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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린 왜 무엇을 들려주고 싶어할까?

지난 2003년 첫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래 출간하는 책마다 기이하고 극단적인 상상력과 예리한 유머로 독자를 사로잡아온 소설가 박형서가 네번째 소설집 `끄라비`(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표제작을 포함해 7편의 작품이 실렸다.박형서가 안고 있는 `뻔뻔한 허풍` `발칙한 상상` 등의 수식어가 다시 한 번 증명된다. 표제작 `끄라비`부터가 그렇다. 작가의 상상을 거친 태국의 휴양지 `끄라비`는 책에서 한 여행객을 흠모하는 질투의 화신이 된다.`끄라비`는 흠모하는 여행객이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기상을 악화시키는 등 투정을 부린다. 더 한 패악은 여행객이 애인을 데려왔을 때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작가가 사랑과 애착을 빙자한 폭력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다.작가의 허풍과 상상은 수록작들에서 확장한다. 360억년을 주기로 붕괴와 대폭발을 반복하고 있는 우주에서 다음 우주의 신을 육성한다는 이야기 `티마이오스`에서는 우주로도 뻗는다.그렇다고 위트와 상상만이 박형서를 말하지는 않는다. 박항서는 파이(π)값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수렴되고 있음을 증명하려는 수학자를 내세운 `Q.E.D.`를 통해 소설가로서의 자세를 말한다. `이상이 내가 증명하려는 내용이었다`라는 의미로 수학자들이 증명을 마칠 때 찍는 약호 `Q.E.D.`를 영원히 찍지 못하는 수학자 이면에 시도로서 증명되는 작가가 있다.제3세계 희귀 언어로 쓴 소설을 표절한 작가를 주인공을 내세운 `아르판`에서도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다. 소설 속 표절 작가는 희귀 언어로 쓴 소설은 읽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고 이를 가져와 많은 독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언어와 문화로 각색한 뒤에야 비로소 소설다운 소설이 된다는 발칙한 주장을 펼친다.박형서는 `Q.E.D.`가 애초 목적이 아닌 듯 끊임없이 소설을 파헤치고 있다. 지침서를 닮은 `논쟁의 기술`, 논문의 형식을 빌린 작품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등이 실린 2006년 두 번째 소설집 `자정의 픽션`에서부터 본격화된 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다.“또다시 싸움을 걸었다. 단방에 맥없이 코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지기에 어찌 된 일인가 봤더니 그게 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아이는 3학년 최강 싸움꾼이었고, 나보다 심한 청각장애가 있었으며, 게다가 여자애라나 뭐라나.”(`어떤 고요` 252쪽)“남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 마약과 같은 작업이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용되는지 따위는 관심 밖이다. 어쩌면 그건 성욕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번식이 육신의 DNA를 보존하려는 욕망의 소산이라면, 예술은 정신의 DNA를 남기려는 욕망의 소산이기 때문이다.”`끄라비`에 수록된 단편 `아르판`에 나오는 대목이다. 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 들려주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이 그럴듯하다. 아르판은 화자가 동남아시아 오지의 `와카`라는 곳에서 머물며 발견한 이야기꾼이다. 아르판은 “세상의 마지막 전신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산등성이 분지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써 내려간” 사람인데, 작가가 그곳에서 아르판의 이야기를 듣고 문명세계로 돌아와 자신의 소설에 써먹는다.제3세계 작가들을 초청한다는 명분으로 서울까지 데려온 아르판은 정작 자신의 서사가 차용된 나의 작품만 인기를 끄는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할 따름이다. 그에게 사실을 고백했는데 아르판은 나를 “내게서 생명을 받아간 자, 내게서 모든 걸 물려받은 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제 정신의 DNA가 어떤 식으로 세상에 간섭했는지 확인한 뒤 자랑스럽게 허리를 펴 퇴장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으로 돌아간다. 이야기꾼의 본질과 그 욕망의 바탕을 우화 형식으로 전개한 박형서의 재치와 재능이 돋보인다.▲ 소설가 박형서이런 독특한 서사 스타일은 이번 소설집에 실린 여타 단편들에도 여일하게 적용된다. 마지막에 실린 자전소설 `어떤 고요`에는 문장마다 위트, 혹은 비애가 묻었다. 유아기에 열병을 앓고 일시적으로 청력을 상실한 사건에서 시작하는 소설에는 그가 `글을 쓰겠다`고 선언적으로 마음먹은 계기, 문학상을 받은 후의 고민 등이 담겼다.`어떤 고요` 속 `어림잡아 5년 이내에` 완전히 듣지 못하게 될 거라는 전문의의 진단 앞에서 “귀도 안 좋고 해서 20년쯤으로 들었다”는 작가의 농담은 슬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23

만연한 중국사회 병폐·부조리 비판

중국 청년 세대 `바링허우`의 기수로, 이들의 분노와 비애를 대변해온 작가 한한의 `나의 이상한 나라, 중국`(문학동네)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17세 나이에 내놓은 데뷔작 `삼중문(三重門)`으로 일찍이 밀리언셀러 소설가 반열에 올랐던 한한은 젊은 세대에 드리운 중국 사회의 그늘을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들로 지난 십수년간 당대 중국 청년 세대의 분노와 비애를 대변해왔다. 2000년대 말부터는 문학의 테두리를 넘어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을 온라인 공간에서 날카롭게 표출하며 수억명에 달하는 중국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중국 최고의 청년 작가가 문학과는 다른 문장, 다른 호흡으로 써내려간 사회비평은 과연 어떤 걸까? 활어처럼 팔딱거리는 재기발랄한 그의 문장들은 일단 폭소 또는 실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 문장들 속에 도사린 서슬 퍼런 비판의 칼날은 이내 읽는 이의 심중을 후벼판다. 중국 사회를 `찜쪄먹는`불한당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고, 부당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가는 중국인에 대한 애잔함이 샘솟는다. 단합이란 명분으로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정부, 오만함에 찌들어 인민 대중을 무시하고 기만하는 사회지도층, 권위주의와 허위의식에 물든 권력집단, 비뚤어진 중화주의의 망상에 젖어 외부세계와 자꾸만 충돌하는 중국인 등 중국 사회에 만연한 온갖 병폐와 부조리를 가감 없이 비판한다.중국 청년 세대의 다른 이름은 `바링허우(80後)`다. 1980년대에 태어나 현재 20~30대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은 중국의 오늘과 내일을 짊어지고 나아갈 중추적인 세대에 올라섰다. 그러나 이들이 당면한 현실은`중추`에게 주어져야 할 현실과는 전혀 다르다.이 책의 지은이이자 바링허우의 대변인인 한한은 이들의 현실을 이렇게 정리한다. “기계적인 노동, 희망 없는 미래, 형편없는 보수.” 반도는 물론 대륙의 젊은이들까지 집어삼킨 이 정체 모를 공포의 기운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걸까? 한한은 첫 글 `청춘`에서 중국 젊은 세대에 닥친 엄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온 중국 사회를 종횡무진하는 비판의 포문을 연다.책의 1부는 한한이 젊은 세대로서 중국 사회를 살아가면서 목격한 여러 부조리를, 재치 있는 조롱과 풍자의 형식을 빌려 고발하는 글들을 담고 있다.2부에서는 한한이 작가이자 전방위 문화인으로서 바라본 중국 문화계의 문제들이 중점적으로 언급된다. 기성 문단과는 다른 문체와 접근법으로 자신의 문학관을 구축한 한한은 먼저 중국 문단을 둘러싼 엄숙주의에 일침을 가한다. 평소 모든 권위적인 것들에 경계심을 드러내온 만큼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3부에서는 최근 중국이 세계적 규모의 행사들을 치르며 보인 비이성적인 모습들을 중심으로 중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면모들을 지적한다.한편 이 책 마지막인 4부에서는 중국의 시사주간지 `난두저우칸(南都週刊)`과의 인터뷰 내용이 소개된다.한한은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들을 멈추지 않아 감시와 검열의 대상이 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또 당대 중국의 청년 문화를 이끄는 `바링허우의 기수`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과 생각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토로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23

미국 기부문화 명암 조명하다

세계적인 석학인 프랑스의 사회학자 기 소르망(70)의 `세상을 바꾸는 착한 돈(Le coeur americain)`(문학세계사)이 번역, 출간됐다.이 책은 기 소르망이 지난 2012년 6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1년 동안 미국 현지에 머무르면서 미국의 기부 문화에 대해 샅샅이 취재한 기록을 담고 있다.그는 미국 기부문화의 기원과 현주소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그 실상과 허상을 분석해 미국 기부 문화의 명암을 심층적으로 조명했다.그는 이 책을 통해 미국의 기부문화의 진실뿐만 아니라 빈부격차나 공교육의 부실 등 미국이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게 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게 한다.사람 생명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자본의 탐욕이 불러낸 이번 세월호 참사 등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듯 하다.□ “많이 버는 만큼 많이 내라”기 소르망은 “미국의 슈퍼리치들은 자신들의 부를 대물림하는 데 집착하기보다는 사회 환원에 더 적극적”이라며 “기부는 미국 문화와 역사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설명했다.그는 또 “미국인들은 후원금이나 자산 기부 등 금품기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나누는 자원봉사에도 적극적이고 연간 수십억 달러를 기부하는 슈퍼리치들이 있는가 하면 매달 자신의 유무급 휴가를 이용해 자원봉사를 하거나 지정단체에 소액 기부금을 보내는 평범한 이들도 있다”고 소개했다.미국인들이 기부에 적극적인 이유에 대해 기 소르망은 박애적 기부를 통한 슈퍼리치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는 미국의 정신문화적 전통에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대부분인 미국의 갑부들은 성공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행운이 따라준 것에 감사하며 성공한 후에는 자신이 누렸던 그 행운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제3섹터`의 기반이 되는 기부기 소르망은 “기부는 받는 사람만큼이나 베푸는 사람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 좋은 일 좀 했다고 박물관이나 학교 건물에 이름을 남기는 일부 슈퍼리치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준다는 것만이 아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좋은 일을 위해 자신의 재산과 시간을 베풂으로써 사회적, 인간적, 정신적 혜택을 얻는 것이야말로 기부의 미덕”이라고 설명한다. 기부자든, 자원봉사자든, 기부단체 운영자든, 베푸는 사람들은 자신의 시민정신과 영혼의 고취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또 그는 “기부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이 못 다한 일을 해결함으로써 아름다운 사회를 완성해주는 `제3섹터`의 기반”이라고 했다.국가나 시장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보를 추구하면서 시민정신과 유대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에 기부 통한 새 길 제시기 소르망은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헌정하는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사회학자 기 소르망“한국 사회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는 정부보다 사회단체나 재단들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수많은 기부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를 통해 온 사회가 같이 책임을 나누어지고, 그렇게 나누는 만큼 그 무게는 가벼워질 것이다. 오늘을 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삶의 의미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나눔 실천, 박애적 기부 활동이야말로 미래를 꿈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것이라고 믿는다.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이 기부가 가진 가장 커다란 덕목이기 때문이다. 나눔과 기부 문화는 자원봉사와 함께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행위를 통한 계층 간 통합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나눔과 기부 문화를 통해 한 사회 안의 건강함을 엿볼 수 있다. 기부를 한 경험이 있는 사람(92%)은 그렇지 않은 사람(76%)보다 자신의 건강과 삶에 더욱 만족한다는 설문조사가 있다. 어려운 처지의 누군가를 작게나마 도움으로써 뿌듯함을 얻는 일은 분명 자신을 따뜻하게 해줄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16

유적과 유물로 본 日 천년고도 교토

`문화유산 답사 붐`을 일으킨 유홍준(65) 명지대 석좌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의 세 번째 책 `교토의 역사`를 내놨다. 유 교수는 지난해 시리즈 출간 20주년을 맞아 일본편 1·2권인 규슈편과 아스카·나라편을 펴냈다.최근 펴낸 `일본편 3권 교토의 역사`(창비)는 천년 고도 교토의 진면목을 살피기 위해 헤이안시대 이전부터 가마쿠라시대까지, 교토의 역사를 씨줄로 삼아 유물과 유적을 선보이는 한층 진화한 `답사기`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한반도 도래인의 문화를 토대로 발전시켜 오늘날 일본의 `국풍문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현장감 넘치는 설명과 이미지로 그려낸다.교토의 공간을 낙중(中)과 낙외(外)로 나누고 그 위에 일본의 역사를 따라가는 동선까지 고려해 설계한, 유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교토 답사의 미적분 풀이`인 이 책의 추천 코스를 따라가다보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교토 답사의 새로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인간과 예술과 역사가 어우러진 `답사기` 본래의 읽는 재미까지도 여실히 느낄 수 있다.경주를 빼놓고 한국의 문화를 논할 수 없듯 교토를 빼고 일본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교토는 일본 역사에서 1천년간 수도의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문화의 진수가 다 모여 있고, 일본미의 꽃이 여기에서 활짝 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위상은 숫자로도 증명된다. 교토부(府) 전체에 사찰이 3천30곳, 신사는 1천770곳이 넘는다. 그중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만 해도 사찰이 13곳, 신사가 3곳, 성이 1곳으로 모두 17곳이나 된다. 이를 보기 위해 해마다 국내외에서 800만명이 모여들어 교토는 세계적인 역사관광 도시가 됐다.유 교수가 교토를 찾은 이유는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일찍이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가 교토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적함으로써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집필 의도를 책 곳곳에서 드러내 보여준다. 그 어느 곳보다 교토는 한반도 도래인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곳이다.황폐한 교토에 댐을 세우고 수로를 만들어 비옥한 땅으로 일군 하타씨(秦氏)의 숨은 공로가 없었다면 헤이안쿄(平安京, 현재의 교토) 천도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일본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는 광륭사에는 신라계 도래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국제적인 명성을 날리는 원효와 의상의 실물과 가장 가까운 초상화가 인화사에 보관돼 있다.또 신안 해저 유물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한 동복사는 수많은 보물을 실은 `신안선`이 목적지로 삼은 당대의 대찰(大刹)이었다.이처럼 `답사기 교토편`은 교토를 단순히 관광지가 아닌 우리의 역사가 함께 어우러지는 친숙한 곳으로 바꿔놓는다.유홍준 교수의 교토 답사기는 한반도 도래인이 남긴 자취를 찾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교토 땅을 문명의 터전으로 일군 도래인의 노력과 뒤이은 당나라 문화 배우기(당풍·唐風), 헤이안시대 중엽(후지와라시대) 이래 스스로의 힘으로 문화를 일궈내려는 시도(국풍·國風) 등을 거치며 교토가 일본문화의 수도로 확고하게 자리잡는 과정을 교토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소상히 알려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16

美 노예제부터 현대 인종차별까지 다뤄

흑인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살아 있는 미국문학의 대모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빌러비드`(문학동네)가 출간됐다. 1987년 출간 당시 퓰리처상, 미국도서상, 로버트 F. 케네디 상 등 미국소설에 주어지는 거의 모든 명예를 얻은 `빌러비드`는 21세기에 들어서며 20세기 미국문학의 정전으로 자리매김했다. 2006년 뉴욕 타임스에서 작가, 비평가, 편집자 등을 대상으로 조사한 `1980년 이후 최고의 미국소설` 1위에 선정됐고, 2008년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조사한 `하버드대 학생이 가장 많이 구입한 책`에서는 2위에 꼽혔다.미국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흑인문제를 노예제에서부터 현대의 인종차별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으로 다룬 토니 모리슨은 `빌러비드`에서는 특히`여성 노예`에 초점을 맞췄다. 노예라는 운명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딸을 죽인 흑인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흑인들의 참혹한 역사를 재조명하는 한편, 박탈당한 모성애를 되찾은 도망노예의 과격하고 뒤틀린 사랑과 그로 인한 자기 파괴를 이야기한다.시대적으로도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남북전쟁 직후의 재건기로 거슬러올라간다. 노예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들은 여성이고 어머니이기 때문에 성적 억압과 모성애의 박탈까지 삼중의 폭력을 겪어야 했다. 결혼은 불가능했고, 자식은 낳아야 했지만 부모가 될 수는 없었다. 제목인 `빌러비드`는 `사랑받은 자`를 뜻하는 말로, 주인공이 죽은 딸의 묘비에 새겨준 글자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사랑받지 못한 흑인 여성들을 애도하는 뜻이 담겨 있다.1856년 1월, 켄터키 주의 한 여성 노예가 임신한 몸으로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오하이오 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도망쳤다. 우여곡절 끝에 친척의 집에 몸을 숨겼지만, 뒤따라온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의 추격에 끝내 붙잡힐 위기에 처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한 후, 두 살배기 딸의 목을 베었다.`빌러비드`의 부분적인 줄거리이기도 한 이 실제 사건은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방증하는 사례로 노예제 폐지 운동의 역사에 남은 실화다. 토니 모리슨은 이를 `빌러비드`의 모티프로 차용하면서, 어머니가 영아를 살해하게까지 한 노예 경험을 독자의 피부에 와 닿게 묘사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16

젊은작가상 수상자들 개성·색깔은?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이 출간됐다.한국 문단의 최전선에서 활약중인 젊은 작가들을 격려하고 독자들에게는 열정과 패기로 충만한 젊은 소설의 숨결을 확인하게 하고자 문학동네가 지난 2010년부터 신설, 운영해온 젊은작가상은 그사이 많은 독자들과 작가들의 호응과 지지를 얻어왔다.2014년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가는 황정은 조해진 윤이형 최은미 기준영 손보미 최은영 이다.빽빽한 서사보다는 특유의 리듬감 있는 대사와 여운이 느껴지는 문장으로 `황정은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는 황정은의 `상류엔 맹금류`가 “`젊은 작가의`라는 제한적 수식조차 필요 없는, 2013년 최고의 단편소설”(신형철, 문학평론가)이란 찬사를 받으며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믿음을 스노볼, 카메라, 빛의 이미지 등을 통해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조해진의 `빛의 호위`, 성장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요구받는 지금,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쿤`이라는 회백색 덩어리를 내세워 묻고 있는 윤이형의 `쿤의 여행`, 사타구니 가려움증에 걸린 한 남성의 가질 수 없는 욕망을 끈적하고 집요하게 파헤친 최은미의 `창 너머 겨울`, 우연히 옛사랑을 만나 일어나는 짧은 해프닝을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려낸 기준영의 `이상한 정열`, 가장 친숙하며 가까운 존재인 가족들 사이의 의심, 불안, 거짓말을 세련되고 정교하게 표현한 손보미의 `산책`, 언어와 국적이 다른 두 소녀가 만나 성장의 문턱들을 통과해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 이상 일곱 편이 올해 젊은작가상 수상작이다.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상류엔 맹금류`의 작가 황정은은 한국일보문학상(2010) 현대문학상(2013, 차후 수상 반려) 등을 수상하며 지금 한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로, 올해로 세번째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게 됐으며, 지난해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손보미 역시 올해로 세번째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손보미는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가이기도 하다.)두 명의 3회 수상작가를 제외하면 나머지 다섯 명의 작가들은 이 상에 처음으로 얼굴을 선보였다. 2004년 데뷔해 올해로 10년 차 마지막 심사 대상자이기도 한 조해진부터, 지난해 겨울, 작가세계신인상 등단작으로 수상하게 된 가장 젊은 최은영까지, 그 이름들은 신선하고도 흥미롭다. 그리고 감각적인 문체의 기준영과 개성 강한 문제의식을 보여준 윤이형 최은미, 우리는 이 젊은 작가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주목하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09

어른돼 읽어보는 유년시절 동화

건축가 김진애, 오영욱, 서울도서관장 이용훈, 라디오 피디 정혜윤, 경제학자 우석훈, 아나운서 고민정, 소설가 황경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17인의 탐서가들이 동화책을 한 권씩 손에 들고 한 자리에 모였다. `플랜더스의 개`, `비밀의 정원`, `어린 왕자`, `인어 공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서가 깊은 곳에서 `내 인생의 동화`라 할 작품들을 꺼내온 저자들은 오랜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화와 함께 성장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고, 어렸던 나와 다시금 마주하면서, 그때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감동과 교훈을 발견하는 과정을 글에 담았다.유년 시절에 읽었던 동화를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될까? 동화를 읽으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로 `시간 여행`을 다녀온 저자들은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반비 펴냄)에서 결코 `추억의 복원`만이 두 번째 독서의 유일한 매력이 아니라고 말한다.명작 동화들은 어른에게도,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삶의 의미를 되새겨주며, 고단한 시간을 감내하는 용기를 북돋워준다. 특히 동화는 세상에서 가장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그런 가르침을 전해주어, 감동의 깊이를 더한다. 아련한 시간 여행 끝에 저자들이 발견한 것은 어른의 영혼도 또 한 번 성장시키는, 위대한 고전의 힘이다.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동화의 힘은 더욱 빛난다. 동화는 우리를 그때 그 시절로 다시 데려가,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와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키며, 근본적인 성찰로 우리를 이끈다.우리는 모두 동화를 먹고 자란다. 동화는 그 자체로 우리의 성장기이다. 그래서 동화를 다시 읽는 것은 그 동화에 새겨진 성장의 발자취를 다시금 되짚어 추억하는 일과 같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저술가, 독서가들이 어린 시절에 읽었던 각별한 동화들을 다시 읽으며, 어떻게 동화와 함께 성숙했고, 세상의 진리를 깨쳤으며, 마침내 지금과 같은 모습의 어른이 되었는지 이야기한다.동화 두 번째 읽기를 통해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고전의 힘이다. 명작 동화들은 그 어느 책보다도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인생과 세상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주고, 지켜가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알려주며, 더 아름답게 나이 들도록 응원해준다.동화는 “나를 퇴행시킴으로써 재무장”(김혜리)시키기도 하고, “막막하고 무기력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이라 할지라도, 손에 쥔 모래알처럼 의미 없이 스르르 빠져나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안소영) 가르쳐주기도 한다.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권오준)는 구절은 여전히 진리이며, 어른에게도 여전히 “기적과 마법의 순간”(김용언)은 필요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09

익숙한 존재들이 그려낸 낯선 초상

익숙한 언어 질서와 의미 체계를 전복해, 늘 곁에 있었으나 깨어나지 않았던 말들의 입체적 이미지를 되살려낸 시집 `시소의 감정`으로 편운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시인 김지녀가 두번째 시집 `양들의 사회학`(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기성의 개념에서 벗어나 사물 자체를 자신의 감각으로 새롭게 매만지는 그만의 생동감이 여전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무수한 존재들을 제 몸에 품었다 낸다. 그들이 들고 난 상흔으로 무너진 얼굴들이 빽빽이 겹친 55편의 시들에서, `양들의 사회학`이라는 기이한 몽타주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 “세계의 자화상”에는 시대의 초상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여기, 바깥을 향해 계속 자라는 목과 이미 알려진 세계를 무위로 돌리는 낯선 코, 허공에 밧줄을 매다는 절박함으로 문장을 되새김질하는 공복과 부정의 힘을 쥔 왼손, 그리고 실패를 반복하는 `더러운 손`과 `낭비`로써 존재의 변이를 촉진하는 `넘치는 발가락`이 있다. 이 시집의 이미지-언어는 어떤 `초상화`,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자화상`이 될 신체의 부분들을 포착하는 데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냉철하고 정교한 `객관적` 시선이 움켜쥘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고, 세계의 배후이며, 시간의 기미다.” -함돈균(문학평론가)“우리의 발목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긴”(`B1`). 첫 시의 첫 문장을 실마리 삼아 조심스레 짐작해보면, 이 시집은 `우리` `몸` `이곳` `지금`을 이야기할 것이다. 김지녀의 시를 신(新) 서정이라 이름 붙였던 가장 큰 이유는, 시인 내면의 단일한 목소리가 아닌 다수의 익명적 존재들이 화자 역할을 하여 입체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바깥에서 피고 지는 것들이 나를 향해 돌진한다는 생각으로”(`혼잣말의 계절`) “줄지어 내게로 달려 들어온 것들”(`검은 재로 쓴 첫 줄`)을 만신(萬神)처럼 품는다. 시인은 몸을 열어 “낯선 손과 악수”하고, “네번째 온 사람, 여섯번째의 노인이나/아흔두번째의 양”(`검은 재로 쓴 첫 줄`)이 된다.김지녀가 그리는 “세계의 자화상”은 시대의 민낯을 동반한다. “우리 시대의 젊은 감각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할 때, `사회학`이 문학적 신체의 단순한 후경이 아닌, 그 신체의 감각을 배태하고 지탱하며 변형시키는 존재 지평이라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야말로 필수적”(함돈균)이기 때문이다.“이름 모를 병이 많고/설명할 수 가늠할 수 없는 아픔이 많”은 이곳엔, “갑자기 잠에 빠져/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오늘의 체조`), “무엇이든 꼭 쥐고 놓지 않는 감자 손가락이 잘린 감자 파업 중인 감자 떠도는 감자 침묵하는 감자”(`더 딱딱한 희망`), 앞선 한 마리를 따라 벼랑인 줄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가는 양 떼(`양들의 사회학`)와 “겁먹은 쥐들”(`회색 눈동자`)이 있다. 세상은, 문제가 있다. “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국문학 혹은 정치학 전공자로서, 사람들은 현상을 “해석”하고 “한참을 생각”하며 고민한다. 하지만 폭우처럼 쏟아지는 사회적 병폐의 `의미`를 곱씹는 중에도, “여자아이는 알몸으로 떨”며 한 남자는 빗속에서 사라져버리고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다 젖어”간다. 발밑으로 흐르는 빗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것만 속절없이 지켜볼 뿐이다(`붉은, 비가`). 해결책은 마땅치 않다. 그러므로 이미 그어져 있고 “아무도 넘지 않는” “선 위에서 우리는 떨고 대결한다/왼쪽과 오른쪽이 되어 줄다리기를 한다/아무도 불평하지 않아서/선은 공평하다”(`선`). `우리`들이 아무리 단단히 각오를 해도 “빠져나올 수가 없다 땅속의 평화와 안전은/보장받을 수가 없다/거대한 손아귀가 줄기를 잡아당기는 순간/크고 작은 주먹들이 열없이 쏟아져 나온다/올해도 흉작이다”(`더 딱딱한 희망`). 이것이 `우리`의 사회학이다.김지녀의 `사회학`은 암흑에서 길어 올린 깊은 자괴나 부글부글 끓는 울분과는 거리가 멀다. 옅은 자조가 섞인 시인의 진단은, 애써 “안 될 거야, 아마”라고 뇌까리는 지금 젊은 세대들의 낙관도 비관도 아닌 담담한 현실 인식과 얼핏 닮아 있다. 시인에게 이 이상한 세상을 공격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미지를 전복하는▲ 김지녀 시인부비트랩을 설치해두고 줄곧 시선을 유지한 채 온 세상으로 퍼지기를 기다리는 것일 테다. 시인은 “희망도 불행도 없는 얼음”처럼 무겁고도 단단한, 차가운 진실을 껴안고는, “다 말하지 못한 진실의 먼지들”(`해동`)이 고여 있는 “가장 사적이고 사색적인” 몸을 열고 세계의 이미지를 품을 준비를 한다. 아직,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이/켜켜이 쌓여 있다”(`발설`). “무정한 고요와 기만적 평화가 “무너지고 무너지면서”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개미들의 통곡`)하”(함돈균)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4-05-09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재조명

작가 조중의(54)씨가 해월 최시형을 조명한 장편역사소설 `망국`(영림카디널)을 출간했다.소설은 동학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1871년 동학 교도들의 영해 동학혁명을 중심으로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재평가했다.사실에 허구를 부분적으로 가미한 팩션(faction)이지만 등장인물 대부분은 모두 실존했던 인물이다.녹두장군 전봉준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최시형의 사상가이자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재조명했다.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갑오년(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최시형의 족적은 의외로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는 개벽의 때를 찾아 고뇌하며 `만민의 나라` 조선의 부활을 꿈꿨던 인물이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인 동학을 다시 살려 천기를 불어넣었던 최시형이 혁명의 주변인물로 밀려나 있던 까닭은 무엇일까?최시형은 동학을 창시한 스승 최제우의 돌연한 형사(刑死)로 황망한 기운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채 법통을 물려받았다. 최제우의 그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교세의 근간은 뿌리째 흔들리고, 심지어 교권을 탐내는 접주(接主)들까지 곳곳에서 발호해 동학 자체가 괴멸지경에 놓이게 된다. 최시형의 권위는 그야말로 바람 앞 등잔 불처럼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최시형에게 난국을 타개할 비책은 동학의 근본인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꿋꿋이 가는 길뿐이었다. 그는 하늘님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한 나라를 만들자는 후천개벽론을 설파해 교세를 회복시켜 나갔다. 당시 대원군 치하 조선 조정의 탄압은 날로 거세져 최시형은 줄곧 도망자로 지내야 했다. 궁지로 몰리면 몰릴수록 최시형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조선팔도의 동학이 꿈틀꿈틀할 정도로 카리스마도 갖추게 됐다. 그러는 사이 대책 없이 쓰러져가는 조선 땅에서 수많은 민초들에게 최시형은 유토피아를 열어줄 등불 같은 존재로 재등장한다.`망국`은 동학초기비사로 전해오는 1871년 동학교도들의 영해성 거사를 모티프로 삼아 최시형을 재평가한다. 1864년 4월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참형을 당한 후 도통을 이어받아 교주가 된 해월 최시형의 지위는 위태로웠다. 수운의 장남인 세정을 따르는 무리와 유림을 버리고 동학당에 들어온 사대부들은 무학자인 그를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조정의 수배를 피해 산간 오지를 숨어 다니다 겨우 영양 일월산에 거처를 정한 해월은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며 흩어진 도인들을 모으고, 교주로서의 권위를 세우는데 절치부심한다.몇 년 후 영해접주 박사헌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동가 이길주는 스승인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영해성을 도모하자는 제안을 해온다. 해월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수차례 거절하나 도인들의 성화를 견디지 못해 결국 거사를 허락하고 만다.▲ 조중의 작가전국에서 집결한 도인들은 영해성을 공격해 부사 이정의 목을 베고 관아를 점거하는데 성공하지만 정예 관군이 출동한다는 소문이 돌며 하루 만에 철수를 결정한다. 영해성을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자는 애초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해월과 동학당은 도주를 시작한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도피 과정에서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져가는 도인들을 바라보며 해월은 처절한 반성과 각오를 다진다. 도인들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해월은 태백산 깊은 곳에서 동학당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고 교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결의를 다져나간다. 조 작가는 “소설 `망국`은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구원의 빛을 밝히려 했던 해월 최시형의 삶에 대한 문학적 복원이다. 그동안 시대의 논리에 밀려 역사의 이면으로 밀려나 있던 그를 다시 불러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조중의 작가는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새 사냥`이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5년 동안 기자로 활동하면서 `신 택리지`, `동학 100주년, 발상지를 가다` 등을 연재했다. 장편소설 `농담의 세계`, 평전 `새로운 세상을 꿈꾼 해월 최시형`, 산문집 `사는 게 참 행복하다` 등을 펴냈다. 현재는 포항CBS 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02

“사물 꿰뚫어보는 시선 예리하며 따뜻”

맑고 투명한 서정 속에서 더욱 빛나는 강인한 시정신으로 한국 현대사와 문학사를 관통해온 이시영 시인의 신작 시집 `호야네 말`(창비)이 출간됐다. “현실에 맞서 시대의 진실을 세심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밀도 높은 서정이 다양한 형식 속에 조화롭게 어우러진 뛰어난 시정신의 소산”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박재삼문학상`과 `만해문학상`을 잇따라 수상한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후 2년 만에 펴내는 열세번째 시집이다.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는 독특한 감성의 어법으로 단형시, 산문시, 인용시 등 변함없이 다채로운 형식을 선보이며 삶에 대한 애정과 웅숭깊은 자기성찰이 깃든 `오래된 노래`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나직 들려준다. “짧은 서정시라 불리는 독특한 시 형식에 `스스로 그러함`을 드러내는 영원한 순간들의 미학”(오철수, 발문)이 현란한 수식 없이 간결하고 명료한 일상적 언어에 녹아든 단정한 시편들이 묵직한 울림과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동양파라곤아파트 동쪽 정원 측백나무 옆/고양이 세마리가 나와 자울자울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그중 두 놈은 흰 배에 검은색 등이고/나머지 한 놈은 완전 호랑이 색깔이다/그런데 저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니!”(`평화롭게` 전문)이시영의 시는 짧지만 긴 여백 속에 큰 울림이 있다. 냉정하다 싶을 만큼 차분한 감성과 극도로 절제된 언어로 사물의 현상과 실체를 에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정확히 꿰뚫어보는 시선이 더없이 예리하면서도 한편 따뜻하다.`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팍팍한 시대를 올곧은 정신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시인은 “모든 결빙(結氷)의 시절”(`십이월`)인 현실을 직시하며 그 속에 감추어진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암울한 시대의 어둠을 밝히며 진실한 삶을 오롯이 지켜온 시인은 편을 가르거나 누구를 따돌리지 않고 서로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그런 `나라` 없는 나라”(``나라` 없는 나라`)를 꿈꾼다.이시영 시인은 삶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쉽게 가슴을 울릴 만큼 `인간적`이다.이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아직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평범한 시인”(시인의 말)으로서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선한 눈빛과 순정한 마음이 새잎에 돋는 이슬방울처럼 “금빛으로 환하게 눈부”(`금빛`)시다.“양들이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를 건너 귀가하고 있습니다/곧, 저녁입니다”(`곧` 전문)/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02

애플 신화 주인공 잡스 경영철학 분석

전세계 모바일 혁명을 이끈 애플 신화의 주인공 잡스(1955~2011)와 함께 애플의 광고와 마케팅을 이끌었던 켄 시걸이 `미친듯이 심플`(문학동네)을 출간했다.`스티브 잡스, 불멸의 경영 무기`라는 부제의 `미친듯이 심플`은 잡스의 경영 철학을 분석했다.저자 켄 시걸은 1997년 잡스가 애플에 복귀했을 때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 광고 캠페인을 기획해 애플의 부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아이맥(iMac)`이란 제품명을 고안해 `아이(i)` 시리즈의 기반을 다졌다.켄 시걸은 똑똑한 인재들의 창의적 사고를 저해하는 관료적인 위계질서와 복잡한 대기업형 프로세스를 철저하게 단순화하고자 한 잡스의 경영 방식을 “단순함을 향한 헌신적인 집착”이라고 표현하고, 애플의 혁신을 가능하게 한 단순함의 11가지 원칙을 제시하며 애플의 외부인이나 저널리스트가 쓴 책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잡스는 남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뛰어난 인재들의 아이디어가 회사의 프로세스로 인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애플의 업무 구조를 신선할 정도로 평탄하게 만들고 프로세스를 단순화했다. 그 누구에게도 형식과 격식을 요구하지 않았고, 아이폰의 단순한 디자인처럼 군더더기 없이 애플을 경영하고자 했다.저자 켄 시걸은 이러한 잡스의 경영 원칙을 형상화한 상징물로 `심플 스틱(Simple Stick)`이란 것을 언급한다. 심플 스틱은 실제 애플 직원들이 사용했던 말이다. 잡스가 어수선한 결과물을 내놓은 직원을 직설적인 언사로 호되게 평가했을 때 직원들은 “심플 스틱으로 맞았다”고 표현하곤 했다. 회의에 불필요한 사람이 참석했을 때, 제품의 기능이나 디자인이 직관적이지 않고 복잡하기만 할 때, 두세 마디면 끝날 의견 개진을 겉만 번드르르한 프레젠테이션으로 만들어 회의 시간만 늘여놓았을 때 어김없이 잡스의 심플 스틱이 등장했다. 저자는 똑똑한 인재가 모인 굴지의 IT 기업들조차 복잡한 프로세스에 빠져 좋은 아이디어를 사장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지적하며, 이 책을 통해 복잡한 형식과 절차에 매몰된 기업들이 심플 스틱을 거머쥘 수 있도록 안내한다.시걸은 잡스의 경영 무기이자 핵심 철학은 바로 심플(단순함)이라고 강조한다. 잡스는 구성원들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가로막는 관료적 위계질서와 복잡한 대기업형 프로세스를 최대한 단순화시켰다. 전 세계 애플 임원의 수를 100명으로 한정하고 경영 전략을 논의하는 연례회의 `톱 100`을 운영하는 등 단순함의 원칙을 적용했다. 제품군에서도 마찬가지다. 잡스는 애플 복귀 당시 20개가 넘는 제품군을 개인용과 전문가용 데스크톱, 노트북 등 4개로 단순화했다.시걸은 잡스의 경영 방식을 `단순함을 향한 헌신적인 집착`으로 요약한다. 그리고 잡스가 끝없이 추구한 단순함 속에서 11가지 경영 원칙을 추려낸다. `냉혹하게 생각하라`, `작게 생각하라`, `최소로 생각하라`, `가동성을 생각하라` `상징을 생각하라`, `단어를 생각하라` `평소처럼 생각하라` `인간을 생각하라` `회의적으로 생각하라` `전쟁을 생각하라` `앞서 생각하라` 등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02

“태어나는 순간엔 왜 나를 볼수 없을까”

이영주(40·사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차가운 사탕들'(문학과지성사)은 존재의 비밀과 시 탄생의 비밀을 일치시키려는 낯선 언어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존재의 비밀이란 한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걸쳐 있는 존재의 현상학을 의미하는데, 이영주는 우선 탄생의 순간에 대한 비의를 이렇게 시로 옮긴다.“태어나는 순간에는 왜 나를 볼 수 없을까/ 미래 밖에서 우리는 공을 굴린다.//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안쪽에 숨겨져 있다./ 아픈 사람의 손바닥은 빨개// (중략)// 새벽을 지나 앞발로 공을 굴리는 고양이/ 태어나면서부터 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색깔을 가졌을지도 몰라// 모호한 시작 때문에 처음과 끝을 굴리는 우리는”(`둥글게 둥글게' 부분)탄생의 순간을 기억하는 갓난아이가 없다는 점에서 산파술의 비밀은 타자만이 탄생의 순간을 기억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받은 산파마저도 피조물이긴 마찬가지여서 산파술의 비밀은 산파 역시 알지 못한다. 한 존재의 시작에 칠해진 가장 아름다운 색은 존재 그 자체라고 할 `공'의 안쪽에 칠해져 있지만 우리는 한번도 그 색을 보지 못한 채 공을 굴리고 있을 뿐이라는 자괴감이 이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죽음은? “오늘은 이 잠이 마지막입니다. 차가운 돌 위를 떠나 안으로 들어갈 날을 하루 앞두고 있네요. 돌을 깨고 돌가루를 먹는 석공들은 느낌으로 안다고 합니다. 병자의 마음을… (중략) 돌을 깨고 나면 우리의 생태는 죽은 살덩이로 남아 있습니다. 미끈한 돌이 완성되고 벼랑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애인을 만나려고.”(`석공들의 뜰' 부분)이 시의 화자는 돌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임종 직전의 사람으로, 여기서 돌이란 차갑게 굳어져가는 그의 몸을 형상화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영주의 시는 이렇듯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모호한 현상들을 포착하고 있는 한편, 그러한 현상을 시의 탄생 과정과 일치시키려는 개성적인 해석학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해석학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야유회'일 것이다. “노인들은 서로를 죽은 자로 대할 수 있기 때문에 등을 쓸어준다. 솟아오른 등뼈가 조금씩 부드러워지도록. 나는 어떤 뼈의 성분에 숨어 있었나.// 머무는 곳으로부터 추방당하면서 침묵은 언어보다 크고 뜨겁게.// 태어난 곳에서 가장 먼 곳. 폐기물 냄새가 모여드는 곳.”(`야유회' 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25

대작가 탄생 알리는 단편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될 뿐만 아니라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토머스 핀천의 유일한 소설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창비)이 완역·출간됐다.필립 로스, 코맥 매카시, 돈 드릴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네명의 소설가로 꼽히는 핀천은 현대사회를 비판적으로 통찰하는 특유의 상상력과 과학소설에 끼친 영향으로 싸이버펑크 SF문학의 선조로 인정받는 소설가로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초기에 쓴 다섯편의 단편을 모아 작품을 쓴 때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84년에 출간한 것이다.데뷔 장편이 나온 이듬해에 발표된 `은밀한 통합'(1964)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모두 핀천이 대학생 시절에 쓴 작품들이며 소설집에 실린 초기 다섯편의 작품을 보면 핀천이 이후에 발전시킬 주제와 스타일, 취향 등을 짐작할 수 있다.핀천은 소설집 앞에 긴 작가 서문을 붙여서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 자신의 미흡했던 점, 즉 어두운 말귀 때문에 대화의 많은 부분을 망가뜨리고 있는 점, 개념이나 관념을 먼저 앞세운 탓에 등장인물의 생생한 형상화가 미흡한 점 등을 고백하고 있다. 작가 서문은 각 단편들에 대한 해설과 비평으로서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힘든 핀천의 문학적 성장과정을 자전적으로 소개하는 글이기도 하다.소설집에 담긴 다섯편의 이야기는 소재나 배경 등이 각기 다르지만 죽음, 무기력, 권태, 획일화, 무질서, 파국, 단절감을 공통적으로 그리고 있다. 핀천의 첫 단편 `이슬비'는 군대라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죽음과 다를 바 없는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청춘의 이야기이다.주인공 러바인은 도망치듯 군대에 들어온 인물인데, 그는 군대를 떠나려 하기보다 반복적이고 정체되어 있는 그곳에 안주하려 한다. 주인공은 허리케인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인근 뉴올리언스에 파견되어 시신 인양작업을 하면서 죽음의 문제와 맞닥뜨리고 우연히 만난 여자와 의미없는 섹스를 한다. 그런 뒤 그는 휴가를 가는 대신 군대생활로 되돌아간다. 작가는 주인공의 삶을 폐쇄회로와 같은 고립적이면서 단절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1960년대 보잉사를 그만 두고 작가로 변신한 이래 지금까지 은둔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토머스 핀천. 사진은 그가 1960년대 중반 뉴욕에 머물 때의 모습으로 유일하게 공개된 것이다.`로우랜드'는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책임있는 성인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거기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롭고 활기찬 삶을 꿈꾸는 남성의 이야기이다. 결혼하여 도시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주인공 데니스 플랜지는 젊은 시절 바다에서 해군 장교로 지낸 기억을 되살리며 집에 찾아온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하나 아내에 의해 쫓겨나 쓰레기 폐기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쓰레기 폐기장에는 1930년대 테러리스트들이 파놓은 은신처가 있고 현재는 집시들이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집시 소녀를 만나 새로운 삶을 계획하나 작가는 이 장면을 환상처럼 묘사함으로써 그것이 새로운 삶의 시작일지, 아니면 또다른 굴레일지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다.`엔트로피'는 핀천 문학의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엔트로피 개념을 문학적으로 처음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후 핀천 소설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아파트 삼층에 사는 멀리건은 재즈 사중주단 친구들과 함께 사흘째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있고, 바로 위의 사층에서 학자로 보이는 칼리스토는 방을 온실처럼 만들어놓고 죽어가는 새를 살리려 하고 있다. 작가는 삼층과 사층을 번갈아가며 묘사하는데, 삼층의 파티가 상징하는 무질서·소음·혼란·고갈과 사층의 온실이 상징하는 질서·규칙·통제·보존 간의 갈등이 소설의 핵심구조를 이룬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25

회계사가 바라본 돈의 본질은?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돈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어쩌면 치열한 일상과 맞물려 무의미한 소리일 수 있다.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우리 삶에서 개인차는 있겠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뉴스 속에서 꼭 돈이 많다고 행복하고 돈이 적다고 불행함은 아니란 것을 듣는다. 이 시점에서 돈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업종 중의 하나인 회계사인 저자 정재흠 선생은 고민한다. “과연 돈이란 무엇인가?” 우리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돈의 본질에 대해 생각한다. 그 결과물이 `풍경 속 돈의 민낯'(휴먼큐브)이다. “인간 삶 속에 스며 있는 돈의 민낯을 자연이 펼친 풍경과 함께 추적해보기로 마음을 먹고 펜을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이 형이상학적 측면, 곧 인간의 불가해한 심리를 자신 있게 추적해나가겠노라고 외치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는 깨우침이 들기 시작했다. 돈의 영혼은 나를 비웃는 듯했고 나의 손은 부끄러워 펜을 놓아야 했다.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황당한 회의는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당혹스러운 물음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결국 나는 교실에서 익힌 경제 경영 서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수학으로 증명된 경제 경영 수치, 학문적·관념론적 언어, 또 도구적 이성으로 돈의 민낯을 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돈의 영혼이나 본질을 증명하기 위해선 오로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고 인간을 에워싼 문화와 역사, 사유의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리가 분출한 사회적 현상을 따라가봐야 했다. 특히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 고려, 조선시대 사람들, 혹은 중세, 근대 역사 속의 사람들이 돈 때문에 겪은 사건이나 서사, 사유 모두 내겐 현재적 사건이요, 오늘날 맞닥뜨리는 문제와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인식도 한몫했다.”_머리말 중`풍경 속 돈의 민낯' 책 속에는 크게 다섯 가지 풍경이 나온다. 저자는 경기도 안성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 속에서 켜켜이 쌓인 돈의 모습을 다양한 앵글로 잡아내고 있다.책의 본문에서 저자는 생명이 깨어나는 풍경 속 모습에서 자연이 개발 분양한 초대형 전원단지에 대해 사색하고, 박두진 시인의 `해' 속에서 사람 잡는 돈의 모습을 말한다. 이처럼 풍경과 문학, 사랑 등의 소재와 돈이라는 언밸런스한 소재를 통찰해 `돈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저자의 시선은 의미가 깊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이 책의 목표는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인간과 돈의 화해가 모색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즉,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룰 때 인간에게 안락감이 깃들듯, 인간과 돈이 화해를 모색할 때, 인간이 돈의 위세에 억눌리지 않고 사이가 좋을 때, 비로소 인간이 평화를 느낄 수 있고, 인간의 삶은 더 정직해지고 또한 우리의 문화는 더욱 다양해지고 풍성해진다는 진리를 쫓는다는 일념으로 저자는 글을 썼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25

조선시대 명문가 비밀은 `道와 禮儀 정신`

2004년부터 조선 명문가를 찾아 그들의 이상과 정신을 탐구해 온 뿌리회가 펴내는`조선의 양반문화`시리즈 2번째 책인 `명문가, 그 깊은 역사`(글항아리)가 나왔다.16세기 사림의 대표 인물인 조광조의 한양 조씨 정암 가문, 성삼문 등 수많은 관료와 학자를 배출한 창녕 성씨 청송·남명 가문, 영일 정씨 송강 가문, 풍산 류씨 겸암·서애 가문, 무안 박씨 무의공 가문, 해주 오씨 추탄 가문, 파평 윤씨 명재 가문, 한양 조씨 주실 가문, 여주 이씨 퇴로 가문 등 모두 10개 명문가를 다뤘다.이들 가문은 단순히 관료를 많이 배출하거나 권력을 누린 것이 아니라 유교의 `예(禮)`와 `덕(德)`을 조선 명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명가의 탄생은 조선시대에 예학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 가문에서 벼슬길에 대한 열망, 탄탄한 경제력, 학맥과 혼맥의 단단한 결속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긴 했으나, 그 중심에는 항상 권력과 힘보다는 도와 예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16세기 사림의 영수로 맨 앞자리에 놓이는 조광조의 한양 조씨 가문은 원래 공신세력이었다. 조선왕조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가문이다. 선조 조인옥은 고려 말 이성계에게 위화도회군을 종용한 인물이며, 조영무, 조연, 조온 등 한양 조씨 일원은 이성계 측에 참여해 활동하고 그 성과로 대거 봉군되었다. 당시 이성계와 중첩해 혼인관계를 맺은 것이 주효했다. 한양과 경기 지역 일대에 세거하던 한양 조씨는 재지 기반을 확대해나갔고, 15세기 중반에는 일부 계파가 용인 지역에 정착했다. 이러던 것이 조원기가 16세기 초반 소릉(문종비) 복위를 지지하면서 한양 조씨는 정치적 성향이 변하게 됐다. 점차 사림 성향으로 전환해갔던 것이다.조선 중기의 학자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지금 문벌이 성하기로는 광주 이씨가 으뜸이고 그다음이 우리 창녕 성씨다”라고 했듯, 창녕 성씨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문가 집안이다. 성삼문, 성담수, 성현, 성수침, 성혼 등 이름을 빛낸 수많은 관료와 학자가 이 집안에서 나왔다. 성여완이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고, 그의 세 아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해 벼슬에 나갔다. 이후 성충달의 아들 성세순은 이조참판까지 이르렀다. 연산군과 중종 때 모두 벼슬생활을 한 그는 이조참판 때 그의 집에 벼슬을 구하러 오는 자가 없을 정도로 청렴했으며 죽었을 때 김안국이 “조정은 양좌를 잃었다”라고 할 정도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 책에서는 성세순을 기점으로 그의 아들인 성수침과 손자 성혼으로 이어지는 창녕 성씨 가문의 학문적 위상을 주로 다루고 있다.저자들은 “이들 가문에서 벼슬길에 대한 열망, 탄탄한 경제력, 학맥과 혼맥의 단단한 결속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긴 했으나 그 중심에는 항상 권력과 힘보다 도와 예의 정신이 자리했다”고 평가한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4-04-18

대한민국 `정치지도` 한눈에

삼국지 인물과 대한민국 유명 인사들을 정교하게 접목시켜 지난해 말부터 한국 페이스북을 뜨겁게 달구며 화제를 모았던 고려대 한문학과 강사 김재욱씨의 `삼국지 인물전`(휴먼큐브)이 출간됐다.저자가 페이스북에 올려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즉흥적 인물평을 엮은 이 책은 한 마디로 삼국지로 풀어보는 대한민국 인물열전이다. 우리에게 친근한 삼국지 인물들과 우리 현대 인물을 절묘하게 매칭 시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삼국지 인물전`책 속에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유명 인사 32명의 인물이 나온다.문재인은 유표, 박원순은 유언, 진중권은 예형, 조국은 조자룡, 김한길은 원술, 안철수는 원소 등 언급되는 인물들의 살아온 행적과 삼국지 내용 중 비슷한 인물을 비교했다.그럼으로써 딱딱한 인물평이 아닌 시대와 교감하는 살아있는 인물전을 만날 수 있다.문재인을 풍채 좋고 사람 좋은 성인군자였지만 천하를 경영할 뜻이 없었던 유표에 비유하면서 유비나 조조 같은 인물로 성장하려면 대중 속으로 뛰어들라고 조언한다. 김한길은 능력도 없으면서 전국옥새에 탐을 내 패가망신의 교과서가 된 원술에 비유했다. 안철수와 짝이 된 원소는 겉으로는 너그러운 것 같지만 시기하는 마음이 강하고 꾀는 많지만 결단력이 부족한 인물이다.특히 오는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요동치는 정치국면을 날카롭고 정확하게 인물 중심으로 파헤쳐 대한민국의 `정치지도`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김재욱씨는 “현대 인물의 경우 그 사람에 대한 전망과 바람을 덧붙였다. 한 사람의 행적을 쓰는 것이므로 사실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며, 신중하게 쓰되 재미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김씨는 또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삼국지의 등장인물과 현대 인물의 모습이 아주 많은 부분에서 흡사하다고 느낄 것인데, 인물 비교와 글의 내용이 독자의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도 당연히 있을 것이나, 작가의 개인적인 견해라 여기고 해량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재미있게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주면 다행”이라고 바람을 나타냈다.“혹시 안철수가 야권 단일 후보가 되어 2017년 대선에 나선다면? 진다. 현재와 같은 밋밋한 장수 구성에 민감한 사안은 모조리 피해가는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이길 수 없다. 안철수의 지지율이 높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태도와 신념을 쉽게 뒤집는 모습을 보면서 안철수를 싫어하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아진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가 원소처럼 피를 토하고 죽지 않으려면 이래야 한다. 책임 소재가 확실한 사안은 명확히 따져 묻고 답해야 한다. 정치권 밖에 있는 인재를 선거에 내보내야 한다. 지금처럼 민주당 2진급 인물을 가지고 싸워서는 지방 토호 세력밖에 될 수 없다. 언론인처럼 논평▲ 김재욱 고려대 강사하지 말고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원소처럼 옳고 그른 것을 섞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현안, 예를 들어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통합진보당 사태, 민영화 논란에 대해 확실한 의견을 제시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이런 정도의 행동은 보여줘야 야권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허상에의 집착은 파멸을 부를 뿐`중 50면)경북 봉화 출신인 저자 김재욱은 동국대 한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한문교육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을 수료했고, 고려대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18

연구실에 등장한 사지 잘린 시체 두 구…

요시가와 에이지 문학상, 나오키상 등을 받으며 일본 환상 미스터리의 대가로 불리는 미나가와 히로코의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문학동네)가 출간됐다. 8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면서 본격 미스터리계의 대표작가로 자리잡고 있는 미나가와 히로코는 환상적인 전기소설, 미스터리, 시대소설 등 장르를 초월할 정도로 독특하고 역사 감각이 아주 색다르고 탐미적인 작품들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2011년 발표한 장편소설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역시 본격 미스터리라는 큰 틀 안에서 미나가와 히로코만의 개성을 뚜렷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2012년 제12회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수상하고 `책의 잡지` 2014년 추천 문고 미스터리 부문 1위에 올랐으며, 출간된 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를 비롯해 거의 모든 미스터리 랭킹에서 3위 안에 드는 기록을 세웠다.18세기 런던, 사회적인 편견 속에서도 해부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던 외과의사 대니얼 버턴의 연구실에 정체불명의 시체 두 구가 등장한다. 사지가 잘린 소년과 얼굴이 짓뭉개진 중년 남자. 평소 연구와 실습을 위해 도굴꾼이 무덤에서 파헤친 시체를 암암리에 구입해왔던 대니얼은 경찰의 추궁으로 궁지에 몰리지만, 맹인 치안판사 존 필딩은 그의 연구에 흥미를 표하며 사건 해결에 협조해줄 것을 요구한다. 총명한 판단력과 강단을 지닌 수제자 에드워드와 심약한 천재 세밀화가 나이절을 비롯한 다섯 명의 제자는 스승과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시체에 얽힌 수수께끼를 쫓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런던으로 올라온 한 소년의 비극이 밝혀진다. 소년을 죽인 이는 누구인가? 시체의 팔다리는 왜 잘렸으며, 어째서 해부실 난로 뒤에 숨겨져 있었는가? 완전범죄에 가까운 사건의 전모가 가혹한 시대상의 묘사와 함께 우아하고도 스릴 넘치는 문체로 그려진다.`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중이던 1770년대의 런던은 빈곤, 실업문제, 생활환경과 노동환경의 악화 속에서 향락과 퇴폐, 그리고 범죄가 공존하던 도시였다.일본 출간 후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나가와 히로코는 “당시 런던에선 예로부터 내려오는 미신과 신식 의학이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사치스러운 상류계층과 밑바닥 하층민의 대비가 심했기도 하고요. 직접 살라고 하면 싫을 가혹한 시대지만, 멀리 떨어져 바라보니 무척 흥미로웠습니다”라고 말했다.추리소설사 최고의 명탐정 셜록 홈스와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가 활약했던 시기로부터 한 세기 전을 배경으로 삼은 이 작품은 그야말로 미스터리 팬들의 구미를 자극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18

우리時代 젊은 세대의 초상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꾸준하고 성실하게 작품활동을 이어온 김금희의 첫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창비)이 출간됐다.등단 이후 5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차분히 가다듬어온 열편의 소설이 묶였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공간을 찾아나가는 우리 시대 젊은 세대의 초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가운데, 주변을 돌아보는 속 깊고 섬세한 시선이 풍성한 이야기의 결 안에서 따뜻하게 빛난다.김금희의 소설은 어느덧 우리 시대의 보편이 돼버린 막막한 현실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집을 나가 자취를 감추었거나(`너의 도큐먼트`), 허울뿐인 베트남 참전 경험만 믿고 허황하게 사업을 벌이다 IMF에 떠밀려 좌초되거나(`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일평생을 몸 바쳐 일했지만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에서 밀려나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아이들`). 그다음 세대에게도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갓 상경해 입사한 회사를 수습기간도 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거나(`우리 집에 왜 왔니`), 다단계 회사에 들어가 몇달씩 헛된 꿈을 쫓기도 하고(`아이들`), 서울의 변두리를 전전하다 회사 사무실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거나(`릴리`), 고단한 일상을 견디며 철거 중인 오래된 판자촌을 지키고 있다(`집으로 돌아오는 밤`).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야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김금희의 소설이 돋보이는 점은 자신이 처한 곤경에 유난 떨지 않고 손쉽게 환상에 기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어정쩡하게 타협하지도 않는 차분한 균형감각이다. `너의 도큐먼트`의 주인공은 어머니의 제안에 따라 집 나간 아버지를 찾으러 지도를 들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는데, 거리거리를 계획 없이 어슬렁거리는 그 하릴없는 여정의 사이에, 옛 친구의 죽음을 전해듣고 해묵은 부채감에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나란히 놓인다.이 탐색은 결국 아버지의 현재와 친구의 죽음 양쪽 모두와 지금의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현실적인 거리감을 확인하는 데서 그치게 되어 있지만, 소설은 그 공백의 자리로부터 자신만의 길을 어렴풋하게 열어나가는 주인공의 성장을 담담하게 그려 보인다.그의 여러 소설들이 세대를 품 넓게 아우르는 것도 그런 미덕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산과 인천의 목재공장에서 평생을 일해온 아버지의 신산한 생애와, 변두리 아파트에 집을 마련해 이사하던 날 정육점에서 구한 황소 코뚜레에 중산층의 소망을 의탁했던 어머니의 삶을 이해해가는 이야기이다.▲ 소설가 김금희아버지와 어머니가 힘겹게 이루어낸 변두리의 삶을 벗어나리라는 꿈을 꾸며 방황했던 주인공은 이제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의 곁에서 언젠가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나무의 부력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 아슬아슬한 생의 부력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시간을 이어주고 있음을 깨달아간다.다양하고 개성 있는 인물들이 품고 있는 다채로운 이야기와 그들의 사연을 요령 있게 갈무리해내는 솜씨 역시 김금희의 소설을 특징짓는 미덕이다.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은 재수에 실패한데다 덜컥 임신까지 해버린 스물한살 주인공의 막막한 상황이 이야기의 중심이지만, 그 고민 못지않게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이 지닌 저마다의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특유의 풍성한 서사의 결을 만들어낸다.자신이 발 딛고 선 현실의 곤경을 차분히 응시하면서 주변의 이들에게 따뜻하고 애틋한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일, 그리고 조심스레 고개를 기울여야 알아챌 수 있는 희미한 기척으로 그들과의 거리를 가늠하는 일. 그것이 김금희의 소설이 세상에 응답하는 우직하고 정직한 방식이다. 담담한 듯 애틋한, 건강한 그 시선이 더욱더 깊고 넓어지면서 만들어갈 아름다운 소설의 결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도 좋겠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11

`조선 최고 침의` 허임 파란만장한 삶

조선 최고의 침의(鍼醫·침술로 병을 다스리는 의원) 허임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소설 `허임`(전 3권)이 출간됐다.`낮은 한의학`의 저자인 이상곤 한의학 박사와 100여 편의 소설을 집필한 성인규 작가의 공동 저작으로, 4년 동안의 기획을 거쳐 탄생한 역사소설이다.관노 출신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광해군과 선조에게 침을 놓았던 전설적인 침술가 허임(1570~1647·추정)의 일대기가 장편소설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동의보감`의 저자이자 당대 명의였던 허준과 동시대를 살았던 허임은 선조와 광해군, 인조 때까지 침의로 활동했다. 말년에는 `침구경험방`을 저술해 중국과 일본의 침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서출이나 양반가이던 허준과 달리 허임은 노비의 아들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지녔으나 침 하나로 어의에 당상관까지 올랐다.책은 노비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취약점을 딛고 끊임없는 견제와 모함을 받았음에도 어의에 이르는 허임의 일대기를 대하 역사소설로 풀어나간다. 성인규 작가가 풀어나가는 17세기 혼란스러웠던 조선중기의 사회상과 전개, 그리고 현직 한의사인 이상곤 원장의 치밀한 의학적 고증은 책의 재미를 더한다.당파 싸움으로 얼룩진 권력자들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임금, 공이 있는 자들을 역적으로 몰아세워 죽이거나, 전란 중에 사사로운 이득을 탐내 아군을 사지로 몰아넣는 자 등 역사적인 기록을 토대로 해 책에 담아냈다. 또한 전란 와중에 시작된 선조와 광해군 사이에 보위를 둘러싼 미묘한 신경전과 선조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당대 명의였던 허준과 허임의 경쟁 등도 다루고 있다.장악원 악공이었던 허억봉은 자신의 말실수로 인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이고, 야반도주하여 숨어 지낸다. 그의 아들 허임은 술만 마시고 가정은 돌보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한다. 아버지 대신 돈을 벌던 어머니가 쓰러지자, 사방팔방 용한 의원을 찾아 헤매이지만 천한 신분과 가난 때문에 그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러던 중 약재를 찾으러 간 노비촌에서 우연히 마소를 돌보던 노인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침구술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11

투박하지만 깊은 울림 주는 `詩人 내면`

문학 전문기자이자 소설가로도 활동중인 정철훈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빛나는 단도`(문학동네)가 출간됐다. 표제작인 `빛나는 단도`는 시인의 내면을 솔직하게, 그래서 투박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전해준다. 태생적인 불구, 그래서 고단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온 꼽추 친구는 시인에게 죽음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이 죽음의 충동은 역설적으로 술잔을 채우고 춤을 추는 역동적인 삶을 떠올리게 한다.앞으로만 진행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모두는 지나가는 존재. 미래는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게 불안하지만, 이 세상이, 가혹한 시간이 볼 수 있도록 피를 묻히는 것. 그것이 정철훈에게는 시가 아닐까. 이번 시집은 그의 언어의 피, 시의 피를 위해 비밀 주머니에서 그가 꺼내든 “빛나는 단도”일지도 모른다.광주에서 태어나 소련 해체 이후 본토에서 러시아 관련 학위를 받은 시인은 이 독특한 이력을 바탕으로, 특유의 강건한 문장을 무기 삼아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역사와 시대를 작품 속에서 다뤄왔다. 한국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된 아버지의 사연과 미증유의 살육을 겪었던 고향의 역사, 그리고 찾아온 현실 사회주의의 패퇴. 역사적 사건은 그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하여 남다른 가족사와 개인적 체험을 매개로 한 그의 시는 `북방`에 얽힌 민족사를 시 안에 적극 끌어들이는 한편, `광주(光州)`로 상징되는 한국 근대성의 파산 과정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역사와 현실을 노래했다. 정철훈의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단단한 힘이 거기 있었다.그러나 이번에 출간된 `빛나는 단도`는 광주와 러시아와 관련된 소회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빛나는 단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웅숭깊게 스스로의 내면을 주시하는 시인의 시선과 이어서 따라오는 자신을 향한 질문이다. 자신에게 시가 무엇인가 하는 시인으로서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 “문자를 해득하기 전의 나를 규명하는 일은 그래서 이유 있음이다”(`독서의 습관`)라는 시구가 이번 시집의 열쇠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화려한 수사적 성찬은 그의 시가 보여주는 바가 아니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전철희는 “다층적 사유를 적확하게 전달하려는 시인에게”, 과장과 애매성을 수반하고 현실과 차폐된 경우가 많은 화려함은 미덕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하여 해설에서 “정철훈의 강건한 말투가 사상적 고투의 흔적이라면 그 궤적을 복기하는 것보다 충실한 독해법을 상상하기 힘들다”면서, 그 작업에 기여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시집 속으로 들어간다. 명료하고 호방한 정철훈 시의 언어에서 “투박한 껍질 속 알을 감춘 진주처럼” 심원한 통찰을 읽어내는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11

한국사회 팽배한 물신주의인간성 외면·배반하는 과정…

문학동네작가상(2004)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 전수찬(46)의 세번째 장편소설 `수치`(창비)가 출간됐다. 등단 당시 `개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삶에 관한 녹록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신수정)는 평을 받은 그가 본격적으로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도 연약한 감정, `수치`를 치밀하게 파헤친다.주인공 원길은 아내와 함께 딸 강주를 데리고 북한을 탈출했다. 그러나 아내는 몽골사막을 건너다 쓰러지고 말았고, 원길은 그런 아내를 사막에 남겨둔 채 강주를 업고 돌아섰다. 이후 남한에 온 원길은 같은 처지의 영남과 동백을 만난다. 그들은 모두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살아남아 생을 이어간다는 수치심에 물들어 있다.동백은 스스로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손가락질 받는 것으로 속죄하려 하지만 죄책감을 덜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동백이 떠난 뒤에도 원길은 매순간 자책과 자학을 반복한다.아내를 버리고도 아무 일 없던 듯 살아가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라는 그는 스스로를 “죽음을 지키는 묘지기”(184면)로 규정하며 다만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살아간다. 반면 영남은 새 생활을 시작하겠다며 올림픽을 유치한 지방도시로 이사를 가지만 그곳에서도 삶과 죽음 사이의 처절한 번민은 계속된다.그러나 `수치`는 탈북자들의 “험난한 인생역정과 사회적 곤경”(한기욱, 추천사)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 작품이 아니다. 전수찬은 주인공들의 겪고 있는 내적 고통을 고도로 자본화된 한국사회, 그 안에서도 물신성이 첨예화되는 사건 하나에 맞붙인다.영남이 이사 간 도시의 올림픽 선수촌 공사현장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유골이 다량 출토된다. 전국은 민간인 학살의 범인이 미군이냐 인민군이냐 하는 진실공방으로 떠들썩해지고, 정부는 인민군의 범행이라는 공식입장을 내놓는다. 그러나 정부의 판단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마을로 몰려와 공사를 중단하고 진실을 규명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길 바라는 지역주민들과 심한 갈등을 빚는다.`수치`의 주인공들은 남한 사회의 소수자이자 퇴락한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제삼자로 자리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들의 시선을 통해 한국사회의 팽배한 물신주의가 인간성을 어떻게 배반하는지 폭로한다.민간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상처 앞에서 정부와 지역주민, 정부를 불신하는 시위대 모두가 자신의 물질적, 정치적 이득을 쟁취하기 위해 날을 세운다.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졌어야만 했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는 어느 쪽에서도 고려되지 않는다.날이면 날마다 삶과 죽음을 새롭게 발견하고, 삶이 내뿜는 아름다움에 매번 좌절하고 마는 영남과 원길의 애처로운 고뇌가 스스로의 삶을 물질에 저당 잡히고 염치를 파한 채 살아가는 이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전수찬이 `수치`를 집요하게 이끌고 온 것은 최소한의 윤리조차 내던진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소설가 전수찬복잡한 이해관계와 단단한 권력구조, 인간성을 탈각시키는 자본의 원리에 위태로이 떠밀려가는 사회에 대한 안쓰러움이 작품 전반에 짙게 묻어난다.전수찬은 이러한 사회· 윤리적 사유의 얼개를 하나의 사건에 밀착시켜 탁월하게 표현했다. 탈북자들의 실존적 고민과 이 땅의 윤리적 척박함이 뒤섞여 명과 암의 앉은자리를 다시금 더듬어보게 한다.작품의 거개가 대화로 이루어졌음에도 사건의 진행에 빈틈이 없고 주인공의 내면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은 `수치`가 이룬 또 하나의 성취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04

어시장 체험이 그대로 詩가 되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시어에 삶의 신산스런 목소리와 날것의 냄새를 덧입히는 시인 성윤석(48)이 어시장 `일용잡부`가 돼 돌아왔다. 이 시집에는 시인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부둣가를 누비며 틈틈이 쓴 시 74편이 수록돼 있다. 극장을 드나들던 소년(`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은 묘지 관리인(`공중 묘지`)을 거쳐 지금은 남쪽의 한 바닷가 도시(마산)에 정착해 있다. 스스로를 `잡부`라 칭하는 시인은 어시장에서 냉동 생선상자를 배달하거나 냉동생선을 손질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인은 그렇게 한동안 시를 잊고 지내다가 그곳의 상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던 중 모처럼 시심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시집에는 멍게를 비롯해 문어, 상어, 해월(海月, 해파리), 사람이 된 생선(임연수), 빨간고기(적어), 호루래기(오징어의 새끼) 등 많은 수산생물들이 주요한 시재로 등장하는가 하면 요구, 통발, 유자망, 딸딸이 등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어로 도구들도 자주 보인다. 문학평론가 오형엽은 이를 두고 성윤석이 자연 생태의 한 극단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체험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결국 성윤석 시의 비밀은 `체험의 강도`와 `실험의 밀도`가 강력하고 집요한 `기억`의 힘에 의해 합체되면서 두 몸이 아니라 한몸을 이루는 데 있을 것이다.” ―오형엽 해설 `체험의 강도와 실험의 밀도` 부분이번 시집에서의 성윤석은 약 200년 전 진해(마산 진동의 옛 지명)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당정 김려가 우리나라 최초의 어족 도감 격인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쓰던 모습과 닮았다. 시인은 스스로를 부둣가에 유폐하고 수면 위로 끌려나와 퍼덕이는 생선처럼 불가능한 것을 갈구하지만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그 서러운 힘은 삶의 비릿함만 더할 뿐이다. 희망은 너무 멀리 있고 슬픔만이 번민의 몫으로 돌아오는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와 닿지 못할 빛은 감당하기 어려운 밝기로 시인을 향하고 있다. 달이 너무 환해 무서운 월명기(月明期)에 심연으로 깊이 숨어드는 바다짐승들처럼 시인은 세계의 명징함을 피해 끊임없이 침잠하는 중이다. 그렇게 시인은 오늘도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괴로워 의도적으로 의식을 지워내고 있다. 독자는 침잠의 그 어느 지점에서 시인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렬한 투쟁이 일순 정지하고 시의 미학이 절정으로 치닫는 것을 보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04

세상의 외로움 보듬는 부모 잃은 두 자매

마치 변함없이 마음 편한 집 앞 골목처럼, 언제나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처럼, 항상 돌아보면 거기서 따스한 위로의 메시지를 발신하는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50). 그녀가 이번에는 외로운 모두를 위해 `함께 이야기하기`에 대한 소설을 펼쳐 보인다.고독한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비밀의 홈페이지 `도토리 자매`. 두서없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누고 싶은데 말할 상대가 없는 우울한 날, `도토리 자매`에게 메일을 보내면 반드시 답장이 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처음으로 올려다본 파란 하늘의 상쾌함부터 저녁 식탁에 올릴 따끈한 수프 한 그릇의 온기까지. 아무리 소소한 이야기라도 마음을 담은 대답이 있으면 외로움이 사라진다.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은 날, 정말로 외로운 사람들만 공유하는 비밀의 주소가 있다. 언제든 메일을 보내면 언젠가는 답장이 오는 홈페이지 `도토리 자매`. 사랑하는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 친척 집에서 보낸 힘겨운 세월, 설레는 연애의 끝, 좋아했던 사람과의 아쉬운 이별. 말을 잃었던 시간이 있었는가 하면 마냥 도망쳐 버린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머물 곳을 찾은 `도토리 자매`는 지금 여기서 고독한 사람들을 위해 답장을 쓰고 있다.요시모토 바나나의 따스한 신작 장편소설 `도토리 자매`(민음사)의 제목 `도토리 자매`는 자매의 이름에서 따온 필명이다. `돈코`와 `구리코`(일본어로 `돈구리`는 `도토리`를 의미한다.) 자매는 산부인과 병원 뜰에서 도토리를 주우며 딸아이들의 출생을 기다린 아버지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과 `도토리`라는 이름을 나누어 붙이자는 어머니 두 사람의 귀여운 마음이 담긴 이름을 받았다. 자매가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 남겨 준 것은 특이한 이름과 사랑받은 기억뿐. 몇몇 친척들의 가정을 거치며 살아오던 자매는 각자 힘든 시기를 거쳐 결국에는 두 사람만의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 `부모님에게 받은 따스한 마음을 잊지 않고 세상에 돌려주고 싶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떠난 온천 여행에서 그런 서로의 생각을 확인한 두 사람은 비밀리에 `도토리 자매`라는 홈페이지를 열고, 이메일을 모집하고, 모르는 사람들이 보내오는 무수한 편지에 답장을 하기 시작한다. 활달한 연애 지상주의자 돈코와 내성적이고 신중한 구리코,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른 자매이지만 둘의 삶은 `도토리 자매`를 운영하면서 점차 같은 색으로 물들어 간다.세상을 향한 순수한 애정, 그런 것이 내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만 해도 위로받는 순간이 있다. 언제 어느 작품을 집어 들고 언제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에는 그러한 위로가 존재한다.요시모토 바나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 속에 그녀가 좋아하는 여행지 풍경이 살짝 삽화처럼 들어가기도 하지만 아예 라틴아메리카나 하와이를 무대로 한 본격적인 여행 이야기를 발표하기도 한다.특히 이번 작품에서 도토리 자매의 언니 돈코가 치유를 경험하고 그 마음을 전하는 장소는 바로 `서울`이다. 다정한 한국인 남자 친구와 함께 떠난 서울 여행에서 돈코는 자기 안의 슬픔을 위로받고 그 이야기를 자신들의 홈페이지인 `도토리 자매`의 메일 계정을 통해 가득히 전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04

“지금 여문 건 고통의 강 건너 왔기 때문”

“사랑하는 일이 가슴 아픈 일 일지라도멈출 수 없으리상처받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가을바람 불면 그 바람 온 몸으로 맞고바람이 잠들면일어나 가던 길 다시 가리라계절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면언제 흔들려 내공을 쌓으랴작은 열매가 바람에 흔들,흔들거리면서 익어 가듯이내 사랑도 가을바람에 붙들려후려치는 아픔을 견뎌야 익어가리라성숙하기 위해서 사랑은 아픈 것인가가을이 가고 바람이 잠들면가던 길 다시 가면서 말하리라이 세상에 아프지 않는 사랑은 없다고지금 여문 것은한 때 긴 고통의 강을 건너온 것이라고바람이 잠들면 말하리라”(박철언 시 `바람이 잘들면 말하리라`)박철언사진 전 정무장관이 세 번째 시집 `바람이 잠들면 말하리라(순수문학)`를 최근 출간했다.20여년 전부터 시인으로 활동해온 박 전장관은 `작은등불하나`, `따뜻한 동행을 위한 기도` 등 두 권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다.공직을 떠나 야인이 된지 14년이 되는 박 전 장관은 시인으로서도 잘 알려져 2005년 `김만중 문학상` 대상을 비롯해 2008년 `순수문학작가상`, 2013년 `세계문학상` 시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다.박 전 장관은 이번 시집을 통해 여러 대상에 대한 그리움의 마음을 담고 있다. 특히 사랑에 상처받은 영혼들이 그 상처를 통해 더욱 성숙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쉽고 아름다운 단어로 표현해 내고 있다.시집에 대해 오양호 문학평론가는 “단순한 연가의 영역을 넘어서는 어떤 숭고의 색채가 시의 행간에 배어난다”며 “어휘의 절제와 압축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박영하 시인(월간순수문학 주간)은 `축하의 글`에서 “박철언의 시를 보면 감성이 따뜻한 분이구나 느낀다. 가슴을 울리는 시, 영원한 서정시인이다”라고 말했다.한편 성주 출신인 박 전 장관은 제6공화국 시절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장관을 역임한 3선 국회의원으로 현재는 변호사와 대구경북발전포럼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8

詩는 기도와 혁명에 가깝다

강은교, 권혁웅, 김언, 박정대, 박주택, 박형준, 손택수, 신현림, 여태천, 유홍준, 이기인, 이민하, 이승희, 이영주, 이재무, 장석주, 정끝별, 정병근, 정호승, 허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20인이 모였다. 전통적인 서정시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가는 실험시까지, 다양한 시의 면면만큼이나 필자들의 구성 역시 다채롭다. 이들이 시를 처음 접한 계기는 무엇이고, `천형`이라는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인 계기는 무엇일까? 서정시만큼 아련하고 아름다운 사연이 있었을까? 전통을 깬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시만큼이나 놀라운 것들이 존재할까?`시인으로 산다는 것`(문학사상사)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20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한데 모은 책이다. 특히 시인으로서의 삶과 창작론에 대해 쓴다는 큰 틀 외에는 형식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시인들이 각자의 개성대로 쓴 20편의 글들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시인들이 시에 대해서 생각해온 것, 이제 시의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모아보는 자체만으로도 21세기 초반 우리 당대의 시에 대한 생각을 함께 증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개성 넘치는 에세이집인 동시에, 시인을 꿈꾸는 미지의 후학들에게 문학적 지평을 확장해주는 지침서가 돼줄 것이다.책머리에서 문학평론가 권영민 교수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특별한 재능이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직업들의 호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 화가 음악가 등은 `집 가(家)`를 쓰고, 가수 목수 등은 `손 수(手)`를 쓴다. 그런가 하면 의사 교사 목사 등은 스승 사(師)`를 쓰고, 변호사 박사 회계사 등은 `선비 사(士)`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같은 문학 분야에서도 작가 소설가 평론가처럼 시가(詩家)라 하지 않고 `사람 인(人)`을 써 시인(詩人)이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 시를 아름답고 초월적이며 고매한 정서의 표현으로 여긴다. 그러나 `아름답다`의 어원이 `앓다`이듯, `글`의 어원이 `그리워하다`이듯, 아름다운 시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오래도록 세상을 온몸으로 앓고 사랑한 이의 가슴에서만 나올 수 있다. 아름다운 시가 때로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시인이 자기 내면의 혼란과 진흙탕 같은 세상의 부조리를 힘겹게 뚫고 올라와 승화시킨 결과가 그 시이기 때문이다. 말(言)로써 절(寺)을 짓는 사람(人), 그가 바로 시인(詩人)이다.이 책에는 시인들이 습작생 시절에 느꼈던 감정과 현재 시인으로서 겪는 솔직한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왜 시를 쓰는지, 왜 시를 쓰려고 하는지, 왜 시를 써야만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을 만든다. 끝이 보이지 않고 정해진 답도 없지만, 이것은 시인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시는 기도에 가깝고 혁명에 가깝다. 기도에 가깝지만 인간과 시대에게로, 혁명에 가깝지만 언어와 저기-너머로 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를 얻기 위해서는 안 보이는 간절한 것들을 감각하라, 그리고 의심하고 물어라. 안 보이는 간절함에 천착하고 그 간절함에 대해 되물어라. 그것이 사랑이든 시간이든 죽음이든, 유토피아든 신념이든, 돈이든 밥벌이든 사람살이든, 새롭게 인식하고 감각하기 위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정끝별―시는 어디서 오는가)이 책은 시를 쓰는 사람에겐 어떻게 시인의 길을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나침반이며,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에겐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지 일러주는 동시에 시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좋은 지침서다. 모처럼 시인들의 향기로운 시와 흥미로운 삶 이야기에 한껏 취해볼 기회다. 읽는 이 모두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8

사랑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독특한 어법과 돌발적인 비유로 한국 서정시에 다채로움을 더한 개성적인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황학주 시인의 열번째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창비)가 출간됐다.`某月某日의 별자리`(지혜 2012) 이후 2년 만에 새롭게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사랑과 슬픔과 고독이 뒤섞인 고즈넉한 서정의 풍경 속에 감성적이고 “차가운 육감의 세계”(이근화, 추천사)를 펼쳐 보인다.더욱 원숙해진 시선으로 생(生)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아직 우리 시가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날것의 체험”(송재학, 발문)을 섬세하고 정갈한 언어로 갈무리한 시편들이 둔중한 울림 속에서 서늘한 감동을 자아낸다.“한사람의 젖어가는 눈동자를/한사람이 어떻게 떠올리는지 모르지만/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한다/그러나 과거를 잊지 말자/파탄이 몸을 준다면 받을 수 있겠니//숨 가쁘게 사랑한 적은 있으나/사랑의 시는 써본 적 없고/사랑에 쫓겨 진눈깨비를 열고/얼음 결정 속으로 뛰어내린 적 없으니/날마다 알뿌리처럼 둥글게 부푸는 사랑을 위해/지옥에 끌려간 적은 더욱 없지//예쁘기만 한 청첩이여/목이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좀 아프면 어때/아픔은 피투성이 우리가 두려울 텐데”(`얼어붙은 시` 부분)`사랑과 상처의 시인`으로 불려온 황학주 시인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가장 소중한 삶의 방식으로 여긴다. “온몸으로 서로에게 저물어가”(`진학`)는 사랑은 타자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길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하여 “아직 한번도 못 본/한사람을 위해 유랑하고 있는/시”(`백야`)는 “빨랫방망이로 두드려놓은/맑은 물”(`우물터 돌`)처럼 순결한 생의 바탕으로서 시인의 순정한 사랑과 다르지 않다.“숨도 쉴 수 없는/행복하게 외로웠던 순간들”(`그렇게 협소한 세상이 한사람에게 있었다`)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시인은 사랑의 불가해한 현상 속에서 삶의 근원과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어느날 야윈 눈송이 날리고/그 눈송이에 밀리며 오래 걷다//눈송이마다 노란 무 싹처럼 돋은 외로움으로/주근깨 많은 별들이 생겨나/안으로 별빛 오므린 젖꼭지를 가만히 물고 있다//어둠이 그린 환한 그림 위를 걸으며 돌아보면/눈이 내려 만삭이 되는 발자국들이 따라온다//두고 온 것이 없는 그곳을 향해 마냥 걸으며/나는 비로소 나와 멀어질 수 있을 것 같다/너에게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사랑은 그렇게 걸어 사랑에서 깨어나고/눈송이에 섞여서 날아온 빛 꺼지다, 켜지다”(`겨울 여행자`전문)/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8

쉬운 언어, 근데 왠지 생경한…

기존 `시`의 모습에서 철저하게 벗어나 전혀 새로운 시의 문법을 보여주는 시인 이준규(44)의 다섯번째 시집 `반복`(문학동네)이 출간됐다. 네번째 시집 `네모`와 한 주 상간으로 연이어 출간된 이번 시집은 정직하고 그래서 강렬한 제목 아래 55편의 시를 담고 있다. 각 시편의 제목만 훑어보아도 이번 시집의 성격을 짐작해볼 수 있다. 동일하거나 조금 변주된 비슷한 제목의 시들이 번호의 구분 없이 놓여 있는데 하나의 단어가 어떤 실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보여줬던 이준규의 시를 줄곧 따라 읽어온 독자들이라면 이러한 구성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일상적이고 어렵지 않은 단어와 그것으로 이뤄져 있는 문장이 이준규를 통해 시라는 옷을 입고 태어나면 지금까지 만나본 적 없는 생경한 `시`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의 시는 소통을 거부한 난해한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것은 그의 시가 맥락이 있는 이야기 혹은 정보 전달의 기능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문학평론가 송종원이 유아기 때 처음 모국어를 접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 이번 시집의 해설을 시작하고 있고 이준규가 언어를 대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익숙한 단어를 학습된 의미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감각적 울림, 혹은 그것을 둘러싼 다른 상황이나 감각을 통해 대상을 새로이 인식하는데 그것은 마치 말과 글을 모르는 시기의 언어감각을 다시 되살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이를테면 이준규가 그리는`딸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과일이 아니다.“딸기가 그릇에 담겨 있다. 딸기는 하얀 바탕에 노란 꽃무늬가 있는 손바닥 크기의 그릇에 담겨 있다. 딸기는 별로 크지 않은데, 반으로 잘려 있다. 절단된 딸기 무더기. 딸기는 작은 꽃무늬가 있는 하얀 그릇에 담겨 있다. 나는 그것을 하나 둘 먹기 시작한다. 딸기를 먹으니 기분이 좋고 딸기를 먹으니 가슴의 통증이 있고 그렇게 딸기를 계속 먹으니 가슴의 통증은 사라진다….”_ `딸기`전문조금도 어렵지 않은 언어들로 이뤄진 이 시가 생경하게 느껴진다면 그간 우리는 `딸기`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딸기`에 얽힌 이야기나 `딸기`를 매개로 해서 얻어진 감정, 그것을 써내려간 것이 `시`의 익숙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준규는 `딸기` 자체에 집중한다. 주변의 다른 대상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결국은`딸기`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딸기`가 반복될 때마다 그것이 읽는 이의 내부에서 다른 감각들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준규의 시에서 보여지는 반복은 언어 자체가 가진 다양한 감각의 울림을 확인하게 하는 실험인 동시에, 의미의 부재를 확인하는 `포르트-다` 놀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 이준규그런데 이준규의 시에서 부재하는 것은 의미만이 아니다. 그의 시에 특히 많이 등장하는 말은`그것`이다. 언어의 불확정성과 가변성만큼이나 규정하기 어려운, 따라서 말의 움직임과 그 관계 속에서 매번 다르게 그 존재와 가치를 따져 물어야 하는 미지의 대상은 가령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그것은 비스듬히 추락한다. 모든 것처럼. 그것은 비스듬히 추락하는 희망이자 환멸이다. 그것은 손가락을 들어 그것을 긁는다. 그것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그것은 앉았다 일어나고 일어났다 앉는다. 그것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렇게 반복한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성실함을 보여주며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의 생은 단순하며 그것의 일생은 비극적이다….”-`그것` 전문의미의 부재를 확인하게 하는 시, 구체적 대상을 지워버린 시. 이런 시의 마지막에서 결국 의미도 실체도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드러나면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허무와 우울이다. 문학평론가 송종원이 시집의 해설에서 이준규의 시에서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펼치기도 전에 그것의 불가능성을 먼저 의식하는 사람이 떠오른다”고 언급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가 아닐까./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1

긍정적 가치라는 `투명성`에 의문 제기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베를린 예술대학)의 신작 `투명사회`가 출간됐다. `투명사회`는 `투명성`에 대한 독일 사회의 주류 담론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비판적 입장을 제시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Transparenzgesellschaft(투명사회)`(2012)와 우리 삶에 새로운 위기를 불러온 디지털 문명에 대한 진단을 제시한 `Im Schwarm. Ansichten des Digitalen(무리 속에서·디지털의 풍경들)`(2013)을 번역해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이 책에서 저자는 투명성의 전체주의적 본질에 대한 전복적인 성찰을 시도한다. 저자에 따르면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요구”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밖으로 표출시키고 정보로 전환시킨다. 반면 낯선 것, 모호한 것, 이질적인 것들은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된다. `투명사회`는 부패 근절과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결코 깨달을 수 없을 투명성의 시스템적 폭력성을 한병철 특유의 간결한 문체로 날카롭게 파헤친다.오늘날 `투명성`은 중요한 화두다.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이제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투명성이 강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투명성이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특히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등의 발달로 정보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공개되고 무제한적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투명한 사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음이 생겨나고 있다.그런데 `투명사회`에서 한병철은 이렇게 긍정적인 가치로 간주돼온 투명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통제사회라고 주장한다. 투명사회는 우리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 상태,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몰아넣는다. 이 사회의 거주민들은 권력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심지어 그것을 `자유`라고 오해한 채 스스로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이곳에서는 빅브라더와 파놉티콘 수감자의 구분이 사라진다.한병철은 투명성이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장악해 근원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 끌어들이는 시스템적 강제력,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고 신속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명성을 강요한다. 가속화의 압력은 부정성의 해체와 궤를 같이한다. 투명성은 낯선 것과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서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투명사회에서는 점차 타자가 소멸되고 나르시시즘의 경향이 강화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1

빚의 덫에 걸린 사람들에 던지는 위로

신용 불량을 넘어선 개인 파산 시대. 거대한 빚에 눌려 꿈도 사랑도 청춘의 것이 아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빚더미에 갇혀 버린 한 여성이 10일 동안 `상가수첩`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은 일을 유쾌한 입담과 현장감 넘치는 대화로 그린 소설 `청춘 파산`(민음사)이 출간됐다. `청춘 파산`은 제2회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청년 파산, 청년 실업 등 오늘날 청춘들이 당면한 위축된 현실을 상가수첩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백인주의 삶을 통해 실감나고 흥미롭게 그렸다. 숨 막히는 일상 속에서도 운명의 횡포에 휘둘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의 의지가 사채업자의 빚 독촉보다 끈질기고 강렬하다.김의경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인 만큼 `청춘 파산`은 자전적 성격이 짙은 소설이다. 인간 CCTV·위장 손님·두상 모델 등 발 닿는 곳마다 이어지는 지난날 아르바이트의 추억과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채권추심 서류, 사채업자들의 예측 불가능한 독촉 방식과 그들을 따돌리기 위한 주인공의 절박한 위장술에는 빚 독촉을 피해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로 일관했던 작가의 한 시절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서른 개가 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빚 때문에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은 작품 속 등장인물일 뿐만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에 빚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은 빚처럼 널려 있었다. 빚의 덫에 걸려든 사람들에게 이 소설이 아주 작은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혼자 공부한 지식으로 법정 서류들을 작성해 부당한 채권추심 세력과 맞서고 쳇바퀴같이 돌기만 하는 아르바이트 인생을 살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삶의 방향을 전진시키려는 모습은 쫓고 쫓기는 이야기적 재미와 인간 승리가 주는 감동뿐만 아니라 작가의 바람대로 위기의 청춘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하다.올해 나이 서른셋. 아르바이트라면 안 해 본 일이 없다. 하루에 세 번 취직하고 세 번 잘린 적도 있으니 이 정도면 알바 계의 고수. 일당 3~4만원짜리 알바 자리라고 해도 이토록 쉽게 취직할 수 있고, 또 이렇게 박력 있게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을 정도로 판단력 있는 백인주가 알바만 고수하는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제3신분`,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신용 불량자에다 개인 파산자다.인주의 아르바이트 인생은 엄마의 사업 부도와 함께 시작됐다. 신용카드는커녕 한 달에 30만 원 이상은 써 본 적도 없건만 자고 일어나니 빚더미 위. 귀신같이 알고 직장으로 몰려드는 사채업자들 탓에 웬만한 일자리는 엄두도 못 내던 그녀를 아르바이트가 받아 줬다. `알바 천국`의 세계에 입성한 인주는 인간 CCTV부터 시작해 나이트클럽 위장 손님, 인형 탈 알바, 고시원 총무 등 일일이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그러나 하나같이 자격을 따져 묻지 않는 `헐렁한`곳에서 일자리를 얻는다.불행 중 다행으로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져 억울하게 상속받은 빚의 그늘에서 벗어나는가 싶던 찰나, 이상한 공문서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1

`케냐 동물 고아` 야생복귀 양육과정 다뤄

대프니 셸드릭은 코끼리 신생아를 인공수유로 키우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이다. 케냐의 풍부하고 다양한 야생동물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 오랜 세월에 걸친 관찰, 올바른 사육법과 우유 조제법을 완성한 선구적인 노력은 수많은 코끼리와 코뿔소를 비롯해 많은 동물을 죽음에서 구해냈으며, 횡행한 밀렵으로 거의 절멸 상태가 된 케냐의 검은코뿔소를 멸종으로부터 구했다. `아프리칸 러브 스토리-고아 코끼리들의 엄마, 그 경이로운 날들의 기록`(문학동네)은 그녀의 가슴 따뜻하고 애틋한 회상록이다.이 책은 더불어 데이비드 셸드릭과 함께한 밀렵 근절 및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활동, 동물들의 인간적 측면, 동물 고아들의 야생 복귀를 위한 양육과정 등을 다룬 책이자 남다른 길을 걸어온 한 여성에 대한 초상이다.그녀는 수많은 동물 고아들과의 놀라운 관계를 이야기한다. 대프니의 첫사랑인 촉촉한 눈망울의 영양 부시, 작은 난쟁이 몽구스 리키-티키-타비, 부지런한 소길쌈새 그레고리 펙, 장난꾸러기 얼룩말 후페티, 그리고 대프니와 40년이 넘는 진한 우정을 쌓아온 거대한 코끼리 엘리너를 비롯한 많은 동물들이 그들이다.또한 이 이야기는 대프니와 차보 국립공원의 유명한 관리소장이던 데이비드 셸드릭과의 아름답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프니가 다방면에서 성과를 이루기까지,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셸드릭 야생동물 트러스트를 설립하고 나이로비 국립공원 내에 고아 탁아소를 세워 지금까지도 계속 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두 사람의 깊고 열정적인 사랑과 자연의 모든 것에 대한 데이비드의 탁월한 통찰, 그리고 데이비드의 때 이른 비극적인 죽음이 있었다.이 두 사람의 밀렵 근절 및 케냐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지난한 활동과, 동물들의 인간적 측면과 교감하는 능력, 동물 고아들의 야생 복귀를 위한 양육과정을 다루는 이 책은 따스함과 유머로 활기가 넘친다. 케냐의 다양한 야생동물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 오랜 세월에 걸친 관찰, 올바른 사육법과 우유 조제법을 완성한 선구적인 노력으로 코끼리와 코뿔소를 비롯해 수많은 동물을 죽음에서 구해낸 저자의 눈물이 고스란히 담겼다.대프니 셸드릭은 케냐의 자연과 야생동물을 사랑하며 그들와 함께 살아가고, 반밀렵 활동을 하며, 고아가 된 야생동물들을 돌보고 다시 야생으로 복원시키면서, 인간에 의해 절멸로 치닫던 케냐 야생동물 역사의 궤도를 바꾸기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한 여인이다. 단지 야생동물 전문가나 활동가 혹은 투사로써가 아니라 고아가 된 야생동물들의 엄마가 되어 그들과 가족의 사랑을 나누는 방식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동물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남다른 재능을 가져서만이 아니라 바로 야생동물들이 인간의 감정과 똑같은 감정과 개성을 가지고 있음을 오랜 시간을 거쳐 배우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그들의 본능과 감정을 존중하고 사랑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