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코로나 시대…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코로나19 사태’로 나라와 나라를 이어주던 하늘길이 대부분 막혔다. 외국으로의 여행을 꿈꾸던 사람들의 발도 묶였다. 이런 상황에선 ‘책을 통한 대리 만족’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독서의 계절’ 아닌가. 여행작가 백경훈의 책 2권과 함께 한국인에겐 다소 낯선 여행지 무스탕과 파키스탄으로 떠나보자. 코로나19가 한시바삐 우리 곁에서 사라지기를 기원하며.여행자를 꿈꾸게 하는 책 ‘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숨겨진 왕국’이 유혹하는 땅으로 가고 싶다면…우리가 사는 세상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전자의 경우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여행을 꿈꾸는 삶을 산다면, 후자는 아이들이 부르는 단조로운 동요와 같은 일상을 그저 견딜 뿐 일탈의 용기를 내지 못한다.단 한 번뿐인 인생. 우리는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기를 열망해야 할까? 시인이자 여행작가인 백경훈의 네팔 기행기 ‘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는 위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한번 뿐인 인생, 네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살아라.”젊은 시절 백경훈은 세칭 ‘잘 나가는 광고쟁이’였다. 높은 연봉에 창의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광고대행사 CD(Creative Director)의 삶을 과감히 버리고 그가 설산(雪山)과 푸른 하늘의 네팔에 매혹된 이유는 뭘까?광고 촬영지로 적합할 지 검토하기 위해 우연히 회사 자료실에 비치된 네팔 관련 영상을 본 백경훈. 그것이 그의 미래를 결정지을 운명이었을까. 백씨는 화면 가득 펼쳐지는 히말라야의 신비로운 풍경에 완벽히 매료되고 만다.이후 오랜 짝사랑 끝에 마침내 9일의 휴가를 얻어 수천m의 설산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는 네팔 히말라야로 향하는 백경훈. 그 첫 여행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네팔의 주술’에 걸린 그는 마침내 ‘출근-근무-퇴근-출근’이 반복되는 일상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버린다.그때부터 한 번 가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5개월 이상을 네팔에서 머물며 그곳 풍경과 사람들의 친구가 된 백경훈이 그 체험을 묵혀 ‘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을 낸 것은 ‘수박 겉 핥기’식의 고만고만한 네팔 여행기에 질려버렸기 때문.그가 20여 일을 머물며 훑어본 무스탕은 네팔 중북부 산간에 위치한 왕국. 백씨가 여행할 당시엔 22대 국왕 ‘지그미 팔벌 비스타’가 통치하고 있었다.무스탕은 1992년에야 외국 여행자들의 방문을 공식적으로 허락한 지구 위 마지막 금단의 땅. 1년 내내 거센 모래바람이 불고, 해발 3천m를 훌쩍 넘는 곳에 위치한 탓에 이방인들은 고산병으로 쓰러지는 일이 흔하다. 그 존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누구나 찾아갈 수는 없는 왕국 무스탕. 백경훈은 위험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이곳을 향해 출발하며,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를 인용한다.“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모든 것의 끝, 심지어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추동한 여행이었다.멀리 낯선 땅에서 들려오는 “영혼이 자유로운 자, 내게로 오라”는 목소리. 백경훈은 지구 위에 남은 마지막 금단의 땅이자, 눈 덮인 웅장한 산들이 춤추는 무스탕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자신의 가슴 속에서 맹렬히 끓고 있는 순정한 욕망을 거부하지 않았다.책은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무스탕에서의 3주를 세세하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록한 성과물이다. 사진작가 이겸과의 동행이었고, 이겸의 사진은 백경훈의 글 못지않은 울림으로 독자들을 유혹한다. “당신은 이처럼 용기 있는 떠남을 행할 수 있는가”라는 아픈 질문을 함께 던진다.너무나 푸르고 높아서 현실 같아 보이지 않는 하늘, 척박하지만 꿈을 품은 꽃들이 숨어있는 대지, 순정과 순수의 절정을 사는 사람들. 백경훈은 무스탕에서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이어주는 신(神)을 만났다”고 말했다.‘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를 읽은 당신은 무엇과 만날 수 있을까? 책이 들려주는 막막한 바람 소리에 네팔로 향하는 배낭을 꾸릴지도 모른다.파키스탄이란 나라가 궁금할 때 펼치면 좋을 ‘신의 뜻대로’.선량하고 눈 맑은 아이들과 만나고 싶다면…시인 김수영처럼 말하자면 “먼 데서 먼 곳을 보는 눈빛”이다. 어떤 세속적 욕망의 때도 묻지 않은 투명한 눈망울. 죄 짓지 않고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선량한 표정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착한 색채’로 물들일 듯하다.궁핍과 불편함이 주위 사방에 산재한 척박한 땅 파키스탄. 그러나, 소년의 눈 속엔 외부 환경이 가져다줬을 법한 서글픈 그늘이 없다. 백경훈은 이 소년을 보며 영혼이 흔들렸다고 한다.여행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은 고백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생면부지의 땅에서 내 전생을 본다”고. 눈 맑은 파키스탄 소년을 만나 영혼의 흔들림을 경험했다는 백경훈. 그 역시 잊었던 전생의 자기 모습을 소년에게서 발견했던 것일까?여행기(旅行記) ‘신의 뜻대로-파키스탄, 그 거친 땅에서 만난 순수’는 예쁜 책이다. 시와 고전 인용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백경훈의 물기 어린 미문(美文)과 유별남이 찍은 사람 향기 물씬 풍기는 사진의 결합. 두 사람이 빚어내는 하모니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2개월 동안 파키스탄을 여행한 백경훈은 해발 6천m에 달하는 미답봉(未踏峯) 등반기와 오지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 여기에 기차로 37시간을 달려야했던 ‘이슬라마바드-카라치 구간’의 체험을 꼼꼼하고 세밀한 기록으로 남겼다.그렇기에 ‘신의 뜻대로’는 “잘 만들어진 파키스탄 가이드북”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하지만, 통상의 가이드북과는 또 다르다. 왜냐? 백경훈의 책에선 자신이 여행한 곳에 대한 꾸미지 않은 사랑이 읽히기 때문이다.설산이 녹아 형성된 투명한 호수에 발을 담근 파키스탄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간 그는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린다.“어린 소년, 소먹이일 듯한 풀짐을 짊어진 그 아이가 미소를 띠며 우리 앞에 서 있다. 두건 그림자 어리는 이쁘디이쁜 소년. 땡볕 아래 게슴츠레한 내 눈이 번쩍 커진다. 너, 누구니… 먼 길에 지친 나를 위로해주는 별 같은 아이야… 지금도 그 소년이 눈에 선하다. 나도 그런 표정을 가진 적이 있었을까.”몸이 아닌 마음으로 파키스탄의 산과 강, 사람들을 끌어안으며 옮겨 다닌 발걸음이기에 백경훈의 글에선 소년의 옷자락에 묻은 바람 냄새와 손끝 미세한 떨림까지가 그대로 전해져온다.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다. 우리는 이때껏 ‘한 손엔 코란(이슬람 경전), 다른 한 손엔 칼’이란 문장을 읽으며, 이슬람교도의 비타협성과 폭력성만을 이야기 들어왔다. 서양, 특히 미국 중심의 시각에서 그들을 봐온 것이다.‘신의 뜻대로’는 그간 우리 내부에서 굳어진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도 작지 않은 도움을 준다.마지막 장에 묶인 ‘살람! 이슬람, 평화’는 요약된 이슬람의 역사와 왜곡·굴절돼 왔던 이슬람교도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슬람 문명’ ‘무슬림 여성과 베일’ ‘세계는 평평하다’ 등 다수의 책을 읽고 핵심을 요약해낸 백씨의 성실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여행을 마친 백경훈은 60일간의 떠돎이 제 삶에 끼친 영향과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파키스탄에서의 여행은 혁명이다. 태양과 원초적 대자연 아래 자신을 허물고 부활을 꿈꿀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언젠가 청정의 땅, 파키스탄 길 위에 다시 서고 싶다. 신이 원하신다면, 신의 뜻대로… 꿈은 꾸는 자의 몫, 나는 계속 꿈을 꿀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10-22

동양 유교·정신 문화전 세계인에 알린다

◇ 세계 교육 올림픽 ‘국제교육도시연합 세계총회’ 미래 교육의 가치와 방향 제시2010년 국제교육도시연합(IAEC) 가입, 2019년 유네스코 글로벌 학습도시(GNLC)에 가입한 안동시가 1년간의 철저한 준비로, 첫 번째 도전 만에 세계교육 올림픽으로 불리는 ‘2022년 제16회 국제교육도시연합 세계총회’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국제교육도시연합(International Association Educating City)은 1994년 창설돼 현재 36개국 494개 도시가 회원으로 가입된 교육 관련 최고의 역사와 권위를 가진 조직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본부를 두고, 총회와 상임이사회, 사무국으로 구성돼 있으며 바르셀로나 시장이 의장직을 맡고 있다. 교육도시헌장에 부합하는 정책을 개발하고 회원 도시 간 평생학습 및 교육 시책 공유를 주요활동 목적으로 한다.IAEC 세계총회는 1990년 제1회 스페인 바르셀로나 총회를 시작으로 격년으로 개최돼 올해 총회가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됐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스페인 빌바오·간디아 제치고 안동시 선정이번 세계총회 유치는 2010년 IAEC 회원 도시로 가입한 안동시가 지난 1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IAEC 사무국에 유치신청서를 접수한 이후 애초 3월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리는 정례회의 시 유치 제안발표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전 세계 확산으로 인해 취소돼 지난 15일 오후 8시 30분 온라인(ZOOM)으로 유치신청 발표가 진행됐다.발표자로 나선 박성수 안동부시장은 15분의 발표와 30분의 질의·응답을 통역 없이 영어로 진행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스페인의 빌바오와 간디아, 대한민국의 안동시 등 총 4개 도시가 신청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투표결과 안동시가 50%의 지지를 받으며 2위 스페인 빌바오(30%)를 제치고 2022년 개최지로 최종 선정됐다.◇ 안동국제컨벤션센터 일원에서 3개 소주제의 세션으로 진행안동시는 이번 총회 유치를 통해 2022년 하반기에 도산면 일대에 조성된 안동국제컨벤션센터 일원에서 행사를 진행하게 된다.총회 기간은 3일간으로 전 회원 도시가 참가하는 총회, 상임이사도시회의, 주제별 워크숍, 교육도시 홍보부스 운영 및 세계유산 시티투어 및 개최도시 자체 연계 행사로 진행된다.기초지방자치단체 단독으로 국제회의를 유치함으로써 2003년 대구·경북 최초의 평생학습도시로 선정된 안동시가 추진하고 있던 글로벌 학습도시 사업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이번 총회는 ‘전통에서 미래 교육을 보다’를 공식 주제로 정하며, 인문·사회·미학적 가치를 소주제로 정해 동양의 유교문화와 정신문화가 잘 살아있는 안동의 지역특성과 유럽의 인문정신을 조화롭게 끌어내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총회로 만들어 갈 예정이다.또 유네스코 세계유산 ‘하회마을’과 ‘봉정사’, 세계기록유산 ‘유교책판’에 이어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그랜드슬램 달성을 노리는 안동시는 총회 기간 중 전 세계인들에게 안동의 우수한 문화유산을 홍보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이번 IAEC 총회 유치의 성공적인 요인으로는 안동시가 IAEC 회원 도시로 활동하며 △세계 최초의 종합병원 내 평생학습센터 설치 △수요자 맞춤형 평생학습 프로그램인 ‘길거리 교실’ △시민역량 강화를 위한 ‘시민강사 9단’ 등 안동시의 우수사례를 IAEC 회원도시와 공유하기 위해 사무국과 소통해 온 점 △2010년부터 4번의 세계 총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 △안동만이 가진 전통 인프라와 평생교육에 대한 비전을 적절히 조화시켜 ‘왜, 안동이 2022년 IAEC 세계 총회를 유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철저한 대비를 한 점 △동아시아의 정신문화를 잘 접목한 주제선정과 국제회의 기준에 맞춘 컨벤션센터의 개관 △한국을 대표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이 심사에 참여한 상임이사 도시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특히 58%에 이르는 시민들의 평생학습 참여율과 국내 최대의 SK케미컬 백신생산 시설이 있는 코로나에 안전한 도시라는 이미지가 크게 주목받은 점이 유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2022년 하반기, 36개국(494개 도시) 2천여 명 참가 예정2022년 열리는 총회 기간 국내·외 약 2천여 명의 방문객이 안동을 찾을 것으로 예상하며 숙박, 음식, 관광 등 컨벤션 연관 산업을 비롯한 지역 경제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을 뿐 아니라 국책사업인 3대 문화권 활성화와 대한민국 관광거점도시,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로서의 참모습을 알리고 인구 16만의 소도시도 상상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또 이번 총회를 통해 동양의 전통사상과 시민교육이 유럽의 인문학과 어떻게 융합하는지를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 더욱 체계적이고 세계화 된 평생학습도시 안동을 전 세계 교육 전문가들에게 알리는 장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권영세 안동시장은 “지금까지는 아는 것이 힘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상상하는 것이 힘이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1년간의 철저한 준비로 성공시킨 만큼 이제 총회까지 남은 약 2년의 기간 동안 총회의 내실 있는 준비를 위해 전담 TF팀을 구성해 ‘2022년 국제교육도시연합 안동총회’를 집중적으로 홍보하겠다”며 “앞으로 494개 회원 도시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비회원도시 참여를 유도하고 국내 평생학습도시의 참여를 통해 서로의 우수사례를 공유하는 등 다양한 협력체계를 구축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을 전 세계에 적극 알리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총회의 성공 개최의 강한 의지를 밝혔다./손병현기자 why@kbmaeil.com

2020-10-22

철길과 시장 사이, 재밌는 변화가 샘솟는 골목

골목길에 출입문이 있을 리 없지만 효자시장 골목길에 가려면 지곡건널목을 거쳐야 제대로다. 요란한 경고음이 울리면 제아무리 광을 낸 승용차라도 차단기 앞에 멈춰야 한다. 차단기가 올라간 뒤 홀로 시간이 멈춘 듯한 만물수퍼마켓을 지나야 비로소 골목의 진면목을 만난다.□ 효자가 살았다고 해서 ‘효자동’이라 불려효자가 살았다고 해서 효자동이냐고 생각했다면 당신의 짐작이 맞다. 효자는 전국 어디에나 살았기에 현재 효자동이 남은 도시는 서울과 전주, 춘천, 고양을 포함해 다섯 곳이다. 평안남도에서도 검색이 되니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 포항에 살았다는 효자는 전희(田禧)라는 조선시대 인물이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묘소 옆에서 3년간 곡을 하자 효심에 감탄한 범이 밤마다 함께 지키다 날이 밝으면 사라졌다고 한다. 모친상에도 마찬가지였기에 조정에서 효자각을 사액했다. 세월이 흘러 비각은 사라지고 비석은 현재 효자초등학교 북쪽으로 옮겨졌다.효자동 전에는 버들골이라는 예스러운 이름도 있었다. 형산강변에 우거진 땅버들에서 유래했기에 땅벌동 혹은 유동(柳洞)이라고도 불렀다. 나룻배가 한가로이 떠다니는 한 폭의 동양화 같았을 마을이 개발된 것은 1960년대. 포스코가 사원주택단지를 지으면서 인부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을 상대하는 식당과 노점상이 들어선 곳이 효자시장이다. 시장 바로 앞에 포스코 직원들이 이용하는 효자역이 생겼고, 출퇴근 시간에는 직원들의 유니폼으로 노랗게 물드는 골목이 형성되었다. 이때가 효자시장의 전성기였는데, 2000년대 이후 이동지구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시장과 인근 상권은 서서히 내리막을 걸었다.□ 효자동 골목길의 ‘첫 가게’ 달팽이책방골목길 생태계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모종린의 ‘골목길 자본론’에 따르면 골목상권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그곳에서 처음 창업한 ‘첫 가게’에서 시작된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 있는 첫 가게를 찾는 사람들로 유동인구가 증가하고 인근에 다양한 가게가 줄지어 들어선다. 그렇게 볼 때 효자시장 골목길의 첫 가게는 달팽이책방이다.2015년 1월 문을 연 달팽이책방은 포항에 처음 들어선 독립출판서점이다. 책방지기 블로그에 실린 일기에는 책방을 시작할 당시의 풍경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책방을 오픈하고 2주 만에 친구와 ‘재미삼아’ 낭독 모임을 시작했다. 한겨울 그것도 인적 없는 골목에 문을 열었으니 손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우리는 서가에 꽂힌 소설책 한 권을 꺼내서 국어시간에 하듯이 한 페이지씩 돌아가며 크게 소리 내어 읽었다. 소설을 낭독한다는 재미에 더해 각자 목소리톤에 따라 색다른 즐거움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신이 난 우리는 바로 SNS에 모임 공고를 내고 매주 같은 시간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다음 주에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왔고 개중에는 경주나 울산 등 멀리에서 온 분도 있었다.효자시장 골목길의 변화는 이렇듯 소설 낭독에서 시작되었다. 저자가 직접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진행하는 독립출판물은 일반 서점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하고 개성 있는 아이템이 많다. 자신의 취향을 찾아 달팽이책방으로 모인 사람들은 역사와 시, 소설, 희곡, 그림책 등 다양한 분야의 독서모임을 만들고, 넘치는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드로잉, 홍차, 와인, 잡지 제작을 배우는 수업들이 생겨났다. 책방의 한쪽 공간에서는 늘 작은 전시가 이어지고 저자 초청 북 토크와 인디뮤지션의 공연도 열렸다. 책을 파는 공간을 넘어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연결의 공간이 바로 달팽이책방인 것이다.달팽이책방이 좋아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단골은 가까운 거리에 민들레글방을 열었다. 지금은 ‘달팽이 곁에 민들레’라고 해서 전국에서 찾는 골목책방 순례지가 되었다. ‘달팽이’와 ‘민들레’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동네에도 책이 있는 공간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현재 포항 북구의 그림책 카페 ‘트레져아일랜드’와 동네 헌 책방 ‘리본’, 남구의 북카페 ‘지금책방’이 영업 중이다.출판사를 차린 사람들도 있는데, 포항 여남 해녀들의 이야기 ‘별따는 해녀’를 펴낸 ‘학교앞거북이’와 결혼이주여성들이 함께 매거진을 만드는 ‘포포포’가 그렇다. 달팽이책방을 드나드는 이들이 많아지자 인근 골목에는 특색 있는 식당과 디저트 카페, 공방, 아틀리에 등이 들어섰다.곳곳에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이름의 가게들과 독특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간판들, 규모는 작지만 청년 창업자의 취향이 한껏 발휘된 인테리어가 사랑스러운 곳들이다. 가게 하나하나에 깃든 개성은 독특하지만 소박한 골목과 전혀 어긋나지는 않는다. 놀랍게도 효자시장 골목길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가게는 대한민국 어느 골목에나 있는 편의점이다. 지나치게 큰 간판과 밝은 조명 탓에 너무 튄다고나 할까. 그에 비해 담박한 간판을 내건 가게들은 특색 있는 메뉴로 사람을 모은다. 수제버거와 라멘, 문어튀김, 쌀국수, 가정초밥, 낫토 통명란 덮밥, 대창덮밥 등은 젊은 입맛을 사로잡았다. 서두르지 않는다면 재료 소진으로 허탕 치기 일쑤고 서두른다 해도 식사시간에는 줄을 서야 한다. 개성 있는 상점들이 사람을 끌어들이고 동네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찾는 이 많아지면서 임대로 부담도 커져사람들이 골목을 좋아하는 이유는 유난스럽지 않으면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 아닐까. 골목 구석구석에 겹겹이 쌓인 시간이 빛나고 혼자 걸어도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 아닐는지. 반면 이름난 골목은 어떤가. 관광객들로 번잡하고 시끄러워 정작 주민은 문을 걸어 잠그고 지낸다. 고즈넉한 골목을 선호하면서도 골목상권 활성화라는 미명하에 골목의 정체성을 간과한 것이다.골목길이 주목받으면서 도시 공간에 즐거운 변화가 일어나고 풍요로워지는 건 좋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소비자들에게 일회용품처럼 소모될 위험도 커졌다. 달팽이책방의 책방지기도 서점에서 찰칵찰칵 소리 내며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린 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이들에게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혹여나 조용히 책읽기를 즐기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몰리면서 임대료 부담도 덩달아 커졌다. 대부분 젊은 취향의 가게들은 2년 단위로 사는 세입자라고 했다. 재계약 기간이 되면 임대료가 오르지 않을까 공포에 가까운 불안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책방지기가 쓴 글을 통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골목길 이름에 대한 진지한 고민 필요해효자시장 골목길이 2, 3년 전부터 주목을 받았던 배경에는 ‘효리단길’이라는 이름도 한몫을 한다. 효자시장과 효자교회 사이의 이 골목길은 예전에 빈 점포가 많았다. 후미진 골목이 예쁜 이름을 얻은 데다 사람들로 북적대기까지 하니 이름이 효자다 싶지만 덥석 받아들기에는 좀 더 생각이 필요하다.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리단길’이라는 명칭이 붙은 상권은 2018년 9월 기준으로 20개나 된다. 서울의 경리단길·망리단길·송리단길, 부산의 해리단길·망미단길·범리단길·전리단길·초리단길, 경주의 황리단길, 문경의 문리단길, 대구 봉리단길 등 일일이 언급하기에 숨이 찰 정도다. 이 가운데 몇 곳은 여전히 건재하고 또 몇 곳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을 것이다. 유행에 편승하더라도 골목이 좋아진다면야 무슨 고민일까. 문제는 ‘○리단길’이라고 호명되었을 때 떠올리게 되는 어떤 풍경이 있다는 것이다. 소위 뜨는 골목에 편승해 홍보하게 되면 골목은 부풀려지기 쉽고 무엇보다 골목 자체의 매력을 담을 수 없다. 처음엔 독특한 자기만의 분위기가 있는 가게들이 형성되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자들이 몰려들면서 결국 잊혀져버린 골목의 스토리는 이미 차고도 넘친다.그렇기에 김주일 한동대 교수는 “○리단길 현상의 이면에는 새로운 시대의 도시문화라는 긍정과 의미성이 결여된 유행에 불과할 수 있다는 우려가 공존한다.”고 말한다. 결국 일시적인 유행이나 복제품이 되지 않으려면 그 속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람냄새 나는 효자시장효자시장 골목길을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흔한 안내판 하나 없고 자세히 알고 싶어도 문의할만한 행정기관 담당부서도 없다. 다만, 이 길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철길숲을 걷다보면 만나는 골목, 계속 걷다보면 효자시장에 이르는 골목으로 통한다.효자시장은 포항에서 죽도시장 다음으로 큰 시장이다. 달팽이책방 책방지기가 자란 동네이며 민들레 글방지기가 하루일과를 마치면 들러서 장을 보는 곳이다. 청년 창업가들이 재료를 구입하는 단골가게가 즐비한 곳이며 상가가 무려 220여 개나 되는 없는 게 없는 곳이다. 전국의 전통시장이 그렇듯 효자시장도 침체기를 겪었지만 2013년 상인회를 조직하고 상인대학을 개설했으며 다양한 정부사업을 따내며 혁신을 꾀했다. 상인회 소속 상인만 250여 명으로 전통시장 가운데도 혈기왕성한 젊은 시장인 셈이다. 시장 상인들은 골목길에서 일어나는 최근의 변화를 반갑게 맞는다.배은정 방송작가,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에서 활동중.물론 젊은 취향의 가게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그에 대해 효자시장상인회 손상용 초대 회장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발전해가고 소비자의 선택권이 넓어지니 고객을 더 모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골목에 사람이 모이면 시장도 좋고, 시장이 잘 되면 골목상권에도 득이란 얘기다.이제 관건은 속도다. 속도에 집착하다보면 골목은 정체성을 잃는다. 더디게 간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다. 역사와 이야기가 있고 취향이 확실한 공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알고 있는 골목을 찾아가는 시대는 지났다. 어디에나 있는 체인점이나 인테리어만 번듯한 카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효자시장 골목길의 재미있는 변화가 지속되기를, 그래서 포항에도 매력 있는 골목길 하나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글/배은정

2020-10-21

“피아노 조율은 물리공학” 명품소리 찾기 한길을 걷다

조율을 마친 스타인웨이가 우아한 모습으로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주를 듣기 위해서 찾아가던 문예예술회관 팔공홀의 무대에 올라서고 보니 그 장엄하면서도 고즈넉한 적요에 위압감을 느꼈다. 비어 있는 객석을 보며 피아노가 어떤 소리로 홀을 가득 채울지 상상했다.조율사 박상효 씨가 그랜드 피아노의 뚜껑을 열었다. 기다란 버팀봉으로 뚜껑을 고정시키자 갈비뼈처럼 질서정연한 프레임과 아우터 링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연주용 피아노의 속살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다. 저기서 모차르트와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쇼팽 녹턴의 선율이 쏟아진다고 생각하니 피아노를 함부로 만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대구에 있는 스타인웨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예요그의 목소리에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평생이라고 해도 좋을 47년이라는 시간을 오로지 피아노 조율만 하고 살았단다. 예술회관에 드나든 시간도 그에 못잖아서 스타인웨이가 그에게는 또 다른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조율할 때 무슨 음에서 시작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a음이죠. 국제 표준음이고, 가장 안정적인 음이에요.조율사가 a음을 눌렀다. 연주회 시작 전에 악장이 누르던 그 소리. 연주회 시작 전에 악장이 오보에 수석을 쳐다보며 누르는 건반, 그게 바로 a음이다. 오보에가 a음을 울림과 동시에 오케스트라 전 단원이 그 음에 맞춰 조율을 한다. 조율을 마치고 연주가 시작되기 전의 짧은 침묵. 지휘자가 지휘봉을 드는 것과 동시에 연주가 시작된다. a음은 악기의 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첫 음이고, 아기의 첫울음만큼이나 의미 있는 음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a음으로 음정을 맞추듯이 조율사 역시 a음으로 피아노 음을 고른다. 리허설을 위해 사전 조율을 두 번 하고, 연주 당일 아침에 다시 한 번 음을 가다듬는다. 조율의 목적은 일정한 음높이를 맞추어 청중들이 가장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안정적인 평균율의 음계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조수미 씨는 연주 시작하기 전에 살짝 부탁을 한다던가. 440헤르츠로 맞춰둔 소리를 442헤르츠로 높여달라고, 작은 체구에 비해 음폭이 어찌나 넓은지 그녀가 노래를 하면 홀이 쩌렁쩌렁 울린다고 했다. 조수미 씨의 음량이야 충분히 짐작이 되고말고.- 피아노 조율은 언제부터 하셨어요?대학 시험을 쳤다가 떨어지고 기술이나 배우겠다고 오르간 만드는 곳에 근무하다 예술단 공보실로 자리를 옮겼다던가. 선배가 편한 일을 두고 힘든 곳으로 가겠다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더란다.예술회관 무대의 나무 벽이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박씨가 둥글게 휘어진 나무판을 통통 두드리며 앞자리 뒷자리 어느 곳에서나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음향판이라고 했다. 예술회관은 객석으로 좋은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벽에 붙이는 음향판의 모양까지 과학의 힘으로 분석하고 연구를 한다고 했다. 소리가 울리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에 카펫을 깐 적도 있는데, 지금은 소리를 흡수하는 카펫 대신에 마루를 깔아서 소리를 뱉어내게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예술회관을 오래 드나든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나이에도 꼬박꼬박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요.조지 윈스턴이 한국에 연주를 하러 오면 대행사에서 와달라는 팩스를 보낸다고 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더욱 책임감 있게 일할 수 있다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조율사가 책임감을 갖고 일하면 피아노도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며, 대구의 스타인웨이만 아직 한 각도 갈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혼자 일을 하는 시간이 많겠어요?- 늘 혼자죠. 조율하며 정교한 소리를 들어야 하니까.대부분 혼자 일을 하지만 큰 수리를 할 때는 무대 감독 하는 친구도 불러서 함께 일한다며, 자라섬에서 재즈공연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일어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한꺼번에 천만 원을 벌었어요.모처럼 친구들과 외국여행 가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재즈연주회에서 급한 일이 생겨 여행경비를 돌려받았다.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스프링클러 작동으로 피아노가 물벼락을 맞았다는 전화가 온 것이다. 박씨는 스텝의 전화를 받자마자 무대감독 하는 친구를 불러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자신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해준 스텝이 너무나 고마웠다. 사람에게만 골든타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도 마찬가지다. 나무가 물을 먹기 전에 분해해서 닦고 말렸기에 망정이지, 그때 스텝이 박씨가 아니라 윗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면 여러 절차를 거치는 동안 스타인웨이는 골든타임을 놓쳐 영원히 회생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랜드 피아노는 부속을 풀어놓으면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관객을 다 내보내고 부속을 무대에 널어서 말렸단다.- 가장 감명 깊었던 연주회를 혹시 기억하세요?- 흑인 영가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뉴욕 할렘가의 예술학교 학생 여섯 명의 보컬로 이루어진 ‘뉴욕 할렘싱어즈’의 공연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는 가스펠송도 있지만 휘트니 휴스턴의 명곡도 섞여 있어서 울림이 더 컸다며, 박씨는 흑인영가의 감동적인 공연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밖에도 레스토랑에서 조율을 마치고 들었던 재즈싱어의 음악과 대봉성당 이층에서 들었던 여섯 명의 수녀님들이 부른 합창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음악실이 이층에 자리 잡고 있어서 피아노 소리는 물론이고 성당 곳곳으로 울려 퍼지는 성가가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감동적이었다고 했다.-표정이 참 밝고 평화로워 보여요.내 말에 그는 마음을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자기 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선 먼저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피아노를 옮기면 직접 가서 봅니다.피아노가 제자리에 앉는 걸 봐야 마음을 놓는 그의 극성에 일하는 사람들이 불편해 할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피아노 소리가 달라진다며 온습도가 적절할 때 피아노가 맑은 소리를 낸다고 했다. 피아노 탑보드를 닫아놓고 예술회관을 나오며 조율이 절대음감을 필요로 하는 일이냐고 물었다.- 조율은 물리공학이어서 절대음감으로 조율할 수 있는 게 아녀요.일을 하는 동안 오랜 숙련의 과정을 거쳐 체득된 것일 뿐, 자신에게는 절대음감 같은 건 없다고 했다. 박씨는 장인(匠人)들의 느낌이나 감은 오랜 숙련 끝에 가꾸어지는 기능이고 감각이어서 하루아침에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 사회가 인재와 기술자를 홀대하는 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토로했다. 예전에는 피아노 부속을 일일이 수제로 깎아서 만들었는데 지금은 기계로 찍어낸다며, 점점 사람이 필요 없는 세상으로 변하는 게 슬프다고 했다.- 장인(匠人)을 장인답게 하는 것은 직업에 대한 긍지와 소신이죠.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진짜 장인이다. 옻칠 장인이나 도자기 장인 같은 각계각층의 장인들을 만나 보면 모두 그 나름대로의 집념과 긍지를 갖고 있다며, 박씨는 그 고집스러움이 한 길을 걷게 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자기 일에 대한 소신이고 사랑이었다.- 젊은 기술자들이 직업에 대한 긍지와 소신을 가졌으면 좋겠어요.스타인웨이가 세계 최고의 명품이 된 것은 오로지 피아노를 위해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나라와 국민이 다 함께 고급 기술을 가진 인재를 아껴줄 때 최고의 상품을 만들 수 있다며, 박씨는 최고의 기술자들이 생활고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찾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프다고 했다.- 스타인웨이가 최고의 음악가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이유를 빨리 깨달아야 우리도 명품을 가질 수 있어요.베테랑 기술자를 일용직 일꾼 취급하고 고급인력을 예사로 자르는 그릇된 풍토가 문제라고 박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나라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라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인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하루하루를 노동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만은 스타인웨이의 위엄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고./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0-21

종은 울어야 생명인데…보존상태 점검한다고 꽁꽁 감싸놓아…

종은 허공에 매달려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다. 그래야 허공을 울리는 종소리를 온 산천에 알리는 것이다. 절에서의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위하여 울리지만 속세에서는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성덕대왕신종은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어 봉덕사에 걸었던 것이다. 그 봉덕사는 홍수(추측)로 절은 흔적도 없고 종만 북천가(지금의 경주세무서)에 뒹굴다가 네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리고 종을 매달았던 종각도 종 따라 옮겼다가 지금은 종과 종각은 따로 떨어져 있다.#. 성덕대왕신종을 4번이나 옮긴 사연신라 33대 성덕대왕(701~735)이 죽자 아들 경덕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종을 만들다 완성하지 못하고 릴레이 하듯이 바통을 이어받은 아들 혜공왕이 완성한다. 771년(혜공왕 7년)까지 34년의 길고 긴 시간과 신라장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완성하여 봉덕사에 걸었던 것이다. 명작들은 각고의 노력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성덕대왕신종이 있었던 네 곳과 마지막 자리 잡은 곳을 향하여 집을 나섰다. 처음 성덕대왕신종을 달았던 봉덕사 터였다고 추측하는 지금의 경주세무서(또는 성동동 제1사지)에 갔다. 현대식 건물이라 느낌이 없었지만 옛 봉덕사를 상상해보았다. 이 정도 오랜 세월과 씨름하여 만든 종을 둘 절이라면 보통 절은 아닌 국찰이었을 것이다. 언제 어떤 연유로 절이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종만 뒹굴었던 것이다. 세무서 안이야 업무 때문에 간간이 왔었지만 오늘은 혹시라도 봉덕사의 흔적표지석이라도 있는지 외각을 다 둘러보았지만 없었다.이 봉덕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절 무너져 돌 자갈에 묻히게 되니./ 종 홀로 황량하게 버려졌었네./ 아이들이 두들기고 소는 뿔을 비볐다네.”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봉덕사’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절이 폐사된 것을 알 수 있다. 19톤의 무거운 종이 본래의 자리에서 멀리 떠내려 갈 수는 없으니 북천냇가 인근인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홍수 때문이라는 것도 가능성의 추측일뿐이다. 어떻든 지진이나 홍수 등의 천재지변으로 봉덕사는 없어지고 거대한 종만 뒹굴었던 것이다.다시 이 종을 1460년(세조 6년) 경주부윤 김담이 영묘사(지금의 흥륜사) 옆에 옮겨 걸었다. 첫 번째로 옮긴 흥륜사를 찾았으나 스님 하나 보이지 않고 고요한 가을 햇살이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여기서 나온 턱이 깨어진 웃을듯 말듯한 수막새는 신라의 미소로 대표된다. 잘 정리된 도심 속의 흥륜사를 뒤로하고 이곳에서 1506년(중종 원년) 경주부윤 예춘년이 읍성 남문 밖 봉황대 곁에 종각을 짓고 성덕대왕 신종을 옮겨달았던 봉황대로 갔다. 종각건물은 봉황대 우측 옆에 지어져 있는 옛 사진대로 찍어 보았다. 이제는 절에서 명복을 비는 역할이 아니라 성문개폐와 군사 징집할 때 종을 쳤다. 무덤 주인을 알 수 없는 이 봉황대 앞에는 1924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금관이 나온 금령총(126호분)은 다시 정밀발굴하고 있었고, 길 건너 붙어있는 금관총은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금관이 나온 곳인데 몇 년 전에 정밀 발굴하였던 곳이다. 봉황대 꼭대기에는 6·25때 포진지를 구축했던 곳이고 민가집들이 즐비하여 동네 뒷동산이었고 아이들이 죽으면 봉황대에 묻었다. 그러나 이 성덕대왕신종은 여기서도 인연이 다하여 나라 잃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구)경주박물관(지금의 경주문화원)으로 종각과 종을 옮긴다. 북으로 1km도 안 되는 (구)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문화원 들어가서 왼편에 쓸쓸히 서있는 종각으로 갔다. 매끄럽고 고운목재라기보다 울퉁불퉁한 목재를 사용하여 힘 있고 단단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19톤의 종을 말없이 달고 있었던 종각은 지금도 경주문화원 문 들어가자마자 왼편에 초라하게 서있다. 경주문화원 본관건물은 향토 사료관으로 사용하는데 그 앞에 어울리지 않는 하늘 높이 솟은 긴 나무가 바싹 붙어 있다. 1926년 10월 스웨덴 구스타프 6세 황태자와 태자비 루이즈가 기념식수한 것이다. 이 본관 건물 왼쪽으로도 정착하지 못하고 60년 있다가 1975년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에 시멘트로 종각을 짓고 건물은 그대로 두고 종만 옮긴다. 건물 종각은 여기에 있는데 종은 떠났으니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세계최고의 봉덕사종은 어떻게 옮겼을까?마지막 둥지를 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갔다. 코로나 때문에 손 소독하고 신분증과 전화번호 기재하고 들어갔다. 월요일 오전이라 사람은 간간히 보였고 곧바로 성덕대왕신종으로 갔다. 종을 보호한다고 꽁꽁 감싸놓아 들판에 볏단을 비닐로 감싸놓은 듯하고 정육점에 고기 매달아 놓은 것이 연상되어 안타깝다. 2022년까지 3년 동안 보존상태를 점검한다고 해괴하게 해놓았다. 다른 유물과 달리 종의 역할은 몸을 맞으면서 소리를 울리는 것이라 종은 깨어질 때까지 치다가 그때 보존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박살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박물관이 유물의 보존이 최우선이지만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종을 모독하는 것이다.세계에서 제일 큰 종인, 성덕대왕신종보다 10배나 더 큰 200톤의 러시아 크레물린 궁전의 ‘황제의 종’은 만들다 깨어져 한 번도 쳐보지 못했고, 마국의‘자유의 종’도 깨진 채로 보존되어 있다. 종교의 의례같이 매일 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한번 치면 100년은 쳐도 100번인데 그 정도 쳐도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맑은 깨달음을 전해주고 생명을 다하는 종은 얼마나 장엄한 아름다움인가?종은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가수가 아무리 춤을 잘 추어도 노래가 안 되면 백 댄스를 해야 하듯이 종은 명복을 빌고 시간을 알리더라도 소리가 아름다워야 된다. 즉 종소리는 부처의 음성을 삼았기 때문에 얼마나 공을 들였겠는가. 서양종은 안에서 쇠와 쇠가 부딪치기 때문에 딸랑거리는 가벼운 쇳소리라 깊은 울림이 없다. 이에 비해 우리의 종은 나무로 금속을 치기에 소리가 융화되고 화합하여 부드럽고 장중한 깊은 울림이 온다.이 성덕대왕신종이 모양과 소리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지만 세계최고의 종이다. 여러 서양학자들도 극찬했지만 그중 독일의 고고학자 켄멜 박사는 “이 종이야말로 세계 제일의 종이라 부를만하다. 만약 독일에 이 같은 종이 있다면 종 하나만 가지고도 훌륭한 박물관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했다. 필자는 2002년 10월 9일 한글날 옆에서, 2003년 개천절에는 반월성 위에서 직접 들어보았다. 첨단 기계가 못 잡아내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맥놀이 현상의 여음을 들을 수 있었다. 녹음해놓은 테이프나 CD로는 그 여음을 못 잡아낸다. 성덕대왕신종 소리 듣고 다른 종소리 들으면 깡통 치는 소리가 들려 듣기 힘들다.그래도 종에 새겨놓은 630자의 서문과 200자의 명이 명문장이다. “성덕대왕신종 명을 한림랑 김필해(또는 김필계, 김필오)는 왕명을 받들어 짓는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밖에 있으니 보려 해도 볼 수가 없고, 진리는 천지간에 진동하나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유의 말을 내세워 오묘한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을 달아 일승 (一乘)의 원음을 깨닫게 한다. 경술년(771년) 12월 해와 달은 한층 빛나고, 음양의 기운은 고르며, 바람은 부드럽고 하늘은 고요하여 신종을 이루었다. 그 모습은 태산이 우뚝 선 것 같고, 그 소리는 우렁찬 용의 소리 같았으며, 위로는 지극히 높은 하늘과 아래로는 지옥에 이르기까지 막힘없이 울리어 보는 이는 기이함을 느끼고 듣는 이는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 명문장이라 심금을 울리는 깊은 감동을 받아 가슴에 담아놓고 있다.종 왼쪽 하단에 세로로 깊게 파인 자국은 이 종의 가루를 끓여먹으면 남자를 낳는다거나 낙태된다고 파갔던 것이다. 종의 북쪽 아래는 주종 대박사 박대나마 기념비가 있다.성덕대왕신종은 어떻게 옮겼을까?1398년(태조 7년) 남한산성 주조소에서 종을 완성하고 한양(서울)의 보신각으로 옮길 때 1천300명의 군졸을 동원하여 10일에 걸쳐 옮겼다. 이에 비해 성덕대왕신종은 같은 시내 권에서 서로 3km를 넘지 않아 비교적 쉬웠을 것이지만, 현대적인 장비가 없던 시절에 소나 말을 이용한 그들만의 노하우는 있었을 것이다. 1975년에는 대한통운의 트레일러로 옮기면서 종과 트레일러의 총 50톤을 통과할 수 있는 다리가 없어 약간 둘러오는데 이제는 높이가 6m나 되어 당시 전깃줄이 걸려 한전 전공들이 차가 지날 때마다 전깃줄 끊고 다시 이었던 것이다. 경주시민 10만 명이 뒤따랐다는 전설적인 광경이었다.성덕대왕신종을 복제한 종은 제야의 종을 치는 서울의 보신각종,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있는 미국건국 200주년 기념 종(korean Bell of Friendship), 2016년 구 경주시청 자리에 신라대종이 있지만 소리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이 종의 수난만큼 사라질 뻔한 큰 위기를 맡는다. 조선초기 숭유억불정책으로 전국에 종들을 녹여 무기를 만드는데 이 종도 대상이 되었지만 세종대왕의 특별조치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한글 창제한 것만으로도 우리민족에게 위대한 업적이었는데 역시 세종은 성군이었다.종은 울어야 생명인데 지금은 생명 없는 죽은 종을 매달아놓아 안타깝다./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10-20

오래된 시장에 활기와 평온을 선물하다

청림(靑林)은 도구, 구룡포로 가는 바닷길의 초입이자 포항공항으로 가는 하늘 길의 관문이다. 해병대 북문을 지나 조금만 속도를 내면 도구와 임곡을 가르는 갈림길에 이르고, 용무가 없다면 굳이 멈춰야 할 이유 없이 통과하게 되는 마을이다. 이곳에 소박한 변화를 통해 사람들이 마음을 내어 찾아오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소개한다.푸른 숲(靑林) 사이로 해와 달(日月)이 뜨는 아름다운 고장. 지명 유래를 통해 청림동을 정의하자면 이런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포은 정몽주의 시 ‘북유몰월(北有沒月) 형산(形山) 동망개월(東望開月) 형산(形山)’이라는 구절을 인용해 생겨났다는 청림의 옛 지명은 몰개월(沒開月)이다. 연오랑세오녀 설화와 관련된 일월지(日月池)가 있으며, 노송이 우거진 숲이 있어 낮에도 도적이 출몰했다는 일월동을 품고 있다.그런 지형적인 특성 때문일까. 높고 넓은 구릉지대와 해변을 낀 골짝은 시대의 필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를 지나며 일부는 중화학공장이 들어서면서 공장지대가 되었고, 군부대와 비행장 건설로 일월동 부락은 철거되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그 일부가 도구와 경계를 이루는 도로변에 취락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 청림으로 우거졌던 숲은 사라지고, 비닐하우스 단지와 해수욕장, 비행장, 공장, 군부대와 사택단지 그리고 일반 주거지가 뒤섞인,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지역이 되고 말았다.□ 청림의 옛 지명은 포은의 시에서 유래한 ‘몰개월’해병대 북문을 통해 군속들이 드나들고, 면회객과 노동자로 활기차고 북적이던 마을은, 영화의 세트장처럼 그 어느 시절에 박제된 골목들, 간판들, 표정들만 남았다. 대체로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기에는 위험한 공장과 인가가 너무 가깝다. 많은 이들이 떠나갔고 마을 인구는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삶의 터전이란 신비한 것이어서 남은 사람들은 무슨 까닭이든 남아서 마을을 지탱한다. 아름다웠던 자연, 호황을 누렸던 기억, 산업화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었던 상처까지를 안고 주민들은 살아간다.필자는 저소득층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자립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으며, OCI 포항 공장의 담벼락을 마주보는 곳에 사옥이 생기면서 10여 년째 이곳과 인연을 맺고 있다. 사무실을 나와 골목길을 따라 자박자박 걸어가면 청림시장이 시작되고, 상가들이 오밀조밀 모인 거리가 펼쳐진다. 시장 안에 들어있지는 않으나 분명 시장을 이루는 이 길은 10분여 만에 끝나버린다.청림시장은 1980년대 개장된 여러 상설시장과 비슷한 운명을 겪는다. 이 인근에서는 맛집으로 유명한 해룡반점과 청림반점이 여전히 분주하고, 영덕상회와 시장식육점의 불이 켜져 있으나 디귿자 형태의 안쪽은 대부분 창고처럼 닫혀 있다. 마을에서도 다방면으로 시장의 변화를 고민하지만, 딱 맞는 해법을 아직 못 찾은 듯하다. 오래된 간판 아래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상점의 문을 지나는 이 10분의 거리가 내가 10년 가까이 청림동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모든 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주민처럼 살아가지만 아무도 우리를 주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애써 관계를 쌓아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던 시간을 지나, 무언가 마을을 위해 우리가 쓰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겨났다. 자주 걷다보면 나쁜 공기도 정겹고, 뭐라도 해보기에 만만하고 맞춤한 이 시장과 골목이 활기를 잃고 스산히 저물어가는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변화를 모색하지만 해법 못 찾은 청림시장마을주민이 원하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막연하게 일자리와 마을의 활력이 조우하기를 기대했고, 우리의 진심이 통하기를 원했다. 반쯤은 숙제를 못한 심정으로 지내던 중, 일터의 위상이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마침 포항시는 도시재생에 몰두하였고, 중앙동에서는 꿈틀로가 자리를 잡아가는 등 외부적인 조건이 우리 활동에 자극이 되었다. 도시재생 지역으로 선정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 청림시장 재생에 도움이 될 수는 없을지 고민했다.때마침 선물 같은 기회, 기적 같은 인연이 만나 ‘세탁소커피·청림’이 탄생했다. 포스코 1%나눔재단과 포스코케미칼(당시는 켐텍)의 지원으로 카페 사업이 선정되었는데, 그 조건은 3년 후 사회적기업 설립이라는 단 하나였다. ‘청림 살림’의 단초가 마련되는 감사한 사건이었다. 마을이 환해지고 생기가 돌게 하는 역할을 하는 공간이라면 청림시장 안에 자리 잡는 것이 좋았겠으나,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우리가 찾은 곳은 당시 멀쩡히 잘 운영되던 계명세탁소 자리였다. 정면에 잉꼬프라자가 사라지고 임시 주차장이 훤하게 열려있는 것도, 좁고 낡았으나 운치 있는 붉은 2층 벽돌집인 것도 매력적이었다. 마침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한동대에 강의를 나가기 시작한 젊은 부부가 있었다. 세탁소 건물이 매력적인 공간이라 자신이 꼭 살려보고 싶다고 우리보다 더 들떴다. 평소 우리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던 동장님을 괴롭혀 세탁소 사장님을 설득했다. 월세도 조정하고 기한도 넉넉히 하는 등 ‘마을 일’이라는 마음으로 서로 합의가 잘되었다. 선대로부터 30년간 운영하던 계명세탁소는 그렇게 ‘세탁소커피·청림’에 자리를 양보하고 마을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장소를 정하고도 30년간 쌓아두었던 ‘묵은 것’을 어떻게 할지 난감했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젊은 건축가 내외는 그 좁은 공간을 5개월 이상 공들여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우리가 눈살을 찌푸렸던 굴뚝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되살려 사진에 담아가기 딱 좋은 그림 같은 창을 내었다. ‘원래의 것’을 최대한 살려보려 했으나 바닥 타일밖에 건질 것이 없어 애석해 하였다. 결국 ‘세탁소커피’라는 작명으로 30년의 흔적을 남기며, 큰 공사에서부터 컵받침 하나에 이르기까지 진심과 성심으로 고르고 배치한 정성이 2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스란하다.□ 세탁소 자리에 커피숍 마련하며 마을에 활기 불어넣어새롭게 탄생한 공간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5명 정도의 일자리로 구상하고 참여할 주민을 선발했다.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저소득층으로서 포항시 자활근로 사업비를 통해 임금을 받고, 커피숍을 운영해 생긴 수입은 참여자들의 자산 형성을 위한 펀드, 창업을 위한 자금 등으로 적립해 3년 후 사회적기업으로 독립할 준비를 하게 된다. 기초생활수급자 네 분이 모였다. 한부모 가장, 결혼이민여성, 약간의 장애가 있는 동네 총각이 일부러 맞춘 것처럼 이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영업 허가를 내기까지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으나, 결국 1층 커피숍 2층 ‘청림 살림’이라는 마을 공유 공간이 완성되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주민의 공간이 되도록 열어두었고, 평온을 선물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회의도 하고, 영화도 보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는. 이제 젊은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식사와 차를 즐기러 나오는 점심시간은 골목이 시끌벅적하다.세탁소와 비스듬히 마주보는 위치에 오락실 간판과 현란한 출입문이 시선을 어지럽히는 빈 점포가 있었다. 너무나 눈에 거슬리는 공간이었다. 세탁소커피가 순항하며 자리를 잡아갈 때를 맞춰 이번에는 이 공간을 탈바꿈하기로 작정했다. 수소문 끝에 건물주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건물 리모델링 비용 일부를 건물주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세탁소커피가 옛것을 되살리며 무채색으로 변신하였고,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였다면, 이 거슬리는 건물은 자연스레 ‘먹을 것’을 제공하는 공간이어야 했다. 마을 상가와 중복되지 않는 메뉴, 돌아온 군인들과 노동자들의 즐거운 먹거리를 위한 메뉴 공부가 진행되었고, 5명의 자활사업 참여 주민들이 전문가의 조력을 얻어 베트남 쌀국수, 나시고렝 등 조금은 친근한 아시아 지역의 메뉴를 다루기로 하였다. 이름하여 ‘아시안푸드·청림’의 탄생 배경이다.당초부터 그 ‘거슬림’에 주목한 건물은, 왜 그렇게 거슬렸을까 돌아봤을 때, 마을 한가운데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주차장과 건물 경계를 이루는 다 허물어진 담벼락, 주인 없이 오래 쌓여온 온갖 종류의 쓰레기, 어느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출입문 선팅, 그 문 앞에 흉하게 삭아가는 통신용 전주……. 커피숍에 그렇게 정성을 들인 것은 이 마을이 환하게 생동하기를 바람기 때문인데, 그 정면의 풍경이 이 지경이어서는 곤란했다.□ ‘세탁소커피’ 맞은편에 ‘아시안푸드·청림’ 개업버려진 보트의 주인을 찾아다니고, 마당에 풀을 뽑고 쌓인 쓰레기를 치우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갔다. 허물어진 담장을 수선하고, 우거진 잡풀과 쓰레기를 들어내자 크고 잘생긴 대추나무가 제 모습을 찾았고 매력적인 정원이 탄생하였다. 우리는 그 공간을 ‘기다리는 동안’이라고 작명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정원을 감상하고 여유롭게 보내시라는 뜻과 함께, 이 마을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생기가 돌고, 주민들의 마음이 따뜻하게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소망이 담겨있다.한번 깨끗해진 공간은 쉽게 더렵혀지지 않았다. 인근 상가들이 표 나지 않게 새 단장을 했다. ‘세탁소커피·청림’과 ‘아시안푸드’가 자리를 잡는 동안, 청림시장 인근에는 커피숍 두 개가 더 생겼다. 칼국수집도 문을 열었고 맞은편 삼계탕집도 다시 문을 열었다. 한숨 자고 난 뒤의 움직임 같은, 어떤 활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걸 보면, 저 시장 안 불 꺼진 점포에서 아직 우리가 모르는 조용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대 변화에 따라 이 정도 규모의 마을과 시장이 쇠락해 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기품 있고 건강하게 잘 늙는 어른처럼, 나름의 매력을 가꾸고 유지하는 수밖에 없고, 이제 ‘청림’은 그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 시작한 듯하다.송애경글/송애경시인, 사회적협동조합 포항나눔지역자활센터 이사장, 1986년 시 전문지 ‘시인’으로 등단, 포항여성회 회장 및 포항시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 역임.

2020-10-19

“우리 마을 아름답다는 말이 가장 듣기 좋아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삶의 질 향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더욱 깨끗하고 좋은 환경에서 삶을 영위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마음이다. 하지만 가속화되는 도시화와 개인주의 삶이 트렌드가 되며 함께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지만 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 내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지역주민이 주도하는 마을가꾸기 사업을 실시하는 지자체가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대구 달성군은 지난 6월부터 지역 내 자연부락을 대상으로 ‘주민과 함께하는 2020 마을가꾸기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마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고, 주민들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키워가고 있다. 본지는 달성군이 실시하는 마을가꾸기 사업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대구 달성군은 도·농 복합 지역으로 다사, 화원 등 대규모 도시계획에 따른 공동주택(APT)단지와 함께 자연취락지구 내 200여개의 부락이 존재한다.자연부락의 특성상 올바른 쓰레기 배출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군의 적극적인 쓰레기 수거 활동에도 불구하고 생활 쓰레기 방치로 인한 도시미관의 저해와 악취 발생 등 지속적인 민원이 이어지고 있었다.이러한 현상은 주민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마을을 찾는 이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지 못해 문제가 되고 있었다.이에 달성군은 수많은 고심 끝에 각 마을별 유휴지 및 입구 도로변 등 생활 쓰레기가 방치되는 주요 지점에 마을별 특색을 살린 주민주도형 마을가꾸기 사업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군은 처음부터 순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업의 기반이 되는 것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좋은 취지로 시작한 사업에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본인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활발한 주민참여와 함께 수차례 주민설명회를 거쳐 각 마을마다 사업이 진행될 수 있었다.지난 4월부터 시작된 이번 사업은 9개 읍·면 마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영역의 문제를 주민들이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주민 공동체 활성화에 대해서 고민을 시작했다. 마을 내 발생하는 민원 해결과 동시에 공동체 의식 확산이라는 두 가지 숙제에 대해 마을 정비, 마을 테마, 재능기부, 가로환경 개선 등을 대안으로 삼아 우리 마을 가꾸기 사업을 준비했다.이러한 과정을 거쳐 토론과 보안점 등을 살핀 후 6월부터 본격적인 사업이 실시됐다.주요 골자는 마을별 특색을 살리는 것이었다. 마을의 특성을 살린 벽화, 조형물 등 다양한 분야에 주민 아이디어가 반영됐다. 이후 사업이 완료되고, 달성군은 마을별 단합에 힘을 보태기 위해 사업 결과를 발표했다.달성군은 주민이 스스로 참여하는 마을 주민협의체를 구성해 마을의 특성을 살린 사업을 신청받아 이 중 주민참여도, 사업 효과, 지속 가능성 등을 기준으로 심사해 총 14개 사업을 선정했다.주거환경 및 도시미관 개선 등의 사업에서 주민참여도를 가장 큰 배점기준으로 관련 분야 전문 평가 위원 평가 및 군정조정위원회의 심의를 걸쳐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그 결과 최우수 마을로는 주택가 이면도로 벽화, 걸이화분 및 유휴지 화단 조성을 통해 어두컴컴했던 주택가를 마을의 LAND MARK로 조성한 논공읍 ‘남1리 안전마을 꽃길 조성’이 선정됐다.우수 마을로는 주민이 자발적으로 내놓은 옹기에 마을 특성을 살린 그림으로 경관 개선에 기여한 다사읍 ‘시선이 머무는, 박곡’, 수년간 방치된 폐가를 주민쉼터로 변화시킨 화원읍 ‘설화리 플라워 가든 만들기’, 장려 마을로는 가창면 ‘너만 사랑해 주리’, 하빈면 ‘동곡 명품 골목길 조성’사업이 최종 선정됐다.우수 마을로 선정된 다사읍 박곡리 마을은 적극적인 주민들의 참여율을 보이며 마을 가꾸기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정옥표 다사읍 박곡리 이장은 “2020년 마을가꾸기 사업에서 우리동네가 큰 상을 받아서 기쁘고, 지금까지 도와준 주민들과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벽화를 그릴 때 밑그림을 그리고 덫칠을 하는 작업을 해야하는데 올 여름 수많은 태풍과 잦은 비로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사업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며 “사업이 완성된 후 변화된 마을의 모습을 보고 주민들이 ‘이쁘다’, ‘아름답다’, ‘마을이 깨끗해졌다’는 말을 많이 한다. 또 추석에 손님이 많이 다녀갔는데 마을이 이쁘다는 칭찬도 많이 해줘서 마을에 대한 주민들의 자긍심이 높아진 것 같다. 어떤 주민은 마을을 위해 하나라도 이쁜 환경을 만들려고 도라지 화분을 손수 가져다 놓는 다든지 사업이 끝난 지금까지도 상당히 가꾸는데 애를 쓰고 있다”고 전했다.이어 “이번 사업의 결과 지저분했던 주변 환경도 깨끗해졌다. 박곡리에 있는 부추창고의 경우 정구지 창고인데 그림을 그려 외관이 보기 좋았다. 외부에서 온 손님도 이 마을은 어떤 마을인가 궁금해한다. 우리 박곡리 마을 말고도 달성군에 있는 수 많은 마을들도 수혜를 입고 더욱 아름다워지고 살기 좋은 고장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김문오 달성군수는 “지역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로 만들어가는 우리 마을 가꾸기 사업이 주민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하고, ‘우리 마을’이라는 공동체 의식 형성에도 이바지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당초 사업 기획 당시 주민들의 참여도를 사업 성공의 척도로 보고 우려의 마음을 가졌으나, 사업 완료 현장을 방문한 후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번 사업의 성공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진정한 주민자치의 초석을 다질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 준 주민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김 군수는 “내년에는 사업 대상 마을을 확대해 실시할 계획”이라며 군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했다./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0-10-15

젊어서, 그 젊음으로 더 아팠던 그 시절의 몰개월

1960년대 베트남으로 보낼 군인들을 훈련시키던 장소 인근에는 현재 ‘몰개월 비행기공원’(포항시 남구 청림동)이 들어서있다.줄을 지어 늘어선 비행기를 보며 떠올리는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기자의 경우엔 베트남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 양을 측정할 수도 없는 네이팜탄과 고엽제(枯葉劑)를 쏟아 붓던 미국 공군 폭격기가 가장 먼저 그려진다.전쟁은 의도하지 않은 수천수만의 개별적 죽음을 부른다. 총알과 폭탄에는 눈이 달리지 않았기에 여자와 아이들도 피해가지 않는다.바로 그 전쟁이란 괴물이 발광(發狂)하는 베트남의 정글로 떠나야할, 이제 겨우 소년의 티를 벗은 갓 스물한두 살의 군인들.‘골목 안’에서 함께 살아온 청년들을 향한 몰개월 여자들의 연민은 또래 청년들에게 맞춤법 틀린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날들은 끝 간 데 없는 폭음과 발버둥을 동반한 눈물. 그러나, 그런 격정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래와 같은 순정 또한 존재했다. 소설 ‘몰개월의 새’ 중 가장 낭만적인 서술이다.“물 좀 마시면서 드셔요.”하면서 물을 따르고 미자는 저도 김밥 한 덩이를 집어먹었다.“밥에 뜸이 좀 덜 들었죠? 꼭꼭 씹으면 괜찮아요.”나는 찍소리도 없이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물을 마시고 나서 쑥스러워진 내가 물었다.“장사는... 안하구...”“낮에두 하나요?”나는 할 말이 없었다.“내 언제... 찾아가지.”“이따가 담치기해서 나오세요. 밤참 해놓을게요.”▲가난하고 슬픈 사람들에게도 연정은 있으니시인 김정환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으로서의 삶, 그 막장에 도착한’ 몰개월의 여자들이라고 왜 순정이 없었겠는가.무너지는 농촌공동체의 마지막 시대를 살았던 그녀들 또한 듬직한 남편 곁에서 아침저녁으로 상에 올릴 반찬 걱정을 하고,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학급 등수 걱정을 하며 살고 싶었을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이치다.붕괴한 ‘골목’이 만들어낸 서글픈 군상들. ‘몰개월의 새’가 빛나는 지점은 바로 그 ‘서글픈 군상’들에게도 꿈이 있음을 눅눅하고 어두운 문장으로 밝힌다는 것이다.‘연애 비슷한 만남’이 지속되던 어느 날, 미자는 한 상병을 자신의 방으로 부른다. 이날 동그란 눈이 예쁜 ‘빠꿈이’ 미자는 닳고 닳은 홍등가(紅燈街) 작부가 아닌 부끄러운 새 신부로 한 상병을 맞는다. 고운 속옷을 준비한 초야(初夜)의 처녀처럼. 이런 문장이다.우리는 같이 술청 뒤꼍에 있는 관(棺)만한 방으로 스며들었다. 신문지로 바른 벽이 군데군데 떨어져서 흙덩이가 드러나 있었고, 천장 바로 아래 널빤지로 선반을 가로질러놓았는데 그 위에는 빠꿈이의 찌그러진 밤색 트렁크가 얹혀 있었다. 미자가 내 군화를 얹었다. 벽에는 붉은색 잠옷이 걸려 있었다. 미자는 푸우, 하고 웃었다. 어깨를 위로 쑥 올리면서 빠꿈이는 웃었다. 목침 위에 더께로 앉은 촛농 사이에 몽당초가 밝혀져 있었다. “초가 다 타면 자요.”하지만, 개인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란 없다.그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1932~1959)나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 정도가 아니라면.또한, 곁에 두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곁에 둘 수 있는 연인이란 지극히 드물고도 드문 법이다. ‘몰개월의 새’가 쓰인 시대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현재는 포항 도구해수욕장으로 불리는 바닷가 근처 빨래터. 속옷을 치대던 미자는 ‘골목 바깥’ 사람들의 결정으로 인해 ‘골목’을 떠나 이국의 전장으로 가게 될 한 상병에게 ‘내가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 거칠게 고백한다.여기서 “한 번 자줄게”라는 말은 “당신을 내 목숨 이상으로 사랑해요”로 들린다. 맞다. 신경림 시인의 진술처럼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집에 갔었다며요?”“응... 우리 내일 모레 떠난다.”“밥 먹었어요?”하다가 미자는 얼른 속옷 나부랭이들을 대야에 챙겨 넣었다.“한 상병, 서울에... 좋은 사람 있어요?”“있었는데 시집 갔더라야.”“저런... 그럼 허탕쳤겠네.”(중략)“왜 웃어?”“가엾어서.”“안됐지 뭐...”“뭐가....”“사는 게 그냥, 다... 내일 밤에 나와요 꼭. 한 번 자줄게”▲세상에 ‘유치한 인생’이란 없다마침내 훈련을 마친 청년들이 몰개월을 떠날 날이 왔다. 가속화하는 ‘골목’의 붕괴를 안타까이 바라보며 물설고 낯선 인도차이나반도로 떠나야 하는 젊은 군인들.기괴한 죽음의 향기를 몸에 묻히고 떠나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건 ‘골목 바깥’의 사람들이 아닌 가난한 몸을 아프게 부대끼던 ‘골목 안’ 여자들이었다. 해서, 이 장면에선 눈물 냄새가 난다. 영화라면 클라이맥스다.‘안개가 부연 몰개월 입구에서 나는 여자들이 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모두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꽃이며 손수건이며를 흔들고 있었다. 수송대열은 천천히 나아갔다. 여자들은 거의가 한복 차림이었다. 병사들도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뛰어서 쫓아오는 여자들도 있었다. 나는 트럭 뒷전에 가서 상반신을 내밀고 소리 질렀다. 미자가 면회 왔을 적의 모습대로 치마를 펄럭이며 쫓아왔다. 뭐라고 떠드는 것 같았으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얀 것이 차 속으로 날아와 떨어졌다. 내가 그것을 주워들었을 적에는 미지는 벌써 뒤차에 가려져서 보이질 않았다. 여자들이 무엇인가를 차 속으로 계속해서 던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무수하게 날아왔다. 몰개월 가로(街路)는 금방 지나갔다. 군가 소리는 여전했다.’남중국해 한복판을 항해하는 군함에서 “당신, 기어코 쓰러지지 말고 살아 돌아와요”라 적힌 ‘하얀 것’을 펼쳐본 주인공 나(한 상병)의 심경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보면 아득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골목’에서 살았던 미자는 ‘골목’을 떠나 ‘전쟁의 광기(狂氣)’에 섞여들 한 상병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오뚝이를 선물했다. 쓰러지면 쓰러짐의 탄성으로 일어나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황석영의 1976년작 ‘몰개월의 새’는 이미 반세기 가까운 옛적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 세월동안 ‘골목 안’의 우리는 ‘골목 바깥’으로 나왔는가? 이 엄혹한 질문에 누가 있어 “그렇다”고 함부로 대답할 수 있을까.젊어서, 그 젊음으로 인해 더 아팠던 군인과 여자들이 살았던 동네 몰개월. 오늘은 도구해수욕장에서 날아온 새 한 마리가 몰개월 인근 동해면과 청림동 하늘을 우울하게 날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새’는 자유와 탈속(脫俗)의 은유였다.‘골목’으로 상징되는 이미 멀어져간 공동체의 꿈.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했던 웃음과 눈물의 날들. 황석영은 소설의 마지막을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끝낸다.4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읽어도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절창(絶唱)이다. 맞다. 예나 지금이나 “인생에서 유치한 일이란 하나도 없다.”‘작전에 나가서야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 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일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10-15

문화예술의 향기로 생기 되찾은 구도심

도시는 성장하는 반면 쇠락한다. 생성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소멸되기도 하는 것. 도시화 과정에서 공간의 권력 변화는 중심에서 교외로 급속히 이동되고 재편되었다.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는 그 과정을 답습한 곳이다. 2006년 포항시청사가 대잠동으로 이전하면서 대부분의 상권이 동시에 이전되었고, 남은 상권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도심 기능이 사라지면서 원도심은 구도심이 되었다. 사람이 떠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의 가치를 묵혀둔 공간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공간의 소멸은 존재의 부재 그 이상이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장면이거나, 두고두고 회자될 찬란한 삶의 한 조각일지도 모를 터무니의 상실이다. 공간을 통해서만 저장 가능한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은 공감의 기제로 작동한다. 그 기제가 사라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도 허물어진다. 기억의 재생이 멈추고 공동체가 상실된 공간의 소멸 속에 지금 여기, 현재성만 있을 뿐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도 멈춘다.□ 구도심이 되고 만 원도심포항시 북구 중앙로 298번지 일대, 지금 꿈틀로라 불리는 곳이다. 행정구역상 ‘중앙’이라는 호칭이 붙은 만큼 근대적 공간 배치에서 중심을 차지했던 곳이다. 행정기관이 밀집하고 그 덕에 공생하는 행정사와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위한 맛집과 각종 상점, 호텔과 유흥업소들이 콜라주처럼 어우러져 아우라를 뽐내던 도시의 심장이었던 셈이다. 적어도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2016년 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갈 즈음, 꿈틀로의 텅 빈 거리를 마치 격동의 시기를 지내온 것만 같은 시절의 민낯으로 대면했다. 청춘의 밤을 뜨겁게 노래했던 주점과 음악다방, 예쁜 옷가게, 극장이 있던 곳이 사라지거나 덩그러니 공실로 남겨져 있었다. 서양식 외관의 모텔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슬레이트 지붕,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건물 바로 옆 노포(老鋪), 대책 없이 방치된 빈 상가,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얽힌 전신줄과 폐간판 사이로 창백한 회색빛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혼종된 풍경을 스펙터클이라 해야 할지, 골목이 주는 이질적 형상들이 파편적으로 떠돌았다.포항시는 당시 중앙로 일대 도심 공동화에 대한 자구책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땅에 딱히 뾰족한 묘수가 많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여러 차례 벤치마킹과 사례연구 끝에 몇몇 도시에서 ‘문화적’ 방식으로 도심을 바꾸어 놓은 모델을 옮겨 보기로 했다. 한때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가 그 기능이 점차 외연으로 확장되면서 공동화(空洞化)가 진행된 곳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묘안은 ‘예술로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골목 곳곳 구멍 난 공실에 공공(포항시)이 예술가들에게 임대비 지원방식의 창작 지원을 통해 조금이나마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라는 기대 반 우려 반으로 21개의 개인과 그룹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고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라는 이름으로 문화재생사업이 시작되었다. 중앙로 298 거리는 그렇게 새 간판을 달고 신장개업을 했다. 분명히 열려있는 길이건만 사람의 물꼬가 막힌 길을 뚫기 위해 공공의 역할이 작동된 것이다.□ 도심 공동화 해결책으로 문화재생사업 시작돼꿈틀로 프로젝트를 시작할 2016년 당시에는 점포 공실률이 30~40%에 육박할 만큼 공동화가 심각했다. 동아세탁소, 할매떡볶이, 산촌식당, 비목쌈밥, 세대세탁소, 옛 포항이용소 등 30~40여 년 자리를 지켜온 노포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꿈틀로는 정식 행정구역명이 아니다 보니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만 4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꿈틀로, 거가 어데라?” 라고 되물을 만큼 ‘아카데미 골목’으로 더 알려져 있다. 혹여라도 이후 30년쯤 훌쩍 지나 오히려 “아카데미 거리? 거가 어데라?” 라고 묻는 시민들에게 화답해 줄 수 있는 곰삭은 서사가 되기엔 발효가 더 필요하다.그래서 현재 꿈틀로의 시작점은 ‘옛 아카데미 골목’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갈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아카데미극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북적이고 다양한 상권이 살아 움직이던 시절로 날아갈 수 있다면, 그 시점에서 지금의 꿈틀로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공간, 다른 이름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우울 속에 도시의 성장사가 함축돼 있다.아카데미극장은 사라졌지만, 1973년부터 30년간 극장 간판 그림을 그린 안경모 씨는 아카데미의 산 증인으로 남아있다. 이외에도 켜켜이 쌓인 시공간의 주름은 꿈틀로 곳곳에 내재돼 있다. 1987년부터 오대산 나물밥을 팔고 있는 산촌식당은 일제강점기 은행 터였고, 그 인근에 포항 최초의 극장 영일좌(迎日座)가 있었다. 이는 문화적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원도심 서사 발굴 과정에서 발굴한 사실이다. 폐쇄지적도를 통해 거슬러 올라간 꿈틀로는 흙에서 터전으로 이어온 유구한 삶의 궤적이다.그런 의미로 꿈틀로는 쇠락한 상실의 공간이 아니다. 공간은 면적과 외형적 부피로만 읽힐 수 없다. 오랜 시간 축적돼 온 기억을 꺼내 닦고 쓰다듬다 보면 이게 보물인가 싶다. 시대를 휩쓸고 있는 레트로 열풍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의 영화가 다하고 낡고 허물어져야 보석이 되는 것도 있다. 지금의 포항을 반추하는 공간으로서 꿈틀로는 여전히 생물적 공간이다. 생물적 삶터의 뿌리는 분절되고 잘려나간 몸통에서 새롭게 생성되기도 한다. 꿈틀로의 명소 청포도다방은 분절된 시공간을 건너 새롭게 소환됨으로써 동시대 문화적 명맥을 이어가는 공간이다.□ 포항을 반추하는 공간, 꿈틀로청포도다방은 이육사의 ‘청포도’가 영일만 삼륜포도원을 배경으로 씌어졌다는 탄생 배경을 모태로 박영달 선생이 중앙상가 행텐캐주얼 자리에 개업한 음악다방이다. 담소를 나누는 공간을 넘어 문화계 인사들의 사랑방 기능을 하는 담론의 장이자 작품 전시장이기도 했다. 그러한 활동을 밑거름으로 1976년 문화예술단체 ‘흐름회’가 탄생되었는데, ‘포항시사’에서는 이 시기를 ‘청포도 살롱시대’라 명명했다.1960년대 청포도다방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낡은 점포를 다시 살린 2020년의 청포도다방도 의미 있는 문화 담론을 생성하고 있다. 원로들의 강의를 통해 근현대 포항 문화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비롯해 북토크, 작품 전시회 등 다양한 인문·예술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문화경작소’라는 별칭에서 청포도다방의 공간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오래되었다고 우월할 수 없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이내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세상이다. 꿈틀로는 새로운 흐름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26개의 예술가 창작공간을 비롯해 청포도다방, 문화공판장, 청년문화 편집숍 등 소단위 다거점 형태의 문화공간이 오밀조밀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다. 분식집과 이용소, 미장원, 식당이 주류를 이루던 골목이 바닥화와 벽화, 공공조형물, 셉테드(CPTED, 범죄예방환경설계) 기법의 조명이 들어서면서 시각적으로도 변신 중이다. 이와 함께 청년 기획자들의 유입으로 신구 조화가 이루는 세대 연결이 이루어지고 있다. 청년들은 예술가들과 함께 기획을 하고 공간을 새롭게 창조한다. 이는 공간을 판매하는 장소 마케팅과는 별개의 지점이다. 자신의 이상을 분출하고 가치를 인정받는 곳으로서의 공간은 장소의 창조성을 순환시킨다. 순환의 연결고리는 주민과 예술가, 청년그룹이 함께 만들어 간다. 처음부터 장소적 가치를 살리는 일보다는 서로를 탐색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에서부터 느슨한 연대가 만들어지고 공동체는 시작된다. 생태의 가치사슬처럼 공간의 생명력은 여러 갈래의 연결고리 속에서 만들어진 공동체를 통해서만 되살아난다. 그래서 우리는 공간의 바깥만을 봐서는 안 되고 내밀한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 사람과 공간의 틈새를 무던히 메워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꿈틀로 안내 조형물□ 다양한 인문·예술활동 펼쳐지는 청포도다방밀물과 썰물의 교차처럼 낡은 것은 낡은 대로, 새것은 새것대로 어우러져 꿈틀로의 터무니가 만들어지고 있다. 매월 1회 ‘문화 반상회’라는 이름으로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예술가와 상인, 주민들이 도란도란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신다. 공공이 엮어 준 프로그램 안에서 형성된 관계맺음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에서 모든 길은 열리는 법이다.그렇게 시작된 ‘문화 반상회’가 ‘문화 품앗이’로 진화하고 있다. 작가들이 여는 행사에 주민들이 협치하고, 주민들이 운영하는 상가에 작가들이 재능 기부를 한다. 공공이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발적 학습동기를 만들어주는 것. 또 예술가들이 일방적으로 주민을 해바라기 하도록 하지 않는 것.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듯이 내밀한 관계맺음 속에서 공동체의 연대를 공고히 해나가고 있다.4년의 시간이 흐른 꿈틀로의 일상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오랜 시간 굳게 닫혀있던 빈 점포가 지금은 새로운 업종으로 거의 채워져 있다. 건물의 낡음도, 어지럽게 널린 전선줄도 해결하지 못한 채. 낡은 건물에 페인트를 칠하고 보기 좋은 조형물이나 포토존을 설치하고, 대형 건물을 짓는 물리적 방식의 재생 활동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롯이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의 손을 이끌어 내는 공동체 과정에 몰입했기 때문이다.꿈틀로는 모든 사람의 기억 속 길이기도 하고 새로운 창조성을 만들어 가야 할 열린 길이기도 하다. 공간의 과거에 집착해서도, 유행에 편승해 순식간에 인기몰이를 했다가 쇠락하는 외부자 중심의 공간이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더 빨리, 더 나은 골목으로 살아남기 위해 속도에 욕망하다 보면 주위의 구경거리가 될 것이고, 지금껏 새 삶의 터무니를 만들어 온 주민, 작가들의 삶터가 밀려나는 둥지내몰림이 올지도 모른다. 꿈틀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연결된 통로다. 축적된 관계와 시간을 통해서 만나는 열림과 닫힘, 삶들의 ‘사이’이다. 사진/안성용글/황상해포항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장 역임. 현재 문화공간 운영팀장으로 재직.

2020-10-14

나눌수록 자라나는 것이 사랑의 기쁨입니다

목요일이다. 대원각 반점의 주인이자 셰프인 조정태 씨의 손길이 바빠지는 날이다. 사랑의 급식을 위해 300명에서 500명분의 식사를 준비해둔다. 일찍 일어나 재료를 준비하는 동안 SNS 봉사단과 천사후원회 회원들이 들이닥쳤다. 무료급식 날마다 달려와서 수고해주고 봉덕동, 대명동, 중구 남산동 일대의 독거노인을 비롯한 어려운 가정에 사랑의 연탄배달도 하는 봉사 단체다. 반점 주인 조정태 씨도 그 봉사단체의 일원이다. 이 투박한 사나이는 봉사가 필요한 곳마다 끼지 않는 곳이 없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고 전염성이 강해서 하나둘 개입하다 보니 봉사단체가 여럿이다. 많을수록 좋은 게 있다면 그게 바로 어려운 이를 돕고 사는 봉사 단체일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음지를 비추는 햇살이다. 그 햇살은 따사롭고 공평해서 어둡고 차가운 구석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비춘다. 우리 사회도 햇살이 비치는 대지처럼 따사롭고 공평했으면 좋겠다.10시가 가까워오니 반점에서 시작된 줄이 점점 더 길어진다. 음식이 나가기 시작하자 가게가 분주해지고 봉사단 회원들의 움직임도 부산스러워진다. 매월마다 날짜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 SNS 봉사단과 천사후원회 회원들이 고맙다. 점심 드시러 오시는 분들이 많아서 도움이 필요한 시점에 알맞게 찾아와 주었다. 짜장면 한 그릇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조정태 씨는 그 한 그릇이 어르신들에게 하루의 기쁨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경제적으로 큰 지출을 감당해야 하는 일인데요.”“힘들지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명쾌한 대답이다. ‘마음만 먹으면.’ 봉사하는 시간이 열한 시부터 한 시까지인데 열 시 전부터 와서 기다린다고 한다. 사도의 집을 운영하시는 수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점심 한 그릇 먹기 위해 새벽 여섯 시부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그럴 때 마음이 몹시 아프다고 하셨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러니 밥 한 그릇이라고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그 한 그릇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기다림이 될 수 있으니.“곱빼기 네 그릇까지 챙겨 가시는 분이 있어요.”그렇겠지. 저녁까지 챙겨야 할지도 모르고, 다리 아파서 못 오는 사람을 위해 여분의 식사를 받아가기도 하니 예상보다 그릇 수가 늘어나는 건 당연하다. 앞으로도 계속 봉사를 할 거냐고 물었다.“음식 장사를 하는 동안은 계속할 겁니다.”경비는 나가지만 그 정도의 지출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 큰 나무의 속삭임처럼 든든하다. 사랑의 봉사는 자석처럼 마음의 끌어당김에서 시작되는 행위이고 전염성도 강하다. 코로나19 사회거리두기 2.5단계에서 2단계로 겨우 내려온 시점이어서 적잖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다. 밥 한 그릇으로 마음의 구김살을 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그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산용불량자가 되고, 신장암 선고를 받고 한쪽 신장을 떼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간을 삼분의 일 떼어냈고 교통사고로 죽을 뻔 했던 적도 있다. 명이 길었던지 지금껏 안 죽고 살아 있다. 여분의 삶을 사는 듯 시작한 봉사가 어느새 13년이다. 감사의 마음은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조정태 씨는 무료급식으로 밥 한 그릇 나누는 일이 바로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한다.“정말 별 거 아닌데.”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가진 것을 조금씩 떼어서 나누고 사는 거지. 세상은 큰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작고 사소한 것이 모여서 전체를 지탱한다.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 부끄러워하는 소박한 마음이 모여서 세상의 전체를 이룬다.무료급식을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어르신들을 보면 공원에서 멋진 풍광을 이루는 노목을 보는 듯하다. 일평생 땀 흘리며 노력해서 거두고, 또 거두어서, 잘 익은 열매를 아낌없이 생산해내고는 고요히 저물어가는 노목. 그들이 언덕에서 굳건히 버티며 사방팔방의 바람을 막아주어서 들녘의 평화가 유지된다. 들녘이 아름다운 건 황혼의 아름다움이 비치기 때문이다.봉사단이 빵과 야쿠르트, 아이스콘 같은 간식을 나눠주면 어르신들은 아이처럼 좋아한다. 얘기를 하다 보니 시조시인이신 문무학 선생님이 조정태 씨의 초등학교 은사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과 통화도 했다. 이래서 세상을 한마당이라는 게지.2002년 반점을 시작하기 전에 조정태 씨는 가스장수, 족발장수, 택시운전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신용불량자로 하루를 힘들게 견디고 있을 즈음, 선배의 권유로 그는 중국집을 하게 되었다. 용기 있게 달려든 새 삶이 그를 살렸다. 그저 가족을 굶기지 않고 자식들 공부나 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버리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삶의 어려움을 겪어본 이가 어디 그 한 사람 뿐일까만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 나누며 살 수 있는 것이 아닐지.코로나19로 소상공인의 시름이 깊어지는 이즈음, 그들의 한숨소리가 나날이 드높아지는데 무심하게도 코로나19는 그 기세를 멈출 줄 모른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셋째 목요일 어르신들을 가게로 모시던 무료급식도 코로나 때문에 잠시 멈추었다. 그 대신 그는 넷째 목요일에 재료를 준비해서 수성구 상동으로 국제사랑나눔회를 찾아가고, 대구장애인부모협회 사랑의 집 남구센터에 한 달에 마지막 주 수요일 한 번씩 짜장면을 볶아서 갖다 주기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 짜장에 밥을 비벼먹는다. 우리가 어릴 때 짜장면을 건져먹고 거기 밥을 비볐던 것처럼. 처음에는 가게로 오게 해서 봉사를 했는데 장애인들이 움직이는 걸 힘들어 해서 그가 직접 갖다 주게 되었다.“사회에 봉사하게 된 동기가 뭡니까?”“신용불량자였던 제가 동네 어르신들 덕분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게 되었으니 그 고마움을 십분의 일이라도 되돌려 주겠다는 생각으로 지역사회 봉사에 나서게 되었습니다.”온갖 어려움을 다 겪고 살았지만 하늘의 도우심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고마워서 그는 자신이 받은 고마움을 사회에 돌려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만 3년이 되었다. 남부경찰서 기동순찰대 새마을 협의회, 지역사회보장협의회와 같은 여러 봉사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자랑하라고 멍석을 갈아주는 데도 입이 무거운 그는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봉사를 시작할 때는 그저 짜장면 한 그릇을 나누자는 단순한 마음이었는데 횟수가 거듭할수록 그 역시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사랑은 땅콩줄기 같아서 땅 속에 얼마나 많은 열매를 갖고 있는지 뿌리를 뽑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모든 일은 시작이 중요하고 봉사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과감하게 시작하면 또 다른 이들이 도움을 주기 마련이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이어서 이인삼각 경기처럼 서로 발을 맞춰 걸을 때에 게임이 원만해진다.밥 한 그릇으로 누군가의 희망이 되는 삶. 나무가 크면 그늘도 넓고 깊다. 누가 먼저 하자고 했느냐니까 조정태 씨는 자신이 먼저 해보자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아내의 호응이 있어서 봉사가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며 공덕을 슬쩍 넘긴다. 고등학교 때에 아내를 만났고, 스물한 살에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람.“신문에 크게 날 일은 아닌데 부끄럽고 민망합니다.”이 투박한 사나이, 겸손하기까지 하니 더욱 마음에 든다. 상투적이지만 그의 봉사는 한 알의 밀알이라고 말해주었다. 그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가 맺힌다고. 기사를 읽고 누군가의 가슴에 밀알의 싹이 돋으면 그것으로 그의 노력은 아름답게 승화한다. 글이란 사실을 전달하는 데도 쓰이지만 그보다는 응원의 메시지가 더 크게 작용한다. 읽는 사람에게나 글감을 제공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고맙다고, 잘 하고 있다며 등을 두드려주는 토닥임이기도 하다, 코로나로 인해서 자신의 발등에 난 불을 끄기도 바쁜 시국에 봉사가 그리 쉬운 말이어야지.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0-14

기러기(雁) 하늘을 날고 오리(鴨) 물위를 헤엄치는 안압지

지금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주말이면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동궁과 월지(옛 안압지)는 신라 때 이름인 임해전 건물 한 채만 연못가에 쓸쓸히 서있었다. 그 임해전을 배경으로 갓 쓰고 낚시하는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을 보고 이 건물이 어디 갔는지 궁금했는데 활터 호림정으로 옮겨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옛 안압지 여러 사진을 보았다. 밀짚모자 쓰고 낚시하는 사람, 지팡이 집고 담소하는 두 사람 뒤에 임해전 누마루에 앉은 사람, 그 앞 댓돌에 앉은 사람과 걸어오는 사람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녹아나 있었다.#. 안압지 보름달밤 기행을 회상하며필자가 경주에 오기 전부터 경주의 문화유적 핵심은 이미 보아왔지만, 25년 전에 경주에 정착하여 경주 곳곳의 문화유적을 스캔하듯이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90년대 초부터 보름달밤 기행도 안내해 왔었는데 답사 객들은 왕릉이나 절터에서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다. 특히 인공의 불빛 하나 없던 안압지의 보름달밤 기행은 먼 먼 태고의 신비가 감돌아 신라 궁녀들의 하얀 웃음이 달빛에 젖는 듯했다. 지금의 안압지 야경이 좋다고 하지만 잠시의 시각적 유혹은 있겠지만 깊은 울림은 없다. 야간관광을 위해 지금같이 온 유적지에 불 밝혀 놓으면 깊은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아스라한 감흥은 없다. 즉 하향평준화 시킨 것이다.660년 신라가 당나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평정했던 태종무열왕의 바통을 이어받은 아들 문무왕은 668년 고구려마저 평정한다, 그러나 새로운 복병 당나라가 신라마저 삼켜 버리려는 야욕에 또다시 당나라와 전쟁 중인 674년에 이 동궁과 월지(안압지)를 만든다. 당나라에도 대명월지라는 연못이 있었고 백제도 궁남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전쟁 중에 이런 연못들을 보고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지금 정비가 잘된 동궁과 월지의 이름은 신라 토기 파편으로 알게 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기러기(雁)가 하늘을 날고 오리(鴨)가 물위를 헤엄치는 연못이라고 시인 묵객들의 시심을 자극하는 안압지(雁鴨池)라 불러왔다. 지금은 처음 불리었던 신라 때의 동궁(東宮) 또는 월지(月池)로 명칭을 바꾸었다. 1975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하면서 여기 동궁과 월지는 연못을 정비하다가 배, 주령구, 불상, 출톼근 카드역할의 목간, 등등 3만여 점이 쏟아져 나와 2년9개월 동안 6만 5천여 명의 인원으로 발굴하였다. 27동의 건물터 중에 지금은 3채만 복원해 놓았다. 그때 남아있던 임해전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었다고 헐게 되어 1977년 황성공원 호림정 활터로 옮겼던 것이다.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유적지를 찾을 때는 휴일은 피하고 평일 날을 택한다. 그래야 유적과 온전히 침묵의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같이 금요일 한글날과 겹친 황금연휴가 지난 월요일 아침은 사람 없어 더욱 좋다. 더구나 동궁과 월지는 우리 집 수오재서 차로 5분 정도의 거리라 마음이 홀가분하다. 예상대로 몇 가족 조금 보이고 서쪽 3동 건물을 지나 한 바퀴 돌 때는 사람 하나 없는 자유를 만끽했다. 서편 건물 지 주위에 좁은 돌 수로는 직각으로 꺾이면서 중간에 물을 모으는 구덩이도 있었다. 최근에 위덕대 박홍국 박물관장은 방화용 수로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방화용 수로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건물 있는 서쪽에는 완벽한 직선으로 동쪽 무산 12봉은 곡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중간 연못에는 섬 3개가 도교의 삼신산(봉래, 영주, 방장)이 떠있다. 옛 이름 안압지대로 하늘에 기러기는 없었지만 물에는 오리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바람은 나뭇잎과 소리 없는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선녀들이 산다는 무산 12봉 제일 꼭대기에 오르니 세찬 가을바람에 선녀가 옷자락 휘날리듯 나뭇잎이 허공을 맴돌며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낙엽이 떨어지면 월명스님의 ‘제망매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삶과 죽음의 길 여기 있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줄을 모르겠구나! 아아!….#. 황성공원과 호원사지, 호림정과 선정비호림(虎林), 글자 그대로 호랑이 숲이다. 지금은 황성공원으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호림 숲이었다. 호랑이가 나올만한 숲인가. 지금같이 아파트나 건물들이 없었던 신라시대는 소금강산 줄기로 봉긋 솟은 숲을 이루었을 것이다. 먼저 봉긋 솟은 황성공원 산길을 올랐다. 참나무와 산죽 사이로 바위들이 제각각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사방에 경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빌딩들이 시야를 가리고 서쪽은 나무가 솟아 하늘만 보인다. 말 탄 김유신 장군상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건립 문에는 “박정희 대통령각하께서 명각 휘호를 내리시어…. 1977년에 경상북도에서 세웠다”고 새겨놓았다. 그런데 말의 자세를 보니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다 멈추는 자세여서 칼 빼어든 김유신이 멋쩍어 보인다.다시 내려와 남쪽으로 숭고한 호랑이 처녀의 넋을 기리는 호원사를 찾았다. 예전에는 가정집 장독이 석탑 위에 있었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지금은 집은 철거했지만 아직 정비 안 되어 철망만 둘러져있고 잡풀들이 마음껏 자라나 있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가. 신라에는 음력 2월8일부터 보름까지 탑돌이 하는 풍습이 있었다. 38대 원성왕 때 화랑 김현이 탑돌이하다 마지막 남은 처녀와 눈이 맞아 이슥한데 가서 달빛 같은 정을 통하고, 처녀는 호랑이임을 고백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오빠 호랑이를 대신하여 죽는다. 한번 정을 통한 사랑의 연으로 호랑이 처녀의 죽음 덕분에 출세한 김현이 호랑이 처녀를 위하여 호원사를 세워주고 명복을 빌었던 곳이다.1977년 안압지에 있던 임해전을 옮겨온 호림정으로 갔다. 5칸 겹집의 건물 한 칸은 한단 내려 2층 누각으로 하고 좌우 한 칸에 방을 넣었다. 옆에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존재감이 반감되었다. 건물 난간 옆에는 경주부윤과 벼슬했던 사람들의 비석들이 줄지어 두 줄로 모아놓았다. 비석 앞줄은 14개였고 뒤에는 15개였다. 내 키 177cm보다 큰 비석이 네 개나 되었다. 철비 한 개가 눈길을 끌고 머리 잘린 조그마한 비석에 눈이 간다. 관리로 재임 중에 선정을 베풀었다고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인데 진짜 선정을 베푼 관리는 이런 비석 세우지 않는다. 이 단단한 돌을 깨트릴 정도면 얼마나 악행을 저질렀을까. 비석을 살펴보니 잊을 망(忘)자도 푹 파버렸다. 함부로 공덕비 세우는 것 아니다. 하늘은 몰라도 산천초목만 알아주어도 족하지 않은가.#. 활의 역사와 경주 호림정일본이 칼을 휘두르는 무사의 민족이라면 우리나라는 옛부터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 동이(東夷)라 불렀다. 특히 단단한 물소 뿔과 참나무, 단단하면서 유연한 대나무와 산뽕나무, 자작나무로 만든 각궁은 사정거리가 145m로 35m인 일본, 120m인 유럽에 비해서 세계최고 수준이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활을 쏘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수렵도는 힘차게 달리는 말위에서 뒤돌아보면서 쏘는 파르티안 궁법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단원 김홍도의 활 쏘는 코치의 그림도 등장하듯이 우리 민족은 활쏘기가 일상화되었다.조선의 활쏘기는 문과 무과 모두 과거시험의 필수과목이었고 선비들은 활쏘기가 육예의 하나로 교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시험 자체가 없어져 국궁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활쏘기 금지령을 내렸다.활 잘 쏘는 사람을 신궁 명궁 강궁이라 하는데 고구려의 주몽은 한 여인이 물동이 이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활을 쏘아 구멍이나 물이 쏟아지자 주몽이 활을 쏘아 구멍을 막아버리는 일화가 있다. 고려 말(1380년 9월) 이성계는 남원 운봉 황산에서 20살 전설의 왜장 아지발도(阿只拔)의 투구꼭지를 쏘아 투구를 떨어트리고 이지란이 얼굴을 쏘아 죽인다.활로 인생 역전하는 경남 함안의 설화도 있다. 기골은 장대한 천하장사였지만 천애 고아로 아무리 일해도 별 희망이 없어 한양으로 떠나 세상물정을 알아본다. 가식으로 척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활 통을 매고 활량으로 가장하여 전국을 돌다 경주에 이르니 활 잘 쏘는 사람을 찾는 방이 붙어 있었다. 경주 큰 부잣집에서 밤마다 귀신 새가 나타나 귀신 새를 잡을 사람을 찾은 것이다. 총각은 죽을 각오를 하고 호언장담 한다. 나무 위에 숨었다가 새를 걸터타고 뛰어내려 죽였다. 그리고는 새의 목에 화살을 꽂았다. 그리하여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꿈같은 세월을 보내는데 장인은 사위의 활솜씨를 자랑하고파 상품을 내걸고 활쏘기 대회를 한다. 안절부절 하던 사위의 차례가 되었다. 활시위를 당긴 채 허공만 바라보는데 보다 못한 아내가 재촉하며 시위 잡은 손을 비틀었다. 때마침 하늘을 나르던 기러기 한 쌍 중 한 마리가 화살에 맞아 떨어졌다.경주에는 해방 전부터 신라정이라는 활터가 있었다. 서천, 북천가 에서 활을 쏘았다. 1957년에 지금의 서편에 정자도 없이 호림정 현판을 걸고 활을 쏘았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는 반월성에서 과녁만 두고 쏘았다. 1977년 지금의 자리에 안압지의 임해전 건물을 옮기고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필자도 이곳에서 잠시 활을 배운 인연이 있다. 호림정 출신으로 최고인 9단은 없고 8단은 다정 김헌우 한 분 있고, 전국에 여 궁사는 5단이 18명인데 경북 최초의 5단은 배운지 7년 되는 김현지 사범이다./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10-13

바람·파도·시간이 빚어낸 아름다운 순례길

살다보면 나침반이 있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갔지만 아닐 때가 있고 잘못 간다고 여겼던 이들이 뒤늦게 보면 제대로 가고 있다. 갈팡질팡할 것 없이 나침반만 보고 걸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평온할까. 문득 삶이 흔들린다 싶을 때 바다로 방향키를 잡아보는 건 어떨까. 오랫동안 천천히 걸어보면 더 좋겠다. 바다라는 푸른 나침반과 동행하는 해파랑길이라면 더더욱 좋겠다.해파랑길은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이어지는 770㎞ 길이다. 국내 최장의 트레킹 코스로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슷한 거리다. 모두 50개 코스며 영남과 강원지역 12개 도시를 지난다. 포항 구간은 13코스부터 18코스까지로 100㎞에 이른다. 포항은 가장 긴 해파랑길을 가진 도시다.□ 장기 바다와 구룡포의 아름다움 품은 13∼14코스해파랑길 포항 구간의 시작은 양포항이다. 청어잡이 배들이 줄지어 서있고 선박 사이로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는 항구다. 해파랑길 초입에서 거대한 물고기 떼가 발길을 붙잡는데 이후에도 가끔 보게 되는 방어 양식장이다. 관리인의 말을 들어보니 방어는 워낙 예민한 어종이라 인적이 드문 곳에서 키우지만 해파랑길이 생기는 바람에 길가에 나왔다고 한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면서도 100마리는 족히 넘어 보이는 방어를 보는 재미에 자주 걸음을 멈췄다. ‘창바우 마을’을 지나면 육당 최남선이 조선 10경으로 꼽은 ‘장기 일출암’에 이른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바위에는 생수가 솟아난다고 해서 ‘날물치’, ‘생수암’으로도 불린다는데 물이 맑아서 여름에는 물놀이객 차지가 되었다. 그에 비해 장길리 복합낚시공원에 있는 ‘보릿돌’은 낚시꾼들 차지다. 갯바위 모양이 보리같기도 하거니와, 보릿고개 시절 바위 아래 미역으로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보릿돌까지 이르는 200m의 교량에는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해파랑길 13코스에서 장기 바다의 매력에 빠졌다면 14코스는 구룡포 차례다. 용 열 마리가 승천하다가 한 마리는 바다 속으로 떨어지고 아홉 마리만 하늘로 올랐다는 구룡포에서 한반도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 끝에 해당하는 호미곶까지. 곳곳에 유명한 명소들을 보석처럼 박아놓은 말이 필요 없는 길이다. 시작지점은 구룡포항. 관광객 대부분이 일본인 가옥거리로 향하기에 해파랑길은 한산하다. 항구를 벗어나 골목을 걷다보면 구룡포만의 독특한 건축물이 눈에 띈다. 관광지의 인위적인 느낌이 싫다면 북적거리는 골목을 조금 비켜나서 걸어도 좋으리라.구룡포해수욕장을 지나 얼마나 걸었을까. 누군가 도로에 크게 써놓은 ‘길이 없음’이라는 글귀를 무시하고 해파랑길 표지판만 믿고 걷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비가 온 뒤라 바다로 흐르는 민물이 불어난 탓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비탈진 암석이 위험해 보였다. 결국 언덕 위 차도로 올라가야 했기에 좁은 골목을 헤매다가 우연히 풍경 좋은 명당을 만났다. 간혹 길을 잃기도 하고 둘러가기는 해도 바다를 나침반 삼으면 돌아갈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골목길을 걸을 때보다 지도를 덜 보게 되고 산길보다 마음이 느긋하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호미곶을 일곱 번이나 답사했다는데 둘러가는 것쯤이야. 그렇게 걷다보면 선물 같은 풍경이 또 펼쳐진다. 막대 모양 돌을 켜켜이 쌓아올린 듯한 바위, 구룡포 주상절리다. 관광객들은 주상절리 앞에 경외심을 담아 조약돌을 탑처럼 쌓고 간다. 1억 년의 시간을 간직한 바위를 보며 걷다보면 멀리서 호미곶 등대가 깜빡이고 ‘상생의 손’이 손짓을 한다.□ 노을 명승지 즐비한 15∼16코스해파랑길 15코스(호미곶 해맞이광장~흥환보건소)와 16코스(흥환보건소~송도해수욕장)는 해파랑길 전 구간 가운데 유일하게 남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독특한 지형에 위치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동해지만 바다를 붉게 적시는 노을 명승지가 많다. 바다 위로 떠오르고 지는 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도시가 또 있을까.최근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 완공되면서 걷기는 더 편해졌다. 둘레길이 조성되기 전 15코스는 여간 힘든 길이 아니었다고 한다. 해안둘레길 개통 후 포항은 해안길이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나는 중이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의 주요 구간은 네 곳으로 해파랑길과 진행 방향은 반대다. 해병대 상륙훈련장과 도구해수욕장,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을 연결하는 ‘연오랑세오녀길’이 소박하지만 정돈이 잘 된 길이라면, 동해면 입암리에서 흥환어항까지 이르는 ‘선바우길’은 볼거리가 화려하다. 모감주나무가 유명한 ‘구룡소길’은 자갈길과 산길이 섞여있어 힘들지만 지도에 없는 신비스러운 바위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생의 손이 반기는 ‘호미길’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겨울에 걷기 좋은 여행길이다.25㎞에 이르는 해안둘레길을 모두 걷기 힘들다면 ‘선바우길’만 걸어도 좋다. 데크길을 따라 걷는 6.5㎞ 구간으로 한 시간 반이면 둘러볼 수 있다. 신생대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기암괴석이 많아 해안둘레길의 백미로 꼽힌다. 우뚝 선 바위인 ‘선바우’는 모래와 자갈을 썩은 독특한 모양으로 벼락을 맞아 지금처럼 아담해졌다고 한다. 거대하고 흰 바위 ‘힌디기’ 앞에는 늘 사람들로 붐빈다. 힌디기의 큰 구멍 앞에서 소원을 빌면 부자가 된다는 전설 때문이다. 용왕과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바위섬 ‘하선대’는 갈매기들만 노닐고, 연오랑과 세오녀를 태우고 갔다는 검은 바위 ‘먹바우’는 금방이라도 바다로 나아가려는 모양새다. 세상에 어느 유능한 석공을 데려온들 이처럼 조각할 수 있을까. 바람과 파도와 시간이 빚어낸 석조 예술품에 심취해 걷다보면 시간 가는 걸 잊을 정도. 데크길 아래로는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투명한 바닷물이 찰랑거리고 청각이며 우뭇가사리를 줍는 사람도 많다.□ 17코스 죽천 용한리는 국내 3대 서핑 성지‘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완주하고 다시 북쪽으로 나침반을 놓으면 송도와 영일대, 칠포해수욕장에 이르는 17코스와 마주한다. 포항시민이라면 굳이 해파랑길 트래킹이 아니더라도 출퇴근길이나 친구를 만나러 간다거나 산책을 하면서 오가는 생활 속 길이다. 길이라는 것이 있어서 걷기도 하지만 걷는 이들의 바람이 모여 만들어지기도 한다. 언젠가 여남갑 등대를 보며 해안길을 걷다가 길이 막혀 돌아선 적이 있다. 지금은 여남동 둘레길이 뚫리면서 해변이 깔끔해졌다. 산책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길이 생겨서 좋다고 입을 모은다. 사람이 길을 만들지만 길은 더 많은 사람을 부르는 힘이 있는 셈이다.그러고 보면 바다와 가까이 사는 건 행운이다. 조금만 움직이면 과메기와 멸치가 꾸덕꾸덕 말라가는 덕장을 볼 수 있고, 새벽 바닷가에서는 부지런한 어선들이 쏟아놓은 싱싱한 횟감을 살 수도 있다. 생선을 손질하는 인부들 곁을 맴맴 돌며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살찐 고양이들을 보는 것도 즐겁다. 여남 멸치 덕장에서 전어며 어린 돔, 전갱이 등을 바로 썰어서 파는 회를 산 적이 있는데, 서너 명 먹을 양이 만 원에 불과했다.영일만항 인근 용한리 해변은 17코스를 걷는 젊은 도보객들에게 소위 핫플레이스다. 강원도 양양, 부산 송정과 더불어 국내 3대 서핑 성지로 불리면서 전국에서 서퍼들이 몰려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보여행자는 무거운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서핑을 즐긴 뒤 다시 길을 떠난다. 길에서의 자유를 온전히 만끽하는 여행자들이다.□ 호랑이 등을 오르는 17∼18코스포항시는 해파랑길 17~18코스를 ‘영일만 북파랑길’로 다듬었다. 송도에서 송라 지경리까지 39.2㎞ 구간으로 ‘영일대길’, ‘주상절리길’, ‘조경대길’, ‘용치바위길’ 모두 4코스다. 한반도 지도에서 ‘호랑이 등’에 해당하는 구간이어서 ‘호랑이 등오름길’이라고도 한다. 자연훼손을 피하기 위해 기존의 백사장과 기암괴석, 군부대 이동로를 살리고 필요한 구간에만 데크길을 설치했다. 모래와 자갈 해변이 길게 이어진 곳을 제외하면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18코스(칠포~화진) 가운데 칠포에서 오도까지는 ‘동해안 연안녹색길’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 과거 군사보호구역으로 해안경비 이동로를 트레킹 코스로 정비했다.경치 좋은 곳마다 전망대가 조성돼 여행자들이 쉬어가기도 좋다. 칠포해수욕장 근처 해오름전망대는 철망 아래로 철썩이는 파도가 짜릿하다. 100m가 넘는 ‘이가리 닻 전망대’ 선두에 서면 미지의 바다로 항해하는 선장이 되어 볼 수도 있다.7번 국도를 자주 다니지만 도로에서의 풍경과 해파랑길의 풍경은 다르다. 포항의 하재영 시인은 “바다는 넓은 귀를 가졌다”고 했다. 바다의 귀에 온갖 시름을 소근 대며 걷다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시인도 경험했을 터. “어떤 슬픔도 씻어주며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주는 동해”는 해파랑길에서만 느낄 수 있다.해파랑길 포항 구간을 마무리하던 날은 비바람이 거셌다. 화진해수욕장을 가로막은 육군훈련장 탓에 자꾸 뒤집히는 우산을 부여잡고 경적을 울리는 차를 피해 걸어야 했다. 그럼에도 최근 군사시설 철거를 협의 중이라는 소식에 다시 걸을 날을 기다린다.해파랑길을 걷는 동안 햇볕이 좋은 날도 있었지만 바람이 거세거나 비가 내리는 날도 있었다. 바다는 늘 한 가지 표정으로 맞아주지 않는다. 물결이 비늘처럼 간지러운 날도 있지만 모든 걸 집어삼킬 듯 파도가 성난 날도 있었다. 그렇기에 아는 길이어도 늘 새로웠다. 그러니 당신도 조금만 나와 보시라. 나침반을 놓을 세상이 넓어진다. 가까이에 바다가 있고 길이 있다. 해파랑길이 있다.사진/안성용글/배은정 방송작가,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에서 활동.

2020-10-12

녹슨 철길, 초록으로 물들다

오래전 기차가 달리던 철길이 이제는 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로가 되었다. 열차를 타고 이동했던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다. 우현동에서 효자동까지 꽃, 나무, 숲, 물, 조형물이 어우러진 ‘철길숲(Forail)’은 포항의 새로운 명소다.침체 된 원도심에 녹색 활력을 불어넣고 시민들의 건강한 삶에 기여하고 있는 철길숲(Forail)은 숲(Forest)과 철길(Rail)의 합성어다. 약 100년간 동해남부선을 달리던 기차가 멈추고 소임을 다한 철로가 숲과 공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우현동에서 옛 포항역(서산터널)까지 1차 구간(2.3㎞)이 2011년에, 옛 포항역에서 효자교회 앞까지 2차 구간(4.3㎞)이 2018년에 완료되었다. 단절구간인 효자-유강IC 구간(2.7㎞)도 곧 완성될 예정이다.철길숲은 테마별로 어울누리 길, 활력의 길, 여유가 있는 띠앗길, 추억의 길로 나눠 조성되었다. 구간마다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잘 닦여 있고, 운동기구, 벤치, 정자가 놓여져 시민들이 길을 따라 걸으며 운동과 휴식을 겸할 수 있다. 덕수공원과 어우러진 호국보훈의 길, 서산터널에서 우현동 사이 여성아이병원 뒤편으로는 태교의 길, 양학동에는 어르신들을 위한 치매예방 보듬마을, 불종로 안심마을 등 지역 특색과 연계한 길도 눈길을 끈다.□ 어울누리 길-불의 정원, 증기기관차 등 볼거리어울누리 길은 옛 효자역 부근 효자교회 앞에서 시작된다. 입구의 커다란 표지석이 당산목 팽나무와 함께 시민들을 반긴다. 유모차나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시멘트로 덮인 철길 산책로와 자전거 길이 나란히 이어진다. 익살맞은 표정의 장승들은 웃음을 자아내고 댄싱프로미너드, 랜드폼이 흥미를 끈다. 성모병원 가는 길 인근 작은 안내소에서 철길숲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어울누리 길의 압권은 불의 정원이다. 철길숲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관정 굴착 작업 중 지하 200m지점에서 나온 천연가스에 불꽃이 옮겨붙어 현재까지 꺼지지 않고 있다. 24시간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발굴 상태 그대로 보존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불의 정원 옆에는 끊긴 철길 위를 달리는 형상의 증기기관차 ‘미카’가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 서 있다. 곳곳에 정자와 벤치가 놓여 있고 단체와 개인이 기증한 수목과 장미가 숲을 이룬다.□ 활력의 길-스틸아트 작품 보는 재미가 쏠쏠활력의 길은 대잠 고가차도 아래가 출발점이다. 시민들의 주체적인 이용공간인 한터 마당에서는 에어로빅, 기체조, 심폐소생술 시연 같은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음악 바닥분수는 코로나19로 작동을 하지 않지만, 주변에는 어린이 놀이시설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소풍을 와도 좋은 곳이다. 팽나무 숲과 메타세쿼이아 길 아래에는 들꽃들이 앞다투어 피고, 반대편 대나무숲 뒤로 그린웨이 도시 텃밭이 조성되는 중이다.군데군데 스틸아트페스티벌 출품작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내일로, 자연을 보다, 물에 물주는 소녀,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 도약, 기념비적 기념물 등. 그중 오픈 스튜디오 부근 광장에 설치된 ‘만남 2017’은 역상 조각 제작으로 유명한 이용덕 작가와 포스코의 만남이 빚어낸 수작이다.□ 여유가 있는 띠앗길-숲 갤러리 지나면 구릉과 자전거길 펼쳐져이 길은 득량 건널목, 양학 건널목, 학잠 건널목을 지나 용흥 고가차도까지 이어진다. 양학동 행정복지센터 앞에 치매 보듬마을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치매 보듬마을 프로젝트는 치매 환자와 인지 저하자가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가족과 이웃의 관심과 돌봄으로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조성하기 위한 주민참여사업이다. 가정과 가족 구성원을 떠올리게 되는 구간이다.박공지붕의 숲 갤러리에는 철길숲 조성 전과 후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입구에는 첼로 형상의 식수대가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구릉과 보도, 자전거길이 동시에 펼쳐지면서 언제부턴가 잠자리 한 마리가 따라온다. 삽상한 바람이 불면 구릉길의 풀들이 정겹게 엎드린다. 말 그대로 여유가 있는 띠앗길이다. 띠앗이란 형제나 자매 사이에, 서로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다. 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낮은 집들이 어릴 적 떠나온 고향 마을 같다.□ 추억의 길-옛 포항역 거닐면 추억이 떠올라용흥 건널목에는 철도 건널목을 지키던 낡은 초소가 그대로 남아있다. 길을 건너면 자갈길과 숲길이 선택을 기다린다. 자갈길은 옛 철도 차량정비소를 지나 안포 가도까지 이어진다. 가장자리는 펜스로 이어졌고 풀들로 무성하다. 철거하다 만 것 같은 건물도 몇 동 흔적이 남아있다. 한적한 포항역 일대는 무언가 변화를 앞두고 고심하는 모양새다.옛 포항역 주변 허공으로 구름다리가 길게 떠 있다. 오래된 육교 역시 인적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역이 사라진 일대는 도로가 개설돼 용흥동과 중앙동을 횡으로 잇는다. 안포 건널목을 건너 범죄 없는 불종로 안심마을 구역을 지난다. 서산터널이 있는 도로에 이르면 철길숲 2구간이 끝나고 2011년 조성이 완료된 우현동 유성여고 앞까지 1구간이 시작된다.□ 서산터널에서 유성여고 앞-지역과 애환을 함께한 덕수공원 만나서산터널 앞 도로를 가로질러 나루끝으로 가다 보면 수도산을 만나게 된다. 산자락에 위치한 덕수공원에는 6·25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충혼탑과 지역문화 창달에 일생을 바친 재생 이명석 선생의 문화공덕비가 서 있다. 사방이 확 트인 우현 사거리 부근에 이르면 문득 길을 잃은 듯 도로가 앞을 막아선다. 하지만 몇 걸음 비켜서면 여태 달려온 길을 한곳으로 모으려는 듯 지하통로가 열린다.그린웨이를 홍보하는 현수막 몇 장이 벽면을 장식하는 지하통로를 지나면 불미숲이다. 불미숲은 여성아이병원에서 유성여고 앞까지 엄마랑 아기가 함께하는 ‘태교의 길’을 콘셉트로 한다. 길이는 짧지만, 흙길이고 벤치가 많아 쉴 곳도 많다.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가 적힌 액자 앞에 서면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된다. 여성아이병원 앞마당으로 가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인형들로 꾸며진 광장이 보인다.□ 경의선 숲길 등 철길숲의 모범사례서울 연남동 경의선 숲길은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중 서울역에서 문산역까지 광역전철이 지하로 개통되면서 용산에서 가좌까지 지상에 조성된 숲길이다. 6.3㎞ 구간에 다양한 테마로 조성된 레트로 감성의 숲길이다. 책거리, 연트럴파크, 노벨길이 있고 핸드메이드 소품을 파는 플리마켓과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스튜디오가 운영된다.8.1㎞ 광주 푸른길 공원은 2000년 폐선된 뒤 공원으로 탈바꿈된 시민 참여형 공원이다. 오감길, 배움길, 물숲길, 이음길이 있으며 맛집, 푸른길 작은 도서관, 교복 나눔 공유센터가 있다. 토요 장터인 상생마켓도 열린다. 군산시는 폐철도를 근대문화유산과 연계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가선 트램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폐철도를 활용한 트램을 도입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전국에서 처음이다.‘서울로 7017’의 모델이 된 뉴욕의 하이라인파크는 500종 이상의 식물과 나무가 식재되어 있으며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사는 도시를 대변하듯 각종 조형물, 설치미술, 벽화, 구조물 등이 풍부하다. 하이라인파크와 연결된 첼시마켓은 수백 년 된 황량한 공장지대에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뉴욕의 문화 중심지로 탈바꿈되었다. 무엇보다 지역사회가 함께한 하이라인파크는 ‘하이라인 효과(High Line Effect)’라는 용어까지 회자되게 만든, 오래된 것은 보존하고 새로움도 함께 포용한 도시재생의 좋은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시민들의 다양한 아이디어 반영해야포항시는 2016년부터 시민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 삶의 질 개선에 역점을 두는 도시 활성화 전략인 그린웨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숲과 물길을 더한 쾌적한 도시, 사람이 머무르는 매력적인 도시, 즐길 거리가 있는 재미있는 도시 등 3대 추진 방향을 설정했으며, 그중 철길숲을 통한 지속 가능한 미래형 녹색 도시를 만들어가고 있다.철길숲을 걸을 때마다 포항을 소재로 한 시화 전시, 책거리와 전망대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옛 포항역을 복원하거나 옛 철길을 회상하고 추억할 수 있는 철길숲 체험공간이 생겨도 좋을 것이다. 일정 구간을 철길숲만의 상징으로 디자인한 트램을 운행한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하지만 그 어떤 시설보다 사람이 먼저다.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행복한 미래를 함께 가꾸어가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폐철도 공원화 사업으로 조성된 철길숲은 이제 많은 시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코로나19로 지친 시민들에게 큰 활력을 주고 시민들의 휴식처와 문화공간이 된 것이다. 이 숲길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시민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더 친숙하고 유용한 시민들의 공간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녹슨 철길이 초록으로 물든 철길숲에 시민들의 다양한 상상력이 계속 반영됨으로써 철길숲이 시민들의 진정한 자긍심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진/안성용글/김영소설가,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평사리문학상·천강문학상 등 수상.

2020-10-07

광대는 죽는 날까지 광대라지요 소리로 전해지는 삶에 감사할 뿐입니다

민요경창대회에서 명창부 대통령상을 받은 이은자 명창을 만났다. 연구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장구를 앞에 놓고 연구생들에게 민요를 가르치는 중이었다.‘백구야 날지 마라 너를 잡을 내 아니로다. 성상이 버리심에 너를 좇아 예 왔노라~.’ 물 흐르듯이 쉽게 가자는 멘트와 함께 명창이 창부타령 한 소절을 부르면 연구생들이 따라하는데, 한 소절의 실수로 전체를 망칠 수 있으니 집중하라고 주의를 준다. 구성진 마디마디를 연결해서 숨 쉴 곳에서 숨 쉬고 내릴 곳은 내려서 소리를 묶고 눌러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판소리와 경기민요가 어떻게 달라요?판소리가 뱃속에서 한을 끌어올려 긴 얘기를 엮어나가는 것이라면 경기민요는 민중들의 입으로 구전되어온 노래이며, 소리를 굴리고 던지듯이 말하는 소박한 음악이라는 점이 다르다고 한다. 말을 던지는 부분에 비성이 들어가면 콧소리가 되기 전에 얼른 소리를 놓아야 하는데 숙련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란다.- 자기만의 소리를 찾은 게 언제예요?불과 십여 년쯤 되었다며, 이은자 명창은 인간의 음성이 성대에서 결정되고 식도의 입구인 후두에서 생성된다고 일러주신다. 소리의 형상을 기호로 표현하면 동그라미가 된다. 그이는 항상 소리를 둥글게 하려고 애쓴다. 소리가 공명강을 거쳐 부드럽게 울려 퍼지도록 둥근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래서인지 그이의 민요는 구르는 듯 부드럽고 감칠맛이 있다.- 민요가 무엇일까요?민요는 민중들의 삶을 소리로 표현한 음악이며, 소리로 삶을 전하는 민중음악이다. 일찍이 민요는 힘든 농사일부터 고기잡이는 물론이고, 사랑의 이별을 노래하며 우리네 삶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은자 명창은 남다른 걸 좋아해서 민요를 주어진 대로 부르지 않고 편곡해서 부르기도 했다. 전통을 허물어뜨린다는 욕을 먹기도 했지만 그 별스러운 각색이 창극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새로운 것이 묵은 것 위에 생성된다고 볼 때, 새로운 걸 추구하는 욕구 강한 이단아가 항상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데 앞장서게 마련이다.- 어째서 판소리가 아니고 경기민요였어요?이은자 명창은 경기민요가 자신에게 맞더라고 했다. 민요는 민중들의 삶을 반영하고 표현하기에 적합한 음악이기도 하지만, 짧으면서도 빠른 시간에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고 금방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판소리가 겹겹의 한을 담은 음악이라면 경기민요는 민중의 애환에 노랫가락의 흥겨움을 더한 것이 다른 점이랄까.- 어떤 곡으로 대통령상을 받으셨어요?유산가로 예선을 통과하고 제비가로 본선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며, 명창대회에서 불렀다는 ‘유산가’ 한 대목을 부른다. “화란춘성(花爛春城)하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山川) 죽장망혜(竹杖芒鞋) 단표자(單瓢子)로 천리 강산을 들어가니….” ‘유산가’에 이어 12잡가 중에서 가장 긴 소리라는 ‘적벽가’를 곁들여주니, 둘러앉아 있던 제자들도 목소리를 맞춘다.민중의 삶을 전하는 경기민요 12잡가를 직접 듣고 있으려니 ‘아! 저게 바로 우리 민요구나.’ 하는 감동이 절로 우러나왔다.명창의 소리를 듣는 동안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품을 팔던 유봉과 그의 딸 송화가 소리를 하며 소릿재를 넘어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에 한(恨)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화자의 어미가 소리꾼인 의붓아비를 만난 후 딸을 낳다 죽는다. 어미가 죽고 아들은 의붓아비 곁을 떠난다. 어른이 되어 소릿재를 찾은 그는 주막 여자에게서 소리꾼 아비가 잠든 딸의 눈에 청강수를 넣어서 멀게 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좋은 소리를 가꾸자면 소리를 지니는 사람 가슴에다 말 못할 한을 심어줘야 하는가 보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사람의 한은 그렇게 심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며,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거라고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만약 딸이 아비를 용서하지 못했다면 그건 원한이지 소리를 위한 한은 될 수 없을 거라며, 아마도 그 아비는 소리보다 딸이 당신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해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12잡가가 민중의 낮은 소리를 대변하며 외세에 시달려온 우리 민족을 위로해 주었듯이, 판소리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민요가 한에서 비롯되는 가락이다. 사설이 길다고 하여 ‘긴 잡가’로 불리는 열두 곡의 잡가는 ‘유산가, 제비가, 소춘향가, 십장가, 적벽가, 출인가, 선유가, 방물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 달거리’까지 이름만으로도 곡절 많은 인생 열두 고개의 진미가 한자리에 모인 느낌이다.이은자 명창이 경기민요를 시작한 것은 서른 즈음이었다. 결혼 직후, 경기민요를 배우기 위해 서울까지 새마을열차와 비행기를 타고 다녔다.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며 경기민요를 안 배우면 죽을 것 같다고 했다.경기민요 예능보유자이신 이춘희 선생님께 민요 창극을 배우며 경상도 사투리로 각색한 ‘이춘풍전’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 열정적으로 해냈던 창극은 ‘이춘풍전’ ‘미얄할미뎐’ ‘달구벌 효자원님’ ‘삼정골의 전설’ 네 작품이었다. 그중에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35호 효자 ‘강순항 정려각’ 을 토대로 각색한 ‘달구벌 효자원님’이 가장 기억이 남는 작품이다.열 살 무렵에 풍물놀이 명인이신 이정자 선생님을 만났다. 설장고, 오고무, 무용을 익히며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선생님을 따라 국악공연에 참여했다. 무용복을 마련하지 못한 명창에게 선생님이 옷을 한 벌 해주셨는데 그 감동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더라고 한다.- 발성연습을 어떻게 하셨어요?젊은 객기로 목을 아끼지 않고 무작정 내지르다 목을 다쳐 수술까지 했다. 소리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아픔이지만 한 번 목을 다치고 나면 소리가 예전 같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목이 아플 때는 쉬는 것보다 좋은 약이 없어서 푹 쉬며 소리가 다시 흘러나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과음 과식을 삼가고 충분한 수면에 더하여 입안을 항상 청결하게 하며, 소리를 하기 전에는 음식물 섭취도 삼간다. ㅅ의 발음에 쇳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한다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대통령상을 받으셨는데, 감회가 새로웠겠어요.나 이런 사람이라고, 상이 대신해서 말해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요.인정받는다는 건 오랜 세월을 소리에 묻혀 살아온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니 기쁘고말고. 고희를 수 년 앞둔 나이여서 이쯤 되면 이은자 명창에게도 노년에 대한 계획이 있을 법하다.- 노년을 어떻게 보내실지.나이가 들면 자신만의 전수관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논다는 생각으로 살고 싶다고 한다. 남은 바람이 있다면 경기민요 12잡가 중 몇 곡을 선정해서 ‘이은자 소리길’이라는 타이틀로 단독 공연을 하는 것인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소리 중심의 공연이 될 것이라고 한다.- 갑작스런 인터뷰로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셨을 텐데, 어떤 마음이세요?광대는 죽는 날까지 광대라고 한다. 광대는 제 속에 있는 열정의 끼를 죄다 뱉어내고 빈 껍질이 되어서 떠난다. 이은자 명창은 소리를 하는 동안 자기 속에 있는 광기를 끄집어내는 느낌이었다며 길을 걷다가도 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춘다고 한다. 소리로 전해지는 광대의 삶에 감사를 바친다.- 여러 인연들이 나를 키웠어요.故 안비취 선생님, 전숙희 선생님, 이춘희 선생님, 가야금 최금란 선생님, 가야금 병창 경주 故 장월중순 선생님, 故 임이조 선생님까지 여러 선생님을 모시며 알게 된 것은 명창을 만들어내기 위해 온 우주가 돕는다는 것이었다. 일평생 노래로 시조를 읊고 산 이은자 명창의 얘기를 들으며 민요는 들을수록 물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노랫가락에 실은 시가 민요로 환생하는 순간 소리는 살아 있는 물이 된다. 물이 되어 흐른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0-07

진보의 변천 만큼 사연 많고 몇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 겪은 향교

청송 진보는 우여곡절이 많은 묘한 곳이다. 진보현, 진보군으로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지속하다가 마지막에 청송군으로 편입되어 지금은 한적한 면 소재지로 남아있는 곳이다. 한때의 영화는 추억과 잔영이 남듯이 진보 곳곳의 문화유적이 그 옛날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우선 행정단위에 있는 국립 관학인 향교가 있다. 그 향교는 진보의 변천만큼이나 사연도 많아 몇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는다.백호서당도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어 1989년에 임하댐 상류 반변천 산기슭 위에 옮겨지었다.#. 진보는 어떤 곳인가청송 진보는 사면이 산으로 쌓여있는 분지형이라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의 축소판 같다. 아무리 번성했던 고을도 행정단위가 축소되어 관청이 옮겨가면 잔영만 남는다. 진보현으로 영화를 누렸지만 청송으로 편입되어 면으로 쪼그라졌다. 강물이 흐르면 그 주위는 퇴적물이 쌓여 비옥한 옥토가 되고 인근에 산이 있으면 땔감으로 밥을 짓고 난방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라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 전국을 9주5소경을 설치할 때 청송지역은 상주와 명주(강릉)에 분할 예속되어 있었고 757년(경덕왕 16년) 전국 주현의 대대적인 명칭변경 때 칠파하현은 진보현으로 되고 이때 진보현은 문소군으로 편제된다. 신라 말에 강성해진 지방호족의 연합체인 고려시대에 청송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은 선필과 홍술이다. 진보현의 촌주 홍술은 922년(태조 5년) 고려에 귀부했고, 왕건은 그를 문소군으로 파견해 의성부성 주장군으로 삼고 후백제를 방어하게 한다. 고려시대 지역 토성의 대표적 인물이 청송 심씨 심홍부와 진성(진보)이씨 이자수 등이 있다.조선시대는 청송군과 진보현 두 고을로 존속하다가 1418년(세종 즉위년) 진보현 속현 청부현은 소헌 왕후 심씨의 본향이라고 청부현과 진보현 두 고을 명칭 한자씩 따서 청보군으로 승격한다. 그러나 진보현 백성들이 관아가 멀어 불편한 점이 많다는 청원으로 송생현과 합쳐 청송군이 되고 1459년(세조 5년)에는 세조의 어머니 소헌 왕후 심씨를 기리기 위해 청송을 도호부로 승격하고 1423년(세종 5년) 현으로 독립한 진보현은 1474년(성종 5년) 고을 사람이 현감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폐현되어 청송도호부에 편입된다. 1478년(성종 9년)에 복구되어 이어오다 1895년(고종 32년) 2차 갑오개혁 때 효율적인 지방통치를 위해 23부제(府制) 실시할 때 진보현이 진보군으로 개편된다. 1914년(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전국 부, 군의 통폐합에 따라 진보군은 갈기갈기 찢겨 청송군에 편입되어 완전 소멸된다. 남면은 청송군 파천면 일부로 편입, 북면은 영양군의 남면, 영양면, 입압면의 일부로 편입, 동면은 영양군 석보면, 동면의 낙평리는 영덕군 지품면으로 흡수된다. 오늘날 진보는 상리면, 하리면, 서면을 보듬고 청송군 진보면으로 겨우 이름만 남았다.#. 청송서 진보 가는 길청송서 국도31번 타고 진보로 가는 길은 왼편에 맑게 흐르는 용전천을 끼고 가다 산길로 접어들면 길가에 왕평 이응호(1908~1940)의 ‘황성옛터’의 노래비가 소나무 숲에 서있다. 황성옛터는 한국인 최초의 작사, 작곡 가요이고 왕평은 1930년대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중심인물이었는데 공연장에서 연기하다 쓰러져 33살에 죽었다. 영천이 고향인데 아버지가 사는 이곳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 입구 산기슭에 묻혔다.진보 중심부 들어가는 완만한 능선에 진보 출신 소설가 김주영의 ‘객주문학관’이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으로 8월 25일부터 별도 해제시까지 휴관한다는 플래카드가 선명하게 붙어있다. 그 옆에는 ‘객주’의 소설가 김주영 제22회 만해 문예대상 수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만 바람에 휘날린다.협소한 청송읍 보다 넓은 평지의 진보는 소도시 같은 분위기다. 왕건 영정을 모시는 사당에 갔다. 주위의 큰 고목들이 진보의 녹슬지 않은 역사를 말해준다. 들어가는 출입문에는 사람 없고 왕거미 줄이 얼굴에 달갑지 않은 촉감으로 맞이한다. 건물 안에는 영정도 위패도 없었다. 왕건의 겉옷에 두르는 붉은 띠가 바람에 날려 이곳에 떨어진 것이 신령스럽다고 지었단다. 옆에는 인조 잔디 깔린 체육시설에 아래를 볼 수 있는 전망대 데크를 해놓았다. 아래는 영양에서 흘러온 반변천이 안동 임하댐으로 향하고 강 건너 광덕산 아래 진보향교와 광덕마을이 보이고 오른쪽 저 멀리는 검은 마음의 범죄자를 수감하는 이름도 유명한 청송교도소가 아스라하게 보인다. 녹색우 거진 산천에 교도소의 하얀 건물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저 속에 갇혀있는 분들이 저 하얀 건물같이 하얀 마음 되길 바란다. 강가에 움푹 파인 물가에 혼자서 낚싯대 드리운 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반변천을 가로지르는 긴 광덕교 건너자마자 왼편에 길게 이어진 뚝 길은 소도시 시골전원의 오솔길 마냥 낭만이 흐른다. 강변의 초가을 상큼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도 괜찮고 벚꽃 피는 봄이나 익어가는 가을날은 더욱 낭만일 것이다.우측마을 길 따라 구불구불 들어가면 길 왼편에 송만정(松巒亭)고택이 길손을 반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장과 창녕 화왕산 전투에서 뚜렷한 공을 세웠던 송만 권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863년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북부지방의 양식대로 건물이 온통 감쌌지만, 대청마루 2칸에 좌우에 방을 넣고 그 앞에 누를 한 칸씩 지은 대단한 낭만과 매력이 넘친다.#. 진보향교와 백호서당 그리고 급발진 차진보향교는 송만정에서 조금 더 오르면 마을 끝 산기슭에 있다. 시내 중심부에 있어야 할 향교가 외진 곳에 있으니 서원같이 느껴졌다. 대문에 진보향교 글씨의 먹물이 빛바랜 만큼이나 향교도 기능 잃고 있다. 진보향교는 1440년(태종 4년)에 창건했다고 여러 기록이 나오는데 1440년은 세종 23년이라 어느 하나가 오기다. 1694년(숙종 19년) 광덕산 기슭으로 1882년(고종 18년) 구읍으로 1886년(고종 23년) 현재의 위치로 세 번이나 옮겼던 것이다. 외삼문, 강학공간의 중심대는 명륜당과 동, 서재가 있고, 내삼문과 대성전이 남아있다. 대성전에는 제향의 공간이니 공자를 위시한 중국의 성현들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명륜당 앞 좌우에 동서재가 있는데 진보향교는 명륜당 뒤에 있어 특이하다. 명륜당에는 “충(忠)과 의(義)의 뜻을 새기다” 플래카드가 빛바랜 향교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하나 없는 향교에 온갖 풀벌레 우짖는 소리와 가느다란 바람 소리 뿐이다. 발아래 땅에는 수많은 개미가 소리 없이 열심히 가고 있었다.향교를 둘러보고 향교 앞에 있는 잘 손질해놓은 대문 없는 고택으로 들어갔다. 주인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덕광임업’회사를 경영하는 젊은 주인 권상희 대표였다. 집안의 고택을 구입했고 수리하여 고택체험 숙박으로 할 계획이란다. 고택은 이런 젊은이들이 많이 살아야 활기차고 생동감이 있다.다시 광덕마을로 나와 북쪽마을 오른쪽 기슭에 귀암 권덕조의 뜻을 기리는 정자에 갔다. 숙부인 충재 권벌에게 배웠고 아들이 송만 권준이다. 방치되어 퇴락할 때로 퇴락한 모습이다. 건물은 찌그러지고 풀들이 무성한데 후손들이 세운 송덕비는 선명했다.내려와 산 고개 넘자 세장마을이 나온다. 마을입구에서 좌회전하여 조그만 다리를 건너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정표에는 1.5km라고 새겨져 있다. 산 중턱 시멘트 길에 몇 개의 다리를 건너자 강(반변천) 언덕 위에 옮겨온 백호서당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강 아래를 보니 염소들과 거위들이 바위를 놀이터 삼아 한가롭게 놀고 있었다.서당 문은 열려 있고 풀은 무성하고 사람 하나 없는 서당에 올랐다. 힘 있고 품격 있게 잘 지었는데 원장도 유생도 없어진 빈 공간에 산새들만 구슬피 울고 세찬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 저 멀리는 진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백호서당은 숙종 때 유학자 존재 이휘일(1619~1672)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당시 청송 현감 조명협의 발의로 영남유림과 진보향중에서 1757년(영조 33년)에 건립한 것이다. 임하댐 수몰로 1989년 상류인 이곳에 옮겨온 것이다. 존재 이휘일의 어머니는 최초의 한글 음식요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이고, 아버지는 석계 이시명, 동생은 퇴계 학통을 적통으로 이어받은 갈암 이현일이다. 흐르는 강물과 백호서당을 뒤로하고 진보 시내 전통시장에서 소설 속의 ‘객주’를 생각하며 보부상들도 먹었을 소머리국밥을 맛있게 먹었다.청송, 진보를 답사하고 와서 일요일 오후에 핸드폰과 지갑을 잃어 버렸다. 지갑보다 전화번호와 사진자료 많이 있는 핸드폰이 문제였다. 핸드폰에 찍어왔던 신문연재 사진이 없어 난감했고, 더구나 월요일은 신문연재 마감 날이라 사진만 찍으러 청송으로 다시 갔다. 백호서당 사진 찍고 시동 걸고 출발하는데 차가 손살 같이 달린다. 브레이크를 꽉 눌렀는데 힘없이 쑥 들어가고 어디를 박고 멈춰야 했다. 오른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고 중간에 시멘트창고 건물 앞에는 목재 파레트가 쌓여있어 거기에 박았다. 차는 멈췄지만 심하게 찌그러졌다. 아직 신문에 보낼 사진을 찍으러 청송까지 가야했다. 마침 주인이 와서 상황을 보고 몇 번이나 천만다행이라고 하시면서 어머님과 밭일 하다가 평소 같으면 이 시간(오후 4시정도)에 오지 않는데 오늘은 어머님이 ‘야야 집에 가봐라” 하시어 왔단다. 외딴집 주인 권오찬님은 법 없이도 살 착한 분이고 고마울 따름이다. 자차보험 있어도 부담금 50만원과 차 수리 이틀 렌트비 20만원 주었다. 급발진은 현대차하고 하란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10-06

우리네 애환 품고 영일만을 바라보고 있는 낮은 산

산과 강, 바다를 두루 품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태백 구봉산에서 솟구친 낙동정맥이 청송 주왕산을 거쳐 남하하다가 동해안 쪽으로 뻗은 산의 흐름이 은은히 이어지고,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형산강이 녹두빛 강물을 뒤척이고 있으며, 밋밋하게 전개되던 동쪽 해안선이 크게 요동쳐 호랑이 꼬리의 지세를 형성하면서 영일만을 안고 있는 곳이 포항이다.산을 두고 얘기하자면,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리는 내연산과 학이 금세라도 큰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갈 듯한 비학산이 북쪽에 솟아 있고, 원효와 자장, 혜공 등 신라 고승들의 수행처인 운제산이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사이로 도음산, 천마산, 봉좌산, 형산 등이 펼쳐져 있으며, 이 흐름과 이어져 수도산, 탑산, 학산, 양학산 같은 낮은 산들이 도심에 들어와 있다. 산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고, 언덕배기 같은 도심의 작은 산에도 애환이 서려 있다. 포항 도심의 대표적인 산, 수도산과 탑산 또한 그렇다.□ 수도산, 포항사람들의 정서적 둥지포항 출신의 작가 손춘익의 대표작인 소년소설 ‘어린 떠돌이’는 6·25 전쟁 직후 서산 밑 가난한 동네에서 한 꼬마가 꿋꿋한 소년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주인공 점득이가 무시로 서산에 올라가 먼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이다.나는 그 옹달샘 곁에 오도카니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없이 넓은 바다에는 흰 돛단배가 서너 척 한가롭게 떠간다. 그러고 보니 그곳은 워낙 내 자리였다. 어느 날이고 틈만 나면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기쁘면 기쁜 대로 또 슬프면 슬픈 대로 나는 으레 그곳을 찾아 하염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한 마리 외로운 짐승처럼.서산은 해가 지는 서쪽의 산으로, 수도산의 다른 이름이다. 주인공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이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 올라가 먼 바다, 곧 영일만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를테면, 수도산은 한 마리 외로운 어린 짐승의 포근한 둥지인 셈이다. 소설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포항사람들이 수도산에 올라가 쪽빛 영일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수도산은 포항사람들의 정서적 둥지라 할 수 있으며, 작가는 가장 포항다운 원풍경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이처럼 수도산은 과거 포항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볼거리, 즐길거리가 빈약하던 시절, 수도산이나 송도 말고는 딱히 갈만한 곳이 없었기에 그렇다. 더욱이 수도산은 1967년 5월 25일 도시계획공원시설로 지정된 덕수공원을 품고 있으며, 조경·휴양·운동시설과 전망대 등이 곳곳에 설치돼 있어 송도 솔밭과 더불어 소풍의 단골장소이자 백일장, 사생대회가 수시로 열리던 곳이었다. ‘어린 떠돌이’의 주인공 같은 어린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가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산책로와 운동장소가 되었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은밀한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수도산 밑자락 철로, 현재 철길숲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으며 그 발자국마다 애틋한 사연이 묻혀 있다. 현충일 행사도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6·25전쟁 때 산화한 포항 출신 군경들의 넋을 추모하는 충혼탑이 덕수공원에 있는 까닭이다. 포항에 문화예술의 씨앗을 뿌린 재생 이명석 선생의 문화공덕비도 충혼탑 가까이에 있다.□ 수도산 명칭의 역사적 유래수도산에는 몇 개의 이름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지는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산이라고도 하는데, 용흥동 우미골에서 육거리 방향으로 연결되는 서산터널이 그런 연유로 붙여진 명칭이다. 수도산은 원래 백산(白山)이라 불렀는데,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한 모갈(茅葛)거사가 은둔하며 곡기를 끊고 순절한 후부터 모갈산이라 불렀다. 포항시가 1979년 11월 수도산에 모갈거사순절사적비를 조성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다. 모갈산이란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일제 당국이 1923년 11월 17일부터 1926년 3월 말까지 당시 숙원사업이던 상수도를 설치하면서 배수지(配水池)를 이곳에 건립했고, 그후로 수도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배수지는 돔 구조의 지붕에 육각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돼 있다. 1920년대 건축물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역사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배수지에는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수덕무강(水德无疆)’, 곧 ‘물의 덕은 크나커서 그 지경이 없다’는 뜻의 글씨가 배수지에 새겨져 있다. 이 범상치 않은 글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은 최근 펴낸 ‘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에서 당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그 주인공으로 추정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수도 시설이 설치되면서 ‘수덕무강’을 새겨넣곤 했는데, 그 글은 대체로 그 지역의 부윤이나 지사가 썼다고 한다. 하지만 포항이 동해안의 대표적인 상업무역항으로 급성장하면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포항을 방문한 사실을 고려할 때, 포항 배수지의 글씨는 총독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김 부국장의 견해다. 요컨대 ‘수덕무강’은 1920년대 포항 상황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탑산, 6·25전쟁 희생자 추념하는 탑과 시설 모여 있어용흥동에 있는 탑산은 수도산과 더불어 포항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왔다. 주변의 산길과 편안하게 이어지고 전망도 좋아 영일만 등 포항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탑산의 원래 이름은 죽림산(竹林山), 대나무숲이 우거졌다는 뜻이다. 산 아래에는 죽림사라는 고찰이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가 1809년(순조 9년)에 중창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포항시사’에는 봉황이 날아가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봉비산(鳳飛山), 다리를 구부리고 있는 말등과 같다 하여 복마산(伏馬山), 말이 달리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주마산(走馬山)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탑산이라는 명칭은 6·25전쟁 후에 세워진 탑에서 연유한다. 6·25전쟁 때 포항은 치열한 격전지였다.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였고, 전선의 절박함은 학도의용군이 처음 투입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44일간 공방전이 이어졌고, 포항 도심은 제일교회만 덩그러니 남은 채 폐허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고, 포항 곳곳에 전쟁 희생자를 추념하는 시설과 조형물이 조성돼 있는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산 밑자락에 위치한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뒤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포항지구 6·25전적비가 우뚝 다가선다. 1980년 2월 21일 건립, 제막된 이 전적비에는 포항지구 방어의 주력부대인 국군 제3사단을 기념하는 금속 조형물이 추상적으로 표현돼 있고, 전면에는 국군이 학도병의 어깨를 감싸는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포항지구 6·25전적비의 서쪽 방면, 산 정상을 바라보면 전몰학도 충혼탑이 서 있다. 포항 전투에서 산화한 학도병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57년 8월 11일 건립, 제막되었다. 탑의 높이는 8.8m로, 전면에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상상 속 영물인 기린상이 설치돼 있다.성격이 비슷한 두 개의 탑이 가까운 거리에 세워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몰학도 충혼탑은 한국 추상 조각의 선구자이자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김종영의 작품이고, 포항지구 6·25전적비는 김종영의 서울대 제자이자 구상 조각가로 이름이 높은 백문기의 작품이다. 사제지간이지만 예술관이 다른 두 작가의 작품이 탑산에 나란히 서 있는 배경은 지역 미술가인 박경숙이 밝혀낸 바 있다. 박경숙에 따르면, 1970년 후반 군부대에서는 김종영의 작품이 추상적이어서 전쟁의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탑을 없애고 다시 건립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구상 조각가로 명성을 떨치던 백문기에게 새 작품을 의뢰하게 되었다. 작품 제작을 수락한 백문기는 스승의 작품을 해체할 수는 없어서 군 당국과 상의 끝에 새 부지에 작품을 건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포항지구 6·25전적비 뒤편에 2009년 8월 11일 편지비가 조성되었다. 이 편지비는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을 지키던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생의 주머니에서 유품으로 발견된 편지를 옮겨 놓은 것이다.(상략)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허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략)인생의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숨진 한 학도병의 편지는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절절한 평화의 메시지로 다가온다.조선시대 풍수가인 이성지가 이 산을 둘러보고는 ‘구봉연실지국(九峰蓮實之局)’으로 천하의 명산이라 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이성지는 어링불, 그리고 흥해를 살린 회화나무 예언에도 등장하지만, 그의 존재는 어느 문헌에도 남아 있지 않아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이성지가 남겼다는 말과 예언은 풍수의 특성상 구전 설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수도산과 탑산을 찾는 발길은 예전만 못하다. 이제는 굳이 이 산에 가지 않더라도 갈 곳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산에 아로새겨진 사연을 알고 나면 관심과 애정을 갖지 않을 수 없고, 산의 명칭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모갈산과 죽림산이라는 명칭이 뚜렷한 근거를 갖고 오랫동안 존재했음에도 상수도 시설이 설치되고 탑이 건립되었다고 수도산, 탑산이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작명인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애환을 품고 영일만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저 낮은 산에게 예의와 정성을 다해 더 친숙한 우리의 벗으로 다가올 수 있기를 바란다. 사진/안성용김도형글/김도형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예담출판사 편집장 역임. 현)글로벌 해양수산 매거진 ‘THE OCEAN’편집위원, 현)독도도서관친구들 이사, 현)한국단백질소재연구조합 본부장.

2020-10-05

“평소처럼… 방역과 건강 살피며 슬기로운 집콕 추석을”

올해 추석은 코로나19 확산 이후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명절이다. 신종 감염병 출몰로 일상 풍경이 달라진 데 이어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 풍습마저 코로나19가 바꿔놓았다. 해마다 추석이면 일가친지들과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둘러앉았지만, 올해는 가족끼리도 가급적 만나지 말고 최대한 집에 머무르며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명절을 보내야만 한다.정부는 이번 추석을 가을철 코로나19 유행이냐 진정이냐를 결정할 분수령으로 본다.질병관리청 중앙방역대책본부는 최근 코로나 정례 브리핑을 통해 “이번 명절은 집에 머물러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추석 명절과 개천절 연휴 이후에 코로나19가 재차 확산하지 않도록 전국 단위의 이동을 줄이고, 고령의 부모님이나 친지 등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추석 연휴동안 이동 자제가 권고되면서 올해는 대부분의 가정이 ‘집콕 추석’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당장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포항뿐 아니라 지역 곳곳에서 매일같이 코로나19 확진자가 쏟아지고 있어 집집마다 이번 추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이 많다. 명절 연휴 동안 집에만 있으면 활동량이 급격히 줄어 생활패턴이 무너지기 쉽고 건강에 좋지 않은 습관이 생길까 봐 우려하는 이들도 많다. 전문가들은 집콕 명절이라고 평소와 달리 행동하기보단 오히려 ‘평소처럼’ 생활할 것을 권한다.□ 명절에도 평소처럼 식단 유지해야연휴기간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음식 유혹에 빠지기 쉽다. 여기다 주로 기름에 볶거나 튀겨서 만드는 명절 음식은 소리부터 냄새까지 오감을 자극한다.평소 식단 조절과 운동으로 꾸준히 건강을 관리했더라도 명절에는 생활패턴이 망가지기 쉽다. 기름지고 열량이 높은 명절 음식을 먹고 소화불량을 호소하는 이들도 급격히 늘어난다. 명절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 평소 실천하던 대로 꾸준함을 유지하는 게 핵심이다.당뇨를 앓고 있다면 명절 음식이 혈당 조절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과식을 피해야 한다.당뇨를 치료하는 데 있어 식사는 약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명절에도 현명하게 식단을 조절하려면 작은 그릇이나 접시에 음식을 덜어 먹는 노력이 필요하다. 떡이나 튀김, 한과처럼 탄수화물과 당류 함량이 높은 음식을 많이 섭취하면 혈당이 급격히 오를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당뇨 환자는 한 번 망가진 생체 리듬을 원래대로 회복하는 데 정상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당류 섭취와 질병 발생의 상관성을 비교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가공식품으로부터 당류를 하루 열량의 10% 이상 섭취한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당뇨병 발생 위험은 41%, 비만 39%, 고혈압은 66% 높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가공식품을 통한 당류 섭취량을 하루 총 섭취 열량의 10% 이내로 낮출 것을 권고한다.하루에 총 2천㎉를 섭취하는 성인의 경우 200㎉를 당으로 섭취하면 된다. 이를 환산하면 50g 정도인데 주스 한두 병만 마셔도 권고량을 훌쩍 넘는다.실제 당뇨를 치료하는 의사들은 코로나19 유행 이후 환자들이 혈당 관리에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반면, 식사요법만으로도 약의 용량을 줄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건강한 추석 명절을 보내기 위해서는 당뇨와 같은 만성질환의 유무와 상관없이 음식을 적당히 규칙적으로 골고루 먹는 것이 중요하다.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식사만 해도 혈당 관리에 도움이 된다. 제시간에 적절한 양의 영양분을 섭취해야 정상 혈당을 유지할 수 있다.식약처 관계자는 “연휴에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활동량은 줄어드는 반면 명절 음식은 열량이 높아 체중 증가를 주의해야 한다”며 “음식을 먹을 때 개인 접시에 조금씩 덜어 먹고, 식사 시간은 20∼30분 정도로 천천히 씹어 먹으면 포만감을 느껴 과식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누워서 스마트폰만? 척추와 위장 부담↑집에만 있다가 보면 여간 좀이 쑤시는 게 아니다.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하면서 자연스레 엎드리거나 누운 자세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엎드린 자세는 엉덩이와 등뼈를 위로 솟게 해 척추에 부담을 준다. 너무 오래 누워있는 것 또한 척추에 부담을 줘 척추관협착증과 같은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에스포항병원 신경외과 권흠대 병원장은 “긴 연휴에 TV나 휴대전화를 보면서 엎드리거나 누운 채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있다 보면 목과 어깨가 뻣뻣해지므로 자주 스트레칭을 해야 한다”면서 “엎드리는 것보단 바로 누운 자세가 나은 데 이때 옆으로 눕는 게 더 편하다면 무릎 사이에 베개나 쿠션을 끼워 척추 건강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특히 식사 후에는 바로 눕지 않는 것이 좋다. 보통 음식물이 위에서 소장으로 이동하기까지 2시간 정도가 걸린다. 밥을 먹고 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대로 눕게 되면, 위산을 포함해 음식물이 식도를 타고 거꾸로 올라와 ‘역류성 식도염’을 유발한다. 과식이나 과음 또한 위산 분비를 증가시켜 역류성 식도염의 원인이 된다. 식사 후에 바로 눕는 것도 좋지 않지만, 반대로 격렬한 운동이나 움직임도 소화를 방해한다. 설거지나 집안일과 같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30분 정도 서서 움직이거나 가벼운 산책 정도가 알맞다.코로나19로 외출을 자제해야 하는 분위기이지만 의료계는 햇볕을 자주 쬐지 못하면 뼈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바깥 활동 자제가 한편으론 ‘햇볕 비타민’(sunshine vitamin)이라 불리는 비타민D의 결핍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10∼15분 정도만 햇볕을 쬐어도 몸에 필요한 비타민D를 충분히 얻을 수 있는데 요즘에는 이조차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비타민D 결핍 환자는 심지어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건강보험공단심사평가원에 따르면 비타민D 결핍 환자는 2019년 기준 15만9천424명으로 2015년(4만9천852명)과 비교해 3.2배 증가했다. 비타민D는 뼈와 관절 골밀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영양소로, 부족하면 골다공증과 같은 근골격계 질환으로 나타난다. 중년 여성의 경우 폐경 이후 급격하게 골밀도가 줄어들면서 골다공증 발생 가능성이 더 커진다. 실제로 지난해 비타민D 결핍 환자 중에 여성이 12만5천610명에 달해 남성보다 4배 가까이 많았다.포항시 북구보건소 보건정책과 관계자는 “코로나19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려면 방역과 함께 자신의 건강 상태를 섬세하게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감염병 확산으로 외출이 어려운 시기에는 집안에서 제자리 걷기를 하면 활동량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정기자 mjkim@kbmaeil.com

2020-09-28

집에서 떠나는 세계 추석여행

올해 추석 분위기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무색하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일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추석 때쯤이면 상황이 호전되어 고향에서 가족친지를 만나고 차례를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소망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감염증이 확산되었다. 정부에서는 추석 연휴 동안 지역 간 이동을 자제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지혜롭게 이겨내자고 국민들에게 권하고 있다.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연휴지만, 집에서라도 세계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마음만은 뜻 깊고 행복한 명절이 되도록, 다른 나라의 추석을 살펴보며 힘든 일상을 잠시나마 잊어보자.우리나라의 추석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다른 말로 한가위라고도 부른다. ‘한’이라는 말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이다. 즉 8월 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이다. 한가위의 기원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잘 나타나 있다. ‘가위’라는 말은 신라 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길쌈’이란 실을 짜는 일을 말한다. 신라 유리왕 때 한가위 한 달 전에 베 짜는 여자들이 궁궐에 모여 두 편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베를 짜서 한 달 뒤인 한가윗날 그동안 베를 짠 양을 가지고 진편이 이긴 편에게 잔치와 춤으로 갚은 것에서 ‘가배’ 라는 말이 나왔는데 후에 ‘가위’라는 말로 변했다. 또 한문으로는 ‘가배’라고 한다. 또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회소(會蘇會蘇)라 하여 그 음조가 슬프고 아름다웠으므로 뒷날 사람이 그 소리로 인하여 노래를 지어 이름을 회소곡(會蘇曲)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독일의 옥토버페스트독일의 추석은 9월 말에서 10월 초에 동네 축제 형식으로 농사에 대해 감사하는 행사가 열린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뮌헨에서는 매년 9월 셋째 주 토요일 정오부터 10월 첫째 일요일까지 16일간 맥주 축제를 개최한다. 1810년 10월 바이에른공국 왕국의 초대 왕인 루드비히 1세의 결혼에 맞추어 5일간 음악제를 곁들인 축제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883년 뮌헨의 6대 메이저 맥주회사가 축제를 후원하면서 4월 축제와 함께 독일을 대표하는 국민 축제로 발전하였다.러시아의 성 드미트리토요일러시아의 추석은 양력 11월 8일 직전의 토요일이다. 러시아에서도 가까운 친척들끼리 모여 햇곡식과 햇과일로 만든 음식을 함께 나누며 조상에게 성묘를 지낸다. 주요 의식은 햇곡식으로 빚은 보드카를 한 잔씩 돌리며, 조상의 공적을 회상하는 것이다. 묘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며, 새들에게 햇곡식을 모이로 던져주는 풍습이 있다.1380년 돈강 유역에서 몽골군을 대파한 드미트리 돈스크공이 11월 8일 전사자를 추모하는 모임을 가진데서 유래했다. 러시아 정교회가 이날을 ‘성드미트리 날’로 정해 전사자와 죽은 조상을 추모하기 시작했다. 그 후 추수감사제의 성격이 더해지면서 점차 민족 명절로 자리를 잡았다. 이 풍습은 소련 정권이 들어서면서 퇴색되었으나, 요즘에는 교인들이나 농촌 노인층에 의해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미국의 추수 감사절미국의 추석은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로 풍성한 수확을 신에게 감사하며 가족과 화목한 시간을 보낸다. 미국인들은 추석날 칠면조 구이와 옥수수 빵, 감자, 호박파이 등을 먹는다. 추수감사절 먹는 음식은 뜨겁고 양이 넉넉해야 한다고 믿고 이를 따른다. 보통의 가정에서 가족들은 이날 3번 이상 식사를 하고, 접시를 깨끗이 비우는 것이 예의로 지켜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미국에서도 추수감사절은 연중 가장 풍족한 시절이고 감사하는 날이라고 믿고 있다. 추수 감사절의 유래는 17세기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당시 미국에 정착한 영국 청교도들이 혹독한 겨울에 적응하지 못하고 굶주리다,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듬해에 가을 추수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이들은 첫 수확을 기념하고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추수 감사절을 지정하게 되었다. 또한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정착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신에게 하기 시작하면서 유래되었다.북한의 추석북한 명절은 정권과 사회주의 발전에 의미가 있는 날을 기념하는 ‘국가명절’과 해마다 민족적으로 즐기는 ‘민속명절’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명절은 민속명절에 속한다. 국가명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북한에서는 1988년에 이르러서야 음력설, 추석 등이 민속명절로 지정됐다. 추석에 3일씩 쉬는 남한과는 달리 북한 주민들은 추석 당일에만 하루 쉴 수 있다. 북한에도 송편이 있지만, ‘노치’가 송편 못지않게 인기 있다. 노치는 찹쌀·찰기장·차조 등의 가루에 끓는 물을 넣어가며 반죽한 것을 엿기름가루에 넣고 삭힌 다음 기름을 둘러 지져 먹는 떡이다. 주로 평양 지역에서 먹는 노치는 향기롭고 달콤하면서도 식감은 쫄깃쫄깃하다는 특징이 있다. 삭힌 음식이기 때문에 추석 이후에도 겨우내 저장해두고 먹을 수 있다. 송편의 모양이나 재료 등은 남한과 다르지 않지만, 북한의 송편은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로 만든다. 밤알 크기의 찹쌀떡에 밤 고물을 솔솔 묻힌 ‘밤단자’도 먹는다.일본의 오봉절일본의 추석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개 양력 8월 15일을 전후로 4일간 지낸다. 13, 14일은 ‘조상을 맞이하는 날’이며, 15, 16일은 ‘조상을 보내는 날’이다. 각 가정에서는 조상을 맞이하기 위해 불단 등을 청소하기도 한다. 오봉은 공식적인 휴일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봉야스미’라 불리는 긴 휴일을 즐긴다. 오봉에는 조상들이 길을 잘 찾아들 수 있도록 불(무카에비)을 피우고, 집에 임시 제단인 ‘본다나’를 마련해 예를 올리거나 절을 찾아 공양을 바친다. 또한 지역 공동체가 함께하는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전통의상인 유카타를 입고 사람들이 원을 만들어 추는 춤인 ‘봉오도리’를 춘다. 오봉 기간에 달았던 등롱과 공양물을 물에 흘려보내는 행사를 도로나가시라고 한다. 저승으로 돌아가는 조상의 영혼을 배웅하는 의미가 있다.중국의 중추절중국의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3대 명절 중 하나이지만, 한국의 추석만큼 큰 명절로 여기지는 않는다. 중추절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긴 기간 동안 쉬는 우리의 설날과 같은 춘절 (춘지)이 중국 최대의 명절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추절은 공휴일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둥글다” 라는 뜻으로 ‘중추절’ 또는 ‘중치우지에’라고 지칭한다. 달도 둥글고, 그날 주로 먹는 음식인 월병(위에빙)도 둥글며, 모인 가족들도 둥글게 둘러앉아 가족의 단결과 화목, 행복을 기원하고 가족 친지들 간에 선물을 주고받기도 한다. 중추절에 하는 대표적인 놀이로 달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소원을 비는 달맞이, 토끼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 장난감 인형놀이 투얼예 등이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옛 풍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중추절이 되면 이웃들과 함께 월병을 나눠 먹고 둥근 달을 보며 화합을 기원한다.프랑스의 투생프랑스의 추석은 11월 1일이다. ‘투생’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가을 명절이 바로 우리의 추석 같은 날이다. 1802년부터 프랑스에서는 이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으며, 이날은 프랑스에서 알려진 성인 뿐 아니라 Toussaint이라는 이름처럼 알려지지 않은 모든 성인들까지 기념하기 위한 프랑스의 종교적 축일이다. 가톨릭 축일인 ‘모든 성인의 축일’이기도 하다. 이날 프랑스인들은 고인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일을 꼭 한다. 우리가 성묘를 가는 것과 비슷하다. 파리의 페르 라셰즈, 몽마르트, 몽파르나스 등의 유명 인사들의 묘, 이름 없는 묘 등에는 꽃다발이 가득 쌓인다. 투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할로윈’이 됐다.필리핀의 만성절필리핀의 추석은 양력 11월 1일이다. 우리나라의 추석과 비슷하게 만성절 전후인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이날은 고향을 방문하여 가족 묘지에 모여 조상들의 영혼을 밤새 이야기하며 음식과 놀이를 즐기는 날이다.만성절에 성묘를 할 때는 반드시 꽃을 가져가 장식을 하고, 찹쌀로 만든 케이크와 바나나 잎에 싼 찹쌀밥을 먹는 풍습이 있다.정미영 수필가※참고문헌: ‘세계의 축제·기념일 백과’ (도서출판 다빈치)※우리나라 추석 소개 다음 국가부터는 가나다 순

2020-09-28

바다와 육지의 정수가 만나는 곳… 해양도시 꿈 무르익어

포항을 포항답게 하는 특징적인 환경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영일만을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영일만의 물줄기가 지나가며 만들어진 동빈내항을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영일만과 동빈내항은 지역을 이루는 한 부분임을 넘어 지역의 본질을 규정하는 어떤 ‘틀’과 같다. 그리고 이 틀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이 독특함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영일만 일대는 맑고 깊고도 차가운 바닷물을 육지 깊숙이 머금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바다와 육지의 정수가 가장 긴밀하게 만나는 곳으로, 그로부터 모든 신비와 독특함이 나타나고 있다.바다와 육지의 교류라 하면 대개 서해안처럼 얕은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온 리아스식 해안이나 남해안처럼 여러 개의 섬과 만이 흩어져 있는 해안을 떠올리게 된다. 그에 비해 동해안은 단조로운 해안선, 급격히 깊어지는 수심으로 인해 바다와 육지가 선명하게 나뉘는 곳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영일만은 서해안, 남해안은 물론 다른 동해안과도 사뭇 다르다. 바다와 육지가 끊임없이 서로 교류하고 합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 어떤 곳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다다운 바다’·‘육지다운 육지’가 공존하는 곳단조롭게 내려오던 동해안이 영일만에 이르러 단 한 번 크게 요동친다. 바다는 묵직하게 육지를 향해 돌진하고, 육지는 바다를 찌르고 나아간다. 우리가 보는 영일만의 모습이다. 그 형태도 심상치 않다. 바다는 거대한 바위 같은 모양으로 육지로 들어와 있고, 육지는 오히려 굽이치는 파도의 물결 같은 모습으로 바다로 몰아치고 있다. 바다와 육지가 서로를 탐한 나머지 서로의 모습마저 흉내 내면서 태극의 음과 양처럼 서로 교합하기를 애쓰고 있는 형상이 아닐까.바다와 육지가 교류하되 그 경계를 흐리면서 구분 없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격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며 서로를 향해 들어가는 모습이다. 그래서 가장 ‘바다다운 바다’와 가장 ‘육지다운 육지’가 공존하고, 바다의 정수와 육지의 정수가 제대로 교감하는 장소인 것이다. 영일만은 육지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바다 특유의 차가움과 깊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호미곶도 바다를 향해 한껏 나아가 있지만 거친 암반과 구릉이라는 육지의 본질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는다. 바다와 육지가 그 성깔은 한 치도 포기하지 않으며 서로를 향한 맹렬한 열정을 보이는 곳, 바로 영일만인 것이다. 이렇게 바다와 육지의 교류라는 지역의 특성은 태초부터 형성돼 온 틀에서부터 너무도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설화와 전설이 암시하는 것‘바다와 육지의 교류’, 그리고 ‘서로를 향해 나아감’을 새기고 있는 태초의 틀은 지역의 설화와 전설에서도 은연중에 드러난다. 영일만의 고래 이야기, 연오랑세오녀 이야기가 그러하다. 영일만 주변의 고대인들은 고래를 소나 말 같이 친근하게 여기고 다루면서 이를 통해 문명을 형성해갔고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시에 수백 마리의 고래가 뛰노는 장관이 영일만 일대에서 펼쳐진 기록이 남아 있다. 저 깊고도 차가운 대양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고래가 북태평양을 돌고 돌아 영일만에서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그들은 차갑고 푸른 바다이면서도 육지로 둘러싸인 영일만을 포근한 요람처럼 느껴 여기에서 새끼를 낳았다. 영일만은 수많은 북태평양 고래들의 고향 마을인 것이다. 이 고래라는 동물은 또 어떠한가. 심해와 수면을 넘나드는 바다의 주연과 같은 존재이지만, 또한 끊임없이 육지를 갈망하는 존재이다.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육지 동물처럼 공기 중에서 숨을 내쉰다. 사람처럼 의사소통을 하는가 하면, 육지와 사람을 좋아해 일부러 연안을 찾아오기도 한다. 바다의 존재이면서도 육지의 삶을 늘 동경하는 고래는 그래서 영일만 그 자체인 것이다.연오랑세오녀 설화도 ‘육지와 바다의 교류’라는 차원에서 읽을 때,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이 고대의 남녀는 당대 육지문명의 정수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육지문명의 절정인 철기문화를 구현하고 있던 고대의 창조계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육지의 안온한 삶에 머무르길 원치 않았다.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는 해와 달을 보며 바다를 소망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바다로 나아가 바다와 합일된 해양문명의 씨앗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들이 바다로 나아갈 때 육지의 한 부분인 큰 돌을 타고 갔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바다로 나아가면서도 돌과 철로 대표되는 육지문명의 정수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육지와 바다의 결합이라는 태초의 틀이 의인화된 결과이고, 영일만이 어떤 곳인가를 알려주는 상징적 근거가 된다.육지를 갈망하는 바다의 정수 고래, 그리고 육지문명의 정수이면서 해 뜨는 바다를 소망한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는 이처럼 연속된 암시를 통해 영일만이 어떠한 곳인지를 설명해준다. 그리하여 오늘날 여기 자리 잡은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제철, 바다와 육지의 교류라는 태초의 틀에 부합하는 산업우리 민족이 파도가 넘실대는 대양보다는 안정적인 내륙을, 해안보다는 중심부를 선호하는 역사를 선택하면서 어느덧 고래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연오랑세오녀도 바다를 갈망한 고대인이 아닌, 다른 육지문명을 개척한 선구자로 해석되었다. 우리에게 바다는 교류와 합일의 대상이 아닌, 어두운 안개가 드리워져 언제 외세가 침략해올지 모르는, 무서운 경계가 된 것이다. 우리는 바다를 잃었고, 바다를 두려워하는 내륙인에 머물러야 했다.다시 현실로 와서 오늘날의 포항과 영일만을 바라본다. 바다와 교류한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만, 태초부터 형성된 틀은 그렇게 쉽사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금 바다와 교류하며 나아가는 움직임이 영일만에서 시작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50년 전 시작돼 산업화를 이끌어 온 제철산업이 그러한 움직임의 상징이다. 앞선 철기문명을 이웃 나라들과 나눈다는 점에서 연오랑세오녀의 재림에 비견되기도 하지만, 제철은 바다와 육지의 교류라는 태초의 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산업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있다. 가장 육지다운 산물인 철광과 가장 바다다운 영일만 심연이 만나서 빚어진 산업이기 때문이다. 부두에 가득 쌓인 철광석은 영일만 심연의 물로 정제돼 단단하고 빛나는 철제로 완성돼 간다. 그리고는 해 뜨는 바닷길을 따라 나아가 세계 곳곳의 철기문명으로 다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포항, 해양도시에 걸맞은 입지 요건 갖춰이제는 지역을 만들어가는 정책도 태초부터 주어진 틀에 조금씩 부응하는 것 같다. 아직은 시작 단계에 불과하지만, 다시금 시민들에게 바다를 향한 소망을 조금씩 불어넣고 있다. 다섯 개의 섬이 모두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도심부를 어루만지는 바닷길이 살아나면서 송도도 그 명칭의 의미를 되찾았다. 빈집으로 내버려두고 떠나야 했던 송도와 동빈내항에 햇빛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마을이 가장 어두운 곳이 되어야 했던 도시개발의 아이러니가 조금씩 극복되고 있다. 바다와 연결된 하천이 돌아오는 것도 좋은 조짐이다. 콘크리트 아래 어디쯤 지나가던 과거의 하천들이 이제 다시 우리 삶터 속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재작년 해양수산부 지원으로 포항을 포함한 우리나라 유수의 해양도시를 비교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주제는 어느 도시가 보다 바다와 잘 결합돼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바다와 잘 결합된 도시는 경관, 활용도 등 여러 면에서 유리하고 또 오늘날의 도시재생에서도 내륙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을 가진다. 도시와 면한 바닷가는 과거와 같이 산업, 물류 기능만이 아닌 다양한 시너지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연구를 시작하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심정적으로 느껴 온 포항의 모습이 차가운 숫자로 표현될 객관적 결과에서도 진실로 나타날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감동적(?)이었다. 포항과 영일만은 바다와 도시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가진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도심부 깊이 들어온 영일만, 그 자체로 인해 포항은 해양도시에 걸맞은 입지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바다와 육지의 교류라는 태초의 틀, 그것이 추상적 상징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우리 손에 놓인 해양도시의 미래송도 재생사업과 함께 도심부 해안의 큰 변화가 예상된다. 송도와 동빈내항은 변두리가 아니다. 바다와 육지를 포함한 영일만권 전체의 중심지이다. 해양도시로의 재생과 발전을 위한 명운이 걸린 곳이 아닐 수 없다. 차분히 다진 계획과 성실한 추진, 시민·전문가의 활발한 참여로 진행돼 포항이 해양도시로 전환하는 데 큰 획이 그려졌으면 한다. 모든 사업에서 선행돼야 할 것은 소명의식이다.그리고 지역의 틀에 나타난 상징적 의미에 대한 공유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인식이 없다면 불협화음 속에 방황하다 현실 안주에 그치는 개발사업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바다와 육지의 정수가 가장 강렬하게 맞닿고 있는 곳, 그에 맞는 인식과 문화를 키워갈 때 해양도시의 미래는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사진/안성용김주일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글/김주일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서울대 도시계획학 박사, 건축사,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서울의 도시구조와 기능체계’ 등 저서와 논문 다수.

2020-09-28

집콕 문화 생활 즐겨 봐요

코로나19가 삶의 방식을 대부분 바꿔놓았다. 책은 도서관에서 읽어보고 샀고, 영화는 극장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 제대로 된 감동을 받았었다. 그러던 것이 도서관도 영화관도 가는 일이 힘들어 책을 사는 일도 영화 직관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런 우리에게 지상파와 케이블, EBS, 넷플릭스 같은 채널에서 추석 특선 영화를 편성했다. 문체부에서는 ‘집콕문화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문화예술을 온라인으로 즐기도록 중계하고 있다. 한국고전영화 357편을 지난 28일부터 볼 수 있게 올려 놓고 팬들을 기다린다. 그 외에도 사서가 추천해주는 도서관과 어린이 프로그램부터 다양한 정보가 들어 있으니 한 번씩 클릭해서 서핑해봐도 좋을 것이다.△‘야구소녀’(최윤태 감독)문체부 홈페이지에서 여러 분야의 정보를 뒤지다 영화 ‘야구소녀’에 대한 다양한 자료도 포스팅되어 있어 반가웠다.한국영상자료원에 영화의 소품이 기증된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다. 관중 없는 올해 야구장, 안방에서만 야구를 즐겨야 한다. 이런 내게 야구 영화는 반가움 그 자체이다. 영화에 사용된 모자, 글러브, 스피드건 같은 소품과 영화 찍을 때 사용한 촬영 슬레이트와 주인공 수인(이주영) 선수의 개인 기록표와 감독의 메모까지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최초의 여자 야구 선수였던 안향미 선수는 등번호가 1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번째라는 의미로 수인의 등번호를 2번으로 하려 했으나 그걸 누가 알기나 할까 싶어 감독은 아내의 생일인 29번을 주인공의 등번호로 낙점했다. 감독 역시 운동할 때 운동복에 29번을 새겨넣었다니 아내 사랑이 깊은 사람이다. 이런 영화의 소소한 부분까지 알려주니 야구소녀를 보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했다.△‘기생충’(봉준호 감독)tvN은 10월 3일 ‘기생충’을 최초로 TV에서 방영한다. “악인이 없는데 비극이고, 광대가 없는데 희극이다.”라고 봉준호 감독은 명언을 남겼다. 어렵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심오한 말인데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독의 저 말에 수긍이 가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은 영화여서 봉 감독은 영화 기생충으로 2만5천762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우리나라 돈으로 얼마일까? 바로 3천억 원이 넘는다. 이에 비해 영화 속 주인공 송강호의 가족 네 명은 모두 백수이다. 반지하(세계에서 우리나라만 존재한다.)에 살면서 모두 직업이 없다는 게 참 아이러니다. 가난한 데는 이유가 있다지만 가난이 어디 개인만의 잘못이던가. 가난은 개인이 열심히 해서 벗어나기엔 늘 역부족이다. 부자 또한 자수성가할 때 비빌 언덕이 있었을 것이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집이었거나 눈떠보니 부자 할아버지의 손자였을 뿐이다. 감독의 연출도 뛰어났고, 배우들 모두의 연기 또한 좋았다. 올 2월, 우리 모두는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를 지켜보았다. 봉준호 감독이 한국말로 수상소감을 이야기하는 것을 번역 없이 들으며 한국인인 게 자랑스러웠다.봉준호라는 이름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고, 세계인들이 짜파구리를 끓이는 진풍경이 유튜브에 떠돌았다. 2월 한 달은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이었다. 아직 직관 못 한 분들은 추석 연휴 끝부분인 개천절에 감동의 물결에 동참하길 바란다.△‘세상을 바꾼 변호인’(미미레더 감독)미국 진보 진영의 아이콘이자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9월18일(현지시간) 워싱턴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녀는 길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새롭게 길을 내야 하니 일생 전체가 고난이고 넘어야 할 산이었다. 1956년 500명의 입학생 중 9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하버드 법대에 입학하였다. (당시는 하버드 법대 학장이 “남자 자리를 차지한” 것에 대해 여학생들을 나무랐던 시절이었다) 이후 컬럼비아 법대로 편입하여 또다시 수석 졸업을 하였으나, 뉴욕의 어느 법률 사무소에서도 여성을 고용하지 않았다. 직장을 구할 수 없었던 긴즈버그는 가르치는 직업을 선택하였고, 컬럼비아 법대의 첫 번째 종신직 여교수가 되었다. 1993년 미 대법관 임명 이후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였으며 최근 미 대법원이 보수 성향으로 기울자 더더욱 자주, 명확히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무엇보다 그는 법률가로서 미국 역사상 큰 업적을 남겼다. 1970년대 시민자유연맹 활동 시절에는 성차별적인 법률 개정과 임신 여성의 권리 옹호에 집중하였다. 1975년에는 아내를 잃은 남편들도 남편을 잃은 아내가 받는 동일한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변론하며, 남성들에게도 아이를 돌볼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임신 한 여성에게도 실업자 혜택을 제공할 것과 여성의 재생산권리 옹호에 앞장섰다. 이 시기에 긴즈버그와 동료들은 미 대법원에 6번의 소송을 제기하여 5번의 승소를 끌어냈다. 대법관 임명 이후 긴즈버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판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버지니아군사학교에 여학생 입학을 허가하도록 한 것이다. 판결문에서 그는 “여성은 개인의 재능과 역량에 따라 사회에 참여하고 이바지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연방대법관 중에 여성이 몇 명이어야 하냐는 질문에 그녀는 9명 전원이라고 했다. 전원이 남자일 때는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고 말이다. 영화는 그녀의 이런 투쟁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았다. 그녀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골랐다.△‘봉오동 전투’(원신연 감독)‘차이 나는 클라스’ 169회 8월 11일 방송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의를 돌려보고 영화를 보면 우리 독립군들이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어떻게 버티며 일궈낸 승리인지 가슴에 와닿을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신주백 소장의 강의가 아주 특별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있었던 전투이다. 실제 고증에 충실하게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봉오동 전투의 중요한 전략이 매복과 유인이었다고 한다. 이장하역의 류준열은 영화 내내 뛰어다니고 있다. 이 전투는 새벽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루에 일어났던 일이다. 몇 날에 걸쳐서 치러진 거겠지 했던 내 예상을 강사님이 확 깨주었다.전략이 뛰어난 독립군이 일본군과 첫 번째 싸움에서 거둔 값진 승리였다. 중국 패키지여행 코스에 백두산, 청산리, 봉오동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봉오동은 큰 골짜기여서 조선인들이 물을 따라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독립군들이 그리로 모였기에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이흥수의 신민단이 모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홍범도가 전략 전술을 짜서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우리가 이분의 이름보다 김좌진 장군의 이름만 기억하는 이유는 그분이 소련에 정착했기 때문이다.소개된 영화 외에도 MBC에서는 ‘스윙키즈’, ‘감쪽같은 그녀’, ‘천문’을 준비했고 EBS에서는 ‘명량’, 케이블에서는 ‘퍼팩트 맨’, ‘정직한 후보’를 볼 수 있다. 넷플릭스에서는 ‘오만과 편견’, ‘센스 앤 센서빌리티’, ‘작은 아씨들’(2020년판)을 개봉했다. 새로 극장에 걸리는 영화로는 ‘검객’, ‘디바’, ‘국제수사’,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 ‘돌멩이’, ‘담보’ 같은 한국 영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김순희 수필가

2020-09-28

정성 담은 건강 ‘문경 농·특산물’로 풍성한 한가위 즐겨요

추석 명절을 앞두고 면역력도 높이고, 지역 경제 회복에도 힘을 보태는 ‘문경 농·특산물 추석 명절선물 동행세일’이 30일까지 이어진다.농·특산물 ‘추석 명절선물 동행세일’은 9월 한 달 동안 문경새재 농특산물직판장과 중부내륙고속도로 상하행선 농·특산물직판장, 인터넷쇼핑몰 ‘문경사랑 새재장터’ 등 4곳에서 동시에 진행되며, 사과, 오미자, 사과칩, 오미자청, 버섯 등 추석 명절선물에 적합한 46개 품목의 우수한 문경시 농·특산물을 기존 판매가보다 7%~22% 할인 판매한다.문경시는 이번 동행세일 행사와 함께 추석명절 문경시 농·특산물 이용을 당부하는 서한문이 실린 홍보책자를 9월 1일 기업체, 문경시 향우회 등 2천500여 곳에 발송했으며, 문경시 농·특산물 홍보 네이버밴드 ‘문경사랑 새재장터’를 통해서도 문경시의 우수한 농·특산물과 할인 행사 정보를 홍보하고 있다.믿고 안심할 수 있는 먹거리, 백두대간 청정지역에서 정성껏 생산된 문경의 건강한 맛과 매력을 소개한다.◇ 문경시 공식 팬클럽 ‘문경사랑 새재장터 밴드’문경시는 코로나19로 어려운 지역사회에 문경의 농·특산물 판매 촉진과 체험 관광지, 축제 홍보를 위한 문경시 공식 팬클럽 ‘문경사랑 새재장터’ 네이버밴드를 개설했다. SNS를 통해 지역 농·특산물 접근성을 높여 판로를 넓히고, 대도시 등 전국의 구매력이 높은 소비자를 확보해 맞춤형 지역 농·특산물 판매와 청정문경의 힐링, 체험 관광자원을 특색 있게 홍보해 관광객까지 유치한다는 전략이다.밴드에 소개되는 우수 농·특산물은 기존의 문경 농·특산물 온라인쇼핑몰 ‘새재장터’와 연계해 운영한다. 현재 새재장터에 입점한 업체는 108곳이며, 오미자청·표고버섯·쌀·산나물 등 191개의 다양한 품목을 판매하고 있다.입점을 원하는 업체와 농가에서는 온라인쇼핑몰 ‘새재장터’를 통해 입점하면 되고 자세한 사항은 문경시농특산물직판장에 문의하면 된다. 밴드 가입은 전 국민 누구나 가능하며 네이버밴드에서 ‘새재장터’를 검색해 가입 신청하면 된다.시는 7월 밴드 개설 후 2개월 가량 운영한 결과 회원 수 3천명이 넘어섰으며, 2021년까지 1만 명까지 회원을 유치해 구매력을 높여간다는 계획이다. 또한 농산물홍보, 관광, 축제 등 관련 부서 공무원 등 27명으로 구성된 T/F팀을 구성하고 매주 회의를 통해 홍보 및 판매전략 아이디어 발굴하고 있다.◇ 호흡기에 탁월한 다섯 가지 맛 붉은 보석 ‘문경오미자’조선 시대 최고 장수왕인 영조 대왕이 즐겨 마셨던 오미자는 시고, 달고, 맵고, 쓰고, 짠 다섯 가지 맛을 갖고 있다.남한에서 가장 긴 백두대간 구간을 가진 문경은 1993년 백두대간에 자생하고 있던 야생 오미자를 시험적으로 재배를 시작했다.이후 꾸준히 재배면적을 증가시키면서 2006년 동로면 일원이 국내 유일의 오미자 산업특구로 지정됐다.한국식품연구원과 안전성평가연구소의 연구에서 오미자는 세포 독성, 세포생존율, 항염증, 대식세포 백혈구 수치 등에서 우수한 호흡기 효능이 입증 됐다. 또한 면역기능 활성화에 탁월하고 항산화 및 항균 효능 등이 대학 연구용역 결과로 증명됐다.최근 코로나19 등 면역력과 호흡기 건강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문경오미자는 우수한 효능과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할수 있는 기호성까지 갖춘 우수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오미자는 김, 와인(오미로제 - 정상회의 만찬주), 문경오미자피지오(스타벅스), 탄산막걸리(오희 2013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만찬주), 화장품 등 다양하게 변신해 출시 중이다.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열린 ‘2020 드라이브스루 문경오미자축제’는 개·폐막식 및 각종 공연 등 대규모 인파가 접촉하는 기존의 축제형식을 벗어나 비대면 방식으로 판매행사만 진행했으나, 이번 축제 기간 중 4천여대의 차량이 판매장을 찾았으며, 오미자 30t, 3억2천만원 정도의 수익을 올려 성공적인 축제의 장이 됐다.◇ 백설공주도 사랑한 ‘문경사과’문경은 백두대간 줄기에 둘러싸여 산세가 아치 모양인 분지 산악기후로 밤낮의 일교차가 매우 커서 사과재배에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이렇게 축복 받은 문경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당도가 타 지역보다 1~2°Brix 정도 높고, 과즙이 많으며, 육질이 단단해 저장을 오랫동안 할 수 있다.생식을 할 경우 사과 고유의 향기와 맛 또한 일품이라 문경사과는 전국 제일의 사과다. 달콤함과 새콤한 맛이 조화를 이루어 한 번 맛을 보면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는 것이 문경 사과이다.사과는 알칼리성 식품으로 동맥경화와 고혈압, 뇌졸중 예방에 탁월하며 사과과육은 잇몸건강에 좋고, 사과산은 어깨 결림을 감소시키고 비타민 C가 다량 함유돼 피부미용에 좋다.문경 감홍은 평균당도 18°Brix로 맛과 향이 뛰어나고, 매년 문경사과축제의 주력상품이 돼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문경사과는 거점산지유통센터(APC)를 통해 고품질의 사과를 연중 공급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2020 온라인 문경사과축제올해로 열다섯번째를 맞는 문경사과축제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온라인축제로 개최한다. 새로운 도전인 만큼 더 알차고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해 문경사과축제의 명성을 이어간다.축제기간은 10월 12일부터 31일까지 20일 동안 온라인으로 진행된다.주요 프로그램은 사과축제 홈페이지를 이용한 사과판매와 참여 이벤트 진행, 사과 따기 체험, 찾아가는 사과축제, 홍보관 운영 등으로 꾸며진다.홈페이지는 △열여섯 농가가 판매하는 맛있는 문경사과를 구입할 수 있는 판매부스 운영 △문경사과 송을 이용한 어린이 온라인 댄스챌린지 △문경사과 카빙자랑 쇼 △문경사과 사행시 짓기 △문경사과축제 추억의 앨범 △문경사과 구입 인증샷 촬영 △ 15회를 맞는 문경사과축제를 기념해 총 60명을 추첨해 1만5천원 상당의 쿠폰을 전달하는 1515이벤트 등 다양한 이벤트로 꾸며진다.모든 이벤트에는 경품이 있어 색다른 추억도 만들고 경품을 받는 행운의 주인공도 될 수 있다.홈페이지는 당초 9월말 오픈 예정이었으나 흐린 날씨와 잦은 강우로 홈페이지에 게시할 사과 사진촬영이 늦어져 10월초쯤 오픈할 계획이다.이 외에도 대도시 현지에서 문경사과가 소비자를 직접 만나게 되는 찾아가는 문경사과축제도 운영한다. 찾아가는 문경사과축제는 10월22일부터 11월 4일까지전국의 이마트와 롯데마트에 입점해 문경사과를 판매하는 이벤트로 이마트 40곳, 롯데마트 55곳에서는 시식행사도 실시해 소비자들에게 문경사과를 맛보이게 된다.◇ 미네랄이 키운 자연의 맛 ‘문경약돌한우돼지’문경약돌한우, 문경약돌돼지는 지역에서 유일하게 생산되는 거정석(일명 약돌)을 먹여 불포화지방산과 필수아미노산 함유가 높아 육질이 탱탱하고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게 특징이다.거정석은 홀뮴(Ho), 게르마늄(Ge), 셀레늄(Se) 등 인체에 유익한 생리필수 미네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면역력을 높이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최근 온라인 유통채널을 통한 축산물 소비가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는 가운데 문경약돌축산물융복합명품화사업단(이하 사업단)이 문경약돌한우돼지 네이버 밴드를 개설하고 온라인 유통채널 확장에 나섰다.9월 1일 오픈한 문경약돌한우돼지 네이버 밴드 ‘문경장터 약돌며느리’는 서울에서 문경으로 시집 온 며느리를 가상의 화자로 삼아 ‘문경약돌한우돼지’를 비롯한 문경의 맛있고 건강한 먹거리를 소개한다는 모티브로 운영된다.밴드 개설을 기념해 사업단은 문경약돌돼지 삼겹살(300g)과 목살(300g), 앞다리살(600g) 등 문경약돌 돼지고기 총 1.2kg으로 구성된 ‘문경약돌돼지 한마리’세트를 2만9천원에 판매했으며, 앞으로도 다양한 기획세트를 마련해 판매할 계획이다.◇ 산속의 고기 ‘표고버섯’1980년대 하우스 재배를 시작한 문경표고버섯은 청정자연환경에서 소백산맥의 풍부한 무공해 참나무에서 생산되어 맛과 향이 우수하다.표고버섯은 중국의 진시황과 로마의 네로를 사로잡을 만큼 맛과 효능이 뛰어나다.표고버섯을 먹음으로 좋은 콜레스테롤 수치는 올라가고 나쁜 콜레스토롤 수치가 내려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표고버섯은 심혈관계 질환 예방 및 치료에 도움이 된다. 또한 칼로리가 낮고 식감이 쫄깃쫄깃하여 고기의 식감과 비슷해 다이어트를 위해 많은 사람이 찾는다.◇ 신의 선물 ‘문경 쌍샘배’문경 호계면 쌍샘배 재배단지는 오정산(805m)를 뒤로하고, 동남향으로 펼쳐진 중간산지의 벌판에 위치해 있다. 일조량이 많고 토질은 점토질이며 가을철 일교차가 매우 커 재배에 쌍샘배 재배에 가장 알맞은 곳이다. 이렇게 큰 일교차와 황토에서 재배된 쌍샘배는 타 지역 배에 비해 당도 2~3°Brix 정도 높으며, 석세포가 적어 맛이 뛰어나고 저장성이 좋다.배는 겨울철 기관지 건강, 숙취 해소, 변비 예방, 각종 성인병 예방 등 건강에 이로운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친환경 쌀아무리 반찬과 국이 맛있더라도 밥이 맛이 없으면 밥맛이 사라진다.밥먹는 시간이 즐겁기 위해서는 문경 쌀이 제격이다. 문경의 쌀은 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재배된다. 때문에 쌀마다 밥맛이 조금씩 다르다.먼저 희양산우렁쌀이다. 희양산우렁쌀은 우렁이를 이용해 친환경 농법으로 쌀을 재배한다. 때문에 쌀의 질이 뛰어나고 밥을 지었을 때 밥향이 아주 좋아 밥짓는 시간이 즐거운 쌀이다.다음은 문경약돌쌀이다. 문경약돌인 거정석을 분말로 만들어 벼가 자라나는 기간 중에 논에 골고루 뿌려준다. 거정석은 물 정화 능력이 뛰어난 티타늄이 함유되어 있다. 때문에 벼가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도와준다.마지막으로 새재청결미와 새재의 아침쌀이 있다. 새재청결미는 대표적인 문경쌀로 웰빙의 고장 문경의 맛과 향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쌀이다. 새재의 아침쌀은 우렁쌀과 마찬가지로 우렁이를 이용한 친환경 쌀이다.이렇게 문경쌀은 각각 맛은 다르지만 모두 친환경적이며, 밥맛이 없고 무기력 할 때 특효이다.고윤환 문경시장은 “코로나19 시대 농산물 판매 플랫폼이 많이 변화했다”며 “우수한 농특산물과 새로운 채널을 통한 마케팅을 통해 어려운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겠다”고 말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0-09-27

청림동과 동해면 사이, 쓸쓸하고 한적한 시골에서의 청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긴 장마, 수차례 태풍까지 겹쳐 올해 경북 바닷가는 어둡고 쓸쓸했다. 흔적 없이 꼬리를 감춘 여름. 아쉬움에 포항 동해면을 찾았다. 그곳은 소설 ‘몰개월의 새’가 잉태된 공간. 그 해변이 내년엔 다시 피서객들의 환한 웃음으로 북적이길 기대하며, 반세기 전 황석영이 겪었던 도구해수욕장의 여름을 떠올려 보았다. 이러한 감상이 낳은 결과물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소설가 최인훈(1936~2018)은 한국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인 ‘광장’의 서문을 통해 이렇게 일갈했다.여기서 쓰인 ‘광장’과 ‘밀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틀 속에 끼워 넣으려는 평론가들이 있었고, 또 다른 학자들은 개인적 고뇌와 집단적 성취욕구로 이 두 단어에 접근하고자 했다.최인훈보다는 몇 해 뒤에 태어난 소설가 황석영(77)은 최인훈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념과 전쟁, 개인과 집단에 접근했던 리얼리스트다.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그는 ‘한국 사실주의문학의 제왕’으로 자리 잡았다. 자타공인이었고, 재론의 여지도 없다. ‘자본주의의 그늘’과 ‘베트남전쟁이 야기한 비극’ ‘몰락일로를 걷는 공동체의 비애’를 황석영 만큼 탁월하게 소설 속에 형상화시킨 동시대의 다른 작가가 있는가? 찾기 어려울 것 같다.최인훈이 밀실과 광장을 키워드로 독자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을 찍었다면, 많은 이들이 황석영의 수작(秀作)으로 지목하는 단편 ‘몰개월의 새’는 ‘골목안 창가(娼家)’와 ‘국경 너머로 확장하는 전장(戰場)’을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읽는 이들을 서늘하고 형상 또렷한 슬픈 자각에 이르게 했다.▲한때 베트남으로 갈 군인들의 훈련지였던 ‘그곳’오래전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황석영이 술회한 바 ‘몰개월의 새’는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인 1976년 ‘세계의문학’에 발표됐던 작품이다. 당시 저자 황석영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본다.“몰개월은 해병 제1상륙사단이 주둔해 있던 포항 외곽의 작은 동네였다. 내 기억에는 사단의 북문과 서문 사이 어디쯤에 있던 쓸쓸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얼마 전에 지나다 보니 그곳은 포항제철이 들어서 있는데다 너무 변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정글전 특수교육대며 몰개월의 술집 등은 당시에 모두 실존했던 곳들이었고, 여기 나오는 추장(소설 속 주인공의 동료병사)이라는 친구도 실제 인물이다. 그는 전라북도가 고향이었는데 1968년 12월인가 꽝응아이성 ‘바탕간 작전’에서 야간 매복을 나갔다가 부비트랩에 걸려 폭사했다. 분대원들이 사지가 찢긴 그의 시신을 군용 우의에 싸가지고 중대 방어진지로 돌아온 것을 목격했었다. 갈매기집도 그때 몰개월에 있던 술집의 하나였고, 미자인지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비슷한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이 떠나던 새벽에 그녀들이 나와서 손을 흔들던 장면도 모두 있었던 일들이었다.”1960년대 파월장병들을 훈련시켜 머나먼 이국의 전쟁터로 떠나보내던 공간인 ‘몰개월’은 경북 포항시 남구 청림동과 동해면 도구해수욕장 사이 어디쯤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흔을 넘긴 포항 본토박이들은 이곳이 ‘우물재’라는 이름으로 변했다고도 한다.케케묵은 고릿적 소설로 오해될 수도 있는 황석영의 ‘몰개월의 새’를 다시 펴드는 것은 웃음은 물론 눈물까지 함께 했던 그(주인공 ‘나’)와 그녀(빠꿈이란 별명의 작부 ‘미자’)의 공동체인 ‘골목’이 어떤 과정을 통해 와해됐으며, 무엇을 통해 복원될 수 있는지를 살피는 행위다.또한 대비되는 두 공간(몰개월과 베트남 정글)이 이름을 달리해 현재도 엄존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에 다름없다. 소설의 서두는 베트남 파병을 목전에 둔 주인공 한 상병이 유년과 청춘을 보낸 서울의 ‘골목’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그의 ‘골목’은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가?“일 년 반만에 서울을 찾아가 다시 확인했던 것은 나의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파충류의 허물과도 같은 것이고, 나는 그 허물을 주워서 다시 뒤집어쓰고 돌아온 건 아닌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싸돌아다니던 골목에는 아직도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나도 언제나 끼이고 싶어 하던. 머리 좋은 치들의 비밀결사는 여전히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성공한 신사들 같았다. 모친의 식료품 가게는 문을 닫았다. 그 어두운 가게의 천장 위에 내 ‘잠수함’은 뚜껑을 닫고 선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뚜껑을 젖히고 머리를 내밀자 나는 다시 심해에 잠기는 것 같았다. 내 다락방의 벽에는 떠나오던 날의 낙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지붕 건너편에서 솜틀집의 활차 돌아가는 소리가 여전히 들렸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발소 집 형제는 유행가를 합창하고, 야채장수 부부는 또 한바탕 두들기고 울었다.”‘골목’에서 성장한 소년이 청년이 되고 그 청년이 또 다른 ‘골목’인 몰개월에 이르러 이제는 ‘골목 바깥’으로 내팽개쳐질 운명이 됐다.온전한 형상이라 믿고 살았던 공동체가 붕괴하는 모습을 힘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20대 젊은이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다.그러나, 그럴수록 ‘골목’에 대한 집착과 같은 아픔을 앓는 골목 안 인간들에 대한 연민은 무한대로 증폭한다. 한 상병에게 그 집착과 연민은 가진 돈 전부를 몰개월의 창녀 빠꿈이(미자)에게 털어주는 형태로 나타난다.추장이 말했다.“뭐하니... 몰개월 나가자.”“잠이나 자야겠어.”“헛... 야, 너 미쳤구나. 다섯 시에 출동이야. 지금 벌써 한시 가까이 되었다. 마지막인데 잠이 오냐?”“졸려.”“돈 아까워서 그러니? 이제부턴 휴지나 다름없는데 뭐할래...”“몸이 불편해.”“인마, 술 먹으면 다 나을 병이야. 갈매기집 빠꿈이가 오매불망 기다린다.”“조용히 누워 있을라구 그래. 갔다 와. 그리고, 이거 갖다줘라. 탁 털은 거야.”“외상값이냐?”“휴지나 마찬가지잖아.”“빠꿈이 수지 맞았는 걸.”▲44년 전 몰개월, 그 바닷가에선…주인공 나(한 상병)는 어디에서 미자를 처음 만났을까? ‘골목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강제한 전쟁에 ‘골목 안’ 사람들이 끌려가 죽는 아이러니가 반복되던 1960년대와 1970년대.당시 포항 외곽 바닷가마을엔 ‘무너지는 골목공동체’를 은유하는 공간이 존재했다. 바로 ‘몰개월’이다. 황석영은 그곳을 이렇게 묘사한다.우리는 철조망을 무사히 통과했다. 개구리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논두렁을 지나면 한길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불빛 보이니?”“응. 몰개월이다.”몰개월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특교대가 생겨나자 서너 채의 초가가 있던 외진 곳에 하나둘씩 주막이 들어섰는데, 거의가 슬레이트 지붕에 흙벽돌이나 블록으로 지은 바라크들이었다. 비슷한 꼴의 나지막한 집 이십여 채가 울퉁불퉁한 자갈길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 이곳을 모두 몰개월이라 불렀는데 바다가 바로 그 뒤편에서 철썩이고 있었다.지금도 포항시 청림동과 동해면은 좁은 골목이 야트막한 건물들을 거느리고 거미줄처럼 얽혀있다.불을 밝힌 골목 안에선 44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삶이 간당간당 이어진다. 외형은 상전벽해로 보일 수 있지만, 간난신고(艱難辛苦)로 이어지는 가난한 자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그렇다면 지난 세기 빈한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온갖 고생을 겪다가 결국엔 삶의 마지막 진창으로 머리채 잡혀 끌려온 몰개월의 ‘작부’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축복받지 못한 출생과 거친 삶의 이력 탓에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잃었던 것일까? 천만에다. 몰개월의 창가 중 한 곳에 기생했던 포주(抱主)가 입을 열어 ‘골목 안’ 그녀들의 이야기를 전한다.“이 쓸개 빠진 년들이 모두들 애인 하나씩 골라서는 편지질을 하는데, 어떤 애들은 열 사람 스무 사람에게 쓴다우. 한 달에 한명씩 골라잡아두 열 달이면 열 명이 꽉 찬다구. 미자년이나 옆집 애란이나 가끔 술 처먹구 지랄을 하는데, 아마 상대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는 모양이지. 제대하구 가면서 몰개월에 찾아와 들여다보는 놈들은 한 번도 못 봤는데두….”/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9-24

‘동방의 적벽’처럼 아름다운 풍경서 큰 사상 일어나

長郊細雨草離離(장교세우초리리) 가는 빗속 너른 들의 풀은 무성한데白裌黃冠次第隨(백겹황관차제수) 흰 소매, 황관으로 차례로 걸어가네節屆曾翁言志日(절계증옹언지일) 찾아온 절기는 증옹이 뜻을 말한 날이고風輕程氏過川時(풍경정씨과천시) 가벼운 바람은 정씨가 시내 지나던 때네要看大海千流會(요간대해천류회) 큰 바다로 여러 물길 모이는 걸 보면서兼取兄山萬景奇(겸취형산만경기) 형산의 온갖 절경을 함께 찾아보네意思超然塵累外(의사초연진루외) 초연해진 생각으로 속세를 벗어나三春行樂互題詩(삼춘행악호제시) 무르익은 봄을 즐기며 서로 시를 짓네묵암(默庵) 허강(1766∼1822)이 쓴 ‘양동의 여러 친구와 함께 형산강을 거닐다(與良洞諸益, 過兄山江)’라는 시다. 묵암은 입재(立齋) 정종로(1738∼1816)를 사사했는데, 정종로는 소퇴계(小退溪)라 불리던 대산(大山) 이상정(1711∼1781)계의 문인이니,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은 인물이라 하겠다.봄날의 정오 무렵, 묵암은 가늘게 내리는 빗속에서 풀이 무성한 형산강 둑을 친구들과 함께 거닌다. 시인은 촉촉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송나라의 정호가 봄날을 즐기던 모습을 떠올리고, 더 먼 옛날 증석이 공자와 나누던 대화를 상기한다.공자가 말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너희의 능력을 알아준다면 어떡하겠느냐?” 처음에 자로가, 다음으로 염유가, 그 다음으로 공서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증석이 대답한다.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을 쓴 사람 5, 6인과 아이 6, 7명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증석의 대답에 공자는 “나도 증석과 같이 하겠다.”라고 답했다.공자는 제자의 답 중에서 증석의 답을 최고로 꼽았고, 자신도 증석과 같은 생각이라 하였다. ‘벼슬에 집착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지향하였기 때문’이었다.묵암에게 형산강은 공자가 거닐던 기수와 같은 곳이었다. 묵암은 여러 시내(川)의 물이 모여 형산강을 이루고, 이 강은 더불어 아름다운 산과 어울려 있음을, 그렇기에 기이한 경치를 지니게 됨을 말하였다.그야말로 형산강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만끽하면서, 함께 형산과 제산의 뛰어난 경치에 눈길을 던지며, 비 오는 봄날의 정취와 가벼운 바람이 이끄는 나들이에서 속세의 근심까지도 잊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묵암이 바라보던 형산강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였을까? 묵암보다 200여 년 전, 쌍봉(雙峰) 정극후(1577∼1658)의 시에서 그 아름다움의 정도를 만날 수 있다.壬戌新秋月旣望(임술신추월기망) 임술년 초가을 열엿새 날에使君來作兄江遊(사군래작형강유) 공(김존경)께서 형산강에 나들이 오셨네兄江水闊波運海(형강수활파운해) 형산강 드넓어 물결이 바다와 맞닿고子夜天淸月滿舟(자야천청월만주) 깊은 밤 하늘은 맑아 달빛 배에 환하네抹輕雲橫遠浦(일말경운횡원포) 한줄기 구름 멀리 포구까지 뻗었고數聲長笛落芳洲(수성장적락방주) 몇 줄기 긴 피리 소리 아름다운 물가에 가득하네東韓赤壁今如此(동한적벽금여차) 동방의 적벽이 바로 여기니不必蘇仙名獨留(불필소선명독류) (세상에) 소동파의 이름만 홀로 남을 필요 없으리‘형산강에 배를 띄우고 상공 김존경 좌하께 올리다(兄江泛舟奉呈金相公座下)’라는 시로 ‘쌍봉선생문집(雙峯先生文集)’에 실려 전한다. 흥해에서 태어난 쌍봉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정삼외의 둘째 아들이다. 여헌(旅軒) 장현광(1554∼1637)과 한강(寒江) 정구(1543∼1620)의 제자로, 효종의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이 시를 쓴 곳은 형산강에서도 부조장터가 있던 곳으로 여겨진다. 당시 경주 부윤이었던 김존경과 함께 형산강에 배를 띄워놓고 뱃놀이를 즐겼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달빛 그윽이 내리는 배에서 쌍봉은 형산강의 아득한 물결을 응시하고 있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과 나무하는 목동의 피리 소리를 들으며 소동파가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적벽부를 짓던 모습을 떠올린다. 동방의 적벽이 바로 형산강의 이곳이며, 동방의 적벽에서 쌍봉은 또한 동파가 되어 시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형산강에 대한 노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동방오현인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은 형산강을 어떻게 대면했을까? ‘회재선생문집’에 실린 ‘형산강가에서(兄山江上)’라는 시를 보자.湛湛江水本來淸(담잠강수본래청) 맑고 맑은 강물, 본래 맑았는데雨歇今朝濁似涇(우헐금조탁사경) 비 개인 오늘 아침에는 흐리기가 똥물 같네.萬古不隨淸濁變(만고불수청탁변) 오랜 옛날부터 청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말라 하였으니巍然江上數峯靑(외연강상수봉청) 강가 높은 곳에서 봉우리의 푸르름을 세어보누나.회재는 비 온 뒤의 형산강을 응시하며, 물길의 청탁과 산봉우리의 푸르름을 대비시켜 우리 삶의 태도와 이치를 돌아보도록 하고 있다.유학에서 공부는 내가 지닌 덕을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에 있다. 그리고 그 출발을 격물(格物)에 두었다. ‘대학’에서 “옛날에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부터 가지런히 하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아는 것을 극진히 해야 할 것이니, 아는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히 하는 데 있다”고 한 것도 그것이다.나의 마음에 있는 ‘명덕(明德, 밝은 덕)’을 밝히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을 격물에 두었으니, 이는 무엇보다 격물(格物)이 치지(致知)를 위한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되며, 격물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앎, 참된 앎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주자도 ‘대학’의 ‘격물치지보전(格物致知補傳)’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앎을 지극히 하는 것이 격물에 달렸다고 하는 것은 나의 앎이 지극히 하는 것이 사물을 접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데에 달렸음을 말한 것이다. 무릇 사람 마음의 영명함은 본래 지각을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고, 세상의 존재물은 이치를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다. 다만 이치에 대하여 궁구치 못한 까닭에 앎에 미진한 면이 있게 된다.”주자는 궁극적인 앎에 다가가기 위해 격물에 좀 더 다가가야 한다고 하여 강조한다. 회재가 탁류를 마주하면서 마음의 태도와 자세를 돌아보도록 한 것은, 사물의 이치에 깊이 다가가 그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앎에 나아가는 것임을 에둘러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형산강은 항상 아름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강좌(江左) 권만에게 형산강은 슬픔으로 마주한 강이었다. 강좌는 1728년에 형산강을 만난다. 그리고 형산강을 처음 마주한 날 시를 쓴다. ‘배를 타고 형산강을 건너다 대송의 적소를 바라본다(舟渡兄江。望大松謫所)’라는 시다. 강좌는 영일현에 유배 오던 날 시를 썼다.兄江東蹙動深坤(형강동축동심곤) 형산강의 동쪽, 땅이 다한 곳斜日揚舲渡海門(사일양령도해문) 석양에 돛단배 타고 해문을 건너네隔浦煙生槐樹綠(격포연생괴수록) 포구엔 느티나무 그늘 사이로 연기 이는데舟人說是大松村(주인설시대송촌) 뱃사공이 말하길, 이곳이 대송촌이라 하네영일현에 도착해 배를 타고 형산강을 건너 대송에 당도했을 때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강좌가 형산강에 도착했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포구에 도착할 즈음, 느티나무 그늘 사이로 저녁연기 자욱하게 이는 대송의 모습이 선하다.울산 백암산에서 발원한 형산강은 옛 진한의 땅, 옛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지나 영일만으로 흐른다. 신라가 통일을 위한 힘을 지니게 되는 첫걸음은 아달라왕의 포항 흡수가 그 출발점이었다. 그런 만큼 형산강을 함께 하는 포항과 경주는 문화적으로 지리적으로 공생의 관계였다.형산강에서 풍류도사상이, 원효의 화쟁사상이, 회재의 이기론이, 최제우와 최시형의 동학사상이 발현되었다. 우리나라 4대 사상의 발현지가 된 것이다. ‘강’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근원이고, 생명의 원천이다. 강은 문화와 문명이 일어나고 전하는 통로가 된다. 인류의 역사가 형성되는 강, 문화와 문화의 흐름과 상생의 열쇠를 쥐고 있는 강, 신라 천년의 사직은 형산강에서 출발해 형산에서 마감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문화를 만들고 공유하면서 흐르고 있고, 또 흘러갈 것이다. 사진/안성용글/신상구위덕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양동문화연구소 소장, 포항문화재단 이사. 동국대 국문과에서 ‘수운 최제우의 성경론과 문학적 실현 양상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저서 ‘치유의 숲’ 등 다수.

2020-09-23

해골, 멜랑콜리를 위한 오브제로 생명을 얻다

대구에 세계적인 화백이 계신다. ‘메이드 인 대구’라는 큰 전시회를 앞두고 참여 작가 8인 중 한 분이신 권정호 화백을 만났다. 뉴욕과 상해미술관, 인도, 일본 등 국제적으로 활동해온 화백의 작품을 대구미술관에서 보게 된 것은 지역의 큰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회가 권정호 화백의 예술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전시회가 될 것으로 예감한다.대구 출신이고 대구에 거주하는 화백의 작업실은 오층 건물 맨 위층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서 문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왈칵 다가오는 해골과 맞닥뜨렸다. 닥종이로 만든 수많은 해골 모형이 상자에 가득 담겨 있었다. 화백은 그 중 하나를 집어 가는 붓으로 색을 칠하고 있었다. 커다란 통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그 통을 가득 채운 희고 노랗고 파랗고 붉은 닥종이 해골이 화백의 오랜 작업과정을 짐작하게 했다. 해골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강렬한 두드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 낯설다.’ 평면 그림이 아닌 조형예술이고 내용이 해골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 해골 모형에서 얼른 ‘죽음’을 떠올린 건 내 선입견일지도 모른다.화백은 그 많은 두개골 모양의 형이상학적인 조형물을 대구미술관 전시실 천장에 낚싯줄로 매달 거라고 했다. 길고 짧게 드리워진 물상들이 만들어내는 카타콤 같은 비밀스러움이 상상된다. 3060개의 두개골 모형이 천장에서 내려와 사각형 큐브를 이룬다는 상상만으로 충분히 그로테스크하다. 그 신선한 충격이 내게 예술과 원시적 형이상학 사이의 간극과 죽음의 형상을 떠올리게 했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를 그린 작품 앞에서 찍은 화백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불에 탄 열차와 검고 흰 선들이 지하철 안에 있었던 원혼들의 말없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모든 예술이 그런 것 아닌가.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각자의 의식에 적재된 심상에 비추어 사물을 보게 되는 그런 것.“해골 형상으로 말하고자 하신 바가 무엇입니까?”“반성적 거울 이미지라고 할까요?”화백은 인간의 정서를 대신한 상징적인 두개골 형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유한하고 불안한 존재인 현대인들의 억압된 갈등과 근원적 죽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해골의 형상 속에 깃든 철학적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을 대면시키고자 했다고 언급한다. 형식 속에 정신을 심고 정신 속에 형식을 만들며.화백은 계명대 미술대를 졸업하고, 대구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미국의 프랫인스티튜드 대학원 회화과에 입학했다. 예술 창작이 하나의 정신적 활동이며 시간과 공간, 영원성에 관계한다고 말씀하신다. 화백의 작품 세계를 검색하다 아주 인상적인 영상을 하나 보았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이루어진 ‘파이어 아트페스타 2018 헌화가(獻火歌)’ 행사였다. 거기서 화백은‘염원 - 헌화가’라는 제목으로, 가로 410㎝ 세로 600㎝ 높이 600㎝ 크기의 나무로 만든 작품을 내놓았다.“헌화가의 착상을 어디서 얻으셨어요?”“신라 향가 헌화가(獻花歌)에서 착안한 작품인데, 제목이 일러준 대로 꽃을 들고 비녀를 한 여인의 형상입니다.”파이어가 실행되며 작품에 불을 붙였다. 작품이 활활 타올랐다. 마지막까지 깨끗이 타버리는 것으로 화려하게 승화한 여인의 형상이 재로 남는 과정으로 예술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했다. 마침내 사라지는 무(無)의 세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우주적 시간이 그러하고, 인간의 삶이 그러하고, 예술가가 피땀 흘려 이뤄낸 작품이 그러하고, 불꽃으로 스러진 헌화가가 그렇게 無로 남았다. 그럼 無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일까? 無는 사라진다기보다 승화하는 것이다. 화백은 그 작품으로 평창올림픽 개최를 축하하고, 세계의 평화와 새로운 창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권정호 화백은 죽음의 과정과 순환의 의미를 닥종이 해골이라는 추상적인 매개체에 담아서, 예술의 본질적인 요소를 탐구하는 미니멀리즘을 뛰어넘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간성을 회복하는 신표현주의를 지향한다. 화백의 작품 세계는 끊임없이 진화하며 또 다른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메이드 인 대구’라는 전시제명으로 대구미술관에서 대구 출신 작가 곽훈, 권정호, 김영진, 박두영, 박철호, 서옥순, 손광익, 최병소 8명의 작품을 전시한다. 거기서 화백은 3060개의 해골 형상으로 이루어지는 사각형 큐브 한 점과 작은 작품 네 점을 포함한 다섯 점의 작품을 전시한다.“전시할 주요 작품의 제목이 뭐예요?”“언타이틀 - 무제.”여백을 주고자 함인지.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낄 자유를 억압하지 않겠다는 의도일지도 모르고. 생각해보니 두개골과 매우 어울리는 제목이다. 카타콤이나 현대인의 정신적 무덤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3060개의 해골이 만들어내는 미로를 상상해본다. 아무리 가도 똑같은 길이어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미로. 아리아드네는 미로에 들어가는 테세우스에게 실 뭉치를 준다. 테세우스는 그녀가 시킨 대로 문고리에 실을 묶어놓고 미궁에 들어가서 괴물을 처치하고 무사히 살아나온다. 사각형 큐브 속의 해골은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군상들일 수 있고, 해골 사이의 간격은 끊임없이 인간들을 헤매게 하는 생의 미로일지도 모른다.권정호 화백은 해골 형상으로 사회현상을 다루는 작가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1960년대에 미대에 들어간 1세대이고, 세계적인 명문미술대학원에 입학한 유학 1세대이기도 하다. 백남준, 김구림, 전수천 작가를 비롯한 재미작가들과 전시회 활동을 함께 한 이력은 대구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메이드 인 대구’는 대구의 문화를 알리는 운동이다. 그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무제’는 지금 마무리 작업 중이다. 화백은 뉴욕 MONA PX1과 같이 작가들이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도움을 주는 큐비컬을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가창분교를 창작스튜디오로 만들었다. 화백은 문화 활동에 참여하는 것 역시 작품 세계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번 출품작 역시 화백이 꾸준히 지향해온 바와 같이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기대가 된다.“왜 해골입니까?”권 화백이 사람의 두개골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고교시절부터이며, 영국의 설치미술가 데미안 허스트보다 훨씬 먼저라고 한다. 아버지가 대구역 부근에 있었던 칠성의원의 공의였고 형이 의대생이었다. 형이 두개골의 외형 조직과 짜임새, 구조를 배우려고 책상에 두개골을 갖다 놓았는데, 고교 2학년이었던 화백은 사람의 두개골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부정맥이 심해서 2군사령부까지 실려 가고, 폐렴으로 밀양 위양에서 요양을 하는 혹독한 과정을 겪으며 형이상학적인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두개골에 대한 충격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어지며, 식육점 진열장의 빨간 불처럼 해골에 대한 관심에 불이 켜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인으로 모델이 되었던 적이 있는 뉴욕 자연사박물관 뉴기니아관에서 화백은 인간의 뼈로 장식물을 만드는 뼈의 사용법을 배웠다. 해골을 작품화하는 것이 운명의 지침을 따르는 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두개골의 시작은 죽음의 의미였으나 작품 활동이 계속되며 해골의 의미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다. 화백은 해골을 죽은 시체로서의 해골로만 이해하기보다 멜랑콜리의 원리로 해석하길 바란다. 해골은 오브제이고, 대상이고, 자연이라고. 자연을 두고 다양하게 느끼고 다르게 보는 것이 바로 창의라고. 그렇듯이 두개골은 전달의 의미를 다양하게 표현하며 색다른 것을 보게 한다. 작가는 해골로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며 어떻게 새로운 걸 보고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가, 하는 멜랑콜리의 원리와 의미를 깨닫게 한다. 그릇이라는 의미로서의 해골을 어떻게 볼 것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작가는 해골로 사회현상을 보는데, 관객은 그것을 어떻게 보고 어떤 새로움으로 느낄지 묻게 된다.화백에게 있어서 두개골은 시체로서의 물상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문화를 발전시킨 인간의 두상이다. 해골은 단지 외형의 껍질일 뿐이다. 화백은 해골이라고 할 때가 있고, 두개골이라고 할 때가 있다. 두 가지의 의미가 다르다. 내용에 따라서 단어가 달라지는 문장의 구조와 같다. 두개골의 구조 조각 또한 내용에 따라서 단어가 달라지는 문장과 같다. 화백은 구조에 관한 분석철학을 곁들인다. 언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문장 구조에 따라 변화하듯이 해골설치작업 역시 전달이라는 구조에 의거하여 사물을 다양하게 보는 것. 행위예술의 언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지.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09-23

코로나 스트레스 날려버릴 매운맛… “영양고추 사이소”

최근 음식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인기가 많아지면서 자극적인 맛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특히 매운 맛이 가득한 음식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강렬한 매운 맛을 만들어 내는 가장 대표적인 식재료가 고추이다.이미 수년전부터 한류 열풍으로 우리 문화가 세계적으로 많이 전파되면서 한식도 세계음식의 주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한식의 이미지는 맵고 강렬한 느낌을 많이 주는데 아무래도 고추를 사용한 요리가 많기 때문이다.그 고추의 주산지 영양군은 매년 서울시청 광장 앞에서 수도권 소비자들을 찾아가는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을 개최해왔다.매년 이맘때면 영양고추를 찾는 이들이 서울광장에 구름처럼 몰려든다. 그러나 올해는 지난 8월 재확산 된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해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이 전면 취소돼 수도권 소비자들은 영양고추를 직접 현장에서 구매할 기회를 놓치게 됐다.영양군은 전 국민이 매운 맛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고 있다.영양고추의 매운맛을 멀리서나마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자.◇ ‘영양고추 H.O.T페스티벌’의 역사1984년 최초로 영양고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군정 발전을 위해 제1회 영양고추아가씨 선발대회를 개최했다. 고추아가씨 선발대회 기점으로 해 2000년대에 들어서 영양고추문화축제로 확대시켜 2006년까지 영양군에서 축제를 개최했다. 그러나 영양군에서는 발상의 전환으로 2007년도부터 매년 서울광장을 찾아가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영양군에서는 해마다 증가하는 중국산 고추를 비롯해 농산물 개방에 따른 수입산 고추의 물량이 해가 증가해 더 이상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며 마케팅을 실시하는 것은 영양고추의 홍보가 효율적이지 않고 관내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산물 판매가 어려워 농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군에서는 수도권 소비자와 관광객을 직접 찾아가는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방식을 전환해 영양고추의 홍보를 강화했으며 2007년부터 전국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서울의 중심부인 서울광장에서 축제를 개최하게 됐다.◇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을 즐길 기회는 내년으로 미뤄영양고추의 우수성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영양고추는 전국을 넘어서 이제 전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이 인정돼 2017년 8월 24일 빛깔찬 고춧가루 6만 달러 규모의 미국 수출을 시작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매년 영양고추의 미국 수출액이 증가하고 있다. 군은 영양고추유통공사를 설립해 (사)한국외식업중앙회 제주도특별자치도지회 및 CJ제일제당(주) 등과 MOU를 체결하는 등 영양고추의 우수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은 소비자를 찾아가는 축제라는 의미가 크고 해가 갈수록 소비자가 기다리는 도·농 상생의 화합의 장터가 됐다. 영양군은 축제를 개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8월 중순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축제가 취소돼 영양고추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내년을 기약하게 됐다.◇ 축제의 취소, 영양고추 판매는 모두 시급한 과제영양고추 H.O.T 페스티벌 방문객에서 파생된 직·간접적인 경제적 효과는 영양에서 고추를 재배하는 농가 소득증대에 큰 기여를 했다. 축제장에서 직접 영양고추를 팔기도 하고 또한 소비자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생산자 직거래 주문을 받아 축제가 끝나고도 영양고추를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재확산돼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이 전면 취소되면서 영양군은 김장철을 대비해 영양고추를 구매하려던 많은 소비자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축제가 취소 되면 관내 고추농사를 짓는 농가들은 타격이 크다. 보통 축제기간 3일 동안 수확한 고추 절반이상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양군은 관내 농산물을 재배하는 농가들을 위해 새로운 판로를 개척해 판매량 증대시킬 방안에 모든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온라인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 개최매년 가을 2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는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은 영양산나물축제와 함께 영양을 대표하는 농특산물 축제이다. 올해 초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2020년 제16회 영양산나물축제 취소에 이어 제14회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도 취소됐다. 축제가 취소되자 영양군은 영양고추의 홍보 및 판로 개척에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 끝에 온라인으로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을 개최하기로 했다. 온라인 축제는 코로나19로부터 지역사회와 군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한편 지역 특산품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시간·공간적 제약이 없는 온라인 형식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축제이다. 온라인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은 온라인 참여행사, 라이브 요리채널, SNS이벤트, 홍보 홈페이지 개설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고 있어 영양군이 효율적으로 영양고추를 홍보할 수 있는 온라인 축제이다. 온라인을 통해 마련된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활용해 영양고추 홍보에 주력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관광 트렌드를 이끌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다.◇ 온라인 판매로 소비자 구매욕 자극영양군은 경북도에서 운영하는 ‘사이소’몰에 온라인 판매 사이트를 개설해 온라인 판촉전을 개최한다. 2007년 4월 지역 농특산물 판로 개척을 위해 만든 쇼핑몰인 ‘사이소(www.cyso.co.kr)’사이트에서 영양군은 개별 사이트를 구축하고 소비자들의 영양고추 구매 욕구를 자극해 판매량 증대를 기대하고 있는 등 전화주문 CS팀도 운영하고 있다. 영양고추를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은 고령층이 많기 때문에 상품소개와 전화 주문접수 및 농가연계 등 다양하게 고객에게 응대하는 방안도 마련했다.◇ 고령층 소비자를 겨냥한 오프라인 판매온라인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다소 생소하고 구매하기 어려운 고령층 소비자를 겨냥한 오프라인 판매도 간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비대면 유통구조 현상이 대세로 자리를 잡았지만 여전히 오프라인으로 구매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판매의 사각지대를 완전히 봉쇄하겠다는 것이 영양군의 입장이다. 축제의 취소로 대도시 소비자들은 손쉽게 영양고추를 직접 맛보고 구매할 기회가 없어져 영양군은 이러한 기회를 주고자 올해 9월 11일에서 17일까지 7일간 부산 롯데백화점 광복점에서 특별판매 행사를 개최해 김장철을 앞 둔 소비자들의 영양고추 구매 욕구를 해소해 주었다.◇ 농가에 맞춤형 행정을 지원하다.영양군 관내 생산된 건고추에 대해 택배비 50%를 지원한다. 생산자 직거래 주문이 계속 증가한다면 농가에 택배비가 축적돼 결국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택배비 지원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택배비용을 지원하게 되면 농가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택배비 지원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판매를 위한 판로에도 적극 나서 올해 재배한 영양고추를 모두 소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오도창 영양군수는 “지금까지 코로나19로 확산으로 모든 국민들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사태가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기원하며 특히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는 지역 소상공인 및 농가들은 가혹하다고 할 만한 시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모든 행정적 수단을 동원해 위기를 극복하도록 하겠다”며 “이번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이 취소된 것은 재충전하는 시기라 생각하고 내년에 더 발전된 축제로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2020-09-22

웅장하면서 위압감 주지 않는 유장한 아름다움 흐르는 운봉관

청송, 청주, 청도는 이름만으로도 맑아 보이듯이 마을이나 도시의 지명을 보면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청송하면 무언가 푸르고 맑아 보이는 이미지에다 주왕산, 달기약수, 주산지, 청송 심씨 등등이 연상된다. 청송 곳곳에 ‘산소카페’란 슬로건에 청송사과를 브랜드화 하고 있다. 관학인 향교는 고을의 중심에 있기에 반경 5리(2km)를 벗어날 수 없다. 청송향교는 1693년(숙종 19년) 부사 이문징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그리고 세종의 왕비 소헌 왕비가 청송 심씨여서 청송은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육지속의 섬 청송청송은 동으로 영덕, 서로는 의성, 남으로는 영천. 북으로는 영양, 북서로는 안동으로 둘러싸인 육지속의 섬같이 고립되어 있는 듯하지만 주왕산의 독특한 산세와 맑은 기운 가득한 곳이다. 청송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선이 사는 세계’란 뜻인데 풍속은 검소하고 인간의 도리를 잘 지키며(尙儉率), 사람은 순박하고 습속은 순후하다(民淳俗厚)고 하였다.아침저녁으로 처량하게 울어대는 풀벌레소리는 가을을 재촉하고, 청송의 산과 들은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송향교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청아루가 엷은 미소로 맞이하고 자신은 비스듬히 기울고 있는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보통의 향교는 대문 겸 루가 있고 좌우에 동무, 서무에 중앙에 명륜당이 중심을 잡고 일직선으로 공자와 성현들의 위폐를 모신 대성전이 있는데 청송향교는 경사진 뒷산에 공간이 협소하여 옆에다가 지어놓았다. 그리고 대성전은 수리중이라 청아루부터 올랐다. 어느 읍면 도시할 것 없이 하늘로 치솟는 건물 때문에 시야가 막힌다. 2층 누각인 청아루에서 앞을 보니 오른쪽에 교회 철탑 두개가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린다. 기숙사인 동무, 서무, 명륜당 어디에도 유생들과 교관은 없고 푸른 풀들만 속삭이듯 바람결에 공자 가라사대(子曰), 공자 가라사대(子曰) 재잘거린다. 기둥 위에서 종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 굵다란 들보들은 푸른 녹색 용들이 꿈틀거리는 듯하고, 건물의 이력을 말해주는 청아루 중수기가 여기저기 붙어있다.조선시대 지방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목적으로 성현의 위폐를 봉안, 배향하는 향교는 중심 되는 관청 인근에 있다. 청송향교는 1426년(세조 8년)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1606년(선조 39년)에 국동에 대성전을 건립했고, 1629년(인조 7년)에 부사 이구징이 강당과 동무, 서무 등을 보수, 중수했다. 그러다가 1693년(숙종 19년) 부사 이문징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청아루는 1700년(숙종 26년) 부사 이상훈이 증축하고, 1869(고종 6년) 부사 이현기가 대대적인 개,보수를 하였고 1962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성전은 1975년 보수하여 지금 또 보수 공사하고 있었다.명륜당이 향교건축의 중심이다. 이를 기준으로 모든 건축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기능 잃은 향교는 각종 예절교육, 충효 교육 등등을 부정기적으로 프로그램 하는데 청송향교는 ‘산소카페 청송에서 즐기는 풍류체험’의 플래카드가 텅빈 명륜당에 붙어 있었다. 오른쪽 위에는 지금의 청송군청이 온 청송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푸른 청송의 이미지답게 푸른 유리창문으로 해놓았다.#. 청송 심씨 소헌 왕비의 본향, 찬경루와 운봉관우리나라에서 왕비의 본향이라고 이런 귀한 대접을 해준 곳은 아마도 청송뿐일 것이다. 더구나 직접 태어난 고향도 아니고 단지 청송 심씨라는 본만 같을 뿐인데 이런 어머 어마한 대우를 받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향교에서 내려와 청도의 중심부에 소헌 왕비의 이름을 딴 소헌 공원에 갔다. 예전에 처음 왔을 때 깜짝 놀랐다. 시골에 이런 큰 고택이 있다니 마치 종묘같이 길게 늘어선 건물은 무슨 사연이 있기에 더구나 경주, 안동도 아닌 청송 산골에….소현왕비(1395~1446)는 조선 27명의 왕들 중에 가장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1397~1450)의 왕비인데 인품이 훌륭하다고 칭송을 받는 만큼 개인의 고통은 심했다. 소헌왕비의 아버지 심온(1375?~1418)과 할아버지 심덕부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에 참여한 개국공신으로 세종대왕 때 영의정을 하고 있었다. 심온은 세종의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동생 심청은 처형당했고 자신은 의주에서 압송되어 수원고향에서 자결해야 했다. 태종 이방원(1367~1422)이 누구인가. 조선건국과 왕권이란 목적에 조금도 방해가 되면 형제들도 죽여 버리고 26살 때 56살 포은 정몽주(1337~1392)를 죽이고 조선의 틀을 만든 삼봉 정도전(1342~1398)도 죽여 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처남 민무규 형제 4명마저도 처형시키지 않던가. 18년 왕 하다 어질고 총명한 셋째아들 충녕(세종)을 왕으로 앉히고 자신은 상왕으로 있으면서 병권은 쥐고 있었다.소헌왕후(1395~1446)가 14살에 12살의 충녕군과 결혼할 때는 3째 아들 세종이 왕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왕비가 되자마자 삼촌과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리고 어머니는 종이 된다. 심온을 제거한 신하들이 태종이 죽고 나면 왕비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폐출을 주장했지만 왕비 심씨가 자손을 많이 나았으며 세종과 금슬도 좋다는 이유로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태종 자신도 처남 4명을 죽였지만 자신의 아내인 원경왕후 민씨는 왕비로 남겨두었다.그리고 시아버지 태종(이방원}이 죽고 4년 뒤(세종 8년)에야 아버지 심온의 명예가 회복되고 어머니도 신분이 회복된다.태종은 외척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후궁제도를 법으로 정한다. 그래서 세종은 왕비 신씨에서 조선의 왕비와 후궁 전체에서 제일 많은 8남 2녀를 낳았고, 7명의 후궁에서 10남 2녀를 두었다. 태종이 법제화한 후궁제도는 양반가문에서 간택하게 했으나 세 번째 후궁부터는 출신을 따지지 않게 했다. 왕의 선택권을 넓혀주고 궁녀들도 간택될 수 있는 최소한의 희망을 주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그래서 무수리 출신 영조의 어머니 최씨도 후궁이 될 수 있었다.친정이 쑥밭이 되고, 성군이었던 세종도 호색이라 7명의 후궁이 들어왔으나 속으로 곪아터지고 분노를 삼켰을지 모르지만 겉으로 질투는 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세종대의 왕비와 후궁들은 겉으로는 분란이 없었다.#. 친정의 몰락과 맞바꾼 현모양처맨 앞에 2층 찬경루 건물에 갔다. 찬경루는 소현 왕후를 배출한 경사를 찬양한다고 1428년(세종 11)에 청송군수 하담이 건립하였고 화재로 불타자 1688년(숙종 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누의 이름은 하담의 청을 받은 당시 경상관찰사 홍여방이 찬경루 기문에 “지금까지 왕후와 왕족이 끊이지 않은 복을 누리고 있으니 이 누각에서 보광산에 있는 소헌 왕후의 시조 묘를 바라보면 우러러 찬미하게 되어 찬경(讚慶)이라 이름 지었다.”는 아부성 이름이다. 정면4칸 측면4칸 이층이니 16칸이 된다. 소헌왕후의 8왕자들이 각 2칸씩 지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지어낸 말이다. 막내 영응대군(1434~1467)은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 잘 살려 지은 누이고 지방유생들의 백일장 장소로 사용했다. 송백강릉(松栢岡陵) 현판 글씨는 소헌왕후의 셋째아들로 시, 서, 화에 뛰어나 3절이라는 평을 받은 안평대군(1418~1453)의 글씨인데 이 건물 지을 때는 11살이라 그 뒤에 쓴 것이다. 이 건물에서 바라보이는 보광산에 청송 심씨 시조 심흥보의 묘가 있고 저 앞의 용전천 냇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면 여기에서 묘사를 지냈다고 한다.오른쪽 옆에는 청송 심씨 유허비가 서있다. 그 뒤에 운봉관으로 갔다. 이 건물도 찬경루 지을 때 같이 지은 공공 숙박기능인 객사건물인데 굉장히 길고 멋있게 지었다. 서산에 비스듬히 길게 비친 건물 기둥의 그림자가 건물의 당당한 위용을 자랑한다. 웅장하면서 위압감을 주지 않는 유장한 아름다움이 흐른다. 한참을 맴돌다 사람 없는 넓은 청마루에 누워버렸다. 때마침 상큼한 바람이 불어와 하루의 피로를 날려버린다.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마도 소헌왕후는 짧은 행복 긴긴 고통이었을 것이다. 친정이 박살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참담함, 아들 8명이나 낳았지만 다섯째 광평대군은 20살에, 일곱째 평원대군은 19살에 천연두에 걸려 죽는 아픔도 겪는다. 며느리 복도 없어 두 번이나 세자빈을 내쫓고 세 번째 세자빈은 아들(단종) 낳았지만 다음날 산후병으로 죽었다. 4남 임영대군과 막내인 8남 영응대군의 부인도 병 때문에 쫓아내었다. 특히 첫 번째 큰며느리 휘빈 김씨는 학문은 좋아했지만 여색은 별 즐기지 않는 남편(문종)의 사랑을 되돌린다고 좋아하는 여자 신발 뒷 굽을 잘라다 불에 태워 술에 타마시게 하거나 봄에 교접하는 뱀과 붉은 박쥐를 가루 내어 세자(문종) 몰래 먹였다. 이런 회괴한 일들을 시어머니 소헌왕후가 알게 되어 국모의 자질이 없다고 쫒아냈다. 두 번째 며느리 봉씨는 독수공방하다가 동성애(레즈비언) 하여 쫓겨났다. 소헌왕후는 온갖 영욕을 가슴에 담고 52살에 쓸쓸히 죽었다.청송은 1418년(세종 원년)에 소헌왕후 심씨의 본향이라고 보배로운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하고 송생현과 합하여 청송군으로 개칭하였다. 1459년(세조 5년) 안덕현을 병합하여 청송도호부로 승격시켜준다. 이곳 소헌 공원에서 청송→영양→봉화→영월로 걷는 240km 구간의 첫 출발지다. 입구에 청송고을을 다스린 수장들의 송덕비가 있는데 군수 장승원이 이 있었다. 치적이 교량신축인데 관찰사 시켜달라고 20만 냥(당시 관찰사 뇌물 값이 20만 냥) 들고 허위 의병대장에게 찾아간 칠곡 부호였다. 물론 받지 않았다. 허위는….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9-22

‘스틸아트시티’… 새로운 서사의 주인공으로

도시의 미래를 준비하며 발전의 동력을 문화예술에서 찾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도시 경쟁력의 핵심이 산업 생산에서 인문학과 문화예술로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제가 정착되면서 지방자치단체마다 차별화된 도시 브랜드를 만들고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지자체 간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면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 확립을 위한 연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이를 문화예술로 녹여내는 작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포항도 새 활로를 열기 위해 시 차원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노력을 해보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포항시가 사활을 걸고 있는 관광산업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야심차게 준비한 해양관광도시로의 도약은 답보 상태에 있으며 미증유의 지진까지 겪어 도시 이미지에도 타격을 입었다. 그 여파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2019년 전국 주요 관광지의 방문객 조사’에서 포항의 주요 관광지는 단 한 곳도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2018년까지만 하더라도 호미곶의 새천년기념관이 순위권에 들면서 자존심을 지켰지만, 지난해부터는 기념관 관광객 수가 100만 명을 넘지 못하면서 인기순위 바깥으로 밀려났다. KTX와 공항 같은 광역교통망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지자체의 경쟁력이 다른 시·군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다.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포항시는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19년 12월 관련 용역 계약을 체결하고 관광 활성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포항관광 2030 권역별 개발 및 활성화 마스터플랜’이 그것이다. 하지만 연구용역 중간 보고회의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인구수 16배 차 포항vs영덕 작년 관광객 400만vs576만’, 경북매일신문 2020년 8월 10일자 참조). 과연 포항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 것이며, 어떤 미래를 꿈꿔야 하는가?□ 철과 예술이 한몸이 된 페스티벌철강산업의 미래가 어둡다고 한다. 철강도시 포항의 미래도 밝을 수 없다. 이미 세계의 여러 철강도시들이 철강산업의 불황으로 쇠락하였고, 그중 몇몇 도시는 새로운 동력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철강산업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하더라도 포항에서 철은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가야 하고 더 큰 가치를 새롭게 부여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철이 포항의 미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역 문화계에서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대표적인 결과물이 스틸아트페스티벌이다. 스틸아트페스티벌의 산파역 중 한 사람인 김갑수 포항미술관장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이 페스티벌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서 기획되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1995년경에 스페인 빌바오에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어요. 잘 나가던 철강도시가 형편없이 기울어버린 장면을 두 눈으로 보고 깜짝 놀랐지요. 빌바오는 그후로 대규모의 도시재생에 성공하고, 구겐하임 미술관도 유치하면서 다시 일어섰지만 당시는 대단한 충격이었어요. 그때 포스코 생각이 나더군요. 포스코도 머지않아 어려워질 수 있고, 포항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철의 쓰임새를 바꿔서 철을 예술과 한몸이 되도록 해보자. 그래서 돌파구를 찾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고민이 스틸아트페스티벌까지 이어지게 되었지요.”(‘스틸아트시티 포항’ 포항문화재단, 2018년, 76쪽.)요컨대 철을 예술과 한몸이 되도록 함으로써 철강도시의 위기를 돌파해보자는 것이 스틸아트페스티벌의 근본적인 기획 취지이다. 즉 산업의 재료이자 지역의 정체성인 철이 예술가의 창의성과 첨단 과학기술을 만나고 이를 축제와 접목한 것이 스틸아트페스티벌이다.사실 ‘스틸아트’는 미술용어사전에 등재돼 있는 용어가 아니다. 금속재료를 이용한 예술장르를 통칭하는 신조어인데, 쇠는 탄소 포화도에 따라 아이언(철)과 스틸(강)로 구분되므로 철이든 강이든 금속을 주재료로 사용한 예술 장르를 상징적으로 명명한 것이다.□ 21세기형 예술도시의 의지를 반영2012년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을 처음 시작하면서 커미셔너 역할을 했던 오의석은 이 축제의 방향성에 대해 이렇게 규정했다.“전국에 넘쳐나는 수많은 축제 가운데 철을 테마로 한 예술축제는 찾기 힘든 신선하고 특별한 발상이었고 철의 도시 포항만이 기획하고 시도할 수 있는 것이기에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은 철을 산업적 코드에서 문화적 코드로 접근하고 변용해 나감으로써 예술과 산업과 기술을 융합하여 이루어가는 21세기형 예술도시로 포항의 변화를 예고하며 추구해 나가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앞의 책, 144∼145쪽.)‘예술과 산업과 기술을 융합하여 이루어가는 21세기형 예술도시’라는 표현에 스틸아트페스티벌의 방향성이 담겨 있다. 국내 유일의 스틸예술축제인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은 내년에 10주년을 맞이한다. 그동안 포항을 대표하는 예술축제로 성장한 것은 물론, 국내 문화예술계에서도 주목하는 예술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철강도시라는 무거운 회색톤의 도시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는 점, 예술축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은 소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또한 페스티벌에 출품된 스틸아트 작품 130여 점을 작품 성격과 잘 어울리는 장소에 재배치함으로써 도시경관을 개선한 것은 물론, 문화예술도시의 면모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대부분의 축제가 취소되었으나 스틸아트페스티벌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코로나 시대에 맞춰 무대행사는 지양하지만, ‘온고지신, 새로운 10년을 향하여’라는 주제를 정하고 영일대해수욕장을 비롯해 포항운하, 철길숲, 오천예술로 등지에서 작품투어 형식으로 진행된다. 스틸아트 투어앱을 개발해 작품의 위치와 해설을 제공함으로써 시민들과 소통하는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스틸아트시티 담론의 필요성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이 처음 열린 2012년부터 조각 예술가들 사이에서 포항은 스틸아트의 메카로 인정받았다. 그만큼 이 예술축제의 지향점이 확실했고, 메시지도 강렬했다. 국내 거의 모든 조각가들이 포항을 주목했고, 금속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작가군이 두터워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틸아트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작품의 수준이 획기적으로 향상되는 효과를 불러왔다. 스틸아트페스티벌 10년의 역사는 또 다른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 2018년 스틸아트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았던 김노암의 발언을 들어보자.“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이 조각과 설치미술, 키네틱아트와 미디어파사드,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현대미술로 장르와 형식을 확장해가리라 기대하면서, 인류의 역사와 함께 동북아의 대륙을 용맹하게 달리던 유목민족의 철기문명이 한반도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포항에서 현대의 철의 산업과 문화를 꽃피우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진 일이다. 포항의 철강산업이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조각작품, 설치미술이 만나는 아트페스티벌로서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이 현대예술과 시민이 함께 공감하고 호흡하며 대화하는 장으로 발전하길 기대한다.”(앞의 책, 171쪽.)오랜 세월 철을 매개로 포항 안에서 싹을 틔우고 성장해 온 포항만의 고유한 개성과 가치를 새로운 문화 담론으로 만들 때가 되었다. 그 담론을 ‘스틸아트시티’라 부를 수 있겠다. 스틸아트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품게 된 문제의식과 미학적 실험을 도시 곳곳에 전면화하는 것이 스틸아트시티이다. 그동안의 페스티벌을 통해 많은 스틸아트 작품이 도시에 곳곳에 배치되었고, 스틸아트공방에서 시민들이 스틸아트 제작기술을 배우고 있다. 지역의 철강기업이 직접 스틸아트 작품을 제작해 페스티벌에 출품하는 것도 페스티벌의 대중성을 강화하는 데 적지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스틸아트시티의 골격은 이미 갖추어져 있다. 스틸아트시티라는 새로운 담론을 통해 그동안의 문제의식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지역의 미래를 본격적으로 바꿔나가는 동력으로 만들어야 한다.스틸아트시티는 지역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철강도시가 철과 예술의 융합을 기반으로 진정한 문화예술도시로 새롭게 거듭나는 서사를 도시 곳곳에 실현하는 실험이다. 예술가와 시민, 행정기관이 창조적인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한 도시를 스틸아트공원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 작업의 연장선에서 우리는 좀 더 과감한 상상을 해볼 수 있겠다.이를테면, 2021년 폐쇄가 결정된 포스코 포항제철소 1고로를 스틸아트와 연계한 문화관광 인프라로 활용해보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스틸아트시티 실현을 위한 과제스틸아트페스티벌을 플랫폼으로 진정한 스틸아트시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점검해야 할 과제가 있다.첫째, 매년 개최되는 방식의 페스티벌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점검해보고 필요하다면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로의 전환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둘째, 국제적 수준의 스틸조각공원 조성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셋째, 스틸아트공방 등 시민참여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할 필요가 있다. 넷째, 스틸아트시티 실현을 위한 세미나, 심포지엄 등 본격적인 공론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섯째,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안을 고려한다면 스틸아트페스티벌 조직위원회 같은 독립된 기구에서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틸아트시티의 필요성과 방향성에 대한 시민적 공감대를 확보하는 것이다. 어떤 담론이나 정책도 시민들이 공감하고 지지를 보내야 확실한 동력이 생긴다. 아무리 좋은 담론이나 정책도 시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생산적인 담론의 활성화는 시민의식의 수준과 도시 공동체에 대한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스틸아트페스티벌의 잠재력을 더 확장하는 것은 물론, 스틸아트시티 담론을 활성화하는 것은 매우 긴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예술이 일상이 되는 품격 높은 도시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사진/안성용류영재 화가글/류영재화가.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포항시립미술관 건립추진위원장·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 운영위원장·장두건미술상 제정 및 운영위원 역임.

2020-09-21

여유롭고 넉넉한 웃음에 담겨진 ‘신라인의 미소’

낯선 도시를 방문한다는 건 그 공간이 간직한 고유의 문물을 접하고,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행위다. 우리는 이걸 ‘여행’이라 부른다.신라 천년의 빛나는 유적·유물과 즐겁게 조우할 수 있는 경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최고의 여행지 중 한 곳. 하지만,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과 경기도에 사는 지인들은 가끔 묻는다.“경상도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던데, 경주도 그래?”이 물음 앞에 설 때면 기자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100년의 역사를 지닌 경주 중앙시장. 무거운 짐을 옮기는 할머니가 있어 아주 잠깐 도와줬다. 그 작은 도움에도 기어코 잘 삶은 수육 한 점을 입 안에 넣어주는 늙은 상인의 환한 웃음이 생전의 내 할머니와 닮아 있었다. 따스하고 푸근했다.점심을 먹기 위해 한두 차례 들렀던 식당. 비싸고 거창한 레스토랑이 아니었다. 손님들의 접시가 비면 청하지 않았음에도 거기 담겼던 반찬을 몇 번이고 다시 가져다주는 정겨운 풍경. 주인장은 32년 동안 경주에서 밥집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고 말했다.거리에서 길을 묻거나, 택시에 올라 “혼자 보기 아까웠던 추천 관광지가 있나요”라고 궁금증을 표했을 때도 상세하고 정겨운 설명이 돌아왔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경주에도 드러내지 않는 깊은 ‘속정’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니 무뚝뚝함과 불친절이란 경상도에 관한 선입견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얼굴무늬 수막새에 새겨진 ‘서라벌 사람의 웃음’높낮이를 달리하며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왕릉들, 철마다 피어 관광객을 설레게 하는 갖가지 꽃들, 1천 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사람들 앞에 선 국보급 유적과 유물들,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를 보여주는 박물관들….서라벌은 보물이 지천인 공간이다. 여기에 한 가지 보물이 또 더해질 수 있으니 바로 경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그들은 여유롭고 넉넉한 웃음을 지녔다. 세상 오만 가지 유혹에도 과한 욕심 내지 않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할 줄 안다.예술가와 역사학자들이 입을 모아 “이것이 바로 신라인의 미소”라고 말하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제2010호)를 몇 해 전 TV 화면에서 본 적이 있다. 담담하게 씨익 웃고 있는 달관의 표정.수막새는 목조 건물 지붕 기왓골 끝에 사용되는 기와다. 그 옛날 신라 사람들은 기와 한 장에도 해학적 감각을 담아낼 줄 알았다.오늘날 경주시민들의 핏속에 분명 신라인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을 터. 두 웃음이 닮은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경주 얼굴무늬 수막새의 내력은 경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신라시대 원와당(圓瓦當)으로 일제강점기 경주 사정리(沙正里·현 사정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1934년 일본인 다나카 도시노부가 골동상점에서 구입해 당시부터 고고학 자료를 통해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일본으로 반출됐으나 1972년 국내로 반환됐다.틀에 찍어 일률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형태를 잡은 후 손으로 직접 빚어 얼굴의 세부 형상을 만들고 도구를 사용해 마무리한 작품. 자연스럽고 정교한 솜씨로 보아 숙련된 장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실제 사용한 흔적도 있다.오른쪽 하단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 잔잔한 미소가 조화를 이루며 신라인들의 염원과 이상향을 구현한 듯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다. 소박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냈고, 당시 우수한 와당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다.”웃음은 인간이 수난과 고통을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이 돼준다. 그건 까마득한 옛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천년왕국 신라의 백성들은 보일 듯 말 듯 잔잔한 미소를 통해 때때로 닥쳐왔을 곤궁과 어려움을 저 멀리 밀어낼 줄 알았던 현명한 사람들이 아니었을지.‘미소’ 외에도 서라벌 사람들과 경주시민의 유사점은 또 있다. 바로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에 능하다는 것.◆ ‘이야기’가 지닌 귀한 가치를 알았던 신라인들올해만 열 번 넘게 경주를 찾았다. 당연지사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드물지만, 일단 말문이 트이면 친절하고 재밌는 어법으로 대화를 주도하는 게 경주 사람들이다.‘이야기’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을 이어주는 가장 효과적인 매개체다. 최소 1천 년 전 세상을 살았던 서라벌 사람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가 뭐냐고?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출간한 ‘신라인의 생활과 문화’엔 아래와 같은 대목이 나온다. 위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읽힌다.“신라인들은 일상생활을 매우 다채롭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통하여 사람과 신성(神性)이나 혼령 사이에 관계와 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과 동식물의 관계와 소통도 있었다. 신라 사람들의 열린 상상력은 사람과 다른 존재들 사이의 관계까지도 설정하여 보여주었다. 용을 비롯한 온갖 동물과 식물, 불보살(佛菩薩·부처와 보살), 귀신 등 사람 아닌 존재들이 신라 사람들의 이야기에 등장했다. 신라 사람들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개방적이었고, 그래서 관계의 공간도 확장시켰다.”오래전 같은 땅에 살았던 서라벌 사람들의 기질과 성정을 DNA가 기억하는 것일까?오늘날 경주시민들도 타자(他者)를 접하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우호적이며 개방적이라 느껴졌다. 이는 경주가 ‘손꼽히는 관광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가 아닐지.위에서 언급한 책은 ‘이야기’가 지닌 귀중한 가치를 일찌감치 인지했던 신라인의 지혜를 이어서 서술하고 있다.“신라의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어주고, 잘 풀리지 않던 문제도 풀리게 해주었다. 이야기를 하고 듣는 사람들이 봉착한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나 수단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라 사람들에게 이야기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낙관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윤활제이며 동력이 됐다.”◆ ‘사람’ 때문에 다시 찾고 싶은 도시 경주앞서도 말했지만 경주 여행의 즐거움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잘 보존된 유적과 유물만이 아니다. 각종 박물관은 한국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귀한 공간이다. 남산과 보문호수 주변을 거닐며 소나무 향기에 매혹되는 낭만도 경주만이 가진 매력. 최근 ‘젊은이들의 거리’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황리단길에선 다양한 맛집을 찾아다니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이 모든 ‘경주의 즐거움’을 만들어낸 이들이 바로 ‘경주 사람들’ 아닐까?세상을 관조하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매개로 자신과 다른 존재들의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줄 아는 사람들.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만약 한 도시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 이유는 거기서 만난 사람들의 배려와 인정 때문이 아닐지.서라벌을 삶의 근거지 삼아 길고도 긴 생을 이어온 신라인들. 그들 후손의 선량한 웃음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라도 가까운 날을 정해 다시 한 번 경주에 가야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끝

2020-09-17

청동기시대 한반도 문화의 지형을 바꾼 칠포 암각화

영일만을 특징짓는 문화의 시원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암각화에서 찾을 수 있다. 장기면 산서 새터마을 같은 구석기 유적이나 신석기시대 유물이 나온 곳도 있지만, 그것을 지역의 특성으로 볼 만한 수준은 아니다.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의 하나이다. 유럽에서부터 인도, 인도차이나반도와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6만 기 정도가 있고, 그중 약 4만 기가 한반도에 분포한다. 그런 까닭에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 대부분은 서해안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영남지방에서는 영일만 일대에서 내륙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형산강 수계를 따라가며 높은 밀도로 분포된 고인돌을 보고 사람들은 진작부터 영일만을 일러 ‘고인돌의 고장’이라 하여 왔다.□ 암각화, 다양한 소재로 이뤄진 상징성 깊은 유물영일만 일대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 무덤은 기계천 주변을 따라가며 있다. 기계면 성계리가 대표적인 곳이며, 인비리에서 구지리의 들판과 언덕에서도 고인돌은 옛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 빼어난 것을 고르라면 문성리 고인돌을 꼽고 싶다. 가로·세로·높이 480×270×390㎝ 크기의 듬직하고 당당한 모습은 주변을 압도한다. 크기로 치자면 성계리 노당재, 속칭 칠성고개의 270톤이나 되는 고인돌도 볼만하다.영일만 문화의 시원을 고인돌만으로 다 말할 수는 없다. 고인돌은 영일만 바깥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각화를 그 자리에 놓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암각화란 자연 속에 있는 바위 표면에 그림이나 조형 이미지를 새긴 것을 말한다. 문헌 기록이 없던 시대, 사람들의 삶의 내용이나 정신적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로 암각화만한 것이 없다. 그 내용을 분석할 수 있다면, 선사시대 인류의 잃어버린 많은 것을 되살릴 수 있게 된다.영일만에서 암각화는 1985년 기계면 인비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기계면에서 기북면으로 들어가는 길목 초입에 여러 점의 고인돌이 늘어서 있다. 이를 ‘인비리 지석묘군’이라 하는데, 암각화는 그중 한 고인돌에서 확인되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고인돌 덮개돌의 남쪽 암면(岩面)에서 석검과 화살촉 모양을 새긴 것이 세 점 나온 것이다. 단단한 석영과 같은 돌을 두드려 만든 석검 모양은 검날보다 훨씬 더 큰 손잡이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암각화가 발견되면서 인비리 고인돌은 이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고인돌이 되었다.□ 칠포리 암각화, 규모와 상징성에서 각별한 의미 지녀1989년 11월부터 필자가 발견·조사한 칠포리 암각화는 한반도에서 가장 넓게 분포하는 암각화 유적으로, 해발 177m 곤륜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다. 칠포리 암각화는 곤륜산의 두 곳을 비롯해 칠포리 마을 뒤 상두들의 고인돌, 제단 유적과 함께,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소동천 옆의 농발재 및 신흥리 마을뒷산 오줌바위를 포함하면 이 일대 7개소에서 조사되었다.이곳에서 나온 암각화는 석검 손잡이 모양의 검파형암각화(劍把形岩刻畵)를 중심으로 석검형, 윷판형, 여성성기형 등이 있는데 이중 검파형암각화가 가장 많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검파형암각화 중에는 길이가 100㎝나 되는 것도 있으며, 그것은 우리나라 암각화에서 최대 크기로 기록된다.칠포리 암각화는 규모와 조형성, 상징성 등에서 다른 암각화 유적과는 차이가 크다. 또한 다른 암각화를 찾아내는 데 자극이 되었고, 우리나라 선사시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영일만에서는 칠포리 외에 동해면 신정리에서도 같은 형태의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암각화는 왜 만들었던 것일까? 한 마디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간절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선사시대 사람들의 평온한 삶을 희구하는 지순한 노력이 암각화로 표출되었다고 할 것이다.□ 석검 손잡이에 풍요의 의미 담은 작은 홈 새겨암각화가 처음 만들어진 배경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바위의 상징성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그동안 무심하게 바라보았던 저 바위가 어느 날부턴가 “사자(死者)의 시신을 가두고 영혼이 머무는 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영혼의 정화를 돕고, 마침내 재생으로 이끄는 힘이 있는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데블리트 М.А)는 것이다. 그러한 자각은 신석기시대부터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일만에서는 기원전 7∼6세기 고인돌이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후 영일만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위를 바라보게 되었고 암각화를 새기게 된 것이다.농경이 크게 발전하는 단계에 와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신성(神聖)을 갈망하게 되었다. 자연 정령이라는 모호한 대상보다는 실재하는 ‘나’라는 존재의 근본으로서 조상신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생전 영웅적 업적을 남긴 조상이 머무는 신성한 공간에 그들의 소망을 담은 ‘어떤 것’을 새긴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것이 기계면 인비리의 한 고인돌에 석검 모양의 암각화로 나타난 것이다.그런 석검을 왜 새긴 것일까? 돌을 다듬어서 만든 석검은 처음부터 도구로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청동기문화의 표본적 유물인 비파형 동검을 모방해 일종의 모조품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 모조품은 광주 신창동 유적과 같은 곳에서 비파형 동검을 본뜬 나무검(木劍)이 저습지에 꽂힌 채 나오기도 했다. 또 한 번의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왜 그렇게 애를 써서 석검과 나무검을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비파형 동검은 도구 이외의 또 다른 기능이 있다. 그것은 비파형 동검을 이용해 하늘의 천둥 번개를 부르기 위한, 궁극적으로는 비를 부르기 위한 제사의 신성구(神聖具)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그 기능성에 주목해 한반도 남쪽지방에서는 결코 구하기 쉽지 않은 청동검을 모방해 돌을 깎아 석검을 만들고 나무검도 만들었다. 결국 그 모두는 기우제를 위한 것이었다.특이한 것은 형산강 주변의 사람들은 그것을 복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석검의 손잡이에 풍요 의미를 더하여 작은 홈을 새기는 독특한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그런 석검이 흥해 초곡리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바위의 상징성에 눈 뜬 사람들은 의례에 사용되는 석검을 고인돌에 새기게 된 것이다. 실물로서 석검이 바위그림으로 재현된 것이다. 검이 물의 안정적 공급을 빌기 위한 신성구였다면, 그 목적을 더 절실하게 달성하기 위해 조상의 무덤인 고인돌에 새기는 행위로 나타나게 되었다. 영일만에서 암각화의 탄생이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영일만 암각화, 선사시대 한반도 문화의 표상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인비리에서 발견된 두 점의 석검 암각화에는 손잡이에 작은 홈이 있다. 형산강 주변에서 유행한 모양 그대로이다. 이 석검 암각화는 내재적 발전을 거듭해 칠포리에서 손잡이만을 중점 묘사하는 검파형암각화로 나타났다. 도구적 기능을 완전 제거하고 온전히 상징성만을 강조한 것이다. 칠포리 사람들이 이러한 형태를 만들어내면서 영일만 암각화는 독자적 형태를 갖게 되었다. 우리 지역의 문화사적 가치를 이 새로운 조형물의 탄생에서 찾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청동기시대 후기의 조형사조는 ‘부분이 전체를 대신한다’는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로 등장하게 된 검파형암각화는 영일만 암각화의 전반을 아우르는 용어가 되었다. 경주의 석장동 암각화도 포함하는 이러한 유형이 영일만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검파형암각화는 우리나라 12개 지역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계통적 유형의 첫머리에 칠포리 암각화를 두고 있다. 칠포리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넓은 지역으로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칠포리에서 동해면 신정리, 경주 석장동을 지나 영천 보성리로 전파되었다. 점진적으로 서쪽으로 이동해간 검파형암각화는 고령 장기리, 안화리, 지산리 암각화에서도 나타났다. 그리고 지리산을 넘어 남원 대곡리 암각화로 발전하기에 이르며, 최근에는 군위 수서리에서도 새롭게 암각화가 조사되었다. 그동안 조사된 10개의 검파형암각화 외에 이 유형의 소멸기 단계 유적으로 판단되는 영주 가흥동 암각화와 경주 안심리 암각화를 포함하면, 한반도 남부지방 동쪽에서 서쪽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칠포리에서 나온 검파형암각화이다.이러한 검파형암각화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조사되면서 분명해진 것은 그 원형으로서 선사시대 영일만 문화의 중요성이다. 그런 까닭에 칠포리 암각화는 발견과 동시에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던 것이다. 칠포리에서 처음 만들어진 검파형암각화는 그렇게 그 시대 사람의 정신사적 표상이 되면서 청동기시대 후반기 한반도 남부지역의 문화사적 지형을 바꾸었으며, 지금도 우리 문화사의 중요한 표본으로 남아 있다. 그때의 빛나는 가치를 다시금 증명하여 후대에 잘 전달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들의 책무로 남아 있다. 사진/안성용글/이하우울산대 반구대연구소 교수. 화가. 현재 한국암각화학회 이사. 한국·호주에서 개인전 3회, 그룹 기획전 260회 참가. ‘한국 암각화의 제의표현에 관하여’로 문학박사 취득. ‘한국 암각화의 제의성’ 등 다수의 저서와 연구논문이 있다.

2020-09-17

자연으로 채우는 삶과 예술은 하늘이 준 축복

파계로를 따라 가면 자연염색박물관 표지판이 보인다. 좁은 샛길로 접어들어 푸른 들녘과 밭고랑 사이의 질서정연한 간격을 보며 길 끝까지 간다. 박물관은 인근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김지희 자연염색 명인이 나와서 반겨주신다. 체험실 입구에 노랗게 마른 홍화가 평상에 가지런히 누워 있다. 홍화 꽃을 보고 싶으면 두어 가지 들고 가서 씨를 털어보라는 말에 체면 차리지 않고 꽃망울이 선명한 가지 하나를 골랐다. 아름다운 홍화의 개화가 기대된다.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흰옷을 즐겨 입었다. 끊임없이 일손을 요구하는 흰옷을 감당 못한 여인들이 승복에 잿물을 들이듯 염료를 생각해내기에 이르렀다. 여인들은 자연에서 얻은 염료에 흰 천을 담가 색을 들인 후에 옷을 지어 평상복으로 입었다. 옷을 입다 색이 희석되면 뜯어서 염색한 후에 다시 옷을 지었다. 옛 여인들은 자연에서 찾아낸 염료를 옷감에도 입히고 음식에도 입히는 지혜를 발휘했다. 진달래 꽃잎으로 화전을 굽고 뿌리와 가지로 염료를 내는 비법을 어떻게 찾았을까. 치자의 노란 물을 음식에 사용하는 법은 또 어떻게 알아냈는지.“박물관을 언제 열었어요?”“2005년에 대구가톨릭대 교수직에서 퇴임하고 사재를 털어서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염색박물관을 지었어요.”명인은 열악한 한국의 염료세계를 넓게 확장하고, 평생을 기울여 배우고 연구해온 염료의 지식과 경험을 후학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박물관을 지었다고 했다. 직접 뛰어다니며 배우고 익힌 것을 후학들에게 넘겨주고 싶다는 말씀이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이의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밭이었다고 한다.“여기다 쪽씨와 홍화씨를 뿌려 가꾸었어요.”일년초는 그때그때 심지 않으면 단절된다며 그 연세에도 밭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 우리의 어머니들이 살아오신 것처럼 명인의 어머니도 누에를 길러서 명주실을 뽑고, 길쌈으로 명주를 짜내고 염색까지 할 때, 명인은 옆에서 거들고 배우며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고 했다. 어머니가 하얀 천에 쪽물을 들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며, 풀물에 담갔다 꺼내면 하얀 천이 놀랍게도 초록으로 물든 후 파랗게 변하는 모습이 너무나 신비로웠다고 한다. 어머니와 길쌈하던 노인들이 모두 명인의 스승님이셨다.“어린 시절을 어디서 보냈어요?”“오사카에서 태어나 여덟 살까지 살았어요.”일본에서 여덟 살까지 살다 창원 덕산에서 살았다며, 숲이 가깝고 들판에 온통 야생초가 자라고 있어서 일찍부터 자연을 가까이 하고 살았고, 공예과 염색 담당교수로 연구소에 계시며 우리 것에 대한 탐구와 연구를 하고 산 덕분에 자연염료의 세계에서도 토속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코로나 때문에 활동도 못 하시고, 시간을 어떻게 보내세요?”“그림을 그려요.”초등학생일 때 수채화를 그려 유네스코 상을 받았고, 고등학교에서 미술실기대회에 나갔고, 서울대학교에서 응용미술학을 전공했으니 그림에 애착을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연염색 명인으로 살아온 과정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평생 연구해본 학문과 경험을 살려 후진들이 자연염색의 세계를 길이 보전할 수 있도록 연구의 사료를 남기는 일도 중요하다며, 자연염색 명인 ‘김지희’만의 책을 낼 의지를 내보인다.1979년에 김지희 명인은 석사를 마치고 일본 동경대학교 대학원 연구원으로 염직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올 때 쪽씨 다섯 알을 가져왔다. 본래 우리 것이었던 쪽씨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나라가 온갖 풍파를 다 겪느라 남아 있는 게 없었네요.”“일제식민지와 6·25 같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전통은 무너지고 아름다운 우리 것이 정체성을 잃으며 사라졌어요.”험난한 세월은 고전 대대로 이어져오던 길쌈 문화와 자연염색의 세계까지 파괴시켰다. 민중의 삶이나 다름없었던 토속적인 문화가 사라지면서 쪽씨조차 말라버려 존재를 찾기가 어려운 점을 생각하고 명인은 자연염색만이라도 우리의 것, 우리나라만의 색상을 되찾기로 했다. 쪽씨와 홍화씨를 땅에 묻고 가꾸며 명인은 본격적으로 염료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정성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염색이 뭐예요?”“홍화의 붉은 색과 푸른 쪽빛이 가장 예민하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요.”김지희 명인은 자연염색박물관에 사각문교힐, 만자 초화문교힐, 기하문과 호접문의 교힐 재현이라는 이름의 쪽빛 무늬 천을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었다. 홍화와 쪽은 염료가 고와서 자연염색을 하시는 분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며 매염제에 따라서 다양한 색상으로 추출되는 자연염색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조곤조곤 들려주신다.명인은 교직생활을 할 때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세계 염색가와 말레이시아 학자들과 교류를 많이 했다며, 세계대회 중에 명인은 대나무 잎을 동시에 준비해서 연구를 해보자고 제의했다. 대나무 잎 염색은 신월대의 큰 잎을 사용하는데 동매염을 한다며, 구리가루를 매염제로 사용하면 고운 연두색이 나온다고 한다. 두 나라가 똑같이 대나무 잎에서 염색을 추출한 후 두 번 염색해서 비교 분석하게 되었다. 실험 결과가 어떻게 나왔느냐고 물었다. 연두색의 고운 염료가 추출되었는데 우리 땅에서 자란 대나무 잎이 훨씬 색이 진하고 아름다웠다고 명인이 자랑스러워했다.그 밖에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에서 염료를 추출하는 과정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었다. 이끼를 암모니아수에 담가서 색을 추출하면 보라색이 나오고, 억새에서 국방색이 나온다거나, 진달래의 뿌리를 태운 재로 비둘기색이나 회색의 염료를 추출해서 스님이 입으시는 승복을 만든다는 마술 같은 얘기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명인은 자연에서 받은 것은 자연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일러주신다. 색을 추출하고 난 찌꺼기를 땅에 묻어주고, 진달래나무의 뿌리를 뽑는 대신 꽃을 보고 난 후에 잘라낸 나뭇가지로 염료를 추출한다거나, 화공약품이 들어간 매염제는 따로 모아두었다가 수거해가는 사람들에게 보내야 한다는 등, 자연에 대한 사랑이 애틋하다.“염색을 하며 가장 중심에 둔 철학이 뭐예요?”“거듭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우리만의 것, 자신만의 것이에요. 제자들이 그걸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명인이 된 것도 하늘의 뜻이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기술을 후학들에게 모두 가르쳐주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자연염료를 복원하며, 제자를 길러내고, 명인 아카데미를 열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덧붙여 주신다. 사회에 기여할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 명인이라고. 책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다며 문헌이나 책을 참고로 하면 실수가 없는 반면, 새로운 연구와 창의적인 연구에는 실패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하신다. 자기만의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런 실험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말씀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자연염색이 제대로 정착되려면 각 분야별로 역할이 있어야 하고, 네트워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사회적인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지 않아 연구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허가와 인증을 받지 못하는 애로사항을 겪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하신다. 무엇보다도 네트워크가 이루어져야 소통이 쉽고 연구 과정이 지연된다거나 뜻하지 않게 번거로운 과정으로 인한 좌절을 방지할 수 있고, 학자들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수 있다고 말 매듭을 지으신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