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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우연과 필연 사이

필립 로스의 소설 ‘울분’. 책장을 덮은 후에도 꼼짝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뭔가를 손에 쥐었다는 감각인데 그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실이라고 해야 할까. 본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에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런 것들이 나를 읽고 쓰는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필립 로스의 소설을 처음 읽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대던 스무 살이었고 도서관의 책장을 뒤적거리면서 시간을 죽이는 중이었다. 나는 젊은 날을 휘발시키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떤 우울, 무기력,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 발붙이고 서 있다는 죄책감과 세상을 향한 묘한 분노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그날 책장에서 꺼내든 책이 필립 로스의 ‘울분’이었던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울분’의 주인공인 마커스는 신중하고 책임감 있으며 부지런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마커스에게 말한다. “너는 창창한 미래를 앞에 둔 청년이야. 네가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에 가지 않는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그것은 어쩌면 자식을 둔 흔한 부모의 염려일지도 모르고 시대적인 필연성이었는지도 모른다.아버지는 마커스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집착을 멈추지 않았다. 마커스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 위해선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는 일밖에 없다고 여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버지?” 마커스의 발악에 아버지는 대답한다. “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마커스는 집을 떠나 대학에 입학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고자 하고 어떤 규정도 위반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의 목표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전쟁에 끌려가지 않고 법대에 진학해 법률가가 되는 것이다. 그는 신중했고 조심했다. 어떤 부분은 미성숙하기도 했고 또 어느 부분은 놀라우리만치 자기중심적이기도 했다.그런 마커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단 하나의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채플 수업에서의 대리 출석이 발각되었을 때, 반성문과 매주 수업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자는 학생과장의 말을 수용할 수 없던 것 역시 일순간의 치기가 아니다. 삶의 이면에 고요히 잠복하던 어떤 울분이 그의 마지막 선택을 추동하게끔 했던 것이다. 마커스는 퇴학당하고 징병되어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 결과 마커스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작가는 말한다. ‘이러기만 했다면 또 저러기만 했다면, 모두 함께 모여 오랫동안 살고, 모든 일이 잘 풀렸을 텐데.’그렇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의 룸메이트나 애인이 아니었다면, 채플 수업이 아니었다면, 마커스는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과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비극으로 향하지 않는 길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는 것, 감정을 억누른 채 어떤 것도 분출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커스는 주먹으로 학생과장의 책상을 내리치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좆까, 씨발.”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만약 마커스가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버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지도 모른다. 학생과장의 뜻대로 하여 무탈하게 대학을 졸업했다면 그는 윤택한 삶의 법률가가 되었을 수 있다. 여러 선택의 끝에는 무수한 마커스의 미래가 있고 그것이 희극이 될지 비극이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어떤 삶을 살든 그의 끝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마주한 아버지가 외쳤듯이. “내가 옳았잖냐, 마커스. 내 눈에는 그게 오는 게 보였단 말이다.”위대한 작품 속의 등장인물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전혀 다른 결과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아주 사소하게 벌어지는 우연적 사건으로 인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운명으로 향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가 그러했듯이.미국의 작가가 써 내려간 이야기는 도서관을 두리번거리던 스무 살의 청년에게 닿게 된다. 청년은 작품을 읽으며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매우 평범한 어느 날의 사건이 삶의 어느 곳에 잠복해 있다가 어떠한 결과를 이끌게 될지는 끝내 두고 볼 일이다.

2023-03-07

‘퇴근후 카톡금지법’

우정구 논설위원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연결차단권’은 2016년 6월 ‘퇴근후 카톡금지법’이란 이름으로 국회에서 발의된 적이 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 법은 노동자의 사생활 보장을 위해 노동시간 이외 시간에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전화, 문자메시지, SNS 등 각종 통신수단을 이용해 업무지시를 내리는 행위를 규제하는 법안이다.실제로 법제화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이후 대기업 등을 중심으로 퇴근 후나 주말, 심야에 디지털기기를 통한 업무지시를 금지토록 하는 조치나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다.최근 정부가 근로자에게 근무시간 외 시간에 회사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지 않을 권리인 이른바 연결차단권 보장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한다는 소식이다. 유럽 등에서 시작한 이 법이 드디어 국내에도 상륙할 것 같다는 이야기다.프랑스는 연결차단권에 관한 법률을 최초로 입법해 2017년부터 시행해왔다. 노동자의 휴식 보장과 사생활 보호가 목적이다. 디지털시대라는 시대적 환경에 맞춘 입법이라는 점에서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시대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국내에서 이 법이 처음 논의될 무렵,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직장인 10명 중 9명이 이 법안에 찬성했다. 그러나 제도의 정착에 대해선 6명이 부정적 의견을 표시했다. 이유는 카톡상 직장과 가정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을 들었다.정부가 관련 법안을 준비하자 벌금까지 부과하면서 이를 규제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회사 일이 바쁘면 주말이라도 연락을 해야 하는데 이를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여론이다. 법이 능사일까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 사회가 너무 각박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03-07

주 52시간제의 유연화… 기대와 우려

정부가 근로가능 시간을 주 52시간에서 최대 69시간으로 늘리되 늘어난 근로시간만큼 장기휴가 등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근로시간 제도를 개편한다고 밝혔다.정부가 발표한 개편안에 따르면 현행 주 52시간제의 틀은 유지하되 주 단위의 연장 근로를 노사합의를 거쳐 월, 분기, 반기, 연단위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일이 많을 때는 한 주 69시간까지 일하고, 일이 적을 때는 휴가를 몰아서 쓸 수 있게 하는 근로시간 유연화가 개편안의 핵심이다.기업은 인력 운용을 쉽게 할 수 있고, 근로자는 근로시간 선택의 자유를 확대한다는 것이 법안 취지다.주 52시간제는 근로자의 과로를 막고 삶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로 문재인 정부가 2018년 도입한 제도다. 그러나 업종에 관계없이 획일적 규제로 근로자의 실질임금 하락과 중소기업 경영난 등의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특히 벤처기업이나 수출기업, 기업연구소, 중소기업 등에선 “정부가 더 일할 기회를 막는다”는 볼멘 목소리도 나왔다. 4차산업 혁명시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됐다.선진국과 비교해서도 우리 제도는 유연성을 잃고 있다. 일본은 연장근로시간을 월 100시간, 연 720시간 안에서 허용하고 독일은 6개월 단위로 운영하고 있다.정부의 이번 조치로 기업의 업무효율성과 생산성이 높아지고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 된다. 특히 지금처럼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근로시간제도 개선이 기업의 경쟁력을 뒷받침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다.그러나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가 행여 근로자의 과로를 조장하는 일은 없는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노동계에선 과로사회로 회귀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내고 있다.정부가 연장근로 단위기간이 길어지면서 장시간 근로가 집중될 수 있음을 우려, 4주 평균 64시간 근로준수를 의무화했다. 하지만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영세사업장에서 근로자의 근로시간 선택권이 얼마나 지켜질지도 사실상 의문이다. 정부가 마련한 근로시간 개편안이 사회적 공감을 얻어 성공리에 안착하길 바란다.

2023-03-07

‘이데올로기전의 도구’가 된 도심거리

심충택 논설위원 정치권의 진지전(陣地戰)이 갈수록 가관이다. 국회와 언론을 넘어 이제는 도심거리도 이데올로기전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최근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도심 주요교차로와 가로수, 전봇대를 가리지 않고 걸려있는 정치현수막 때문에 출퇴근길 스트레스가 대단하다.경쟁하듯 자극적인 문구를 동원해 상대편을 비방하는 내용이 주류여서, 원치 않아도 봐야하는 시민들로선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과 검사들을 향해 “깡패”라고 한 말들도 길거리 현수막에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초등학교 근처 현수막에 적힌 적대감이 가득한 문구 때문에 학부모들의 민원도 쇄도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당이나 정치인이 외연을 확장하고 표를 얻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마치 선거철처럼, 현수막이 도심을 뒤덮은 것은 작년 연말, 정당이나 정치인의 현수막은 별도의 신고·허가 없이 최장 보름 동안 아무 데나 설치할 수 있도록 ‘옥외광고물법’이 슬쩍 개정됐기 때문이다. 정당현수막은 15일이라는 기간만 지키면 신고 의무, 위치나 내용에 대한 제한이 없다. 국회가 도심 길거리를 무법천지로 만든 것이다. 일반 시민의 경우 합법적으로 현수막을 걸려면 자치구 지침에 따라 약 한달 전에 접수하고, 당첨이 되면 일정 금액을 지불한 후 ‘지정게시대’에 약 10일정도 설치할 수 있다. 국회의원들이 총선을 의식해 또 다른 ‘자기특혜’를 만든 것이다.현수막 공해를 차단하기 위해 인천시는 정당 현수막과의 전쟁을 선포했다.조례 개정을 통해 현수막 게재 기간과 전화번호를 크게 명시하도록 하고, 자치구의 현수막 게시시설도 대폭 늘리기로 했다.서울시와 창원시는 정부에 시행령 개정을 정식 건의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 1월 설 명절을 앞두고 “과시성 현수막은 도시 미관만 해칠 뿐이니 바로 철거하겠다”고 말했다가, 민주당 대구시당으로부터 “대구시가 홍준표 시장의 것이냐”는 비판을 받았다.장소 제한 없이 난립하는 현수막은 안전사고 발생요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달 대구 달서구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시민이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정당 현수막 끈에 목이 걸려 상처를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달 인천 송도에서도 전동킥보드를 타던 20대 여성이 현수막 끈에 목이 걸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현수막 줄은 어두운 밤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현수막을 이용한 이데올로기전은 총선이 다가올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지금까지는 공직선거법이 선거일 6개월(180일) 전부터 현수막이나 인쇄물을 통한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도록 규정했지만,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7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리면서 오는 7월 31일까지 법 개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8월부터는 해당 법 조항은 효력을 잃으며, 누구나 자유롭게 ‘선거 현수막’을 내걸 수 있다. 예비후보가 범람하는 총선일이 다가오면 아마 전국이 현수막으로 도배될 것이고, 시민들은 이에 비례해 정치환멸을 느낄 것이다.

2023-03-07

오늘 여당의 전당대회는 ‘통합의 기회’돼야

오늘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리는 국민의힘 3·8전당대회가 역대급 투표율을 기록하면서 누가 당권을 잡을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지난 4일부터 7일까지 집계된 득표수는 오늘 전대에서 최종 발표된다. 이번 전대 선거인단은 전당대회 대의원, 책임당원, 일반당원을 합해 모두 83만7천여명이다. 지난해 정권교체를 거치며 당원 규모가 역대 최대가 됐다. 이번 전당대회에는 윤 대통령도 ‘1호당원’ 자격으로 참석해 국민의힘과 정부가 ‘원팀’을 이뤄나가자는 화합의 메시지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이날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과 청년 최고위원 선거의 경우 당선자가 결정되지만, 당 대표 선거는 4명의 후보 중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1·2위 후보가 9일 일대일 토론 후 10일 모바일 투표, 11일 ARS 투표를 통해 최종 당선자를 결정한다. 결선투표가 도입되면서 본경선 2위를 하더라도 반전을 노릴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당권레이스에서 선두를 달려온 김기현 후보는 결선투표 없이 전당대회가 마무리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안철수·황교안·천하람 후보는 결선투표까지 가서 극적인 뒤집기를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우려되는 부분은 이번 경선 과정이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혼탁해 후유증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당대표 후보들은 마지막 투표일까지도 ‘대통령실 선거개입 의혹’을 제기하며 날선 공방을 벌였다. 안철수·황교안·천하람 후보는 어제도 “대통령실 행정관의 선거개입은 공직선거법을 어긴 중대한 범법 행위”라며 김기현 후보의 사퇴를 요구했다. 특히 안 후보는 법적조치를 하겠다며 강경대응을 예고했다.국민의힘은 이번 전대 후 집권당으로서의 리더십을 찾아야 한다. 전대 이후 불공정시비로 당이 더 혼란에 빠지면 내년 총선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 윤 대통령도 아마 이러한 걱정 때문에 전당대회에 참여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국민의힘은 오늘 전당대회를 통합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걸어왔던 지난 1년을 당 차원에서 성찰하고, 대선 이후 등 돌린 민심을 철저하게 챙기는 전당대회가 돼야 한다.

2023-03-07

봄 마중 춤사위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날의 서막이 펼쳐지고 있다. 황량하던 무채색의 대지엔 매화와 산수유 꽃망울이 봄의 길목을 단장하고, 양지 바른 둔덕엔 가녀린 새싹들이 음표마냥 돋아나며 때 이른봄을 알리고 있다. 슬그머니 꼬리 감추며 멀어져가는 겨울의 뒷자락으로 피어나는 아지랑이의 아른거림 속에 인동(忍冬)의 시간을 숨죽이며 지내온 만물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며 생동의 봄 채비를 하는 듯하다.약동하는 봄날은 색깔과 움직임으로부터 온다. 봄의 초입에 피어나는 복수초나 산수유는 노란 몸짓을 일찌감치 내세우는가 하면, 앙상하던 가지에 희거나 붉은 매화꽃이 등(燈)처럼 달리기도 한다. 또한 가볍게 불어오는 남풍 결에 겨울잠을 자던 벌레가 꿈틀거리고,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듯 개구리가 깨어나 땅 위로 나온다는 경칩을 즈음해 온갖 생물들은 스프링(Spring)같이 조금씩 톡톡 튀는 생장의 기운을 받기도 한다.‘줄기차게/뿜어대는 해의 입김/굿거리장단에//파아란 춤사위판/땅김의 너름새로//수액을/두레박질하는/간지러운 마파람’ -拙시조 ‘춘신(春信)’ 중(1995)자연만이 봄을 맞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생동과 리듬에 맞추기라도 하듯이 지난 2일 포항시청 대잠홀에서는 봄 마중 같이 설레고 활달한 춤자리가 의미있게 열렸다. 경북도 지정 전문예술단체 전통연희컴퍼니 예심과 포항향토무형유산원이 전통춤의 명인 스승과 제자, 문하생이 3대를 잇는 춤사위로 활기찬 봄을 알리는 ‘2023 춤, 세대를 잇다’의 정기 발표회가 신명나고 멋스럽게 펼쳐진 것이다. 수준 높은 전통춤으로 지역 간의 문화교류와 전통문화의 계승을 알리고, 당대 최고의 세 명무가 직접 무대에서 ‘태평무’ ‘손소고춤’ ‘버꾸춤’ 등의 춤판을 벌이는, 그야말로 시대를 넘나들며 세대를 아우르는 장단과 추임으로 깊은 울림과 몸짓의 숨결을 고스란히 전하는 귀하고 보기 드문 공연이 아닐 수 없었다.가녀린 듯 거침없이 가락을 타는 나비의 분방한 나풀거림 같고, 뻗었다가 휘감듯 접으며 휘영청 두드림 결에 유유히 날갯짓하는 학의 비상 같은 춤사위는, 과연 율려(律呂)의 응축과 침잠, 분출과 절제의 미학 같은 그윽하고 유장한 몸짓 언어로 다가왔다. 어쩌면 격정의 소용돌이 같고 바람 속의 회오리 같이 날렵하고 교태있는 몸동작 하나하나에 몰입하고 경탄하는 내내 심금이 울려지고 액운은 얼씬조차 못했으리라.생명의 춤판이 벌어지는 봄날은 모두 부지런한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된다. 기운과 움직임이 있어야 새싹이 돋고 물이 오르듯이, 아름다운 움직임은 춤의 본질이자 궁극적인 예술이다. 가무(歌舞)의 민족은 흥이 일게 되면 저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덩실덩실 팔 다리가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른봄 마중하듯이 신바람 나게 펼쳐진 전통춤의 무대는, 변화무쌍한 율동성이 생명인 ‘춤’이 역동성을 강조해서 쓴 붓글씨 서체의 생동감과 어우러져 한결 묘미를 더했다. 대지 위에서 솟구치는 생명의 잔치를 추임새 삼아 저마다의 삶을 춤추듯이 살아보면 어떨까?

2023-03-07

챗GPT, 어디까지 할 수 있니?

이상산 한동대 교수·AI융합교육원장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챗GPT 이야기 말이다. 작년 11월 말에 오픈AI라는 회사에서 공개한 인공지능 채팅 프로그램이다. 어지간한 보고서쯤은 뚝딱 써낸다. 이런 질문을 챗GPT에 던져보았다. 한국의 한반도 통일전략을 단계적으로 제시하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600자 정도로 단계에 대한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1. 상호 연락과 문화 교류 강화, 2. 경제적 통합, 3. 제도 및 법률 통합, 4. 정치 및 안보 통합, 5. 문화, 사회, 교육 통합. 고등학교 학생의 과제 보고서로는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이뿐 아니다. 챗GPT에게 코딩을 시키기도 한다. 나아가 코딩의 오류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교육 기관들이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보편적인 지식이나 규정화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주 내용인 교육과정은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특정 주에서는 챗GPT 사용을 전면금지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챗GPT를 활용한 과제에 0점을 부여한 학교도 나왔다. 전자계산기가 나왔다고 해서 수학교육이 없어지지 않았고, 컴퓨터가 나왔다고 단순업무가 현장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검색 포털이 나왔다고 컨설턴트 직업이 없어지지도 않았다.그러나 우리가 통찰하고 인정해야 할 것은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컴퓨터 없는 세상, 인터넷 없는 세상, 휴대폰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앞에 인공지능의 세상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단언컨대 이제 인공지능 없는 세상은 없다. 우리가 모두 컴퓨터를 만들고 프로그래머가 되지 않아도, 각자의 수준에 맞게 인터넷을 잘 활용하고 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이런 일들을 참 잘하고 있다. 인터넷 인프라와 서비스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에 있다.챗GPT, 참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많은 정보를 모으고 조합하고 정리하는 세상 친절한 개인비서다. 문제는 이 비서에게 무슨 일을 시키느냐에 따라서, 그 비서의 능력이 다르게 발현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에서 ‘반복적인 것 잘하기’는 좀 덜어내고, ‘새로운 생각 다듬어가기’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면 좋겠다. 우리의 교육은 개념 이해에 집중하고 반복되는 일은 컴퓨터와 인공지능에 맡기면 좋겠다.챗GPT, 만능처럼 보이지만 아직은 편견도 있고 오류도 있으며, 상황을 반영할 만큼 구체적이지도 못하다. 개인적으로는 영원히 인간을 다 담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우리의 길이 있다. 챗GPT는 모른다. 통일의 단계는 언급했지만, 언제 어떤 단계의 일을 어떤 수준으로 해야 할 것인지, 여러 단계의 일을 어느 정도로 동시에 추진해야 할지, 정부가 바뀔 때는 어떤 조정이 필요한지. 챗GPT는 못한다.일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디테일이 필요하다. 우리 각자는 개인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전문가이며, 의도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챗GPT 두려워하지 말고, 재미있게 유익하게 사용해 보자. 좋은 질문을 하자, 그러면 우리도 오늘 비서로 요술램프의 지니를 가질 수 있다.

2023-03-07

수출하는 해양암반수

홍석봉 대구지사장 먹는 물의 진화가 놀랍다. 생수에서 해양심층수를 거쳐 해양암반수까지 나왔다. 해양암반수는 개발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이런 해양암반수가 해외에 수출된다.경북도는 최근 울진 환동해산업연구원에서 연구원과 아리바이오가 공동 개발한 동해안 해양암반수(염지하수)의 인도네시아 수출 선적식을 가졌다. 해양암반수는 2013년부터 동해안(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바닷가 땅속 1천50m 깊이에서 취수해 개발한 음용수다. 그동안 국내에서만 유통되다가 첫 해외수출이 이뤄졌다.이번에 초도 수출하는 물량은 500㎖ 4만 병이다. 인도네시아 현지 판매가는 병당 5천 원 내외로 전체 2억 원 정도 규모다. 1인당 GDP가 4천300달러에 불과한 나라에서 1병에 5천 원을 주고 사먹겠다고 하니 놀랍다.해양암반수는 물속에 녹아있는 칼슘, 마그네슘 등 미네랄 함량이 2천mg/ℓ 이상인 암반대수층 안의 지하수다. 제조업, 바이오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염지하수는 일반 물과 달리 귀한 지하수다. 업체 측은 몇 년 동안 동해안을 샅샅이 뒤져 최적의 장소인 울진의 죽변 바닷가를 찾았다. 우리나라에 염지하수 취수 지역은 여러 곳 있지만 식수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제주와 울진뿐이다. 전문가들은 미네랄 함량이나 원수의 안전성 측면에서 울진의 염지하수를 더 높이 평가한다. 아토피 치료제로도 사용된다. 미네랄을 포함했지만 환경영향을 많이 받는 해양심층수와 달리 해양암반수는 암반에서 용해된 미네랄을 포함한 100% 무공해 청정수라는 차이가 있다.해양암반수는 뷰티, 식품 등 연관 산업으로 확대될 여지가 많다. 에비앙 못잖은 명품 생수의 탄생을 기대한다. /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3-06

‘에너지 그린버튼’

남광현 대구경북연구원 연구본부장 어느덧 따뜻한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이다. 예년에 비해 반가운 마음이 더 큰 것은 그만큼 지난 겨울이 유난히 춥고 힘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아마 급등한 난방비도 우리를 무척 힘들게 하는데 크게 한몫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다가올 봄은 잠시이고 우리를 무더운 폭염과 열대야로 시달리게 할 긴 여름이 이내 올 것이다. 지난 겨울 난방비만큼 엄청나게 커진 냉방비로 인한 큰 고통이 또 예견된다. 앞으로 더 악화할 기후변화 문제와 이에 대응하기 위한 2050 탄소중립 체제 강화로 인해 이런 에너지발 경제적 고통은 일상화될 것이다.2011년 이후 연평균 최종 에너지 소비량은 대구광역시가 1.12% 감소하였으나, 전국은 0.79% 증가하였다. 특·광역시 중에서는 울산시가 1.62%로 가장 높고, 인천시, 광주시, 대전시 순으로 증가율이 높게 나타났다. 최근 10년 동안 1인당 최종 에너지 소비량의 연평균증가율은 대구광역시가 ·0.74%로 전국의 0.56%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타 도시에 비해 산업 분야의 에너지소비 비중이 낮은 것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결국 대구광역시는 산업을 제외한 수송과 가정·상업 분야의 에너지소비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데, 이 분야가 냉·난방비 상승의 직격탄을 받는 취약한 분야이다.2020년 기준 대구광역시 최종 에너지 원별 소비량 비중은 석유제품 36.0%, 전력 31.2%, 천연 및 도시가스 23.4%, 석탄 4.0%, 신재생에너지 3.1%, 열에너지 2.2% 순이다. 지역의 에너지 자립을 위해 필요한 신재생에너지의 소비량 비중은 너무 낮고, 대외 의존적이고 에너지 경제적으로 취약한 석유제품, 전력 그리고 천연·도시가스의 비중은 여전히 너무 높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순차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2011년 이후 대구광역시 최종 에너지 원별 소비량의 연평균증가율이 천연 및 도시가스는 증가하지만, 전력, 석유제품은 감소 추세인 것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지난 겨울 난방비 폭탄이라 표현되는 큰 충격은 역설적으로 매우 다양한 에너지소비 관련 정책의 도입을 촉진하게 됐다. 특히 대구광역시 최종 에너지 소비량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정·상업부문에서의 에너지수요관리 대책이 주목받고 있으며, 이는 건물의 에너지 효율화와 직결된다. 건물의 에너지 효율화는 건축물 에너지 효율인증 등급 최상위와 최하위 등급의 에너지 소비량 차이가 무려 최대 7배 이상 나는 것에서도 그 효과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건축물 주거 유형과 준공 연도별 단위면적당 난방에너지 사용량 통계에서 단독주택이고 건축물이 노후될수록 난방에너지사용량이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것에서도 에너지 효율화의 필요성이 드러난다.건물에서 에너지 효율화를 위한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소비자가 전기·가스·수도 등 자신의 에너지 사용량을 손쉽게 온라인을 통해 확인하고, 자신의 데이터를 신뢰할 수 있는 제3자와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에서 효과가 이미 검증된 쌍방향 정보공유 앱인 ‘에너지 그린버튼’의 도입이 시급하다.

2023-03-06

대통령도 나선 봄철 산불, 항구 대책 세워라

건조한 날씨 속에 전국에서 산불이 잇따르자 윤석열 대통령이 산불 예방 관리에 총력을 다해 줄 것을 긴급 지시했다.지난 주말인 4일 오후 대구의 대표적 산인 앞산에서 산불이 발생하고, 5일 낮에는 경산시 남천면 야산에서 산불이 나는 등 주말동안 대구경북서만 8곳에서 동시다발로 산불이 났다. 산림청에 의하면 최근 8일동안 전국에서 매일 10건 이상 산불이 발생했다. 올 들어서 벌써 200건 가깝다고 한다.산림청은 지난 2일부터 산불경보 주의단계를 발령하는 등 특별경계를 펴고 있지만 산불 발생은 줄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경북도는 6일 봄철 산불대응회의를 개최, 전행정력을 모으기로 했다. 235명의 산불예방 지역책임관을 배치관리키로 했고, 기동단속반의 활동도 강화키로 했다. 그러나 봄철마다 되풀이되는 산불이 행정력을 집중한다고 줄어들지는 의문이다. 과거에도 산불 예방을 위해 행정력을 총동원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산불 방지에 대한 획기적 수단이 개발되는 등 항구적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산불 발생은 이상기후 변화로 매년 증가한다. 1990년대 104일이던 산불 연중 발생일이 최근 5년간(2017∼2021년) 170일로 늘었다. 최악 겨울 가뭄이 있던 작년은 전국에서 740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피해면적이 2만4천여ha, 재산피해가 1조3천억원이다.산불은 인명, 재산뿐 아니라 생태계까지 파괴하는 심각한 재해다. 불에 탄 나무를 베어내고 산림을 복원하고 동식물이 살아갈 환경을 만드는데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이상 시간이 걸린다. 작년 3월 울진에서 발생한 역대급 산불의 현장은 지금도 황폐한 모습 그대로다. 100여 이재민은 아직도 컨테이너 생활을 한다. 이곳 산림을 복구하는 데만 3천400억원 이상 들 거란 추산도 있다.이제 해마다 반복되는 산불에 대응하는 방식이 과거와 같아서는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 헬기에 의존하는 진화방식을 더 첨단화하고 인력의 전문화, 산림 수목의 내화수림화, 국민의 산림 보호의식 강화 등 종합적이고 항구적 대책 마련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2023-03-06

‘세종대왕이 선택한 태교여행’을 아시나요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와 생태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경북도가 관광상품 개발에 행정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경북도는 지난 5일 공모절차를 통해 도내 각 시·군이 신청한 19개 관광사업에 대해 심사한 결과, 이중 대표관광 상품 4개, 야간관광 상품 4개를 선정해 지원하기로 했다. 경북도는 5년여 전부터 관광상품 공모사업을 매년 시행해 왔다. 공모사업에 선정되면 도비지원과 함께 전문가 컨설팅, 현장평가를 통한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선정된 대표관광 상품은 해당 지역의 관광브랜드 역할을 하며, 지역경제나 지자체간 관광교류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올해에는 드라마 촬영세트장을 활용한 문경시의 ‘직판타지 로드벤처’와 고분군·가야금을 활용한 고령군의 ‘왕의 길, 현의 노래’, 세종대왕자태실을 연계한 성주군의 ‘세종대왕이 선택한 태교여행’, 호국평화를 테마로 한 칠곡군의 ‘매일매일 칠곡소풍’ 이 선정됐다.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경북도의 야간관광 상품은 젊은 관광객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이번에는 역사유적과 설화를 활용한 경주시의 ‘신라달빛기행’, 월영교 야경과 원이엄마 스토리를 접목한 안동시의 ‘달빛투어 달그락(樂)’, 금당실 고택마을을 활용한 예천군의 ‘금당야행’, 청정밤하늘을 감상할 수 있는 울릉군의 ‘나리 빛나는 밤에 만나요’가 선정됐다.경북도는 국내 타 도시와 비교해 풍부한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신라, 유교, 가야 문화권을 보유하고 있는데다, 백두대간·낙동정맥의 산림힐링자원, 동해 바다의 풍부한 해양레저자원이 있다. 특히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자랑할 만한 관광자원이다. 경북도가 이러한 관광자원에 최근 현대인의 핵심가치로 자리잡고 있는 ‘힐링과 웰니스’를 스토리텔링화해서 새로운 관광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앞으로도 건강과 가족중심의 관광활동, MZ세대의 이벤트 여행 증가추세에 맞춰 경북만의 차별화된 관광상품을 개발해 관광객 유치와 관련 일자리 마련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한다.

2023-03-06

지금이 필수 의료 붕괴 막을 적기다

이시라 사회부 ‘의료’가 곧 ‘국력’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우수 의료진, 최첨단 장비, 선진화된 진료시스템까지 k-의료의 우수성은 해외에서도 인정한다. 개도국뿐만 아니라 미국 등 의료 선진국에서도 국내 의료진의 수술 기법을 배우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이제 의료는 한국의 성장을 이끌 신산업 성장동력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기 어렵다.그러나 과연 k-의료는 그 실상까지 자랑스러운 수준에 도달해 있을까. 부끄럽게도 그 대답은 ‘NO’다. 자만했던 k-의료의 민낯을 보여주는 일련의 사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지난해 국내에서 실력으로 손꼽히는 ‘빅5 병원’에서 근무 중 쓰러진 간호사가 골든타임을 놓쳐 사망한 사건은 큰 충격을 줬다. 놀라운 것은 당시 그 큰 병원에 수술을 집도할 뇌혈관 전문의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최근에는 소아과 전공의 부족 문제도 이슈다. 전국적으로 소아과 의사 수가 부족해 아침부터 ‘오픈 런’을 하는 등 소아과 대란이 심화하고 있다. 저출생 여파로 소아의료 수요가 감소하고 의사들의 소아청소년과 전공 기피와 수도권 쏠림이 심해진 게 원인이다.올해 상반기 대학병원 전공의 모집 결과 50곳 중 38곳에서 소아청소년과 지원자가 0명이었다. 수도권 일부 대학병원마저도 주말 소아청소년과의 응급 진료를 중단하는 사태도 발생하고 있다.의료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사실 한국의 필수 의료에 허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소아청소년과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외과, 산부인과 등 필수 진료과 모두가 위기다. 지방은 물론 서울의 주요 상급종합병원도 소아청소년과를 비롯한 이들 진료과의 전공의 모집에 실패하는 등 필수 의료체계 전반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정부는 이들 사건 발생 이후 지난 1월 ‘필수 의료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시민단체는 “근본적인 수가 체계 개선 없이 당장 상황만 모면하려는 실효성 낮은 정책”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위기는 곧 기회다. 의료위기는 지금이 대한민국 의료 개혁의 적기임을 뜻한다. 만일 이번 기회마저 놓친다면 필수 의료 기반이 약해져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치료 적기를 놓친 환자가 다른 지역으로 진료를 받으려고 달려가다가 골든타임을 놓쳐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더욱 늘어날 수 있다.이제는 정부와 정치권이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사건이 터질 적마다 나오는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확실한 제도 구축과 관련법 제정이 시급하다. 정부가 이번만큼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제대로 된 대책을 만들어서 대한민국의 필수 의료를 명성에 걸맞은 수준으로 반드시 혁신해주기를 소망한다. /sira115@kbmaeil.com

2023-03-06

1587년 어느 대구 부사의 ‘금쪽같은 내 새끼’

자식을 키운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낳으면 그냥 자랄 것 같은 아니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는 것이 곧 자식이다. 남보다 뛰어났으면 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크게 문제없이 자라주면 좋겠는데, 어디서 어떻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아이의 문제 행동을 맞닥뜨리게 되면 더욱 당황스럽고 속상하기만 한 게 부모의 마음이다. 몇 년 전까지 한참 유행했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이렇게 어렵기만 한 육아를 도와주고자 만들어진 육아 코치 프로그램이었다. 생각보다 도움을 원하는 부모가 많았기에 사회적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근래 인기리에 방영 중인 ‘금쪽같은 내 새끼’도 비슷한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TV프로가 인기가 높다는 것은 소중한 내 자식이 행복하게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 마음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이이기에 내가 달라져서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권문해(權文海·1534~1591)는 1587년(선조20) 8월 28일의 일기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당시 그는 대구부사에 재직 중이었는데, 마침 경남 안음에서 열린 감시도회(監試都會)의 시험관으로 출장 갔다가 서둘러 돌아온 길이었다. 동생이 부종(浮腫)을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동생뿐만 아니라 어린 여식까지 아픈 상태였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때 대구부(大邱府)에 도착하였다. 달아(達兒)가 머리 위에 종기가 나서 약을 발랐다. 딱지가 앉은 뒤에는 종기가 아래로 내려와 목에 부기가 생겨 목과 얼굴이 분간되지 않았다. 치료가 어려운 지경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침으로 종기를 터트려 피를 낸 뒤에야 부기가 조금 가라앉았으니 다시 살길이 보이는 듯했다.”-권문해의 ‘초간일기’ 1587년(선조20, 정해년) 8월 28일 일기 중에서권문해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식이 없어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30년을 함께 살았던 첫 번째 부인 현풍곽씨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내의 죽음에 자식 없는 서글픔까지 겹쳐 한참 동안을 슬퍼하고 또 슬퍼했다. 권문해는 이러한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 ‘죽은 아내 숙인 곽씨에 대한 만사(挽亡室淑人郭氏)’를 지었고, 1582년 10월 20일의 일기에 이 글이 온전하게 기록되어 있다. 약 2년 후 함양박씨와 혼인했는데, 권문해의 나이는 51세였다. 일기에 보이는 달아는 두 번째 부인 함양박씨와 혼인한 직후 얻은 딸로 추측되며, 이 당시 겨우 2~3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딸아이였다. 작은 머리에 난 종기가 목으로 내려와 목과 얼굴이 분간되지 않은 모습을 지켜보던 권문해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치료가 어려운 게 눈에도 확연히 보이지만, 종기를 터뜨려 부기가 다소 가라앉는 모습을 보고 혹시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 부모의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온다.이날부터 달아의 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권문해는 아이의 종기가 가라앉아 살 수 있다 생각하고 안심했던 것 같다. 일기에서 달아가 다시 등장한 것은 10월 7일로 20일쯤 지났을 때였다. 저녁부터 기운이 고르지 않더니 밤에는 통증이 그치지 않는다고 적었다. 짧고 간략한 기록이지만, 그 속에 울며 보채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다음 날의 일기에서는 공무로 바깥에 나온 일과 함께 달아의 증세를 중간중간 섞어 적었다. 감기 정도의 가볍고 우연한 병증이라 생각했는데, 이날 저녁까지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들었다고 했다. 다음 날에는 달아의 병이 수그러지지 않아 아침 일찍 복귀했다고만 기록했다. 다음 날은 아예 출근하지 않고 아이를 지켜보았다. 아이의 증세가 여전한 것을 보며 혹시 관아 북쪽 담장 내에 토우(土偶)를 만들어 묻은 것이 동티난 게 아닐까 의심하고 또 걱정했다. 천연두인지 모르겠다면서도 확실하지 않다고 적고 있으니, 이것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이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달아가 아픈 것은 결국 천연두때문이었다. 10월 11일, “병든 아이에게 역신(疫神)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해 얼굴 위에는 마치 좁쌀을 흩뿌려 놓은 듯하였고, 온몸에는 마치 물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고 기록했다. 더 이상의 일기는 없었지만, 이날 달아는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날 권문해는 달아를 병장기를 보관하는 곳에 옮겨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그 이유를 다시 다음 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역병으로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혹 깨어나는 경우도 있기에 종을 시켜 계속해서 열어보도록 하였으나 가망 없는 일이다”라고. 죽은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 부정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달아가 아프기 시작한 7일부터 권문해는 온통 달아 생각뿐이었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일까. 권문해는 이후 며칠간 출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88년 10월 12일의 일기에서 “이날은 달아가 역병으로 죽은 날이다. 종일 출근하지 않았다. 온 집안이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채소만 먹고 고기는 먹지 않았다”라고 기록하며 달아를 그리워했다. 이것은 158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성장하면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소통과 공감이 쉽지 않아진다. 이 때문에 숱한 갈등에 부딪치며 부모도 자식도 속상한 날을 보낼 때가 많다. 건강하게만 자라주는 것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는 것들이 사실 나에게 주어진 특별한 행복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이다.

2023-03-06

아름답고 처연하게, 두껍고 무겁게 소멸하는 이야기

영화는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유령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일반적인 요소들을 태연하게 펼쳐 놓는다. 특히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은 노골적이다. 눈구멍 뚫린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이 그가 살던 집으로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교통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C는 유령이 되어 그가 살던 집에 남은 사랑하는 M의 곁에 머문다. 그리고 M의 슬퍼하는 모습과 극복의 과정을 목격한다.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는 죽은 자의 몫으로 그린다. 살아남은 자의 시선이 아니라 철저히 죽은 자의 시선, 곧 유령의 시선을 따른다. 직선적인 세계관을 살다가 순환하고 종횡무진하는 세계로 들어온 유령의 시선으로 시간은 흐르거나 역전되고, 늘어지거나 축약된다. 표현할 수 없고, 전달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집이라는 공간을 떠돈다.우스꽝스럽게 시작한 유령의 모습은 이내 처연하게 다가온다. 눈구멍 두 개만 뚫린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의 변화없는 표정 속에서 무겁게 내려앉는 상실의 얼굴이 읽힌다. 홀로 남은 집, 집은 거대한 쓸쓸함이 되어 슬픔과 함께 뭉쳐져 집안을 떠다닌다. 그 시간 속에서 집은 또 다른 주인을 맞이하고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유령 C와 남는다. 귀엽고 소탈하게 등장한 유령은 이제 세상 그 어느 곳, 누구 보다도 외롭고 쓸쓸한 존재가 되어 집에 남는다. M이 상처 받고 괴로워 하는 모습과 점차 일상을 회복하고 마침내 극복하고 새 삶을 찾아 떠나간 이후에도 유령은 그 집에 머문다.모든 시선은 유령의 시선과 또 다른 유령과도 같은 관객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알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표현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들이 오간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속에 남겨진 자(혹은 그 무엇의 존재)가 되어 관객도 함께 빈집에 머문다. C가 그렇듯 우리는 그저 가늠되지 않는 시간을 지켜볼 뿐이다.가늠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공허와 상실, 쓸쓸함과 외로움과 애틋함, 아름다우면서도 텅 빈 감정들이 뒤섞인다. 유령 C가 머무는 집과 함께 무언지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 채워진 집의 어느 곳에서 추억을 더듬는다. 이제 ‘유령 이야기’는 C가 머물며 추억하고 목격한 ‘집’의 시간, ‘집의 이야기’가 된다.그래서 화면은 일상의 공간, 일상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작은 집 어딘가에 카메라를 놓고서 복도를 비추거나 빈벽을 비추거나, 텅 빈 공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속에 정물처럼 남은 유령 C가 놓이기도 한다. 빈집이 헐리고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질 때 유령은 다시 시간을 거슬러 그곳에 처음 정착했던 이들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C와 M이 함께 살던 때까지 목격자로 관객과 함께 묵묵히 시간을 보낸다. 먼지가 쌓이듯 기억의 공간은 두껍고 무겁게,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메운다.언제까지건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존재(유령)가 사라지는 순간은 허무하다. 건너편 집의 또 다른 유령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에서 존재의 이유를 가지던 유령도 “안 올건가봐요”라고 체념하는 순간 무너져 내린다.영화는 짧지만 흐름은 느리고 길게 흘러간다. C와 M의 시간, 유령의 시간, 유령이 머물던 집의 시간, 그 집이 들어서기 이전의 시간이 한편의 시처럼 함께 흐른다. 기형도 시인의 시 ‘빈집’의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에서 시작해 사랑과 연민, 쓸쓸함과 공허함, 기억까지 소멸시켜 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끝까지 움켜쥐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까지 놓아 버리게 만든다. 소리없이 사라지는 유령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묵직한 아름답고 처연한 무언가가 내려앉으며 영화가 끝난다. 그 무게만큼 여운이 오래 남는다. /김규형 (주)Engine42 대표

2023-03-06

‘피지컬 100’이 남긴 것들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최고의 피지컬(physical·신체 능력)을 갖춘 몸을 찾는다.’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 100’의 슬로건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했다. 슬로건에 걸맞게 보디빌더, 격투기 선수, 올림픽 메달리스트, 경찰, 전직 군인, 산악구조대원, 댄서 등 소위 ‘몸을 쓰는’ 다양한 분야의 참가자들이 모였고, 완력, 지구력, 순발력 등의 신체 능력을 테스트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모든 과제는 성별에 상관없이 동등한 조건으로 진행됐으며, 남성과 여성이 직접적으로 맞대결하는 과제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한국 뿐 아니라 해외 시청자들의 눈길마저 사로잡을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이 ‘기계적 공정성’일 것이다.참가자들의 신체 능력을 겨루는 ‘스포츠 버라이어티’는 그 역사가 제법 오래됐다. 미국에서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몸싸움을 벌이는 ‘롤러 더비’나 각종 장애물을 ‘닌자’처럼 통과해야 하는 ‘아메리칸 닌자 워리어’같은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고, 한국에서도 ‘열전! 달리는 일요일’이나 ‘출발 드림팀’ 등이 있었다. 스포츠 버라이어티의 미덕은 참가자들이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거나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뛰어난 운동 능력과 잘 단련된 육체를 전시하는 것이다. ‘피지컬 100’ 역시 이러한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그런데 ‘피지컬 100’이 기존 스포츠 버라이어티와 차별화되는 점은 참가자들을 성별에 따라 나누지 않고, 남녀 간의 맞대결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기존에도 남녀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프로그램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코스를 빨리 돌파하는 경쟁이었지 맞대결을 펼치는 방식은 아니었다. 첫 번째 과제였던 ‘일대일 데스매치’에서는 남녀 간의 맞대결이 두 차례나 벌어졌고, 여성 보디빌더 춘리는 남성 못지않은 완력과 투지를 보여주며 큰 성원을 이끌어냈다. 경기 도중 상대 남성이 무릎으로 춘리의 가슴 부위를 강하게 누른 것에 대해 다른 여성 참가자들의 항의가 있기는 했지만, 이는 경기 운영 방식에 대한 항의였지 ‘신체적 특성이 다른 남녀를 맞대결시켜도 좋은가?’라는 문제제기는 아니었다.이 장면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실제적 지위가 상승했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 여성들은 제도적 어드밴티지(advantage·유리함) 없이 남성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해도 될 만큼 자신감에 차 있다. 피지컬 100을 보라”라고. 하지만 그런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최근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국가대표 출신 남성 운동선수가 여자친구를 흉기로 폭행해 구속됐다. 이 사건은 여성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물리적·사회문화적 약자임을 잘 보여준다.2단계 과제 ‘모래 나르기’에서 장은실 참가자와 팀원들이 잘 보여주었듯, 반드시 완력으로 상대를 제압해야만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피지컬 100’이 보여준 남녀 간의 맞대결, 그리고 ‘최고의 피지컬을 갖춘 단 하나의 몸을 찾는다’라는 슬로건은 어디까지나 방송의 재미를 위한 ‘설정’에 불과하다.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생물학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최고의 몸’ 또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2023-03-06

따뜻한 눈빛이 그리운 시간이다

김규인 수필가 1만 년 전에 빙하기가 완전히 종식된 후 폭력은 자연 선택적 변이가 완료된 상태로 인간의 유전자에 남아 우리에게 전한다. 문명사회인 오늘도 아들의 학교폭력으로 공직을 내놓은 변호사와 자신의 폭력으로 중도하차한 가수의 이야기가 연일 기사로 뜬다.인류가 삶을 시작할 때, 야생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다.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돌도끼와 돌칼을 만들어 싸우며 자신들을 지켰다. 이동하며 사냥해 먹을 것을 구하던 유목민 생활에서 농경 생활로 정착한 이후에도 폭력을 사용했다. 옆의 나라를 침공하여 영토를 넓히고 이런 가운데 폭력은 어김없이 쓰였고 문명화된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계속된다. 인류의 역사는 폭력으로 물든 역사다.학교폭력 피해자는 신체적인 손상과 정신적인 압박감을 받는다. 이러한 영향으로 정상적인 학업 생활의 어려움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 불안해 매사에 의욕을 잃고 심한 경우에 자살로 이어지는 일도 자주 발생한다. 학교폭력으로 인한 자살이 일어나면 학교와 교육청은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약속하지만,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폭력의 긴 뿌리를 생각하면 인간이 있는 한 폭력이 계속될 것 같다.사냥해야 살아갈 수 있는 원시 유목 사회에서 생존의 도구인 폭력이었지만, 이제는 필요 없는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쩌면 먹이를 사냥해야만 살아남는 야생의 본능이 아직 인간에게는 남아있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약한 상대를 찾고 뒤를 쫓아 사냥 기회를 엿보는 야생 사회 말이다.학교폭력을 걱정하는 사이에 아줌마라는 말에 격분해 흉기를 휘두르는 일이 발생한다. 조금만 참으면 될 일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비극 앞에 뚜렷한 대책 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자전거를 타고 대구 신천을 달리는 일이 잦다. 유모차에 반려견을 태우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자식처럼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뒷바라지하는 사람들을 보며 같은 종족끼리 이보다 더 열악한 대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왜 이런 지경까지 됐는지.돈을 사냥하기 위해 부모와 형제를 죽이고 우정을 나누어야 할 친구를 폭행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왜 이리 자주 발생하는지. 폭력으로 무너진 인간의 존엄성을 언제쯤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모든 폭력 앞에 언제쯤 사람들은 당당할 수 있을까.폭력의 피해는 언제나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 늘어나는 사회를 보면서 다시 교육에 기댈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이제는 가정과 학교와 언론과 사회가 모든 분야서 교육의 주체가 돼야 한다.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교육해야 한다. 그나마 희망을 갖는 것은 어린 나이일수록 교육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상담해 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2023-03-06

봉화군에 베트남 왕족이 살았다

박현국 봉화군수 봉화군이 베트남 마을 조성이라는 이색 사업을 펼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베트남은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과 삼성 핸드폰 베트남 공장 설립,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우리와 매우 친근한 국가이다.봉화군 봉성면 창평리마을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베트남 선조의 흔적이 남아있는 한국 속의 베트남으로 통한다.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장기 집권 왕조였던 리 왕조의 후손 이용상이 고려에 귀화해 한국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됐고, 그의 둘째 아들인 이일청이 안동부사로 부임하면서 후손들이 봉화 일원에서 세거지를 이루고 살았다.이후 이용상의 13세손인 이장발이 임진왜란에 참전해 장렬하게 전사하자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봉성면 창평리에 충효당과 유허비를 건립했다.이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베트남 리 왕조 관련 유적이며 이 마을에는 아직도 그 직계 종손 및 후손들이 살고 있어 베트남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리 왕조는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로서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인 호치민 주석이 생전에 리 왕조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표할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이다.봉화군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의 발자취를 발전시켜 국내 유일의 리 왕조 유적지의 관광명소화를 통해 한국-베트남 간의 우호를 증진하고 다문화인들의 교류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현재 추진하고 있는 봉화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은 오는 2027년까지 총사업비 294억 원을 들여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 일원 부지 3만8350㎡에 베트남 전통 마을, 문화공연장, 연수·숙박 시설 등을 조성하는 것이다.베트남마을이 조성되면 연간 10만 명의 관광객 유치는 물론 연평균 37억 원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482명의 직·간접적 취업유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특히 최근 베트남 국가주석 면담과 베트남 뜨선시와 우호 강화 협약 체결로 봉화 베트남마을 조성사업 추진이 탄력을 받고 있다.지난해 12월 화산 이씨 종친 회장단과 함께 베트남 대사관을 방문해 국빈 방한한 응우옌 쑤언 푹 주석을 만나 베트남마을 조성사업 설명과 함께 국가 정책사업화 추진을 제의했다.특히 베트남 주석과의 만남은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보다도 앞서 진행될 만큼 베트남 측에서도 적극적이었으며 사업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베트남에서도 각 부처에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답했다.또 베트남 박린성 뜨선시와 우호협력 강화 협약서를 체결해 봉화군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에 대해 양 도시의 협력과 협조를 약속했다.최근에는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한 전문가 워크숍을 열어 베트남 전문가들과 함께 베트남 리 왕조 후손 유적지인 충효당과 재실, 창평저수지 등 베트남마을 조성 사업대상지를 둘러봤다.전문가들은 대구경북 신공항시대와 맞물려 추진되는 베트남마을 사업에서 한-베 문화교류 기능을 강화하면 양국 간 우호 증진과 국내 베트남 다문화인들의 교류공간으로 활용성이 높다며 사업 필요성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앞으로 워크숍에서 논의된 사항과 기존 사업계획을 바탕으로 한-베 양국 간의 든든한 가교가 될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는 용역을 실시해 봉화 베트남 마을이 성공적으로 조성될 수 있도록 힘쓸 계획이다.올해에는 베트남과의 지속적인 문화교류를 더욱 추진하고 베트남마을 조성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협력을 이어가려고 한다.한국과 베트남 양국의 관심과 지원을 통해 베트남마을이 조성된다면 베트남의 역사가 살아 있는 봉화군에 새로운 국제적 관광명소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된다.더불어 양 국가의 발전과 우의를 더 깊이 다지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국내 유일 베트남과의 경제·문화 교류중심지가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베트남마을 조성사업이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베트남 국민도 양국의 역사적 뿌리를 공감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며 이번 사업이 성공적으로 조성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협력해 나갈 것이다.사업의 성숙기에 터진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던 사업을 재개해 사업의 속도를 내려 하는 만큼 군민들의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바란다.

2023-03-05

세상의 모든 아들에게

이희정 시인 부모에게 자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끝이 없는 A/S 대상이다.“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 네 뒷모습에 대고 /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더러는 부모가 부실하면 아이들이 먼저 철이 들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훈련소 상사가 문자로 보내온 아들의 모습은 긴장된 가운데 늠름하다. 발가락 재해로 일 년 가까이 입대 시기를 늦춰야 했던 어느 집 아들의 이야기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겨우 나아갈 때 즈음 서둘러 급행을 신청해 입대했다. 전날까지 일언도 없이 문을 나섰던 아들이 훈련소 입소 직전 사진과 함께 “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보내왔다. 입대를 보류할 부모를 견제한 판단이었으리라 짐작한다.예전과 달리 복무기간도 단축되고 핸드폰 사용도 가능하다지만 여전히 어머니들에게 입대는 간절한 기도로 신을 부르는 일이다. 총에 맞아 죽기보다는 총소리를 듣고 먼저 쓰러진다는 시구도 있지 않은가.아들아너와 나 사이에는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네 뒷모습에 대고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네가 어렸을 때우리 사이에 다만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사랑 한 알에도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이제 쳐다보기만 해도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너와 나 사이에는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문정희 ‘어린 사랑에게’(1992, 미래사) 중 ‘아들에게’ 전문그런데 어머니와 아들을 대하는 간절함의 인식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없던 질병도 만들어 군 면제를 받았으면 하는 힘센 부모도 있다. 과거와 달리 너나 할 것 없이 자식이 한 둘인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군에서 맞는 생일에 공산품 초코파이 케이크는 거부하고 특별히 만든 케이크를 보내고, 군대 상사에게 사소한 것들까지 수시로 주문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풍토 속에서 부모의 배웅 없이 홀로 기차를 타고 가벼운 여행길 나서듯 그렇게 홀연히 떠나는 아들의 태도는 약한 부모를 부끄럽게도, 마음 저리게도 한다.서울 양재동 숲길을 걷다 보면 청년 윤봉길을 만날 수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사가 되어야 했던 그의 나이는 약관이었다. 고향에는 살아 있는 부모가 있었고 앳된 아내가 있었고 무엇보다 완두콩 같은 발가락을 고물거리는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그는 아들이었고, 가장이었고, 아버지였다. 현대 시점으로 보자면 저 어린 나이에 어찌 저리 큰마음으로 나설 수 있었을까 믿기지 않는다. 혼인 연령이 늦어지면서 아이들의 성장도 늦되어지는 것인가. 바뀐 세상이 성장의 키를 조율하는 것인가. 지금의 아이들에게 대자면 상상할 수도 없는 신화에 가까운 실화다. 훈련 중 부상보다 상사나 동기의 괴롭힘 등 정신적인 이유로 어머니들의 ‘간절’을 소환하는 예가 많은 것을 보면 더욱 실감이 나지 않는다.시대가 바뀌고 풍족한 환경에도 세상은 여전히 평온하지 않다. 저 먼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으로 실시간 대치 중인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모든 어머니에게 귀하지 않은 발가락이 있으랴. 문정희 시인(1947~)은 말한다. “네가 어렸을 때 / 우리 사이에 다만 /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 사랑 한 알에도 / 온 우주가 다 녹아들곤 했는데 /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이 되어 있다고.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전하고 싶다. 내 아이들은 생각하는 것보다 어리거나 유약하지 않다고. 어머니의 간절함 속에는 강물처럼 흐르는 신이 한 분 살아 계셔서 결코 그 마음의 키가 작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아들을 믿고 모두를 위한 간절함으로 두 손 모을 수 있어야 한다고.내 아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들들’에게.

2023-03-05

땃벌떼에 포위당한 국회

김진국 고문 1995년 7월 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 복귀와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92년 12월 정계 은퇴를 선언한 지 2년 7개월 만이다. 민주당 의원 95명 가운데 65명이 탈당했다. 은밀한 작업 끝에 신당 창당이 공개되자 민주당은 어수선했다.다수 의원이 빠져나간 국회 민주당 의원실 소파에서 노무현 최고위원과 유인태·원혜영 의원이 바둑을 두며 개탄하는 말을 들었다. 정당이 한 사람에 좌지우지되는 꼴에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만들어 독자적 길을 모색했지만 실패했다.그때만 해도 그들은 3김 정치 타파를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3김의 대권욕이 민주화운동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집권 야망 탓에 지역할거 정치를 주도해, 민주화를 왜곡한다고 생각했다. 조순형·제정구·유인태·원혜영·김부겸 등이 88년 한겨레민주당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다. 양김씨(김영삼·김대중)가 후보단일화에 실패해 정권 교체를 실패한 직후다. 대권욕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정당 장악을 저지하려던 이들이 만든 민주당에 민주주의는 남아 있는가.요즘 민주당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의 개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과 관련해 ‘배신자’ 색출이 거세다. 이낙연 전 대표 영구 제명 청원은 게시 나흘째인 3일 오후 동의자가 6만 명이 넘었다. 민주당혁신위원회는 총선과 전당대회 등 당내 경선에서 ‘개딸’(개혁의 딸이란 이름의 이재명 친위세력)들의 목소리를 크게 반영하도록 규정들을 고치려 한다. 이 대표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현역의원들을 물갈이하겠다는 것이다.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개××’라느니 ‘수박(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라는 뜻) 깨기’라는 말로 공공연히 선동한다. 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나치 시대에 기독교 신자를 색출하려고 십자가 밟기를 강요”한 것과 같은 짓이라고 개탄했다.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갈등이 심한 정당을 버리고 나간 적이 있다. 신민당을 버리고 나가 민추협과 통일민주당을 만들었다. 그때는 독재정권의 공작정치에 맞서기 위해 야권 세력을 결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은 당이 가진 재산이 아깝고, 선거에서 거저먹기인 제1야당의 간판이 아까워 나갈 생각은 못 한다. 그때는 민주화라는 명분이 있었다. 지금은 사법 심판 회피 이외에 무슨 명분이 있나. 정치는 명분이다. 명분이 없으면 양아치나 다름없다.1971년 10월 2일 공화당의 4인 체제는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화가 난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정보부장을 시켜 김성곤 의원의 코털을 뽑고, 의원직에서 쫓아냈다. 민주당이 50년 전의 공화당처럼 절대자 1인의 정당인가.이승만 전 대통령은 2대 국회를 야당이 압도해 간선제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국회에서는 의원 내각제 개헌을 시도했다. 그러자 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 의원들을 의사당에서 연행했다. 백골단, 땃벌떼 등 정치 깡패집단, 마차·우마차에 마의(馬意)·우의(牛意)를 실어 날라 국회를 포위하고, 공개투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수박 깨기’ 한다며 투표 내용을 공개하라고 압박한다. 또 체포동의안이 오면 불참하는 방식으로 의사 표시를 드러나게 만들려 한다. 문자 폭탄을 날리고, 청원압력을 가하는 ‘개딸’은 ‘땃벌떼’와 다를 게 없다.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보이고,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일부 과격분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만 과잉 대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험한 적이다. 소수파였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는 선동정치 과정이 그러했다.국민의힘이 흘러가는 꼴도 비슷하다. ‘친윤’을 선언하지 않으면 모두 배신자로 낙인찍는다. 물갈이가 거론된다. 통신 기술의 발달로, 정제된 소식만 전달하던 시대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누구나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 가짜뉴스가 범람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보다 자극적인 선동이 더 잘 먹히는 시대다. 민주주의가 위태롭다. 당 대표와 다른 의견에는 침묵을 강요하는 것도 명백한 민주주의 파괴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3-05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김규종 경북대 교수 봄이 오고 있다. 작년보다 월등히 추웠던 겨울이 지난주 금요일 오후를 기점으로 봄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갔다. 목요일 오전 영하 7℃, 금요일 오전 영하 5℃를 끝으로 청도는 앞으로 영하의 아침을 만나기 힘들어질 모양이다. 하지만 겨울의 여파는 곳곳에 남아있다. 작년 이맘때에는 홍매가 졌을 터인데, 올해는 아직도 봉오리 상태로 몸을 닫아걸고 있다. 봄의 첫 번째 전령인 영춘화(迎春化)가 이제야 노란 꽃송이를 선보이기 시작한다.대구 동촌 유원지 전봇대 아래 하얀 냉이꽃이 앙증맞게 피어났다. 도심의 소음과 매연과 인총(人叢)들의 무관심을 이겨내고 청정하게 피어난 냉이꽃에 마음이 짠해진다. 대구 문화방송국 주변 욱수천에 뿌리내리고 서 있는 버드나무에도 도톰하게 꽃눈이 올라오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선화 꽃대가 시나브로 키 자람을 하고, 원추리와 루드베키아, 봄까치꽃도 여기저기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바야흐로 봄이 흐드러질 참이다.길을 걷다가 나무에 손을 대본다. 겨우내 차가웠던 나무에도 조금씩 온기가 느껴진다. 창천(蒼天)의 구름도 살이 붙어 통통하다. 저녁 7시나 되어야 캄캄해지는 사위(四圍)를 뚫고 금성과 목성이 천상에서 유희하는 장면은 경이롭다. 그것을 지켜보며 증인 구실을 하는 하얀 반달이 어느 참엔가 노랗게 색깔을 바꾼다. 겨우내 고요했던 지붕에 참새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조류의 소음과 추함은 여전하다.밤하늘의 별들이 찬란하게 빛났던 차고 아름다운 시절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떠나가고 있다. 모든 떠나는 것에 동반하는 만가(輓歌)에는 슬픔과 아쉬움이 깃들기 마련이지만, 겨울과 봄의 교체에는 그런 징후가 없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생명의 약동과 환희가 대지와 하늘과 인간들의 아수라판에 범람할 것이기 때문이다. 10월 말까지 이어질 뭇 생명의 환호작약과 괄목상대와 욱일승천의 기세에 미소(微小)한 인간의 개입이 불가능하다.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문자 조합은 자연보호(自然保護)다!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겠다니! 마치 세 살짜리 천둥벌거숭이가 부모를 부양하고 보호하겠다고 나선 것과 다를 바 없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과 지난 2월 6일 터키와 시리아를 덮친 지진을 생각해보라. 인간은 자연을 보호할 수도 없고, 자연은 인간의 보호를 바라지 않는다. 인간은 수많은 생명과 어울려 살아가는 미미한 존재일 따름이다.자본주의와 과학주의가 낳은 기형적인 괴물인 근대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자연 정복이다. 과학에 터를 둔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오만에 빠진 인간은 ‘계몽’이란 허울 아래 자연을 인간의 하위에 자리하도록 했다. 그것이 불러온 파괴적인 양상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기고만장(氣高萬丈)해진 일부 괴짜 사내들은 화성 탐사와 인간의 달 이주 계획을 서둘러야 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정말로 희화적인 지구의 풍경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환경부가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에 동의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개발이익과 업적을 챙기려는 시커먼 욕망의 무리가 거악을 만들어낼 태세다. 우리의 봄과 자연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2023-03-05

현대차 생산직에 쏠린 시선

우정구 논설위원 최근 산업연구원이 MZ세대의 직업 가치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지난 12년에 걸쳐 10만명 대졸자를 대상으로 소득, 근로시간, 적성, 업무난이도 등 16개 직업 가치요소에 대한 인식조사를 벌였더니 직업 가치 순위에 변동이 생겼다는 것이다.과거 직업 가치로 가장 소중히 여겼던 ‘개인 발전가능성’이 뒤로 밀리고 소득과 업무시간 등이 앞쪽으로 당겨졌다. 1순위였던 ‘개인 발전가능성’은 6위로 떨어졌고 소득이 3위에서 1위로, 근로시간이 6위에서 2위로 올라섰다.이와 달리 다른 한 여론조사에서도 MZ세대는 가장 싫어하는 기업으로 ‘주말 출근 등 초과근무가 많은 기업’을 1순위로 꼽았다. 고액 연봉과 워라밸이 잘 돼야 그들에게는 신의 직장으로 평가받는다는 뜻이다.현대자동차가 10년만에 생산직 모집에 나서면서 많은 화제를 뿌렸다. 올해 뽑을 400명 생산직에 지원자가 폭주해 채용 홈페이지가 마비되고 최종 지원자가 10만명은 족히 될 것 같다는 관측이다.현대자동차 생산직을 킹산직(king+생산직)이라 부르고, ‘현차 고시’니 ‘전국민 오디션’이란 말도 나왔다. 또 놀라운 것은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사무직까지 현대차 생산직 모집에 들썩이고 있다는 소식이다.현대차의 작년 임직원 평균 연봉은 9천600만 원. 생산직 초봉도 5천∼6천만 원이다. 높은 연봉과 정년보장, 다양한 복지혜택 등 현대차 생산직 자리가 로또에 비견될 만큼 부러운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기성세대에는 자기발전보다 연봉에 무게를 둔 그들의 직업관이 낯설어 보이기도 한다. 조직에 충성하고 개인보다 업무에 더 열중했던 전통적 직업 가치가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03-05

與전대 핵심키워드는 당내통합과 외연확장

국민의힘이 오는 8일 경기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는 전당대회 공식 선거운동을 마무리하고, 지난 4일부터 당 대표와 5명의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투표에 들어갔다. 투표는 첫날부터 역대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할 정도로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오늘(6일)부터 내일까지는 휴대전화가 없거나 모바일투표를 하지 않은 당원들을 대상으로 전화 ARS(자동응답) 투표가 치러진다. 만약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10일부터 11일까지 1· 2위가 결선을 치른다. 현재까지 당 대표 선거 판세를 보면, 각종 여론조사에서 김기현 후보가 줄곧 선두를 달리고 있다. 김 후보는 당권레이스 초반부터 ‘윤심(윤석열 대통령 의중) 마케팅’으로 친윤 그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투표가 결선으로 갈 경우, 2·3위인 안철수·천하람 후보의 연대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일 열린 마지막 당 대표 토론회에서 천 후보가 안 후보에게 “필요하면 연대하면 될 것 같다”고 언급하자, 안 후보가 웃으며 화답한 것이 여운을 남긴다.아쉽게도 집권여당 전당대회를 지켜보는 국민의 시선은 싸늘하다. 당 대표 후보들이 모두 자기 권력을 위한 이전투구식 싸움을 이어 가면서, 민심을 얻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지금까지 당권 주자가 김기현·안철수·천하람·황교안 4명의 후보로 완성되기까지는 ‘윤심’이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던 나경원 전 의원은 대통령실과 ‘윤핵관’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은 끝에 결국 전당대회 출마를 포기했다. 안철수 후보는 ‘윤안(윤석열·안철수) 연대’를 내세웠다가, 대통령실로부터 “국정운영의 방해꾼이자 적으로 인식될 것”이라는 강한 경고까지 받았다.차기 당 대표는 집권 2년차를 맞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드라이브를 뒷받침하고 내년 4월 22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려면 당 내부를 통합하는 것은 물론, 외연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 자기권력보다는 대통령실과 내각과의 긴밀한 공조, 그리고 야당과의 협치를 이뤄낼 수 있는 당 대표를 뽑아야 한다.

2023-03-05

단속 피하려는 신종마약 급증, 특단 대책을

당국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새롭게 개발한 신종마약의 국내 유입이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충격이다.양경숙 의원(더불어 민주당)이 밝힌 관세청 자료에 의하면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적발된 신종마약의 금액은 108억 원 규모로 전년 38억 원보다 무려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적발 중량도 267kg으로 전년 비해 87%가 증가했다.지난해 필로폰, 코카인 등 국내에서 적발된 전체 마약 규모는 줄어들었는데도 신종마약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신종마약이란 기존에 남용돼 오던 약물과는 다르게 법적 제재를 피하기 위해 기존 마약류의 변형된 형태인 유사제제나 유도제로 개발된 마약을 일컫는다. 또 이미 의학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약물로 중독성이 발견되어 오남용 우려가 있는 경우에도 이에 해당한다.신종마약으로 분류되는 것으로 일명 엑스터시로 불리는 MDMA를 비롯 러쉬와 졸피뎀, 프로포폴 등이 있다. 국내의 경우 식약처에 마약 또는 임시 마약류에 등록이 돼야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종마약이면서도 등록이 되지 않으면 처벌을 받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실제로 2021년 11월 경찰이 액상 형태 대마를 판매한 A씨를 붙잡았으나 그 물질이 식약처에 등록된 마약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법 처리를 하지 못했다.특히 마약이 새로운 형태로 변형 유입되는 데다 경로도 인터넷이나 우편 등을 이용하고, 거래에 가상화폐 등을 사용함에 따라 단속이 쉽지 않다. 더 문제는 마약류 사용 연령이 낮아지고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마약류 범죄백서에 의하면 작년 한해 우리나라에서 검거된 마약 사범은 1만8천여 명에 이르며 그 중 20, 30대가 절반이다. 마약 거래가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에 비쳐볼 때 젊은층의 마약 사용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수 있다.마약은 한번 손대면 빠져나오기 힘든 중독성이 강한 물질이다. 사회적 폐해와 위해성으로 따지면 술이나 담배보다 훨씬 더 나쁘다. 마약류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인식을 갖도록 교육 기회를 더 많이 늘리고 당국의 단속기법도 더 강화돼야 한다.

2023-03-05

새 학기가 두려운 아이

사공정규 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학박사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새 학기가 되면 유치원이나 학교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아이들이 있다. 처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갈 때 어느 정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현상이다. 대개 1주 정도 다니다 보면 적응을 하게 되지만, 일부 아이들은 학교 가는 것에 대해 과도한 불안 증세를 나타낸다. 심한 경우는 아이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가는 것을 너무 싫어하고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 울고 떼쓰고 이런 일이 계속돼 해결 방법을 찾기 난감할 수가 있다. 그런데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 증상은 씻은 듯 사라진다. 부모들은 흔히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혼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못살게 구는 친구가 있거나, 선생님이 무서워서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그러나 원인은 애착 대상(주로 어머니)과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처럼 불안으로 등교를 회피하는 것을 과거에는 학교 공포증(school phobia) 또는 등교 거부증(school refusal)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공식 정신의학적 진단명은 분리불안장애(separation anxiety disorder)이고 최근에는 ‘장애’라는 우리말 표현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 ‘새 학기 증후군’이라는 완화된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분리불안장애는 12세 미만의 소아에서 가장 흔한 불안장애로 일종의 정신의학적 병이며 유아기나 초등학교 저학년에 흔하다. 아동에서의 유병률은 4% 정도로 추정되고 환자의 경우 남녀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여아가 좀 더 흔하다.하여튼 극심한 불안감이나 신체증상은 학교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떨어져서 집을 떠난다는데 있다.다시 말해 학교에 대한 공포나 거부가 아니라 어머니와의 분리에 대한 불안이다. 분리불안장애의 원인은 아동의 기질적 특성뿐만 아니라 부모의 양육태도도 영향을 끼친다. 치료하며 목도한 점은 성장과정에서 어머니가 과잉보호를 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마음이 ‘알 두고 온 새의 마음’처럼 불안한 경우 분리불안장애의 위험이 증가한다. 사실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를 어떻게 키울까 하는 불안과 고민을 가지고 있다.특히 요즈음 평균 자녀수가 한두 명으로 줄어들면서 부모의 과도한 애정과 과보호의 경향이 더 많아지고 있다.그러나 과잉보호를 하게 되면 아이의 새로운 적응에 대한 시도를 단념시켜서 아이의 발전 능력이 저해되고 정서적으로 나약하게 만들며 자신감이 형성되지 않게 된다.자율성이나 주도성, 독립심이 형성되지 못하게 된다. 아이를 위한다는 것이 오히려 아이의 정신적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다.부모가 아이를 너무 끼고 돌면 아이는 스스로 난관을 극복할 기회를 얻을 수가 없다. 부모가 아이 혼자 설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지 않으면 아이들이 갑자기 부모를 떠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는 더 힘이 들 수밖에 없다.심하면 어른이 되어도 그 정신연령은 ‘어린아이’에 머물러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모든 일을 어머니에게 물어봐야 하는 ‘마마보이’가 된다.아이를 잘 키우려면 앞질러 해주지 말아야 한다.우리 부모들이 아이가 할 일을 앞질러 해주는 것은 ‘혼자서 못할까봐’ 또는 ‘다칠까봐’ 하는 마음에서라는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공감한다.하지만, 부모가 진정 아이의 교육을 생각한다면, 아이 스스로 활동하도록 허용해야 하고 아이가 자기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능력 밖의 어려움이 있을 때, 위험한 환경일 때에만 돕거나 보호해 주어야 한다, 아이에게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할 기회를 주자. 관심은 가지되 간섭하지 말자.아이의 신체적인 발육과 정신적인 성숙 정도에 따라서 적당한 시기에 욕구를 적절히 좌절시키는 것을 점진적으로 해야 하는데 이러한 훈련은 장차 험한 세파에 저항력을 기르기 위한 정신적 예방주사가 된다.아이는 좌절에 따르는 감정과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처리하고 ‘나도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율성과 주도성, 독립심은 그런 과정을 거치며 형성된다.자녀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 스스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어 그들이 주도적이고 독립적이고 행복한 성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부모가 언제까지나 아이를 알로 생각해서 보호하려고 한다면 아이는 영원히 부화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깃털과 품속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아이가 알을 깨고 나오도록 해주어야 한다.어미 새가 껍질을 깨어 주기보다,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부리 끝이 터지고 힘겨워도 제 힘으로 알을 깨고 나온 새는, 마침내 창공을 향해 힘찬 날개짓을 시작할 것이다. 새 학기 새로운 도전에 나선 아이와 부모를 응원한다.

2023-03-05

전기는 공공재… 펑펑쓰면 안된다

위현복(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에너지 절감운동을 거창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실제 에너지 절감은 우리 생활에서 가장 가까이 있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전기는 ‘kWh’(킬로와트시)로 표시한다. ‘KW’(킬로와트)는 전기의 양이고 ‘H’(시)는 전기를 쓰는 시간을 뜻한다. 그러니까 에너지 절감은 ‘KW’나 ‘H’를 줄이는 것이다. 기존의 백열등, 형광등, 할로겐 조명등을 LED 조명등으로 바꾸는 것이 대표적이다. 전자제품, 전기제품을 고효율 절전 제품으로 바꾸는 것 또한 ‘KW’를 줄이는 것이다.‘H’를 줄이는 것은 전기를 사용하지 않을 때 스위치를 끄거나 플러그를 뽑는 것이 대표적이다.출근하면서 혹은 잠들면서 스위치를 켜 놓으면 사용 시간의 4배 정도를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스위치만 끄면 H는 줄일 수 있는데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글로벌 IT기업 퀄컴은 본사에 7천500여개의 센서를 설치하여 직원들이 일정 시간 이상 자리를 비우면 컴퓨터부터 각종 전자기기, 냉·난방기, 조명까지 자동으로 꺼지게 하여 연간 100만 달러를 절감한다고 한국의 주요 일간지에 홍보한 적이 있다.알고 보면 전기를 절감하는 방법은 엄청 많다. 우리나라 전기요금 제도에는 ‘피크’라는 게 있다. 15분 이상 연속해서 연중 최대치로 사용하는 전기량을 1년간의 기본요금으로 정하는 제도로써 일상적으로 쓰는 전기량보다 피크치는 훨씬 높다. 대체로 1년 중 10~20시간만 보강하게 관리하면 최소한 수십 KW의 피크치를 낮출 수가 있다.냉·난방기 사용 시에도 항상 전기절감을 명심해야 한다. 대부분의 피크치는 냉방기, 난방기 사용 때 나타난다. 냉방기를 사용할 때는 실내 온도를 25~28℃에 맞춰놓고 선풍기를 겸해서 사용하면 전기 사용량을 30~40% 줄일 수 있다. 난방기 또한 근무시간 30분 전에 22~23℃에 맞춰 놓았다가 근무시간에 1~2℃ 높이고, 겨울철에도 목 티셔츠를 입거나 내의를 입는다면 쉽게 30~40% 절감할 수 있다.모든 전기는 한국전력과 사용량에 대해 계약이 되어 있는데 기업의 오너나 임직원 중 전기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기업이나 대부분의 IT 회사에서는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은 과도하거나 부족하게 계약해서 쓴다.오래된 상가나 사무실, 교회, 성당 등에서는 한국전력과 부족하게 전력량을 계약해서 1년에 6~7개월씩 계약전력 초과로 과태료를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몇 년 전 사설 테니스장 에너지 컨설팅을 한 적이 있는데, 처음 설비할 때는 야간 경기가 별로 없어서 70kWh를 계약했었는데 최근 야간 사용이 많아서 250kWh를 넘겨쓰고 있었다. 메탈 투광등을 LED등으로 교체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비싸서 한 달 한 달을 과태료를 내며 지탱하고 있었다.7~8년 전 대구지역 한 대학과 에너지 컨설팅을 한 적이 있다. 그 대학은 9천kWh를 한전과 계약했는데 피크는 1천700kWh에 불과했다. 너무 과다하게 전기 계약을 하여서 한국전력 규약상 계약전력의 30%인 2천700kWh를 기본요금으로 내고 있었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피크치 보다 매달 1천kWh 더 많은 기본요금(698만 원)을 한국전력에 납부하고 있었다.한국전력에 신고해서 합리적으로 조정하면 되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관심도 없어서 그냥 매월 698만 원씩을 한전에 납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그 대학 전기 컨설팅을 다시 하였는데 아직도 그대로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서울, 지방 할 것 없이 대부분 대학이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다.아파트도 대부분 계약전력이 과도하게 되어 있어 불필요한 요금을 한전에 납부하고 있으며, 한전은 쓰지 않는 과도한 계약전력으로 인해 불필요한 예비전력을 준비해야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계약전력의 과도한 설정은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대구에 있는 A공공기관의 경우 계약전력을 낮추면서 요금체계를 ‘일반용 을 고압A-Ⅱ’에서 ‘일반용 갑 고압A-Ⅱ’로 바꾸니 요금이 23% 줄어들었다.단순히 스위치를 끄거나 센서 부착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전기 관리가 복잡하다면 에너지 컨설팅 회사 컨설팅을 통해 불필요한 낭비를 줄임과 동시에 ‘한전의 불필요한 전기 준비’도 줄여줘야 한다.계약전력을 과도하게 설정하면, 이유도 모르고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한전에 납부하며 전기세가 많다고 불평들을 한다.우크라이나 전쟁 후 석유, 가스값 상승으로 전기요금도 30% 가까이 오르고 가스 요금은 100% 이상 오르니 모두들 충격을 받고 있다. 전기는 관심만 가지고, 또 세심하게 관찰하면 절약할 요소가 많다. 전기요금 고지서가 나오면 자세히 살펴보고, 컨설팅을 통해 불필요한 지출은 줄여나가는 지혜도 필요하다. 재산이 많다고 해서 전기세 정도는 아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전기는 공공재다. 전기사용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필요하다.

2023-03-05

언어폭력 ‘정도’라니요?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초등학교 때 장면 하나, 하늘은 파랗고, 길 양옆에는 벼가 넘실거리는 초가을, 경운기가 다닐 만한 흙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멀리서 꼬마 서너 명이 ‘돼지야’ 하고 소리쳤다. 나를 놀리는 말이다. 그날 나는 땅속으로 꺼지고 싶었다. 장면 둘, 마루 끝에 앉아 있는 나를 가리키며 방에서 엄마가 이웃집 아줌마에게 ‘덩치는 인왕산만 한 것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나는 마루 밑으로 사라지고 싶었다.이 두 장면의 ‘맥락’을 보자면, 길에서 우연히 만난 그 꼬마들의 놀림은 위협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장난이었고, 엄마의 인왕산 비유는 나의 심한 낯가림을 걱정하면서 나온 말이라 학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돼지’와 ‘인왕산’이라는 단어에 심하게 위축되고 이후 성격 형성에 영향을 받았는데, 그것은 나의 ‘기질’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언어폭력이라고 죄를 묻기는 어렵다.그러나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었던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 경우는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순신의 아들은, 내가 길에서 우연히 몇 번 만난 꼬마가 아니라, 기숙사에서 피해자와 같은 방을 쓰는 동급생이었고, 아버지의 권력을 자랑하며 피해자에게 ‘좌파 빨갱이’, ‘제주도에서 온 돼지’라고 했다. 8개월 이상 지속된 혐오 표현은, 피해자가 호소한 고통을 고려했을 때 명백한 언어폭력이다.그런데 그 부모는 학교의 전학 조치에 불복해서 무죄를 주장하며 대법원까지 소송을 이어가서 가해 학생은 1년 이상 학교에 더 있었다. 피해자가 자살 시도까지 하고 학업을 포기했는데도 변호인 측은 ‘맥락’을 봐야 한다거나, 피해자의 ‘기질’의 문제로 몰아갔다고 한다. 그들이 내세운 논리 중에 특히 내 눈에 들어온 부분은 ‘언어폭력 정도로 고등학교 남학생이 일반적으로 피해 학생과 같은 피해를 입는다고 보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리사 펠드먼 배럿은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에서 인간은 ‘말’로 서로를 조절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 소개된 한 실험을 보면, 실험 참가자들에게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의 위험 상황을 단순히 말해주기만 했는데도 심박수, 호흡, 신진대사, 면역체계, 호르몬은 물론이고, 체내 여러 가지를 제어하는 뇌 시스템의 활동이 증가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은 혐오스러운 말을 들으면 뇌는 위험을 예측하여 다량의 호르몬을 혈류로 보내어 생존에 필요한 신체 예산을 탕진하게 된다.이렇게 ‘말’은 인체를 조절할 수 있어서 몇 달 이상 지속적이고 강력한 언어폭력은 만성 스트레스를 일으키고 뇌를 갉아먹는다고 한다. ‘언어폭력 정도로 고등학교 남학생이 이런 피해를 입을 수 없다’가 아니라 ‘언어폭력만으로도 누구나 피해 학생과 같은 피해를 충분히 입을 수 있다.’그러나 피곤할 때 한마디 격려의 말이 마음을 진정시키듯이, 배럿은 말로 망가진 뇌는 말로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 가까운 이의 따듯한 말도 피해자를 도울 수 있지만, 무엇보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가 피해자의 회복에 제일 중요하다. 그날이 꼭 오기를 바란다.

2023-03-05

혁신의 바이블은 무엇인가

정상철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책의 바이블(Bible)은 성경이라 한다. 그곳에 진리와 길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혁신의 바이블은 무엇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정형화된 정답은 없는 것 같다. 혁신은 생물이기 때문에 대내외 변화에 맞게 진화하고 최적화 되어 간다.공룡은 지구 변화에 따라 몸을 작게 진화하지 못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역사가 되었다. 혁신은 생산수준을 높여서 경쟁력 확보와 일하는 사고, 일하는 방법을 진화 발전시켜 생존하는 길이다.세계 유수 기업들이 많지만 시대 변화에 먼저 변화하지 않아 부귀영화를 누렸던 대기업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디지털 카메라 시대를 예감하면서도 타이밍에 맞게 변화를 선택하지 않아 쇠퇴의 길을 걸은 필름회사나 100년의 부귀영화를 누리다 사라진 베들레헴제철소도 그 중 하나다.이와는 반대로 일본전산은 1973년 사장을 포함한 단 네 명이 교토의 시골 창고에서 시작해 50년만에 직원 13만명, 매출 16조원의 막강한 기업으로 성장한 비결은 무엇일까. 일본전산은 초기 ‘모터의 크기를 반으로 줄여 납품해달라’는 대기업의 요청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약점을 핑계로 변명하지 않는다’라는 비즈니스 콘셉트에 따라 긍정적 창조로 핸드폰, PC, 로봇 등 작은 모터 전문생산기업 세계 1위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즉시, 반드시, 될 때까지 한다’가 일본전산의 기업 모토로 영세한 시절, ‘밥 빨리 먹는 사람, 목소리 큰 사람, 화장실 청소 잘 하는 사람’ 등의 시험으로 삼류 인재들을 등용해 세계 초일류 기업과 경쟁에서 승리한 인재전략이 성공의 키가 되었다.그것은 기본이 튼튼한 인재를 바탕으로 경영자가 직원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지속적인 동기부여를 통하여 생각하는 직원, 성장하는 기업을 만든 비결이었다. 혁신활동은 여러 분야의 문제를 개선해서 생산 최적화하는 것이지만 현장 개선활동에는 문제를 푸는 기법이 있다. 현장의 작업장 환경개선과 공구, 비품 등 일의 편리성 확보를 위한 5S(정리, 정돈, 청소,청결, 습관)활동이 있고, 설비 열화를 예방관리하기 위해 닦고 조이고 기름치며 미결함을 중결함으로 못 가게 하는 원리인 마이머신 활동이 있다.고급 강종을 생산하기 위해 P사가 개발한 My MS 기법은 설비 구조와 작동원리를 이해하며 예지조업까지 가능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성공의 길은 혁신기법의 수행원리와 기능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 있다.기업생리와 혁신의 원리로 반추해 보면, 혁신의 바이블은 ‘기업의 바른 방향설정과 경쟁력 확보를 향한 문제를 푸는 기법의 최적화 그리고 인재육성’으로 구성된다. 핵심은 문제를 푸는 것인데 기법을 적용할 때 안전과 설비관리, 생산, 품질 등 ‘균형있는 혁신활동’이 되어야 하며, 인사·조직·문화 등 기업전반에 걸쳐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일본전산의 성공사례에서도 경영자의 일관된 경영방침과 작은 모터 개발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인재육성이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데 생산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직원들의 지속적인 동기부여와 인재운영능력이 성공의 키이고 혁신의 바이블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23-03-05

경북도 ‘인구쇼크’ 심각… 광역비자제도 필요

경북도내 인구가 가파르게 줄면서 이웃에 빈집이 늘고 초등학교 신입생이 사라지는 현상이 일상화되고 있다. 경북도내에서는 지난해 총 1만1천342명이 출생했지만, 사망자는 이보다 1만4천명이나 많은 2만5천350명에 달해 인구 감소가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전국 최고의 혼인율과 출산율을 자랑하던 구미시마저 지난해 처음으로 인구 데드크로스(자연감소) 현상이 발생했다.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은 대표적인 인구소멸 위기 지표다. 경북도는 지난 2016년부터 이미 자연감소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소멸지수를 보면, 경북도내 23개 시·군 중 포항·구미·경산·경주 등을 제외한 18곳이 인구소멸위험지역이다. 이중 군위와 의성, 청송, 영양, 영덕, 청도, 봉화는 ‘고위험’ 진단을 받았다. 인구감소로 지난해 경북도내 빈집수는 1만4천여채(전국의 20%)에 이르렀다. 그리고 경북도내 초등학교 중 2023학년도 신입생이 한 명도 없는 학교가 32개교에 달했다. 이 중 4개교는 3년 연속 신입생이 없었고, 10개교는 2년 연속 신입생이 없었다. 입학생이 1명뿐인 학교도 30곳이었다. 문을 닫는 초등학교가 증가하면서 교육여건이 악화하니 아이를 키워야 하는 청년들은 도시로 떠나갈 수밖에 없다. 지난해 경북도로 전입한 청년수는 10만8천833명, 전출한 청년수는 12만616명으로 1년간 1만1천783명이 고향을 등졌다. 청년층 이동의 가장 큰 원인은 교육과 일자리였다.‘인구쇼크’ 현상은 경북만 겪는 현안이 아니다. 최근에는 머지않아 한국이라는 나라가 소멸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도 언급했다시피, 저출산·고령화 추세를 막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난 2006년부터 약 280조원의 예산을 저출산 대응에 투입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민제도 도입 등 인구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준비할 때가 된 것 같다. 정부는 최근 경북도가 제안한 ‘광역비자’ 제도(시도지사가 외국인 노동인력, 유학생 유치를 위해 비자 발급 권한을 갖는 것) 도입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023-03-02

서민술 소주

우정구 논설위원 주세와 주정 등 재료비 상승을 이유로 출고가 인상을 고려하던 소주업계가 소주값 인상은 없던 일로 백지화했다. 업계의 소주값 인상 움직임에 정부가 실태조사 카드를 꺼내면서 소주값 인상을 사실상 압박했기 때문이다.최근 정부가 은행 금리에 이어 통신비, 소주값까지 압박을 가하는 강공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고물가 흐름이 좀처럼 잡히지 않자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려는 강수로 풀이된다. 시장경제에 맡겨야 할 가격을 정부가 개입하면서 거부감도 있지만 한편으로 정부 고민도 이해될 법도 하다.작년 경우 고물가로 실질소득이 마이너스로 넘어갔다. 연초 들어서는 난방비 폭탄까지 가세하면서 민심이 흉흉해 진퇴양난에 빠진 정부로서는 인위적인 통제 수단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특히 서민의 술 소주가 서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소주값이 일반식당에서 한 병당 6천원까지 오를 것이란 관측 보도가 나오자 각종 매체에는 다양한 내용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이제 소주 한잔 사달라는 말도 쉽지 않겠네”, “집에서 마셔라”, “삼겹살에 냉수를 마셔야 하나” 등 소주값 인상에 대한 부정적 댓글이 주류를 이뤘다.서민이나 봉급자가 스트레스를 푸는 데 가장 친근한 소주값 인상에 정부가 민감 반응을 한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러나 외적 요인에 의한 가격 인상이 정부 개입으로 진정될 지는 알 수 없다. 서울에서는 소주 한 병 값이 6천원하는 곳이 등장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소주가 서민의 술로 불리는 이유는 맛이 있어서도 아니고 향이 좋아서도 아니다. 단지 저렴하기 때문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고통을 분담할 때 소주도 서민 술로 우리 곁에 머물게 된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3-02

사드가 남긴 것

홍석봉 대구지사장 #1. 국방부는 지난달 경북 성주 사드 기지 부지에 대한 환경영향평가서 초안을 발표했다. 2016년 사드 부지 선정 당시 인체 유해 논란이 인 사드 레이더 전자파의 인체보호기준을 만족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향후 전자파 저감 방안과 주민 우려 해소 대책도 내놓았다. 성주 사드가 임시 배치 6년 만에 정상화의 길이 열렸다. 주민 대표가 반발하고 있지만 사드 사태는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다.2017년 사드 임시 배치 직후 민주당과 좌파 단체들이 전자파 괴담을 퍼뜨렸다. 주민들은 사드 장비와 물품 반입을 막으며 집단 시위를 벌였다. 반대 단체 등은 “사드 전자파가 참외까지 오염시킨다”며 ‘전자레인지 참외’라고 비아냥댔다. 선동의 끝판왕이었다. 주민과 반대단체들은 거의 매일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김천역 광장에도 주말마다 30여 명 이상 모여 시위를 했다. 시위는 6년 동안 꼬박 이어졌다. 시위는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젠 힘을 잃었다.일손을 놓은 채 시위에 나섰던 주민들과 각지에서 몰려든 반대 단체, 이를 막는 경찰과 충돌로 소성리는 전장터를 방불케 했다. 사드가 남긴 상처는 컸다. 행정낭비와 함께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초래했다. 공사가 늦어지면서 장병들은 천막과 컨테이너 생활을 해야 했다. 한·미동맹에도 조금씩 금이 갔다. 6년 동안의 간접 피해는 아예 추산이 어렵다. 주민과 반대단체 활동가들은 집시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았다.#2.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가 한국인에게 광우병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는 MBC ‘PD수첩’의 공포 방송에 여중생까지 촛불시위에 나서는 등 집단 시위로 번졌다. 3개월 동안 나라를 뒤흔들었다. 이후 대법원에서 MBC ‘PD수첩’ 일부 내용이 허위로 확인됐다. MBC가 사과 및 정정보도를 했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인간 광우병 사례는 단 1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거짓 선동에 넘어간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국민들의 심리적 피해는 더욱 컸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이 밖에도 ‘세월호 사고’, ‘이태원 참사’ 등 관련 가짜뉴스 사례는 수없이 많다. 지금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백제 무왕이 지었다는 ‘서동요’가 있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서동이 가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우리나라 가짜뉴스의 원조격이다.1923년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등의 낭설을 퍼뜨려 수 천 명의 조선인을 살해했다. 가짜뉴스가 참혹한 학살로 이어졌다.가짜뉴스(Fake News)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꾸며낸다는 뜻의 ‘주작부언(做作浮言)’이라는 한자어와 통한다. 특정 세력이 개입되면 파급효과는 폭발적으로 커진다. 우리 사회는 가짜뉴스에 속수무책이다.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번번이 당한다. 가짜뉴스는 2, 3차 가해로 이어진다. 국민 분열과 불신을 부추긴다. 많은 사회적 비용이 수반된다. 언제까지 가짜뉴스에 휘둘리며 고통받아야 하나.

2023-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