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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암호

등록일 2024-04-21 17:56 게재일 2024-04-2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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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손자, 둘만의 숫자 암호.

“딩동”

휴대폰 벨이 울리자 아흔의 아버지 얼굴이 환해진다. 돋보기를 끼고 휴대폰 문자를 읽더니 고개를 들어 거실 벽을 쳐다본다. 아버지는 웃음을 띤 얼굴로 휴대폰 자판을 누른다. 더듬더듬 글자를 찍어 넣는 아버지 손이 분주하다. 도대체 누구에게서 온 문자이기에 아버지 낯빛이 저토록 밝아진단 말인가?

“나도 1번이다”

아버지에게 나는 늘 1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또 다른 1번이 생겼단 말인가. 아버지는 문자를 발송하고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잠시 후, ‘딩동’하고 벨이 또 울렸다. 이번엔 ‘2번이에요’라고 들어온 문자에 찍힌 이름을 보고, 나는 눈물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결혼 후에도 음악학원을 하면서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냈다. 몸과 마음이 피로에 지쳐있을 즈음, 아이까지 생겼다. 아이가 태어나면 동화책도 읽어주고 함께 놀아주리라 다짐했던 각오는 먼 이야기가 되었다. 아이가 20개월 쯤 되었을 때 어린이집에 보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아이가 너무 울어요. 오늘은 그냥 데리고 가셔야겠어요.”

아침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아이를 억지로 떼어내서 어린이집에 보냈다. 아이는 조금도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날마다 내 마음을 찢어 놓았다. 그날 나는 아버지께 부탁을 했다. 아이를 보고만 온다던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왔다. 놀고 있는 많은 원아들 가운데 아무리 찾아도 우리 아이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깜짝 놀란 아버지는 구석구석 다니며 찾아보니 혼자서 벽만 쳐다보고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내 이제부터 경로당에 안 가고, 니 새끼 봐 줄 테니 걱정 말고 일해라.”

아버지는 그날부터 아이를 돌보았다. 장기도 가르치고, 화투도 가르치고, 자전거도 가르쳤다. 함께 고구마를 심었고 구워 먹기도 했다. 강나루에 업고 가서 돌 던지기도 하고, 기차도 타러 가고, 함께 버스를 타고, 동물 시장에 가서 토끼도 사 왔다. 뻥튀기를 사서 들고 공원으로 가서 비둘기에게 던져주는 것도 가르쳤다. 아이와 할아버지, 둘 사이에는 놀이가 하나씩 둘씩 늘어갔다. 놀이에 번호를 매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1번 하고 놀까?” “아니 3번”

1번은 자전거 타기고, 3번은 비둘기를 보러 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삶의 무료함을 아이를 통해 달랬고 아이는 아버지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 나갔다.

그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들은 한 달에 한, 두 번 집에 온다. 그런데 아흔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하더니 청각 장애 판정을 받았다. 아이가 아무리 많은 말을 큰 소리로 해도 다 못 알아들으신다. 할아버지와 소통하고 싶었던 아이는 칠판을 하나 사들고 와서 무언가 적어두었다.

김경아 작가
김경아 작가

1. 사랑해요. 2. 보고 싶어요. 3. 진지 맛있게 드세요. 4. 자전거 타실 때 차 조심 하세요. 5. 이번 주 토요일에 갈게요.

아이는 어릴 때, 놀았던 기억을 더듬어 할아버지와 소통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연구했던 것이다.

“딩동” “할아버지, 2번이에요.”

아이가 아버지께 보낸 문자를 보고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손자와 할아버지의 기막힌 소통, 그것은 숫자를 이용한 문자 메시지였다. 1번부터 5번까지 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문자가 올 때마다 칠판을 확인했다. 아버지는 더듬거리며 ‘나도 2번이다’라고 찍어 넣고 있는 중이다.

노인 냄새난다고 아이들은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들려오는 요즘이다. 예사로 보았던 칠판의 숫자들, 아버지에게 휴대폰 문자는 손자를 곁에 두고 어루만지는 것만큼 기쁜 일이 되어 있다. 그새 또 문자가 울린다. 5번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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