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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든 옷

등록일 2021-06-08 18:17 게재일 2021-06-0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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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人<br/>천상두 이노센스 대표

이노센스의 일층 매장에서 천상두 디자이너를 만났다. 매장에서 얘기를 나누다 패션쇼 동영상을 보기 위해 이층 카페로 올라갔다. 가수를 알려면 노래를 들어봐야 하고, 화가를 알려면 그림을 봐야 하고, 디자이너의 진면목을 알려면 그가 만든 옷을 보는 게 가장 빠르다. 천 대표도 그런 예술의 속성을 알기 때문에 패션쇼를 보여주겠다고 했을 것이다. 물론 매장에 옷이 가득하지만 그냥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과 모델이 입은 옷은 차원이 다르니.

밤이 되면 명망 있는 지인들이 모여들어 화려하게 부상할 공간이지만 낮이어서 카페에 불이 꺼져 있고, 긴 탁자에 침전된 고요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재즈가 흐를 것 같은 어둑한 그대로, 가볍게 실내등 하나만 켠 채로 커피부터 따라준다. 어둠 속에서 찬연히 빛나는 흰색 커피잔의 유니크한 모습에 매료되었다. 특이한 모양의 흰색 손잡이를 살피고 있노라니, 천 대표가 ‘내가 만든 거예요.’ 한다. 신은 참 짓궂다. 어쩌자고 재능덩어리에게 여러 개의 달란트를 한꺼번에 주셨는지.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나는 커피 잔에 감탄하고 있을 짬도 없이 천 대표가 패션쇼 동영상을 열어준다. 2014 대구패션페어에서 프랑스의 모자 디자이너이자 무형문화재 셀린 로베르트(Cenline Robert)와 컬래버레이션으로 이루어진 바잉 쇼 영상이었다. 인터뷰 중에 그녀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게 궁금해서 물었다.

 

그는 중국시장을 개척해서 일 년에 두 번 내지 세 번 

꾸준히 패션쇼를 하고 있다. 그가 말한다. 10년을 입어도

어제 만든 것처럼 변하지 않는 옷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또 어떤 세계로 나아가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항상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둔다고 한다.

“선생님에게 저 패션쇼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제 인생에서 가장 기록적인 일이라고 할까요. 지금까지는 그래요.”

누구나 자신의 일생 중 기억에 남는 사람 한 명쯤 마음에 품고 있기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한 개인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할까. 어려운 시기에 발돋움할 계기가 되어주었다거나, 아무 것도 보여줄 수 없는 상황인데도 무작정 믿어주었다거나, 또는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거나. 그런 사람을 마음에 둔 사람은 행복하다. 천 대표에게 셀린 로베르트가 그런 사람이었던가 보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155년 전통의 3대째 이어져 온 모자디자이너였다. 파리에 갔을 때 그녀가 먼저 패션쇼를 해보자고 제의를 하더란다. 프랑스 최고의 모자디자이너가 천 대표의 작품을 알아봐주었다는 말이다. 아파트 한 채는 털어 넣어야 할 것 같은 파리에서의 큰 쇼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사절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천 대표는 경제적 사정으로 물리친 파리 패션쇼 대신에 한국에서 쇼를 준비했다. 무대에 올릴 작품을 사진에 담아서 보냈더니 셀린 로베르트가 흔쾌히 호응하며 모자를 한 상자 가득 담아서 보내주었다. 그 모자로 즐겁게 쇼를 진행할 수 있었다. 패션쇼를 위해 한국에 온 셀린 로베르트에게 천 대표는 직접 만든 옷을 선물했다. 그 옷을 입고 무대 인사를 하는 그녀를 보며 천 대표의 가슴이 얼마나 벅찼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혹시 모자를 잃어버리면 어쩌나 걱정되어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모자를 돌려보냈다며, 나중에 모자를 모두 구입해서 홍콩 바이어들에게 옷과 함께 팔았다고 한다. 지난날을 즐겁게 회상하는 천 대표를 보며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사람보다 더 큰 부자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패션쇼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육 개월 정도?”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따로 여행을 하느냐고 물으니 영감은 예고 없이 다가오는 것이어서 집안이나 화장실, 길을 걷다 일상에서 잘 얻는다고 한다. 그 예를 보여주듯이 천 대표가 패션쇼의 한 장면을 가리킨다. 한 모델이 쓰고 있는 장미꽃 화관이 길에서 주운 조화였다고 한다. 은행을 다녀오던 중에 장미꽃 조화를 주워서 머리띠로 만들었다며, 그렇게 영감을 길에서 자주 만난다고 한다.

“언제 어떻게 해서 옷을 하게 되었어요?”

“중학교 때에 어머니께 재봉틀 사용법을 배운 게 시작이었어요.”

나일론 소재의 청바지 다리를 반으로 잘랐다. 자른 부분에 메탈 반짝이를 풀로 붙여 재봉틀로 박아서 자기만의 옷을 만들었다. 친구에게 자랑을 했더니 말광대 같다고 놀리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만든 옷을 자랑하고 싶은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 서운했다. 음악선생님은 그에게 성악을 전공하라고 하셨지만 그의 가슴에 이미 옷에 대한 관심이 자라고 있었다. 평범한 걸 거부하는 것부터 남달랐다. 옷을 맞출 때도 일일이 디자인을 일러준 탓에 특이하게 입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제대하고 진로를 고민할 때, 친구들이 옷을 만들어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옷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무작정 남성복을 만드는 가게를 차렸다. 서문시장의 장인급 재단사에게 옷을 맡겼다.

“그 무모함을 젊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자신을 믿어주는 용기라고 해야겠죠.”

스스로를 믿는 용기로 대구백화점 앞 사루비아 양화점 옆에 가게를 열었다. 남성복 가게인데 특이한 디자인 탓인지 여자 손님이 더 많았다. 여성복 매장으로 종목을 바꾸고, 아서 펜 감독의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Bonnie and Clyde)’의 제목을 따서 가게 이름을 지었다. 독일군 야전점퍼에서 힌트를 얻어 남녀 구별 없이 입을 수 있는 유니섹스 모드로 옷을 만들었다. 마네킹도 직접 만들었다. 낚싯줄을 천장에 매달고 바가지에 얼굴을 그려서 허수아비처럼 흐늘거리게 디스플레이해서 옷을 걸었다. 무엇이든 남달라야 했다.

중학교 때 어머니께 재봉틀 사용법을 배운 게 패션 디자인의 시작이었다고 하는 천상두 이노센스 대표.
중학교 때 어머니께 재봉틀 사용법을 배운 게 패션 디자인의 시작이었다고 하는 천상두 이노센스 대표.

얼김에 여성복으로 종목을 바꾸었지만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여성복을 하려면 용어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옷 만드는 공장의 직원을 채용해서 그들에게 하나하나 용어를 배웠다. 그러다 패션 트렌드가 정장으로 바뀌며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정장을 하려면 먼저 옷 만드는 법부터 배워야겠기에 일본으로 갔다. 세계적인 최고급 상품을 보며 신의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정장을 한 벌 사라는 하용수 형의 권유대로 조르지오 아르마니 정장을 23만엔에 샀다. 그때만 해도 큰돈이었다. 그 옷을 가져와서 분리하는데 이틀 걸렸다. 돋보기로 봉재선 하나하나 핀으로 꽂아가며 패턴을 익혔다. 완벽하게 재생하고서야 정장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대구에서 정장만은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욕망과 실제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체형이 달라서 아르마니 정장이 제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 옷을 한국 여성들의 패턴에 맞게 구성하는데 5년이 걸렸다. 정장에 맞게 매장의 상호도 바꾸었다. 디자이너이자 영화배우인 하용수 씨가 지어준 이름이 바로 ‘이노센스(INNOCENCE)’였다. 유니섹스의 최초 발생지인 삼일고가도로의 광교에서 하용수 씨가 음악카페 ‘유혹’을 운영하며 ‘대블 바이 익스프레서’라는 케주얼 매장을 운영할 때였다. 오사카에서 처음 만나 친해졌지만 하용수 씨도 대구 향촌동이 고향이었다.

“혹시 살며 후회스러웠던 적이 있으세요?”

“오사카 미나미에서 이노센스 매장을 열었던 적이 있어요.”

국내와 일본을 드나들며 운영했는데 불경기 때문에 성급하게 매장을 철수한 것이 후회스러웠다고 회상한다. 경기가 나쁘면 여자들이 지갑부터 닫는다는 의견에 귀를 기울인 탓이었다. 실패가 두려웠다. 그때 마음 약하게 먹지 않고 견뎠으면 지금쯤 오사카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세계시장과 교류하기도 한층 쉬웠을 텐데. 그 후 그는 중국시장을 개척해서 일 년에 두 번 내지 세 번 꾸준히 패션쇼를 하고 있다. 대련, 베이징, 상하이, 연길, 칭다오, 온주, 정저우, 충칭 외 중국 전역에서 패션쇼를 했다. 옷을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코로나가 닥쳐 모든 행사가 멈추었다. 그래도 지난해 11월 5일에 엑스코에서 패션쇼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대구에서 활동하시는 디자이너는 어떤 분들이세요?”

“고급 옷을 만들던 미스 김텔라, 코코 박동준을 가장 먼저 손꼽지만 두 분 모두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패션 아카데미 회원으로 최복호, 전상진, 김용만, 이응도, 변상일, 최태용, 김서룡 등이 있고, 90년대 크리에이터 디자이너 그룹에 소속된 박항치, 하용수, 김영세, 신장경, 이상봉, 박윤수, 장광효, 선미수 등과 활동했다며 천 대표는 영원히 디자이너로 남고 싶다는 바람을 펼친다. 어느 소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옷을 만들고 싶은 고집이 올곧다. 그가 말한다. 10년을 입어도 어제 만든 것처럼 변하지 않는 옷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또 어떤 세계로 나아가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항상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둔다고 한다.

대구광역시장 표창장과 광저우 패션협회 최우수디자이너상,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표창을 받았고, 미국독립기념 초청 패션쇼, 프랑스 후즈 넥스트, 중국 대련패션쇼·상하이 패션쇼,·청도 패션쇼 등, 난치병 어린이 돕기 자선 패션쇼와 불우이웃돕기 패션쇼로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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