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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힘과 멋, 그리고 단정한 아름다움이 흐르는 송소고택 사랑채

지금의 부자들은 주식, 건물, 예금 등등이지만, 예전의 부자들은 쌀 몇 석을 하느냐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다. 꼭 만석이 아니라도 쌀이 현금보다 더 위력적일 때 큰 부자를 칭할 때 만석꾼이라 했다. 그 아래는 팔 천석, 오천 석은 없고 천석꾼으로 칭한다.쌀은 넓은 바다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기에 어마어마한 넓은 땅이 있어야 가능하다. 전라도 김제평야 같은 넓은 땅이 없는 경상도 그것도 산이 많은 북부 청송지방에서 만석꾼이 가능할까? 경주 안강 평야의 토지를 소유했기에 가능했다. 청송에 덕천 민속마을과 지경리(호박골)에서 옮겨온 만석꾼 송소 고택을 나그네 심정으로 둘러보자.#. 만석꾼은 어떻게 만석꾼이 되었는가부자는 누구나 꿈을 꾸지만 이루기는 더 어렵다. 또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기는 더 어렵다. 봉건사회에서는 왕이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질 때 개국을 도왔거나 반정 같은 쿠데타가 성공하면 도운 사람에게 공신전을 준다. 그리고 조선 중기까지 남자들이 장가들면 주로 처가살이 하는데 아들 없는 집의 사위가 되면 그대로 물려받는다. 재산을 나누어주는 오늘날 상속의 개념인 분재기를 보면 그때까지는 아들딸 구별 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국난을 당한다. 유교가 국시인 조선시대는 충과 효는 절대적 가치기준이었다. 그래서 조상을 모시는 제사는 어떤 명분보다 중요하여 국난을 당하자 절손되면 제사가 끊어질 위기상황에서 장자 한 사람에게 몰아주어 집안에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만석꾼이나 부자들 대부분이 조선 중기 이후부터 이어진다.또 댐이나 호수, 못 등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농사란 것은 운 칠(7) 노력 삼(3)이 아니라 하늘이 거의 좌우한다. 가뭄 들고 요즘같이 수해 당하면 땅 외에 담보가 없는 소농들은 부잣집이 금융기관이었다. 먹을 것 없는 춘궁기에 지금의 은행 가듯이 땅문서 들고 부잣집에 빌고 빌어 가을 추수하여 갚겠다고 약속하여 위기를 넘긴다. 다행히 풍년이 되면 갚을 수 있지만 흉년이 들면 갚지 못하고 고스란히 담보물 농토는 부자의 소유가 된다. 다른 대안이 없는 소농들은 소작인이 되거나 그것도 못하면 유랑 걸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망으로 부자 된 사람들이 많고 아름다운 부자 되기가 어려운 것이다.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서 토지조사 할 때 남북한 통틀어 만석 할 수 있는 토지소유자는 대략 40명 정도였다. 오늘날로 치면 만석꾼은 10대 대기업이고 천석꾼은 100대 기업 정도와 비슷할 것이다.경북에 대표적인 만석꾼은 경주의 최 부자와 청송의 심 부자(송소 고택)댁이다. 최 부자가 12대로 이어왔다면 심 부자는 9대를 이어왔다. 둘 다 대단한 부의 대물림이다. 최 부자 1대 최진립은 무인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공으로 공신전을 받는다. 벼 직파재배와 하천개간으로 수확량이 많은 것도 있지만, 흉년에 땅문서 저당 잡아 소유했고 흉년에 땅도 샀다. 땅이 없는 사람들은 더이상 살아갈 방법이 없자 밤중에 3대 최국선의 방에 복면하고 문서 찾아 찢고 불태운다. 그래도 사람은 심하게 해치지 않았다. 엄청난 수모였지만 최국선은 법률상 합법이라도 그것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갖고 있던 집문서를 찢었던 것이다. 수모당한 원한을 갚지 않고 흉년에 땅 사지 않는 것을 실천한 최국선도 대단했다. 흔히 부자가 3대 못 간다는 옛말이 있는데 12대 만석꾼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뒤부터 최 부자집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 없게 하라는 육훈과 육연으로 오늘날 극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칭송받는 것이다.송소 고택도 영조 때 심처대가 어떤 이유로 만석꾼으로 이어오다가 7대손 송소 심호택(1862~1930)은 밤에 복면하고 침입한 도적 떼들이 위협하자 재치 있는 마나님이 “사람을 해치지는 마라”하고는 곳간 문을 열어주고 마음껏 가져가게 했다. 그러고는 남은 재산으로 지은 것이 오늘날 청송의 송소 고택이다. 흔히 ‘부자는 본능을 통제하고 가난한자는 본능대로 산다.’는데 예전에는 본능대로 살았던 사람은 부자 되고 본능을 통제한 사람은 오히려 가난했다.#. 사라질 번한 송소 고택지금은 청송을 대표하는 고택으로 유명세를 타는 송소 고택이 되었는데 없어질 뻔한 위기상황도 있었다. 필자가 문화유물을 보고 느낀 감동을 세상에 전해주려고 1995년 문화유적이 가장 많은 경주에 정착하여 사라져가는 고택을 1996년부터 옮겨 짓고 있었다. 구미에 미군정 때 수도경찰청장 했던 장택상 고택을 10억에 판다고 하여 가보았다. 인동 장씨 집성촌의 높다란 산언덕에 지었는데 마당도 협소하고 집이 품위와 격이 없었다. 다만 대들보 하나는 필자가 수없이 본 고택 중에 제일 아름답고 멋있었다. 그 뒤 궁금하여 가보았는데 4억 주고 샀는데 수리비가 더 많이 들었다는 한정식하고 있던 주인의 말이었다. 그리고 청송에 송소 고택을 2억(4억에 내놓았다가 팔리지 않아)에 판다고 하여 가보았다. 오래전부터 비워둔 집이라 폐가에서 주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여러 채의 큰 규모였지만 품격이 없는 고택이었다. 다만 대문 왼편에 있는 사랑채만은 낭만이 흐르면서 품격도 있어 아름다운 매력이 풍겨 탐이 났다. 그러나 청송에 산다면 모를까 이미 경주에 정착했고 멀쩡하게 있는 집을 옮겨오지는 않고 없어지는 고택만 옮겨오기에 나와는 인연이 아니었다. 그 뒤 송소 고택은 지금의 심재오 종손의 풍산금속동료 박경진씨가 2003년부터 2010년 8월까지 7년 동안 임대하여 전국에 알리는 큰 역할을 했다. 그 이후 서울에 살던 종손이 내려와 이어오고 있다. 이 마을 어느 종부와 잠시 대화했는데 2억은 아니고 경매가 5억이고 계속 유찰 되고 그것을 안 누나가 구입하여 지금은 외동 심재오 동생 소유로 이전했단다. 그때는 100억대의 빚을 진 상태였고 그런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 전국적으로 각광받고 덕천 마을도 살아나 천만다행이다.장마도 아닌데 비가 계속 이어지다가 오늘은 다행히 하늘이 구름을 잔뜩 머금어 비를 막고 있어 고마웠다. 몇 번이나 왔어도 답사 객들 기행안내로 왔고 오늘은 혼자서 찬찬히 마을을 포위하듯이 앞산, 뒷산에 올라 마을 전체를 살피고 송소 고택에 들어갔다.#. 덕천 민속마을의 이모저모높다란 대문은 부자나 권력자의 권위의 상징이다. 대문 위에는 송소 고택이 아니라 근대 서예가 위창 오세창의 전서로 깔끔하게 쓴 송소고장(松韶古莊)이다. 송소(松韶)라는 뜻대로라면 심호택은 한 풍류 한 상당히 낭만적인 부자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하기야 부자라도 낭만이 있어야 이런 집을 짓지 않겠나. 장이란 대저택을 상징하는데 강릉의 선교장이 대표적이다. 들어서자마자 좌우를 가르는 담이 남녀유별의 상징으로 왼쪽은 남자들이 사랑채로 출입하고 오른쪽은 여자들이 안채로 들어가게 나눈 것이다. 왼쪽의 사랑채는 송소 고택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올 때마다 옛정 그리운 애인마냥 한참을 서성인다. 야무지고 힘 있고 멋 부리면서 거드름 피우지 않는 단정한 아름다움이 흐른다. 이 송소 고택은 여러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어 담과 문들이 많아 축소한 작은 궁전 같다. 사랑채 우측담장을 끼고 있는 곳에 필자가 처음 왔을 때는 있었다. 그 7칸 건물이 불타고 없어져 99칸에서 92칸만 남았다. 이 집을 1880년에 지었다면 송소가 19살 때이다. 안채 후원 담에는 기와 구멍이 3개인데 사랑채 담에는 6개다. 사랑채서는 안채를 볼 수 없지만 안채서는 기와구멍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했는데 한 구멍에 사랑채 쪽으로 기와 2개로 구멍을 뚫은 지혜가 대단하다.안채 들어가는 입구에서 뒤돌아 밖을 보면 대문이 오른쪽에 비켜있다. 경사진 뒷산을 등지고 안채정문에서 앞산을 바라보니 정면에는 봉긋한 봉우리가 마치 공을 올려놓은 것 같아 풍수에서는 밥그릇 뒤집어 놓은 것이라 하고, 좌우로 펑퍼짐하게 솟아있는 것은 곡식 쌓아놓은 것 같은 노적봉이라 한다. 하기야 곡식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으니 만석꾼이 될 수밖에?오른쪽 옆문으로 연결된 송정고택은 장작불 때는 연기가 아련한 고향의 정서를 풍긴다. 주인은 불 때고 유난히도 털이긴 덩치 큰 삽살개는 그 옆에서 태평하게 누워있다. 풀 무성한 뒷산 경사진 산길 오르면 벤치가 놓여있고 ‘철기장군 명상 길’이라 해놓았다. 철기 이범석(1900~1972)은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고 해방 후에는 초대 국무총리를 엮임하고 “조국, 이 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강력과 감동과 영향력을 주는 말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송소 고택 왼쪽 옆의 ‘백일홍’ 카페가 예쁘게 꾸며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마을중간 쯤에 있는 찰방공 심당(1606~1674)의 종택인데 지금의 집은 1933년에 지어 100년도 안되지만 소뱍하고 검소하여 정감이 간다. 특히 반질반질하게 손질을 잘해놓아 주인을 칭찬해주고 싶다. 초전 댁은 2칸짜리 사랑채가 힘 있고 멋있게 지었다 청마루 위 대들보가 세 개가 나란히 힘 받치고 있고 건물지은 연대를 안채 처마 끝 기와에 가경(嘉慶1795~1820) 11년을 새겨놓아 1806년에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끝 부분에 있는 창실 고택은 송소 심호택의 동생 심시택이 1917년 분가하면서 지은 규모 큰 집이다. 다시 마을 반대방향 끝에 풍산금속 유찬우(유청) 창업주가 어릴 때 살았던 초가집에 갔다. 길 다란 초가 본채와 사랑채와 2칸의 별채 등은 정겹고 좋았지만 그 앞에 시멘트로 웅장하게 멋도 맛도 없게 지어놓은 학산정(鶴山亭)은 흉물이었다. 하느님은 공평한지 돈 있으면 안목 없고 안목 있으면 돈이 없는 모양이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9-15

건강·맛 다 잡은 ‘영주 특산품’으로 한가위 情 나누세요

소백산록의 청정지역이 만들어 낸 영주시의 특산물은 풍부한 유기물과 맑은 공기, 깨끗한 물로 재배해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또한, 전통적으로 이어져 생산되는 영주지역의 특산품은 차별화된 제조방법과 선별된 원료로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어 소비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영주 풍기인삼영주 지역은 소백산 기슭의 풍부한 유기물과 대륙성 한랭기후와 배수가 잘되는 사질양토로서 인삼이 생육하기 좋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풍기인삼의 특징육질이 탄탄해 중량이 무겁고 약효가 뛰어나며 같은 분량을 달여도 다른 인삼보다 훨씬 진하다. 약탕기에 끊여 재탕, 삼탕을 해도 물렁하게 풀어지지 않고 피로를 빨리 회복하고 식욕을 돋워 주며 적혈구 증가 등 신진대사를 원활히 해준다.△인삼의 효능많은 연구결과 인삼을 장기적으로 복용하는 사람은 체내에서 병 발생에 대한 위험도를 감소시켜 효과적으로 병을 예방 할 수 있다. 현대 의학적 효능을 살펴보면, 당뇨병, 암, 동맥경화 및 고혈압, 빈혈, 노화방지, 피로 및 스트레스 해소 등 효능이 있고 한방적 효능으로 신체허약 개선, 강장효과, 간 기능강화, 체력증진 등이 있다.△인삼의 종류수삼은 밭에서 캐낸 인삼 원형상태로 75% 내외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다.백삼은 수삼을 원료로 해 껍질을 벗겨 수분함량이 14% 이하가 되도록 건조시킨 것.홍삼은 주로 6년근 수삼을 수증기로 찐 것으로 색상은 담적황갈색이며 품질별로 천삼(天蔘), 지삼(地蔘), 양삼(良蔘)으로 구분하며 대부분 대만, 홍콩, 일본 등 동남아 지역과 유럽, 미주 지역 등으로 수출이 확대되고 있다.인삼 중에서 최고로 친다.△인삼가공 제품절편삼, 홍삼절편삼, 홍삼차, 홍삼정과, 홍삼정, 홍삼타브렛, 홍삼액, 홍삼분말, 인삼분말, 홍삼정, 홍삼캡슐, 황금홍삼비누, 홍삼벌꿀비누, 홍삼우유비누, 홍삼제리, 홍삼캔디 등이 있다.◇영주 사과영주시는 국내 사과 생산의 14.5%를 차지하는 전국 제1의 사과 주산지로서 백두대간의 주맥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분기하는 지역의 소백산 남쪽에 위치한 산지 과원에서 생산, 풍부한 일조량과 깨끗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에 의해 맛과 향이 뛰어나며 성숙기 일교차가 커서 사과의 당도가 높다. 사과는 대부분 15kg 상자로 포장돼 출하되고 있으나 다양한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포장단위를 5kg, 10kg 단위로 다양화 체제를 갖췄다.미국 및 동남아 시장에서 영주사과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수출 물량도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영주 한우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는 소백산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에서 사육된 영주한우는 개량된 암소에 1등급 정액으로 인공수정해 생산된 우량 숫송아지를 5∼6개월에 거세하고 한우고급육 표준사양관리프로그램에 의거 사육한다. 비육 후기에는 영주시와 건국대학교 축산대학팀이 협력해 1996년부터 1997년까지 2년에 걸쳐 개발한 아마종실을 첨가한 특수사료를 급여하고 초음파 육질 진단을 실시해 출하 적기를 판단, 고품질의 육질만을 생산·판매한다.△위생 및 질병 안정성부루세라병 등의 악성가축전염병을 완전차단하고 축산물의 위생·안정성에 대한 소비자 신뢰확보를 위해 사육·도축·가공·판매에 이르기까지 정보를 기록·관리하는 쇠고기 이력추적시스템을 2006년부터 시범실시해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안전한 축산물을 생산하고 있다.쇠고기 이력추적시스템 체계는 생산단계 → 도축단계 → 가공단계 → 판매단계 → 소비자 조회단계 순이다.△축산과학원과 영주시 간의 축산기술협약 체결영주한우 명품화를 위해 농촌진흥청 산하 축산과학원과의 축산기술협약을 체결하고 영주한우의 명품화를 위해 축산과학원의 다각적인 기술지도를 받고 있다.영주시에서 생산되는 특산품 중 인삼, 한우, 사과, 인견 외에도 다양한 우수한 품질의 지역 특산품이 생산되고 있다.또, 다른 특산품에는 단산포도, 네프란, 오정주, 한과, 순흥 기지떡 등이 있다.◇소백네프란청정 수목에서 추출한 목초산 분말 재제와 유산균을 급여해 생산된 계란이며 일반계란에 비해 A, B12, 토코페롤 함량은 높고 콜레스테롤 함량은 낮아 비린 맛이 없고 단백하며 고소하다.맑고 깨끗한 소백산의 공해 없는 환경 속에서 청정사료를 급여해 생산된 계란으로 엄격한 기준의 검란, 세척, 선별과정을 거쳐 위생적으로 처리된 완전식품의 결정체다.소백양계단지는 네프란 이외에 지역특산품인 인삼을 이용한 홍삼란등 기능성 계란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단산포도단산포도는 간이 비 가림 재배로 저 농약 고품질로 호맥재배로 유기물 생산품이며 점적관수시설로 생산된다.미숙과는 출하하지 않고 적정량을 착과시켜 품질이 우수하며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유기물효소를 균형시비하고 선과와 포장을 철저히 관리한다. 단산포도의 특징은 포도생육에 가장 적합한 최적의 기후조건과 비옥한 토양에서 유기농업으로 재배해 육질이 조밀하고 맛과 향이 뛰어나다.단산포도의 생산은 단산포도작목회가 관리하고 선별기준을 통일해 회원들에게 지속적인 교육과 마을별로 자율검사원의 철저한 출하심사를 거쳐 규격품만 출하하고 있다.◇소백산 오정주사대부가의 선비들이 건강 약용주로 마시던 술로서 소백산 청정약수, 우리 쌀, 우리 밀로 만든 누룩, 소백산에서 자생하는 약초로 빚어 만든 전통 명주이다.저온에서 백일이상 장기 숙성해 뒤끝이 깨끗한 오정주는 고현동 박찬정가에서 4대째 그 제조기법을 전수해 생산하고 있다.◇순흥 기지떡기지떡은 서리꽃처럼 희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상화떡, 상화병이라고도 하며 기지떡은 술로 빚어 여름철에도 쉬지 않아 오래두고 먹을 수 있다.칼로리가 낮고 속을 든든하게 해줘 여성들의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인기가 높다.한국 전통음식 조리법을 대표하는 발효 과정을 거친 떡이라 살아있는 유산균 덩어리로 단순한 계절떡, 의례떡과 달리 기지떡은 건강을 생각한 고품격 떡이다.◇선비촌 한과전통의 맛을 지켜가는 선비촌 한과는 영주지역의 특산품인 인삼, 마, 자연 식품인 쑥, 솔잎 등을 이용해 생산되고 있다.달지 않고 담백하며 고소한 맛이 특징으로 제수용, 선물용, 혼수용으로 구분 생산된다.이 밖에도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및 식이섬유가 함유된 국내산 100% 고구마로 만든 고구마 빵, 영주사과로 만든 100% 순수 천연제품으로 설탕과 알코올이 전혀 첨가되지 않은 상떼마루 와인, 영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찹쌀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찹쌀도너츠인 정 도너츠는 인삼, 사과, 생강, 고구마를 원료로 웰빙 식품으로 생산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영주시에서 생산되는 특산품들은 소백산록의 자연환경과 전통기법에 따른 생산 방식을 선택해 그 맛과 품질이 우수하며 무엇보다 정성이 가득 담긴 제품으로 한가위 선물 및 제수용품으로 그 가치성이 소비자들로부터 높이 평가받고 있다./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0-09-14

우리 곁을 묵묵히 지키며 영욕의 역사와 함께해 와

지구는 무수한 별 중에 가장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다. 식물이 태초의 불모지에 산소를 공급한 것은 물론, 우리가 먹고 자고 입는 것의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식물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은 이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인류의 정신문화도 식물과 연관된 것이 너무도 많다. 1천년 이상을 살아가는 나무의 생명력을 보고 있노라면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온갖 풍파를 겪으며 오랜 세월을 살아낸 노거수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겼다. 노거수는 단순히 나이가 많은 큰 나무가 아니라 마을의 상징이자 문화의 중심으로 역할을 해온 것이다.□ 노거수회 출범의 계기자연환경은 그 땅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포항의 자연환경은 어떨까? 한마디로 열악한 환경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먼저, 우리나라는 편서풍이 주풍인 곳으로, 서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오는데 포항은 한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해 건조한 바람만 오게 된다. 이 때문에 포항은 강수량이 적어 식물이나 사람이 살아가기가 무척 어렵다.다음은 토양이다. 포항의 토양을 설명하는 좋은 예로 영일만 사방공사가 있다. 1960년대 영일만 주변 산에는 나무를 아무리 심어도 잘 살지 못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칠포에 와보니 산이 온통 이암층으로 덮여있는 게 아닌가. 대기가 건조하면 ‘떡돌’이란 이름처럼 푸석푸석 부서지고, 비가 오면 흙이 씻겨 내려가거나 배수가 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영양가는 거의 없는 토양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해병대를 동원해 산에 교통호처럼 땅을 파게 하고는 평지에서 좋은 흙을 지게에 짊어지고 와서 나무를 심게 했다. 3년간 30만 명의 인원이 투입되었다.이후 30년이 지나 큰 산불로 이 일대 나무가 모두 불탄 후 몇 년이 지나도 숲이 형성되지 않고 맨땅이 드러나 있었다. 이에 포항시와 산림청은 이곳을 사방기념공원으로 만들어 과거 역사를 교육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니 포항사람들은 한 그루의 나무도 소홀히 다룰 수 없게 되었고, 노거수회가 포항에서 처음 출범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자천손의 마북 느티나무신광면 마북 저수지 옆에 느티나무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 이 할아버지는 경상북도 지정 보호수 제1호로 ‘권씨 할배나무’라 불리며 매년 정월 대보름 동제를 지냈던 당산나무이다. 1993년부터 포항의 극심한 가뭄으로 마북 저수지 확장 계획이 결정되었다. 이 공사가 진행되면 느티나무는 물에 잠기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노거수회는 느티나무 구명 운동을 펼쳤다. 다행히 4억5천만 원의 예산을 확보해 3년간 뿌리돌림 후 1999년 3월 9일 원래 있던 곳에서 200m 떨어진 남쪽 산기슭으로 옮기게 되었다.느티나무는 이 마을 안동 권씨 입향조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무자천손(無子千孫)’으로 ‘아들은 없고, 손자가 천명’ 또는 ‘아들은 없지만, 자손은 천대를 잇는다’란 내용이다. 옛날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온갖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물살에 휩쓸려 내려갔다. 그런데 수형이 반듯한 어린 느티나무 한 그루는 센 물살에 넘어지지 않고 꼿꼿이 선 채 떠내려왔다. 이를 본 입향조 권씨가 어린나무를 건져 소반 위에 얹어서 방안에 두었다. 흙도 없고 물도 주지 않았는데 한 달이 지나도 죽지 않기에 집안 뜰에 심게 되었다. 나무가 점점 자라 집안에 둘 수 없어 마을 입구에 옮겨 심었다.자식이 없던 입향조 권씨는 친자식 대하듯 돌보았고 이런 정성 덕분에 나무는 쑥쑥 자라 늠름한 모습이 되었을 때쯤 권씨는 병으로 앓아누웠다. “내 죽거든 저 나무를 나로 알고 박주일배(薄酒一杯)를 쳐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또 권씨의 무덤자리를 정한 풍수가 무자천손 터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 나무는 커갈수록 다섯 가지가 동서남북과 중앙을 가리키듯 반듯하게 자라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주었고 권씨 유언대로 절을 받는 당산나무가 되었다.홍수에 떠내려가던 나무를 입향조 권씨가 살려주었고, 다시 물속에 잠길 운명에 있는 나무를 노거수회가 구한 것이다. 이후 노거수회에서는 매년 칠월 칠석에 이 느티나무와 만남의 날 행사를 갖고, 손자 손녀의 마음으로 막걸리를 대접하며 천수를 누리길 기원하고 있다.□ 흥해를 살린 회화나무흥해읍 성내리 흥해민속박물관 뜰에는 수령이 600년, 둘레가 6.5m나 되는 늠름한 회화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흥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조선시대 풍수가였던 이성지가 비학산 정상에 올라 흥해 분지를 바라보고 “흥해는 다풍질(多風疾)이어서 후손이 5대 이상 살 곳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 “흥해는 과거 큰 호수였던 곳으로 가뭄 걱정은 없으나 습기가 너무 많아 필시 괴질병이 창궐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집집마다 회화나무를 많이 심어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흥해군수는 집집마다 회화나무 심기를 권장하였고, 이후 흥해는 물 좋고 농사도 잘 돼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 되었다고 한다.풍수가 이성지의 안목도 뛰어나지만 이를 허투루 듣지 않고 실행에 옮긴 군수의 실행력도 본받을 만하다. 흥해 곳곳에는 회화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데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 보호수로 지정돼 있는 흥해 민속박물관의 회화나무뿐 아니라 이곳을 옥토로 바꾼 다른 주인공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늘이 내린 선물, 모감주나무6월 중순,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황금색 꽃이 피어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 주인공인 모감주나무는 세계적 희귀종으로 국내에서도 자생지가 몇 곳 되지 않는다. 포항은 우리나라 최대의 모감주나무 자생지로, 특히 동해면 발산리의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생태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 제371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포항의 천연기념물은 모감주나무 군락지를 포함해 흥해 달전리 주상절리, 흥해 북송리 북천수(숲), 장기 뇌성산 뇌록산지 등 4곳이 있다.모감주나무는 큰 나무이면서 화려한 꽃을 피우는 몇 되지 않는 나무이다. 꽃 하나하나는 작지만 원추꽃차례로 달린 꽃들은 은은한 향기와 함께 벌들의 합창까지 들려준다. 곧이어 꽃이 싱그러운 채로 뚝 떨어지는데, 이를 서양에서는 골든 레인 트리(Golden rain tree)라 부른다. 노란꽃을 떨구자마자 꽈리를 닮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 보는 이의 마음을 풍성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씨앗으로 염주를 만들어 염주나무라고도 하고, 중국에서는 학자나 선비의 묘에 심는 나무라 해서 학자수, 선비수라 한다. 공자의 묘소에도 아름드리 모감주나무 두 그루가 있다고 한다.□ 명성을 되찾아야 할 장기숲장기숲은 신라시대부터 길이가 10리, 폭이 5리나 되는 큰 숲으로 ‘십리장림임중숲’으로 불렸다. 1967년 농토로 개간하면서 대부분 벌채되고 지금은 장기중학교 안팎에 느티나무, 이팝나무, 회화나무 몇 그루만 남아 있다. 숲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예전 장기고을 원님은 주변 고을의 원님들에게 장기숲 자랑만 하다가 재임 기간을 마치고 갔다는 말이 전해진다.장기숲에는 다른 숲에 없는 특별한 수종이 있었다고 하는데, 탱자나무, 주엽나무, 시무나무 등 가시가 많은 나무이다. 가시 많은 나무를 심은 이유는 장기 뇌성산에 있는 뇌록(磊綠) 때문이라고 한다. 뇌록은 단청에서 옥색을 만들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초록색 암석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난다. 왜구가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 자꾸 침입하자 거대한 방책으로 조성한 것이 장기숲이다. 지금도 장기중학교 안에는 100년 이상 된 아름드리 주엽나무가 있다.장기는 다산 정약용, 우암 송시열 등의 유배지로 학문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이들이 장기숲을 거닐며 유배의 설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렇게 훌륭한 역사를 간직한 장기숲을 복원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김설보 여사의 숭고한 뜻이 서려 있는 ‘여인의 숲’포항시 북구 송라면 하송리에는 한 여인의 정성으로 조성된 울창한 상수리나무 숲이 있다. 1992년 노거수회 이삼우 회장이 이 숲의 가치를 발굴해 ‘여인의 숲’이라 이름 짓고 2011년 생명의 숲, 산림청, 유한킴벌리가 공동으로 주최한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 공모해 공존상을 받았다. 예전에 이곳에서 주막을 하던 김설보 여사가 땅을 사서 참나무 숲을 조성하였다. 이후에 큰 홍수가 났는데 이 숲 덕분에 많은 인명과 가축, 그리고 추수해놓은 곡식을 구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감사비를 세우고 이 숲을 ‘식생이수(食生而藪)’라 불렀다. 예전에는 숲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숲에 들어선 아이들이 길을 잃을 정도였다고 하나 일제강점기부터 주택과 논이 야금야금 침범해 지금은 자그마한 숲으로 남아 있다. 2003년 노거수회의 제안과 포항시의 지원으로 ‘여인의 비’를 건립했다. 김설보 여사야말로 장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의 회화나무와 소나무겸재 정선이 청하현감으로 부임하던 중 국보 217호인 ‘금강전도’를 완성하고, ‘내연산삼용추도’와 ‘고사의송관란도’, ‘청하읍성도’를 남겼다. ‘내연산삼용추도’의 모델인 연산폭포와 관음폭포는 어느 명소에 비해도 뒤지지 않을 절경이다. ‘고사의송관란도’의 소나무는 바위 절벽인 비하대에 굽어자란 소나무가 모델인 것으로 추정돼 ‘겸재송’이라 부르고 있다. 조감기법으로 그린 ‘청하읍성도’의 큰 나무는 현재 청하면사무소 뜰에 있는 회화나무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여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청하읍성의 복원과 더불어 이 회화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 포항의 자랑이 될 것이다. 사진/안성용글/ 강기호서울대 산림자원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 졸업. 영남대 조경학과 박사. 현재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백두대간보전부장 근무.

2020-09-14

전설의 웅장한 사찰·목탑을 상상하다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와 끝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건 오만이나 착각일 수 있다.상상이 구체화되기 힘든 아주 오래된 사건이나 1천400여 년 전 까마득한 풍경 앞에서는 사람이 가진 상상의 힘이 무너지거나 무력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매번 신라의 고대 유적과 유물을 만날 때면 위와 같은 의문을 가졌다. 경주를 여행한다는 건 스스로의 상상력이 얼마나 큰 영역 안에서 작동하는지를 가늠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4명의 왕이 93년에 걸쳐 만들어낸 사찰, 80m 높이의 거대한 목탑이 우뚝 서있던 공간, 서라벌 사람들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했던 황룡사 또한 우리들 상상력의 한계를 위협한다. 머릿속에서도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바로 그 황룡사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사적 제6호)를 찾은 날은 잠시 소강상태였던 ‘코로나19 사태’가 재발한 시기였다. 당연지사 관광객이 눈에 띄게 줄어든 상태.중년의 아버지와 20대 초반의 딸을 제외하고는 황룡사지를 거니는 여행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위가 조용했다. 그래서였을까. 발굴의 흔적이 곳곳에 남은 거기선 상상력의 날개가 더 크게 펼쳐졌다. 황룡사는 대체 어떤 가람이었을까?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20권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사람들의 의문에 이런 답을 들려주고 있다.“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년)에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사찰로 짓게 하여 이름을 황룡사(黃龍寺)라고 하였다. 착공 후 17년 만에 완성하여 다시 황룡사(皇龍寺)로 고쳤다. 그리고 사찰이 완성되고 5년 후 진흥왕 35년(574년)에 주존불(主尊佛)을 비롯하여 금동삼존불인 장육존상을 만들고, 진평왕 6년(584년)에 10년의 세월이 걸려 금당을 지어 모셨다. 이후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율사의 권유로 645년에 구층 목탑을 세웠으며…(하략)”◆ 한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웅장한 사찰을 상상하다황룡사 조성은 6세기 중반에 시작돼 7세기까지 이어진 ‘서라벌의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규모가 컸음은 물론이고, 거기서 파생된 예술적 성취도 대단했다.공사엔 수천 명의 석공(石工)과 목공(木工)이 동원됐고, 심지어 갈등하고 대립하던 백제에서 일류 목공까지 모셔와 목탑 축조의 감독을 맡겼다. 신라 왕실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10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려 마침내 황룡사와 목탑이 모두 완성됐을 무렵의 서라벌을 상상해봤다. 미려한 건물들과 하늘을 뚫을 듯 웅장하게 솟아오른 구층 목탑. 거기에 수백 명 승려들의 예불 소리…. 재론의 여지없이 장관이었을 게 분명하다.앞서 언급한 책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당시 황룡사가 가졌던 위상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553년 처음으로 건립되기 시작한 황룡사는 선덕여왕 14년(645년)에 목탑이 완성될 때까지 진흥왕, 진평왕, 진지왕, 선덕여왕에 이르기까지 4대 93년 만에 완공된 신라 최고의 사찰이었으며, 신라 삼보(新羅三寶·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3가지 보물) 중에서 장육존상과 구층 목탑을 간직한 국찰(國刹·국가가 창건해 운영한 절)이었다. 신라가 멸망한 후 1012년엔 조유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구층 목탑을 수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1238년 몽골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리는 비운을 맞았다.”나무는 재료의 특성상 돌처럼 견고하지 못하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이란 무용한 일. 그러나,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황룡사와 구층 목탑이 목조가 아닌 석조 건축물이었다면 어땠을까? 끔찍한 화마(火魔)에 사라지지 않고, 세월의 파도를 이겨내며 지금도 그 모습이 제대로 남아있다면…. 아마도 중세 이탈리아 성당이나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Angkor Wat) 이상으로 미려함을 인정받는 세계적 관광유적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니 이 땅을 유린한 800년 전 몽골 군대가 미워졌다.◆ 오래된 절터에서 미당(未堂)의 시를 떠올리다형상은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다. 역사적 상상력이 그 기억의 복원에 힘을 더해준다. 황룡사는 1천400년 전에 만들어져, 까마득한 옛날인 고려 시대 때 사라진 사찰이다. 생존한 누구도 본 적이 없다. 그렇다 해도 한 민족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자부심이나 자랑거리를 온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는 법. 황룡사 발굴 작업은 상상력 저편 기억으로 남은 서라벌의 역사를 복원하는 행위다. 그래서 의미가 작지 않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976년부터 8년 간 황룡사지 일대 8만928㎡의 땅에서 발굴 조사를 벌였다. 사찰 배치의 전모를 밝히고, 발굴된 자료를 토대로 절터를 정비·보존해 역사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이 작업을 통해 수만 점의 유물이 세상에 드러났고, 황룡사 구조와 내부 건물의 배치가 많은 부분 확인됐다. 출토된 연화하대석, 간주석, 초석 등은 현장에 전시돼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 반갑게 만나고 있다.2020년 오늘. 완전한 형태의 황룡사와 구층 목탑을 볼 수는 없지만, 학자들의 노력이 ‘상상 속의 7세기 신라’를 보다 뚜렷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절터를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며 그 옛날 황룡사를 찾았을 진흥왕과 선덕여왕의 모습을 상상했다.그때 떠오른 시 한 편이 있었으니 서정주(1915~2000)의 ‘선운사 동구(禪雲寺 洞口)’. 이런 노래다.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동백꽃을 보러 고향 가까운 절을 찾아간 시인. 정작 보고자 했던 꽃은 보지 못하고 주모의 잡스럽고 속된 노래만 듣고 돌아와야 할 난처한 형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선 실망보다는 낭만이 더 크게 일렁이고 있는 게 보인다.‘동백꽃’으로 상징되는 성(聖)과 ‘육자배기’로 표현된 속(俗)이 결국은 멀리 있지 않다는 문학적 깨달음이 작가에게서 독자에게로 자연스레 전달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황룡사역사문화관이 다시 문 여는 날을 기다리며미당이 동백꽃을 보러 선운사에 갔다면, 기자는 황룡사지와 함께 황룡사역사문화관을 보기 위해 경주행 버스를 탔다. 황룡사 발굴 현장에 지어진 황룡사역사문화관은 어떤 곳일까?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간략한 정보가 실려 있다.“신라왕경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황룡사지 바로 옆에 건립된 전시관이다. 황룡사지의 연구 및 발굴 조사 성과를 국민과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영상 시청각실과 발굴 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역사전시실 등으로 이루어졌고, 황룡사 구층 목탑을 1/10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도 전시돼 있다.”우리는 올해를 ‘갑작스레 출현한 바이러스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 고약한 시절’로 기억할 듯하다. 안타깝게도 황룡사역사문화관은 임시 휴관 중이었다.역사문화관 통유리를 통해 손에 잡힐 것 같은 황룡사 구층 목탑 모형을 바라보며, ‘코로나19 종식’ 이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그나저나 큰일이었다. 서정주에겐 ‘동백꽃’을 대신할 ‘막걸릿집’과 ‘육자배기’가 있었지만, 기자에겐 그게 없었던 것.그래서다. 한참을 더 황룡사지에 머물며 저 먼 6~7세기 서라벌과 그 시대를 살았던 신라인들을 상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9-10

평화로운 일상 사라진상실의 시대에희망을 노래하라

코로나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른다. 사람들이 질병의 고통으로 조용히 숨죽이고 있을 때, 지구는 태풍과 이상 기온, 지금까지 없었던 폭우로 홍수를 일으켜 온몸으로 고통의 단말마를 내지른다. 이 와중에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력파 퓨전음악그룹 ‘에스피아르떼’의 리더이기도 한 정성진 대표를 만났다. 팀명의 내력을 물었다. ‘SP Arte’는 이탈리아어로 희망을 이르는 스페란짜(speranza)의 sp와 아르떼를 합쳐서 ‘희망예술’을 의미한다며 팀명을 자세히 풀어준다. 그 말은 곧 음악을 하는 사람이 먼저 희망을 가져야 행복 바이러스를 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음악은 연주를 하는 사람이 먼저 즐겨야 듣는 사람도 즐겁게 들을 수 있다고.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에 ‘공주는 잠 못 이루고’ 가사를 보면 “Guardi le stelle che tremano d‘amore e di speranza! 사랑과 희망에 떨고 있는 저 별들을 보는구나!”라는 대목이 있다. 이들의 sp는 거기서 왔다.코로나19의 발발로 온 나라가 최고 단계의 거리두기를 하던 지난 4월, 음악창의도시인 대구에 참 의미 있는 공연이 있었다. 관람객 없이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한 라이브 중계로 진행되는 콘텐츠인 ‘DAC on Live’ 공연이 무대에 올랐다. 문화예술회관 소속 4개 시립예술 단체 중 한 팀으로 참가했던 ‘에스피아르떼’도 비어 있는 객석을 보며 관객 없는 연주를 했다. 혼잣말을 하는 듯 쓸쓸한 연주였지만 그렇게라도 공연을 한다는 사실이 기뻐서 온 열정을 다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그때는 여름만 지나면 코로나의 기세가 꺾이고 금방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을 줄 알았다.바이올린·퍼커션·피아노·베이스기타 등4인조 앙상블로 2017년 크로스오버팀 기획싱글곡 첫 앨범 ‘희망’·싱글앨범 ‘미라클’ 발표대구문예회관 시립예술단체로 연 160회 공연-멤버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어요?△에스피아르떼는 바이올린(노윤지), 퍼커션(김찬양), 피아노(이연희), 베이스기타(김제윤)의 4인조 앙상블 팀이다. 성악을 전공한 정성진 대표를 더한 다섯 명 모두 클래식과 실용음악을 전공한 흔치 않은 구성으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 크로스오버로 작곡과 연주, 편곡을 겸하며 에스피아르떼만의 색깔을 만들어내고 있다.-창단 초기의 얘기를 좀 해주세요.△에스피 아르떼는 2017년에 창단되었다. 연습실이 없어서 레스토랑을 빌리는가 하면 지인의 이층집에서 연습을 하기도 하고, 지금의 작업실을 얻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2018년 제 1주년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본격적으로 연주활동을 시작했고 2019년에 2주년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3주년 공연을 준비하던 중에 모든 활동이 정지되었다. 갑자기 일을 잃은 이들이 에스피아르떼뿐일까. 모든 음악인들과 극단 관계자들, 하다못해 야외 행사까지 취소된 터라 심각한 삶의 정체 현상이 길어질 조짐까지 보이며 연주자들의 초조함을 더하고 있다. 연극도 영화관도 음악연주회도 관객이 없으면 현실적으로 존재하기가 어렵다.-다섯 명이 어떻게 만났어요?△로마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오페라 공연까지 했는데, 순수음악 만으로는 관객을 만나기가 어렵고 현실적으로 지탱하기가 쉽지 않아서 크로스오버를 기획했다. 바이올린 연주자와 퍼커션, 베이스 기타 연주자를 만나 함께 해보자는 제의를 하며 연주 인원이 갖춰지게 되었다. 클래식에서 벗어나며 연주해달라는 부탁이 많이 들어왔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많은 뮤지션들이 음악 대신에 택배를 한다거나 아르바이트로 지탱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급 인력들이 재능을 썩히고 있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경제적인 여건을 어떻게 극복하시나요?△연간 160회 정도의 연주를 하는데, 코로나가 확산되며 활동을 멈추고 있다. 언제 연주 기회가 생길지 몰라서 항상 스탠바이를 준비하고 있지만 기다리는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하다. 에스피아르떼 뿐만 아니라 지구촌의 모든 연주자들이 똑같은 입장이겠지만 멈춰버린 시간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국가의 의식이 높아질수록 음악의 가치도 올라간다.’정성진 대표는 음악을 가장 즐겨야 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인 문제로 맘껏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음악가는 음악을 연주할 때 가장 행복하다. 그것을 위해 평소 수많은 연습을 반복하는 게 음악인의 일상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여건 등 많은 제약과 부담을 극복하고 올해 안으로 3주년 공연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지난 4월 라이브중계 ‘DAC on Live’ 공연 후유튜브 통한 랜선 음악회로 팬들과 소통해 와“코로나로 많은 뮤지션들이 힘든 시기더 많은 연습으로 실력 쌓을 기회 삼을 터”-음악의 사회적 기능이 뭐라고 생각하세요?△중세 말에 야생 설치류로 인한 흑사병(黑死病)이 돌아서 유럽 인구를 5분의 1로 줄여놓았던 적이 있다. 300년간 주기적으로 유럽 인구를 줄여나갔던 흑사병으로 인해 백년전쟁이 중단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흑사병으로 유럽이 죽어갈 때 피렌체에서는 르네상스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바로크문화가 융성해진 아이러니가 발생한 걸 보면 어려운 시절이 인간의 삶에 약이 될 수도 있겠다는 묘한 생각이 든다.가장 어려운 시기에 예술이 아름답게 피어난 것은 상심에 빠진 인간을 위로해주는 기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슬픔을 견디며 예술을 창조해낸다. 그들을 살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가가 먼저 행복해야 관객들에게도 행복바이러스를 전달할 수 있다. 유명한 음악가들도 많지만 무명의 음악가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아서, 돈도 못 벌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굴욕을 참으며 예술을 한다. 다만 좋아서. 예술은 예술가의 영혼을 먹으며 자라는 악의 꽃인가! 아무리 어려워도 예술을 버리지 못하는 걸 보면. 예술은 자신을 이겨야 할 수 있는 것이니, 시역과의(是亦過矣) 라고 하지 않던가.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마니아 층만 즐기는 음악이기보다 계층을 떠나 소상공인을 비롯한 서민층에서 충분히 즐길 때 음악의 사회적 기능도 살아난다. 싱글곡 첫 앨범 ‘희망’을 발표하고, 싱글앨범 ‘미라클’이라는 자작곡을 또 만들었다. 희망과 기적은 그들 음악의 모토이기도 하다. 앨범을 발표하고도 연주를 하러 다닐 수 없어서 그들은 유튜브를 통한 랜선 음악회로 팬들을 만나고 있다.-언제부터 음악을 하셨어요?△중학교 때 “시민회관에 음악 들으러 갈래?” 하는 담임선생님의 제의를 받고 따라갔는데, 시향의 연주 끝에 애국가가 흐르는데 심벌즈가 짱 하고 울렸다. 그 소리에 온몸에 전율이 일며 음악에 대한 인식의 눈을 뜨게 되었다. 성악가로서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나부꼬 역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기억에 남는 연주를 꼽자면?△1주년 창단기념 콘서트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추운 겨울에 수성아트피아 용지홀에서 공연을 했는데, 칼바람을 헤치고 오신 관객을 다 받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사태가 생긴 것이 지금도 미안하다. 한 달 후에 문화예술회관에서 그때 공연장에 들어오지 못한 분들을 모셔서 앵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앵콜 공연에 꼭 와달라며 티켓에 사인까지 해주던 죄송스러움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2주년 기념콘서트 때는 알맞게 자리를 채워주셨다.코로나가 터지며 연주회를 못 하고 있어서 팀원들의 사기가 많이 저하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많은 연습으로 실력을 쌓아서 다음 연주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연주자는 항상 스텐바이를 준비하고 있다. 르네상스는 그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대변하는 시대의 요구이다. 코로나19가 또 다른 르네상스를 준비하고 있다고 믿어본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09-09

아늑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고택… 목은 이색의 유년시절을 그리다

지금이야 병원에서 아이를 낳지만 예전에는 친정 가서 아이를 낳았다. 산후조리는 아무래도 시어머니보다 친정 엄마가 심리적으로 편안하기 때문이다.영덕 영해의 괴시리 마을은 영양 남씨들의 집성촌으로 400여 년간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처음엔 함창 김씨들이 고려 말에 괴시리 마을에 살았다. 그때 이 마을 함창 김씨 딸과 사랑을 맺어 장가온 사람이 가정 이곡이었다. 그의 장모가 영양 남씨였고, 아들 목은 이색은 외가인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목은 이색이 태어난 집터에 고택 한 채를 옮겨놓았고 그를 기리는 공간으로 해 놓았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길고 긴 여름 장마가 끝나자 연이어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태풍이 동해안을 할퀴고 간 상처는 깊었다. 자연 앞에 초라한 인간이 어떤 반성과 겸손으로 해야 자연의 재해가 멈출까? 지구 온난화가 태풍의 가장 큰 원인인데 그 온난화를 만든 인간은 어디쯤에서 욕망을 잠재울까? 태풍으로 상처 깊은 영덕 강구 지나 영해 괴시리 마을은 조용히 아픈 상처를 보듬고 숨죽이고 있었다. 괴시리 마을 중간에서 경사진 산길을 오르면 협소한 골짜기가 나온다. 끝까지 오르면 흡사 자궁모양 제법 넓은 공간이 나오고 맨 위에는 이 마을의 ‘스타’ 목은 이색이 태어난 집터가 나온다. 아직도 더운 여름이지만 생가 터 뒤 솔밭에 들어서자 동해의 시원한 바람이 몸에 안겨 오히려 시원했다. 벤치가 몇 개 놓여있고 이색이 고향 그리며 쓴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 원문을 길게 세워놓았고 그 옆에 친절히 번역도 해놓았다. 눈으로 한번 읽고는 매미소리 벗 삼아 소리 내어 두 번이나 음미해 보았다.“관어대는 영해부에 있는데,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어 암석의 낭떠러지 밑에 유영하는 고기들을 셀 수가 있으므로 관어대라 이름 한 것이다. 영해부는 나의 외가가 있는 곳이므로….”“영해의 동쪽 언덕 일본의 서쪽물가엔 흰 파도만 아득할 뿐 그 나머지는 알 수가 없네 물결이 움직이면 산이 무너지는 듯하고 물결이 잠잠하면 닦아놓은 거울 같도다…. 관어대 밑에는 파도가 일지 않아서 고기들을 내려다보면 서로 같고 다른 놈 있어 느릿한 놈 활발한 놈이 제각기 만족해 하누나…. 아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내 형체를 잊고 그 즐거움을 즐기며 즐거움을 즐기다 죽어서 내 편안하리. 물아가 한 마음이요 고금의 한 이치인데 그 누가 구복 채우기에 급급하여 군자의 버림받기를 달게 여기랴 슬프도다….”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바닷가를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묘사해 놓았다.그러면 목은 이색은 어떤 사람이었나.사람을 완벽하게 평가는 할 수 없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어떤 삶을 살았나를 살펴보면 큰 맥락은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가정 어디에서 태어났는가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고, 어떤 스승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직업으로 평생의 동반자 배필이 누구냐가 결정적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 교우하는가는 그 사람의 살아가는 가치관과 직결된다.목은 이색이 태어난 1328년(충숙왕 15년)의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는 몸부림을 치는 격동의 시대를 산 사람이다.이색(1328~1396)의 아버지 가정 이곡(1298~1351)은 죽부인으로 잘 알려졌지만 원나라에 유학 가서 36세(1333년)때 과거에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할 때 이색은 6살 어린 나이로 고향에 있었다. 8살부터 고향 한산 술정산 절에서 글을 읽고 14살에 강화도에 가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14살 어린 나이에 성균관시에 합격하여 벼슬 하면서도 공부는 열심히 하였다. 17살 때는 봄에는 삼각산, 가을에는 감악산, 겨울에는 청룡산에서 공부하였다. 18살에 고향 근처 대둔산으로 내려와서 글을 읽었다. 이때 북경에서 벼슬하고 있던 아버지 이곡이 시로 아들의 공부를 격려한다.“사내로 태어났으면 황제의 서울에서 벼슬을 해야지./ 자신을 세우려면 부지런히 공부하는 수밖에./ 천하가 작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너는 기억하겠지./자신이 태산에 높이 올랐기 때문이란다./아비는 30년 전에 독서를 게을리 해서 머리가 희끗해지며 헛이름을 한탄한단다./ 너는 지금부터 한 순간이라도 아껴 배우거라./부귀는 오직 그 길 뿐이란다.”이색은 이처럼 아버지의 영향을 듬뿍 받고 원나라와 고려에 이름을 떨치는 대학자가 된다.어느 부모인들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냐만, 이보다 앞선 고려 중기 대표적인 문장가 이규보는 자신은 그렇게 술을 좋아하지만 아들 삼백이 자신을 닮아 어릴 때부터 술을 많이 마시자 아삼백음주(兒三百飮酒 1, 2) 시를 지어준다.“너 어린 나이에 벌써 술잔을 기울이니 몇 년 못가서 창자가 녹을까 두렵구나./네 아비 늘 취하는 버릇만은 배우지 마아라./한 평생 남들이 미치광이라고 놀린단다./한 평생 망친 게 모두 다 술 때문인데 너까지 좋아할 건 무어냐./삼백이라 이름 지은 걸 이제야 뉘우치니 날마다 삼백 잔씩 마실까 두렵구나.”지금 시대는 부모와 자식 간에 가벼운 일상을 문자로 주고받을 뿐 부모를 감동시키고 자식을 울리는 깊이가 없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아버지 이곡과 아들 이색은 다 같이 원나라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을 하면서 뛰어난 문장으로 고려를 위하여 많은 역할을 한다. 그의 소설 ‘죽부인전’은 대나무(죽부인)는 18살 연상의 소나무(송)와 결혼하여 남편이 신선이 되어 돌로 변하자 쓸쓸함과 외로움에 술로 세월을 보내도 지조를 지킨다는 내용이다.사람을 사고파는 인사설(人肆說)은 원나라에 있다가 고려의 개성골목을 지나다 얼굴 아름답게 꾸민 여자들이 예쁨으로 등급 매겨 몸을 파는 여사(女肆), 공문서 작성하고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관리시장(吏肆·사람시장), 가뭄과 홍수로 입에 풀칠도 못하자 부모는 어린자식을 팔고, 남편은 아내를 팔며, 주인은 종을 팔려고 시장에 줄지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 값은 너무 싸서 개나 돼지 값만도 못하였고, 해당 관청의 관리들도 수수방관했다.이곡은 이 세 가지 시장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 불미스럽고 가증스러운 결과가 장래에 틀림없이 여기에 머물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했다.원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서도 속국 된 고려의 비참한 참상을 조목조목 알리며 시정을 바라는 명문장이다. “고려 사람들은 차라리 남자는 살림을 내보내 따로 살도록 할망정 여자는 집에서 길러 부모와 같이 살기를 바라는 풍속이 있습니다. 지금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모두들 고려 여자를 자기들의 처첩으로 삼아 데려오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한 번 중국의 사신이 나오면 온 나라가 시끄러워 닭이나 개까지도 편히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신들은 이렇게 빼앗아 온 여자들을 모아놓고 잘생기고 못생긴 사람을 고르는데, 때로는 그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욕심을 채워주면 아무리 예뻐도 그냥 놓아주고 그보다 못한 여자를 데려가기도 합니다. 일 년에 두 번이 나 한 번씩 일어나고 한 번에 40~50명 된답니다. 선발된 처녀들의 부모와 종족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니 그 애처로운 소리는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슬픈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고, 그들은 우물에 빠져 죽거나 목을 매어 죽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흘리다가 시력을 잃는 자도 있어서 이러한 참상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곡의 상소문은 원나라 혜종 황제를 감동시켜 공녀의 요구를 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때는 원나라도 사양길에 접어들어 간신과 탐관오리들이 득실거려 황제의 힘이 미약했기 때문에 혜종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이곡의 상소문은 원나라 학자들이 앞을 다투어 구해보고 천하명문이라고 감탄했다 한다.이곡의 아들 이색은 훌륭한 아버지보다 더 빛나는 이름으로 남는다.그도 손자 맹균에게 “먼저 심술(心術)을 바르게 하고 그런 다음 문장에 힘써라”는 당부의 시를 보낸다. 고려로 와서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문 성리학을 가르치고 20년 동안 과거시험을 여섯 차례나 주관하여 137명 정도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자신은 익재 이제현의 제자였고 그의 제자들은 스승 이색과 같이 불사이군의 자세로 충절을 다한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이 있고, 새로운 조선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는 정도전, 권근, 하륜 등이 있다. 이색이 가장 아낀 제자가 권근이고, 하륜도 이색의 아들 이종덕을 사위 삼는다. 이색은 한산부원군, 문하시중 등의 재상을 지내고 우왕의 사부가 되어 꺼져가는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한다.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조선건국에 반대한 친구 이색을 서인으로 삼아 장흥으로 귀양 보내고 종신토록 양반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붓을 꺾었다 한다. 아들 종학도 곤장 100대를 때려서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종학은 한 달 뒤 귀양지에서 죽었다.이성계는 당시 최고의 학자이자 사림의 존경을 받던 이색이 자신의 건국을 도와주기를 바랐는데 이색은 선비의 지조로 끝까지 반대하자 분풀이로 귀양 보내고 두 아들도 죽였다. 세월이 지나면 분도 풀리듯이 1년 뒤 이성계는 이색을 사면시켜주고 친구의 예로 술잔을 나누고 잔치도 베풀었다. 이성계는 여러 조건으로 새 왕조에 참여하기를 권했지만 이색은 망국대부로 남았다. 1396년 파란만장한 격동기를 살다가면서 백이정, 우탁, 정몽주와 함께 경학의 대가였던 이색이 죽자(고려 왕족을 바다에 수장시켰듯이 이색도 남한강서 배가 폭파되어 죽는데 이성계가 시켰다는 설) 이성계(태조)는 매우 슬퍼하면서 3일이나 조회를 파하고 사신을 보내 정중히 제사지내고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린다. 목은 이색이 남긴 수많은 문장이 있지만 “차라리 오늘 버림을 받을지언정 다음에 어리석은 비웃음을 받지 않겠다”는 말이 귓전을 울린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9-08

기와집과 마주하는슬기로운한옥생활

경주 여행이 처음인 사람이건, 여러 차례 방문한 이들이건 마찬가지다. 경주 톨게이트 위에 근사하게 올라앉은 기와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진다.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도시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수십 년 전 기와집과 초가집에서 살아본 세대에겐 아련한 향수를 선물하고, 콘크리트로 지어진 아파트와 연립 주택에서만 지내온 아이들에겐 감탄을 부르는 풍경.경주에서는 기와를 얹은 한옥(韓屋)을 어디서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관공서와 대형 카페도 기와지붕이 흔할 정도다. 이런 형국이니 한옥은 ‘서라벌을 서라벌답게 보이게 하는’ 매력적인 보물의 하나가 분명해 보인다.시멘트나 벽돌이 아닌 나무가 주된 재료이기에 방에서 풍기는 향기부터가 현대식 주택과는 다른 한옥에서 하루쯤 머물고 싶다는 건 적지 않은 관광객들의 희망사항이다.경주 관광업계는 이러한 사람들의 요구에 발맞춰 다양한 한옥 숙소에서의 하룻밤 체험을 준비해놓고 있다.◆ 한옥의 멋스러움을 찾아 황남동으로기자 또한 지난해 이끼 낀 오래된 검은 기와 위로 산새가 날아드는 안동 고택(故宅)에서 보낸 시간이 즐겁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기에, 경주의 한옥에서도 한 번쯤 달콤한 잠을 청해보고 싶었다.한옥 숙소는 물론, 살림집과 식당으로 사용되는 도시형 한옥이 즐비하다는 황남동은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도보로 15~20분 거리. 낯선 도시에서의 가벼운 산책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그런데 어째서 타 지역에서는 사라진 한옥이 황남동엔 아직 다수 남아 있거나, 심지어 새롭게 만들어지기까지 하는 것일까?한국건축역사학회가 발행한 논문 ‘경주시 황남동 일대 한식 건물 주거지 형성에 관한 기초 조사연구’(구성준·이경아)는 이런 궁금증의 한 부분을 풀어주고 있다.“경주시 황남동 일대에서는 오히려 1970년대에 한식 건물이 대량 건설되어 같은 시기 타 지역과 차이를 보인다. 더불어 목조 외에 다양한 재료를 수용한 한식 건물이 도입되어 1980~90년대 신축의 주류를 차지하는 특수한 건축적 맥락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런 현상의 저변에는 1970년대부터 공공 차원에서 주거지 정비를 통한 역사적 경관을 형성하려는 기획이 배경으로 자리한다. 황남동의 경관 구축 과정은 그 성격에 따라 1960년대까지의 주거지 형성, 1970년대 역사적 경관 성격 부여, 1980~90년대의 비목조 한식 건물의 정착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여기서 키워드는 ‘공공 차원에서 주거지 정비를 통한 역사적 경관을 형성하려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경주는 누가 뭐래도 천년왕국 신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 도시’다. 바로 이 ‘역사’를 도시 발전에 기여할 관광 콘텐츠로 전환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한옥의 보존과 현대적 리모델링을 택한 것이 아닐지. 이런 추론에 힘을 실어주는 건 앞서 언급한 논문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1979년 발표된 ‘경주 구시가지 및 사적지 정비계획’은 문화유산과 상업 및 주거 기능이 혼재된 경주의 도시 구조에서 핵과 핵 사이를 연결하는 중심가로를 고도(古都·역사가 오래된 도시) 이미지에 맞게 개발하여 활성화를 유도할 것을 목표로 하는 계획이다…(하략)”국가 차원에서 보존해야 할 유적과 유물이 다수 존재하는 경주. 그것들을 중심으로 관광활성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기에 여타 지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가지게 된 ‘독특하고 고풍스런 공간’ 황남동으로 들어섰다.기자가 묵기로 한 숙소는 1층과 2층에 각각 4개의 방을 갖춘 신축된 한옥 양식의 건물. 바닥에서 천장까지가 꽤 높아 쾌적하게 느껴졌다.◆ 그 많던 한옥은 왜 사라졌을까?딸과 함께 경주로 여행 왔다는 70대 중반의 할머니가 숙소 방문을 열어보더니 “에어컨을 켜지도 않았는데, 나무가 많이 사용돼 아파트보다 시원하다”며 웃었다. 그날은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날이었다.“내가 어릴 땐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나무와 황토로 만든 한옥에서 살았는데, 어쩌다 그런 집들이 이젠 다 사라졌는지 모르겠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할머니의 푸념을 들었던 주위 사람들도 대부분의 한국 도시에서 ‘한옥이 사라진 이유’가 궁금했을 터.그 의문에 최무현의 논문 ‘경주지역 도시 한옥의 시대별 건축 특성에 관한 연구-황남동 한옥보존지구를 중심으로’가 이런 답을 내놓고 있다.“한옥은 삼국시대와 고려조를 거쳐 조선왕조 500년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삶과 혼, 그리고 정체성을 담아온 귀중한 생명체와 같았다. 그러나 1876년 개항은 서구 문화의 급속한 유입을 불러왔고,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의식과 생활양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외래 주거문화인 양식 및 일식 생활 패턴의 유입은 전통한옥을 외면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세상 모든 사물의 내부엔 빛과 그림자가 있다. 한옥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전통적 정서를 반영했기에 한옥엔 포근함과 따스한 서정이 깃든다.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몸이 느끼기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그래서일까? 최근에 새롭게 지어지는 경주의 한옥은 부엌과 화장실 등이 젊은 세대의 요구에 맞춰 현대적 감각으로 꾸며지고 있는 추세다. 이는 변화하는 시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한 ‘클래식과 모던의 결합’이 아닐까 싶다.기자가 하루를 보낸 한옥 숙소 역시 외형은 전통방식을 따르면서도 내부는 편리함을 지향하는 형태를 보였다. 오래전 한옥과 달리 방 안에 샤워기와 양변기를 갖춘 욕실이 있고, 침대도 놓여 있었던 것.◆ 한옥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니…내부는 현대적으로, 외부는 고전적으로 꾸며진 한옥 숙소에서의 하룻밤은 비교적 만족스러웠다.“옆방의 소리가 다 들린다”며 방음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각자의 방에 든 여행자들은 밤이 깊어지자 서로가 조심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매너가 좋은 사람들이었다.자정 무렵. 조용히 마루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외갓집과 결혼한 작은이모가 살던 집은 둘 다 시골에 있었고, 외숙부와 이모는 낡은 한옥에서 생활했다.40년 전 기자는 먼 산에서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가 겁나서 방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혼자 가지 못하고 곤히 잠든 엄마를 깨우곤 했다. 귀찮다는 기색 없이 아들의 손을 잡고 선선히 마당으로 내려서던 젊은 시절의 엄마.캄캄한 밤하늘에서 점점이 빛나던 수많은 별과 착한 눈망울을 가진 소를 키우던 외양간 마른 풀 냄새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아무 것도 몰랐기에 세상의 어두움을 보지 못하고 마냥 행복할 수 있었던 유년. 우리 모두는 그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됐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한가?이제 더 이상 새의 울음소리 따위에 겁먹지 않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허위허위 살아가는 소시민.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묵은 추억을 꺼내 보게 하는 경주 한옥 마루에서의 상념이 사람을 나른하고 섬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쁠 것 없었다. 여행이란 자기를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기도 하기에.황남동 한옥 숙소에 누웠던 그 밤. 아주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몸과 마음 모두가 창호지를 통과한 햇살에 눈 비비며 일어나던 유년의 아침처럼 편안하고 평화로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0-09-03

사람이 온다는 건… 결혼 전문가의 삶 이야기

그 어느 때보다 비가 많고 태양의 열기마저 뜨겁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가을은 결혼도 많이 하고 여행지를 검색하는 손길도 바빠지는 계절인데 코로나19의 위협이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있다. 결혼식을 하며 마스크를 껴야 하고 식사를 답례품으로 대신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치르는 가장 큰 행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란 두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가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세상에서 유일한 내 편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대구에서 23년간 결혼정보회사를 운영해온 이현숙 대표를 방문했다. 딸의 결혼식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것이 떠올랐다.비혼과 미혼의 비율이 높아지며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결혼은 여전히 우리네 삶에서 가장 큰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결혼은 등가교환방식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맞선을 통해 외모와 배경 같은 외향적인 조건을 먼저 알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다소 편리한 점도 있을 것 같다. 이현숙 대표는 남녀가 만나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짧게는 육 개월 길게는 일 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여러 번의 만남을 갖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탐색하는 과정을 거치며 다른 문화와 다른 가정에서 자란 낯설음을 극복하는 마음의 준비기간이랄 수도 있겠다. 마침내 마음이 통해 결혼한다는 연락을 받게 되면 얼마나 기쁘고 보람이 있을까.이현숙 대표는 결혼 상담하는 과정을 자세히 일러준다. 우선 서로가 이상형을 피력하고 어떤 공통분모가 형성되면 만남을 주선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나이, 학력, 직업, 경제력, 가족관계, 키, 몸무게, 취미 등의 정보를 상대에게 제공함으로써 서로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취향이나 이상으로 상대에 대한 신뢰감과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언제부터 이 일을 하셨어요?”서른아홉 살 무렵에 돈도 벌고 사회에 기여하는 보람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신문에서 우연히 결혼정보회사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미국인 커플 매니저가 바쁜 사람들을 위해서 화상 채팅으로 만남을 주선하고 결혼이 성사되는 기사를 읽으며 머리에 전류가 이는 충동을 느꼈다. 저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 결혼정보 회사를 찾아갔다. 큰 회사에 들어가서 두 달 동안 일을 배운 다음 독립을 했는데 고향 구미에서 40평 넓이의 사무실을 열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 1998년이었다.‘결혼정보회사’라는 광고를 띄우고 관리를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사무실을 연 곳이 공단 지역이어서 남녀 성비율이 맞지 않았다. 돌파구를 찾다 눈을 돌리게 된 것이 국제결혼이었는데, 언어문제, 위장결혼 등의 국제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오래도록 일을 피했다. 그러다 베트남 현지인을 통해 한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그가 착하고 온순한 베트남 여인을 만나고 왔다. 너무나 좋은 인상을 갖고 온 터라 이현숙 대표도 국제결혼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이후부터 농촌이나 공단 지역 청년들의 결혼이 늦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결혼과 함께 국제결혼도 주선하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다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 석사·박사과정을 밟으며 제대로 된 커플 매니저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 역시 직업에 대한 강한 자의식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 일을 더 잘해보겠다는 욕망이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어서 예전에 가난 때문에 국제결혼을 하던 외국여성들도 이제는 조건을 따지게 되고 사랑을 바탕으로 결혼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남성이 여성을 선택하던 시대에서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난달에는 결혼이 세 건이나 성사되었다.이 일은 사회적인 참여로 보람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여성들이 결혼을 회피하고 아기를 낳지 않으니 사회의 미래가 염려스러운 이즈음 커플 매니저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시 되고 있다. 만혼의 경우 부모에게 떠밀려서 맞선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들이 마음을 열고 상대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 또한 커플 매니저의 능력이 아닐까.“제가 좋아하는 시가 있는데 잠시만 소개를 해볼게요.”이현숙 대표가 말을 멈추고 시를 읽는다. 대학에서 다문화와 결혼문화에 대한 강의를 할 때 청강생들에게 읽어주는 시라고 한다.사람이 온다는 건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그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의 ‘위대한 인연’시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긴장을 풀어주는 힘. 낯선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며 이현숙 대표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읊조렸을 것 같다. 두 사람의 일생이 마침내 한 자리에 모였다고. 자신을 온통 맡긴다는 의식으로 결혼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 고학력과 매스미디어의 발전으로 남녀 모두 일을 갖고 있는 것이 다반사고, 동등한 입장에서 생활하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할 말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서로 의견이 부딪친다고 해서 예전처럼 여성들이 더 참고 견디란 법도 없고 할 말을 다 하는 그녀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생각의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현숙 대표는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필요한 것이 유튜브 강의나 따뜻하고 훈훈한 프로그램으로 마음의 벽을 넘어 서로 어려움을 헤쳐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다. 지각 있는 기성세대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갑자기 든 생각이지만.”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 아이들이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는 어른도 좋은 부모가 되는 공부가 필요하다. 단과대학에서 결혼대학이란 코스를 만들면 결혼을 앞둔 사람들이 강의를 들으며 어른이 되는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결혼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고 서툴고 미숙해서 저지르게 되는 오류를 그만큼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현숙 대표가 웃는다. 내가 보기엔 급하게 해낸 생각이라기보다 서툰 어른들을 보며 느낀 진심 어린 마음 같다. 지나고 난 후에야 무지로 저지른 과오를 깨닫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특히 육아문제에 한해서. 육체적으로 성숙하고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이 아녀서 가정 폭력이 벌어지고 아이를 버리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 아닌지. 실은 어른이 되는 공부가 밥상머리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부모들이 너무나 바쁜 시대가 되었다.“저는 프로가 아름답다는 말을 참 좋아해요.”일하랴, 강의하랴, 글 쓰랴 일 분 일 초도 버릴 것 없이 열심히 살고 있는 그이. 이현숙 대표는 자기 분야에서 진정한 프로가 되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는 개념의 프로가 아니다. 일을 하는 도중에 석사 박사 과정을 밟으며 논문을 쓰고, 짬짬이 신문에 짧은 글도 발표하고, 결혼행복정보 채널 리스토리TV 유튜브 방송 진행자로 결혼을 장려하기도 하는 이 대표.그 모든 에너지가 자신의 가치관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거나 인정받고 싶다기보다 자신의 일을 그만큼 사랑하며 달려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한다. 온 마음으로 진정성 있게 대했는데 상대가 단순한 이해타산으로 대하거나 성혼이 되었는데도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직업인으로 봐 넘길 때 조금 서운하기도 하지만 아기를 낳았다거나 돌잔치를 한다는 연락을 받으면 그 모든 회의를 다 잊는다.“언제까지 이 일을 할 생각이세요?”한 번도 일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건강이 허락하면 90세가 되어도 일을 할 생각이다. 이 대표는 신문에 결혼칼럼 연재한 글을 모아 책으로 출판할 예정이다. 현장 사례를 담은 글이어서 은근히 기다려진다. 그 에너지와 열정은 그이의 숨은 저력이기도 하지만 자아실현의 모토이기도 하다.이 대표는 하루도 잊은 적 없다. 자신이 온 청춘을 바쳐 이 일을 하는 것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보람을 느끼고 있음을. 외로운 청년들을 결혼이라는 성스러운 궁전으로 이끌고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해주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글 장정옥

2020-09-02

모자람 없이 뽐내지 않고 담백하고 정겨운 고택

지금의 산업화 정보화 사회에서는 온갖 것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조하고 만들어 내지만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온 정착 농경시대는 땅이 최고의 가치이고 하늘이었다. 그래서 봉건사회의 모든 전쟁은 땅 따먹기 싸움이었다. 우리나라 전통마을에 즐비한 기와집들은 오늘날 강남의 빌딩숲에 해당한다. 대표적인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의 경제적 기반의 물적 토대는 인근에 풍산들판과 안강 들판이었듯이, 영덕 수창면의 기와집 즐비한 인량 전통마을과 영덕 영해면의 괴시리 마을도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벌판 덕분에 물질적 토대가 형성된다.괴시 마을은 고려 말에 함창 김씨가 처음 살았고, 조선 중기(명종 때)에 수안 김씨, 영해 신씨, 신안 주씨 등이 살다가 1630년(인조 8년) 영양 남씨들이 정착하였다. 남씨들 세력이 강했는지 다른 성씨들은 떠나고 영양 남씨들의 집성촌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동해변의 영덕 괴시리 마을 가는 길사람은 밥만 먹다가 때론 라면과 피자도 먹고 싶고, 산골에 있다가 간혹 넓은 바다를 보고도 싶어진다. 안동은 안동댐과 임하댐으로 옮겨온 고택들이 전국에서 제일 많아 아직도 안동에 남겨둔 것이 많아 발목이 잡혀(?) 전국으로 못 나가고 있다. 조금 잠잠해지던 코로나가 다시 창궐하여 온 나라가 어수선하여 광활한 바다를 품어보고 안기기도 싶어 동해변의 영덕 영해의 괴시리로 출발했다. 경주에서 영덕 가는 길은 자꾸만 일직선 도로를 만들어 산이 해안가에 붙어있는 지역 빼고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아쉬웠다.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흥해를 지나자 도로 옆 언덕에 흥해 향교가 그 옛날의 영화를 안고 힘겹게 앉아있다. 더구나 코밑에 차가 쉼 없이 주야로 달려 고통이 심한데다 조금 지나자 길가에 ‘이명박 대통령 고향마을’ 팻말이 더운 여름의 코로나 만큼이나 감동을 못주고 서있다. 그러나 주위의 넓은 벌판이 푸른 춤을 추어 자연이 인간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곧이어 청하가 나온다.청하는 지금은 포항에 편입되었지만 예전에는 현으로 포항보다는 한 수 위였다. 청하초등학교 자리가 청하현 관아 자리였다. 거쳐간 현감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겸재 정선(1676~1759)이 현감 한 것에 주목한다. 관념의 중국 산수화에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인왕제색도’ ‘금강산전도’등의 진경산수를 그려 한국회화사에 큰 획을 긋는다. 그가 청하현감 할 때 인근 송라면의 내연산을 찾았던 흔적이 제3폭포 움푹 파인 바위에 ‘갑인추 겸재 정선(甲寅秋 謙齋 鄭善)’의 조그마한 석각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각인된 스타일로 예행 연습한 결과 걸작 ‘금강전도’가 완성되는 뜻 깊은 곳이다.청하에서 영덕까지는 해안가라 푸른 물결 넘실대는 동해를 곁눈질하며 올라갔다. 온통 대게간판과 ‘블루영덕’의 알림판이 푸른 영덕과 연결된다. 이 해안 길을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분기점인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770km 해안 걷는 길을 ‘해파랑 길’이라 하는데 경주 구간 해파랑 길을 ‘감포 깍지길’이름을 붙이듯이, 영덕 해파랑 길도 ‘영덕 블루로드’로 부른다. 이 해파랑 길(동해안 전체구간)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만들 때 필자가 자문위원 하면서 최대한 해안 절벽에 붙여서 만들라고 자문해 준 기억이 새롭다.대게로 유명한 영덕이지만 울진 분들은 실제 대게는 영덕보다 울진에서 더 많이 잡는데 영덕이 선점했다고 아쉬워한다. 마치 고래하면 울산인데 실제 포항이 고래가 더 잡혀(공식적으로는 포경금지인데 그물에 잡히거나 등등으로 고래 고기는 끊어지지 않는다) 한 마리 1억 넘는 밍크 고래를 울산의 큰 상인들이 포항서 구매하여 울산서 판매하는 것과 같다.영해 괴시리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청량한 매미소리가 더운 여름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고택에 백일홍 붉게 물들고마을 시작되는 남쪽 끝에는 영해중고등학교가 높게 서있다. 주차장엔 이색의 시비와 영양 남씨 종친회서 만든 비가 세워져있고 영감댁 고택이 제일 먼저 길손을 맞아준다. 전체를 조망하고 마을을 둘러보기로 하여 이색의 산책길로 접어들었으나 수풀이 무성하여 발길을 돌려 마을부터 먼저 둘러보았다. 마을은 예전보다 많이 가꾸어져 있었다. 예전과 비교하면서 천천히 나그네 되어 이집 저집 살펴보았다. 몇몇 집들은 숙박도 하고 간단한 차도 팔았지만 코로나 여파로 개점휴업이라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 그래도 집안에 간간히 붉은 백일홍이 8월의 마지막 여름의 정열을 불태우며 고택에 생기를 넣어주고 있었다. 천전 댁(내 앞 댁) 고택은 손님 받는 집답게 집 곳곳을 정갈하게 잘 관리해 놓아 기쁜 마음으로 한참을 둘러보았다. ‘ㅁ’형의 전형적인 북부지방의 형태지만 사랑채를 높게 올려 지어 별도의 독립된 집같이 해놓았다. 석류가 탐스럽게 붉음을 토하고 그 옆에 능소화도 주황색 꽃으로 은근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본채에서 중문을 거치지 않고 마당 끝의 텃밭으로 드나드는 조그마한 쪽문의 아름다움에 눈길이 간다. 150년도 안된 1876년에 지었지만 집과 마당과 텃밭의 규모가 이상적이라 선비가 유유자적하며 살만한 집이라 더욱 정감이 갔다.1600년대에 괴시 마을 입향조 남두원의 장남 남붕익이 지었다는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은 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그러나 문들을 새것으로 많이 수리해놓아 고택의 맛이 덜했다. 그 앞의 물소와 고택은 길고 개성 있게 지었는데 내부전체를 수리 중이라 어수선했다. 산 오르는 길옆에 경주댁은 남아있는 괴시 마을의 고택들이 남씨들이 지은 것인데 반해 먼저 입향 했던 수안 김씨가 살았던 고택이다. 대문채가 천전댁과 같이 별도로 되어있다.마을 중간에서 산 위로 올라 마을과 넓은 벌판이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을 조망했다.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 저편은 장수면으로 인량 전통마을이다. 고려 때 나옹화상의 고향이고 조선중기 석계 이시명과 그의 아내로 최초의 한글 요리책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장계향, 그리고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이 태어난 곳이다.#. 옮겨지은 괴정과 영양 남씨산에서 내려와 다시 북쪽으로 백희재 고택부터 살펴보았다. 구계댁 사랑채 고택 방향이 특이하다. 보통 사랑채는 안채의 방향대로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는 안채가 서향이라도 ‘ㅁ’자로 감싸서 서향의 단점이 보완되지만 사랑채는 그대로 노출되어 긴긴 여름 햇살이 힘들게 하기에 사랑채는 남향으로 앉히고 서향의 측면도 판자로 막아버렸다. 주인의 실용적인 감각이다. 이와 같이 예전에는 집주인이 건축가였다. 혜촌 고택은 사랑채의 높낮이로 변화를 주면서 돌출 시킨 집주인의 낭만이 보인다. 1766년(영조 42년)에 괴정정자를 지은 괴정 남준형이 지은 대남 댁도 개성 있게 지었고, 북쪽 끝의 영은 고택은 다른 고택에 비해 멋스럽게 지어 눈 맛이 상큼하다. 북쪽 마을 앞에는 고려 말의 의식 있는 문장가 가정 이곡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 두 분의 유적을 추모하는 유허비를 세워 놓았다. 이 유허비는 1796년(정조 20년)에 경상감사 이태영이 영해부사 황은에게 세우게 하였고 마멸이 심하여 1971년 영해군수 이상복이 괴시 마을 남영종의 도움으로 새로 세웠다.남씨의 시조는 신라 경덕왕 때 영의공 남민(南敏)으로 시작하여 고려 중기에 와서 의령, 영양, 고성 남씨로 분파된다. 괴시리 입향 조는 앞에서 말한 대로 남두원 이래로 지금까지 400여년을 이어온 영양 남씨 집성촌으로 문향을 간직하면서 고래등 같은 특출한 고택은 없어도 모자람 없이 뽐내지 않고 담백하고 정겨운 고택들로 오랜 전통을 이어온 것에 고마운 마음이다. 이런 문필의 분위기라 영양 남씨들도 여러 문장가가 배출되는 자양분이 되었다.이 마을에서 옮겨온 고택은 목은 이색이 태어난 생가 터에 옮겨 지은 고택이 있고, 유허비 옆에 괴정이 있다. 이 괴정은 1766년(영조 42년)에 괴정 남준형이 이곡과 이색 부자의 유허지에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연못을 앞에 둔 서향이었으나 1817년(순조 17년) 괴정을 중건하면서 지금과 같이 남향으로 옮겨지었다.이 괴정을 지은 남준형의 글을 보면 밭 갈고 씨 뿌리는 전원생활하면서 담담한 선비로서의 이치를 깨달은 삶을 살았던 분 같다. 괴정 앞에 있는 ‘삼을 심으면서’ 시에는 “삼 심고 밤새도록 비가오니/…. 괴화나무 아래에 앉아 시를 읊네 / 전원에서 늙은 계획 이루어졌으니/ 이로부터 그 계획 어기지 말기를.”‘늙음을 읊으면서’에서는 “총명은 유한하나 이치는 무궁한데/ 부질없이 책속에서 예순 살 늙은이 되었네/ 요즘 다시 천화(天花)가 책상 가득 떨어져/ 흑백을 가져다가 청홍으로 바꾸었네” 행장에서는 “맑아도 풍속과 괴리되지 않고/ 개결해도 남을 끊어버리지 않으며/ 청렴한 상처를 입히는 데에 이르지 않고/ 주밀해도 인색한데에 이르지 않으니 참으로 문무의 재능이 온전하다” 하였다. 묘갈명에는 “늙고 병들고 곤궁한 어른을 집에 맞아 모시돼 아버지처럼 섬겼다. 곤궁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도와주었다. 이를 미루어 노인을 편안히 모시는 양노회도 만들었다. 영해부에 자금이 서리의 사유재산으로 돌아가자 괴정공은 두, 세명의 향 중 노성한 이와 함께 고루 절약하여 주민들에게 세금을 덜어 주었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선비가 곡진히 삼가는 그런 무리들과는 달랐다.특히 행장과 묘지명은 그 사람의 일생을 응축해 놓은 것이다. 괴정 남준형은 크게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뜻과 글이 좋고 참다운 선비 같아 그의 글을 음미하면서 한참을 서성거렸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9-01

‘응애∼응애∼’ 아기 울음소리 커져가는 문경

정부가 2006년부터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수립해 13년간 총 143조원의 예산을 투입했으나 출산율은 계속 하락하는 추세다. 이런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지만 출산율이 하락하는 것은 현실을 정책에서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대부분 지자체에서도 인구문제 해결을 위해 정책을 펴고 있으나 비슷비슷한 지원정책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문경시는 저출산·고령화 사회로의 변화에 따라 지역현실에 맞는 시책을 발굴하고 맞춤식 인구정책을 펼쳐가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지난해 말 문경시 인구는 7만2천242명으로 전년 동기와 비교해 368명이 증가했다. 출생아수 또한 8년 만에 감소세에서 증가세로 돌아섰다.여기에 더해 올해 7월 기준 출생아수가 190명으로 전년 동기와 비교해 12명이 증가했다. 넷째 이상 다자녀를 출산한 가구는 10가구(넷째 7가구, 다섯째 1가구, 여섯째 2가구)나 됐다. 이러한 성과에 기반해 지난해 경북도 저출생 대응 우수시책 기관 평가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이낳고 키우기 좋은 행복도시를 만들기 위해 문경시는 인식개선, 임신·출산, 양육, 교육, 청년, 주택, 귀농귀촌 등 분야별로 37개의 인구정책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구증가 위한 TF팀과 인구정책위원회 운영2017년 7월 지역인구정책팀이 신설된 이후 문경시에서는 ‘문경시 인구정책 기본조례’를 제정해 인구정책 시행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문경시인구정책위원회’를 출범해 인구정책 종합계획에 대한 전반적인 추진상황 점검 및 인구정책에 대한 각종 자문과 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2018년 8월에는 인구정책 관련 주요 부서가 참여한 인구정책TF팀을 구성해 저출산과 인구감소에 대응할 실질적 정책인 ‘인구증가 5대 주요시책’을 발굴했다.2019년부터는 신혼부부 주택자금 대출이자 지원, 출산장려금 확대지원,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업 확대지원, 아이돌봄 서비스 확대지원, 문경시 장학회 다자녀가정 생활장학금 확대지원 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문경시에서 전국 최초 시행한 다자녀 생활장학금은 3자녀 이상 양육하는 관내의 모든 가정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2019년에는 1천811명에게 14억5천만원을 지원해 시민들에게 다자녀 가정의 자긍심을 가지게 했다. 올해 9월 중 공고해 장학금을 지원할 계획이다.□ 저출산 인식개선 사업으로 분위기 UP!문경시는 실질적 인구정책 효과를 거두기 위해 정책적 접근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 주목하고 범시민 인식개선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시행했다.지난해 2월에는 문경시청 공무원 대상 ‘아이키우기 좋은 직장 분위기 만들기 다짐대회’를 개최해 임신·육아 배려 문화 정착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 5월에는 공공기관, 교육기관, 금융기관, 의료기관 및 지역언론 등 관내 15개 기관·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저출산 대응 및 인구증가를 위한 민·관·학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결혼·출산 친화적인 분위기 조성과 일-가정 양립 문화 정착을 위한 공동 노력을 약속했다.다양한 연령층을 위한 생애주기별 맞춤형 인식개선 프로그램도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지난 2년간 지역 청년들 간의 커뮤니티 형성과 저출산 인식개선을 위한 ‘저출산 인식개선 청년교육’을 실시해 총 360여명의 청년들이 참여해 저출산 문제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가치관 변화를 위해 다양한 커리큘럼의 내용으로 교육을 진행했다.올해는 지역 내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인구교육’을 시행해 학생들이 저출산·고령화 및 인구감소에 대한 기초적 인식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미래 인구문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그리고 6월부터 8월까지 3차에 걸쳐 60명의 청년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개최해 만남의 기회가 부족한 청년들을 위한 상호교류의 장을 마련해 주고 문화체험 및 새로운 정보 공유, 인구정책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유익한 시간을 제공할 예정이다.□ 저출산 대응과 아이키우기 좋은 환경 조성문경시는 각종 돌봄시설을 확충하고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놀이시설을 구축하는 등 양육 여건을 개선하고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지난해 경북도 저출생 극복 공모사업에 선정된 ‘맘편한 돌봄공부방 조성사업’을 통해 ‘맘편한 돌봄공부방’을 설치해 돌봄서비스 및 아동 공부방으로 운영하고 있다.맞벌이 가정을 위한 초등돌봄시설 ‘다함께 돌봄센터’는 현재 흥덕동에서 리모델링 공사 진행 중으로 올해 하반기 내 개소를 앞두고 있어,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의 육아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점차 증가하는 어린이 놀이시설 수요를 반영해 각종 어린이 놀이시설 건립 또한 진행중이다.지난해 행정안전부 저출산 대응모델 육성 공모사업에 선정된 ‘도란도란♥문경 아이도담센터 건립’사업은 어린이 야외 물놀이터 조성과 원스톱 저출산 지원 센터를 구축하는 것이 주요 내용으로 총사업비 10억원을 확보해 현재 실시설계 단계에 있다.올해 3월 조성된 ‘영신 숲 밧줄놀이터’는 다양한 밧줄 놀이 시설로 구성된 야외 놀이터로, 코로나19로 인해 실내 놀이시설 이용이 어려운 요즘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에 더해 올해 경북도 ‘저출생 극복 및 대응기반 구축 공모사업’에 선정돼 총사업비 2억8천만원을 확보함에 따라, 지역 내 보육기관의 숲놀이 프로그램 운영을 지원하고 모전동 일원에 어린이 모험놀이터를 건립하는 등 보육 환경 개선을 위한 시설 기반과 프로그램을 함께 확충해 나갈 계획이다.□ 2020 청년 정착과 청년문화 융성미래를 이끌어 갈 주역인 청년 정착을 위한 사업들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청년들의 지역정착을 위한 문경살이 프로젝트가 행정안전부의 공모사업에 선정돼 8월부터 11월까지 문경읍 일원에서 진행된다.이 사업은 지방도시에 청년인구를 유입하고 정착시켜 지역의 활력을 되찾고 청년들에게 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업비 6억원은 전액 국비다.문경읍을 지역적 기반으로 60명의 청년을 모집해 로컬의 이해, 창업의 이해, 팀 프로젝트 활동, 기획자료 제작 및 발표 등으로 이루어지며, 30명 이상의 젊은이가 문경 지역에 정착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한다.사업 주체인 지역청년협의체인 ‘가치살자’는 문경에 정착해 각종 사업을 하는 청년들의 협의체로서 전반적인 진행과 교육을 맡게 되고, 홍보 및 서포트를 맡은 도레컴퍼니는 창업과 음식에 대한 교육을 진행한다.현재 탐사대를 모집해 지역을 탐사하고 있으며, 9월부터 프로젝트를 본격 시작한다.시는 2018년 행정안전부 인구감소지역 통합지원 공모사업에 선정돼 총사업비 14억5천만원으로 산양면에 청년커뮤니티센터와 셰어하우스를 구축해 청년 정착을 이끌고 있다.올해는 인구감소지역 프로그램 지원 공모사업(사업비 2억원)도 선정돼 지역 내 청년들에게 배움과 소통의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경제 활성화와 주민 상생을 도모하는 등 지역 활력 증진에 힘쓸 계획이다.고윤환 문경시장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육아환경이 구축될 때 출산율 향상은 물론 인구정책을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인구정책이 과도한 목표치를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역여건을 감안한 실질적인 정책내용인 일자리, 정주환경 등을 담을 수 있을 때 살기좋은 도시와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을 해 나갈 수 있다”며 “문경시도 한 걸음씩 시민이 만족하고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효율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0-08-30

21세기 서라벌의 밤, 그 찬란하고 설레는 천년의 이야기를 걷다

얼마 전 예순을 훌쩍 넘겨 일흔에 가까운 부부의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거기서 두 사람이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을 봤다. 아마도 1970년대 후반이거나 1980년대 초쯤이었을 터.경주 첨성대 앞에 나란히 선 부부는 말 그대로 금방 피어난 꽃처럼 화사하게 젊었다. 신부는 분홍색 한복을 입고, 신랑은 결혼식을 준비하며 샀을 것이 분명한 깔끔한 새 양복 차림.“우리 때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이라 외국으로 놀러간다는 건 언감생심이었지. 비행기 타고 제주도를 가는 신혼부부도 드물었어. 그저 기차 타고 온양 온천에 가거나, 버스 타고 경주에 가는 게 최고의 신혼여행이던 시절이야.”40년 전 옛날을 추억하는 남편과 아내의 웃음이 너무도 환해서 보기 좋았다. 그랬다. 부부가 들려준 추억담처럼 경주는 한때 각광받는 신혼여행지였다.이와 관련해 ‘한국 일생 의례사전’은 20세기 우리나라의 신혼여행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신혼여행은 1950~1960년대까지도 여전히 도시 지역에 거주하며 경제적 여유를 가진 중산층 이상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신혼여행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면서 결혼식 후 승용차를 타고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호텔에서 1박을 하는 경우도 생겼다. 1970년대 접어들면서 신혼여행은 널리 보급되어 경주·온양·속리산·제주도 등으로 가는 일이 많아졌다.”◆ ‘신라의 달밤’이 만들어준 허니문 베이비도 있을 듯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신혼여행은 낮에 하는 관광도 좋지만, 밤의 낭만도 중요한 여행.30~40년 전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난 선남선녀들은 어둑한 저녁이면 커다란 왕릉과 전설이 숨 쉬는 소나무 숲, 동궁과 월지 등을 산책했을 것이고 그들이 함께 보낸 로맨틱한 ‘신라의 달밤’은 적지 않은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프랑스 영화 제목처럼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고 속삭였을 그 시절 신혼부부들.세월의 흐름에 따라 밤의 경주는 많은 부분 변해왔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공간엔 예산이 투입돼 깔끔한 정돈이 이뤄졌고,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화려하고 빛나는 조명이 서라벌의 여러 유적과 유물을 돋보이게 꾸며주고 있다.아마도 1980년대 경주를 찾은 이들에겐 오늘날의 경주 야경이 더없이 낯설 수도 있을 듯하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수준의 변화니까.그렇다면 이렇게 달라진 ‘경주의 밤’을 이제는 누가 즐기고 있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 어두워진 길을 달려 21세기 경주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황리단길을 향했다.지척에 동궁과 월지, 첨성대, 계림, 대릉원 등이 몰려 있으니 서라벌의 밤 풍경을 두루 살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경주시는 “한여름 8월에도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관광 슬로건으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때가 때이니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횡포를 막기 위한 마스크 착용 등 개인위생 규칙 준수는 매너 있는 관광객의 기본 중 기본.경주의 주요 여행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문화관광 홈페이지는 ‘밤의 경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동궁과 월지, 월정교, 경주읍성 등 내로라하는 야경 명소들이 경주의 화려한 밤을 밝힌다. 거기에 더해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 새로운 야간 관광콘텐츠가 생겼다. 엑스포공원의 ‘루미나 나이트워크’가 바로 그것. 루미나 나이트워크는 스토리가 있는 숲속 산책길이다. 기마인물형 토기에서 착안한 ‘토우대장 차차’가 이승과 중간계, 지하세계를 넘나들며 천년왕국 신라로의 대장정을 안내한다.”◆ 야경을 즐기는 젊은 연인과 가족 단위 관광객들미리 예약해둔 숙소에 짐을 풀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황리단길로 나섰다. 평일임에도 꽤 많은 여행자가 삼삼오오 거리를 오가고 있다. 대부분이 20~30대로 보이는 연인들과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까짓 더위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라는 듯 손을 꼭 잡거나 다정하게 팔짱을 낀 젊은이들은 저녁을 먹으며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분위기 좋은 식당과 카페를 찾아다녔다.밤의 황리단길은 그런 연인들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는 곳으로 이미 이름이 높다. 개조하거나 신축한 한옥풍의 건물엔 한식당과 일식당은 물론 아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여러 종류의 수제 맥주와 포도주를 판매하는 카페들은 실내 장식이 감각적이고 세련됐다. 서울이나 부산의 유명 카페 못지않다. 또한 여타 도시에 비해 음식과 음료의 가격도 합리적으로 보였다.기자가 들어간 곳은 한옥을 개조해 만든 이탈리아 음식점이었는데, 피자와 파스타 맛이 썩 좋았다. 곁들인 레드 와인도 저렴했다. 한국식 전통가옥에서 유럽 요리를 즐기는 것. 경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선 쉽게 하기 힘든 경험이다.반세기 전 신혼여행객들의 자리를 대신 채운 연인과 식구들이 식사 후 찾아갈 ‘서라벌의 야간 명소’는 어딜까?열 살쯤으로 보이는 아들을 앞세우고 걷는 젊은 부부의 뒤를 따라 기자도 ‘경주의 밤’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유럽과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수십 개 나라를 여행한 친구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취한 채 인적 드문 밤거리를 걸어도 위험하지 않은 세상에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야.”이 말이 터무니없는 과장만은 아니다. 사실 한국의 야간 치안은 어느 나라보다 좋은 편이다. 큰 도시와 소읍(小邑) 모두가 그렇다. 일단 곳곳에 가로등이 켜져 환하고, 범죄 예방 효과를 인정받은 CCTV도 요소요소에 설치돼 있다.경주도 마찬가지다. 첨성대에서 시작해 계림, 월정교, 동궁과 월지를 거쳐 대릉원 인근까지 2시간 가까이 밤의 경주를 유유히 산책했다. 당연지사 안전을 위협하는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게다가 가는 곳마다 수백 명의 관광객들이 야경을 즐기고 있어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헛갈릴 정도. ‘신라의 달밤’을 걷고 싶다는 로망은 몇몇 사람만의 꿈이 아닌 것 같았다.◆ 아름다운 조명과 함께 여름밤의 낭만을...2020년 현재 낭만적인 경주의 밤에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건 어둠이 숨긴 고대 유적을 환히 비추는 색색깔의 조명인 듯했다.작은 산처럼 거대한 능(陵)을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하는 보랏빛 조명, 김알지 탄생 설화가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계림 산책로를 밝힌 푸른 조명, 순간순간 색을 바꾸며 첨성대를 비추는 조명….동궁과 월지에 도착해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쉴 때면 갖가지 빛깔 조명 사이로 신라의 역사 한 장면이 영상처럼 흘러간다.사적 제18호인 동궁과 월지는 어떤 곳일까?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만든 책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질문에 답한다.“동궁과 월지는 임해전(臨海殿·신라 안압지 서쪽의 궁궐 건물)이 속한 통일신라의 동궁지로 알려진 곳이다.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雁鴨池)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나 2011년에 동궁과 월지로 사적 명칭을 변경했다. 월지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왕과 신하들이 모여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관광도시가 되려면 낮에 누릴 수 있는 기쁨과 더불어 볼만한 밤의 구경거리도 두루 갖춰야 하는 시대가 왔다. 경주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황리단길-첨성대-계림-월정교-동궁과 월지-대릉원’으로 이어지는 서라벌의 밤거리는 현대적 감각과 역사적 유적·유물을 함께 만날 수 있기에 누구나 흥미를 가질만한 관광 코스가 될 수 있을 듯하다.세상은 매순간 바뀌고 있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여행의 트렌드도 변한다. 1970~1980년대 신혼부부들에게 사랑받았던 ‘경주의 밤’은 이제 젊은 연인과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에게까지 즐거움을 주고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8-27

‘고령’ 걷는 것만으로 대가야로의 시간여행 떠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불러온 2차 위기가 한국을 휩쓸고 있다. 몇몇 감염 확진의 경우엔 전파자와 전파 장소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늦게나마 계획한 여름휴가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한국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가 자신의 고장을 찾아오는 여행자에 의존하는 관광산업이 지역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런 이유로 어느 지자체 할 것 없이 재발한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게 언필칭 ‘언택트(Untact·비대면 또는 비접촉) 관광’이다. ‘포스트 코로나시대’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언택트 관광에 다수의 지자체가 주목하고 있다.동시에 지역에 숨겨진 ‘비대면 관광지’의 효율적인 개발과 소개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대가야의 신비한 문화를 간직한 고령군도 이런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터.◆ ‘포스트 코로나시대’의 관광지 개발과 홍보에 나선 고령군고령군 관광산업 종사자들은 “언택트와 힐링(치유)이 함께 하는 대가야 고령이 문화관광 슬로건이 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포스트 코로나시대의 트렌드로 주목받는 청정, 안전, 힐링, 비대면과 비접촉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이고 있는 것.현실 역시 함께 어울리는 여행에서 언택트 관광으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작은 규모로 소수가 즐기는 여행을 선호하는 관광객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이에 고령군은 방문객들의 새로운 트렌드에 맞춰 보다 안전하게 휴식과 휴양을 즐길 수 있는 관광지 소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여행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곳으로 평가받던 대가야의 역사·문화 체험지가 언택트 관광이 가능한 공간임을 알려가겠다”는 각오인 것이다.지산동 대가야 고분군은 고령을 대표하는 볼거리인 동시에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트레킹 코스이기도 하다.‘왕의 길’로 불리는 여기에 최근 야간 경관 조명이 설치돼 크고 작은 700여 기의 고분 전체를 아름답게 밝혀주고 있다. 또한 고령군은 관광객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잔디 매트와 식생 매트도 설치해 안전한 도보 여행이 가능하도록 배려했다.대가야수목원 역시 흥겨운 마음으로 가볍게 걷기 좋은 여행지. “수목원에서 금산재, 금산, 의봉산까지 숲길이 이어져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등산 코스가 되고 있다”는 게 고령군의 설명이다.고령의 힐링투어 코스로는 개경포공원에서 개경포 너울길을 지나 부례관광지까지 이어지는 ‘청룡산 MTV 자전거도로’가 대표적이다. ‘프로듀사’와 ‘킹덤’ 등 드라마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좌학리 은행나무숲은 젊은 여행자들의 관심을 모은다.“우륵박물관과 가얏고마을을 거쳐 대가야 고령 생태숲과 미숭산 자연휴양림을 찾는 것도 언택트와 힐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방법”이라고 고령군 관광업계는 조언한다. 여기선 우륵의 가야금 선율도 느낄 수 있을 듯하다.아래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피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고령군의 언택트·힐링 관광지는 어떤 곳이 있는지 소개한다.◆ 대가야로 떠나는 시간여행… 지산동 고분군고령군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는 산 위엔 대가야 시대의 주산성이 있고 그 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 위에는 대가야가 성장하기 시작한 서기 400년 무렵부터 멸망한 562년 사이에 조성된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 늘어서 있다.이곳엔 한국에서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인 지산동44호와 45호 무덤을 비롯해, 왕족과 귀족들의 유택이라 추정되는 704기의 무덤이 분포돼 있다.여기는 독특한 토기와 철기, 말갖춤을 비롯해 왕이 쓰던 금동관과 금귀걸이 등 화려한 장신구가 다수 출토된 대가야 시대 최대 고분군이다. “걷는 것만으로도 대가야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한 공간”이라는 것이 고령군의 자랑이다.◆ 아름다운 자전거길… 청룡산 MTV 자전거도로낙동강 자전거길의 일부분이기도 한 청룡산 MTV 자전거도로는 2016년에 ‘꼭 가봐야 할 아름다운 자전거길 100선’에 선정됐다. 고령군 개진면 개경포공원에서 우곡면 예곡리에 이르는 길.꼭 자전거를 이용하지 않아도 좋다. 걸어서 산책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언택트 힐링코스’라는 것이 이미 다녀온 사람들의 평가다.강정고령보와 우륵문화 광장을 필두로 다산체육공원, 달성보, 개경포공원을 거쳐 부례관광지에 이르는 낙동강 자전거길 또한 최고의 ‘언택트·건강 도로’로 불린다.청룡산 MTV 자전거도로가 ‘가볼 만한 고령의 언택트 관광지’로 지목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 도로의 출발점인 개경포공원은 깔끔하게 손질된 넓은 잔디에 개경포의 유래를 적은 유래비와 표석, 팔각정·벤치 등 휴식공간이 마련돼 있다.도로의 종착지인 부례관광지에선 카라반과 바이크텔이 숙박객을 반긴다. 여기서 포레스트 어드벤처 체험과 풋살과 농구 등 스포츠를 즐겨도 좋다.◆ 다양한 볼거리가 유혹하는 대가야수목원대가야수목원은 방문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산림문화전시실에선 숲의 역할과 혜택, 산림자원의 조성 과정, 낙동강 유역 산림의 녹화 과정을 그래픽과 영상물로 볼 수 있다.전국의 수석 애호가들이 기증한 여러 점의 수석을 만날 수 있는 전시실, 식물에서 추출한 천연 원료를 이용한 향기 제품 제작 체험실, 녹화기념숲과 금산재를 연결하는 산림등산로 또한 많은 관광객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좌학리 은행나무숲과 대가야 고령 생태숲적지 않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 ‘프로듀사’와 ‘킹덤’의 촬영 장소인 좌학리 은행나무숲에선 드라마 속 한 장면을 추억하며 사진을 남겨보는 게 어떨까?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은 물론, 가족들과 함께 하기에도 좋은 관광지다.몸과 마음에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숲의 소리와 향기를 즐기려면 대가야 고령 생태숲을 찾으면 된다. 대가야읍 신리 미숭산 일대 50ha의 넓은 지역에 자생 식물과 향토 수종을 식재·복원해 자연환경의 훼손 위협을 막고 있는 공간이다.고령군에 따르면 “교육체험원, 소리향기원, 숲테라피원 등을 갖춰 다양한 연령대의 방문객들이 모두 만족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미숭산 자연휴양림과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일상을 떠나 자연과 함께 치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미숭산 자연휴양림은 산림문화휴양관, 숲속의 집, 황토집 등 친환경 자재를 사용한 숙박시설을 갖췄다. 숲속 화장실과 소운동장, 산책로와 등산로 등의 편의시설도 잘 만들어져 있다.대가야의 역사를 테마별로 만나볼 수 있는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는 과거, 현재, 미래의 고령군 모습을 요약해 볼 수 있다. 고대 가옥촌, 대가야 유물체험관, 가마터 체험관 등이 여행자를 반긴다. 또한 대가야 건국 설화의 주인공인 정견모주를 주제로 만들어진 음악분수대도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대가야 농촌체험특구와 대가야생활촌전국에서 손꼽히는 농촌문화 체험지로 조성된 대가야 농촌체험특구에선 지역 농특산물을 이용한 체험학습을 통해 어린이들이 평소엔 해보기 힘든 경험을 선물하고 있다.주요 시설물은 농업전시관, 고상가옥, 원두막, 동물농장, 야영장, 농산물, 과수체험장, 대가야 기마문화체험장 등. 학생들은 물론 성인들을 위한 볼거리도 충분하다. 바비큐 체험은 가족 단위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100여 동의 텐트를 동시에 칠 수 있는 넓은 시설이 마련됐다”고 고령군은 부연한다.2019년 4월 개장한 대가야생활촌은 ‘경북 3대 문화권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됐다. 1천500년 전 대가야의 의식주와 철기문화, 토기문화를 실감나게 재현한 공간으로 알려졌으며, 전통 나룻배 탑승체험과 용사체험 등이 가능하다.“가야문화권을 대표하는 관광지이니만치 전통 한옥 숙박시설이 마련돼 있으며, 편안한 휴식이 가능한 언택트 관광지”라는 게 고령군 관광업계의 설명이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0-08-26

고려 공민왕과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만날 수 있는 영호루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쌓여있고 산과 어우러진 강과 하천, 냇가가 많아 전국 어디에나 누(樓)와 정자(亭子)가 있다. 이 누와 정자를 합쳐 누정이라 하고, 여기에 당(堂), 대(臺), 각(閣), 헌(軒) 등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누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공의 성격을 띄고 정자는 작은 공간으로 개인의 수양과 정신적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공통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몸소 보고 느끼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안동의 영호루도 낙동강 가에 지어져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위치 선정이 잘못되어 많이 유실되어 지금은 반대편 산위에 지어져 수해걱정은 없지만 시멘트 콘크리트로 볼품없이 지어 전국의 누 중에는 최하품이 되어 버렸다.#. 누(루)는 언제부터 생겼을까?언제부터 누가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이 집을 짓고 살 때부터 원두막 형태의 휴식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기록상으로는 신선들이 누에서 살기를 좋아하므로 전설적인 삼황오황제때 황제는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를 짓고 신인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사기’의 기록으로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원수지만 한배를 탄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오나라 왕 합려(闔閭)가 백문루(白門樓)를 짓고 월나라 왕 구천을 도와 와신상담(臥薪嘗膽)끝에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 서시(西施)를 오나라에 보내 멸망시킨 범려(范蠡)가 구천(勾踐)을 위해 비익루(飛翼樓)를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우리나라는 삼한시대에 춘천의 소양정(昭陽亭) 자리에 이요루(二樂樓)가 있었다고 구전(口傳)으로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고구려는 기원전 17년(유리왕 3년)서로 앙숙인 유리왕 계비 화희(禾姬)와 치희(稚姬)를 별거시키기 위해 따로 별궁을 지었고, 백제는 391년(진사왕7년 ) 궁전을 중수하면서 자금성의 이화원 같이 못을 파고 산을 쌓았다는 것으로 누를 추정할 뿐이다. 636년(무왕37년) 망해루(望海樓) 등을 짓는다. 신라는 삼국유사의 사금갑(射琴甲)에 나오는 21대 소지왕이 488년 천천정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궁과 월지에 임해전을 짓고 불국사에는 범영루를 짓듯이 여러 사찰에도 누가 있었을 것이다. 월상루에서 연회를 베푼 헌강왕 등의 기록으로 궁궐과 부속건물에 지었을 것이다.고려시대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불교국가라 절을 중심으로 많은 누가 생긴다. 안동 봉정사의 덕휘루, 부석사의 안양루, 그리고 해안가에는 왜구의 침입이 심해 통영 수군진영에는 남쪽을 진압한다는 진남루(鎭南樓)가 있듯이, 경주 기림사 같이 해안가 큰 절에도 진남루가 있고, 대개의 산사에는 누가 있다.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는 누정이 절정에 달한다. 궁궐의 누정은 경복궁의 경회루같이 연회장소의 목적에 충실하게 실용적으로 지은 것 빼고는 경복궁의 향원정과 부용정 같이 치장과 구조가 매우화려하다. 관청이나 서원 등에는 누가 있고 특히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선비들의 누정은 대체로 화려함보다 검소하고 담백하다.#. 영호루의 영광과 상처사람이나 건물이나 한때의 영광도 있지만 상처도 있다. 특히 안동의 영호루는 큰 영광과 명성을 얻었고 그 명성만큼 상처도 컸다. 영광은 10만 홍건적의 참입으로 복주(福州·안동)까지 피난온 공민왕이 70일 있으면서 강가의 영호루에 올라 활 쏘고 말 달린다. 공민왕은 어릴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대륙의 웅혼함을 익혔을 것이다. 그래서 말도 잘 타고 그림과 글씨도 잘 썼다. 말달리는 ‘천산대렵도’ 그림도 자신을 생각하며 그렸을 것이다. 서원이나 누정에 누구의 글씨가 있느냐에 따라 그 건물의 위상이 달라진다. 홍건적을 물리친 후 개경으로 갔어도 안동 영호루서 추억을 잊지 못해 1366년‘영호루’ 편액 글씨를 써준다. 이 공민왕의 어필(御筆) 편액 때문에 영호루는 더욱 격이 올라갔다. 영호루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최소한 공민왕이 피난온 1363년(공민왕 12년) 이전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누정기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영호루의 누정기는 고려 말의 문인 담암 백문보(1303~1373)가 1368년(공민왕 17년)에 썼는데 익제 이재현과 제정 이달충과 함께 고려 국사를 편찬했고, 청렴결백하고 정직하며 특히 문장이 뛰어났다.“영호루는 호수를 굽어보고 있어 기둥과 서까래, 대마루와 들보가 물속에 거꾸로 비쳐 그림자가 어지럽게 일렁인다. …. 큰 강은 옷깃과 띠처럼 둘러앉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었다. 무릇 물의 근원과 지류가 머리를 간장(艮方)에 두고 꼬리를 곤방(坤方)에 둔 것으로서 하늘에 있는 것을 은하수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복주의 글 잘하는 선비와 걸출한 인재가 가끔 이 정기를 타고 그 사이에 탄생한다.…. 이 누(樓)가 은하수처럼 근원을 간방에 두고 꼬리를 곤방에 둔 강물을 누르고 섰으니, 하늘의 문채와 같은 임금의 현판글씨를 얻어 금벽(金碧)의 단청으로 새겨서 오는 세상에 밝게 빛나게 함은 마땅한 일이다. 임금의 덕의 밝은 빛이 이곳에 강림하여 몇 천 년을 두고 우러러보며 흠모하게 되었으니, 나라 일의 기틀에 불행함이 있었던 것이 도리어 누(樓)를 위하여 다행이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조선시대는 누정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았고 또한 즐겼다. 안동은 유학의 메카라 할 정도로 퇴계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전국의 한 가닥 한다는 학자와 문인들은 안동에 오면 영호루가 필수 코스라 보고 느낀 감흥을 시 한 수로 남겼다.우선 위치 선정 문제였다. 도심 속에 있는 관공서의 누들은 도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만 그 외의 누들은 강가나 언덕 위의 전망 좋은 위치에서 자연을 내려다보는 부감법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지어지는데 안동 영호루만 강가 낮은 지역에 지었다. 왜 그랬을까. 우리나라는 도심이나 마을을 형성할 때 집 뒤에 산이 겨울에 북풍을 막아주고 앞에는 적당한 농경지에다 강물이나 냇가가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룬다. 영호루는 누의 입지조건은 지형적으로 불리하고 좋은 위치는 아니었다. 평양의 부벽루에 한 번, 그 외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 울산의 태화루 등등 많이도 가 보았지만 이런 누들은 도심 앞을 흐르는 강물 절벽이나 산언덕 위에 세웠는데 안동은 도심에는 절벽이나 언덕이 없어 홍수로 몇 번이나 사라지는 수난의 상처를 당한다.#. 수난의 상처, 망쳐 버린 영호루올 여름 긴 장마라 낙동강 물도 불어 영호루를 찾았다. 누런 흙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위에 안동댐과 임하댐이 없다면 장관을 이루며 흘러갔을 것이다. 이 낙동강 물을 보니 어릴 적 물 구경 갔던 기억이 새롭다. 내 고향 의령은 동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이고 남으로는 남강을 두고 함안과 경계를 이룬다. 사람들은 물, 불구경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듯이 수재민의 아픔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어린나이 때 의령의 동쪽 끝에 살았던 필자는 요즘같이 비가 많이 내리면 동네 형들을 따라 산 너머 낙동강 가에 물 구경 갔었다. 강가의 바위위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물은 무서웠다. 평소보다 넓게 펼쳐진 강물이 저 건너 벌판에는 유유히 흘러가는데 발아래 바위산에 부딪히면서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위에 떠내려 오던 집과 소들이 소용돌이 물결에 빨려들어 사라졌다가 저 아래서 솟구치곤 했다. 무시무시한 강물로 기억된다.그 옛날 큰 홍수 때 백사장 가에 있었던 영호루도 그렇게 떠내려갔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영호루는 1547년(명종 2년) 홍수로 유실되어 공민왕이 쓴 영호루 현판이 낙동강 하구 김해에서 찾았다는 것이 실감난다. 6년 뒤(1552년)에 중창한다. 1775년(영조 51년) 홍수로 다시 중건했고, 1792년(정조 15년) 홍수로 떠내려가 유실되어 4년 뒤 1796년(정조 19년)에 중수하고 1820(순조 20년) 청음 김상현의 7대손 안동부사 김학순이 중수하고 낙동상류영좌명루(洛東上流嶺左名樓)큰 글씨를 남긴다.이후에도 수난은 계속되어 일제 강점기인 1934년 대홍수로 누각이 유실되어 영호루 금자현판이 떠내려가 선산군 구미리 부근의 강물속에서 다시 찾았다. 이 터 빈터만 남았다가 1969년 12월 안동시, 군민이 ‘영호루 중건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원래의 자리에서 정하동 지금의 강 건너 산위로 옮겨짓는다. 그런데 왜 시멘트 콘크리트로 지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망처 버린 것이다. 같은 시기 진주의 촉석루도 1241년 창건되어 중건과 중수를 8차례나 해오다 임진왜란과 6·25때 완전소실 되었다. 안동과 마찬가지로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들의 성금으로 목조로 아름답게 지은 것이 지금의 촉석루다. 뒤쪽으로 오르니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영호루’편액이 있고 앞에는 공민왕이 써준 한문‘영호루‘가 있다. 1층 기둥 옆에는 중년 남녀가 건식을 사와 먹고 있었고, 2층 누에는 혼자서 운동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김학순의 큰 글씨가 눈을 놀라게 하고 김종직의 중수기와 고려와 조선의 기라성 같은 선인들의 시판을 일이이 세어보니 47개였다. 지면의 한정으로 좋은 시들을 인용 못하지만, 고려 말의 호영 이집(1327~1387)의 ‘영호루 유별’ 중에 “술은 떨어지고 석양은 다락에 비치는데(酒盡夕陽樓),/ 떠도는 괴로움은 언제나 끝날까(行役何時了)”의 시 구절이 가슴을 친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8-25

천년의 전설 품은, 그 수많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다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세상에 전해오는 신화와 전설은 언제나 흥미롭다. 인간의 상상력과 이성 바깥에 존재하는 감성을 자극하기에 그렇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늘의 신(神) 몸의 일부분이 파도가 일으킨 거품과 뒤섞여 조개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프로디테였다. 신화에 매혹된 수많은 조각가들이 대리석을 깎아 그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그 옛날 북유럽 사람들은 남쪽의 뜨거운 불꽃이 거대한 얼음 기둥을 녹였고 거기서 생겨난 거인이 자신들의 선조(先祖)라는 전설을 믿었다.그리스와 로마,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떠도는 이러한 신화와 전설이 한국이라고 없겠는가. 당연지사 있다.경주시 교동에 자리한 계림(鷄林·사적 제19호)은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비한 설화가 서린 공간 중 한 곳이다.계림은 신라의 다른 이름이며,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신성한 숲을 왜 용의 숲이나 봉황의 숲이 아닌 ‘닭의 숲’이라 불렀을까?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5권 ‘신라의 토착종교와 국가제의’가 이 궁금증에 답해준다.“닭은 신라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김씨 시조설화를 보면 닭이 울어서 김알지의 탄생을 인간 세상에 알렸다. 이에 알지가 나온 시림(始林)을 계림이라 고치고 국호로 삼았다 한다. 신라인들이 닭을 숭상했음이 인도에까지 알려졌다는 기록도 있다…(중략) 김씨 집단은 닭을 특별한 의미를 가진 동물로 여겼고, 그들이 5세기 이후 왕위를 독점하는 왕실세력을 이룸으로써 신라는 닭의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천마총에서 계란 실물이 토기에 담겨 출토된 점도 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서늘한 숲이 반기는 ‘전설 깃든 계림’으로의 피서계림을 찾았던 때는 견디기 힘든 폭염이 전국을 뜨겁게 장악한 날이었다. 한 조각 작은 그늘조차 애타게 그리운 여름.대릉원 입구에서 내려 첨성대 쪽으로 잠시 걸어가니 저만치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계림이 모습을 드러냈다.브램 스토커(Bram Stoker·1847~1912)의 소설에 등장하는 드라큘라. 그 흡혈귀가 산다는 동유럽의 숲은 빽빽한 침엽수와 축축한 늪 탓에 낮에도 무언가가 튀어나올 듯 음산하다고 한다. 더위를 피해 피크닉을 즐기기엔 적당하지 않을 것 같다.하지만, 계림은 달랐다. 회화나무와 왕버들, 팽나무와 느티나무 등이 환한 햇살 아래 저마다 멋을 뽐내는 계림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정하게 방문객을 반기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찰랑거리며 숲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개울이 정감을 더해줬다.20여 분 걸으며 셔츠를 적셨던 땀이 계림 안에 마련된 조그만 나무의자에 앉으니 금방 식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오래전 연인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는 ‘최적의 피서지’인 이곳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 계림이라 불렀다. 탈해왕 4년에 왕이 금성 서쪽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환한 빛이 가득해 신하를 보내 살피도록 했다. 가보니 금으로 된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왕이 궤짝을 여니 그 속에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이 아이를 하늘에서 보낸 것으로 믿어 태자로 삼았다. 이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캄캄한 밤, 조용한 숲에서 갑자기 비산하는 환한 빛, 느닷없는 하얀 닭의 울음소리, 새벽에 발견된 황금으로 만들어진 궤짝, 그 안에 담긴 귀여운 아기…. 그야말로 신화나 전설의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춘 재밌는 이야기다.사람이 드문 평일 한낮의 계림. 전설 혹은, 신화 속으로 피서를 온 기분이 들었다. 더위를 피할 곳을 고민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계림 여행을 권하고 싶어졌다.사실 독특한 출생 설화를 가진 신라 사람들은 김알지 외에도 여럿이다. 탈해왕은 동해 아진포로 밀려온 배의 작은 상자 속에서 부모를 알 수 없는 상태로 발견됐다는 옛이야기가 전한다.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14대 왕 유례이사금은 어머니 박씨가 밤에 길을 걷다가 별빛이 입에 들어오면서 잉태됐다고 한다. 믿기 어렵지만 별이 아버지가 된 셈이다.이처럼 ‘기이한 출생 배경을 지닌 아이가 현명한 노인에게 발견돼 왕으로 키워지는 과정의 서술’은 신라의 설화가 가진 특성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공간느린 걸음으로 계림을 돌아보다가 ‘계림비각(鷄林碑閣)’ 근처에서 청아한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었다. 번잡한 도심에선 맛볼 수 없는 적요함이 좋았다.쏟아지는 햇볕 아래서 구릿빛으로 몸을 태우며 수영하는 바닷가에서의 휴가도 좋지만, 때로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조용히 사색에 잠기는 시간도 현대인들에겐 필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의 선택에 의해 피서의 방법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으니까.세월의 이끼 낀 멋스런 기와 아래 계림비각은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세워졌다고 한다.육각형의 비각으로 계림의 내력과 김알지의 탄생 설화를 새긴 ‘경주 김알지 탄생기록비(慶州 金閼智 誕生記錄碑)’가 내부에 자리했다. 대석, 비신, 개석으로 이뤄진 이 비석은 영의정 남공철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경주부윤 최헌중이 썼다고 알려졌다. 비각을 둘러싼 야트막한 토담이 예스러워 사람을 자꾸 돌아보게 만든다.계림은 교촌마을과도 지척이다. 숲을 빠져나와 거길 가려고 하다가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새긴 향가비(鄕歌碑)와 우연히 만났다. 사전에 어떠한 정보도 없이 마주친 1천300여 년 전 신라의 옛 노래가 기자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젊은 화랑 기파랑의 고매한 품성을 자연에 비유한 향가. ‘삼국유사’에 실린 ‘찬기파랑가’의 서두를 현대적으로 풀어쓰면 이렇다.‘슬픔을 지우며 나타나 밝게 비친 달이흰 구름을 따라 멀리 떠난 것은 무슨 까닭인가…’이 구절을 조용히 혼잣말로 읊조리자 8월의 무더위를 잊게 해줄 달 환한 서라벌의 여름밤 풍경이 떠올랐고, 무심히 떠가는 흰 구름이 마지막에 가 닿을 곳은 어디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면 계림은 보통 사람을 예술가로 만드는 힘을 가진 숲이다.◆ 계림의 형태와 속성에 대한 연구도 활성화돼야…천년왕국 신라의 흥미로운 설화가 깃든 계림은 더위를 피할 최적의 장소이며,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 전설과 신화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여행지다. 가족이 함께 찾는다면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도 무궁무진할 듯했다.이와 함께 25종 510개체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계림은 우리가 귀하게 보존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향기로운 숲’이기도 할 것이다.그럼에도 ‘설화의 공간’이 아닌 ‘숲’으로서의 계림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것 같다.한국조경학회지에 실린 논문 ‘문화재로서 경주 계림 내 생육수목 현황 및 공간정보 구축 연구’(홍석환·안미연·강래열)는 그 아쉬움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계림의 중요성은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지속되는데, 신라시대부터 신라의 신성한 숲으로 보호되었으며,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이듬해 1월 사적으로 지정될 만큼 중요한 문화재로 인식돼 왔다. 문화재의 조기 지정은 이 당시까지 숲이 훌륭하게 보전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계림은 문화재 지정 이후 60년 이상을 적극적으로 국가가 관리하고 있는 역사적 숲임에도 불구하고, 지정의 근본적 이유인 숲의 형태와 속성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현재까지 없는 상태이며…(하략)”역사의 현장이 관광 콘텐츠가 되기 위해선 하드웨어에 대한 철저한 조사도 필요하다. 전설과 신화라는 소프트웨어에 더해 ‘숲에 대한 연구’까지 활발히 진행된다면 계림은 둘 모두를 갖춘 서라벌의 보물로 우뚝 서지 않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0-08-20

아버지에서 아들로… 8대째 맥 잇는 조선백자의 장인

“군대 다녀오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가업을 이어받아야겠다고 생각했죠.당연한 결정입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또 그 위의 할아버지들이 해 오신 일이니까요.제 아들도 지금 학교에서 도자기를 배우고 있는데 또 그렇게 대를 이어 가겠죠.”늙수그레한 사람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생각은 여지없이 깨어져 젊은 사람이 조선요 박물관의 문을 열고 나왔다. 박물관 뒤로 보이는 하늘재 너머로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넓은 전시관 지붕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하늘재는 경상도와 수도 간의 문물이 유통되던 물류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생산되던 풍부한 도자 원료는 문경을 전통도자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게 해주었다. 하늘재 아래에서 8대째 조선요의 맥을 이어가는 문경 조선요 대표 김영식씨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망댕이가마 소장자로 경북 민속자료 135호인 망댕이사기가마를 보존하며 조선요를 만들고 있었다.망댕이란 사람 장딴지와 같은 모양의 길이 20∼25cm의 진흙덩어리를 말한다. 이 망댕이를 촘촘히 박아 반구형의 가마칸 3∼8개를 나란히 연결한 우리나라 특유의 칸 가마를 망댕이가마라 한다. 칸마다 통풍장치인 살창구멍이 있어 불길의 흐름을 부드럽게 하고 벽돌로 만들어진 가마와는 다르게 가마 안에서 불을 지피면 그릇이 더 견고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김 대표가 보존하고 있는 이 망댕이가마는 하늘재의 산허리에 있는데 여기에 가면 가마뿐만 아니라 당시 살던 집과 작업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김 대표는 여기서 나고 자라 아버지의 일을 돕곤 했는데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게 된 원천이라고 했다.누구에게 조선요를 배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냥 아버지가 하시던 일이고 어릴 때부터 그 일을 도우며 자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더 많이 배우지 못해서 아쉽지만 그런 대로 어릴 때 보았던 것을 기억하며 재현하다보니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망댕이가마 오르는 길은 좁고 가팔랐다. 이 길을 김 대표의 아버지와 그 할아버지들은 지게로 도자기를 져 나르며 살았을 것이다. 그 힘들고 어려웠던 삶이 길과 가마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모든 도공들이 그런 삶 속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불이 타오르지 않는 망댕이가마를 보며 선조들의 삶을 잠시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문경 조선요는 경주김씨 계림군파의 13대인 김취정으로부터 이어져 20대 김영식에까지 이른다. 3대였던 김영수가 1843년 망댕이요를 축조했고, 5대였던 김운희가 왕실자기 생산을 전담하던 경기도 분원에 발탁되어 경기도 광주 분원으로 이주해 1903년 분원의 가마를 제작했다. 이때 김운희는 백자항아리와 병 제작에 큰 명성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하재일기’ 제8권에 보면 문경사람 김비안이 1903년 망댕이가마를 축조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김비안은 김운희의 다른 이름으로 문경의 망댕이가마가 분원에도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운희는 가마축조기술 및 자기 성형기술이 뛰어나 광주분원에서 김문경으로 통하였다고 전해진다. 김운희의 아들 김교수는 아버지의 분원 활동 양상을 지켜보다가 문경으로 돌아와 가업을 이끌었다. 해방 이후 도자 수공업의 명맥이 끊어져 가고 있을 때라서 김교수의 귀향은 의미가 컸다. 그로부터 문경 지역이 전통도자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게 되었다. 김교수는 조선요에서 무문의 백자 발, 대접, 잔, 항아리, 병과 같은 일상 기명(器皿)을 제작했는데 고졸한 아름다움과 정치한 세련미가 일품이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항아리, 병과 같은 중형 기명에서 고졸미와 세련미가 도드라져 조선 도자의 품격이 그대로 살아있다.김교수의 아들 김천만은 부친의 뜻을 따라 묵묵히 조선요를 만들었다. 김천만은 특히 청화백자의 멋스러움을 현대적으로 재현하고 나아가 조선전기 분청사기의 재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도식화된 포도 문양이 특징인 청화백자를 제작하여 명맥이 끊길 수도 있었던 청화백자기술을 조선요에서 지켜냈다.김천만은 본격적으로 일본 도자기 시장에 진출하여 문경의 도자가 일본에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70년 당시 조선요에 들어와 있던 고바야시 도고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도자기의 대중화와 자연의 질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섬세한 제작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우수한 도자기 제작기술을 일본에 보여줄 수 있었다. 김천만이 일본으로 진출한 때에는 문경 지역 가마의 대부분이 특별한 상호가 없어 ‘호암요’ 또는 ‘관음요’라는 상호를 이용하였다. 관음요는 동네 이름을 딴 것이고, 호암요는 망댕이가마 뒤편의 바위가 호랑이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지었다는데, 지금도 그 바위는 가마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김천만은 미술품은 특수한 애호가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널리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질 좋은 도자기를 생산하기 위해 근교의 흙을 사용하고 유약은 목탄이나 장석 등의 자연 유약을 사용하며 구울 때는 소나무를 주로 사용했다. 자연 유약은 좋은 흙과 고온으로 굽는 두 가지 조건이 맞지 않으면 좋은 도자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매일 사용함으로써 색이 변하며 그로써 가치가 드러난다고 했다. 도자의 일상화가 시작된 것이다.김천만의 아들이자 현재의 조선요 대표인 김영식은 8대째 170여 년간 이어온 문경 망댕이가마의 정통 계승자이다. 2019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한 그의 조선요에 대한 자부심은 남달랐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사기장이기도 한 그는 자비로 망댕이박물관을 짓고 조선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일본 등 국내외에 도자기 전시회를 수차례 열어 문경백자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이다.“문경백자는 다른 지방 도자기와 달리 흙을 쓰는 방법이 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문경백자는 흙 배합률이 달라 색상에서 차이가 나죠. 저는 문경백자만의 색을 구현하려 하는데 이 노력이 인정을 받아 경북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고 봐요. 전통방식을 그대로 계승해서 후대에 물려주고 싶어요.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저라도 전통을 이어받아 그대로 물려줘야죠.”문경이 왜 도자기가 유명하냐는 뻔한 질문에 그는 당연하게도 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문경백자는 여주나 이천 등 다른 지방 백자와 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문경백자는 문경에서 수십 년 전부터 만들어온 청색을 가미한 색상을 구현해 내죠. 문경 흙을 전부 사용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흙 채취 과정이라든가, 항아리를 만들 때의 점육이라든가, 열의 화도가 좀 떨어지는 면에서 차이가 있죠.”흙이 좋으니 도자 문화가 번성했겠지만 실제로 문경 흙을 본 적은 없었다. 도자기 장인들이나 볼 수 있을 흙일 것이다.그렇다면 8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김영식 대표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오고 있을 것인데 그것은 무엇일까.“무엇보다 빛깔이죠. 문경 도자기는 푸른색이 약간 가미된 청백색 도자기입니다. 흰 매화에도 여러 가지 색이 있듯이 도자기도 그렇죠. 흰색이라고 모두 같은 흰색이 아닙니다. 관조백자는 회백색도 있고 설백색도 있지만 문경백자라면 뭐니뭐니 해도 청백색이죠. 제가 현재 구현해 내고 있는 것도 청백색 도자기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죠.”젊어서 그런지 그의 꿈은 크고 조선요에 대한 열망도 가득했다.“대통령 표창도 받고 경북 무형문화재도 됐으니 이제 문경백자의 전통 기법을 열심히 연구해서 국가무형문화재에 올라야죠. 국가무형문화재에 오른다는 것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조선요가 인정받는 것이니까요.”/글 천영애

2020-08-19

이름대로 많은 물과 깊은 인연으로 두 번 이사한 수다재(水多齋)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도시로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지만 농경사회에서는 같은 집안끼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즉 피를 통한 혈연중심의 삶을 지탱해왔다. 그중에서 안동이 유독 강하고 많았다. 진성 이씨는 안동 북쪽의 도산을 중심으로 그 아래 강 건너 분강 마을은 영천 이씨, 횡성 조씨, 예안의 단양 우씨, 그 아래는 광산 김씨, 평산 신씨, 반변천의 무실, 박곡은 전주 유씨, 내 앞 마을은 의성 김씨, 흥해 배씨, 서쪽에는 안동 권씨. 진주 하씨. 원주 변씨, 안동 장씨, 안동 김씨, 풍산 유씨 등등의 여러 문중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성 이씨들은 낙동강과 반변천(임하댐)이 합수되는 곳에 강을 두고 남, 북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의 신도비와 수다재원이 엄마의 애절한 사연이 있는 귀래정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어은정과 재사가 나오고 150여 미터만 더 가면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1419~1480)의 붉게 입힌 글씨의 신도비가 있고, 그 이증을 제사 지내는 수다재 재사가 있다. 1600년대 지어져 1974년 안동댐으로 면자체가 없어진 월곡면 미질동에서 예안면 기사리로 옮겼다가 다시 1998년 여기로 옮긴 기구한 운명의 수다재(水多齋)는 이름대로 많은 물과 깊은 인연으로 이증의 신도비와 함께 두 번이나 옮겨야 했다.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1368~1429)의 여섯 째 아들인 이증은 영산현감을 지냈고 안동에 오게 된 연유는 안동의 아름다운 산수에 반해 정착한 곳이 지금의 임청각 터였다. 그의 둘째 아들이 여기 인근에 귀래정을 지은 이굉(李汯)이고, 셋째 아들이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 그가 지금의 임청각을 짓는다.수다재는 이증의 묘제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진 건물인데 입구부터 온갖 다육이가 줄지어 놓여있다. 문 열린 대문에 들어서서 주인은 불러도 없고 빈 공간은 다육이로 채워 놓았다. 본채는 안동 서럽게 높게 지었고 ‘ㅁ’자로 높낮이를 정해 공간을 많이 활용하게 했다. 좁은 공간을 부엌과 광, 뒤주 등으로 제실의 용도에 맞게 복잡하면서 오밀조밀하게 해 놓았다. 재사 건물은 용도가 제사지낼 때 편리성으로 지은 것이라 살림집 같은 정이 흐르거나 아늑한 공간이 아니라 큰 매력은 없다. 한옥의 공간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두는 여백의 미가 있어야 한결 여유로운 맛이 나는데, 좁은 공간에 분재와 다육이가 빽빽하여 답답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이 건물도 안동 김씨의 이상루 재사 같이 활용하는지 주인의 손길이 나 반질반질하다.#. 반구정과 권정달수다재와 마주보는 가까운 곳에 반구정 재사와 반구정이 있다. 이 반구정은 강 건너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여섯 째 아들 반구옹(伴鷗翁) 이굉(李肱)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153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자신의 호도 갈매기와 벗하는 늙은이 반구옹을 했으니 이 분도 인근에 귀래정을 지은 삼촌 이굉 같이 낙동강의 갈매기를 보면서 귀거래(歸去來) 한 것이다. 귀래정이 전국에 있듯이 이 반구정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파주 임진강변의 반구정인데 세종 때 무려 18년이나 영의정 지낸 황희(1363~1452)가 87세(1449년)의 나이에 사임하고 지은 것인데, 그래도 3년이나 갈매기와 벗하면서 살았으니 청백리의 아름다운 명재상이라 천복을 준 것이다. 정자라기보다 4칸의 반듯한 살림집 같았고 방을 좌우에 한 칸씩 넣어 실용적인 정자였다. 안동의 유림들이 시회와 향회를 자주 열었다 하고, 선비들의 출입이 잦아 서원모양으로 동, 서재를 지어 마치 작은 서원 같았다. 반구정 옆에는 조그마한 재사 건물이 있고 문화재 수리하는 분들이 건물을 수리하고, 문 칸 방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방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다시 신도비기 있는 길가로 나오자 카페 내부는 수리중인데 대문에 눈에 띄는 이름이 보였다. ‘권정달 장군 향리고택’. 그가 누구인가 한때 나르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세 아니었던가.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국보위 상임위원장 밑에서 실세 중의 실세, 보안사 대령 출신 권정달 아니던가. ‘정의 사회를 구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창당한 민정당의 사무총장에, 안동 권씨 가문의 막강한 파워에, 국회의원 등등. 책을 좋아한 필자가 옛날에 사 본 ‘여자가 눈물을 흘릴 때’ 책이 떠오른다. 남편 권정달에게 이혼당한 그의 부인 용인순의 책 제목이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만 아는 일이라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재혼한 부인 덕에 안동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도영심 유엔세계관광기구 재단 이사장이 권정달 국회의원이 실세일 때 재혼하여 같이 국회의원도 했다. 특히 시댁 안동의 탈춤을 세계에 알리고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도 경주가 아닌 안동으로 오도록 한 공로가 크다. 양반들이 괄시한, 상민들의 욕구 해소인 하회 탈춤을 1990년대 초부터 알리는데 노력하여 ‘안동 국제탈춤페스티벌’이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알 수 없지만 23회째가 된다.#. 어은정과 문무를 겸비한 고성이씨 쓰리 스타반구정을 지은 이굉의 아들인 어은 이용도 반구정에 은거하면서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호를 정자 이름으로 하였다. 아버지가 나르는 갈매기와 벗한다면 자신은 물속에 숨은 물고기(漁隱)로 했으니 더 침잠하는 삶이다. 1570년(선조 3년)에 지었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인데 안과 밖 모두 명호서원(明湖書院) 현판이 붙어있다. 명호서원은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의 아버지 이원과 갑자사화 때 사사된 이주를 제향했던 곳이다.이 건물도 안동댐 수몰로 1974년 와룡면 도곡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지은 집이다. 붙어 있는 재사 건물은 작지만 알차고 다부진 건물이었다. 여기도 고택체험 하여 정리는 어느 정도 되어있었다. 문은 열려 있고 불러도 사람 없어 사진 찍으며 건물을 살펴보는데 자전거 끌고 안주인이 왔다. 세찬 비 온 뒤라 어수선함을 감당하기 힘든지 잠시 사진 찍고 어은정 구경 왔다고 정중하게 말해도 시무룩한 채 아무 반응도 없어 무안해서 그냥 나왔다. 담 옆에 마을 정자에 노인 분들 조그마한 은행 알로 윷놀이하고 있었다.중국에서 건너온 고성 이씨의 시조는 이황(李璜·퇴계 이황과는 동명이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노자(老子·이름은 이이(李耳) 율곡 이이와 동명이인)다. 구전되어 오는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노자의 어머니가 81년 동안 임신했다가 오얏나무(자두나무) 아래서 낳았다 하여 오얏나무 이(李)를 성으로 했다 한다.행촌 이암(1297~1364)은 고려 말의 조맹부의 송설체의 명필이었고, 1361년 10만의 홍건적이 침략해올 때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 가는 중 행촌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호종공신 1등으로 되었다, 그러나 정세운 이방실, 김득배 등이 홍건적 토벌에 큰 공을 세우고도 죽임을 당하자 수문하시중 벼슬을 사임하고 강화도로 은퇴 했다가 3년 뒤에 죽는다.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단군세기’의 저자라 빛난다. 그의 제자 중에는 목은 이색이 있다.고성 이씨가 낳은 걸출한 인물은 조선을 뒤흔든 이괄(1587~1624)이다. 문무를 겸비한 이괄은 영의정 이원의 6세손으로 어린 나이에 관직에 나가 지략이 뛰어나고 문무를 겸비한 걸출한 풍운아였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에 합류하여 머뭇거리고 늦게 온 김류를 대신하여 반정을 성공시킨,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권력 주변에 한자리 하려고 불나비처럼 모여든다. 특히 쿠데타를 하면 논공행상이 있고 권력에 진입하기 위해 거짓 밀고도 한다. 1624년 문희, 허통, 이우가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기자헌, 한명련, 이시언, 정충신 등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고변한다. 반정의 최고 공로자 이괄, 광해군 때 영의정 지낸 의리와 명분을 내세운 지조 있는 학자인 기자헌, 왜란 때 많은 무공을 세운 이시언, 의병장 권율 휘하에서 큰 전적을 올린 무신 한명련 등을 지목했다.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가 밝혀져 조사담당관이 고변자를 사형 시키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은 이괄을 잡아와서 신문한 뒤에 부원수작을 해임시키자고 했다. 인조는 이괄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라고 명한다.역모로 몰리게 되면 죽음이란 것을 간파한 이괄은 부하들과 의논하여 금부도사 고덕상, 심대림, 선전관 심지수를 목을 베고 이괄의 난이 시작된다. 1624년 1월 22일 항 왜병 100명을 선봉에 1만의 군사로 파죽지세로 2월 10일 서울까지 점령한다. 인조는 2월 8일 공주로 피난 간다. 이괄은 선조의 아들 홍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성공하는 듯했으나 도원수 장만과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고 이괄은 헌명련 등과 패잔병 수백 명을 데리고 2월 15일 이천에 머물 때 마지막 부하장수 기익헌과 이수백은 자신들만 살기 위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친다.안동의 임청각(臨淸閣)은 1519년 이명(李洺)이 양반가로서는 최고치인 99칸의 집으로 현존하는 민가로는 가장 커서 유명하고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1858~1932)과 집안에 독립운동가 10명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500년 가까이 고성 이씨 종가로 이어오다 나라 잃자 조상의 신주 묻고 나라 찾겠다고 전 재산 팔아 만주로 떠난 그 희생정신은 길이길이 기억하고 선양해야 된다. 신흥무관학교를 새워 독립군을 양성한 석주는 독립자금이 부족하여 몰래 임청각 집까지 팔아서 독립운동 했다. 문중에서는 십시일반 돈을 모아 사들였고,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2002년 국가에 헌납한 아름다운 실천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집 앞에는 일제가 앙갚음으로 철길로 반 토막 내어 상처 입은 용이 되었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8-18

말 갑옷 입고… 화려하고 찬란한 신라시대로 여행

지상에 유토피아(Utopia·불합리와 부조리가 사라진 완벽한 사회)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인류의 역사는 그걸 증명한다. 길 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보자.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불문하고 ‘빈틈없는 온전한 세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다. ‘유토피아가 실재할 수 있다’는 희망을.천국은 유토피아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예술가들은 어떤 방식으로건 이상사회(理想社會)를 꿈꿔 왔다. 그 연장선에서 소설가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도서관을 유토피아 혹은, 천국이라 지목했다. 축적된 인류의 정신적 자산이라 할 책이 진열된 도서관을 이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장소로 본 것이다. 수긍이 가능한 주장이다.그렇다면 박물관은 어떨까? 의미와 가치를 동시에 지닌 책을 포함한 고고학적 자료와 역사적 유물, 여기에 갖가지 예술품 등을 한데 모아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박물관. 이곳 또한 실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닐지.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사태’. 여기에 물난리와 태풍까지 겹쳐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기 힘들어진 2020년 여름을 겪는 이들에겐 “세상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다”란 문장이 실감으로 다가온다.답답함과 우울함이 모기떼처럼 밀려오는 폭염과 폭우의 나날. 밑으로만 가라앉는 기분을 달래려 경주로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국립경주박물관이 과연 ‘우리 안의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신라의 역사와 핵심적 문화·예술품을 한곳에서‘뚜벅이 여행자’라면 터미널에서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한 박물관까지 걸어보길 권한다.많은 이들이 말하듯 “경주는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다.대릉원, 황리단길, 첨성대, 동궁과 월지 등을 친구 삼아 국립경주박물관까지 유유자적 걷는다면 택시 안에선 볼 수 없는 세세한 풍광들과 만나게 된다. 이 40분쯤의 즐거움은 흐르는 땀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때가 때이니만치 경주박물관 입구에선 입장객들의 체온을 체크하고, 마스크 착용을 부탁하고 있었다. 관광객이 몰리는 주말엔 동시 입장객의 숫자도 제한해 보다 안전한 관람을 유도한다.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박물관으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커다란 종(鐘)과 시원한 그늘이 사람들을 반겼다. 군데군데 마련된 벤치 중 한 곳에 앉아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를 열었다. 눈앞으로 국립경주박물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펼쳐진다.“경주박물관에선 압축된 신라 천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경주 여행의 첫 번째 행선지로 들러 미리 공부한 후 곳곳의 문화유산을 만나면 알찬 여행이 될 것이다. 박물관은 대표 전시관인 신라역사관을 비롯해 신라미술관, 월지관 등의 상설전시관 세 곳과 기획전시가 열리는 특별전시관으로 구성됐다.신라역사관은 신라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일련의 역사를 나눠 전시한다. 신라 불교 미술에 대해 알고 싶다면 신라미술관으로 가면 된다. 월지관은 동궁과 월지의 발굴조사를 토대로 출토 유물을 정리해둔 전시관이다. 상설전시관에선 전시해설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박물관 뜰에 전시된 국보급 문화재다. 이곳을 둘러보며 성덕대왕 신종과 고선사지 삼층석탑 등 귀한 유물과 만나보자.”기자가 경주박물관을 찾은 날은 여름 방학을 맞아 부모와 함께 온 어린 학생들이 주된 관람객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전시관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뛰어다니지 않았고, 의젓하게 신라의 불상과 토기 등을 살피며 관람 매너를 지키고 있었다.신라역사관에선 열 살 남짓의 남매가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을 설명해주는 젊은 아버지의 조용한 목소리에 흥미롭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이 몹시도 다정해 보였다.◆ 박물관, 옛것을 본받아 새로움을 만들어 가는 공간여간해선 직접 보기 힘든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을 살핀 뒤 입장한 신라역사관은 4개의 전시실로 운영되는 공간.이곳이 매력적인 이유는 1천 년 가깝게 이어져온 신라의 역사, 그 시작과 끝을 짧은 시간 안에 요약해 보여준다는 것이다.첫 번째 전시실엔 구석기 시대부터 6세기 초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돼 있다. 이 시기는 신라가 천년왕국의 기틀을 마련한 때다.제2전시실에 들어서면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화려한 금관을 비롯해 정교하게 제작된 각종 금·은 장신구 수백 점이 관람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지금은 전시환경 개선사업이 진행 중인 3전시실과 4전시실에선 신라의 영토 확장과 중앙집권제 국가로의 성장 과정,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적 특성, 신라 멸망의 이유 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사업이 완료되는 올해 11월 말 이후면 이 두 전시실도 다시 사람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대구교육박물관 김정학 관장은 최근 출간된 ‘박물관에서 무릎을 치다’를 통해 역사를 주제로 한 박물관의 중요성과 지향점을 아래와 같이 말했다. 새겨들어볼 가치가 충분하다.“역사 공부의 가장 큰 덕목은 그것이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옛것에 미루어 새로움을 발견하고 옛것을 본받아 새로움을 만들어 가는 삶을 생각하면,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박물관은 참으로 귀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중략) 박물관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규모의 장대함보다 콘텐츠를 통한 체험과 감동의 크기다.”사실 역사를 그저 흘러간 시간의 부스러기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과연 그 믿음이 옳은 것일까?과거에 기대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없다. 미래를 계획하는 데에도 과거는 중요한 재료로 역할한다. 바로 이 과거의 총합이 역사가 아닐지. 그렇기에 현인(賢人)들은 “역사를 배척하고는 앞날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해 왔다.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국립경주박물관은 배척해서는 안 될 귀한 역사 유산을 가득 담은 서라벌의 보물인 동시에, 관람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양질의 콘텐츠를 다수 간직한 ‘미래지향적 공간’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빼놓을 수 없는 월지관과 신라미술관마음먹고 온 길이니 월지관과 신라미술관도 빼놓을 수 없었다. 금동용머리장식과 금동심지가위 등 보물급 유물 여러 점이 여행자를 기다리는 월지관에선 통일신라시대의 왕실·귀족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1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레바퀴 자국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불교미술실, 황룡사실, 국은기념실로 구성된 신라미술관은 남산 장창골 미륵삼존불,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기와, 말탄무사모양 뿔잔 등을 전시하고 있다. 족히 일흔은 넘어 보이는 노부부 한 쌍이 백률사 약사불을 앞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이 따뜻하고 애틋했다.특별전시관에선 ‘말, 갑옷을 입다’는 타이틀의 전시회가 진행 중이었다. 왜 사람이 아닌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혔을까?신라의 말 갑옷과 말 투구는 물론 백제와 고구려의 다양한 말 관련 유물이 관람객들의 흥미와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특별전은 8월 23일까지 열리니 위 의문에 대한 해답은 경주박물관을 찾아 직접 풀어보시길.꽤 넓은 박물관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거닐다 보니 3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어린이박물관과 수장고 전용 건물 신라천년보고(寶庫)의 로비전시실은 다음 기회에 조카들과 함께 방문하기로 하고 귀가를 서둘렀다.돌아오는 버스 안. 국립경주박물관이 ‘우리 안의 유토피아’ 중 한 곳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기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지금도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찾고 있다는 것./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0-08-13

시간이 스승… 대구 교육계를 이끌어 온 팔순의 대모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의외로 소박한 경우가 많다. 일정 궤도에 올라서면 그들은 궤도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순응하며 달려간다. 그러다 보니 더이상 자신을 포장해야 할 일도, 일부러 드러내야 할 일도 줄어든다.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은 인정 투쟁을 하며 살아간다고 설파했다.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는 말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서 인간의 삶은 바로 이 인정 투쟁의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종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이 인정 투쟁의 장에서 이탈하여 고유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대구의 랜드마크로 발돋움한 수성못가의 수성호텔에서 흔히들 대구의 대모라고-250만 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구에서 특정인을 대모라고 불러도 되는지의 문제는 제쳐두고- 불리는 문신자 이사장을 만나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물어보았더니 초등학교 교장을 하던 때였다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팔순이 넘었지만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 문 이사장은 오래전에 그만두었을 초등학교 교장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기운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초등학교 교장 할 때가 가장 보람 있었지요. 그때는 아직 우리나라가 그렇게 잘 살지 못할 때였고, 부모들이 먹고살기 바빠서 지금처럼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할 때였어요. 나는 아이들에게 인사 하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그들의 생활을 바꿔 보고자 했어요. 자신이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인사말로 하라고 했어요. 예를 들어 숙제를 잘해 오지 않는 아이는 선생님을 만나면 ‘숙제를 잘해 오는 OOO가 되겠습니다.’라는 식이었죠. 처음에는 아이들이 쑥스러워 했지만 그 인사말로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숙제를 안 해오던 아이는 그 인사말을 늘 하다 보니 숙제를 해오게 되는 식이었죠.”아이들이 그렇게 인사를 하면 문 이사장은 칠성시장에서 사 온 사탕을 나눠 주었는데 그 사탕을 받기 위해 아이들이 운동장까지 줄을 섰다고 한다. “나는 효자가 되겠습니다. 나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겠습니다. 나는 밥을 잘 먹겠습니다”라는 인사말들은 사소하면서도 파급력이 컸다고 했다.아이들의 부족한 부분을 인사말로 하도록 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소리에는 생명이 있어서 상대의 가슴에 남는다. 그러므로 소리를 낼 때는 잘 생각해서 내야 하는데 그렇게 반복적으로 소리를 내는 인사를 하다 보면 그 말의 생명이 아이를 바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집념은 기적을 낳고 노력은 천재를 만든다고 문 이사장은 믿고 있는데 특히 초등학교 때는 가르치는 대로 행동이 바뀌는 것이 눈에 보여서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인사말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도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뀝니다.”그리고 아이들에게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토론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토론문화가 부족한데 당시에는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토론 교육을 시키면서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문 이사장은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직에서 은퇴하고 가톨릭대학에서 미래지식포럼이라는 사회교육원을 개설해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대구의 정·재계, 행정인, 법조인들이 등록했는데 그들 각자는 자기 분야의 리더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일괄적인 관리가 어려웠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육계에 있었던 경험을 살려 그들의 개성과 분야를 존중하면서 포럼을 성공적으로 끌고 갔다. 미래지식포럼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면서 경북과학대 사회교육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문 이사장은 거기서 미래지식포럼과 비슷한 최고지도자과정을 운영했다. 미래지식포럼과 경북과학대 사회교육원은 지역 리더들의 사교모임 장이 되었다.문 이사장은 그렇게 초등학교 교장에서 대학의 사회교육원 원장으로 생활을 바꾸면서 사회에서 맡는 직책도 늘어갔다. 힘든 일이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회를 위한 봉사라는 마음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서서히 삶을 정리해 가는 나이를 살고 있는 문 이사장에게 요즘의 관심사에 대해 물어 보았다.“남의 말 좋게 하기입니다.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켜 보세요. 손가락 하나가 남을 향하면 셋이 나를 향합니다. 남의 흉이 하나면 내 흉이 셋이라는 뜻이지요. 말은 산울림과 같은 것입니다. 말이 총칼보다 무서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선을 베풀면 선이 오고 악을 행하면 악이 오는 법입니다. 말도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인데 바른말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합니다. 바른말이 남에게 상처 주는 경우도 많거든요. 남을 흉보는 사람이 있으면 껌을 씹더라도 남을 씹지 말라고 합니다.”‘봉사가 개천 나무란다’고 남의 탓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책임감이 높은 사람은 남 탓보다 내 탓을 더 한다고 했다. 가톨릭 기도문 중에 ‘내 탓이로소이다. 내 탓이로소이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어떤 일이 닥쳐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남을 탓할 일이 줄어들고 흉을 볼 일도 줄어든다는 것이다.현재 한류문화인진흥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문 이사장은 문화예술인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촉발된 경제효과는 엄청났다. 문화예술이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만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키면서 경제적인 영역에까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한류 문화 스타가 대를 이어 가기 위해서는 어린 문화예술인들의 성장을 지원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현실상 그렇지는 못하다. 개인적으로 성공하면 나라가 그 덕을 보는 셈이다. 재능과 끼는 타고 났지만 어려운 환경 때문에 그 재능과 끼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차세대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 대중문화, 예술 체육 등 차세대를 이끌어갈 꿈나무들을 지원하는 것이 이 재단의 사업인데 문 이사장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재단을 이끌고 있다. 초등학교 교육의 현장에서는 벗어났지만 지금도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지원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그와 더불어 한국·우즈베키스탄과의 문화교류 및 경제지원사업을 14년째 계속하고 있다. 대구시는 35개국과 교류를 위한 국제교류협회를 조직하고 있는데 문 이사장은 그중에서 우즈베키스탄과의 국제교류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르네상스 이후 인류는 휴머니즘의 시대로 들어섰지만 진정한 휴머니즘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1세기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때 그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의 인간관계 기술까지 기계적인 환경을 인간 환경에 맞게 제작하는 시대다. 기계가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게 당연한 시대인데 그럴수록 휴머니즘이 강조되어야 한다. 인간관계까지 기계적으로 변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산다. 2차 세계대전과 6·25를 겪은 문 이사장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지나면서 그래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휴머니즘이라고 강조했다. 휴머니즘은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이고 그러자면 먼저 말부터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타인과의 관계의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니 진정한 배려는 타인을 배려하는 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살아보니 시간이 스승입디다. 어제의 시간이 내일의 스승이더라고요.”팔십 년을 넘게 살아온 문 이사장에게서는 여전히 강한 삶의 의욕이 보였다. 어제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문 이사장에게 내일은 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수많은 사회단체장을 하면서 봉사를 해오고 사회의 리더 역할을 해 온 문 이사장은 여전히 강인하고 삶의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글 천영애

2020-08-12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보낸 이름모를 여인의 지고지순의 순정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벼슬이 직업인 사대부들은 파직당하거나 은퇴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생활을 한다. 그러나 시절이 하 수상하면 벼슬을 던지고 귀거래(歸去來)를 실천하는, 신념으로 사는 선비도 있다. 아니면 처음부터 학문을 닦으며 산림에 묻혀 한평생 전원에서 보내는 산림처사 선비도 있다. 여기 안동의 귀래정은 이광(1440~1516)이 말년에 은퇴하여 지어 몇 년 동안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리고 애절한 편지를 쓴 원이엄마의 남편 이응태가 태어나 살던 곳이다.#. 독특한 귀래정과 도연명의 귀거래사안동부의 “동남쪽에 있는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는 예전에 유수(留水·조선시대에 개성, 황주, 강화, 수원 등 요긴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2품의 벼슬)를 지낸 이광이 지은 것이고 동쪽에 있는 임청각(臨淸閣)은 고성이씨들이 대를 이어 사는 집으로 이것들이 영호루(映湖樓)와 함께 이 고을의 명승지다.” 이중환(1690~1756)이 ‘택리지’에서 귀래정을 이렇게 써놓았다.이 귀래정과 임청각, 영호루(강 건너로 옮기기 전)는 낙동강가에 서로가 바라볼 수 있는 삼각형으로 위치해 있다. 예전에 단체 답사객들을 데리고 올 때는 버스 세울 때가 없었는데 오늘은 혼자라 주차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하늘의 변화는 수시로 바뀌어 비가 오락가락한다. 강물은 불어 흙탕물에다 건물들이 가득하여 예전 조선시대의 풍경은 상상으로 그리는 수밖에 없다. 이 귀래정을 멋스럽게 지은 이광은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1419~1480)의 둘째 아들로 25세에 진사, 4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 성주목사 등을 지내다 갑자사화(甲子士禍)때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의 일당으로 몰려 관직이 삭탈되었다. 그러다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1506년)뒤 충청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개성유수 등을 지내다 1513년(중종 8년)에 나이(74세)가 많아 사직하고 고향 안동에 내려왔다. 낙동강과 임하천이 합수되는 옛 경승지였던 이곳에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글 뜻과 흡사하여 ‘귀래정’이라 지었다.고려와 조선의 한 문장 하는 사람들은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롤 모델을 삼아 귀래정을 많이 지었고 글을 남겼다. 목은 이색(1328~1396)은 독귀거래사(讀歸去來辭)에서 “흰머리 되어 길게 읊조리니 나도 이제 끝이런가./ 문 닫고 그저 ‘귀거래사’나 읽으리라.”했고 신숙주의 아우 신말주(1439~?)는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몰고 왕이 되자 벼슬을 버리고 순창으로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을 짓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면서 은둔생활을 했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1542년(76세)에 은퇴하고 여기 귀래정 위의 낙동강 상류의 예안(지금 안동) 분강 마을로 와서는 명농당(明農堂)을 지어 벽에 도연명의 ‘귀거래도’를 걸어놓고 귀전록(歸田錄) 3수중 ‘효빈가’에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하며 말만 할뿐 갈 사람은 없네, 잡초 우거진 들판 아니 가면 어찌 할꼬,” 노래하고 장수 집안이라 89세까지 은퇴하고 13년을 강호에 묻혀 살다 갔다.도연명(365~427)은 동진(東晋)시대 평택현령으로 있을 때 상사에게 굽신거리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아 “내 어찌 쌀 다섯 말의 봉급을 위하여 그에게 허리를 굽힐 소냐.”며 405년(41살 때) 사직하고 지은 작품이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돌아가자! 내 고향 잡초우거진 고향으로…. 지난일 탓한들 부질없음 깨닫고…. 지금 생각 옳고 지난일 그름 이제야 깨닫네.…. 술 단지 끌어당겨 나홀로 한 잔 드니…. 정원을 거닐며 아치를 이루어가고 사립문은 달아 놓았지만 늘 닫혀 있다. …. 고요히 해는 지고 외로이 서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나의 마음은 평온으로 돌아온다. 가리라! 돌아가고파 돌아왔는데 다시 무슨 미련을 두랴! 세상과 내가 가는 길 다르니 어찌 다시 벼슬길 구하겠는가…. 부귀는 내 원하는 바가 아니요 신선은 기약할 수가 없네.…. 동쪽 언덕에 올라 노래 부르고 조용히 맑은 물에 가서 시를 지으며 자연의 조화를 따라 돌아가려 하니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이렇게 전원에 돌아와 23년을 살다가 죽는데 세상 어디에나 현실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돌아온 지 3년 만에 집이 홀랑 불타고 말년에는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술과 시와 문장은 벗 되어 평생을 함께했다.#. 이응태와 원이엄마의 애달픈 편지지금이야 폰으로 문자를 주고받고 편지는 거의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휴대폰 나오기 전까지는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예전에는 필자도 편지를 많이 썼지만 지금은 거의 하지 않고 아주 드물게 한다. 그러면서도 우체부 아저씨의 빨간 오토바이 올 때마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늘 편지를 기다린다.“‘워늬(원이) 아버님께, 아내가’ 자내(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자네(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어서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 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이렇게 끝내놓고 그래도 미련이 남아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한 여인의 서럽고 애달픈 사연 담은, 가슴 뭉클한 편지다. 1586년 6월 1일 31살에 죽은 남편 이응태(1556~1586)의 장례까지의 짧은 기간 중에 이렇게 써서 관속 가슴 위에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413년 뒤인 1998년 4월 14일 안동 정하동 택지개발로 고성이씨 문중 묘 이장하던 중 이 편지가 나온 것이다.이 편지는 이응태의 무덤(귀래정에서 500m)에서 나온 75점의 유물 중 하나인데 아버지 이요신, 형 이몽태가 쓴 만시(輓詩), 부채에 쓴 한시, 장신구 등이 나왔다. 이 중 머리맡에서 나온 미투리는 이응태가 병중일 때 원이 엄마가 머리를 잘라 눈물을 삼키며 만든 것이라 또 한 번 깊고도 아픈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미투리를 싼 한지가 훼손이 심했지만, 남아있는 글자 중에 “내 머리 버혀….(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았다).” “이 신 신어 보지….(못하고 돌아가셨다)”는 지고지순의 순정이 보인다. 인근의 이응태 할머니 문씨의 묘에서는 온전한 미라가 나왔고, 이응태는 하얀 피부에 수염까지 그대로 있었고, 수의로 180cm의 훤친한 키에 호남형의 장부였음을 알 수 있다.남편의 옷과 자신(4점), 그리고 어린 아들의 옷(1점)까지 넣은 여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더구나 남편과 꿀 같은 사랑을 나누었던 사이라 슬픔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원이 엄마 편지 외에 아버지와 형이 쓴 편지 9통도 있었다. 아버지 이요신이 ‘아들 응태에게 부치는 편지(子應台寄書)’에서 묻힌 이의 이름이 ‘응태’임을 알 수 있었고, 형 몽태의 편지에는 “31년 동안 아우와 함께했다”의 글에서 31살에 죽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이 엄마는 이름도 성도 모른다. 다만 옷의 치수로 160cm 정도의 키에 5살 아들 원이, 그리고 뱃속에 잉태되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이응태는 여기 귀래정에서 태어나 원이 엄마와 결혼하여 처가에 살다가 병들어 귀래정으로 와서 죽었다. 원이 엄마는 그 뒤 아이들 데리고 ‘진보흥부로 옮겨가 살았음(移居眞寶興阜구)’의 고성이씨 족보의 단서로 친정(영양군 흥구리)으로 가서 한 많은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아무도 없는 귀래정을 둘러보았다. 이응태와 원이엄마가 살았던 귀래정은 도로 개설로 묘가 있는 산쪽 20m 정도 옮겨져 집 안에 있던 500년 넘는 은행나무는 집 밖에 있다. 이 은행나무는 그때의 슬픔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집 옆에는 원이엄마의 편지글을 석각해놓았고, 큰 길 건너 안동지청 앞에는 미투리를 가슴에 꼭 안고 있는 원이 엄마의 동상이 슬픔을 머금고 서 있었다. 슬픔에 젖은 능소화도 빗물에 떨어져 뒹굴고, 한 송이 능소화가 슬픔 머금은 원이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8-11

파여진 바위·산 군데군데 부처님들이 큰 뜻을 품다

비단 종교인만은 아닐 것이다. 무신론자들도 세상살이 번잡함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을 땐 절이나 성당, 또는 교회를 찾아간다. 주위에서 그런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기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낯선 곳으로 떠난 여행에선 오래된 사원이나 이름난 중세 성당을 빼놓지 않고 방문하곤 했다. 종교를 떠나 인간 모두에겐 안식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찾았던 몇 해 전엔 불가리아 정교회 교당에 갔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성직자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안정과 편안함을 얻었다. 그 감정은 일상에선 얻기 힘든 특별한 선물 같은 것이었다.◆ 평화로운 산사(山寺)의 여름 풍경을 만나러…여름이 진홍빛 복숭아처럼 무르익고 있다. 햇살은 뜨겁고 장마는 길었다. 곧 폭염과 열대야가 지루하게 이어질 게 분명하다. 답답한 도시에 갇혀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고, 스스로는 스트레스에 지쳐가는 계절. 이럴 땐 시원스런 매미 울음과 짙푸른 녹음이 몸과 마음을 위로해주는 조용한 산사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잠시잠깐이지만 푸르고 평화로운 풍경 속에 자신을 던져 넣고 싶어지는 시기다.경주시 양북면에 자리한 기림사와 골굴사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요구에 맞춤하는 안식처가 될 수 있을 듯했다.지척에 위치한 두 사찰은 오르는 길의 매혹적인 풍경과 조용한 절의 공기가 여행자를 유혹한다. 곳곳에 핀 색색깔 꽃들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도 세파에 시달려온 우리를 위로해준다.동국대학교 한상길 교수는 “불교 사찰은 좁은 의미에서는 수행과 포교를 위해 수행자가 거주하는 곳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1천500년 이상을 가꿔 온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이 함축되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기림사와 골굴사 또한 경주의 역사와 문화, 전통이 집약돼 있는 ‘서라벌의 보물’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기자가 탄 차는 어느새 기림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크고 작은 꽃들이 반기는 기림사10~15분 남짓, 절로 향하는 길이 더위에 지친 이들의 어깨를 다독인다.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은 시원스럽고, 숲을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은 더없이 자유로워 보였다.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가 발행한 핸드북은 제목부터가 관광객을 설레게 한다. ‘나를 위한 행복여행’. 거기선 기림사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래 옮긴다.“여러 문헌에 의하면 인도의 승려인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제자 안락국에게 ‘해동의 신령한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한 길지(吉地)에 임정사(林井寺)를 창건하고, 오정수(五淨水)를 길어 차를 달여 부처 앞에 공양 올리며 수행하라고 했다. 이를 통해 신라시대에 이미 기림사에서 차가 재배되고 있었고, 이 도량의 역사가 차와 함께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중략) 기림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훈련 주둔지이기도 했다.”기림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미적 완성도를 갖춘 건축물과 함께 무더위 속에서도 자신의 빛깔을 간직한 갖가지 여름꽃들이 사찰을 찾은 연인과 가족을 반겼다. 그 앞에서 8월의 폭염이 한풀 꺾이고 있었다.독특한 점은 또 있다.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제 833호)과 명부전 등 기림사 내 건물들 앞엔 주련(柱聯·벽이나 기둥에 쓰인 글귀)을 해석한 푯말이 서있다. 다른 절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대부분이 한자이기에 그 뜻이 궁금해도 어쩔 수 없이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여행자들에겐 기림사 주련을 읽는 재미도 만만찮을 것 같았다.기자 역시 “세상에 악을 행하는 사람은 많지만, 착하게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이들은 적다”라는 푯말 앞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여러 번 읽어야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문장이었다.기림사를 찾는다면 누구나 보게 되는 대적광전은 정면 5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 기림사의 본전으로 신라시대 때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며 제 모습을 많은 부분 잃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조선 정조 10년(1786년) 경주부윤이었던 김광묵이 중창(重創·낡은 건물을 고쳐 다시 지음)한 것.안팎이 두루 아름다운 기림사는 여름에도 좋지만,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더 유명하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달게 마시고 대적광전 계단에 앉아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를 열었다. 거기선 이런 설명이 이어졌다.“기림사는 선덕여왕 때인 643년 창건됐다. 당시 이름은 임정사였는데 원효대사가 기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엔 불국사를 비롯해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거대한 사찰이었다. ‘비로자나 삼신불’이 봉안된 대적광전과 약사전,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지휘본부로 사용된 진남루 등 귀한 유산을 품고 있다. 대적광전을 마주보고 좌측 계단에 오르면 3천 개의 하얀 불상이 본존불 주변을 둘러싼 삼천불전(三千佛殿)이 있다.”유유자적 기림사를 구석구석 돌아보곤 다가오는 가을에 다시 한 번 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울긋불긋한 단풍을 만날 수 있겠지. 그 기대만으로도 지루한 여름을 견뎌낼 힘이 생겨났다.이제 기림사에서 자동차로 5~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골굴사와 만날 시간이다. 거기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한국의 둔황’으로 불리는 골굴사고상현의 논문 ‘골굴사와 선무도의 축전 문화콘텐츠 연구’는 이렇게 시작된다.“골굴사는 경주 양북면 함월산 자락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석굴사원(石窟寺院)이다. 조선시대에는 골굴사 내에 12곳의 석굴사원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에선 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581호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골굴사 역시 가람(伽藍)으로 올라가는 길이 적요해서 인상적이다. 온갖 소음과 네온사인 불빛이 사람을 어지럽게 만드는 도시에선 경험해보지 못한 여유로운 산책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이런 게 피서지로 산사를 찾는 이유가 아닐지.경주 시내에서 동해 쪽으로 2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골굴사는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서역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6세기 무렵 10개가 넘는 석굴을 만들었고, 이것들은 법당으로 사용됐다. 응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인공 석굴사원이기에 ‘한국의 둔황(敦煌)’으로도 불리는 골굴사.20~30대 시절. 인도와 라오스를 여행하던 기자는 크고 작은 동굴 안에 만들어진 불상의 신비스러움에 매료되곤 했다. 조그만 한 점도 깎아내기 힘든 단단한 바위에 거대한 부처의 형상을 새기고, 그 공간을 불당처럼 조성한 옛사람들의 신심(信心)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골굴사를 포함한 세상의 석굴사원 모두는 신을 향한 인간의 믿음이 어떤 일을 이뤄낼 수 있는지를 실물로 보여주는 진경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신론자가 보기엔 놀라운 모습. 경내에서 올려다보는 깎아지른 절벽과 새파란 하늘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골굴사는 삶의 유한함과 꿈의 무한함을 깨닫게 하는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여기저기 돌아보며 흐른 땀을 식히려 그늘을 찾아가던 길. 골굴사가 ‘선무도(禪武道)의 본산’이며 승려들의 시범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정보도 알게 됐다. 오래전부터 불가(佛家)의 전통적 수행법으로 내려왔다는 선무도. 신라의 화랑들도 수련한 무예라고 하니, 궁금한 사람들은 공연 시간에 맞춰 골굴사를 찾으면 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8-06

대구의 사랑채를 짓는 사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건설회사라니 어수선하고 다소 거칠거라고 예상했던 사무실은 마치 학교의 연구실에 간 듯 했다.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서류들과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는 다기(茶器)들이 묘하게 어울려 상상의 사무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풀비체라는 로고가 여기저기 보이고 건설 중인 건물의 조감도가 벽에 붙어 있는 사무실에서 장세철 회장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무실이 마치 연구실 같다는 내 말에 장 회장이 웃었다.“나는 공부하는 걸 좋아해요. 대학원에서 도시재생을 공부했는데 아마 지역에서는 이 분야의 박사 1호일 걸요. 아, 그건 쓰지 마세요. 혹시나 틀릴 수도 있으니까.”몇 호라는 그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의 그런 자부심이 보기에 좋았다. 장 회장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술을 마시면 저녁 시간이 그대로 낭비되는데 그 시간에 집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단히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도 술을 마시기 않고 버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도시재생이라는 건 도시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명이 다한 도시를 재생하는 분야죠. 흔히 건설회사라면 산을 깎고 들판을 밀어서 건물을 지으면서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가는 것만 생각하는데 이미 있는 도시를 재생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도시가 많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도시재생도 건설회사에서는 중요한 사업 분야거든요.”‘배움과 도전 그리고 나눔’이 고려건설의 슬로건이라고 했다. 배움이 없는 회사는 전문성을 갖추지 못하고 도전이 없으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며, 나눔이 없으면 이익만 추구하는 수준 낮은 회사밖에 되지 못하니 회사의 이런 슬로건은 ‘기부왕’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장 회장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고려건설에는 ‘모티’라는 IT디자인 연구소가 있다. ‘모티’라는 것은 모퉁이라는 의미의 경상도 사투리로 중심이 아닌 모퉁이에서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이름을 선택했다고 했다. 건설회사에서 연구소라는 것도 이색적이었지만 IT연구소라는 것은 더 이색적이었다.내가 인문학을 공부한 작가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장 회장은 IT에 대한 설명부터 이어갔다.“IT라는건 ICT와 IOT를 합쳐서 부르는 말입니다. 정보통신기술인 ICT는 우리나라에서 150년 역사를 가진 KT가 담당하고 있고, IOT는 사물인터넷을 말하죠.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회사 연구소는 사물인터넷 연구소입니다.”사물인터넷에 관심을 보이자 장 회장은 오히려 작가가 그런 것에 흥미를 가지는 것이 더 신기하다고 말했다. 작가는 세상의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데 어찌 사물인터넷에 관심이 없겠는가. 이미 아파트에 일부 도입되어 있는 사물인터넷을 우리 집에서는 강아지가 가장 잘 활용한다. 인터폰으로 차 들어오는 신호가 오면 쪼르르 현관으로 달려가 사람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데 들어오는 사람은 이미 준비된 강아지의 환대를 받는 것이다. 나는 그 신호를 받고 밥상을 차리고 어떨 때는 엘리베이터를 지하로 내려보내 준다.“지금은 차가 들어오면 엘리베이터가 감지해서 차가 멈추는 층에 먼저 내려가 있는 수준입니다.”지금 사물인터넷의 수준이 어디까지 도달해 있느냐의 질문에 장 회장은 흥미로운 대답을 내놓았다. “로봇이 사람과 대화할 때 사람이 말하지 않는 감정도 읽어서 대화가 가능하죠. 아이가 혼자 있을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겁니다.”입력된 것만 출력이 가능한 기계가 입력되지 않은 것을 유추해서 출력할 수 있다면 이미 고전적인 의미의 기계를 넘어선 것이다. 추론능력을 갖추었으니 기계와 인공지능의 결합이 주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고려건설이 짓고 있다는 풀비체의 사물인터넷의 수준이 궁금했다. IT 디자인 연구소를 가지고 있는 지역의 건설회사라니 얼마나 흥미로운가. 잠깐이었지만 최고 수준의 사물인터넷이 구현되어 있을 풀비체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풀비체의 의미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새벽이슬에 비치는 햇살의 영롱한 반짝임 같은 것입니다.”그는 그렇게 사회에서 풀비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일체유심조’라는 좌우명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강한 의지와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샤프하면서 예의 바른 그는 스스로 사차원적이고 돈키호테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런 기질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끝없이 도전하는 지금의 회사를 일구어 냈을 것이다.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는 그의 말을 시작으로 봉사에 대한 말이 이어졌다.“예전에는 집에 사랑채가 있었잖아요.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죠. 집 주인은 거기에 머무는 손님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손님들을 통해 자신의 일을 구상하고 살림을 불려 나갈 수 있었죠.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찾아내기도 하고, 또 사랑채에 몰려드는 예술인들을 후원하기도 했어요.”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풀비체 문화대학을 5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그는 인생의 마지막 계획을 털어놓았다.“대구와 경기도에 헬스케어센터를 건설하고 싶어요. 자급자족이 가능한 고품격 실버타운이죠. 역모기지로 운영할 계획입니다. 그래야 노년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죠.”장 회장은 사회사업가이면서 기업가이고 싶어했다. 스스로를 ‘투잡 인생’이라고 표현하는 그는 사람들은 운이 좋아 사업을 이렇게 일구어 가는 줄 알지만 운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부단한 노력의 대가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노력 없이는 운이 다가와도 잡을 수가 없다.수많은 단체의 대표를 맡고 끝없이 기부를 하는 그에게 기부란 어떤 의미인지를 물어보았다.“기부를 많이 하면 회사의 이미지도 좋아지고, 또 지역과 친해지는 묘약이기도 하죠. 앞산에는 12개의 등산코스가 있는데 시간이 나면 매주 그 길을 오르내립니다. 올라갈 때는 지난 한 주의 일을 반성하고 내려올 때는 다가올 한 주의 일을 계획하죠. 스님들이 포행(布行)하듯이 천천히 그 길을 걸으면 머리가 맑아지면서 해야 할 일들이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오너가 좀 더 부지런하고 전문적으로 직접 일을 챙기면 더 많은 이익을 실현할 수 있죠. 전 그런 이익을 기부하는데 쓰려고 합니다.”장 회장이 기부하는 곳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수많은 사회단체의 대표 자리는 곧 기부를 하는 단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대학교에 장학금을 주거나 풀비체 문화대학 등에 많은 기부를 한다. 최근에 맡은 한국생활예총은 특히 운영이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예술인들은 개성이 강해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어렵지만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기도 하다.장 회장은 스스로가 대구의 사랑채 역할을 하고 싶어 했다. 자신의 사랑채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고 그 아이디어를 통해 기업을 운영하면서 이익을 실현하고, 그 이익을 다시 사회로 환원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인드다.끝없이 연구하고 도전하는 기업인인 그는 뜻밖에도 스리랑카 왕립대학으로부터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록 명예이긴 하지만 건설회사 회장의 철학박사 학위는 다소 뜬금없었다.“이래 보여도 제가 사색과 명상을 엄청 좋아합니다. 기업 운영에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데 유연한 사고를 하려면 여유가 필요하죠. 쉼이 있어야 도전도 있습니다. 쉬지 않고 가다보면 직진만 하게 됩니다. 돌아가는 길에서 많은 걸 얻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돌아가는 길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죠. 전 돌아가기를 즐깁니다. 그래서 동화사 신도회장도 맡았는지 몰라요. 절에 가면 여유가 생기고 많은 걸 얻어오죠.”소문으로 듣던 장 회장은 기업운영과 기부의 대명사였지만 막상 만나본 그는 공부하는 기업인이고 나눔의 미학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처럼 고려건설이 대구의 대표적인 건설회사였던 청구와 우방의 맥을 잇기를 기대한다./글 천영애

2020-08-05

조상의 얼을 찾고 뿌리를 생각한다는 이상루(履霜樓)

선조의 묘를 지키고 제사 지내는 재사(齋舍)는 조상숭배가 삶의 일부분인 조선시대는 어떤 가치기준보다 우선했다. 또한 거대한 문중의 단합과 세 과시도 된다. 여러 제도와 가치기준이 변해도 조상숭배만큼은 형식적이라도 이어질 것이다. 안동은 어느 지역보다도 혈연으로 연결된 강한 유대감과 조상숭배는 거의 종교적인 수준이라 유독 재사가 많다.#. 진성이씨 도솔원 재사하늘도 코로나에 감염되었는지 예전 같지 않게 지리한 장마가 이어지고 있다. 전국적인 장마로 경주 집을 나설 때도 빗방울 정도였는데 영천, 군위, 의성을 지날 때는 쏟아지는 폭우에 모든 차들은 토끼같이 달리다가 순한 양이 되어 두눈을 껌뻑껌뻑 거북이같이 아니 두꺼비처럼 엉금엉금 기어갔다. 빗속의 전쟁이었다. 방송에서는 특집으로 물난리를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한때라고 서안동 IC를 빠져나와 학가산 온천 길 접어들자 큰 울음 터뜨렸던 하늘의 눈물도 그쳤다. 푸른 초록의 물결이 싱싱한 여름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얼마 안가서 왼편 길옆에 송원군 묘소 입구를 알리고 유허비 지나자 곧바로 두솔원 재사가 나온다.두솔원 재사(兜率院齋舍)는 진성이씨 안동 입향조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隋)의 묘소를 지키고 묘제를 받들기 위한 재실이다. 건물이 전체를 사각으로 빈틈없이 감싼 북부지방의 특징으로 1천700년대에 옮겨온 건물인데 최근에 보수를 해 놓았다. 얼마나 건물이 낡았는지 옛 부재는 드문 드문 보일 정도다. 재실건물들은 묘소에 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이라 1년에 한두 번 모이는 장소이기에 빈집을 관리하는 격이라 빨리 손상된다.이 소박한 건물 처마 밑에 앉아있는 인상 좋은 아저씨께 묘소까지 거리가 얼마쯤 되는지 물었다. 300m 정도라 하여 우산 들고 올랐다. 시멘트포장 끝나고 수풀 우거진 산을 조금 오르자 ‘청초 우거진 골’이 아니라 잡초 무성하게 허리만큼 솟아 아래위 무덤은 윤곽이 드러나지 않고 석물과 비석만 풀밭에 솟아있었다. 강한 비 내린 뒤라 산새도 우짖지 않고 길옆에 두꺼비 한 마리가 엉거주춤 걸으며 온 산천을 지키고 있었다.#. 홍건적과 송안군 이자수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 백성은 고통스럽다. 유럽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장구한 역사의 중국도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로 큰 고통을 당하는데 송나라를 멸망시킨 몽고족의 원나라 지배하에 고려도 부마국으로 전락하였다. 원나라는 몽고인을 최상으로 두고 그 밑에 몽고족을 보좌하는 색목인(色目人)을 두고 최하로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을 두고 통치했는데 특히 남인은 몽고에 끝까지 저항한 남송사람들이라 더욱 핍박받았다. 자연재해가 나면 지금처럼 토목의 장비가 없을 때 인력으로 복구할 수밖에 없다. 1351년 대홍수로 범람한 황하의 수리로 수많은 농민들이 징발되어 민심의 동요를 일으키자 이 틈을 타서 한족의 송나라를 부흥한다는 기치를 걸고 백련교라는 비밀결사대를 기반으로 홍건적의 난을 일으킨다.홍건적은 백련교와 세상을 구제한다는 미륵교 신자들이 동지의 표시로 붉은 천 조각으로 머리를 싸매어 홍건적이라 불렀다. 우리나라 동학군같이 대부분 농민들로 구성된 홍건적은 처음에는 세력을 떨치다가 관군에 의해서 진압되고 끝까지 살아남은 주원장은 결국 원을 무너뜨리고 한족의 명나라를 세운다. 이 홍건적이 관군에 쫓겨 만주로 후퇴하여 2차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다.1359년(공민왕 3년)에 4만의 홍건적이 평양까지 함락한다. 그러나 이방실, 안우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추격으로 거의 궤멸시켰다. 이후에도 홍건적은 수군(水軍)으로 황해도, 평안도 해안을 침입하다가 1361년(공민왕 10년)10월에 10만의 홍건적이 2차로 침입한다. 이때 수도 개경이 위험하자 공민왕은 피난길에 오르고 개경은 함락되어 수개월동안 잔학함을 당해야했고 원주까지 함락당한다. 12월에 복주(안동)까지 피난 온 공민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여 홍건적 토벌에 나선다. 정세운은 이방실, 안우, 김득배 장군들과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다. 이때 이성계는 사병 2천명을 이끌고 적장 사유 등의 목을 베는 등의 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낸다.진성이씨는 진보현(청송 진보면)의 토착 향리였다가 시조격인 이석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의 큰아들 이자수(~1365~)는 고려 공민왕 홍건적의 침입 때 고려 조정은 군대에 공을 세운 관료들에게 봉군, 통헌 등의 명예직(첨설직)의 벼슬을 주었다. 이자수도 진보현의 향리였는데 정세운 장군을 따라 큰 공을 세워 송안군에 봉해져 신분이 높아졌고, 세습으로 내려오던 향리(鄕吏)도 면하고 판전의시사의 벼슬도 지냈다. 이자수는 안동 입향조가 되어 퇴계 이황 같은 큰 학자가 나와 수는 많지 않아도 진성이씨(진보이씨)는 양반으로의 기반을 단단히 구축한다.#. 재사 이상루안동의 중요한 문중의 재사는 안동 서쪽 서후면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그것은 음택, 양택의 조건이 좋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선조가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린 깊은 인연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두솔원을 지나 서후면 사무소 가는 길에 안동 장씨. 풍산 유씨 재사가 연거푸 있고 경당 장흥효 고택이 도로에서 보이고 그 옆에 성곡 전원마을이 있다. 조금 지나면 서후면 사무소가 나오고 오른쪽 남으로 조금 가면 옛 경당 고택이 있었고 광풍루 정자가 쓸쓸히 있다. 조금 아래로 가면 학봉 종택과 간재 종택, 사육신 단계 하위지 고택 그 아랫마을은 관물당 권호문 고택과 청성서원이 있다. 면사무소에서 왼쪽 북으로 가면 신라고찰 봉정사 가는 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봉정사가 나오고 우측으로 200m만 가면 이상루가 길옆에서 안내한다.이상루(履霜樓)는 직역하면 밟을 리(履)에 서리 상(霜)자를 써서 ‘서리를 밟고 서 있는 위풍당당한 루(樓)’라는 뜻으로 의역하면 돌아가신 조상의 얼을 찾고 뿌리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학문과 덕행, 나아가 충효가 뛰어난 선조에 대해 제사지내는 건물이 재사인데 여기 이상루는 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의 묘소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이다. 1750년(영조 26년)에 건축했고 지금의 터에는 1793년(정조 17년)에 28칸으로 길게 중건햐였다. 일부 건물과 루는 옮겨지었다. 이상루는 재사 건물이면서 누의 건물이 인상적이라 답사할 때 들리곤 하는 곳이다. 지난주에 왔을 때는 고택체험도 하기에 개방되어 있어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단청 칠한 것과 천태암(天台庵)현판이 있어 예전에 천태암 절을 폐하고 이 건물을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천민에 속했던 승려들은 양반의 노비와 비슷했기에 절을 순순히 빼앗겼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을 떨게 했던 풍양 조씨와 세도정치의 대명사 안동 김씨 문중에 스님들은 양반처럼 에헴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머금고 절을 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래도 천태암 현판은 달아 놓았으니 일말의 양심은 있어 다행이다.혼자서 찬찬히 둘러보는데 점잖은 분이 나오신다. 안동김씨 후손인줄 알았는데 타성인데 10년 전에 수리하여 고택 숙소로 운영하는 이신자 관장님이다. 앞으로 5년만 더하고 그만 둘 생각이란다. 그때가 80살이 된다하시는데 스스로 80을 정년으로 택한 삶이다. 여기서 생활하다가 안동시내 집에 가면 답답하다고 하신다. 그런데 세찬 비 오는 오늘은 문도 잠겨 사람도 없고, 산새들도 고요히 숨어 골짜기 물 흐르는 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안동김씨 김선평의 묘김선평의 묘를 예전에 보았던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오늘 다시 찾았다. 문 닫힌 이상루 앞을 지나 산허리 휘감듯이 조금 오르면 묘소가 있다. 경사진 산길 오르는 계단을 온통 장대석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장인이 사라진 우리시대 혼히 없는 업자들의 작품이라 곳곳에 일그러져 있다. 석물에다 잔디로 잘 단장하여 왕릉같이 해 놓았다. 묘 옆에는 처참하게 부러져 누워있는 두 소나무가 묘한 여운을 준다. 검소한 진성이씨 이자수 묘와 화려하게 단장한 김선평 묘의 상반된 모습에 많은 생각에 잠긴다. 잔디를 심어 언제나 이 모습이고 이자수 묘는 일반 풀이라 잡초 무성하지만 때가 되어 벌초하면 깔끔해진다. 불교에서 마음공양이 최고이듯이 기리고 흠모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극한 마음이다.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은 어떤 사람인가.후삼국이 각축을 다툴 때 고려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보다 열세였기에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특히 신라 경애왕을 죽인(927년) 견훤과 공산전투에서 왕건 옷으로 변장한 신숭겸을 비롯한 8장수들이 순국(이때부터 공산을 팔공산이라 했다)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왕건이었다.왕건은 전열을 가다듬어 930년(경순왕 4년, 태조 13년)) 고창(안동) 병산전투에서 8천명의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함몰시켜 결정적 승기를 잡는다. 고창성주 김선평과 장길, 김행이 향군을 이끌고 왕건을 도왔기 때문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김선평에게 안동 김씨, 장길에게 안동 장씨, 김행에게 안동 권씨를 하사하고 삼태사로 모셨고, 고창은 안동 도호부로 승격시켜준다.그러나 숨은 공로는 안동의 안중구(安中嫗)라는 할머니가 독한 고삼(苦蔘)술을 빚어서 적장에게 취하게 한 뒤에 총공격하여 승리했다고 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2·12 쿠데타때 반대파 장군들을 술 마시게 한 뒤 했던 것과 같이 술이 역사의 줄기를 바꾼 것은 너무나 많다. 장보고, 전봉준, 신돌석도 술에 죽어간 영웅들이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8-04

파도·바람·바위·시간이 빚어낸 보물이 숨쉬는 경주의 바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는 특유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입에서 발음되는 순간, 그 즉시 연속적으로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경주가 가진 이미지는 고풍스럽고 묵직하다.천년 세월 동안 이름을 간직한 오래된 사찰, 거대하고 부드러운 반구(半球)의 형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수많은 고분들, 남산에 뿌리를 내리고 세파를 견디며 숲을 이룬 부드럽게 굽은 소나무….경주는 위와 같은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진녹색의 풍경 속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도시 서라벌. 이는 산과 가람, 왕릉 등이 결합해 만들어낸 압도적인 이미지다.그래서일까? 경주를 찾은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바다’를 떠올리는 경우는 드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경주에도 바다가 있다. 그것도 청량한 파도 소리가 귓전을 간질이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바다.“앞으로는 장마와 더위가 긴 기간 이어질 것”이란 기상 예보가 들려온 7월 하순 어느 날 오후. 낭만적인 피서지를 찾아 경주 시내를 벗어나 양남면을 향했다.승용차로는 약 40~50분, 경주시외·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도 1시간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서라벌의 푸른 보물’이 있으니, 바로 ‘주상절리(柱狀節理)’와 ‘파도소리길’이다.◆ 기묘한 형상으로 사람들을 반기는 양남 주상절리차에서 내려 바다를 향해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앞에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치 검은 병풍을 눕혀놓은 듯한 모습을 한 양남 주상절리다.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는 이 풍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2012년 양남면 읍천리에 자리했던 군부대가 옮겨가면서 숨겨져 있던 보물이 세상에 나왔다. 파도, 바람, 바위, 시간이 빚어낸 보물 양남 주상절리군(群)이다. 주상절리는 화산암 지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위로 솟은 모양의 육각형 돌기둥을 뜻한다.양남 주상절리군에서는 위로 솟은 주상절리뿐만 아니라, 부채꼴 주상절리, 기울어진 주상절리, 누워있는 주상절리 등 다양한 형태의 주상절리를 관찰할 수 있다. 발달 규모와 형태의 다양성을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됐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둥글게 펼쳐진 부채꼴 주상절리.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형태다.”주상(柱狀)은 기둥의 형상, 절리(節理)는 암석에서 볼 수 있는 나란한 결, 또는 갈라진 틈을 의미한다. 그러니 주상절리란 나란한 결로 갈라진 기둥 형태의 바위라고 보면 될 듯하다.여행자가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양남의 주상절리는 제주도 중문의 주상절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낸다. 몇 해 전. 비행기를 타고 가서 본 제주의 주상절리는 바다와 대립된 수직의 자세로 우뚝 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꺾으며, 하얀 포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웅장하고 남성적인 모습이었다.반면 경주의 주상절리는 파란 물결과 하나가 되려는 듯 바다를 향해 발을 뻗고 있는 수평의 형태다. 제주의 그것에 비해 작은 규모지만 온화하고 여성적으로 느껴졌다.자연이 펼치는 마술은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영역이다.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주상절리란 화산 활동으로 인해 생긴 것이겠지만, 양남 바닷가에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만난 주상절리는 자연이란 마법사가 사람들의 감탄을 불러내기 위해 만들어놓은 ‘기묘한 예술품’으로 다가왔다.양남 주상절리가 형성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천60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까마득한 시간의 저편.지금 기자가 보고 있는 풍경을 1천500년 전 신라인들도 봤다고 생각하니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시간의 연속성’이 실감으로 전해진다.제대로 된 교통편이 없었던 옛날. 서라벌의 소년들은 무리 지어 모험을 떠나듯 발걸음을 재촉해 동남쪽 양남 바닷가로 더위를 피해 왔을 것이다.그리고, 그중 하나는 주상절리 끝자락에서 몸을 던져 함께 온 친구들에게 수영 실력을 과시하지 않았을까? 변변한 수영복도 없이.한없이 평화로운 해변 풍광 속에서 접혀 있던 상상력의 날개를 펴는 짙푸른 경주의 여름. 너무나 아름다워 혼자 즐기기엔 아까웠다.◆ 신경림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파도소리길‘일상’이라는 이름의 감옥 속에 갇혀 있던 현대인들에게 돌아가고픈 원시의 풍경을 선물하는 경주의 바다. 여기까지 왔으니 1시간쯤 할애해 잘 정돈된 해변 산책로를 걸어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양남엔 괜찮은 음식점과 근사한 카페가 적지 않다. 가볍게 요기부터 한 후 얼음 섞인 차가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파도소리길’에 들어섰다.누구의 작명인지 몰라도 산책로 이름을 기막히게 잘 지었다. 초입에서부터 무더위를 저 멀리 내쫓는 시원스런 파도 소리가 여행자를 반긴다.들머리에 1.7km 가량 이어지는 파도소리길에 대한 경주시의 친절한 설명이 안내판에 적혀 있다.“양남 주상절리를 곁에 두고 거닐 수 있도록 읍천항에서 하서항에 이르는 해안 산책로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이 조성됐다. 데크로드, 정자, 벤치, 구름다리 등이 잘 정비돼 있고, 중간엔 주상절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으니 꼭 찾아보시길 권한다.”앞서 걷는 어린 아들과 젊은 아버지의 등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둘은 무슨 이야기를 저토록 비밀스럽게 나누고 있는 것일지. 부자의 뒷모습이 먼 기억 안에서 사람살이의 풍경을 노래한 시인 신경림(84)의 ‘동해 바다’를 소환시켰다. 그 절창 중 한 대목을 아래 옮긴다.‘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깊고 짙푸른 바다처럼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20~30년을 먼저 냉혹한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아버지. 아직 물정 어두운 아들에게 조그만 충고라도 해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 신경림의 시는 바로 그런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아들이 타인에게는 너그럽고, 자신에겐 엄정하기를 내심 기대한다. 그런 이타적인 사람으로 커가길 열망한다. 그건 15세기 전 서라벌 아버지나, 2020년 오늘의 아버지가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어때요? ‘생명의 시원’ 바다로 떠나는 경주 여행양남 주상절리를 옆에 끼고 해변 산책로를 다정하게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국문학자 김윤식(1936~2018)이 말한 ‘존재의 시원(始原)’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거기서 의미를 조금 더 넓혀 드넓은 바다를 떠올린다. 인간의 생성과 소멸이 좁은 차원에서의 ‘존재’ 문제라면, 보다 확장된 의미로서의 지구 위 모든 ‘생명’은 바로 바다에 그 시원을 두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이 움트고 생겨난 곳.길었던 여름 하루가 지는 해와 함께 까무룩 사라지는 양남 바닷가. 드문드문 오렌지 빛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다정한 부자는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갈 시간임을 알고 주상절리 검은 바위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기자 역시 기대 이상의 감흥을 선사한 경주의 여름 바다에 작별을 고했다. ‘곧 다시 찾아올 것’이란 소리 없는 약속을 전하며./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7-30

도전적이고 개척적인 정신과 열린 마음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다

덕산코트랜 강환수 대표에 주목한 이유는 한 장의 그림 때문이었다. 그림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사장님요, 부족한 아들을 거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림의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덕산코트랜을 방문한 날은 오랜 장마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위로 열어놓은 창문에는 빗소리가 요란했고, 인상 좋게 생긴 강 대표와의 인터뷰는 참으로 힘들게 이어졌다. 하나를 질문하면 하나만 답하면서 입을 다물고 또 하나를 질문하면 또 하나만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보기보다는 참 과묵하다는 느낌이었다. 영업이 천직이라는 사람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법도 하건만 그에게서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어버이날이 되면 사장인 나는 고향 집에 가는데 직원들은 못 그러잖아요.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직원들의 부모님께 우체환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까 습관화되어서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편지쓰기를 시작했죠. 부모님께 편지 쓰는 직원에게만 우체환을 보내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직원들이 어버이날이 되면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전 거기에 우체환을 동봉해서 보냈죠. 어른이 되고 나면 부모님께 편지 쓰기가 어렵거든요. 그런데 직원들의 부모님들이 자식에게서 편지를 받고는 감사의 편지를 회사로 보내오시는 거예요.”그 그림의 내막은 그랬다. 작은 일이었지만 파급 효과는 컸다. 강 대표는 가정 내에서 인성이 좋은 사람이 직장에서 일도 잘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런 믿음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직원의 부모님께로 퍼져 나가고 지금은 덕산코트랜의 특별한 문화가 되어 있었다.보통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모두가 다르다. 강 대표는 직원들의 인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좋은 사고 좋은 제품 좋은 신뢰’라는 사훈에는 회사의 이익에 대한 것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더 많이 드러나 있다.강 대표는 효 문화를 정착시키면서 사내에서 칭찬릴레이게임을 시작했다. 사람은 다면성을 가지는데 많은 모습 중에서 하나만 보면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칭찬릴레이게임을 하면서 직원 서로간에 더 잘 알게 되고 그들이 가진 장점이 더 부각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매주 2명씩 칭찬하기로 했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1달에 1명씩 칭찬하는 것으로 줄어들었다. 장기근속하는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이다.강 대표는 기업문화의 하나로 ‘상경여빈’의 정신을 강조했다. 상경여빈이란 서로 공경하고 늘 손님처럼 대하라는 말인데 항상 보는 사람이라고 만만해지면 예의가 없어지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서로를 존중해주고 손님처럼 대하다 보면 갈등은 필연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생산성 향상이라든가 좋은 제품을 개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사람 중심의 기업문화는 중소기업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덕산코트랜은 2013년에 여성가족부 가족친화인증 국무총리 표창을 받게 되었다.어떻게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는지 궁금했다.“대학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죠. 그런데 동신유압이라는 기계회사에 영업직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어요. 기계에 대해서 아는 게 뭐 있어야지. 그래서 기계 공부를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영업을 해보니 이 영업이라는 것이 내 적성에 딱 맞는 거야. 천직을 찾은 거죠.”강 대표는 그렇게 기계 공부를 하면서 영업을 배워 나갔다.“나는 제품을 파는 것보다 인간관계를 먼저 맺어 나갔어요. 영업은 사람 중심이거든요. 아무리 내가 기계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더라도 인간관계에서 실패하면 영업도 실패예요. 그 다음은 서비스죠. 직접 나가서 서비스를 해줍니다. 수십 년 전의 기계를 지금도 쓰는 업체가 있어요. 우리도 깜짝 놀란다니까요.”강 대표는 청년들이 직장을 구할 때 1순위에 두어야 할 것으로 회사의 비전을 꼽았다. 회사는 사람과 함께 가고 사람은 회사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당장의 급여나 복리후생보다는 그 회사가 얼마나 비전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은 인재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회사가 인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교육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데 특히 외부교육 수료의 기회를 많이 준다고 했다. 백 명의 직원 중에서 한 명의 직원이 회사를 살린다는 철학이 강 대표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는 덕을 베풀면 외롭지 않다는 신념으로 사람들을 대한다고 했다. 지금 부자들은 상속이나 증여 등의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지만 아무리 아껴봤자 어차피 50% 정도는 세금으로 국가에 바쳐야 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색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그런 그에게 봉사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대답은 간결했다.“기억나는 게 없어요.” 봉사를 하지 않아서 기억나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강 대표는 봉사라는 말이 나오자 웃음을 지으며 자꾸만 감추려 들었다. 쑥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봉사를 하면서 봉사를 배우기 때문에 굳이 말할 만한 봉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급식 봉사를 나가보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와서 음식을 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정말로 급식이 필요한 사람들임을 알아본다고도 했다. 그냥 집에 있기가 심심해서 나온 김에 급식 봉사를 받는 사람도 있고, 정말로 절실해서 급식 봉사를 받는 사람도 있는데 절실한 사람들은 다음 끼니를 위해서 음식을 봉지에 담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담아 주면서 다음에도 꼭 오시라고 당부하는데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 복지의 그늘을 읽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보다 봉사나 기부를 얼마나 했는지가 중요한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봉사나 기부를 할 줄 모르는 부자는 진정한 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아직 5일제 근무가 정착되기 전에 직원들로부터 그런 요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머리를 썼죠. 전 직원이 한 달에 한 번 봉사를 하면 5일제 근무를 하겠다고요. 그런데 막상 봉사를 하려 해도 어렵더라고요. 단체에는 학생들이 전부 와 있고, 그래서 지속하지 못했어요. 마음 있는 직원들은 개별적으로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장애인 단체에 가보면 장애인이 오히려 비장애인에게 장애를 가졌다고 해요. 마음에 장애가 있다는 뜻이죠. 인정 안 할 도리가 없어요.”덕산코트랜은 대구의 스타 기업에 선정되면서 대구시로부터 이런저런 지원을 받았다.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때 강 대표는 대구시로부터 받은 혜택을 돌려주기로 했다. 받았으니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대구시에 기부의 손길을 보태고 여기저기 기부를 늘려나갔다. 어려운 사람이 손을 내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주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독자적인 방식으로 영업을 하고 싶어서 창업한 회사는 어느덧 강소기업으로 떠올랐다. 덕산코트랜은 해외 유럽CE 인증 2건 추가 획득 등 다수의 우수특허인증서 및 특허를 30개나 보유하고 있다. 그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였지만 사업에서만은 추진력이 있고 창조적인 마인드를 드러냈다. 강 대표는 부유하게 살았던 부친이 보증을 서주면서 가세가 기울었는데 오히려 그런 부친에게 고맙다고 했다. 대구의 기업가들을 보면 90% 정도가 자수성가한 사람인데 만약 부친이 계속 부유하고 자신이 그 그늘에서 살았다면 덕산코트랜을 창립할 생각이나 했겠느냐는 것이다. 길은 무수하고 어느 길을 가느냐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지만 성공의 길을 가려면 도전적이고 개척적인 정신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사무실에는 ‘작은 것부터 신용을 얻고 더 큰 신용을 얻자’라는 글귀가 쓰여진 액자가 있었는데 자신의 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행보가 눈에 보였다. ‘운칠기삼’이라고 하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다는 그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날이었다. /글 천영애

2020-07-29

꿈이 있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그 길 가야 후회 남지 않으리…

◇ 18개국 38,000킬로미터를 달려 집으로118일(2019년 5월 10일-8월 30일) 동안 38,000킬로미터를 달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러시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체코-오스트리아-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벨기에-네덜란드-독일-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에스토니아(18개국)를 돌아 다시 러시아를 지나왔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지만 딱히 일상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생업을 뒷전에 두고 다녀왔으니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고단하게 밥벌이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한 번도 떠난 걸 후회한 적은 없다. 여행의 기억이 평생 자산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장엄한 시베리아와 북유럽의 자연 속을 마음껏 달린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다.처음 세웠던 계획, 유럽의 서점과 도서관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오겠다는 다짐은 흐지부지 되었고 그야말로 주마간산 달리기만 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없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아내와 아이들이 여행을 끝낸 모습을 보고 했던 말은 “몇 개월 동안 10년은 늙은 것 같아!”였다. 4개월 동안 많은 에너지를 썼고 한계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예전처럼 몸으로 밀어붙이는 건 더는 어렵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고, 철없이 집을 떠나 길을 헤매는 일이 예전과 다르게 힘들다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언제까지 철없는 일에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행하는 동안 돌아가면 덜 소비하고 더 단순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것은 정리하고, 가진 것은 가능한 살려 쓰고, 능력 밖의 일은 쳐다보지 않고, 목적 없이 멀리 떠나지 않고, 사람 모으는 일에 힘쓰지 않고, 관심 없는 일에 허투루 에너지를 흩지 않고. 이번 여행에서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내가 가진 에너지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지만, 항상 경계하는 마음으로 ‘단순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항로가 다시 열리길여행을 다녀오고 1년이란 짧은 시간이 지난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나오기 시작한 이후부터 장기간 해외여행을 떠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여행 하는 동안 거쳐 간 국가들 대부분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 받고 있고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없다. 사람도 물류도 오가기 힘들어지니 점점 항로도 해로도 오가는 비행기와 배가 줄고 있다. 당장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던 페리도 운항을 멈추었다. 예정되어 있던 포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항로도 언제 열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여행, 항공, 해운 등 많은 분야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직격탄을 맞았다. 2019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전쟁이 아닌 바이러스가 세상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지난해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오토바이 대륙 횡단 여행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내일도 예측하지 못하는 게 사람 일이라 마음먹은 것은 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았다. 마흔 이후의 삶은 상승의 변곡점을 찍고 내리막을 걷는 일만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뒤로 미뤄선 안 된다. 내일, 한 달 후, 내년에, 형편이 나아지면…. 하고 싶었던 일을 뒤로 미루면 결국 나중에 후회할 일만 남는다. 다들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일상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일도 가족도 잠시 놓고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세상일은 모두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거둘 수가 없는 법이다.대륙 횡단 여행, 오토바이 여행을 꿈꾸는 분들을 가끔 만난다. 딱 한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한다는 건 무리지만 여행하는 동안 절실히 느낀 건 ‘체력’이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체력을 키우지 않으면 중도포기하기 쉽다.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대사를 보고 무릎을 쳤었다. 사범이 바둑판을 앞에 두고 담담하게 주인공 장그래에게 말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야하는 여행에선 첫째도 둘째도 체력이다.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집중력만 잃지 않았다면 러시아를 벗어나며 미끄러졌던 사고도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을 것이다.“니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니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데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구가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리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니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고마운 친구이자 독자였던 형주 씨를 기억하며사십 대에 1년 동안 여행자로 살겠다는 버킷리스트는 이뤘으니 남은 3년 동안(난 마흔일곱이다) 오십 대에 해보고 싶은 것들에 대해 계획을 세워볼 생각이다. 지금까지 다녀왔던 긴 여행 대부분 준비 기간이 3년이었다. 이번 여행도 경비를 마련하고 오토바이 정비하는 법을 배우고…. 준비하는데 3년이 걸렸다. 지천명이 되면 오토바이를 두고 자전거로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는 게 꿈이다. 자전거 여행에 대한 영감은 우랄 산맥을 넘다 만난 다이스케 씨에게 얻었다. 그는 3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여행했고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가 요트로 다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길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모든 걸 갖추고 떠난 이가 없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고, 기회가 왔을 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을 뿐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책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여행에서 배우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고,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호기심이 아직 남았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나의 스승이었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이 사라지는 순간 더는 여행을 꿈꾸지 않을 것이다.여행을 다녀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 분들 중에 남형주 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형주 씨에 대해선 지난 1월 22일자 연재글에 동해항까지 마중 나온 일로 짧게 언급하기도 했다. 형주 씨를 처음 만난 건 2017년 여름이었고, 졸저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을 읽었다며 파주에서 찾아왔었다. 그렇게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인연으로 성수공고에서 진행됐던 오토바이 정비 수업도 함께 듣고, 형주 씨가 운영하는 펜션에서 북토크도 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책방을 찾아 여행하는 이야기를 누가 재밌게 읽어줄까 했었는데, 형주 씨 한 사람 덕분에 그 걱정을 덜었었다. 이태준 선생은 “목전에는 독자가 적어도 좋다. 아니 한 사람도 없어도 슬플 것이 없다”고 썼지만 그건 거짓말에 가깝다. 읽는 이 없는 글을 쓴다는 건 고단하고 슬픈 일이다.형주 씨는 내게 소중한 친구이자 독자였다. 여행기도 꼬박꼬박 읽고 있다며 연락했었다. 그런 형주 씨가 사고로 지난 5월 세상을 떠났다. 조만간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나겠다고, 지금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연락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었다. 형주 씨의 소식을 듣고 인생은 짧고 덧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떠났다 돌아오고 누군가에겐 꿈으로 남았을 뿐이다. 불공평한 일이다. 꿈이 있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길을 가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 형주 씨를 떠올리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7개월 동안 서른한 번의 소중한 지면을 내준 경북매일과 부족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끝

2020-07-28

종택 정신 상징하는 누마루 사랑채의 ‘충효고가(忠孝古家)’

충과 효는 빛바랜 전통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최소의 단위가 가족이라면 최대의 단위가 국가이다. 그 국가를 지탱하는 것도 가족과 사회이고 국가는 가족과 사회를 보호하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충과 효의 갈림길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가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원주 변씨들의 충과 효를 실천한 안동 동호정과 간재 종택을 살펴보자.#. 원주 변씨 시조 변안렬과 굴불가“내 가슴에 구멍 뚫어 동아줄로 길고 길게 메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감키고 찢길망정/ 임 향한 그 높은 뜻을 내 뉘라서 굽힐 소냐.”“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년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앞 노래는 대은 변안렬(1334~1390)의 불굴가(不屈歌)이고 뒷 노래는 너무나 유명한 포은 정몽주(1337~1392)의 단심가(丹心歌)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게 제국을 건설한 몽고가 세운 원나라에 고려는 부마국으로 90년을 넘게 이어오면서 고려왕은 원나라에 불모로 있다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고려왕이 된다. 그래서 충숙, 충혜, 충렬 등 7명의 ‘충’자가 붙는 고려왕들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다. 공민왕(1330~1374)은 충혜왕 때 원나라로 가서(몽고 이름 백안테무르) 위왕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고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을 폐하고 왕이 되었다. 변안렬은 중국 심양 출신으로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고려로 올 때 호위해와 원주 변씨 시조가 된다. 고려에 귀화해서는 홍건적을 물리치고 운봉에서는 이성계와 왜구를 격퇴하고 위화도회군 때는 이성계의 부장으로 함께했다.변안렬은 정몽주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개혁은 찬성했으나 왕조를 무너뜨리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는 동의할 수 없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하여가(何如歌)로 마음을 떠본 이방원(태종)의 노래에 고려에 충성하겠다는 뜻을 정몽주는 직설적 은유의 표현이라면 변안렬은 구체적 언어로 표출했던 것이다. 특히 이성계의 아들 무안대군 이방번은 사위가 되어 이성계와는 친사돈이 되지만 가치관은 달랐다. 최영의 생질 김저(?~1389)는 여주에 폐위되어있던 우왕으로부터 이성계를 죽이라는 밀명을 받고 곽충보와 팔관회 참석 날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는 이성계에게 밀고하여 27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된다. 이때 변안렬도 연관되어 처형당한다. 정몽주와 이색, 이숭인, 사위 이방번이 슬픔의 제문을 짓는다. 이성계도 변안렬을 죽이기는 했으나 뒤에 사면하고 자손들에게는 벼슬을 준다. 조선 건국 뒤 변안렬의 아들 변이는 도총제, 손자 변상복은 정종의 부마, 변상복의 조카 변효순은 태종의 부마가 된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고려의 삼은(三隱)에, 대은 변안렬과 도은 이숭인을 포함하여 고려에 충성한 오은(五隱)으로 불린다. 변안렬의 충절은 정몽주에 뒤지지 않으나 역사에 크게 빛나지 않은 것은 무보다 문을 숭상하는 전통의 원인도 있을 것이다.이런 무인기질은 남호 변협(1528~1590)과 변양걸(1546~1610)이 이어받았는지 변협은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고 을미왜변 때 왜구를 격파하여 장흥부사, 제주목사, 포도대장, 공조판서가 된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지옥의 세상이었다. 왜군의 살육도 문제지만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는데 구원온 명나라 군인들의 추태도 극에 달해 종로에서 술 취한 명나라 군졸이 토해낸 음식물을 굶주린 백성들이 게걸스럽게 핥아 먹었다. 명나라 군인들은 조선의 벼슬아치들을 능멸해도 대응하지 못하고 낙오병들이 때지어 다니면서 난동부리는 것을 무과에 급제한 변양걸이 막아내 훈련대장으로 복직되고 임진왜란 때 강화도를 지킨 공을 세웠고, 길주목사, 순천부사, 제주목사, 충청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동호 변영청과 동호정원주 변씨가 안동 서후면 금계리에 정착한 것은 변안렬의 6대손 변광이 안동 권씨 권철경의 사위가 되면서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주로 처가살이 하면서 그곳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큰아들 동호 변영청(1516~1580)은 금계에 살면서 동호파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셋째아들 변영순(1523~?)은 봉화 거촌으로 이사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수온당 종택 등으로 이어왔다.동호 변영청은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총명하여 주위의 주목을 받았고 명종(재위1545~1567)이 등극할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다. 주로 언관 등의 일을 보다 뒤에 남원부사, 대구부사, 청송부사 등의 외직을 보내면서 선정을 베풀고 청렴한 선비의 삶으로 살았다. 동호정(東湖亭)은 1551년(명종6년) 어린 명종을 수렴청정 하던 문정왕후의 친정 윤씨들의 전횡을 강한 어조로 상소하여 파직당하고 낙향한다. 처가가 있는 안동 동쪽 법흥리 고성이씨 임청각 언덕 낙동강이 보이는 곳에 동호정을 짓고 자신의 호도 동호라 한다. 이보다 19년 전인 1532년 중종(1506~1544)의 사돈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당한 회재 이언적(1491~1553)도 고향 경주에 와서 나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獨樂堂)을 짓는다. 독락당은 송나라 신종 때 급진적 개혁가 왕안석(1021~1086)의 신법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사마광(1019~1086)이 스스로 퇴임하고 낙향하여 독락원을 지었듯이, 회재도 독락원을 그리며 지었을 것이다. 동호 변영청도 북송의 인종 때 곽황후 폐립문제로 재상 여이간과 대립하다 쫓겨난 범중엄((989~1052)이 동정호에 ‘등악양루기’의 문구를 상기하면서 낙동강가에 동호정을 지었을 것이다. 동정호는 호남성에 있는 중국 최대의 호수로 중국의 내노라 하는 시인묵객들은 자신의 포부를 쏟아내었다. 시성 두보(712~770)도 ‘등악양루’시에서“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물에 떠있구나(乾坤日夜浮)”로 노래했고, 범중엄의 ‘등악양루기’의 마지막 구절 “천하 사람들이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先天下之憂而憂),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후에야 즐거워한다(後天下之樂而樂歟).”의 마지막 구절은 모든 관료들이 가슴에 새겨들어야 할 명구다. 그래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중국 문명의 보배 같은 정신유산으로 범중엄을 유사 이래 천하 최고의 일류급 인물이라고 극찬했던 것이다.동호 변영청이 죽자 임청각 처가에 살던 가족들은 선조의 터전이었던 서후 금계로 왔고 동호정도 퇴락하였다. 후손들이 선조의 자취를 보존하고자 1926년 후손들이 옛 터전금계로 옮겨지은 동호정을 찾았다. 학봉종택 건너 마을 산언덕에 있었다. 서산에 지는 햇살마냥 사람 떠난 동호정은 말없이 서 있었다.#. 간재 종택의 충과 효와 간재정동호정에서 대각선 건너편에 있는 간재 종택은 몇 달째 안동에 오면서 올해만 세 번째 찾았다. 언제나 차분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간재의 11대 주영숙 종부와 변성렬 종손이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 종택 입구 연 밭 위에 거문고소리에 학이 춤을 추는 금학정 정자는 근래에 세웠고 그 앞에 소나무 군상들이 정자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다른 종택과는 다르게 충과 효를 상징하는 정려각과 홍살문이 시선을 끈다. 간재 변중일(1575~1660)은 동호 변영청의 손자로 효심이 남달라 임진왜란 때 병든 조모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지극한 효심에 감동 받은 왜병이 병간호 잘하라며 다른 왜병이 해치지 못하게 징표로 칼을 주고 간다. 그래서 하늘이 내린 효자로 칭송받았다. 군량미 100석을 상주 진영으로 보내고 18세의 어린나이에 형 변희일과 곽재우 의병장 아래서 왜적과 싸웠고 정유재란 때도 의병으로 왜적과 싸워 충과 효를 실천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동쪽언덕에 검소한 간재정을 짓고 간재기를 쓴다. 사람을 평가할 때 입체적으로 분석해야 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 알려면 기문을 보면 알 수 있다.다산 정약용은 수오재기에서, 갈암 이현일은 갈암기에서, 간재는 간재기를 통해서 자신의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나타낸다. “일찍이 군자의 도는 중도(中道)로 가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중도는 성덕(成德)이 아니면 할 수 없으나 치우치면 지향하는 사람이 미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감히 성덕자가 될 수 있는 것을 바라지 않지만 또한 지향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간(簡)에서 뜻을 취한 까닭이 어찌 중(中)을 버리고 치우침에서 취한 것이겠는가로 자신의 뜻을 삼았다.종택의 본채와 이어진 누마루 사랑채는 예서로 묵직하게 쓴 충효고가(忠孝古家)가 간재 종택의 정신을 상징한다. 본체의 대들보가 자연스런 멋은 좋은데 너무 굴곡이 급반전하여 악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집 뒤에 불천위 위폐를 모신 사당을 둘러보고 외따로 떨어진 간재정으로 갔다. 백일홍이 충과 효를 실천했던 선비의 정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 간재정도 간재가 소박하게 지어 거문고를 곁에 두고 학문하면서 강학을 하던 곳이었는데 후손들이 줄여서 지은 것인데 단정한 맛이 난다.현대사회는 개인단위로 삶이 형성되어 있어 집안과 여러 문중이 함께 모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간재 종부와 종손이 구심점이 되어 매년 8월이면 9녀2남의 가족, 친지들과 외손, 안동의 여러 문중 분들을 모시고 만남으로 정을 쌓고 음식으로 기쁨을 주고받으며 화합하는 ‘열친회(熱親會)’는 본받을만하고 칭찬받아 마땅하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7-28

경이로운 아름다움 그 자체… 세계의 마음을 사로잡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중년들 중 경주에 관한 추억 한 조각 없는 사람이 있을까?분명 없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박철화 역시 마찬가지. 그는 1981년 경주 수학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서라벌의 보물’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목했다. 신라와 신라인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원고를 아래 싣는다.필자인 박철화는 서울대 불문과와 프랑스 파리 8대학·10대학에 공부했다. /편집자 주고교 2학년 가을. 내가 경주 수학여행을 가기로 한 것은 불국사가 아니고 순전히 바다 때문이었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강원도 내륙 도시 춘천에서 나고 자랐기에 그때까지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사진을 통해서나 불과 몇 달 전 시작한 칼라TV 방송에서 간접적으로 파란 바다를 보긴 했다.태어나서 내내 온 사방을 둘러싼 산을 보며 자란 내게 바다는 놀라우리만큼 단순하고 명쾌한 풍경이었다. 상당한 시각적 충격이었는지 그 풍경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당시 감기 끝물에다 장염에 시달리던 내가 약을 복용하면서까지 수학여행에 참여하기로 한 이유는 그것이었다.가는 길은 지루했고, 중간에 들른 장소들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다만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경주와 신라의 문화에 대한 선생님들의 소개가 있었다. 하지만 10대 후반 소년들에게 그 말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알에서 사람이 태어나는 신비한 설화나, 하얀 피를 뿌리며 순교하여 이 땅에 불교를 받아들이는 전기를 마련했고, 그 불교문화의 찬란한 중심지가 바로 경주여서, 이번 수학여행의 목표가 그런 유적들을 둘러보는 것이라는 이야기 등등.그런데 대체 그게 시커먼 교복을 입고 한 반에 70명 넘게 구겨 앉아 있다가 풀려난 우리들의 청춘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떼로 몸을 뒤틀며 우리는 저녁 무렵 경주에 도착했고 여관에 짐을 풀었다. 첫날은 경주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불국사를 거쳐 감포 문무대왕릉과 울산 조선소 탐방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10대 후반의 고삐 풀린 청춘들이란 어디서나 본능적으로 이성을 찾아간다. 좁은 버스 안에서 몸을 비비꼬다가 간신히 풀려난 우리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엇비슷한 시간에 버스에서 내린, 건너편 여관에 묵을 여고생들이었다. 전주에서 왔다는 그 여고생들에게 친구들은 선생님들 눈을 피해 수작을 걸었다. 키가 180cm 가까웠던 나는 얼굴마담 노릇하느라 앞에 섰고 ‘말빨’ 좋은 친구가 곁에서 여학생과의 약속을 받아냈다. 경주의 첫인상은 그러했다.문제는 내가 저녁을 먹자마자 약을 먹고 인솔교사 방에서 잠이 들어버린 거였다. 그 사이 친구들은 선생님들의 철벽 방어를 뚫고 몇몇이 몰래 나가서 여학생들을 만났는데, ‘신라의 달밤’이 신통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컨디션을 회복하고 나타난 내게 책임지라며 투덜거린 것을 보면. 그 가운데 한 여학생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펜팔 요청 쪽지를 건네받았지만 그걸 간직하지 않았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 온 여행이었다. 아침 먹고 올라온 불국사 경내 어딘가에서 그 쪽지를 버렸다.그것은 황홀한 아름다움에 대한 경배였다. 나는 불교도가 아니어서 절에 간 경험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버지가 재직한 관할 면의 소양댐 안 청평사 정도에 가봤을 뿐이다. 그런 내 눈에 불국사와 석굴암은 놀라움 자체였다. 자연과 인위, 무심함과 정교함, 화려함과 절제, 위엄과 겸손까지…. 무엇 하나 보태고 뺄 것이 없었다. 짧은 인생 경험으로 보기에도 가장 완벽한 미의 원형이었다. 내가 그 여학생의 쪽지를 버렸다는 말은 그러니 수정되어야 한다. 정신이 팔려서 아예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는 기억조차 못하고 잃어버렸다. 석굴암을 나와 부지런히 혼자 다시 찾아가 둘러본 석가탑과 다보탑, 그리고 불국사를 품고 있는 산부터 경주의 모든 것이 지워지지 않는 의미가 된 것이다.그날 아침 이후로 수학여행의 의미가 바뀌었다. 바다가 뒷전이었다. 물론 처음 본 바다가 놀랍지 않을 리 없다. 모래, 바다, 하늘로 선이 그러진 3등분의 세계는 굳이 표현하자면 미니멀리즘의 극치였고,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추상회화의 원조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숨결이 들어 있지 않다. 인공낙원의 향취가 없는 것이다.그것보다는 가는 길에 본 감은사지 석탑 주변 쇠락한 삶의 자취, 인위적 흔적의 황량함이 더 인상적이었다. 감포 끝자락에서 본 문무대왕릉도 놀랍긴 했지만 이미 불국사와 석굴암에 마음을 빼앗긴 내게는 역사적 사연 가득한 자연물 정도였다. 그 점은 경주를 지나 울산 조선소에 가서 본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능가하는 배가 품은 산업화의 근대문명을 마주하면서 이번에는 그 과도한 인위에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불국사와 석굴암은 최선의 조화를 이룬 이상적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때로 생각한다. 예술적이지 않은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내가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왜 문학과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물론 타고난 기질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 기질도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그토록 두드러지게 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돌이켜보면 1981년의 수학여행은 내게 아름다움에 대한 원초적 동경을 심어준 계기가 아니었을까? 기질이 화약이라면, 불국사와 석굴암과의 만남은 영혼의 뇌관이었던 셈이다. 그 뒤로 경주는 늘 내 영혼의 처소 깊숙한 곳에 머물다 호출되곤 했다. 박물관에서 전시를 보다가, 책을 뒤적이다가 경주가 나오면 나는 곧장 그 수학여행의 아침으로 되돌아가곤 한다.프랑스문학을 전공한 터라 대학을 마치고 유럽에서 몇 년 더 밀린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물렀다. 현대시가 전공이었지만 미술과의 관계를 다루는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핑계로 유럽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물론 유럽은 놀라운 곳이다. 근대문명을 만든 주인공들답게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 것을 능가하는 문화유산이 곳곳에 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고 내 핏속에는 우리의 역사와 자연에서 우러난 개별적 미의 원형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휘황한 문화유산 앞에서도 나는 기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한가운데에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지금이야 많이 알려졌지만 1990년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한국은 동아시아 한구석의 크게 의미 없는 존재였다. 중국의 스케일과 일본의 경제력과 정교함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거의 몰랐다. 우리가 한글이라는 독자적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에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도 가끔 한국을 궁금해하며 가보려는 외국인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경주를 권했다. 내가 박가여서 신라 왕족의 후예라는 허풍 섞인 이야기까지 얹어주면 순진한 그들은 마냥 좋아했다. 그리고 돌아온 반응은 놀랍다는 것이었다.당시 한국까지 갈 정도면 아시아 문화와 예술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유럽인이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라는 찬사가 거의 다였다. 경주 남산의 석불들, 대릉원, 곳곳의 폐사지들…. 그 가운데서도 압권은 불국사와 석굴암이었다. 유럽 문명의 후예로 그들 나름의 미적 기준을 갖고 있는 개성 중시의 외국인들에게도 불국사와 석굴암은 부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들의 반응은 단순한 이국 취향에 머물지 않았다.문학평론가 박철화.신라 천년왕국이 빚어낸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만나는 이상적 아름다움의 뚜렷한 증거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유럽에서 돌아온 뒤로 여러 번 경주에 갔다. 보문단지의 벚꽃, 감포 문무대왕릉, 찰주에 보름달이 걸리던 심야의 감은사지, 용장사곡 삼층석탑처럼 남산에 숨어 있듯 남은 다 닳은 석탑과 석불들….거기서 쇠락한 문화의 쓸쓸함에 전염되기도 했지만 나는 늘 불국사와 석굴암의 정돈된 아름다움, 인간의 세속적 삶을 넘어 종교의 영원한 성스러움이 번져나가는 그 자리의 끈질김과 단단함에서 영혼의 기운을 얻곤 했다.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거의 40년 전 아침, 불국사 마당에서 듣던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2020-07-23

“때 묻지 않은 청정자원 바탕, 영양군 새 미래 100년 준비”

‘살고 싶은 영양! 찾고 싶은 영양!’ 구태를 벗고 새로운 영양을 만들어 달라는 군민의 염원에 힘입어 영양군수 입성에 성공한 오도창 군수는 군민이 군수라는 군정운영 철학과 소통 행정으로 군민 모두의 행복이 있는 영양을 만들겠다는 군정지표로 민선 7기 영양군정을 이끌며 취임 2주년을 맞았다.오도창 군수는 “당장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성과보다는 군민이 주인 되는 군정의 근본을 바로 세우고 영양의 문제점과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을 해결해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일에 노력한 시간이었다”고 전반기를 평가하고 “남은 2년도 군민을 섬기고 소통하는 열린 행정으로 영양군의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혔다민선7기 취임 2주년을 맞은 오도창 영양군수에게 지난 2년간의 소회와 함께 남은 2년 동안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초선 군수로 군민들과 2년을 보냈는데 소감은.△초선 군수로 취임을 했을 때 많은 분들의 우려와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2년의 시간 속에서 제 자신도 강해졌고 군민들의 시선도 기대와 격려로 바뀌었다. 다소 미숙한 부분으로 말미암아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 역시 하나의 소중한 경험이라 생각한다. 1만7천여명의 군민들을 지켜내야 하는 군수라는 무거운 책임을 결코 짐이라고 생각하며 외면하려는 생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자란 고향에서 모든 이웃과 가족들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영양을 만들자는 고민만 있었을 뿐이다. 이제 2년의 시간이 지나 반환점을 돌았다.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멀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우리 앞에 놓인 어려운 숙제들을 함께 이겨나가길 기대한다.-민선7기 전반기 군수께서 생각하는 주요 성과가 있다면?△지난 2년 동안 대외적인 평가에서 ‘2019 대한민국 뉴리더 지방자치부문 대상’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대내적으로도 영양군 최초 예산 3천억 돌파, 영양산나물축제 역대 최고 인원인 16만명 기록, 생활민원 바로처리반 실시 및 어르신 무료 목욕상품권 지급, 장보기 배송서비스 실시, 국립멸종위기종복원센터 개원, 농산물품질관리원 경북지원 영양분소 개소, 새로운 영양군 농산물 공동브랜드인 ‘영양군 美듬직’ 확정, 영양고추 최고가격 대우, 군정알리미 시스템 구축, LPG배관망지원사업 완료, 영양소방서 신설 유치 확정 등과 같은 성과를 거뒀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지난 2년 군민들과 함께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자부한다.-민선 7기에서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이유는.△변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재 영양이 처한 현실 속에서 모든 군민들의 행복을 위한 토대를 만들어 나가자는 의미다.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보다는 퇴보하는 현 실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만들어져야 한다. 갈라진 민심으로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를 위한 첫 걸음 그것이 바로 하나된 영양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군민들은 2년의 시간 속에서 보여주었다. 할 수 있다는 모습으로 서로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것이 변화라고 생각한다.-저출산고령화가 지속되면서 다른 지자체와 같은 고민에 빠져 있을텐데…. 인구 2만명 회복을 위해 추진하는 핵심방안이 있다면.△인구 문제는 모든 자치단체의 고민이다. 저출산 고령화의 추세는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그렇기에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출산장려금이며 다양한 지원방안이 실시됐지만 인구 감소 추세는 빨라지고 있다. 그래서 영양군도 보다 현실적인 접근에 나섰으며, 이를 위해 지난해 군민들의 뜻을 모으는 자리를 마련했다. 아울러 ‘영양군 인구증가정책 지원조례’를 제정하고 전입 축하금 지원으로 인구감소 문제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새둥지마을 조성사업과 소방서 신설, 귀농귀촌 장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여건 개선 등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돌파하고자 한다.-무엇보다 인구 감소를 위한 맞춤형 정책 추진이 절실하다. 민선 7기에서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서비스 제공에 나섰다고 했다. 어떤 내용인가.△올해 안으로 인구증대를 위한 기본인프라 구축에 어느 정도 성과가 있을 것이다. 출산과 양육의 정책을 총괄하는 민간공동 인구지킴이 대응센터와 지역 아동들의 건전한 성장과 발달을 도울 공립형 지역아동센터, 청소년들의 소중한 꿈과 희망을 키우는 청소년 수련관, 어르신들의 참여와 소통의 공간인 노인복지관이 연내에 완공된다. 다양한 계층과 세대가 지역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기반 구축으로 영양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지나온 시간 못지않게 앞으로 남은 기간도 중요하다. 어떤 계획이 있는지.△남은 기간 동안 핵심 키워드는 재생, 환경, 미래, 소통, 혁신으로 말하고 싶다. 새롭게 짓는 건물과 집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과의 조화를 이루며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진행된다. 그것은 영양다움이 살아있는 도시의 변화를 재생이라는 단어로 재탄생될 것이며, 모두가 당연하게 누리는 자연이 영양에서는 차별화된 자원으로 만들어 질 것이다. 영양에서만 느끼고 즐기며 만끽할 수 있는 청정 공기와 자작나무숲이 대표적으로 거대한 자연에서 만들어지는 영양의 자연이 영양의 미래를 보여 줄 것이며 소멸 위험에 처해진 영양에도 새로운 탈출구가 만들어 질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특히 아직은 멀지만 조금씩 한 발짝 다가가는 영양의 발걸음이 올해 연말이면 시작을 알리게 된다. 국도31호선 4차선 선형 개량을 위한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게 되면 영양도 이제는 마음속에서부터 가깝다는 느낌이 들것이다.-끝으로 군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사랑하는 영양군민 여러분!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의 행복한 삶을 위해 많은 것들을 이루고자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전반기 영양군정을 마무리하며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고 ‘꾸준한 오늘이 있기에 내일은 무한하다’는 말처럼 여러분들의 무한한 내일을 위해 남은 기간 더욱 신중하게 여러분들을 위한 군정을 펼쳐나가겠다.또한 저를 비롯한 500여명의 공직자는 ‘마부위침(磨斧爲針·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의 정신으로 농민도 부자 되는 영양, 교육과 문화가 있는 영양, 더불어 함께 가는 영양, 대한민국 대표 웰니스 산림관광지 영양 실현을 바탕으로 모두가 부자 되는 영양을 만들어 나가는 동시에 행정의 신뢰도와 만족도를 높여 나갈 것을 분명히 약속드린다.코로나19라는 세계적 위기 속에서도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나눔을 실천하고 ‘같이의 가치, 함께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여러분 모두 수고가 많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다.앞으로도 영양군정을 향한 군민 여러분들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린다./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2020-07-23

도전하는 자만이 성공… ‘경영·봉사’ 두 토끼를 잡다

정영만 제이아그로(주) 대표의 인생을 바꾼 것은 농우바이오라는 회사에 취직을 하면서였다. 이 회사는 종자 육종 및 육성연구를 하는 회사로 우리나라에서는 이 분야에서 굴지의 회사이다. 경남 의령에서 한지협동조합을 설립해서 한지를 생산하고 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생각했던 그의 인생은 이 회사에 취직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농우바이오에서는 그를 기업체 간부 및 사회적 리더를 양성하는 일본의 후즈노미야 양성학교에 유학을 보내 주었다. 그에게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37살 때 농우바이오의 총괄본부장으로 취임했다. 그 회사에 다니는 동안 그는 외국의 선진문물을 견학하면서 안목을 넓혔고, 후즈노미야 양성학교에서 배운 리더십을 통해 빠르게 리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그러다가 사업을 하기 위해 그 회사를 퇴직했다. 농우바이오와 겹치는 종자육종 사업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였다. 자신을 키운 회사의 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회사를 차린다는 것은 그로서도 허용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 윤리였다. 그러나 농사를 떠난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가 그때까지 배워 온 것도 농사와 관련된 일이었다. 고민을 하던 그는 시골의 땅이 농약과 화학비료 때문에 생명을 잃어가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 땅을 되살릴 결심을 했다. 땅이 살아야 지속가능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농업인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정부나 농업인은 생산의 극대화에만 치우쳐 땅이 죽어가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친환경에 주목했다.식물영양물질과 특수기능성 식물 생장 및 보호물질을 공급하는 기능성 농업제제 전문기업인 제이아그로(주)는 그렇게 창업되었다. 농업 생산량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던 해충들을 농약으로 손쉽게 해결하던 처방학이 만연해 있던 기존의 풍토에서 식물을 어릴 때부터 강하고 단단하게 키워 병 발생을 줄이고 수확량까지 늘릴 수 있는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예방학이 필요했다. 화학비료와 인체에 위험한 농약을 줄이는 것은 우선 땅을 살리고 농업인을 살리는 일이었다. 화학비료는 식물을 부쩍부쩍 자라게 해주고 농약은 온갖 해충을 박멸해 주었지만 그 대신 땅과 농업인은 병들어 가고 있었다.제이아그로(주)는 미국의 스톨러사, 이탈리아의 발아그로사, 일본의 하야시사 등 세계를 대표하는 농업제제 회사들과 기술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친환경 최첨단의 제제들을 농업인들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농업인들의 삶과 가까이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비록 회사에서 생산한 제품을 팔아야 하지만 당장 눈앞의 매출에만 신경 쓰기보다는 진정으로 농업인에게 도움이 되는 제품을 개발하고 공급해야 하는 것은 이미 농우바이오에서 배운 철학이었다. 정 대표 역시 그때 배운 마인드로 농업인이 먼저 사는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했다. 그 결과 그의 회사는 우리나라 농업회사 중에서 특허를 가장 많이 보유한 회사가 되었다. 농업인들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미네랄이 풍부한 기능성 고급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은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수입농산물을 이겨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러한 실천 가능한 친환경농업 이론을 개발한 공로로 2011년 친환경 농업유공자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또한 지식경영인 대상과 대한민국사회봉사대상을 수상하면서 정 대표는 선도적인 농업전문경영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회사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정 대표는 사회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농대학생과 다문화가정을 지원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정 대표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스톨러제이 재단에서도 지원을 해왔다.“봉사가 계속되면서 제일 걱정되는 게 봉사의 진실성을 잃고 겉멋에 빠져 들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하면 그 멋 때문에 원래의 의미를 잃게 되거든요.”그리고 그는 회사 직원과의 나눔에 나섰다. 회사는 자신 혼자 키운 것이 아니라 직원 모두의 힘으로 키운 것이기 때문에 성과도 나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자식이 회사를 물려받았을 때를 대비해 회사 사규를 개정했다. 농업 분야의 회사를 둘러보면 창업주의 2세가 회사를 물려받아 성공한 회사는 거의 없었다. 이것을 보면서 그는 회사 사규를 아예 개정해 버렸다.“내 자식들은 내가 제시하는 조건에 동의해야만 주식을 받을 수 있어요.”어떤 조건인지 궁금했지만 회사의 운영에 대한 문제라서 그것까지는 묻지 않았다. 다만 그의 표정으로 봐서 자식이 그 회사를 쉽게 물려받아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주와 직원의 관계 또한 사규 개정을 통해 보완했다. 정 대표는 주주와 직원이 평등한 관계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를 원했다. 그는 회사 안에서 작은 혁명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이면서 직원 모두의 회사여야 한다는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대화 도중 그가 말한 인디언 스틱은 흥미로웠다.“인디언들은 부족회의를 할 때 스틱을 받은 1인만 발언을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권위주의 문화가 강하고 토론문화가 발달되지 않아서 남의 발언 도중에 끼어드는 경우가 흔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회의 때 이 인디언 스틱을 활용합니다. 인디언 스틱을 가진 사람이 발언하는 도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일체 끼어들 수가 없어요. 어떠한 불평도, 항의도,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 거죠. 인디언 스틱은 말하는 사람의 권리를 보장해 주고, 다른 사람들은 듣는 훈련을 하는 거죠. 그러면 인디언 스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나는 이 제도가 참 좋다고 생각해요.”회사나 단체는 윗사람의 발언이 길어지고 아랫사람의 발언은 종종 중간에서 제지를 당하는데, 그러다보면 충분한 의견 개진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말만으로 그가 얼마나 직원들이나 단체 구성원들을 존중하는지 알 수 있었다.정 대표는 젊은 시절부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현지에서 100여 차례 이상 체류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그 안목은 회사 경영에서도 드러나지만 그의 사회생활 이력에서도 드러난다. 대구경찰청 외사자문위원장을 하면서 다문화가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은 부모의 모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앞으로 이 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낼 것이라고 본다.정 대표는 경찰청 외사협력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알게 된 지인들을 통해 2014년 자유총연맹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자유총연맹은 건전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정치적 중립을 선언한 단체로 그는 수석부회장을 맡으면서 이 단체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2019년 12월 대구지부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 정 대표는 지부의 재정적인 안정과 회원들의 고령화 탈피를 최우선 과제로 꼽으며 조직 개편을 통해 ‘다문화가정 끌어안기 사업’과 회원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유튜브 아카데미’를 개설해 평생 교육의 장을 마련하였다.이미 봉사에는 어느 정도 이력이 쌓인지라 자유총연맹 회장의 역할도 그는 무겁게 받아들인다.“통일 준비는 인적, 물적 준비가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작은 일부터 실천할 수 있어야 해요. 국가기념일이 되면 태극기 달기 캠페인부터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마중물 사업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안보와 통일에 대한 작은 일을 하려고 해요.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취미교실, 장학사업, 김장 나눔, 고추장 나눔사업 등은 굳이 국가가 아니라도 시민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이죠. 한반도 숲 가꾸기 운동도 추진하고 있는데 남북한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 좀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사업의 성공과 사회단체장의 역할은 맥을 같이한다. 한 번 성공해 본 사람이 다른 성공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가 자유총연맹에 가진 애착을 보면서 머지않아 그 단체 또한 그의 회사처럼 비약적인 성과를 거두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졌다. ‘도전하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격언이 생각난다. /글 천영애

2020-07-22

고령군, 지역 특산물 경쟁력 강화·효과적 마케팅에 총력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 지방자치단체 대부분은 한두 가지의 특산물을 가지고 있다. 특산물의 경쟁력 강화와 효과적인 마케팅은 지역 경제 활성화와도 맞닿아 있기에 각 지자체들은 내세워 자랑할 만한 특산물의 적극적 육성과 브랜드 강화에 힘을 쏟는다.수박과 딸기, 감자와 멜론 등 비교적 다양한 특산물을 생산해내는 고령군 역시 이런 흐름을 잘 알고 있기에, 판로 확보와 홍보, 품질 개량과 재배 농민 지원에 노력 중이다. 여기에 더해 농업 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귀농인을 위한 다양한 정책도 펼쳐나가고 있다.청정한 가야산이 선물한 맑은 물과 낙동강이 만들어낸 사질양토라는 좋은 조건 아래에서 대표적 특산물이라 할 수박, 딸기, 감자, 멜론 등 우수 농산물의 경쟁력을 높이고, 마케팅에 고심하고 있는 고령군의 오늘을 점검하고 내일을 예측해본다.◆ 규격화와 품질 균일화 통해 새로운 시장 개척고령군은 농산물의 안정적 판로 확보와 산지 마케팅 경쟁력 및 교섭력을 높이기 위해 지역 농협을 이용한 통합마케팅을 추진 중이다. 고령군 APC, 다산농협 APC, 쌍림농협 APC 등 산지유통센터를 통해 규격화와 품질 균일화를 이루고,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마케팅 행사는 기본이다. 산지유통 기반시설 확충과 유통조직 지원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임은 물론이다.또 농협 외 공동선별을 하는 생산자 단체에도 공동선별비를 지원하고, 지게차와 선별기 등의 유통장비도 지원한다. GAP 안전성 검사와 생산단계 안전성 검사로 농산물의 안전을 확보함은 기본이다. 특산물을 돋보이게 할 포장재 디자인 개발과 택배에 적합한 포장재 제작도 지원함으로써 유통·마케팅의 효율성도 높이고 있다.그간 고령군은 고령딸기, 우곡수박, 성산멜론, 개진감자를 지역 특화품목으로 육성하기 위해 고품질 농·특산물 생산기반을 조성해왔다. 관련 사업도 여러 개 진행했다. 시설원예 철재, 연질강화필름, 보온커튼, 보온덮개, 측창개폐기, 환풍기, 내부순환기, 양액재배시설 등도 지원했다. 이는 농업 관련 시설 현대화로 이어졌다. 땅심 회복, 수정벌 지원으로 친환경 농산물 재배 환경도 마련됐다. 더불어 각 품목별 기술대학 운영과 컨설팅으로 재배기술도 향상됐다.생산 과잉과 경쟁 심화는 농산물의 가격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빠르게 변화하는 농산물 소비 패턴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고령군은 단순히 고품질 농산물 생산만으로는 농가 소득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에 유통과 마케팅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그 실질적인 예가 농·특산물 홍보 및 직거래 활성화, 박람회와 축제 참가, 우곡수박·개진감자 직판장 운영 등이다.◆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고령 특산물이 되려면...특산물 브랜드 강화를 위해 고령군은 해외시장 개척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수출단지를 육성하고, 물류비와 해외 판촉행사 지원 등을 통해 러시아, 싱가포르, 미국, 대만, 베트남, 캄보디아 등으로 특산물 수출을 확대하고 있는 것. 앞으로는 더 많은 나라 사람들이 고령에서 재배된 수박과 딸기, 멜론과 감자를 맛보게 될 전망이다.최근 5년 사이 재배 면적이 2배 이상 늘어나 고령 농가의 주요 소득원으로 자리 잡은 양파와 마늘의 유통구조 개선에도 힘을 쏟고 있다. 2021년까지 각 지역농협마다 10억 원 이상이 투자돼 산지유통시설이 들어설 예정.농산물 소비시장이 재래시장과 대형 마트 위주에서 편의점, 온라인, TV홈쇼핑으로 바뀌고 있다. 젊은 소비자의 취향이 가격보다는 안전·품질·편의성 위주로 변화하는 중이다. 고령군은 이러한 시장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는 대응책 마련에도 고심하고 있다.현재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95% 이상이다. 이에 유튜브 등 SNS를 통한 마케팅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를 감안해 고령군은 ‘고령몰’을 통한 농산물 판매 증대와 SNS 홍보 강화에도 주력할 방침이다.유튜브는 지역의 우수 농산물을 홍보하고, 인터넷 쇼핑과의 연계가 용이한 효율적인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게 고령군의 판단이다. 소비자의 접근성을 높여 영상 시청과 구매가 즉각 연결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앞으로도 반가공, 소포장 선호 등 신세대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상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농가 교육과 조직화, APC시설 등 인프라 확충에 힘쓰고, 차별화된 마케팅으로 SNS를 통한 판로 확보에 적극 나서겠다”는 것이 고령군의 계획이다.지속가능한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후변화 대응 작물 개발로 미래농업의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발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 고령군은 이미 ICT 스마트 팜 생산시설 현대화와 6차 산업기반 조성으로 지역 농업의 활로 구축과 새로운 농가소득원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이를 위해 지역 특화품목 생산시설 개선과 경쟁력 제고를 위한 스마트팜 생산시설 현대화 사업, 새로운 소득 작목 생산과 노동력 절감시설 지원사업도 추진 중이다.또한 고품질 식량작물 기술 보급, 미생물 배양실 등 과학영농기반 구축, 작업환경 개선을 위한 ICT 융복합 스마트팜 시설 보급, 수경재배시설 현대화, 시설하우스 에너지 효율화 지원 등은 농업 경쟁력 강화와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낼 기반이 되고 있다.◆ 귀농인들의 안정적인 정착에 도움 주는 정책들고령군은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대가야농업기술대학도 운영하고 있다. 지역 농업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전문 농업경영인을 양성하는 과정을 개설해 새로운 농업기술 습득, 생산과 가공의 효율성 강화, 유통·체험·관광·판매·서비스 등 6차 산업 전반을 교육하고 있는 중이다.또 농가경영 진단·분석과 처방에 따른 맞춤형 교육 컨설팅을 통해 생리 장애, 병해충 방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알려줌으로써 새로운 소득원 개발에도 진력하고 있다.고령군은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조선 영조 때 현지 답사를 기초로 하여 저술한 지리서)에 소개될 만큼 ‘천혜의 조건을 갖춘 농촌’으로 알려졌다. 이를 증명하듯 예비 귀농 희망자 영농기초 교육과 재배기술 멘토·멘티 운영도 진행 중이다. 이런 노력은 귀농인들의 안정적 정착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그렇기에 고령에 뿌리를 내린 귀농인연합회 회원들은 주택 수리, 도색, LED 전등 교체, 독거노인 사랑나눔 봉사 등 재능기부로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다.최근엔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하는 2020년 일반농산어촌개발 공모사업에 고령군 2개 지구(금천지구·우곡면)가 선정돼 사업비 80억 원도 확보했다. 이는 고령군의 기초생활 인프라 확충과 경관개선사업 등에 투자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안림지구 배수개선사업’은 여름철 풍수해로부터 군민들의 안전을 지켜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고령군은 “농·특산물 경쟁력 강화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와 효율적 농가 지원, 농업 환경의 개선을 위한 노력은 앞으로도 멈춤 없이 지속될 것”이라고 약속했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0-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