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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4-07-14 19:26 게재일 2024-07-1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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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감자

뒷산 둘레 길을 걷는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숨이 가빠진다. 잠시 앉아 숨을 깊이 들이켜고 뱉어낸다. 숲의 날숨은 언제 마셔도 상쾌하다. 푸른 기운이 몸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집으로 오니 택배가 와 있다. 박스를 열었다. 울퉁불퉁한 돼지감자와 그 아이의 눈동자를 닮은 검은 콩이 들어 있다. 흙냄새와 쇠죽 끓이는 냄새도 함께 실려 왔다. 그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다. 편지를 열자 오래도록 봉인 되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결혼 후, 남편과 시외가에 갔다. 여느 마을과 다르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후 남편과 산책에 나섰다. 맑은 공기 푸른 하늘, 도시에서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면서 걷자니 숨이 탁 트였다. 둑을 따라 수양버드 나뭇가지가 ‘쏴 쏴’ 노래를 했다. 정미소의 발동기 소리가 시골마을의 심장 소리처럼 들렸다.

정미소의 마당 옆에는 큰 웅덩이가 있었다. 참새들이 모여 입방아를 찧고 오리가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머리 하나가 쑥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사람 같기도 하고 오리 같기도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꼬마 하나가 오리 옆에서 자맥질 하고 있었다. 아이는 물놀이에 익숙해 보였다.

웅덩이를 스쳐 지날 때, 자맥질을 하던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오리만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웅덩이를 계속 바라보았다. 물결이 없었다. 아이는 어디 갔을까. 머리가 쭈뼛 서면서 불길한 예감이 몸을 휘감았다. 발만 동동거리는데 웅덩이 속으로 누군가 뛰어 들었다. 남편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물속만 쳐다보았다. 물은 아무 표정이 없다. 잠잠했다. 숨이 막혔다.

잠시 후, 아이를 끌고 나왔다. 남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의 눈은 잠들어 있었다. 팔은 탈수 되지 않은 옷처럼 축 쳐져 있었다. 남편이 무릎 위에 아이를 거꾸로 올렸다. 물을 빼도 아이에겐 반응이 없었다. 남편이 아이를 눕혔다. 숨을 십 여 차례 불어 넣자,

“으앙”

소리가 났다. 내 숨도 터졌다. 남편은 아이 옆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 누구 없어요?’ 다시 고함을 쳤다. 건너편에서 할머니 한 분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할머니의 눈은 백 리는 들어 간 듯 퀭하였다. 할머니는 손자를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편의 손을 붙들고 연신 기역자로 고개를 숙였다.

“이 놈이 3대 독잔데 오늘 씨를 말릴 뻔 했네요”

다음 날 할머니는 아이와 함께 우리를 찾아 왔다. 삶은 감자가 담긴 소쿠리를 거친 손등으로 건네셨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팍팍한 삶이라 손자 목숨 사례가 이것 밖에 안 된다며 미안해 하셨다. 다음 날도 할머니는 고구마와 옥수수를 한 보따리 가져 오셨다. 돌아오는 길에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도 함께 싸서 왔다.

김경아 작가
김경아 작가

그러고는 잊고 살았다. 한 아이를 구하느라 목숨을 걸었던 남편도 응당 할 일을 했다는 듯 더는 말하지 않았다. 편지가 없었다면 아이는 우리 부부에게 잊힌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시골 마을에서 친구들은 도시로 다 떠나고 혼자 남아 고향을 지킨다고 했다. 열심히 키워 낸 채소들이 자연 재해 등으로 말라 갈 때는 가슴이 찢어진다고, 채소를 쓸어버릴 때마다 어린 시절의 사건을 기억해 낸다고 했다. ‘목숨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할머니는 수년 전 돌아가셨고, 꼭 우리 부부를 찾아 감사의 마음을 전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했다.

상자 속에 담긴 농산물은 이삼 만 원 정도다. 하지만 남편은 값비싼 선물을 받은 양 기뻐했다. 삭막함이 고무풍선처럼 가득 차 있던 일상에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건조한 부부 사이에 끼어든 아이의 숨소리에 오랜만에 남편과 나는 옛 이야기에 빠질 수 있었다. 아이가 보내 준 고향의 숨소리가 상자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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