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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모든 사물에 생명 온기 불어넣어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유병록(32) 시인의 첫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창비)가 출간됐다.등단 당시 “시선의 깊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서둘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되는 묘사력이 탁월”하다는 호평을 받았던 시인은 산뜻한 감각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시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묵직하고 개성적인 첫 시집에서 시인은 “삶과 죽음 사이의 균열”에 숨결을 불어넣는 “대지의 상상력”(손택수, 추천사)이 넘쳐흐르는 개성적인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전통적 서정과 현대적 감각을 아우르면서 평범한 일상에서 새로운 삶의 결을 발견해내는 시적 인식과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이 도드라진다. 또한 사물의 현상과 본질을 꿰뚫어보는 사유의 깊이가 돋보이는 시편들이 다채로운 빛을 반짝이며 다사로운 감동을 선사한다.유병록의 시는 `몸의 언어`라 이를 만하다. 문학평론가 양경언이 해설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병록 시인은 시적 대상의 육화(肉化)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붉게 익어가는/토마토는 대지가 꺼내놓은 수천개의 심장”(`붉은 달`), “땅에 묻힌 자가 팔을 내밀 듯/피어나는 꽃” “부러지는 손가락처럼/뚝뚝/꽃잎 질 때”(`완력`), “굽이를 지나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물방울, 뼈가 부서지고 체온이 탈출한다 살점이 공중으로 튀어오른다”(`중력의 세계`)에서 보듯, 시인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시인이 그려내는 시적 세계의 풍경은 바로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인 물질성을 띠며 선명한 감각으로 다가온다.유병록은 몸의 언어를 매개로 언어와 현상세계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려 한다. “아무도 부축하지 않는 생은 지구가 업고 간다//구부러진 자들은 두 손으로 지구의 목을 꼭 끌어안는다”(`구부러지고 마는`)에서 보듯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서로 유기적인 영향 관계에 있으며 삶의 무게를 함께 견딘다는 것을 통찰하는 시인은 사과 한알이 둘로 쪼개지는 틈새에도 “검은 피가 흐르고 흰 뼈가 돋아”(`검은 피 흰 뼈`)나는 존재들의 세계가 있음을 일깨운다. “종이 한장 갖지 못한 자들이 제 몸을 펼쳐 이야기를 기록하는”(`너를 만지다`) 순간이기도 하면서, 문자와 종이의 관계를 뼈와 몸으로 여기는 시인에게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종이에 검은 잉크가 새겨지면서 새로이 시가 탄생하는 순간”(양경언, 해설)이기도 하다.▲ 시인 유병록유병록의 시는 진부하고 어설픈 상징이나 알레고리 혹은 흐리터분한 이미지의 나열로 빈약한 사유를 눙치거나 얼버무리지 않는다. 시인은 바람에 날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구겨진 종잇조각에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읽어내고 “검은 뼈가 자라듯 글자가 새겨지던 순간”과 “뼈를 부러뜨리고 온몸에 상처를 남긴 완력”(`구겨지고 나서야`)을 포착해내는 섬세한 시선으로 사물의 실체를 꿰뚫어보며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시인은 또한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이,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이 된다더군/아이가 죽으면 예언서가 된다더군”(`사자(死者)의 서(書)`)에서처럼 상징적 관념을 찬찬히 풀어놓거나 때로는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환상적 세계를 펼쳐놓기도 한다.유병록이 고등학교 때 쓴 시 `식구`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널리 읽히고 있다. 그만큼 탄탄한 기본기와 내공이 입증된 셈이다.손택수 시인은 “석탄처럼 막막한 밀도의 어둠을 품고 피워낸 불꽃 같은 시집으로 시단에 또렷한 첫발자국을 새긴 이 시인의 첫걸음으로 하여 우리 시는 희미해져가는 두근거림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14

詩人 49명이 고른 자신의 대표작은?

문학동네시인선이 50권째를 맞아 펴낸 기념 자선 시집 `영원한 귓속말`은 말 그대로 시인들이 직접 나서서 한데 목소리를 모았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영원한 귓속말`은 지금까지 문학동네시인선을 통해 선을 보인 1권부터 49권까지 49명의 시인들이 각자의 시집에서 시인 자신이 이거다 싶은 한 편의 시를 직접 고르게 했고, `시인의 말`과는 별개로 시와 시집에 붙이고 싶은 산문을 덧대었다. 안도현, 허수경, 송재학, 김언희, 조인호, 이홍섭, 정한아, 성미정, 김안, 조동범, 장이지, 윤진화, 천서봉, 김형술, 장석남, 임현정, 김병호, 이은규, 김경후, 최승호, 김륭, 함기석, 이현승, 서대경, 장대송, 김이강, 조말선, 박연준, 신동옥, 이승희, 곽은영, 박준, 박지웅, 김승희, 서상영, 장옥관, 김충규, 오은, 이사라, 윤성학, 박상수, 고형렬, 리산, 손월언, 윤성택, 조영석, 이향, 윤제림, 박태일 시인이 그 주인공.어떤 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산문을 쓰기도 했고, 어떤 시인은 일기에서처럼 시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시인은 연륜에 걸맞게 시론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개성이 제각각으로 드러나는 시와 산문을 엮어내어 우리 시의 다양성과 우리 시인들의 폭넓은 상상력을 재미있게 선보이게 된 점이 이 책이 가질 수 있는 큰 미덕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자선시 `꾀병`전문“거짓말 할 때 코를 문지르는 사람이 있다 난생처음 키스를 하고 난 뒤 딸꾹질하는 여학생도 있다 // 비언어적 누설이다 // 겹겹 밀봉해도 새어나오는 김치 냄새처럼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것, 몸이 흘리는 말이다 // 누이가 쑤셔박은 농짝 뒤 어둠, 이사할 때 끌려나온 무명천에 핀 검붉은 꽃//몽정한 아들 팬티를 쪼그리고 앉아 손빨래하는 어머니의 차가운 손등 // 개꼬리는 맹렬히 흔들리고 있다 // 핏물 노을 밭에서 흔들리는 / 수크령 // 대지가 흘러내리는 비언어적 누설이다” -장옥관 시집 `그 겨울 나는 북벽에 살았다` 자선시 `붉은 꽃` 전문/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14

현대 中 지식인들 부조리 고발

중국 내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 폭발력 있는 작가, 쟁의가 가장 많은 작가로 손꼽히는 옌롄커. 그의 국내외 수상 경력과 여러 나라 대학이나 학회에서의 화려한 문학강연 활동을 보면 이제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세계적 작가임에 틀림없다. 1996년 중편 `황금동`으로 제1회 루쉰문학상 수상, 1997년 `연월일`로 제2회 루쉰문학상 수상, 2005년 `레닌의 키스`로 제3회 라오서문학상 수상 등 자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휩쓴 것은 물론, 해외에서도 2012년 `딩씨 마을의 꿈`으로 타이완 `독서인상` 수상, 전지구 화어 10대 양서 선정, 영국 `맨아시아문학상` 최종후보, `파이낸셜 타임즈` `올해의 책` 선정과 더불어 `사서`로 프랑스 `페미나문학상` 최종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이번에 나온 옌롄커의 장편 `풍아송`(문학동네)은 출간 당시 “베이징 대학을 겨냥했다”는 비판과 더불어 대대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며 `중국 당대 문학에서 최초로 지식인의 부조리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또 한번 `중국에서 가장 쟁의가 많은 작가`라는 화제를 불러모았다. 한국어판에는 저자가 직접 보내온 `한국어판 서문`과 말미에 부록으로 실은 `저자 후기` 세 편이 실려 있어 이 작품의 창작 과정과 출간에 대한 저자의 변을 맛볼 수 있다.옌롄커는 “현실은 상상보다 더 부조리하다. 글을 쓴다는 건 인생에 대한 도둑질, 죽음이 엄습한 곳에서 생명을 도둑질하는 과정이다”라고 했다.이 책의 제목 `풍아송`은 원래 `시경`에 나오는 내용별 분류 체제를 가리킨다. 즉 `풍(風)`은 남녀의 애정을 주로 다룬 여러 제후국의 민요·민가이며,`아(雅)`는 조정의 의식에서 주로 불린 시가이고, `송(頌)`은 선조의 덕을 기리는 종묘 제의용 악시다. 옌롄커는 이 체제를 차용해 자신의 소설 형식을 변주했다. 이 소설은 돌림노래처럼 이 세 개의 악장이 돌아가며 반복된다. `시경`의 각 시에서 빌린 제목의 낱낱의 장들은 밀도감 있는 심리 묘사와 빠른 이야기 전개로 한 편의 완결된 시적 정경을 만들어낸다.이 소설의 내용적 측면에서 보자면, 주인공 양커 교수의 행보는 아주 문제적이다. 바러우산맥의 시골 출신인 그는 현재 입신양명해 베이징 유명 대학의 교수이자 `시경`을 연구한 권위자다. 5년 간 공들여 쓴 50만 자 분량의 연구서를 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침실에는 자신의 아내이자 동료 교수 자오루핑이 훗날 총장으로 취임할 리광즈와 뒹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모래폭풍에 휩쓸려 쓰러져가는 대학건물을 지키려던 대학생들과 우연한 계기로 함께하다 정치적 교수사회의 표적이 돼 뜻밖에도 정신병원 환자로 둔갑된다. 대학 내에서 배척되던 그의 강연 기회는 황당하게도 정신병원 환자들과 홍등가로 변모한 고향 천당 거리의 여자들에게 베풀어진다. 또한 공자가 채록에서 빠뜨리거나 삭제된 사라진 시편을 찾으려는 그의 학문적 이상은 고향 바러우산맥에서 자신만을 사랑했고 그 사랑의 체념으로 죽어간 링쩐이라는 여인과 그녀의 딸 샤오민에 대한 일그러진 사랑의 양태로 변모한다. 그는 과연 자신의 붕괴된 학문적 이상을, 누락되어 사라진 시들을, 황폐해진 사랑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소설가 옌롄커지식인으로 자부하는 이들 앞에서 양커 교수는 매번 숱한 유혹과 갈등의 시험대에 오른다. 그의 선택과 행동이 곧 지신인의 실천이자 정신의 지표인 셈이다. 그가 부딪히는 심판의 문들 앞에서 해나가는 그의 선택이 이 서사를 이끄는 동력이다. 그러나 그가 “마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산 전체를 정복하려는 것처럼” 이들에게 오히려 무릎을 꿇는 행동은 지식인으로서의 무기력과 나약함을 반증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단속이자 타인의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기도와 같다. 이 주객이 전도된 자세란 얼마나 부조리한가. 자오루핑과 리광즈의 불손한 결탁 아래 펼쳐지는 교수사회의 횡포로부터 도망한 고향도 이미 예전의 고향이 아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07

감각 자체만으로 대상과 마주하며…

한국 시단의 독자적인 징후이며 예외적인 프로파간다로 회자되는 시인 이준규의 네번째 시집 `네모`(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시적인 구성을 도모하지 않고 짧은 줄글로 작성된 72편의 산문시들은 내용도 형식도 없는 지표들을 제시함으로써 적막한 외관을 구축하고 있다. 온갖 수사를 배제하고 극미한 진술만을 통해 멈추어 있는 이 정물성은 감각에 순수하게 머무르고자 하는 시인의 기획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데 간섭하는 모든 외적 요소를 차단하고 감각 자체만으로 대상과 마주하며 감정의 요동은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준규의 시어들은 완벽히 고립되어 있다. 동료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이수명은 이러한 이준규의 시를 가리켜 “아무것도 선언하지 않는 프로파간다”라고 했다.이준규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모든 시가 단순하고 반복적인 제시와 불친절한 단절의 외연을 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를 피하고 부사와 형용사를 절제한 결과, 시어에 감정의 물기가 스밀 틈이 없고 단어와 문장 들 사이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공동이 자리 잡는다. 그렇게 “있다” “있었다”와 같은 단순 진술만으로 포착된 이준규의 세계에는 아찔한 여백들이 시의 중요한 맥락을 형성하게 된다.“공터가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터의 끝에 교회가 있었다. 교회의 뒤로 테니스장이 있었다. 테니스장 옆에는 밭이 있었다. 비닐하우스도 있었다. 그곳은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조금 떨어져 도로가 있고 도로 위에는 육교가 있었다. 공터의 다른 끝에는 아파트가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터의 가운데에 트램펄린이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트램펄린` 전문이 시는 화자의 시선이 해가 지고 있는 시각에 공터를 시작으로 공터 주변의 대상들을 훑은 뒤 다시 공터 한가운데 놓인 트램펄린에 가 닿는 것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서 화자의 위치를 허공에 두고 사물을 조망한다는 습관적인 독법은 이 시를 맛보는 데 별 소용이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인 여백을 읽어낼 때 비로소 트램펄린 위에서 뛰어놀고 있는 화자가 드러나는 것이다. 공터 가운데서 높이 솟구치길 반복하며 공터의 끝, 교회의 너머, 테니스장의 근처에 있는 밭과 비닐하우스까지 눈에 담는다. 대상들은 화자가 솟구쳤다가 가라앉는 사이사이에, 즉 여백과 여백의 틈에서 잠깐씩 드러난다. 시의 후반부에서 공터의 다른 끝, 화자의 시선 반대편에 있는 아파트를 의식하는데, 그 아파트는 화자가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집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화자는 이 즐거운 유희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07

타살일까 자살일까, 13살 소년의 죽음

일본의 인기 작가 오쿠다 히데오(55)의 신작 `침묵의 거리에서`(전 2권·민음사)가 출간됐다. 일본 아사히신문 연재 당시부터 큰 반향을 부른 이 소설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중학생의 왕따` 문제를 소재로 했지만, 비극적인 색채를 띠는 일반적인 왕따 소설과는 달리 가해자와 피해자를 확실히 구분하지 않는다.한여름, 학교에서 벌어진 한 소년의 죽음을 둘러싸고 인간 군상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단순한 사고사나 자살인 줄 알았던 죽음에 잔혹한 학교 폭력이 결부됐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학교, 유가족, 가해 학생, 경찰, 법조계, 언론이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인다.휴대 전화 협박 문자, 소년의 등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 혐의를 부정하는 모범생들, 엇갈리는 아이들의 증언, 가해 학생 부모들의 두 얼굴, 신참 기자와 젊은 검사와 말단 형사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왜곡되고 만들어지는 소문들, 그러나 모든 진실은 소년의 죽음을 지켜본 교정의 은행나무 그늘 속에 침묵할 뿐이다.매 장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또 다른 가능성, 책을 덮을 때까지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이야기로 독자를 압도한다.중학교에서 열세 살 학생이 죽음을 맞는다. 2층 높이의 운동부실 지붕에서 학교의 자랑인 커다란 은행나무 그늘 속 도랑에 떨어져 사망한 나구라 유이치. 아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당황한 어머니의 전화 한 통에 아이를 찾아 나선 교사가 소년의 죽음을 처음으로 목격한다. 최초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단순한 실족 사고인지 사춘기 소년의 자살인지 아니면 훨씬 무거운 비밀이 숨어 있는 사건인지 수사에 나선 경찰과 학생을 보호하려는 학교의 의견이 갈리면서 한여름의 잊지 못할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유가족, 학교 폭력 주도자로 지목된 자녀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가해자 가족, 끝내 비밀을 밝히지 않으려 애쓰는 중학생들, 전대미문의 스캔들에 당황하는 교사들, 흉악한 소년 범죄를 밝혀내려는 말단 형사, 처음으로 만난 호외 앞에서 기자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신참 기자, 잠을 줄이면서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젊은 검사, 그리고 소문을 퍼뜨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입을 다무는 마을 주민까지. 말없이 죽은 소년의 시신 앞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페이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치는 가운데 어른도 아이도 결국 가장 중요한 이야기에는 굳게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열세 살 소년의 죽음.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이러한 주제를 놓고 오쿠다 히데오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무게를 재어 가면서 숨 가쁘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읽는 재미는 물론, 손에 잡힐 듯이 알기 쉽게 인물 심리를 묘사하여 잘 읽히지만 오래 생각하게 하는 `오쿠다 히데오식 사회파`를 완성해 내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작품의 힘에 대해 작품 연재지인 아사히 신문에서는 “무거운 테마를 이토록 읽기 쉽게 보여 주는 필치야말로 이 작가만의 독무대일 것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07

신현림이 건네는 `사랑의 통찰`

예술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전방위 작가 신현림(53)의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책읽는오두막)이 출간됐다.삶을 견뎌내고 사랑하며 살아온 신현림의 색깔 있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는 감성에세이다.이번 신간은 그간 써뒀던 작품에서 엄선한 것과 새로 쓴 작품을 함께 엮은 것으로 신현림의 작품 세계가 어느 책보다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더불어 사진작가 신현림과 시인 신현림의 면모가 균형감 있게 녹아 있는 책이기도 하다. 작가가 직접 촬영한 30여장의 사진 작품은 본문과 어우러지게 배치돼 몰입을 높이고 중간 부분에는 별도의 포토페이지를 구성해 텍스트뿐 아니라 사진 작품을 감상하는 묘미를 살렸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촬영된 사진들은 낭만적인 감성을 자아내고 텍스트의 의미를 확장시켜 더 폭넓은 감상의 기회를 안겨준다. 또 각 주제별로 엮은 글들은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며 공감을 확보하고 있고 작가의 삶에 대한 철학과 예술관을 다양한 주제의식으로 잘 버무려냈다. 이 책을 통해 신현림의 기존 독자는 물론, 신현림을 만난 적이 없었던 새로운 독자들도 지친 영혼에 위로를 얻고 자신의 삶이 조금 특별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그동안 신현림은 다양한 작품 활동을 통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사랑`으로 꼽으며 강조해왔다.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에서도 이별·관계·신앙·여행 등 여러 주제의 글과 사진을 보여주며 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 에세이에서 다루는 사랑은 범위를 한정할 수 없는 폭넓은 사랑이지만 관계에서 생기는 마음의 틈새에 관한 이야기이자 앞으로 다가올 사랑을 기다리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쁜 생활에 쫓겨 사랑에서까지 조급해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신현림이 건네는 사랑의 통찰은 무엇보다 특별하다.인생에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저자가 가장 중요시하는 메시지는 `함께하라`라는 것이다. 여행과 신앙, 예술로 시원한 숨을 들이쉬고 친구와 가족과 연인을 마음껏 사랑하며 함께하라는 말. 그러면서도 홀로 겪어야 할 외로움과 고독의 시간 또한 마냥 괴롭고 떨쳐야 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축복이 있다고 강조한다. 사진과 글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이 에세이는 총 일곱 파트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 파트인`나도 쓰레기였던 적이 있어`에서는 잉여의 삶을 살아야 했던 젊은 날에 대한 회상과 고뇌가 눅진하게 녹아 있다. 특히 지금의 2, 30대 젊은이들이 경험하고 있을 막막함과 실패에 대한 아픔이 자신의 일기를 들여다보듯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두 번째 파트인 `흰 눈으로 끓인 커피`에는 사랑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사랑 고민과 이별 후의 아픔, 인연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배어 있어, 자신이 가진 사랑이 어떤 모양인지 생각하게 해주는 부분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8

발견한 욕망, 실천과정 보여줘

1995년 데뷔, 등단 20년차인 은희경(55) 작가에게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이하 `눈송이`·문학동네)는 그의 다섯번째 소설집이자, 열두 권째 작품집이다. 소설 외에 산문집 `생각의 일요일들`이 있다. 연재를 하고 계절마다 단편을 쓰고, 그것들을 모으고 정리해 책을 내는 시간들을 생각하면 작가는 그동안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작품을 쓰고 책을 묶었다. 20년, 작가의 첫 책 `새의 선물`에 열광했던 이들의 딸들이 자라 다시 그의 책을 집어드는 시간이다. `은희경`은 엄마와 딸이 함께 읽는 브랜드 장르다. 어떤 시간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풍경은 늘 그렇게 있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조금은 다를 것이다. 결국 시간이 개입된다는 뜻이겠지. 풍경을 보기 위해 내가 간다. 대체로 헤맸다. 익숙한 시간은 온 적이 없다. 늘 배워왔으나 숙련이 되지 않는 성격을 가진 탓이고 가까운 사람들이 자주 낯설어지는 까닭이다. 왜 그럴까. 시간이 작동되는 것이겠지. 내 탓도 네 탓도 아니다. 내가 어떻게 그곳에 닿느냐에 따라 풍경이 달라진다고 여겼을 때는 그랬다는 말이다. 지금 이 풍경 앞에서 생각한다. 내가 풍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실려갔다. 떠밀려간 것도 아니고 스침과 흩어짐이 나를 거기로 데려갔다. 이런 생각을 하던 시간들이 이 책 속 이야기가 되었다. 쓸 수 있다, 고마운 일이다.”_은희경, 작가의 말`작가의 말`에서 그는 `시간`과 그 시간이 데려간 `풍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떠밀려간 것이 아니라 스침과 흩어짐이 데려”간 그곳에 대해.이번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대부분은 압축적이고 단일하며 통일적이라기보다 굉장히 긴 시간, 그러니까 한 인간(혹은 한 집단)의 긴 인생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예전의 소설들이 한 사람의 생애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사건, 한 순간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압축적이고 통일적으로 그려냈다면 `눈송이`의 소설들은 한 인간의 수많은 굴곡들과 삶의 파노라마들을 냉정하면서도 차분하게 따라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단편소설들이 인생을 결정짓는 지속적인 계기들 혹은 시간을 견뎌낸 자들만이 발견하는 삶의 진실들 같은 것에 굉장히 인색하다면`눈송이`의 소설들은 이례적으로 유한한 인간이 시간의 압력 속에서 자기의 고유한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보여주고 있다.그래서일까. 우리를 관통하고 지나간 그 시간의 흔적들을 그가 쫓아간 때문일까. `눈송이`에 수록된 여섯 편의 소설들은 느슨하면서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유사한 인물들과 동일한 공간들이 여러 소설들에서 겹쳐지고, 에피소드와 모티프가 교차한다. 그리고 여섯 편의 소설들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마지막 작품 `금성녀`에 이르면, 그것들이 단지 희미한 유사성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집은, `눈송이 연작`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각각의 단편으로 흩어져 있을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연결고리들은 이렇게 함께 모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홀로 빛나는 듯 보이던 별들이 모여 다시 제각각의 별자리를 이루듯, 날실과 씨실이 교차되면서 하나의 “선”이었던 시간은 “면”을 이뤄나간다.▲ 은희경 소설가그 안엔, 우리의 시간들도 함께 엮여들어간다. 당신이 겪어낸 시간은, 곧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기도 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견뎌낸 시간들. 그 시간들은 힘이 세다. 그래서 이렇게 농익은 이야기로, 때론 촘촘하게 때론 느슨하게, 그러나 결국은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된다.그의 소설이 단언컨대 한 번도 설익은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품집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들은, 곧장 따서 한 입 베어물면 입술을 타고, 팔목을 타고 과즙이 흘러내릴 것 같은 잘 익은 과일과도 같다. 시간과 비와 바람과 햇빛을 견뎌내며 품어안은 향기는 이미 봄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8

한시로 본 조선시대 지식인 사회·문화

선비의 삶과 사상을 담은 한시를 독자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앞장서온 강원대 김풍기 교수가 `한시의 품격`(창비)을 출간했다. 조선시대 주류 문화인 한시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그 속에서 조선 지식인 사회와 문화를 읽어낸다. 저자는 한시를 양반만의 전유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대부의 시뿐만 아니라 속세를 벗어난 승려의 시 그리고 신분적 불평등을 문학으로 승화한 중인들의 작품까지 폭넓게 살핀다. 좋은 시작품을 읽는 가운데 자연스레 그 안에 깃든 `옛사람이 시를 보는 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들이 읊은 한시의 세계가 오늘날 우리 삶의 풍경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하려는 의도다.김 교수는 한시가 조선 지식인 사회를 비추는 맑은 거울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고상한 듯 보이는 한시의 세계뿐만 아니라 한시와 더불어 살아가던 이들이 일으키는 잡음까지 포착해서 생생하게 들려준다. 옛것을 인용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문화에서 표절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자존심을 건 문인들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됐는지, 날선 비평의 세계에서 한시가 어떻게 살아남아 전해지는지 등 조선 지식인 문화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서슴없이 들춘다. 좋은 한시를 소개하는 책은 많지만 어떻게 해서 그 작품들이 오래도록 남아 전해지는지 알려주는 책은 드물다. 그 배경과 과정을 찾기 어려워하는 독자들에게`한시의 품격`은 좋은 길잡이 책이 될 것이다.10대의 어린 총각부터 70대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함께 어울려서 답안지를 쓰고 마음 졸이며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는 것은 과거시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렇듯 입신양명을 꿈꾸며 관직에 나아갈 때도 모든 명예를 버리고 초야에 묻힐 때도 그들 곁에는 언제나 한시가 함께했다. 그러다보니 한시에 얽힌 믿기 힘든 일이 전해지기도 한다. 시 귀신에 얽힌 이야기가 대표적인데 글자 한 자 모르는 시골 선비가 어느날 뛰어난 시를 짓게 된다거나,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에게 귀신이 답을 알려준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저자는 이를 중세 지식인을 옭아맨 관직 진출에 대한 부담감이 시문(詩文)의 신비스러운 성격을 강화시킨 결과라고 해석한다.사실 한시는 선비에겐 지식의 감옥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대부 커뮤니티에 끼기 위해서도 한시를 짓는 능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허름한 행색의 선비가 좋은 시구 하나로 상석에 앉아 명주를 얻어먹는 일화는 수두룩하다. 이렇듯 저자는 선비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한시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라고 말한다.이 책에서 좋은 한시 작품을 소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일견 어려워 보이는 시운론, 천기론, 성령론 등의 문학이론을 깊이 있게 다루는 이유다. 하지만 그 핵심을 설명할 때에는 서거정, 이규보, 허균 등의 문집에 실린 글과 시작품을 직접 인용해 옛사람의 생각을 직접 대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8

말문 닫고 사는 새시대 `바벨` 모습

2009년 등단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짙은 인상을 남기며 평단의 기대를 받아온 소설가 정용준이 첫번째 소설집 `가나`(2011)에 이어 첫번째 장편소설 `바벨`(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말이 얼음 결정이 되어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는 아름답고 불길한 동화 `얼음의 나라 아이라`로 시작되는 `바벨`은 이 동화에서 영감을 받은 천재 과학자 노아가 말을 결정화하는 실험에 실패한 뒤, 말이 만들어내는 부패하고 냄새나는 펠릿 때문에 사람들이 말문을 닫고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바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과 `소통`이라는 언어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이런 SF적 상상은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체와 결합해 먹먹하고 절망적인 시기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고 그 고통을 실감하게 한다. “`바벨`은 (소재적으로는) 종말의 문제를 `언어`의 형상화와 소통이라는 문학의 오랜 고민과 더불어 제시하고, (서사적으로는) 종말론적 이야기가 거의 필연적으로 당도하게 될 선택의 아포리아와 정직하게 대면하며, (주제적으로는) 그 아포리아가 유발할 수 있는 종말론적 염세주의에 손쉽게 투항하지 않은 채 급기야는 어떤 희망이라는 삶의 형식에 도달하고야 만다”(강동호). 말의 무게를 재는 이 한 편의 실험극은 `정용준 소설`이라는 거대한 결과와 함께 우리 소설의 새로운 미적 성취를 보여줄 것이다.“사랑에 도달한다는 것은 언어를 나누는 공통 감각의 현장에 두 사람이 함께 입회, 근원적인 실존을 나누고 느끼면서, 다시 둘로 나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에 대한 정용준의 끈질긴 천착이야말로 종말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예표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벨`은 여전히 우리가 희망을 더듬어 나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이유를 느끼도록 만드는 중이다.”- 강동호(문학평론가)정용준 소설에는 유독 언어 장애를 가진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말에 대한 욕망에도 억압과 폭력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인물이 그려진 `굿나잇, 오블로`나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고 “차라리 벙어리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말더듬이의 이야기 `떠떠떠, 떠` 등. 말하자면 이번 작품은 말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관심이 언어 장애를 겪는 전 인류의 이야기로 확장되면서 말이라는 인간의 욕망과 능력으로 모든 사람들을 포획해버리는 가혹한 실험을 한다.`단 하나의 욕망`인 `말`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이 우울한 공상은 그 정황 안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공포와 혐오의 감정에 휩싸이게 하고 우리를 슬픔 안에 가둔다. `말`이라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한 소설적 분투가 감정적 격정을 일으키고 얼룩처럼 남아 무게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먹먹해지는 가슴은 물리적 상처처럼, 흉터처럼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누구도 쉽게 어떤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말`을 가진 인간 모두에게 이 소설은 극단의 체험이다.종말의 시대를 보여주는 문장들은 계시의 순간처럼 잠언으로서 기능한다. 이것은 작가 특유의 시적 문체가 한 시대를 말하는 이 소설에서 얼마나 절묘한 문장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말에 대한 오만이 말로써 끔찍한 형벌을 받는 상황은 “역사는 영원한 밤을 맞이했다” “오래전에 시작된 현재”, 그리하여 “종말은 미래가 아닌 현재였고 과거였다”는 문장을 입으며 언어라는 관념적 대상은 물리적 속성을 갖고 살아나게 된다. “역사적 진보의 확신이 남아 있지 않은 세계의 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정확한 문장인가를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또한 소설에 등장하는 요나와 마리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가리켜 “두 사람의 언어가 서로의 언어를 만지는 행위”와 같다는 강동호의 지적은 좀더 효과적으로 정용준의 문장을 대변한다. “`바벨`에서 보여주는 이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체는 결정적이다. 종종 우리는 문체를 이야기와 구별되는 어떤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해버릴 때가 있는데, 최소한 정용준의 소설에서 문체는 그야말로 소설의 몸과 같아서 그것만으로 소설의 주제를 체현하는 노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배려하면서, 한편으로는 끈질기게 만지려고 접근해가는 작가의 노력이 이렇게 표현되는 중이다.”▲ 정용준 소설가`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어릴 때부터 말을 할 때마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쉽게 말을 할 수 없었고, 오랫동안 말더듬이로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장용학과 박상륭은 사변화하고, 편혜영과 백가흠은 사회화하고, 백민석은 탈승화한 그 데스트루도를 정용준은 서정화”(김형중)한다는 지적을 다시 상기해보면, 정용준의 소설이 서정화되는 지점은 소설과 작가의 내밀한 밀착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전에서 나오는 평면적, 서사적 친화가 아닌 자신의 모티프를 꿰뚫고 들어가 앓는 밀착이다. `사후의 세계` `SF-우화`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 작가만의 이 방식은 불가능해 보이는 소재를 작가 자신의 문제, 우리의 문제로 만들고야 마는 능력이다. “깊게 파고든 밀도 높은 어둠”으로 작품 읽기는 괴롭지만 끝내 작품을 내려놓을 수 없게 하는 힘, 그것은 진실한 한 작가와 나누게 되는 `공통 감각` 때문일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1

美 대표작가 샐린저의 영혼과 고독…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1919~2010)의 전기 `샐린저 평전`(민음사)이 출간됐다.이 책은 샐린저 사후 최초로 출간된 평전이다. 샐린저에 관한 웹사이트를 운영해 온 케니스 슬라웬스키가 샐린저 별세 4개월 후인 2010년 5월에 출간했고, 민음사가 최근 번역해 내놓았다.샐린저의 편지들, 부모님과 전 아내들에 관한 정보, 비밀에 부쳐진 첫 결혼, 심취했던 동양철학 등 사생활의 전모가 담겨있다.책은 강박에 가까운 `사생활 보호`로 철저히 감춰져 있던 샐린저의 인생을 탐색하면서, 그의 영혼의 성장과 고독의 뿌리를 찾아간다.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이름 뒤에는 `은둔 작가`, `괴짜`, `사생활 보호에 과민한 사람` 등 예사롭지 않은 표현들이 늘 따라다녔다. 실제로 샐린저는 1965년 마지막 작품을 발표한 이후로 수십 년간 미국 뉴햄프셔주 코니시라는 코니시라는 작은 마을에 머물며 문단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은둔을 시작한 1965년은 작가 샐린저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당시 그의 이전 작품들은 해마다 새로운 쇄를 찍었고, `호밀밭의 파수꾼`은 매년 30만부씩 팔려 나갔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은둔 생활을 유지했다.샐린저는 또한 `괴팍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매번 책을 출판할 때마다 편집은 물론 표지 디자인, 홍보 방식까지 하나하나 간섭하고 통제했다. 또 `홀든 콜필드`가 부당하게 인용되는 걸 용납하지 않았으며, 대중매체에 자신의 개인 정보가 오르내리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샐린저 생전에 랜덤하우스(이언 해밀턴)가 출판한 `샐린저 전기`는 법정 공방에까지 이르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샐린저는 저작권 및 사생활 보호 명목으로 `전기`에 인용된 개인적 편지, 신상 정보, 자신이 언급된 모든 인터뷰 기록을 삭제시켰고,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저작권법 판례가 됐다. 따라서 샐린저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전기`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기획이었다.2010년 5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최고의 샐린저 웹사이트(deadcaulfields.com) 운영자인 케니스 슬라웬스키는 `샐린저 평전`, 바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샐린저 사후 최초로 출간된 획기적인 평전이다. 샐린저 생전에는 절대 공개될 수 없었던 그의 편지들, 부모님과 전 아내들에 관한 정보,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과의 연애 등 베일에 가려져 있던 사생활의 전모가 밝혀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언론에 의해 왜곡된 은둔 생활의 진실, 미국 문단의 최대 스캔들이었던 조이스 메이너드와의 관계,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 내용 등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명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1

우리가 맺어가는 인연들 신비로운 7가지의 운명

장편소설 `사이보그 나이트클럽`을 통해 현실과 허구의 `익사이팅`한 대결을 보여준 소설가 이명행이 설화적 원형이 풍부하게 함축된 첫 소설집 `마치 계시처럼`(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번 소설집의 작품들을 쓰는 동안 `관계`와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다고 밝혀놓았다. 우리가 맺어가는 인연들의 닿음닿음마다 신비로운 운명이 어려 있음을 얘기하는 일곱 편의 소설을 만나보자.소설집의 첫머리에 놓인 `숨결`은 새벽 2시만 되면 모르는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는 치과 의사의 이야기다. 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주인공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댄다. 주인공은 너무나 엉뚱한 이 상황을 생각처럼 쉽게 거부하지 못하고 그가 앓고 있던 불면증은 더욱 심각해진다.`완전한 그림`에는 불현 듯 현실이 숨 막혀 가출을 감행하는 중년 남자가 등장한다. 제목 `완전한 그림`은 홀로그램을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인데, 홀로그래픽 필름의 아주 작은 조각에도 이미지 전체의 정보가 담겨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불발된 인연`과의 옛 기억을 하나하나 채취해가는 남자의 여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표제작 `마치 계시처럼`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는 하얀 소복을 한 기차다. 주인공이 고향에서 유년에 간접적으로 겪은 열차 사고가 중년에 접어들도록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인데,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고자 고향으로 찾아갔을 때 새록새록 돋아나는 기억들이 아프고도 따스하다.뒤를 잇는 `통증` `변신의 끼` `푸른 여로` `국경, 취우령 이야기`를 마저 따라가보면, 삶의 경로를 벗어나 떠돌다가 `마치 계시처럼` 느닷없이 엄습하는 기억들로 하여금 예상하지 못한 통증을 겪어내며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인물들을 계속 만날 수 있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인간이 도구 없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기재일 것이다. `마치 계시처럼`의 수록작들이 모두 특별히이 `기억`을 향해 촉수를 민감하게 뻗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이명행의 소설들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운명이나 우연과 같은 불확정적인 질서에 내던져진 인물을 통해 그 질문의 답을 찾고자 한다. 우연과 운명은 예측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을 불러일으키고 이 세계를 모순의 연속이자 집합으로 이해하게끔 한다. 그러나 이명행의 인물들은 절망의 끝에 서 있긴 하지만 운명과 우연도 이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의 한 갈래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삶을 경이롭게 맞이하도록 만들어주지 않는가 하는 긍정의 여지를 둔다.문학평론가 김진수는 이명행의 이러한 작업을 `모순의 통일`이라 말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1

단어 하나하나가 던지는 의미…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이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2014 제3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이 출간됐다.한 해 동안 발표된 작품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중·단편소설만을 모아 싣는`이상문학상 작품집`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심사 과정과 한국소설 문학의 황금부분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탁월한 작품성을 지닌 수상작으로, 현대소설의 흐름을 대변하는 소설 미학의 절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2014년 이상문학상 대상작은 김윤식, 서영은, 권영민, 윤대녕, 신경숙 등 심사위원 5명의 심사숙고 끝에 편혜영의 `몬순`으로 선정됐다. 편혜영은 그동안 인간의 내밀한 고독과 불안을 치밀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형상화한 작품을 발표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호평을 받아왔다. 올해의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몬순`의 곳곳에 산재한 불안과 관련된 소재나 장면 역시 그동안 지속되어온 작가의 관심과 연결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특히 거대한 불안과 대면하는 과정에 주목하였던 종전 스타일과는 달리, 인간의 삶 자체가 겪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론적 불안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 세계의 진전을 기대할 만하다.이번 작품집에는 대상 수상작인 편혜영의`몬순`과 자선 대표작 `저녁의 구애` 외에도 대상과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우수상 수상작인 김숨의 `법(法) 앞에서`, 손홍규의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 천명관의 `파충류의 밤`, 조해진의 `빛의 호위`, 윤고은의 `프레디의 사생아`, 이장욱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윤이형의 `쿤의 여행`, 안보윤의 `나선의 방향` 등 삶에 대한 깊이와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고루 포진해 읽는 재미와 맛을 더해주고 있다.작품 외에도 김윤식, 서영은, 권영민, 윤대녕, 신경숙 등 심사위원 5인의 심사평도 함께 실려 있어 각각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편혜영의 `몬순`을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있어 심사위원들은 작가가 그동안 즐겨 다루어온 주제와 기법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 작품의 무게와 그 소설적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 심사를 맡은 김윤식 평론가는 “삶의 난감함을 겪는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고 이 작품의 우수성을 주목했고, 서영은 소설가는 “무심심한 단어 하나하나가 돌연 의미심장한 주제로 바뀌는 것이 매력”이라고 이 작품의 무게를 인정했다. 권영민 평론가는 “주인공의 삶에 내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고통과 그 비밀이 인간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불안의 상황과 절묘하게 접합되어 있음”을 주목했다.`몬순`은 아이의 죽음을 서사의 바탕의 깔고, 제목이 암시하듯 삶의 불확정적인 요소들을 집요하게 응시한 작품이다. 더불어 관계의 틈에 도사리고 있는 극복할 수 없는 괴리감과 단절감이 `단전`의 상황에 빗대져 작가만의 건조하고 치밀한 문체로 유려하게 서술돼 있다. 그 어떤 것도 확실하거나 증명되지 않는 삶, 부조리함이 어느덧 전제로 작용하는 삶 속에서 주인공은 실체 없는 존재로 변해가는 자신을 다만 무기력하게 지켜볼 뿐이다. 관계로 표현되는 삶의 생태성이 무너져가는 현실을 압축해서 드러낸 이 작품은 반복되는 생활 속에 함몰돼 놓쳐버리고 말았던 진실의 무수한 파편들을 보여주고 있다.대상 수상작 외에도 학교폭력 가해학생의 아버지가 겪는 다양한 상념과 혼란을 통해 선과 악의 근본적 정의에 대해 질문한 김숨의 `법(法) 앞에서`, 기억을 모두 잃고 한 일가가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통해 삶의 균열을 그린 손홍규의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 절박한 생존본능을 내포한 파충류의 기억을 통해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표현한 천명관의 `파충류의 밤`도 눈여겨볼 작품이다. 또한 두 세계에 관한 기억과 기록을 치밀한 구도로 교차 조명하며 숨을 불어넣는 작가적 역량이 돋보이는 조해진의 `빛의 호위`, 유일무이한 어떤 가치가 상업적 포즈에 휘둘리면서 점차 소멸해가는 과정을 그린 윤고은의 `프레디의 사생아`도 고유한 개성을 발하는 작품이다. 아울러 기린불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참과 거짓의 정의에 질문을 던지는 이장욱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쿤`이라는 상징을 통해 타자화된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 윤이형의 `쿤의 여행`, 본론과 각주로 이어진 독특한 소설 쓰기로 숨은 역량을 보여준 안보윤의 `나선의 방향`도 주목해볼 만한 수작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14

미군 포로 생체해부 사건으로 일본인 죄의식 부재 문제 다뤄

일본을 대표하는 엔도오 슈우사꾸의 장편소설 `바다와 독약`(창비)이 출간됐다.엔도오 슈우사꾸는 전후 일본인에게 드러나는 죄의식의 부재 문제를 일관되게 작품화한 가톨릭 작가로서 초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소설에서는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 포로에게 행해진 생체해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생체해부라는 선정적인 사건을 리얼하게 묘사하면서도 이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죄의식 문제를 깊이 성찰하고 있다.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5월, 미군 B29기가 추락하면서 12명이 포로로 잡히고 그중 8명이 재판 없이 사형선고를 받는다. 큐우슈우 대학 의학부에서는 이 포로들을 생체해부 대상으로 요청하고 군은 이를 받아들인다. 이 작품은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세 등장인물이 어떻게 가담하게 되는지를 중심으로 그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무력감이나 피로감은 오랫동안 이어진 비인간적인 전쟁이 `독약`처럼 퍼져 양심과 정신을 마비시켰음을 말해준다. 작가는 전쟁 같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이성이나 윤리, 합리적 사고가 얼마나 힘없이 무너지고 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소설은 전쟁이 끝나고 10여년이 흘러 한창 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모습을 먼저 보여준다. 새로운 주택지로 이사한 `나`가 기흉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간 의사 스구로는 미군 포로 생체해부 실험에 가담했던 과거를 지니고 있다.암울함과 불안감이 지배하는 2차대전 말기, 오랜 전쟁으로 도시는 폐허로 변하고 사람들의 삶과 마음은 나날이 피폐해져간다. 밤마다 계속되는 공습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이지만 대학병원에서는 차기 의학부장 자리를 두고 권력다툼이 한창이다. 미군에 대한 생체해부 역시 이러한 권력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다.작가는 스구로, 토다, 우에다라는 세 인물이 어떻게 생체해부에 가담하게 되는지를 중심으로 그들 내면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의학도인 스구로는 양심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생체해부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실험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소심한 스구로는 불참을 선택하지 못한다. 이런 그의 태도에는 체념과 무기력이 자리하고 있다. 깨진 파편과 같이 미약한 인간은 넘실대며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맞설 수 없으며 검은 바다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체념은 동료인 토다와 간호사인 우에다에게도 공통적으로 보인다. 우에다는 결혼 후 아기를 사산한 뒤 부정을 저지른 남편과 이혼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인물로 별다른 가책 없이 생체해부 실험을 돕게 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력감이나 피로감을 느끼는데 오랫동안 이어져온 비인간적인 전쟁이 `독약`처럼 퍼져 양심과 정신을 마비시켜버렸음을 말해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14

삶과 존재에 대한 치열한 반성

독일의 유명한 문학평론가이자 서평가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비견되는 작가”라고 평했으며, 스페인 비평상(스페인), 로물로 가예고스 상(베네수엘라), 페미나 국제문학상(프랑스), 임팩 더블린 문학상(아일랜드), 넬리 작스 문학상(독일), 몬델로 문학상(이탈리아), 유럽문학상(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문학상을 싹쓸이한 스페인 작가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가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소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남미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물로 가예고스 상` 수상작으로 탐정소설과 철학 에세이라는 두 장르의 기법에 바탕을 두고 구성된 소설이다. 사랑과 죽음에 관한 수많은 사색과 성찰을 비극적이면서도 코믹한 말투로 진지하면서도 가볍게 다루며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독자를 이끈다.드라마 작가이자 대필 작가인 빅토르는 사랑을 나누기 직전 숨을 거둔 여인 마르타의 집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운 뒤 떠난다. 마르타의 가족은 그녀가 죽을 때 혼자가 아니었음을 눈치 채고, 그녀의 남편 데안은 그 밤에 마르타와 함께 있던 사람을 찾는다. 한 달 뒤 자신이 누구인지 숨긴 채 마르타의 가족에게 접근하고 마르타의 여동생 루이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하는데….스페인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세계 유명 문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특유의 성찰적이고 시적인 문체로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가다. 이른바 `형이상학적 스릴러`라는 마리에스 소설 특유의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는 확실해 보이는 삶 너머에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삶을 주관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불확정적인 것들로 가득 찬 인간 존재에 대한 관조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전한다.사실 사색과 성찰이 포함돼 느리게 진행되는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고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끄는 기발함으로 내면적 성찰에 중심을 두는 소설의 단조로움을 파괴하고, 이로 인해 독자가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우리의 삶과 존재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라는 성찰적인 내용을 스릴러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이 비범한 작품은 문학사의 한 장을 장식할 현대의 명작으로 남을 것이다.인상적이면서 동시에 궁금증을 일으키는 제목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에서 인용한 문장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14

김동리와 함께 보낸 삶 이야기

“소재는 자전적이지만 나는 나 자신이나 김동리에 대해서 가능하면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인간성의 깊이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무한유(無限有)한 인생의 심오함을 소설로 담아내고 싶었다.”- `꽃들은 어디로 갔나`작가의 말 중한국 문단의 거목이었던 소설가 김동리(1913~1995)의 세 번째 아내, 30대에 혜성같이 나타나 이상문학상을 받은 화제의 여성 작가 서영은(71)씨의 자전적 장편소설`꽃들은 어디로 갔나`(해냄)가 출간됐다.문학을 통해 구도(求道)의 길을 걸어온 서씨가 인고(忍苦)의 사랑을 그린 이 책은 그가 김동리와 함께 보낸 지난한 삶을 픽션으로 옮겼다.서씨는 마치 자신과 김동리를 제3자인 것처럼 3년여 결혼 생활을 무심하고도 담담한 문체로 풀어내며 둘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든다.30대에 문단에 등단, 이상문학상과 연암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던 서씨는 44세 때 김동리 선생의 세 번째 아내가 됐다. `등신불` 등 수많은 소설을 발표해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으로 불리던 김동리 선생의 당시 나이 74세였고 두 번째 아내 손소희 여사를 사별한 후였다. 결혼생활은 3년 만에 끝났지만, 이들의 결혼은 당시 문단의 대단한 화제였다.삶의 근원과 존재론적 슬픔을 그려낸 서씨의 작품세계는 1968년 등단한 이래 46년간 이어져왔다. `그녀의 여자` 이후 14년 만에 출간하는 일곱 번째 장편인 이번 신작에서도 작가는 남녀의 사랑을 넘어선 깨달음의 경지를 이뤄낸다. 작품의 일부는 2004년 `작가세계`(서영은 특집)에 게재된 바 있다. 소재는 자전적이지만 오랜 세월을 통해 정련된 3인칭 서술의 어조는 무연(無緣)하기까지 하며, 작가 스스로도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작가로서 삶의 진실, 인간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노라고 밝혔다.소설은 두 번째 아내와 사별한 70대 노인 박 선생의 세 번째 아내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40대 여인 강호순의 내면을 3인칭 시점으로 그린다. `50, 60대 시절, 대학에서 맡고 있던 직함 외에도, 중요한 직함만 일고여덟 개 이상`이었던 남자의 외도 상대였다는 것만으로도 호순의 사랑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다. “우리 박 선생 불쌍한 사람이야. 잘 지켜줘”라는 말을 남긴 뒤 세상을 떠난 전처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호순은 아내로서 응당 누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채 그늘과 구석을 오가며 삶을 견뎌 낸다.이념 지향적 문학이 주도하던 7~80년대, 서영은 작가의 작품들은 개성적이고 이채로운 공간을 구축한 정신적 모험이었다고 평가된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1983년, 컬러TV와 프로스포츠 등으로 독서문화가 위축되고 산업화에 발맞춘 처세서와 대중소설이 쏟아지던 때에 작가는 근대적 합리주의와 물신주의의 반대편에서 삶 자체가 안고 있는 시련을 평범한 일상 안에서 `실천`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속물적 세계에서 `참된 나`의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를 보여준 첫 단편 `교(橋)`와 세속의 허무와 무의미를 극복하는 `사막을 건너는 법` 그리고 `관사 사람들`에서 드러난 순수한 생명력이 `먼 그대`에 이르러 고통(사막)과 극복(물)의 힘을 함께 품은 불사의 낙타가 됐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신작 `꽃들은 어디로 갔나`의 주인공 호순에게서도 구현된다.▲ 서영은 소설가`생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담금질하는 그녀는 한 남자의 생애와 비속한 일상을 포용함으로써 현실을 전복해 나간다. 성공한 남자의 세속적 외관을 떠받치는 `순결한 안감`이자, 나약해진 그를 보듬는 강인한 보호막이기도 한 호순은 `먼 그대`의 `낙타`를 더욱 다면적으로 드러낸다.`생의 가시밭길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마침내 자존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발견한` 주인공의 초극적 자아는 인생의 참뜻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삶의 의지를 북돋는 돌파구가 되어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07

떼어낸 만큼 온전해지는 인생

1989년 등단 이래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 간명하고 절제된 형식으로 생명이 깃든 삶의 표정과 감각의 깊이에 집중해온 나희덕 시인이 `야생사과`(2009) 이후 5년 만에 일곱번째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무한 허공을 향해 마른 가지를 뻗는 나무에서 저 무(無)의 바다 앞에 선 여인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이번 시집에는 죽음의 절망과 이별의 상처를 통과한 직후 물기가 마르고 담담해진 내면에 깃들기 시작하는 목소리와, 자신이 속한 세계 전체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조용하고도 결연한 행보가 가득하다. “떼어낸 만큼 온전해지는, 덜어낸 만큼 무거워지는 이상한 저울, 삶”(뒤표지 시인의 산문)을 온몸으로 부딪쳐온 시인은 이제,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어쩌면 존재의 시원인 깊고 푸른 바다에서 시인이 만나는 무수한 말들과 그가 내보낸 한 마리 말, 이들의 상호순환적인 움직임은 해변에 이르러 부서지는 흰 포말처럼, 무의 허공으로 사라지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도약으로 볼 수 있다.(남진우, 시인·문학평론가) 그 도약은 “무언가, 아직 오지 않은 것”(무언가 부족한 저녁`)처럼 어느 날 찾아드는 목소리일 사랑에의 희구, 궁극적으로 시인이 쓰고자 하는 한 편의 시를 향한다.첫 시집 `뿌리에게`를 필두로 등단 초기에 자기희생과 소멸까지 감내하며 묵묵히 포용하는 대지와 초목의 은밀한 교감 그리고 그 생성의 궤적에 주목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의 첫 장에 한 그루의 나무로 자신을 설정하고 마를 대로 마른 가지의 이미지에 스스로를 투영한다. “나부끼는 황홀 대신/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달라는(`어떤 나무의 말`) 간절한 호소는 언뜻 내적 세계에 봉인된 시적화자의 소멸과 쇠락을 향한 죽음충동으로 읽힐 수 있다. 최근 정치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온 사건들에 대한 감회를 담는 등(`아홉번째 파도`) 주로 2부와 3부에 안타까운 죽음과 상실의 시간들(“피에서 솟구친 노래, 모래언덕을 잃어버린 파도”-`들리지 않는 노래`)이 산재해 있다.“말들이 돌아오고 있다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이 해변에 이르러서야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07

근원과 순수 향한 길고 깊은 앓이들

곽효환 시인의 새 시집 `슬픔의 뼈대`(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시인은 앞서 출간한 두 시집 `인디오 여인`과 `지도에 없는 집`을 통해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모든 실제적 욕망들을 차근차근 비워내며 처음의 포용력만을 남기는 미학을 추구해왔다. 곽효환은 삶의 신산한 풍경에 가려진 순수에게 손 내밀고 격변의 틈에서 신음하는 근원을 부축하고자 한다. 그러나 시인이란 구원자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가깝다. 그러므로 무자비한 개발 논리, 갈등만 쌓여가는 사회, 자본에 눈먼 욕망들 앞에서 수없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시인은 “남들보다 빨리 움츠러들고, 남들보다 소심하게 반응지만 대신 먼저 아프고 오래 앓고 마지막까지 질문한다”고 고백한다. 이번 시집의 예순여섯 시편들은 시인이 그렇게 주저하고 망설이며 다가간 고통의 중심에 서 있다.곽효환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응시하는 시선과 자주 마주친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포진해 있는 비합리를 바라보는 그의 동공은 매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천안함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서쪽 바다`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물기둥`(`늦게 핀 꽃들의 저녁`)이나 종로 일대의 재개발 풍경(`피맛길을 보내다`) 앞에서 시인이 체험하고 있는 것은 짙은 무기력이다. 시인의 번뇌는 `도심의 저녁 식사`에서 좀더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대결할 상대는 `창밖 하늘 아득한 곳까지 닿아 있는 타워크레인`처럼 위압적이다. 그에 비해 시인은 가장 낮은 곳, 텅 빈 식당에 홀로 앉아 있는 나약한 사무원일 뿐이다. 시인은 소리 없이 반복해 외친다,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윤동주를 떠올린다면 비약일까. 그러나 곽효환이 `병상일기`에서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라고, 윤동주의 `병원` 중 한 구절을 인용하며 한탄한 것을 그저 가볍게 보아 넘길 독자는 없을 것이다.“저물녘 텅 빈 식당 한켠에 구겨져 앉은 그림자 하나삼켜지지 않는 입안 가득한 밥을 씹는다홀로 마주한 밥상의 서걱거리는 밥알들씹다 만 깍두기처럼 겉도는 말들떠도는 말들과 부유하는 진실을 삼키는여름날, 목메는 도심의 저녁 식사”-`도심의 저녁 식사`부분시인으로 하여금 이토록 아픈 현재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힘은 어쩌면 미래에 대한 낙관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낙관의 근거는 시인이 자주 호출하는 북방의 곳곳에 새겨져 있다. 자연 지리상의 북방은 사시사철 폭설과 한파를 견뎌야 하는 땅인가 하면 한없이 메마르고 거친 고통의 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곳은 척박하지만 인정 넘치는 삶의 터전이며 고달프고 벅찬 이야기가 두텁게 쌓여온 곳, 세상살이의 따스한 인간미가 살아 있는 땅, 사랑의 궁극이 숨 쉬는 장소이며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시원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07

詩로 읽는 삶의 지혜와 철학

“나이들어 눈 어두우니”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풀과 나무 사이에도 보이고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별` 전문문단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올곧은 `원로`로서 익숙하고 친근한 이름 석자만으로도 든든한 버팀목으로 우뚝 서 있는 신경림 시인이 신작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을 펴냈다. 시인의 열한번째 신작 시집이자 `낙타`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한평생 가난한 삶들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들을 고졸하게 읊조리며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건네는 “맑고 순수하고 단순한 시편들”(이경철`발문`)을 선보이며, 지나온 한평생을 곱씹으며 낮고 편안한 서정적 어조로 삶의 지혜와 철학을 들려준다. 올해 팔순을 맞는 시인은 연륜 속에 스며든 삶에 대한 통찰과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시편들이 묵직한 울림 속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가슴 저릿한 전율과 감동을 자아낸다. 등단 59년차에 접어든 시력(詩歷)의 무게와 깊이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서러운 행복과 애잔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시집”(박성우, 추천사)이다.“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하늘에 별이 보이니/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별` 전문)한평생 시의 외길을 걸어온 시인은 이제 황혼의 고갯마루에 이르러 “지금도 꿈속에서 찾아가는, 어쩌다 그리워서 찾아가는”(`나의 마흔, 봄`) 지난날을 돌이키며 빛바랜 추억의 흑백사진 속으로 걸어들어가 그리운 얼굴들을 현재의 삶 속에 되살려낸다. “서른해 동안 서울 살면서” 집에서 시장까지의 짧은 길만 오가며 사셨지만 “아름다운 것,/신기한 것 지천으로 보았을” 어머니(`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죽어서도 떠나지 못할” 산동네에서 살다 돌아가셨지만 시인의 마음속에는 그곳에서 “지금도 살고 계신” 아버지와 “아들도 몰라보고 어데서 온 누구냐고 시도 때도 없이 물어쌓”던 “망령 난” 할머니(`안양시 비산동 498의 43`), 그리고 “부엌이 따로 없는” 무허가촌 사글셋방에서의 가난한 삶 속에서 일찍이 사별한 아내. 그들은 이제 모두 떠나고 “세상은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꿈인 듯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아득한 그리움에 젖는다.세상은 바뀌었지만, 돌아다보면 지나온 길이 그립고 아름답게 빛난다▲ 신경림 시인어머니와 달리 “어려서부터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늘 떠돌았던 시인은 낯익고 익숙한 것들 속에서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역전 사진관집 이층`)을 찾듯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고 찾으려고 하루하루 “활기차게” 살아간다. “아주 먼 데./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그 먼 데까지 가자고” 멀리 떠나기도 하지만 종내는 “사람 사는 곳/어디인들 크게 다르”지 않고 “아내 닮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자식 닮은 사람들과 아웅다웅 싸우면서”(`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살아가는 모습은 한결같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별들이 쌔근쌔근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초원의 적막 속에서 문득 “세상의 소음”(`초원`)이 그리워진 시인은 “너무 오래 혼자”서 “차를 타고 달려온 길을/터벅터벅 걸어서/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이쯤에서 돌아”(`이쯤에서`)가고자 한다.자연의 순리대로 세월은 가고 시인은 나이가 들었다. 시인은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다시 느티나무가`)고 말한다. 그러나 “하늘을 두려워 않고 자연을 넘보면서 뿌린 오만의 씨앗”(`원 달러`)으로 인한 재앙과 “매몰찬 둑에 뎅겅 허리를 잘리기도 하는”(`담담해서 아름답게 강물은 흐르고`) 강을 바라보면서 마구잡이 환경 파괴에 비판의 시선을 내쏘기도 한다.일찍이 문학평론가 최원식이 “우리 시대의 두보(杜甫)”라 일컬었듯이 신경림 시인은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민초들과 더불어 저잣거리에 섞여 살면서 하찮은 존재들의 슬픔과 한, 그들의 굴곡진 삶의 풍경과 애환을 질박하고 친근한 생활 언어로 노래해온 `민중적 서정시인`으로서 자리매김해왔다. “화려한 것들과 찬란한 것들”(`섬`)의 볕바른 중심에 서 있기보다는 “늘 음지에 서”(`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서, “세상에서 버려져 살아온 사람들”(`빨간 풍선`)과 “꽃 같은 생애와는 무관할 것 같은 민중의 헐거운 삶”(박성우, 추천사)을 끌어안으며 “언 손 굽은 등 두루두루 어르면서”(`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위하여`) “집권자들의 횡포에 삶의 뿌리를 잃”은 “가난하고 힘없는”(`인생은 나병환자와 같은 것이니`) 외로운 존재들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언제나 더없이 따뜻하기만 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24

`개혁 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 생애 그려

중국 `개혁 개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덩샤오핑의 인생과 국가 전략을 담은 `덩 샤오핑 평전`(민음사)이 출간됐다.세 번 쓰러졌으나 세 번 다시 일어서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오른 덩샤오핑(1904~97)은 근대 이후 중국을 지배한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사명을 완수했다. 바로 중국 인민을 부유하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길을 찾은 것이다. 저자 세계적인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걸(84)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정부 인사, 당 역사 연구자, 가족, 주변 인물 등과의 인터뷰와 최근에 공개되거나 발굴된 각종 문서 등 방대한 자료를 통해 덩샤오핑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그의 생애와 맞물린 중국의 전환기를 세밀히 그려 낸다. 10년간 저자의 모든 경험과 연구 성과를 쏟아부은 역작 `덩샤오핑 평전`은 비단 시대를 바꾼 걸출한 인물의 전기일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한 시대를 이끈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직조하며 풀어내는 웅장한 중국 현대사다.이 책은 덩샤오핑이라는 한 걸출한 인물이 살아온 삶을 통해 그가 지나온 중국의 현대사, 그가 만들어 낸 중국의 현대사를 그려 낸다. 특히 덩샤오핑이 광대한 중국 대륙에 불러일으킨 개혁의 바람을 집중 조명하여 전체 분량의 3분의 2를 할애할 정도로 매우 깊게 다루고 있다. 중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거대한 개혁이 어떻게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을 통해 실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곧 현대 중국이 어떻게 이룩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곧은길이다.덩샤오핑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개괄한 1부에서는 그가 프랑스 유학, 대장정, 항일 전쟁, 국공 내전 등을 경험하면서 어떠한 자질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때의 실전 경험이 그의 미래 구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조망한다.2부에서는 마오쩌둥 체제하에서 쌓은 실무 경험과 세 번의 실각과 복귀 등을 다루면서 덩샤오핑 시대 이전에 어떠한 기류가 형성돼 있었는지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화궈펑이 이미 덩샤오핑 이전에 마오쩌둥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으며 중국을 개방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음을 밝힌다. 화궈펑은 계급 투쟁보다 현대화에 초점을 맞췄고 현대 기술 습득을 위해 대표단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경제 특구를 처음 설치하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면서 자신만이 지닌 뛰어난 정치 감각과 지도력으로 돌출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덩샤오핑을 `총설계자`가 아닌 `총지배인`으로 일컬어야 한다고 단언한다.이어 3~5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덩샤오핑이 중국을 이끌어 나간 20년간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마지막 6부에서는 덩샤오핑의 후계자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와 중국이 맞이할 미래를 생각해 본다.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책 계승을 공언한 시진핑 주석이 덩샤오핑을 능가할 만한 최강의 권력자로 대두된 지금, 과연 중국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덩샤오핑 시대를 통해 전망한다.`덩샤오핑 평전`은 2011년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큰 주목을 받으면서 현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언론의 극찬을 받았고 각계의 추천도 이어졌으며 세계 최고 논픽션 상 중 하나인 라이어넬 겔버 상(2012)을 수상하기도 했다. 중국 본토에서는 학생 시위와 톈안먼 사건을 다룬 2개 장(20~21장)이 축소되고 `덩샤오핑 시대의 핵심 인물` 부분은 삭제된 채 2013년 번역 출간됐으나 65만부 이상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24

“부부는 교집합을 가진 합집합”

`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애니북스)은 여자들의 대변인으로 떠오른 마스다 미리의 신작이다. `수짱 시리즈`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작들이 30대 싱글 여성들의 삶과 고민을 주로 다루었던 것과 달리 `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은 치에코 씨와 사쿠짱 두 부부를 통해 “함께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속에 등장하는 치에코 씨와 사쿠짱은 결혼 11년차 부부다.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는 치에코 씨와 집에서 구두 수선 가게를 운영하는 사쿠짱은 아이 없이 둘이서 살아간다. 작품 속에 그려지는 두 사람의 일상은 매우 평범하다. 함께 밥 먹고, 장 보고, 대화하고, 일을 한다. 때로는 싸우기도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이좋은 보통 부부의 모습이다.그런데 두 사람의 모습은 “부부는 일심동체” 라는 말과는 어쩐지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이 부부의 생활 속에선 “부부는 함께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매일 퇴근길에 역에서 만나 저녁 장을 보며 데이트를 즐기는 사이좋은 부부이지만, 새해 연휴를 쇠러 고향으로 떠날 때는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서로 가장 원하는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각자의 본가에서 보내는 것이 더 좋겠다며 결혼 전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이 부부에겐 혼자 커피를 마시러 가거나 산책을 즐기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부부는 닮아간다”고들 하지만 치에코 씨와 사쿠짱은 서로 닮지도 않았다. 서로 성격과 습관은 물론 사소한 점 하나하나도 모두 다르다. 치에코 씨는 섬세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꾸밈없이 표현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매 순간을 소중히 음미하고자 한다. 반면 사쿠짱은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하고 느긋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치에코 씨처럼 순간에 의미를 두진 않지만,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이렇게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은 두 사람인지라 때로는 의견이나 감정의 충돌이 벌어지기도 한다.하지만 이 부부는 서로 간의 차이를 현명하게 맞추어나갈 줄 안다.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일심동체”보다는 “교집합을 가진 합집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24

“기억 정화하면 행복해져요”

`하루 한 번 호오포노포노`(판미동)는 고대 하와이인들의 문제 해결법 `호오포노포노`를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이다. 이 책은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의 후속작이다. 전작은 저자 조 비테일이 호오포노포노에 입문하는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 특징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조 비테일의 스승이자 호오포노포노의 최고 권위자인 휴 렌 박사가 호오포노포노의 원리와 실천 방법을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특징이다. 1장 만남, 2장 원리, 3장 실천, 4장 QA로 구성된 목차에는 이러한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전작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이 입문서였다면, `하루 한 번 호오포노포노`는 본격 실천을 위한 안내서인 셈이다.그렇다면 호오포노포노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호오포노포노는 기억을 정화해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고대 하와이인들의 치유법이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현재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제거하면,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역할과 공간이 주어지고 그 결과 부와 건강, 행복이 자연스레 뒤따른다는 것이 호오포노포노의 핵심 원리다. 이를 위해서는 매일 자신을 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 한 번 호오포노포노`는 그 실천을 돕는다. 휴 렌 박사는 `사랑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용서하세요`라는 네 마디 말을 반복함으로써 기억을 정화할 수 방법을 알려준다. 이 외에도 다양한 정화 도구를 소개하며 호오포노포노를 쉽게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아이오와 대학에서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휴 렌 박사는 1982년에 현대 호오포노포노의 창시자인 모르나 날라마쿠 시메오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하와이 주립 병동의 임상 심리학자로 부임하게 됐다. 이 병동은 살인, 강간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장애인을 수용한 곳으로, 폭행이 끊이지 않았으며 증상이 회복돼 병동을 나가는 수용자도 드물었다. 3년 뒤 이 병동에 기적이 일어났다. 병이 치유돼 퇴원하는 환자가 줄을 이은 것이다. 현재 이 병동은 폐쇄된 상태다. 이 모든 것을 위해 그가 한 일은 오로지 호오포노포노로 정화한 것뿐이다. 휴 렌 박사가 호오포노포노의 최고 권위자라는 명성을 갖게 된 배경이다.하와이인들의 오랜 지혜를 전 세계에 전하고 있는 심리치료사, 이하레아카라 휴 렌. 이제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별난 강의를 들어 보자. 휴 렌 박사의 지침을 따라하다 보면 `하루 한 번 호오포노포노`라는 멋진 습관을 갖게 되어, 어느덧 자신도 놀랄 만큼 변화한 일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하와이 말로 호오포노포노는 완벽해지기 위해 오류를 수정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오류`와 `잘못`은 잠재의식 속에 있는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고대부터 하와이인들은 동료들 간에 문제가 생기면 집단으로 모여 이러한 기억들을 정화해 왔다. 이를 집단이 아닌 개개인이 할 수 있는 형태로 현대화한 것이 `셀프 아이덴티티 호오포노포노(Self Identity ho`o ponopono: SITH)`다. 이 책의 저자인 휴 렌 박사는 현대화된 호오포노포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호오포노포노에서는 잠재의식 속에 있는 `기억`이 삶을 왜곡시킨다고 여긴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축적돼 온 기억들이 인간의 행동과 삶에 반영되어 수많은 장애와 고뇌를 일으키고 있다. 기억을 제거해 버리면 이러한 고민과 고통은 사라진다. 호오포노포노에서는 이를 `정화`라고 부른다. 잠재의식 속의 기억을 제거함으로써 당신은 본래의 모습과 삶을 되찾아 무한한 자유와 풍요,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또한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세상도 바꿀 수 있다. 한 마디로 현대 호오포노포노는 `누구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8p.)호오포노포노는 회개와 용서, 변환의 세 단계로 이뤄져 있다. 기억을 정화하려면 회개와 용서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를 위해 “사랑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용서하세요”라는 네 마디 말을 반복해야 한다. 이 책의 3장에는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는 호오포노포노 실천 노하우가 담겨 있다.`사랑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용서하세요`를 마음속으로 습관처럼 되뇐다. (93p.)네 마디 말을 다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한다는 한 마디로도 충분하다. (93p.)사랑한다는 말이 하기 어려우면 소중하다고 말해도 된다. (94p.)반드시 진심으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컴퓨터에서 삭제 버튼을 누를 때 감정을 담아 누르는 사람은 없다. 버튼을 누르듯 마음속으로 습관처럼 말을 되뇌기만 해도 충분하다. (161p.)에너지를 활성화하는 `하(ha) 호흡법`을 해 본다. 의자에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은 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기를 일곱 번 반복한다. (111p.)/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7

꽃잎같은 손이 세상 헤집고 꽃이 되다

1987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한 윤제림(서울예술대 교수) 시인이 `그는 걸어서 온다`이후 5년 만에 찾아왔다. 그의 여섯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그동안 보여준 `낡거나 모자란 것`에 대한 관심, 연기론(緣起論)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삶에 대한 연민을 고스란히 담으면서도 타자의 얼굴과 시선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응답, 익숙한 풍경의 바깥을 향한 관조와 통찰을 더욱더 농밀하게 보여준다. 특유의 이야기성이 강한 시들 역시 만날 수 있다.`새의 얼굴`(문학동네)은 총 67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담겼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여행에 관한 시편들이 적지 않은데, 1부에 포진한 여행지는 2부에서 4부로 흘러가면서 자연 일반과 인생의 희로애락으로, 김소월, 박목월, 오규원부터 배병우 함민복까지 실존인물에 대한 회상과 인연에 대한 소회로, 마지막 4부에서는 별주부, 토끼 부인, 이몽룡씨 부인 등 시인 특유의 상황극적 시로 이어지며 의미와 논리로 가득찬 세계를 일순간에 뛰어넘는다.여행지에서 시인은 그의 눈에 들어오는 이국적인 풍광이나 그가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정서적 감흥에 심취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만나고 마주치고 의식한 시선들, 내면성에 갇혀 있던 `나`를 자극하고 다른 시공간으로 이끌고 가는 `얼굴`들이야말로 `내`가 다 볼 수 없는 것들로 나아가게 한다.“대여섯 살 먹은 여자아이와 서너 살 사내아이어린 남매가 나란히 앉아 똥을 눈다먼저 일을 마친 동생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쳐든다제 일도 못 다 본 누나가제 일은 미뤄놓고 동생의 밑을 닦아준다손으로,꽃잎 같은 손으로안개가 걷히면서 망고나무 숲이 보인다인도의 아침이다”-`예토(穢土)라서 꽃이 핀다` 전문예토의 `예(穢)`는 `똥`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흔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예토라고 한다. 똥들이 가득한 이 땅, 누나에게 똥을 눈 밑을 맡긴 채 엉덩이를 `쳐들고` 앉아 있는 동생과 그런 동생의 밑을 닦아주는 누나. 그 “꽃잎같은 손”은 예토를 헤집고 한 송이 꽃이 되어 시인의 눈앞에 피어난다.“집으로 가는데,큰물에 떠내려왔다가판문점 넘어가는 북쪽의 사람들처럼이쪽의 옷은 훌렁훌렁 벗어던지고만세를 외치며냅다 뛰어 달아나지 못하고 -`하구의 일몰` 전문이 시의 주체가 `하구의 일몰`에서 본 것은 다만 풍경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약한 자들의 모습이다. 이 세계에 자신의 몫이 없는 이들의 모습이 해와 함께 서서히 진다.“어떻게 생긴새가저렇게 슬피울까딱하고 안타깝고궁금해서밤새 잠을 못 이룬 어떤 편집자가자기가 만드는 시집에는꼭시인의얼굴을넣어야겠다고생각했을 것이다”-`새의 얼굴`전문`딱하고 안타깝고 궁금해서` 슬피 우는 새의 얼굴이 궁금하다. 타자의 울음을 듣고 그 얼굴을 궁금해하는 것. 타자의 울음을, 슬픔을 대면하고 응답하고자 하는 것. “윤제림의 시쓰기에서 힘없고 연약한 얼굴들, 그 무방비의 얼굴들 깊숙한 곳에서 만나는 것은 이 얼굴들의 `가늠할 수 없음`이다. 윤제림 시 특유의 위트마저도 결국 감동스러운 것은 이 연약한 존재들에 대한 느꺼운 감수성 때문이다”(이광호, 해설에서) 그리하여 시집에 실리는 시인들의 얼굴은 슬프게 우는 바로 그 새의 얼굴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7

어머니 위해 부르는 사모곡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속살을 보여줘 온 강형철 시인이 십여 년 만에 펴낸 네 번째 시집 `환생`(실천문학)이 출간됐다. 이번 시집에는 강형철 시인의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매개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노래한 시편들이 실려 있다. 독자들은 이번 시집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 지쳐 놓치고 있던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지켜내야 할 삶의 근본임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어머니를 위해 부르는 우리 세대의 사모곡이라고 할 수 있다.먼저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통해 바라본 환생은 정신이 다시 살아남을 의미한다. 간혹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정신을 통해 어머니와 시인은 예전의 관계성을 회복하며 그것은 모자간에 형성된 시간의 지층을 반추하는 일이다. 이는 “어둑한 집 안의 오후가 환해”(`환생`)지는 시간이다. 하지만 과거의 반추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피가 뜨거웠던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느라 고초를 겪었던 아들을 생각하곤 다시 그 아들이 잡혀갈까봐 걱정하는 노모가 있다.이 시집은 시인이 발표한 지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시들과 최근의 시들을 합쳐 총 4부로 묶었다. 1부는 나름으로 전체적인 이야기를 모았고 2부는 어머니와 살고 있는 이야기를 모았다. 3부와 4부는 최근에 생각하는 것들을 시로 쓴 것들이다. 시인은 특히 2부 시편들은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웃으면서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품들로 엮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7

“진정한 이해·사랑 일깨워줘”

대산문학상과 현대문학상을 거머쥐며 뛰어난 작품세계를 인정받고 있는 작가 김숨의 네번째 소설집 `국수`(창비)가 출간됐다. 현대문학상 수상작 `그 밤의 경숙`을 비롯 김숨의 탁월한 소설세계를 보여주는 9편의 작품을 실었다. 가족의 의미를 진중하고도 새롭게 천착하는 진정성과 더불어 현대인이 앓고 있는 분열적 심리에 대한 성찰과 묘사가 지적 각성과 동시에 깊고 풍부한 울림을 선사한다. `국수`는 김숨이 3년 만에 펴내는 소설집이자 그의 열번째 저작이다. 그는 등단 7년 만에 첫 소설집 `투견`을 내놓은 후 누구보다 왕성한 창작열로 매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발표한 작품들은 호평을 받으며 굵직한 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됐고 지난 2013년 장편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로 대산문학상을, `그 밤의 경숙`으로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데뷔 이래 사회의 이면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와 그런 사회에서 망가져가는 관계를 특유의 잔혹한 이미지와 환상적 기법으로 구현한 소설세계로 주목받았다. 또한 주제를 향해 나직하지만 집요하게 나아가는 문장은 그의 작품의 또다른 든든한 축이 되어주었다. 이런 김숨이 이번 소설집에서 더 깊이 집중하는 관계는 `가족`이다. 부부의 갈등과 균열을 사회적 층위와 연결 지어 긴장감 있게 그리고(`막차` `명당을 찾아서` `그 밤의 경숙`),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편한 동거를 기묘한 분위기로 드러내며(`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증오만 남은 부자 관계를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집단 살육의 현장과 중첩시켜 표현하기도 한다(`구덩이`). 그중에서도 `국수`와 `옥천 가는 날`은 전통 서사에 기대어 모녀간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결을 함께한다. “삶의 영원한 화두에 대한 아름다운 천착이 돋보인다”(서영은)는 평을 받기도 한 표제작 `국수`는 외롭고 고단했을 계모의 삶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화해를 이루는 주인공의 심리를 국수를 만드는 일련의 조리 과정에 탁월하게 버무려낸다. 리드미컬하게 문장에 문장을 더하며 촘촘한 서사의 밀도를 이루는 이 작품은 진정한 이해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옥천 가는 날`의 두 자매는 응급차에 어머니의 주검을 싣고 장례가 치러질 어머니의 고향 옥천으로 향한다. 자매가 좁은 공간에서 주검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은 죽음과 삶이 이질감 없이 한데 섞이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자매가 회상하는 그들 가족의 드라마는 서로에게 짐이 되기도 하고 유일한 도피처가 되기도 하는 가족이란 관계의 심연을 들추어낸다.`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는 가족이라고는 혐오하는 개 한마리뿐인 한 노인이 등장한다. 극도의 한파가 들이닥치는 냉골에서 밤을 이겨내야 하는 노인은 부인이 살아생전 데리고 온 개와 함께 있다. 방에 온기를 내뿜는 것이라고는 그 개뿐이지만 노인은 개를 가까이하지 않겠노라 거듭 다짐한다. 그러나 결국 노인이 극심한 추위에 정신을 잃자 그를 살리려 사력을 다하고 온기를 나누어주려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 건 바로 그 개다.▲ 김숨 소설가가족은 사랑으로 묶이기도 하지만, 증오로도 엮일 수도 있다는 걸 김숨은 간과하지 않는다. 같이 사는 시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는 것조차 끔찍해하면서도 시아버지가 남편이 날려버린 재산을 돌려달라고 할까봐 불안해하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의 주인공이나 오랜 시간 함께한 남편에 대한 경멸과 멸시를 숨기지 않는 `막차`의 주인공, 하루가 멀다 하고 어머니와 이혼하라며 전화로 윽박지르는 아들을 둔 `구덩이`의 주인공은 모두 부조리한 관계 안에서 고통받는다. 이처럼 김숨은 자칫 진부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주제를 끊임없이 새롭게 보고 관계의 심연까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진실과 마주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그가 구사하는 단단한 문장과 독자들의 눈을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는 탄탄한 구성과 만나 진정성의 파장을 획득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0

아내 죽음에 얽힌 진실은?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테마를 과학적 상상력과 치밀한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흥미진진하게 풀어 간 `무명인(원제 `게놈 해저드`)`이 출간됐다. 저자 쓰카사키 시로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발표하며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중견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산토리 미스터리 대상 독자상을 수상한 이번 작품은 기억에 문제가 깨달은 주인공이 자신의 진짜 정체성과 아내의 죽음에 얽힌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속도감 있는 전개와 촘촘한 구성을 통해 보여 준다. 기본적으로는 스릴러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본격 추리와 SF의 성격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재미를 배가시킨다.“생일날 발견한 아내의 시체, 그와 동시에 걸려 온 그녀의 전화….기억이 잘못된 걸 깨달은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미유키가 그런 표정을 지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다른 누군가로 절대 착각할 수는 없었다. 그 여자, 거기 죽어 있는 여자는 내 아내였다.”_ 본문 중에서결혼 후 맞게 된 첫 생일, 일러스트레이터인 도리야마 도시하루는 아내 미유키와의 저녁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갈 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그가 집에 도착하여 보게 된 것은 조명이 나간 거실과 열일곱 개의 촛불, 그리고 아내의 시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패닉 상태에서 전화를 받은 도리야마의 귀에 분명 그의 옆에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아내 미유키의 목소리가 들린다.곧이어 형사라고 밝히며 두 남자가 찾아와 도리야마를 추궁하다가 끝내 집 안으로 들어오고 만다. 도리야마는 방금 전만 해도 있었던 아내의 시체가 사라진 것에 당황한다.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전화로 도리야마에게 두 남자의 정체가 사실 형사가 아니며 그를 납치하러 온 것이니 당장 도망치라고 지시한다. 추격을 피하다가 우연히 오쿠무라 지아키라는 여성의 도움을 받게 된 도리야마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녀와 함께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직면하게 되는데…./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0

자연의 신비 따르며 평화롭게 사는 `우리`

전쟁을 찬미하고 나치 집권에 일조하는 글을 썼다고 비난받는 동시에, 나치에 비판적인 작가로 간주되기도 하는 에른스트 윙거(1885~1998)의 대표작 `대리석 절벽 위에서`(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지식인 한 명 한 명에게 정치적 결단과 결정이 요구되는 시기를 살며 민감한 정치적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던 동시에 독보적인 미학적 성과를 보여준 에른스트 윙거는 독일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윙거는 세계적 명성에 있어서도 이미 오래 전에 20세기 독일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 꼽혔지만 한국에서 그의 작품이 출간되기는 이번에 처음이다. 그것은 니체의 영향을 받은 초기 윙거의 반민주주의적 사상으로 인해 독일에서도 그의 문학적 가치가 다소 늦게 인정된 데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윙거 정도의 명성과 영향력을 지닌 20세기 세계 문학 거장이 국내에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케이스는 앞으로 더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윙거는 국내에 미지로 남아 있는 최후의 20세기 거장이었다고 할 만하다.땅을 일구며 영혼과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지키며 살아가는 곳, 마리나. `나`와 오토 형제는 이 목가적인 땅의 대리석 절벽에서 식물계를 연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산림감독원장과 그가 이끄는 마우레타니아 인들의 횡포로 이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은 피로 얼룩지게 된다. 1939년에 발표한 `대리석 절벽 위에서`는 나치 정권이 주도한 폭력 시대의 역사적 반성을 담았다고 해석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정작 윙거는 `산림감독원장`이 히틀러 한 사람을 지칭한다기보다 지구상에서 사라진 적이 없는 독재자의 한 전형이라고 말한다.시대를 추정할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무법의 독재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이 나치 정권을 겨냥한 것으로 한정된다면,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돼버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에도 양상을 달리한 채 폭력과 압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 역사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언제 어디서든 당대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이 짧은 장편 소설은 영혼의 힘과 자연의 신비를 따르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우리`(화자인 나와, 함께 식물계를 연구하는 오토 형제)가 잔인한 독재자 산림감독원장 무리의 횡포에 맞서 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의 장소 혹은 인물 들이 실제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과 뚜렷한 대응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먼저 `나`와 `오토 형제`가 기거하는 운향초 암자는 윙거가 동생 프리드리히 게오르크와 2차대전 직전에 살았던 위버링겐을 그린 것이며, 마리나의 풍경은 보덴 호수 지역을 닮았다고 한다. 한편 용기와 호기를 갖추었으나 결국은 잔인한 폭력 위에 권력을 구축하는 산림감독원장은 히틀러나 스탈린, 혹은 헤르만 괴링을 암시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 나치 정권하에서 문화를 통제하던 이들은 즉시 윙거를 체포하고 강제수용소로 보낼 것을 건의했으나 히틀러가 직접 말렸다는 에피소드도 전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0

“몽골은 잃어 버렸던 그리운 풍경”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태일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문학동네)가 출간됐다. 2006년 2월부터 2007년 1월까지 한 해 동안 머물렀던 몽골에서의 나날살이를 총 5부, 60편의 시로 오롯이 담아냈다. “언어의 생김새와 색깔, 소리 등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것의 맛을 적절하게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은 `풀나라` 이후 11년 만에 낸 시집이라 더욱 관심을 모은다.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말결에 대한 뛰어난 감수성을 바탕으로 낯선 몽골이라는 공간을 우리말의 리듬 속에 함축적으로 녹여내어 시적 서정의 공감대를 더욱 깊고 풍요롭게 만든다. 박태일 시인은 몽골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존에 통용되는 영어식 표기보다는 실제로 생활하며 듣고 말했던 현지 발음에 가까운 살아 있는 표기를 사용했다.경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지역어와 고유어 등을 살리는 노력에 공들여온 그이기에 이번 작업이 더욱 의미가 깊다.“가을 가랑잎이 겨울까지 흘러왔다 얼음 속에 켜켜 한소끔 몰려 앉았다 호롱불 눈을 밝힌 소들이 강 위로 건너온다 어미소가 송아지를 기다려 돌아섰다 다시 걷는다 큰 키 버들숲이 이고 진 홍싯빛 노을 강우물 번지 위쪽에선 늙은 내외 기러기가 물을 긷는다 쩡 한 획 굽은 톨 강이 등짐 내려놓는다 쩡 어디선가 말 뼈다귀 찾아 문 검둥개가 지나다 그 소리에 놀라 선다.” ―`강우물`전문“나무 장작 조개탄 장수 다 돌아간 골짝버스도 사람을 내려놓고 문을 잠근다흰 낙타 털 흩뿌리는 밤기울어진 연통을 안고아이들이 게르 위로 날아오른다능선에는 큰 키 낙엽송이 서넛텅 어느 눈벼랑이 갈라졌나개가 짖는다잠결에 젖을 물리는 어머니.”―`백야` 전문▲ 박태일 시인단음의 의성어들은 원시의 생명력을 드러내며 `도끼` 처럼 강렬하게 시적 화자의 내면을 쪼갠다. 그와 함께 시인은, 강을 건너는 “어미소가 송아지를 기다려 돌아섰다 다시 걷는” 풍경이나 잠결에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모습 등 자연의 위협적인 생명력 앞에 놓인 삶의 단면을 능숙하게 접고 펼치면서 특유의 회화적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리하여 어느새 몽골은, 잃어버렸던 그리운 풍경이 돼 마음에 조용히 걸어들어온다.“오츨라레는 몽골 말로 미안합니다톨 강가 이태준열사기념공원 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고벅뜨항 산 인중까지 관광 게르 식당이 번져올라봄부터 가을 양고기 반달 만두가 접시째 떠다니는데오츨라레 허리 세게 눌러서 아픈 발가락 당겨서당신 나라와 당신 말씨와 당신 복숭뼈를 밟아서”―`오츨라레 오츨라레` 부분허나 몽골이 우리가 잃어버린 따뜻한 장면만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가 도입된 몽골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 대자연이나 아직 때묻지 않은 순박한 삶의 모습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왜곡에 그칠지 모른다.문학평론가 이경수가 해설에서 지적한 대로 “어쩌면 몽골에서 본 사막보다 더 막막한 사막에서 살고 있는 시인과 우리에게 몽골의 슬픔과 쓸쓸함은 우리의 나날을 비춰보는 거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4-01-03

신비한 운명의 일곱 가지 이야기

장편소설 `사이보그 나이트클럽`을 통해 현실과 허구의 `익사이팅`한 대결을 보여준 소설가 이명행이 설화적 원형이 풍부하게 함축된 첫 소설집 `마치 계시처럼`(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번 소설집의 작품들을 쓰는 동안 `관계`와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다고 밝혀놓았다. 얽히고설킨 그물 안에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맺어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주치는 애틋한 관계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맺어가는 인연들의 닿음닿음마다 신비로운 운명이 어려 있음을 얘기하는 일곱 편의 소설을 담았다. 소설집의 첫머리에 놓인 `숨결`은 새벽 2시만 되면 모르는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는 치과 의사의 이야기다. 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주인공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댄다. 주인공은 너무나 엉뚱한 이 상황을 생각처럼 쉽게 거부하지 못하고 그가 앓고 있던 불면증은 더욱 심각해진다.`완전한 그림`에는 불현 듯 현실이 숨 막혀 가출을 감행하는 중년 남자가 등장한다. 제목 `완전한 그림`은 홀로그램을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인데, 홀로그래픽 필름의 아주 작은 조각에도 이미지 전체의 정보가 담겨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불발된 인연`과의 옛 기억을 하나하나 채취해가는 남자의 여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표제작 `마치 계시처럼`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는 하얀 소복을 한 기차다. 주인공이 고향에서 유년에 간접적으로 겪은 열차 사고가 중년에 접어들도록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인데,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고자 고향으로 찾아갔을 때 새록새록 돋아나는 기억들이 아프고도 따스하다.뒤를 잇는 `통증` `변신의 끼` `푸른 여로` `국경, 취우령 이야기`를 마저 따라가보면, 삶의 경로를 벗어나 떠돌다가 `마치 계시처럼` 느닷없이 엄습하는 기억들로 하여금 예상하지 못한 통증을 겪어내며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인물들을 계속 만날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03

개성 넘치는 지구촌 요리사들 삶은?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반비)는 미국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등 세계 곳곳의 개성 넘치는 요리사들을 찾아 그들의 삶을 소개한 책이다.일용할 양식을 만드는 요리사들에게 삶과 음식의 의미를 묻는 이 책은 요리사들의 삶과 요리 방식, 음식 철학 자체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다. 산뜻한 유머, 새콤한 기발함, 달콤한 재미, 짭짤한 눈물, 매콤한 아이러니, 뒷골을 짜릿하게 만드는 기이한 인생 역정이 다채롭고 화려한 향연을 펼쳐 보인다.세상에 요리는 많고, 요리사는 더욱 많다. 두메산골이든, 사막이든, 심지어 감옥이든 사람의 그림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음식이 있고 그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가 있다. 요리만큼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소재가 없다면, 요리사에게도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환경이 독특할수록, 거기서 일하는 요리사 역시 남다른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저자 후안 모레노는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이야기를 간직한 개성 넘치는 요리사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미국,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등 나라와 국적을 불문하고 저자가 발굴한 요리사의 리스트는 화려하다. 텍사스 교도소에서 200명의 사형수에게 마지막 식사를 만들어준 요리사가 있는가 하면, 알프스의 두메산골에 있는 700년 된 게스트하우스에서 요리하는 할머니도 있고, 반핵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며 시위자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도 있다.이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세상의 어느 화려한 요리보다도 더욱 흥미진진하다. 이들의 주방에서는 가족에 대한 애증, 친구와의 우정, 가난의 추억, 이룬 줄 알았던 꿈과 뒤늦게 알게 된 인생의 진실들이 지글지글 익어간다. 인터뷰를 이어나가는 동안, 요리와 인생은 어느새 한 덩어리가 되어 페이소스 가득한 이야기가 된다. 저자는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그 이야기에 감칠맛을 더한다.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주방에서 최선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요리사에 관한 책이자, 그들이 주방에서 완성해낸 인생의 깊이에 관한 책이다.책에 등장하는 17명의 요리사들이 서 있는 주방은 다채롭다. 여기에 평범한 주방은 하나도 없다. 각 요리사들이 서 있는 주방은 그 자체로 요리의 목적과 요리사의 인생을 반영한다.이탈리아 출신 요리사 프랭크 펠레그리노가 운영하는 뉴욕의 레스토랑에는 영화`대부`로 그 낭만이 절정에 달했던, 이탈리아 마피아의 추억이 가득 서려 있다. 우간다의 요리사 오톤데 오데라는,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던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의 주방에서 일했다. 스위스 할머니 오타비아 파서가 일하는 `카사 칼라바이나`는 알프스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는,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게스트하우스이며, 케냐의 아기 엄마 페이스 무토니는 나이로비 최대의 쓰레기장인 단도라 쓰레기 집하장 안에 간판도 없는 식당을 열었다.주방이 따로 없는 요리사도 있다. 그린피스의 환경 감시선 `레인보 워리어`를 시작으로, 시위 현장만을 찾아다니며 요리하는 독일인 밤 카트에게는 거리가 곧 주방이다. 바리케이드 앞에서 요리하는 그는 반핵 시위대 사이에서 이미 유명인사이다.유럽으로 건너가려고 임시로 난민 캠프에 살고 있는 나이지리아의 요리사 이매뉴얼 존도 캠프의 어느 공터에서 요리를 한다. 번듯한 집도, 교회도 없는 곳이니 주방이라고 갖춰져 있을 리 없다. 독일의 요리사 제라르도 아데소는 원래 유명한 레스토랑에 근사한 주방을 가진 위풍당당한 셰프였지만 마약 거래 혐의로 수감되어 지금은 감옥에서 요리한다. 이 요리 천재는 감옥에서도 자기 음식에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너털웃음을 웃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03

좀도둑서 조직 보스로… 그의 끝은?

“당대 최고의 전문가가 선보이는 범죄 느와르 소설. 섬세하고 문학적이고 예리하며 문장문장에서 즐거움이 묻어난다.” -뉴욕타임스`살인자들의 섬(셔터 아일랜드)`, `미스틱 리버`로 전 세계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최신 베스트셀러 `리브 바이 나이트-밤에 살다`(황금가지)가 출간됐다.1919년 보스턴 경찰 파업 이후, 뿔뿔이 흩어진 커글린 가문의 막내 아들 조의 파란만장한 생을 격동적으로 풀어낸 작품으로, 출간 즉시 전미 베스트셀러를 석권하고 2013년에는 애드거 앨런 포 상에서 선정한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영애를 누렸다. 데니스 루헤인은 이미 보혁, 노사, 인종, 남녀 갈등이 폭발하던 1919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운명의 날`로 독자들의 찬사와 평단의 호평을 동시에 받았는데, 이번에는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술이 마약처럼 밀거래되던 어둠의 세계를 사실적이면서도 흡인력 있게 담아냈다. 뉴욕타임스는 “섬세하고 문학적이고 예리하며 문장문장에서 즐거움이 묻어난다.”, 워싱턴 포스트는 “신선하면서도 정교한 언어, 폭력적 과거에 대한 세밀한 재현” LA타임스는 “숭고한 야심과 의도로 빚어낸 걸작” 이라고 찬사하는 등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퍼블리셔스 위클리에서 올해 최고로 꼽는 단 하나의 책으로도 선정된 `리브 바이 나이트-밤에 살다`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대작 영화로 기획 중인데, 현재 가장 주목받는 배우 겸 감독인 벤 애플렉이 감독으로 낙점됐으며, 그는 이미 자신의 데뷔작 영화로 데니스 루헤인의 `가라, 아이야, 가라`를 만들어 협회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을 만큼 인연이 깊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배우로 캐스팅된 가운데, 2015년 공개될 예정이다. `리브 바이 나이트-밤에 살다`라는 제목은 니컬러스 레이 감독의 영화 `그들은 밤에 산다(They Live By Night, 1949)`와 라울 월시 감독의 영화 `그들은 밤에 달린다(They Drive By Night, 1940)`에서 영감을 받은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보스턴에서 37년째 경찰로 근무 중인 아버지를 둔 조 커글린은 밤의 남자다. 아버지를 `누구보다 뻔뻔한 범죄자`라고 생각하는 그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강도질을 일삼고 다니던 중 불법 도박장을 털다 에마라는 이름의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보스턴 거대 범죄 조직의 보스인 앨버트 화이트의 애인이다. 조는 에마와 함께 도망가기로 하고 은행 강도에 나서지만 의도치 않게 지역 경찰관 셋이 죽으면서 감옥에 잡혀 들어간다.범죄 조직이 지배하는 건 감옥 안이건 밖이건 다르지 않다. 마피아 조직의 보스 마소 페스카토레는 고위 경찰인 조의 아버지가 마소의 경쟁 조직을 쓸어버리도록 압박을 가한다. 앨버트 화이트와 마소 페스카토레의 무자비한 전쟁 속에서 조와 네 범죄가 낳은 아이들은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보복으로 돌아올 거야라고 말하는 아버지는 운명적으로 엇갈린다. 범죄, 복수, 음모, 배반, 치명적인 사랑 같은 범죄 누아르 장르의 익숙한 재료들이 초반부터 숨가쁘게 맞물려 돌아간다.소설은 중반부터 출소 이후 마소에게 조직을 물려 받아 플로리다에서 사업가로 성공하게 되는 조의 궤적을 좇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