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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선

등록일 2024-01-28 18:10 게재일 2024-01-2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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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선

가을 공원길, 나란히 산책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눈부시다. 두 분은 오늘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을 맞춰 왔을 것이다. 자신의 속도를 고집하지 않고 손을 꼭 쥔 채 걸어가는 등 뒤로 석양이 비춘다. 남편과 나는 보폭이 맞지 않았다. 함께 길을 걸을 때 저만치 앞서간 남편은 뒤를 돌아보며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시간의 굴레를 풀어놓은 산길에서는 쉬엄쉬엄 걷고 물 맑은 여울에서는 발이라도 담그고 싶었다. 느릿하고 맛갈지게 걷고 싶은데, 남편의 성화에 이끌렸다.

남편은 매사에 반듯했다. 책이든 가구든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상자 안에 정리하고 차곡차곡 줄을 맞추는 것을 좋아했다. 남편이 지나 간 자리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잘 못 건들면 흐트러질까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때로는 그런 모습이 숨 막혀 일부러 흩트리기도 했다. 내가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어수선했다. 대충 개놓은 옷가지와 선반에 질서 없이 올려놓은 그릇 그리고 어른 아이 구분 없이 뒤섞인 신발들, 충동구매를 한 옷가지가 나뒹구는 옷장, 남편은 볼 때마다 속 시끄럽다며 잔소리를 해댔다. 그러면 나는 적당히 흐트러진 것이 인간답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살아 온 환경이 달랐던 우리는 씀씀이에서도 부딪혔다. 남편은 알뜰하고 나는 헤픈 편이었다. 때로는 계획 없는 지출이 스트레스 해소라는 소득이 되기도 하는데 남편에게는 통하지 않는 계산서였다. 결혼 초 남편과 어느 장터에 기차 여행을 갔다. 장터로 안내하던 철길은 추억으로 이끄는 길이 되었다. 도시에서 들을 수 없었던 엿장수 가위 소리에 귀가 열렸다. 백화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흥정하는 모습, 골목을 돌면 나는 ‘뻥’소리, 먹어 보라고 과일을 건네는 농부의 손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시간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공간을 만나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들었던 풍경을 만났다.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를 만나고 애니메이션에서 본 그림과 마주쳤다. 우리는 계속 흘러가는데 이 곳은 어느 순간 멈춰 버린 듯 낡아 있었다. 이 공간을 담고 싶었다. 간이역에 잠시 정차한 기차처럼 멈추고 싶었지만 남편은 충동구매는 안 된다며 모든 공간을 뒤로 물리며 갈 길을 향했다. 나는 여행지보다 가는 길을 더 좋아했다. 가까운 곳보다 지루할 정도로 먼 목적지가 좋았다. 느리게 걸으며 목적지까지 걸어가길 원했다. 들꽃을 보며 웃기도 하고, 비가 오면 처마 밑에 잠시 쉬어 가고도 싶었다. 감당 할 수 없는 속도에 조금씩 지쳐 갔다. 크기가 다른 기차 바퀴처럼 어느 하나가 밀려날 것 만 같았다.

남편을 따라 계획을 세워 보았다.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계획표대로 책을 읽으려 하면 열어 놓은 창가에서 신문지 팔랑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어느 세월에 이 책을 다 읽나 싶어 괜스레 뒷장을 뒤적였다. 계획을 세우기만 하면 뭐하나, 노안은 오고 시력은 점점 나빠지고 몰입 할 수 없는 핑계만 가득했다. 우리는 다투었다. 감정으로, 언어로 밀어냈다. 인도와 차도처럼 늘 경계선이 있었다. 남편의 속도에 맞춰 보려고 애를 썼다. 나의 속도로 살아도 손해 본 적이 없는데 자꾸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평행선은 나란히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김경아 작가
김경아 작가

도돌이표 같은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내가 흘려 놓은 것을 줍기 시작했다. 내가 빼 놓은 것을 챙겼다. 내가 벌여 놓은 틈을 메웠다. 내가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걷도록 내버려 두었다. 굽이진 길을 돌아 나올 때는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주었다. 내게 맞는 보폭이 나를 당당하게 걷게 했다. 서로의 걸음을 인정하고 나니 똑같은 속도가 아니라도 마음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쉼 없이 전진하는 게 헛걸음이 될 때도 있었다. 같은 속도로 꼭 성공해야 한다는 법칙도 없다. 사람마다 오르려고 하는 봉우리가 다르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다. 함께 돌아보며 늦춰 주고 당겨 주면서 생각의 보폭을 맞추어 가는 것이 부부였다.

남편과 함께 걸어온 시간을 돌아본다.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어느새 보폭이 비슷해졌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평행선은 이탈 없이 내일로 갈 것이다. 나란히 손을 잡고 인생의 소실점으로 가는 노부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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