마는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도 충분히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올케 언니가 생긴 후 오빠는 밝아졌다. 이젠 명절이 되면 오빠는 혼자가 아니라서 좋다. 우리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부모님을 대신해 우리 부모님을 잘 모셔주어 너무나 감사하다. 언니를 볼 때마다 나도 미소가 생기지만 고마운 마음을 말로 전하는 게 참 쉽지 않았다. 문자라도 한 번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겪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 같다. 소통은 말이 아니고, 문화가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이 만들어 감을 알게 되었다. 괜한 걱정에 자신을 묶어 두기 보다는 희망으로, 기대로, 마음으로 서로를 들여다보는 눈이 깊어져야할 것이다.

2024-12-08

금지곡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엄마가 싫어하는 노래가 하나 있었다. ‘여자의 일생’이라는 노래다. 엄마는 그 노래를 유독 싫어했다. 큰 소리로 가요를 따라 부르다가도 그 노래가 나오면 빠른 속도로 버튼을 눌러 껐다. 그 노래는 우리 집의 금지곡이었다. 그 노래 속에는 엄마 동생의 삶이 들어 있었다. 노래의 가사처럼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떠나 버린 이모는 엄마의 아픈 노래였다. 이모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이모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며 처가의 짐을 덜어 주었다. 이모는 우리 남매들에게 언니 같은, 누나 같은, 아버지에게는 자식 같은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모 뒷바라지는 그리 길지 못했다. 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삶을 정리하며 집에서 요양을 했다. 젊은 엄마에게는 아버지의 병간호와 생계의 멍에가 너무 무거웠다. 엄마를 대신하여 이모는 학업을 포기 하고 우리를 돌보았고, 우리 남매들의 뜨신 밥을 맡으면서 우리 집의 살림도 떠맡게 되었다. 몸이 아픈 아버지는 예민해지고, 성격은 날로 불같이 변해갔다. 무슨 일이든 참지 못했고, 이모와 자주 싸웠다. 곰보였던 이모 얼굴은 비포장 길처럼 울퉁불퉁했다. 사춘기였던 우리 3남매는 그런 이모를 친구들 앞에서 늘 부끄러워했다. 어느 날, 집 마당이 소란스러워 나가보았다. 동네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건넛방 아저씨가 돈 3만원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마당을 쓸다가 3만원을 주운 이모는 도둑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모는 자초지종을 말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모의 옷을 구석구석을 뒤졌다.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이모의 음성은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가 되었다. 다음 날, 눈물 줄기 같은 비가 내렸다. 이모는 우리에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났다. 부엌의 도마 소리는 허공에서 자꾸만 들려왔다. 마당에 날아와서 먹이를 쪼아 먹던 까치도 외로워 보였다. 정답게 이야기 해 주던 이모가 사라진 자리에서. 모든 집안일은 아버지와 언니의 몫이 되었고 엄마는 더욱 바빠졌다. 이모는 점점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기억의 끈도 삭고 삭아졌다. 하지만 엄마는 우리와 달랐다. 텔레비전에서 ‘여자의 일생’ 노래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우리가 따라 부르는 것도 싫어했고 화를 내기도 했다. 잊히지 않는 이모를 떨쳐내고 있는 것이었을까. 창밖에 새끼 손톱만한 달이 까만 하늘에 노랗게 박혀있는 것을 보며 잠이 들었다. 어둠이 짙은 밤공기를 따라 흐르는 노래 소리는 구슬프게 들렸다. 엄마는 우리의 머리맡에 앉아 달을 보며 우리에게 금지시켰던 노래를 조용조용 부르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내 볼에 닿는 엄마의 소매는 젖어 있었다. 김경아 작가 강산이 서너 번도 더 바뀌었다. 엄마는 10년 전부터 이모의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뜬금없이 엄마는 이모를 찾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엄마의 뜻을 받아들여 이모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모를 찾기로 마음먹기까지 참으로 오랜 아픔을 그냥 넘기며 살아왔다. 이모는 살아 있었다. 35년 만에 이모를 만났다. 이모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큰언니였던 엄마는 허리가 다 꼬꾸라져 있었고 말썽쟁이였던 막내 동생은 백발이 무성했다. 이모의 곰보 자국 덕분에 우리가 이모를 알아보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았던 이별과 만남의 대사는 눈물이 대신했다. 이모는 우리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도 모질게 대했던 아버지와 숙맥 같았던 이모의 만남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가 숭숭 빠진 모습으로 끌어안고 우는 모습은 백일 된 아기 같았다. 눈물의 의미를 아무도 해석하지 않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모는 아버지의 손을 맞잡았다. 모두가 손을 잡았다. 그때, 아버지가 ‘여자의 일생’ 노래를 갑자기 부르기 시작했다. 긴 세월 우리 집에서 금지 되었던 노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2024-11-24

어머니의 손. 어린 시절 엄마의 손에는 늘 상처가 있었다. 밴드도 붙이지 않은 손가락에는 곳곳이 칼에 베어 살들이 벌어져 있었다. 엄마는 피가 마르지 않은 손으로 빨래도 척척 해내고 설거지도 후다닥 해치웠다. 그 손이 아플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엄마는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인 나의 아버지가 아팠다. 어린 자녀들을 두고 아픈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엄마는 젊은 나이에 시장에서 회를 팔았다. 회를 뜨는 일은 경험이 없는 엄마에게는 생소한 일이었다. 회를 뜨는 칼에 생선살과 함께 자신의 살도 베는 일이 많았다. 그 상처는 보이지 않는 가슴의 상처와는 비할 수가 없었다. 살아 내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는 아버지도 살려냈다. 아버지는 엄마의 억척스러운 손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찾았다. 엄마 손에 가락지만 주렁주렁 달아 주겠다던 아버지의 약속은 금이 간 지 오래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다던 다짐은 온데간데없다. 엄마의 손은 눈물로 젖어 불어 있었다. 건강을 찾은 아버지는 엄마의 삶을 보상해 줄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겉돌았고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우리를 돌보지도 않았다. 일에 지친 엄마는 가끔씩 악을 썼다. 엄마는 일생을 젖은 손으로 우리를 공부시켰고 결혼도 시켰다. 일흔이 넘어서야 물에서 손을 떠나보냈다. 우리들이 엄마가 되고 나니 이따금 마음의 말을 내어 놓는다. 손 한 번 잡고 살려줘서 고맙고, 고생 시켜 미안 하다는 말 한 마디만 해 주면 고생 한 거 다 잊을 것 같다며 야속한 아버지를 탓했다. 몇일 전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침대에서 떨어져 꼼짝을 못한다며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왔다고 했다. 누워 있던 엄마의 다리는 미이라 같았다. 왼쪽 발에서부터 골반까지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엄마는 일어나 앉지도, 옆으로 돌아눕지도 못했다. 자신의 다리를 혼자서 굽히지도, 들지도, 펴지도 못했다. 수술을 할 때까지 그저 천장만 바라보며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떨어져 고관절이 산산 조각이 났다. 당장 수술을 해야 했지만 심장이 좋지 않은 엄마는 늘 아스피린을 복용했다.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누워서 죽만 받아먹고 물도 빨대에 꽂아 먹이고 양치도 누운 상태에서 했다. 소변 줄을 달고 큰 볼일도 기저귀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엄마는 볼일이 힘들어 거의 곡기를 끊었다, 김경아 작가 엄마의 손은 허물 벗은 뱀 껍질처럼 물기하나 없었다. 거죽만 남은 엄마의 손을 닦이고 로션을 발랐다. 엄마의 손은 이불에 닿을 때마다 까슬까슬 소리가 났다. 거칠었다. 가정을 위해, 어린 자식을 위해 ‘여자의 손’을 포기 하고 선택한 ‘엄마의 손’이었다. 수술 전 날 가족들이 다 모였다. 집에서 걱정만 하던 아버지도 오셨다. 청각 장애가 있는 아버지는 조용한 장소에서는 의사소통이 힘들다. 아버지는 그저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옛 세대들이 그렇듯 힘들어 하는 엄마 앞에서도 무덤덤해 보였다. 저녁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발지도만 그렸다. 겨우 일어나 나가던 아버지는 자꾸 엄마 쪽을 보았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돌아서서 성큼성큼 엄마에게로 왔다. 갑자기 이불 속에 있는 엄마 손을 꺼내더니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마이 무라. 손이 이게 뭐고. 다 말라 비틀어졌다. 마이무래이” 아버지 두 손 안에 엄마 손 하나를 감싸 잡았다. 앉아 있는 내내 하고 싶었던 마음의 말을 입으로 삼키다가 돌아서서 한 마디 하고는 다시 돌아섰다. 엄마 눈에는 왜 눈물이 고였을까. 엄마는 수술로 인해 아프고 불편한 다리를 가졌지만 평생을 삭혀둔 가슴의 상처가 치유 된 듯하다. 아버지의 말대로 엄마는 많이 드시고 손에 조금씩 살이 차올랐다. 수많은 손들이 있지만 자식을 향한 수만 가지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 있는 세상의 어머니들 손은 아름답다. 아팠던 손 안에서 상처가 꽃이 되어 삶의 꽃이 피어났다.

2024-11-10

보물찾기

엄마는 한글을 모른 채 인생의 절반을 넘겼다. 둥글둥글한 엄마의 인생 중에 한 부분이 이가 빠져 있었다. 어려운 환경으로 놓쳐버린 것, 바로 엄마의 문자인생이다. 내가 글을 배우면서 엄마의 문자인생의 빈 공간에 조금씩 땜질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완전한 동그라미를 만들지는 못해도 문자로 답답해했던 엄마를 대신해서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나는 엄마 나이 예순이 될 때까지 손발이 되어주었다. 외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외할머니는 이런 저런 삶의 시련 끝에 장사를 시작했다. 자식들 배는 굶기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모성애였다. 외할머니가 장사를 나가면 장녀였던 엄마는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이모와 외삼촌들은 고구마 줄기처럼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졌고 할머니 이상으로 엄마의 삶도 고달팠다. 그러니 학교를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고기 팔아 돈 많이 벌어 와서 학교 보내주께. 동생들 잘 보고 있거라.” 외할머니의 말이 엄마에게는 달콤한 사탕 같았다. 내일이 되어도 똑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또 다시 엄마는 할머니를 졸랐다. 늘 똑같은 물음에 똑같은 대답이 이어지면서 세월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맺힌 채로 엄마는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고 나를 낳았다. 자식에게만은 한을 물려주지 않으리라. 다짐에 또 다짐을 한 엄마는 남들보다 두 배로 열심히 살았다. 자식을 통해 간접적인 한풀이를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한풀이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10년 전 어느 날, 친정에서 일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책이 두 권 있었다. 한 권은 악보가 그려진 노래책이고 한 권은 ㄱ, ㄴ이 적혀있는 한글 기초 떼기라는 책이었다. 엄마는 지난달부터 노인학교에 한글반이 생겼다며 공부를 한다고 했다. 한글을 배워서 노래방에 가서 부르고 싶은 노래를 모두 불러볼 것이라 했다. 금방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풍선 같은 엄마의 모습에 나도 얼떨결에 기뻐해 주었다. 엄마의 각오는 대단했다. 한글은 엄마 인생의 목표였고 희망이었다. 김경아 작가 다음 해 봄, 엄마는 노인학교 한글 반에서 소풍을 간다고 했다. 백발이 무성한 할머니들이 한글공부라는 한에 동질감을 느끼며 ‘학교’라는 이름으로 처음 가는 소풍, 어쩌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풍이 될지 모른다. 엄마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신 모양이다. 내 어릴 적 소풍 때 엄마처럼 나도 엄마의 소풍을 챙겼다. 뜨거운 김이 나는 하얀 밥에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반지르한 김 위에 밥을 깔고 계란과 시금치무침, 우엉조림을 넣고 내 미안한 마음까지 돌돌 말았다. 나는 왜 엄마에게 지금까지 글 세상을 열어줄 생각을 못했을까. 엄마의 마음을 진작 읽어 드리지 못함에 자꾸 눈이 붉어졌다. 맛있는 간식을 사드시라고 용돈도 챙겨 엄마 생애 ‘첫 소풍 가방’을 챙겼다. 저녁 무렵 대문을 들어서는 엄마의 소풍 이야기는 시리즈로 이어졌다. 먼저, 노래자랑을 해서 받은 양은 냄비를 자랑했다. 그다음 보물찾기를 했는데 겨우 찾은 종이가 ‘꽝’이었는데 얼른 꽝 된 종이를 다시 숨기고 자리를 비켰단다. 다른 곳에서 엄마는 3장이나 더 찾았다. 보물찾기에서 받은 선물이라며 수세미, 비누, 치약들을 내놓았다. 엄마의 김밥이 최고 맛있었다는 다른 할머니들의 칭찬에 흡족해 하시는 엄마 모습에서 30년 전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칠순을 훌쩍 넘긴 엄마. 기나긴 인생의 여정 가운데 노래자랑 때처럼 설레는 순간도 있었겠고 처음 해 보는 보물찾기의 종이에 적힌 것처럼 `꽝’인 순간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손자의 받아쓰기를 불러 줄 수 있고, 노래방에서 글을 보고 노래도 부를 수 있을 만큼 엄마의 인생은 멋지고 아름답게 변했다. 소풍의 보물찾기에서 선물 받은 수세미나 비누, 치약이 엄마 인생의 보물찾기에서 선물 받은 한글에 감히 비길 수가 있겠는가. 엄마 인생 최고의 보물찾기는 남편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돈도 아닌 한글일지 모른다. 신문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엄마의 인생 소풍 끝나는 그날까지 더 많은 보물들을 속속 찾아내길 간절히 소망한다. 돋보기를 끼고 손자의 받아쓰기를 불러주고 있는 엄마의 목소리에 오늘따라 힘이 실린다.

2024-10-13

노잣돈, 이만 원

이렇게 쓸쓸한 장례식은 처음이다.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몸만큼이나 초라했다. 구순의 친정아버지와 고등학생 아들, 그리고 우리 부부가 그녀를 배웅했다. 나는 그녀를 학부모로 만났다. 처음 아이를 학원에 데리고 오는 날, 그녀는 자신의 가정사를 이야기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다른 여인을 품으면서 그녀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시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가난한 친정으로 들어와서 팔삭둥이로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깔깔대며 했다. 끄떡없이 잘 살 수 있다는 표현을 하는 것으로 나는 느꼈다. 한 달마다 닥쳐오는 아이의 학원비는 그녀에게 부담이었다. 그녀의 사정을 알았던 나는 반값으로 내려주었다. 그녀는 아이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나 학교 선생님들에 대한 섭섭함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땐 늘 학원으로 찾아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며 많이 들어주려고 애를 썼다. 그런 그녀가 가슴에 멍울이 잡힌다고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아이와 연로한 부모님을 걱정했다. 힘겨운 치료 과정에서도 그녀는 스스로의 삶을 늘 응원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 찾은 병원에서 그녀는 재발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뼈와 간, 폐까지 전이가 되었다고 했다. 손을 쓸 틈도 없이 그녀는 1년이라는 유효기간을 받아 들었다. 머릿속에 아는 단어가 모두 지워진 듯 아무런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암덩어리는 피할 수 없는 연기처럼 순식간에 온 몸으로 퍼져갔다. 열이 나서 춥고 균형을 잡지 못해 넘어지면서 온 몸은 멍투성이가 되어 갔다. 그 시기에 나는 자궁 수술을 받다가 의료 사고로 대학 병원에 이송되었다. 30분의 골든타임을 살려 나는 위험에서 벗어났다. 못 볼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다녀갔다. 하지만 그녀의 방문은 의외였다. 나를 보며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더 크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꽃샘추위로 바깥 날씨가 예사롭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자신의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버스로 한 시간이나 걸리는 이 곳을 찾아왔다. 살이라고는 없는 앙상한 그녀는 은사시 떨듯 하염없이 떨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온 그녀를 보고 나도 울었다. 10분 후 그녀는 일어섰다. 태워 주겠다는 남편의 제의를 마다했다. 택시라도 태워 주겠다는 말에도 화를 냈다. 혼자서 갈 수 있다며 돌아서면서 무조건 받으라며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손사래를 치는 우리에게 ‘내 마음이니 받아 주세요’ 하며 돌아섰다. 봉투를 열었다. 속에는 그녀의 지갑 속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접혀 있었던지 칼처럼 날카롭고 공기라곤 느낄 수 없이 납작하고 빳빳한 만 원짜리 두 개가 2번 접혀 있었다. 형편이 어려웠던 그녀가 아끼고 아끼며 차마 쓰지 못했던 돈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기꺼이 내어준 그녀의 마음이 뜨겁게 다가와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는 커피 두 잔으로 써 버릴 작은 금액일 수 있겠으나 그녀에게는 너무나 큰 금액이었다. 한 달 만에 나는 퇴원을 했고 조금씩 회복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다. 걱정이 되어 그녀의 현관문을 두드리려 하면 두려움이 먼저 다가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내 발걸음을 자꾸 밀어냈다. 그녀는 점점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전화가 왔다. 그녀의 아버지였다. 떨리지도 않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가뿟심더” 김경아 작가 병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빈소도 없었다. 올 사람도 없다며 할아버지는 입관 후 다음 날 바로 발인을 했다. 절차와 행정적인 부분을 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를 대신해 나는 분주했다. 입관에는 할아버지와 아들, 교회 목사님과 내가 함께 했다. 가족이라고는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깊이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마지막 길은 외로웠다. 수의를 입고 있는 그녀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말이 없던 아들은 어깨만 들썩일 뿐 제 엄마의 주검 앞에서 목 내어 울지도 못했다. 나는 그녀가 가는 길에 노잣돈으로 차마 쓸 수 없었던 이만 원을 함께 보냈다. 저 세상에서 그녀는 또 누군가에게 자신의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며 살 것이라 믿었다. 납골당에 그녀를 두고 돌아서는데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애미가 행복했다 카대요. 유일하게 인간 대접 해 준 사람이라 카면서 고맙다고 꼭 전해주라 하대요. 고맙심더” 그녀의 환한 웃음이 떠올라 자꾸만 눈이 시려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넓고 넓은 이만 원의 크기만큼 그녀의 가족들을 돌보겠노라 약속을 했다.

2024-09-29

우리 땅 독도

김경아 작가 여명이 밝아온다. 바다 밑 대장장이는 밤이 새도록 풀무질로 쇳덩이를 달군다. 때를 맞춰 화로에서 불덩이를 집게로 꺼내 수평선 위로 밀어 올린다. 이글이글 타오르며 솟아오르는 저 불덩이, 해는 내 머리 위에서 떠올라 육지로 간다. 하루를 지나는 동안 저 붉은 해는 세상에 광명을 뿌리고 서해 수평선 아래로 진다. 한 치의 어김없이 동해의 새날이 밝아온다. 바위틈 옆에서 자맥질하던 주름진 파도가 하얗게 웃고, 먼 길 가던 철새들은 인사를 건넨다. 괭이갈매기는 아리랑 춤을 추며 푸른 바다에 하루를 띄운다. 밤새 해풍에 움츠렸던 명아주, 번행초, 해국, 소리쟁이, 땅채송화, 괭이밥, 방가지똥이 생기를 되찾는다. 어둑한 천장굴에 빛이 들면 독립문 바위의 당당한 위엄과 함께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육지의 모든 산은 저마다의 키재기를 한다. 봄이면 앞을 다투어 움튼 새싹들을 키우고, 여름이면 번영하고 가을이면 오색 옷으로 갈아입고 풍요의 축제를 벌인다. 비가 오면 물을 머금었다가 젖줄도 흐르게 한다. 이 산 저 산 제 나름의 멋으로 서로 어깨를 맞대고 등을 기대고 손을 맞잡았으니, 이름하여 금수강산이다. 나는 망망대해 홀로 섰다. 사방을 돌아봐도 보이는 것은 바다뿐이다. 나는 어쩌다 절해고도로 자리를 잡았을까. 왜 홀로 차디찬 외로움을 달래야 하는 것일까. 나의 외로움을 아는 걸까. 먼 길을 떠나는 철새들이 휴게소인양 내게로 와서 쉬어간다. 빗물마저 고이지 않는 열악한 내 봉우리에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가 서식하며 가끔 육지 산 이야기도 건네준다. 전선 줄 건너 건너 유유자적 거닐며 나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고요에 졸기라도 할까 봐 상모솔새, 솔잣새, 매 솔개 무수리는 내 머리 위를 맴돌며 지친 어깨를 쓰다듬어 주기도 한다. 내 외로움의 반경은 넓다. 품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괭이갈매기는 초록의 알을 품고 이 곳에서 터를 잡는다. 흰배지빠귀, 검은 딱새, 노랑턱 멧새도 내 머리 위를 맴돌다 한 자락 노래를 뽑는다. 내 뿌리 깊은 곳에서는 돌기해삼, 개볼락, 파랑돔, 도화 새우가 머문다. 나는 동해 한 가운데 있기에 가장 작지만 가장 큰 해양영토를 지녔다. 척박한 환경에서 일궈온 바다의 수려한 경관과 땅의 가치, 육지와 동등한 주권이 미치는 공간 속에 수많은 광물과 자원이 도사리고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산봉우리는 비록 작지만 내가 품고 있는 영토의 잠재가치는 어떤 도량형으로도 가늠할 수 없다. 내 고독의 깊이도 동해만큼 깊다. 나의 가치는 무진장이다. 돈으로 환산한 가치는 계량일 뿐이다. 내가 있기에 대한민국의 해양영토가 동해로 뻗는다. 안전한 바닷길이 동북으로 열린다. 국제정세, 전략적 효용, 어느 모로 보나 내 몸값은 여느 섬과 비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높다. 그러니 탐욕의 무리가 어찌 호시탐탐 야욕을 드러내지 않겠는가. 나는 칼에 피를 묻히기를 좋아하는 야만족의 땅이 아니다. 대포를 앞세워 위협하길 좋아하는 불곰족의 땅도 아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설계하는 사람들, 일한 만큼 얻고 남으면 남과 나누는 사람들, 남이 어려우면 소매를 걷고 돕는 사람들, 그래도 여유가 생기면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 부모형제, 이웃이 서로 아끼는 사람들, 자유, 평등,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역사 앞에 정직한 민족의 땅이다. 나도 한반도와 같은 지정학적 운명을 타고났다. 한반도에 터를 잡고 영토를 지닌 이상 나의 영유권은 백의민족이다. 사람, 영토, 주권이 삼위일체가 되어 주어진 길을 가야 한다. 존재에는 운명처럼 가야하는 길이 있다. 펭귄은 혹독한 남극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뱀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바닥을 기어야 한다. 나 또한 가야할 길이 있다. 푸르른 초원도 아니고 수풀 우거진 숲도 아니다. 시련 끝에 영광이 있는 길도 아니고 고난 끝에 안식이 있는 길도 아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등에 지고 역사의 사막을 끝없이 가야 한다. 가슴 속에 묵직한 사명 하나 품고 뜨거운 모래사막을 걸어가야 한다. 어둠이 몰려와도 결코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며 앞만 보고 가야 할 나의 길이다. 사람들은 내 두 봉우리를 보고 낙타와 닮았다고 말한다. 그렇다. 나는 작은 산봉우리 둘 등에 지고 역사의 사막을 건너고 있다. 하나는 한민족이며 하나는 한반도이다. 역사의 등짐이 가볍지는 않지만, 그것은 내가 지고 가야 할 역사이다. 낙타가 사막을 건너듯, 나는 오늘도 묵묵히 고독한 길을 걷는다.

2024-09-08

엄마의 눈이 붉다. 거친 손마디가 눈두덩이를 지나갈 때마다 짧은 속눈썹이 몇 가닥씩 뭉쳐져 보인다. 엄마는 새 집에 보금자리를 틀고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엄마는 옷소매를 한참 적셨지만 그저, 노인이 겪어온 지난날의 힘든 여정을 내려놓는 것으로 여기거나 새 집을 얻은 기쁨쯤으로 생각했다. 나는 미처 구경하지 못한 집 안을 살폈다. 겨울이면 추웠던 집이 따뜻하게 변한 게 가장 좋았다. 안방을 둘러보다가 나는 이 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침대 옆에는 주인을 잃은 외로운 화분이 2개 놓여 있었다. 그 곳에는 화초 대신 자갈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 쓸모없는 것을 엄마는 왜 버리지 않고 간직 하고 있는 것일까’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엄마는 자갈의 사연을 말해 주었다. 엄마는 자갈을 버리려고도 해 보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할머니 몸을 닦아 주듯이 자갈 하나하나를 깨끗하게 씻고 닦아서 말렸다고 한다. 자갈은 외할머니가 남겨준 하나 밖에 없는 유품이라며 한 가지 부탁의 말을 덧붙였다. “나, 죽거든 저 자갈 버리지 말고 무덤 옆에 차곡차곡 둑처럼 쌓아다오.”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일찍 죽고 혼자서 생계의 짐을 메었다. 5남매를 여자 혼자서 돌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새벽 일찍 먼 길을 걸어가 생선을 떼어와 장사를 시작했다. 지치고 힘든 몸으로 다시 먼 길을 걸어 집에 오면 찬물 한 사발로 저녁을 해결했다.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입 하나라도 줄여야겠다는 마음으로 첫 딸인 나의 엄마를 시집보내는 날, 집 안 곳곳을 뒤져도 도무지 나올 것이 없었다. 장독 두 개를 사 주며 고생만 시켜 미안하다며 밤새 베겟닛을 적셨다. 할머니의 걱정과 다르게 엄마는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하늘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일까, 엄마는 감당할 수 없는 무너짐 앞에서 망연자실 했다.그 해, 큰 홍수가 나면서 둑이 무너졌다. 물은 엄마의 보금자리도 함께 쓸고 가 버렸다. 할머니가 준 장독도, 애써 이룬 가구며, 살림살이도 모두 휩쓸고 갔다. 간신히 가족만 남겨진 걸 감사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큰 집의 건넛방 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단칸방에서 갖은 서러움을 당했다. 하지만 남편과 아이들, 가족이라는 커다란 둑이 있어서 힘을 내고 견디며 살았다.엄마는 5년 만에 작은 집을 하나 장만했다. 고생만 하던 딸이 첫 집을 장만하여 이사를 하던 날, 할머니는 참 많이 우셨다. 이제 장독마저도 하나 사 줄 형편이 안 되었던 할머니는 다음 날부터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구석구석 청소를 하시더니 병든 몸으로 대야를 들고 공사판에 가서 자갈을 담아 장독대에 나르기 시작했다. 딸이 첫 장만한 집에 복을 나르는 마음으로 장독대가 넘쳐 나도록 자갈을 옮겼던 것이다. 햇빛을 받은 자갈은 엄마 삶을 축복해 주듯 반질반질 빛이 났다. 할머니는 자갈을 옮기며 아무리 거친 파도가 살과 뼈를 깎는다 해도 이 자갈처럼 둥글게 잘 이겨 내라고 했다. 많은 풍파 속에서도 자갈은 수많은 해초들을 잘 키워 내고, 인생의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잘 막아내고 헤쳐 나가라는 할머니만의 철학을 담아 옮긴 것이다. 김경아 작가 축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 해, 아버지는 의사로부터 마지막을 준비 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6개월, 아버지에게 남은 삶의 기간이었다. 가정의 큰 둑이 점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생활은 점점 힘들어졌다. 엄마는 팔뚝을 걷어 부치고 구멍 난 곳을 막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막기 시작했던 둑은 주먹으로, 팔뚝으로, 등으로. 온몸으로…. 엄마는 스스로 둑이 되어갔다. 둑이 되어버린 딸을 힘겹게 바라보시던 할머니는 그해 자갈을 밟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장독대 모퉁이 마다 남아있는 할머니의 흔적을 어루만지며 엄마는 몇 날을 통곡했다.할머니의 바람대로 정말 자갈이 복을 가져다 준 것일까. 아버지는 엄마의 간절한 기도와 보살핌으로 몇년 뒤 완치되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커다란 시련을 겪은 뒤 우리들에게 더 견고한 둑이 되어 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둑을 가지고 살아간다. 둑이 홍수를 잘 견디기 위해서는 구멍이 날 때마다 메워줄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엄마에게 할머니의 자갈이 있었듯이.

2024-08-25

철의 인문학

아들이 손을 흔들었다. 얼마 전 직장을 따라 타지역으로 나간 아들을 보며 나도 따라 손을 흔들었다. 열차가 플랫폼을 떠나 소실점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열차가 밟고 지나간 평행 레일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오늘 나는 철길 위에 이별의 시(詩) 한 소절 뿌렸다.돌아오는 길, 하늘로 솟은 건물들이 압도적이다. 건물들은 저마다 높이를 자랑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옆에는 새로운 빌딩이 철을 수직으로 세우며 높이 치솟는다. 철은 이 시간에도 강인한 힘으로 문명을 드높인다.철철철, 철이 넘칠수록 인간은 번영을 누렸다. 철을 화덕에 넣어 빨갛게 달구고 두들기고, 그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인간도 강인해졌다. 철기로 무장한 부족은 강자가 되었다. 힘이 약한 부족을 정복하면서 마을을 파괴하고 오만과 탐욕의 피를 뿌렸다. 철의 연금술이 뛰어난 집단이 곧 문명이라는 명제가 진리였다. 그렇게 인류는 철과 함께 역사를 써내려 왔다.철은 평화를 일구는 도구도 되었다. 돌을 떼고 돌을 갈아 쓰던 인간에게 철은 혁명이었다. 낫, 볏, 보습, 쇠스랑, 철로 쟁기를 만들어 논밭을 갈았다. 철의 힘이 더해지자 수확은 급속히 늘었다. 철은 주변에 흔하게 있다. 광석에 녹아 있는 철도 녹이지 않으면 그냥 돌의 부분일 뿐이다. 용광로에 녹여 하나로 뭉치고 다시 녹여 가공해야 가치가 살아난다. 망치로 얻어맞고 불에 달궈지면서 더 강하고 더욱 탄탄해진다. 철은 인고의 과정을 지나온 만큼 도도하다.철은 차갑다. 철문, 철창, 칼, 발음으로도 차가운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철은 그 누구보다 뜨겁게 태어난다. 뜨거운 화덕에 들어가 한 번 데워지면 쉬이 식지를 않는다. 철은 달구고 식히는 동안 속에는 따뜻한 품성을 지닌다. 그래서일까. 철은 도구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영역으로 뻗어나갔다. 도도해 보이는 철이 길게 누우면 길이 된다. 강물 위로 몸을 눕혀 강을 건너뛰게 하고, 늪 위로 몸을 구부려 늪을 가로지르게 한다. 산은 입을 벌려 길을 받아들이고 제 등을 내어주며 길을 낸다. 뭍과 섬을 이어 외롭지 않게 하고 도시와 촌을 이어 사람이 흐르게 한다. 나란히 누운 길은 또 다른 징검다리가 되어 부와 가난을 잇는다. 먼 소식도 철길을 타고 왔다. 돈을 벌어 돌아오겠다고 먼 객지로 떠난 아들의 ‘부모님 전상서’가 밤길을 달려왔다. 그러면 ‘객지에서 몸조심하그래이’ 답장이 달려갔다. 집을 나간 삼촌 소식도 오는 사람을 통해 풍문처럼 들려왔다. 떠남과 기다림과 만남이 있는 플랫폼에는 늘 눈물과 설렘과 기쁨이 교차했다. 간이역이라는 마디마다 사연이 깃들었다. 어머니는 객지로 떠난 아들을 기다리고, 아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이별은 눈가에 촉촉한 이슬을 남기고, 환한 미소를 남기고, 별 같은 수다를 남기고, 잊지 못할 바람을 남겼다. 아나로그 간이역 마디와 마디, 길을 오가는 정한(情恨)의 문장들이 철길 위에 뿌려졌다. 김경아 작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철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철학이 있다. 무사는 함부로 베지 않는다는 칼의 철학을, 농군은 벨 것만 벤다는 낫의 철학을, 대장장이는 만 번을 두드려 명기를 만든다는 장인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식솔의 숟가락을 쥔 아버지는 배고픈 녀석 먼저 먹인다는 배려를, 바느질하는 어머니는 해진 마음까지 깁는다는 마음을 가졌다. 마음속으로 불러들인 철의 가치는 그렇게 정신문화로 승화했다.철로 된 건물이 수직이라면 철로 된 길은 수평이다. 수직은 창문을 거는 밤 같지만 수평은 창문을 열어 펼치는 아침 같다. 절벽 같은 수직을 강물처럼 수평으로 눕혀 철길은 숱한 삶의 문장을 헹궈내고 흘려보낸다. 떠나고 돌아오는 길 위에서 인간은 기나긴 소설을 쓰고 번뜩이는 시를 쓰기도 하면서 삶을 녹였다 굳혀갔다. 아들과의 이별을 통해 나는 철길 위에 만남의 시를 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직 아들을 보내지 못한 내 마음이 작은 꽃씨가 되어 말갛게 터져 나온다. 나도 함께 철길을 달리며 써 내려간 가슴의 시는 길이 되어 독자에게 달려간다. 몇 달 후, 아들은 평행선을 타고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온다. 그러면 따뜻한 차 한 잔 나누며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눌 것이다. 새로운 문명을 체험하는 아들을 기다리며 나는 철의 인문학을 또박또박 써내려 간다.

2024-08-11

봄봄

신호를 기다리다 바삐 사이렌을 울리며 가는 구급차에 눈이 머문다. 앞차가 가는 줄도 모르고 목을 빼서 구급차의 꽁지를 바라본다. 가슴이 벌렁거린다. 2년 전 산소마스크를 쓰고 경계를 넘나들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폐달을 밟으려니 힘이 빠진다.하혈이 심해서 병원을 찾았을 때 자궁에 근종이 있으니 제거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크고 작은 수술을 많이 했던 터라 병원이라면 등부터 돌리고 싶었지만 결국은 수술 날을 잡았다. 봄이 막 문을 연 3월의 문턱에서 내 발로 걸어가 수술대 위에 누웠다.“하나, 둘 하시고 편안히 주무세요”간호사가 하는 말을 듣고 잠이 들었다. 그 뒤로는 모든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내가 의식이 돌아온 다음 남편은 그간의 모든 과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수술 시간은 3시간쯤 걸렸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나의 최고 혈압은 80이었다. 평소에 수면 내시경이든 어떤 마취를 해도 금방 깨는 나였지만 그 날은 이상하게 자꾸 어지럽고 눈을 뜨지 못했다. 남편은 담당 의사에게 왜 이렇게 마취가 깨지 않고 혈압이 낮냐고 물었더니 수술 중 출혈이 심해서 그러니 수혈을 좀 받자고 했다. 나는 수혈을 받았지만 여전히 어지러웠다. 혈압은 60으로 점점 떨어졌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지고 있었다.나는 자꾸 배가 아파왔다. 바로 누워 있으면 압이 차고 숨이 막히는 듯 아파 왔다. 어지러움보다 감당할 수 없었던 괴로움은 목마름이었다. 물이 너무 먹고 싶었다. 목 안이 타 들어 갔다.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한 조금의 물도 먹을 수가 없었다. 혈압이 낮은 상태에서 잘못 먹으면 폐혈증이 올 수 있다고 했다.남편은 내 손목에 자기의 손을 갖다 대고 맥을 체크했다. 빈맥이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나는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남편은 나를 체크하다가 새벽녘 나의 맥이 거의 뛰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혈압을 다시 체크하라고 했다. 혈압은 잡히지 않았다. 혈압기가 계속 에러가 났다. 헤모글로빈 수치는 4.7로 떨어졌다. 나는 호흡이 힘들어 산소마스크를 쓰게 되었다. 대학 병원에 도착 했을 때 나의 배는 더 이상 산소가 들어갈 수 없는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나를 소생실로 데려갔다. 말도 못하는 나에게 모든 의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혈압을 올린 후 CT를 찍었다. 배가 너무 아팠다. 내가 의식을 놓을까봐 잠들어가는 나에게 의사 한 분이 계속 말을 시켰다. 외래 보던 교수가 응급실로 뛰어 내려왔다. 보호자인 남편을 불렀다. 남편에게 온통 새까만 CT 한 장을 보여 주었다.“지금 이 환자는 피가 간까지 차있습니다. 혈복강 내출혈인데 30분 안에 수술을 못하면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곧 폐로 피가 찰 것입니다.”나는 영문도 모르고 수술실로 가고 있었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는 나를 남편은 자꾸 깨웠다. 평소에 이성적이고 냉정한 남편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김경아 작가 내 손을 잡고 ‘괜찮다. 힘내야 돼. 네 남편이라 너무 행복했다’하며 알 수 없는 말들을 했다. 나는 눈만 깜빡이다 수술실로 들어갔다. 소리가 들렸다. 턱까지 차올라 아팠던 배가 아프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얼음 같았던 내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눈을 떠보니 오른 쪽 목에 주사 바늘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온 몸의 혈액이 다 빠져 나간 상태라 빠른 시간에 공급을 위해 큰 혈관에 수혈을 했다. 얼굴은 두 배로 부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중환자실로 가지 않고 일반 병실로 오게 되어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혹독한 바람과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찾았다.내 몸은 황폐화되고 시렸지만 내 마음은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도 감사함을 배웠다. 타는 갈증을 참아내고 일주일 만에 물을 먹으며 물 한 모금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적인지를 알게 되었다. 덤으로 사는 내 인생을 예쁜 꽃으로 피워간다. 구급차에 타고 있는 그 누군가가 꼭 다시 봄을 맞이하기를 나도 함께 손을 모은다.

2024-07-28

뒷산 둘레 길을 걷는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숨이 가빠진다. 잠시 앉아 숨을 깊이 들이켜고 뱉어낸다. 숲의 날숨은 언제 마셔도 상쾌하다. 푸른 기운이 몸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낀다.집으로 오니 택배가 와 있다. 박스를 열었다. 울퉁불퉁한 돼지감자와 그 아이의 눈동자를 닮은 검은 콩이 들어 있다. 흙냄새와 쇠죽 끓이는 냄새도 함께 실려 왔다. 그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다. 편지를 열자 오래도록 봉인 되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결혼 후, 남편과 시외가에 갔다. 여느 마을과 다르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후 남편과 산책에 나섰다. 맑은 공기 푸른 하늘, 도시에서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면서 걷자니 숨이 탁 트였다. 둑을 따라 수양버드 나뭇가지가 ‘쏴 쏴’ 노래를 했다. 정미소의 발동기 소리가 시골마을의 심장 소리처럼 들렸다.정미소의 마당 옆에는 큰 웅덩이가 있었다. 참새들이 모여 입방아를 찧고 오리가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머리 하나가 쑥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사람 같기도 하고 오리 같기도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꼬마 하나가 오리 옆에서 자맥질 하고 있었다. 아이는 물놀이에 익숙해 보였다.웅덩이를 스쳐 지날 때, 자맥질을 하던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오리만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웅덩이를 계속 바라보았다. 물결이 없었다. 아이는 어디 갔을까. 머리가 쭈뼛 서면서 불길한 예감이 몸을 휘감았다. 발만 동동거리는데 웅덩이 속으로 누군가 뛰어 들었다. 남편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물속만 쳐다보았다. 물은 아무 표정이 없다. 잠잠했다. 숨이 막혔다.잠시 후, 아이를 끌고 나왔다. 남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의 눈은 잠들어 있었다. 팔은 탈수 되지 않은 옷처럼 축 쳐져 있었다. 남편이 무릎 위에 아이를 거꾸로 올렸다. 물을 빼도 아이에겐 반응이 없었다. 남편이 아이를 눕혔다. 숨을 십 여 차례 불어 넣자,“으앙”소리가 났다. 내 숨도 터졌다. 남편은 아이 옆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 누구 없어요?’ 다시 고함을 쳤다. 건너편에서 할머니 한 분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할머니의 눈은 백 리는 들어 간 듯 퀭하였다. 할머니는 손자를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편의 손을 붙들고 연신 기역자로 고개를 숙였다.“이 놈이 3대 독잔데 오늘 씨를 말릴 뻔 했네요”다음 날 할머니는 아이와 함께 우리를 찾아 왔다. 삶은 감자가 담긴 소쿠리를 거친 손등으로 건네셨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팍팍한 삶이라 손자 목숨 사례가 이것 밖에 안 된다며 미안해 하셨다. 다음 날도 할머니는 고구마와 옥수수를 한 보따리 가져 오셨다. 돌아오는 길에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도 함께 싸서 왔다. 김경아 작가 그러고는 잊고 살았다. 한 아이를 구하느라 목숨을 걸었던 남편도 응당 할 일을 했다는 듯 더는 말하지 않았다. 편지가 없었다면 아이는 우리 부부에게 잊힌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아이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시골 마을에서 친구들은 도시로 다 떠나고 혼자 남아 고향을 지킨다고 했다. 열심히 키워 낸 채소들이 자연 재해 등으로 말라 갈 때는 가슴이 찢어진다고, 채소를 쓸어버릴 때마다 어린 시절의 사건을 기억해 낸다고 했다. ‘목숨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할머니는 수년 전 돌아가셨고, 꼭 우리 부부를 찾아 감사의 마음을 전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했다.상자 속에 담긴 농산물은 이삼 만 원 정도다. 하지만 남편은 값비싼 선물을 받은 양 기뻐했다. 삭막함이 고무풍선처럼 가득 차 있던 일상에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건조한 부부 사이에 끼어든 아이의 숨소리에 오랜만에 남편과 나는 옛 이야기에 빠질 수 있었다. 아이가 보내 준 고향의 숨소리가 상자에 가득하다.

2024-07-14

완벽하지 않는 우상

김경아 작가 바위는 그냥 두면 돌덩이일 뿐이다. 네모지게 깎으면 다듬잇돌이 된다. 돌을 깎아 농사를 지으면 온 식구가 배를 불리고, 가락바퀴에 실을 꿰어 옷을 지어 입으면 매서운 겨울을 이겨낸다. 돌을 쌓아 성을 쌓으면 적군을 막아주는 요새가 되고, 쇠줄을 갈아가며 돌을 잘라 만든 편경은 국보급 악기가 되었다. 인간들은 돌에 의미를 부여했다. 고기 잡으러 나간 아버지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돌탑을 쌓아 자식의 앞날을 밀어주는 조상신으로, 아이들이 아프거나 아이를 낳고 싶을 때 두 손을 비비면 자식을 점지해주는 삼신할미로, 가족의 앞날을 맡겼다. 내일이 불투명할 때, 누군가는 바위에 부처를 새겼고 누군가는 경배를 올리며 불심으로 이겨내길 기원했다.못난이 부처 사진을 보고 고령으로 차를 몰았다. 개포리 시리골은 동네를 둘러싼 골짜기 모양이 마치 떡시루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도로에서 골짜기로 들어가면 기와를 얹은 집들이 보이고 유형문화재 표지판이 도로에 우뚝 서 있다. 석조관음 보살좌상은 배 모양의 평평한 돌에 새긴 고려시대 불상이다. 전체적인 윤곽은 돋을새김이고, 옷의 주름이나 연꽃무늬 등은 선으로 긋는 기법이다. 머리에 쓴 관은 여타 불상과 달리 丁(정)자 모양이다. 얼굴은 둥글넓적하고 좁은 코, 작은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이 풍겨졌다. 어디로 보나 대웅전에 정좌한 부처의 모습이 아니다. 금박을 입혀 고급스럽게 빛나지도 않는다. 르네상스 시대의 빼어난 조각상에 비하면 비례도 엉성하다. 양어깨에 걸친 옷의 주름은 물결선처럼 대강 처리하여 남루하고 대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조각이 간결하지 못하고 생동감도 없다. 솜씨 좋고 불심 깊은 석공의 작품이 아니라 망치와 정을 들고 오며 가며 새긴 작품 같다.뒷면에 ‘옹희(雍7155) 2년(985) 을유 6월 27일’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조각에 잔잔히 흐르는 고려인들의 삶의 자취를 반추해 보게 한다. 거란족의 거듭된 침입으로 민생은 피폐해졌다.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쳐도 빈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마음 둘 곳 없는 백성은 정치권력 이외의 의지처를 찾았다.불완전한 인간은 수많은 우상을 만들었다. 우상은 무결점이어야 했다. 아주 균형 있게, 반듯하게, 형상도 미끈하게 빚었다. 자신만의 상(像)을 만들어 떠받들고 환상의 세계를 덧입혀 정신의 언어를 쏟아내기 위해 완벽을 추구했다. 석조관음 보살좌상은 외모에서 우상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균형도, 선도 고르지 않다. 마치 우리들의 일그러진 우상처럼 어설프다. 정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불상은 범접이 어렵다. 인간 크기를 능가하는 불상은 선뜻 다가서기 꺼려진다. 하지만 석조관음 보살좌상을 마주 보면 눈높이가 같아진다. 온화한 표정과 투박한 몸짓, 헐렁하고 정감 가는 미소에 왠지 동질감이 느껴진다. 언제든 다가서면 중생의 괴로움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 줄 것만 같다.짧은 목 아래로 얕게 가슴골이 드러난다. 오른팔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형식이고, 왼손에서 뻗어 나온 연꽃 양 끝에는 각각 꽃이 피어 있다. 옷 주름은 구불구불한 몇 가닥의 선으로 간략하다. 결가부좌를 튼 하체는 상체에 비해 더욱 왜소하다. 숙련된 장인이 깎아낸 게 아니라 비포장 인생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원을 바위 위에 성스럽게 새겨 놓은 듯하다. 허술한 모습에 나도 더 가까이 다가선다. 말라버린 들꽃이 시간을 머금고 있듯 불상 앞에 서니 남편의 건강과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손을 모았던 엄마들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 차마 목 놓아 부르짖지 못하고 조용히 머리만 조아렸을 중생들의 향기를 찾는다. 허술한 옷을 입고도 미소를 잃지 않는 불상의 모습이 친근하다.인간들은 정말 완벽한 우상을 원했을까. 인간들이 구하는 것은 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십자가의 형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상의 형상이 부처의 자비를, 디오니소스의 형상이 다산과 풍요의 대체품이 될 수는 없다.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함에 대한 결핍을 자신이 좋아하는 형상으로 채우고 싶었을 것이다.삼촌 같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나와 괴리가 없는 친근한 우상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마음에 큰 물결이 일면 찾아가 독백의 언어를 뱉을 수 있는 인상 좋은 우상이 필요했다. 우상 앞에 선 사람들의 해진 마음을 다독여주는 듯하다.부처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고 내려오는 길, 완벽하지 않은 우상을 바라본다. 이웃집 삼촌이 편안한 옷을 입고 손짓하는 것 같다. 편안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으면 다시 오라고.

2024-06-16

나란히 집으로 가는 길

아버지는 6·25참전 용사다. 아버지 집 대문을 지키는 ‘6·25참전 용사의 집’ 이라는 문구를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지금의 내 아들보다 더 어린 나이에 아버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젊음과 목숨을 바쳐 싸웠다. 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겼고 많은 것을 잃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끝내 지키고 싶었던 여동생은 지키지 못했기에 늘 가슴 한 조각이 분단된 조국처럼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70년을 넘게 통일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사신 아버지는 아직도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동생의 얼굴은 아버지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하다고 했다. 함께 별을 보며 냇가에서 멱을 감던 기억이나 빨래줄에 빨래를 널던 수많은 기억들이 남아 있었다. 전쟁 중 아버지는 목에 파편을 맞아 상처가 깊이 박혔지만 그 상처보다 더 깊은 것은 여동생에 대한 기억이었다.몇 해 전 아버지를 모시고 ‘고성 통일 전망대’에 다녀왔다. 조국분단의 현실을 볼 수 있는 통일전망대로 가는 내내 아버지의 얼굴은 어두웠다. 민통선 지역으로 향하며 출입국 신고서를 작성했다. 안보교육 영상도 보았다. 같은 나라 안이지만 민통선으로 가면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들이 많았다. 왠지 삼엄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통일전망대 관광’이라는 출입증을 국군들에게 받아 2차선 도로를 달렸다.“이대로 금강산까지 가면 얼마나 좋을꼬”아버지는 어서 이 길이 뚫려야 한다며 도로 옆 바다해변으로 고개를 돌렸다.통일전망대 앞에 오니 계단이 있었다. 통일로 가는 계단이기를 바라며 아버지는 희망의 계단을 올랐다. 지척에 북한 땅이 보인다. 뛰어 가도 얼마 걸리지 않을 땅을 우리는 망원경을 통해 보았다. 어렴풋이 철조망도 보였다. 북한의 해금강, 낙타봉, 송도해변도 눈에 담았다. 남북을 자유로이 오가는 뻐꾸기에게 아버지는 통일의 염원을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뻐꾸기가 그 임무를 잘 완수해 줄 것이라 믿는다.아버지의 여동생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생사를 알 수 없다. 아버지는 동생이 살아 있다고 믿었고 북쪽 땅 어딘가에 있기 때문에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지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분단은 우리 민족의 의사와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암울한 역사를 극복하고 정상적인 역사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많은 대화로 풀어 나가야 한다. 통일은 헤어진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실제 탈북자가 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통일을 ‘엄마’라고 정의했다. 통일이 되면 엄마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들의 그리움과 고통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늘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도 통일은 늘 마음의 소원이었고 동생이라 정의하는 단어였다.아버지의 슬픈 안색이 기쁜 안색으로 바뀌는 날이 와야 할 텐데 생각하니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많은 이산가족들이 살아계시는 동안 가족을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구순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의 기억은 아직도 그림을 그리듯 술술 풀어낸다. 여동생을 만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와 쌓아야할 추억거리가 쌓여 있는데 꿈에서조차 한 번을 만날 수 없는 시간을 한스러워했다. 김경아 작가 분단의 슬픈 현실을 자손들에게 더 이상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다시 못 올 것만 같은 북한 땅을 원 없이 바라보시다가 ‘덕순아, 덕순아 살아 있거래이’하시더니 발길을 돌렸다. 목숨 걸고 탈출한 새터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나 뿐인 목숨을 걸지 않고도 여행 가듯 남북을 오갈 수 있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정치 이념 이런 것 다 내려놓고 그저 우리 민족이고 우리말을 쓰는 형제고 우리랑 같은 뿌리니까 쉽게 오고갈 수 있는 길이 열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통일이 되면 아버지 집 대문 앞에 ‘피양 랭면 배달’ 스티커도 함께 붙어 있겠지. 백두산 여행을 마치고 아버지와 고모가 나란히 함께 집으로 들어와 식초와 겨자를 곁들인 시원한 피양 랭면을 드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리운 금강산’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마음먹으면 등산복 차림으로 다녀올 수 있는 그 곳이기를 바라본다. 아버지의 간절한 기다림에도 세월은 오늘도 기다려주지 않고 구름처럼 흐르고 있다.

2024-06-02

롤러코스터

롤러코스터. 척, 척, 척경사진 레일 위를 천천히 올라간다. 50m 이상의 중턱을 헉헉거리지도 않고 하늘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 올라간다. 잠시 정차. 하늘을 유유히 돌다가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아찔한 속도로 땅을 향해 내리꽂는다. 양팔을 벌리고 환호하는 사람, 연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고 차마 세상을 눈 뜨고 볼 수 없는 사람, 혹이나 떨어질까 땀을 쥐고 난간을 꽉 잡은 사람, 다리가 새처럼 덜덜 떨리는 사람, 허벅지가 말 장딴지처럼 잔뜩 긴장해 있는 사람, 공포에 질리면서도 저마다 짜릿한 스릴을 즐긴다. 내 일상은 늘 롤러코스터 위에 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 모든 것이 흔들린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은 나를 빙글빙글 돌려댄다. 진단을 받으니 이석증이란다. 귓속 깊은 곳의 반고리관 안에 이석이라는 물질이 흘러 다녀서 발생한다고 한다. 어떤 이유든 이석이 원래 위치에서 떨어져 나와 반고리관 내부의 액체 속에서 흘러 다니거나 붙어 있게 되면 주위가 돌아가는 듯 어지럼증이 생긴단다.병원을 다녀온 후, 빙빙 도는 현기증은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빙 돌고 머리가 조여 오는 두통에 시달렸다. 점점 과로나 스트레스와 상관없이 말도 안 되고, 이해할 수도 없는 까닭으로 나를 흔들어댔다. 외출과 과로를 피하고 힘들면 쉬거나 낮잠을 잤다. 하지만 두 달 뒤 친구들과 수다 떠는 중에 갑자기 어지럼증이 왔다. 어떤 자세도 편하지가 않았다. 병원에서 또 이석이 빠졌음을 진단받았다. 이석이 제자리로 돌아가도 증상은 남아 있어 일상생활이 쉽지 않았다. 이렇게 빙빙 도는데 나는 세상을 바로 보고 살 수 있을까. 때때로 귀에서 폭우가 내리는 것 같았다. 맑은 날은 잠시, 비바람이 몰아쳤다가 우박이 내렸다가 가끔 천둥도 치고, 예측할 수 없는 일상을 견뎌내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회의가 귀를 틀어막고 있는 것 같았다.어두운 밤 나 홀로 무중력 공간을 떠돈다. 땅을 향해 발을 뻗어 보지만 지구는 저 멀리서 빙빙 돌아간다. 내가 도는 것인지 지구가 도는 것인지 헷갈린다. 그러다가 지구의 중력을 이탈해 칠흑 같은 우주공간으로 빨려가는 꿈을 꾼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면 남편의 얼굴이 빙빙 돈다. 나의 이석은 왜 이탈하여 온 우주를 돌려대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 세상이다. 먼 나라에서는 전쟁으로, 가까운 곳에서는 내 잘났느니 네 잘났느니, 눈을 뜨면 먹어야 하는 약은 한 움큼이나 되고 나의 몸과 생각은 시간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니 어지러울 수 밖에. 때로는 어질머리 나는 세상을 잊고 싶기도 하다.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갈수록 자연에서 배운 성숙과 풍요를 누리며 살고 싶었다. 중후한 노년은커녕 골방에 갇혀 어지러움과 싸우고 있으니, 세상은 직선으로 가고 있는데 난 마치 게임을 하듯 꽈배기를 틀고 있으니. 환각이라면 차라리 깨어날 희망이라도 있을텐데. 일상이 따분하면 사람들은 번지점프를 하거나 놀이기구를 탄다. 현실이 주지 못하는 공포와 쾌감을 느끼려 롤러코스터를 탄다. 느닷없이 치솟고 사정없이 돌려대는 스릴을 즐긴다. 그리고 흔들리는 몸으로 착지한다. 온몸으로 느끼는 안정감도 공포 이후의 카타르시스이다. 여행과 모험의 목적이 가벼운 마음으로 일상으로의 복귀이듯. 김경아 작가 살다보면 높은 곳에 오를 때가 많다. 대박을 꿈꾸며 주식에 올라타지만 주가곡선은 너울거리다가 결국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허방이다. 열매가 탐나서 나무를 기어오르다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다. 꿈을 따러 허공을 서성이며 수없이 허방을 디디는 우리는 착지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래야 다치지 않고 바닥에서 바로 일어날 수 있는데, 그렇게 탄력성을 익혔다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양이의 가뿐한 착지는 묘기에 가깝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 살기 위한 본능적 몸짓이라고 한다. 나 또한 살기 위한 착지를 꿈꾸지만 고양이 같은 몸짓은 없다.약으로 감각을 마비시키는 처방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래서인지 롤러코스터 위에서 비명을 지르는 저들의 몸짓이 부럽다. 가뿐한 착지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롤러코스터에서 내린다. 잠깐 어지러운 몸을 추스르자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개운하고 시원한 얼굴이다. 흔들리지 않는 저들의 걸음이 가볍고 경쾌하다. 나는 다시 어지러운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2024-05-19

기막힌, 암호

“딩동”휴대폰 벨이 울리자 아흔의 아버지 얼굴이 환해진다. 돋보기를 끼고 휴대폰 문자를 읽더니 고개를 들어 거실 벽을 쳐다본다. 아버지는 웃음을 띤 얼굴로 휴대폰 자판을 누른다. 더듬더듬 글자를 찍어 넣는 아버지 손이 분주하다. 도대체 누구에게서 온 문자이기에 아버지 낯빛이 저토록 밝아진단 말인가?“나도 1번이다”아버지에게 나는 늘 1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또 다른 1번이 생겼단 말인가. 아버지는 문자를 발송하고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잠시 후, ‘딩동’하고 벨이 또 울렸다. 이번엔 ‘2번이에요’라고 들어온 문자에 찍힌 이름을 보고, 나는 눈물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결혼 후에도 음악학원을 하면서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냈다. 몸과 마음이 피로에 지쳐있을 즈음, 아이까지 생겼다. 아이가 태어나면 동화책도 읽어주고 함께 놀아주리라 다짐했던 각오는 먼 이야기가 되었다. 아이가 20개월 쯤 되었을 때 어린이집에 보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어머니, 아이가 너무 울어요. 오늘은 그냥 데리고 가셔야겠어요.”아침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아이를 억지로 떼어내서 어린이집에 보냈다. 아이는 조금도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날마다 내 마음을 찢어 놓았다. 그날 나는 아버지께 부탁을 했다. 아이를 보고만 온다던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왔다. 놀고 있는 많은 원아들 가운데 아무리 찾아도 우리 아이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깜짝 놀란 아버지는 구석구석 다니며 찾아보니 혼자서 벽만 쳐다보고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내 이제부터 경로당에 안 가고, 니 새끼 봐 줄 테니 걱정 말고 일해라.”아버지는 그날부터 아이를 돌보았다. 장기도 가르치고, 화투도 가르치고, 자전거도 가르쳤다. 함께 고구마를 심었고 구워 먹기도 했다. 강나루에 업고 가서 돌 던지기도 하고, 기차도 타러 가고, 함께 버스를 타고, 동물 시장에 가서 토끼도 사 왔다. 뻥튀기를 사서 들고 공원으로 가서 비둘기에게 던져주는 것도 가르쳤다. 아이와 할아버지, 둘 사이에는 놀이가 하나씩 둘씩 늘어갔다. 놀이에 번호를 매기기 시작했다.“오늘은 1번 하고 놀까?” “아니 3번”1번은 자전거 타기고, 3번은 비둘기를 보러 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삶의 무료함을 아이를 통해 달랬고 아이는 아버지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 나갔다.그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들은 한 달에 한, 두 번 집에 온다. 그런데 아흔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하더니 청각 장애 판정을 받았다. 아이가 아무리 많은 말을 큰 소리로 해도 다 못 알아들으신다. 할아버지와 소통하고 싶었던 아이는 칠판을 하나 사들고 와서 무언가 적어두었다. 김경아 작가 1. 사랑해요. 2. 보고 싶어요. 3. 진지 맛있게 드세요. 4. 자전거 타실 때 차 조심 하세요. 5. 이번 주 토요일에 갈게요.아이는 어릴 때, 놀았던 기억을 더듬어 할아버지와 소통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연구했던 것이다.“딩동” “할아버지, 2번이에요.”아이가 아버지께 보낸 문자를 보고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손자와 할아버지의 기막힌 소통, 그것은 숫자를 이용한 문자 메시지였다. 1번부터 5번까지 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문자가 올 때마다 칠판을 확인했다. 아버지는 더듬거리며 ‘나도 2번이다’라고 찍어 넣고 있는 중이다.노인 냄새난다고 아이들은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들려오는 요즘이다. 예사로 보았던 칠판의 숫자들, 아버지에게 휴대폰 문자는 손자를 곁에 두고 어루만지는 것만큼 기쁜 일이 되어 있다. 그새 또 문자가 울린다. 5번이란다.

2024-04-21

평행선

가을 공원길, 나란히 산책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눈부시다. 두 분은 오늘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을 맞춰 왔을 것이다. 자신의 속도를 고집하지 않고 손을 꼭 쥔 채 걸어가는 등 뒤로 석양이 비춘다. 남편과 나는 보폭이 맞지 않았다. 함께 길을 걸을 때 저만치 앞서간 남편은 뒤를 돌아보며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시간의 굴레를 풀어놓은 산길에서는 쉬엄쉬엄 걷고 물 맑은 여울에서는 발이라도 담그고 싶었다. 느릿하고 맛갈지게 걷고 싶은데, 남편의 성화에 이끌렸다.남편은 매사에 반듯했다. 책이든 가구든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상자 안에 정리하고 차곡차곡 줄을 맞추는 것을 좋아했다. 남편이 지나 간 자리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잘 못 건들면 흐트러질까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때로는 그런 모습이 숨 막혀 일부러 흩트리기도 했다. 내가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어수선했다. 대충 개놓은 옷가지와 선반에 질서 없이 올려놓은 그릇 그리고 어른 아이 구분 없이 뒤섞인 신발들, 충동구매를 한 옷가지가 나뒹구는 옷장, 남편은 볼 때마다 속 시끄럽다며 잔소리를 해댔다. 그러면 나는 적당히 흐트러진 것이 인간답다고 볼멘소리를 했다.살아 온 환경이 달랐던 우리는 씀씀이에서도 부딪혔다. 남편은 알뜰하고 나는 헤픈 편이었다. 때로는 계획 없는 지출이 스트레스 해소라는 소득이 되기도 하는데 남편에게는 통하지 않는 계산서였다. 결혼 초 남편과 어느 장터에 기차 여행을 갔다. 장터로 안내하던 철길은 추억으로 이끄는 길이 되었다. 도시에서 들을 수 없었던 엿장수 가위 소리에 귀가 열렸다. 백화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흥정하는 모습, 골목을 돌면 나는 ‘뻥’소리, 먹어 보라고 과일을 건네는 농부의 손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시간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공간을 만나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들었던 풍경을 만났다.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를 만나고 애니메이션에서 본 그림과 마주쳤다. 우리는 계속 흘러가는데 이 곳은 어느 순간 멈춰 버린 듯 낡아 있었다. 이 공간을 담고 싶었다. 간이역에 잠시 정차한 기차처럼 멈추고 싶었지만 남편은 충동구매는 안 된다며 모든 공간을 뒤로 물리며 갈 길을 향했다. 나는 여행지보다 가는 길을 더 좋아했다. 가까운 곳보다 지루할 정도로 먼 목적지가 좋았다. 느리게 걸으며 목적지까지 걸어가길 원했다. 들꽃을 보며 웃기도 하고, 비가 오면 처마 밑에 잠시 쉬어 가고도 싶었다. 감당 할 수 없는 속도에 조금씩 지쳐 갔다. 크기가 다른 기차 바퀴처럼 어느 하나가 밀려날 것 만 같았다.남편을 따라 계획을 세워 보았다.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계획표대로 책을 읽으려 하면 열어 놓은 창가에서 신문지 팔랑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어느 세월에 이 책을 다 읽나 싶어 괜스레 뒷장을 뒤적였다. 계획을 세우기만 하면 뭐하나, 노안은 오고 시력은 점점 나빠지고 몰입 할 수 없는 핑계만 가득했다. 우리는 다투었다. 감정으로, 언어로 밀어냈다. 인도와 차도처럼 늘 경계선이 있었다. 남편의 속도에 맞춰 보려고 애를 썼다. 나의 속도로 살아도 손해 본 적이 없는데 자꾸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평행선은 나란히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김경아 작가 도돌이표 같은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내가 흘려 놓은 것을 줍기 시작했다. 내가 빼 놓은 것을 챙겼다. 내가 벌여 놓은 틈을 메웠다. 내가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걷도록 내버려 두었다. 굽이진 길을 돌아 나올 때는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주었다. 내게 맞는 보폭이 나를 당당하게 걷게 했다. 서로의 걸음을 인정하고 나니 똑같은 속도가 아니라도 마음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쉼 없이 전진하는 게 헛걸음이 될 때도 있었다. 같은 속도로 꼭 성공해야 한다는 법칙도 없다. 사람마다 오르려고 하는 봉우리가 다르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다. 함께 돌아보며 늦춰 주고 당겨 주면서 생각의 보폭을 맞추어 가는 것이 부부였다.남편과 함께 걸어온 시간을 돌아본다.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어느새 보폭이 비슷해졌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평행선은 이탈 없이 내일로 갈 것이다. 나란히 손을 잡고 인생의 소실점으로 가는 노부부처럼.

2024-01-28

명당

양쪽으로 소나무가 도열한 돌계단을 오른다. 하나하나 밟을수록 맑은 기운이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알처럼 둥근 봉우리 위에 오르니 돌로 만든 항아리들이 봉긋봉긋 솟아있다. 세종대왕 왕자들의 탯줄을 담은 열아홉 개의 항아리다. 자손 탄생의 기운과 왕조를 이어가려는 기원이 서려있는 태실이다.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여겨 소중하게 여겼다. 자른 탯줄도 생명의 일부라 생각하고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특히나 왕족의 태는 국가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 전국의 명당에 안치했다. 천지인이 모인 곳에 태를 봉안해 하늘과 땅의 기운의 영향을 받기를 바랐다. 모난 기단석은 땅을, 연꽃을 새긴 둥근 뚜껑 모양의 돌은 하늘을, 그 사이에 있는 중동석은 인간을 상징한다.이곳 세종대왕자태실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이다. 태실을 한 바퀴 돌며 주변의 산수(山水)를 살펴본다. 선석산이 병풍처럼 뒤를 둘러싸면서 산줄기가 좌우로 뻗어 알처럼 생긴 태봉을 보호하고 있다. 어미새가 온몸으로 알을 품는 지형이며 사람으로 보면 여자의 자궁과 생김새가 닮았다.“들어냅시다.” 의사는 기어이 없애자고 했다. 한 번의 유산 후 좋지 않았던 자궁은 하혈을 끝도 없이 했다. 찾아간 병원에서 자궁 속에 커다란 혹이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살기 위해 자식을 품었던 곳을 내어 놓기로 했다. 수술대 위에 올랐다. 3시간이 지나 수술실에서 나온 나는 사막에 버려진 꽃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뱃속에 가득 고인 나의 혈액은 심장 박동을 올렸고 혈압을 내렸다. 기어이 혈압이 잡히지 않았고 큰 병원으로 이송되어 소생실로, 또다시 수술실로 옮겨졌다.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다던 의사의 예고에 멀리 있던 가족이 모였다. 생명이 꺼질 뻔했던 나는 타인의 피를 받고서야 깨어났다.여자의 몸은 생명의 시작이다. 아이들의 출발점이었던 우주가 나에게서 빠져 나갔다. 휑한 빈자리만큼 내 마음에도 구멍이 났다.더는 생명을 품을 수 없다는 상실감은 정체성까지 뒤흔들었다. 태초에 엄마의 자궁 속에서 이미 여자임을 품고 나왔지만 더 이상 알을 품을 수 없다는 처지에 이르자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생명은 신비하다. 다른 태를 걸고 나온 두 개의 생명체가 몇 겁의 인연으로 만난다. 둘은 하나가 된다. 하나의 생명이 태를 안고 또 다른 세상을 영접한다. 생명은 알과 태와 알을 통하여 순환하며 대를 이어간다. 포유류에게 탯줄은 생명과 생명을 잇는 끈이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탯줄과 탯줄로 이어지고 현재에서 멸종까지 암컷의 몸을 통하여 생명이 이어진다. 탯줄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건널 수 없는 단절된 거리를 이어준다. 알 속의 생명은 어미의 탯줄을 통해 모든 것을 공급받고 완전체가 되어 알을 깨고 나온다.생명은 세상을 활기차게 한다. 바삐 움직여 꿀을 만든 벌 덕분에 꽃은 씨와 열매를 잘 맺는다. 민들레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 뽐내도록 봄이 바삐 온다. 잘 품은 알이 세상에 잘 깨고 나오도록 여인의 몸은 태를 통해 알을 품는다. 모든 씨앗이 알의 형상으로 묻히고 해가 바뀌면 땅은 알을 품어 새로운 생명으로 움트게 한다. 김경아 작가 알은 생명과 생명을 잇는 연속성의 집합체다. 그 연결고리가 되는 탯줄을 알처럼 생긴 봉우리에 보관한 것 또한 영속성을 바라는 마음에 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도 이러한 연결의 연장선에 있다. 나는 여자로서 생명의 지속에 공헌했고 그 연속성 가운데 오늘의 내가 있다.씨앗을 받아 생명을 잉태해 열 달을 품었다. 아이를 낳고 마음으로 품고 길러 더 넒은 세상으로 내보냈다. 나간 자식은 가끔 돌아와 편안하게 쉬었다 간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다 명당에서 태어나고 내 몸은 명당의 역할을 한 셈이다.자궁이 빠져 나간 자리에 이제는 무엇을 품을까. 모성을 되살려 이제는 사람을 마음으로 품기로 한다. 거대한 우주의 모체는 여자이며 여자가 알을 품는 곳은 모두 명당이 아닌가. 돌아오는 길, 생명 탄생의 원리가 숨어있는 봉우리를 한 번 더 바라본다.

2024-01-14

망개떡

전화기 벨이 울렸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 받기로 하고 전화기를 가방 속으로 넣었다. 조용한 카페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칠 수 없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아버지는 나이가 드시면서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청각 장애 판정을 받으셨다. 어지간히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통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잠시 아버지와의 통화를 미뤘다.나는 막내딸이다. 아버지 나이 사십에 얻은 막내딸이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죽음을 선고 받았다. 지금까지 살아 계신 이유는 내가 아버지의 살아야 할 이유였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그런 절박한 사랑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많은 아버지가 그렇듯 표현이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내 옆엔 항상 무서움과 외로움이 나란히 했다.대학교 2학년 때다. 음악 연주회로 외국을 나갔다 며칠 만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지친 몸을 끌고 어두운 길을 터벅터벅 걸어 왔다. 우리 집으로 가려면 긴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 다리는 내게 외로움의 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다리 위 가로등 밑에 너무나 익숙한 걸음걸이가 보였다. 내 쪽으로 뚫어져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학교 앞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는 부모님들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스스로 낮아지고 작아진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를 기다려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런 이유였는지 나를 기다려준 아버지가 기쁘기보다 오히려 어색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옆에서 같이 걸어 주니 내가 높아지고 커진 것 같아 무섭지도 않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었다.아버지와 나는 참 어색했다.그저 집으로 가는 것이 목표인 양 열심히 걸었다. 외국인과 걷는다 한들 이렇게 부자연스러울까.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목에서 아버지와 나는 말없이 망개떡 한 개씩을 먹으며 나란히 걸었다. 집에 도착 할 즈음 아버지는 겨우 한 마디 하셨다. ‘차 조심 하고 다녀’ 라고. 어디선가 아카시아 향이 망개떡 냄새와 함께 코를 스쳐갔다.3년 전의 일이다. 학부모가 학원을 하는 내게 망개떡을 가져 왔다. 나뭇잎에 새 색시처럼 하얀 살을 감추고 있는 망개떡이었다. 처음 보는 그 떡이 예쁘기도 했지만 맛이 좋아 아버지께 갖다드렸다. 아버지는 떡을 드시면서 옛일을 떠올리셨다. 전시에는 항상 군인들의 식량이 문제인데 상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라고 했다. 망개이파리는 부패를 방지하는 성분이 있다고 했다. 일본에도 비슷한 떡이 있지만 우리나라 망개떡과는 의미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며 추억에 젖어 행복하게 드셨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전화를 하신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길고 여운이 있다.“갱…. 아….”“망개뗙 먹고 싶다” 김경아 작가 항상 맨 뒤의 단어가 길다. 할 말만 하시곤 내 대답은 상관없이 전화를 뚝 끊으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식이 나 혼잔가 하며 투덜대지만 외면할 수 없다. 망개떡을 샀다. 친정으로 향했다. 저 멀리 아버지의 자전거가 보인다. 자전거 뒷좌석에는 직접 키운 상추랑 고추랑 파가 가득 실려 있다. 열심히 페달을 밟으신다. 순간, 이전에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처진 어깨와 페달을 밟는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나를 발견하고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셨다. 귀가 잘 안 들려 엄마랑 소통이 잘 안 된다. 늘상 소리 지르는 엄마에게 섭섭한지 그때부터 아버지는 무표정으로 살았다. 그러나 나를 보면 말 대신 활짝 웃으신다.그것은 또 다른 언어였다. 20년 전, 다리 위에서 평생에 한 번 나를 기다리셨던 아버지. 망개떡을 함께 먹으며 차 조심 하라고 하신 아버지. 그 한 마디는 딸에 대한 아버지만의 사랑이었다. 또, 망개떡이 먹고 싶다는 말은 딸이 보고 싶다는 아버지의 또 다른 언어였다. 망개떡은 아버지와 나만의 소통이었고 사랑이었다. 나뭇잎에 싸여 있을 땐 망개떡의 맛도 모습도 알 수 없다. 아버지의 겉모습은 망개 이파리처럼 뻣뻣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망개떡처럼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했다.

2023-12-17

옥상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사방이 꽉 막힌 방보다 탁 트인 곳이면 더 좋다. 누군가의 간섭도, 관심도 없이 나만이 머무는 곳, 기왕이면 내가 사는 세상을 가만히 내려다 볼 수 있으면 제격이다.사춘기 시절, 빈 집 옥상에 올라가 소설을 썼다. 소설 속 소녀는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을 좋아했다. 낮이면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았고 밤이면 달빛을 따라 밤하늘을 유영했다. 상상의 날개를 파닥이며 쓰고 또 쓰고, 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맑은 내일과 파란 자유를 동경했다. 해거름이 넘도록 옥상에서 기다리는 날이 많았다. 일하러 간 부모님은 늦게 왔고 언니는 자율학습 하느라 밤이 이슥해서야 집에 들어왔다. 혼자서 다섯 알 공기를 가지고 놀다가 멀리서 누군가 오는 소리가 나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공기놀이가 싫증이 나면 상추 사이에 붙어 있는 달팽이들과 소꿉놀이를 하였다. 바람이 불면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춤을 추었다. 거꾸로 매달려 춤을 추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옷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면 허수아비 춤 같기도 해서 나도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았다. 그러면 바람은 내 치맛자락을 들춰보고 저만치 달아났다.엄마는 내가 집 안에서만 있기를 원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바깥으로 너무 돌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어둡고 막힌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들꽃처럼 바깥 공기를 마시며 비도 맞고 바람도 맞으며 자라고 싶었다. 단지 내가 마음껏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옥상은 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다가 들켜 버린 날, 시험을 망쳐 버린 날, 나는 옥상에 올랐다. 아버지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청소해라 공부해라’하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었다. 노란 물탱크 옆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쿵쿵 발을 구르면 아래에 있는 엄마 아빠에게 화풀이라도 한 듯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옥상은 어린 내 생각이 크는 공간이었다. 장독대에 기대어 빈 하늘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공부는 왜 해야 할까, 나 혼자 살 수 없을까, 내가 행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인생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가 삶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음속으로 가출해 여기저기 떠돌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 날, 옥상은 꿈의 공간이었다. 엄마와 돗자리를 깔고 누우면 더위가 가셨다. 하늘의 모든 별이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는 것 같았다. 그 시간만큼은 외롭지 않았고 마음은 별처럼 반짝거렸다. 텃밭의 주인공보다 훌쩍 자란 잡초처럼 꿈속에서 나는 마음껏 자라나고 있었다.옥상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것이 작아 보였다. 동네에서 제일 큰 어른도 꼬맹이 인형처럼 작아 보였다. 마치 내가 거인이 된 것처럼 앞 집 슈퍼도 작게 보였다. 모두가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같았다. 옥상에 서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크고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같았다. 옥상에 서면 혼자서는 갈 수 없는 먼 곳을 볼 수 있었다. 창문으로는 볼 수 없었던 푸른 하늘과 강둑으로 넘어가는 해도 가까이 보였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 내가 바라는 세상이 펼쳐질 것 같았다. 김경아 작가 옥상에서 나만의 비밀을 간직했다. 화분 밑에 숨겨 둔 비밀 노트엔 부모님에 대한 섭섭함과 나의 연애사 등 모든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숨어 있는 비밀도 발견했다. 아무도 안 보는 줄 알고 했던 사람들의 무심한 행동들을 나는 옥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의 분홍 구두를 신고 낡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나는 훨씬 더 많은 비밀을 간직한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옥상은 어린 날의 마음이 머물던 공간으로 남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되어 정신없이 사는 동안 옥상도 잊었다. 그러나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만의 이야기는 옥상에 많았다. 가끔 혼자이고 싶을 때 옥상이 떠오른다. 계단 사이사이 자라는 이름 모를 풀들과 하늘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이 정겨웠던 그 곳, 옹기종기 모인 항아리는 작아 보일 것이고 빨랫줄을 높이 올리던 바지랑대도 낮아 보일 것이다. 혼자 가만히 앉아 공깃돌을 받아보고 싶다.베란다에서 멀리 바라본다. 매지구름 몇 조각이 수평선 너머로 떠간다. 어린 날의 마음인 듯 구름을 따라가고 싶다.

2023-12-03

누룽지

며칠 전 친정 엄마가 누룽지를 보내왔다. 일찍 출근하는 남편이 입맛이 없다기에 끓여 주었더니 고소하다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좀 더 구하고 싶어 전화를 했더니 집에서 손수 만든 것이라며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냉동실에 오랫동안 두었던 찬밥 덩어리를 꺼냈다. 알알이 흩어져 먹을 수 없는 식은 밥을 프라이팬에 올렸다. 중간 불에서 밥을 주걱으로 꾹꾹 눌렀다. 어느 정도 눌으면 약한 불에서 은근히 굳히면 된다. 노르스름하게 누룽지가 만들어지는 재미에 식은 밥을 자꾸 올렸다. 외출 준비를 하면서 나갈 때 ‘가스 불을 끄고 가야지’ 해놓고 백지 상태로 그냥 나가 버렸다.까마득히 잊은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백화점에서 즐거운 시간에 빠졌다. 아이들 옷도 사고 우리 옷도 사고 화장품도 구경했다. 쇼핑을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까페에서 커피도 한잔 하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나지 않는 수다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배에서 어김없이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백화점 식당가로 갔다. 친구와 나는 알밥을 시켰다. 진동 벨을 받아들고 우리 번호가 뜨길 기다렸다. 잠시 후 식사가 나왔다. 알밥을 받아들고 지글지글거리는 눌은밥을 비비는 순간 집에 켜 두고 온 가스 불이 생각났다. 머리가 하얘졌다. 아무리 필름을 되돌려 보아도 불을 끄고 온 기억이 없다.쇼핑한 모든 것을 친구에게 집어 던져두고 비비다 만 알밥도 팽개치고 주차장까지 마냥 달렸다. 차에 비상등을 켰다. 빨간 신호등을 마구마구 지나쳤다. 좌회전을 해야 하는 차선에서 직진 차량에 막혀 갈 수가 없었다.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나에게 이전부터 따라 왔던지 경찰차가 막아섰다. 경찰 한 분이 다가와 내 차의 창문을 내리라는 손짓을 보냈다.“무슨 일이십니까?”잔뜩 긴장했던 나는 경찰을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뭔가 해결을 해 줄 것 같았다.“아저씨…. 우리 집에 불났어요”집이 어디냐고 묻고는 경찰차를 따라 오라고 했다. 호루라기를 꺼내 사거리 중간에 서서 모든 차를 다 막아 세웠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다른 경찰 한 분이 차량 지붕에 빨간 등을 꽂더니 갑자기 사이렌 소리를 내며 창문으로 손을 꺼내어 뒤로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경찰차가 막힌 길을 뚫어주었다. 나는 경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집까지 왔다. 가는 동안 조금씩 정신이 들면서 문뜩 ‘혹시 내가 가스 불을 끄고 왔으면 어쩌지’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온 아파트가 불길에 휩싸여 소방차가 와 있으면 어떡하나 했던 염려는 잠시 뒤로 미뤘다. 생각보다 평온한 공기에 안심하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주방 바닥이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몇 번의 경보음이 났겠지만 아무도 들여다 봐 주지 않았으니 주방 스프링클러가 작동해 불을 진정시켜 놓았다.대학을 졸업한 후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었다. 바쁘게 돌진하며 살더보니 배터리 다 된 네온사인마냥 깜빡거리니 겁이 살짝 나기도 했다. 오후 내내 주방 바닥의 물기를 닦아냈다. 이전 같으면 물기 묻은 주방 바닥이 일어나 있는 것도 속상하고, 집에 불 냄새가 나는 것도 싫었을 텐데 그냥 한 번 실컷 웃고 말았다. 김경아 작가 꽉 막힌 도로를 달려오며 맥없이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지만 두려움의 불길을 지나면서 다시 한 번 삶의 모습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값비싼 화장품 하나 사는 것으로, 명품 가방 하나 사는 것으로 나의 세련됨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마흔의 끝자락에서 조금씩 깨달아 간다. 일류 스테이크가 아니고 눌어붙은 누룽지처럼 은근히 또 기억나게 하는 깊은 속이 진정 나이 들어가는 것임을 조금씩 알 것 같다.눈이 좀 침침하고 기억이 좀 깜빡거려도 사람들 속에 묻혀 주변의 꽃과 풀도 눈에 담을 줄 아는 느림이 세련된 것임을 알 것 같다. 피곤하면 어디든 앉아 쉬고 누군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낼 줄도 아는 여유를 알아가며 익어가고 싶다. 다른 이의 탁한 목구멍을 뻥하고 뚫어주며 불편한 속을 달래주는 누룽지처럼 깊은 맛을 내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2023-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