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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저항과 위로

등록일 2024-06-16 18:45 게재일 2024-06-17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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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34∼5℃를 오르내리는 더위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면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다. “저항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겨라!”는 아주 신랄하고 노골적인 말도 있다. 더위를 포함한 자연의 섭리에 거부권을 행사함은 어리석고도 삿된 짓이다. 그런 까닭에 나약한 육신의 관심 영역을 외부세계로 이전함이 현명할 수 있다. 이것이 유튜브를 향한 나의 관심 시작점이다.

며칠 전 텃밭과 잔디에 넉넉하게 물 주고, 여유롭게 아침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안두(案頭)에 앉는다. 그 무렵 켜둔 유튜브에서 호소력 짙은 낭송자의 단편소설이 들려온다. 쌍둥이 남매의 애틋한 이야기가 끊일 듯 말 듯 이어진다. ‘반야심경’과 ‘도덕경’ 1장부터 15장까지 외워서 왼손 쓰기를 하던 나였지만, 마음과 귀가 자꾸 소설로 옮아가 어려움을 겪는다.

고교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쌍둥이 오빠를 떠올리며 그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부터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여러 사건이 중첩되어 생겨난 깊은 상처와 안타까움이 내게도 전해진다. 소설은 어떤 때에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더러는 감상적으로, 혹은 서정적으로 나의 영혼과 육신을 후려갈긴다. 4·16 세월호 대참사와 관련된 소설이었으므로!….

여성적인 서정과 다정다감함, 섬세함과 애틋함이 넘치는 오빠와 외려 남성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쌍둥이 누이의 유소년기와 어른이 되고 난 이후의 이야기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그래선지 ‘도덕경’과 ‘반야심경’보다 소설의 진척 양상과 여주인공의 황량(荒<6DBC>)한 내면 풍경의 변화가 훨씬 더 마음 깊숙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참 잘 썼네! 저런 작가가 우리 옆에 있다니, 정말 운이 좋은 거지.’ 하는 혼잣말이 스르륵 하고 나온다. 우리 시대 문학은 많은 경우에 죽었거나 가사상태(假死狀態)에 있다. 시인과 소설가, 극작가를 찾지 않는 한국 독자들에게 문학의 위로 혹은 문학의 향수나 저항 따위의 어휘는 멸망을 자초한 조선왕조의 비루(鄙陋)한 골동품처럼 헛헛하고 무의미한 것이다.

문학이 힘을 가지는 것은 1980년대 참혹한 군부독재 시절에도 저항의 붓을 놓지 않은 박노해와 김남주 같은 시인들 덕이었다. 60년대 김수영과 70년대 김지하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자유와 민주와 문학의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저항하며 투쟁했다. 그들의 헌신적인 싸움의 결과물을 우리는 물과 공기를 누리듯 공짜로 향수(享受)할 따름 아닌가?!

시대의 어둠과 폭력과 야만이 절정으로 치달아갈 때 그들은 가장 위태로운 꼭짓점에 서 있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수영’이 구차하고 남루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 ‘애린’에서 이제는 담담하게 평안을 얻어낸 ‘지하’처럼 그들은 고요와 평정을 구하지 않고 좌충우돌(左衝右突)하며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공장에서 야학당에서 깃발을 들었다.

오늘 들은 단편소설은 지난날 이야기를 그저 무심히 던지면서 절규하지도, 주장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그리 가슴이 미어지는지 모르겠다. 문학의 저항과 위로가 어디서 오는지 자꾸만 생각하도록 한다. 우리 시대를 위한 문학의 힘은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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