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를 기다리다 바삐 사이렌을 울리며 가는 구급차에 눈이 머문다. 앞차가 가는 줄도 모르고 목을 빼서 구급차의 꽁지를 바라본다. 가슴이 벌렁거린다. 2년 전 산소마스크를 쓰고 경계를 넘나들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폐달을 밟으려니 힘이 빠진다.
하혈이 심해서 병원을 찾았을 때 자궁에 근종이 있으니 제거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크고 작은 수술을 많이 했던 터라 병원이라면 등부터 돌리고 싶었지만 결국은 수술 날을 잡았다. 봄이 막 문을 연 3월의 문턱에서 내 발로 걸어가 수술대 위에 누웠다.
“하나, 둘 하시고 편안히 주무세요”
간호사가 하는 말을 듣고 잠이 들었다. 그 뒤로는 모든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내가 의식이 돌아온 다음 남편은 그간의 모든 과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수술 시간은 3시간쯤 걸렸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나의 최고 혈압은 80이었다. 평소에 수면 내시경이든 어떤 마취를 해도 금방 깨는 나였지만 그 날은 이상하게 자꾸 어지럽고 눈을 뜨지 못했다. 남편은 담당 의사에게 왜 이렇게 마취가 깨지 않고 혈압이 낮냐고 물었더니 수술 중 출혈이 심해서 그러니 수혈을 좀 받자고 했다. 나는 수혈을 받았지만 여전히 어지러웠다. 혈압은 60으로 점점 떨어졌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꾸 배가 아파왔다. 바로 누워 있으면 압이 차고 숨이 막히는 듯 아파 왔다. 어지러움보다 감당할 수 없었던 괴로움은 목마름이었다. 물이 너무 먹고 싶었다. 목 안이 타 들어 갔다.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한 조금의 물도 먹을 수가 없었다. 혈압이 낮은 상태에서 잘못 먹으면 폐혈증이 올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은 내 손목에 자기의 손을 갖다 대고 맥을 체크했다. 빈맥이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나는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남편은 나를 체크하다가 새벽녘 나의 맥이 거의 뛰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혈압을 다시 체크하라고 했다. 혈압은 잡히지 않았다. 혈압기가 계속 에러가 났다. 헤모글로빈 수치는 4.7로 떨어졌다. 나는 호흡이 힘들어 산소마스크를 쓰게 되었다. 대학 병원에 도착 했을 때 나의 배는 더 이상 산소가 들어갈 수 없는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나를 소생실로 데려갔다. 말도 못하는 나에게 모든 의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혈압을 올린 후 CT를 찍었다. 배가 너무 아팠다. 내가 의식을 놓을까봐 잠들어가는 나에게 의사 한 분이 계속 말을 시켰다. 외래 보던 교수가 응급실로 뛰어 내려왔다. 보호자인 남편을 불렀다. 남편에게 온통 새까만 CT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지금 이 환자는 피가 간까지 차있습니다. 혈복강 내출혈인데 30분 안에 수술을 못하면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곧 폐로 피가 찰 것입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수술실로 가고 있었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는 나를 남편은 자꾸 깨웠다. 평소에 이성적이고 냉정한 남편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 손을 잡고 ‘괜찮다. 힘내야 돼. 네 남편이라 너무 행복했다’하며 알 수 없는 말들을 했다. 나는 눈만 깜빡이다 수술실로 들어갔다. 소리가 들렸다. 턱까지 차올라 아팠던 배가 아프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얼음 같았던 내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눈을 떠보니 오른 쪽 목에 주사 바늘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온 몸의 혈액이 다 빠져 나간 상태라 빠른 시간에 공급을 위해 큰 혈관에 수혈을 했다. 얼굴은 두 배로 부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중환자실로 가지 않고 일반 병실로 오게 되어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혹독한 바람과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찾았다.
내 몸은 황폐화되고 시렸지만 내 마음은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도 감사함을 배웠다. 타는 갈증을 참아내고 일주일 만에 물을 먹으며 물 한 모금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적인지를 알게 되었다. 덤으로 사는 내 인생을 예쁜 꽃으로 피워간다. 구급차에 타고 있는 그 누군가가 꼭 다시 봄을 맞이하기를 나도 함께 손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