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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국내 최장 ‘문경 단산 모노레일’ 개장… 짜릿한 힐링 곳곳에

문경시는 올해 1월 코로나19 확진자가 중국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하자 곧바로 비상방역대책반을 가동했다.정부의 대응보다 앞서 행정조직을 심각단계 대응체계로 전환하고,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해 코로나19 차단을 위한 각종 시책과 예방사업들을 선제적으로 추진 해 왔다.◇정부보다 앞선 코로나19 선제적 대응문경시는 감염병 초기단계부터 지역 내 병원 및 보건소 등 3곳에 선별진료소를 운영해 병원 내 전파를 막았다.시 보건소는 감염병 발생에 대비해 2015년 도내 보건소 최초로 음압진료실을 설치했으며, 카라반 음압진료실, 드라이브 스루 검사체계를 일찌감치 도입해 감염병 예방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왔다.또, 2억 원을 들여 선별진료소가 설치된 병원 2곳에 이동형 음압시설 4동을 추가 설치해 음압 병실 부족 및 병원 내 감염을 원천 차단토록 조치했다.사람의 이동이 많은 버스터미널, 공공청사, 문경새재를 비롯한 주요 관광지 등 전 지역에 걸쳐 대인소독기를 설치해 바이러스 이동을 차단했다.코로나19 확산 속 행정업무 공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부서 내 1/2 근무 및 임신부 등 재택근무를 실시했다.대면회의·보고를 대체한 영상회의를 진행하고 문경시립도서관 북 워킹 스루 서비스 등 대인 접촉을 최소화 했다.감염에 취약한 사회복지생활시설 25곳에 코호트 격리를 모범적으로 실시해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사회복지시설 내 감염병 전파도 막았다.사회복지시설에는 코로나19 예방 2단계 조치로 증상이 발견된 경우 즉시 격리할 수 있도록 재해재난예비비 1억8천만원을 투입해 이동형 음압기를 보급했으며, 외부로부터의 오염물질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의류소독기, 위생복까지 지원했다.교회 등 종교시설과 체육시설, 학원, PC방, 노래방 등 실내 시설들은 매일 담당 공무원을 지정해 소독 및 점검을 실시하고, 서로 간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 운동을 적극 전개해 코로나19에 시민들이 경각심을 가지도록 하고 동시에 감염병 퇴치에 온 힘을 쏟아왔다.◇시민 전수조사로 감염 조기 발견·차단공무원들은 인근 지자체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자 주말도 반납한 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나눠주며 마스크 쓰기와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을 펼쳤다.전 시민에 대한 발열 등 전수조사도 했다.전수조사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약 29%인 문경지역에서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노인들에게 코로나19 예방법과 진행사항을 안내하고, 1대 1로 소통하며 건강상태를 알려 주는 등 큰 힘이 됐다.학교의 개학이 연기되면서 PC방이나 노래방처럼 환기가 어렵고 밀집된 공간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늘어났다.이들은 활동반경이 넓어 코로나19에 감염될 경우 지역 내 슈퍼전파자가 될 우려가 높아 청소년층을 중점으로 집중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전국 최초 대인소독차 운영전국 최초로 코로나19 예방 및 확산 차단을 위해 지역아동센터, 청소년 문화의 집 등 아동·청소년시설과 시·읍면동의 각종 행사 시 대인소독차를 운영했다.대인소독차는 내구연한이 지난 문경시 42인승 관용버스를 구조변경해 대인소독기를 제작·설치 한 특수차량으로, 사용이 간편하고 이동이 용이하며 신발, 의복 등에 묻어 옮길 수 있는 세균, 바이러스를 사멸하는 등 감염원 차단에 효과를 얻었다.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는 어린이들에게는 지난 24일부터 격일제(1일 4개 아동센터)로 대인소독차를 우선 운영해 감염병 예방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지역아동센터는 지역사회 건전한 아동 육성을 위해 보호·교육·놀이 등 종합적인 아동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시는 10개 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다.◇공공시설·공공주택 승강기에 향균필름코로나19 교차 감염 예방을 위해 지난 17일부터 지역 내 공공시설, 공동주택의 전체 승강기 614대에 항균필름을 지원했다.항균필름은 바이러스와 감염균 서식을 어렵게 하는 구리(Cu) 성분이 함유돼 손끝 교차 감염 차단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항균필름을 간접 접촉 가능성이 높은 승강기 내 부착해 코로나19 감염 예방에 기여하고 있다.◇단산모노레일, 문경생태미로공원 개장코로나19의 여파로 지역 경제 및 관광산업이 위축되자 코로나19 이후를 대비한 관광시설 개장을 위해 철저한 방역 대책을 세웠다.방역을 확실하게 해 안전하게 관광하고 청정 문경에서 코로나19로 지친 몸을 달랬수 있게 했다.이로써 관광객들이 단산(956m)을 다시 즐겨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단산에 오르면 조령산, 백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와 수려한 바위산인 운달산과 주흘산을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시에 따르면 예산 100억원을 들여 문경새재 인근 문경읍 고요리 단산에 관광모노레일을 만들어 27일 개장했다.문경 단산 관광모노레일은 문경활공장이 위치한 정상까지 왕복 3.6km 구간에 설치된 국내 최장 산악모노레일이다.상·하부 승강장에서 8인승 모노레일 10대를 운영한다.하부 승강장에서 탑승해 가파른 레일을 따라 35분가량 달려 정상에 도착하면 백두대간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급경사에 암벽까지 오르내리는 구간 구간이 놀이기구 못지않은 짜릿함을 선사한다.모든 제어기는 이중화로 차량 정지 조건을 최소화하는 등 안전성 강화에 중점을 뒀으며, 상당한 기간 동안 다양한 시범운행으로 첫째도, 둘째도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준비했다.모노레일을 타고 해발 865m 정상에 오르면, 단산 숲속 캠핑장(16곳), 숲속 썰매장(6레일), 전망대, 산악 바이크 로드 등에서 즐길 수 있다.유아, 노인, 장애인까지 길이 200m, 폭 2.5m의 무장애 데크길을 걸으며 산 정상의 정취를 맛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이홍우 관광진흥과장은 “모노레일 10대가 무인 운행한다”며 “안정감과 승차감이 뛰어나고 냉·난방 시설까지 겸비했다”고 설명했다.고윤환 시장은 “문경새재 관광객을 문경읍으로 유입하고자 단산 모노레일을 설치했다”며 “더 많은 관광객이 찾아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0-04-27

하근찬 “우리가 겪은 전쟁을 증언하는 것이 문학적 사명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폭력의 세기’에서 “20세기는 전쟁과 혁명의 세기가 되었으며, 그러므로 전쟁과 혁명의 공통분모라고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폭력의 세기가 되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렌트의 말은 러일전쟁을 시작으로 하여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25, 베트남 전쟁 등을 20세기 내내 겪은 한국인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마지막 장면은집으로 돌아오던 두 부자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팔 하나가 없는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다리 하나가 없는 아들이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산 고등어를 손에 든 채 외나무다리를 건넌다.…우리가 겪은 전쟁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문학적 사명이라고 여긴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하근찬이다. 1931년에 태어난 하근찬은 “전쟁의 그늘 속에서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랐고, 또 꿈 많던 시절을 전쟁 때문에 괴로움으로 지샌 것만 같이 회상”된다면서, 자신의 작품들을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전쟁피해담”(‘전쟁의 아픔, 기타’, 산울림, 겨레, 1987, 4면)이라고 말하였다.하근찬이 전쟁에 대한 고발을 자신의 문학적 사명으로 여긴 이유는, 본인이 누구보다 큰 전쟁의 피해자라는 사실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아버지가 아무런 죄도 없이 반동으로 몰려 총살당하는 끔찍한 일을 경험하였으며, 본인도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국민방위군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겪은 하근찬은 6.25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그것은 사람이 만든 지옥이었다. 열아홉 살이던 나는 그때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전쟁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끝없는 절망을 느꼈었다.”(‘인간에 대한 끝없는 절망’, 내 안에 내가 있다, 엔터, 1997, 33면)고 6.25를 회고할 정도이다. 하근찬은 일제 말의 폭력도 나름대로 체험하였는데, 전주사범학교 1학년 때이던 1945년 4월부터 8월 15일까지 경험한 4개월여의 기숙사 생활을, “이른바 일본군국주의 교육의 맛”(‘과거와 현재의 오버랩’, 文藝, 1988년 여름호, 313면)을 실컷 보았던 때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전쟁피해담이라고 규정한 하근찬의 소설은 경북 영천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근찬은 1931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나 성장하다가 열 살 무렵 교사였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고향을 떠난다. 이후에는 교원임용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전북 지역에서 살다가, 1948년에 영천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면서 귀향한다. 이후 1956년에는 영천초등학교 동료교사와 결혼하여 영천에 신혼집을 마련하였으며,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수난이대’가 당선되었다는 소식도 영천에서 듣게 된다.고향을 떠나 있을 때에도 하근찬은 고향 영천에 대한 각별한 감정을 가졌던 것 같다. ‘진정한 고향은 마음 속에’라는 산문에서 6.25가 일어나기 한 두 해 전에 혼자서 고향에 갔을 때의 감상과 다짐을 밝히고 있는데, 그때 가슴 속에 고향에 대한 목마른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나중에 작가가 되면 “반드시 경상도 사투리를 쓰리라고 다짐했다.”(‘내 안에 내가 있다’, 엔터, 1997, 16-17면)는 것이다. 실제로 하근찬이 창작한 대부분의 작품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경상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하근찬의 소설세계는 대부분 가난한 농촌을 배경으로 일제 말기나 한국전쟁과 같은 민족사의 비극과 이로부터 비롯된 여러 사회문제를 형상화한 것들이다. ‘수난이대’는 작가의 등단작이자 대표작으로 하근찬 문학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다.‘수난이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제목처럼 아버지 박만도와 아들 박진수이다. 아버지 박만도는 일제시대에 징용에 끌려가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화약으로 동굴을 파다가 팔 하나를 잃었다. 그런 그가 아침부터 신이 났다. 이유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삼대 독자인 아들 진수가 살아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을 위해 고등어까지 사서 손에 든, 만도의 눈 앞에 진수는 다리 하나를 잃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만도는 너무나 큰 실망에 진수에게 화를 내기도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모르겠다는 아들을 향해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능 기다.”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은 집으로 돌아오던 두 부자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팔 하나가 없는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다리 하나가 없는 아들이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산 고등어를 손에 든 채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이 부자(父子)는 눈물 나는 협동을 통해 전쟁과 거짓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삶이 있는 본래의 삶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실개천이 흐르고 주막이 있는 ‘수난이대’의 농촌 마을은 영천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김동혁이 작가의 전기 자료, 작품의 줄거리, 현지답사를 통해 실증적으로 밝혀 놓았다. 이 작품에 나타난 주인공 만도의 동선은 ‘용머릿재-외나무다리-주막집-시장-정거장-주막-외나무다리’로 정리해 볼 수 있는데, 용머릿재는 마현산 일대, 외나무다리가 놓인 시냇가는 남천, 주막집은 남천의 둔치 인근, 시장은 영천의 재래시장, 정거장은 영천역에 해당하는 것이다.(김동혁, ‘문학적 공간’의 분석을 통한 ‘지리적 공간’의 재구성, 어문론집 46집, 2011, 239-266면)하근찬은 자신의 몸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고향 영천을,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전형적 공간으로 형상화하였다. 보편적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이유는, ‘수난이대’가 미학적으로도 매우 잘 짜여진 작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난이대’는 텍스트의 모든 효소들이 함께 작동하면서 작품의 의미를 확립시켜주는 유기적 통일성(organic unity)을 갖춘 작품이다. 잘 짜여진 레고 블록처럼 하나의 사건이나 장소 혹은 소도구 하나도 허투루 쓰인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이 작품에서 만도는 진수를 만나러 가는 길에 주막을 떠올리고, 서술자는 굳이 “만도는 여간 언짢은 일이 있어도 이 여편네의 궁둥이 곁에 가서 앉으면 속이 절로 쑥 내려가는 것이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 주막은 나중에 만도와 진수를 정서적으로 결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처음 다리 하나를 잃은 아들의 모습에 크게 실망한 만도는, 주막에 들르고서야 아들을 향한 본연의 따뜻한 부정(父情)을 회복한다.그리고 아들을 위해 산 고등어도 이 작품의 감동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고등어가 없었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마지막 장면에서 진수가 만도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진수가 고등어를 손에 들고 다리를 건넘으로써, 만도 역시도 진수에게 의지하는 모양새가 된다. 고등어는 단순한 밥반찬이 아니라, 전쟁으로 상처 받은 두 부자가 힘을 합쳐 본래의 삶을 되찾는다는 작품의 주제를 가능케 하는 주인공인 것이다. 이처럼 서사의 경제학이 철저하게 지켜진 결과, 이 작품은 단편의 분량으로 민족사의 아픔과 극복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살뜰하게 담아내고 있다.‘수난이대’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웃픈(웃기고 슬픈) 소설이기도 하다. 슬픔을 자아내는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와 아들의 훼손된 육체이다.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도 없는 이들 부자에게 훼손된 육체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요소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웃음을 자아내는데, 그것은 대부분 인물들의 언행에서 비롯된다. 만도는 기본적으로 단순하고 다분히 익살기가 넘치는 인물이다. 만도가 주막에서 주모와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든가, 냇가에서 오줌을 누는 장면 등이 그러하다. 향토색 짙고 정감 넘치는 경북 방언 역시 순박한 두 부자의 맑은 심성을 부각시키며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주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째 살긴 뭘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능 기다.”라는 낙관이야말로 그 어떤 외나무다리도 건널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흔히 ‘수난이대’(1957), ‘나룻배 이야기’(1959), ‘흰 종이 수염’(1959)을 하근찬의 초기 3부작으로 꼽는다. 이들 작품은 모두 농촌마을에서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끔찍한 장애를 입고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이들 작품에서는 고향과 타향이 선명한 이분법을 이룬다. 고향이 따뜻한 사람들의 인정이 가득한 자연의 세계라면, 타향은 전쟁의 포성이 가득한 거짓 문명의 세계이다. 이 시기 하근찬은 문명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폭력과 거짓으로 가득 찬 부정적인 대상으로 보았다. ‘수난이대’에서 정거장에 있는 시계는 고장난 채 유리가 깨어져 있으며 먼지가 꺼멓게 앉아 있다. 또한 ‘나룻배 이야기’에서 양복을 입거나 어깨에 총을 멘 사람들은 멀쩡한 고향 사람들을 데려다가 못 쓰게 만드는 고약한 사람들이다.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지만, 결코 그 대단한 전쟁이나 문명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극복해내고자 한다. 그러한 힘은 바로 자연에 가까운 그들의 순수함과 생명력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극복에의 의지가 ‘수난이대’에서는 외나무다리 건너기로, ‘나룻배 이야기’에서는 잘난 외지인들을 배에 태우지 않는 것으로, ‘흰 종이 수염’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추상적인 공간에서 전쟁에서 비롯된 존재론적 고통을 이야기하던 전후(戰後)에, 하근찬은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인물과 공간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매우 의미 있는 작가이다. 그리고 그러한 창작의 한복판에는 경북 영천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한번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소설가 하근찬은…1931년 경북 영천 출생. 전주사범과 동아대에서 수학했다. 이후 교사와 잡지사 기자 등으로 일했다. 창작집 ‘수난이대’ ‘일본도’ ‘서울 개구리’ ‘내 마음의 풍금’ 등을 냈고, 장편 ‘야호’ ‘제복의 상처’ ‘여제자’ ‘은장도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조연현문학상, 요산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인정과 향토성이 짙은 농촌을 배경으로 농민들이 겪는 민족적 수난을 묘사한 작가로 잘 알려졌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4-27

공기 좋고 물 맑은 ‘청정지역 청송’, 코로나19 방역도 성공적

공기 맑고 물 깨끗한 곳에서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청송군은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여행지다. ‘산소카페’라는 청송의 도시 브랜드도 이런 연장선에서 탄생했다. 브랜드 이미지에 맞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군민과 군청이 힘을 모으고 있는 청송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모습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선제적인 대응과 전폭적 지원으로 ‘코로나 19 청정지역’으로 자리매김 한 것. 더불어 전국적으로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 청송사과도 ‘대한민국 대표 사과 브랜드’로서의 명성을 8년 넘게 이어가고 있다. ‘청정 도시’와 ‘힐링의 공간’을 지향하는 청송군의 현재 모습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한다.◆‘산소카페’와 특산품 ‘청송사과’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로 선정최근 청송군의 도시 브랜드인 ‘산소카페’가 2020년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대상을 수상했다. 이와 함께 ‘청송사과’도 8년 연속으로 대상을 영광을 안았다. 3개 언론사가 공동 주최하는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대상은 소비자들의 평가를 통해 수상 여부가 결정된다.‘산소카페 청송군’은 다수의 항목에서 타 도시 브랜드를 압도하는 경쟁력을 보였다. 마케팅 활동 분야에서의 점수가 특히 높았다. 지난해 도시 브랜드 개발 이후 소비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지속적인 소통을 가져온 것이 좋은 결과를 도출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 과정에선 ‘스토리 텔링형 브랜드 마케팅’이 주효했다.깨끗한 자연환경과 청송만이 가진 청정과 힐링의 이미지가 입체적으로 표현됐다는 평가를 받는 ‘산소카페’ 로고는 각종 오염원으로 인해 일상과 건강을 위협받는 현대인들에게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 욕구임을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청정의 이미지를 현실에서 구체화시키고자 하는 청송군의 노력 또한 주목받았다. 군은 자연휴양림 안에 숲속도서관과 북스테이 시설 조성계획을 수립했고, 정원 조성, 명품숲 조성, 산림 레포츠 휴양단지 조성 등을 통한 관광사업 활성화에도 땀을 쏟고 있다.청송을 대표하는 특산품인 ‘청송사과’도 인기를 이어가는 중이다. 1994년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하고, 2007년 지리적표시제를 등록한 청송사과는 “자연이 만든 명품”이라는 브랜드 콘셉트로 그 명성을 전국에 알렸다.좋은 품질의 사과를 생산할 수 있는 ‘키낮은 사과묘목(M9)’을 가장 먼저 도입한 청송군은 친환경 저농약 재배기술도 보급해 껍질째 먹는 사과를 개발하기도 했다. 또한 과수 고품질 시설 현대화 지원 등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전국 최초 사과 자판기 설치, 대도시 홍보 마케팅과 직거래, 청송사과유통센터 운영, 청송사과 품질보증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개막전 홍보행사 등은 청송군이 사과 판매 촉진과 농가 수입 확대를 위해 그간 기울여온 노력이다.이와 관련해 윤경희 청송군수는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대상을 동시에 2개나 받게 돼 기쁘다. 앞으로도 우리 고장을 ‘청정·힐링의 휴양 명소’로 만들기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코로나19 청정지역’으로 평가 받은 청송‘코로나19 사태’로 한국 전체가 공황상태에 빠졌을 때 청송군은 빠른 대처와 효과적인 확산 방지책 수립 및 실행으로 ‘바이러스 청정지역’이 될 수 있었다.지난 2월 24일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첫 확진자가 나온 청송군은 치밀한 방역체제 구축으로 추가 확진자가 발생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았다.청송군 보건의료원 응급실 입구에선 방호복을 착용한 직원들이 일일이 내방객의 체온을 체크했고, 신원 확인과 해외방문 여부를 기록한 후 열이 없을 경우에만 출입을 허가했다.현재는 확진자 1명도 완치돼 퇴원했다. 청송군 확진자 2명 중 1명은 주소지만 청송인 학생이었고, 1명은 해외입국자이기에 사실상 지역주민 감염은 없었다는 게 군청의 설명이다. 이처럼 ‘코로나19 청정지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민·관 합동의 방역체제 구축과 정부 대책보다 한발 앞선 방역당국의 선제 대응, 군청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청송군 보건의료원은 확진자 발생 직후 군청 방역반, 관내 사회단체, 봉사단체 등 50여 명으로 구성된 긴급방역대책반을 편성했고, 군부대 살수 차량 등의 협조로 진보면 일대도 꼼꼼하게 방역했다.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사회복지과 요양시설, 공공기관을 우선 방역하며, 확진자 동선이 확인된 상가와 식당에 대해서도 철저한 방역에 나섰다. 불안해하는 주민들을 위해 아파트와 빌라 등 주거지역과 그곳 공동시설까지 꼼꼼히 챙겼다. 읍면의 재래시장, 버스터미널 등의 방역도 병행됐다.지난 4월 10일엔 코로나19 검체 채취의 신속성과 안전성 향상을 위해 ‘워킹스루’ 검체 채취 방식도 도입했다.정부 대책보다 한발 앞선 선제 방역도 주목받았다. 청송군은 긴급방역에 소요될 예산이 없자 여름철 방역비를 먼저 집행해 방역활동에 나섰다.또, 서울 콜센터에서 집단으로 확진자가 발행하기 전 다중 집합장소인 노래방과 PC방 등을 미리 방역하기도 했다.정부 발표 이전에 임신한 공무원을 재택근무 지시한 청송군은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전인 1월 말에 선별진료소를 설치하는 현명한 행보를 보여줬다. 지자체와 민간이 효율적인 협력을 통해 ‘바이러스 청정지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바이러스를 이겨낸 청송군의 현실적 대책그렇다면 청송은 어떤 현실적인 대처로 ‘코로나19’가 야기한 비극적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며 ‘청정 도시’의 이미지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먼저 청송군은 코로나19로 침체된 지역경제 살리기에 나섰다. 소비 위축 등 경제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 차단을 위해 전통시장 상인 지원책을 마련한 것.점포 사용료를 일정 기간 면제하고, 공무원과 물가조사 모니터 요원으로 구성된 지역물가 조사반을 편성해 불공정거래 행위 단속을 강화했다. 약국, 마트, 편의점 등 오프라인 매장을 중심으로 가격 동향과 수급 상황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마스크 사재기 등 불법행위도 비교적 적었다.자금 사정이 어려운 소상공인 신용대출 보증금 지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소상공인 특례보증 서면협약’ 등이 실질적인 사례다. 군 차원에서 과도한 불안감 조성을 미리 막았던 것이다.평소 5% 할인율이 적용되던 청송사랑화폐를 3월과 4월엔 10% 특별할인 했다. 총 20억 원 규모였다. 별도 가맹점 없이 관내 어느 곳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청송사랑화폐는 어려운 시기 지역에서 돌고 돌아 경기 정상화에 작지 않게 일조했다.‘코로나19 사태’로 매출 감소를 겪던 소상공인들에겐 긴급생계비를 지원키로 했다. 중앙정부의 지원과는 별도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애쓴 것이다.한시적 지방세 감면 정책도 청송군이 실천한 ‘코로나19 사태’ 극복 방안 중 하나다.올해 상반기 중 3개월 이상 소상공인에게 임대료를 인하한 임대인, 코로나19 확진 및 자가격리 조치로 경제활동이 중단됐던 납세자, 감염 확진자 방문에 따른 휴업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소상공인 등이 감면 대상이다.덧붙여 윤경희 군수는 “위기 극복을 위한 기한 연장, 징수 유예, 체납처분 유예, 세무조사 유예 등은 코로나19 사태가 고개를 숙일 시점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이번 어려움에 동참했던 ‘소노벨 청송’도 군민들의 응원 속에 무사히 운영을 종료했다.소노벨 청송은 지난달부터 이달 7일까지 코로나19 경증환자를 치료하는 생활치료센터로 지정돼 운영됐다. 운영이 시작된 때는 대구, 경북에서 감염자가 쏟아지고 있던 절박한 시기.이런 상황에서 소노벨 청송은 방역 당국의 요청을 수용해 생활치료센터 운영에 들어갔다. 한마음으로 파국을 막자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었다. 국가적 비상사태에서 지역 이기주의를 앞세우기보단 고통을 나누자는 대승적 결정을 한 것이었다.주민들도 ‘청정 주왕산에서 여러분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어 국난 극복에 함께 했다. 소노벨 청송 생활치료센터는 운영기간 동안 지역 전파 없이 완치율 92%라는 성과를 이뤄냈다.이와 더불어 청송군은 경북에선 최초로 농기계 임대료 50% 감면을 시행했고, 이를 연말까지 연장 운영할 방침이다.‘함께 힘을 모아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청정한 도시 이미지를 지켜나간다’는 청송군의 선진적인 행보가 주변의 주목을 받고 있다./김종철·홍성식 기자

2020-04-23

대구시 코로나19 대응 모델 ‘전수조사’ 세계가 주목하다

하루 741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대구가 60여일만에 안정세를 찾고 있다. 하지만, 세계는 지금도 코로나의 충격과 공포에 빠져 있다. 미국은 하루에도 5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누적 사망자가 4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탈리아는 2만3천227명이 사망하고 누적 확진자가 100만명에 달하는 등 유럽전역이 코로나에 점령당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로 세계 각국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할 때만해도 세계에서 가장 우려하는 국가였으나 지금은 발빠른 대응으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가 됐다. 국내 코로나 확산의 진원지였던 대구의 코로나19 대응 모델을 전 세계에서 배우고 있다.□ 대구지역 코로나19 집단감염과 전수조사대구는 세계에서 극찬하는 코로나19 대응 모델의 첨병에 섰다. 지난 1월 20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만 해도 코로나19를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천지 대구교회라는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를 발생하면서 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가 다가왔다.대구지역 첫 확진자인 31번 환자가 신천지 신도임이 밝혀지면서 10여일만에 하루에 741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등 빠르게 확산됐다. 의료체계가 붕과하기 일보직전이었고, ‘대구 봉쇄’란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 권영진 대구시장이 총력전에 돌입했다. 신천지 신도 전수조사를 단행해 확진자와 일반 시민들을 분리하면서 급증하던 확진자 수가 줄어들었다. 또 요양병원 등 집단시설 전수조사를 선제적으로 진행하면서 ‘328대구운동’을 병행, 한때 700여명에 이르는 확진자 수가 점차 감소 추세로 돌아섰다. 전수조사로 코로나19 극복의 단초를 잡은 셈이다.이 과정에서 대구시는 기존의 병원에만 입원하던 확진자를 경증과 중증으로 나눠 경증 확진자는 생활치료센터에 격리 조치하고 중증환자를 병원으로 입원시켜 집중치료를 받도록 하는 확진자 관리에 대한 지침 변경을 중앙에 요구해 의료체계 붕괴 위기를 넘겼다.대구시가 실시한 전수조사는 해외에서 코로나19 대응 모델로 소개되기도 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전수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미국처럼 됐을 것”이라면서 감염 가능성이 있는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대구시의 전수조사를 높게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대한민국, 대구 -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한창 발발했을 때 중증 환자를 위한 병상을 확보하고 대기업으로부터 추가 시설을 확보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고안해 냄으로써 심각한 상황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세계 최초 드라이브 스루 도입전 세계가 코로나19와 관련해 ‘드라이브 스루(Drive-Thru)’를 주목하고 있다. 대구시가 세계 최초로 도입한 드라이브 스루는 현재까지 1만5천건이 넘는 검사를 진행한 것으로 나타났다.드라이브 스루는 2월 29일 지역 감염 초기에 의심환자가 폭증해 신속한 대규모 검체채취 방법이 요구됨에 따라 대구 칠곡 경북대병원에서 처음으로 운영됐다. 그동안 총 9만3천315건의 검진 검사 중 16.7%인 1만5천594건을 수행하는 등 감염병의 지역확산 방지에 기여한 것으로 분석됐다. 최근 코로나19 확진자가 감소하면서 대구시는 총 10개소 중 6개소는 운영을 종료하고 나머지 4개소(서구, 남구, 북구, 수성구)는 지속해서 운영키로 했다.감염 가능성이 높은 시민들을 분리해 신속하게 검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드라이브 스루는 세계 각국에서 도입하고 있다. 미국은 드라이브 스루 모델, 자가진단 앱 사용 등과 같은 효율적인 시스템에 대한 벤치마킹과 함께 모델 노하우 공유를 요청했다. 독일과 영국도 한국의 드라이브 스루 방식을 모니터링 한 뒤 시설을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 생활체계 방역 전환대구지역 코로나19가 60여일만에 안정세를 보이자 대구시는 생활방역체계로 전환했다. 시는 코로나19 첫 확진자 발생 이후 60일 만에 정례브리핑을 종료했다. 향후 대규모 확진자 발생이나 특이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다시 재개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이처럼 대구시가 정례브리핑을 종료한 것은 60여일간 코로나19와 전쟁에서 실시한 ‘전수조사’ 대응모델이 코로나19 지역사회 확산에 충분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 것으로 분석된다.이어 시는 3·28대구운동 등을 통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사회적 거리두기와 개인위생수칙이 잘 지켜지고 있고 각계각층의 방역대책에 대한 협조가 잘 이루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20일부터 대구 전역과 모든 분야로 확산하는 방역을 연계한 범시민운동을 전개한다. 각계각층의 오피니언 리더 200여 명으로 코로나19 극복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분야별, 사업장별, 일상 속에서 지켜야 할 방역 지침을 마련하고 시민행동수칙을 일상과 문화로 정착시켜나갈 계획이다.권영진 대구시장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일이었기에 초기에는 비판이 많았으나 해외에서 코로나19가 대유행하면서 대구의 초기 대응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전국에서 처음 실시한 ‘3·28(3월 15∼28일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 대구운동’은 높은 시민의식을 보여준 성공적인 모델이었다”고 밝혔다.이어 그는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유족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구시민은 물론 지역기업 등 모두가 힘겨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위기에 강한 대구시민의 유전자(DNA)는 코로나19에 맞서 놀라울 정도의 저력을 보여줬다”며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고 있다. 전국에 대유행으로 번지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을 보면서 메디시티(의료도시) 대구의 힘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권 시장은 “코로나19는 무증상 전파자와 완치 후 재감염 등 얼마든지 폭발적인 감염 가능성이 있다는 게 의학계의 판단이다”며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다시 유행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기존의 지방자치단체 주도의 방역으로는 한계가 있다. 방역당국인 대구시는 철저한 방역역량과 대비태세를 계속 유지하고, 시민들은 시민행동수칙을 일상과 문화로 정착시켜나가는 형태의 민·관협력 방식의 상시방역체제로 코로나19를 극복하겠다”고 밝혔다./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2020-04-22

“변화를 향한 희망은 현재진행형 입니다”

과장과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는 담백한 사람. 이번 2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포항남·울릉 지역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석패한 허대만(52) 씨에게서 받은 첫 느낌이다. 구구하게 패배를 변명하지 않고, 경쟁했던 당선자를 향해 “앞으로 의정활동을 잘 해서 표를 준 분들에게 보답하시라”는 덕담을 전하는 사람.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 허대만 씨는 지금까지 포항에서 8번의 선거를 치렀다. 성적은 시의원 1승을 제외하면 7패.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고 총선과 지자체장 선거에 나섰다. 포기를 모르는 출마의 이유가 궁금했다.미래가 기대되는 명문대 학생에서 시민운동가로,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에 노력한 시의원에서 국회의원과 지자체장 선거 출마자로 포항에서 살아온 30년 가까운 세월.4·15 총선이 막을 내린 지난 토요일 오후. 조용해진 선거사무소에서 허대만 씨를 만났다. 정치인으로서의 삶,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삶에 더해 그가 그리고 있는 포항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어볼 수 있었다. 아래 그날 오간 대화를 가감 없이 옮긴다.-아쉬움이 있겠지만, 21대 총선 결과를 자평한다면.△전국적으론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을 얻어 정권 후반기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돼 다행이라 본다. 하지만, 대구·경북의 경우엔 미래통합당이 거의 전 의석을 휩쓸었다. 선거 결과가 포항의 앞날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 걱정된다. 기울어진 지역의 정치 지형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안타깝다.-포항에서 시의원, 시장, 국회의원 선거에 8번 출마했다. 시의원 당선 한 번을 제외하고는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출마를 지속했는데.△2008년 국회의원 선거엔 대구·경북 27개 선거구 중 민주당 출마자가 6명밖에 없었다. 2010년 지자체장 선거에선 23개 시·군 중 민주당 후보자가 겨우 나 하나였다. 경북에도 민주당 지지자가 분명 있는데,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당의 지역 책임자로서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출마를 지속했다. 선거를 통해 지역의 정치 구도를 바꾸겠다는 오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행히 갈수록 지지를 보내는 시민들이 많아지고 있어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서울대 정치학과에서 공부했다. 서울이 아닌 포항에서 정치를 하려는 이유는.△포항은 내 고향이다. 대학 다닐 때부터 ‘고향에서 선출직 공직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고시를 통해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대학원 재학 중에 포항으로 내려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대 중반 시절이다. 어릴 땐 형편이 너무 어려웠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내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선친을 대신해 날 도와준 포항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부채의식이 있다. 앞으로도 포항 사람으로 살아갈 생각이다.-이번 선거엔 출마하지 않으려했다고 들었다.△21대 총선에선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좋은 후보를 찾고자 애썼고, 실제로 몇 분을 접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난색을 표했다. 그들의 심정도 이해된다. 민주당 깃발로 포항에서 선거에 나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후보를 내지 않고 지역구를 비워둘 수는 없었다. 민주당 경북도당 위원장의 책무를 다른 이들에게 미룰 수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출마를 결심했다.-경쟁자였던 미래통합당 후보가 ‘포항은 썩은 땅’ 등의 막말로 설화(舌禍)를 겪었는데.△SNS에 글을 쓰거나 발언 도중에 나온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선거기간 중엔 후보자의 뜻이 왜곡되거나 과장돼 비판받는 경우가 흔하다. 이미 선거는 끝났다. 앞으로 의정활동을 열심히 해 지역민의 신뢰를 얻었으면 좋겠다.-이번 선거 결과를 보면서 집권당과 대구·경북의 핫라인이 사라졌다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지역 현안을 풀어가야 하는데 정부와의 협상 통로가 막혔다. 심각한 문제다. 그동안은 집권당이 취약한 지역을 배려해왔다. 김부겸, 홍의락, 김현권 의원 등이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대구·경북을 배려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향후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국책사업 등에서 우리 지역이 소외받거나, 사업 진행에 브레이크가 걸릴 가능성이 없지 않다. 어렵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갈 것이다.-포항에서 정치를 하며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문재인 정부 초기에 행정안전부장관 정책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때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주무 부처의 정책보좌관으로 있었기에 임대주택 보급, 이재민 지원, 수능 연기 등의 정책 수립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장관에게 ‘일정 기간 포항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도 했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직접 듣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하기 위해 고심했다. 포항시민들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지진 이후 포항은 지속적 경기 침체에 빠져있는데.△포항시의 성장잠재력은 여전하다. 이젠 지곡단지를 중심으로 첨단산업을 키워야하지 않을까.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초기 동력을 찾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시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다.-거듭 낙선의 고통을 준 포항시민들에게 서운하지 않나.△누구를 원망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겠구나’라는 상황에서 선거를 치러본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 총대를 멘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매번 유권자 15% 이상의 지지는 받았다. 절망할 정도의 득표는 아니었다.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했을 때도 선거비용은 보전 받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포항시민들이 나를 선택해주시겠지’라는 마음이 훨씬 컸다. 물론 이번 선거는 사전 여론조사 결과 등이 나쁘지 않아 기대를 했는데, 다소 아쉽다.-몇 해 전엔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다.△젊은 시절엔 건강을 과신했는데, 이른바 촛불정국 즈음에 위암 통보를 받았다. 수술과 항암 치료가 잘 돼 지금은 괜찮다. 아프고 나서도 선거를 두 번이나 치르지 않았나.(웃음) 현재는 6개월에 한 번 정기검진을 받고 있다.-다둥이 아빠다. 집안에선 어떤 남편, 어떤 아버지인가.△애들이 네 명이다. 나와 아내 모두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능한 많이 낳자는 것에 동의했다. 장남이 스물셋, 막내딸이 열두 살인데 자식들을 볼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이번 선거 유세 현장에 아이들 모두가 나왔다. 자기들끼리 아빠를 응원하자고 의논을 했던 것 같다. 기특하고 고마웠다. 바빠서 애들을 챙겨줄 시간이 많이 없지만, 언제나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한다. 아내에겐 가정적인 남편이 되고 싶다.-앞으로도 포항에서 출마할 의향이 있는지.△즉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선거 과정에선 어쩔 수 없이 주변에 너무 많은 폐를 끼치게 된다. 도와준 분들에게 느끼는 고마움은 평생 안고 가야할 것이지만…. 포항을 발전시켜 포항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능력 있는 사람을 찾고 싶다는 정도로 대답하면 되지 않을까?-포항이 그려가야 할 청사진은.△단순화된 산업구조의 혁신이 필요하다. 철을 생산하는 도시인데도 자전거 만드는 기업 하나 없다. 철만 만들 게 아니라 부가가치가 높은 관련 산업을 함께 키워가야 한다. 고용도 거기서 창출된다. 포항의 철강생태계를 미래형으로 바꾸는데 일조하고 싶다. 포스코와 포스텍이 있으니 인프라는 어느 지역보다 좋지 않은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력, 정책 실행 과정에서 민간의 협조를 이끌어낼 리더십을 가진 인물도 육성해야 할 것이다.-포항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포항에 애정을 가진 젊은 정치인이 나타났을 때 꿈과 희망을 키워줄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 비단 정치 지망생만은 아니다. 청년이 떠나는 도시가 아닌, 어떤 분야에서건 청년이 미래를 설계하며 성장할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부탁드린다.포항은 단순화된 산업구조의 혁신이 필요하다. 철만 만들 게 아니라 부가가치가 높은 관련 산업을 함께 키워가야 한다. 고용도 거기서 창출된다.포스코와 포스텍이 있으니 인프라는 어느 지역보다 좋지 않은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력, 정책 실행 과정에서 민간의 협조를 이끌어낼 리더십을 가진 인물도 육성해야 할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22

재미를 주었던 것들…이제, 스칼라 성으로 간다

◇ 구세주, 페트롤헤드스의 미치아이와 도미니크에바 씨에게 소개받은 ‘패트롤헤드스’에 다녀왔다. 패트롤헤드스는 바르샤바 시내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외곽 낡은 창고에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옆에는 생활폐기물 처리장이 있다. 그냥 버리기 어려운 쓰레기들을 신고하고 와서 처리하는 모양이다.냉각팬은 회생불능 판정을 받았다. 합선으로 모터가 탔다. 왜 합선이 되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교체를 해야만 하는 상황. 지금까진 임시조치해서 타고 왔으나 이제 그럴 수 없다. 부품을 새것으로 바꿔야만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미캐닉 미치아이 씨에게 “내 오토바이가 문제가 많다”고 하자 웃으며 “BMW잖아”란다. 그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첫 번째 사고의 원인은 나의 부주의였고, 쿨링팬이 멈춘 건 출고된 지 10년이 넘었으니 슬슬 노후화된 부품들이 문제가 생길 때가 된 것일 수도.이왕 뜯는 김에 이곳저곳 문제가 없는지 점검했다. 출발하기 전에 교체했던 에어필터는 곤충들과 이물질로 엉망이었고, 구석구석 온갖 날벌레들이 끼어서 지저분한 상태. 흙투성이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쿨링팬 교체 때문에 결국 바르샤바에서 또 며칠 머무르게 되었다. 다른 문제들까지 해결이 된다면 뮌헨은 가지 않아도 된다. 이번 주는 꼼짝할 수 없을 듯.미치아이 씨와 도미니크 씨는 세상일은 별 관심 없는 듯 오토바이만 만지며 사는 미캐닉이자 라이더인 듯싶다. 버스를 타기 위해 마을로 한참 걸어나가다 지갑에 유로화 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돌아가 미치아이 씨에게 택시를 불러 달라 부탁했다.폴란드는 유럽연합에 속해 있지만 자국 통화를 사용한다. 숙소까지 약 30분 46즈워티(약 1만6천원)이 들었다. 카드 결제. 우리와 택시 요금이 비슷한 듯하다.◇“오토바이 정도는 반드시 있었으면 한다”K선생님은 결국 포기하고 귀국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신 듯하다. 5월 12일 유라시아 횡단을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동해항에 모인 사람은 나까지 포함해 6명. 바이칼에 도착하기 전부터 K선생님의 오토바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길 들었다. P선생님께 앞 서스펜션 오일이 새서 완전히 내려 앉아 고생 중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선생님은 아직 러시아를 벗어나지 못했다. 같은 날 유라시아 횡단을 떠난 사람들끼리 위치 공유앱을 깔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다.바르샤바에서 만난 H선생님은 지난해 러시아 모고차 근처에서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어 포기하고 올해 다시 도전하셨다. 선생님 오토바이는 구입한 지 1년 남짓 되었는데 문제가 생겨 BMW 본사가 있는 뮌헨으로 가신다고. 원래 함께 가려고 계획했지만 뜻밖에 냉각팬 문제가 생겨나는 바르샤바에 남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워낙 먼 거리를 달려야하니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겪고 누군가는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안전이 먼저.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에선 체력을 유지하고 여유를 잃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토바이는 고장 나면 어떻게든 고치면 되지만 체력이 떨어지고 여유를 잃으면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모두 건강하게 목적지까지 갔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길.지하철을 타고 중심가에 나가 이리저리 어슬렁어슬렁 다녔다. 밤 10시쯤 되어서야 해가 넘어가니 오히려 저녁에 돌아다니기 좋은 듯하다. 낮에는 워낙 덥고 햇살이 뜨거워 그늘이 아니면 금방 땀범벅. 내일쯤 수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연락을 받기로 했다. 지금 있는 숙소에서 우선 4일 더 있기로. 장기투숙(?)이라 요금을 깎아준 듯. 3박 추가요금이 65즈워티(약 2만원).도미니크 씨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숙소에 꼼짝 않고 있었다. 가만히 늘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몸이다. 내 주변의 상황들이 몸을 쓰게 만들 뿐. 애써 무엇을 해야 한다든가 억지로 부지런을 떠는 건 딱 질색이다. 가장 중요한 건 재미다.재밌으면 부지런해질 수도. 자신의 깜냥에 넘치게 ‘애써 억지로’ 무슨 일이건 하다보면 상처 입고 균형을 잃게 마련이다. 예전에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씩 철들고 부턴 그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가끔 에너지가 넘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이를 만나면 ‘훌륭하신 분이구나’ 생각하지만 쉽게 피로를 느낀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로를 주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항상 다짐한다.지금껏 내게 재미를 주었던 것들을 꼽아보면 주로 ‘기계류’였다.오토바이는 잘 만든 기계이기도 하고 빨리 달리고픈 인간의 본능에 가장 충실한 이동수단이기도 하다. 몸을 드러내고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하는 오토바이는 위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 위험은 언제나 불시에 찾아온다. 균형이 깨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그 순간 아드레날린이 대폭발한다는 건 아이러니다. 마루야마 겐지는 ‘취미 있는 인생’에서 이렇게 말했다.“오토바이가 차보다 위험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지금은 제대로 된 답을 내기 힘든, 내더라도 의미가 없는 시대다. 말하자면 이미지에 빠져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 남자가 남자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이런 세상이기 때문에야말로, 오히려 오토바이 정도는 반드시 있었으면 한다.”◇ 드디어 말끔해진 로시를 찾아오다3일만에 도미니크 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걷고... 패트롤헤드스에 로시를 데리러 다녀왔다.저번에 택시 타고 돌아올 때는 30분도 안 걸렸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했더니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해 2시간이나 걸렸다. 90분 동안 버스와 지하철, 트램을 이용할 수 있는 승차권이 7즈워티(약 2천원)다. 어쨌거나 드디어 로시가 돌아왔다!먼저 패트롤헤드스의 미치아이, 도미니크 씨에게 감사를. 정말 저렴한 비용으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가장 큰 문제였던 부러진 프론트 패널 캐리어와 모터가 타버린 냉각팬을 교체했다.프론트 패널 캐리어는 쉽게 부품을 구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여러 곳 수소문했나보다. 정품은 아니지만 시그널 램프와 안개등도 다시 달았다.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던 앞뒤 브레이크 오일도 교환했고, 엉망이었던 에어필터까지 새것으로. 부러진 카울은 당장 주행하는데 문제가 없으니 돌아가서 고치기로. 새로 바꾸기엔 비용이 너무 비싸다.세차까지 해서 오랜만에 말끔해진 로시를 보니 기분이 좋다.내일 폴란드의 옛 수도였던 크라쿠프로 간다 하니 도미니크 씨가 중간에 스칼라 성에 들렀다 가라고 추천했다. 절벽 위에 성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멋진 여행하라며 작별 인사를.그래서 내일 첫 번째 경유지는 스칼라 성으로 잡았다. 숙소에 돌아와서 내일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정리했다. 미리 빨래도 해놓고. 미리 챙겨놓지 않으면 아침나절이 금방 지난다. 낮엔 워낙 더워서 가능하면 시원한 아침에 출발하는 편이 낫다.그 당시 바르샤바 기온은 33도. 더워서 잠깐 팔을 걷고 달렸는데도 피부가 화끈거릴 정도로 탔다. 바르샤바의 마지막 밤이다.    /조경국

2020-04-21

산과 푸른 하늘·임하호, 그리고 오롯하게 자리 잡은 고택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버지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 지금시대에 최고의 조건이라지만, 산업화 이전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잘난 조상 덕에 ‘에헴’ 하면서 폼 재고 살았다. 주로 조선시대 학식이나 벼슬로 이름을 알린 조상이 한명 나오면 중시조가 되어 그 이름의 음덕으로 오늘까지 긍지를 갖고 산다. 중시조에서 시조보다 더 큰사람이 안 나오면 경주최씨 설씨 등과 같이 신라 최치원과 원효와 설총까지 소급하여 이어온다. 해남 윤씨들은 고산 윤선도로, 손소, 손중돈, 회재 이언적은 양동 손씨, 양동 이씨의 후손들은 자부심을 안고 살았다. 안동은 유독 중시조가 많다. 진성이씨는 퇴계 이황, 안동김씨는 고려의 김방경, 풍산류씨는 서애 류성룡, 의성김씨는 학봉 김성일, 영천이씨는 농암 이현보, 그리고 중시조에서 방계로 뿌리에 뿌리를 물고 이어져 거대한 문중이 된다. 지촌 김방걸도 의성김씨 지례 입향조가 된다. 그 흔적이 지례예술촌이다.#. 장희빈과 남인, 지촌 김방걸인물은 그 시대와 밀접한 인연을 가진다.의성김씨가 임하댐을 중심으로 문중으로 번성한 것은 김만근(1446~1500)이 임하현 일대 강력한 기반을 가진 해주오씨 오계동 집안에 장가들어 처갓집 재산을 물려받고 내 앞(川前)에 정착하고부터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큰 문중 대부분이 처가살이하여 처가재산을 물려받았거나 아내의 지참금으로 부를 형성한다.김만근의 손자 청계 김진(1500~1580)은 자신의 입신을 포기하고 아들 교육에 헌신하여 다섯 아들(약봉 극일, 귀봉 수일, 운암 명일, 학봉 성일, 남악 복일)을 퇴계 문하에 보내 모두 과거에 합격시켜 명문가 반열에 오른다. 청계는 아내를 일찍 잃고도 젖 달라고 우는 아이를 양손에 부둥켜안고 나오지 않는 자신의 젖을 물려 울음을 그치게 했던 눈물겨운 부성애를 갖고 있었다. 지촌 김방걸의 고조부가 청계 김진이고 증조부가 약봉 극일이다. 지촌 김방걸은(1623~1695)은 인조(1623~1649) 원년에 태어나 숙종 때 활약한 인물이다. 38세에 과거 병과에 급제하여 주로 사간원 성균관 등 언론과 학계에 머물었던 언관으로 50대 초부터 21년간 숙종과 인연을 맺어 전남 화순 동북 귀양지에서 73세에 죽는다.숙종 하면 장희빈과 사랑 놀음과 착한 인현왕후로 각인되지만, 숙종은 5군영과 남한산성, 북한산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고, 세금폐단을 획기적으로 막은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했다. 이처럼 군사와 경제에 큰 업적을 쌓았지만 여인의 치마 속에 가려졌다. 숙종의 여인 장희빈(장옥정)과 인현왕후는 둘 다 왕비가 되었다가 폐위되었다. 인현왕후는 34살에 죽고, 장희빈도 42살에 사약을 받고 죽은 시대가 낳은 비극의 여인들이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서인(노론)의 핵심이었고, 장희빈의 숙부 장현은 왕의 통역관으로 무역으로 오빠 장희재와 서울에서 돈(현금)이 가장 많았던 중인출신이었다. 안동선비들은 동인에서 남인세력으로 장희빈과 운명을 같이했다. 선조 때 김효원과 심의겸으로 동인, 서인으로 갈라진 붕당이 동인은 정여립 사건 때 서인은 숙종 6년(1680) 경신대축출 때 남인을 강하게 처벌하자는(노론), 온건하게 하자는(소론)으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투다 숙종 때는 극에 달한다. 그런데 김효원 심의겸 둘다 퇴계의 문하생이었다.장희빈이 아들(경종)을 낳아 세자로 책봉되고 인현왕후가 폐출(1689년)되자 지촌 김방걸은 언관으로 책임을 느껴 낙향한다. 장희빈은 왕비가 되고 기사환국으로 남인 천지가 된다. 5년 뒤 숙종은 폐위시킨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들을 대거 숙청하는 갑술옥사(1694)때부터 온 조선천지는 노론, 소론세상이 되고, 영남의 남인세력들은 몰락한다. 이때 ‘구운몽’의 저자 남구만은 소론의 우두머리가 되어 영의정이 된다.72세의 대사성(지금의 국립서울대 총장) 김방걸은 갑술옥사 때 고향 지례로 귀향하지만 며칠 만에 화순 동북으로 귀양 가서 독서로 나날을 보내다 73세의 일기로 죽는다.정치란 생물과 같아서 이해관계에 따라 변한다. 숙종은 장희빈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겠지만, 역관집안에 현금 제일 많은 부자의 딸이고. 청나라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어 숙종에게 도움이 되었고, 역관 즉 중인층의 지지가 왕권 강화에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인층의 지지가 노론, 소론으로 기울자, 숙종도 장희빈과 남인을 버렸다. 장희빈은 친정 쪽의 재력을 이용하여 남인들을 업고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한 것이다.# 지례예술촌은 어떤 곳인가임하댐을 끼고 천천히 달렸다. 댐 위에 망향비를 보니 함께 살았던 한실댁, 대추월댁, 유천댁, 원촌댁, 주실댁, 각골댁, 동골댁, 곰모댁, 턱골댁, 마질댁, 추월댁…. 밑에 류건원, 하식, 갑이, 봉년, 앙팔, 병태, 태수 오봉, 영복…. 이름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여기 실향민이 아닌 필자도 마음이 울컥거리는데 여기 살았던 실향민들은 고향 잃은 상실감에 얼마나 마음이 아리고 쓰릴까? 갈 수 없는 고향은 희망이라도 있지만, 사라진 고향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처일 것이다.필자는 1987년부터 한국문화유산 답사회 초대 총무로 유홍준 대표와 회원들과 전국으로 기행할 때와 울산시민역사기행 대표를 할 때 지례예술촌을 90년 초에, 단체로 두 번 숙박했었다. 그때는 버스로 비포장 길 산속을 한참 돌고 돌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늘은 아스팔트로 잘 닦여진 대낮에 산천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흩어져있던 문중의 비석들을 모아놓고 지촌 김방걸 유허비를 크게 세워놓았다. 평소 습관대로 전체를 보고 느끼기 위해 산책로 따라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았다. 곳곳에 시인 김종길 촌장답게 아름다운 시를 세워놓아 시심을 자극한다. 호수(임하댐)의 물결은 보드랍게 속삭이듯 고요하다. 도화꽃 춘정에 몸부림치니, 산 벚꽃 하얀 속살도 봄바람에 흐느껴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석양에 장대들고 낚시터로 내려가니./ 폭포에 산들바람 버들 솜이 휘날리네./ 모래위의 갈매기야 날아가지 말게나./ 너를 해칠 마음 없어진지 오래거니./”지촌 김방걸의 ‘낙연(도연폭포)조어(落淵釣魚)’시인데 오늘 같은 봄의 정경이다. 여기에서 오른쪽 산 넘어 임하댐에 수몰되어있는 도연폭포에서 직계증손자 난곡 김강한(1719~1779)과 고손자 낙유재 김시기(1751~1779)의 비극적인 죽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재야선비 김강한이 3월 21일에 죽자 장례는 5월 23일로 정했으나 장례날이 가까워오자 계속되는 장마에 강 건너가 장지여서 앞당겨 장례를 치른다. 상주 김시기는 상여에 올라가 관을 붙들고 불어난 강물을 건너다 센 물살에 상두꾼들은 급류에 휘말리자 상두꾼들은 상여를 내버려두고 헤쳐 나왔지만, 아들은 뛰어내리지 않고 상여를 붙잡고 가다 도연폭포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나라에서 효자명부에는 올렸지만 자신의 목숨과 바꾼 효였다. 1965년 7월 고려대불교학생회에서 상원사 보산스님 다비식에 참석하고 내려오다 불어난 계곡물을 건너다 10명이 급류에 휩쓸려가 죽은 사건이 떠오른다.동쪽 산등성이 오르자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묘를 단장하고 있었다. 조상숭배가 극에 달한 안동을 보는 것 같았다. 고택 뒤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아래 고택을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미인은 혼자 외롭게 있을 때가 아름답듯이, 소나무도 한 그루 쓸쓸히 있을 때가 고독한 아름다움을 풍긴다.건물들을 살펴보았다. 지촌이 40세 무렵에 지은 안채와 바깥채는 소박하면서 담담한 기품을 풍긴다. 지촌 사후에 지은 지촌제청 건물도 엄청 크고, ‘지산서당’ 건물은 웅장하고 어깨 힘이 잔뜩 들어간 위압적인 형상이다. 기둥도 너무 굵고 다포식의 화려한 절집 같아 권위적인 사또가 집무를 보는 동헌 같다. 이 모든 건물을 임하댐 수몰지 지례마을(아래 200m)에서 옮겨지어(1985~1989) ‘지례예술’을 만든 시인 김원길 촌장의 집념이 대단하다.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는 코로나 정국이라도 다른 고택들은 대문은 열려 있었는데, 여기는 굳게 닫힌 대문에 ‘숙박 손님 외 절대 출입금지’문구가 무릉도원에 왔다가 갑자기 속세의 현실로 나를 안내했다.필자가 경북의 종손, 종부들 대상으로 특강할 때, 촌장님도 같은 날 강의를 했고 밤새 술잔을 나누었던 인연이 있기에, 인사나 하려고 대문을 두드렸다. 촌장님은 없고 손자와 며느리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들어가 남편을 보내 맞이한다. 내가 더 미안해하고, 번갯불에 콩 튀기듯이 가볍게 빨리 보고 나왔다./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04-21

올곧은 선비정신이 독특한 고전미의 세계를 구축하다

한 나라의 문화는 전통 지향성과 새것 지향성이 서로 힘겨룸을 하면서 발전해 나간다고 할 수 있다. 옛 것에만 집착할 경우 그 문화는 고루해져서 결국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며, 새 것만 지향할 경우에는 그 문화가 정체성을 잃고 독자적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문학 역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는 전통 지향성과 새것 지향성의 힘겨룸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한국의 현대사는 새것 지향성이 문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을 압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광풍 속에서도 우리 고유의 것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문인들이 있었으니, 그 중의 대표적인 시인이 바로 조지훈(1920-1968)이다. 조지훈은 시인으로만 한정하기에는 그 쌓은 업적의 산이 매우 높다. 그는 시인이면서 논객이고, 동시에 지사이자 학자이다. 그가 여섯 권의 시집을 통해 남긴 그 완미한 시, 4.19나 5.16과 같은 역사의 격동기마다 토해낸 사자후(‘선비의 직언’, ‘지조론’ 등), ‘멋의 연구’와 같은 논문을 통해 구축한 한국학의 세계는 후대의 기림을 받을만한 것이다.그러한 삶을 뒷받침한 것은 바로 조선 500년을 이어온 선비정신이다. 조지훈의 고향은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주실이라고도 함)으로, 이곳은 한양 조씨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마을이다. 그의 조상은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다가 쓰러진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이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지훈의 증조부인 조승기는 의병대장으로 항일활동을 하다가 한일합방 이후 자결한 순국지사이며, 조부 조인석도 학문과 덕망으로 추앙을 받은 한학자였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조지훈은 일제가 주도하는 신교육 대신 전통적인 유학을 주로 배우며 성장하였다. 어린 조지훈이 신교육을 받은 것은 영양보통학교에 잠시 다닌 것이 전부이다. 수백 년간 주실 마을을 채워온 올곧은 선비정신 속에서 조지훈은 정신의 뼈와 살을 형성한 것이다.거기에 덧보태 조지훈은 한국의 정신을 형성하는 또 하나의 축인 불교에도 전문가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1941년 불교계 학교인 혜화전문학교(동국대 전신)를 졸업하였고, 1941년 4월에는 오대산 월정사의 외전강사로 입산하여 1년 여를 머물렀다. 이 당시 조지훈은 각종 경전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선(禪) 체험을 갖기도 했던 것이다. 수필 ‘돌의 미학’(1964)에서는 월정사에 가기 일 년 전에 일본 교토의 묘심사(妙心寺)에서 선(禪)에 든 적이 있다는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이러한 성장배경을 통해 조지훈의 독특한 미의 세계를 일찌감치 알아본 이가 바로 정지용이다. 정지용은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의 작품으로 조지훈을 문단에 등단시키며 “詩에 있어서 깃과 죽지를 고를 줄 아는 것도 天成의 기품이 아닐 수 없으니 詩壇에 하나 新古典을 紹介하며……뿌라보우”(‘詩選後’, 문장, 1940.2.)라는 추천사를 남겼다. 정지용은 조지훈의 문학이 지닌 ‘고전적 성격’을 예리하게 포착했으며, 그러한 개성이 우리 시단에 축복이 될 것을 알았던 것이다.실제로 조지훈의 시는 한국의 고유의상이나 한국불교의 전통 춤과 같은 제재뿐만 아니라 형태나 기법 역시도 전통적인 세계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조지훈의 시에는 시조나 한시(漢詩)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는데, 이것은 그가 한시를 직접 번역하고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조지훈 전집에는 무려 36편의 번역 한시와 19편의 창작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조지훈을 일컬어 ‘동양적인 세계를 우리의 새로운 시사에 수립한 거장’(박목월), ‘현대를 살다간 이조적(李朝的) 사림의 마지막 인물’(박노준), ‘우리 민족의 크고도 섬세한 손’(오탁번), ‘보편적 인문주의자’(윤석성)라고 칭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조지훈이 자신이 나고 자란 경북을 주된 시적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의 시세계 중에서 네 번째 시기에 해당하다. ‘조지훈 시선’(1956)과 ‘청록집 이후’(1968)의 후기에서 조지훈은 스스로 자신의 시세계를 여섯 단계로 나누었다. 그 각 단계는 ①서구적 감각의 화사와 퇴폐의 시(습작기와 문단 데뷔 직전의 동인지 시기), ②민족정서에 대한 애착과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수의 시(‘문장’지 추천 시기), ③선미(禪味)와 관조의 시(오대산 월정사의 시기), ④방랑과 운수심성(雲水心性)의 자연 은둔시(해방 직전, 조선어학회 시대), ⑤인생 사랑과 미움에 대한 고요한 서정의 시(해방 전후의 시기), ⑥현실 참여 및 사회 비판시(사회적 변동의 시기)(오세영, ‘조지훈의 문학사적 위치’, 조지훈, 최승호 편, 새미, 2003, 45면)로 나뉘어진다.이 중에서 경북이 문학적 대상이 된 때는 암흑기에 해당하는 일제 말기이다. 월정사에서 나온 조지훈은 19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사업을 돕다가 회원 전원이 검거되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일제는 상징적인 차원에서 우리 민족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는 조선어학회를 가혹하게 다루었고, 조지훈은 간신히 검거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 무렵을, 조지훈은 ‘나의 역정’(고대문화, 1955.12.5.)에서 성지순례와도 같은 심정으로 경주를 다녀오거나 여러 곳을 방랑한 시기라고 회고하였다. 경주 순례와 낙향 중의 방랑시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芭蕉雨’, ‘落花 1’, ‘落花 2’, ‘靜夜 1’, ‘靜夜 2’, ‘枯木’, ‘落葉’, ‘玩花衫’, ‘鷄林哀唱’, ‘倚樓吹笛’, ‘北關行 1’, ‘北關行 2’, ‘送行 1’, ‘送行 2’, ‘밤길’ 등을 들 수 있다.조지훈이 1942년 봄에 경주로 박목월을 방문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둘의 만남은 이후 청록파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문단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조지훈은 보름 정도 경주의 곳곳을 방문했는데,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창작한 것이 바로 ‘鷄林哀唱’이다.鷄林哀唱임오년 이른봄 내 불현듯 徐羅伐이 그리워 飄然히 慶州에 오니 복사꽃 대숲에 철아닌 봄눈이 뿌리는 四月일네라. 보름 동안을 옛터에 두루 놀 제 鷄林에서 이 한首를 얻으니 대개 麻衣太子의 魂으로 더불어 같은 韻을밟음이라, 弔古傷今의 하염없는 歎息일진저!1보리이랑 우거진 골 구으는 조각돌에서라벌 즈믄해의 水晶하늘이 걸리었다무너진 石塔우에 흰구름이 걸리었다새소리 바람소리도 찬돌에 감기었다잔띄우던 구비물에 떨어지는 복사꽃잎玉笛소리 끊인골에 흐느끼는 저풀피리비가오나 눈이오나 瞻星臺 위에 서서하늘을 우러르는 나의 넋이여!2사람가고 臺는 비어 봄풀만 푸르른데풀밭 속 주추조차 비바람에 스러졌다돌도 가는구나 구름과 같으온가사람도 가는구나 풀잎과 같으온가저녁놀 곱게 타는 이 들녘에끊쳤다 이어지는 여울물 소리무성한 찔레숲에 피를 흘리며울어라 울어라 새여 내설움에 울어라 새여!계림은 경주의 옛 이름이다. 시인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의 혼으로 이 시를 쓰고 있다. 마의태자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로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통곡하며 금강산에 들어가 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시인 역시 마의태자와 같은 망국민으로서 그 찬란한 신라의 유적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과 서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경주를 노래한 시 중에 조지훈의 ‘계림애창’ 만큼 애상적인 시는 드물 것이다.이 무렵에 발표된 15편의 시에는 슬픔과 상실감과 좌절의 정서가 가득하다. 특히 그것은 떨어지는 꽃이나 잎의 이미지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낙화), “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완화삼), “하나 둘 굴르는/落葉을 따라”(낙엽), “꽃 지는 소리/하도 가늘어”(낙화 2), “소리 없이 떨어지는/은행 잎/하나”(정야 1), “한두 개 남았던 은행잎도 간밤에 다 떨리고”(정야 2), “기울은 울타리에 호박꽃이 떨어진다”(북관행 1), “자욱히 꽃잎이 흩날리노라”(송행 1)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꽃이나 잎은 생명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꽃이나 잎이 떨어지고 죽어가는 상황은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져가던 일제 말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한다.또한 “달빛 아래 고요히/흔들리며 가노니……”(완화삼), “이 밤을 어디메서/쉬리라던고”(파초우), “나그네는 홀로 가고/별이 새로 돋는다”(고목), “산골 주막방 이미 불을 끈 지 오랜 방에서”(정야 2) 등에 나타나는 정처 없는 방랑자의 이미지 역시 조국과 자연을 상실한 식민지인의 자기 표상에 해당한다. 어떤 경우에는 망국민의 슬픔을 “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낙화)라고 직접적으로 표출하거나, “산새가 구슬피/우름 운다”(완화삼), “鶴이 운다/사슴도 운다”(의루취적), “산길 七十里를 뻐꾸기가 우짖는다”(북관행 2)처럼 주변의 동물에 의탁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조지훈의 경주 순례와 낙향 중의 방랑시편은 누구보다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했던 시인이, 일제 말기에 경험한 그 참담한 아픔을 고전적인 미적 기율에 바탕해 표현한 우리 현대시의 소중한 얼굴이다.작가 조지훈은…1920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동탁(東卓). 어린 시절엔 한학을 익혔고, 중학교 과정을 독학했다. 혜화전문학교 졸업 후 ‘문장(文章)’을 통해 등단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한 우아하고 섬세한 시로 유명하다. 경기여고와 고려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0년대 후반엔 현실 참여적인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4-20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시대, ‘불멸’을 떠올리다

불과 몇 개월 전. 이전엔 들어본 적 없는 생경한 이름의 바이러스 하나가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다. ‘코로나19’라고 했다. 이후의 상황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듯하다.우리가 온전하고 완벽하며 변함없을 것이라 믿어왔던 ‘일상’이 파탄을 맞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그만 바이러스 하나가 ‘지구의 지배자’라 스스로를 추켜세웠던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가 죽었고, 영국 총리 보리슨 존슨은 중환자실까지 실려 갔다가 한참 후에야 초췌한 모습으로 TV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탈리아는 국가 전체가 비상등이 켜진 폐차 직전 자가용 형국이다.점잖던 프랑스의 장관이 “왜 우리나라로 와야 할 마스크가 미국으로 간 것인가”라며 목소리 높여 분노했고,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유럽연합이 역사상 가장 큰 혼란에 빠졌다”고 한탄했다.유럽만이 아니다. ‘지구 위 경찰국가’를 자임하며 제 나라에 위협이 된다면 중동이건 아시아건 폭탄부터 쏟아붓고 보던 초강대국 미국의 자존심도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미 2만여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숨졌고,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한 병원 빈 방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시신을 촬영한 사진이 전 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한국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선진화된 사회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던 유럽과 미국의 방역 체계는 생각보다 허술했고 형편없었다.‘코로나19’가 야기한 이번 사태 이후 세상을 움직여온 패러다임이 대폭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서양은 동양을 향해 더 이상 ‘의료기술의 우위’를 말하기가 어렵게 됐고, 비교적 간단했던 국가간 이동에도 유무형의 장벽이 생길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보통 사람들의 자유로운 세계여행이 어려워질 수도 있는 것.더불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통한 비대면 강의와 교육이 보편화 될 것이라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일부 국가에서 야생동물을 함부로 먹던 습관도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사회·문화의 많은 측면들이 ‘코로나19 사태’ 전과 달라질 것이다.▲모래 위에 세워진 성 같았던 인간의 일상서양과 동양이 매한가지다. 유럽과 미국,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중동과 아프리카가 다를 바 없다. 소소한 기쁨과 자그마한 웃음으로 행복감을 느끼곤 했던 인간의 일상은 철옹성이 아닌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20년 봄의 각성’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허방다리 위를 걷는 위태로움에 처한 이때. 우리들은 쉽고 허술하게 무너지는 것의 반대편에 있는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과 ‘불멸하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캄보디아의 작은 도시 시엠립. 도처에 흩어져있는 크메르(Khmer)의 고대 유적들은 여행자의 눈을 매혹한다. 앙코르와트, 앙코르톰, 타프롬….크메르 제국은 지금으로부터 1천100년 전 생겨난 동남아시아의 고대 왕조. 현재의 캄보디아 지역에서 번성했다. 중국은 이곳을 ‘진랍(眞臘)’이라 불렀고,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세력이 커졌을 땐 캄보디아는 물론 주변 태국 동북부와 라오스·베트남 일부까지 통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바로 이 왕조의 가장 유명한 유적이 한국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앙코르와트다. 힌두교와 불교 관련 건축물과 조각품을 원 없이 만날 수 있는 곳.크메르 사람들은 왕이 죽으면 섬기던 신(神)과 하나로 합쳐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앙코르와트를 포함한 시엠립의 사원들은 각기 다른 왕이 자신과 합일하게 될 신을 위해 축조한 것이다,이제까지 다섯 번에 걸쳐 앙코르와트를 찾았다. 부조(浮彫) 한 점, 한 점에서 크메르의 역사와 유구한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었다.앙코르와트의 길고 긴 회랑에선 태양을 가려주는 차양막을 펼친 커다란 코끼리에 올라 정복 전쟁을 지휘하는 크메르의 왕들과 힌두교의 요정 압사라(Apsaras)의 돋을새김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것들이 적어도 800년 전에 새긴 것이라는 사실은 언제 봐도 잘 믿기지 않는다. 너무나 또렷한 형상으로 어제 만든 듯 존재하는 부조. 크메르 사원 석벽에 새겨진 조각들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부연 없이도 알게 해주는 증거물 중 하나다.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앙코르와트의 복도에선 자연스레 ‘불멸’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면 오탁번(77) 시인의 절창 ‘너의 별에서’가 떠오르곤 했다.▲‘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겠지만...그것이 정신의 영역이건 육체적인 것이건 사람들은 사랑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덧없고 헛된 욕망일지라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무한히 존재하는 ‘불멸’을 지향해왔다. 사랑도 불멸의 영역이 되기를 기원했다.시인 역시 ‘무서운 광속으로 다가와서/나도 모르는 나의 생애를 불 밝혀 놓는’ 사랑에 놀라워한다. ‘흰 수염 가득한 턱을 고이고/생각에 잠기고 또 잠기지만’ 사랑의 실체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별이 내뿜는 사랑의 빛은/1초에 우주를 일흔 바퀴씩 돌면서/너의 전생에서부터 오늘 한강 물결까지/완전하게 발가벗기고 있다’는 걸. 그래서다. 인간은 영원히 사랑 안에서 살다가 죽고 싶다. 불멸과 포옹하고 싶은 욕망에 들뜬다.캄보디아 시엠립엔 할리우드 영화 ‘툼 레이더’의 촬영 장소로 유명한 또 하나의 사원이 있다. 타프롬이다.거기선 열대의 거대한 나무와 석조 건축물이 애초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한 몸을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백 년간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다가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은 형상.모래성처럼 허술한 인간의 일상, 그걸 무너뜨린 바이러스, 천 년을 변치 않은 앙코르와트의 조각들, 오랜 대립 끝에 돌과 나무가 하나의 몸으로 사랑과 불멸을 꿈꾸게 된 사원…. 연결고리가 분명치 않은 이것들을 떠올리는 봄날이 어지럽다. 곧 깨어날 꿈이었으면 좋겠다./사진제공 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16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詩의 힘을 느껴보세요”

해사한 얼굴, 선량한 눈매, 소년의 웃음을 지닌 중앙대 이승하 교수. 얼핏 봐선 예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그늘이나 곡절 하나 없이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다.상처 받기 쉬운 예민한 영혼을 가진 이승하의 소년기는 ‘거의’ 지옥에 가까웠다.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 학교들은 군대 이상으로 폭력적이었고, 서울법대를 나와 판검사가 아닌 문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형님으로 인해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학교와 가정 어디서도 편히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처럼 어두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고교생 이승하는 신경 쇠약을 앓으며 가출과 자살 시도를 거듭했다. 그 결과는 퇴학 처분.하지만, 그에게는 ‘성실함’과 ‘예술을 향한 열정’이 있었다. 그것들이 파탄 직전에 이른 이승하의 청년기를 구해냈다. 회사원, 출판사 직원, 교수 등 어떤 직업을 가졌을 때건 성실한 삶의 태도를 버린 적이 없다.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20~30대를 보내고, 연구와 강의에 바친 40~50대를 지나 이제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떠올린다는 이승하 교수. 애잔한 눈빛으로 고향 쪽을 바라보는 그를 만나 살아온 내력을 이야기 들었다.-‘코로나19’로 한국 학교들이 전례 없던 상황을 맞았다. 대면 수업이 아닌 동영상 강의, 온라인 개강 등으로 어수선하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아주 우울하다. 교수란 직업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데 학생들 얼굴도 못 보고 동영상 강의 녹화를 하고, 과제를 이메일로 받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인적 없는 교정에 봄꽃이 활짝 피어 있어 눈물이 다 났다.-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김천에서 성장한 것으로 안다. 그 시절 잊을 수 없는 기억은.△경찰관이었던 아버지가 3년에 한 번 꼴로 전근을 다니셨기에 출생지와 성장지가 다르다. 김천에서 생활한 건 고등학교 입학한 이후 2개월 정도다. 그 이후로도 간간이, 혹은 한동안 부모님이 계신 김천에 있기도 했지만 주로 세상을 떠돌았다. 장문의 유서를 써놓고 집을 나가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서울 구경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작정 상경은 아니었고 나중에 출세해 어머니를 모시러 오겠다고 했다.-김천고등학교를 다녔다. 현대문학 분야에서 다수의 작가를 배출한 학교인데.△두 달밖에 안 다녔기에 교풍을 느낄 시간은 거의 없었다. 내가 입학한 그해 대도시 고교는 평준화되었고 소도시는 시험 제도가 유지됐다. 그런 이유로 인근 도시에서 수재들이 몰려왔다. 교사들도 엄격했다. 첫 번째 월말고사부터 틀린 문제 숫자만큼 매를 맞은 기억이 난다. 경찰직을 그만둔 아버지는 사법고시 1차시험에 합격한 형이 2차시험을 보지 않고 문학을 하겠다고 하자 분기탱천 했었다. 집에서 맞고 학교에서 맞고…, 견딜 수 없어 서울로 줄행랑을 놓아 고교시절이 끝나버렸다. 그래서 김천 출신의 문태준, 김연수, 김종태, 김중혁 같은 문인들을 학교 후배라고 하기엔 좀 어색하다. 문단 행사 등에서 만나도 선배티를 안 내고 존댓말을 쓴다.-경북에서의 소년시절은 어땠나. 외향적인 아이였는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는지.△후자다. 초등학교 5~6학년과 중학교 3년 동안 김천문화원 도서관의 책을 마음껏 빌려보면서 보냈다. 학교 성적은 부모님을 낙담케 했지만, 학원사 세계명작이니 계림문고니 하는 청소년용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보냈다. 책만 끼고 살았으니 나름대로 행복했다.-대기업 사원으로도 일했다. 교수 외의 직업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가.△1987년부터 1997년까지 11년 동안 샐러리맨이었다. 쌍용양회에서 7년을 근무했고, 문예출판사와 금강기획에서도 1년씩 근무했다. 회사생활 하면서 박사과정 입학시험 공부도 했었고 졸업까지 했다. 상사의 배려 덕분에 일주일에 하루 결근을 해도 결근 처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못한 일을 업무 외 시간에 하느라 고충이 많았다.1998년 인천 재능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로 있었고, 막 마흔이 된 1999년에 모교인 중앙대에 부임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20대와 30대가 힘들었다. 작년에 학교에서 20년 근속상을 받았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당신의 초창기 시들은 슬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회의, 시집 속에 사진이 들어간 형식적 파격 등으로 기억되는데.△내가 태어난 다음날 4·19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에 이상하게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때 아버지가 서울에서 근무했다면 분명 학생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무장공비 사건과 간첩단 일망타진 기사를 수시로 보던 시절이었다. 중동에선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남미에선 걸핏하면 쿠데타가 발생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마침 시 등단작이 ‘고문 정국’과 ‘보트피플’을 다룬 것이어서 그 뒤로 국내외 곳곳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시를 쓰게 됐다. 비극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사진을 시에 끌어들이게 됐다. 세상은 폭력과 광기가 난무하는 소돔이었고 무간지옥이었다. 순수서정시보다는 현실참여시가 내가 갈 길이라 생각하고는 뭉크의 그림 ‘절규’ 속 인물의 심정으로 시를 쓰던 시기였다.-올해 이순을 맞았다. 젊은 시절 시와 지금의 시가 달라졌는가.△시집 제목을 몇 개 들어보겠다. ‘폭력과 광기의 나날’,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엄살이 아니라 이런 시집을 누가 사볼 것인가? 다만 교과서에 3편이 실려 교사들과 학원 강사들이 내 시를 해설하고 문제로 내기도 한다. 며칠 전에 시집 ‘예수·폭력’을 냈는데 이제는 방향을 틀어 유쾌한 시, 밝은 내용의 시, 유머러스한 시를 쓰고 싶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시와 함께 소설과 평론도 쓰고 있다. 각각의 작업이 어떻게 다른지.△시를 쓸 때는 즐겁고, 신문 칼럼을 쓸 때는 펜이 춤을 춘다. 논문, 평론, 계간평, 심사평 등은 억지로 쓰는 탓에 등에 땀이 맺힌다. 소설은 품이 많이 들어 띄엄띄엄 발표한다. 그래도 최근 중편 하나와 단편 둘을 발표했다. 친일파 문제를 다룬 소설을 어떤 중견작가가 내리 3번을 읽었다고 해서 힘과 용기를 얻었다.-제자들에게 강조하는 삶의 자세는.△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말해준다. 부처와 예수와 마호메트가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인간을 연민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종교의 차이로 분쟁이 일어나니 너무 안타깝다.-당신의 기억 속 스승은. 그리고 아끼는 제자는.△권태을 선생님은 중학교 시절 3년 동안 글쓰기를 지도해주셨다. 고등학교를 퇴학당하고 방황할 땐 용기를 줬다. 대학 때 스승 신상웅 교수님은 소설가의 길로 이끌어준 분이다. 대학원 스승 김주연 교수님은 줄기차게 쓰는 사람만이 작가임을 가르쳤다. 제자가 등단을 했다고 알려오거나, 취직을 했다는 전화가 오면 종일 기분이 좋아 웃고 다닌다.-한 매체에 ‘내 영혼을 움직인 시’를 오래 연재했다. 어떤 시가 영혼을 움직이나.△현대시는 난해하고, 너무 길고, 산문 형식이라 시를 읽지 않게 됐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쉽게 이해되지만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시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해 365일 동안 1편씩 설명하는 작업을 꼬박 1년간 했다. 해설을 쓰는 것보다 시를 고르는 게 훨씬 어려웠다. 시의 힘이 거기 있지 않을까?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시인은 어떤 사람인가.△언어가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기쁘다고 환호성을 지를 수는 있다. 소리를 내는 자, 절규하는 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출간을 포함한 향후 계획은.△공초 오상순 평전과 청소년용 시인 윤동주 전기, 시조만을 다룬 문학평론집을 4월 말에 함께 출간한다. 예전에 낸 시집 ‘뼈아픈 별을 찾아서’도 재출간된다. 신들린 듯 쓰다 보니 책을 마구 내고 있다. 반성할 일이다.-삶을 돌아볼 나이다. 어떤 스승,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천재 시인이 아니라 성실한 시인으로, 엄한 스승이 아닌 따뜻한 스승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철없던 10대 땐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뛰쳐나가곤 했었다. 나이가 드니 고향 생각이 많이 난다. 얼마 전엔 ‘김천신문’에 김천 일대를 소재로 한 연작시를 20여 편 연재했다. 수구초심이라는 말의 뜻을 실감하는 요즘이다.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말해준다. 부처와 예수와 마호메트가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인간을 연민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종교의 차이로 분쟁이 일어나니 너무 안타깝다.언어가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기쁘다고 환호성을 지를 수는 있다. 소리를 내는 자, 절규하는 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15

40년 인생, 가장 가슴 뛰는 여행… 그곳엔 자유로움이 있었다

◇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에 가다엊그제 집을 나온 듯한데 벌써 한 달을 채웠다. 이렇게 오래 돌아다니는 여행은 젊은 시절, 20대에 했었어야. 마음은 있었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던 날들이었다. 이렇게 훌쩍 나이를 먹고서도 멀리 떠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번 여행이 나의 사십대에 가장 중요한 버킷리스트였다. 지난해 출발하려는 계획이 무위로 돌아가고 바등거리며 다시 떠날 계획을 세운 건 그만큼 ‘유라시아 횡단’이 중요했기 때문이다.지금껏 해보고 싶은 일들 중에 가장 가슴 뛰는 일이었다. 살면서 이것만은 해보고 싶은... 그런게 있지 않나.마흔부터 매년 세 가지씩 버킷리스트를 썼다. 지난해엔 딱 한 가지 ‘유라시아 횡단’만 생각했었다. 그게 한해 미뤄졌고 약간의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여기까지 왔다. 떠나온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바람을 가르며 달릴 때 느끼는 자유로움은 누구와도 공유하기 어렵다.인생은 한 번 뿐이고, 짧고, 뒤돌아보곤 후회할 일을 만들며 산다. 마흔 언저리쯤 겪었던 몇몇 슬프고 강렬했던 경험들이 이 생각을 더 굳게 만들었다. 그리고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에너지 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다.(무엇을 하건 회복하는 속도가 예전 같지 않다.) 건강할 때 몸을 써서 하고 싶은 일은 해야지, 마음먹은 이유다.오늘은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에 다녀왔다.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라트비아의 주요 작가와 작품을 훑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유럽의 변방이었고,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작품성이 뛰어나더라도 널리 알릴 기회를 잃어버린 작가들이 많았을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테두리 안에서 창작력을 억눌러야 했던 소련 시절, 1950-60년대 그려진 작품들이 가장 눈에 들어왔다. 크기도 대작이거니와 몸을 쓰는 사람들의 생동감과 건강함이 작품 속에 넘쳤다.비구상, 추상은 작품을 보자마자 ‘좋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어렵기 때문에 안목이 높지 않은 나로선 작가가 당시 처했던 현실은 접고라도 당장 눈에 들어오는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은 사진을 찍고(허락을 받았다) 작가의 이름도 따로 기록해두었다. 지하 전시장엔 젊은 예술가들의 영상, 설치작품들을 전시 중이었다. 그중 1971년 시베리아로 떠났던 시인 미에르발디스가 촬영한 영상과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와 편지 속에 넣어 보냈던 말린 야생화가 인상 깊었다. 38년이 지난 후 이 편지를 발견하고 영상을 다시 편집해 올린 이는 편지를 받은 친구의 아들(카리스탑스 에피너스, 정확한 발음인지 모르겠다.) 이 전시의 제목은 ‘Forget me not’. 그의 바람대로 그는 잊히지 않았다. 38년 동안 친구의 편지와 꽃을 간직하고 세월을 뛰어넘는 작품으로 만든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잠시 시인의 편지 앞에서 생각했다. 그의 편지를 해석할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돔 천장부터 지하수장고까지 모두 개방되어 있어서(수장고 출입은 불가능) 작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레드카펫을 유유히 밟고 내려오며 돔과 날개처럼 로비를 감싼 계단만으로도 개방감이 훌륭하다 감탄했다. 미술관으로 딱 적당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오늘도 여기저기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녔다.내일 떠난다고 생각하니 섭섭하기도 하고 볼만한 곳들을 더 찾아볼 걸 후회도 된다. 내일은 목적지를 생각지 않고 남쪽으로 출발.◇ 리투아니아 독립의 상징, 십자가 언덕드디어 리가를 떠나기로 했다. 결국 리가에서 해결한 건 아무것도 없다. 러시아를 벗어나 잠시 휴식한 셈. 고장난 곳을 임시 조치하고 오늘 350킬로미터쯤 탔는데 문제가 없는 듯하다. BMW 본사가 있는 뮌헨에 가서 부품을 구하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로시를 받을 때,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넘어올 때의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유럽연합은 교통만 놓고 보자면 가상의 국경선만 존재할 뿐이다.이리 왔다갔다 할 수 있는 편리함에 익숙해지면 쉽게 과거로 되돌리기는 힘들 듯하다. 영국의 ‘브렉시트’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피울 수 있는 고집이 아닐까. 도로를 이용해 이동할 수 있는 편리함을 맛보았다면 단언컨대 브렉시트는 나오지 않았으리라. 우리도 북한과 도로든 기차든 이어져 대륙으로 물류를 이동할 수만 있다면 더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수도. 한번 길을 내기가 어렵지 길이 열리고 나면 쉽게 닫히지는 않을 것이다.아침 떠나올 때 같은 방을 썼던 메르키비 아저씨가 가는 길에 시아울리아리 가까이 있는 ‘십자가 언덕’을 들렀다 카우나스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십자가 언덕은 라트비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상징하는 곳이다. 원래는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지였으나 나중에는 독립투사들의 영혼을 기리고 평화를 기원하는 공간이 되었다.지금은 누구나 십자가를 놓고 기도하는 이름난 순례지이자 관광지 같다. ‘십자가 언덕’에 놓인 십자가만 10만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충분히 납득이 간다.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을 단체로 찾은 다른 라이더들과 같이 잠시 안전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했다. (다른 라이더들은 다들 십자가를 들고 왔다!) 카우나스에 도착해선 숙소에서 라면 끓여 먹고 커피도 타 마시고 꼼짝 않고 쉬는 중. 메르키비 아저씨가 이곳 구도심도 멋지다고 했는데 내일 아침 일찍 바르샤바로 출발할 예정이라 오늘은 일찍 취침하기로.◇ 새로운 문제, 냉각팬 고장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이대로 달릴 수는 없는 상황. 바르샤바로 들어올 때 혹시 로시가 멈추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라디에이터 열을 식혀주는 냉각팬이 고장난 듯하다. 정지하고 있으면 온도가 치솟고 계속 경고등이 뜬다. 오늘 기온은 32도, 도로 위 온도는 38도까지 올랐다.(고속도로 전광판에서 확인했다.) 이 상태에서 냉각팬이 돌지 않고 도심 도로에서 정체 상태로 있으면 엔진 열이 오를 것은 뻔하다. 또 그 열이 또 고스란히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올라온다. 겨우 숙소를 찾아 들어와서 내일 로시를 끌고 어디로 점검을 받으러 가야하나 고민하는 중에 친한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바르샤바에 있는 자신의 친구 에바 씨에게 연락해보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이란. 한국말이 나보다 더 유창한 에바 씨에게 소개받은 미캐닉을 찾아가기로.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하며 어떻게든 반환점을 향해 가는 중이다.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어놓고 나면 항상 근처 식료품점부터 찾는다. 식사는 가능하면 숙소 부엌에서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거의 매일 장볼 때 콜라를 사서 마신다. 물을 마셔선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랄까. 콜라를 마셔야 그나마 해갈(?)이 된다. 숙소 벤치나 그늘에 앉아 콜라 한잔 마시면서 멍하니 있는 게 낙이다. 그런데 오늘 마신 라임 코카콜라는 오리지널보다 못한 듯하다. 지구가 뜨거워질수록 주가가 오를 기업은 코카콜라일 거다. 지금이라도 여윳돈이 있으면 투자할까보다. 지구온난화로 인류가 멸망하고 새로운 문명종이 나타나 인류의 유적을 발굴하면 가장 흔하게 발견될 것은 코카콜라를 담았던 용기들이 아닐까.    /조경국

2020-04-14

전통과 현대의 만남…구름 위의 행복한 마을 ‘구름에’

#. 벚꽃 속에 파묻힌 안동민속촌과 열녀 서씨봄을 더욱 봄답게 하는 벚꽃들은 잎에게 물려준 경주와 달리 안동에는 벚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대단한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의 생가 임천각과 군자정, 7층 전탑을 가로막아 철길을 낸 일제의 만행은 흉물이지만, 강 건너 민속촌 주위는 울긋불긋 꽃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80~90년대 수학여행이나 산업시찰, 답사 때 필수코스가 춘천의 소양강댐과 안동댐이었다. 안동댐을 의미 없이 보고 민속촌으로 갔다.안동댐 수몰지에서 옮겨온 고택들 대부분이 기와집들이지만, 안동민속촌에는 초가집들이 몇 채 옮겨놓아 깊은 향수를 느끼게 한다. 안동댐 주위의 대부분 지형이 그러하듯이 가파르게 경사진 좁은 골짜기 층층이 한 채씩 놓여있다. 기능 잃은 물레방아가 맑은 물을 쉼 없이 머금고 하얀 물줄기로 토해내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이원모 기와집은 멋 부리지 않은 담백한 맛이 흐르는 질박한 집이었다. 대문 붙은 사랑채와 안채가 한 몸 같이 ‘ㅁ’형으로 둘러진 집은 사랑채와 차이를 둔다고 했겠지만, 안채가 너무 높아 없어도 자존심 강한 안동다운 형식 같았다.연이어 영천 신령(영천의 옛 지명)에서 옮겨온 돌담집의 돌담은 한없이 정겨워 눈물이 날 것 같다. 댕기머리에 대바구니 들고 봄나물 캐러가는 수줍은 봄 처녀의 하얀 웃음소리가 돌담에 아련하다. 돌담 앞에 소나무가 멋없이 쑥 솟아있어 돌담 집을 방해하는데 가지를 자르든지 소나무를 없애면 정겨운 돌담집이 살아나겠다.그 옆에 돌담에 속삭이듯 피어있는 앵두꽃은 왜 이리 가슴을 울릴까. 박명실 초가집도 안동댐 수몰로 옮겨왔는데 추운 겨울을 위해 남부지방의 개방된 집이 아니라 폐쇄적으로 실용의 공간배치를 했다. 조그마한 디딜방아를 보니 삶의 애환이 물씬 풍긴다.그 위의 이춘백 초가집도 다른 초가집들과 마찬가지로 기둥은 크고 튼튼한 것으로 바꾸어놓아 옛 정겨운 초가집 분위기는 아니지만, 서까래는 연기에 검게 그을린 옛 그대로 복원해 놓아 다행히 옛 향수가 난다. 다음 박분섭의 까치구멍 집은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특이한 가옥 구조다. 안방, 건넌방, 부엌, 외양간 등등의 생활공간이 한 건물 안에 모여 있어 외양간 가축의 악취와 부엌 취사 연기를 밖으로 배출하는 연통구조이다.이 민속촌이 지금은 텅텅 비어 야외 박물관이 되었지만, 필자도 답사 단체를 데리고 와 몇 번이나 먹었듯이, 여기 초가집을 술과 안주, 밥을 파는 주막 겸 식당으로 활용했던 곳이다.제일위 가파른 산 언덕 위에는 영양의 석보에서 옮겨온 통나무집(귀틀집)에는 마침 갈대로 지붕을 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동네사람들이 품앗이 하듯이 했다면 지금은 일당 받는 인부들이 한다. 내려다본 초가지붕들은 아련한 그리움이 샘솟는 정겨운 풍경이었다.여기 민속촌에는 2기의 비가 있는데 고려시대 권백종(단종의 외증조부)의 효를 기리는 비가 있고 다른 하나는 공자의 이름 틀에 희생된 기구한 여인 이천서씨 열녀비가 봄바람에 떨어지는 꽃비를 맞으며 길손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김창경)과 사별하고, 몸이 불편한 시부모도 외아들 잃은 슬픔에 병을 얻자 며느리 서씨는 지극정성으로 간병했으나 세상을 떠났다. 즉시 시부모를 따라 죽으려다 장례를 치루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가련한 여인의 열녀비다. 나이(1795~1817) 겨우 22살로 4계절 중 봄만큼 고통을 안고 살다갔다. 전국에 수많은 열녀 중에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죽어도 시가에서 죽어라’는 당시의 윤리에 친정에도 갈 수 없었다. 결국 오갈 때 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죽음을 택한 형식은 열녀지만, 내용은 무언의 강요에 희생된 슬픈 열녀가 많다. 수줍은 앵두꽃도 화사한 벚꽃도 사람 없는 화려한 적막 속에 서 있다.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도 시대의 윤리에 희생된 수많은 꽃다운 열녀들의 혼령과도 같다.#. 고택들의 향연 ‘구름에’ 리조트민속촌에서 계속 올라 성곽을 지나면 기와 고택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여기도 안동댐 수몰지에서 옮겨온 고택 7채를 2012년에 ‘SK’, 문화체육관광부, 경상북도, 안동시가 4자간 협의로 SK의 사회적 기업 행복전통마을에서 운영하는 ‘구름에’리조트다.고택하면 귀신 나올 것 같고 불편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2000년대 서울 북촌 한옥 살리기부터 전국적인 열풍이 불어 전남에는 지원해주는 정책으로 많은 한옥들이 들어섰지만 일률적인 모텔에 기성품 한옥 같아 느낌도 감동도 없다. 서울, 인천, 여수, 경주 등등 전국에 한옥호텔이 많이 들어섰다. 경주 ‘라궁’도 5성급 호텔요금으로 잠시 인기 반짝이다가 문 닫았다. 지금은 신라호텔에서 한옥호텔을 야심작으로 짓고 있다. 고택이주는 오랜 세월의 무게감을 현대 한옥에 어떻게 스며들게 하느냐가 관건이다.갈수록 좁아지는 북쪽 골짜기에 제일 큰 계남고택을 맨 앞에 제일 작은 박산정(博山亭) 정자를 제일위에 알맞게 잘 배치해 놓았다. 밑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고택 하나하나 살펴보았다.입구의 계남고택은 나라를 잃자 순국한 향산 이만도 등 독립운동가 25명을 배출한 도산면 하계마을이 수몰되어 옮겨온 고택이다.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퇴계 이황의 8대손 이귀용이 지은 종가다. 성리학으로 무장된 안동 선비들의 고택들은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듯이 이 집도 규모는 크지만 담백하고 검소한 고택이다. 뒤에 칠곡고택은 퇴계의 10대손인 이휘면(1807~1858)의 고택(1831년 건립)을 이육사의 고향 원촌에서 옮겨온 고택이다. 나란히 붙어있는 3칸 서운정(栖雲亭) 정자는 탁 트인 서쪽을 한없이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 모든 숙소가 그러하듯 화장실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관건인데, 서운정만 둥근 욕조 갖춘 숙소여서 목욕 좋아하는 분들의 취향을 저격했다.중간에 우향각과 강동제사 주위에 붉게 물든 도화꽃이 핑크빛 봄을 알리고 있었다.제일 위에 있는 박산정 정자는 집보다 마음 수양하는 정자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안동의 정자 표본 같다. 아래 정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둥이 크면 힘은 있어 보여도 부드러운 낭만이 흐르지 않는다. 이 박산정도 좌우 2칸을 방으로 두고 중앙 1칸을 대청마루를 두었는데 힘 있고 단단한 맛이 흐른다. 아궁이가 정면에 있어 이채롭다. 아래 정자들이 사각기둥을 사용했는데 원기둥이라 한결 돋보인다. 공조참의를 지낸 이지(1560~1631)가 학문수양을 위해 1600년대 초기에 지은 정자다.32살 때 참담한 임진왜란을 당하여 동생들과 함께 의병에 가담했으니 인생 중반에 이런 정자를 짓고 누릴만한 참된 선비였다. 안동댐으로 인해 두 번이나 옮기는 운명이었지만 여기서 마지막 생이길 바라면서 옆 골짜기에 있는 한옥체험공간 ‘예움터 마을’을 둘러보았다. 구인당 좌우로 주자의 권학문, 매월당의 화개화사, 도연명의 권학문과 사시가 주련에 붙어있다. 주자의 시적이며 교훈적인 권학문보다 도연명의 직설적인 권학문 ‘젊음은 다시 오지 않고….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가 와 닿는다.활짝 핀 벚꽃을 가슴에 안고 안동 시내를 빠져나오는 곳곳에 나부끼는 21대 국회의원 선거 문구는 가짜보수, 진짜 보수로 서로 도토리 키 재기로 항변하고 있다. 선비의 고장,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안동에서, 정치란 자신의 이익보다 사회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의 도(道)인데…./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4-14

서정주 “목월은 남방적 향토정서를 표현한 최고의 시인”

한국근대시사에서 방언(方言)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백석(1912-1996)을 들 수 있다. ‘여우난골族’(1935)과 같은 작품은 “명절만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엄매’, ‘아배’, ‘진할머니’, ‘진할아버지’는 모두 백석이 나고 자란 평안북도 정주 지방의 방언이다. 백석은 방언의 전면적인 사용을 통하여 개체 차원은 물론이고 민족 차원의 시원(始原)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던 독특한 개성의 시인이다. 백석과 더불어 방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시인으로 김소월(1902-1934)을 들 수 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김소월이 남긴 230여 편의 시에는 방언 내지 방언에 준하는 말들이 80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김용직, ‘방언과 한국문학’, 문학과 방언, 역락, 2001) 김소월은 방언을 통해 독특한 시의 리듬을 창출하고 민족적 정서를 노래하는데 성공한 민족시인이다.이와 관련하여 시인 정지용(1902-1950)이 1940년 9월에 박목월을 문단에 추천하면서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 박목월이가 날 만한다. 소월의 툭툭 불거지는 朔州龜城調(삭주구성조)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 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다.”(‘시선후기’, 문장, 1940.9)는 추천사를 남긴 것은 주목할 만하다. 김소월이 그러했던 것처럼, 박목월 역시 방언의 적극적인 사용을 통해 향토적 서정과 전통적 가락을 창조하는데 성공한 시인이기 때문이다.서정주가 박목월을 일컬어 “남방적 향토정서를 표현”(한국의 현대시, 일지사, 1969)한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한 것처럼, 박목월은 가장 향토성이 강한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오세영은 이러한 향토정서를 구현하는 수단으로써, 박목월이 “향토에 대한 서경적 묘사”, “향토적 삶의 소도구”, “경상도 방언”을 활용했다고 말한다.(오세영, ‘박목월론’, 현대시의 실천비평, 이우출판사, 1983) 이러한 향토성을 구현하는데 모어이자 토박이말인 방언이 활용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본래 방언은 서민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언어로서, 지역성과 현장성을 진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방언이 많이 사용된 박목월의 대표적인 시로는 ‘아가’, ‘눌담’, ‘산그늘’, ‘목단 여정’, ‘한정’, ‘낙랑공주’, ‘진주행’, ‘적막한 식욕’, ‘치모’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시에 나타난 영남 방언으로는 “상기(늘)”, “해으름(해거름)”, “고누는(겨누는)” 등의 단어와 “아인기요”나 “안는기요”와 같은 종결형 어미가 꼽힌다. (이상규, 방언의 미학, 살림, 2007) 이 중에서도 ‘사투리’는 제목처럼, 박목월에게 사투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사투리우리 고장에서는오빠를오라베라 했다.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오오라베 부르면나는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나는 머루처럼 透明한밤하늘을 사랑했다.그리고 오디가 샛까만뽕나무를 사랑했다.혹은 울타리 섶에 피는이슬마꽃 같은 것을……그런 것은나무나 하늘이나 꽃이기보다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싶었다.참말로경상도 사투리에는약간 풀냄새가 난다.약간 이슬냄새가 난다.그리고 입안이 마르는黃土흙 타는 냄새가 난다.-‘난(蘭). 기타’(신구문화사, 1959)이 시에서 사투리는 언어 이전에 생명 그 자체이다. 언어가 천연색(天然色)의 입체를 흑백의 평면으로 바꾸는 것이라면, 사투리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미메시스(mimesis)하는 경이로운 수단이다. 그렇기에 “경상도 사투리”에는 풀냄새와 이슬냄새와 입안을 마르게 하는 황토흙 타는 냄새까지 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실감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기에, 소녀가 시인을 “오빠”가 아닌 “오오라베”라고 불러줄 때, 시인은 “앞이 콱 막히도록 좋”은 것이 아니라 “앞이 칵 막히도록 좋”다. 시인이 사랑하는 나무나 하늘이나 꽃은 “내 고장의 그 사투리”로만 표현이 가능하며, 그렇기에 시인이 “내 고장”과 “내 고장의 자연”과 그리고 “내 고장의 사람”에 다가가는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사투리일 수밖에 없다.시인이 추구한 방언의 미학이 꽃을 피우는 것은 ‘경상도의 가랑잎’(민중서관, 1968)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의 대부분에는 영남 방언이 적극적으로 구사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만술아비의 축문’은 자연스러운 시적 리듬과 방언의 능숙한 구사를 통하여 한국인의 심성 깊숙한 곳에 담겨진 인생 철학을 보여주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萬術 아비의 祝文아베요 아베요내 눈이 티눈인 걸아베도 알지러요.등잔불도 없는 제삿상에축문이 당한기요.눌러 눌러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윤사월 보리고개아베도 알지러요.간고등어 한손이믄아베 소원 풀어드리련만저승길 배고플라요소금에 밥이나마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여보게 萬術 아비니 정성이 엄첩다.이승 저승 다 다녀도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亡靈도 感應하여, 되돌아가는저승길에니 정성 느껴느껴 세상에는굵은 밤이슬이 온다.-‘경상도의 가랑잎’(민중서관, 1968)전통 사회에서 축문(祝文)은 가장 엄숙한 언어의 형식이다. 그것은 유교 사회에서 신(조상신)을 섬기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술은 그러한 권위를 뒷받침할 지식(“낸 눈이 티눈”)도 능력(“등잔불도 없는”)도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죽은 아버지 배고프지 말라고 소금밥이나마 꾹꾹 눌러 담는 정성 뿐이다. 그런데 2연에서는 이 정성이 기적을 일으킨다. 죽은 아버지는 만술의 정성에 감동해서(“엄첩다”) 감응을 하는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마음뿐인 만술의 정성은 이승과 저승을 건너뛰고, 결국에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까지도 넘나든다. 이 거룩한 사투리 축문이 읽히는 고요한 밤에, 세상에는 감응의 증표인 “굵은 밤이슬”이 오는 것이다. 만술과 죽은 아버지, 이승과 저승,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벽이 허물어지는 이 장엄한 순간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방언 이외의 다른 말을 떠올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1960-70년대 박목월의 시에서 방언의 사용이 늘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던 시세계가 일상적 삶을 대상으로 하는 시세계로 변모하면서 발생한 현상으로 이해하고는 하였다. 이와 관련해 방언과 방언을 낳은 표준어의 간략한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표준어는 19세기 서양에서 발생한 국가주의 시대의 산물로서, 국민의 의사 전달 수단을 통일하여 국가적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의 경우 ‘서울말’을 중심으로 한 표준어 개념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정책적으로 처음 도입되었고, 1930년대에는 조선어학회의 주도로 표준어 사정(査定)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 결과물이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으로서, 이 책은 표준어를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정의하고, 6천111개의 단어를 표준어로 선정하였다.(정승철, 방언의 발견, 창비, 2018) 한국사회는 광복 이후에도 표준어를 정책적으로 채택하였고,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력하게 표준어 정책을 추진하였다.이러한 상황에서 방언은 소멸되어야 할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어 교정과 극복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다. 이것은 중앙집권적인 사회 체제의 심화현상과도 맞물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향토를 사랑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정서와 가락으로 시를 썼던 박목월은 누구보다 민감하게 방언이 지닌 미학과 가치에 관심을 기울였다. 일제 말기 박목월이 ‘환상의 지도’에서 아름다움을 구현하며 광기의 시대를 건너려 했다면, 효율을 최우선시하며 모든 것이 표준화 되는 산업화 시대에는 ‘향토의 언어’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삶의 진실을 건져 올리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술의 그 갸륵한 마음이 담긴 방언이 무지와 차별의 표시가 아니라 개성과 존엄의 표시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시인의 꿈인 동시에 우리 모두가 간직해야 할 꿈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4-13

‘큰 섬’에서 미래를 낙관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혹자는 “그린란드(Greenland·대서양과 북극해 사이에 위치한 섬)보다 큰 건 섬이 아니라 대륙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또 다른 어떤 이들은 “어쨌거나 크기와는 관계없이 바다 위에 떠 있으니 섬이지 뭐…”라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를 둘러싼 재밌는 설전이다.지구 위에서 6번째로 큰 국가지만 인구는 한국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오스트레일리아. 두어 해 전 캥거루와 거대한 붉은 사막으로 유명한 이곳에서 1주일쯤 머물렀다.경험한 바에 의하면 오스트레일리아는 땅덩어리만이 아닌 대부분의 것들이 컸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서라면 183cm에 87kg쯤 되는 기자가 작은 편이 아니다.근데, 브리즈번 시내와 선샤인 코스트에서 만난 거리 청소부와 식당 아저씨, 버스 운전기사는 모두 100kg이 훨씬 넘어 보였고 키 역시 보통의 한국인보다 한 뼘은 커보였다. 갑자기 어린애가 돼버린 듯한 기이한 기분으로 둘러본 골드코스트 해변의 규모 역시 혀를 내두를 정도로 광활했다.사우스포트에서 시작해 서퍼스 파라다이스, 벌리 헤즈, 쿨랑가타 등 4개 도시로 구성된 골드코스트의 해변은 족히 20리는 뻗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한쪽 끝에서 바라보면 반대편 끝이 가물가물 아득했다. 마치 살아서의 세상 차안(此岸)과 죽지 못하면 알 수 없는 피안(彼岸)의 거리처럼.그 해변에서 건장한 체격의 호주 사람들이 파도타기를 하거나, 헤엄을 치거나, 일광욕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바다와 접한 식당에서 보니 그 나라 사람들은 덩치만큼 먹는 양도 상당했다. 10대 소년 앞에 놓인 스테이크 크기가 한국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스테이크의 2배는 돼보였다. 우리 일행은 결국 그걸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크기’와 ‘여유로움’에서 압도적인 나라브리즈번 외곽에선 호주 집의 크기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손만 뻗으면 바닷물이 닿을 거리에 지어진 고급 주택들 앞엔 아프리카나 중동의 독재자들까지 욕심낼 만한 잘빠진 요트가 줄줄이 정박돼 있었다. ‘1가구 1자동차’가 아닌 ‘1저택 1요트’의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지금이야 형편이 많이 달라졌지만, 국토는 넓고 인구는 적은 오스트레일리아는 20세기 한 때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손꼽혔다.빈부의 격차가 비교적 크지 않았고, 사회복지도 나쁘지 않았다. 제 나라로 삶의 터전을 옮겨온 이민자에게도 관대했다고 한다. 나눠 먹을 빵의 크기가 꽤 컸던 시절 이야기지만.오래 전 베트남 하롱베이 여행에서 부부와 아들 둘로 이뤄진 호주 가족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기계 수리공으로 25년쯤 일했다는 40대 중반의 호주인 아버지는 “내 집엔 테니스장과 수영장이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밀집돼 사는 한국에서라면 고졸 노동자가 그런 집을 가지기가 쉽지 않을 터.한국보다는 삶의 형편이 좀 더 좋아서였을까?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 대다수는 여유로움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버스에 오를 때도 앞서 탄 승객이 거스름돈을 받을 때까지 여유 있게 기다릴 줄 알았고, 버스기사 역시 탑승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거리에선 경보 선수인양 걸음을 빨리하는 이들을 보기 힘들었고, 자신이 주문한 음료나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안달하며 목소리 높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골드코스트 해변 야외 레스토랑에서 느릿느릿 여유롭게 점심을 즐기는 호주인들을 보며, 매번 급하게 숟가락을 놀려야 했던 한국에서의 점심시간이 떠올랐다.크고 여유로운 국가 호주에서 우리는 왜 ‘빨리빨리’라는 단어에만 방점을 찍은 채 강퍅한 표정으로 살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때 동시에 떠오른 게 김승희(68)의 시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였다.▲조금은 여유롭게 미래를 낙관해야….세상과 인간을 향한 민감하고 예리한 촉수를 가진 김승희 시인은 한국 현대문학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중진 작가다. 그는 앞서 언급한 시에서 중의적 의미를 가진 ‘그래도’라는 단어를 재치 있게 사용한다.우리가 통상 말하는 ‘그래도’라는 단어는 ‘그렇다 하더라도’의 의미를 지녔다. 그런데, 김 시인은 ‘그래도’를 제주도나 울릉도와 같은 섬(島)의 의미로도 쓰고 있다.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시적 변용이고, 재기 발랄한 문학적 장치다.김승희에 의하자면 ‘가장 낮은 곳에/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섬 ‘그래도’엔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그 사람들은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골방에서 목을 매고/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하지만 어떤 고통과 수난에도 ‘ 타오르는 찬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아간다.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면 시의 마지막에선 메시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라는 섬에서/그래도 부둥켜안고/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는 위무의 메시지.무시무시한 바이러스의 횡포에 봄 같지 않은 봄이 길어진다. 다른 도시에 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시절.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인간을 외떨어진 섬처럼 서글프게 한다.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억지로라도 여유로움을 만들어 김승희 시인이 안내하는 미래를 낙관해야 하지 않을까? 삶이 지속되는 한 희망이 온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으므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09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마술 향한 정열만은 쉽게 꺼지지 않았죠”

탁자가 저절로 공중을 떠다니고, 입에서 뿜어내는 불길이 어두운 거리를 환하게 밝힌다. 때론 손바닥에 올려놓은 동전이 중력을 거스르며 공중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보낸다. 마술공연이 펼쳐지는 현장 분위기는 언제나 흥겹다.포항에서 열리는 각종 축제 무대와 영일대해수욕장 거리에서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마술사로 살아가는 한인황(36) 씨.열서너 살 무렵 마술에 매료된 인황 씨는 삼십대 중반이 됐음에도 여전히 ‘꿈꾸는 소년’이다. 곤궁과 힘겨움이 닥쳐오더라도 스스로 선택한 삶을 후회 없이 걷고 있는 사람.인간은 꿈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늙는다고 한다. 그러니, 꿈을 버리지 않은 ‘거리의 마술사 한인황’은 아직도 새파란 청춘이다. 볕 좋은 4월의 봄날 오후.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 그를 만나 마술사의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에 대해 들었다.-마술사는 특이하고 드문 직업이다. 언제부터 마술에 관심이 있었던 건가.△‘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학교 때 친하던 급우와 장난처럼 TV에서 본 마술을 따라하곤 했다. 별것 아닌데도 마술을 보여주면 친구들이 웃으며 좋아하는 게 흥미로웠다. 그게 계기가 돼 스무 살 무렵부터는 본격적으로 마술을 배우고 싶어졌다. 함께 마술에 관심을 가졌던 급우 역시 계속 마술사의 길을 가고 싶었던지, 군대를 마치고 다시 만났을 땐 제법 실력이 좋아져있었다. 대구의 마술학원에서 2년간 본격적으로 여러 테크닉을 보고 익혔다고 했다. 그게 부러웠다. 스물서너 살 무렵부터 친구와 함께 부산과 일본 오사카를 오가는 크루즈선에서 마술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일종의 직업이 된 것이다. 유람선에 오른 관광객들에게 마술을 보여주는 게 재밌고 보람 있었다. 돌아보면 참으로 즐거운 시절이었다.-잘 몰랐던 사실인데, 마술을 배우는 학교나 학원이 있는 모양이다.△그렇다. 내 경우도 20대 중반에 마술을 가르치는 학과가 있는 동부산대학교에서 짧게 공부했다. 아쉽게도 졸업은 하지 못했다. 취미나 여가 활동으로 마술을 배우는 사람도 적지 않고, 마술 기법 등을 알려주는 학원도 있다. 하지만 내 경우는 크고 작은 공연을 통해 마술의 길로 들어섰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학교나 학원보다는 현장에서, 거리에서 배운 게 더 많았다.-TV나 인터넷 동영상 등에서 많은 마술사들을 만나게 된다. 당신이 좋아하거나 영향 받은 마술사는 누구인가.△내 경우엔 거대한 빌딩이나 건축물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게 만드는 큰 스케일의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보다는 비둘기와 촛불을 소재로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마술을 보여주는 랜스 버튼의 스타일을 더 좋아한다. 아마도 내 취향과 성정에 맞아서 그런 것 같다.-마술사로 활동한 곳이 다양할 것 같은데.△앞서 말했듯 처음 시작한 곳은 한국과 일본을 왕복하던 크루즈선이었다. 그걸 그만둔 후에는 경북 구미에서 친구와 마술학원을 운영했다. 그게 20대 중반 무렵이다. 마술학원에선 사회성이 좋지 못하고, 남들 앞에 서면 부끄러워하는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적극성을 길러주려 노력했다. 사실 마술을 배우면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즐거워진다.‘마술학원에서 뭘 배울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던 부모들도 막상 자신의 자녀가 표정이 밝아지고, 자신감을 얻으면 기뻐하며 나를 격려해줬다. 그런 게 마술학원이 가진 힘이다. 충북 청주에서 잠시 생활하며 카페에서 마술쇼를 관객들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그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방과 후 마술수업도 준비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아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마술사의 길을 계속 걸으려면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을 텐데.△물론 쉽지 않았다. 나이는 먹어 가는데 생활인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는 나를 어머니와 친척들이 많이 걱정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땐 외숙부가 자신의 사업체로 나를 불러 2년가량 일을 시키기도 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이 마술에 가있으니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매형의 소개로 포항의 한 회사에서 몇 년간 사무직원으로도 일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마음속 정열을 누르지 못해 방황했다. 회사원이 아닌 마술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결국은 30대 초반에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거리에서 마술공연을 시작했다. 모두가 그렇지만 나 역시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거리 마술공연가’의 삶은 어떤 것인가.△지금까지 10년 이상 마술을 해왔다. 그런데, 마술사에게도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다. 어린이날이 있는 5월과 크리스마스가 낀 12월이 성수기라면 나머지는 비수기라고 볼 수 있다. 마술사에겐 비수기가 너무 길다.(웃음) 그래서 고민 끝에 나온 대책이 무대 공연과는 또 다른 거리 마술공연이었다.거리에서의 공연이 시작된 건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야외무대다. 지금은 거기서 공연을 하려면 허가를 얻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4년 전에는 누구나 ‘거리의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대구에서 온 어떤 ‘거리 예술가’가 풍선쇼와 불쇼로 관객을 유혹하는 걸 본 후에 ‘나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커졌다.-거리 공연만의 매력이 있을 것 같다. 또한 어려움도 있을 텐데.△특정 공간에서 내 마술을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자유롭게 연습하고, 스스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관객들과 만나고, 아이들에게 웃음을 선물해줄 수 있다는 게 좋다. 처음 거리에 섰을 땐 부끄럽고 어색했다. 관객이 10명 이하인 경우도 흔했다. 마술공연이 끝나면 사람들이 수고했다는 의미로 주는 ‘자발적 관람료’도 처음엔 3천 원 정도가 전부였다. 그게 나중엔 20만~30만 원으로 늘어났으니 나름의 노력은 다했다고 자부한다.힘든 점은 혼자서 모든 걸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리에 서서 마술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공연이 끝날 때까지를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한다. 거리 공연의 노하우를 익히기 위해 ‘거리 공연의 메카’로 불리는 부산의 해운대해수욕장을 아마 50번 이상은 방문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마술사로 살면서 느끼는 즐거움은.△잠깐이지만 사람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준다는 게 보람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또한 답답했던 내 가슴도 시원스럽게 트였다. 물론 돈도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만족감을 돈과 바꿀 수 있을까?-반대로 마술사로 살며 서글펐던 순간은.△다른 사람들처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은 내게도 있다. 앞으로 얼마 동안 마술사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떠올려보면 막막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때는 ‘누구에게나 어려움과 고난은 있다. 나는 아직도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라는 혼잣말로 스스로를 위로한다.-잊을 수 없는 관객이 있는지.△거리 마술공연이 끝난 후 5만 원을 ‘자발적 관람료’로 준 주부가 있었다. 아이들이 날 자기네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할 만큼 마술을 좋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아들과 딸이 공연을 보며 느낀 행복감을 내게 돌려준 게 아닐까? 어떤 할머니가 마술을 보며 눈물을 흘렸던 것도 기억난다. 왜 울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도 궁금하다. 아마도 아주 오래 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천막극장에서 마술공연을 보던 어린 날이 떠올라서가 아닐까라고 짐작할 뿐이다.-당신에게 마술이란.△포기할 수 없는 꿈이고, 내 삶의 전부다. 다른 곳에서 무엇을 해도 공연무대가 떠올랐고, 회사원으로 살 때도 애타게 그리워했던 게 바로 마술사의 삶이었다.-‘코로나19’로 인해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어떤 심정인지.△많은 ‘거리 공연가’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불가능하니 어떤 공연도 열릴 수가 없다. 하지만 비극에도 끝은 있는 법이니 다시 관객들과 만날 날을 준비 중이다. 그땐 깜짝 놀랄만한 마술로 바이러스에 고통 받은 사람들을 위로해줘야 하지 않겠나.-마술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진심으로 마술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 부지런히 연습해서 ‘부산 국제 매직 페스티벌’과 ‘피즘(FISM·마술사들의 올림픽)’ 등 마술대회에 참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잠깐이지만 사람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준다는 게 보람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또한 답답했던 내 가슴도 시원스럽게 트였다. 물론 돈도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만족감을 돈과 바꿀 수 있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08

오랜 숲을 간직한 ‘라트비아’… 여유롭게 걷기 좋은 ‘리가’

◇ 수리점을 찾아 헤매고, 부츠를 수선하다오토바이를 가지러 BMW 모토라드에 다녀왔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한 시간쯤 담당자를 기다린 다음에야 찾을 수 있었다. 라트비아 모토라드의 문제점은 미캐닉을 직접 만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제외하고 저것만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게 국내라면 가능했을 텐데 철저하게 손님과 미캐닉 사이에 소통은 할 수 없었다. 숙소 직원에게 소개 받은 곳으로 오토바이를 끌고 갔다. 시내 반대편에 수리점이 있어 겸사겸사 리가의 전체적인 풍경도 감상할 수 있었다.옛 건물들과 숲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점은 리가의 매력. 도심 개발이 한창이지만 구시가지는 잘 보존되어 있고 그걸 보기 위해 찾는 관광객도 많은 듯하다.모토라드를 뒤로 하고 찾아간 수리점 이름은 ‘탠더스’. 미캐닉 마르씨가 로시를 보더니 문제없이 고칠 수 있지만 지금은 작업이 어렵고 다음 주 수요일에 다시 오란다. 작은 작업장 안에도 밖에도 대기하고 있는 오토바이가….어쨌거나 함께 교체하거나 손 봐야할 부품에 대해 확인했고 예약했다. 걱정 말라고 하니 걱정은 털어버리는 걸로. 숙소에 돌아와서 밑창 벌어진 부츠를 들고 구두 수선점을 찾아가 맡겼다. 이탈리아 본사에 가려던 계획은 접었다.오래된 건물 1층에 있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꼭 100년 전으로 세월을 거슬러가는 기분이었다. 양쪽 모두 수선하는데 드는 비용은 10유로. 수선공 할아버지께서 금요일에 찾으러 오라고 하셨다. 오토바이 수리를 마칠 때까지 최대한 다음 여정에 차질 없도록 그동안 불편했던 건 매일 하나씩이라도 해결하기로. 거의 한달 내내 입었던 슈트를 세탁하고 국립미술관에 가볼 생각이다. 두 군데 헌책방을 찾았으나 문 여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모두 문을 닫았다. 여기도 나처럼 불량한 책방지기이거나 형편이 어려운 것이겠지. 러시아를 지나오면서 모스크바에서 딱 두 명 책 읽는 사람을 봤고, 리가에선 아직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어디든 책 읽는 사람들이 소멸하고 있는 증거일까.리가 인구는 65만 명(광역 100만 명)정도.라트비아 전체 인구는 약 200만 명이다. 제정 러시아와 소련으로부터 두 번 독립했다.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감정은 나쁜 편이지만 현재 리가 인구의 30퍼센트는 러시아인이다.◇ 여유롭게 걷기 좋은 도시, 리가리가에서 5일째. 만약 사고 없이 달렸다면 폴란드를 지나고 있었을 테다. 슈트를 세탁해 널고 짐을 다시 정리했다. 사이드 박스 하나가 없는 상태라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기로. 최소한으로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줄일 짐이 있다. 그러고 보면 평소에도 너무 많은 것을 이고지고 살고 있는지도. 올드 리가(옛 시가지)를 걷다 이대로 미캐닉만 믿고 있을 게 아니라 그냥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낫겠다고 결론 내렸다.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필요한 부품을 유럽 어디론가 받아서 직접 수리하기로 했다. 우선 계기판 지지대와 양쪽 외장 카울, 앞 오른쪽 방향 지시등, 그리고 사라져버린 몇 개의 볼트와 너트만 있으면 달리는 데 문제가 없으니. 계속 리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간 다시 러시아까지 돌아가는 시간이 촉박할 수밖에 없다. 리가에 있는 공구상가에서 재료를 사서 임시 조치해둔 곳을 보강해 부품 받을 곳까지 달리기로 했다. 공구상가에 가면 무언가 쓸만한 재료들이 있을 것이다.리가는 여유롭게 걷기 좋은 도시다. 인구가 65만 명(광역 100만 명)정도. 라트비아 전체 인구는 약 200만 명이다. 제정 러시아와 소련으로부터 두 번 독립했다.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감정은 나쁜 편이지만 현재 리가 인구의 30퍼센트는 러시아인이다.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또 반대로 러시아와 가까이 있고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러시아에 진출하려는 회사나 자본이 라트비아를 교두보로 삼는다는 글을 읽었다.리가 시내에 즐비한 고급 차들과 건설 현장이 그 증거. 생산 시설이 거의 없음에도 부를 누리려면 무역, 금융, 관광, 서비스업 외에는 길이 없다.지리적 이점은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번영과 침탈의 가능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북해를 끼고 러시아와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독립했음에도 라트비아로선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는 처지리라. 1991년 독립 이후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들어간 것은 최근 러시아와 갈등을 빚고 있는 우크라이나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리가가 가진 도시의 품격은 옛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는 올드 리가와 도시를 아늑하게 만드는 오랜 숲인 듯하다. 건물보다 숲에 더 점수를. 왜 내가 사는 동네는 가로수 가지치기를 그렇게 매정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대로 두어도 참 좋을 텐데.◇ 전설의 경주차, 오토유니언 타입 C/D오토유니언 타입 C/D가 리가에 있다고! 입장료 10유로쯤이야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우디의 전신 오토유니언이 만든 전설의 ‘아름다운’ 경주차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덤으로 옛 오토바이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리가 자동차 박물관은 시내 중심가에서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굳이 타입 C/D가 아니더라도 입장료를 낼만큼 충분한 전시물과 콘텐츠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인 자동차를 완벽한 상태로 복원하고 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물론 그 중 백미는 C/D. 이곳에서 보니 1930년대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다들 특별한 능력을 가졌던 모양이다. 1930년대로 넘어오면서 자동차의 성능도 비약했지만 디자인만 놓고 보면 성능의 발전 이상으로 기계적인 아름다움을 극도로 끌어올린 시대였던 것 같다.리가 자동차 박물관과 이르쿠츠크 앤티크 모터사이클 박물관에서 본 것만으로 글 한 편을 쓸 수도 있겠다. 두 곳 모두 우연히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관람했는데 오토바이나 자동차(작고 실용적인 차를 좋아한다. 러시아에서 LADA 니바 보고 반했다)를 좋아하다보니 이런 류의 박물관은 자연스레 관심이 간다.박물관을 포함한 전시공간은 단순히 소장품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건물만 지어 놓고 계속 새롭게 바꾸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중소 도시의 박물관이라면 현재와 소통할 수 있는 분야, 소장품과 내용을 쉽게 업데이트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다. 내가 사는 동네를 언급해서 그렇지만 한동안 문을 닫았던 청동기 박물관이 그랬다.(그곳에 청동기 박물관을 짓는 게 적절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옛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만, 단순히 옛 유물과 복원품만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가 어렵다. 박물관을 다녀오고 리가 중앙 시장에 가서 밥도 사먹고 체리도 사먹고 내내 쏘다녔다. 일주일쯤 있으니 리가가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한낮 기온은 30도, 위도가 우리보다 한참 위인데도 날씨가 뜨겁다. 아래쪽은 얼마나 더울지. 내일이 리가에서 마지막 날이다. 내가 있는 방(4인 도미토리)엔 여행자들이 계속 바뀌어 하이와 굿바이를 반복 중. 모레 아침 일찍 폴란드를 향해 출발할 계획이다.    /조경국

2020-04-07

생가는 철거를 앞둔 방치된 집 같아 참담하다

흔히 죽음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 3가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누구나 아는 것 3가지는 누구나 죽고, 오는 순서 있어도 가는 순서 모른다는 것과 아무도 동행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은 무엇을 먹고 사는 것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듯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던 자신을 위하던 죽음은 숭고한 의미를 지닌다. 이육사!그 이름만으로 우리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불덩어리 기운을 안겨 주었다. 이육사가 나고 자라 혁명적 자양분을 흠뻑 받았던 고향 원촌마을과 묘소, 안동시내로 옮겨놓은 고택을 숙연한 마음으로 찾아 나섰다.#. 나라 위해 몸 바친 숭고한 사람들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에다 농경 정착생활이라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지만, 유목민들이나 척박한 땅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약 1천여번이나 외침을 당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때마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이 되어서 바람 앞에 등불인 나라를 구했다. 당시 세계최강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 몽고와의 끈질긴 전쟁과 7년의 임진왜란 등등의 국난을 당할 때 마다 온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적의 침입을 막아냈다.이육사(1904~1944)가 살았던 조선말을 보자.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쟁탈전이 된 조선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민영환(1861~1905)은 조약파기와 찬성파 대신들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영환은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 하노라.” 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척족이라 일찍부터 출세의 길이 열려 고위직에 있었고, 그의 자결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켜 백범 김구와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가 땅을 치며 통곡했다.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출신인 민영환이 자결하자 ‘자결’ 도미노 사태가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의병들은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왜변) 이후 전국에 들불처럼 일어났다. 나라 망한 일제강점기에 양녕대군 16대손 왕족이라고 내세운 이승만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두 번이나 장원하고도 나라의 혜택을 받지 못한 매천 황현(1855~1910)은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지 500년이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은가. 하면서 절명 시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낮을 찡그린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가을 등잔불 밑에 책을 덮고 수 천 년 역사를 회고하니/ 아 참으로 이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구나.’ 등의 절명 시 4수를 남기고 더덕 술에 아편 타마시고 순국한 선비도 있다.#. 혁명가 이육사지금이야 어디서 태어나 어디에 살던 여기저기 옮겨 사는 유목민적 삶이라 태어난 고향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80년대 중반까지의 고향은 절대적인 자양분을 받았다. 그래서 작가는 어릴 때 형성된 정서로 평생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이육사가 16살까지 살았던 고향 원촌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저 멀리 산들이 병풍처럼 줄지어 서있고 낙동강이 푸른 물 간직한 채 절벽의 바위를 때리고 자갈에 부딪히면서 모래를 적시고 흘렀다. 산을 등지고 있는 마을은 옹기종기 모여 살았고, 강과 마을 사이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말달릴 수 있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있다. 가히 무릉도원이라 할만하다.이런 고향분위기지만 이육사는 고단한 시대에 태어나 식민지 현실에 정면으로 부딪치며 헤쳐나가다 감옥에서 순국 했다. 어머니 허길 여사는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1854~1908)의 4촌형 범산 허형의 딸이고 퇴계의 진성이씨 집안에 안동의병장 이인화부터 수많은 독립지사들 집안이었으니 6남매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이육사는 17살 되던 1920년 온 가족이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 갔었고, 이미 한학을 했지만 일본과 중국유학을 한다. 1925년에 형 원기 동생 원유와 함께 약산 김원봉(1898~1958)이 이끄는 항일무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3형제가 대구형무소에 3년 복역한다. 그때 수인번호가 264번이라 이원록에서 이육사로 바꾼다. 기자생활(1929~1937) 8년 하면서 1931년에 대구격문사건으로 두 번째 구속되고 풀려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학하여 졸업 희곡작품이 “토지가 농민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완전한 노동자,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를 꿈군 ‘지하실’이다. 17번이나 투옥과 구금되었으나 강철 같았던 의지의 이육사는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에 베이징의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한 많은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감았다. 유골은 먼 친척 이병희와 동생 원창에게 전해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대 고향 뒷산에 부인 안일향 여사와 나란히 누워있다.이육사의 첫 시는 1933년 ‘황혼’, 39년에 ‘청포도’, 유고집에 ‘광야’등 총 36편의 시를 썼다. 100여 편의 시를 쓴 윤동주는 일본유학 가기위해 창씨개명 했지만, 맑은 영혼으로 자아를 성찰하는 아픈 마음으로 쓴 시가 참회록이었다면, 이육사는 가슴에 강철 같은 뜨거운 불덩이안고 맑고 웅혼한 시어를 폭포수같이 품어낸 혁명가이며 독립운동가, 시인 이였다.#. 생가와 기념관이육사문학관이 있는 고향 원촌마을은 예전에도 몇 번 왔고, 이번에는 매주 왔지만 안 가 본 묘소와 안동시내로 옮겨온 생가도 지금 모습 보려 늦은 오후에 안동으로 출발했다. 남쪽과 북쪽의 위도 차이로 경주는 꽃 봄이 완연하지만 안동은 지구가 자전하는 만큼의 속도로 천천히 꽃 봄이 오고 있었다. 춘분이 지난 4월 초순이라 6시가 지났는데도 하늘에 해는 밝았다.안동시내 태화동 비탈진 언덕에서 마주친 생가는 꼭 철거를 앞둔 방치된 집 같아 참담했다. 입에서 욕이 주저리주저리 나왔다. 정갈하게 수리하여 문화재 돌보미 한명이라도! 이육사가 어떤 사람인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청포도)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한(광야)- 시 한 구절에 얼마나 가슴 조였던가. 그런데 생가를 이렇게 방치하다니. 문패도 대문 열쇠도 녹슬고 잠겨진 채 있었고, 좁은 마당에 활짝 핀 앵두꽃도 애처로운지 꽃 웃음도 흘리지 않았다.원촌마을에 들어서니 어둠이 내려앉아 불빛만 전설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학관 입구에는 강철 같은 선비 혁명가 시인이 고향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학관 위에는 생가가 원형이 변질되어 생가로서의 기능이 훼손되어 고증을 거쳐 육우당(육형제 우의를 기린다는)을 복원해 놓았다고 했다. 참으로 소가 웃을 일이다. 어떤 자가 고증했기에 이따위로 했는지 기가 찬다. 일부는 원형이 변질되었더라도 그 생가를 보완해서 세워야지 오리지널 진품을 두고 모조품 만든 격이다. 1976년 안동 태화동에 안동댐 수몰로 옮겨놓은 생가는 방치는 되었지만, 70~80%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우리나라 문학인들이나 큰 스님들 생가 복원 하는 것 보면 눈뜨고 못 본다. 산청에 성철스님 생가 복원해 놓은 겁외사는 생가는 온데간데없고 으리으리한 한옥에 웅장한 절, 그리고 스님의 동상까지 세워놓아 산청군과 제자들은 검소했던 성철스님을 똥칠했다. 경주에 박목월 생가는 흔적도 없고 그 위 언덕에다 이상한 건물을 지어 놓고 동리목월문학관을 국민세금으로 수백억 들여서 불국사 옆에다가 세워놓았다. 스승을 핑계 삼아 문화가 뭔지도 모르는 안목 없는 제자들의 경로당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반사람들은 향기를 못 느끼게 해놓았다. 이 육우당도 이육사의 채취와 향기도 없고 영혼 없는 박제된 건물이라 안타깝다. 날은 점점 어두워 산길 이육사 묘소에 한참을 오르니 등위에는 반달 지나 보름으로 커가는 달빛이 산길을 비추고 있었다. 아직도 2km 남아 혼자서 망설이다 아쉬운 발걸음 되돌려 내려왔다.문학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청포도 공원이 생가 터였고, 그 옆에 고택다운 운치 있는 목재고택이 단정히 앉아있다. 그 고택에는 이육사 아들은 일찍 죽었고, 1943년 청량리역에서 북경으로 압송되어가면서 욕심 없이 남을 배려하라고 지어준 4살 딸 옥비(沃非)에게 ‘다녀오마’ 마지막 말 남기고 생이별한 딸이 살고 있다. 그 옆 진성이씨 원촌파 종손 이재철 변호사의 ‘원대고택’은 필자가 옮기지 말고 수리만하라고 자문해준 집이고, 그 옆에 사은구장 고택은 독립운동가 이원영 목사집이다. 가슴이 아픈 만큼 밤하늘도 어둡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04-07

경주라는 헤테로토피아가 있었기에 창조된 유토피아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에 당시 조선문단을 대표하던 김남천, 이원조, 이태준, 한효, 한설야, 임화, 이기영, 김사량이 봉황각이란 중국요리집에 모인다. 친일에 대한 문인의 자기 비판이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이다. 이 자리에서는 지금도 음미할 만한 여러 논점들이 제시된다.이태준은 8.15 이전에 가장 위협을 느낀 것은 “문학보다 문화요 문화보다 다시 언어”였다면서, 조선어가 말살되는 상황에서 일본어로 글을 쓴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논지를 펼친다. 이태준의 이 발언은 이 자리에 모인 문인 중에서 일본어 소설 ‘빛 속으로(光の中に)’(문예수도, 1939.10)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에까지 올랐던 김사량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일제 말기 조선의용군의 중심지인 태항산으로 탈출하여 항일활동을 벌인 김사량은 문화인이란 “이보 퇴각 일본 전진”의 자세로 싸우는 자이며,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가 논의될 문제”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심중에는 일본어 글쓰기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는지, 일제 말기 문인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붓을 표면에서는 꺾었으나 그래도 골방 속으로 책상을 가지고 들어가 그냥 끊임없이 창작의 붓을 들었던 이”를 제시하며, 그런 문인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 앞에 모자를 벗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문학자의 자기 비판’, 인민문학, 1946.2)라고 덧붙인다.사용이 금지된 조선어로, 그것도 발표를 기약할 수도 없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결단코 범인(凡人)이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문학사에서는 다행히도 조선어가 사라지고 일제에의 맹목적인 복종만이 요구되는 시대에도, 소중한 조선어로 우리의 삶과 자연을 노래한 문인들이 있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박목월(1916-1978)도 바로 그 자랑스러운 얼굴 중의 하나이다.윤석중(1911-2003)은 ‘어린이날 노래’, ‘퐁당 퐁당’, ‘고추 먹고 맴맴’ 등 약 1200편의 동시를 발표한 한국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이다. 그는 1940년대 도쿄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을 맞아 서울로 가는 길에 경주에 있는 박목월을 방문한다. 운석중은 1930년대 잡지 ‘어린이’, ‘소년중앙’, ‘소년조선일보’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동요작가인 박목월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박목월은 중학교 3학년이던 1932년부터 동요를 투고하다가, 1933년 6월 ‘신가정’에 ‘제비맞이’가 현상 당선되면서 정식으로 등단한 동요 시인이었다. 동요 시인으로 활동하던 당시에는 목월(木月)이라는 필명 대신 본명 영종(泳鍾)을 사용하였다.윤석중은 박목월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밤을 새워 동요이야기를 하다가 “발표할 데도 없고, 불러 줄 아이도 없는 노래를 자꾸 지어서는 무얼 하누…”라고 탄식한다. 그 말을 듣자 박목월은 정색을 하면서 땅을 파고 묻어 두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윤석중, ‘목월과의 사귐’, 박목월, 순한 눈망울을 스쳐간 인연들의 회상록, 국학자료원, 2008, 35면) 이 당시 박목월은 실제로 주옥같은 시를 우리말로 써서 해방의 날까지 땅에 파묻어 두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록집’에 수록된 15편의 명시들이다.1916년 경북 경주군 서면 모량리 571번지에서 태어나 자란 박목월은, 해방 이전까지 경주의 품 안에서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산문 ‘나와 청록집(靑鹿集) 시절’에서 박목월은 문학청년 시절 경주에서 문학에 뜻을 둔 친구는 김동리, 이기현 등이 있었지만, 어울릴 기회는 많지 않아 “나는 늘 혼자였다.”며 “실로 내가 벗할 것이란 황폐한 고도(古都)의 산천과 하늘뿐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경주의 동부금융조합 서기 일이 끝나면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 분황사로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경주에서 꽃 같은 젊음을 보내며, 왕릉에 누워서 달을 보거나 오래된 기와 조각을 툭툭 차면서 길을 걷는 박목월의 모습이 손에 잡히듯 생생하다. ‘청록집’은 “이 풀 길 없는 고독이 안으로 응결”(박목월, 문학사상사, 2007, 271면)되어 탄생한 것이다. ‘청록집’에 수록된 15편의 작품 중에서 ‘춘일(春日)’은 직접적으로 경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춘일(春日)여기는 慶州新羅千年……타는 노을아지랑이 아른대는머언 길을봄 하로 더딘 날꿈을 따라가며는石塔 한 채 돌아서鄕校 門 하나丹靑이 낡은 대로닫혀 있었다.‘춘일(春日)’은 교촌에 있는 향교가 배경이며, 열릴 듯 안타깝게 닫혀 있는 향교문과 ‘타는 노을’의 이미지를 통해서 천년 고도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감추듯 드러낸 작품이다. 이러한 애수는 일제 말기라는 상황과 맞물려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는 차원으로까지 확장된다.일반적으로 박목월의 시세계는 크게 자연을 대상으로 한 초기 ‘청록집’(을유문화사, 1946), ‘산도화’(영웅출판사, 1955), 가족과 일상을 소재로 한 중기‘난(蘭)·기타’(신구문화사, 1959), ‘청담’(일조각, 1964), ‘경상도의 가랑잎’(민중서관, 1968), 존재의 근원을 탐구한 후기 ‘무순’(삼중당, 1976)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박목월에게는 경주를 소재로 한 작품이 ‘청록집’ 시절부터 말년에 해당하는 ‘무제(無題)’(심상, 1977.7)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나타난다. ‘불국사’, ‘선도산하’, ‘사향가’, ‘춘일’, ‘청운교’, ‘토함산’, ‘왕릉’, ‘보랑’, ‘무제’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으며, 이들 작품은 불국사, 선도산, 청운교, 토함산, 안압지, 석가탑 등의 명승고적을 박목월 식의 절제된 언어와 빼어난 음악성으로 표현한 가작(佳作)들이다. 특히 ‘사향가’는 경주가 시인에게 얼마나 신성한 곳인지를 잘 보여준다.경주는 시인이 사는 서울에서 하룻밤을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서울과 경주는 “막막한 地域”과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에 해당할 정도로 대비적이다. 시인의 경주에 대한 동경은 점차 확대되어 서울과 경주는 “이승과 저승”에 해당하는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경주가 이토록 위대한 것은 이름난 곳이 많아서가 아니라 경주에 사는 사람들이 “千年을/한가락 微笑로 풀어버리고” 사는, “연꽃하늘 햇살속에/그렁저렁” 사는 위인들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의 삶을 “귀양온 영혼의/무서운 刑罰”이라고 생각하는 시인에게 경주는 어머니의 몸과도 같은 영원한 귀의처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곳은 마지막 연에서 알 수 있듯이, 결코 현실에서는 도달가능한 곳이 아니다.한동안 박목월이 시로 표현한 자연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일테면 ‘나그네’의 “술 익은 마을마다/타는 저녁놀”이 피폐한 일제 말기의 조선 현실을 미화했다는 식의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충분한 반박이 있었으며, 현재는 ‘나그네’와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어둠의 극단에 이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방편으로 창조한 상상의 공간이자 미의 유토피아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박목월 자신도 일제 말기의 그 어둡고 불안한 시대에 푸근하게 은신할 수 있는 곳이 그리웠으나, 당시의 조국은 일본 치하의 불안하고 되바라진 땅이었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환상의 지도”(박목월, ‘구강산(九江山)의 청록(靑鹿)’, 박목월, 문학사상사, 2007, 316면)를 마련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사향가(思鄕歌)’에 나타난 그 절절한 향수를 떠올린다면, 박목월이 창조한 그 아름다운 ‘환상의 지도’는 분명 경주라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현실화된 유토피아)가 있었기에 창조된 유토피아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작가 박목월은…본명은 영종(泳鍾). 경북 월성군(현재의 경주시)에서 태어나 유년기엔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1930년 대구 계성중학에 들어갔다. 그 시절부터 책 읽기와 습작에 몰두한다. 중학교 때 이미 빼어난 작문 솜씨를 인정받았다. 해방 이후엔 오래 교직에 있었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고 수필 분야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아세아자유문학상과 대한민국문예상 수상자이기도 하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4-06

방 안에 갇힌 스무 살 청춘들에게 건네는 위로

학생들의 일상 자체가 마비된 상황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방학 동안 얼굴 보지 못했던 친구들과 만나 반가운 인사 나눌 때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려왔지만, 4월이 왔음에도 온전한 개학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아직은 혼자서 모든 걸 해내는 게 서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를 둔 맞벌이 부모들은 마음 놓고 자식을 맡길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이다.조금 컸지만 중학생과 고등학생도 형편은 비슷하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아들, 딸과 신경전을 벌인다는 부모가 적지 않다.학원을 보내려고 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쩐지 불안스럽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접촉으로 인한 감염’ 탓이다.학생만이 아니다. 교사들의 고충도 적지 않을 듯하다. 사람은 자신이 서야 할 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편한 법. 익숙한 교단이 아닌 컴퓨터 모니터와 연결된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강의용 동영상’을 만들며 밤을 새는 교사와 교수가 많다는 뉴스가 들려온다.갑자기 등장해 한순간에 세계를 멈춰버린 강위력한 바이러스가 사람들 삶의 형식은 물론, 내용마저 바꾸고 있다.▲‘바이러스의 시대’를 사는 불행한 젊은이들이러니저러니 해도 볕 좋고 꽃향기 가득한 이 빛나는 4월에 가장 불쌍해 보이는 건 스무 살 청춘들이다.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갓 대학에 들어가거나,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이들. 그들이 꼼짝없이 방 안에 갇힌 2020년 4월.한 세대 전 스무 살을 보낸 젊은이들은 어땠을까? 기자의 경험과 기억에 의하면 4월은 눈부신 달이었다. 따스한 바람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망울을 터뜨린 벚꽃. 그 아래서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거나, 버스를 타고 나간 교외에서 너무나 관능적인 빛깔의 복사꽃과 만나는 계절.마치 폭설처럼 시야를 가리던 연분홍 벚꽃 잎들. 그걸 배경으로 “우리네 젊은 날도 언젠가는 저렇듯 허무하게 지겠지”라는 너스레를 떨며 슬그머니 연인의 손을 잡던 20대 청춘들.2020년과 달리 20세기의 젊음은 고통스러웠기에 아름다울 수 있었다. 그랬다. 그런 역설과 반어가 통하던 시절이었다.답답하고 갑갑한 현실은 좋았던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그 호시절의 재료가 돼준 영화와 노래도 더불어 기억 속에서 불러오게 된다. 낭만이 거세된 4월을 살고 있는 지금의 스무 살 청춘들에겐 어떤 영화와 노래가 어울릴까? 주제넘지만 추천해 볼까. 먼저 영화 이야기다.▲빛나는 낭만을 다룬 영화 ‘4월 이야기’벚꽃이 눈처럼 시야를 가리는 도쿄 근교의 작은 도시 무사시노(武藏野).홋카이도 시골에서 그곳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 니레노 우즈키를 가장 먼저 반긴 건 “당신은 빛나는 벚꽃보다 아름답습니다”라고 적힌 예쁜 플래카드다.일본에 대한 관심이 있는 관객들에게 ‘무사시노’는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다.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피터 캣(Peter Cat)이란 카페를 만들어 끈적이는 찰리 파커와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의 쿨 재즈를 밤낮없이 틀어대던 도시.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무라카미 류의 매력적인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무대가 된 도시.바로 이 무사시노에서 이와이 슌지는 “세상은 사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든다. ‘4월 이야기’다.카메라는 시종일관 첫사랑인 고등학교 선배를 잊지 못해 무사시노까지 와서 같은 학교에 입학한 니레노 우즈키를 쫓아다닌다.이와이 슌지의 렌즈 속에 담긴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도시를 뒤덮은 연분홍 벚꽃, 새내기들의 밝고 활기찬 웃음, 넓고 푸른 잔디밭, 거기에 스크린의 색감까지 은은한 황갈색이 감도는 낭만적인 톤이다.세상과 사람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보편적이다. 그건 한국과 일본이 다를 수 없다.최인호의 소설 ‘겨울 나그네’를 읽고는 자전거를 사고, 그 자전거에 부딪쳐줄 소녀를 찾아 교정을 누비던 스무 살 청년들. 그런 로맨스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임을 알게 되기까지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한 법.영화 ‘4월 이야기’는 단조롭고 심상하다. 근사한 남자 선배를 보기 위해 무사시노를 찾아온 예쁜 후배.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어색하고 서투르다. 차마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선배의 곁을 서성이기만 하는 여린 마음. 그리고, 마침내 흩뿌리는 봄비 아래서 이뤄지는 스무 살의 첫사랑.이 영화는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란 아주 당연한 진리를 느릿느릿하며, 쉽고, 아름답게 우리 귀에 속삭여준다.그래서일까? 작위적인 벚꽃 날림의 연출도, 서툴게 보이는 조연들의 연기도, 여배우가 직접 연주했다는 초등학생 수준의 피아노 솜씨도 용서가 가능해진다.선과 악의 대립 구조도, 갈등과 화해의 드라마도, 그 흔한 악역 하나 등장하지 않는 밋밋한 영화 ‘4월 이야기’.그러나 상영 시간 내내 관객은 이와이 슌지 감독이 의도한 ‘사랑과 그로 인한 가슴 흔들림’에 동화된다.그래서다. 바이러스가 횡행하는 바깥을 피해 방 안에 갇혔지만, 사랑과 낭만을 꿈꿀 것이 분명한 세상 모든 스무 살에게 ‘4월 이야기’의 속삭임을 소개하고 싶다. 이런 것이다.“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이다. 그러니 네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살아라. 사랑을 배우고 익히고 행하라. 그것만 하기에도 인간의 삶은 짧다.”▲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린다면….벚꽃이 도시 전체를 핑크색으로 물들이는 경북 경주와 경남 진해는 물론, 꽃놀이 인파로 걷기조차 힘들었던 서울 여의도까지 “제발 찾아오지 말아주세요”라며 관광객을 마다하는 희귀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는 요즈음.마음으로나마 아직 도착하지 않은 봄과 벚꽃을 마주하려는 청춘들에게 시 한 편을 선물하려 한다.‘무겁고 불편한 오늘과/저당 잡힌 내일’을 잠시 잊고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바란다면 조용히 혼자서 읊조려 보시기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02

“영덕은 영감을 주는 마르지 않는 우물, 현실 바깥에서 나는 고향과 매일 만난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1802~1885)는 “성인은 세상 어떤 곳도 고향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현재 서있는 곳이 태어난 곳만큼이나 귀한 자리이니, 거기서 세상과 인간을 위한 양심적 투쟁을 해야 한다는 뜻일 터.하지만 모두가 빅토르 위고처럼 살 수는 없는 일. 보통의 인간들에게 고향이란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공간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성훈(50)의 고향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르른 바다와 산’을 품에 안은 영덕.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40년을 살고 있지만, 권성훈에게 영덕 병곡면은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애틋한 마을이다. 언젠가는 돌아가 자신의 마지막 문학적 정열을 쏟아붓고 싶은.고향 떠나 도착한 낯선 도시에서 처음 본 연탄을 신기해하던 열 살 아이가 타향에서도 그늘 없이 자라 대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영덕 사람’ 권성훈 이야기다. 그를 만나 ‘몸의 고향’ 영덕과 ‘마음의 고향’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의 계획과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더불어 들을 수 있었다.-현재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경기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있다. 교양학부에선 문학을, 국문학과와 문예창작 전공 학생들에겐 현대 시론과 시평론을 강의한다. 지난해 우리 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한류문화대학원이 생겼는데, 거기선 시조 창작과 현대 시조론을 강의 중이다.-‘코로나19 사태’로 개강이 늦어지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동영상 강의로 인해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어려움이 적지 않다는데.△대면 수업이 아닌 비대면 수업을 동영상 강의로 3주째 진행하고 있다.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달리 말하면 ‘인간학’이다. 기본적으로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문학을 매개로 인간의 삶을 서로 교환해야 하는데,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강의 동영상을 교내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면서 방송통신대와 사이버대학 교수님들의 애로사항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 빨리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할 날만을 고대하고 있다.-최근에 낸 책은 뭔지. 그리고, 상을 받기 위해 문학을 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의 문학 관련 수상 이력도 궁금하다.△지난해 세 번째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를 냈다. 이 책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르코창작기금으로 출간됐다. 운 좋게도 세종우수도서로 선정됐고, 2020년 ‘작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집’으로도 선택됐다. 감사한 일이다. 그간 펴낸 책은 연구서와 시론, 평론집 등을 합해 10권쯤 된다. 젊은 작가상, 한국예술작가상, 열린시학상, 인산시조평론상 등을 받았던 것도 행복한 기억이다.-현재 쓰고 있는 책은.△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문학치료’였다. 문학치료 이론에 적용되는 정신분석을 테마로 한국 현대시인 중 이상, 김수영, 박남철 등을 분석하고 있다. 그들 시 세계를 무의식의 소산으로 보고 정신분석화 하는 작업 중이다.-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얼마나 산 것이고, 잊을 수 없는 그곳에서의 추억은.△영덕군 병곡면 거무역동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다. 열 살이 되던 해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를 했다. 산과 바다, 꽃과 비를 좋아하는데 그것들이 내가 어렸을 때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초등학교 1학년 봄날의 기억인데, 갑자기 천둥이 치며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산에 묶어둔 소를 찾아 같이 내려오는데, 천둥소리에 무서워하는 나를 안타깝게 돌아보던 늙은 소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마치 엄마의 눈빛 같았다.-중고교 시절엔 ‘문학소년’이었나. 영향 받은 작가와 작품이 있는가.△중학교 다닐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집이 가난해 서점에서 책을 사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던 기억이 난다. 토요일 방과 후 책을 대출해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가장 행복했다. 닥치는 대로 독서를 했기 때문에 딱히 영향을 받은 작가는 없지만, 있다면 불특정 다수의 책 모두가 나를 가르친 선생님이자 친구였다.-수원에 정착할 무렵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파편 같은 게 있는지.△형제들과 트럭 짐칸에 타고 부모님을 따라 수원으로 왔다. 저녁에 어머님이 연탄을 피우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골에서는 아궁이에 장작을 때며 살다가 검정색 연탄이 하얗게 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돌아보면 웃음 나오는 추억이다.-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을 그리워한다는데,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나이를 좀 더 먹으면 영덕에 내려가 고향을 배경으로 한 연작시를 쓰고 싶다. 영덕은 내 작품에 영감을 주는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이 느껴진다. 상상의 두레로 언어의 물을 퍼 올리며, 현실 바깥에서지만 나는 고향과 매일 만나고 있다.-시와 시조, 평론까지 문학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인간에게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그냥’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냥이라는 단어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혹은, 변함이 없다는 뜻이 담긴 것 같다. 작품을 쓰면서는 항상 어떠한 형식과 구성이 더 좋을지 고민하게 된다. 창작뿐만 아니라 연구에도 몰두하는 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통해 창작의 질을 높이고, 창작을 통해 연구의 장을 열어갈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 바람은 시조의 활성화를 위해 연구와 평론을 좀 더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다.-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나만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의미 없듯, 나 혼자 존재하는 세계 역시 의미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은 같이 존재하고 함께 있기에 살아있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나를 있게 한 중요한 삶의 동력이다. ‘나의 길’을 가는 것에서 만족하지 말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고향 영덕을 소재로 작품을 쓴 적이 있는지.△어릴 때 고향 바다를 두고 슬퍼하며 수원으로 이사했던 내 모습을 형상화한 게 있다. 아래 소개하는 ‘폐차’라는 시다.다음 생애 좋은 곳에서 태어나라십 년 살다 바다에 묻은 그 애도 그랬다울음소리 수리도 않은 채 도로를 넘나들며녹슨 바람에 이는 사월 파도를 태우는밤은 밤을 열면서 떠돌아다녔다.-인간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일까.△고향은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곳이 아닐까 싶다.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향 또한 시간을 돌릴 수 없으니, 예전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아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추상적 질문이다. 실용적 학문이 아닌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예술의 효용성은 필요와 불필요에 의해 규정되는 게 아니다. 느끼는 사람의 것이며, 감동을 받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모든 것이 허망하고 무용하다고 느껴질 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실용적 학문이 접근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으로,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할 때 ‘예술적인 어떤 것’이 우리 곁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코로나19’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대구·경북에 어떤 위로를 전하고 싶은지.△“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인간은 함께 살아남은 자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고향을 지켜온 힘이 재건의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는다. 이 과정에선 분리되거나 분열된 나와 너가 없고, 우리만 있을 뿐이다.-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열 살 때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한 번도 영덕의 푸른 산과 맑은 바다를 잊은 적이 없다. 신문과 방송에서 ‘코로나19 사태로 신음하는 대구·경북’이 거론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무쪼록 지혜와 힘을 모아 경북인의 위대함을 보여줬으면 좋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코로나19’로 고통 받고 있는 대구·경북에게…“‘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인간은 함께 살아남은 자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고향을 지켜온 힘이 재건의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는다. 이 과정에선 분리되거나 분열된 나와 너가 없고, 우리만 있을 뿐이다.”

2020-04-01

찢어지고, 부서지고, 쓰라린… 러시아 마지막 날의 흔적들

◇ 러시아에서 마지막 날, 미끄러져 넘어지다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날 이번 여행도 끝날 뻔 했다. 모두 내가 잘못한 탓이다. 도로에 떨어진 돌을 피하려다 미끄러졌다. 다행히 크게 속도를 내지 않았고 도로에 흙이 깔린 곳에서 넘어졌다. 긴장을 늦추고 있었던 탓이다.나는 다친 곳이 전혀 없었지만 로시는 만신창이. 양쪽 카울과 앞쪽 깜박이등 하나가 깨졌다.더 큰 문제는 헤드라이트와 계기판을 잡아주는 지지대가 부러지고 사이드 박스 하나가 완전히 회생 불능이 된 것이다. 사이드 박스는 폐기처분하고 헤드라이트와 계기판은 덕테이프(덕테이프는 그야말로 만능이다!)로 고정시켜 숙소에 들어왔다.엔진이나 미션, 전장에는 문제가 없다. 넘어진 후 잠시 시동이 켜지지 않아 고민했었는데 다행히도 시동도 켜지고 경고등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일이 새는 곳도 없고.6-7미터쯤 미끄러진 듯한데 몸이 성한 건 슈트와 부츠 때문이다. 이리저리 기운 슈트와 물 새는 부츠가 제대로 역할을 했다. 사고로 바지 밑단이 찢어져 또 기워야 했다. 덕테이프로 고정하고 계속 달릴 수 없어 숙소에 와서 고장난 것들을 완전히 분리했다.안개등도 하나가 완전히 부서져 분리했다. 깨진 카울과 지지대, 앞 물받이를 수선했다. 가장 구경이 작은 별렌치를 버너에 달궈 구멍을 뚫고 케이블타이로 꿰맸다. 오토바이까지 깁다니. 이렇게 만들어 미안하다! 로시.미끄러지며 헬멧 안으로 흙이 밀고 들어왔을 때,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혹시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잠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찰나가 지나고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어쨌거나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다. 달리지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여행은 계속된다.계속 달려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고. 하지만 오늘 일로 일정이 틀어질 수도. 임시조치해둔 부품을 꼭 교환해야 한다. 우선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가서 알아보기로. 어떻게든 러시아 국경을 넘는다.◇ 러시아여 안녕!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로사고로 대범함+2, 상황대처능력+3.5 정도 능력치 상승했으나 에너지-7, 지출-10. 응급조치한 부분은 비포장길을 달렸음에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임시로 묶어둔 부분이 피로가 누적되면 별 수 없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우선 라트비아로 넘어가야 해서 러시아의 벨리키예루키에서 가장 가까운 남쪽 국경검문소로 갔다.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넘어가려면 그린카드(유럽 자동차보험)를 만들어야 한다.국경 검문소 가까이 세 곳이나 보험회사 사무실에 들렀는데도 발급이 안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라트비아에 가서 만들어야 한다고. 예전 여행자들이 남긴 정보가 틀린 경우도 종종 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 계속 나온다. 러시아 검문소에서 짐까지 검사 받았지만 다시 돌아나와야 했다.결국 라트비아 국경 검문소 안에서 그린카드를 발급 받을 수 있는 북쪽에 가서야 입국할 수 있었다. 3개월 보험료가 53유로.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한데 내가 가진 카드 모두 불가능. 다행히 지갑 안에 60유로가 있어 그린카드를 만들 수 있었다.그때 신용카드 결제가 안 되었던 건 국내 점검시간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오후 6시 정각부터 몇 분 사이 결제를 시도했었으니까. 한국보다 6시간 빠르니 그때 국내는 자정. 나중에 숙소에 와서 문제없이 지불 가능한 걸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갑 속에 150달러와 60유로, 그리고 쓰고 남은 루블화 약간 뿐이었으니까. 카드로 인출하거나 결제를 할 수 없으면 난감할 수밖에.해외에 나올 때는 다른 은행 신용카드를 준비하는 게 좋겠다. 둘 다 같은 은행이라 같은 문제로 동시에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북쪽 국경에서 280킬로미터쯤 달려 밤 11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쪽에서 다시 북쪽으로(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아갔는데 비포장도로가 길게 이어졌다.), 또 거기서 리가까지. 아주 긴긴 하루였다.◇ 깜짝 놀랄만한 수리비, 수리를 포기하다BMW 모토라드에 가서 수리를 의뢰했다. 로시의 모델명은 F650GS TWIN. 2009년식이고 아주 짧은 기간 생산되었고 2011년부턴가 F700GS로 변경되어 나왔다. 호환되는 부품이 많지만 그래도 부품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 거라 생각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수리해야할 부분을 점검하고(밀린 일이 많아서 점검은 하루를 기다려야 한단다.) 독일 본사에 부품을 주문해 수리하기까지 ‘아마도’ 짧게는 일주일에서 2주일은 걸린다고. 일주일과 2주일 사이 ‘메이비(maybe)’가 얼마나 또렷하게 들리던지. 결국 리가에서 최소 10일, 최대 보름은 발이 묶이게 생겼다.헬멧을 들고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숙소로 걸어 돌아오는데 이렇게 된 거 요즘 유행한다는 ‘ㅇㅇ에서 한 달 살기’를 짧게 해보기로 결심했다.사실 이렇게 한 도시에 오래 머무르며 느긋하게 돌아보고 알아 가는 게 가장 추천할만한 여행 방식이라 생각한다. 주마간산, 달리고 달려서 반환점과 종착점를 찍는 여행은 꽤나 피로하고 놓치고 가는 것이 많다. 하지만 시간과 달려야할 할 곳이 정해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마트에 가서 과일(자두와 방울토마토)를 사서 먹었는데 뱃속으로 넘어가자마자 바로 분해되어 흡수되는 느낌이었다.그동안 과일을 사먹지 않았더니 몸이 바로 반응한다. 옛날 먼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도 과일을 먹을 때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옴스크부터 같이 달렸던 현묵 씨는 리투아니아 쪽으로 먼저 출발하는 걸로. 가능하다면 돌아갈 때 모스크바에서 만나기로 했다. 안전하게 가고 싶은 곳 모두 돌아보길.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내일부터 숙소를 좀 더 저렴한 곳(1박 9유로)으로 옮기기로 했다.쉬는 동안 라트비아 역사와 지리 공부나 해야겠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려면 대중교통과 음식, 그리고 통신, 이 세 가지를 먼저 해결하는 게 중요한 듯하다.지금 숙소에서 로시를 맡긴 모토라드까지 걸어가긴 먼 거리라 버스카드를 구입했다.버스나 트램을 10번 탈 수 있는 카드가 약 11유로. 심카드는 1.5유로짜리를 구입했다. 유심카드는 10일 동안 리가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하니 직원이 알아서 건네주었다. 우리네 편의점 같은 곳에서 두 가지 모두 구입할 수 있다.모토라드에 다녀와서 견적서를 이메일로 받고 한숨을 내쉬었다. 로시를 사랑하지만 이 회사의 애프터서비스 정책은 나 같은 헝그리 라이더는 감당하기 어렵다.오 마이 갓! 차마 수리금액을 말하기가…. 견적서에 나와 있는 세금만으로 내가 생각했던 수리 금액과 거의 맞먹었다.문제는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될 부품들까지 견적서에 넣어둔 것. 결국 수리하지 않고 오토바이를 찾으러 가겠노라 답장을 보냈고, 길게 한숨 한 번 쉬고 내가 원하는 곳만 수리할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모토라드에서만 수리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견적서에 나온 수리비를 그대로 내면 이대로 핸들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한 번의 실수가 많은 경험을 하게 만든다.    /조경국

2020-03-31

독립기념관만 화려하면 뭣하나…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처신을 하는가가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특히 나라를 잃었을 때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자신의 영달을 꾀한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으면서 자신의 목숨도 버린 가슴 뭉클한 독립투사도 있다. 사람을 보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죽음부터 역 추적해 보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강렬하게 알 수 있다. 안동은 기초단체로는 제일 많은 353명이 독립운동으로 포상 받은 독립운동의 성지다.향산 고택과 치암고택 가기 전에 향산 이만도((1842~1910) 선생이 순국했던 예안 인계리 순국유허비를 보고 태어난 하계마을과 치암 이만현(1832~1911)의 고향 원촌마을을 보고 갔다.#. 나라운명의 변곡점과 독립운동의 요람 안동‘추로지향(鄒魯之鄕)’. 추나라 맹자와 노나라 공자 고향의 출생지를 딴 이 한마디로 안동은 유학의 본 고장임을 입증한다.그러나 신라 고려시대까지는 불교문화가 융성하여 성덕왕 23년(724)에 만든 강원도 상원사 (왕실(세조)의 원당이었음) 범종은 성덕대왕 신종(경덕왕 1년·742)보다 18년이나 앞서는데, 조선 8도에서 가장 좋은 종으로 선발해 갔다. 소리가 웅장하고 맑아 백리(40km)까지 울렸다는 이 종은 원래 안동에 있었던 것이다.봉정사의 극락전도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앞선 시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현존하는 국내 전탑 5개 중에서 여주 신륵사와 칠곡 송림사 전탑 외 법흥사지 7층 전탑, 일직 조탑리 5층 전탑, 안동역 앞의 운흥동 5층 전탑 등이 모두 안동에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안동은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한다. 930년 후삼국 각축의 혼란기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안동 병산전투에 안동의 토호세력 김행, 장길, 김선평의 향군들 도움으로 견훤 군사 8천명을 무찔러 후삼국 통일의 확고한 기틀을 만들어 고려가 후삼국을 평정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나라 대개의 성씨가 그러하듯 태조 왕건은 김행(金幸·안동 권씨), 장길(張吉(장정필)·안동 장씨), 김선평(金宣平)·안동김씨)에게 삼태사(三太師)로 공훈을 기렸다. 그리고 1361년 홍건적 난으로 공민왕(10년)은 수도 개경(개성)에서 안전한 복주(안동)에 피신 왔다. 유학이 건국이념인 조선왕조에서는 퇴계 이황의 우뚝한 유학자에 선비의 고장이 되었고, 명재상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참혹한 위기 때 국난극복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한입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안동의 선비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가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단식으로 순국하고, 만세운동으로 나라 찾는 숭고한 일에 일생을 바친다. 고성 이씨 임청각, 의성김씨 집성촌의 내앞 마을과 진성 이씨 하계, 원촌마을에 수 십 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명예로운 안동이었다.그러나 오늘날 안동은 과연 ‘한국정신문화의수도, 선비의 고장’다운가? 상징적인 사건이 2019년 5월 김종길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장은 자유한국당(통합당) 황00 대표가 안동에 왔을 때 “보수가 궤멸해가는 이 어려운 처지를 건져줄 우리의 희망의 등불이요, 국난극복을 해결해줄 구세주”고 라고 추켜세웠고, 박원갑 경북 향교재단 이사장은 “100년마다, 1세기 마다 사람이 난다 그러는데 건국 100년, 또 3·1절 100년에 나타난 것이 황00 대표”라고 주장했다. 왕조시대보다 더 심한 마치 맹신도가 사이비 교주에게 하는 소리 같아 참담했다.다행히 “안동을 대표하는 유림이 한 정당 대표에게 ‘희망’ ‘등불’ ‘구세주’라고 칭송했다.”“선비라면 정치권력에 쓴 소리와 바른말을 해야지 아첨이나 하고 있으니 안동출신으로 너무 부끄럽습니다.” “친일적폐 속물적 부유로 변질한 소인배 유림을 규탄하고 그릇된 유림의 역사인식과 현실풍토를 성토하기 위하여 안동 문화의 거리에서 1인 시위를 한다”는 서애 류성룡의 14대손 류돈하(38)같은 참 선비다운 젊은 분이 있어 위안을 삼았다.#. 지조의 선비 향산 이만도와 부끄러움을 아는 치암 이만현져버린 매화를 대신하여 진달래, 개나리, 살구꽃, 자두꽃, 도화 꽃에 벚꽃 마저 활짝 피어버린 경주를 뒤로하고 안동으로 향했다. 산천은 화사한 꽃단장할 자신의 역할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었다. 안동 북으로 조금가자 길옆 바위에 새겨놓은 ‘자력갱생’이 왜 ‘각자도생’으로 연결되고 꽉낀 마스크는 ‘자가격리’ ‘원천봉쇄’가 연상될까. 와룡 지나 예안 인계리 가는 길은 가난해도 이웃과 정 나누며 오순도순 살았을 억척스런 안동사람들이 연상된다. 향산 선생이 순국했던 장소는 도로 옆에 비석만 쓸쓸히 서있고. 옆에는 향산의 주손 이동석 시민운동가의 수목장한 소나무가 푸른 향기를 품고 있었다. 앞면은 백범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기 전 마지막 쓴 글씨고 뒷면은 위당 정인보의 유려한 문장으로 새겨져있다.‘향산 공원’이라 해 놓았는데 이렇게 작은 공원은 처음 봤다. 여기서 향산 고택이 있던 하계는 강 건너 직선거리 7km로 멀지않지만 안동댐으로 한참을 돌아야했다. 가는 길에 도산서원에 만개한 매화의 짙고 그윽한 향기 보고, 듣고, 음미하며 퇴계 종택에 갔다. 굳게 닫힌 솟을대문에는 손소독제가 잡귀 쫓는 벽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안동댐으로 사라진 하계마을은 산비탈 경사진 퇴계묘소에서 내려다보니 흔적도 없고 저 멀리 강물은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산 고개 넘어서면 이육사 생가 터에 문학관이 들어서 있고 꽤 넓은 벌판이 펼쳐져있다. 이 마을에서 치암 이만현은 퇴계 11대손으로 나라 잃자 비분강개해 세상을 떠났다. 바위에도 부끄러워한다는 치암(恥巖) 이만현의 고택이 있던 자리에도 강 버들만 무심히 늘어서있다.이제 안동시내 안막동 좁은 산골짜기로 옮겨온 향산과 치암의 고택을 찾았다. 치암 고택은 4칸으로 큰집은 아니어도 절제된 균형미에 1칸은 정자형식의 누마루를 만들어 소박하고 단정한 낭만이 흘렀다. 고택체험 숙소로도 개방하여 하나하나에 손이 많이 간 고택이었다. 장독대며 연못 그리고 예쁜 꽃들로 잘 꾸며 고택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공간을 잘 배치하여 여러 채가 있어도 답답하지 않았고 주인공 본채를 위하여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조연 역할을 충실히 하여 서로가 상생하며 살았다. 치암 고택에는 유독 글씨를 많이 붙여놓아 뜻은 좋지만 의미가 반감된다. 치암고택과 신독(愼獨), 청풍헌(淸風軒) 정도만 있어도 홀로 부끄러움을 아는 맑은 선비의 바람이 불어 좋으련만…. 마당에 잔디도 정갈한 백토였으면 더욱 담백한 고택의 맛이 날텐데.퇴계는 낙향해 “진나라 도연명은 굳은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국화 그리고 대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그런데 고고한 풍경을 지닌 매화를 왜 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절우사 뜰에 소나무, 대나무, 국화와 맑은 향기 지닌 매화와 연못에 연꽃을 심어 이 다섯 친구와 자신을 육우(六友)라 했다. 지금의 장복수 종부의 손맛으로 퇴계를 기리는‘ 육우원 다과’를 개발했다.앞에 향산 고택으로 갔다. 대문과 사랑채가 좁게 붙어있어 답답했다. 맞배지붕의 사랑채 뒤에는 ㄷ자 안채가 허술하게 서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옳은 일에 신념을 바치고 독립운동을 하면 이렇게 된다는 산역사의 본보기 같아 마음이 울컥했다. 이집이 어떤 집인가. 향산 이만도는 과거에 급제하여 양산군수 홍문관 교리하다 1896년 예안 의병대장 활동에 1905년 을사늑약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 1910년 경술국치 뒤 일제통치를 부정하며 24일 단식 끝에 순국하였고, 아들 기암 이중업(1863~1921)은 파리장서운동 주도했다. 기암의 두 아들 이동흠과 종흠은 대한광복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루었던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문의 고택이 아닌가. 특히 향산의 며느리 김락(1863~1929) 여사의 눈물겨운 굴곡진 삶은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온갖 고통을 겪었다. 남편(이중업), 두 아들(동흠, 종흠), 언니 김우락(1854~1933)은 노비 풀어주고 신흥무관학교 세우고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부인, 친정오빠 백하 김대락(1845~1914)은 자신의 집 ‘백화구려’는 안동지역 애국계몽운동의 학교로 내주고 경술국치이후 67세의 고령에 마을 주민 150명과 서간도로 망명했다. 자신은 3·1만세운동 예안면 시위에 참여했다가 달군 인두로 눈을 지짐 당해 두 눈을 잃었으니 이 모진 수모와 지옥 같은 현실을 어떻게 견디어 내었을까. 온몸으로 나라에 바친 분들이 살았던 고택이 이렇게 방치될 수 있는가. 문중에서 관리하다보니 한계가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루빨리 정갈하게 관리하여 후세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는 교육의 장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더니, 독립기념관만 화려하면 뭣하나. 8도 의병대장으로 서대문형무소 첫 순국자였던 구미의 왕산 허위의 장 손자 허경성은 대구서 짜장면 배달해야했고, 임청각의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의 손자, 손녀는 해방된 나라에서 고아원에 지내야했다. 김락 부인이 태어난 내앞 마을 ‘백화구려’ 가는 길은 하늘도 슬픈지 안개비 산천을 울리고 있었다.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

2020-03-31

‘신과 인간이 결합된 등신불’은 ‘한국 인간주의’ 요체

김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이다. 한국적인 특성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무녀도’ 등에서 보여준 우리 민족 고유의 무(巫)였다면, 다른 한 기둥은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문학적 형상화와 관련해서도 그가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경주는 불교 왕국이었던 신라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흔히 경주를 ‘담장 없는 역사박물관’이라고 일컫는데, 그 박물관을 채우는 구체적인 세목은 대부분 불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한국인이라면 한번쯤 가본 적이 있는 불국사, 석굴암이나 불국토를 꿈꾸던 신라인들의 염원이 곳곳에 아로새겨진 남산만 떠올려보아도 경주와 불교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불교가 경주에 남긴 무형의 정신자산도 대단한데,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수놓은 그 많은 대승고덕들의 주요 활동무대도 다름 아닌 경주이다.김동리는 불교에서 소재나 정신을 취해온 여러 작품을 남겼다. 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등신불’(사상계, 1961.11)이다. 이 작품은 다솔사 소속의 광명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20대 중반 시절, 백형 범보와 만해 한용운이 나누는 소신공양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 훗날 이를 토대로 완성해 낸 것이라고 한다. (김동리, ‘만해 선생과 등신불’, 나를 찾아서, 민음사, 1997)‘등신불’의 한복판에는 주인공 ‘내’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머문, 양자강 북쪽에 있는 정원사(淨願寺)의 금불각에 안치되어 있는 등신불(等身佛)이 있다.이 등신불은 당나라 때 소신공양(燒身供養-부처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을 한 스님 만적(萬寂)의 타다 굳어진 몸에 금물을 입힌 불상을 말한다. 만적(속명은 기·耆)은 어머니의 학대로 집을 나간 이복형 사신(謝信)을 찾아 나섰다가 스님이 되고, 나중에 소신공양까지 하게 된다. 만적이 몸을 태우던 날 여러 가지 신기하고 영험한 일이 일어나 새전(賽錢)이 쏟아지며, 이 돈으로 타다 남은 그의 몸에 금물을 입혀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등신불이다.‘나’는 등신불을 보고서는 아래턱을 덜덜덜 떨면서 “저건 부처님도 아니다! 불상도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의 큰 충격을 받는다. 충격을 받은 이유는 등신불이 너무도 인간적인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등신불은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엄한 여타의 불상과는 달리,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꽉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인간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이 등신불이 인간적인 속성만 지닌 것은 아니다. 금불각의 가부좌상은 고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어떠한 대각보다도 그렇게 영검이 많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자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적 특징과 신적인 특징이 혼합된 존재로 형상화된다.‘내’가 경험하는 충격은 대부분의 종교가 신과 인간 사이에 절대적인 위계를 설정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연한 반응이다. ‘내’가 신과 인간이 결합된 형상으로 드러난 등신불 앞에서 그토록 당황하는 것은 “습관화된 개념으로써는 도저히 부처님과 스님을 혼동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신과 인간이 결합된 등신불’은 김동리의 ‘한국 인간주의’라는 독특한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동리는 ‘한국문학과 한국 인간주의’(김동리 문학앨범, 웅진, 1995)에서 ‘한국 인간주의’가 근대 인간주의(르네상스 휴머니즘)를 발전시킨 인류의 보편적인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중세 기독교의 신본주의(神本主義)에 대립하여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적극적인 반신적(反神的)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근대 인간주의는 무신론과 허무주의로 변모하여 급기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비극까지 낳았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신과 인간의 합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인간주의’를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의 ‘한국 인간주의’는 신과 인간의 합작인 동시에 신과 자연의 합작이어서 ‘신을 내포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테제(정립)로서의 신본주의에 안티테제(반정립)로 일어난 근대 인간주의가 진테제(종합)로 전개된 것”이 바로 ‘한국 인간주의’라는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등신불’은 김동리의 사상이 응축된 ‘한국 인간주의’의 상징이다. 이러한 ‘한국 인간주의’는 ‘무녀도’에도 나타난 대칭성의 사고와도 통한다. 동시에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으며 부분과 전체는 하나라는 대칭성의 사고는 불교의 핵심에도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김동리의 문학은 불교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다.‘등신불’에서 만적이 등신불이 되어 가는 과정은 대칭성의 사고를 깨닫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적의 어머니는 ‘신과 인간’이나 ‘인간과 자연’의 융합은커녕 극단적으로 자기만을 내세우는 인물이다. 그녀는 일찍 남편을 여의자, 아들인 만적을 데리고 사구(謝仇)라는 사람과 재혼한다. 사구에게는 신(信)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사씨 집의 재산을 탐낸 만적의 어머니는 신의 밥에 독약을 감춘다. 이 일로 신은 집을 나가고, 신을 찾아 나선 만적은 결국 출가를 하게 된 것이다.출가 이후에도 만적은 참된 깨달음의 세계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 만적은 자신을 거두어준 취뢰(吹7C5F) 스님이 열반하였을 때 그 은공을 갚기 위하여 처음 소신공양을 시도한다. 그러나 당대의 선지식인 운봉(雲峰) 선사는 “만적의 그릇(器)됨을 보고 더 수도를 계속”하라며 소신공양을 허락하지 않는다. 운봉 선사는 만적이 5년 동안 더 수행을 하고, 우연히 문둥병이 든 사신을 만나고 돌아온 후에야 소신공양을 허락한다. 사신을 만났을 때 만적은 자신의 염주를 벗어 사신의 목에 걸어주는데, 이 행동은 만적이 자기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음을 상징한다.불교에서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보살(bodhisattva)은 대칭성의 논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자이다. 순수한 증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금강반야경’에서는 “위대한 보살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이라는 세 가지 생각조차 떨쳐버리고 보시(布施)해야 한다.”라고 밝힌다. 처음 소신공양을 시도할 때, 만적의 머리 속에는 ‘자신’이 ‘취뢰 스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소신공양을 원할 때는 그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고, 그렇기에 운봉 선사는 만적의 깨달음을 인가(印可)하는 차원에서 소신공양을 허락한 것이다.‘등신불’에서 ‘나’의 이야기와 만적의 이야기 사이에는 천년을 넘는 시간과 중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의 거리가 가로놓여 있다. 이러한 거리는 만적의 이야기를 마친 원혜(圓慧) 대사가 ‘나’를 향해 “자네 바른손 식지를 들어보게”라고 말함으로써 사라져버린다. ‘나’의 바른손 식지에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진기수(陳奇修)씨에게 혈서를 바치느라고 살을 물어 뗀 상처가 남아 있다. ‘나’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진기수 씨를 만났을 때, 식지 끝을 물어 뜯어 거기서 나온 피로 ‘願免殺生 歸依佛恩’(원컨대 살생을 면하게 하옵시며 부처님의 은혜 속에 귀의코자 하나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만적처럼 자신의 온목숨을 바친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피를 흘리면서까지 뭇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또 하나의 만적’이었던 것이다.김동리는 ‘한국 인간주의’에서 신본주의에 대한 반발로 근대 인간주의가 극단화된 결과의 구체적 사례로 20세기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들고 있다. 이와 관련해 ‘등신불’의 배경이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1943년이고, ‘나’가 학병으로 끌려온 청년이라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전쟁이야말로 자타의 구별이 가장 선명해지는 무대이며, 이 무대에서 인간은 신(神)은 고사하고 하나의 사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쟁을 배경으로 했을 때, ‘신이 된 인간’ 혹은 ‘인간이 된 신’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등신불’ 이외에도 김동리는 “우주만상은 헤아리기 어렵고 인연 관계로 얽혀 있다는 화엄사상의 일면을 주제”(김동리, ‘불교와 나의 작품’, 소설문학, 1985.6)로 한 ‘까치소리’(현대문학, 1966.10)와 윤회 사상을 서사화 한 ‘눈 오는 오후’(월간중앙, 1969.4)와 ‘저승새’(한국문학, 1977.12) 등의 작품을 남겼다. 김동리의 문학에서 우리 고유의 무(巫)와 세계종교인 불교는 대칭성이라는 사고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조화롭게 어울린다.이러한 공존은 신라 이후 계속되어 온 한국의 종교적 다양성을 해명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30

영천시, 코로나·경제침체 극복 총력… “함께 힘 모을 때”

“코로나19 사태로 힘든 상황이지만, 영천이 가장 먼저 사태를 종식하고, 안정화되는 전환점이자 희망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지원정책을 추진해, 어느 누구도 소외받지 않도록 꼼꼼하게 챙기도록 하겠습니다.”최기문 영천시장의 말이다.영천시는 민·관·군의 노력으로 지난 7일부터 24일째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현재까지 36명의 코로나19 확진자 중 완치 9명, 병원입원 17명, 생활치료센터 입소 9명, 자가격리 1명이다.또 424명이 격리해제돼 일상으로 돌아왔다.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코로나19 예방생활과 성숙한 시민의식이 이같은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고 조기 종식을 위해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지난 21일부터 4월 5일까지 15일간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고 있다.사람들이 밀집돼 활동하는 교회, PC방, 학원, 체육시설, 교습소 등 412개소 시설들을 대상으로 ‘집중 관리사업장’으로 지정하고, 공무원 534명이 해당시설을 방문해 관리하고 있다.최근에는 요양원 등 27개소에 대한 코호트 격리조치를 해제했고, 종사자 25%를 대상으로 검체 검사한 결과, 모두가 음성으로 나왔다.격리조치가 해제된 요양원 등은 2주 동안 공무원 1명과 종사자 1명을 감염관리 책임자로 지정해 집중적으로 관리할 계획이다.발열·기침·인후통 등 증상 여부체크 및 유증상자 출입금지, 종사자 및 이용자 전원 마스크 착용, 손소독제 비치 및 출입시 소독, 시설 내 참여자간 간격 최소 1m 이상 유지, 주기적 소독 및 환기, 단체식사 금지 등 출입자 명단작성 등 방역지침 이행여부를 세밀하게 점검하고 있다.방역지침을 이행하지 않은 시설이 발견되면 집회 및 집회금지 등 행정명령을 내릴 예정이다.행정명령 위반시에는 고발 조치하고, 확진자 발생 시에는 손해배상을 청구 한다는 계획이다.시는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 급격한 매출감소로 경영난에 직면했고, 취약계층 뿐만 아니라 중산층까지도 피해가 확산된다”며 3만800여 가구에 230여억을 지원할 계획이다.중앙과 경북도 정책과 보조를 맞춰 긴급생활비를 기초수급자 및 차상위 가구 6천668가구에 34억9천여만원, 실직 및 휴·폐업한 중위소득 75%이하 가구에 생계비, 의료비 등 36억5천여만원을 영천사랑상품권, 온누리상품권, 기프트카드 형태로 지원할 예정이다.이 외에도 다양한 지원책들을 마련하고 있다.소상공인 경영안정화를 위해 경영안정자금 50억으로 확대해 신용등급에 상관없이 업체당 2천만원의 대출보증과 연 3% 이자를 2년간 지원하고, 소상공인 등에게 카드수수료와 공공요금도 지원해 국세, 도세 감면과 연계, 착한 임대인 재산세 감면 등 경영안정화도 모색하고 있다.지역산업을 이끄는 기업들을 위해서는 기업당 최대 10억이내 융자, 대출이자 3%를 1년간 지원한다.영천 기업들이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도록 투자유치진흥기금 지급요건을 완화했으며, 중소기업 기숙사 임차비도 월세 80%에서 90%로 확대했다.387개사 자동차 부품업체들을 위해 미래형자동차 부품개발, 테스트장비, 시제품 제작 등 기술개발과 함께 건축설계비 50% 감면을 추진해 일자리도 늘린다.농업분야에서는 경북도와 연계해 농어촌진흥기금 상환기간 연장 및 추가지원과 농가당 최대 5천만원 한도 내에서 대출과 이자를 지원하는 농업인 재해대책경영자금 지원책을 마련했다.농번기 인력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농가참여근로자 3천명 일비 추가지원, 외국인 근로자 4천명 영농현장 수송, 농가일손돕기에 참여하는 유관단체에 운영비를 지원한다.특히 급식용 친환경농산물의 소비촉진 운동, 시립도서관, 재경학사, 체육시설 등 공유재산에 대한 사용료 감면과 시민교육, 문화강좌 등 중지에 따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예술인들을 위한 강좌료 선 지급 등 100여건의 분야별 지원대책들을 마련하고 있다.최기문 시장은 “추가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아, 자칫 완전히 종식됐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절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하루 빨리 사태를 종식할 수 있도록 시민 모두가 힘을 모아 주길 당부한다.”고 말했다. /조규남기자 nam8319@kbmaeil.com

2020-03-30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평화로움에 잠기고 싶지만

중국과 이란이 위기로 휘청거리더니, 이젠 미국과 이탈리아, 독일과 프랑스, 영국과 스페인까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자로 인해 국가가 통째로 멈춰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거대도시 뉴욕과 런던 거리에선 오가는 차량을 볼 수 없고, 이탈리아 외곽 지역 노인들은 의료진을 찾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여름에 일본 도쿄에서 열릴 예정이던 올림픽은 전례 없이 연기가 진지하게 논의됐다.프랑스 대통령과 영국 총리는 연일 TV에 나와 “사람들 간의 접촉을 줄이고 집에 있어 달라”고 목소리 높여 호소한다. 미국과 유럽만이 아닌 중동도 형편이 크게 다르지 않다.한국 또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초토화 된 실정이다.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까지 “아사(餓死) 직전”이라는 호소를 정부에 보내고 있고, 최근엔 이웃과 친구들끼리의 다감한 커뮤니케이션도 눈에 띄게 줄었다. 특정 집단이나 지역에 대한 질타와 조롱도 비등한다.여기에 멀쩡하게 생겨서 더 경악스런 청년 한 명은 가장 악질적인 방식으로 미성년자들의 성을 착취해 신문과 방송을 뜨겁게 달궜다.서울 종로경찰서 앞에 얼굴을 드러낸 조주빈(25)은 스스로를 “악마”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너는 악마도 아니고 더러운 세균일 뿐”이라며 분노했다.▲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리운 풍경대체 2020년 봄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봄이 품에 안아 데리고 오는 희망과 꿈이라는 분홍빛 단어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들려오는 건 온통 짜증 섞인 불만과 안타까운 비명뿐.식구와 연인의 손을 잡고 벚꽃과 매화 흩날리는 강변에서 소박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환히 웃던 지난해 봄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 전체가 비극적으로 꾸며진 시뮬레이션 세트장 같다.불투명한 미래와 비루한 오늘은 자연스레 좋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어디에 ‘행복한 꿈’을 파는 가게가 있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한 후 아주 길고 긴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을 정도다. 올해 봄이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기자 하나만은 아닐 듯하다.떠올려보면 행복한 꿈같았던 과거는 누구에게나 있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봄날 백일몽 같은 기억들.몇 해 전 라오스를 여행했을 때다.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밝은 미소로 타인을 대하는 그 나라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에 매료됐다.철없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시시때때로 조용한 웃음을 보여주던 라오스.낡은 버스에 올라 그 나라 남부에서 시작해 북부까지를 2주쯤 돌아다녔다. 당연지사 많은 이들을 만났다.시장에서 남편이 사준 중국산 청바지 하나에 감동해 눈물 흘리던 어린 신부, 외국인이 준 조그만 사탕 하나를 동생에게 양보하며 쑥스러워하던 초등학생, 자식을 11명이나 둔 마흔아홉 살 농부까지. 그들 모두는 빈한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행복해보였다.‘동남아시아의 젖줄’로 불리는 메콩강과 그 지류들. 흙빛으로 숨죽이며 수천 년을 흘러온 라오스의 강이 선물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저물 무렵 강 언덕에 드러누운 기자는 그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떠올렸다.▲희망과 꿈을 빌던 라오스 동승(童僧)처럼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이 상을 선정하는 기관인 스웨덴 한림원은 네루다의 작품을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운명과 희망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평했다.생후 2개월 때 어머니를 잃은 불행한 유년,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10대 시절, 눈앞에서 봐야했던 스페인 내전의 광기와 처참함, 정치적 지향으로 인한 오랜 망명 생활까지. 네루다의 삶은 희망과 꿈을 떠올리기 힘든 나날로 점철됐다. 그러나 시인은 끝끝내 인간의 당연한 권리인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그는 언제나 희망으로 건너가는 ‘꿈’을 노래했다. 때론 감미로운 목소리로, 때로는 거친 함성으로.‘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지만, 이어지는 전개는 결코 어둡지 않다. 이 시에선 유독 ‘그녀’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게 ‘희망’과 ‘꿈’의 은유라는 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네루다는 ‘그녀’를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희망과 꿈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마지막 행처럼 ‘이것이 내가 그녀에게 바치는 마지막 시라고 할지라도’ 가치 있는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시인만이 아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포악한 바이러스와 추악한 욕망에 눈먼 악마를 앞에 둔 이런 막막한 상황일수록 더더욱.그날, 강변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길. 소승불교 사원에서 조그만 손을 모아 합장하는 어린 라오스 승려들을 봤다. 그 동승들 또한 분명 희망과 꿈을 빌고 있었으리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26

“인재 육성, 지역이 강한 나라로 가는 길”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김사열 신임 위원장은 균형위의 향후 과제를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지역대학을 거점으로 한 지역인재 양성 등 교육체계 구축에 방점을 찍었다. 이전까지 사회간접자본(SOC) 위주였던 지역균형발전 전략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한 셈이다.지난 9일 위원장으로 임명된 김 위원장은 25일 경북매일신문-한국지역언론인클럽(KLJC 회장 김진호)과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진 공동인터뷰에서 “지역혁신성장의 동력인 ‘사람’에 초점을 두고, 지역인재 양성 및 지역인재-일자리 선순환 구조를 확보하기 위한 교육체계 구축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그는 “대학과 지자체의 연결고리가 없다”며 “거점대학, 특히 국립대는 중앙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반기 추진하려는 지역대학과 지역일자리의 연계 등을 통해 인재들을 키우는 게 ‘지역이 강한 나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수도권의 팽창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건강한 수도권’이 아니라 ‘비만 수도권’이다”라며 “강제적으로 사람을 내보낼 순 없으니 지역의 생활여건을 보완해야 한다. 특히 교육, 지역에서 학교를 졸업했을 때 이득이 없다. 이제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집중보완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김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기준 수도권 인구비율이 50%를 넘어선 것은 일본 동경이 31%, 프랑스 파리가 18%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의 수도권집중이 매우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다”며 “더 이상 수도권집중이 되지 않도록 조속히 기반을 조성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김 위원장은 “공공기관 이전은 진행형이고 장기적으로는 민간기업체들이 지역으로 갈 수 있도록 정부가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며 “교육, 복지, 문화 등 가족들이 같이 가서 살 수 있는 정주여건을 만들어 지금까지보다 접근하기 쉽고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취임 소감과 비전은.△평생 지역에서 지역 주민의 한사람으로서 지역사회 내에서 다양한 시민활동을 지속해왔으며, 지역의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또 대안을 실천해 왔다. 제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데는 그동안 쌓아온 경험들을 문재인 정부 국가균형발전정책의 목표인 ‘지역주도 자립적 성장기반 마련’에 기여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며, 매우 영광스럽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균형발전정책의 국가적 중요성과 지역이 처한 현실적인 위기 앞에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고르게 발전하는 지역’이라는 국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범정부적으로 노력했다. 앞으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가교로서 큰 흐름에서 국가균형발전정책이 지역주도로 속도감 있게 전개될 수 있도록 하겠다. 또한 그 동안 다소 미진했던 분야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겠다.-인구감소와 수도권 집중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지방의 많은 지역은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 지역으로의 인구유출로 이미 인구감소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지역인구 감소는 저출산과 같은 자연적 인구감소도 있지만, 특히 교육·문화·일자리 문제 등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라 지역인구가 수도권으로 유출되는 것이 더 큰 원인이다. 이에 균형위는 지역을 떠나지 않고도 지역 내에서 경제활동과 여가생활이 가능한 여건을 만들기 위해, 지역의 실정과 수요에 맞는 정책이 지역 주도로 마련되고 시행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적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우선 사람이 지역에 머무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일자리 창출을 지원하기 위해, 지역의 투자 및 일자리 관련 규제와 제도를 발굴해 개선을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또 지역의 발전전략을 지역 스스로 구상하고 실행함으로써 지역의 특성에 맞는 혁신성장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지역의 혁신성장과 관련해선 시도 자체사업은 물론, 지역단위에서 이루어지던 기존 중앙부처의 사업을 지역이 직접 기획해 이를 ‘지역혁신성장계획’을 통해 연계하는 시스템을 지난해부터 도입, 사업간 분절화를 막고 성장 효과는 높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와 함께 700만명에 이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본격적 은퇴 상황에 맞춰, 이들을 지역 단위에 효과적으로 유입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혁신도시 시즌2 추진현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지난 6일 균특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혁신도시 추가지정 사업 및 추가 공공기관 이전에 대한 기대가 높은데, 현재 추가이전과 관련한 국토부 용역과제가 진행 중이며, 2차 공공기관 이전은 용역과제 종료 후(5월 28일 예정) 연구결과에 따라 신중한 검토를 거쳐 결정된다. 지난해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이전(충북)을 마지막으로 혁신도시 건설 및 공공기관 이전이 마무리됐다. 물리적 기반조성이 마무리됨에 따라 혁신도시를 新지역성장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혁신도시 시즌2’를 추진중인데, 균형위는 기업 입주 유도, 정주여건 개선, 지역 상생발전 등을 지속 추진해 혁신도시가 지역 경제의 新성장 거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일단 정주여건 개선을 위해 광역·연계교통 확대 등 교통편의를 제고하고, 문화·체육시설이 포함된 복합혁신센터 건립 등을 추진했다. 복합혁신센터 10개소가 2020년 중 착공되고, 2021년부터 순차적으로 개관할 예정이다. 또 산업 활성화를 위해 입주기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지역기업 우대 등 특색에 맞는 특구 지정, 산·학·연 클러스터 육성 등을 추진하고 있다. 공공기관 지역인재 채용은 2022년까지 30%로 확대하며, 지역 인재육성을 위해 이전기관과 연계한 오픈캠퍼스 확대·내실화 등도 추진된다. 이 같은 혁신도시 시즌2 추진으로 혁신도시의 입주기업, 정주인구, 지역인재 채용, 지방세수 등이 모두 증가되는 성과가 있었다. 실제로 입주기업은 2018년 기준 693개에서 2019년 1천425개로, 정주인구는 19만3천명에서 20만5천명으로, 지역인재 채용률 역시 23.4%에서 25.9%로, 지방세수도 3천814억원에서 4천228억원으로 늘었다. 이런 성과를 널리 알려주시길 바란다.-국가균형발전 5개년 계획이 추진되고 있지만, 체감도가 낮다. 대책은.△균형위에서는 작년 1월 ‘지역주도의 자립적 성장기반 마련’을 목표로 20개 관계부처, 17개 시·도와 함께 ‘제4차 국가균형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해 발표했다. 이번 5개년 계획에서는 24조원 규모의 균형발전프로젝트(일명 예타면제 프로젝트) 추진, 지역발전투자협약제도 도입 등 지역 주도성을 강화하고, 5년간 175조원을 지원해 사람, 공간, 산업 3대 전략 및 9대 핵심과제를 집중 이행하고 있다.5개년 계획의 실효성과 국민 체감도를 높이기 위해 매년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계획 실행 결과를 균형위에서 매년 종합평가하고 국회에 보고해 계획의 성과를 지속 관리 중이다. 올해에는 총 39조2천억원을 투입하는 내용의 ‘2020년 국가균형발전 시행계획(안)’을 수립했고, 4월초 균형위 심의를 거쳐 확정하고 시행해 나갈 계획이다. 또 2019년 국가균형발전사업에 대해서는 종합평가가 진행 중이며, 국회 보고, 내년도 정부 예산편성 시 평가결과 활용 등을 통해 계획의 성과 제고에 노력해 나가겠다.제4차 5개년 계획은 ‘지역 주도 혁신적 포용국가’ 구현을 목표로 하는 만큼 지역이 주도하는 정책추진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 주도의 강력한 정책처럼 가시적이지 않고, 균형위가 추진한 사업들이 지역사업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생활밀착형SOC, 지역발전투자협약 등과 같은 정책들은 시행 이후 체감성과가 나타나기까지의 공백 기간도 존재한다. 앞으로 균형위가 추진하는 지역균형발전 정책들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에도 힘쓰겠다.-총선이 다가왔다. 정치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국가균형발전은 대한민국 헌법 가치로서 국가의 당연한 목적 중 하나이고, 의무다. 헌법 122조에는 ‘국가는 국민 모두의 생산 및 생활의 기반이 되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한다고 되어있고, 헌법 123조에는 ‘지역 간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국가의 의무’를 적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주민의 대표로서 지역발전에 공헌해야 하고, 이에 대해서는 여야가 있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균형발전정책의 제도적 뒷받침을 위해 21대 국회와 정치권에 많은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린다./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20-03-26

“사람의 情 나누는 기쁨 함께 합니다”

자영업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시대다. 비단 대구·경북만이 아니라 전국이 마찬가지다. 당장 우리 주위만 둘러봐도 이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짧으면 5~6개월, 길다고 해도 1~2년 사이에 간판을 바꾸는 소규모 식당과 카페가 부지기수다.상황이 이러하니 포항 죽도시장 골목길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카페 ‘죽도소년’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1층과 2층을 합쳐 20명을 수용하기 힘든 작은 찻집이지만, 각종 SNS에서 확인 가능한 죽도소년의 인기는 어떤 ‘핫 플레이스’보다 뜨겁다.주말이면 고풍스런 한복집 등 최소 20~30년 이상 된 노포(老鋪) 사이에 돌올하게 들어선 젊은 감각의 카페로 경북과 부산은 물론, 멀리 강원도와 서울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온다. 이 정도면 자영업으로 이룬 ‘작은 성공’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최근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손님이 많이 줄었지만, 바이러스의 난동은 언젠가는 끝이 날 터. 죽도소년을 운영하는 김희준(45)씨는 “상황을 마냥 비극적으로만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얼핏 봐도 1천 권은 넘어 보이는 책과 수백 장의 음반으로 채워진 ‘카페 죽도소년’을 찾아 김희준 씨를 만났다.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완연한 봄의 향기 속에서 카페 운영의 노하우와 어머니뻘의 전통시장 상인들과 불화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이유, 카페를 차리고 싶은 이들에게 전하는 조언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묻고 그에 관한 답을 들었다.◇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걸 찾으려 노력해야30대 시절 김희준 씨는 학원 운영자였다. 포항 북구에서 시작한 학원은 경영 성과도 좋았다. 김씨가 대표인 2개 학원의 수강생이 400명 넘던 시절도 있었다.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매너리즘에 빠졌고, 그때부터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사실 학원을 할 때도 틈틈이 인테리어 관련 일을 했고, 커피 공부도 틈틈이 시작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그런 고민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것이 포항 중앙상가 골목의 폐가를 수리해 만든 ‘카페 1944’였다. 대학에서 전공한 경영학과 마케팅이 카페 운영 초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예술과 문화에 포커스를 맞춘 ‘스토리 마케팅 기법’이 카페가 쉽게 자리를 잡게 했다.입구 시멘트 바닥에 찍힌 고양이 발자국과 고양이 가면을 쓰고 커피와 주스를 가져다주는 카페의 주인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금세 입소문을 탔다.지저분했던 주변 벽에 귀여운 고양이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김씨는 ‘친절하고 재밌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셀 수 없이 많은 카페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차별성 가진 아이템이 필수다. 이전 카페가 고양이라는 키워드로 유명해졌다면, 옮겨온 이곳 죽도소년에선 화려한 색감의 두건을 쓰고, 멜빵 달린 옷을 입은 나 스스로를 가게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결국은 아이디어 싸움인 것이다.”마케팅과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자영업자에게 더 중요한 건 성실함이다. 김씨는 자신이 일하는 주위 공간을 따스하고 정 넘치는 곳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버려진 담배꽁초를 줍고, 먼저 나서 빗자루를 들었다. 여기에 ‘골목길 미술전’과 ‘작은 콘서트’ 등 문화행사까지 열었다.중앙상가에서 죽도시장으로 카페를 옮겨오면서도 이런 태도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친구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한복가게를 리모델링해 죽도소년을 열 수 있었던 것도 주위 사람들이 김씨의 부지런하고 정직한 성정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죽도시장 어르신들과 잘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죽도소년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이들은 대부분 수십 년 이상 그곳에 터를 잡고 장사를 해온 어르신들이다.청춘의 대부분을 가게에 바친 그들은 죽도시장을 제 몸처럼 여긴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일으키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비교적 젊은 김희준 씨가 나이 지긋한 상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뭘까?“무엇보다 가장 열심히 하는 건 인사다. 내 가게 앞만이 아니라 주변 청소도 하고 있다. 근처 상인들이 커피를 주문하면 반값에 배달까지 해준다. 3년가량 이렇게 지내다보니 친해진 분들이 적지 않다. 카페를 찾는 관광객을 어르신이 안내해 올 때도 있다.(웃음)”사실 죽도소년 근처엔 ‘젊은 상인’이 별로 없다. 부모의 가게를 이어받아 하는 사람들이 소수 있을 뿐이다.김씨는 청년 자영업자가 전통시장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없는 이유를 오래된 시장 특유의 보수성과 폐쇄성이 아닌, 중장년층 위주로 구성된 상권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 또, 생선·채소가게 등은 일의 특성상 해가 뜨기 전 새벽부터 가게로 나와야 하는 게 청년들 입장에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사람들이 찾아오는 카페는 어떻게 만들어지나재론의 여지없이 카페 운영은 장사다. 그렇기에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익 창출은 기본 중 기본이다. 사업의 특성상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따라잡지 않으면 언제라도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는 게 카페 운영이다.진입장벽이 비교적 낮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카페를 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지속가능성을 인정받아 오래 운영되는 카페는 드문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김희준 씨는 ‘예비 카페 창업자들’에게 이런 조언을 들려줬다.“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나면 금방 주위에 비슷한 유형의 카페가 우후죽순 생기는 걸 여러 번 봤다. 파이의 크기는 한정돼 있는데 나눠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어떻겠는가? 철저한 사전 준비와 조사, 획기적인 아이디어, 여기에 열정을 바치겠다는 각오 없이 카페 문을 연다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창업 과정보다 더 어려운 건 카페의 지속적 운영이다. 죽도소년의 경우엔 ‘단골’이 카페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정을 주고받은 단골들은 김씨와 가족 이상의 유대관계를 형성했다.20대 젊은 손님들에게 ‘키다리 아저씨’이자 인생의 선배 역할을 하고 있는 김희준 씨는 “우리 카페는 단골들이 만들어가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죽도소년에선 아기자기한 소품과 그림을 다수 만날 수 있는데, 그것들 대부분은 단골이 선물하거나 그려준 것들이라고.2년 전엔 김씨의 카페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단골손님들의 ‘스몰 웨딩’이 죽도소년에서 진행됐다.전통시장의 작은 가게에서 결혼식이 열린 건 아마 시장이 생기고 처음이었을 것이다. 손님에게서 카페 운영의 즐거움과 보람을 찾는 게 죽도소년 주인의 마음가짐이라면, 자신들이 아끼는 공간에서 사람간의 정을 나누는 건 죽도소년 단골 모두의 기쁨이 되고 있다.◇활력과 웃음 넘치는 전통시장을 위해짧지 않은 기간 지속된 불황에 ‘바이러스 창궐’이라는 악재까지 겹친 전통시장의 한숨이 갈수록 깊어지는 요즘이다. 죽도시장도 다를 수 없다.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지만, 아직은 제대로 체감되지 않는다는 게 상인들의 하소연.김희준 씨를 포함한 젊은 자영업자들은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통시장을 활성화시킬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낮과는 전혀 다른 밤 시간대 전통시장의 매력을 관광객에게 소개하는 ‘죽도시장 야간 투어 프로그램’과 영일대해수욕장에서 시작해 포항운하와 죽도시장을 걸으며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걷기 코스의 개발’ 등은 김씨가 고민해온 전통시장 살리기 방안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이 아이디어의 현실화도 가능해지지 않을까?어떠한 곤경 속에서도 ‘희망의 출구’를 찾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어르신과 청년 상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활로를 찾으려 동분서주하는 죽도시장. 그 미래가 환하게 밝은 봄의 꽃길 같기를 기대한다.셀 수 없이 많은 카페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차별성 가진 아이템이 필수다. 이전 카페가 고양이라는 키워드로 유명해졌다면, 옮겨온 이곳 죽도소년에선 화려한 색감의 두건을 쓰고, 멜빵 달린 옷을 입은 나 스스로를 가게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결국은 아이디어 싸움인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25

1만1천㎞ 달려온 홀로 여행… 우리네랑 다른 풍경을 발견하고

◇ 시베리아 지나 모스크바에 도착하다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한국을 출발해 모스크바까지 로시로 달린 거리가 11,259킬로미터. 집에서 출발한 지 21일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17일이 걸렸다. 춥고 더운 것(도착한 날 모스크바 최고 기온 29도), 그리고 비가 자주 내렸던 걸 제외하면 크게 고생하지 않고 온 듯하다.시베리아 횡단하며 묵었던 숙소나 음식은 가격대비 아주 만족. 뭐 비만 피하고 배만 채울 수 있으면 어디든 뭐든. 혹시나 출발하기 전 겪었던 문제(간헐적 엔진 출력 저하)를 여행 중에 다시 겪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부분도 출발하기 전에 정확하게 진단해서 잘 해결(연료 펌프 교체)한 것 같다. 오는 동안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모스크바에 도착하니 이번 여행의 1막이 끝난 기분이다. 유럽을 여행하고 지금까지 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니 이제 4분의1이 지난 셈. 러시아를 벗어나 유럽 대륙의 가장 동쪽 끝인 포르투갈 호카곶까지 가야 절반. 러시아를 벗어날 때까진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최대한 빨리 유럽으로 들어가고 모스크바는 돌아갈 때 여유 있게 둘러보기로. 추위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넉넉하게 9월 중순까지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돌아가야 하니 여유를 부리기 힘들다.엔진오일과 체인루브를 구하려 근처 바이크샵에 가려고 나왔더니 세찬 비가 내려서 포기. 예보가 틀린 적이 거의 없다. 모스크바에선 하루만 쉬며 정비하고 아침 일찍 러시아워를 피해 라트비아로 간다. 유럽 국가로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가려면 보험(그린카드)을 들어야 하는데 라트비아 국경에서 받는 것이 가장 저렴하다.어디로 입국하느냐에 따라 3개월 보험료가 적게는 55유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해 러시아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핀란드로 갈 경우 수백 유로를 내야한다. 대부분 유라시아 횡단 여행자들은 몽골, 중앙아시아를 통과해 동유럽으로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보험료가 저렴한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로 입국하는 경로를 선호한다.이제 유럽 내에서 어떻게 이동할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쉴 때마다 지도를 보는데 동선을 짜는 게 쉽지 않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지만 달릴 거리를 생각하면 여유가 많지 않다. 포기할 건 깔끔하게 미련두지 않기로.◇ 치킨을 먹으려 1시간 넘게 걷다시내 관광이라도 나갈까 했는데 비가 와서 강제 휴식 중. 밀린 빨래도 하고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있나 헤아리고 줄일 짐은 없나 뒤적거린다. 하나라도 줄일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좋겠지만 있다 해도 놓고 가긴 어렵다. 한 번도 꺼내지 않은 노트북이 애물단지다. 챙기면서도 고민을 많이 했었다.몇 년 전 두어 번 긴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만해도 기록이나 숙소와 교통편 예약, 행선지 검색 모두 노트북으로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것만 놓고 왔어도 2킬로그램은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가방을 열 때마다 후회하는 중. 아직 달릴 거리가 많이 남았으니 집으로 돌려보낼 방법을 찾기로 한다.비가 그치자마자 바로 시내에 나갔다. 꽤 먼 거리를 걸었다. 10킬로미터쯤 걸어 다녔다. 모스크바 시내 반대편(숙소는 시내 동쪽 외곽에 있었고, 오토바이 매장은 서쪽 외곽)까지 가서 엔진오일과 체인루브를 샀고, 저녁으로 치맥을 먹었다. 길을 가다 오븐에 굽는 통닭을 봤고 숙소에 들어갔다가 다시 그 가게까지 걸어 1시간 넘게 기다려 사 왔다. 닭이 꽤 큰데 가격은 330루블(약 6천원)이었다.현재 함께 달리고 있는 현묵 군은 휴대폰 거치대와 탑박스를 가져오지 않아 고생 중이다. 어제 방문했던 매장에서 적당한 것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찾는 물건이 없어서 실패했다.여행을 시작한 이후에는 무엇이든 바꾸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은 처음 시작할 때 선택을 잘 해야만 불편을 줄일 수가 있다. 여행 경비를 최대한 아껴야 하는 처지에선 기존에 가져온 것을 두고 다시 구입하는 것이 쉽지 않다. 탑박스가 진열된 매대 앞에서 한참 고민하고 계산기를 두드렸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는지 포기. 나도 탱크백과 여름용 라이딩 자켓을 보고 마음이 혹했으나 가격표를 보고 가만히 내려놓았다. 러시아 오토바이 매장의 물건 값은 우리와 거의 비슷하거나 아주 약간 저렴한 듯.우리가 묵는 숙소는 커다란 낡은 창고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높은 담으로 아예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트럭이나 버스 운전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듯하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이런 곳에 숙소가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안전하게 주차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붉은 광장에서 감상한 ’백조의 호수’다시 하룻밤을 보내고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바이크샵을 찾아 나섰다. 어제 구입하지 못한 물건들 때문이었다. 버스와 지하철, 그리고 미니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이나 걸려서 도착했지만 역시나 이곳도 현묵 군이 찾는 물건이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택시를 제외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트로이카 카드를 구입하면 편리하다. 우리네 교통카드와 같은데 지하철과 버스를 탈 때 사용한다. 단 미니버스는 현금을 내야 한다. 트로이카 카드는 지하철 역에서 구입할 수 있다. 보증금은 50루블이고 원하는 금액만큼 충전해서 사용할 수 있다.돌아오는 길에 모스크바의 상징 성 바실리 성당을 보고 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붉은 광장으로 가는 길에 수산물 박람회도 구경하고 전통복장을 차려 입은 미인이 같이 사진 찍자고 내 손까지 잡았지만 미안하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왜 제 손을 잡는지 다 알아요!) 사진을 찍으면 모델료(?)를 요구한다. 주로 어리바리한 동양인 아저씨들이 대상인 듯하다.붉은 광장에는 서가가 가득 찬 부스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책 축제가 일주일 동안 열릴 예정이라 각 부스마다 출판사에서 나온 직원들이 책을 진열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러시아 출판사 사람들도 다들 책 만들고 파느라 고생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마음 같아선 내일 하루 더 짬을 내어보고 싶었으나 갈 길이 머니. 성 바실리 성당 가까이엔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오케스트라가 리허설 중이었다.책 축제에 오케스트라가 공연을 하다니 우리네랑은 스케일이 다른 모습이었다. 크고 작은 책 축제에 가보았지만 이만한 공연은 보지 못했다. 비록 리허설이지만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실시간으로 들으며 붉은 광장을 둘러보게 될 줄은 몰랐다.돌아오는 길에 육교 위에서 병색 가득한 엄마와 함께 구걸하는 아이를 보았다. 예닐곱이나 되었을까. 주머니에 잡히는 동전을 모두 아이가 들고 있는 작은 종이 가방 속에 넣었다. 세상은 언제나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기 마련이다. 해맑은 아이 얼굴을 보며 한 인간에게 주어진 슬픔은 공평하게 총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슬픔은 곱으로 쳐서 감할 수 있기를.내일은 러시아에서 묵는 마지막 밤이 될 듯하다.    /조경국

2020-03-24

웅장하면서 아름다운 탁청정

집은 장소와 터가 중요하다.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본래의 장소를 떠난 집은 무미건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기한 보물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명작들의 공동묘지’라 하지 않던가. 오늘 가는 오천문화재단지의 군자마을도 1972년 안동댐 수몰로 광산 김씨 예안파의 중요한 고택 20여 채를 옮겨놓은 곳이다. 같은 수몰지에서 옮겨온 것이라도 농암 종택이 분천마을과 비슷한 상류의 가송리로 옮겼다면 군자마을은 인근 산중턱으로 옮겨와 주위의 자연환경은 볼품 없지만, 집 그 자체에서 풍기는 고택의 향기는 대단하다. 우선 군자마을 주위를 살펴보기 위해 와룡면에서 예안 쪽으로 광산김씨 종택 긍구당을 지나 돌고 돌아 도산서원에서 흘러가는 낙동강을 보면서 이끼마을 선성현문화단지를 둘러 군자마을을 포위하듯이 보고 갔다.#.안동과 구곡(九曲)문화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성리학은 신성불가침의 국가이념이었고 중심철학이었다. 그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주자·1130~1200)는 선비들의 흠모를 넘어 숭모의 대상이고 롤 모델이었다. 주희는 중국 복건성 무이산에서 주자학(성리학)을 성립했고, 주자가 머물렀던 무이정사에서 서원의 모범으로 삼았고, 무이산 계곡에 이름붙인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조선의 사대부들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구곡을 정하여 자연과 일치되는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했다.경남 고성에는 아예 무이산이 있듯이 주희를 흠모한 회재 이언적(晦齋·1491~1553)도 자신의 호 첫 자를 주희 호 회헌(晦軒)의 첫 자로 삼고 경주 옥산계곡에 4산5대와 9곡을 만들었고, 퇴계 이황(1501~1570)은 도산 구곡을 정하고 도산 12곡을 노래했다.퇴계도 군자마을에 제자 후조당 김부필(1516~1577)과 탁청정 김유(1491~1555)가 있어 자신이 지은 도산가 “안개와 노을을 집으로 삼고,/ 풍월로 친구삼아/….라고 노래했을 것이고, 분천마을의 농암을 만나서는 배위나 바위에 앉아 먼저가신 농암 이현보를 생각하면서 어부가를 부르며 자신의 4곡 “봄바람 부니 꽃은 산에 가득 피어있고,/ 가을밤에는 달빛이 누대에 가득하니.” 를 읊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희가 무이구곡에서 5곡(탁영)을 ‘산 높고 구름 깊어 숲이 언제나 안개구름에 어둑하다.’노래하며 그곳에 무이정사를 지었듯이 1565년 65세에 낙향한 퇴계도 자신이 지은 도산 12곡에다 도산서당을 마련하고 “오곡이 깊은 산 들어가니 은거하던 선비는 어디 있는고,/ 산 앞에 높은 대(臺)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 그리고 청량산으로 가면서 고산정에서 제자 금난수와 학문을 논하면서 “고인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고인을 보지 못하니./ 했을 것이고, 청량산 코앞에 와서는 ”청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가./ 하면서 자신을 자연에 맡기고 다시 담담하게 학문에 몰입했을 것이다.율곡 이이(1536~1584)도 해주 수양산 석담에 머물면서 무이산 은병봉에서 따온 은병정사를 지어 고산9곡을 정하고 고산가를 불렀다. 공자의 나라 중국을 사모함이 지나쳐 죽을 때 망한 명나라의 ‘만동묘’에 제사지내라 했던 우암 송시열은 속리산 화양계곡에 머물면서 화양구곡을 정한다.이처럼 온 조선의 강과 계곡에는 100개가 넘는 구곡이 생긴다. 그중 경상도가 55개(51.4%)로 반이 넘고 충북이 22개로(20.56%)를 차지한다. 단일 지역으로는 안동이 10개로 제일 많은 것은 청량산에서 맑은 물이 낙동강으로 흘러오면서 강물은 산을 넘지 못하기에 물줄기가 계곡과 절벽이 부딪쳐 곡(曲)을 만들면서 구곡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인걸이 자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걸을 만들었지만, 그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칠 맛나게 살려내는 것은 사람이다. 여기에 성리학으로 무장된 안동선비들은 주로 상류 낙동강 변에 살았던 자연환경이 구곡문화의 이상향을 만들게 했다. 퇴계가 죽을 때 ‘저 매화 분에 물주라’며 그토록 아꼈던 매화가 도산 서당 앞에는 꽃망울 터트리고 앞마당에 왕 버들은 흡사 구곡같이 휘어져 용트림하고 있었다.#. 명작들의 공동묘지 고택 박물관1972년 안동댐으로 곡(曲)들 일부는 수몰되어 원래의 기능을 잃었고, 마을도 사라지고 사람도 떠났지만 괜찮은 고택들은 여기저기 옮겨져 있다. 대개의 고택들이 사람이 살지 않아 생동감 없는 녹화방송같이 박제된 모습으로 앉아있다. 원래부터 있던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 같이 기와집 초가집이 어우러진 마을이 아니라 문화재 고택들만 옮겨와서 정감 없는 ‘고택들의 야외박물관’ 같은 곳이 군자마을이다. 그러나 고택 하나하나 애정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도 박물관에서 명품을 보듯이 잔잔한 여유와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군자마을을 들어서자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경사진 산에 잡목들을 정리하여 미끈하게 쭉 뻗은 소나무들이 사람 하나 없어도 생기를 불어넣어 고택들이 한결 돋보였다. 혼자서 마음껏 눈과 마음을 호사했다. 임진왜란 때 영남의병대장으로 순국한 근시재 김해(1555~1593) 선생의 숭고한 비를 보고 왼쪽 산위에서 전체를 조망하고 내려와 군자마을 입향조 후조당 김부필(1516~1577)의 종택에 딸린 별당 후조당으로 갔다. ‘ㄱ’자집으로 흐트러짐 없는 단단한 격을 품고 있었다. 남부지방의 개방형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모두를 여름이면 들어 올리는 합각문으로 꽁꽁 싸매어 답답해 보였으나 추운 안동지방의 자구책이다.대청마루에 퇴계가 제자에게 써준 ‘후조당’ 편액은 멋 부리지 않는 퇴계의 정직 담백한 글씨가 외롭게 걸려있다. 그 옆에는 정면 6칸의 단정한 누각형식의‘운암정사’가 붉은 매화와 봄의 향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붙어있는 설월당 정자도 4칸 누각형식으로 단정한 낭만을 드러내고 그 앞에는 아직 피지 못한 자목련이 매화에 질세라 검붉은 자색 꽃을 살며시 밀어내고 있었다, 마치 금붕어가 알을 낳듯 몽우리 진 수많은 자목련이 봄 햇살에 엷은 미소 머금고 속삭이듯 나오고 있었다. 하염없이 자목련이 다 필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싶었으나 이성의 발걸음은 파청정 정자로 향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고택들을 돈보다 정신을 추구하는 광산김씨 문중의 힘으로 옮겼다니 대단한 일이다.#. 힘과 멋이 어우러진 탁청정과 낭만의 낙운정잘난 사람들만 다 모아놓아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있듯이 여기도 광산김씨 문중의 내노라 하는 고택들을 옮겨 놓았지만 군자마을의 스타는 탁청정과 김유이다.탁청정은 김유(1491~1555)의 호에서 따온 이름인데 멱라수에 빠져죽은 비운의 충신 초나라 굴원(BC343~BC223)의 어부사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에서 따왔고, 정자치고는 엄청 크다. 종이 웅장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웅장하기 어려운데 이 정자는 웅장하면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격이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옥도 하나의 로망으로 전국에 수없이 짓고 있는데 규모만 크고 멋도 울림도 없는 것은 안목 없는 졸부들의 천박한 과시용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공평하여 안목 있으면 돈이 없고 돈 있으면 안목 없는 것이다. 퇴계나 남명이 기거한 도산서당이나 산청의 산천재를 보라. 대유학자들도 최소한의 공간으로 소박하면서 절제의 미를 품어내지 않던가. 건물 특히 정자는 주인의 철학과 안목, 인품이 스며있기에 결국 주인이 누구냐가 중요한 포인터가 된다. 원래 정자는 자연 속에 있는 듯 없는듯해야지 크면 자연과 분리되는데 이 탁청정은 크면서도 드라마틱한 장쾌한 미를 발산한다. 정자에 올랐다. 규모도 그렇지만 조선의 최고급 소나무들로 마음껏 멋을 부렸다. 김유 사후에 명필 석봉 한호(1543~1605)의 힘 있고 옹골차게 쓴 ‘탁청정’은 정자에 어울리는 화룡점정을 찍는다.그러면 이 정자의 주인 김유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토록 큰 정자와 옆에 있는 큰 살림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보통의 선비들이 그러하듯 과거보아 입신양명하는 것이 최고의 원하는 코스였다. 김유는 생원시에는 합격했지만 계속 낙방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형님을 대신하여 부모님 봉양하면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낭만적인 삶으로 방향을 바꾼다. 고모가 남긴 유산으로 경제적 고민 없이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복을 사람접대와 1541년(51세)에 고래 등 같은 정면 6칸의 안채와 이런 멋진 정자를 지었다. 지금이야 먹방이 대세이고 남자 셰프들의 전성기지만 김유는 600여 년 전에 전통요리책 ‘수운잡방’을 지었다. 121가지 요리를 소개하는데 주로 술 담는 법 61항목, 김치가 17항목이다.집의 당호를 보면 주인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듯이 ‘수운잡방(需雲雜方)’은‘역경’에 “구름 위 하늘 음식과 주연으로 군자를 대접한다(雲上于天需君子以飮食宴樂)”에서 따온 것으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경제력에다 벼슬하지 않아 집 짓는데 올인 할 수 있었다. 마음껏 멋 부린 격조 있는 명품 정자를 지었던 김유는 행복은 부와 명승보다 좋은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탁청정이 근엄하고 권위적인 본부인이라면, 탁청정 아래 낙운정(落雲亭)은 수줍은 듯 낭만이 흘러 아름다움은 다 갖추었으면서도 말없는 첩 같아 연민의 정이 흐른다.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

2020-03-24

가장 한국적인 그러므로 가장 세계적인 꿈을 꾸다

김동리(1913-1995)의 묘비에는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던 한국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른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무지개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거인 김동리와 평생을 교유하며 한국문학을 이끌었던 또 한 명의 거인 미당 서정주(1915-2000)이다. 함께 한 시간의 깊이와 최고 시인의 안목이 만난 결과인지는 몰라도, 이 묘비명만큼 김동리라는 인간과 문학을 요령 있게 압축해 놓은 글도 드물다.한국문학사에서 김동리는 많은 힘을 누렸던 문인이었다. 좌익의 내로라하는 맹장들에 맞서 순수문학을 옹호했던 김동리는 40대에 이미 한국문단의 원로였다. 1953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에 부임했고, 1954년에 41세의 나이로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문예지 ‘현대문학’, ‘월간문학’, ‘한국문학’ 등을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는 문단 조직, 후배 문인 양성, 발표 지면이라는 문학장의 핵심적인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이러한 문단권력자로서의 모습은 김동리의 당당한 실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시와 소설이라는 장르를 넘나들며 신춘문예를 세 번이나 통과한 재사이다. 더군다나 그의 뒤에는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이름이 높았던 맏형 김정설(1897∼1966)이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힘의 근원에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비약하던 그의 작품이 존재했다.김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고 불린다. 이것은 작가가 “우리 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것, 혹은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무속과 나의 문학’, 월간문학, 1978.8)을 추구한 결과이다. 이러한 필생의 과업을 수행하기에 김동리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신라 천년 고도(古都)인 경주에서 나고 자랐던 것이다. 경주는 화랑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고유한 정신이 가장 많이 남겨져 있는 곳이다. 김동리는 자신의 정신은 물론이고 육신에까지 경주의 고유한 정신과 풍속을 깊이 새기며 성장하였다.‘巫女圖(무녀도)’(중앙, 1936.5)는 경주라는 신성한 자궁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요한 배경인 성건동은 일명 ‘무당촌’이라고 불릴 만큼 무당이 한 집 건너에 있는 무속 짙은 마을이었다. 김동리는 경주시 성건동 189번지(현재는 284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도 골목에 무당집이 많았다고 한다. 주인공 모화가 마지막에 굿을 하다 빠져 죽은 소는 예기소이다. 서천 변 금장대 절벽 밑에 있는 예기소는, 예기(기생)가 사람을 유혹하듯이 물이 사람을 유인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김정숙, ‘김동리 삶과 문학’, 집문당, 1996, 68-75면) 욱이가 처음 집을 떠나 머물렀다고 하는 기림사는 일제 시대 경주 지역의 14개 사찰을 관할하던 대사찰이었다.‘무녀도’는 작가의 출세작일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무척이나 아낀 작품이다. 이것은 ‘무녀도’가 장편 ‘을화’(1978)로 개작될 것까지 포함하여 무려 세 번이나 개작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무녀도’는 무당인 모화와 기독교인인 아들 욱이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신동으로 소문난 욱이는 공부를 하기 위해 아홉 살에 모화의 품을 떠났다가 약 10년 만에 ‘신약성서’를 들고 돌아온다. 이때부터 모화는 욱이를 “몹쓸 잡귀에 들린 것”으로 여기고, 욱이는 모화를 “사귀 들린 여인”으로 여기며 서로 갈등한다. 그 갈등은 점차 고조되다가 결국 모화가 욱이를 칼로 찌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모화와 욱이의 갈등에는 김동리의 유년기 체험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동리의 아버지 김임수는 자수성가한 당당한 인물이었는데 50세를 전후한 시기에는 그만 술로 인생을 탕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유교적 가풍에 젖은 아버지는 아내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아 둘의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술을 가리켜 “마귀의 음식”이라고 하고, 술에 취한 아버지는 “예수 잡자, 너구리 잡자”라며 미친 듯 어머니에게 달려드는 일이 매일같이 펼쳐졌으니, 어린 김동리가 받았을 충격과 공포는 대단했을 것이다.(김윤식, ‘김동리와 그의 시대’, 민음사, 1995, 103-105면) 이러한 부모의 싸움은 어린 김동리의 내면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것이 ‘무녀도’에서 모화와 욱이의 종교적 갈등이라는 명작을 낳았다는 것이다.김동리에게는 이때의 어머니가 모화이자 욱이이고, 또한 아버지가 모화이자 욱이였을 것이다. 기독교를 믿는 자와 배척하는 자라는 면에서 욱이는 어머니이고 모화는 아버지일테지만, 자신의 신앙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욱이가 아버지이고 모화는 어머니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핵심은 어린 김동리에게 무서움, 전율, 절망, 비분, 저주스러움을 전해준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처절한 싸움의 원체험이 ‘무녀도’의 밑바탕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결국 욱이는 죽지만, 그의 노력으로 이 미개하고 낙후된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당이 서고 전도사가 들어온다. 대신 모화는 기독교를 믿게 된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다. 이 상황에서 모화는 일생일대의 시험에 나선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예기소에 몸을 던진 김씨 부인의 혼백을 건지는 굿을 함으로써, 자신의 영검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화는 김씨 부인의 혼백을 건지는데 실패하고, 대신 예기소 검푸른 물속으로 스스로 들어간다.모화와 욱이의 대결은 끝내 둘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둘의 승부는 욱이의 승리로 끝났다고 볼 수도 있다. 욱이는 역사의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러했듯이, 죽음을 통해 그토록 자신이 꿈꾸던 복음의 전파라는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둘의 대결에서 패배자는 모화이고, 모화의 죽음은 소멸해 가는 세계에 대한 비극성을 보여준 것으로 규정하였다.그러나 과연 모화는 거대한 시대의 변화에 맞서 무력하게 패배한 비극의 주인공이기만 한 것일까? 이와 관련해 작가 스스로 ‘무녀도’에 대해 말한 ‘신세대의 정신’(문장, 1940.2)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김동리는 ‘무녀도’의 모화가 보여준 무(巫)는 우리 민족 고유의 이념적 세계인 신선(神仙)관념의 발로이며, 신선의 이념은 “한(限) 있는 인간이 한(限)없는 자연에 융화(融和)”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동리는 민족의 고유한 정신인 신선 관념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연속성과 동일성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세계적인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1908-2009)가 말한 대칭성의 사고와도 상통한다. 대칭성의 사고에서에는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으며, 부분과 전체는 하나라는 직감만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할 뿐이다.이와 관련해 모화의 특징으로 만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능력을 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화가 소통하고 교감하는 대상에는 “사람뿐 아니라 돼지, 고양이, 개구리, 지렁이, 고기, 나비, 감나무, 살구나무, 부지깽이, 항아리, 섬돌, 짚신, 대추나뭇가지, 제비, 구름, 바람, 불, 밥, 연, 바가지, 다래끼, 솥, 숟가락, 호롱불…”이 해당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녀와 서로 보고, 부르고 말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성내고 할 수 있는 이웃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화는 그 모든 것을 “님”이라 부른다.모화가 검푸른 예기소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그녀의 춤과 물의 너울은 같은 박자 같은 율동으로 어우러지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고 표현된다. 어쩌면 모화는 단순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물이라는 대자연과 ‘같은 박자 같은 율동으로 어우러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우리 고유의 신선이 된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 그녀는 죽음을 통해 만신(萬神)에서 신(神)이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만물을 영혼 있는 존재로 여기며, 그것과 융화되기를 갈망하는 정신. 이것은 근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미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지금 대구·경북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해서 2차 대전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에볼라, 사스, 메르스에 이어지는 인수공통 감염병으로 살 곳을 잃은 야생동물이 인간과 접촉하면서 탄생한 재앙이라고 말한다. 인간만을 절대시하고 자연을 한갓 수단으로 여긴 결과, 자연의 보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 정신의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제2, 제3의 코로나19는 언제든지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구리, 살구나무, 부지깽이마저도 영혼 있는 존재로 여겨 ‘님’이라 부르는 모화는, 어쩌면 잃어버린 우리의 소중한 얼굴인지도 모른다.1913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많은 문학평론가들이 “전통의 세계, 종교의 세계, 민속의 세계에 천착해 이를 바탕으로 빼어난 작품을 써낸 소설가”로 평가하고 있다. 대구 계성학교와 서울 경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35년엔 중앙일보, 이듬해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대표적인 우파 진영의 작가.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무녀도’ ‘등신불’ ‘황토기’ ‘사반의 십자가’ 등을 썼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