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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4-08-25 19:08 게재일 2024-08-2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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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둑.

엄마의 눈이 붉다. 거친 손마디가 눈두덩이를 지나갈 때마다 짧은 속눈썹이 몇 가닥씩 뭉쳐져 보인다. 엄마는 새 집에 보금자리를 틀고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엄마는 옷소매를 한참 적셨지만 그저, 노인이 겪어온 지난날의 힘든 여정을 내려놓는 것으로 여기거나 새 집을 얻은 기쁨쯤으로 생각했다. 나는 미처 구경하지 못한 집 안을 살폈다. 겨울이면 추웠던 집이 따뜻하게 변한 게 가장 좋았다. 안방을 둘러보다가 나는 이 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침대 옆에는 주인을 잃은 외로운 화분이 2개 놓여 있었다. 그 곳에는 화초 대신 자갈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 쓸모없는 것을 엄마는 왜 버리지 않고 간직 하고 있는 것일까’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엄마는 자갈의 사연을 말해 주었다. 엄마는 자갈을 버리려고도 해 보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할머니 몸을 닦아 주듯이 자갈 하나하나를 깨끗하게 씻고 닦아서 말렸다고 한다. 자갈은 외할머니가 남겨준 하나 밖에 없는 유품이라며 한 가지 부탁의 말을 덧붙였다. “나, 죽거든 저 자갈 버리지 말고 무덤 옆에 차곡차곡 둑처럼 쌓아다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일찍 죽고 혼자서 생계의 짐을 메었다. 5남매를 여자 혼자서 돌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새벽 일찍 먼 길을 걸어가 생선을 떼어와 장사를 시작했다. 지치고 힘든 몸으로 다시 먼 길을 걸어 집에 오면 찬물 한 사발로 저녁을 해결했다.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입 하나라도 줄여야겠다는 마음으로 첫 딸인 나의 엄마를 시집보내는 날, 집 안 곳곳을 뒤져도 도무지 나올 것이 없었다. 장독 두 개를 사 주며 고생만 시켜 미안하다며 밤새 베겟닛을 적셨다. 할머니의 걱정과 다르게 엄마는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하늘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일까, 엄마는 감당할 수 없는 무너짐 앞에서 망연자실 했다.

그 해, 큰 홍수가 나면서 둑이 무너졌다. 물은 엄마의 보금자리도 함께 쓸고 가 버렸다. 할머니가 준 장독도, 애써 이룬 가구며, 살림살이도 모두 휩쓸고 갔다. 간신히 가족만 남겨진 걸 감사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큰 집의 건넛방 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단칸방에서 갖은 서러움을 당했다. 하지만 남편과 아이들, 가족이라는 커다란 둑이 있어서 힘을 내고 견디며 살았다.

엄마는 5년 만에 작은 집을 하나 장만했다. 고생만 하던 딸이 첫 집을 장만하여 이사를 하던 날, 할머니는 참 많이 우셨다. 이제 장독마저도 하나 사 줄 형편이 안 되었던 할머니는 다음 날부터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구석구석 청소를 하시더니 병든 몸으로 대야를 들고 공사판에 가서 자갈을 담아 장독대에 나르기 시작했다. 딸이 첫 장만한 집에 복을 나르는 마음으로 장독대가 넘쳐 나도록 자갈을 옮겼던 것이다. 햇빛을 받은 자갈은 엄마 삶을 축복해 주듯 반질반질 빛이 났다. 할머니는 자갈을 옮기며 아무리 거친 파도가 살과 뼈를 깎는다 해도 이 자갈처럼 둥글게 잘 이겨 내라고 했다. 많은 풍파 속에서도 자갈은 수많은 해초들을 잘 키워 내고, 인생의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잘 막아내고 헤쳐 나가라는 할머니만의 철학을 담아 옮긴 것이다.

김경아 작가
김경아 작가

축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 해, 아버지는 의사로부터 마지막을 준비 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6개월, 아버지에게 남은 삶의 기간이었다. 가정의 큰 둑이 점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생활은 점점 힘들어졌다. 엄마는 팔뚝을 걷어 부치고 구멍 난 곳을 막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막기 시작했던 둑은 주먹으로, 팔뚝으로, 등으로. 온몸으로…. 엄마는 스스로 둑이 되어갔다. 둑이 되어버린 딸을 힘겹게 바라보시던 할머니는 그해 자갈을 밟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장독대 모퉁이 마다 남아있는 할머니의 흔적을 어루만지며 엄마는 몇 날을 통곡했다.

할머니의 바람대로 정말 자갈이 복을 가져다 준 것일까. 아버지는 엄마의 간절한 기도와 보살핌으로 몇년 뒤 완치되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커다란 시련을 겪은 뒤 우리들에게 더 견고한 둑이 되어 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둑을 가지고 살아간다. 둑이 홍수를 잘 견디기 위해서는 구멍이 날 때마다 메워줄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엄마에게 할머니의 자갈이 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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