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벨이 울렸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 받기로 하고 전화기를 가방 속으로 넣었다. 조용한 카페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칠 수 없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아버지는 나이가 드시면서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청각 장애 판정을 받으셨다. 어지간히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통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잠시 아버지와의 통화를 미뤘다.
나는 막내딸이다. 아버지 나이 사십에 얻은 막내딸이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죽음을 선고 받았다. 지금까지 살아 계신 이유는 내가 아버지의 살아야 할 이유였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그런 절박한 사랑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많은 아버지가 그렇듯 표현이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내 옆엔 항상 무서움과 외로움이 나란히 했다.
대학교 2학년 때다. 음악 연주회로 외국을 나갔다 며칠 만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지친 몸을 끌고 어두운 길을 터벅터벅 걸어 왔다. 우리 집으로 가려면 긴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 다리는 내게 외로움의 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다리 위 가로등 밑에 너무나 익숙한 걸음걸이가 보였다. 내 쪽으로 뚫어져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학교 앞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는 부모님들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스스로 낮아지고 작아진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를 기다려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런 이유였는지 나를 기다려준 아버지가 기쁘기보다 오히려 어색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옆에서 같이 걸어 주니 내가 높아지고 커진 것 같아 무섭지도 않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참 어색했다.
그저 집으로 가는 것이 목표인 양 열심히 걸었다. 외국인과 걷는다 한들 이렇게 부자연스러울까.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목에서 아버지와 나는 말없이 망개떡 한 개씩을 먹으며 나란히 걸었다. 집에 도착 할 즈음 아버지는 겨우 한 마디 하셨다. ‘차 조심 하고 다녀’ 라고. 어디선가 아카시아 향이 망개떡 냄새와 함께 코를 스쳐갔다.
3년 전의 일이다. 학부모가 학원을 하는 내게 망개떡을 가져 왔다. 나뭇잎에 새 색시처럼 하얀 살을 감추고 있는 망개떡이었다. 처음 보는 그 떡이 예쁘기도 했지만 맛이 좋아 아버지께 갖다드렸다. 아버지는 떡을 드시면서 옛일을 떠올리셨다. 전시에는 항상 군인들의 식량이 문제인데 상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라고 했다. 망개이파리는 부패를 방지하는 성분이 있다고 했다. 일본에도 비슷한 떡이 있지만 우리나라 망개떡과는 의미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며 추억에 젖어 행복하게 드셨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전화를 하신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길고 여운이 있다.
“갱…. 아….”
“망개뗙 먹고 싶다”
항상 맨 뒤의 단어가 길다. 할 말만 하시곤 내 대답은 상관없이 전화를 뚝 끊으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식이 나 혼잔가 하며 투덜대지만 외면할 수 없다. 망개떡을 샀다. 친정으로 향했다. 저 멀리 아버지의 자전거가 보인다. 자전거 뒷좌석에는 직접 키운 상추랑 고추랑 파가 가득 실려 있다. 열심히 페달을 밟으신다. 순간, 이전에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처진 어깨와 페달을 밟는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나를 발견하고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셨다. 귀가 잘 안 들려 엄마랑 소통이 잘 안 된다. 늘상 소리 지르는 엄마에게 섭섭한지 그때부터 아버지는 무표정으로 살았다. 그러나 나를 보면 말 대신 활짝 웃으신다.
그것은 또 다른 언어였다. 20년 전, 다리 위에서 평생에 한 번 나를 기다리셨던 아버지. 망개떡을 함께 먹으며 차 조심 하라고 하신 아버지. 그 한 마디는 딸에 대한 아버지만의 사랑이었다. 또, 망개떡이 먹고 싶다는 말은 딸이 보고 싶다는 아버지의 또 다른 언어였다. 망개떡은 아버지와 나만의 소통이었고 사랑이었다. 나뭇잎에 싸여 있을 땐 망개떡의 맛도 모습도 알 수 없다. 아버지의 겉모습은 망개 이파리처럼 뻣뻣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망개떡처럼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