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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예술인 장계향 그리고 소설가 이문열… 문향이 깃든 마을

현대 삶의 조건에서 주거지역은 산지보다 넓은 평지를 선호하지만, 농경사회에서는 산이 있고 냇물이 흐르는 산골이 살기가 더 좋았다. 영양은 높고 낮은 산이 감싸고 맑은 냇물이 흐르면서 바닷가에서도 적당히 떨어져있는 그야말로 현실 속에 무릉도원을 꿈꿀 수 있는 곳이다. 영양은 글자 그대로 영양가 높은 곳이다. 그래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자 1640년, 석계 이시명과 장계향은 영해에서 가솔 30여 명을 데리고 이 마을에 정착한다. 그때부터 재령이씨 집성촌이 된다. 이런 연유로 주곡고택과 유우당고택을 석보 주남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온다.#. 문화의 향기가 스며있는 두들마을 가는 길영덕, 청송 진보를 거쳐 영양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신록이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뽐내고 있는데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가 일상화되어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고 어쩌다 차들만 간혹 만날 뿐이다. 아마 조선시대의 풍경이 이랬을 것이다. 석보로 접어들자 길옆에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동상이 길손에게 조선 독립을 외치고 있었다. 남자현(1872~1933)은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고 남편 김영주가 의병으로 1896년 청송진보전투에서 전사하자 민족 계몽운동 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유복자 김성삼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생가 터에 동상과 순국비와 집을 지어놓았지만 관리가 허술하여 마당에는 징그러운 뱀이 가까이 갈 때까지도 떠날 줄을 모르고, 청마루에는 오래전에 죽은 새가 쓰러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독립운동한 집이나 유적지에는 엉망으로 관리할까.두들마을 전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외곽부터 찬찬히 둘러보았다. ‘두들’의 뜻대로 언덕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제일위의 산기슭에 음식디미방 문화체험원은 한옥으로 잘 지었지만, 어느 왕조의 궁궐 같았다. 휼륭한 사람 선양하고 알리는 것은 중요하지만 대한민국 곳곳에 관광객 유치란 역사적 사명을 띠고 대규모위락시설과 건물들을 짓는다. 인구는 줄고, 관이 동원하지 않으면 대규모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시대는 지났다. 이렇게 큰 건물 지어놓고 관리는 어떻게 할까. 걱정스럽다.지금은 개인의 브랜드화에다 혼밥, 혼술에 홀로여행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더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될 조짐이다. 문화체험원 아래는 옮겨온 주곡고택이 초라하게 웅크리고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다.#. 옮겨온 주곡고택과 유우정고택주곡고택은 석보 주남리에 유학자 이도(1636~1712)가 지은 집을 1830년에 이곳에 옮겨지은 집이다. 이 고택도 따뜻한 남부 지방의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되어있는 개방형이 아니라 추운 북부지방의 환경에 따라 사랑채 안채가 서로 스크램 짜듯이 부둥켜안고 있는 ‘ㅁ’자형(뜰집형)의 집이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윤기 사라진 고택이 더욱 스산했으나 집 앞에 하얀 찔레꽃 향기가 일말의 생기를 넣어주고 있다.두들마을 중간에 석계고택과 장계향 유허비가 있고 연이어 여러 고택들이 있는데 음식디미방 전시관, 교육관, 예절관, 유물전시관, 체험관 등 온통 마을 곳곳에 너무 많이 해놓았다. 마을 왼쪽 끝에는 석보 주남리에 이상도(1773~1835)가 죽기 2년 전인 1833년에 지은 집을 후손 이돈호(1869~1942)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처음 건립한 이병도의 장남 이기찬의 호가 유우당이라 그대로 당호로 하였다. 이 집을 옮긴 이돈호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한다. 이 유우당에서 태어난 조카 이병각(1910~1941)은 청년, 민중운동을 한 항일시인으로 시와 산문, 평론을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하다가 일찍 요절하여 빛을 발하지 못했다. 병든 몸으로 직접 한지에다 붓으로 쓴 시집 첫 장에 ‘가장 괴로운 시대에 나를 나허주신 어머님께 드리노라’며 괴로운 식민지 시대를 대변한다.“동풍이 불면 호수는 외로워지고/ 나의 소녀는 나비처럼 지쳐진답니다./ ‘연모(戀慕)’ 한 구절과 /밤은 외로운 창에 기대여/ 차운 달과 함께 새움니다.” 회야곡(悔夜曲) 한 구절로 그의 시상을 떠올려본다.그 옆에 붙어있는 석간고택은 석계 이시명과 장계향의 넷째 아들 항재 이승일(1631~1698)의 7세손 좌해 이수영(1809~1892)의 집이다. 이수영의 5세손인 소설가 이문열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이기도 하다. 석간고택 앞에는 석천서당이 단단하고 힘 있게 버티고 있었다. 석계 이시명이 입향하여 초가로 강학을 하던 곳인데 후손과 유림이 중건하여 재령이씨 집성촌인 이 두들 마을의 문필이 이어지게 하여 이문열 같은 우뚝한 소설가가 나온다. 안동의 전주유씨 무실파 유씨들도 기양서당의 교육이 문필이 끊어지지 않는 맥이 이어져 유안진 시인도 이런 자양분을 받고 자란 덕분이다.#. 광제원과 원리(두들)마을과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우리나라 의술이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오른 시발점은 1885년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광혜원이고, 국민의 질병치료목적으로 1900년에 설립한 국립병원이 광제원이다. 그래서 이 마을도 조선시대 광제원이 있었다고 원리마을이다. 석계는 교육으로, 장계향은 빈민들과 어려운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광제원이 생기기 260년(1640년 입향)전부터 그 역할을 수행했다. 신사임당은 율곡 같은 천재를 낳았지만, 자아가 뚜렷한 자유분방한 예술가였는데 국가에서 장려한 현모양처라면, 시댁과 시가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에게 베푼 진정한 현모양처이다. 공자도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사랑의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일까. 상대방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출발해야 된다.검소한 건물의 석계고택 위에는 80~90년대 소설로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이문열의 집필실 겸 광산문학연구소를 둘러보았다. 너무 크고 웅장한 건물을 둘러보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베스트셀러 덕분에 엄청난 인쇄가 들어와 고향 문중 땅을 사서 한국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를 양성하기 위하여 문학연구소를 개인 사비로 한옥을 지었지만 지금은 인쇄수입이 거의 없는 상태라 유지하지 못하는 유령의 집이 되어버렸다. 뜻은 좋았으나 작가들 대부분은 공간이 작아도 자신만의 방에서 우주적인 무한한 상상력과 집필욕구가 생기는 것이지 이렇게 ‘ㅁ’자로 붙어있는 큰 건물은 세미나용이지 창작의 산실은 아니다. 큰 세미나용 1채 정도를 짓고 나머지는 방 하나 청마루 한 칸, 부엌과 화장실 공간의 원룸식 조그마한 한옥 한 채씩 지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흔히 가수가 자신의 노래 가사 대로 산다는 말이 있다. 차중광은 27살에 낙엽 따라 가버렸고, 권혜경은 ‘산장의 여인’노래대로 쓸쓸히 죽었고, 곡예사의 첫사랑같이 줄을 타며 잠시 행복하다가 50살에 가버린 박경애, 반면에 무명가수에서 ‘쨍하고 해뜰 날’로 쨍한 송대관도 있다. 인기 작가 이문열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책 제목같이 추락하는 일그러진 영웅이 되어버렸다. 2001년 지역감정, 이념, 색깔론을 편향된 극우적인 발언으로 ‘이문열돕기운동본부’에서 전국에서 모은 733권을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의 이문열의 작업실 ‘부악문원’ 앞에 가서 “반납 받지 않으면 고물상에 10원에 팔아 버리겠습니다.”의 고통스런 아픔을 겪어야 했다.현대의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고전으로 후세까지 남아있을 책들은 있을까.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은 70년대,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는 80년대에 감성에 어울리는 소설들이다. 대중의 인기란 물거품 같은 것이다. 예전에는 ‘권력의 프레임’으로 걸출한 영웅이나 카리스마적인 최고의 지도자가 그 시대를 끌어갔다면, 다원화된 지금은 ‘평등의 프레임’으로 각자 개인의 영웅시대가 되었다.한국최고의 인기작가 반열에 오른 대중작가였고, 한국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이었지만, 대중에게 잊혀져가는 것은 왜일까. 장편 30편, 중단편 60편이 넘고,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쏟아냈다. 이문열 작가의 말대로 “모친이 임신했을 때 좌익 활동을 하는 부친을 도와 전단지를 돌리다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다. 부친이 “배 속에서부터 치열하게 싸우는 투사라며 이열이라고 이름 지었다. 좌익투사이름을 타고난 내가 ‘보수우파골통’소리를 듣는 상황이다.”고 했다.두들마을은 차와 관광객 위주로 꾸미다보니 옛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골목길도 없다. 너무 많은 장계향 체험관을 지어 활용도가 떨어져 2002년 19억원 들여 지은 장계향 예절관과 유물관을 이문열의 광산문학연구소와 합쳐 경북도와 영양군이 25억원 들여 ‘이문열 문학관’을 짓는다.건축가 김수근은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것은 넓을수록 좋다.“고 했고 근대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Miss Van der Roeh)는 “덜 장식적이어야 더 아름답다.”라고 건축미학의 역설을 설파했다. 우리시대 “모든 건축은 쇼핑센터가 되었다.”고 네덜란드 건축가 렘 클하스의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06-02

민중 중심 역사관을 바로세우다

김주영은 1939년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서 태어났으며 진보초등학교와 진보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에서 대구농림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공부한 후에는, 오랜 시간 안동에 있는 엽연초생산조합에서 일하였다. 1976년 상경할 때까지 안동 지역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안동문학’이라는 동인지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김주영이 창작한 방대한 문학세계는 도시 빈민들을 다룬 소설, 대하역사소설, 유년기 체험을 다룬 소설로 나눠볼 수 있으며, 이러한 문학세계는 “소외된 국외인들인 배고픈 유년, 도시빈민 악동, 과부, 유랑인을 묘사”(양진오)하거나 “의리 이데올로기를 내세움으로써 동양적 전통의 웅자(雄姿)한 남성문학의 전통”(하응백)에 이어진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김주영의 ‘객주’는 작가의 문학적 특징이 압축된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객주’는 1979년 6월 2일부터 1983년 2월 29일까지 총 1천465회에 걸쳐 연재된 대하 역사소설이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창작과비평사에서 3부(1부 외장(外場), 2부 경상(京商), 3부 상도(商盜)) 아홉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가 1992년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왔다. 2003년에는 문이당으로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이 나왔고, 2013년에 문학동네에서 10권이 출간됨으로써 삼십여 년 만에 완간에 이르렀다.‘객주’는 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구체적 생활상 속에 생동하는 이념으로 육화시킨 대표적인 사실주의적 역사소설로 꼽힌다. 이전의 역사소설이 왕실이나 영웅 중심이었다면, ‘객주’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에서 맨 아래를 차지하는 상인 그 중에서도 최하층에 해당하는 보부상을 전면에 내세웠다. 보부상은 봇짐장수로 앉아서 파는 보상(褓商)과 등짐장수로 서서 파는 부상(負商)을 함께 아우르는 말로, 떠돌이 행상을 말한다. 보부상은 상인 중에서도 특히 궁핍하고 불우한 처지에 속했던 자들로서, 대체로 가족이 없는 홀아비나 고아 또는 가난하여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임경희, ‘경상동에서 조선의 보부상을 만나다’, 민속원, 2014, 20면) 김주영은 보부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각 지역의 토속적인 산물과 풍속, 구전설화와 야담, 음담, 민요, 판소리, 타령, 탈춤, 무가 등을 전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민중의 삶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작품을 창조하는데 성공하였다.떠돌아다니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보부상이 주인공인 소설답게 작품의 무대로 여러 곳이 등장한다. 삼남(三南)지방을 배경으로 한 1부에서는 문경, 상주, 안동, 예천, 하동, 구례, 전주, 강경, 연산, 군산포 등이 나온다. 2부에서는 주요한 무대가 서울로 바뀌고, 사적인 갈등을 다루었던 1부와는 달리 세도가인 김보현이나 거상 신석주 등을 통해 구한말 조선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차원으로 확대된다. 2부에서는 무교, 애오개, 약고개, 압구정, 두뭇개, 수철리, 시구문 등의 서울 지리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된다. 3부에서는 서울이나 평강과 더불어 원산이 주요무대로 새롭게 등장한다. 이 때의 원산은 단순한 지방 도시가 아니라,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1880년에 개항한 3대 항구(부산, 원산, 인천)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원산을 배경으로 한 3부에서는 자연스럽게 일본의 침략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게 된다.‘객주’를 지도 삼아서 답사를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작품의 배경이 된 공간들에 대한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이것은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답사 등을 하며 기울인 노력이 만만치 않음을 증명한다. 또한 등장인물의 형상화도 매우 실감나는데, 이것은 작가의 유년기 체험과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김주영이 나고 자란 진보라는 곳은 본래 장시(場市)가 성한 교통 요지였으며, 생계를 책임 진 어머니는 저잣거리 마을에서 품을 팔아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김주영은 ‘객주’를 쓰게 된 첫 번째 동기로, 어린 시절 집 밖의 유일한 큰 세계를 이루었던 저잣거리 사람들의 삶을 그려야 한다는 작가적 부채 의식을 꼽을 정도이다. 요컨대 김주영에게 장터와 그 곳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너무나 익숙한 삶의 원풍경이었던 것이다.‘객주’는 민중과 권력층의 대립이라는 기본 갈등에 바탕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병렬적으로 연결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민중과 권력층의 대결은 일방적으로 후자가 힘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민중들 역시 만만찮은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보부상들의 공동체 의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그들의 지략과 완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객주’에는 음모와 협잡이 가득하여 배신은 물론이고, ‘배신의 배신’, 나아가 ‘배신의 배신의 배신’까지 일어난다. 여기에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보부상들의 공동체이다. 그들은 “동병상련으로 객고(客苦)를 달램에 유무상통하여 혈육지간보다 질긴 정분을 가지고 간담상조(肝膽相照)하고 환난상구(患難相求)하는” 윤리를 철저히 지켜나가며, 그것을 위반했을 시에는 엄격하게 응징한다. 본래 김주영은 고아, 넝마주이, 창녀, 고물장수, 백정 등의 주변 인물들을 주요한 문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왔으며, ‘객주’의 보부상들은 작가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민중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객주’는 후반부로 갈수록 임오군란과 같은 역사적 사건의 비중이 커지는 경향을 보이며 동시에 주요한 갈등이 민중과 지배층의 대결에서 조선과 일본의 대결로 변모한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은 1878년에서 1884년까지의 시기는 우리 민족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때이다. 작품의 전반부가 조선의 봉건적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에 집중했다면, 후반부에서 비판의 대상은 당시 가장 위협적인 외세였던 일본으로 옮겨간다. 이 작품의 인물 대다수는 반일의식을 공유한다. 주인공인 천봉삼은 이러한 반일의식을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인물이다. ‘객주’의 모든 갈등은 결국 외세/민족이라는 이분법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왜선을 공격하여 감옥에 가게 된 천봉삼을 빼내는 일에 조선의 모든 역량이 총집결되는 모습을 통하여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용익, 매월이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명성황후와 고종까지 천봉삼의 탈옥에 동조하는 것이다.2013년에 새롭게 덧붙여진 10권은 탈옥 이후 천봉삼의 삶을 다루고 있다. 1884년 갑신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10권에서 천봉삼은 울진 포구에서 현동 저자나 내성으로 가는 십이령길에 나타난다. 본래 울진과 봉화를 잇는 십이령길은 보부상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보부상들은 소금과 해산물이 풍부한 울진의 흥부장, 울진장, 죽변장에서 미역, 고등어, 건어물 등을 구매해 동서 방향 주 도로인 십이령길을 걸어 봉화로 향했으며, 봉화에선 비단, 담배, 곡식을 싣고 되돌아왔다고 한다. (송기역, ‘힐리로드-옛길에서 사람, 그리고 보부상을 만나다’, 이야기의숲, 2015, 231면)십이령길에 나타난 천봉삼은 조선을 대표하는 상인이자 일본에 맞서는 지도자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남행하였다가 산적 무리에게 잡혀 그들의 염탐꾼 노릇을 하는 범부이다. 10권에서는 일본이 아니라 천봉삼과 십이령길의 상단을 괴롭히는 산적 무리를 징치하고 장시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야말로 핵심적인 과제가 된다. 소금 상단의 도움으로 구출된 천봉삼은 결말에 이르러 드디어 안정된 가족을 이루고 생달 마을에 정착해 촌장이 된다.천봉삼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생달 마을에 이상적인 마을을 건설한다. 이곳에서는 대낮에도 노루가 뛰어들고 솥에는 꿩이 저절로 날아들며, 오랫동안 버려졌던 묵정밭이 불과 2년여 만에 “꿀이 흐르는 문전옥답”으로 변한다. 이 곳은 바로 천봉삼이 그토록 찾아 헤맨 “길지(吉地)”이며, 다음과 같이 이상적인 장소로 이야기된다.“징세나 부역이 없고, 토호들의 발호나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없고, 양반도 없고 상것도 없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열매가 열리는 그런 땅이겠지요. 마당에 노루가 뛰어들고, 솥에는 꿩이 저절로 날아드는 그런 땅이겠지요.”천봉삼이 정착한 생달마을은 지난 날 조선의 방방곡곡을 걷고 걷고 또 걷다가 사라진 이름 없는 보부상들이 꿈에도 그리던 이상향이자, 30여년 만에 작가 김주영이 천봉삼을 비롯한 보부상들에게 바치는 선물에 해당한다.외딴 마을에 사는 서민들의 물류를 책임치며 고단한 삶을 살다 간 보부상에 대한 선물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옛길박물관’과 ‘객주문학관’은 보부상을 기리는 현실의 장소들이다. ‘객주’는 경기도 송파지역의 쇠살쭈인 조성준이 자신의 전처와 간부(姦夫) 송만치가 살고 있는 문경에 가서 복수극을 펼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 복수극의 무대가 된 문경에는 지금 옛길과 보부상에 관한 유물과 유품이 전시된 옛길박물관이 있다. 또한 김주영의 고향인 청송군 진보면에는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만든 객주문학관이 존재한다. 옛길박물관이나 객주문학관, 혹은 십이령길을 조용히 걷다보면 동료 보부상을 위해서 목숨도 흔쾌히 내놓던 천봉삼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문학평론가 이경재1970년 ‘월간문학’ 가작 입선, 이듬해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주영은 경북 청송 출신이다. 토속적인 농촌 배경의 설정, 향토색 짙은 문장과 현장감이 살아있는 비어와 속어의 능수능란한 구사 등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여자를 찾습니다’ ‘아들의 겨울’ ‘천둥소리’ ‘홍어’ ‘빈집’ ‘객주’ 등의 작품을 썼고,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을 받았다.

2020-06-01

문경과 자연은 하나… 즐거움 넘치는 테마파크 변신

◇문경 찾는 새로운 즐거움, 문경에코랄라문경에코랄라는 개장 1년 만에 20여 만 명이 다녀가 문경의 대표 관광콘텐츠로 부상했다. 환경과 생태를 뜻하는 ‘에코’와 즐거움을 뜻하는‘룰루랄라’의 합성어인 ‘에코랄라’는 2018년 개관한 국내 최초 ‘문화·생태·영상 테마파크’이다.문경시 가은읍에 있으며 주요시설로는 기존 시설인 석탄박물관, 가은오픈세트장, 모노레일, 철로자전거 등과 더불어 ‘에코타운’과 야외체험시설인 ‘자이언트 포레스트’가 있다.문경에코랄라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에코타운에는 관람객이 직접 배우, 감독이 돼 영상 촬영, 기획, 편집까지 체험할 수 있는 에코스튜디오와 360도 써클 비전 및 입체효과로 백두대간을 감상할 수 있는 에코써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VR 체험이 가능한 키즈 플레이 등 다양한 교육·문화체험의 기획전도 준비돼 있다.9개의 테마공간으로 구성돼 유아 및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야외체험시설인 ‘자이언트 포레스트’에서는 자연과 사람의 상생을 주제로 한 촬영 체험과 자연과학 체험이 가능하다. 거인을 테마로 한 거인광장, 거인숲, 거인언덕 등 창작동화 ‘거인의 숲’을 기반으로 해 이야기를 따라 숲의 주인인 거인을 깨우는 ‘AR(증강현실)’기반의 모험 공간이기도 하다.이와 더불어 기존 시설인 석탄박물관도 중요 포인트 중 하나다.6천730점의 석탄관련 소장 유물을 보유한 이곳에는 전시물뿐만 아니라 갱도체험을 할 수 있는 ‘거미열차’와 1995년 폐광한 은성갱을 보존한 ‘갱도 전시장’이 있어 국내 석탄 생산량 2위를 자랑하던 문경의 석탄산업의 면모를 볼 수 있다.지난해에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에서 발표한 470여개 산업관광 시설 중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 SM타운 등과 함께 ‘추천! 가볼만한 산업관광지 20선’에 선정되는 쾌거를 거뒀다.‘문경에코랄라 新한류 뮤직콘텐츠 플랫폼 구축’과제로 문체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한 국비 공모사업에 선정돼 문경에코랄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대표 관광 캐릭터로 개발될 ‘랄라스타즈’와 함께 음악과 율동을 함께 즐기는 참여형 영상콘텐츠를 개발했다.올해는 민자유치사업으로 추진된 ‘포레스트 어드벤처 조성사업’ 1단계로 짚와이어가 오픈할 예정이다.이는 고도차 83m, 코스 길이 600m로 좌식형 2개 라인, 슈퍼맨형 2개 라인으로 최고속도 시속 100km의 익스트림을 경험할 수 있는 시설이다. 슈퍼맨형은 마치 슈퍼맨이 돼 하늘을 나는 쾌감을 경험할 수 있어서, 매우 인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짚코스터, 마운틴루지 조성 및 은성 갱도 내 ICT 기술을 적용한 가상현실 실감콘텐츠 체험시설까지 구축 계획이 있어 자연과 하나 되고 실감나는 대단위 테마파크로 계속 변신 준비 중이다.◇굽이치는 계곡 따라 즐기는 신선놀음, 선유동 계곡(仙遊洞 溪谷)신선이 노닐만큼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뜻을 담은 선유동 계곡(仙遊洞 溪谷). 선유동천으로도 불리는 물길을 따라 약 1.7km의 나들길이 조성돼 있다. 이 계곡에는 시리도록 맑은 물과 고목이 어우러져 이름만큼이나 장관을 이룬다. 대야산 자락의 용추계곡에서 시작된 물길은 선유동 계곡으로 이어져 굽이굽이 기암괴석과 함께 절경을 이뤄 예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산림청이 실시한 ‘2018 숲길 이용자 만족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선유동천 나들길은 2개 구간 총연장 8.4km로 독립운동가 운강 이강년선생 기념관에서 시작해 월영대까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숲길 이용객들은 선유구곡, 용추계곡 등 숲길 주변의 풍부한 역사·문화 자원을 체험할 수 있다.◇관광사격장문경시는 불정동 소재 관광사격장에 레이저 스크린 사격장을 설치, 개장했다. 스크린 사격장이 들어선 문경관광사격장은 전국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클레이 사격을 즐길 수 있다. 클레이사격뿐만 아니라 권총, 공기총 사격까지 경험해 볼 수 있는 종합사격장으로 일반 초보자들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1:1 맞춤 코칭을 제공한다.이번에 설치된 레이저 스크린 사격시스템은 레이저로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방식으로 클레이, 소총, 권총 등 자유롭게 총기 선택이 가능하고 타격, 속사, 실거리 사격 등 다양한 테마로 즐길 수 있다.이용요금은 1인 2천원, 2인 3천원으로 계절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으며 실탄 소음이 두려운 어린이들도 이용 가능해 가족, 친구 혹은 연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 공간이 될 전망이다.고윤환 문경시장은 “문경은 백두대간의 축복을 받은 생태자원과 문경새재, 석탄박물관을 비롯한 역사 자원 외에도, 단산 모노레일과 짚라인, 패러글라이딩 등 이색 레포츠 시설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며 “이번에 개장한 스크린 사격장도 기존 관광사격장과 함께 문경의 명소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문경전통시장가은 아자게 장터시장은 마을기업형 문화체험시장으로 육성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상인들의 자생력 확보를 위해 상인회 협동조합을 구성 했으며, 조직 및 자생력 강화를 위해 상인회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사업을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가은 아자게 장터시장 상인회에서는 매주 주말 민속품 경매장을 열어 전통시장을 찾은 많은 관광객들이 지역의 특산품과 꼭 필요한 생활용품, 일반 시장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었던 물건도 경매를 통해 저렴하게 구매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중앙시장에는 59억원을 투자해 문화의 거리 상점가와 신흥시장을 연계해 ‘점촌 상권활성화 구역’으로 육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청년몰 사업 및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육성할 계획이며, 청년상인 입점을 통해 지역특산물, 로컬푸드를 활용한 대표 명품 브랜드 상품을 개발해 전통시장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특성화 시장 조성을 통한 관광명소 계획도 함께 추진해 문경의 관광자원과 연계해 관광객 등 외부 고객 유입 확대로 전통시장 활성화와 지역경제 경기회복에도 크게 기여 하고 있다.신흥시장은 골목형시장 및 도시활력증진사업 등을 통한 거점형시장으로 육성 발전해 나가고 있다. 방앗간 특화 상품을 개발하고, 전시·판매 할 수 있는 판매장을 조성해 시장의 경쟁력을 키워 나갈 계획이다.주말 벼룩시장과 할매장터도 함께 운영해 주민 참여형 벼룩시장으로의 변화도 시도한다.이를 위해 시장을 이용하는 시민들과 관광객 등을 대상으로 모바일 홈폐이지를 제작하고 홍보와 이벤트 지원도 아끼지 않을 계획이다.문경시는 전통시장 시설현대화사업으로 추진한 문경전통시장 약돌한우·돼지 타운 조성 준공식을 지난 4월 27일 문경전통시장에서 개최했다.2016년 전통시장 시설현대화사업 공모사업에 선정돼 국비 18억원, 시비 15억원 등 총 33억 원의 사업비로 2017년 1월부터 2020년 2월까지 약 3년간의 공사를 거쳐 결실을 이루게 됐다.이번 준공으로 손님들이 고기를 직접 사서 구워 먹을 수 있는 상차림 식당 3곳과 정육점 1곳이 들어 선 약돌한우·돼지타운 1동과 컨테이너형 휴게음식점 및 특산물판매장 3곳, 고객쉼터 1곳이 들어섰다.특히 아케이드 막구조물 등 주변 환경을 개선해 기존 도로변 위험에 노출돼 있던 노점상들을 장옥 안으로 이전시켜 눈·비 걱정 없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장사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앞으로 상설시장으로 나아가는 데 첫발을 내딛었다.변상진 일자리경제과장은 “먹거리 타운은 중부내륙고속철도의 개통을 앞두고 문경새재, 단산모노레일, 문경온천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문경전통시장으로 유입되도록 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0-05-31

‘코로나19’ 슬기롭게 극복하고 미래 준비해 볼까요

2020년이 열린 직후 시작된 이른바 ‘코로나19 사태’는 한국은 룰론 전 세계를 공황상태에 빠뜨렸다. 병원마다 바이러스 감염자가 넘쳐났고, 도시와 도시, 나라와 나라를 잇는 길이 일시적으로 끊기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한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고, 감염자를 치료하는데 행정력을 쏟았다. 고령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애쓴 고령군의 지난 몇 개월간 행적을 꼼꼼하게 돌아본다.◆적극적 대처로 코로나 바이러스 극복 노력고령군은 이미 지난 1월부터 코로나19에 대한 선제적 방역과 침체에 빠진 지역경제 활성화, 취약계층 복지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코로나19 발생 초기인 1월 8개 반 53명으로 구성된 방역대책반을 운영해 다중이용시설을 방역하는 동시에 방역물품을 지원했고, 인접 지역에서 감염이 발생하기 시작한 초기에 체육·관광시설 30곳과 경로당 204곳 등을 운영 중단했다.더불어 집단감염을 방지하고자 4월 예정된 대가야체험축제 등 크고 작은 지역 축제와 행사도 취소했으며, 복지시설 11곳 등 집단시설에 대한 신속한 코호트 격리 조치와 종사자 200명 전원의 선제 검사로 바이러스 확산 차단에 만전을 기했다.그러나,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한 지역경기 침체는 피해가기 힘들었다. 이에 고령은 ‘경제 살리기 비상대책 TF팀’을 구성해 주민 생계 안정을 위한 지원을 모색했다.코로나19에 대응해 예산 191억 원을 증액했고,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재난긴급생활비 지원, 한시적 긴급복지 지원, 저소득층 한시생활 지원, 코로나19 격리자 생활 지원, 코로나19 격리자 생필품패키지 지원 등의 신속한 경제지원과 복지정책을 실시했다.또 코로나19로 인해 타격을 입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13억 원의 경제회복 지원, 4억 원의 소상공인 카드수수료 지원, 상하수도 요금 감면 지원, 소상공인 특별경영안정자금 지원, 소상공인 시장진흥공단 대출, 미소금융창업 운영자금 등의 사업도 병행했다.◆군민과 군수, 공무원이 뭉쳐 ‘지역 경제 살리기’지역경제 활성화 특별대책으로 고령사랑상품권 특별적립 행사와 군청 직원 급여 일부를 상품권으로 구매하는 등 총 50억 원 상당의 고령사랑상품권을 발행했고, 4월 한 달간 군청 구내식당 운영을 중단하고, 하루 평균 500여 명의 공직자가 외부 식당을 이용해 외식업 살리기에 앞장섰다. 관내 농산물 팔아주기 운동과 드라이브 스루 판매도 눈길을 끈 정책이다.대구·경북 최초로 제로페이 연계 모바일상품권 도입 등을 통해 침체된 지역경제의 정상화를 위해 행정력을 동원하기도 했다.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 사업도 펼쳤다. 무급휴직 근로자 지원과 특수형태 근로종사자·프리랜서 등 사각지대 지원을 통해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최대 월50만원을 지원한 것. 이러한 일련의 정책에 대해 곽용환 고령군수는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지원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실시했다”며 “군민들이 속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또한 고령군청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비해 행정 시스템을 개선하는 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철저한 방역으로 코로나19 확산 막아내이와 함께 고령군은 효과적인 방역 활동으로도 주목받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고령은 물론 전국으로 일파만파 확산되던 2월 말. 고령은 재난안전대책본부를 구성해 매일 2회 이상 대책회의를 열어 방역 방법을 의논했다.코로나19 현황을 고령군 홈페이지와 군 공식 페이스북, 문자알리미를 통해 실시간으로 주민들에게 전한 것은 물론, 고령군보건소는 자체 인력을 활용해 관공서, 재래시장, 유관기관, 종교시설의 일제 소독에 나섰다.바이러스 감염자 확산을 막기 위한 대책도 세웠다. 1월 말부터 고령군 보건소에 선별진료소를 설치·운영했고, 선제적 대응을 위한 역학조사반과 자가격리자 관리전담반도 편성했다.관리전담반은 유증상자를 상담하고 모니터링 했으며, 자가격리자들에겐 생필품을 전달해 그들의 불편을 줄였다. 강화된 선별진료소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근무 인력 10명이 투입됐다. 더불어 “코로나19 감염 의심 증상이 생기면 언제든 선별진료소를 방문해 줄 것”을 주민들에게 부탁했다.“확진자와 의심환자가 방문한 장소는 소독이 완벽하게 완료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폐쇄하고,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은 자가격리 하거나, 능동감시 조치를 취했다”는 게 고령군청의 설명이다.이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문화누리관, 대가야박물관, 관광지 등은 일시적으로 운영을 중단시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고령시외버스터미널과 주민들의 발이 되는 버스와 택시는 매일 2회 이상 소독을 진행했다. 공공기관과 어린이 이용시설 출입구엔 열화상감지카메라가 설치됐다. 대가야시장상인회는 5일장을 임시 휴장해 외부로부터 전파될 수 있는 바이러스 감염원을 차단하는데 노력했고, 노점상의 영업도 일부 통제된 바 있다. 손 씻기, 기침을 할 경우 입과 코 가리기, 마스크 착용 등의 행동 수칙을 폭넓게 전파했음은 물론이다.◆고령군의사회의 헌신과 희생도 주목받아고령군의사회의 희생과 땀방울도 코로나19를 이겨내고 군민들이 일상을 찾아가는데 큰 도움이 됐다. 군의사회 8명의 회원들은 3월 초부터 주말 휴일을 마다하고,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의료 지원에 나섰다.이들은 순서를 정해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선별진료소에서 근무했다. 코로나19와 관련된 각종 상담과 검체 채취 등으로 주말을 정신없이 보낸 것. 이는 재론의 여지없이 희생정신에서 나온 값진 행동이었다.이와 관련 고령군의사회 백두현 회장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선별진료소에서 근무하는 보건소 의사들이 전혀 쉬지 못하고 있어 주말이라도 휴식할 수 있도록 우리들이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령군의사회는 인력 지원 외에도 마스크와 안면보호기를 기부하기도 했다.고령군은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군내 공중보건의 6명을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 배치해 1일 2명 교대 근무 형태로 24시간 진료를 이어갔다.전국적으로 확진자가 급격히 증가한 지난 2월 말엔 감염병 경보가 ‘위기 단계’에서 ‘심각 단계’로 격상됐고, 선별진료소를 찾는 환자도 대폭 늘어 인력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군의사회의 인력 지원에 김곤수 보건소장은 “모두가 지쳐있을 때 지역 의료인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며 “고령군의사회의 헌신에 감동했다”고 말했다.◆드론을 활용한 방역과 심리지원 서비스도 진행이번 코로나19 사태 와중에선 사람이 아닌 ‘드론’도 톡톡히 제 역할을 수행했다.코로나19 감염자가 인근 지역에서 발생했을 때 스마트드론항공(대표 한창수)은 재능기부 형식으로 고령군청년회의소 회원들과 함께 드론을 활용한 방역소독을 펼쳤다.3대의 드론을 이용해 16개 학교를 대상으로 진행된 방역소독은 사람이 소독제를 뿌리는 기존 방식에 비해 보다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소독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소독제의 인체 노출 위험을 줄이고, 분사 속도 또한 빨랐다.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일상생활로의 복귀를 도운 ‘코로나19 심리지원 서비스’도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 받았던 고령군민들을 위로했다.코로나19 심리지원 서비스를 통해 퇴원 확진자, 자가격리자, 정신건강복지센터 등록인 등은 심리안정 용품을 제공받고, 전화 상담과 안부문자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영남권 트라우마센터와 연계된 서비스였다.앞서 언급한 다양한 각도에서의 코로나19 확산 방지 정책 때문인지 고령군에선 지난 19일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치료를 받던 마지막 입원환자가 완치돼 퇴원했다.2월 26일 첫 확진자가 확인된 고령군은 현재까지 9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4월 2일 마지막 확진자 발생 이후엔 추가 확진자가 없는 상태. 안정화 시기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이를 감안한 듯 곽용환 군수는 “앞으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생활 속 거리두기 등 생활밀착형 방역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갈 것”이라는 약속을 내놓았다./전병휴기자

2020-05-28

“우리가 만든 집은 ‘작품’ 끝까지 책임집니다”

10대 때부터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소년이 있었다. 집을 만든다는 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그 아이는 무작정 ‘집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꿈을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며 키워간다면 꿈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귀 위에 연필을 꽂고 건물을 바삐 오르내리는 이들을 지켜보던 소년은 자라서 건축가가 됐다. 참샘건설 최광식(47) 대표 이야기다.건설 현장 청소 일부터 시작해 현재는 ‘작지만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믿음직한 건설사’를 이끌고 있는 사람.만드는 건축물 모두에 ‘좋은 스토리’를 담고 싶다는 그는 다른 것에 눈 돌리지 않고 집 만들고, 관리하는 일에 30년 가까운 시간을 쏟아 부었다. 어려운 시기에도 뜻을 함께 해준 직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참샘건설 직원들은 “우리가 만든 건물은 끝까지 우리가 책임진다”는 자세로 일한다. 건축물에 ‘애프터서비스’ 개념을 과감하게 도입한 것이다.자신을 성장하게 만들어준 포항을 위해 봉사활동에도 열심인 최광식 대표는 최근 부모님을 위한 두 번째 집을 완성했다.“스물셋에 첫 번째 집을 만들 땐 모든 것이 내 중심이었지만, 이번에 지은 집은 아버지·어머니의 요구와 편의를 중심에 두고 작업을 진행했다”며 환하게 웃는 최 대표. 이는 그가 늘 강조하는 ‘고객 중심주의’의 실천이기도 했다.최 대표를 만나 살아온 과정과 건설회사 대표가 되기까지 겪은 일, 지향하는 건축의 방향과 참샘건설의 비전 등을 물었다. 아래 그의 답변을 요약한다.-포항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다.△1973년 보경사 인근 송라면에서 출생했다. 초·중·고교도 포항에서 나왔다. 대학에선 토목을 전공했다. 아내와 쌍둥이 아들, 늦둥이 딸과 살고 있다. 아들 둘은 모두 미대에서 디자인을 공부 중이다.-어릴 때부터 건축에 관심이 있었는지.△무엇이건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다. 그림도 곧잘 그렸다. 하지만 시골이라 미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앞으로 건축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가졌다. 막연하게 집을 만드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다. 귀 위에 연필을 꽂은 채 안전모를 쓰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부러웠던 것 같다.-건축 일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대학 다닐 때도 아파트 공사 현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별다른 기술이 없으니 막노동부터 시작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건축을 밑바닥부터 배우기 위해서였다. 스물여섯에 토목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많은 사람과 접촉하며 관계를 만들어가겠다는 내 꿈과는 멀어 보여 그만두고, 작더라도 내 업체를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참샘건설을 시작한 시기는.△토목회사를 퇴사했던 2000년대 초반 즈음이다. 그 이전에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부모님의 집을 지었다. 시골에서 억대의 건축비가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아들을 믿고 좋은 집을 만들어보라며 큰돈을 기꺼이 내주신 부모님이 내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집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최근에 내가 새롭게 만든 집으로 이사했다.-참샘건설이 어떤 회사인지 소개한다면.△현재 정직원이 10여 명이다. 이루고자 하는 뜻을 함께 공유하는 가족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 회사가 꿈꾸는 건 설계부터 시작해 완공까지 하도급을 맡기지 않고 건축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내는 것이다. 다행히 구성원 모두가 이런 미래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다른 건설회사에 비해 이직이 많지 않다는 것도 참샘건설의 자랑이라면 자랑이다.-지방에서 작은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영업과 수주가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만의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긍정의 힘으로 회사를 키워가려 애쓰고 있다. 특히 건물이 만들어진 이후의 사후 관리와 애프터서비스에 노력한다.-건물을 애프터서비스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우리가 만든 집과 건축물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몇 해 전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땐 직원 모두가 2주 동안 우리가 만들었던 건물을 돌아다니며 안전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했다. 점검 비용도 모두 회사가 부담했다. 우리는 작업한 건물을 ‘작품’이라 부른다. 그 작품에 작은 하자라도 있으면 고객에게 실망을 주게 된다. 다행히 지진으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한 건물은 없었다. 그때 ‘참샘건설이 만들면 튼튼하다’는 인식이 생긴 듯하다. 지진이라는 재앙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다.-건설회사임에도 해마다 책을 발간하고 있는데.△2016년부터 우리가 만든 건축물에 담긴 이야기를 담아 책을 출간하고 있다. 여타의 건설회사 팸플릿처럼 단순히 기술적인 면, 자재 소개 등이 아닌 작업한 집과 건물의 스토리텔링에 집중해 책을 만든다. 건축주들에겐 선물이 될 수 있고, 회사가 커나가는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유용한 영업 자료도 된다.-그간 만든 건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2007년쯤 건축에 대해 탁월한 철학과 감각을 가진 부부의 의뢰를 받아 포항 청하면에 만든 집이다. 분야별로 시공 팀이 3~4번이나 바뀔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고, 고생 또한 많았지만 ‘좋은 건축물이란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건축주와 회사가 마음을 터놓고 소통한 결과 후세에 물려주고 싶은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준 건축주께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이다.-직원들과 함께 만들어갈 미래는 어떤 것인지.△회사와 직원이 함께 성장하기를 바란다. 믿고 일을 맡기는 고객의 만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참샘건설로 커가지 않겠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에게 월급도 더 많이 주고, 복지도 개선해나가고 싶다.-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집, 좋은 건축물은 뭔가.△30년 가까이 일을 해오며 느낀 것인데 모든 건축물엔 ‘스토리’가 담겨야 한다고 믿는다. 좋은 마음으로 집을 지으면서 이웃들과 다툼이 생긴다면 거기에 좋은 기운이 생길 수 없다. 우리 회사는 건축 과정에서 생기는 주변과의 불화와 각종 민원을 해결하는 것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결국 좋은 집은 ‘좋은 스토리’를 가진 집이 아니겠는가.-참샘건설이 어떤 회사로 기억됐으면 좋겠는지.△집 잘 짓고, 사후 관리(애프터서비스) 잘해주는 회사다. ‘참샘건설에 맡기면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현재까지는 직원 모두가 회사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는 나부터 주위를 살피면서 내실을 더해가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27

걷고 또 걷고… 순례자의 종착지엔 고행의 눈물이 흐르고

◇ 산티아고 순례자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알베르게(숙소)에 순례자가 아닌 일반 여행자는 나밖에 없는 듯. 다들 배낭을 침대 맡에 둔 순례자들이다.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광장에 갔더니 순례를 끝낸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쉬고 있었다. 야고보의 유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했고 그의 유해는 신화 속 이야기처럼 발견되어 이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곳으로 유해가 옮겨진 시기인 9세기 경 스페인(에스파냐)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고 땅을 되찾고자 했던 에스파냐 지배자들은 유럽 다른 나라의 지원이 필요했다. 순교한 지 1천년이 지난 행방을 알 수 없는 성인의 무덤을 찾아 유해를 옮기고 대성당을 지은 이유는 다분히 정치적 군사적 이유가 컸다고 할 밖에. 중세시대 신심 가득한 순례자들은 갈 수 없는 예루살렘 대신 이곳을 찾았을 테고 이들은 자연스레 에스파냐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지원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모여야 돈이든 군대든 만들 수 있고, 무슨 일이든 벌일 수가 있으니. 어쨌거나 대성당 건축을 시작한 당시 에스파냐의 왕 알폰소 2세는 탁월한 수완가였을 듯하다.가장 많은 순례자가 찾는 프랑스 생 장 삐헤 드 뽀흐에서 이곳 산티아고까지 루트는 약 800킬로미터, 40일 남짓 걸어야 하는 길이다. 신심이 없는 도보여행자일지라도 순례의 마지막 대성당 앞에 서면 아마 이전과는 다른 나 앞에 서있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광장엔 흐느껴 우는 순례자들이 많았다. 여행이라기보다 고행에 가까운 길을 걸었던 이유가 다들 있을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순례길의 마지막에 느끼는 저 폭풍과 같은 감정의 북받침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는 것이겠지. 주변에도 이곳을 다녀온 분들이 꽤 있고 이야기도 많이 들어 걷지도 않았는데 이미 다녀온 기분이다. 언젠가 여유가 되면 순례자가 되어 보고픈 생각도 있지만 가능할지는. 산티아고에서 하룻밤만 자고 700킬로미터를 달려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달리며 많은 순례자들을 봤다. 모두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로 향하는 사람들.예부터 있던 순례길이 다시금 인기를 끌게 된 이유가 뭘까. 훌륭한 자연환경, 저렴한 숙박시설, 지역 주민의 친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길에 담긴 역사성, 이야기가 아닐까.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했고, 또 새로운 순례자들이 쌓아가는 이야기가 계속 사람들을 카미노로 불러 모으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길만 내는 것으론 부족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 길이어야 사람들이 찾겠지.◇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팜플로나팜플로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찾았다. 첫 번째는 헤밍웨이가 이곳에 머물렀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후반부의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에슐리가 젊은 투우사 로메오와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 바로 팜플로나다. 두 번째는 주변 다른 도시보다 숙소가 저렴한 때문이었다. 카미노 여정에 있는 도시라 값싼 알베르게가 많다. 프랑스로 넘어가기 전 머물고 가기 좋은 듯하다. 헤밍웨이의 대표작은 ‘노인과 바다’라지만 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가장 사랑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도 스페인이 배경이었고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경험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스페인을 아낀 작가였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책보다 영화로 아주 어린 시절 먼저 만났다. 마리아 역을 맡았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키스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키스 장면의 그 명대사는 원작자가 아닌 극작가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키스할 때 코는 어디로 가죠? 그게 늘 궁금했어요.”내일 쉬엄쉬엄 헤밍웨이가 단골로 찾았다는 카페도 가보고 이곳저곳 돌아볼 생각이다. 이 먼 이국에서 함양 청년 셋과 한 방에 묵게 됐다. 세상은 넓고도 좁구나.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는 걸까?팜플로나는 산 페르민 축제를 앞두고 구시가지는 벌써 분위기가 무르익는 중이다. 소몰이로 유명한(사람이 소를 모는 건지 소가 사람을 모는 건지 애매한) 산 페르민 축제는 매년 7월 6일부터 시작한다. 만약 축제 기간이었다면 팜플로나에는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다. 질주하는 소와 도망가는 사람이 뒤엉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위험한 놀이를 수 세기 동안(1591년부터 시작) 전통으로 이어온 이유가 뭘까. 단순한 오락으로 보기엔 무모하고 위험하고 잔인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거겠지만.헤밍웨이도 이 소몰이에 참여했고 그래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겠지.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이루나 카페도 슬쩍 구경하고 소몰이 골목을 따라 걷다 팜플로나 시민회관에 들러 산페르민 축제를 찍은 사진전도 보고 19세기 파가니니와 함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사라사테를 기념하는 전시실도 보고 왔다. 찌고르바이젠을 작곡했고 다른 연주자가 범접할 수 없었던 기교로 청중을 사로잡았던 그의 고향이 팜플로나인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거리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갤러리는 조용해서 소파에 앉아 교양 있게(?) 음악을 감상했다. 시민회관 중앙홀엔 축제기간 동안 음악 공연이 있는 듯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만든 무대는 훌륭했다. 낮은 단상과 플라스틱 의자가 놓였을 뿐이지만 건물 자체의 공간감이 워낙 훌륭해 어떤 공연을 하더라도 생동감을 불어넣을 것 같다.◇ 스페인을 지나 다시 프랑스로만화 페스티벌로 유명한 앙굴렘에서 하루 묵으려 했으나 최대한 파리 가까이 가서 쉬는 편이 나을 듯하여 그냥 지나기로. 인구 6만 명의 작은 도시가 만화 페스티벌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뭘까, 한번 그 도시에 가보고 싶었었다. 아쉽지만 포기. 러시아에 들어갈 때까진 최대한 경비를 아껴야 한다. 안개 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보르도의 포도밭을 지나 푸아티에의 밀밭을 가르고 부르주 외곽에 있는 주로 트럭 운전자들이 묵는 숙소에 들어왔다. 파리까진 약 250킬로미터 남았고 팜플로나에서 여기까지 800킬로미터쯤 달렸다. 거의 10시간 넘게 로시를 타고 왔는데 이쯤 달리면 내가 로시인지 로시가 나인지, 오토바이와 몸과 영혼까지 합친 듯한 기분이 든다. 묶어둔 2리터 생수병 안에 햇빛을 받아 따끈하게 데워진 물을 등에다 붓고 장갑을 적셔 더위를 쫓아보지만 마르는 건 순식간이다. 로시와 함께 열덩어리가 되어 유럽을 남에서 북으로 점프하듯 달리는 중이다.오늘처럼 달리는 날엔 숙소에 들어와서 땀에 절은 티셔츠와 속옷, 양말을 빨고 샤워하고 누우면 열을 세기도 전에 곯아떨어진다. 눈을 부비며 하루 일과를 기록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여행 중 유일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내일 계획(주로 지도 검색)을 세우는 시간이니 미룰 수가 없다.하루만 지나도 오늘 있었던 일이 가물거리니. 파리에선 4일 동안 머물 예정이다. 최대한 주말을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쾨벤하운, 오슬로, 스톡홀름, 헬싱키를 거쳐 최대한 빨리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넘어갈 작정이다.    /조경국

2020-05-26

“뭘 좋아할지 몰라 다 담았어” 관광종합선물세트 문경

문경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 중 1위 문경새재와 ‘경북 8경 중 으뜸’ 진남교반을 비롯해 전국에서 가장 긴 백두대간 구간 110km가 지나고 있다.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중 희양산, 주흘산, 대야산, 황장산 등 4개 명산도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국내 최초 복합생태영상 테마파크인 에코랄라와 최근 개장한 전국 최장 길이의 단산 모노레일은 문경시를 넘어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췄고 오미자테마공원, 철로자전거, 관광사격장, 패러글라이딩, 짚라인 등 관광 자원이 풍부한 도시다.해외보다 국내로 많은 사람이 모이고, 즐기는 관광보다 힐링 관광이 주목받는 요즘 건강하고 안전한 도시 문경이 주목받는 이유다.◇ 문경단산관광모노레일문경 단산에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모노레일이 문을 열었다.단산관광모노레일은 새로운 관광인프라 구축으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추진했으며, 문경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단산 정상부까지 가파른 레일을 따라 운행하는 단산모노레일은 해발 260m에서 출발해 860m까지 3.6km를 왕복한다. 해발 865m의 정상에 오르면 백두대간의 절경이 한눈에 펼쳐지는데, 급경사에 암벽까지 오르내리는 구간구간이 놀이기구 못지않은 짜릿함을 선사한다.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다보면 단산에 자생하는 금강송과 우리나라 고유의 소나무 숲, 신갈나무 등을 다양하게 볼 수 있고, 문경 산양삼이 식재돼 있어 7월이면 빨간 열매를 볼 수 있다. 특히 단산의 지명유래가 된 박달나무 군락지도 볼 수 있다.모노레일을 타고 산 정상에 오르면, 단산 숲속 캠핑장(16개소), 숲속 썰매장(6레일), 전망대, 산악 바이크 로드(21km, 초급·중급·고급 코스 등 다양한 코스가 마련) 등이 조성돼 있다. 길이 200m, 폭 2.5m의 무장애 데크길도 마련돼 유아, 노인, 장애인 등 누구나 편안히 산 정상의 정취를 맛 볼 수 있는 색다른 관광 명소로 주목 받고 있다. 모노레일 승강장에서 단산 정상까지 1.9km 걷기 좋은 데크로드도 조성돼 있다. 소요시간은 왕복 1시간 40분이다.단산 정상에 오르면 백두대간 문경구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탁 트인 전망은 마치 하늘에 오른 듯 신비함마저 느낄 수 있어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의 편안한 휴식 공간이 되고 있다.◇ 문경생태 미로공원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는 영남대로 관문이다.조선시대 남쪽 지방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을 가던 선비들이 서울로 가는 세 개의 큰 고개 중 가장 빠르고 넓었던 영남대로 문경새재를 많이 이용했다.도립공원인 문경새재는 1관문에서 3관문까지 맑고, 시원한 계곡을 따라 완만한 황톳길이 조성돼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산책을 즐길 수 있으며, 대한민국테마여행 10선에 선정될 만큼 옛 정취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힐링로드다.이 문경새재에 새로운 체험과 힐링공간이 문을 열었는데, 3천586㎡ 면적에 4개 테마로 구성된 ‘문경생태미로공원’ 이다.자생식물원 형태로 유지돼 오던 자연생태공원을 도자기, 연인, 돌, 생태를 주제로 한 4개의 미로공원과 전망대, 산책로 등을 추가해 식물테마 미로공원으로 변경 개장했다.우리나라 자생식물인 측백나무로 특색 있게 조성한 도자기미로, 연인의 미로, 생태미로는 측백나무 향의 피톤치드를 맡으면서 어릴 적 추억의 미로 찾기를 할 수 있다. 각 미로마다 설치돼 있는 도자기 및 연인 조형물을 통한 추억의 인생샷도 남길 수 있다.입장료는 성인 어른 3천원, 단체 2천500원 이며, 문경시민은 50% 할인된 1천500원에 입장 할 수 있다.또한,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농민들을 돕고 문경생태미로공원 이용 활성화를 위해 일반(3천원) 및 단체(2천500원) 입장객에겐 문경시 농특산품 교환권(1천원)을 배부한다. 교환권으로는 문경새재에 위치한 문경시 농특산품직판장에서 지역의 우수한 농특산품을 구매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문경오미자테마공원오미자는 시고, 달고, 맵고, 쓰고, 짠 다섯 가지 맛을 갖고 있다.전국 오미자 생산량의 45%를 차지하는 문경은 2006년 동로면 일원이 국내 유일의 오미자 산업특구로 지정됐다.최근 면역력과 호흡기 건강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문경오미자는 우수한 효능과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할수 있는 기호성까지 갖춘 우수 식품으로 떠오르고 있다.문경오미자테마공원은 문경 대표 농·특산물인 오미자를 종합적으로 홍보하고,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녹지 오미자공원 등 힐링·휴양의 공간으로 조성됐다.문경오미자테마공원은 크게 오미자 테마관(본관), 사랑의 오작교 출렁다리(63m), 오미자 광장, 오미자 테마 야외공원으로 구성돼 있다.오미자테마관의 1층에는 오미자쿠킹클레스, 오미자 명상, 오미자뷰티체험 등 오미자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고, 2층에는 견우직녀포토존과 디지털 오작교, 오미자의 사계절, 오미자수확게임존 등 체험존이 조성돼 있다. 3층에는 전국 최초의 오미자전문 티(Tea)하우스와 오미자갤러리, 오미자트리하우스전망대가 설치 돼있다.1·2공원은 오미자터널길과 오미자밭, 다양한 오미자 조형물로 자연속에서 오미자를 오감으로 체험하고 둘러보는 야외 녹지공원으로 조성돼 있다.견우와 직녀의 사랑을 이어주었던 오작교의 재료가 오미자가지라는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작교 출렁다리는 이 두 공원을 이어주고 있다.◇ 문경힐링휴양촌“삶의 쉼표를 찍으세요! 새로운 휴양공간, 문경힐링휴양촌!”청정자연을 자랑하는 문경새재 인근에 휴식과 체험을 통해 바쁜 현대인의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복합휴양시설이 들어섰다.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인 ‘진안성지’ 주변에 들어선 이 곳, ‘문경힐링휴양촌’은 자연과 함께 명상과 휴양을 즐기면서 온천욕이 가능한 숙박시설이 있어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있는 복합휴양공간이다.힐링휴양촌은 숙박시설, 명상휴양시설, 체험시설, 식음시설 등을 갖춰 삶의 쉼표를 더하는 자연 속의 명상, 가족과의 휴양, 즐거운 체험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어르신과 영유아 동반 가족 등을 배려한 BF(Barrier Free) 시설로 모든 방문객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주요 시설로는 문경의 보양 온천수를 이용한 스파를 즐길 수 있는 숙박시설 11개실과 차와 간단한 디저트 음식을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체험시설, 실내외 명상을 할 수 있는 휴양명상시설, 문경 향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전통 한식당 및 특산물 판매장 등을 갖추고 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0-05-26

최초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 장계향이 태어나 자란 경당종택

댐으로 마을이 수몰되고 대규모 공단으로 마을이 사라질 때 옮기는 고택이 많지만 예전부터 우리의 한옥집들은 필요에 따라 많이 옮겨지었다. 안동의 경당 종택도 인근 마을에서 옮겨지은 것이다. 집은 누가 살았고 어떤 사람이 태어난 것도 중요하다. 경당종택은 퇴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경당 장흥효가 나고 살았고, 경당의 무남독녀 딸로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의 주인공 장계향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아버지와 딸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세상의 모든 아버지들 대부분은 딸을 사랑하고 아낀다. 그러나 시대의 상황이 남존여비. 남녀유별이 정치,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굳혀진 조선시대에 딸에게 한문을 가르친다는 것은 깨어있는 선각자가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경당 장흥효는(1564~1633)는 12살 때 이웃의 학봉 김성일에게 학문을 배운다. 어릴 때부터 행동이 단정하고 침착하여 꼭 필요한 말만 했다는 심지 곧은 내향형의 선비기질을 타고났다. 그는 배움에 그치지 않고 이치를 탐구하며 깊게 사유하고 실천하는 선비였다. 학봉 뿐 아니라 서애 유성룡과 한강 정구에게 사숙했으니 세분 모두 퇴계의 수제자들이다. 뿌리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세분의 장점을 흡수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마침내 퇴계에서 학봉으로 이어진 맥을 받아 제자이며 사위가 되는 석계 이시명과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에게 고스란히 전해준 훌륭한 학자이자 교육자이다. 부인은 봉화 닭실의 권씨 부인으로 18년 만에 낳은 딸이 장계향(1598~1680)이다. 그가 태어날 때는 온 조선이 쑥밭이 되어버린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7년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되는 5일 뒤에 태어난다. 권씨 부인은 병약하여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해 장계향은 무남독녀가 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가 글을 가르치면 뜻을 이해하고 문학적인 감수성이 뛰어나 이웃마을의 백발의 노인이 군대 떠나는 아들 때문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백발의 늙은이가 병이 들어/ 서산의 해처럼 위급하네/ 두 손 모아 기도하지만/ 하늘은 어찌하여 응답이 없나./ 이처럼 가슴 찡한 ‘학발시(鶴髮詩)’를 짓는다. 비 내리는 한옥은 선경의 경지를 품어낸다. 계향은 내리는 비를 보고 /창밖에 소소소 내리는 비/ 소소소 소리가 자연스럽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 마음 또한 자연스럽네./ 감수성을 듬뿍 담아 ‘소소음(簫簫音)’을 노래한다.황진이가 자신의 신분의 한계를 알고는 시와 공부를 접고 기생의 길로 갔지만, 계향은 안동 장씨 학자의 노른자 집안이었지만, 여자의 한계는 있었다. 15살의 계향도 여자는 집안일을 해야 하고, 시를 짓고 글을 쓰는 것은 여자가 할 일이 아닌 시대의 한계를 알고 글과 시를 접고 밥하고 음식 하는 현모양처의 길을 들어선다. 어머니 친정 안동 권씨의 봉화음식과 안동의 음식이 융합된 음씩 솜씨가 무르익은 19살에 아버지의 제자 석계 이시명(1590~1674)에게 시집간다. 석계는 임진란 때 안동, 예안 의병장으로 순국한 광산김씨 김해의 딸이 1남 1녀를 낳고 죽은 상태라 계향은 재처로 들어간다. 아무리 아끼는 제자라도 무남독녀 외동딸을 아이가 둘에다 8살 많은 기혼자의 재처로 보내는 아버지도 대단하다. 물론 이런 제약을 뛰어넘는 석계의 학문과 인간 됨됨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선택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학문은 사위 석계와 외손 갈암 이현일(1627~1704)에게 이어졌고, 계향과 석계는 죽을 때까지 서로 귀한 손님을 대하듯 공경하며 살았다. 부부가 서로 공경함은 시대와 상관없이 지켜야할 중요한 덕목이다.1622년, 어머니 권씨가 죽자 홀로 남은 아버지를 돌보기 위하여 친정에 머물며 아버지를 보살피고 대를 잇기 위해 재혼을 권유한다. 딸 계향의 권유에 60살의 아버지 경당은 안동 권씨와 재혼하여 3남 1녀를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간다. 새엄마는 계향보다 10살이나 어린 15살이라 친정의 허락을 받아 3년간 친정집에 머물며 어린 새어머니에게 친정의 살림살이를 가르친다. 이때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외할아버지께 배우도록 하여 퇴계 학맥을 잇는 대학자로 키워낸다.1933년 아버지가 죽자 3년 상을 끝내고 8살의 이복동생을 데리고 와서 학문을 가르친다. 조금 뒤에는 새어머니와 3남매를 영해로 모시고 와서 아버지 제사와 혼인까지 챙겨준다.대학자 아버지 경당과 현모양처의 딸 계향은 윤리를 뛰어넘는 아름답고도 인간적이고 파격적인 사랑이다.#. 경당과 장계향의 흔적을 찾아서안동 서후면 봉정사 가는 길에 경당종택을 찾았다. 추운 북부지방 안동의 집들같이 사방으로 감싼 ‘ㅁ’자형의 고택이고 경당종택의 편액이 유난히 큰 글씨였다. 이 사랑채에서 결혼하고도 18년 동안 자식 없이 학문에 매진한 경당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외동딸 계향이 총명했지만 아들 없는 아쉬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였을 경당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럴수록 학문에 더 깊이 빠져들었을 것이다. 아들로 대를 잇고 출세하는 속세적인 시대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또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붕괴 직전의 불행은 백성의 삶에 파탄으로 이어지고 학문과 현실사이에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책상위에 ‘대통령’을 붙이고 공부했다더만 경당은 공경할 ‘경(敬)’을 책상 위에 써 붙이고 생활의 신조로 삼았다.장계향도 병약한 어머니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200리 떨어진 영해로 시집갔어도 그리고 홀로된 아버지를 위하여 돌봐주면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한다.지금의 고택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경당과 장계향이 태어난, 옮기기 전의 춘파마을의 광풍정 정자로 갔다. 옛 정자는 아름답다. 좋은 경치가 필수적이니 자연 속에서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것이 정자다. 원래 경당 고택이 이 정자 옆에 있었고 이 정자는 경당이 거의 말년(1630년대)에 초당을 지어 문인들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지금의 기와정자는 지역의 유림들이 1838년에 개축한 것이다. 광풍정(光風亭) 뒤에는 큰 바위 덩어리가 흔들림 없는 경당의 마음같이 버티고 있다. 그 바위에 능주 목사를 지낸 김진하(1793~1850)가 세로로 남긴 ‘경당장선생제월대’ 새겨놓은 글씨가 있다. 그 바위 위에 제월대(霽月臺) 건물은 멀리서 보면 괜찮아도 옆에서 보면 건물의 짜임새도 없고 격도 떨어지는 건물이라 바위를 모독했다. 상량을 보니 단기 4319년(1986) 건립한 졸작이었다. 왜 우리시대 짓는 건물들은 예전 고택보다 못할까.장계향이 마지막 생을 다한 영양 석보 두들마을을 가는 길에 근처의 의성 김씨 학봉종택을 보고 조금아래 원주 변씨 간재종택으로 갔다. 어깨 힘이 잔뜩 들어간 학봉종택을 보다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흐르는 간재종택을 보니 답답했던 마음에 왠지 모를 기쁨이 흘렀다. 오늘 보는 고택들은 예전에 봉정사 가는 길에 많이도 들렸던 고택들이다. 마침 잔잔한 맑은 미소 머금은 소녀 같은 주영숙 종부와 착하고 선량하게 보이는 변성렬 종손과 잠시 차 한 잔에 의미 있는 대화가 행복했다.#. 안동의 신사임당, 영광과 상처, 그리고 죽음누구나 한 평생 살면서 슬픔과 기쁨도 있고 말 못할 사연과 고통도 있다. 또 영광이 있으면 상처도 있다. 장계향을 현모양처의 대명사 신사임당(1504~1551)과 비교해서 안동의 신사임당이라고 한다. 장계향이 무남독녀였다면 신사임당은 아들 없는 여형제만 있었고, 두 분 다 시, 서, 화에 시경에 사서삼경까지 익힌 유학이 스며있는 교양인이었다. 묘하게도 19살에 결혼하는 것과 친정부모 각별히 챙기는 것은 같다. 신사임당이 7자녀 중에 걸출한 율곡 이이(1536~1583)를 낳았다면, 장계향은 7남 3녀(1남1녀는 전처 소생) 중 갈암 이현일을 낳았다. 수명은 신사임당과 율곡 모두 48살에 단명하였다. 이에 비해 장계향은 83살, 갈암도 78살까지 장수하며 살았다. 신사임당이 결혼할 때 축첩이 관례였고 제도화되었지만 첩을 안 두기로 약조했는데 남편 이원수는 딴 살림 차린다. 신사임당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인데다 남편과 격이 맞지 않아 괴로운 나날이 쌓여 병이 들어 스트레스로 죽었을 것이다. 허난설헌이 남편 김성립보다 격이 높아 비극의 생을 마쳤듯이…. 이에 비해 장계향은 서로 아버지에게 학문을 익혀 남편 석계와 격이 맞았을 것이다.1640년 인량에 살던 석계와 장계향은 30여 명의 식솔을 데리고 영양 석보 두들마을에 정착한다. 13년 사는 동안 큰 흉년들고 전염병에 시어머니 죽고, 큰딸은 친정 와서 아이 낳다 죽고. 둘째딸은 친정에 어머님 뵈러 왔다가 죽는 불상사에 더 깊은 영양 수비면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이들 장래를 위하여 안동으로 옮기고 마지막은 두들마을로 돌아와 친정과 시댁의 온갖 길흉사를 치루고 ‘음식디미방’책 쓰고 죽는다. 두들마을은 온통 장계향의 음식테마 건물이 들어차 있다. 석계고택은 검소하게 살다 숨을 거둔 장계향 다운 소박하고 퇴락한 건물이었지만, 지금의 장계향 테마 건물들은 궁전 같아 장계향이 웃을까, 슬퍼할까./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05-26

피울음처럼 전하는권정생의 ‘오래된 미래’ ‘랑랑별 때때롱’

20세기를 양분한 이데올로기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들 수 있다. 두 이데올로기는 대립적인 것으로만 보이지만, 근대의 자식으로서 공유하는 지점도 적지 않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생산력주의이다. 생산력주의란 어마어마한 물질적 진보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는 성장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생산력주의는 산업적 근대성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대중의 물질적 행복을 제공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믿음이다. 물질적 진보를 향한 인간의 꿈으로 인해, 지난 세기 인간이 말할 수 없는 생활의 편리와 풍요를 이룬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꿈은 반복적으로 악몽으로 변해 전쟁, 착취, 독재, 환경의 파괴 등을 불러왔다.물질적 풍요를 절대적인 과제로 삼고 달려오는 동안, 인류는 자신 역시 지구라는 생태계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는 했던 것이다. 그 결과 20세기에는 그 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연 파괴가 이루어졌으며, 그 속도는 광적으로 빨라지는 상황이다. 1990년부터 30년간 지구를 괴롭힌 오염 총량이 과거 2000년간 누적된 총량을 능가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을 정도이다.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물질적 풍요만을 향해 달려간다면, 결국에는 유한한 지구 별이 망가진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결코 이 단순한 과학(아니 산수)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를 불편하고 공포스럽게 하는 코로나19는 이토록 명백한 진실을 깨우쳐 주려는 자연의 마지막 메시지인지도 모른다.권정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물질적 풍요를 향한 인간의 광적인 신앙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지구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가 존엄한 가치를 지니며, 인간만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편견은 존재할 자리가 없다는 것을 여러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일반적으로 권정생의 문학세계를 단편 동화를 주로 창작한 초기(1969-1980), 소년소설을 창작한 중기(1981-1990), 장편 판타지를 창작한 후기(1991-2007)로 나누고는 한다.(엄혜숙, ‘권정생의 문학과 사상’, 소명출판, 2017, 340면) 초기의 작품들은 주로 기독교적 희생과 사랑의 사상을 담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강아지똥’을 꼽을 수 있다면, 중기의 작품들은 한국 근대사의 고통스런 체험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몽실언니’를 꼽을 수 있다. 후기에는 지구 생태계가 유기적 통일체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생태주의에 바탕한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이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작가가 마지막으로 창작한 장편동화 ‘랑랑별 때때롱’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2006년 1월-2007년 2월)되었고 작가가 별세한 다음해인 2008년에 보리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랑랑별 때때롱’은 지구에서 보면 북두칠성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랑랑별에 사는 때때롱과 매매롱이, 지구에 사는 새달이 미달이와 우정을 나누는 장편 판타지이다. 이 작품에는 세 개의 시공이 등장하는데, 첫번째는 새달이와 동생 마달이가 사는 지구이고, 두 번째는 때때롱과 동생 매매롱이 사는 지금의 랑랑별이고, 세 번째는 500년 전의 랑랑별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환상적인 요소는 랑랑별이라는 가공의 행성이라고 할 수 있다.소설에서 환상은 현실과의 관계에서 크게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값싼 위안을 줄 수도 있으며, 이와는 달리 기존 현실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거나 새로운 현실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 ‘랑랑별 때때롱’에 등장하는 ‘500년 전 랑랑별’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비판과 성찰을 하도록 이끌고, ‘지금의 랑랑별’은 권정생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5백 년 전 랑랑별은 ‘지구의 미래’이고, 현재의 랑랑별은 ‘지구의 미래를 극복한 미래’인 것이다.새달이와 마달이가 살아가는 지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환경오염이다. “지금 지구 나라는 온통 쓰레기뿐이고 사람 사는 곳이 못 된다.”고 이야기된다. 그 중에서 한국은 본래 물이 하도 맑아서 선녀들이 미역을 감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런 깨끗한 곳이 남아 있지 않으며 공기에도 먼지가 가득 섞여 있다. 환경오염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대표해서, 이 작품에는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왕잠자리가 등장한다. 왕잠자리는 “유리창을 날카로운 못 끝으로 찍 찍 긋는 듯한” 목소리로 눈물까지 흘리며, “다 죽었다! 다 죽었다!”라거나 “지구 별은 나쁘다, 지구 별은 나쁘다, 나쁘다, 나쁘다…!”라고 절규한다. 왕잠자리를 만난 이후 “새달이와 마달이는 목숨이 위태로우니 조심하여라.”는 때때롱의 편지를 받는데, 이것은 왕잠자리가 처한 상황이 새달이와 마달이에게도 곧 닥쳐올 것임을 암시한다.때때롱은 왕잠자리에게 “랑랑별에서는 농약도 안 치고 쓰레기도 안 버린다.”며 랑랑별에 오라고 권한다. 새달이와 마달이는 맘껏 뛰어놀며 풀을 뜯어먹고 싶은 누렁이를 비롯한 흰둥이, 나비, 매미, 메뚜기, 온갖 벌레들, 개구리, 물고기들과 함께 랑랑별에 간다. 이후 새달이와 마달이는 ‘500년 전 랑랑별’과 ‘지금의 랑랑별’을 둘러보고 지구로 귀환한다.‘5백 년 전 랑랑별’은 지금 인류가 물질적 풍요를 향한 꿈에 취해 별다른 반성 없이 살아갈 때, 마주하게 될 세상의 모습이다. “과학이 너무 발달”한 그곳에서는 사람과 꼭 같은 모습을 한 로봇이 거의 모든 일들을 대신한다. 이 곳의 아이들은 좋은 유전자만 골라다가 만든 맞춤 인간이기에 하나 같이 잘나고 어른 같다. 이들의 몸 속에는 열 사람도 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따로 있으며, 당연히 함께 사는 가족이라는 개념도 없다. 모든 인간들은 기계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기에, 어른들도 아이들도 놀 줄을 모르고, 웃을 줄도 울 줄도 화낼 줄도 슬픈 줄도 사랑할 줄도 모른다. ‘5백 년 전 랑랑별’은 인간성의 본질을 잊고, 과학만을 맹신하며 나아갔을 때 인류가 도달할 디스토피아에 해당한다.때때롱과 매매롱이 사는 ‘지금의 랑랑별’은 권정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이다.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고 집에서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학교에는 떠들기 시간이 따로 있고, 옷이 찢어지면 스스로 기워 입는다. 아빠는 엄마가 하는 요리를 다 할 줄 알고, 때때롱 매매롱 형제도 스스로 밥을 지어 먹을 줄 안다. 이 곳에서는 ‘뚱뚱보’가 많은 지구 별과는 달리 세 가지 반찬만 먹으며 열심히 일하고 뛰어논다. 또한 이 곳에는 새달이나 마달이는 물론이고 누렁이와 흰둥이도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보존되어 있다.흥미로운 것은 그토록 과학 기술이 발전한 ‘5백 년 전의 랑랑별’을 극복한 ‘지금의 랑랑별’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과거의 우리와 닮아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는 “집안의 대장”으로 대우 받으며, 사람들은 호롱불을 켜 놓고 밥을 먹는다. 심지어 사람들은 화장실이 아닌 들판과 같은 곳에서 볼 일을 해결할 정도이다. 과거야말로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오래된 미래’였던 것이다. ‘랑랑별 때때롱’의 의미는 이 작품이 출판된 같은 해에 개정증보판이 나온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2008)에 실린 산문들과 나란히 놓고 볼 때 보다 선명해진다. 여기에 수록된 ‘태기네 암소 눈물’에서 권정생은 “우리가 옛날에 가지고 있던 모든 걸 되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우리는 본래의 조선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장, 발전, 물질과는 무관하게 참된 삶을 추구한 반근대인의 초상을 확인할 수 있다.‘우리들의 하느님’에 수록된 산문에는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 권정생의 절절한 육성이 직정적으로 표현돼 있다. 대표적인 것들만 정리해보아도 다음과 같다. “자연을 망가뜨리고 더럽히는 건 인간의 욕심과 낭비 때문이다.”(물 한 그릇의 양심), “우리가 잘 산다는 것은 결국 가난한 동족의 몫을 빼앗고 모든 자연계의 동식물의 몫을 빼앗는 행위밖에 또 무엇이 있는가?”(태기네 암소 눈물), “이 땅의 주인은 인간들만이 아닌데 인간중심의 인간제국을 건설하려는 오만이 결국 인간상실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녹색을 찾는 길), “산과 들이 깨끗하고 아름다울 때, 우리들의 모습도 아름답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울 것이다.”(쌀 한톨의 사랑), “우리는 경제성장의 뒤편으로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몇갑절이나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새소리가 들리던 시골 오솔길의 아이들), “사람이란 동물은 어쩔 수 없는 악마일지도 모른다.”(새야 새야), “그동안 일어난 여러 일들을 보고 과연 문명은 발전인지 퇴보인지 알 수가 없었다.”(골프장 건설 반대 깃발이 내려지던 날)여기에는 인간중심주의와 생산력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리고 모든 생명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이 담겨 있다. 어쩌면 이러한 말은 수많은 사람들이 전달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 속에 담긴 정신을 실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말들이 피울음처럼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메신저가 실제로 겸손한 자연의 삶을 실천한 권정생이기 때문이다. AC(anno covid19) 원년이라는 지금, 인류는 ‘500년 전 랑랑별’로 가느냐, ‘지금의 랑랑별’로 가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권정생이 살아 있다면, 그는 분명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우리 모두 자연을 봅시다.”(제발 그만 죽이십시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5-25

청송 ‘백일홍’ 꽃으로 관광객 유혹

지나온 시절과 새롭게 열린 21세기를 구분하는 키워드 중 우리에게 가장 실감 있게 다가오는 건 ‘선택과 집중’이다.다른 것은 과감하게 뒤로 돌리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능동적으로 ‘선택’해, 최선의 힘과 노력을 기울여 목적에 이를 수 있도록 진력하는 ‘집중’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은 개인은 물론, 조직이나 단체에게도 마찬가지.한국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는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자연환경이 수려하다거나, 전국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품질 좋은 특산품을 가졌다거나, 국가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작동하는 주요한 사회적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거나.청송군은 주왕산과 주산지를 위시한 빼어난 자연경관과 최고의 브랜드 파워를 가진 청송사과를 품 안에 안은 ‘청정 지자체’다. 불어오는 초여름 바람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공기와 어디를 가도 쓰레기 하나 발견하기 힘든 깨끗한 도심은 청송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일상에 찌든 도시민을 자연 속에서 치유하는 산소 카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맑고 밝은 고장을 지향하고 있는 청송군.그렇다면 청송이 선택과 집중의 열정을 기울일 포인트는 뭘까? 재론의 여지없이 ‘산소카페 청송’에 어울리는 자연친화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도시의 건설일 것이다.청송군민과 윤경희 군수, 현장에서 지역 발전에 땀 흘리고 있는 청송군청 공무원들은 청송군이 주목받는 청정도시이자, 모두가 찾고 싶은 인상적인 관광지가 되기를 기대하며 뜻을 모으는 중이다.‘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혼란과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도시 발전을 위해 새로운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청송군의 5월. 그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지역 경제 발전시키고, 관광객 눈길 사로잡을 ‘청송정원’ 조성이달 8일 청송군은 도시 브랜드를 효율적으로 강화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청송의 이미지를 보다 높이기 위해 국내 최대 규모의 백일홍 화원을 조성할 것이라는 계획을 내놓았다.이미 청송군은 지역에 큰 피해를 입힌 태풍 콩레이의 부정적 영향을 극복하고, 반복적인 수해 발생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파천면 신기리 일대의 용전천 제방을 높였다. 성토 또한 진행했다. 수해로 입은 피해를 복구한 부지에 ‘산소 카페 청송정원’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다양한 관광 수요에 대비하고, 관광자원과 연계될 주민참여형 화원을 조성해 주민들과 청송을 찾는 관광객에게 느낌과 쉼이 있는 힐링의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이 청송군의 설명이다. 이는 청송정원이 지향하는 비전이기도 하다.새롭게 들어설 ‘산소카페 청송정원’은 파천면 신기리 728번지 일원 13만5천㎡의 땅에 백일홍 화원과 청보리단지를 조성하게 된다. “여행자들이 우리 고장을 편하게 돌아볼 수 있는 전망대도 만들고, 벤치와 안내판 등 관련 시설도 설치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힌 청송군청은 “관수시설과 식재기반 조성 등도 진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청송군새마을회, 한국자유총연맹 청송군지회, 바르게살기운동 청송군협의회, 청송군이장연합회 등 지역의 14개 사회단체도 자발적인 참여로 청송정원에서 선보일 식물의 생육관리에 협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주인의식과 결속력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될 듯하다.청송의 최고 특산물이라 불러도 무방한 사과가 익어갈 가을 즈음이면 백일홍까지 만개해 청송의 새로운 볼거리로 관광객들을 매료하게 된다.‘청정·힐링의 휴양 명소’를 꿈꾸는 청송으로선 내세워 홍보할 또 한 가지의 자랑거리가 생기는 셈이다.이와 관련 윤경희 군수는 “향후 청송정원은 탐방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으며 지역경제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라 예측하며, “청송군엔 활력을, 관광객들에겐 다양한 볼거리와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이달 중순엔 드넓은 백일홍 단지가 들어설 청송정원 부지 현장에서 사업 설명회도 진행됐다.설명회에는 윤 군수와 관계 공무원, 군의원, 사회단체 회원 등이 참석했다. 담당 부서와 용역사의 사업 설명이 열렸고, 이어서 질의·응답, 참여단체의 백일홍 생육관리 담당구역 선정 등이 논의됐다.이날 청송군은 “전국 최대의 백일홍 단지 조성으로 청정과 힐링의 휴양명소를 만들고, 주왕산 등 지역 관광자원과 연계해 앞으로 연간 3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청송군을 만들 것”이라는 목표도 전했다. 청송정원 조성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최대 1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청송정원을 찾는 관람객들은 입장료를 내면 이를 청송사랑화폐로 교환받게 된다. 무료관람 효과와 함께 실질적인 지역 상권 살리기에도 한몫 하게 되는 것이다.“청송정원은 주민과 방문객을 기쁘게 하는 힐링 공간으로 자리매김 할 것”이라고 전망한 청송군은 “산책과 운동, 여기에 보는 즐거움까지 줄 수 있는 명품 정원으로 만들어 갈 것”이라는 약속을 함께 전했다.◆청정 환경 속에 들어서는 ‘진보 키즈 카페’맑은 공기를 마시고, 오염되지 않은 흙을 만지며 자란 아이는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 건강하다고 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 환경은 인간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산소 카페’ 청송군은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일단 외부적 조건이 합격점을 받고 있다. 이름 감안해 청송에 어린이들의 환호성을 부를 새로운 키즈 카페가 만들어지고 있다.“아이 키우기 좋은 보육 환경 조성과 출산 장려 분위기 확산”은 청송군의 민선7기 공약사업 중 하나다. 현재 진행 중인 ‘진보 키즈 카페 조성사업’은 지난 2018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얼마 전엔 키즈 카페 개장에 앞서 미비점을 보완하고 개선 사항을 미리 확인하기 위한 중간보고회가 개최됐다. 청송군청 관계자와 군의회 의장, 군의원 등 50여 명이 참석해 키즈 카페 조성사업 추진 경과를 들었고, 시설 개선에 관한 의견을 청취했다. 물론 현장을 꼼꼼하게 살피며 돌아보기도 했다.오는 6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진보 키즈 카페는 실내 공간(472㎡)과 실외 바닥분수(330㎡)로 구성돼 있다. 영아놀이실, 유아놀이터, 운동 영역, 휴게 공간을 갖췄고, 미끄럼틀, 그물놀이터, 볼풀장 등 각종 놀이기구가 설치된다. 키즈 카페 밖에는 우산분수, 바닥분수, 조합놀이대, 흔들놀이기구, 쉼터가 만들어질 예정이다.“이번에 준공될 진보 키즈 카페엔 인근 도시인 영양에서도 이용자들이 찾아올 것”이라는 게 청송군의 설명. 이에 더해 “아이들의 건전한 성장과 저출산시대 양육 환경 개선을 위한 시설”이라고 관계자는 부연했다.지역 주민들의 요구에 발맞춰 어린들에게 다양한 놀이문화를 제공하게 될 진보 키즈 카페는 근처 문화체육센터와 연계돼 주민들 쉼터로서의 역할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정성 들여 직접 쓴 편지로 고마움 전한 청송군수편지는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전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특히 컴퓨터 자판이 아닌 펜을 들어 직접 손으로 쓴 편지는 받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최근 윤경희 청송군수가 ‘코로나19 사태’ 극복에 애쓴 500여 명 공직자들에게 손편지를 전해 잔잔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윤 군수는 자필 편지를 통해 헌신과 열정으로 코로나19 예방과 확산 방지에 노력한 청송군 공무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편지는 “발병 초기 2명의 관외주민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2차 감염은 물론, 실질적인 지역 감염이 발생하지 않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이는 군민의 노력과 공직자의 헌신과 봉사,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청송사과축제장 변경 배경, 청송사랑화폐 발행 계기, ‘산소카페 청송군’ 슬로건을 만든 이유 등이 담긴 이 편지에서 윤 군수는 그간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전했다.“군민의 안위를 걱정하는 헌신, 열정은 청송 발전의 원동력이자 국가 발전의 밑거름”이라는 격려를 전한 윤 군수는 편지의 말미에선 “군민 모두가 활짝 웃을 수 있는 1등 청송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공직자들과 함께이기에 행복하고 자랑스럽다”며 각별한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청정한 환경 속에 백일홍이 만발할 청송정원을 조성하고, 아이들의 꿈이 커가는 키즈 카페를 만들며, ‘코로나19 사태’ 이후를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있는 청송군은 오늘도 분주하게 미래를 준비 중이다./김종철·홍성식 기자

2020-05-21

테마형 전원주택단지 조성으로 인구소멸 위기 돌파

한국고용정보원이 2018년 조사한 인구소멸 위험지수 분석에서 봉화군이 2050년 인구소멸 고위험지역으로 나타났다.한국고용정보원의 지방소멸지수는 20~39세 가임기 여성 인구수를 65세 이상 노인 인구수로 나눈 값으로 이 지수가 0.5미만으로 내려가면 소멸위험지역으로 간주한다.경북 23개 시·군 중에는 구미, 경산, 칠곡, 포항 등 4개 시군을 제외한 19개 시·군 모두 소멸위험지역으로 포함됐다. 그중 군위·의성·청송·영양·청도·봉화·영덕 등 7개 시·군은 소멸 고위험지역(0.2미만)으로 분류됐다.특히 봉화군은 2050년 전국 인구소멸 고위험 지자체 16개소 중 한 곳에 포함됨에 따라 청정지역의 장점을 살린 다양한 테마형 전원주택단지를 대대적으로 추진해 지역소멸 위험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지역발전을 도모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봉화군은 60년대 말 한때 12만 명에 육박할 정도의 많은 인구가 거주했으나, 산업화와 탈 농촌화 현상으로 2020년 3월말 현재 3만1천951명(1만6천727가구)으로 큰 폭으로 줄어든 상태다.그마저도 매년 감소세를 보이고 있어 인구늘리기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한때 우리사회는 베이비부머 세대(1955년~1963년 출생자)들의 본격적인 은퇴로 풍요로운 삶과 주택의 질적인 추구에 대한 열망으로 전원주택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도 했다.이에 정부는 낙후된 농어촌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농어촌 활력증진과 도농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전원마을조성사업을 시행했다.하지만 전원주택의 개발은 소규모로 개발됨에 따라 부대, 복리시설의 미비로 개별주택이 갖는 주거 편리성에 비해 단지 내 생활환경시설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이 제기됐다. 또, 매년 수백 명이 귀농귀촌을 찾고 있지만 해당 지자체들이 거주 가능한 주택부족과 초기 소득부재로 인한 역귀농 그리고 교통문제, 자녀교육문제, 의료시설 등 각종 편의시설의 미비와 상하수도 등의 문제, 법적 절차와 자본의 한계성 등으로 모범적인 전원주택단지 사례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봉화군은 이러한 기존 전원주택단지들의 단점과 미비점을 보완하고 도시민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테마가 있는 전원주택단지 조성사업을 민선7기 엄태항 군수의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 핵심 사업으로 정해 100개 마을 5000호를 목표로 마을별 힐링, 경치, 소득, 문화재 등 다양한 테마를 구성해 귀농·귀촌 활성화에 매진하고 있다.또 도시민들이 획일화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고 기존의 단순한 주거편의만을 고려한 전원마을에서 볼 수 없었던 테마가 있는 전원주택단지를 조성해 안정적이고 행복한 전원생활을 지원하고, 감소세에 있는 인구증가와 지역경기 활성화를 위해 테마전원주택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봉화군은 이 사업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지역 40개소의 전원마을 가능 후보지를 선정하고 주변 환경과 법적 가능성, 타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우선 10여개소를 선정했다.수요조사와 현장 확인을 통해 1차로 물야면 북지리와 춘양면 소로리에 각각 80가구와 60가구 등 총 140가구를 2023년까지 조성하고자 박차를 가하고 있다.봉화군은 2차로 읍 소재지 각종 편의시설을 선호하는 귀농인들을 위한 도심형으로 봉화읍 삼계리에 100세대, 백두대간수목원과 국립청소년산림체험센터 근로자들을 위한 실거주형 전원주택을 춘양면 도심리에 60세대를 2024년까지 조성하고자 현재 부지 보상 중이다.기존 석포면에 추진 중인 38세대 전원주택단지를 포함하면 5개 지역에 총 340세대의 대규모 전원단지를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다.전원주택단지는 봉화와 춘양 등 문화와 복지시설이 잘 갖춰진 거점생활권 중심지 주변에 집중 조성해 전원생활의 단점인 생활의 편리성을 추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지역에 산재한 군유지를 적극 활용해 전원주택단지를 조성하고, 투자가치가 높은 군유지를 저가 장기임대도 가능토록 해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들이 큰 부담없이 봉화에 조기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소규모 농장 부지제공과 버섯재배사 부지 장기임대 및 버섯종균 저가공급, 소규모 태양광발전시설 설치 지원 등 도시민들의 봉화정착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이밖에도 귀농·귀촌인들의 안전하고 편리한 영농생활을 돕기 위해 최첨단 스마트팜 시설을 설치 지원하고 있다.영농복합형 및 협동조합형 태양광발전사업과 분양형 및 계획입지형 태양광발전사업 등 다양한 녹색자원을 활용한 신재생에너지사업도 봉화에 귀농·귀촌하는 도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다.엄태항 군수는 4선 민선자치단체장의 풍부한 경력을 바탕으로 민선7기 단체장 취임 직후 봉화군 농업기술센터 산하에 있던 농촌개발과를 본청으로 이전시켜 전원농촌개발과로 과 명칭을 변경했다.전원주택단지를 전담하는 전원주택팀과 전원생활지원팀을 신설해 신속한 전원주택단지 관련 업무지원은 물론 각종 귀농교육과 귀농정착자금 지원책 등과 바로 연계 지원할 수 있는 원스톱체계를 갖춰 귀농·귀촌인 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행정조직을 효율적으로 개편했다.봉화군은 현재 5개소의 테마가 있는 전원주택단지 조성으로 도시민들의 귀농·귀촌활성화와 인구유입을 촉진해 지역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경기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귀농·귀촌인들의 취향과 적성에 맞는 다양한 테마의 맞춤형 전원주택단지도 추가로 조성해 명실상부한 ‘전국 최고의 전원생활지 봉화군!’ 기반조성과 나아가 대한민국 전원마을축제를 개최하는 등 봉화군이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전원주택생활의 메카가 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엄태항 봉화군수는 “희망과 꿈이 사라져 가던 봉화군이 도시민 유치로 인구가 늘고 지역이 발전해 풍요로운 전원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희망찬 녹색도시 봉화가 될 수 있도록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0-05-21

“풀지못한 본질적 모순·차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소설을 쓴다는 건 허구의 문장을 수단으로 세계와 인간의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다.소설가가 꼭 똑똑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건 소설가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 아닐까. 고민 없이 해결되는 문제는 없고, 진실은 고민의 시간을 통해 찾아지는 것이므로.소설가가 인간의 소프트웨어라 할 정신 영역을 심화·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의사는 하드웨어라 부를 수 있는 육체의 안정적 보존과 효과적인 치유를 담당하고 있다. 둘 다 쉽지 않은 일이다.여기 내과 의사와 소설가의 삶을 동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최근 첫 번째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을 펴낸 김강(48)씨.1990년대에 청춘 시절을 보낸 김씨는 그 시기를 함께 살았던 수많은 또래들처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나름의 깊은 고민을 했다. 방황의 시간도 길었다.그러나, 30여 년 전 품었던 문제의식은 중년에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았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고 싶었다. 그게 김강 씨가 바쁜 의사 생활 가운데서도 시간을 할애해 소설을 썼던 이유다. 열정은 물론, 뒤따르는 노력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을 터.김씨는 남다른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20대 중반까지는 법학을 공부했고, 스물일곱에 의대 신입생이 됐으며, 마흔에 가까워서야 내과 전문의가 됐다. 그리고, 마흔여덟엔 ‘자신의 책을 낸 소설가’라는 이름표까지 얻었다. 독자들이 그의 삶에 궁금증을 가질만하다.“의사 일과 소설가로서의 역할 두 가지 모두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김강 씨를 초여름 기운이 완연했던 지난 수요일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그는 무엇을 꿈꾸며 어떻게 살아왔을까? 아래는 그 의문에 대한 답변이다.-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72년 바다가 지척인 부산 대연동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대 법학과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경주 동국대 의대에 입학해 공부했다. 서른셋에 결혼했고,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둘 있다.-현재 의사이자 소설가다. 중고교 시절은 어떤 학생이었는지.△무엇이 되겠다는 목표가 뚜렷한 아이는 아니었다.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글을 쓰는 건 좋아했다. 생각하는 걸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고, 그 방식을 찾았던 것 같다.부모님 기억 속에선 모범생인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게 뛰어난 성적도 아니었다. 공부를 썩 잘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분야에서 눈에 띌 만큼 뛰어나지도 않았다. 다만 중학교 때까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피아노 연주를 즐겼다. 고등학교 땐 시 비슷한 걸 쓰곤 했는데,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동인지를 한 권 냈던 기억이 난다.-고교 졸업 후 법대에 입학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아버지의 권유였다. 당시엔 말 잘 듣는 학생이었다.(웃음) 적지 않은 수험생들이 부모의 뜻에 따라 학과를 선택하곤 하던 시대였다. 입학은 했는데 사법시험이나 공무원 시험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저 세상과 인간에 대한 고민, 이를테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지향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1990년대 초반엔 나 말고도 그런 학생들이 많았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세상에 대한 고민과 번민의 시간이 길었다. 무얼 알고 삶의 방식을 모색했다기보다는 정확한 지향이 없으니, 그저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 듯도 하다. 그 시기를 미화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싶다. 그때 보낸 시간을 통해 현재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얻었고, 또한 인간에게 전혀 의미 없는 시간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의대에 입학한 건 언제이고, 그 학과를 선택한 이유는.△스물일곱 살 때다. 학력고사가 아닌 수학능력시험을 보고 입학했다. 학력고사와는 달리 논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정답을 찾는 게 비교적 수월한 시험이다. 의대에 간 이유는… 20대 초반에 부모님께 걱정을 많이 끼쳤다. 자식으로서 한 번이라도 효도란 걸 해 보고 싶었다. 함께 입학한 동기들과는 적지 않게 나이 차이가 났는데, 그런 게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IMF 즈음이라 나 외에도 나이 먹은 의대 신입생들이 적지 않았다.-인턴과 레지던트 등 수련의 시절은 군대 같은 분위기라고 하던데.△나이대접도 조금은 받은 것 같고… 대부분 학년 단위로 움직이니 선배들과 크게 불화할 일은 없었다. 나이 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도 했다. 야구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거기서도 후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지 권위적으로 굴지 않았다. 내 느낌만일 수도 있으나 레지던트가 됐을 때 선배들이 나를 자기 후배로 뽑아가는 걸 싫어하지는 않은 것 같다.-전문의가 된 건 몇 살 때인가.△의대 6년 과정과 인턴, 레지던트까지 거치고 내과 전문의가 됐을 때 서른여덟이었다. 이후 동국대 경주병원에서 일하며 조교수로 생활했다. 거길 그만두고 마흔한 살에 포항으로 와서 몇몇 선배들과 병원을 했다. 2016년부터는 양덕동에서 한 선배와 동업으로 내과를 운영하고 있다. 직원이 13명인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병원이다.-소설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의사 일이 바쁠 텐데 언제 습작을 했나.△3년 전부터다. 그 이전엔 소설을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 내 경우 한 가지 일에 열정을 기울이면 거기에 몰두하는 편이다. 평일엔 의사로 일하고, 술도 마시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주말엔 자리 잡고 앉아 소설 쓰기에만 몰두했다. 처음 1년 동안은 한 달에 한 편 이상 습작을 했다. 마흔다섯 살에 습작을 시작했고, 그해 등단했으니 다른 작가들보다 운이 좋은 편이다. 주말 내내 책상에 앉아있는 날 이해해준 아내와 아이들이 고맙다.-2017년 심훈문학상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주위의 반응은.△소설을 쓰기 시작한지 3개월 만에 상을 받았다. 아버지와 아내가 특히 좋아했다. 취미로 하는 글쓰기가 아니란 걸 인정받았다는 의미도 컸다. 동료 의사들은 ‘대단하다’ ‘언제 소설을 다 썼냐’라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응을 보였다.(웃음) 아직은 세상에 내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가장 먼저 썼던 습작이 1990년대 나와 친구들의 이야기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스토리를 소설이란 방식으로 풀어내고 나니 다음 작품들이 생각보다 쉽게 이어졌다. 짧은 습작 기간에 30편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싶다.-사숙하거나 영향 받은 작가가 있는지.△다소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내가 쓸 수 있는 걸 써야지 누구와 비슷하게 쓰고 싶지는 않다. 집 거실과 병원 진료실에 막심 고리키(러시아의 작가·1868~1936)의 사진을 걸어놓고 있다. 냉소적인 동시에 진중해 보이는 그의 눈빛을 보며 소설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포항문예아카데미와 포항도서관에서 진행된 글쓰기 프로그램은 문장을 만들어 다듬고, 소설의 얼개를 짜는 방법을 익히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얼마 전 첫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이 나왔다. 어떤 기분이 들었나.△출간 전에는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책을 받아드니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아주 좋을 줄 알았는데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부담감도 없지 않았다. 다만 ‘이제 나는 습작생이 아닌 작가다’라는 의식은 생겼다. 보잘것없는 내 습작들의 첫 번째 독자가 돼준 부모님과 아내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이번 책을 통해 다루고자 했던 주제는 뭔가.△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갖가지 감정, 우리가 아직까지 풀지 못한 세계의 본질적 모순들, 차별이나 폭력 같은 주제에 관심이 있다. 책에 수록된 소설 대부분이 가까운 미래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우리 곁에 엄존함에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 인간적 문제와 모순이 그때는 해결될 수 있을까’란 의문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했다.-앞으론 어떤 의사, 어떤 소설가를 꿈꾸는지.△처음 의대에 갔을 땐 목적의식이 없었다. 내 경우엔 환자를 돌보게 되면서 차츰 소명의식이 생겼다. 마음과 귀를 열어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따스한 의사가 되고 싶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소설가로선 일상에만 천착하지 않고, 조금은 큰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작품들을 심화시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도 독자들에게 던지며. 또한 잘 쓰지는 못해도 열심히, 꾸준히 쓰겠다는 약속은 할 수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20

서쪽으로 달린 51일째… 유럽의 동쪽 끝에 서다

◇ 2만2천400㎞, 리스본 도착P에게 연락이 와서 리스본에서 만나기로 했다. P는 나와 반대 방향으로 유럽을 달리는 중. 유라시아 횡단 여행자의 반환점, 혹은 종착점은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호카곶이다. 유럽의 가장 서쪽에 있는 그곳에서 횡단여행의 마침표를 찍는 경우가 많다.동해항에서 똑같이 출발하고 돌아가는 일정도 얼추 비슷한데 유럽 일정은 정반대다. 대부분 여행자들은 호카곶에 왔다 스페인에서 배로 오토바이를 한국으로 보내고 비행기로 귀국한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돌아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루 더 쉬었다가 상태가 나아지면 출발하려고 했는데(세르반테스 동상 인증샷도 찍고) P와 다시 유럽에서 만나기도 쉽지 않을 듯해 리스본으로 왔다. 한낮 더위를 피하려고 아예 새벽에 출발했다.리스본에 와서 엔진오일과 오일필터, 뒷타이어를 갈았다. 모토밀(Motomil)에서 소모품을 교환했다. 한국에서 이곳까지 오토바이로 왔다니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동. 부품비 할인도 받았고 출발하기 전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도로를 돌아나오는 데까지 지켜보며 환송해 감동했다. 혹시나 맡겨 놓고 기다려야 하나 걱정했는데 아주 빠르게 처리해주었다.깨끗하게 세차를 해준 건 기본이고 고정 스트랩, 생수까지 챙겨주는 친절함이라니. 지금까지 달린 거리 약 2만2천400㎞. 내일부턴 집으로 돌아간다. 달릴수록 집과 가까워진다. 두 번째 단락을 끝맺은 기분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니….저녁에 현묵 씨를 만나 서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풀었다. 바르샤바에서 헤어졌으니 그동안 서로 꽤 많은 이야기들이 쌓였다. 역시 더위로 고생한 것이 단연 첫 번째. 나는 이제 북으로 올라가니 더위에선 멀어져 안도하고 현묵 씨는 남쪽으로 가니 걱정이다.◇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간직한 도시 리스본햇살은 따갑지만 스페인 내륙에 비하면 리스본은 선선한 편이다. 마젤란 동상에서 상조르즈 성까지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마젤란은 조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에스파냐(스페인) 왕가의 후원으로 세계 일주를 떠났다.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진실’을 보여주었고 아메리카 대륙 남단 마젤란 해협을 개척하고 필리핀까지 이르렀지만 그곳 원주민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모험가였지만 향료 무역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무역상이기도 했고, 가는 곳마다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열렬한 전도사 노릇도 했다.결국 그는 끝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지휘했던 5척으로 이뤄진 ‘몰루카 함대’ 중 빅토리아 호만 천신만고 끝에 정향을 싣고 에스파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한 척에 실렸던 정향만으로도 함대의 모든 원정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았다. 미각에 눈을 뜬 당시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고 대항해시대를 여는 기폭제였다.리스본은 정말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아랍, 아프리카 사람들이 절반은 되는 듯하다. 의외로 중국인들이 많아 놀랐다. 번화가에 차이나타운으로 불릴 만한 곳이 있었고 그곳 외에도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은 한때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제국이었지만 지금은 유럽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국가다. 인구는 천만 명 정도고 영토도 그리 크지 않다.시내 중심가를 걷는데 오랜 세월 정체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낡고 훼손된 건물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활력을 느낄 수도 없었다. 잠시 스쳐가는 처지에 속단할 수는 없다. 내내 빵과 샌드위치, 우유만 먹다 케밥집에서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배부르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케밥집인 듯하다. 터키, 인도계 사람들이 운영하는 케밥집을 대도시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유럽의 동쪽 끝, 호카곶에 도착하다집을 떠나 서쪽으로 달린 지 51일째 드디어 호카곶에 도착했다. 유럽의 서쪽 끝에서 대서양을 마주보고 섰다. 몸이 휘청일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옛 뱃사람들은 이 바람을 타고 아메리카로 아프리카로 나아갔겠지. 만약 그 시절 태어났더라면 나도 뱃사람이 되어보았을 텐데.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구름이 내려앉았지만 빗방울이 떨어지진 않았고 덕분에 종일 시원했다. 내륙보다 바다를 끼고 가는 길은 확실히 기온이 낮다. 이 정도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스페인 북쪽 해안을 타고 가다 결국 프랑스 내륙을 거쳐야 한다.유럽 내륙은 여전히 폭염에 시달리고 있지만 30도 이상만 올라가지 않으면 별 문제 없이 달릴 수 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추위와 더위를 아주 골고루 경험했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가는 동안 어떤 날씨를 경험할지 알 수가 없다.엔진오일과 타이어를 교체하고 체인 루브까지 칠했더니 확실히 매끄럽게 잘 나간다. 이제 엔진오일만 두 번 교체하면 더는 신경 쓸 것이 없다. 오일필터는 여분으로 모토밀에서 구입했다. 앞서 겪었던 사고 같은 일만 피하고 이제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잘 쉬며 달리는 일만 남았다.무리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달리다보면 다음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로틀을 당길 때가 많다.출발할 때 예상과는 다르게 날씨나 도로 상태뿐만 아니라 온갖 변수들이 생기니, 그 변수들을 최소한의 에너지를 써서 극복하는 게 오토바이 여행의 묘미다.산티아고 오는 길에 포르투 렐루 서점에 들렀다. 정확히는 겉만 보고 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포기했다. 구경하고 나온 손님들만큼 입장할 수 있다. 근처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왔는데도 줄은 그대로였다.렐루 서점은 책을 파는 서점이라기보다 관광명소라고 해야겠다. 오랜 시간 이곳에 오길 바랐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책과 오랜 역사를 품은 공간이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듯하여 아쉬운 마음이 크다.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서점이 자리를 지키고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 사라지는 것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옛 역할을 할 수 없더라도 간판을 내리지 않는 게 낫지 않나. 돌아가면 다시 책방 문을 열어야 한다.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딱 지치지 않을 만큼 에너지를 쓰며 버틸 생각이다. 줄어든 몸피만큼 에너지도 줄일 수 있겠지. 가만히 엎드려 책방에서 혼자 꼼지락거리며 할 수 있는 재미난 일을 찾아야겠다. 멀리 돌아다니는 건 이번 여행을 끝으로 더는 하기 힘들테니.산티아고 숙소는 순례자들로 넘친다. 16개 침대에 빈자리라곤 딱 2개. 한국에서 온 순례자가 그중 3명(1명은 정확하진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오니 실감할 수 있다. 도보 여행자야말로 여행의 순수한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내일은 산티아고에서 하루 쉬고 모레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팜플로나에 갈 계획이다.    /조경국

2020-05-19

영남학파 거두 갈암 이현일 어머니는 ‘여중군자’ 장계향

물은 이념을 초월하여 국경을 넘고 인위적인 행정구역을 무인지경으로 거침없이 달려간다. 산이 막히면 돌고 돌아 산을 배려해주고, 절벽에 닿으면 몸으로 부딪치되 되돌아 나오는 수용과 공존을 반복하면서 유유히 흘러간다. 그래서 안동 임하댐으로 안동 지역만 수몰된 것이 아니라 이웃 청송 진보면 일부도 수몰된다. 갈암 이현일 종택도 청송 진보 광덕마을에서 영덕 창수면 인량마을로 1992년 옮겨 짓는다. 유서 깊은 종택을 옮길 때는 함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여건을 고려한다. 갈암이 인량마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고 태실을 묻은 곳이라 태생적 인연이 되는 고향으로 옮겨온 것이다.# 영해는 어떤 곳인가지금은 행정구역이 나누어지고 한미한 읍으로 전락했지만 고려시대는 동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로 조선시대까지 영해부로 이웃 청송 영양까지 도호부사가 관장하던 곳이다. 우리시대 영덕 하면 대게가 떠오르지만 영덕(영해도호부)은 넓은 벌판의 농산물과 풍부한 해산물이 경제적 기반으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라 정계의 실세들이 거쳐간 곳이다. 송나라 주희의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 영남학파의 종장 점필제 김종직이 영해부사를 거쳐 갔다.물산이 풍부하다는 것은 좋은 면도 있지만, 수탈의 원인이 되어 탐관오리들은 중앙으로 진상하면서 자신도 치부하여 백성은 고달파진다, 영해부사 이정은 자신의 생일잔치에 초대해놓고 떡국 한 그릇에 30금을 받는 탐관의 소굴이었다.우리 역사에 역성혁명이나 쿠데타는 위로부터의 권력싸움이라면 밑으로부터의 혁명인 동학농민혁명(1894년)의 전초전이 영해서 일어난다. 이 지구상에서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표방한 동학만큼 인간을 성스럽게 대한 것은 없을 것이다. 동학교도 이필제는 영해에 있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찾아와 최제우가 순교한 3월 10일(음력)을 기해 1871년(고종 8년) 교주 신원과 반봉건투쟁을 외치며 전국의 동학교도 600여 명이 영해부를 습격하여 부사 이정을 “…. 정사를 잘못하여 세상을 어지럽혔고,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한 죄.”를 꾸짖었지만 끝내 반성하지 않다가 목이 잘렸다. 관아의 돈 130냥을 영해읍내 5개동에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관의 보복은 가혹했다. 90명은 잡혀죽고 20명이 귀양 가고 60여 명이 수배 당했다. 이필제는 능지처참 당했고 부인과 가족, 친족 모두 죽였다. 이처럼 영해지방은 봉기 이후 대대적인 관의 탄압을 받지만 그들의 저항정신은 23년 뒤(19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졌고, 1896년 의병운동 때 태백산 호랑이로 통하는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을 낳았고, 1919년 영해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갔다.#. 유서 깊은 영덕 인량 전통테마마을영덕 강구 지나 축산면을 들어서자 신돌석 장군이 생각나고, 수창면의 인량마을 동쪽의 괴시리 전통마을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었던 목은 이색이 태어났고, 인량마을은 고려 개혁정치의 상징 공민왕의 스승이었던 나옹 왕사와 퇴계 학맥을 이은 갈암 이현일 등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고을이다. 인량마을 입구에 들어가자 갑자기 불어오는 세찬바람에 익어가는 보리가 이리 저리 몸부림친다. 화가 이숙자의 보리밭 그림이 연상되면서 문둥(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닐니리…./ 나환자 이면서 인간적 고통의 고독을 노래한 슬픈 ‘보리피리’시가 떠올랐다. 인량 마을 중간에 체험학교에는 사람 하나 없는 마당에 당나귀 한 마리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체험장 좌,우로 인량2리 1리로 나누어진다. 1리에는 용암종택이 앞에 있고 오른쪽 뒤에 있는 삼백당은 영천이씨 농암 이현보(1467~1555)의 넷째아들로 강원도 관찰사 했던 이중량(1504~1582)종택이다. 넓은 공간에 큰 규모이고, 사람 없는 고택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안채 대문 구멍에 얼굴을 내밀고 길손을 빤히 보고 있다. 왼쪽 위에는 2층 누각의 평범한 처인당 고택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2리에는 마을도 넓고 고택들이 여기 저기 많이 몰려있다. 마을 중간에는 함양박씨 3형제(의연, 의열, 의훈)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가슴 찡한 사적비가 마을의 긍지를 높인다. 조금 뒤에는 강파 권상임의 고택이 청백리다운 담백한 낭만이 흘러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는(儉而不陋 華而不侈) 말이 떠올라 내 마음도 즐겁다. 강파 고택 뒤에는 1450년대 지은 안동 권씨 부정공파 영해 입향조 오봉 권책의 종택인데 200여 년 뒤에 불타고 다시 지은 것이다. 좌측에 백산정은 우리 시대 정신은 사라지고 단가대로 업자가 지은 유치찬란한 한옥이라 눈과 마음이 괴롭다. 아마도 문중에서 돈 각출하여 지었을 것이다.영해지역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다는 만괴헌 신재수 고택에 들어서자 마음이 몹시도 아팠다. 잘 정리하면 매력적인 집인데 온갖 잡다한 물건들은 어지럽게 놓여있고 사랑채 겸 정자는 기둥도 기울어졌다. 아, 그때 안채에서 몸과 다리가 불편한 어르신이 힘겹게 나오시길래 차마 눈을 마주치기가 송구하여 말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왔다. 제일 위에 자리 잡은 재령이씨 영해 입향조 이애의 충효당 종택은 인량 마을에서 전망은 가장 좋았다. 마침 서울 살다가 10년 전부터 충효당에 있다는 파종손은 “한 10년 사니까 전문 셰프 되었다.”며 맑게 웃는다. 나오면서 이름을 묻자 웃으면서 “몽룡입니다. 아니 이몽룡, 아직도 춘향이는 기다리고 있답니다.” 한 바탕 웃으면서 나왔다.#. 갈암 이현일과 종택사람의 일생은 시대에 따라 좌우되고 집안의 환경은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고조부 이애는 영해로 장가들어 인량마을 입향조가 된 인연으로 갈암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명의 첫 부인은 임진왜란 때 순국한 광산김씨 김해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이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한 경당 장흥효의 무남독녀 장계향이다. 장계향은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안동의 신사임당으로 칭송받는다. 여기서 난 갈암은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학문을 전수받아 퇴계학의 적통을 이어받는다. 산림처사로 학문에 매진하던 갈암은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까지 오른다. 갈암의 시대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인조때부터 숙종의 시기인데 숙종의 인현왕후(서인)와 장희빈(남인)의 붕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갑술옥사 때 68세의 나이에 홍원으로 귀양 간다. 조선시대 학문의 중심은 주자학이었다. 연구하는 입장에 따라 율곡 학통을 이어받은 기호학파는 김장생, 조헌, 송시열, 권상하로 이어진 서인이었다. 김종직→ 이언적→ 퇴계로 이어진 영남학파는→학봉→경당→갈암은 다시→대산→정재로 어어준 영남 남인의 종장이 된다.갈암은 학문을 이룩한 경지도 크고 뚜렷하지만 필자가 주목하고 좋아하는 것은 호를 고상하지 않은 칡뿌리 갈(葛)자를 쓴 것과 해박한 역사지식에 자연과 벗하되 현실을 깊이 사유한 문장과 시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의 ‘수오재기’는 자신을 지키지 못한 회한을 가슴 뭉클한 반성의 문장이라면, 갈암 이현일의 ‘갈암기’도 자신을 갈고닦아 칡처럼 다양한 용도로 세상에 쓰임을 각오하는 훌륭한 문장이다. ‘갈암기’도 칡을 빗대어 자신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칡이란 재질은 질기고 깨끗하며 마디는 길고 부드러워서 꼬아서 새끼를 만들 수도 있고 짜서 베를 만들 수도 있으며 두건을 만들기도 좋고 신발을 만들기도 좋으니…. 이제 내가 칡으로 만든 갈건으로 술을 거르고 칡으로 만든 신발로 서리를 밟으며 칡으로 만든 베를 몸에 걸침으로서 더위를 막고 칡으로 만든 줄로 지붕을 얽어맴으로써 비바람에 대비한다…. 이에 나의 사사로운 용도를 넉넉히 하고 나의 분수에 맡겨둘 뿐 남에게 도움을 바라지 않으며 순진하고 소박한 천성을 지니고서 그럭저럭 자족한 삶을 살뿐이니 이러한 상태를 극도로 미루어 간다면 거의 갈천씨의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이름을 삼고 싶은 것으로는 그 의의가 칡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내가 이 때문에 다른 좋은 것들을 다 제쳐놓고 이 칡을 취하였던 것이다…”인량마을 입구에는 무안박씨 영해파 입향조 청어당 종택이 애국지사 박주억 생가에 새로 지어 놓아졌고 옆 뒤에는 인량교회가, 조금 옆에는 청송 진보에서 옮겨온 갈암 종택에 화사한 꽃들이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새로 지어 놓은 솟을대문은 너무 높아 안채와 어울리지 않는다. 옮겨온 종택은 소박 단정한 지족의 선비 같았고, 잘 관리한 고택에 온갖 꽃들을 잘 가꾸어 놓아 자연을 좋아한 갈암 선생이 흡족해 할 것 같다. 정원 정리하고 있던 종부께 인사드리니 수줍은 미소로 “낫 들고 꼴이 말이 아닙니다.” 하시고 종손께 알리고 식혜와 다식을 내어 오신다. 12대 종손 이원흥님과 퇴계, 학봉과 서애, 호계서원, 병산서원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곡식이 농부의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더만 집과 정원은 손 가는 만큼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마치 미인같이….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05-19

생명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모성 넘어선 위대한 여성성 ‘몽실’

20세기 한국 소설이 가장 많이 그리고 진지하게 다룬 제재는 6.25이다. 6.25가 우리 민족에게 가져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권정생은 아동문학의 영역에 6.25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적극적으로 가져온 대표적인 작가이다. ‘몽실언니’(1984)는 ‘초가집이 있던 마을’(1985), ‘점득이네’(1990)와 함께 권정생이 발표한 ‘6.25 전쟁 삼부작’ 중의 한 편이다. ‘몽실언니’는 장편소년소설로서 1981년 처음 연재를 시작해, 198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오랜 동안 사랑받아 온 스테디셀러이며, 1990년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권정생의 대표작이다.‘몽실언니’는 6.25를 전후한 시기에 몽실이라는 소녀가 일곱 살부터 열한 살에 이를 때까지 두 명의 아버지(정씨, 김씨)와 두 명의 어머니(밀양댁, 북촌댁)를 모시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른 세 명의 동생(김영득, 김영순, 정난남)을 돌보며 온갖 고난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이다. 해방 뒤 귀국하여 살강마을에서 어렵게 살던 몽실의 어머니 밀양댁은, 남편 정씨가 일자리를 찾아 집을 떠난 사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몽실을 데리고 댓골마을의 김씨에게 시집을 간다. 이후 밀양댁이 아들을 낳자 김씨는 몽실을 구박하고, 몽실은 김씨의 폭력으로 평생 다리 하나를 평생 못 쓰게 된다. 노루실의 정씨에게 돌아온 몽실은 정씨가 새로 얻은 북촌댁과 사이좋게 지낸다. 그러나 전쟁이 터져 정씨는 전쟁터로 끌려 나가고, 북촌댁은 아기를 낳은 후 삼일만에 병으로 죽는다. 약해진 몸으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정씨는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는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몽실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꿋꿋하게 인생을 헤쳐 나간다.‘몽실언니’의 주요 배경은 안동 일직면 운산리를 중심으로 한 경북 의성과 청송 등이다. 안동의 대표적 시인인 안상학에 따르면, 일본에서 귀국한 몽실의 가족이 처음 살던 살강마을은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있으며, 몽실의 엄마인 밀양댁이 김씨에게 새로 시집 가서 살던 댓골마을은 경북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에 있다고 한다. 댓골마을은 몽실이처럼 귀국동포였던 권정생 가족이 일본에서 돌아와 1년 반 동안 살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엄마 북촌댁과 함께 살던 노루실은 안동시 일직면 운산장터에서 남쪽으로 5리 밖에 있으며, 몽실이 구걸을 하여 동생 난남이를 먹여 살리던 장터는 운산장터를 말한다고 한다. (안상학, ‘권정생이 그린 몽실의 길과 마을’, 창비어린이, 2011.3, 183-192면) 권정생은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통하여 생동감이 넘치는 몽실의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었던 것이다.한민족 중의 그 누구도 6.25의 상처로부터 예외일 수 없겠지만, 권정생 역시도 그 고통의 한복판에 있었다. 전쟁이 나자 권정생의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도 모르게 되었다. 또한 권정생이 평생 동안 살면서 작품을 집필한 안동 조탑마을은 6.25 전쟁 때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진 격전지 중 하나라서 다른 어느 곳보다도 마을 사람들의 억울한 희생이 많았다고 한다.(원종찬, ‘속죄양 권정생’, 권정생의 삶과 문학, 창비, 2008, 107면) 권정생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전쟁의 다양한 모습은 ‘몽실언니’라는 장편의 실감나는 서사적 육체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몽실의 가장 큰 특징은 약자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우선 몽실언니라는 제목처럼, 몽실은 동생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보여준다. 김씨네서 구박을 받다가 고모를 따라 아버지에게 가는 길에도, 김씨와 밀양댁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 영득이를 두고 어떻게 가나?”라고 걱정을 한다. 나중에 밀양댁이 영득이와 영순이를 남기고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노루골에서 댓골마을을 오가며 영득이와 영순이를 돌보기도 한다. 특히 정씨와 북촌댁 사이에서 태어난 난남을 향해 쏟는 사랑과 정성은 초인적이다. 북촌댁은 난남을 낳고 사흘만에 죽는데, 이후 몽실이는 식모살이를 하거나 구걸을 하면서까지 난남을 키워낸다. 그러한 몽실의 사랑은 같은 핏줄을 지닌 가족의 범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념이나 인종의 경계도 뛰어넘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것이다. 몽실은 “인민을 못살게 하는 반동 분자는 죽여야 해!”라고 말하는 의용군에게 반발하며, 의용군의 총구 앞에서도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는다. 몽실의 박애(博愛)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검둥이 아기”를 돌보려고 애쓰는 장면이다.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된 “검둥이 갓난아기”를 보고, 지나던 사람들은 “화냥년의 새끼!”라며 침을 뱉고 발길로 걷어차 죽이려 한다. 이 때 몽실은 자신의 온몸을 던져 아기를 보호한다.“검둥이 아기”를 위해 몸을 던지는 몽실의 모습은 2007년에 작성한 유언장의 마지막과 닮아 있다. 유언장은 “제 예금 통장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 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베트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이충렬,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산처럼, 2018, 401면)로 끝난다. 여기에는 권정생이 평생 간직한 아이들과 평화에 대한 사랑, 그리고 통일에 지향이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마음은 결코 한민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티베트 아이들에게까지 열려 있는 것이다.몽실이는 결코 동생과 부모의 사랑을 다투고, 성장에 따르는 심신의 스트레스로 힘겨워하는 철부지 언니가 아니다. 권정생이 그려낸 몽실언니는 차라리 위대한 모성을 지닌 어머니에 가까운 모습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권정생 문학의 변치 않는 중요한 요소이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무명저고리와 동화’도 희생적인 어머니를 그린 작품이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권정생에게 어머니는 참으로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권정생의 자전적 산문인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1986)에는, 작가의 어머니가 베풀었던 사랑이 눈물겹게 묘사되어 있다. 1957년 권정생의 어머니는 객지생활을 하다가 폐결핵에 걸린 아들을 집으로 데려가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결핵균이 신장과 방광으로 번지는 상항에서 권정생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으며, 이 때마다 어머니는 함께 잠을 자지 않으며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산과 들로 다니며 약초와 메뚜기, 뱀, 개구리를 잡아와 먹였고, 벌레 한 마리도 죽이는 것을 꺼리시던 어머니가 이 때 껍질을 벗겼던 개구리만 해도 수천 마리가 넘을 거라고 회상한다. 이런 어머니의 정성으로 죽기만을 기다리던 권정생의 건강은 조금씩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난다.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권정생은 사실상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몽실을 왜 굳이 ‘어린 언니’로 만들었을까? 이것은 독자인 소년 소녀들을 위한 배려일 수 있다. 동시에 몽실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과 순수한 인간애를 발휘하기에 어머니는 적당하지 않은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대는 폭력적인 가부장제가 철통같은 지배력을 발휘하는 시기였다. 실제로 ‘몽실언니’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지극히 폭력적이며 이기적이다. 몽실이에게 폭력을 휘둘러 평생 다리 하나를 못 쓰게 한 김씨는 말할 것도 없고, 친아버지인 정씨 역시 몽실을 “술 취하고 때리는 것”에 있어서는 똑같다. 그렇기에 몽실이 “어느 쪽이 김씨 아버지인지 어느 쪽이 정씨 아버지인지 잘 가려내지 못할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아버지들의 모습은 “사람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6.25 전쟁과 닮아 있기도 하다.여자는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 수 없단다”나 “여자라는 건 남편과 먹을 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단다.”와 같은 말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세상에서, 어머니가 베풀 수 있는 사랑은 남편의 핏줄과 관련된 존재로만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실제로 이 작품에서 몽실의 친엄마인 밀양댁에게서 가부장제가 강제한 가족주의의 한계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밀양댁은 처음 몽실이를 데리고 김씨네 집에 가지만, 김씨의 아들 영득이가 태어나자 끝내 몽실이를 정씨에게 보내는데 동의하고 만다. 나중에 북촌댁의 죽음으로 돌봐주는 이가 없게 된 몽실이가 갓난아기인 난남이를 데리고 왔을 때는, 자기와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순이에게는 젖을 먹이면서도 암죽만 먹어 뼈만 남은 난남이는 본 체 만 체한다. 이러한 행동 모두 김씨의 핏줄만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가부장제가 낳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몽실은 죽은 밀양댁과 북촉댁, 그리고 미군에게 몸을 팔아 살아가는 금년이를 생각하며 “여자라는 것 때문에, 어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엄마 몽실’이 아닌 ‘언니 몽실’만이 혈육은 물론이고 이념과 인종마저 뛰어넘는 숭고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권정생의 ‘몽실언니’는 6.25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아동문학의 틀로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는 의미도 크지만, 가족(특히 가부장)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의의를 부여받는 기존의 모성을 뛰어넘는 위대한 여성성을 제시한 작품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필요가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5-18

흑백처럼 어두운 땅그래도 희망은 있다

21세기 벽두. 빈자와 부자는 같은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화려한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세칭 ‘명품 가방’의 가격이 곧 오를 예정이라는 뉴스가 나오자 아침부터 값이 오르기 전 그 가방을 사려는 사람들이 명품매장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그 일이 있기 불과 얼마 전. 생존의 위기에 몰린 수천 명의 소상공인들은 명품 가방 1~2개 가격에 해당하는 대출금을 신청하기 위해 은행과 관공서 앞에서 밤샘을 했다. 대부분 조그만 술집과 소규모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었다.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가난은 부끄럽지 않은 것”이지만 매우 자주 인간을 불편하게 한다.또한 “단순히 돈이 많다는 건 자랑할 일이 못 된다”고 말하지만 가지고 있는 많은 돈은 어떤 인간이건 그를 우쭐하게 만든다. 누가 있어 이 사실을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빈부의 차이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살아가는 전혀 다른 삶은 한국에서만 목격되는 게 아니다. 유럽이건 아시아건, 아메리카건 아프리카건 전 세계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더불어 과거와 지금, 현재와 앞으로도 유사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알바니아와 캄보디아에서 마주친 빈곤지금으로부터 9년 전쯤이다. 조그만 배낭 하나 메고 중동과 유럽을 여행하던 기자는 알바니아 듀레스에서 이탈리아 남부 해변도시 바리로 가는 배를 탄 적이 있다. 15시간의 항해로 아드리아해(海)를 건너는, 최소 1천여 명을 태울 수 있는 거대한 여객선이었다.거기엔 침대와 이불 없이 맨바닥에 앉아 있어야 하는 3등석과 샤워실과 발코니까지 갖춘 1등석이 동시에 존재했다.배가 출발하기 몇 시간 전부터 3등석 티켓을 사려는 승객들로 매표소 앞이 시장통인양 북적였다.대부분이 경제적으로 곤궁한 동유럽을 떠나 비교적 부유한 남부 유럽과 서부 유럽에서 일거리를 찾으려는 이들이라고 했다. 젊은이는 물론 노인들도 적지 않았고, 허술한 옷차림의 엄마 품에 안긴 젖먹이 아기도 여럿이었다.1등석과 특실 승객들은 그 난장판에서 훌쩍 비껴나 있었다. 비싼 티켓을 발권하는 창구는 한산했고, 1등석 티켓 구매자들은 3등석 승객들의 출입이 제한된 출구를 지나 편하게 배에 올랐으므로.크메르의 고대 유적을 보기 위해 몇 차례 찾았던 캄보디아의 국경 도시 포이펫에서 목도한 한빈(寒貧)의 풍경도 기억 속에 또렷하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포장되지 않은 질퍽한 거리. 채 150cm가 될까 말까한 조그만 체구의 아주머니들이 자기 몸보다 5~6배는 커 보이는 리어카에 짐을 잔뜩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특별한 기술 없는 캄보디아 육체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2~3달러에 불과하다고 들었다.포이펫만이 아니다. 프놈펜과 시아누크빌 등 캄보디아 상당수 도시엔 오로지 ‘밥을 굶지 않기 위해’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장사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듯했다.싸구려 음료수 몇 병과 과자 몇 봉지, 조악한 품질의 휴지나 비누 따위를 낡은 판자 위에 깔아 놓고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캄보디아 구멍가게 상인들이 벌어들이는 하루 수입은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보잘것없을 게 분명할 터.허름한 가게에서 맥주 서너 병을 청해 먼지 날리는 길에서 마실 때면 괜히 서글프고 마음 아팠다. 그런데, 돌아보면 알바니아와 캄보디아만이 아니었다. 한국 또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절대적 가난을 국민 대부분이 앓았다.초등학생도 100만 원짜리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입에 들어가는 음식의 양이 아닌 질을 따지는 한국인. 그러나 그런 시절을 살아온 건 불과 얼마 전부터다. 인간에게 수치심과 자존심을 버리게 만드는 가난. 우리 역시 오랫동안 그런 세월을 살아왔다.눈 맑고 선량한 인품을 가진 시인 나해철(64)의 절창 ‘영산포’가 그려내는 건 부정할 수 없는 30~40년 전 우리네 ‘가난의 풍경’이다.▲웃음과 희망, 가난을 이기는 힘은…한 세대 전 한국. 번성했던 포구가 쇠락을 길을 걸으면서 그곳의 젊은 여성들은 도시로 떠났다.가난한 살림에 자기 입 하나라도 줄이고, 동생들의 연필과 스케치북을 사주기 위한 공장행. 비단 영산포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경상도와 충청도 시골 마을에도 그런 처녀는 흔전만전이었다.울면서 마을을 떠난 누이들은 ‘빈손의 설움 속에 살아온 어머니가 묻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쉽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끊지 못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늘 같이 흐르고’ 누이는 철 지난 ‘개나리꽃처럼’ 시들어갔다.아무리 기다려도 누님은 오지 않았고, 잔칫날도 큰집의 제삿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누이를 아는 모두가 오래도록 소리 죽여 울 수밖에 없었던 시난고난의 세월을 우리도 지나왔다. 캄보디아나 알바니아의 서민들처럼.그렇다면 가난은 인간의 모든 ‘존재 조건’을 박탈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현재의 한국을 보면. 그래서다. 빈곤 속에서 겨우겨우 삶을 이어가는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제넘지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태도, 결핍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우리 또한 그러했다”고.앞서도 말했지만 가난이 자랑스러울 건 없다. 하지만 그걸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14

노래하는 포항 홍보대사가 되고픈 ‘경찰 가수’ 권영삼

최근 높은 인기를 얻으며 방영된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을 안타까운 눈길로 지켜본 사람이 있다. ‘노래하는 경찰’로 이름이 알려진 권영삼(52) 경위다.‘46세 이하’라는 자격 요건에 걸려 도전을 포기해야 했던 권씨는 다른 가수가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서 열창하는 모습이 한없이 부러웠을 터.1992년 경찰이 됐고, 1997년 가수로 데뷔한 권영삼 씨는 세상 무엇보다 노래와 무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가졌던 아쉬움과 부러움이 충분히 이해된다.열 살도 되기 전 조용필의 노래와 몸짓을 따라하던 아이는 서른 살이 가까워서야 그토록 원하던 가수의 꿈을 이뤘다. 포항을 포함한 경북 지역 축제무대에 서며 원 없이 노래를 불렀다. 물론 본업인 경찰 직무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이젠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 한 가지 일을 제대로 잘 해내기도 어려운 게 사람이다. 그런데 경찰과 가수라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왔으니 권씨의 삶은 누구보다 바쁘고 드라마틱했을 게 분명하다.웃는 모습이 소박하고 선량해 보이는 그를 지난 주말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아래는 “누군가에게 도움과 기쁨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경찰 가수’ 권영삼이 지금까지 걸어온 삶의 궤적이다.-태어난 곳은 어딘가. 간단하게 가족 소개도 부탁한다.△딸기와 감자로 유명한 경북 고령이다. 1968년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고향을 떠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다녔다. 아내와 대학생인 딸, 고등학교에서 축구를 하는 아들과 함께 산다.-노래에 관심을 가지고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시기는.△초등학교 다닐 때 누나가 듣던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노래를 들었다. ‘고추잠자리’ ‘못찾겠다 꾀꼬리’ ‘비련’ 등이 동요보다 좋았다. 최고의 가수를 흉내 내면서 따라 불렀다. 시골에선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으니 동네 어른들이 ‘귀엽다’며 사탕도 사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줬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가수의 꿈을 가졌던 것 같다.-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그때도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1980년대 후반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대구의 라이브 무대에 서기도 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노래 하러 다니는 나를 걱정한 작은형에게 잡혀 학교로 돌아갔다. 고교 졸업장은 받아야 했으니까.(웃음) 졸업 이후엔 잠시 가수의 꿈을 접고 의무 경찰로 복무했다.-경찰이 된 건 언제인지.△1987년 고교 졸업 후 바로 입대했다. 제대한 게 1990년이다. 의경 시절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경찰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공무원인 아버지와 형의 권유로 경찰 시험을 준비하게 됐다. 그 기간이 살아오면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때다. 1992년 어렵게 합격해 포항으로 발령을 받았다. 세월은 빨라 올해로 벌써 28년을 경찰로 살아왔다.-버리지 못했던 가수의 꿈을 이룬 건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가.△1996년에 포항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렸다. 아마추어 가수들에겐 큰 무대다. 묻어두었던 꿈이 생각나 거기에 도전했다. 포항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본선대회에서 상반기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경찰이라는 직업과 가수 생활을 병행해보자라고 마음먹었다.-당시 가족들과 주의의 반응은 어땠나.△아버지는 자신의 막내아들이 경찰을 그만두고 가수로 산다고 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아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니 좋기는 하지만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전국노래자랑 수상 이듬해인 1997년 포항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선배에게 곡을 받아 첫 번째 앨범을 냈다. 그게 벌써 23년 전이다.-가수로 활동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제1회 ‘포항 국제 불빛축제’ 무대에 섰을 때다. 조금 과장하자면 수만 명의 관객이 영일대해수욕장 해변에서 울릉도행 배가 오가는 선착장까지 들어찼다. 그때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듯하다.-가수와 경찰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게 쉬울 것 같지는 않다.△가수가 됐던 초기엔 경찰서에 권위적인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경찰이 무슨 노래냐’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노래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고, 가수 활동을 통해 주민에게 편하게 다가가 좋은 관계도 형성할 수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격려의 목소리도 많아졌다. 날 이해해준 동료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경찰로선 주로 어떤 업무를 수행했는지.△포항남부경찰서 관내 파출소 근무를 20년 이상 했다. 이곳엔 13개의 파출소가 있다. 주로 주민들과 밀착된 경찰 관련 업무를 해왔다. 쉽게 이야기하면 시민들의 어려움을 바로 곁에서 해결해주고 도와주는 역할인데,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준다’는 가수 활동과도 일정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다.-경찰로 일하며 느꼈던 가장 큰 보람은.△수도 없이 많은 사건과 사고를 접하며 살았다. 과거엔 벌금을 내지 못해 수배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소액의 벌금만 내면 해결되는 것인데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들은 그게 쉽지 않았다. 그들 중 몇 명에게 벌금을 빌려줬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내 성격 때문인데, 나중에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사람을 보며 경찰로서의 기쁨을 맛봤다.-가수로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아쉬웠던 일이 있다면.△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지내왔으니 크게 아쉬운 건 없다. 하지만, 얼마 전 출전하려고 마음먹었던 ‘미스터 트롯’에 나이를 이유로 나가지 못한 건 참으로 안타까웠다. 스스로는 아직 젊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46세 이하’라는 자격 요건 탓에 도전을 거부당했다. 앞으로 TV에서 이런 경연이 열린다면 나이 제한을 없앴으면 좋겠다. 꿈을 이루는데 나이가 걸림돌이 된다는 건 너무 서글픈 일 아닌가.-포항에서 많은 무대에 섰다고 들었다. 자선공연도 여러 차례 했다던데.△‘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요즘은 무대에 서기가 어렵다. 30대 때는 내가 가진 재능으로 좋은 일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자선공연을 자주 열었다. ‘경찰 가수’라는 타이틀이 있어 모금 실적도 나쁘지 않았다. 대형 마트에 마련된 무대에서 3년쯤 연말 자선공연을 진행했다. 거기서 모인 돈은 복지센터 등에 기부했다. 한국에서도 기부문화가 좀 더 활성화됐으면 한다.-다시 태어난다면 경찰과 가수 중 어떤 걸 선택하고 싶은지.△하나만 고르지는 못하겠다.(웃음)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경찰, 대중에게 행복감을 선물하는 가수 둘 다 하고 싶다. 이건 내 소박한 욕심이다.-지금까지 4장의 앨범을 냈다. 당신의 노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포항에서 경찰로 일하며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젠 그들에게 무언가를 돌려주고 싶다. ‘비바 포항’과 ‘과메기 추억’은 그런 이유에서 만들어진 곡이다. 타 지역에 포항을 알리고, 시민들에게 힘을 줬으면 한다는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줬으면 좋겠다. 내 노래가 개사돼 노인들의 보이스피싱 피해를 예방하는 작은 역할을 했다는 것도 잊을 수 없는 보람이었다.-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떤 가수, 어떤 경찰로 남길 원하는가.△주민들과 잘 융화하는 경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경찰로 기억되고 싶다. 가수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다면 기부문화를 정착시킨 사람으로 살고 싶기도 하다.-40년 이상 노래와 더불어 살았다. 노래에는 어떤 매력이 있나.△‘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 열풍을 보면 알겠지만, 노래엔 사람살이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는 힘이 담겼다. 노래는 삶의 희로애락을 싣고 우리 곁을 달리는 버스 같은 게 아닐까. 특히나 지금처럼 우울한 시기엔 노래가 치료제의 역할도 하고 있다고 본다.-가수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준다면.△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현실이 팍팍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꿈을 위한 도전을 계속하라고 격려해주고 싶다. 나도 그랬으니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13

영주시, 코로나19 극복 범시민대책위 출범 경제 활성화 총력

영주시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를 최소화하고 지역경기 침체 등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시는 일차적으로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한 방역 및 시민 홍보 활동, 정부 방침에 따른 긴급재난생활비 지원 사업을 신속히 진행했다.코로나19 사태 이후 발생할 경기침체에 따른 다양한 분야에서의 민생고충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하고 이를 대처하기 위한 100대 과제를 선정, 코로나19 극복 범시민대책위원회 출범식을 갖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적인 접근 방안 마련에도 안간힘을 쏟고 있다.◇코로나19 극복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 출범영주시는 코로나19 조기 극복을 위해 지난 1일 민·관이 함께하는 코로나19 극복 범시민대책위원회를 출범했다.코로나19 극복 범시민대책위원회는 시민화합, 경제활력, 생활방역 등 총 10개 분과로 구성해 영주시장과 민간인이 공동위원장을 맡아 범시민 운동으로 확산한다는 계획이다.대책위원회는 분과별 회의를 통해 위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생활 밀착형 실천 과제를 발굴해 코로나19 극복과 범시민 100대 과제를 선정한다.지금은 현재를 걱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에서 벗어나 코로나19 종식 이후를 생각할 때라며 지역경제 활성화와 시민 화합을 위해 민·관이 함께 협력해 조기 극복할 수 있는 역량과 대안을 만들 시기라는데 뜻을 함께했다.코로나19의 확산으로 온라인 중심으로 재편된 소비를 다시 지역 서비스로 옮겨오려면 지역의 서비스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코로나19의 종식 때까지 시민 모두 가정 및 개인사업장 생활 방역 체계를 철저히 유지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범시민대책위원회는 생활 속 거리두기 실천과 지속적인 생활방역으로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경기 부양책 마련에 힘을 보태게 된다.◇범시민대책위원회 분과별 100대 과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시민화합 분과, 경제활력 분과, 시민 돌봄 분과, 문화체육 분과, 시민안전 분과, 교육지원 분과, 생활방역 분과, 장기전략운영 분과, 관광진흥 분과, 농축산지원 분과 등으로 구성됐다.시민화합 분과는 7대 과제로 유관기관·단체 네트워크 구축, 민생 안정을 위한 관내 음식점 가보기 운동에 이어 후생복지 사업 등의 과제를 중점 개발 운영한다.경제활력 분과는 피해 점포 지원사업, 소상공인 카드 수수료 지원사업, 전통시장 무료 와이파이존 구축, 피해 자영업자를 위한 건축물 용도변경 등 설계비용 감면, 실직자 단기 행복 일자리 제공, 코로나19 특별공공근로사업 추진, 공설시장 사용료 감면 연장, 소규모 주민숙원사업 상반기 집중 완료 추진 등 33개의 과제를 수행한다.시민 돌봄 분과는 경북도 재난 긴급 생활비 지원, 저소득층 한시생활비지원, 아동양육 한시지원, 독거노인 반려식물 키우기 운동, 공익형 참여자 상품권 추가 지급 등 5개 과제를 수행하고 문화체육 분과는 코로나19 종식 기념 체육대회, 선비세상 조성사업, 감염병 퇴치 기원 자전거 대회, 영주시민 다 함께 걷기, 시민 노래방 경연대회, 안방에서 즐기는 문화예술공연 제작 등 6개 과제를 수행한다.시민안전 분과는 WHO 국제안전도시 공인인증 사업 추진, 신혼부부 임차보증금 이자지원사업 조기추진, 운수업체 건전 경영 지원 사업, 피해 운수종사자 지원사업 등 5개 과제를, 교육지원 분과는 학교 및 학원 방역관리, 국립 인성교육진흥원 설립 유치, 국립 청백리 기념관 유치 등 3개 과제를, 생활 방역 분과는 병·의원 및 약국 방역소독지원, 감염병 예방을 위한 소독장비 대여, 선비체조 보급, 공공 체육시설 폐쇄에 따른 건강유지 홍보 등 5개 과제를 각각 수행한다.장기전략 분과는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조성, 죽령 옛길 세계유산 등재, 청년 친화형 도시모델 구축, 힐링승마 콤플렉스 조성, 강 마을 재생 사업 등 15개 과제를, 관광진흥 분과는 쿠폰 북 제작, 가족 단위 우리 지역 체험여행, 맞춤형 도시락 관광상품 개발 등 7개 과제를, 농축산지원 분과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농특산물 수출 특별지원, 농산물 팔아주기 행사, 대도시 판촉 행사, 농작물 재해보험료 확대지원, 2021 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 개최 등 14개 과제를 수행한다.범시민대책위원회는 분과별로 총 100대 과제를 수행하면서 현실에 맞게 보완해 나갈 방침이다.◇영주시 코로나19 대처는 이렇게영주시는 코로나19 발생과 함께 영주시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재난안전대책본부를 구성했다.차장직을 맞은 부시장은 사회적 거리두기 추진 T/F팀을 관장하고 통제관에 보건소장, 행정안전국장이 행정지원관을 맡아 업무를 수행 중이다.실무팀에는 상황총괄반, 전염병 대책반, 방역지원반, 물자지원반, 인력지원반, 홍보지원반, 문화교육지원반, 경제지원반, 교통환경반, 복지구호반, 확인점검반을 두고 유관기관과의 협력을 위해 연락관을 파견하는 체제를 구축했다.각 지원반은 업무 추진에 대한 일일보고 및 관련 부서와의 업무 협조를 비롯해 매일 시민들을 대상으로 일일상황에 대한 상황 전파 및 대시민 안전을 위한 홍보 활동을 이어간다.코로나 발생 이후 재난안전대책본부는 생활 속 거리두기 전환에 따른 일상방역 대책 추진과 다양한 문제에 대한 모니터링, 민심 동향 관리, 코로나19 상담 19개 읍면동 전담창구 운영에 이어 2차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끝나면서 감염증에 대한 경각심이 약해짐에 따라 코로나 극복을 위한 현시점의 중요성 홍보와 민생경제 활성화 대책 마련을 위한 다양한 대안 방안을 모색한다.장욱현 영주시장 인터뷰재난안전본부 24시간 가동지역활력화 39대 시책 추진-코로나19 발생 이후 영주시의 대응은.△시는 1월 31일부터 모든 상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영주시 재난안전대책본부를 24시간 비상체제로 운영 중이다.보건소를 중심으로 선별진료소 운영과 확진자 발생 현황 및 대응 상황을 매일 정례브리핑과 홈페이지, SNS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코로나19 환자 및 자가격리자 현황은.△국내 코로나19 발생 초기에 감염됐던 확진자 5명은 완치된 상태며, 이달 12일 기준 모니터링 중인 자사격리대상은 해외유입자 35명, 국내 외부 접촉자 2명 등 37명이다. 국가지정 감염병원 영주적십자병원의 입원자는 없다.-코로나19 극복 지역활력화 시책은.△최근 출범한 범시민대책위원회와 시책 사업으로 3개 분야 39대 시책을 세워놓고 적극 추진 중이다.긴급재난생계비 지원은 140억원을 투입해 재난 긴급생활비 지원사업에 85억3천만원, 저소득층 한시생활 지원사업에 35억9천600만원, 아동교육 한시지원 사업 15억5천800만원,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에 3억5천600만원을 지원한다.-일자리 및 소상공인 지원사업은.△영주사랑상품권 10% 할인판매 연장, 착한 임대인 운동 추진, 피해자 지방세 감면, 공설시장 사용료 감면, 상하수도 요금 한시적 감면, 농기계 임대료 감면 추진, 지역 신선농산물 팔아주기를 위해 517억원의 추가예산을 편성한 상태다.-방역대책 및 시민편의 지원은.△사회적 거리두기와 안심식당 지정 운영, 취약계층 및 사회복지시설종사자와 소상공인 등 마스크 배부, 영주시민 방역의 날 운영, 전통시장 및 상가 일제 방역 등을 실시 중이다.-앞으로 계획은.△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태원 코로나19 확산 사태로 전 국민의 노력과 희생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다.코로나19 지역사회 집단감염 확산을 차단하는 것은 철저한 대응력 뿐이라 생각한다.모든 시민들과 1천여 공직자들에게 안전에 대한 의식을 당부 한다.이달 5일부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단계적으로 완화되고 6일부터 정부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를 시행하고 있다.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해야 하는 생활방역이라는 새로운 일상은 시작됐다.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새로운 페러다임이 될 생활방역체계 구축과 지역경제 활력화를 위해 단계적이며 신속한 대비 체제를 만들어갈 것이다./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0-05-13

블록 하나 사이에 두고 100년 된 헌책방… 동떨어진 세상 속 공간

◇ 니스에서 아름다운 소르본느 서점을 만나다고모댁에 지내며 잠시 기록하는 걸 멈췄다. 매일 기록한다는 건 굉장한 인내심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잠들기 전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써두지 않으면 눈을 감기 힘들었다. 아무리 피곤하고 잠이 쏟아져도 기록하려 노력했던 건 오랜 기간 준비하고 떠나온 이번 여정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떠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다시 하기 힘든 경험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으면 떠나기 위해 고생했던 것들을 보상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 남는 것은 언제나 일기와 사진뿐이었다.40일 넘게 달려오며 바닥난 에너지를 다시 충전했다. 그래도 그냥 쉬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고모부의 설명을 들으며 니스에 있는 대부분의 미술관과 전시관을 돌아보고 문 연 지 100년 가까운(1931년) 헌책방 ‘소르본느 서점’도 다녀왔다. 프랑스도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서점이 점점 줄어들고 있단다. 서점을 여러 곳 찾아다녔으나 문을 닫은 곳도 있고, 예전보다 형편이 어려워진 곳도 있었다. 그나마 소르본느 서점은 규모도 크고 갖춘 장서도 훌륭했으나 손님은 많지 않았다.한 블록만 내려가도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해안도로였으나 소르본느 서점은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 속에 있는 공간 같았다. 소르본느 서점의 원주인은 러시아 혁명을 피해 니스에 정착한 망명 귀족이었다.니스는 오랜 세월 유럽의 이름난 휴양지라 이곳을 찾고, 거주했던 예술가와 귀족들이 많았고 그 덕분인지 작은 도시임에도(35만 명, 근교 거주자 포함 100만) 그들이 남긴 문화 자산으로 풍요로운 곳이다 . 그중에서도 특히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앙리 마티스와 세잔과 피카소는 니스를 사랑했던 예술가들이다. 니스의 강렬하고 투명한 햇볕은 끊임없이 창작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매개였겠지. 그들이 만든 이야기와 작품이 남았기 때문에 니스는 단순한 휴양지 이상의 가치를 지닌 도시라고 생각했다. 도시를 풍성하게 하는 건 새로운 공장이나 건물이 아니라 예술가와 그들이 만든 이야기, 그리고 훼손하지 않은 유적과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작은 할아버지의 부고를 듣다3일 동안 니스에서 충분히 쉬고 새벽 니스를 떠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은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야한다. 스페인으로 넘어오기 직전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톨게이트에서 줄을 잘못 서서 진땀을 뺐다. 뒤에 줄을 길게 서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게 어렵다. 스페인에 들어와선 톨게이트 앞에서 매의 눈으로 현금을 낼 수 있는 통로를 찾아들어갔다. 어떻게 결제하는지도 앞 운전자를 자세히 관찰했다.무더위에 오토바이를 타고 대도시로 들어가는 건 항상 괴롭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시베리아의 서늘한 바람을 벌써 맞고 싶으니. 신용카드로 통행료를 내려고 했더니 불가. 결국 직원 호출 버튼을 눌러 카드번호를 불러주고서야 결제할 수 있었다. 스피커로 다른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는데(프랑스어가 들릴 리가) 크레디트 카드와 넘버만 또렷하게 들렸다. 눈치가 갈수록 늘고 있다.프랑스도 스페인도 유인 톨게이트가 없다. 모두 기계다. 사람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기계로 대체하고 있다. 기계가 편리할 것 같지만 기계가 해결책은 내놓지 못한다.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결국 사람의 손을 거쳐야한다. 기업의 이익과 효율을 위해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는 것은 결국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소득의 불균형을 가져올 뿐이다.바르셀로나에서 이틀 밤 묵고 마드리드로. 반환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바르셀로나에선 가우디가 남긴 건축물들을 보고 싶었다. 책과 사진으로 보았던 그의 작품들은 시대와 관습을 완전히 뛰어넘는 천재의 것이었다. 하지만 숙소를 떠날 수 없었다. 작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르셀로나에서 하고 싶었던 건 모두 포기했다. 집안의 장손으로 응당 장례를 도와야했는데, 이리 멀리 떠나와 있으니. 이틀 동안 숙소 밖을 나가지 않았다. 불혹이 지나며 기쁜 일보다 슬픈 일에 불려가거나 소식을 듣는 게 부쩍 횟수가 늘었다.◇ 폭염을 뚫고 마드리드로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왔다. 사라고사 근처에선 한낮 기온이 37도까지 올랐다. 헬멧 내피와 슈트를 물에 적시며 달렸지만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말랐다. 서유럽 지역 전체가 이상 고온으로 비상이라는 기사를 숙소에 들어와서 읽었다. 파리는 40도가 넘을 수도 있단다. 숙소에 들어와서 샤워를 했지만 열이 식지 않았다. 온몸이 불덩이 같다. 30도만 넘어도 힘든데 마드리드에 도착할 때까지 35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뙤약볕 아래 달리는 건 체력 소모가 엄청나다.오늘 마신 물이 3리터가 넘는다. 이번 주 내내 뜨거운 염천이라니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 열기가 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더위를 참으며 달리는 것도 힘든 일이다.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갔다 반환점인 포르토 렐루서점까진 약 1,000킬로미터. 이런 날씨가 파리를 넘어갈 때까지 계속 된다면 5,000킬로미터를 버텨야 한다. 하루 주행 거리를 짧게 잡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오늘 달린 600킬로미터가 나로선 임계치인 듯.모든 열이 눈으로 몰린 것 같았다. 끼니를 모두 거르고 수건에 물을 적셔 눈에 대고 종일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런 날씨에 헬멧을 쓰고 있으면 달리고 있어도 머리가 뜨겁다. 쉴드를 열면 도로 위에서 달궈진 바람이…. 한증막 문을 여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들어오듯 한다. 밤이 되곤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눈두덩이 열은 그대로였다. 강한 빛을 계속 마주보고 달렸더니 눈도 얼마나 시린지. 선글라스를 해도 어느 선을 넘어가면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몸 상태가 이상하면 가장 빨리 신호를 주는 곳이 눈이다. 나이가 들수록 빛에 더 예민해지는 듯하다.결국 리스본에서의 계획도 모두 접었다. 숙소 가까이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있는데도 꼼짝할 수 없었다. 밤이 될 때까지 물수건을 눈에 붙이고 누워 있었으니까. 나까지 모두 5명 한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해가 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에어컨도 없는 방이라 창문으로 넘어오는 바람이 잠시 쉬기라도 하면 금방 더위가 찼다. 저녁 6시쯤 기온이 39도였다. “인페르노(화염지옥)가 온다”는 어느 스페인 기상 캐스터의 말을 빌린 신문기사를 읽었다. 이래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나.이번 여행의 소득이라면 대륙을 가로지르며 ‘기후변화’를 직접 몸으로 경험한 것이다. 예전 후쿠시마 원전과 가까운 나미에초에 갔을 때 보고 느꼈던 것과 근사치에 가까운 깨달음이다. 지구는 이미 인류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2020-05-12

단단하고 내실있고 담백한 맛이 나는 정겨운 고택

#. 구미 해평과 일선리 문화재마을 가는 길안동 임하댐으로 수몰지역인 무실, 박곡, 용계, 한들 마을에서 70여 가구의 대규모로 옮겨온 일선리 마을을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 군위군 소보면 시골 산길로 하여 해평으로 들어갔다. 해평(海平),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직역하면 바다 평야다. 내륙이지만 산을 등지고 흘러내리는 물은 습문천이 되어, 기름진 평야를 끼고 유유히 젖줄 되어 흘러가는 낙동강에 온몸을 맡긴다. 두 물줄기가 기름진 충적평야의 옥토를 만들어 주는 곳이라 이름에 걸맞다. 해평에서 일선리 문화재 마을에 가기 전에 길 좌, 우 야트막한 산(낙산고분군)에 가야 및 원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고분 205기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어 오래전부터 토착지배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라 최초로 눌지왕 2년(418년)에 아도화상이 세운 도리사가 있고, 통일신라시대의 낙산리 3층 석탑이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신라가 쇠약해지는 말기(907년)에 후삼국이 각축을 펼 때 견훤이 일선군과 남쪽 10여 성을 점령하여 후백제가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936년(고려 태조 19년) 왕건이 선산 알리천에서 최후의 승리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때 김선(金宣)은 왕건을 도와 큰 공을 세워 일선김씨를 하사받고 이 지역 대표적 가문이 된다.해평면은 지금이야 구미국가공단으로 한적했던 구미에 편입되었지만, 고려시대부터 현으로 독립관청이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해평을 본으로 하는 성씨만 해도 해평 윤씨를 비롯하여 해평 김씨, 해평 손씨, 해평 유씨, 해평 길씨, 해평 전씨 등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낙산 고분군을 조금 더 가면 길옆에 가슴 찡한 의로운 개 무덤이 있다. 해평에 사는 하급관리였던 김성원(또는 노성원)은 출퇴근도 개와 같이하면서 아낌없이 보살펴 주었다. 어느 날 이웃동네에서 술이 잔뜩 취하여 집으로 오는 도중에 풀밭에 쓰러져 깊이 잠이 들었다. 불이나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강으로 달려가 몸을 적셔 풀밭을 뒹굴어 불길이 잡히자 기진맥진하여 주인 옆에 쓰러져 죽었다. 깨어난 주인은 자신을 위해 온몸으로 불 끄고 죽은 개에 감동을 받아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이와 같은 의로운 개 기록은 많고 임실의 오수에도 이와 비슷하다. 신라 때 김개인(金蓋仁)도 술 취해 잠들고 불이 나자 냇가에 달려가 물 묻힌 개가 방화선으로 불 끄고 죽는다. 이것은 고려 고종(1254년)때 문인 최자의 보한집에 실려 있고, 1973년 교과서에 실려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함부로 개 같은 놈 하면 안 된다. 개보다 못한 놈이 많다. 그 김개인은 죽은 개를 위한 슬픈 견분곡(犬墳曲)을 짓는다.#. 안동에서 해평으로 옮겨온 일선리 문화재마을1987년 임하댐으로 3개군 6개면 41개 동네가 사라졌다. 그중 박실, 무실, 한들, 용계마을 사람들이 고택 문화재와 함께 옮겨왔다. 70가구가 동시에 옮기려면 집터와 농지가 필수적인 조건이라 전주류씨 무실파 문중차원에서 추진위원회가 구성된다. 안동 남후면, 예천 신풍면, 상주 중동면, 구미(당시 선산) 해평면 후보지 중에 해평 낙산리(이주하고 일선리로 바꿈)를 선택했다. 안동과 멀었지만 농지와 집터 확보가 가능했고 학문을 좋아하는 류씨 문중은 이중환이 택리지에 “영남 인재 반은 선산에 있다.(嶺南人才在一善)”라고 하였듯이, 선산은 불사이군의 상징 야은 길재와 영남학파의 종장 김종직과 그의 아버지 김숙자. 의병장 허위 등 안동과 비견될만한 문향이 서려 있는 것에도 한몫했다. 집터 200평~5천10평은 추첨으로 분양받고 농사지을 논 12마지기(1천400평)를 각각 불하받아 조상대대로 살면서 정 들었던 고향을 떠나 낯설은 구미 해평 낙산리에 정착하여 오늘의 일선리 문화재마을을 이루었다.일선리 문화재마을에 들어섰다. 필자는 예전에 이 마을에 와서 바둑판같이 구획해놓아 군 막사나 관공서 관사 같아 실망하고 아쉬웠지만, 다만 옮겨놓은 고택들 하나하나는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관광차 밀려오던 일선리 휴게소는 썰렁하고 그 옆에는 매매를 내놓아 마을의 쇠락을 알린다. 버스 기다리는 할머니 한 분과 잠시 대화했다. 마을이 수몰될 때 있는 사람들은 대구나 도시로 나가고 보상 없이 아무것도 없이 온 사람들이 다 부자 되었단다.젊은이는 나가고 한 사람도 없고 70살 지난 사람이 가장 젊단다. 집터와 농지를 불하받을 때 집터는 1평 6천500원, 논은 1평 3천500원이었는데 있는 사람들은 맞돈(현금의 경상도말)주고 샀고, 없는 사람들은 20~30년 연부로 하여 이제는 전부 다 갚았고, 모두다 부자 되었다고 한 번 더 힘주어 강조하신다. 여기가 안동보다 교통 좋고 병원 가깝고 여건이 좋다 하시면서 79살 나이만 알려주고 이름은 끝내 밝히지 않고 버스에 오르신다.마을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 뒷산을 오르다 마침 약통 메고 밭일하러 오는 어르신을 만나 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금 일선리 마을은 산을 깎아 터를 만들고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논을 분양했단다. 집터 분양가는 6천원 조금 더했는데 융자는 8~9천원이었다. 전주 류씨 무실파의 70가구에 안동 권씨, 진성이씨, 의성김씨 타성 몇 가구가 왔고, 있는 사람들은 안동으로 제일 많이 나가고 대구에도 많이 갔다 하신다. 고향 생각 나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하룻밤 자고 나면 생각나 1년에 서너 번은 안동 갔는데 차차 고향 생각이 멀어지고, 10년 지나서는 긴요한 일 아니면 가지 않습니다.”33년 지난 지금은 어떠십니까? “생각이야 간혹 나지만 모든 여건과 농사짓기가 안동보다 좋고, 여기 선산사람들은 우리를‘안동 산중 사람’이라고 놀려도 우리를 양반대접 해줘서 고맙다”하신다. 그 대신 밭이 귀해 산비탈 쪼아서 조금 하고 이 뒷산도 국유지였는데 군수에게 부탁하여 문중에서 산 것이라 했다. 아들딸 4남매 객지에 나가고 아내와 행복하게 농사일 하며 사시는 모습 보니 성자 같아 보였고, 대화 내내 웃음 머금은 온화한 미소는 진정 아름다운 이 시대 양반을 뵌 것 같아 겸손해지고 마음이 행복했다. 그리고 바로 앞에 흉물처럼 짓다 만 현대식 건물을 물어보았다. “짓다가 부도가 났고, 좀 옳찮은 사람인데, 사기가 농후한 사람입니다.”안동 앙반 다운 말씀이었다.#. 내려다본 구미와 일선리 고택들드론 없이 내려다본 사진 찍으려면 발품을 팔아 산 위를 올라야 된다. 신록의 좁은 산 오솔길은 정겨웠지만 한참을 올라야 했다. 이윽고 경주 남산모양으로 큰 바위 여러 개가 집단으로 엉켜있어 기뻤다. 여러 바위 덩어리 중 평평한 큰 바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듯 반가웠고 고마웠다. 아래를 내려다본 풍경은 가히 일품이었다. 왼쪽 저 멀리는 구미 금오산이 옹골차게 중심을 잡아준다. 오른쪽은 선산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에 평화로움을 맡긴다. 발아래 일선리 마을이 질서 정연하게 있고, 왼편에는 해평 들판의 옥토가 풍요롭게 누워있는 기막힌 장면을 연출한다. 갈 길 바쁜 나그네는 배고픔도 잊은 채 한참을 서성거리다 내려와 옮겨온 고택들을 둘러보았다. 고택 하나하나 다양하여 온갖 사연과 애환이 있겠지만 전주 류씨 무실파 고택들 특징은 외유내강의 선비 같은 맛이나 화려하거나 큰 건물 보다 단단하고 내실있고 담백한 맛이 나 정겨웠다.경사진 마을의 제일 위에는 옮겨온 고택들인데 서로 형제같이 붙어 있다. 우측 위에 동암정은 정면 3칸 원기둥의 단단한 아름다움의 정자였다. 길 건너 용와 고택은 박곡에서 옮겨왔는데 찬찬히 눈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침간정은 건실하게 폐쇄형의 실용적으로 지어 정자 맛은 없었고, 안채는 정면 6칸의 비교적 큰 건물이었다. 제일 중심에 있고 큰 수남위 종택은 임진왜란 전에 지은 건물로 힘과 균형이 어우러진 잘 지은 집이라 박곡의 종택다운 위엄이 있었다.옆에 호고와 정자도 멋 부린 단단한 기교가 넘친다. 임하댁은 높은 단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건물인데 비교적 오래된 고택이 아니기에 크게 권위적으로 지었다. 그러나 집의 짜임새는 알맞게 배치했다. 그 위의 대야정 정자는 난간도 하여 담담한 멋을 부린 아름다운 정자였다.바둑판 같게만 구획하지 않고 자연스런 골목을 만들었다면 아름다운 고택마을이었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보는 사람은 객이고 사는 사람들이 만족하고 행복해하니 성공한 이주마을이었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05-12

권정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

권정생은 우리 시대 위인이다. 그가 위인인 이유는 귀신도 부린다는 돈이 많아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이 있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학벌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가 위인인 이유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는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채, 평생 교회 문칸방이나 좁은 흙집에 살며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 나아가 민들레와 흙덩이를 위해 묵묵히 교회종을 치거나 원고지를 채웠을 뿐이다. 그는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가고, 비천한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다른 모습이라는 성경 속의 세계를 이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살다가 간 사람, 어쩌면 ‘우리 시대 성자’인지도 모른다.권정생은 ‘강아지똥’, ‘무명저고리와 엄마’, ‘깜둥바가지 아줌마’, ‘하느님의 눈물’, ‘몽실언니’, ‘점득이네’와 같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동화나 소년소설을 100편이 훨씬 넘게 남긴 아동문학계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모든 작품이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서 쓰여졌다는 점이다. 1937년에 태어나 해방 직후까지 지냈던 일본에서의 유년 시절과 부산에서 일하던 10대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2007년 별세할 때까지 안동을 떠나지 않았다. 1968년부터 안동 일직교회 사찰집사(주요 업무는 교회 문단속과 시설 관리, 그리고 종지기)로 교회 문간방에 살았고, 1983년부터는 마을 청년들이 빌뱅이 언덕 아래에 지어준 5평 크기의 흙집에서 살며 글쓰기에만 전념하였다.동화 ‘강아지똥’은 1969년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수상작이며 권정생의 등단작이다. 이 작품에는 권정생이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펼쳐갈 사랑과 생명의 사상이 씨앗처럼 쏙쏙 박혀 있다. 주인공인 강아지똥은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으로 “똥 중에서도 제일 더러운 개똥”이다. 그래도 강아지똥은 착하게 살고 싶고 세상에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결국 봄이 와서 싹이 돋아난 민들레를 만나고, 자신이 거름이 되어 민들레의 몸 속으로 들어가면 별처럼 고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아지똥은 너무나 기뻐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아 버리고, 사흘 동안 내린 비에 자디잘게 부서져 민들레 뿌리로 흘러들어가 결국 민들레꽃을 피운다.이 아름다운 동화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주인공이 다름 아닌 강아지똥이라는 점이다. 권정생 이전의 동화에서 주인공은 대개 왕자나 공주 혹은 왕자나 공주가 되려는 천사같은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권정생은 동화에서 “대부분 벙어리, 바보, 거지, 장애인, 외로운 노인, 똥, 지렁이, 구렁이 등 정상인들로터 멸시받거나 그로 인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계삼, ‘진리에 가장 가까운 정신’, 권정생의 삶과 문학, 원종찬 엮음, 창비, 2008)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왕자와 공주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는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엔가 귀하게 쓰일 거야”라는 흙덩이의 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강아지똥이 결국 민들레꽃을 피워내는 귀한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는, 이 땅의 모든 가난하고 병든 약자들에게 힘을 주지만 아마도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힘을 얻은 독자는 권정생 자신이었을 것이다. 권정생이야말로 이 땅의 많고 많은 ‘강아지똥’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권정생은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부모님을 잃고, 형제들과도 자연스럽게 떨여져 살게 되었다. ‘강아지똥’을 쓸 때까지 젊은 권정생은 악몽처럼 떨쳐낼 수 없는 가난과 병고로 몸부림쳐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1956년 당시 불치의 병으로 인식되던 결핵에 걸린 후, 평생 그 병을 짊어지고 살았다.이 시기 권정생이 그토록 동화작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자신이 이 생애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자취는 글밖에 없다고 생각”(이충렬,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산처럼, 2018, 31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등단하기 불과 3년 전에 권정생은 콩팥과 방광을 떼어 내고 의사로부터 길어야 2년 정도를 더 살 거라는 말을 들은 상태였다. “항상 나는 죽는다는 그거, 그게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강아지똥’ 이거 하나라도 써놓고 죽어야지”(권정생·원종찬 대담, ‘저것도 거름이 돼가지고 꽃을 피우는데’, 창비어린이, 2005년 겨울호)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썼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목숨 걸고 쓴다’는 말을 하지만, ‘강아지똥’이야말로 조금의 과장도 없이 작가가 ‘목숨 걸고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한 작가의 초기작일수록 한 인간을 작가로 내몬 내면적 고민의 흔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강아지똥’은 권정생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빈곤과 병환으로 인해 겪을 수밖에 없던 인간적 고통과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고투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다. 아마도 권정생은 이 무렵 자신을 강아지똥과 같은 존재로 여겼을지도 모르며, 이를 극복하는 길은 작품 속의 강아지똥이 자신을 자디잘게 부셔서 민들레꽃을 피워냈듯이, 자신의 병약한 몸에 남은 생명의 진액을 뽑아서 동화를 쓰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나아가 ‘강아지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강아지똥’이라는 근원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별처럼 아름다운 민들레꽃이 개똥과 비와 따뜻한 햇볕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세상 만물은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강아지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첫 번째 동화집 ‘강아지똥’(세종출판사, 1974)의 ‘작가의 말’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작가의 말’은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마당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버린 끝에 참다 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됩니다.”로 시작된다. 거지라는 표현에는 권정생이 이 작품을 쓸 때까지 겪었을 그 처절했던 고통이 잘 압축되어 있다.그러나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라는 문장을 작가의 어려웠던 삶에 대한 고백으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바로 이어 작가는 “하기야, 세상 사람치고 거지 아닌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있다면 ‘나 여기 있소’하고 한번 나서 보실까요? 아마 그런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좀 편하게 앉아서 얻어먹는 상등거지는 있을지라도 역시 거지는 거지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이 모두 깊이 연결되어 서로간의 도움과 배려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자기만 잘났다고 뽐낼 수는 없는 일이다. 절대성 앞에서 모두는 ‘강아지똥’이자 ‘거지’알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때, 새로운 세계는 개시되는 것이다.‘강아지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참으로 놀랍다. 그것은 죽음을 통한 존재의 완전한 전환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서 더 위대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이 작품이 쓰여지던 시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발상이다. 이 시기는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도 오직 발전과 성장에 모든 것을 걸던 때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필연이며, 낙오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 이런 시대에 권정생은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버림으로써 꽃을 피우는 강아지똥을 그려낸 것이다.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꽃피운다는 이 희생과 헌신의 자세는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적 세계관의 본질에 해당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보여준 사랑의 정신이며, 작품에서도 별만큼 고운 민들레꽃을 피운 것은 바로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이었다고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동시에 가장 보잘것없고 무시 받는 존재가 좋은 일을 행하여 성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상상력은 우리 민족의 원형적 상상력에도 맞닿아 있다. 서사무가 ‘바리공주’의 바리공주가 바로 그 성스러운 주인공이다. 일곱 번째 딸인 바리공주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태어남과 동시에 버림받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 바리공주는 행복하게 자란 여섯 명의 언니 대신 온갖 고생을 하며 약을 구해와 아버지를 살려낸다. 그 결과 바리공주는 최고의 높은 정신적 경지에 오른다. ‘강아지똥’이 창작된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도 꾸준하게 읽히는 이유는, 담고 있는 사상이 인류 보편의 아름다운 정신에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아마도 이 땅에는 ‘삶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강아지똥이 조용히 살다 갔음에 분명하다. 그들이 소리 없이 피운 민들레꽃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전히 희생과 사랑이라는 낱말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작가 권정생은…1937년 일본 도쿄 빈민가에서 출생. 1946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가난 탓에 식구들과 헤어져 살았고, 유년시절부터 고구마 장수, 가게 점원 등으로 일했다. 결핵을 앓는 등 몸도 약했다. 1967년 안동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기독교교육’, 조선일보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검소하고 성실한 삶으로 시종했기에 많은 독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5-11

무쳐 먹고, 비벼 먹고… ‘영양산나물’ 봄철 입맛 유혹

부드러운 흙에서 돋아난 순한 나물과 나뭇가지에서 이제 막 돋아난 새순의 맛이 가장 좋을 때가 바로 5월에 접어드는 시기다.그야말로 영양의 산에는 산나물들이 경쟁하듯 자라 산나물을 맛보는 이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익히 알려진대로 봄나물은 대개 향으로 먹지만 4월과 5월의 산나물은 또 다른 맛을 지닌다. 산나물과 새순은 향도 향이거니와 조직에 힘이 있어 입으로 씹히는 맛도 시기마다 달라 매력은 그칠 줄 모른다.그만큼 산나물 맛은 끝이 없다.4월과 5월 사이에 몇 차례 뿌려지는 봄비가 내리면 산나물의 생장도 빨라지면서 맛도 배가 된다. 그래서 야산 어디나 널려있는 산나물을 무쳐 먹거나 비벼 먹으면 어떤 반찬보다 더 맛있다. 간장, 참기름, 마늘, 깨소금을 넣어 숨이 죽지 않도록 살짝 무쳐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그런 산나물이 한자리에 모이는 축제인 영양산나물축제가 올해는 열리지 못한다.코로나19 사태로 많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내년에 다시 만날 예정이다. 아쉬움을 달랠 영양산나물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영양군에서는 저렴하고 신선한 영양산나물을 소비자들이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다. 영양산나물의 매력을 알아보자.◇축제 전면 취소로 영양산나물축제의 만남은 잠시 미뤄영양산나물축제가 가진 우수성은 이미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최우수축제 2회, 우수축제 9회 선정으로 입증됐다. 산채라는 콘텐츠로 계속된 영양군의 도전이 결실을 맺어 경북도를 넘어 전국 축제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이미 소비자를 찾아가는 축제로 수도권 도시민들이 기다리는 축제로 자리잡은 영양고추 HOT페스티벌과 함께 그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올해 1월 ‘경상북도지역축제심의위원회’를 통해 지역을 대표하고 관광자원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경북도 지정 축제 14개에 포함된 영양산나물축제는 유망 축제로 선정, 2천500만원의 지원을 받아 전국구 축제로의 위상도 함께 가지게 됐다. 코로나19로 인한 취소라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내년에는 더욱 더 특별한 콘텐츠로 방문객들에게 다가갈 예정이다.◇영양산나물축제 취소, 모두가 함께 이겨 나가야 할 과제영양산나물축제 방문객에서 파생된 직·간접적인 경제적인 효과는 영양지역 상권 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지역경제 활성화와 주민들의 화합과 행복, 참여, 그리고 소득 증대에 도움이 되는 축제가 된 만큼 올해는 지난해의 열기를 이어받아 최고의 축제로 거듭나는 영양산나물축제를 기대했다.하지만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전면 취소가 되면서 영양산나물축제를 기다려 온 많은 소비자들과 새로운 만남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군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전격 취소를 결정했다. 이로 인해 산나물재배 농가들의 타격이 클 것으로 보인다. 이에 영양군에서는 축제 개최에 따른 판매량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수준까지는 산나물을 소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 행정력을 모으고 있다.◇저렴한 가격과 특별한 마케팅, 온라인 판매가 핵심영양군은 경북도와 시·군 특산품 전용 판매 온라인몰이나 SNS를 적극 활용해 판매를 촉진하는 방식에도 나설 예정이다. ‘사이소(www.cyso.co.kr)’는 경북도에서 운영하는 농특산물 판매 쇼핑몰로 지난해 70억의 매출을 올리는 등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영양군은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높은 신뢰를 얻고 있는 ‘사이소’ 쇼핑몰 내 온라인 산나물축제 개최 특별전을 개최해 영양산나물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다.영양산나물 특판행사 개별페이지도 개설해 영양군의 다양한 농특산물을 구입할 수 있도록 소비자들의 구매 의욕을 충족시키고 있다.산나물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을 높일 수 있도록 산나물과 관련된 판매 홍보 영상과 광고안도 제작, 전국 소비자들에게 노출시키고 있다.◇찾아가는 산나물판매장으로 소비자들의 구매욕 높여영양군에서는 당초 제16회 영양산나물축제 개최 예정 기간과 겹치는 지난 8일부터 14일까지 롯데백화점 광복점에서 특판 행사를 진행해 소비자들의 산나물 구매 욕구를 해소해 줬다.이번 특판 행사를 위해 산나물 구입을 보다 많은 소비자들이 할 수 있도록 부산, 경남 지역에도 대대적인 홍보를 실시해 기간 내 산나물을 구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판매 행사에는 영양고추 사절단인 ‘영양고추아가씨’도 함께하며 영양 농특산물의 우수성을 알렸다.◇상설장터로 산나물축제 취소의 아쉬움을 달래다영양군은 29일까지 산나물이 나오는 시기동안 영양 전통시장 5일장에서 시장 상인회와 협력 속 산나물 재배 8농가와 함께 영양산나물 상설장터를 운영한다.군은 산나물 특판행사 기간을 맞아 보다 많은 방문객이 유입될 수 있도록 향우회나 자매결연 도시를 대상으로 소비자 유치활동을 벌이고 있다.◇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산나물 재배농가 제대로 돕는다영양군은 가격을 낮춰 경쟁력을 높이고 인하된 가격과 배송분을 보전해 농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산나물 재배농가에 대해서는 택배비 50%를 지원하고 택배 발송 시 산나물 배송을 위한 박스 구입비용 70%를 지원하고 있다.택배비와 박스의 건당 구입비는 크지 않지만 판매가 크게 늘어날 경우 농가의 부담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여 군에서 비용을 지원하게 됐다.택배비와 박스비 지원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판매를 위한 판로에도 적극 나서 준비한 산나물을 모두 소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오도창 영양군수는 “코로나19 사태로 침체된 지역경제와 축제 취소로 어려움을 겪는 산나물 재배 농가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피해 최소화를 하는데 모든 행정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장유수기자jang7775@kbmaeil.com

2020-05-11

세상의 모든 중년에게 보내는 위로

중년은 40~50대를 지칭하는 단어다. 묘한 시기다.20대들 앞에선 “나도 아직 젊어”라고 하기에 부끄럽고, 노인들을 향해 “함께 늙어가는 처지”라고 말했다간 핀잔을 먹게 되는 나이.모험과 도전에 방점을 찍고 무모하게 훌쩍 먼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젊은이도 아니고, 골방에 틀어박혀 시린 무릎을 스스로 주무르며 옛날이나 추억하는 늙은이도 아닌 중년. 용기는 사라지고, 지혜는 아직 모자란 어중간한 시절.기자는 바로 이 중년의 한가운데를 살고 있다. 학교와 직장 등에서 만난 친구들도 비슷한 연배. 가끔 모여 세상의 화제를 안주 삼아 소주 한잔 기울일 때면 이야기의 주제나 소재가 청년 시절과는 판이하다는 걸 느낀다.중년이 된 이들이 낯선 외국에서 하루 15시간 버스를 타고 떠도는 배낭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에 대해서도 더 이상 주절주절 하지 않는다. 그러면 매너리즘 속에서 겨우겨우 견디고 있는 생이 더 피곤하고 귀찮아진다.보통 중년들의 술자리 이야깃거리란 새로 바꾼 자동차의 좌석이 얼마나 쾌적한지, 이른바 일류 대학에 들어간 자식이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지, 사놓은 주식이나 시골 땅의 시세가 얼마나 올랐는지 등일 경우가 흔하다. 주위를 돌아보면 이게 과장이 아니란 걸 단박에 알게 된다.지금으로부터 2천500년 전 공자는 ‘논어’ 학이(學而)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이걸 요즘 세대가 사용하는 문장으로 풀어보면 대충 이런 이야기다.“남이 너를 알아주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가 남을 알지 못함을 경계해라.”참으로 근사한 말이다. 사실 중년이라면 이 정도 사람의 도리는 깨닫고 실천해야 맞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게 결코 쉽지 않다.▲세상, 저항과 극복의 대상에서 이해와 해석의 대상으로중년보다 훨씬 젊은 청춘들에게 세상은 저항과 극복의 대상이다.일렁이는 조그만 파도에도 뒤집힐 것 같은 쪽배에 몸을 싣고 거대한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항해를 떠날 용기가 그들에겐 있다.육체는 물론 그 육체에 탑재된 정신까지도 한없이 뜨겁고 건강한 시절. 그들에겐 세상이 무섭지 않을 터. 청년에겐 끝을 알 수 없는 짙푸른 바다가 모험 가득한 세계의 낭만적인 은유로 보일 것이다.청년이 막 항구를 떠난 신형 선박이라면, 중년은 부표 없는 거친 바다를 떠돌다 지쳐 포구에 정박한 낡은 배다. 지나온 항해의 힘겨움을 알기에 앞으로 넘어야 할 파도가 두려운 선원의 심정은 중년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공자처럼 빼어난 현인(賢人)이야 경험의 축적 속에서 나이 들어가며 겸양과 덕을 쌓아가지만, 보통의 사람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세상이 야속하고 미울 뿐이다.앞서 언급한 ‘학이 편’의 문구를 눈앞에 가져다 펼쳐줘도 “아직도 내가 누구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는데, 왜 다른 사람들 사정까지 헤아리고 살아야 하나?”라는 투정이 나올 게 뻔하다. 그러면서도 괜스레 부끄러워할 것이다. 남들이 나잇값 못한다고 손가락질 할까 싶어.거듭 말하지만 청년에게 세상이란 극복과 저항과 대상이다. 그 시절이 지나면 누구에게나 중년이 온다. 그때가 되면 세상은 이해와 해석의 대상으로 모습을 바꾼다.시인 김광규(79)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40년 전쯤 김 시인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시를 쓴다. 그가 중년에 들어섰을 무렵이다.▲스스로를 용서하고 이해한다면 중년의 삶도…‘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오래된 회색 판화와 닮았다. 행간의 의미를 곱씹을수록 우울해진다. 초반엔 빛나는 청년의 나날을, 뒤에는 이와 대비되는 중년의 비루한 오늘을 너무나 명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세상사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던’ 청년의 시간이 지나고 원하지 않았음에도 중년이 된 사내들.한때는 차가운 방을 자신들의 체온으로 덥히던 그들. 쏜살처럼 흘러버린 세월은 그들을 아래와 같은 슬픈 노래나 합창하게 만들었다.‘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그리고…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서/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게 했다.’적지 않은 이들이 대책 없이 나이 먹어가는 걸 서글퍼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 생각해보면 영원한 청년은 세상에 없고, 청년시절 없이 생겨난 중년도 없다. 그렇다면 이 중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게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세상을 해석하고 분석할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현재의 자신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것, 허술하고 하찮을지라도 제 삶을 따스하게 포옹하는 것. 그래야 마음이라도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이 땅의 모든 중년이 공자처럼 ‘온갖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하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들만 사는 세상은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기에./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07

“특권층 전유물이 아닌 그림 보통 사람들도 감동 누려야”

51년 인생에서 40년 넘는 시간을 한 가지에 몰두하며 한 우물을 파왔다면 그 신념의 단단함이 어느 정도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푸른 바다와 짙푸른 녹음, 붉은 일출과 어두운 달그림자가 공존하는 울릉도에서 태어난 소년은 철이 들기 전부터 그림이 좋았다. 물감과 붓만 있다면 어디서건 그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미술은 소년의 ‘운명’ 혹은 ‘삶 자체’가 됐다.흘러온 반세기 동안 울릉도, 포항, 대구, 다시 포항으로 사는 곳은 바뀌었지만 그림을 향한 그의 열정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화가 박승태 씨 이야기다.그림을 그리며, 그림이 가져다주는 매혹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다는 박 화백은 지천명(知天命)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소년 같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학원에서 미술 강사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수십 년간 꾸준히 내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니 꿈의 절반은 이미 이룬 것 아닌가”라며 환한 미소를 짓는 박승태 씨를 포항 중앙동 꿈틀로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만났다.자신의 젊음과 에너지 모두를 그림에 바치며 살아온 세월이 후회되지는 않는지, 앞으로는 어떤 그림으로 사람들과 만나고자 하는지, 지향하는 예술세계는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아래는 그 물음에 관한 박 화백의 솔직한 답변이다.-먼저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1969년 아버지가 교사로 근무하던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살다가 포항으로 나온 건 아홉 살 때다. 이후 중·고교는 포항에서 마쳤고, 대구 계명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그림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언제이고, 미술에 매료된 계기는.△오형제인데, 큰형과 셋째 형이 모두 그림을 잘 그렸다. 집안 분위기가 그랬으니 덩달아 나도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런데, 나보다 더 재능 있던 형들은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고, 결국 내가 화가가 됐다. 인생이 참 재밌다.(웃음)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대회에 나가 상을 받곤 했다. 알게 모르게 유년을 보낸 울릉도의 자연 경관이 미술에 대한 열망의 한 부분을 키워준 듯하다. 어릴 때부터 꿈이 미술교사였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림 그리며 살고 싶었다. 그 꿈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중·고교 시절 미술과 관련된 일화가 있는지.△중학교와 고등학교 땐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렸다. 중학교 시절 미술을 가르친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그때 정말이지 빼어난 실력과 재능을 갖춘 친구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내가 질투를 느낄 정도로 그림 실력이 탁월한 친구였다. 걔가 죽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친구 집까지 찾아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아직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시기에 접한 죽음의 그림자로 인해 오래 슬퍼했다. 당시엔 미술학원과 집만을 오갔는데, 그림 그리는 걸 반가워하지 않던 아버지가 그즈음 미술대학에 입학하는 걸 허락했다. 지금도 가끔 그 친구의 모습과 작품이 떠오른다.-군대에서도 미술 전공한 것이 도움이 됐는가.△예비군을 관리하는 부대에 있었다. 인사·행정병이었는데, 부대 내 현수막 제작과 차트 작업 등을 도맡아 했다. 미술을 공부한 덕택에 군대 생활이 조금은 편해질 수 있었다.-대학을 마친 후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모교인 계명대 인근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했다. 대학 졸업 직후엔 경제적으로 어려워 앞산에서 사람들 초상화도 그렸다. 용돈을 벌어 쓰기 위한 일종의 아르바이트였다. 학원 강사와 운영자로 일하던 시절엔 보람도 있었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이른바 ‘명문 미술대학’에 많이 들어갔다. 개인 사정으로 학원을 정리하고 포항으로 돌아왔던 게 30대 초반 때다. 이후엔 쭉 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다.-당신의 작업 스타일을 소개한다면.△풍경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좋아하고 즐겨 그린다. 나는 자연이 가진 매력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작품 중엔 풍경화가 많다. 지금은 물론 학생 때도 그림의 소재를 찾기 위해 배낭 메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산을 포함한 자연이 그 자체로 좋다. 그 안에 있으면 숨 쉬는 것부터가 편하다.-앞서 질문과 이어지는 것인데, 여행을 좋아한다고 들었다.△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이 스스로 만족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매일, 매시간 모습을 달리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꽃이 필 때와 질 때의 아름다움이 다르고, 해가 뜰 때와 저물 때의 색감이 다르다. 현장에 가지 않으면 그걸 느낄 방법이 없다. 경상도, 서울,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가리지 않고 여행을 다녔다. 가본 여행지 중 가장 멋진 곳을 꼽는다면 적막함과 오밀조밀함이 매력적인 겨울철 보경사 청아골과 가을 무렵의 청송 주왕산이다.-좋아했거나 영향을 받은 화가가 있는지.△폴 세잔느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그린 작품들이 매력적이다. 클로드 모네의 색채도 좋아한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는 요즘엔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과 ‘이삭 줍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됐다. 그들의 그림은 재론의 여지없이 감동적이다.-예술가로 살아가는 게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경제적, 심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텐데.△금전적인 압박도 있고…. 학원을 운영할 때는 시간이 없어서 힘들었다. 해외여행도 그래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도 그림의 소재가 될 좋은 경관의 여행지가 많다.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자연 속에서 내 그림을 완성시켜 나갈 생각이다. 전라도의 갯벌과 어릴 때 떠나와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울릉도의 풍광을 소재로 한 작품도 해보고 싶다.-포항 원도심 활성화와 문화예술인 창작 지원을 위해 조성된 ‘꿈틀로’에 작업실이 있다.△3년 전쯤 들어왔다. 30만 원 정도의 작업실 임대료를 지원받고 있으니 크건 작건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려면 예술가들의 자율권을 존중하는 방식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느낀다.-‘꿈틀로’에서 활동하며 잊을 수 없는 기억은.△동네 주민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내가 지원받는 임대료도 결국은 시민들의 세금이 아닌가. 그걸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돌려주고 싶었다. 2018년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때는 시민들에게 작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초상화를 그려 선물한 분들이 대략 백 명쯤 된다.-당신의 전시회를 찾는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지금까지 개인전을 열 번 열었다. 지난번 전시 때는 지진 탓에 힘들었는데, 이번엔 코로나19가 말썽이다. 전시회 운이 없다. 올해 여는 전시의 핵심은 ‘봄, 여름, 가을, 겨울-반복의 시간’이다. 시간은 흐르지만 그 흐름 속에서도 자연은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바로 그 ‘변함’과 ‘변하지 않음’에 주목했으면 한다. 내 경우엔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림이 밝아진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 ‘밝음’도 잘 살펴줬으면 좋겠다.(웃음)-그림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삶 자체다. 내게 자연은 사랑이다. 나는 내가 가진 재주로 사랑을 느끼는 대상을 화폭에 담는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거창한 의미 부여나 긴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화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할 게 있다면.△목적이나 수단이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그림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궁핍과 외로움을 견디며 자기 자신과 오랜 시간 싸우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꾸준히 작업하는 성실함 역시 필요하다.-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화가를 포함한 예술가와 일반인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화가의 겉멋은 사람들을 그림에서 멀어지게 한다. 몇몇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으로 쓰인 미술평론도 지양돼야 할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누리는 예술이 바람직할까? 그림은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그림이 주는 감동을 누릴 자격이 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06

아낌없는 지원으로 민생경제 살린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 되고 있다. WHO는 감염병의 최고 경고 등급인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악화된 세계경제는 국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봉화군은 예비비 집행에 이어 58억원의 추경예산을 편성해 코로나19 사태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 휴직자, 프리랜서, 중소기업 등 다양한 계층의 군민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하면서 민생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코로나19 극복 소상공인 지원대책 추진봉화군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들의 경제 회복을 위해 3종의 지원 사업을 시행한다.먼저, 2019년도 카드매출액의 0.8%, 최대 50만원까지 지원하는 소상공인 카드 수수료 지원사업을 7월 31일까지 시행할 예정이다.코로나19 확진자 방문점포에 300만원, 휴업점포에 100만원 이내의 재료비, 홍보 마케팅비 등을 지원하는 소상공인 점포 재개장지원사업과, 코로나19로 인한 매출감소가 있는 소상공인에게 50만원을 지급하는 소상공인 경제 회복비 지원사업을 오는 8일까지 시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7월 31일까지 연장해 신청하지 못하는 소상공인이 없도록 시행할 계획이다. 단, 점포재개장비는 경제회복비의 차액분이 지원된다.접수는 읍·면 사무소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신청이 특정 기간에 몰릴 것을 대비해 사업주의 출생년도 끝자리를 기준으로 요일별 5부제를 시행해 신청인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고 있다.□ 코로나19 극복 중소기업 경영안정 지원군은 코로나19로 인해 기업의 거래 감소·지연, 계약지연·파기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을 위해 두 가지 경영안전 지원책을 시행한다.긴급경영안정자금과 특별경영자금은 기업 당 최대 10억원을 1년간 최대 3~4% 범위 내에서 무이자로 지원한다.군은 지난달 2일부터 20일까지 신청·접수를 받아 관내에 중소기업 긴급경영 안정자금을 1개 업체에 총 2억5천만원, 중소기업 특별경영 안정자금을 10개 업체에 총 65억8천만원을 지원해 기업경영 안정화를 도모했다.□ 코로나19 특별공공근로사업 진행군은 코로나19로 인해 고용불안과 구직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취약계층의 생계안정을 위해 6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코로나19 특별공공근로사업’을 시행하고 있다.사업은 기준중위소득 60%이하 취약계층, 실업자 등을 대상으로 부양가족수, 재산 등을 고려해 13개소 사업장에 44명을 배치했다. 선발된 근로자는 지난 4일부터 10월 30일까지 약 6개월간 코로나19 관련 방역 및 물품전달, 행정업무 보조 환경정화 사업 등에 참여한다.□ 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 사업 시행군은 코로나19로 인해 타격을 입은 무급휴직자 및 특수형태근로자·프리랜서를 대상으로 ‘코로나19 봉화군 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사업(1차)’을 시행한다. 이 사업은 올 2월 23일부터 3월 31일까지의 기간 중 휴직일수에 따라 일정금액을 지원해주는 사업이다. 지난달 9일부터 29일까지 173명의 신청자를 받아 5월 중 심사위원회를 연 뒤 지급 여부를 결정, 지역 내 고용안정을 도모한다.□ 억지춘양시장 공영주차타워 건립군은 2018년 중소벤처기업부에서 공모한 ‘전통시장 및 상점가 활성화지원 주차환경개선사업’에 선정됐다. 이에 따라 총 사업비 31억원을 들여 춘양면 의양리 일원 부지 2천998m²에 2층 3단 139면 규모의 억지춘양시장 공영주차타워를 건립한다. 준공은 올 10월이다. 공영주차타워가 생기면 전통시장 이용객의 고질적인 주차문제를 해소할 수 있어 상권 활성화가 기대된다.□ 봉화상설시장 비가림시설 교체군은 코로나19로 인해 시장 이용고객이 줄어든 틈을 타 봉화상설시장 비가림시설 교체 사업을 신속하게 추진하는 등 시장 재정비에 나선다.봉화읍 신시장길 6번지 일원에 총 25억원의 사업비(국비 15억원, 군비 10억원)를 들여 5월말까지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업이 완공되면 우천 시에도 시장 상인들과 이용고객이 불편 없이 시장을 이용할 수 있어 시장경기 활성화에 또 하나의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0-05-05

모짜르트 생가·미라벨궁 지나 베로나… 옛 정취 그대로인 도시들

◇ 바르샤바를 떠나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오스트리아로 넘어오니 돈의 가치가 달라졌다. 프라하에서 묵었던 디스카운트 프라하 호텔은 2박 요금이 아침밥 포함 15.6유로였다. 6인실 도미토리였지만 부엌이 있어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편했다. 잘츠부르크에선 아예 호스텔을 검색할 수도 없었다. 숙소를 잡을 때 기준은 무료 주차와 최저 가격. 거기에 부엌이 있는 곳이면 무조건 오케이. 짤츠부르크에선 그 기준이 아예 통하지 않았다.결국 시내에서 꽤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다. 1인실 조식 포함 50유로. 부킹닷컴 어플로 검색한 최저가. 일반 가정집 다락방인데 비싸지만 50유로가 아깝지 않은 곳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도 친절하고 깨끗하고 주변 경관이 정말 아름다웠다. 문 열고 나가면 알프스 소녀 하이디와 페페가 놀고 있을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그것보단 마리아와 폰 트랩 대령의 아이들이 ‘도레미송’을 부르고 있을 것 같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 짤츠부르크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어쨌거나 여행을 떠난 후 처음 누려보는 호사였다. 지금껏 1인실은 한 번도 묵어보지 못했다. 만약 캠핑 장비를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알프스 주변이나 북유럽에선 캠핑장을 이용했을 텐데 사고로 사이드박스를 잃어버린 후유증이 크다. 사이드박스가 완전히 깨져버려 그 안에 있는 캠핑 장비를 모두 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텐트 치고 자는 재미를 빼앗겨 버린 슬픔보다 경비를 줄일 수 있는 수단을 잃어버린 아쉬움이 더 크다.짐을 풀자마자 시내 구경에 나섰다. 대중교통 이용하기 애매한 곳에 숙소가 있어서 그냥 걸어서 다녔다. 걸은 거리만 20킬로미터쯤 될 듯하다. 프라하에서 새벽에 일어나 400킬로미터를 달려오곤 쉬지도 않고 종종거리며 시내 구경하고 돌아왔더니 파김치. 모차르트 생가, 미라벨궁, 기타 등등, 서점 세 곳... 그냥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잘자흐 강변에 앉아 쉬며 어디를 가볼까 지도를 보는데 바로 근처에 아우구스티너 맥주 양조장이 있었다. 안 그래도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픈 참이었다. 아우구스티너 양조장에서 맥주를 마신 건 두고두고 술자리 자랑거리가 될 듯하다. 사실 맥주를 어떻게 사 마시는지 몰라 한참 헤맸다. 아우구스티너 수도원 맥주의 역사는 1621년에 시작되었지만 현재 양조장 건물은 1912년에 지어졌다.건물 밖 넓은 정원은 오후 3시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로 가득 찼다. 관광객을 제외하곤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다. 이곳 양조장은 우리로 치면 오래된 막걸리 술도가 같은 거겠지. 실내 홀과 야외 정원까지 합치면 2천 명 넘게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잘츠부르크 여행은 커다란 상수리나무 밑에서 저민 소시지와 샐러드를 안주 삼아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마신 걸로 충분히 만족.돌아오는 길에 오토바이 매장에 들러 박스를 고정할 스트랩을 구입했다. 박스 지지대에 금이 간 걸 뒤늦게 발견했다. 미리 묶어두지 않으면 나머지 박스들까지 떨어져버릴 수도. 이제 드디어 이탈리아로 넘어가 라이더라면 누구나 한 번쯤 달려보길 꿈꾸는 돌로미티 패스를 달린다.◇ 라이더의 꿈, 돌로미티 패스를 달리다돌로미티를 달리고 싶다고 일기에 썼던 게 2017년 9월 22일. 드디어 그 꿈을 이뤘다. 잘츠부르크를 출발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경계 펠버 타우에른 터널을 지나 돌로미티 산맥을 넘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인 이탈리아 베로나에 왔다. 돌로미티의 산들은 장엄하고 박력이 넘친다. 깎아지르고 우뚝 솟은 산들을 보노라니 탄탄한 근육을 뽐내는 옛 신화 속 영웅들인 듯싶다. 미로처럼 꺾이고 숲으로 하염없이 들어가는 길을 달리다보니 신화의 한 페이지를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듯 황홀했다. 눈부신 만년설, 청량한 공기, 비를 흠뻑 맞으며 급경사를 돌아나갈 때의 아찔함까지…. 오랫동안 잊지 못할 테다. 돌로미티를 넘는 경험은 유라시아 횡단의 하이라이트였다고 해도 좋겠다. 영상을 촬영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아쉽다.베로나에 온 것은 딱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고모가 계신 프랑스 니스까지 가야하니 베니스로 들어가면 니스가 멀어지고 밀라노까지 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어 중간에 있는 베로나를 선택했다. 베니스나 밀라노에 비해 덜 유명한 탓에 오히려 북적이지 않고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베로나 아레나(원형극장)는 로마시대에 지어져 지금도 오페라 공연이 열린다.베로나에 도착했을 땐 여름 오페라 페스티벌이 시작되어 준비가 한창이었다. 광장 한쪽에 스핑크스와 이집트 상징물들이 쌓여 있는 걸 보니 ‘아이다’가 무대에 올려질 듯했다.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건물이 아직도 굳건하다는 것도, 거기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는 것도 부럽다. 이미 토대가 있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것과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걸 만드는 건 격차가 크다. 작게나마 있는 것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훼손하기 일쑤인 것들을 말해보아야 무슨 소용이겠나. 베로나 골목 구석구석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고대 로마에서 현재까지 시간과 역사가 중첩된 공간이다. 이탈리아의 이름난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겠지. 옛것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도시의 매력을 풍성하게 한다.◇ 이탈리아 남자의 매력, 패션 감각과 ‘리액션’흔히 말하는 이탈리아 남자의 매력이란 바로 이것인가, 숙소 주인 아저씨를 보고 느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데 세련되고 깔끔한 옷차림에 호텔리어 수준의 상차림은 기본(혹시 전직 호텔리어였을까). 매력의 핵심은 공감 능력이었다. 손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대화를 이끌어 가는데 ‘리액션’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이게 얼마나 어려운가.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아저씨의 모범을 본 듯하다.베로나에서 니스로 넘어오는 길은 약 450킬로미터. 제노아에서 니스까진 지중해를 왼쪽으로 끼고 달린다. 잘 닦인 해안길이 아니라 험한 산을 뚫고 계곡에 다리를 놓아 연결한 도로다. 터널과 다리를 각각 200개씩은 지났을 듯. 고속도로가 끝날 쯤 통행료가 꽤 나오겠구나 싶었는데 40.5유로를 계산했다. 이탈리아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방식이 우리와 같다. 100킬로미터에 10유로의 비용이 든다고 생각하면 될 듯.한때 유행했던(지금도 유행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중해풍’ 원조를 달리면서 곁눈질로 보았다. 이건 그 마을 전체가 색과 스타일을 공유해야만 매력을 가지는 듯하다. 주변 경관과 상관없이 지중해풍 건물을 짓는다면 우리네 환경에선 튀기만 할 뿐 쉽게 어울리기는 어렵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옅은 황톳빛 기와와 벽체로 마감했는데, 지중해의 푸른빛과 마을을 감싸고 있는 녹색을 중화시키는 색이었다. 바다와 땅과 숲을 공간과 색으로 표현한다면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을 표본으로 삼으면 되겠다.집을 떠난 지 43일 만에 드디어 프랑스 니스 고모댁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인지 모르겠다. 니스 시내로 들어오는 길이 막혀 꽤나 힘들었다.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이었다. 시내가 밤늦도록 북적북적. 고모부, 고모와 니스 해변에서 맥주도 마시고, 골목길에서 열리는 음악 공연도 잠시 구경했다.고모부께선 니스 경찰서에서 무료 통역 봉사활동을 하신다. 도착한 날 렌터카를 빌려 니스를 찾은 한국 관광객들이 차에 둔 짐들을 도둑맞아 통역을 도와주러 가셨는데, 도둑이 차 유리를 깨고 짐을 몽땅 훔쳐갔다고. 렌터카로 여행하는 경우 무조건 트렁크에 넣어야 한다. 가능하면 트렁크가 있는 렌터카를 빌리는 게 나을 듯. 그리고 차를 빌릴 때 파손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    /조경국

2020-05-05

물에 잠겨있는 마을 굽어보는 수애당의 당당한 위용

안동댐과 같이 임하댐 물속에도 여러 마을과 집성촌이 있었다. 대부분 그대로 수몰되고 일부고택들만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었다. 그러나 온갖 사연과 애환이 묻어있는 정겨운 집들과 골목까지 옮겨온 것이 아니기에 그 아련한 향수는 고향 잃은 실향민들의 가슴에 멍들어 있을 것이다. 그중 박곡, 무실(수곡)마을의 전주 류씨 무실 집성촌의 집들 중에 수몰지 근처로 옮겨지은 기양서당, 무실 종택과 수애당, 그리고 강(임하댐) 건너 언덕으로 옮긴 정재 종택을 찾아 나섰다.안동에 8주째 매주 가다 보니 봄을 두 번이나 만끽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남쪽 경주에서 북쪽 안동까지 약 400리 거리의 간격에 1주일 정도 꽃의 개화기 차이 때문이다.#. 조상의 음덕과 집성촌의 사연지금이야 문중보다 개인의 삶과 행복이 더 중요한 시대지만 그래도 조상 중에 큰 벼슬했거나 학식이 뛰어나면 긍지를 가슴에 안고 있다. 안동만 하더라도 진성 이씨들은 벼슬보다 자신을 갈고닦는 수양에 힘쓴 조선 성리학의 거봉 퇴계 이황을, 풍산 유씨들은 국난 극복의 명재상 서애 유성룡으로, 영천 이씨들은 가사문학의 선구자인 농암 이현보로, 고성 이씨들은 독립운동 집안의 석주 이상룡으로, 의성 김씨들은 학봉 김성일로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산다. 전주 류씨 류습의 7대손 류윤성이 서울에 살다 영주의 반남 박씨 사위가 되어 처가살이 와서 낳은 아들 유성은 안동 내앞(천전) 의성김씨 청계 김진의 사위가 처가의 농장이 있는 무실(수곡)에 정착하여 전주 류씨 무실파의 입향조가 된다. 신부의 집에 사는 처가살이 하는 ‘남귀여가혼’은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등살에 친정과 환경이 전혀 다른 시가 댁에 시집살이하듯이, 처가살이하는 신랑은 고향산천과 부모형제와 친구들과 이별하고 처가에 산다는 것은 늘 긴장 속에 살았을 것이다. 실향민들 1세대는 가슴에 한이 있지만 2세대는 다르듯이 처가살이 1세대 지나면 자신의 고향이 되기 때문에 괜찮다. 그래서 1세대 처가살이 분들은 긴장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일찍 죽는다. 어린 아이들은 외갓집의 보살핌 속에 성장한다. 그 이어진 친가와 외가의 문중은 후대까지 끈끈한 연결고리가 된다.우리나라 집성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양동마을은 처가입향(妻家入鄕)의 대표적인 마을이다. 손소는 풍덕 유씨 류복하의 무남독녀 사위로 처가살이한다. 큰 아들 손백돈은 처가살이하다 요절하고, 둘째아들 우재 손중돈이 청백리가 되어 오늘날 양동마을을 이룬다. 경주 손씨(양동 손씨) 입향조 손소의 사위 이번(1463~1500)도 양동마을에 처가살이하다 37살에 죽는다. 그의 큰아들 이언적은 외삼촌 손중돈에게 학문을 익혀 동방5현으로 영남학파의 종장으로 오늘날 양동 이씨(여강이씨)의 집성촌이 되었다.무실마을의 입향조 류성(1533~1560)도 27살에 어린 아들 두 명 두고 요절한다. 외갓집의 보살핌 속에 자란 큰 아들 기봉 류복기(1555~1617)는 임진왜란 때 최소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의병과 창녕 화왕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작은 아들 류복립은 외삼촌 학봉 김성일을 따라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여 후손이 없다. 그래서 지금 무실파 자손들은 기봉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청계 김진이 쓸려고 한 묘터를 사위 류성이 일찍 죽자 양보한다. 그 터가 명당이라 무실 류씨들이 발복하여 많은 학자와 선비가 나왔다는데 필자는 운명은 자기가 개척하고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지 풍수의 명당론은 허구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민사소송의 대부분이 묘지싸움이다. 양동마을의 양동 손씨, 양동 이씨들과 같이 의성 김씨와 무실 류씨들도 이런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온 것이다. 입향조 유성의 묘터를 준 외가에 고마움으로 의성김씨 청계 김진의 제삿날 제물을 보내준다고 한다.#. 임하댐과 기양서당, 무실 종택과 수애당경주에서 안동 중심부나 서쪽으로 갈 때는 어쩔 수 없이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지만 동편 임하댐 쪽으로 갈 때는 동해안을 끼고 영덕 청송 진보로 가거나 오늘처럼 청송 길안 쪽으로 가면 낭만이 흐르는 아름다운 길이 된다. 청송 송소 고택 앞을 지나 길안 쪽으로 굽이굽이 시골길은 눈물 나는 정서가 있다. 산기슭에 마을이 오순도순 이어지고 협소한 논에 비탈진 밭의 풍경은 옛 시골의 애환 어린 아련한 풍경이라 더욱 살갑게 다가온다. 용계리에 접어들자 임하댐 맑은 물이 녹색 산천의 풀빛과 어우러져 아득한 태고의 신비로 젖어든다. 15미터 위로 옮겨놓은 용계리 은행나무는 반달 전에 움트지 않던 은행잎이 힘겨워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싹트고 있었다. ‘도연교’아래 좌, 우의 임하댐은 환상적이라 한참을 보고 또 보았다. 의성김씨 지례파의 낭만과 비극이 교차되는 도연폭포 바위가 머리만 드러내고 있었다.댐 아래에서 옮겨온 기양서당으로 갔다. 세종 때 학자인 회헌 류의손(1398~1450)과 임진왜란 때 의병장 기봉 류복기(1555~1617)의 위폐를 모시고 기봉의 후손들이 수학과 휴식을 위한 서당이다. 강당은 5칸 원기둥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데 단단하고 야무진 짜임새의 속이 꽉 찬 건물이다. 역락당(亦樂堂)으로 한 것으로 보아서는 학문의 즐거움을 실천하겠다는 무실 류씨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듯하고, 담벼락에 붉은 꽃들은 나그네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근처에 무실 종택과 수애당으로 갔다. 망향정 정자는 튼실하게 잘 지어져 댐 아래 잠겨있는 마을을 굽어보고 긴 수애당이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그 위에는 무실 종택이 말없이 있는데 붉은 꽃들이 간간히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무실파 대종택은 1600년 말이나 1700년초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정면 7칸 측면 6칸의 긴 건물이다. 안채를 둘러싼 긴 사랑채 한쪽을 정자형으로 돌출시켜 실용과 멋을 부렸다.#. 수애당의 류효진 종손, 정재종택과 류성호 종손집이란 건물과 터도 중요하지만 누가 사느냐가 더 중요하듯이 집과 사람이 일체감을 보일 때 아름답고 정겨운 것이다. 필자는 문화유산의 폐사지나 고택을 쓸 때 스님을 만나거나 고택주인을 연락해놓고 만나지는 않는다. 당사자를 만나면 장점만 부각하고 단점은 감추고 안면 때문에 객관적으로 쓰기에 제약을 받는다. 혹 인연되어 만나면 인사 정도 하고 만다.먼저 바깥을 쭉 둘러봤다. 길고 큰 건물이라 가정집이라기보다 객사나 관공서 같았다. 수애 류진걸이 1937년에 지은 건물이라 이 시기 일제강점기 때 지은 집 대부분이 크고 곧은 나무를 사용한 특징 때문에 정감이 흐르거나 낭만적인 맛은 없다. 당시에 이런 규모의 집은 큰 갑부라야 가능하다. 집안에서 여러 아궁이에 군불 때고 있기에 대문을 두드리며 불렀다. 잠시 후 문이 열려 류효진님 아닙니까? 그렇습니다만, 저는 경주에서 왔는데 잠시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아 예, 하면서 다정하게 대청으로 안내한다. 차를 대접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독립운동 양성학교 협동학교 출신 수애당 지은 류진걸 조부는 토목기술자였는데 돈은 엄청 많았고 만주철도 기술자라 김일성이 안 보내주어 북한에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단다. 건물 하나하나 살펴보니 곧은 나무로 빈틈 없이 잘 지은 집인데 대들보도 곧은 목재라 고택에서 휘어져 꿈틀대는 맛이 풍기는 긴장은 없다. 그래도 옳은 생각을 간직한 한량기질의 낭만이 흐르는 주인장이라 집에 생기가 돈다.수애당 주인장은 한사코 점심 대접하겠다고 따라나서 같이 수곡다리 건너 정재 고택으로 갔다. 외따로 언덕위에서 임하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재 종택은 퇴계 학통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1777~1861)의 고조부 양파 류관현(1692~1764)이 1735년에 지은 건물이다. 안채에 비해서 정면 6칸인 사랑채가 유독 커 보였다. 이 사랑채와 지례예술촌의 지산서당, 오류헌, 수애당 건물을 ‘고 대목’이라는 사람이 지은 집인데 수애당은 제일 마지막에 지은 집으로 미완성이었다는 류성호 종손의 설명에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무실 류씨들의 건물에 낭만이 흐르는 계자난간이 없는 것은 음풍농월을 경계하고 학문하겠다는 뜻이란다.수애당 문정현 종부와 정재 종택의 김영한 종부는 필자가 1박2일 종부, 종손들 특강할 때 인연으로 경주 우리 집 수오재도 왔다갔는데 두 분 다 출타중이고 수애당 종손이 정재 종손과 나를 납치하듯이 진보까지 태워가 점심 대접한다. 피를 맑게 하는 정재 종택의 가양주 ‘송화주’는 종택에 오면 맛보여 주겠다했는데 몇 년 만에 왔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종부 없는 종택은 앙꼬없는 찐빵 격이지만 현대의 종부들은 집에서 하염없이 손님만 접대하는 시대는 지났다. 류효진 종손은 안동서 술 사겠다고 한사코 수애당에 자고 가라며 강하게 잡았으나 마음 아프게 정을 뿌리치고 와야 하는 내 마음도 아팠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05-05

사라지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다… 그 존재의 흔적들 뿐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죽음이란 삶의 대극이 아닌 일부”라고 잘라 말했다. 토를 달 것도 없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삶과 죽음은 자석의 N극과 S극, 혹은 물과 기름이 아니라 같은 밀도의 액체를 섞어놓은 혼합주스처럼 존재한다.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살아서 숨 쉬고 움직이는 인간 중 99%는 애써 부정하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연한 사실이 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민족과 인종, 종교와 경제 문제로 야기된 전쟁은 그 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지 않은 인간을 먼저 죽음으로 내몬다. 세계 1·2차대전이 그랬고, 한국전쟁이 그랬으며, 아프리카와 동유럽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내전이 그랬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한 광기 어린 인종주의자의 일그러진 욕망은 유대인 수백 만 명의 죽음과 수난으로 현대사에 기록됐다.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라선 70년 전 한국인들은 어제까지 형, 동생으로 부르던 서로의 가슴에 총을 쏘아댔다.이슬람과 가톨릭, 기독교와 정교회로 각기 다른 신을 섬기던 이들 역시 “망할 이교도”라고 상대방을 힐난하며 이웃의 팔다리를 잘랐다. 함께 저녁을 먹던 식탁으로 핏물이 튀었다.최근 전 세계를 패닉으로 몰고 간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세상 어디에도 끔찍하고 해괴한 병에 걸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전쟁에서 사용되는 총탄에 눈이 달리지 않았듯, 바이러스 또한 사람을 가려 습격하지 않는다.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았던 사람도, 패륜을 거듭하던 천하의 악당도, 어린아이도, 팔순의 노인도 갑작스레 닥쳐오는 전쟁과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죽음의 음습한 그림자를 피해갈 수 없다.▲자신은 사라지지 않을 줄 알던 이들이 남긴 흔적인간은 선한 동시에 악하고, 현명한 동시에 우매하다. 역사란 그걸 증명해온 과정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우매한 자들은 앞서 언급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본질 해석’을 믿지 않거나 백안시했다. 자기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성당과 사찰, 교회가 사후의 행복을 빌기 위한 기원의 공간이라면 거대한 궁전은 살아서의 영화를 끝까지 누리겠다는 욕망의 물질적 현현(顯現)이다. 마침내는 삶의 덧없음을 보여주는.아시아와 유럽, 중동을 여러 차례 여행하며 적지 않은 숫자의 궁전을 보았다. 짧게는 수백 년 전에 축조된 것부터, 멀리는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까지.인도의 북부. 널찍한 호수 근처에 깎아지른 듯 직각에 가깝게 서있는 커다란 석벽. 그 뒤 웅장한 산이 품고 있는 성(城)의 모습은 현실 바깥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하얀색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룬 성채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환하게 눈부셨다.터키 동쪽 끝 조그만 마을 도우베야짓에서 만난 이삭파샤 궁전은 신비하기까지 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가 만들어졌다는 풍문이 떠도는 산 속에 들어선 미려한 고궁(古宮). 유럽에서 온 여행자들은 세월의 풍화를 이겨낸 오래된 흙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이란의 페르세폴리스를 둘러볼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자그마치 2천500년 전 옛날. 당시 지구의 1/4을 지배했던 페르시아 왕조의 위세를 짐작하게 해주는 광활한 유적지인 페르세폴리스. 황량한 사막 위에 세워진 정교한 조각과 엄청난 규모의 열주(列柱)가 한계를 몰랐던 왕들의 권력을 우회적으로 보여줬다.하지만 한 걸음만 물러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자. 그 궁전과 건축물은 영주(領主)나 왕 혼자서 만든 게 아니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 아름답고 휘황한 궁궐과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땀과 피를 흘린 건 피지배 계층이었을 터.최소한 자신만은 영원한 행복, 영원한 권력, 영원한 삶을 지속할 것이라 착각했던 한 사람을 위해 만 사람이 원치 않는 희생을 치른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고성이 아닐까?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는 엄연한 명제에 눈 돌린 지배자들.오래 전 축조된 거대한 성과 건축물은 비이성의 영역에서 영원을 지향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그렇다면 이성의 영역에서 꿈꾸는 영원이란 뭘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내놓을 수 있는 시가 서른도 되기 전 안타깝게 요절한 기형도(1960~1989)의 ‘오래된 서적’이다.▲왕이 원했던 ‘영원’과 시인이 꿈꾼 ‘영원’일본 소설가가 죽음과 삶의 상관관계를 정의했다면, 한국의 시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에 접근하는 방법을 시(詩)라는 수단을 통해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하루키보다 기형도가 한 수 위다.예민했던 청년시인 기형도는 책을 통해 영원을 꿈꾼다. 독서가 있었기에 ‘기적적’으로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텅 빈 희망 속에서’ 책은 영원에 이르는 길을 인간에게 알려준다.책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한 길을 본 시인은 이런 깨달음도 얻게 된다.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라는.고대의 왕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영원에 다가서고자 했다. 웅장한 궁궐을 짓고, 눈부신 보석으로 장식된 조각을 만들었다. 그러나 어떤 권력자도 영원히는 고사하고 100년도 살지 못했다.반면 시인은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꿈꾸어야 한다/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는 노래로 영원을 추구하는 또 다른 길을 일러 주고 있다.한 명 예외 없이 한정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둘 중 어떤 방법으로 영원을 지향해야 할까. 왕의 방식? 아니면 시인의 방식?/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30

독재자의 시대… 철조망 둘러싸인 절망 가득했던 금단의 공간

◇ 바르샤바를 떠나 크라쿠프로바르샤바에서 크라쿠프로 향했다. 비가 온다. 다행히 크라쿠프 숙소에 도착하고서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내는 나가기 어렵겠다. 오는 길에 잠시 스칼라성에 들렀고 엉뚱한 곳을 숙소로 착각해 헤매기도 했다. 주행 중 문제는 없었다. 이 상태만 유지하면 된다. 로시를 수리하느라 리가와 바르샤바에서 시간과 경비를 예상보다 많이 써버린 탓에 나머지 일정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포르투갈까지 갔다가 스웨덴, 핀란드로 해서 다시 러시아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는 여정이니 물가가 비싼 곳에선 아쉽지만 체류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크라쿠프로 내려온 이유는 이곳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기 위해서다.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히틀러와 나치가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현장을 보고 싶었다. 한 사람의 광기가 집단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토록 많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었는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가진 악은 선함보다 훨씬 더 끄집어내기 쉽고 또 힘을 키우기 쉬운 듯하다. 특히 독재자의 시대에선(우리도 마찬가지 시대를 지나왔다) 악의 평범성은 너무나 쉽게 일상이 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주범 중 한 사람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의 중령으로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학살하는 책임자였다. 그는 가족들과 아르헨티나로 몰래 이주해 이름을 숨기고 살다 이스라엘 정보국에 체포되어 재판받았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성찰하지 않는 인간이 어떤 가공할 결과를 초래하는지, 서로 죽고 죽이는 폭력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아이히만의 사례는 잘 보여준다.’크라쿠프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기도 하다. 시내에 가면 그의 법랑냄비 공장이 있다. 오스카 쉰들러도 나치당원이었으나 그는 자신 공장에서 일하던 수용소에서 데려온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1천2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구했다. 선과 악은 공존하지만 악은 ‘평범’만으로도 그 해악의 경계가 없고 용기를 내어야만 하는 선은 그 수고에 비해 이로움을 내기 힘든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선한 사람이 되기 힘든 것이겠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다개인 방문자는 아침 일찍 가야한다는 말이 맞았다. 단체로 아우슈비츠를 찾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가이드 해설 없이 관람하려면 오전 9시 이전에만 가능하다는 이야길 들었다. 숙소에서 7시에 나와 아침 8시 30분이 되기 전에 도착했다. 그 시간에도 주차장엔 버스들로 가득했다. 여권을 보여주고 무료입장권을 얻었다. 들어가기 전 가방이나 큰 소지품은 유료 보관소에 맡겨야 했다.(헬멧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주차장 입구 큰 도로에는 유대인을 실어 나르던 기차 선로가 놓여 있고 수용소는 이중 철망 속에 붉은 벽돌 건물들이 20여동 나란히 서있었다. 수용소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걷어내고 현재의 풍경만 놓고 보면 한적한 시골에 있는 오래된 작은 대학 캠퍼스 같은 느낌이다.(원래 이곳은 폴란드군의 병영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상상도 못할 만행이 자행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철저하게 산자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장치들이 곳곳에 있었다.수용소와 수용소 건물 사이에 만들어 놓은 총살 집행장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이 메아리쳐 울리도록 했다. 바로 옆 지하 감방은 소련과 폴란드에서 잡혀온 사상범들을 대상으로 가스 실험을 했던 곳이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절대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절망만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다.보헤미안(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집시)을 가뒀던 수용소 건물에 전시된 두 손가락을 합쳐놓은 크기의 작은 수첩에 빼곡히 적힌 글자가 살아남은, 기록을 남겨 기어코 그 시절을 버텨 지금까지 살아있는 영혼이 아닐까 생각했다.이 작은 규모의 수용소에서 그 많은 유대인과 집시, 히틀러에 반대하는 이들을 죽이기 위해 가스실을 만들고 바로 옆 화구 속에 시체를 밀어 넣어 태웠다. 전쟁은 언제나 인간을 광기 속으로 몰아넣고 인간임을 망각하게 만든다. 평화의 길을 두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부추기는 이들은 대부분 타인을 희생해 자신의 생명과 권력을 연장하려는 이들이다.프라하까지 달려 저녁 무렵 도착해 자정이 되도록 시내를 쏘다녔다. 슬리퍼 신고 심카드 사러 나갔다가 그 길로 프라하 성부터 카를교 일대까지 모두 돌아본. 덕분에 카프카 기념관 위치도 확인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쿠델카를 따라 찍다바츨라프 광장을 찾았다. 1968년 8월 어느 날, 민주화를 열망했던 프라하 시민들은 바츨라프 광장에서 쫓겨났다. 소련군들은 광장 가로수 그늘 밑에 탱크를 두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겁박했다. 정적이 깔린 광장을 바라보고 젊은 사진가 쿠델카는 6시 3분을 가리키고 있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파인더 안에 넣고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그는 프라하는 떠났다.그가 사진을 찍었음직한 건물을 찾았다. 그 위치엔 ‘뉴요커’라는 의류 매장이 있었고 여름휴가를 위해 신상 수영복을 찾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2019년 6월, 나는 그의 사진을 오마주하기 위해 매장 창가에 서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런…. 고장난 시계를 리가에서 다른 짐들과 함께 집으로 보내버렸다는 걸 잊고 있었다. 결국 뉴요커에서 시계를 20유로쯤 주고 단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샀다. 40년이 훌쩍 지난 바츨라프 광장엔 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하다. 새 시계의 시각은 12시 57분.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바츨라프 광장에서 카프카 기념관으로, 레논벽으로 어젯밤 걸었던 길을 역순으로 돌았다. 책방 두 곳을 구경했고 지인들에게 보낼 엽서를 샀다. 엽서는 프라하에서 샀지만 소인은 프랑스 어느 도시 것이 찍힐 듯하다.죽음을 앞둔 카프카는 자신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원고를 맡기며 모두 불태워달라고 했다. 나는 그게 항상 궁금했다. 그토록 자신의 작품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면 왜 스스로 없애지 않았는지.(나 같으면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고 그렇게 했을 듯)유언과는 다르게 친구가 자신의 원고를 제대로 평가해줄 것이란 믿음과, 또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강했던 것은 아닐까. 언제나 복선과 다의의 단어를 쓰기 좋아했던 카프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아니면 마무리 짓지 못한 작품들에 대한 결백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기념관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은 그리 많지 않았고 ‘성’의 줄거리를 짧게 영상으로 옮긴 것을 혼자 여러 번 보았다.그는 언제나 떨쳐버릴 수 없는 아득한 절망에 짓눌린 예민한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건 태생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살았던 시대 때문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독일, 오스트리아….어디로 갈지 아직 행선지를 정하지 못했다.

2020-04-28

눈 맛을 즐겁게 하는 국탄댁

임하댐으로 의성김씨 지례파 집성촌 지례마을이 수몰되면서 마을위의 산으로 옮겨지은 고택들이 ‘지례예술촌’이라면 나머지 고택들은 각자의 길을 가듯이 여기저기 흩어져 옮겨지어졌다. 그러나 머나먼 타향객지에 떠난 것이 아니라 수구초심(首丘初心), 즉 근본을 잃지 않고 죽어서라도 고향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의성김씨가 임하에 뿌리내린 내 앞(천전)마을이나 옆 마을로 옮겼다. 국탄댁과 오류헌 고택은 근처 임하마을로, 치헌 고택은 내앞 마을로 옮겨지었다.코로나19 때문에 전국이 우울한데 안동은 큰 산불까지 겹쳐서 가는 마음 찹찹하다.#. 국탄댁과 이우당, 오류헌 고택국탄댁은 1757년 국탄 김시정이 임동면 지례마을에 지었는데 임하댐 건설로 1988년에 이곳 임하마을로 옮겨지은 고택이다. 집의 구조는 보통의 안동 고택들과 같이 사랑채가 앞에서 안채를 감싸고 있는 ‘ㅁ’자 형태로 지은 집이다.나지막한 동산을 끼고 잘 관리되어 예전부터 여기에 있었던 고택 같았고 집도 잘 가꾸어 놓아 눈 맛을 즐겁게 했지만, 굳게 닫힌 대문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기같이 국가의 세금으로 보존 유지해주는 문화재 고택들은 안채야 사생활로 보호해준다면 최소한 대문은 열어놓아야 된다.저만큼 떨어져있는 오류헌 가는 길에 정자가 일품인 안동 권씨 부정공파 임하지파 이우당 권환의 종택에 갔다. 인조 18년(1640년)에 지은 연륜 쌓인 고택이라 눈 맛을 즐겁게 했다.대문에 들어서자 높은 단을 쌓은 우람한 정자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정자 그 자체가 아름다워 수용할만했다. 평지의 집안에 이렇게 높게 단을 쌓은 정자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평지다보니 내려다 보기 위한 융통성이다. 담백하고 검소한 낭만이 흐르는 정자와는 사뭇 다르게 굵은 원기둥에 화려한 멋을 부려 사찰의 대웅전 같았지만, 온갖 멋을 부려도 아름다움이 풍겨 칭찬 할만하다. 마스크 낀 채로 일하고 있던 친절한 종부는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남편을 불렀지만 사양하고 잠시 머물다 오류헌으로 갔다.오류헌은 특히 대문으로 권위를 세우는 안동양반들 집 같아 향기로운 마음으로 들어가고 싶은 길손을 주눅 들게 한다. 대문은 열려있어 여봐라 외쳐 댈 필요도 없지만, 뛰쳐나올 돌쇠도 없는 시대다. 돌쇠는 사라졌는데 마나님은 존재하니 간간히 화제에 오른다.대문 위를 보니 경오(庚午) 4월 13일 상량이고 목재 색깔이 고택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깊이가 아니라 덜 숙성되어 그리 오래되지 않아 연대를 추정해보았다. 예전에 조그만 대문이 있었더라도 큰 사랑채 지으려면 통로가 필요하다. 담을 허물거나 대문을 뜯는다. 그리고 집을 짓고 대문을 만들지 대문 만들고 짓지 않기 때문에 1870년(경오년)과 1990년(경오년)은 아닐 테고 1930년(경오년)에 지금의 대문을 세웠을 것이다.경주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신라시대 석물들을 보면 인공으로 가공한 뒤부터 연대를 추정하는데 천년의 세월이 흐른 흔적과 700년, 500년은 확연히 다르다. 오류헌은 지례마을 입향조 지촌 김방걸(1623~1695)의 3남 목와 김원중(1658~1724)이 21살 때인 1678년에 지은 집이다. 이 오류헌 고택도 지레마을에 있던 것을 임하댐 건설로 이곳 임하마을로 옮겨온 것인데 1920년 사랑채를 개축했다고 써놓았다. 대문에 들어서자 넓은 마당에 석물들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긴 사랑채가 큰 규모로 앉아있다. 정원과 새로 지은 5칸 사랑채에서 안채가 주는 약간 어눌하면서 순박한 모습의 고택과는 엇박자지만 건축이란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은 없다, 시대에 따라 건축주의 필요에 의해서 지어지는 것이다. 다만 아름답거나 실용적이냐의 차이와 집의 격이 따를 뿐이다.오류헌 대문에서 오른쪽 가까이 논가에 홀로 서 있는 임하리 3층 석탑이 묘한 여운을 준다. 예전에 필자가 안동 동편으로 답사 오면 내앞(천전)마을과 여기 임하리 3층석탑 보러 왔다가 국탄댁, 이우당, 오류헌을 둘러보는데, 오늘은 고택 보러 왔다가 곁눈질하여 탑을 보고 간다. 이 석탑에서 좌우로 보면 이 세 고택이 시야에 안기는데 신라, 고려시대 불교천지에서 조선의 유교, 유학의 세상으로 공간의 이동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박한 치헌 고택과 내앞 마을푸른 물결 잔잔히 흐르는 임하교를 건너 내앞 마을 치헌 고택으로 갔다. 이 고택도 지례마을이 수몰지역이라 이곳으로 1988년에 옮겨왔다. 30년을 훌쩍 넘겨 이 마을과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한눈에 소박하고 담박하여 군더더기 없이 나를 내세우지 않는 고택 같아 정겨움이 밀려온다. 반면에 하루하루 먹거리의 현실과 이상적인 선비의 도 사이의 괴리현상에 고뇌하는 가난한 선비의 집 같아 마음이 아련하다. 벽채도 보통의 기와집처럼 하얀 회벽이 아니라 누런 황토흙벽이라 몹시도 정감이 가면서 마음이 짠하다. 정원도 깔끔하게 잘 가꾸어 놓았는데 유독 붉은 철쭉꽃이 파리한 선비의 붉은 열정 같은 느낌이다.안채도 조그마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라 공간이 협소하여 툇마루도 없고, 1칸의 청마루만 있는 조촐하고 단아하다. 대문달린 사랑채도 좌우로 2칸의 맞배지붕에 측면 1칸이라 공간이 협소하고 아담하고 긴 ‘-’자 형이다.이 고택은 국탄 김시정의 셋째 아들인 치헌 김영운(1765~1841)이 정조 9년(1785)에 21살 때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묘하게도 오류헌 고택은 지촌 김방걸의 셋째 아들 김원중이 21살 때 지었고, 치헌 고택도 국탄 김시정의 셋째 아들 김영운이 21살 때 지은 집이다.주인은 1년에 두세 번 오고 강릉서 몇 달 전에 와서 고택 관리하면서 행랑채에 산다는 분께 집을 잘 가꾸어 보기 좋다고 인사드리고 내앞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골목마다 사람 없고 간간히 보이는 분들은 마스크로 무장하여 코로나 시기의 일상을 보여준다. 단체와 가족단위의 답사객들도 없으니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도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다.귀봉 종택은 귀봉 김수일의 아들 김용(1557~1620)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1590년 과거에 합격했으나 잠시 벼슬하다 병으로 낙향하였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선조)이 피난간 곳으로 달려가 왕을 호종 하면서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호종일기(1593,8~1594,6)가 중요한 자료가 된다.또 하나 눈물겨운 존경의 마음으로 보아야 될 것이 백하 김대락(1845~1914) 독립운동가의 고택 ‘백하구려(白下舊廬)’다. 천석꾼 집안의 전 재산을 팔아 서간도로 이주하여 독립 운동한 김대락이 1885년에 지은 집이다. 1907년 자 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내주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경제력과 학문을 두루 갖춘 집안이었지만 타민족의 지배하에 살 수 없다고 만삭의 손부와 67살의 행동하는 선비 김대락은 정이 묻은 이곳을 떠난다. 여형제 김우락 여사는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아내로, 여동생 김락 여사는 단식 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며느리로, 남편 이중업은 파리장서사건 주도한 독립운동가 아내로, 독립운동한 집안이라 향기가 깃든 곳이다.이 마을에서 기려야 할 또 한 분이 무장 독립운동단체 서로군정서 참모장 김동삼(1878~1937) 선생이다. 만주와 상해 임시정부서 특출한 활동을 하다 만주사변 뒤 일본 경찰에 체포돠어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한다. 그의 생가 입구에는 마스크 낀 동네분들이 협동으로 모내기할 볍씨 준비에 한창이고 몇 발자국 옮기면 태극기 펄럭이고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 생가터’ 표지석만 선생을 위로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산불조심 깃발 단 트럭 한 대와 개 한마리 앉아있고 화단에는 감잎이 연노란 새싹을 틔우고 있었다.마을 옆에 한옥으로 잘 지은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지난 3월에 왔을 때도 오늘도 휴관이라 언제쯤 보이지 않는 코로나로부터 독립할지, 독립운동 산실의 내앞 마을에서 염원해본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