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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신성장 경제울진 구축… 2021 도민체전 손님맞이 총력”

전찬걸 울진군수는 희망찬 2020년을 ‘원전의존형 경제구조 극복 원년의 해’로 정하고 도민체전이 개최되는 2021년을 ‘울진방문의 해’로 선포했다.미래울진의 지속가능한 신경제 성장동력 육성과 더불어 도민체전 손님맞이 준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이를 위해 미래 신산업 육성, 치유·힐링관광 완성, 스포츠·레저산업 활성화를 새로운 성장동력 산업의 3대 핵심전략으로 수립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6대 역점시책 사업도 추진 한다.-울진군의 역점시책을 소개 해달라.△해양과학·해양바이오·에너지 등 신산업 육성을 통한 ‘새로운 성장 경제울진’ 을 구축하겠다.기존의 전략자산인 경북해양과학연구단지와 연계하는 ‘해양바이오 산업 기술개발 산업화’, ‘해양심층수·염지하수 산업기반 구축’을 통한 의료, 화장품, 식품관련 기업의 적극 유치와 제조, 서비스, 대학교육, 관광서비스를 결합한 ‘해양바이오 메디컬헬스 특화단지 조성’을 위한 기반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국내 최대의 원자력발전단지의 지역입지 여건을 최대한 활용해 경북 원자력방재타운 건립과 원자력 수출실증단지 조성 유치에 전력을 다하겠다.미래사회 차세대 에너지원인 수소에너지 생산기반 조성을 위해 수소에너지 특화단지 유치, 차세대 원자로 활용 수소에너지 생산기반 조성 선점을 위해 노력하겠다.투자유치 촉진조례를 개정해서는 대외 공격적인 투자마케팅으로, 양질의 기업유치로 농공단지 활성화를 도모하고 중소기업 인턴사원제, 지역혁신 일자리지원 프로젝트, 사회적경제 청년일자리 사업 등 다양한 청년유입 일자리 정책사업을 추진, 청년이 돌아오는 농촌으로 탈바꿈시키겠다.ㅡ온천·숲·해양치유를 결합한 머물고 싶은 힐링울진 건설도 추진한다고 하던데.△2020년은 관광도시 울진을 상징하는 대규모 관광인프라가 완료됨에 따라 힐링관광도시로 새롭게 도약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권역별 특성을 살린 소프트웨어 개발을 동해안 최적의 힐링 관광지로 가꾸어 나갈 것이다.남부권역은 후포 국제거점형 마리나항을 중심으로 백암온천 산림생태공원과 향후 조성될 해양치유 센터와 연계한 역사·문화, 해양·온천치유를 결합한 관광코스로 개발할 예정이다.중부권역은 항공기술 전문학교 유치로 울진공항 활성화 도모와 현종산 풍력단지 경관활용 특화관광지 조성, 오산 해양레포츠센터와 연계한 오산종합리조트 및 울진마린골프장 내 민자 리조트 유치와 동시에 엑스포공원과 연계한 왕피천 케이블카 설치, 염전해변 관광자원화 사업 완공으로 명실공히 울진관광의 허브로 조성할 계획이다.-북구권역 개발계획도 들려달라.△북부권역은 덕구온천 주변에 관광객 놀이체험·휴식공간을 조성하고 금강송에코리움과 연계한 국립해양과학관, 죽변해안 스카이레일 설치에 이어 죽변항 이용고도화 사업이 완료되면 죽변항에 유람선을 유치해 온천, 산림, 바다, 해양과학체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울진의 새로운 휴양관광지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그리고 스포츠, 레저, 여행을 결합한 스포츠관광을 울진의 신성장 산업 육성, 2021년도 경북도민 체육대회 기반조성을 위한 인프라 구축사업으로 울진마린CC 조성, 흥부생활체육공원 조성, 남부 스포츠센터 조성사업의 조속한 마무리와 후포마리나 요트, 해양레포츠 체험, 바다낚시 등 스포츠·레저투어 프로그램을 개발해 마케팅 집중과 전국단위 스포츠대회 및 전지훈련 유치로 관광서비스업을 활성화해 지역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도록 하겠다.또 주인예술촌 확대 조성으로 전국 유명한 예술작가들을 초빙해 작업할 수 있는 공간 마련과 유영국 화백의 생가를 복원해 문향울진의 긍지를 높이는 한편 울진 북부도서관신축으로 공동육아나눔터, 어린이도서관 등을 갖추고 유교, 향교문화의 전통적 가치와 올바른 인성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울진전통문화 교육회관을 건립 하겠다.-복지분야에 대한 비전은.△군민 누구도 소외됨이 없는 촘촘한 복지로 ‘더불어 잘 사는 복지울진’을 실현하겠다. 주거, 교육, 복지, 의료 등 군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부분에 투자를 확대해 군민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높이겠다.저출산 고령화 사회 극복을 위한 첫째아 출산장려금 및 전입아동 축하장려금 지원기준 마련과 양육에 대한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공공산후조리원 설치, 북면·후포 어린이집 신축, 맞춤형 돌봄서비스 통합을 통한 서비스 일원화, 경로당 행복도우미 지원으로 어르신들의 다양한 여가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 울진군립추모원 조성사업의 조기완공으로 군민들의 경제적 부담과 불편도 해소할 방침이다.-부자농어촌 건설을 위한 복안은.△돌아오고 싶고 살고 싶은 ‘풍요로움이 가득한 부자 농어촌’을 건설하겠다. 농산물 시장개방, 농촌의 고령화, 일손부족 등으로 지금 농어촌은 매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농어업도 고도의 기술집약화 스마트 ICT농수산업으로 전환하겠다. 치열한 경쟁 끝에 전국 3개 시군만 선정된 ‘스마트축산 ICT한우단지 조성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스마트 농업 테스트베드 교육장 조성’, ‘스마트 시설하우스’ 설치 등에서 나아가 수산업도 스마트 양식어업으로 바꾸고 스마트 팜 혁신기술을 활용한 ‘로컬푸드 직매장 구축’과 ‘친환경채소 스마트 팜 단지’를 조성하겠다.또한 농산물 가공교육관을 활용한 신제품 개발 및 농업인 가공창업 교육·지원 확대, 해양레저 관광의 거점 공간조성을 위한 ‘석호항 어촌뉴딜300사업’과 다목적 복합공간인 ‘후포 해양수산복합 센터 건립’ 및 ‘죽변 수산물유통 복합센터 건립’을 추진하겠다.-안전한 고장 만들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사람중심! 안전하고 깨끗한 생활환경 조성으로 ‘행복가득 쾌적울진’을 만들어 가겠다.태풍 ‘미탁’ 침수피해 지역인 울진, 평해, 후포지구 배수펌프 시설 4개소 846억원의 국비예산을 확보했다. 군민의 소중한 재산과 인명이 보호될 수 있도록 시설개선 사업의 조속한 마무리와 농산어촌의 정주여건 개선을 위한 기성면, 북면, 금강송면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 ‘평해읍 기초생활 거점 육성사업’을 추진하겠다. 전 군민 기본전기요금 지원과 LNG 배관망 설치 지원, LPG 소형 저장탱크 보급, 주택용 태양광·태양열 보급사업 등 에너지 경감 정책도 확대해 나가겠다.또 전기자동차 보급 및 충전 인프라 확충과 미세먼지 저감 조림사업, 숲 가꾸기 사업, 대기질 환경 개선사업 등 미세먼지 없는 청정울진 이미지 제고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군민과의 소통도 강조되고 있다.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군민과 함께하는 ‘소통울진, 현장행정’을 위해 ‘이동군수실’ 운영을 활성화하겠다. 현장행정 강화와 새로운 환경변화와 행정수요에 적극 대처할 수 있도록 조직개편을 하겠다. 1년 365일 군민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다니는 소통행정을 통해 군민이 주인되는 군민주권시대를 열어 갈 것을 약속한다.울진군 공직자부터 시작한 친절 운동에 전 군민의 참여로 친절울진을 건설해 울진발전의 성장동력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 이 문화혁신 운동에 군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부탁 드린다./장인설기자 jang3338@kbmaeil.com

2020-02-16

거대한 황제의 동상 앞에서 떠올린 인간 존재의 비루함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수도다. 나라 인구의 1/3이 그 도시에 산다. 20세기 초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 연방은 국경을 맞댄 몽골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 경제적 지배까지 면밀하게 계획했다.소련에서 생산된 석탄이 울란바토르로 대량 유입됐고, 몽골은 아직까지 그때 만들어진 난방 시스템으로 겨울을 나고 있다. 1~2월 울란바토르의 기온은 영하 20℃를 밑돈다. 숨을 들이쉬면 코로 들어가는 공기 중 습기가 얼어붙어 콧속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의 추위다. 직접 느껴보면? 끔찍하고도 재밌다.독한 술 보드카와 달군 돌에 구운 양고기만으로는 달랠 수 없는 차가움.그래서다. 몽골을 여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탄 연기 가득한 갑갑한 공간 울란바토르를 빠져나와 초원을 달리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기자 역시 그러했다.도심 한복판에서 겨우 1시간 남짓 차를 타고 막막한 초원 위를 내달렸을까? 함께 한 일행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저게 뭐야?”야트막한 산과 기암괴석, 향기로운 들꽃이 아름다운 몽골 테렐지 국립공원(Gorkhi-Terelj National Park)엔 인공적으로 만든 조형물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곳에 아파트 20층 높이는 족히 될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동상이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칭기즈칸(1162~1227)이었다. 아니 칭기즈칸을 형상화한 조형물이었다.높이 40m, 무게 250t의 어마어마한 크기. 그 앞에선 입을 딱 벌리고 놀라는 것 외에는 별로 할 게 없었다.▲장쾌한 왕의 삶 앞에 바쳐진 거대한 동상칭기즈칸이 황금 채찍을 들고 말에 오른 모습을 재현한 기마상(騎馬像)은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해 지구 위에 존재하는 동상 중 가장 거대하다고 알려져 있다.사실 칭기즈칸은 제 나라에선 ‘신(神)’으로 추앙받는다. 죽은 지 800년이 가깝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칭기즈칸의 시대처럼 넓은 영토와 강한 국력을 가져보지 못한 몽골 사람들은 ‘좋았던 그 옛날’을 빛나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칭기즈’는 위대한, ‘칸’은 황제로 번역되니 그 이름에서부터 존경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몽골인들은 말한다. “칭기즈칸이 없었다면 누가 힘없고 인구도 적은 우리나라를 제대로 기억하겠는가?”그랬다. 13세기에 주위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해 거대한 제국의 기틀을 닦은 칭기즈칸은 비교적 합리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고유의 문자까지 만들었다.그의 손자 쿠빌라이칸(1215~1294)은 할아버지가 닦아놓은 길 위를 종횡무진 달려 더 넓은 땅을 몽골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구 면적의 30%에 해당했던 원나라의 영토. 그때까지 어떤 국가도, 어떤 왕도 가져보지 못한 방대한 넓이였다.겨우 수십 마리의 양이나 키우며, 물과 가축의 먹이를 찾아 거친 벌판을 헤매던 오합지졸 같은 사람들을 모으고 통합해 ‘잘난 체 하는’ 유럽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동양의 황제.물론 당시 원나라 기병대에게 짓밟힌 아시아와 중동, 유럽 일부 국가에선 ‘잔혹한 정복자’로 칭기즈칸을 폄훼하기도 한다.인간에 대한 평가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게 세상사 이치. 칭기즈칸 역시 몽골 사람들에겐 영웅이지만, 정복지의 국민들에겐 ‘무서운 악당’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법이다.몽골인들의 칭기즈칸 사랑은 유별나게 느껴질 정도다. 랜드마크가 될 만한 건물과 광장의 상당수에 ‘칭기즈’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뿐인가. 몽골에서 가장 비싼 보드카의 명칭도 ‘칭기즈칸’이다.그러니 ‘장쾌한 삶’을 살았던 자신들의 왕을 추앙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조형물을 만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기자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황제 동상 앞에서 ‘작고 사소한’ 절망과 슬픔을 노래한 시인 김수영(1921~1968)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떠올리고 있었다. 몽골 초원의 보잘것없는 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거대함’과 ‘사소함’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들김수영은 민감한 문학적 촉수를 통해 20세기에 살면서 21세기를 예언한 작가다. 그는 그것이 권력이건 자본이건 ‘거대한’ 힘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하면서,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화풀이나 해대는 ‘사소한’ 소시민의 모습을 아프게 그려냈다. 이미 반세기 전에.‘왕궁의 음탕’이 아닌 가진 것 없는 허름한 ‘설렁탕집 주인’에게, ‘구청 직원’이 아닌 만만한 ‘야경꾼’에게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며 욱대기는 김수영의 작품 속 인물은 2020년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한 달 내내 말을 타고 휘몰아쳐 달려도 다 돌아볼 수 없는 ‘광대한 영토’를 욕망했던 칭기즈칸, 이와는 반대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라고 노래하며 ‘사소한 서러움’을 속을 살았던 김수영.두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답변을 내놓기가 몹시 어렵다. 본디 인간이란 거대함과 사소함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여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가로놓여있다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부산에 포로수용소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너어스들 옆에서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 구창웅

2020-02-13

“시간이 흘러가도 변치않는 보석처럼 ‘나눔의 마음’도 지켜내며 살래요”

보통의 남자들처럼 ‘보석’에 별다른 관심 없이 살아가던 서울 남자와 어릴 때부터 ‘보석’의 매력의 빠져 대학에서도 보석 감정을 전공한 대구 출신의 여자가 만났다. ‘보석과 귀금속의 메카’로 불리는 종로3가에서였다.첫 만남에서 여자는 남자가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남자 역시 상냥한 태도와 배려가 담긴 여자의 말투에 호감을 가졌다. 동시에 여자가 매료된 보석에 대한 관심까지 생겼다.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여의 연애 끝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보석감정사인 아내에게 애정을 느낀 남편은 직업까지 보석세공사로 바꾼다. 포항시 북구에서 보석가게 다이아를 운영하는 육종성(45)-이효미(42) 부부 이야기다.사람이 사람에게 사랑과 신뢰의 감정을 가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런 감정에 이르기까지 매개체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종성 씨와 효미 씨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둘 사이를 이어준 가장 중요한 매개체 중 하나가 보석이었다는 것.입춘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날. 따스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보석처럼 예쁘게 살아가는 부부를 만났다. 그날 오간 흥미롭고 가슴 훈훈한 이야기를 아래 옮긴다.◇보석감정사 아내‘보석감정사’가 대충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겠으나, 보통 사람들에겐 아직 생소하다.광학 계기나 화학 용액을 이용해 보석의 가치와 진위 여부를 평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보석감정사다.그들은 보석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결함과 특성을 찾아내고, 보석의 표면과 내부를 검사한다. 더불어 보석 가격까지 측정하는 보석감정사는 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20대 초반부터 보석 감정과 판매 일을 해온 이효미 씨는 보석감정사 자격증 외에 미국에서도 통용되는 ‘보석가치평가사’ 라이선스도 가지고 있다. 벌써 경력이 20년이 넘는다.포항을 포함한 경북 지역에서 보석감정사가 상주하는 귀금속 가게는 극히 드물다. 효미 씨가 가진 2개의 자격증은 판매하는 보석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고, 손님들이 이들 부부의 가게를 믿고 찾는 이유가 되고 있다.인터뷰 중에 가게를 찾은 한 손님은 효미 씨의 웃는 얼굴과 사람 대하는 자세를 보고는 “선량하고 친절하다”고 칭찬했다.효미 씨는 “보석감정사로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감정하고 판매한 반지나 목걸이를 보면서 환하게 웃으며 만족감을 표시하는 손님을 볼 때”라고 답했다.사실 그렇다. 좋은 보석감정사가 되고 싶다면 남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가장 귀중한 순간에 선물로 역할 하는 게 보석이니까. 약혼식과 결혼식, 결혼기념일과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 입학과 졸업을 축하하며 건네지는 보석들. 그 가격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그것들 모두는 주고받는 이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보석감정사는 보석은 물론, 그걸 주고받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헤아려 함께 기뻐하며 감동하는 사람이 아닐지.◇보석세공사 남편아내에 대한 믿음이 보석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 육종성 씨는 결혼 전까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보석세공사’로 직업을 바꿨다.보석세공사는 처음 캐냈을 땐 투박하고 거친 자연 상태의 광물을 화려하게 빛나는 보석으로 바꾸는 일을 한다.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 진주 등 5대 보석은 물론, 금과 은 등의 귀금속이 제대로 된 가치를 보여줄 수 있도록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게 바로 보석세공이다.그들의 일은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오랜 시간 숙련된 보석세공사의 세밀함과 정교함은 어떤 기계도 따라올 수 없다고 한다.종성 씨 역시 아내와 비슷한 심성을 지녔다. “내 만족보다는 손님이 만족하는 세공이 이뤄졌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종성 씨의 말을 듣다보니 보석세공이란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작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가장 다루기 힘든 보석은 뭔가”라는 물음에 “비싸기도 하지만, 지구에서 제일 단단한 광물이기에 쉽게 세공하기 힘든 다이아몬드”라고 답한 종성 씨에게 “그럼 가장 편하게 다룰 수 있는 보석은 뭔가”라고 연이어 물었다.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보석은 대부분 아끼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아내를 향한 남편의 마음, 부모를 향한 자식의 마음, 서로를 향한 연인들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한다면 어떤 보석도 함부로 다룰 수 없다. 내가 세공하는 모든 보석이 가격과는 무관하게 똑같이 소중하다.”◇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지겹지 않아부부는 포항에 별다른 연고가 없다. 그럼에도 7년 전 포항으로 이주했고 가게를 시작했다. 두 딸도 여기서 자라 초등학교에 다닌다. 포항으로 온 이유를 물었다. 효미 씨의 답변은 심플했다.“오래 전에 포항을 여행했다. 음식도 맛있고 바다 풍경도 너무 예뻤다. 언젠가는 와서 살아보고 싶은 도시였다. 그래서 이사를 결정했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고, 살다보니 더 정이 들었다.”종성 씨와 효미 씨의 결혼 생활은 올해로 11년째다. 다른 부부들은 아침에 헤어졌다가(?) 밤에 다시 만나거나, 주말부부의 경우라면 일주일에 한 번 보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가게와 집에서 하루 24시간을 함께 지낸다. 농담처럼 물었다.“지겹지 않은가?”서로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웃던 부부가 입을 모아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이 통해서 좋았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저런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겁다. 그러니 지겨울 까닭이 없지 않겠나. 연애할 때나 지금이나 같이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다.”보석전문가인 이들 부부에 따르면 ‘보석에도 유행이 있다’고 한다. 초록빛 보석의 대세가 지나가면 붉은 보석이 선호되기도 하고, 크고 묵직한 보석에 열광하는 시기가 있다면 작고 앙증맞은 보석이 인기를 모을 때도 있다.그런데, 종성 씨와 효미 씨가 상대에게 가진 신뢰와 애정은 유행을 타지 않는 보석처럼 한결같아 보였다.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기자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두 딸과 함께 하는 봉사 활동 즐거워오랜 시간 보석을 곁에 두고 살아온 부부이니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인간에게 보석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고민하지 않고 종성 씨가 답했다.“시간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효미 씨가 아래와 같은 말을 덧붙였다.“얼마 전 결혼 20주년을 맞은 남편이 1천만원이 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려고 가게에 온 적이 있다. 그 손님은 반지를 통해 아내에게 ‘처음 당신을 만나 사랑하게 됐을 때의 마음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준비한 선물이라면 10만원짜리 반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만큼 값어치가 있다고 믿는다. 보석의 가격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를 향한 애정 아니겠는가.”마지막으로 ‘또 다른 보석’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한다.부모에게 자식이란 같은 무게의 금이나 다이아몬드와도 바꿀 수 없는 세상 가장 귀한 보석이다. 종성 씨와 효미 씨 역시 분명 딸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터.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재산보다 귀한 ‘나눔의 마음’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쉬는 날이면 딸들과 무료 급식소 배식 봉사, 환경 정화 활동 등을 함께 하고, 양로원에 가서 외로운 할아버지·할머니의 말벗이 돼주기도 한다. 아이들도 그 시간을 좋아한다. 애들이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어른으로 커갔으면 좋겠다.”종성 씨가 꺼내든 가족사진을 본 순간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포항에는 보석을 매개체로 만나 보석 같은 마음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착한 부부가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2-12

역사 속 ‘자유시 참변’… 세월마저 멈춘 듯 상처투성이

◇ 자유시 참변의 현장을 찾다비를 피해 하룻밤 보낼 수 있었지만 타이어 공기압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공기가 반쯤 빠진 타이어로 장거리를 속도를 내어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출발하자마자 주인아저씨가 알려준 에어 펌프가 있을만한 주유소로 갔으나 허탕, 다른 주유소를 찾아나서야 했다. 이른 아침이라 자동차 정비소는 문을 열기 전이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마지막 주유소에 가서도 에어 펌프는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망하긴 일렀다. 휘발유를 넣는 동안 내게 어디서 왔느냐 질문을 던진 노신사가 직원과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신을 따라오라 했다. 노신사는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꼼뿌레샤!”를 꺼내 깊은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의 차 트렁크엔 웬만한 공구들이 다 실려 있었다. 하긴 인적 없는 시베리아 들판에서 고장이라도 난다면 직접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비사나 견인차를 부르는 것도 쉽지는 않을 테고 부르더라도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간단한 정비는 다들 스스로 하겠지. 공기를 가득 넣은 만큼 자신감도 불어났다. 어제만 해도 달리면서 조마조마했었는데 불안감이 완벽하게 가셨다.시베리아를 지나며 구체적인 경유지를 딱 한 곳 정했었다. 옛날 ‘자유시’라 불렸던 스보보드니. 그곳 역에 있는 급수탑이 경유지였다. 시베리아 횡단 메인도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긴 했지만 자유시만큼은 꼭 가보고 싶었다.1921년 6월 28일 독립군이 소비에트 적군에게 공격받아 학살당하고 도망치거나 포로로 잡혀 독립군 조직 자체가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던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바로 그곳이다.자유시 참변으로 홍범도 장군은 소비에트 적군에게 붙잡혀 카자흐스탄까지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의 승리로 기세를 올렸으나 독립군은 항상 변변한 무기조차 구하기 힘든 나라 잃은 군인이었다.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자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고자 찾았던 자유시에서 오히려 큰 화를 당하고 이후 다시 투쟁을 위한 대오를 갖추기까지 많은 세월을 허비해야 했다. 당시 소비에트 적군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길 포기하고 그들의 회유에 만주 일대에서 모여든 독립군을 오히려 무장 해제시키려 했다. 아직 왕정 복고를 노리는 백군과의 내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의 독립군을 지원하는 건 무리였다. 오히려 일본의 공격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그뿐 아니라 독립군 내부의 주도권을 놓고 일어난 내분도 자유시 참변의 원인이었다. 스보보드니 역 급수탑 주변은 소비에트 적군의 무장해제 명령을 거부한 독립군이 당시 마지막 항전을 벌인 곳이다.스보보드니 가는 길은 황량했다. 100년 전 독립군들은 나라를 떠나 이역만리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이곳까지 목숨을 걸고 왔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천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이곳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왔지만 동료들과 소비에트 적군의 배신으로 눈물을 삼키며 흩어져야 했다. 스보보드니는 시라고 하기에도 작은 마을이었다.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도 포장 상태가 엉망이었고 건물들도 세월이 오래 전 멈춰버린 듯 낡아 있었다. 역사의 현장이었던 급수탑도 마찬가지. 육교 위에 서서 급수탑과 역 주위를 살피니 ‘산천은 의구하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옛말이 절로 떠올랐다.이곳에서 독립을 위해 총칼을 들었던 용감한 청년들은 몇이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스보보드니를 벗어나며 그 시절 독립군이 불렀다는 ‘광야를 달리는 독립군’을 가만히 읊조렸다.광야를 헤치며 달리는 사나이오늘은 북간도 내일은 몽고 땅흐르고 또 흘러 부평초 같은 몸고향을 떠난 지 그 몇 해 이런가석양 하늘 등에 지고 달려가는 독립군아남아 일생 가는 길은 미련이 없어라.◇ 먼저 떠난 젊은 여행자들을 만나다제야강(흑하)을 다시 거슬러 올라 모고차로 향했다. 오후가 되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와 비바람 때문에 결국 모고차까지 가길 포기했다. 800킬로미터쯤 달려 숲이 첩첩 겹친 작은 마을 예로페이라는 곳에 멈추고 숙소를 찾아 들어왔다.종일 비가 오다 숙소에 들어올 때쯤 그쳤다. 이놈의 비. 예전 빗길에 미끄러진 아픈 기억이 있어서 빗길 주행은 항상 피곤하고 몸이 빨리 굳는다. 힘을 빼고 타야 오래 달릴 수 있는데 커브길이나 비포장길을 만나면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달리다 쉴 때는 커피 한 잔 끓여 마시는 게 즐거움이다. 집에서 아이들 컵라면 두 개를 몰래 가져와 아껴 두었는데 밥 사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하나 꺼냈다. 아우 성진이 선물로 챙겨준 칼로리바는 출출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었다.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자에겐 정말 탁월한 선물인 듯. 치타에 가까워질수록 초원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자연 환경이 바뀌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좀처럼 볼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니 드넓은 지형을 만나면 괜스레 가슴이 뛴다.예로페이에서 하룻밤 묵고 네르친스크를 향해 달리다 일주일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먼저 도착해 출발한 팀을 만났다. 20대 청년 다섯 명이서 스쿠터를 타고 포르투갈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숙소를 잡고 밥을 얻어먹고 대신 맥주를 샀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함께 이렇게 멀리 여행할 수 있다는 건 두고두고 멋진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예로페이에 오기까지 꽤나 고생한 모양이었다. 배기량이 큰 오토바이로도 쉽지 않은데 작은 스쿠터로 달리며 두고두고 기억할만한 경험을 쌓았다. 중고로 구해온 친구들의 스쿠터는 언뜻 보아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 젊은 ‘스쿠터 팀’은 얼마 남지 않은 대도시인 치타에서 정비하고 몽골로 넘어 갔다가 유럽으로 가는 것이 목표였다.예보대로 다음 날도 비가 내렸다. 냉기가 가득한 봄비. 해가 지면 급격히 기온이 떨어졌다. 오는 길에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도 봤다. 더는 비를 맞으며 달릴 마음이 없었다. 이미 많은 비를 맞으며 왔고 떠나온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피로했다. 4일 만에 3천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달렸으니. 일주일 전에 출발한 친구들을 따라잡았다는 건 그만큼 무리했다는 증거였다. 비가 그칠 때까지 며칠이든 쉬기로 마음을 굳혔다. ‘스쿠터 팀’은 다음 여정을 위해 치타로 출발했다. 마음 편히 쉰다고 생각하니 여유가 생겼다. 모든 짐을 풀어놓고 다시 정리했다. 가져왔을 거라 생각했던 예비 안경을 놓고 온 것과 또 몇 가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생각났다. 읽고 참고할 모든 자료들을 고장난 휴대폰에 넣어왔으니 그냥 그때그때 얻은 정보들로 일정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오히려 결정을 머뭇거리게 만들 수도 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이틀 전에 묵었던 곳처럼 네르친스크의 숙소도 건물만 컸지 휑했다. 원래 주유소까지 운영했던 곳이었는데 주유기는 버려진 채로 있다. 카페 영업으로 겨우 버티는 느낌이다. 대부분 횡단도로의 숙박업소는 카페를 겸하고 있다. 주로 트럭 운전자들이 이용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진 9천킬로미터가 넘으니 아직 3분의 1도 가지 않은 셈이다.별 문제가 없다면 보름 정도면 러시아를 통과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비가 오거나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수도 있으니 단정할 수 없었다. 숙소 벽에 네르친스크의 옛 모습을 담은 복사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 쇠사슬에 묶인 수형자들 사진에 눈길이 오래 멈췄다. 동토의 땅에 철로와 도로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확장과 개발은 언제나 폭력과 강제를 동반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조경국

2020-02-11

정감록(鄭鑑錄)역모사건

1787년(정조 11년)년 5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50대 후반의 여인이 장기로 유배를 와 관비가 되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계우(溪佑)라 했다. 바로 정감록(鄭鑑錄) 역모사건의 연루자로 몰려 효시(梟示)를 당한 유한경(劉漢敬)의 친어머니였다.‘정감록’은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예언서이다. 그 종류도 수십 가지에 이르지만 정작 저자의 이름과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책은 여러 비기(祕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 ·풍수지리설 ·도교사상 등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즉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 도읍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도읍 몇 백 년이 이어지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 도읍 몇 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 도읍 몇 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는 책이다.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도선(道詵) ·무학(無學) ·토정(土亭) ·격암(格庵) 등의 예언집도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국왕의 심기를 극도로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읽어서도 소지해서도 안 되는 금서였다. 그러나 그런 금압((禁壓))에도 불구하고 필사본의 형태로 전국 각지에 널리 퍼지면서 조선 말기에 각종 반란과 동학 등 신흥종교의 등장을 야기하기도 했다.정조 9년(1785) 3월, 경상도 하동 지리산일대에서 정감록을 사상적 틀로 새 왕조를 꿈꾸는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문양해 역모사건’ 또는 ‘홍복영의 옥사사건’이라고 한다. 그 배경에는 정조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다 실각한 홍국영(洪國榮)의 세력들이 있었다.홍국영 일파들이 정조에게 반감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1777년 정조는 자신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숙위소를 설치하고 홍국영을 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그의 권세가 너무 커지자 1779년 그를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숙위소도 혁파해버렸다. 그러자 그 잔여세력들의 역모 시도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는 홍국영의 사촌동생인 홍복영(洪福榮) 일파가 또다시 새 정치판을 원하며 역모를 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복영은 측근인 이율(李瑮), 양형(梁衡) 등과 의논해서 문양해 등 이른바 산속에서 술법(術法)을 행하면서 민심을 모으고 있던 도인(道人) 세력들을 끌어 들이고, 이들을 이용해 유언비어로 민심을 동요시켜 새 왕조를 건립하려 했던 것이다.그 본부는 하동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은 삼국 시대부터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라의 국가제사인 ‘중사(中祀)’를 지내던 곳이었다. 고려 시대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수 리(里)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곳에 서식하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 아마도 옛날 세상에서 숨은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라고 하였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도참설의 이상향인 청학동이 하동 지리산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정감록과 같은 비기가 나돌고, 숙종 대 이후 성행하기 시작하는 미륵세상의 갈망에서 본다면, 이런 지리산 청학동은 더 없는 사회변혁 세력의 의지처가 되기에 좋았다.정작 그 청학동의 위치에 대해서는 어떤 이는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현재의 청학동이 그곳이라고 했고, 김일손은 쌍계사 북동쪽 계곡에 있는 불일폭포 부근이라고 했다. 유운룡은 그게 아니고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 있는 세석평전이 그곳이라고 했는가 하면, 하동 악양면 등촌리에 있는 청학이골이 바로 청학동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김종직은 피아골이 바로 그곳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이다.홍복영의 사주를 받은 지사(地師·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를 잡아 주는 사람) 양형(梁衡)은 지리산 일대의 도사들을 다스릴만한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적임자가 친척 조카인 문양해였다. 문양해는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평민이었다.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그는 상당한 도를 닦아 도인(道人)으로 통했다. 1783년 양형은 홍복영으로부터 자금을 받아와 하동의 지리산 쌍계사 골짜기 깊은 곳에 백여 칸의 집부터 지었다. 그 집의 당호를 ‘하천산당(荷川山堂)’이라고 붙이고 이곳에 문양해를 불러와 머무르게 했다.문양해는 이곳을 근거지로 하고 각지를 전전하며 동조자를 모았다. 그의 아버지 문광겸도 이곳으로 와서 지하본부를 총괄했고, 3촌 문광덕도 주거지를 하동으로 옮겨 약포(藥鋪)를 경영했다. 이들은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서 활동하는 주형채·오도하 등과 연계를 맺으면서 한양과 지방 각지에서도 동참할 자를 모았다.이에 동참한 사람들은 승려 부류인 유한경·이태수·김명복 및 거사(居士) 출신인 조거사(趙居士) 등이었다. 이들은 ‘지리산 선원(仙苑)의 이인(異人)들’로부터 들은 내용이라며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지리산 이인들’은 지리산의 선원(仙苑)인 하천산당에 은거하면서 선술(仙術)과 술법으로 정감록을 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지리산 선원의 이인(異人·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은 향악(香嶽)으로 불린 김호(金灝), 징담(澄潭)으로 불린 고경명(高輕明), 노선생(老先生)으로 불린 이현성(李玄晟), 일양자(一陽子)로 불린 모문룡(茅文龍) 등이었다. 문양해는 이 이인들이 ‘정감록’ 같은 예언서에 적힌 내용을 해석해서 주면 이를 중간매개자를 통해 전국에 유포하는 역할을 했다.중인 출신의 양형은 ‘정감록’ 지하조직의 서울지부 책임자였다. 그는 서울의 조직원들에게 향악 선생과 노선생의 말을 전했다. 그 말들은 문양해로부터 전해들은 장차 나라가 어지럽게 된다는 예언들이었다. 더하여 홍복영은 구체적으로 ‘장차 나라가 셋으로 쪼개질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른바 ‘동국삼분지설(東國三分之說)’이다. 조선이 삼국으로 분열될 징조는 산천(山川)과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에 나타나 있었단다. 나라를 셋으로 나눠 가질 영웅들은 강원도 통천의 유(劉)씨, 전라도 영암의 김(金)씨 그리고 정(鄭)씨라 했다. 이중 정씨는 남해의 어느 섬에 숨어 있는데, 때가 되면 전국을 통일하여 나라를 세울 거라고 했다. 정씨가 출현할 시기는 정조 9년(을사년) 3월이 거병시기로 예정돼 있다고 했다. 이는 역성혁명, 즉 이씨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정씨왕조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었다. 문양해는 도당을 불러 모아서 그 날짜를 정하고, 거사할 계획까지 세웠다.그러나 이 사건은 거사계획 단계에서 발각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문양해 등은 1785년 2월 29일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의 고변으로 말미암아 혁명적인 이상국가 건설에 실패하였다. 하늘의 뜻과 산천의 기운으로 무능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들의 바람은 결국 사람에 의해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이 사건으로 1785년(정조9) 3월 29일 주모자 문양해는 참형에 처해졌다. 응좌인(應坐人)들도 덩달아 처벌되었는데, 어미 아기(阿只)는 황해도 풍천부(豐川府) 초도(椒島)에 계집종이 되었고, 아우 문금득(文錦得)은 함경도 부령부(富寧府)에 종이 되었다. 누이 문복혜(文福惠)는 평안도 운산군(雲山郡)의 계집종이 되었고, 누이 문숙혜(文淑惠)는 양덕현(陽德縣)의 계집종이 되었다. 문인방(文仁邦)·이율(李瑮)은 효시되었다. 문광겸(文光謙)은 지레 겁을 먹고 자살하였고, 주형로(朱炯魯)와 오도하(吳道夏)는 사형을 감하여 귀양 보냈다. 양형(梁衡)은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하동에 있던 홍복영도 사형에 처해졌다.사건의 여파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1786년 2월 11일(정조 10) 유한경·이태수·김명복 및 조거사(趙居士)가 삼수(三水) 인차동(仁遮洞) 이문목(李文穆)의 집에 모여 흉서를 작성하여 퍼뜨리다가 이태수와 유한경이 잡혔다. 국문결과 이들은 문양해 사건의 공범이란 사실이 밝혀져 모두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연좌된 사람은 그 이듬해인 1787년(정조 11) 5월 3일에야 처벌이 이루어졌다. 유한경의 아버지 유계청(劉溪淸)은 연좌되어 교형에 처해졌고, 그의 어머니 계우(溪佑)는 경상도 장기현으로 와서 노비가 되었던 것이다.유한경은 평안도 안주목에서 태어났고, 이태수는 전라도 순천부 고돌산(古突山)에서 태어났다. 이들이 역모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그들의 고향 고을에도 연대책임을 물어 안주목(安州牧)을 강등하여 안북현(安北縣)으로 삼고, 순천부(順天府)를 강등하여 순천현(順天縣)으로 삼았다.‘정감록’은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과 당파싸움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실제로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이래의 국정의 문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도탄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이씨가 망한 다음에는 정씨가 있고, 그 다음에는 조씨·범씨가 일어나 한 민족을 구원한다’는 게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이었던 것이다.정조 9년에 일어났던 이 홍복영·문양해 역모사건은 정감록을 이용하여 체제 변혁을 시도했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2-11

죽음을 마주한 절대의 순간 유언처럼 피어난 詩 ‘광야’

지난번 연재에서 필자는 육사의 시 중에서 고향을 연상시키는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자야곡(子夜曲)’(문장, 1941.4),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를 ‘육사의 고향 3부작’으로 규정하였다. 이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자야곡’은 ‘청포도’와 거의 반대되는 이미지와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청포도가 흰색과 푸른색의 청신한 대비를 통하여 아름다운 고향과 자연의 법칙처럼 반드시 오고야 말 광복의 희망을 감미롭게 노래했다면, ‘자야곡’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희망의 밝은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제목부터 생명의 푸른빛이 가득한 ‘청포도’에서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한 ‘자야곡’으로 바뀐 것이다. 자야곡은 자야(子夜)의 노래라는 뜻으로서, 자야는 자시(子時, 밤 11시부터 새벽 1시)인 한밤중을 의미한다. 또한 6연 12행으로 되어 있는 ‘자야곡’의 첫 번째 연과 마지막 연은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이다. 수만호는 빛이 아름답고 광택이 나는 석영의 하나인 수마노(水瑪瑙)를 의미하는데, 본래 고향은 그 아름다운 빛깔로 가득해야 하건만 지금은 그 빛은 바랄 수도 없고 노랑나비도 오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 결과 무덤 위에 죽음을 연상시키는 푸른빛을 지닌 이끼만 가득할 뿐이다. 시의 나머지 부분에도 “검은 꿈”, “짜운 소금”, “바람”, “눈보라”, “매운 술” 등의 표현이 고향의 암담하고 괴로운 현실을 더욱 부각시킨다.‘청포도’로부터 ‘자야곡’까지는 고작 2년의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토록 고향의 느낌은 달라진 것일까? 그 원인은 시대적 이유와 작가 개인 차원의 이유 두 가지를 모두 생각할 수 있다. 2년여의 시간 동안 일제의 탄압은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1939년 10월에는 국민징용령을 실시하였고 친일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결성된다. 1940년 2월에는 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실시하였고, 8월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 당한다. 1941년 3월에는 초등학교 규정을 공포하여 조선어 학습을 전면적으로 폐지하였다. 바야흐로 일제는 조선인의 말과 성을 빼앗고, 황국신민화의 단계로까지 우리 민족을 내몰았던 것이다.누구보다 민족의 아픔과 함께 해왔던 이육사 개인에게도 이 시기는 고통과 비극이 점차 강화되는 시기였다. 1941년 이육사는 폐질환으로 경주의 옥룡암 등에서 요양을 해야 했으며, 가을에는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한다. 이 때 친동생처럼 가까이 지내던 시인 이병각이 이육사가 입원해 있는 성모병원에서 폐병으로 요절하는 아픔을 겪는다. 또한 이 해에는 유교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아버지 이가호가 별세하는 참극을 경험한다. 이러한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서 탄생한 시가 바로 ‘자야곡’이라고 할 수 있다.이후로도 이육사가 겪는 고난의 강도는 가파르게 상승한다. 1942년 6월에 어머니가 별세하고, 두 달 후에는 가장 역할을 하던 맏형 이원기마저 사망한 것이다. 의지할 가족은 사라지고 자신의 폐병도 극한에 이른 상황. 범부라면 자신 하나도 추스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육사는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앞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간다. 1943년 4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조국 광복을 위해 홀연히 베이징으로 떠난 것이다. 역사학자 김희곤에 따르면, 이육사가 베이징에 간 것은 당시 중국지역 독립운동계의 양대 세력인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의 전선통일에 그가 일조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한다.(‘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이육사의 중국행은 시인의 개인적 사정이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일종의 순국을 향한 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결국 그는 1944년 1월 16일에 베이징 감옥에서 짧지만 강렬한 삶을 마감한다. 그 죽음을 마주한 절대의 순간 유언처럼 창작한 시가 바로 ‘광야’이다.‘광야’는 ‘꽃’과 더불어 해방 이후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발표된 이육사의 유작이다. 이것은 마치 일제 말기 또 한 명의 저항시인이라 불리던 윤동주의 작품들이 해방 이후에야 유작의 형식으로 우리 민족의 품에 전달된 것과 비슷하다.이 작품은 광야(廣野)와 황야(荒野)의 두 가지 의미 사이에서 고유한 시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시이다. 제목이기도 한 광야(曠野)는 “아득하게 넓은 벌판”과 “버려두어 거친 들판”이라는, 즉 신성한 땅이라는 광야(廣野)와 황폐한 땅이라는 황야(荒野)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육사는 다분히 이러한 중의성을 의식하면서 시적 효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이 작품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질서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는데,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곳은 ‘광야(廣野)-황야(荒野)-광야(廣野)’로 변하는 것이다.과거에 이 땅은 닭 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며 그 강한 산맥조차 넘볼 수 없는 신성한 곳(廣野)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 곳은 눈이 내리는 고난의 땅(荒野)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이 곳을 다시 신성한 곳(廣野)으로 되돌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그러한 도전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여전히 남아 있는 매화향기이다. 또한 이 매화향기는 이 시의 광야를 만주 대륙과 연결지어 바라본 그동안의 논의를 교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매화는 황해도 이남 지역에서 자라기 때문에 만주에서 매화를 발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홀로 아득한 매화향기를 통해 이 시에 등장하는 광야는 시인의 고향인 원촌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매화는 매서운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절의(節義)의 상징으로서, 조선 시대 선비들이 아끼던 꽃이다. 특히 이육사의 선조이기도 한 퇴계 이황은 매화를 각별히 사랑하였다. 퇴계는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이 했으며, 죽기 직전에 시자를 시켜 매화에게 물을 주도록 했다고 한다. 이육사는 ‘전조기’(조선일보, 1938.3.2.)나 ‘은하수’(농업조선, 1940.10)와 같은 산문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집의 화단에도 옥매화, 분홍매화 등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이러한 매화향기를 바탕으로 이육사는 이 땅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자 한다. ‘청포도’에서 손님은 자연의 순환질서처럼 반드시 올 존재이지만, 지금은 그러한 기다림을 뛰어넘는 필사의 투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투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이 땅은 초인이 오는 광야(廣野)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난과 시련이 심해질수록 더욱 강렬하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저항하는 것은 오직 고매한 정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수많은 문인들은 일제 말기에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온갖 오욕의 난경을 보여주었다. 이육사는 그 어지러운 난무 속에서도 진정한 의로움과 아름다움의 세계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청포도’, ‘자야곡’, ‘광야’로 이어지는 이육사의 고향 3부작은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써내려간 양심의 기도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2-10

낮에는 활력이 넘치는, 밤에는 낭만이 흐르는 도시로

2020년 경자년(庚子年) 솟아오른 붉은 태양을 보며 새해 계획을 세웠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월을 지나 2월에 접어들었다. 언제나처럼 시간은 빠르고 해야 할 일은 많은 것이 세상사고 인생사다.올 한 해 역점적으로 추진할 사업에 관한 계획을 수립해 ‘군민 모두가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적인 고장’을 만들려는 청송군(군수 윤경희)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 추위를 녹이며 청송군이 올해 진척시키고 현실화시킬 주요 사업들을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살펴보고자 한다.농민수당’으로 농가 안정·지역경제 활성화청송군은 지난해 하반기 “지역 농민들에게 농민수당을 지급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가장 먼저 ‘농민수당 심의위원회’를 열어 주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확인했다. 이 자리엔 군의원, 관련 부서장, 농협 관계자, 지역단체장 등으로 구성된 심의위원들 다수가 참석했다.위원들은 농민수당 도입 취지와 추진 상황 등을 이야기 듣고 향후 이를 구체화시킬 방안 마련에 골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이들에게 위촉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윤경희 군수는 “농업인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알기에 고심 끝에 농민수당 도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농민수당은 농업인 경영안전 도모, 농가소득 양극화 해소, 농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원하자는 뜻에서 마련됐다.지난 가을엔 안덕면과 부남면을 시작으로 읍면별 순회 설명회도 개최했다. 설명회는 공정하고 일관성 있는 ‘농민수당 지원사업’ 추진을 위해 군청 농정기획 담당자가 회의에 참석해 주민들에게 사업추진 경과와 신청 요령 등을 알렸다. 여기서는 농민들의 궁금증에 답하는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또한 “농민수당은 경작 사실, 실거주 사실 등의 확인을 이장으로부터 받은 후 읍면사무소로 신청해야 한다”는 절차가 소개되기도 했다. 순회 설명회가 종료된 후엔 농가 신청을 마무리 한 후, 신청 농가 심의가 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신설된 청송군 농민수당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발행되는 ‘청송사랑화폐’로 지급된다. 이는 지역 상인들을 돕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청송군은 전망했다.이러한 과정을 거쳐 군은 지난해 10월 말 농민수당 신청·접수를 받았다. 현수막과 군정 소식지 등을 통한 사전 홍보가 주효했던지 첫날부터 많은 농민들이 몰렸다.“농민수당은 주민 소득안정과 소상공인들의 매출 증대에 기여하고, 지역경기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이 나왔다.2019년 12월엔 ‘2020년 청송군 농민수당 지급대상자 확정’을 위한 심의위원회가 진행됐다. 1차와 2차에 걸쳐 지급되는 농민수당을 지급받을 이들은 6천여 명에 이를 것이란 게 청송군의 설명이다. 앞으로는 지원 금액이 더 늘어날 예정이다.‘청송사랑화폐’로 부활 계기 마련한 지역 상권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올 1월부터 차별화된 지역 화폐라 할 수 있는 ‘청송사랑화폐’가 제작·유통되고 있다.청송사랑화폐는 타 지자체의 상품권이나 카드와 달리 1회성이 아닌 재유통이 가능한 지역 화폐다. 이는 전국에서 청송이 최초라고 한다. 화폐 형태로 발행되니 가맹점 없이 청송군 전 지역에서 사용이 가능한 것도 장점.청송사랑화폐는 우체국을 제외한 농협은행 군 지부, 지역농협 8곳, 청송·영양축협 2곳, 신협 2곳, 새마을금고 3곳 등 금융기관 18곳에서 판매된다. 지역 화폐이니만치 타 지역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도 갖췄다. 청송사랑화폐의 발행과 유통으로 청송군이 기대하는 경제 유발 효과는 약 150억 원.지난해 11월 말 군청은 청송사랑화폐의 사용 방법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군민들의 이해를 도왔다. 청송 거주자 중엔 고령자가 적지 않다. 이에 애니메이션 상영이라는 차별화된 기법으로 사용법을 알린 것.“청송사랑화폐 도입 취지, 발행 규모, 특징, 구입처, 할인 혜택 등을 해당 애니메이션에 담았다”는 것이 청송군의 부연이다. 사과축제장과 마을회관, 경로당 등에서 상영된 애니메이션은 노인 인구가 많은 청송군이 선택한 ‘신의 한 수’로 평가받았다.비슷한 시기엔 청송사랑화폐 업무대행 협약식도 열렸다. 80억 원 규모로 발행된 청송사랑화폐는 총괄 대행점을 농협은행 청송군지부로 지정했고, 이외에도 청송농업협동조합, 청송영양축산업협동조합, 청송우체국, 청송새마을금고, 청송군산림조합 등과 협약을 맺었다.협약식에서 윤 군수는 “청송사랑화폐를 통한 지역의 소비 촉진으로 침체된 경제가 되살아나길 기대한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지난달 6일엔 청송사랑화폐 출시를 기념하는 현판 제막식이 개최됐다. 이날 군은 발행 축하 행사와 청송사랑화폐 지급 퍼포먼스 등을 진행했다.시중에 유통 중인 청송사랑화폐는 관내에 사업자등록을 하고 있는 사업장에 한해서 환전이 가능하다. “자금 흐름을 보다 원활하게 해줬으면 한다”는 주민들의 뜻을 반영한 것이다.이와 관련 청송군은 “앞으로도 군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들어 보완점을 찾아갈 것”이라고 말했다.청송사과축제 명품화와 농산물 택배비 지원‘2020~2021년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선정된 청송사과축제의 명품화도 올해 청송군의 주요한 과제다. 청송은 전국에서 유통되는 사과의 10% 이상이 생산되는 지역이다.지난해 말 문화체육관광부는 청송사과축제를 포함한 전국 35개의 축제를 문화관광축제로 지정해 발표한 바 있다. 이로써 청송은 향후 2년간 국비 지원과 함께 한국관광공사를 통한 국내외 홍보·마케팅 지원 등을 받게 된다.지난 2004년 청송사과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시작된 청송사과축제는 2013년부터 7년 연속 경상북도 최우수축제로 굳건하게 자리매김 했다. 2018년 축제장 이전 등으로 접근의 편리성을 높인 이 축제는 지역 경제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 축제 선정에 안주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켜온 명성에 걸맞은 명품 축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는 게 청송군청의 다짐이다.지난해 봄부터 시행돼 지역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낸 ‘농산물 택배지 지원사업’ 역시 올해도 이어진다. 청송사과를 비롯한 농산물의 소비 촉진과 유통 활성화를 위해서다.8억 원의 예산으로 시행된 이 사업은 택배비 지원과 관련된 단일 사업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 청송군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산물이 택배비 지원 대상이다. 지난해엔 실제 지출된 택배요금의 50% 범위에서 농가 당 연간 최대 50만원이 지원됐다.이 사업의 조기 정착을 위해 고심한 청송군은 수입 농산물의 증가와 경기 침체로 인한 농산물 소비 부진을 극복해나간다는 복안을 세웠고, 이런 차원에서 2020년에도 중단 없이 농산물 택배비를 지원할 예정이다.청정한 ‘산소카페’같은 고장을 지향하는 청송군. 낮에는 활력이 넘치는 도시, 별과 달이 반짝이는 밤이면 서정적 낭만이 있는 지역으로 발돋움하려는 노력들이 오늘도 진행 중이다.‘희망과 꿈이 있는 농촌’ 702억 투입농업 경영 안정화 지원·미래농업 육성 마케팅·유통구조 개선 등 역점 추진‘희망과 꿈이 있는 농촌’을 지향하는 청송군이 최근 농업 관련 예산 702억 원을 확보하고, 향후 추진될 농정시책 방향을 발표했다.△농업경영 안정화 지원 △경쟁력 있는 농촌수익모델 창출 △지속 가능한 미래농업 육성 △농산물 특화 마케팅과 유통구조 개선을 주요 시책으로 설정한 청송은 농민수당 지급, 농작물재해보험 지원, 농업인안전보험 지원 등을 진행해 주민들 삶의 질을 높일 방침이다. 농촌의 다양한 잠재자원 발굴을 통해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창출하고, 6차 산업 활성화를 추진한다는 게 청송군의 설명. 더불어 식량의 안정적 생산과 영농조직 육성을 위해 유기질 비료와 퇴비 생산도 지원하게 된다. 농업용수 처리기와 과실 장기저장제 등도 지원 대상이다. 또한 군수가 직접 대도시 판촉 행사에 나서는 특산물 마케팅도 강화한다.이외에도 변화하는 관광 수요에 맞춘 농촌 체험관광 활성화와 무인항공기를 이용한 영농 지원, 자두 명품화사업과 스마트팜 연구단지 조성 등도 청송군이 지역 농업 발전을 위해 준비한 사업들이다.“농촌경제를 활성화시켜 밝은 미래가 있는 고장을 만들어가겠다”는 윤경희 군수의 약속에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종철·홍성식 기자

2020-02-06

“경험과 학문적 연구 토대로 모두를 위한 발전방안 찾을 터”

모두가 인정하는 세칭 일류대학에서 사회학과 외교학을 공부했다. 미국 유학에선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2차례에 걸쳐 서울대가 주는 우수논문상과 학술상을 받았다. 한국국방연구원 실장을 지냈고, 통일부와 외교부의 정책자문위원 역할도 한다. 이 정도 스펙과 경력이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오만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마주 앉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깍듯한 예의가 몸에 밴 사람. 기자가 한동대학교 박원곤(52) 교수를 접한 첫 느낌이었다.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같은 교수’로 역할하며, 방송 출연과 기고를 통해선 그간 연구해온 외교-국방-안보 관련 지식을 시청자와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고 있는 박 교수.겸양지덕(謙讓之德)을 갖춘 학자인 그에게 스승으로서의 삶과 방송 출연 중 에피소드 등을 물었다. 더불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태도, 향후 국제 질서의 재편 방향도 질문했다. 아래 그 내용을 요약한다.-포털사이트 등에서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국제지역학 교수로 소개되고 있다. ‘국제지역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걸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문인가.△국제학, 국제정치학, 정치학을 아우르는 영역이다. 우리 학교의 경우 거기에 영어도 포함돼 있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 대부분은 정치학과 국제정치학 전공자다. 다른 대학의 정치외교학과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2008년 이후 임용된 교수들은 모두 영어 강의가 가능하다. 한동대 강의 중 영어로 진행되는 게 40% 이상이다. 학생들도 전공과목 중 4개는 반드시 영어로 듣도록 돼 있다.-한동대로 오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지역적 연고가 있는지.△아니다. 난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한동대를 처음 알게 된 건 미국 유학시절인 1994년이다. 시카고에서 열린 ‘전미 유학생 수련회’에서 김영길(한동대 1대 총장·1939~2019) 선생을 만났다. 그의 열정적이고 진실한 특강에 감명 받았다. 그때부터 우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7년쯤 포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했다. 많은 학생과 포항시민들을 만났을 텐데.△본적은 경남 김해고, 아버지는 부산 사람이다. 영남은 내게 익숙한 곳이다. 포항의 경우엔 임용 후 처음 왔지만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오래 생활했던 서울보다 좋은 점이 더 많다. 복잡한 대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공기도 좋고 바다도 가깝고, 삶의 질이 더 높아진 느낌이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가 친절하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서울에 가면 갑갑하다.(웃음)-재직 중인 한동대는 어떤 대학인가.△‘학생 중심의 학교’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로 오기 전 국방연구원에서 18년간 일했기에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 한동대는 입학생들이 전공을 정하지 않고 들어온다. 그들이 1년 동안 자신의 원하는 강의를 듣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한다. 자율과 자기 결정권이 존중되는 것이다. 비슷하게 흉내를 내는 다른 대학이 있지만, 우리 학교의 경우엔 성적순으로 인기 있는 과에 몰리는 현상이 적다. 만약 그렇더라도 교수를 충원하는 등의 방식으로 유연하게 대처한다. 한 해 신입생이 700명 정도인 소수정예 시스템이라 가능했다. 지난 20년간의 실적이 이 시스템이 성공적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학생들과의 관계는 어떤지.△우리는 ‘학생과 교수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모든 교수가 학기가 시작될 때면 학생 30여 명과 하나의 팀을 이룬다. 일종의 ‘담임 제도’ 같은 것이다. 팀원이 된 학생들과 1년간 동고동락한다. 크고 작은 활동을 함께 하며 고민을 공유한다. 그런 까닭에 편안한 친구처럼 느껴지는 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학생의 고민과 어려움을 들어주는 아버지 같은 교수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 생활 훈련’이 4년 내내 지속되기에 한동대 졸업생이 사회에 나가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팀워크가 좋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사회생활에서 능력보다 더 중요한 건 조직원들과 불화 없이 어울리는 화합의 마음이 아닐까.-한동대에서 언론 노출이 가장 많은 교수 중 한 명이다. 방송 출연과 신문 칼럼 기고에 적극적인 이유가 있는지.△방송 출연을 처음 시작하게 된 건 한국국방연구원에서 일할 때다. 한미동맹과 북한문제 등 통일-외교-안보가 나의 연구 분야다. 이것들은 비단 한국만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한동대에 오기 전부터 정책보고서를 써왔고, 김영삼 정권 시기부터 정부와도 밀접하게 소통했다. 그러다 보니 언론 매체와 자연스레 연결이 됐다. 기자들이 당면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 내가 아는 정보와 지식을 제공했다. 방송 출연과 신문 기고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내가 의도하거나 먼저 나서서 TV에 나가려고 한 것은 아니다.(웃음)-공중파, 케이블방송, 종합편성채널 등 다양한 방송에서 얼굴을 볼 수 있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면.△사람마다 타고난 성향이 다른데 내 경우엔 생방송이 잘 맞는다. 카메라 앞이라고 긴장하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녹화방송이 더 어렵다. 한 호흡으로 쭉 이어지는 생방송이 좋다.에피소드라면…. 2018년과 2019년엔 ‘북미-남북 문제’와 관련해 자주 방송에 출연했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도 YTN 생방송에 출연 중이었다. 그런데 방송 중에 회담이 결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전에 준비된 시나리오도 없이 즉각적 판단에 따라 회담이 깨진 이유와 향후 전망을 예측해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25년 이상 공부해온 주제이니 당혹스럽진 않았다.-세간엔 언론 노출이 잦은 교수를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데.△학기 중엔 주말에만 서울에 간다. 주중에는 내내 포항에 있다. 내 본업은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지 방송 출연이 아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세운 원칙이 있다. 전공 분야를 다루는 대담 프로그램과 토론 프로그램에만 출연한다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대립하는 국내 정치에 관해선 논평하지 않는다. 이는 방송계에도 잘 알려져 있다.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정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 하나를 덧붙이자면 방송과 신문 기고를 포함한 나의 활동은 내가 가르치는 학문의 영역과도 많은 부분 겹친다. 그렇기에 방송된 토론 프로그램을 강의 중에 활용해 학생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경우도 흔하다.-올해 한미 관계, 남북 관계 등은 어떻게 전망하는지.△한마디로 예측하기가 몹시 어렵다. 세계 질서 자체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향후 30년 이상 넘어서야 할 힘겨운 문제가 연이어 발생할 것이다. 한-미, 한-중, 남-북, 미-북, 한-일 관계 등에서 세계의 변화와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내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극단적으로 갈라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태도다. ‘국제 정치’라는 영역엔 정답이 없다. 항상 여러 가지 견해와 주장이 충돌한다. 이를 조율하기 위해선 끊임없는 토론이 필요한데, 아직 한국엔 그런 분위기가 완전히 정착되지 못했다. 진보-보수간 갈등 해결을 위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기에 앞서 상대방의 견해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건 뭔가.△우리 학교의 모토가 ‘공부해서 남 주자’다. 이는 자기 이익만 취하지 않고 남을 섬기는 게 목표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방 의견을 경청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는 자기 이익과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당신은 ‘지식인의 사회 참여’가 어떤 형태로 드러나야 한다고 보는지.△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전공 영역인 통일-외교-안보 분야에서 한국이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우리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앞으로도 고민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인터넷 댓글 등을 통한 비난이 있더라도, 내가 옳다고 믿는 생각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나와 더불어 타인을 위한 발전 방안을 찾아가는 게 소박하지만 바람직한 ‘지식인의 사회 참여’ 방식이 아닐까.-올 한 해 계획과 향후 학자로서의 궁극적 목표는.△작년부터 시작한 미-중 관계 연구를 지속할 예정이다. 미국 대선과 한국 총선이 있는 올해는 어느 시기보다 역동적일 게 분명하다. 이미 관련 논문 2편을 발표했다. 중장기적인 계획은 1953년 한국전쟁 이후부터 1990년 냉전이 해체될 때까지의 과정을 깊이 있게 연구해보고 싶다. 냉전사(冷戰史·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역사)는 나의 세부 전공이기도 하니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2-05

고독한 홀로 여행… 뜻밖의 김치와 상상 밖의 여로

◇ 아무르 강을 건너 시베리아 고원으로하바로프스크를 지나 아무르 강을 건너 벨로고르스크까지 달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진 북으로 올라가지만 하바로프스크를 기점으로 달리는 방향이 서쪽으로 바뀐다. 아무르 강부터 시베리아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시베리아는 서쪽 우랄산맥에서 태평양 연안까지의 지역을 가리키는 말(러시아말로는 ‘시비르’)이다.시베리아라는 말에 ‘추위’가 함께 연상되는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걸 확인하며 달렸다. 낮인데도 해가 구름에 가리면 냉기가 손끝과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아무르강에서 150킬로미터쯤 달리면 작은 도시 비로비잔이 나오고 그 이후론 언제 끝날지 가늠하기 힘든 고원지대로 들어선다.비로비잔에서 모고차까진 오버랜더(대륙횡단여행자)들에게 꽤나 힘든 코스로 알려져 있다. 5월에도 영하로 떨어질 때가 있고 산속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예측 불가. 아예 비옷을 껴입고 달려야 했다. 도로엔 지뢰밭처럼 포트홀이 깔려 있어 속도를 쉽게 낼 수 없었다. 아침 출발할 때 계획했던 거리와 시간은 지킬 수가 없다는 걸 이미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할 때부터 깨달았다.어쩐지 문제없이 잘 나간다 했더니만... 뒷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긴 못이 구부러진 채 뒷 타이어에 박혀 있었다. 롱노즈 플라이어를 꺼내 조심스럽게 빼며 펑크가 아니길 바랐지만 바람이 샜다. 바람이 새는 걸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침을 구멍에 잔뜩 묻히면 된다. 침을 묻히니 기포가 조금씩 올라왔다. 이럴 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고 펑크 때운 경험도 있어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못이 비딱하게 구멍을 냈음에도 펑크 씰(라이더들은 그 모양 때문에 ‘지렁이’라 부른다)이 잘 붙었다. 때운 곳에 문제가 없는지 또 침을 잔뜩 손가락에 묻혀 타이어에 발랐더니 입 안에서 타이어 맛이 났다.문제는 펑크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함께 가져온 배터리에 연결해 사용하는 에어펌프가 갑자기 작동하지 않았다. 자동 펌프냐 수동 펌프냐를 두고 편한 쪽을 선택한 나의 실수였다. 떠나기 전 점검했을 땐 분명 제대로 작동했었다. 가장 험한 길을 달리고 있을 때 하필 고장날 줄이야. 빠진 만큼 공기를 채워 넣어야 하는데 펌프가 작동하지 않으니... 혹시나 배터리나 배선에 문제가 없는지 배터리 쪽 카울을 뜯어야 했다. 다른 문제는 없었다. 타이어 공기압이 부족해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돌발 상황… 펑크가 나다치타로 가는 A-297 도로에서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하바로프스크로 가는 라이더 알렉스를 만났다. 거의 오가는 차량을 볼 수 없는 고원 외딴 도로에서 오토바이 여행자를 만나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는 천천히 달리고 있는 나를 보며 경적을 울리며 오토바이를 세웠다. 오토바이 여행자들에 대한 러시아 라이더들의 끈끈한 우정과 친절은 유명하다.시베리아 횡단 여행 중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러시아 라이더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경험담을 자주 들었다. 들은대로 그도 어떻게든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인터넷도 전화도 터지지 않는 그곳에서 내게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려던 그의 노력은 허사였다. 해가 지기 전 최대한 빨리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행운을 빈다고 말하는 것 말곤 그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맑았던 하늘에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그는 두둥거리는 낡은 할리 데이비슨의 엔진 소리를 높여 동쪽으로 사라졌다.알렉스가 말한 벨로고르스크쯤 오니 엄청난 먹구름이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만약 해가 지고 비까지 내리는 상황에 벨로고르스크까지 오질 못했으면 간이 버스정류장 같은 곳에서 노숙해야 했을 수도. 하바로프스크에서 치타까지 2천 킬로미터가 넘는 구간 사이엔 큰 도시가 없다. 벨로고르스크도 인구 6만 명쯤 되는 작은 읍내 같은 곳이다. 750킬로미터를 달렸고 소나기는 이미 한 차례 맞아 몸과 마음이 눅진해진 상태. 더는 비와 다투고 싶지 않아 가장 가까운 숙소를 찾았다.카페를 겸한 게스트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다스런 주인아저씨 알렉스는 내게 한국에서 온 라이더들이 이곳에서 묵고 갔다며 자신의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젊은이들이 흥겹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이 젊은 라이더들과는 나중에 만나게 된다.) 함께 팀을 이뤄 여행 중인 듯했다.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짐을 풀고 잠시 누우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홀로 여행을 떠나는 라이더도 있지만 유라시아 횡단의 경우 워낙 먼 거리를 달려야 하니 처음부터 동료와 함께 준비하거나 출발할 때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 함께 달리는 경우가 많다. 어쨌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면 홀로 떠나는 것이 좋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예측할 수 없는 난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맞는 동료와 함께라면 훨씬 여행의 피로가 줄어들 테다.하지만 다시 떠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혼자 떠나는 편을 선택할듯 싶다. 여행은 어쩌면 온갖 관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이니 마다할 수가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평생 ‘나는 없고 관계만 있는 일상’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 채 산다. 누군가 곁에 없으면 고독하고 불안해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가 될 테니 미리 고독을 맛보는 일 따윈 굳이 할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방주사처럼 완전한 고독을 미리 체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비를 피해 벨로고르스크에서 쉬다주인아저씨가 불러 카페로 나갔더니 커피와 빵과 김치를 내놓았다. 빵과 김치라니! 시베리아 작은 마을 카페에서 김치를 맛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사실 이 김치는 앞서 묵었던 친구들 것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숙소에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연속으로 묵어가는 행운을 잡은 주인아저씨는 계속 한국 여행자들이 벨로고르스크를 지나가는지 궁금해 했다. 내가 빵을 먹는 동안 내 앞에 앉아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 내게 물었다. 하지만 번역기는 엉뚱한 말을 내뱉었고, 나는 “야 니 즈나유”(잘 모르겠어요)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했다.그는 끈질기게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나중에야 그가 묻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여행자들도 이곳을 지날 거고 그들에게 오토바이를 안전하게 주차할 수 있는 이곳을 추천하겠다고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야 내 앞에서 자리를 떴다. 이런 궁벽한 마을에서 외국인 여행자가 묵고 가는 일은 드물 테니 홍보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을 것이다. 오토바이를 주차하며 잠시 둘러본 느낌으론 이 게스트하우스는 큰 돈을 투자했지만 제대로 영업도 하지 못하고 퇴락해버린 공간 같았다.잠시 카페 소파에 앉아 졸다 인기척이 나서 눈을 뜨니 자그마한 체구의 젊은 남자가 접시를 치우고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스파시바”(고마워요)라고 말하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옅은 금발에 핏기 없는 얼굴을 가진 그의 눈빛은 공허했고, 어딘가 모르게 결핍되고 신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요리도 청소도 모두 그의 몫인 듯했다. 주인아저씨는 오로지 돈 만지는 일만 할 뿐이었다.테이블을 치우는 그의 손은 어렸을 때부터 험한 일을 해온 듯 손마디가 굵고 거칠었다. 손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나. 그날 밤 샤샤는 내 옆 침대에서 잤다. 따로 방이 없는 듯했다. 침대가 스무 개쯤 있는 넓은 방에 그와 나 뿐이었다. 샤샤는 밤새 뒤척이며 이를 갈았고 나는 비가 그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만약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었을 테다. 하지만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떠나기 전 그가 지친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나가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고 나는 로시의 시동을 걸어 예로페이로 향했다.    /조경국

2020-02-04

훈련대장 일가의 몰락

능성구씨는 무인(武人)의 명가였다. ‘능성구씨사료집’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총 5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진사 144명, 문과 55명, 무과 363명으로 무과 출신이 65%를 차지한다. 따라서 능성구씨는 영조대(英祖代)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 권력의 핵심에서 가문의 세를 떨쳤다. 하지만 정조의 즉위 후 10년 만인 1786년 12월 9일, 구선복이 역모죄로 몰려 조카인 구명겸과 함께 죽음을 당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문효세자가 죽자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세자로 추대하려 하였다는 ‘구선복 옥사’가 이 집안을 몰락의 길로 걷게 했다이 옥사의 연좌인으로 1787년(정조 11년) 1월 15일, 구명겸(具明謙)의 첩 아기련(阿只連)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구명겸은 구선복의 조카이기도 하였지만, 마흔 살에 황해도병마절도사라는 중책을 맡은 이래 좌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두루 거치며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는 구선복의 힘이 받쳐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노론에 속한 구선복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 때 그 뒤주의 감시책임을 맡은 포도대장이었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사도세자의 뒤주를 마련한 장본인이라고 한다. 그는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를 조롱하기까지 했으며, 당시 세손이던 정조가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세손은 이 모습을 보고 장차 자신이 왕이 되면 반드시 구선복을 징치(懲治)하리라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1792년(정조 16) 윤 4월 27일자 ‘정조실록’의 기록은 정조가 그동안 얼마나 구선복을 증오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조는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자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뒤 끝에 붙은 말을 줄여 버림)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에 오를 때 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라고 했다. 이는 정조가 그동안 극도의 인내로 복수의 칼을 품고 있었음을 고백한 것이었다.그랬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말자 노론 벽파의 영수 홍인한과 정후겸을 처단했지만, 막상 구선복은 징치하지 못했다. 그것은 구씨 일가가 무시무시한 병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구선복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구선복은 1757년(영조 33) 총융사로서 최초의 군영대장에 오른 이후 1765(영조 41)년에 마침내 훈련대장에 올랐다. 그는 종형이었던 구선행(具善行)과 번갈아가며 병권을 잡아 무반 벌열로서의 위세를 보여주었다. 정조 즉위 이후에는 홍국영과 교대로 훈련대장과 금위대장을 역임하였으며, 홍국영의 실각 이후에도 1786년(정조 10)까지 훈련대장의 직위를 유지했다. 정조가 즉위한 후 10년이 되었지만 그 10년 동안 중간 중간 홍국영이 맡은 3년의 기간을 뺀 7년간은 구선복이 훈련대장을 맡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장들이 그를 ‘무종(武宗)’이라 받들 정도로 그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구선복의 배경도 막강했다. 윗대부터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출신이기도 했지만, 특히 정조 즉위 초 영의정을 역임한 소론의 거두 김상철(金尙喆)과는 사돈지간이었다. 김상철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화완옹주(和緩翁主·영조와 영빈 이씨의 딸)와도 인척간이었다. 화완옹주의 시아버지인 정우량(鄭羽良)의 사위가 바로 김상철이었던 것이다. 그는 소론임에도 노론벽파인 정후겸·김귀주·홍인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인물이었다. 구선복도 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기에 정조는 즉위하고도 10여년간은 강력한 그의 힘을 꺾지 못했던 것이다.이런 구선복은 훈련도감에서 궁중으로 파견한 하리(下吏)들을 통해 조정 대소사를 일일이 보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오라버니인 좌의정 홍낙성을 빈연(賓筵·손님을 위해 베푸는 잔치)에서 업신여길 정도로 위세를 떨었다. 그래서 정조는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선복 일당을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드디어 정조에게 기회가 왔다. 도승지 홍국영이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정조 초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원빈)으로 들이기도 하면서 엄청난 권세를 부렸다. 그런데 원빈이 후사 없이 일찍 죽어버리자 홍국영은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장차 왕이 될 세자로 삼으려고 했다. 홍국영은 이 일로 정조의 미움을 사 축출되었다.그런 일이 있은 후 정조와 의빈성씨(宜嬪成氏) 사이에 문효세자가 태어났다. 당시 의빈은 후궁이 아닌 궁녀였기 때문에 정조는 문효세자를 원자로 정하기를 주저했으나, 소론의 요구로 결국 생후 3개월 만에 원자로 삼았다. 1784년 7월, 정조는 태어난 지 만 22개월짜리 원자를 세자로 책봉했다.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의 세자 책봉에 해당한다. 하지만 왕세자로 책봉됐던 문효세자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786년 6월 6일 홍역으로 죽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의빈성씨도 같은 해 9월, 출산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의빈성씨의 죽음을 두고 조정에서는 홍국영이 상계군 담의 일파와 짜고 그녀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상계군을 공석이 된 세자자리에 앉히려는 역모가 있다는 것이다. 상계군은 은언군(恩彦君) 인(4104)의 아들이었다. 은언군은 영조의 손자이자 장조(사도세자)의 서장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는 이 의혹을 공식화하는 언문전교까지 내렸다. 그녀는 반드시 역적을 찾아내어 처단해야 한다며 정조를 압박했다. 실제 정순왕후의 하교는 은언군을 노린 것이었다. 정조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생인 은언군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할 작정이었다. 그래야만 혹 정조가 후손을 낳지 못할 때 자신들이 마음대로 왕의 자리를 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하지만 일은 정순왕후의 의도와는 영 딴판으로 전개되었다. 정조는 이 사태를 구선복일가를 제거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의심의 핵심에 있던 상계군 담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이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진 상계군의 외할아버지 송낙휴(宋樂休)는 김상철과 구이겸(具以謙)이 역모에 연관되어 있다는 고변을 했다. 즉 상계군이 죽기 전에 자신에게 고백을 한 게 있었는데 그 내용은 구선복, 구명겸 등이 짜고 상계군을 세자로 앉히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김상철은 구선복의 사돈이었고, 구이겸은 구선복의 양아들이었다.급기야 역모죄를 수사하기 위한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고 중심인물인 구선복이 잡혀왔다. 구선복은 처음에는 자신을 몰아내려는 음모라며 결백을 주장하다가 장언회(張彦恢)와 대질하자 결국에는 승복을 했다. 1년 전에 있었던 홍복영과 문양해의 역모사건에 자신과 구명겸 등이 관여하여 정조를 죽이고 상계군 담을 국왕으로 추대하는 반정(反正)을 추진하다 그만 두었다고 실토를 한 것이다.1786년(정조10) 12월 9일, 정조는 구선복을 최고의 형벌인 능지처사에 처했다. 구명겸에 대해서는 남문(南門) 밖에 삼군(三軍)을 크게 모아 놓고 조리를 돌린 뒤에 목을 베어 매달아 효수(梟首)하였다. 구이겸은 그 다음해인 1787년 1월 9일 의금부도사를 과천현에 보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연좌인들에 대한 처벌도 있었다. 1787년 1월 15일, 구명겸의 가족과 처첩들은 전부 노비가 되었다. 처(妻) 정임(丁任)은 전라도 흥양현 발도, 첩(妾) 아기련(阿只連)은 경상도 장기현, 첩 아기(阿只)는 함경도 부령부, 첩 희안(喜安)은 길주목, 며느리 유임(有任)은 전라도 해남현, 서모(庶母) 함봉(咸鳳)은 함경도 이성현, 서모(庶母) 매선(梅善)은 경상도 하동부, 서녀(庶女) 순임(順任)은 전라도 흥덕현, 서녀(庶女) 희임(喜任)은 보성군, 손녀 소숙(小淑)은 평안도 희천군, 손녀 정숙(貞淑)은 영원군의 노비가 되었다. 그해 갓 태어난 손자는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의 노비가 되었다.이 사건 이후 정조는 국왕을 음해하여 반정의 기운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음을 신하들에게 토로하면서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정조는 “병오년에 이르러서야 국법에 의해 처단되었는데 시신을 저자에 버리는 형벌이 어찌 이 역적에게 법을 충분히 적용했다고 하겠는가. 사실은 살점을 씹어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았었다.” 고 했다. 또 재위 16년 5월에 다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역적 구선복의 일은, 그의 극도로 흉악함을 어찌 하루라도 용서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 스스로 천주(天誅:하늘의 주벌)를 범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죽였던 것이다”고 했다. 부친을 죽음으로 몬 인물이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벌하지 않고 스스로 법망에 걸린 후 처벌했다는 뜻이다.결국 정순왕후가 정조의 동생 은언군을 죽이기 위해 시작된 언문전교 사건은 노론의 노련한 장수 구선복 일가를 몰락시키는 것으로 끝이 났다. 노론이 밀고 있던 정순황후측은 군부 한 축이 무너지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대반전으로 병권을 완전히 장악한 정조는 오군영의 대표인 훈련도감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친위 군영인 장용영(壯勇營) 창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2-04

그는 ‘저항’시인이자탁월한 저항 ‘시인’ 이었다

시인 이육사는…1904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綠). 보문의숙과 대구 교남학교에서 공부했다. 21세에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1933년경부터 ‘육사’란 필명으로 ‘황혼’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시를 발표한다. 민족적 불행을 겪던 일제강점기에 뜨거운 저항정신을 드러낸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사망했다.◇ 짧았지만 빛나는 삶, 이육사항일활동으로 체포되어 차가운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만큼 저항시인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문인은 없다. 39년 8개월에 불과한 그의 삶은 조국 독립을 향한 수많은 투쟁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널리 알려졌듯이 필명인 이육사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 사건에 피의자로 연루되어 대구 감옥에 수감 중일 때 붙여졌던 수인번호 ‘二六四’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이육사는 필명으로 소리가 같은 육사(肉瀉), 육사(戮史), 육사(陸史)를 함께 사용하다가 1935년 이후에는 육사(陸史)를 주로 사용하였다. 다양한 뜻의 ‘육사’라는 말에는 모두 강렬한 항일정신이 담겨 있다.그의 항일투쟁은 안동, 대구, 일본, 서울, 중국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중국에서의 활동은 일본 중심의 다른 문인들과는 구별되는 이육사의 고유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활동은 글과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총을 든 행동으로도 연결된 것이었다. 그는 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원이였으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이기도 하였다.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 고난의 삶은 이육사의 맏형 이원기가 1931년 이영우에게 보낸 서신의 다음과 같은 절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활군(육사)이 옥살이하는 정황을 탐문해보니 고통이 보통이 아니고 감방에서 병들어 누웠다고 합니다. 그 위독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니, 이 왜놈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입니까?(중략) 이따위 세상에서는 비록 부처가 살아 있다 해도 막다른 길에서 통곡할 뿐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확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 생명을 부지한다는 것이 이처럼 고통스럽습니까? (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 창비, 2017, 295면)그렇다고 그를 ‘저항’시인으로만 보는 것은 육사의 삶과 문학에 대한 명백한 과소평가이다. 그는 ‘저항’시인이기도 하지만 저항‘시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산맥의 등뼈와도 같은 그 단단하고 매운 정신은 결코 날 것으로 시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육사의 시는 충분한 미적 단련과 숙고를 거친 후에야 탄생한 결과물이다. 이육사는 1930년대 한국시단의 큰 흐름을 형성한 계급문학, 순수문학파, 모더니즘, 생명파 등의 어느 유형에도 귀속되지 않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시세계를 펼쳐 나갔다. 그는 깊이 있는 사상과 세련된 언어, 거기에 새로운 감각과 진중한 생명의식까지 한데 아우르는 풍요롭고도 독창적인 시를 창조한 것이다.그의 시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을 꼽자면 유교적 세계관에서 비롯한 선비정신과 미적 전통을 들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갈고 닦여진 미적·인식적·윤리적 단련의 세례를 통해 이육사는 자신만의 고유한 인장을 한국현대시사에 새길 수 있었던 것이다.이육사는 조선의 유학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츨생 당시는 원촌동) 881번지에서 육형제의 둘째로 태어났다. 고향인 원촌(遠村)을 빼놓고 이육사와 그의 문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마을은 이황의 5세손이자 육사의 9대조가 터를 잡은 마을이다. 이곳은 주자학적 질서가 삶의 전체를 촘촘하게 이끌어가는 곳으로서, 이러한 특징을 이육사는 “내 동리란 곳은 겨우 한百餘戶나 되락마락한 곳 모두가 내 집안이 대대로 지켜온 이따에는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주엇습니다.”(‘季節의 五行’, ‘조선일보’, 1938.12.24.)라고 밝힌 바 있다. ‘무서운 규모’란 수백 년 동안 원촌을 지배한 유교적 삶의 질서를 의미한다.자신의 종교를 유교라고 말한 바도 있는 이육사도 이러한 원촌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하며 성장하였다. 이육사는 ‘전조기(剪爪記)’(‘조선일보’, 1938.3.2.)에서 자신이 여섯 살 때 ‘소학’을 배웠으며, ‘은하수’(농업조선, 1940.10)에서는 7,8세쯤에는 한시를 짓고 십여 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공부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계절의 오행’(‘조선일보’, 1938.12.24.)에서는 열다섯에 이미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道를 다 배웟다고 스스로 달떠”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수백 년 길러온 선비정신은 독립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역사학자 김희곤에 따르면, 독립운동사의 첫 장(1894년 갑오의병)이 열린 곳이 안동이고, 가장 많은 독립유공포상자(2010년 기준 320여 명)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며, 1910년을 전후하여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약 90명 가운데 10명)를 배출한 곳 역시 안동이라고 한다.(김희곤, ‘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251면) 그 중에서도 원촌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하계는 그러한 항일정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안의병장을 지냈으며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단식하여 순국한 이만도도 육사의 친척으로서 원촌과 당재라는 작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하계 출신이다. 이육사의 그 뜨거운 삶과 문학의 모태는 안동의 원촌과 그곳을 지배한 유교적 세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육사는 총 44편(시조 1편과 한시 3편 포함)의 시를 창작하였는데, 이 중에서 직접적으로 원촌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시는 없다. 그렇지만 간접적으로 시인의 고향을 연상시키는 시는 여러 편이 등장하며, 필자는 이 중에서도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자야곡(子夜曲)’(‘문장’, 1941.4),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를 ‘육사의 고향 3부작’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들 시에는 육사의 전통적인 고향의 분위기가 깊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살펴보려고 하는 ‘청포도’는 시인 자신이 생전에 “가장 아끼는 작품”(김희곤, 앞의 책, 199면)으로 고백했다고 한다.청포도내 고장 칠월(七月)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청포도’는 흰 색과 푸른 색의 강렬한 대비를 통하여, “내 고장”의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한껏 고양시키고 있다. 이곳은 결코 욕되고 더러운 세력이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없는 성지인 것이다. 또한 육사는 엄혹한 일제 시절이지만 반드시 오고야 말 “손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손님이 온다는 사실은 마치 칠월이 되면 늘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과 같은 불변의 자연적 질서인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맑고 깨끗한 이곳에서 반드시 올 손님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준비일 뿐이다. 1939년이라는 일제 말기에 수많은 지사들마저 변절의 길을 가는 상황에서, 이육사는 자연의 법칙처럼 도래할 광복의 미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청포도’와 관련한 기념물은 이육사의 고향 원촌에 집중되어 있다. 1993년에 안동시 원촌리 생가 터에 세워진 시비에도 시 ‘청포도’가 새겨져 있으며, 2004년에 개관한 이육사문학관 앞에는 청포도샘이, 문학관에서 육사 묘에 이르는 구간에는 청포도 오솔길이 만들어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경북 포항에도 여러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호미곶과 동해면 면사무소 앞에는 ‘청포도’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옛날 미쯔와 포도원 인근에는 청포도 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것은 육사가 김대청의 안내로 식민지 시기 거의 유일한 포도원이었던 포항의 미쯔와 포도원을 방문한 후에 영감을 얻어 ‘청포도’를 창작했다는 증언에 따른 것이다.‘청포도’의 배경을 안동의 원촌이나 포항의 포도원으로 한정짓는 것은 결코 본질적인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육사가 ‘청포도’에서 진정 말하고자 했던 ‘고장’과 ‘마을’은 그 어떤 불의의 세력으로부터도 훼손되지 않는 숭고한 공간이자 언젠가는 반드시 빛을 되찾고야 말 공간으로서의 조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선에는 매운 선비정신을 담뿍 머금은 원촌은 물론이고, 참신한 포도송이로 생명력의 향취를 내뿜던 마쯔와 포도원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육사의 그 굴강한 정신이 있었기에 한국근대문학사는 부끄럽지 않은 내면의 당당함을 갖게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2-03

슬플지라도 ‘겨울 제주도’가 그립다

혼자서, 또는 졸업을 앞둔 학생 때 단체여행으로, 혹은 지난 시절 연인과 함께 제주도를 가곤 했다. 이래저래 따져보니 ‘제주 여행’이 10여 차례가 넘는다.어느 곳을 가도 지척에 짙푸른 바다의 낭만이 있고, 싱싱한 해산물과 흑돼지 고기가 맛있는 섬.봄과 여름에 즐기는 제주도 여행은 물론 좋다. 그러나 ‘겨울 제주’의 매력도 만만찮다. 성산포나 우도에서 차갑게 출렁이는 푸른 물결을 보며 제주의 근현대사를 떠올려보는 건 쓸쓸하고 아프지만 분명 의미 있는 일일 터.몇 해 전이다. 제주에서 몇 년을 살다가 서울로 돌아간 소설가 A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제주도는 국수도 맛있어요. 멸치로 우려낸 국물 맛이 그만이죠. 작업실 아래에 있는 국수 가게를 1년 넘게 드나들었지요.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주인장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는 내 말을 듣고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대꾸가 없더라고요. 서운했지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4.3항쟁에서 입은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아직도 이방인에 대해 저처럼 배타적일까라는 생각에 슬퍼졌어요.”▲제주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시와 소설들1948년 4월 유채꽃 만발하던 때 시작된 제주 사람들의 통곡은 21세기가 돼서야 겨우 위로받을 수 있었다. 국가 차원의 사과와 관련 특별법 제정이 추진된 것.갑작스레 닥쳐온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려 꽁꽁 얼어붙은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간 이들, 줄줄이 묶인 채 폭포 아래로 던져진 이들, 몽둥이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이들. 당시 제주도민의 15%가 죽었다. 지금도 제주도 작은 마을엔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많다. 이성이 상실된 광기의 시대였다.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살해된 이들 중 ‘폭도’로 불릴만한 인물은 이덕구와 김운민, 박남해와 김병남 등 무장 게릴라 400~5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3만여 명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억장 무너지는 억울한 죽음이었다.오래전 ‘문학인 평화기원제’ 취재를 위해 제주도를 찾았던 날. 여든에 가까운 할머니 한 명을 만났다.4.3항쟁 때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는 그녀는 행사에 참석한 작가들의 손을 잡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 엄마와 오빠까지 다 죽고 저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제발 다시는 이처럼 억울한 일이 없도록 도와주세요”라며 울먹였다. 사실 문학은 4.3항쟁의 진실이 알려지는데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시인 이산하의 ‘한라산’ 등이 대표적이다. 두 작품이 역사적 사실로 직격하고 있다면, 원로 시인 이생진(91)은 우회적이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제주의 서러움과 우울을 노래하고 있다.2년 전 ‘나 홀로 제주여행’을 떠났다. 20대 시절 여자 친구와 추억을 쌓았던 성산포에서 우도를 바라보며 기자는 이생진의 애끓는 시를 기억해냈다.▲풍광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섬으로 남기를타지에서 온 손님을 마냥 살갑게만 대하지 못하는 국숫집 주인, 부모와 형제를 잃고 캄캄한 고통의 터널 속에서 살아온 할머니, 검은 바위 위에서 잡아온 해삼과 멍게를 파는 거친 손등의 해녀들, 아무 것도 모르고 노란 병아리처럼 종종거리며 웃는 제주도의 아이들….수난의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들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성산포의 바다가 빛나는 보석이 아닌 지울 수 없는 ‘푸른 멍’으로 느껴지는 정도가 고통의 공유 방식일 뿐.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생진 역시 ‘빈 자리’라는 시어를 통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핍과 공허함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고난의 메타포인 ‘파도’와 타의에 의한 고립을 지칭하는 ‘고독’이란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 것 또한 제주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생진의 시는 끝없는 절망의 되풀이는 아니다. 행간 곳곳에서 읽히는 위로와 위안의 목소리 때문이다.‘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살아서 그리웠던 사람/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 주었다…(후략)’‘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마지막 대목은 죽음이 아닌 부활의 노래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보리밭에도, 섬 꼭대기에도, 심지어 짚신 한 짝에서도 제주의 바람 냄새가 느껴지는 시.다시 ‘겨울 제주’를 가게 된다면 이번엔 성산포의 풍광이 아닌 성산포 사람, 아니 제주도 사람들의 향기에 취해봐야겠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어떤 풍경보다 아름답다./사진제공 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30

“푸르른 바다 곁에서 치유받으며 살고 있어요”

소년은 언제나 ‘지금 이곳’ 아닌 ‘또 다른 곳’을 꿈꿨다. 10~20대 시절엔 밤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이 땅 남쪽 끝을 향해 가거나,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바람처럼 서쪽으로 달리곤 했다. 그 소년은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서른둘에 공무원이 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북의 여러 등대를 떠돌며 드넓은 바다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 항로표지관리원 김현길 씨다.한 달간의 독도등대 근무를 마치고 포항으로 돌아온 그를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기자는 김씨를 기다리며 초등학교 음악 수업시간에 목청껏 부르곤 했던 ‘등대지기’를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로 시작해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이란 구절로 끝나는 노래, 이상스레 우리들 마음을 아프게 울리는 그 노래를.-먼저 궁금한 것 하나 묻고 싶다. ‘등대지기’의 정식 명칭은 뭔가.△‘~지기’라는 말이 직업을 폄훼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근엔 등대관리원 혹은, 항로표지관리원이라 부른다.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나는 해양수산부 포항지방해양수산청 항로표지과에서 독도항로표지관리소 운영·관리를 맡고 있는 팀원 중 한 명이다.-항로표지관리원을 시작한 시기와 현재 나이는.△53세다. 1999년 등대 지키는 일을 시작했다. 올해로 21년째다.-어릴 때부터 바다가 좋고, 외로움을 잘 견디는 사람이었나. 항로표지관리원이 된 이유가 궁금하다.△그렇지 않다. 일을 시작하기 전엔 등대에 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직업훈련원을 수료하고, 정비업체 등에서 일했다. 한 친구가 우연히 권유해 항로표지관리원 시험에 응시했고 운 좋게 합격했다. 어찌 보면 운명 같기도 하다.-등대를 지키기 전엔 어떤 청년시절을 보냈는지.△10대 때부터 여행을 좋아했다. 20대에도 기차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낯선 곳에서 텐트를 치고 자다가 불심검문에 걸리기도 했고…. 짧지만 사찰에서 행자 생활도 해봤다. 내겐 역마살이 있다. 1999년 독도에 설치된 등대가 무인등대에서 유인등대로 바뀌며 인력 충원이 필요했다. 그해 나를 포함해 7명이 항로표지관리원이 됐다. 32세 때다.-유인등대와 무인등대의 차이는 뭔가.△쉽게 말하면 등대에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통상 2년에 한 번쯤 근무지가 바뀐다. 경북에는 5개의 유인등대가 있다. 독도, 울릉도(도동등대와 태하등대) 울진 죽변, 포항 호미곶 등이다. 이 다섯 군데의 등대를 순환 형태로 돌아가며 근무한다. 각각의 등대에서는 3교대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다만 독도등대의 경우엔 ‘2개 팀·1개월 근무·1개월 휴무 시스템’이다. 1개 팀은 3명이고, 1명이 주간 근무, 2명이 야간 근무를 맡는다. 경북 전체에서 등대를 지키는 사람들은 대략 25명 정도라고 알고 있다. 무인등대는 280개쯤 된다.-항로표지관리원의 주된 임무는 어떤 것인지.△선박의 항해를 돕기 위해 등대와 부표를 관리한다. 관련 해상 시설을 점검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땐 이를 해결하기도 한다. 예전엔 등대의 역할이 ‘어선과 어부 보호’에 방점이 찍혀있었으나, 요즘은 국가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독특한 직업이다. 힘겨운 점과 보람의 순간이 동시에 있었을 듯한데.△두 아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게 가장 안타깝다. 이젠 대학생이 된 자식들이 어릴 때 곁에서 돌봐주지 못했다. 예전 독도등대에 근무할 땐 겨울이면 50~60일간 만나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착하게 자라준 애들에게 고맙다. 보람이라면…. 독도등대에서 일본 순시선을 볼 때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억지 부려도 우리 영해를 쉽게 침범하지는 못한다. 대한민국의 동쪽 끝을 지키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독도등대에서 근무한 세월이 만만찮을 것 같다.△8년이다. 울릉도에선 4년쯤 있었다. 독도와 울릉도 근무를 합치면 12년가량 된다. 독도 근무를 꽤 오래 한 셈인데, 그건 독도와 나의 궁합이 잘 맞아서가 아닐까.(웃음)-독도등대에선 고독을 느끼지 않는가? 독도에 대한 애증이 있을 텐데.△처음 갔을 땐 낯설고 답답했다. 하루 종일 볼 거라곤 바다밖에 없으니까. 들리는 건 갈매기 소리뿐이고. 눈을 떠도 바다, 심지어는 감아도 바다가 보였을 정도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진과 글쓰기에 관심이 생겼고 이후론 답답함이 많은 부분 사라졌다. 독도 관련 사진을 모아 크고 작은 전시회를 30여 차례 열었고, 지난해엔 시집도 한 권 출간했다.-독도에 상주하는 이들은 얼마나 되는가.△서도엔 독도관리사무소 직원 2명과 독도 주민 김신열 씨와 김씨의 사위가 산다. 동도의 경우엔 독도경비대와 항로표지관리원 등 30명 조금 넘는 인원이 생활하고 있다.-항로표지관리원으로 일하면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2000년대 초반 독도 관련 모임에서 함께 활동하던 남녀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자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고 둘의 유골을 독도에 뿌렸다. 이후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의 그림자를 본 독도경비대원들이 적지 않았다. 갑자기 삽살개가 짖어대던 날, 나도 그들의 그림자를 봤다.(웃음)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건 태하등대의 아름다움이다. 사진작가들 상당수가 한국 최고의 촬영 장소로 꼽는 게 태하등대 주변이다. 특히 일출과 일몰 때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경이 근사하다.-‘나도 등대를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하려고 한다면 택하기 어려운 직업이다.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하고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도 이 일을 시작하면서 애국심이 커졌다. 그걸 소명감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바다를 떠돌며 살아왔다. 후회는 없나? 만족스런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는지.△가정적으론 곁을 지켜주는 아버지가 되지 못해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나쁜 삶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울릉도나 독도까지 10시간 넘게 배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근무 여건도 좋아졌다. 누군가는 ‘당신이 등대를 지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웃음) 틀린 말이 아니다. 난 갇혀 있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니까.-마지막 질문이다. 항로표지관리원이란 세상에 어떤 도움을 주는 사람인가.△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기보다 오히려 내가 푸르른 바다 곁에서 치유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 역시 지금의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김현길 씨는 2001년 필름 카메라로 독도의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셔터를 눌렀다”고 한다. 누구에게 배우거나, 정식 교육을 받은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반인이라면 평생 한 번 가보기도 힘든 독도의 절경을 담아낸 김씨의 사진은 차츰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디지털 카메라로 장비를 바꾼 뒤엔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독도의 모습을 더 많이 렌즈에 담을 수 있었다.정부와 지자체는 영토 주권의 문제이기에 “독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한다. 그런 차원에서 독도를 주제로 한 사진전에 보다 많은 관람객이 찾아주기를 김씨는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부와 지자체의 도움이 절실하다.포항은 울릉도와 독도를 향해 가는 출발점이다. ‘독도 사진 상설전시관’이 생긴다면 시의 이미지와 위상을 동시에 높일 수 있지 않을까?사진과 더불어 글쓰기로 독도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고 있는 김현길 씨의 시 ‘독도 예찬’을 소개한다. 소박하고 소탈한 문장이 읽는 사람의 가슴을 흔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29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별빛 쏟아지는 자작나무 길을 달리다

◇ 여행의 필수품, 휴대폰 유심카드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으나 로시(오토바이)를 바로 받을 수 없었다. 통관에 걸리는 시간이 보통 이틀, 길면 일주일을 넘길 수도 있다고. 오토바이를 찾기까지 통관대행회사 근처 숙소에서 마냥 연락을 기다려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려 입국심사를 받고 난 다음 통관대행회사 직원을 만나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휴대폰 유심카드 구입이었다. 옛 여행자 같으면 가까운 서점에 지도를 구하러 갔겠지만 요즘엔 인터넷이 연결되는 휴대폰만 있으면 지도뿐만 아니라 숙소 예약부터 통역까지 여행자가 겪는 거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으니 유심카드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여객선터미널 근처 통신회사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선불제 유심카드를 받았다. 인터넷과 전화가 되는 걸 확인하고 아내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낸 후에야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낯선 도시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함께 떠나온 일행과 연락처를 교환하고 위치추적 앱(Zenly)을 설치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비였다.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어디에서 묵는지 위치추적 앱만 켜면 알 수 있었다. 유심카드를 구입하곤 각자 예약한 숙소로 흩어졌다.예약한 숙소는 1박에 1만 원쯤(600루블)하는 보야지호스텔, 남성 전용 8인실이었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니 덩치가 산만한 남자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오토바이 슈트를 입고 헬멧을 들고 있는 여행자를 쉽게 보긴 힘들 테니. 남자들만 있는 공간에서만 나는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짐을 풀고 침대에 앉으니 맞은편에 앉는 왈랴크 씨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왔다.“야 카레이스키”(나는 한국인입니다)라는 말만 두어 번 반복하곤 당신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곤 나를 제외한 6명의 남자들이 서로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논쟁의 중심에 내가 있는 듯했으나 언어의 장벽은 높고 두터워 단 한 마디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러다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하비프 씨였다. 인천에서 일하는 타지키스탄 사람. 바로 위의 침대를 쓰는 그는 유창하게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번갈아가며 말했고, 나의 정체(?)에 대해 다른 사람에서 설명했다. 한국인이 맞고(내가 분명 ‘카레이스키’라고 말했음에도 그들은 내가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책방을 하고 있으며 유럽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할 계획이라고. 하비프 씨가 설명을 끝내자 다들 엄지를 치켜세우며 나를 격려했다. 시베리아는 5월에도 추우니 조심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리곤 자신들이 온 곳이 어딘지 말해주었다.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중앙아시아나 타지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사람들이었다.◇ 첫날 밤, 러시아말을 배우다하비프 씨와 친구 무즈카쉬 씨는 비자문제로 잠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왔다고 했다. 한국 체류기간이 끝나면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러시아에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고 했다. 고향인 타지키스탄까진 너무 멀어 가장 비용이 저렴한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비자문제를 해결한다고 했다. 벌써 5년이나 한국에서 일했고(원래 그의 직업은 교사였다.) 자녀가 다섯이나 되어 열심히 벌어야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말했지만, 가족을 두고 먼 이국에서 하루하루 버텨야하는 그가 안쓰러웠다.보야지호스텔에서 묵는 이틀 동안 하비프 씨는 식사를 할 때마다 나를 챙겼다. 근처 식료품점에서 사온 빵과 주스, 통조림, 약간의 채소가 전부였으나 내겐 성찬이었다. 식사뿐만 아니었다. 여행하는 동안 꼭 필요한 러시아어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가 알려준 러시아어는 따로 받아 적어놓고 틈나는 대로 연습했다. 할레브와 말라크, 코페는 러시아를 여행하는 내내 달고 살았다. 아래 ‘기초 회화’만으로 러시아를 건너가는데 별 문제가 없었으니 그의 짧은 러시아어 강의는 효과만점이었다.할레브 - 빵말라크 - 우유코페 - 커피카로아 마야사 - 쇠고기리바 - 생선다이티 - 주세요바춈 - 얼마입니까?즈드라스트위테 - 안녕하세요이드비나테 - 미안합니다무주키 - 아저씨데오시카 - 아주머니스파시바 오촘프쿠스노 - 잘 먹었습니다◇ 로시를 받고 먼저 시베리아로…이튿날, 휴대폰이 제대로 충전되지 않는 문제가 생겨 수리점을 찾아갔으나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중고 휴대폰을 구입해야만 했다. 떠나기 전부터 휴대폰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불안했는데 떠나서야 문제가 터졌다. 혹시 모르니 미리 휴대폰을 하나 더 챙겨가라는 경험 많은 친구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어쨌거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이곳저곳을 쏘다닌 덕분에 길을 수월하게 익힐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고향인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동상도 보고 아르바뜨 거리도 가고,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헤매기도 했다. 종일 휴대폰을 고치기 위해 걸어 다녀 파김치가 되어 숙소에 들어가서 또 하비프 씨에게 저녁밥을 얻어먹고 러시아 여행에 대한 정보를 여러 가지 얻을 수 있었다. 그가 내게 베풀어준 친절은 처음부터 꼬일 듯했던 나의 여정이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드디어 3일째, 오후에 세관에서 로시를 찾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로시를 찾기 전에 영사관에 가서 면허증 번역공증서를 받아야만 했다. 러시아에선 한국에서 발급받은 국제면허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따로 영사관을 찾아 번역공증서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어로 작성한 신청서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미리 준비한 덕분에 쉽게 발급받을 수 있었다. 번역공증서를 발급받는 동안 영사관 관계자에게 2018년 7월 있었던 사고에 대해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트럭과 추돌해 라이더가 사망했고 영사관 직원이 이틀이나 걸려서야 사고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워낙 땅이 넓고 교통이 불편해 사고가 나더라도 쉽게 해결하기 힘드니 시베리아를 통과할 때는 각별히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사망사고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사고들이 무시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일행 중 한 분도 첫 번째 여행에서 러시아를 벗어나지 못하고 크게 다쳐 돌아와야 했고 절치부심하여 다시 도전한다고 했다.배에 오토바이를 실을 때 선사 직원에게 한 해 유라시아를 왕복해 다시 오토바이를 싣고 돌아오는 여행자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을 때 “떠나는 사람은 100명 정도지만 왕복해서 오는 경우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실패 쪽이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만났을 때는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그렇게 마음을 잡았다.오후 5시 로시를 세관에서 받자마자 함께 배를 타고 왔던 분들께 작별인사를 하고 하바롭스크로 달렸다. 하바롭스크까지 거리는 약 750킬로미터. 새벽 2시까지 550킬로미터쯤 달리다 멈추고 길가에서 침낭을 깔고 노숙했다. 일찌감치 숙소를 잡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자작나무가 춤추고 별빛이 쏟아지는 밤길 위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길엔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이 나 홀로였다.   /조경국

2020-01-28

충효의 고장에 ‘호래자식’이 웬 말

강상죄(綱常罪)는 삼강과 오상의 도덕을 해친 범죄를 말한다. 삼강오상은 현대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삼강오륜과 같은 의미이다.조선시대는 유교 윤리가 통치의 근간 이념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여겼다. 그래서 불효죄는 본인을 처형함은 물론이고, 그들이 살던 고을 읍호가 강등되고 관할 수령은 파직되는 경우도 허다했다.1751년(영조 27년) 9월경에 충남 예산에 살고 있던 박우천((朴右天)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는데, 그 죄목이 바로 ‘불효죄’였다. 박우천이 그의 어미가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상이란 먼 곳에서 어버이의 죽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달려오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상례(喪禮)에서 분상은 매우 중요한 절차였다. 그래서 분상하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 편의를 보아주는 것이 통례였지만, 상주가 이 절차를 어길 때는 가차 없는 처벌이 내려졌다.통상적으로 유배를 온 사람들은 1~2년이면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관례적이었는데, 박우천은 어찌된 영문인지 유배가 풀리지 않았다. 그가 장기로 온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박우천을 관리하던 장기현감이 그의 고향인 오산(烏山·현재 충남 예산) 현감에게 공문을 보내 사실조회를 했다. 그가 도대체 어떤 모진 죄를 저질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수개월 후 오산현감이 답장을 보내왔다. 우선 공부상에 적힌 범죄사실로는 강상죄의 구성요건이 충분했다. 이 사건의 당초 고발자는 박우천의 외삼촌인 김선의였다. 김선의는 나이가 많은데도 자식이 없었다. 게다가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어서 박우천에게 얹혀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었다. 김선의는 노망(老妄)이 들어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조금만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좌수어른이나 관가에 고발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래도 박우천은 그의 생질인 까닭에 감히 다투거나 따지지도 못하고 매번 순종하여 그의 청을 받아주었다고 한다.그런데, 신미년(1751, 영조27)에 이르러 김선의가 박우천에게 돈 10냥을 달라고 해서 줬더니 그 돈을 생활비에 쓰지 않고 그의 처족(妻族)에게 줘버렸다. 박우천이 이 사실을 알고 그 돈을 돌려달라고 누차 말하였는데도 김선의는 돌려주지 않았다. 박우천과 김선의는 모두 성격이 날카롭고 표독한 사람들이었다. 둘은 이 문제로 술을 마시고 다투며 따지다가 술에 취한 김선의가 홧김에 관아에 박우천을 고발해버렸다. 김선의는 자신의 생질인 박우천이 그 어미가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았고 또 약간의 돈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러운 오물을 자신의 입속에 채워 넣었다는 것이었다. 실제 고발하러 온 김선의의 입에는 오물이 칠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감이 봤을 때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미의 상(喪)에 분상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외삼촌을 구타하고 입에 오물까지 처넣었으니 천하에 이런 호래자식이 없다고 생각했다. 광패한 박우천의 행위에 매우 놀란 현감은 전라감영에 보고하여 그를 섬에 유배하기로 조율(照律)을 하다가 마침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보냈다는 것이 이제까지 인정된 사실이었다.장기현감의 사실조회 요청에 따라 현임 오산현감은 신사년(1761, 영조 37년) 9월 초3일, 박우천의 10년 전 죄상을 물어보기 위해 그의 고향인 현내면 연지동(蓮池洞)의 좌상(座上) 윤취번(尹就幡)과 유사(有司) 배악불이(裵惡不伊), 그리고 박우천의 인척인 송인철을 불러 위에서 밝힌 인정사실이 틀림없는지 다시 조사를 했다.그런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참고인들로 불려나온 동네사람들의 진술은 공부상에 적힌 위의 내용과는 좀 달랐다. 오물을 김선의의 입속에 채울 때에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기에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으나, 모친상에 그가 분상하지 않았다는 일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당시 박우천은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던 사령(使令)으로 있었는데, 관가의 심부름이 없는 날이면 관문(官門)에서 오래 지냈고 애당초 멀리 나간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어미의 병이 여러 달 낫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는데, 그때 박우천이 분명히 분상을 했다는 것이다. 발상(發喪)할 때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가서 조문하였으며 행상(行喪)할 때에도 동네 사람들이 모두 상여를 메고 갔기 때문에 박우천이 상여를 뒤따라가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했다. 그 뒤에 박우천이 장사하러 다른 곳에 나갔다가 여러 달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사실이 있었는데, 김선의가 이것을 분상(奔喪)하지 않은 것으로 허위 고발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박우천이 멀리 장기현으로 귀양을 간 사실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애매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진술했다.김선의의 생질 송인철도 김선의는 외삼촌이고 박우천은 이종(姨從)간이 되지만, 어느 쪽도 두둔할 필요가 없다면서 본리(本里) 좌상과 유사의 진술내용이 사실과 다름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사실이 이러하다면, 10년 전에 내려진 박우천에 대한 유3천리의 판결은 사실인정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 책임 있는 관리였다면 그 판결의 당부(當否)를 다시 심리하는 비상수단적인 구제방법을 거쳐 그를 즉시 해배시켜야 할 것이지만, 장기현감은 위와 같은 답변을 통보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앉았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782년(정조 6년) 12월 6일 유배인들의 처리에 관한 형조의 문서에도 박우천은 여전히 장기현의 유배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정통 유학이 깊이 뿌리 내린 장기현은 “충효의 본고장”이라할 만큼 충효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장기면 양포리의 장인풍(張仁豊), 임중리의 김사민(金士敏), 산서리의 최학진(崔鶴振)과 김시상(金時相), 정천리의 김윤찬(金潤瓚), 금곡리의 허기(許琦), 대곡리의 박춘무의 처 김해김씨 등 조선시대 효와 열의 행적들이 정효각, 효자각, 열녀각과 함께 남아있다.효자·열녀각에 얽힌 사연들도 각양각색이다. 특히 산서리 김시상의 효행은 효자비에 전하는 비문 뿐 아니라 ‘효행전(孝行傳)’이라는 서사적 구조를 갖춘 문헌설화까지 전해온다. 김시상은 영조 때 인물로 8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소년가장이 된 시상은 집안이 가난하여 시장에 나무를 해다 팔아서 식량을 구해 어머니를 봉양해 왔다. 하루는 장터에 갔다가 어머니에게 드릴 고기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솔개가 날아와 고기를 빼앗아 갔다. 난감해진 시상은 고기를 다시 사려고 했지만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머니의 밥상에 난데없는 고기가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시상이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아까 솔개 한 마리가 문 앞에 날아와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갔기에 자세히 보니 그게 고기였다고 했다. 그 묶은 끈을 확인한 결과 시상이 낮에 시장에서 산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 밥상의 반찬이 허술하고 아들의 걸음이 늦음을 하늘이 알고 솔개를 보내 먼저 고기를 집으로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언젠가 시상의 어머니에게 안질이 생겨 실명위기에 놓였다. 시상은 집 뒤에 정화수를 떠놓고 꿇어앉아 저녁마다 북두칠성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하늘도 감응을 받았는지 어머니의 눈이 다시 밝아졌다. 어머니의 연세가 일흔이 되었을 때였다. 병석에 누워 신음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숨을 거두려하자 시상은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하늘에 축원을 하면서 어머니 입에 드리우니 피가 목에 넘어가며 다시 회생하였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5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어머니의 상을 치른 후 시상이 하루는 성묘를 가는데 산처럼 큰 호랑이가 길목에 버티고 앉아 길을 막고 있었다. 시상이 호랑이를 꾸짖어 “너는 산중 영물이요 나는 인간죄인이라, 가는 길이 각각 다른데 어찌하여 어버이 보려고 가는 자식 앞을 막고 앉았는고? 빨리 산으로 가거라” 하니 호랑이가 물러갔다는 것이다. 하늘이 내린 이런 효자를 나라에서도 알고 영조 23년(1747)에 효자각을 건립하게 하였다고 한다.장기 금곡리에는 ‘삼효각(三孝閣)’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이곳에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한 허기(許琦)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나이 18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묘소 옆에 움막을 치고 기거를 하며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다. 어머니에게도 예를 다하고 공손하게 대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 했다. 그는 나이가 어려 상을 당했던 관계로 아버지의 묘 터를 잘 골라 쓰지 못하였던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뒤늦게 좋은 명당 터를 찾아 이장을 한 다음 제사를 드렸더니 이상하게도 술잔에 부어두었던 술 3잔이 모두 말라 없어지는 게 아닌가? 이를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아버지 제삿날 제사를 지내고 고개를 들어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시와 똑 같이 제상에 앉아 있어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놀란 일이 있었다 한다.허기에게는 허식(許湜)과 허온(許溫)이란 두 아들이 있었다. 허식은 장가 간지 8년 만에 불행하게도 세상을 떴다. 허식의 처 곡강 최씨(曲江 崔氏)는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머리를 빗지 않고 시어머니에게 정성을 다 했다. 시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한 달이 넘도록 자리에 눕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변을 손수 받아 처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시어머니의 추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허온의 처인 월성 최씨(月城 崔氏) 역시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허씨 가문에 시집 온 뒤에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했다. 시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직접 변을 받아내기도 하고, 또 변의 맛을 보아가면서까지 병환의 상태를 점검하며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했다.어느 해 겨울, 찬바람이 불고 눈이 하얗게 쌓인 날이었다. 시아버지가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최씨는 무작정 길을 나섰으나 고기를 팔러 다니는 상인이 없어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홀연히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 도로변에 앉았다. 최씨가 쫓아가서 손으로 잡아 그것으로 시아버지의 저녁 반찬을 해드린 일이 있었다.이런 허기와 그 두 며느리의 효행은 금방 고을전체에 퍼졌다. 이에 조선 순조 때 도내의 유림(儒林)들이 연명하여 경상감사와 예조에 장계를 올렸더니 왕께서도 감명을 받고 정려(旌閭)를 내렸다.‘반면교사’란 말이 있다. 부정적인 것을 보고 긍정적으로 개선할 때, 그 부정적인 것을 반면교사라고 하였다. 장기에 효자와 효부가 많은 이유는 애당초 유현(儒賢)의 고을로 예절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던 점도 있었지만, 강상죄로 인해 장기로 유배를 오는 여러 사람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을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1-28

현실비판이 강했던 작가는 왜 일본문단에 목말라 했을까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저항 문인으로 ‘청포도’와 ‘광야’의 시인 이육사의 오른편에 앉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이육사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할 때,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인터뷰를 한 문인이 있다. 조선일보 1932년 3월 29일자 기사에서 이육사는 그 작가의 응접실 겸 침실 겸용인 서재에 찾아가, “그의 눈은 리지에 타는 듯이 빗낫다(빛났다)”고 감탄하기도 하며 그에게 수필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이 날 이육사를 이토록 격동시킨 인터뷰이(interviewee)는 과연 누구였을까? 놀라지 마시라. 그는 다름 아닌 친일파로 일본과 조선에서 명성이 높았던 “조선 출신의 대일본제국의 작가 초 가쿠추”(시라카와 유타카, ‘장혁주 연구’, 동국대 출판부, 2009, 344면), 바로 장혁주(張赫宙)이다.그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대표적인 친일문인으로서, 본명은 장은중이고, 일본명은 노구치 미노루(野口稔)이며, 귀화 이후 필명은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였다. 장혁주는 일반인들에게는 잊힌 작가이지만, 엄청난 열정으로 수많은 작품을 써낸 일제 시기의 유명작가다. 등단하여 해방될 때까지 장혁주는 장편 15편을 포함한 소설 90여 편(조선어 작품 10여 편)을 발표하였으며, 단행본으로 30권 이상을 출판하였다.장혁주는 일본어 글쓰기가 극히 드물던 1930년에 일본어 작품을 일본잡지에 발표하며 등단하였고, 조선어보다 일본어로 훨씬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문단의 페스토균’(1935)을 통해서 조선 문인들을 실력도 없이 질투나 일삼는 무리들로 매도한 바 있는 그는, 1936년 여름부터는 아예 도쿄로 이주해 버린다.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1939)이라는 일본어 논설에서는 조선의 완전한 ‘내지화(일본화)’를 주장하며, 이를 위해 한국인의 단점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후에도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여러 활동과 ‘이와모토 지원병’(1943)과 같은 국책에 순응하는 작품을 창작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머물던 그는 1952년에는 일본인으로 귀화해 사망할 때까지 창작활동을 이어갔다.이육사의 인터뷰는 이번에 다루려고 하는 장혁주의 ‘餓鬼道(아귀도)’(가이조, 1932.4.)와 관련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인터뷰는 ‘아귀도’가 수록된 ‘가이조’ 4월호가 “각 서점에서 짐을 풀자마자 전화가 빗발치듯 하고 나는 듯이 팔려 그 다음날부터 절품”이 되었을 정도로 큰 주목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이 무렵의 장혁주는 사회주의 문인으로서의 풍모를 풍긴다. 장혁주의 서재에는 프리체의 ‘예술사회학’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과학 서적이 꽂혀 있으며, 가장 친한 친구로는 경주에서 함께 청년운동을 한 박로아를 들고 있다. 또 다른 글에서 장혁주는 ‘아귀도’를 쓸 무렵에는 “구레하라 고레히토(藏原惟人) 이하의 프로문학제이론의 영향이 외부적으로 졸작을 움직이었다”(‘정독하는 양 대가’, 동아일보, 1935.7.11)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구레하라 고레히토는 NAPF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일본의 경향 작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비평가였다.장혁주만큼 많은 작품에서 경북 지방을 소설의 배경으로 그린 작가도 드물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내력에서 기인한다. 장혁주 연구의 권위자인 시라카와 유타카 교수에 따르면, 그는 1905년 대구에서 구 한국군 장교를 지낸 아버지와 술집 등을 경영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순탄치 않은 가정 환경으로 어린 시절부터 생모를 따라 경상도 지방을 전전해야 했다. 이후 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청송국 안덕면립학교의 교원으로 부임하였으며, 1927년에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립보통학교의 교원이 돼 1929년 봄까지 머문다.이때의 경험은 예천군 지보면을 배경으로 한 ‘아귀도’를 창작하는 원천이 된 것으로 보인다. 장혁주는 ‘나의 修業時代(수업시대)’(동아일보, 1937.8.13.-15)에서 “예천(醴泉)의 산촌교원을 하면서 거기서의 체험을 기록했다”고 직접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장혁주는 조선을 그린 대부분의 소설에서 경북 지역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주로 대구 경북 지방에만 머물다가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일본으로 이주한 장혁주에게는 대구 경북 지방이야말로 자신이 아는 조선의 전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장혁주의 등단작은 1930년 10월 ‘다이치니타쓰’에 발표한 일본어 소설 ‘白楊木(백양목)’이지만, 본격적으로 작가의 이름을 알린 것은 1932년 4월 ‘가이조(改造)’ 현상공모에 ‘아귀도’가 당선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아귀도’는 경북 예천 지보면을 배경으로 당대 조선의 농민들이 겪는 온갖 시련을 알뜰하게 모아 놓은 일종의 ‘고통 박물관’과도 같은 작품이다.이 작품은 제목이기도 한, ‘아귀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한 생존의 막장이 펼쳐진 작품이다. 불교에서 유래한 말인 아귀도는 중생이 머무는 여섯 개의 세계(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도, 천도) 중 하나로 이곳의 중생은 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괴로움을 겪는다. 이 작품에서는 1930년대 경북의 농민들이 겪는 괴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단편의 분량 안에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다양하게 담아 놓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의욕으로 인해 인물들은 뚜렷한 개성이나 심리도 없이 무한고통의 세계에서 신음하고 탄식하는 일종의 중생 차원에서 그려질 뿐이다.농민들의 고통은 두 가지 사건을 계기로 발생하는데, 첫 번째는 가뭄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저수지 공사장의 비인간적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소작농의 불합리한 생산조건이다. 공사장에서는 감독과 십장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농민들 몫으로 배정된 알량한 돈을 가로채고, 농민들을 마소 다루듯이 채찍으로 때리기도 한다. 마을의 아녀자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농사를 짓지만 수확을 해보아야 대부분을 지주에게 빼앗길 뿐이다. 이 와중에 가난과 빚을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하는 농민이 나오고, 풀즙이나 먹던 아이가 좁쌀을 급하게 먹어 급체로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칡을 캐러 갔던 부인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비극이 발생한다. 결국 인간 생존의 극한 상황에 몰린 농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단결하여 십장과 감독들에게 저항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이 작품은 식민지 조선 현실의 핍진한 재현의 차원을 넘어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실천적 전망을 담아내고자 하는 경향소설로서의 성격도 선명하다. 그것은 이러한 빈궁과 고통을 그대로 감내하는 차원을 벗어나서 뚜렷한 저항의 모습까지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항의 의식은 매우 선명한 것이어서, 이 작품의 도처에는 너무나 많은 복자(伏字, 검열을 통해 글자를 삭제하고 대신 X와 같은 기호로 표시한 것)로 인해 독해가 불가능한 부분도 여러 곳이다.장혁주는 초창기에 복자로 독해가 어려울 정도의 정치의식이 강렬한 작품을 주로 발표하지만, 이러한 정치의식은 점차 약화된다. 나중에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으로까지 변절한다. 이러한 변모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러한 비극은 작가 장혁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타자가 늘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아귀도’를 비롯한 경향소설에 가까운 작품을 쓰던 시기는 “일본 문단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이 침체기에 접어 들어가고 있어, 한국 작가의 ‘동반자문학’이 참신하게 보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장혁주는 이육사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한 이유 중의 하나로 일본 문단에 “조선의 사정을 한번 소개”하려는 것을 들고 있다.소설가 장혁주의 작품집.조선 농민에 대한 장혁주의 천착은 간절한 내적 고뇌와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 문단의 인정에 목말라 했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이 견뎌낼 수 없는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는 동물화 된 조선 농민의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흥미로운 이국적 소재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상징적 아버지가 일본(좁게는 일본 문단, 넓게는 일제)인 장혁주이기에, 일본의 요구와 태도가 변화되어 감에 따라 그는 동반자 문학가에서 순수 문학가로, 다시 순수 문학가에서 국책 문학가로 몸을 바꿔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자신을 지탱시켜 나갈 상징적 아버지가 너무나도 미약한 정신적 고아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대 일본인 작가들이 장혁주를 겁이 많고 나약한 인물로 평가한 것도 한번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해방 이후 장혁주는 친일 행적으로 조국은 물론이고 재일조선인 사회로부터도 배척받았다. 그러나 1997년 별세할 때까지 창작활동은 계속 이어나간다. 흥미로운 것은 말년에 영어로 소설 창작을 시도했고, 실제로 1991년 12월에는 ‘Forlorn Journey’라는 영문 장편소설을 출판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어 창작이 지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경북의 벽촌에서 문학을 시작한 장혁주가 일본보다도 더욱 강력한 아버지를 영어(미국)에서 발견한 것이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평생 자신을 옥죄던 한글과 일본어라는 굴레(한국과 일본)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작을 꿈꿨던 것이었을까? 장혁주는 해방으로부터 수많은 날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한국문학의 정체와 양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소설가 장혁주는…1905년 대구 출생. 보통학교 교원 등으로 일하다가, 1932년 일본어로 쓴 소설 ‘아귀도’를 시작으로 본격적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처참한 실상을 사실감 있게 그려냄으로써 비판적 현실 인식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다. 일본 문단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엔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무지개’, ‘삼곡선’, ‘여명기’, ‘인왕동시대’ 등이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1-27

전통시장 활성화·청년 일자리·신재생 에너지 분야 집중 추진

김천시가 2020년 경자년 새해를 맞아 전통시장, 일자리창출, 에너지관련분야에 공격적인 행정 추진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시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지역경제활성화 사업에 대해 알아보고, 그로 인해 변화될 김천의 경쟁력에 대해 살펴봤다.△소상공인이 살아야 지역경제가 산다김천시는 나날이 어려워지는 소상공인들을 위해 다양한 시책을 전개하고 있다. 먼저 김천사랑 상품권 발행규모를 올해 200억원으로 대폭 늘리고, 시민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오는 7월 모바일 상품권을 본격 출시할 계획이다. 시는 김천사랑 상품권이 지난해 판매 개시 4달만에 30억원이 조기 매진되는 성과를 거둔 만큼 올해도 골목상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올해는 발행규모를 대폭 확대하고, 5만원권 추가 발행, 모바일형 상품 개발 등 공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또 지난해 소상공인 특례보증사업이 3개월만에 60억원이 모두 소진됨에 따라 올해는 지난해 대비 160% 상향된 100억원 보증 규모로 확정했다. 소상공인의 경영자금도 개소당 2천만원 범위 내 2년동안 3%의 이자보전 함으로써 지역 골목상권 활성화에 일조하도록 했다.△2020년은 전통시장 활력 기반의 해김천시는 2020년도를 ‘전통시장 활력 기반의 해’로 삼고, 전통시장 공모사업으로 총 사업비 42억2천만원(국비 23억3천만원)을 확보해, 올해부터 지역 상권의 뿌리인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평화시장 청년몰 조성 및 황금시장 주차장 조성사업을 시작한다.평화시장 청년몰 조성사업은 2개년도에 걸쳐 사업비 15억원을 투자해 20개 이상 청년몰을 조성해 시장 내 지역순환(가공)센터, 로컬푸드, 로컬직매장 등으로 활용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과 더불어 청년동아리 창작공간, 체류형 게스트하우스 등 공용공간이 추가로 조성되면 청년과 중장년층이 함께 북적북적하는 활기 넘치는 시장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황금시장 주차장 조성사업은 27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2개년도 동안 920여평 부지에 주차장 98면을 조성한다. 기존의 협소한 주차장을 보완하고 현대화된 신규 주차장을 설치해 이용객의 편의성을 높여 찾고 싶은 전통시장으로의 변화가 기대된다. 김천시는 이러한 공격적인 사업 준비로 지난해 경북도로부터 지역경제 활성화 부문 최우수 시(市)로 평가받았다.△청년 일자리가 곧 지역의 미래다김천시는 ‘일자리가 곧 지역의 미래’라는 신념으로 일자리 창출에 매진하고 있다. 시는 올해 청년 일자리, 취업취약계층 일자리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김천시 청년센터’를 설치해 김천시 청년 일자리 사업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고, 취업취약계층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청년의 취·창업 정보 제공과 다양한 취업 프로그램 운영, 사회적 경제기업 네트워크 구축 등 청년 활동 공간으로 운영될 김천시 청년센터는 구직 청년의 역량강화와 일자리 창출, 취업 극대화를 목표로 지난해 7월부터 (구)김천소방서를 리모델링해 오는 3월 개관을 앞두고 있다. 또 청년스타트업 지원사업은 특성화 고등학교 졸업생 취업률 향상을 위한 취업역량강화 교육, 공공기관 및 기업체 현장 탐방, 직업교육 훈련을 지원한다. 여기에 특성화고교 졸업(예정)자 및 청년 구직자들로 하여금 취업을 위한 초청강의, 집합교육, 지역 우수기업 탐방 등 기업과 구직청년 간 일자리 미스매치 해소를 위한 1사-1청년 더 채용 릴레이 운동도 전개할 방침이다.시는 청년창업과 취업을 지원하기 위한 △도시청년 시골파견제 △청년마을 일자리 뉴딜사업 △청년 CEO 육성사업 △취업지원센터 운영 △중소기업 인턴사원제 사업 △대학생 공공기관 직무체험 지원 △기업 직무체험 지원 △일자리창출 우수기업 근로환경 개선사업비 지원 △일자리 네트워크 협력사업 △지역실업자 직업훈련 사업 등도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사회적 약자를 위한 일자리 사업으로는 △지역공동체 일자리사업 △공공근로 사업 △취업박람회 등 청년뿐만 아니라 전 연령을 위한 사업으로 확대 추진할 예정이다. 추가로 올해 고용노동부 공모사업인 △지역산업 맞춤형 일자리창출 지원사업 △김천시 운송관련 제조분야생산 품질관리자 양성지원사업 △신중년 일자리를 위한 NEW-START 인력양성사업 △START-UP 창업 성공을 위한 희망프로젝트사업 등을 철저히 준비해 신청할 예정이다.민선7기 출범 이후 김천시는 ‘민선7기 일자리대책 종합계획’을 수립해 일자리 비전과 목표인 5대 핵심전략, 20대 전략과제 및 40개 실천과제를 발표했다. 임기 중 1천542억원의 재정을 투입, 매년 6천여개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5년간 3만개의 공공형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다. 지난해에만 7천109명이 취업해 목표치 대비 116% 웃도는 성과를 거뒀다. 시는 이를 바탕으로 일자리부분 전국 기초자치단체장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 우수상, 경북도 상반기 일자리창출 추진실적 우수상을 수상했다.△신재생에너지로 삶의 방식을 바꾸다김천시는 올해 산업통상자원부 신재생에너지 융복합 공모사업 ‘어모 Eco-Friendly 에너지타운 조성사업’에 선정돼 국비 10억원, 도비 3억원 등 총 22억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안전하고 깨끗한 청정에너지 자립마을 조성을 목표로 하는 이 사업은 태양광·지열·수소연료전지 등 2종 이상의 신재생에너지원을 설치해 마을이나 개별 가구에 공급하게 된다. 이 사업으로 어모면 그린스마트빌리지 외 8개 마을(태양광 167개소, 지열 37개소)이 에너지 자립마을로 거듭나게 될 전망이다. 2008년부터 시행중인 신재생에너지 주택지원사업은 태양광, 태양열, 지열, 소형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를 주택에 설치할 때 해당 건물주에게 설치비의 약 60%를 보조하는 사업으로 김천시는 지금까지 총 384가구를 지원했고 2020년에는 10가구를 늘린 61가구를 지원할 계획이다. 시는 신재생에너지설비 부담을 경감하고, 전기료 비용 절감 및 온실가스 배출 감소를 위한 이 사업을 앞으로도 적극 추진할 방침이다. 시의 이러한 노력으로 지난해 경북도가 주최하고 한국에너지공단이 주관한 ‘2019년 경상북도 에너지효율대상’ 공공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해 상사업비 5천만원을 받기도 했다.김충섭 김천시장은 “지난해는 민선7기 시정 첫 번째 목표인 일자리· 경제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룬 해로 이는 시민 모두가 시정 운영에 적극 협조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2020년은 지역경제 분야 예산이 전년대비 135% 증액 편성되는 등 관련 분야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한해가 될 것”이라며 “철저하고 적극적인 시책 추진을 통해 상권이 살아나고 지역이 살아나는 활력 넘치는 경제 도시로 성장하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김천/나채복기자 ncb7737@kbmaeil.com

2020-01-22

“인생길 내리막 고비서 영지버섯이 날 살렸죠”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젊은 법학도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낯선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는 법조인이 아닌 사업가가 됐다. 30~40대엔 탄탄한 중소기업을 이끌며 거칠 것 없는 삶을 살았다. 부르면 언제든 달려올 친구도 많았다.그러나 세상 모든 인간들에겐 부침(浮沈)이 있는 법. 쉰 살 무렵. 그는 사람과 돈을 한꺼번에 잃었다. 하강하는 롤러코스터처럼 사업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때 떠올린 것이 ‘고향’과 ‘귀농’이란 단어.칠곡군 기산면에서 엄지영지버섯을 운영하는 오순기(56) 대표는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법관을 꿈꾸던 20대 청년에서, 잘 나가던 건축·설비업자,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영지버섯과 함께 새로운 꿈을 키워가고 있는 사람.지난 주말. 귀농을 통해 또 다른 성공을 이뤄낸 오순기 대표를 만나 그가 헤쳐 온 풍파와 세파에 관해 들었다. 아래 흥미로웠던 그 이야기들을 정리한다.-먼저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64년 칠곡에서 태어났다. 현재 영지버섯 재배와 관련 제품 생산을 7년째 하고 있다. 영지버섯은 잘 키우는 것 이상으로 판로 개척과 유통망 확보 등이 중요하다. 영지버섯의 효능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최근의 트렌드를 잘 반영해내지 못해 다른 건강식품에 비해 조금 밀리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청년시절엔 사법시험을 준비했다고 들었다. 지금 모습과는 전혀 다른 꿈을 꾼 것인데.△내 또래들이 진학할 땐 남학생들이라면 대부분 법대나 상경대, 정치외교학과 등을 지망했다. 시골은 특히 그랬다. 법대에 가면 다양한 진로가 있으리라 보고 선택하게 됐다. 경북대 법대에서 공부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나도 3학년 때쯤 사법시험 준비를 했다. 한 3~4년 공부를 해보면서 깨달았다. 사법시험은 나와는 맞지 않았다. 난 하루에 14~15시간씩 집중해 공부만 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가 못 된다.(웃음)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 빨리 접었다.-그럼 이후엔 어떤 일을 한 것인가.△군대를 다녀온 후 졸업을 하고 친척 형님과 건축·설비업을 시작했다. 저온 창고와 관련 시설을 만들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가 ‘콜드 체인 시스템’이 한국에 정착된 시기다. 요즘엔 백화점이나 마트의 식품을 대부분 냉장 보관한다. 당시는 그런 체계가 아직 없었다. 농협이 운영하는 연쇄점이 현대화되면서 우리 사업과 연결이 됐다. 귀농해 영지버섯 재배를 시작할 때까지 그 일을 계속했으니 제법 오래 했다.-사업은 잘 됐는지.△경제적으로 나쁘지 않았고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다른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려고 무리하게 투자를 하다가 돈도 잃고 사람도 잃었다.-귀농을 결심한 이유나 계기는 뭔가.△진행하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2013년쯤 귀농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이미 나이가 오십에 가까운 시점이라, 다시 뭔가를 시작할 것 같으면 먼 미래를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에 만난 ‘효자’가 영지버섯이다.-귀농지로 칠곡을 선택한 이유와 초창기 어려웠던 점은.△칠곡이 고향이다. 아는 사람도 많고, 대도시와 가까워 입지도 괜찮았다. 문제는 귀농하던 때 금전적으로 너무 어려웠다는 것이다. 사업 자금이 별로 없었다. 또 키울 작물의 선택이나 재배 노하우 등을 조언·교육받는 게 쉽지 않았다. 요즘 같은 체계적인 귀농·귀촌 프로그램이 없던 시기였으니까.나이 든 사람보다는 청년들에게 귀농을 권하고 싶다.젊은 사람이 농촌과 조화롭게 매치된다면 국가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겠는가.농촌 창업 프로그램과 소상공인 창업 프로그램 등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도시보다 풍요로운 삶을 농촌에서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처음부터 영지버섯을 키우겠다는 결심을 하고 귀농한 것인지.△버섯을 재배하겠다는 마음은 있었다. 내가 사업을 했던 분야와 연관시켜 봐도 단순 원예나 전통 작물보다는 시설 재배의 경제적 전망과 미래가 밝을 듯했다. 그때부터 어떤 버섯을 키울 것인가를 고민하며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표고버섯, 상황버섯, 영지버섯 등을 놓고 적합성과 합리성을 검토했다. 표고버섯은 제시간에 수확하지 않으면 상품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약점으로 느껴졌다. 또 다른 약용 버섯은 시설 관리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투자해야 했다. 영지버섯을 선택한 건 수확 시기가 비교적 자유롭고, 관리 비용이 적절하며, 수익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영지는 실온 재배에 통상 3년 기준 4회 가량 수확이 가능하다. 결정한 이후엔 영지버섯 재배에 최적화된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했다.-영지버섯 재배만이 아니라 가공과 유통에도 뛰어들었는데.△영지버섯 농가는 전국에 70여 개쯤 된다. 전체 생산량은 20t 정도다. 비싼 버섯이다. 건조한 버섯의 경우 1kg에 5만~6만 원이다. 그럼에도 면역력 향상과 혈행 개선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판매는 잘 되는 편이다. 영지의 약효는 ‘동의보감’ 등의 의서에도 잘 나타나 있으니까. 특히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영지버섯을 매우 신뢰한다.영지버섯은 99%가 재배되는 것이다. 시장에서 유통되는 자연산은 거의 없다. 중국산 영지는 생산량도 많고 가격도 싸지만,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시장에선 깨끗한 지하수를 이용해 키우기에 오염 가능성이 없는 한국 영지버섯을 최고로 쳐준다.-해외 진출까지는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인가.△칠곡군에 중장년층을 위한 창업지원 프로그램이 있다. 그걸 통해 베트남 호치민에 가게 됐고, 거기서 한국식품 도매상을 크게 운영하는 분을 만나 베트남 진출을 도모할 수 있었다. 칠곡군의 도움이 적지 않았고, 개인적인 노력도 기울였다.홍삼을 수출하는 방식으로 영지버섯도 베트남에서 유통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 현지 반응은 아주 좋은 편이다.-서울 등 대도시에서 영지 가공제품이 잘 팔린다고 들었다.△영지버섯과 현미를 가공해 만든 ‘누룽다욧’이 인기다. 영지버섯이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을 떨어뜨려 다이어트에 효과를 보인다는 농촌진흥청 연구 결과를 접한 후 아이디어를 냈다. 영지와 곡물을 이용해 먹기 편하게 만든 제품이다. 출시한지 3년 됐는데 지금까지 4만~5만 상자 정도 판매했다.-요즘 법조인 친구들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이젠 그 친구들이 날 부러워한다.(웃음) 우리 세대쯤이면 다들 퇴직을 앞둔 나이 아닌가. 그런데 난 앞으로도 할 일이 많고, 새롭게 시작할 사업 아이템도 무궁무진하다. 내가 귀농을 후회하지 않는 이유다.-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할 게 있다면.△나이 든 사람보다는 청년들에게 귀농을 권하고 싶다. 젊은 사람이 농촌과 조화롭게 매치된다면 국가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정부 지원 프로그램도 많은 부분 청년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농촌 창업 프로그램과 소상공인 창업 프로그램 등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도시보다 풍요로운 삶을 농촌에서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현재 개발 중인 영지버섯 가공품이 있는지.△영지버섯과 꿀의 혼합물을 동결 건조한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꿀 자체만으로는 수출하기가 쉽지 않다. 관련 규제도 많다. 하지만 영지와 결합시켜 분말 형태로 만든다면 포장도 쉽고, 무게도 가볍게 할 수 있다. 수출 역시 용이해진다. 더불어 영지버섯만이 아닌 다른 약용 식품과도 결합이 가능하다. 분말식품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도 소비자에게 저항감이 별로 없다. ‘영지·꿀가루’는 상품화 과정을 거쳐 곧 시장에 선보일 계획이다.더불어 영지버섯과 토종닭을 함께 이용한 삼계탕도 내놓을 예정이다. 인삼이나 녹두, 능이버섯이 아닌 영지가 들어간 삼계탕은 아직 보편화가 덜 됐다. 이에 착안한 것이다. 국내 판매와 ‘농가 맛집’으로의 납품, 나아가 베트남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으로의 수출도 추진하고 싶다. 영지버섯 가격은 한국보다 베트남이 2배 이상 비싸다. 그만큼 한국산 영지를 높이 평가한다. 그곳 상류층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당신이 세우고 있는 장기적 계획은 무엇인가.△지금은 ‘6차 산업(1·2·3차 산업을 복합해 부가가치를 극대화한 산업) 시대’다. 이제 농촌도 용·복합산업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 단순히 농사짓는 것만으론 ‘농가소득 5천만 원 시대’에 안착하기 어렵다. 가공도 하고, 유통도 하고, 수출도 해야 한다. 그래야 시너지 효과가 생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도 단순한 금전 보조가 아닌 6차 산업의 토대를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엔 그렇게 바뀌고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가속도가 붙었으면 하는 바람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22

책과 노니는 설… 사색의 시간 가져보자

이사하면서 방 하나를 서재로 바꿨다. 벽은 모두 붙박이 책장으로 둘러 책으로 채웠다. 책을 꽂았다. 그러고도 그동안 사들인 책들이 책꽂이를 넘쳐흘렀다. 이삿짐 싸며 버려야 할 것은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욕심을 덜 내려놓았던 모양이다. 경자년(庚子年) 설 연휴에 누군가에게 소개할만한가 생각해보고 아니면 과감히 노끈으로 결박해서 추운 현관 밖으로 내쫓았다. 책꽂이에 살아남아서 당당히 자리를 지킨 책 몇 권을 여기 소개한다.1 △책과 노니는 집 / 이영서소설 ‘책과 노니는 집’에 주인공 장이는 서유당 주인인 홍 교리에게 “책꽂이에 책을 다 읽었나요?”라 묻는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지인들과 같은 질문이었다. 어린애 다루듯 책을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다시 읽은 책도 있고, 읽다가 재미없고 어려워서 그냥 접어 둔 책도 있느니라. 내용보다는 꾸밈과 제목에 반해 사들인 책도 있고…. 어쨌건 다 읽지는 못했다.” 홍 교리의 생각이 나와 같은 마음이라 밑줄을 짙게 그었다.“훌륭한 선비님들은 ‘논어’나 ‘맹자’가 재미납니까? 전 들여다보면 잠만 오고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그 책이 가장 많이 나갑니다.” 장이의 말에 홍 교리는 자신은 훌륭한 선비가 아니라 그런지 그런 책은 어렵고 재미없다 하면서 다만 곱씹고 새겨들을 말은 있다했다. 그리고 어렵더라도 반복해서 읽고 살면서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이게 그런 뜻이었구나 하며 무릎을 치는 날이 올 것이라며 웃었다. 그때는 어려운 책의 ‘깊고 단백한 맛’을 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2 △담론 / 신영복책의 부제가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이다. 서문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은 신영복은 책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강의를 녹음해서 낸 강의록이 대부분이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옥중에서 편지를 썼더니 그게 책이 되고, 또 여행기를 연재했더니 또 묶어서 출판되었다. 워낙 내용이 좋고 깊으니 너도나도 책으로 내고 싶었던 것이다.담론, 이야기를 논하다. ‘논어’는 공자의 이야기를 제자들이 받아 적은 거라는데 신영복의 말을 받아서 적으면 글이 되니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용은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김수영의 ‘풀’은 ‘논어’의 안연편 ‘초상지풍필언’에서 따와서 쓴 것이라 한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예이츠의 시를, 엘리엇의 ‘사월은 잔인한 달’도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착상했다고 신영복 선생이 책에서 이야기했다. 아인슈타인도 갈릴레이와 뉴턴의 어깨위에 서있다고 하니 고전에 모두 빚지고 있다. 그래서 모두 고전, 고전 하는가 보다.중국은 시 300편을 암송해야 초등학교 졸업을 한다고 한다. 어릴 적 외운 시나 노랫말은 나이가 들어도 기억나는데 우리나라 초등학생도 이런 시 수업을 받고 자랐으면 한다. 집이 초등학교 옆이라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다 보인다. 저 목소리로 시를 암송하면 진풍경일 테다. 신영복 선생님도 그리던 그림이 아닐까.3 △그해 가을 / 권정생 원작, 김재홍 그림그림책 표지를 어떻게 이런 시점으로 그렸을까. 바람에 날아 온 나뭇가지와 은행잎 사이로 소년이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표정이 연못에 비친 모습이다. 권정생 선생의 원작을 유은실 작가가 각색하고 화가 김재홍이 그림을 그렸다. 권정생이 젊은 시절 예배당 문간방에 살 때 그 곳을 들른 16살 소년 창섭이와의 사연을 그린 그림책이다.가슴 시리게 하는 동화를 써서 우리에게 주고 가신 권정생 선생 옆에서 지적장애를 가진 주인공 창섭이가 자신을 상대해주길 기다린다. 늘 배가 고팠던 선생과 창섭이는 하늘에서 감자가 내리는 상상을 한다. 영화 동막골처럼. 김재홍님의 하늘 그림은 예술이다. 구름을 이분만큼 잘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의 그림책 속에는 숨은 그림이 있어서 가까이보지 말고 조금 거리를 두고 보는 게 좋다. 외국 속담에 그림과 전쟁은 거리를 두고 보는 게 좋다고 했다. 먼 산을 가만히 보다보면 산이 성경으로 변한다. 성경으로 난 산길에 창섭이가 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창섭이는 가난하고 어둔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 온 천사가 아니었을까.이 소년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그림을 본 순간 ‘하….’하고 한참 가슴이 먹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다음 순간 바로 책을 주문했다. 그림책이 곧 갤러리다. 소장할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4 △총·균·쇠 / 재레드 다이아몬드1972년, 뉴기니 섬에서 흑인 정치가 얄리가 이 책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에게 유럽인들이(백인들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물은 것에 대한 답으로서 쓴 책. 결국 그 이유는 유럽인이 다른 대륙의 인간들이 가지지 못했던 총, 균, 쇠(칼, 창, 활, 갑옷 등) 이 3가지를 먼저 가짐으로서 신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요약되는데 그 원인을 더 깊이 파고들어 요약하면 유럽인들이 유라시아 대륙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700쪽이 넘는 책은 두께가 있어 들고 다니기에는 불편하지만 갖고 있는 것만으로 뭔가 있어 보이는 책이다. 인류 문명의 수수께끼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한글의 우수함을 논하기도 해서 더 반가운 책이다. 김소월의 산유화가 네모반듯한 글씨로 인쇄되어 있어 세계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한글에 대해 읽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해진다. 부록으로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통해 일본 야요이 문화가 한국인에 의해 촉발되었음을 밝혀냈다. 얼마 전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에 강연자로 나와 책에 못 다한 이야기도 들려주었으니 찾아보고 읽으면 두꺼운 책이 더 쉽게 읽혀질 것이다.5 △사슴공원에서 / 고영민 시집포항에서 활동하는 시인 고영민의 세 번째 책이다. 시집은 한 권에서 두세 편의 시만 건져도 성공이라는데 그의 시는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알감자 엮이듯 달려 나올 만큼 회자되고 있으니 믿고 보는 시인이다. 다섯 권의 시집을 엮었지만 하필 세 번째 것을 선택한 이유는 발문 때문이다. 책을 세상에 내 놓아본 사람은 안다. 내 책에 발문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오래오래 고민한다는 것을.‘사슴공원에서’ 발문은 그의 동료시인 윤성학이 써 주었다. 시만 읽어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시인의 젊은 시절의 방황(발, 쾅 반도 유혈사태)과 무규칙 이종격투 시 창작 배틀 관전기 같은 그가 소설을 쓰다 시인이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섬세하게 밝혀 놓았다.“눈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 하늘보다 더 먼 곳에서 온다 / 빈 그네만이 걸려 있는 / 고향에서 온다.” 이 시를 메일로 윤성학에게 보내자 옛 선비들이 시 한 수 써서 보내면 시로 화답하듯, 매일 시를 써서 보내기를 7년가량 지속했다. 한 해 300여 편의 시를 썼다니 두 시인 모두 서로에게 큰 힘이 된 게 분명하다. 2002년 그렇게 등단을 했고 우리에게 좋은 시를 먹여주는 든든한 시인이 되었다.그의 시 ‘저녁 밥상을 물린 뒤’를 읽으면 우리네 안방에 시인이 와 앉은 것 같고, ‘호미’를 읽으면서는 그의 몸에 매놓은 눈물 많은 소의 등을 쓰다듬고 싶어진다. 고영민의 시가 내게로 성큼 걸어 왔다./김순희(수필가)

2020-01-22

“지역경제 살릴 신재생에너지 융복합단지 유치 적극 추진”

이희진 영덕군수는 “올해는 완벽한 태풍피해 복구를 위해 사업예산을 우선 배정해 안전한 영덕을 만드는데 매진하겠다”고 군정운영방향을 밝혔다.또 “민선 6기 소통의 성과를 민선 7기 참여민주주의로 계승해 민관협치가 잘 이뤄지도록 하겠다”며 “늘 군민의 소리를 경청하며, 현장중심의 소통행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군정을 이끌어 가겠다.”고 말했다. 이 군수의 2020년 영덕군정방향을 들어본다.-지난 한 해 동안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은.△처음으로 시행한 주민자치예산제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소통을 넘어 군민의 의견이 군정에 반영되는 절차를 제도화했다. 예산교육, 사업제안 신청과 접수, 심의, 토론회 등을 거쳐 군민이 직접 제안한 사업들이 새해 예산에 반영됐다. 군민들이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했다. 올해는 이 제도가 잘 정착되도록 노력하겠다.-요즘 들어 도시재생이 화두인 것 같다. 도시시재생과 관련해 ‘영해장터거리 역사문화공간’ 조성사업이 추진된다고 들었다. 사업이 선정될 수 있었던 배경은.△‘영덕의 역사가 흙 속에 묻혀있는 진주와 같다’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영해장터거리는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 기존의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선정된 지역의 건물들은 적산가옥, 즉 일본의 건축양식을 따랐지만 영덕은 조선 고유의 양식을 간직한 곳이다. 주민들의 역사의식도 남달랐다. 문화재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건물 소유자의 동의가 필수다. 현재 장터거리의 건물 10곳이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됐다. 주민들은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사업에 동참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9개의 역사문화도시가 결국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이런 역사의식은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영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농민혁명이 일어났고, 신돌석 평민의병장이 활약했던 곳이다. 경북 최대의 항일시위였던 영해3·18독립만세운동이 바로 영해장터거리에서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후예들은 매년 독립만세문화제를 개최하며 선대의 숭고한 뜻과 희생을 기려왔다. 지난해 3월 심혈을 기울여 개최한 100주년 기념 문화제는 영덕군민의 역사의식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런 사유로 사업에 선정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도시재생사업은 2016년부터 공을 들여왔다고 들었다. 향후 어떻게 진행되나?△2024년까지 5년간 총 450억의 예산을 들여 문화재 보수정비, 전신주 지중화, 역사경관개선, 3.18만세운동 활성화사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새해에는 기초학술조사연구와 건축물기록화사업을 추진해 지속적인 보존기반을 구축할 것이다. 문화재 보존·관리 및 활용에 대한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부지매입 등 사업기반을 조성해 가겠다. 세부사업과 구체적 지원규모가 확정되면 문화재청의 최종 승인을 받아 연도별 투자계획에 따른 보존활용기반 조성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3.18 의거탑을 중심으로 곳곳에 산재한 근대문화유산과 신돌석 장군 유적지, 영해괴시마을, 김도현 선생 도해단 등과 유기적으로 연계해 호국문화 관광벨트를 구축하고 전국 최고의 역사문화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이다.-‘맑은공기특별시’를 선포했다. ‘특별시’라고 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올해 시무식에서 선포식을 열었다. ‘맑은공기특별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에코힐링도시로 본격 도약하려는 영덕의 가치이며, 미래 비전이다. 지역의 가장 큰 자원이며, 가치 있는 미래유산인 영덕의 자연환경을 보전·발전시켜 지역민 삶의 질을 높이고, 국내는 물론 세계인이 찾는 에코힐링도시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영덕군은 지난해 말 (사)한국환경정보연구센터에서 주관한 제8회 친환경도시대상 에코시티 심사에서 맑은공기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영덕의 좋은 공기질을 인정받은 것이다. 요즘 ‘삼한사미’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로 미세먼지 문제가 전국적으로 심각하다. 2006년부터 로하스 인증을 받은 영덕은 미세먼지 농도가 나쁜 날이 매우 드물다. 2019년 12월 기준 한국환경공단 측정자료를 보면 미세먼지(PM-10)가 나쁜 날(81㎍/㎥이상)이 1일, 초미세먼지(PM-2.5)가 나쁜 날(36㎍/㎥이상)이 1일이었다. 보존이 잘된 자연환경이 가장 큰 비결이다. 영덕은 산림지역이 80%를 차지해 산소공급이 많다. 특산물인 송이 생산량 향상을 위해 1980년부터 벌여 온 숲가꾸기 사업도 공기질 개선에 기여했고, 지역 산업 중 비중이 큰 관광서비스업도 영향을 미쳤다. 작년부터 도로먼지 전용 청소차량을 구입해 운영하는 등 미세먼지 저감사업도 추진하고 있다.-‘맑은공기특별시’를 선포하면 이전과 비교했을 때, 어떤 것들이 달라지나?△우선 도시 이미지가 바뀌게 된다. 미세먼지 저감과 자연환경 보존 등 공기질을 더욱 높이는 데 자원을 집중하게 된다. 2022년까지 약 100억원을 투자해 노후 경유차 조기폐차 지원, 매연저감장치와 엔진교체 지원, 어린이 통학차량 LPG전환, 전기자동차 구입 지원, 미세먼지 측정소 확대, 배출사업장 방지시설 지원, 취약계층 마스크 지원, 민간환경감시원 건설공사장 점검 등 8개의 미세먼지 대응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숲가꾸기사업 등을 확대해 자연보존에도 힘쓸 것이다.미세먼지를 전국평균 대기오염도 대비 20% 미만으로 유지하는 게 목표다. 2016년 기준으로 영덕군에선 미세먼지(PM-10)가 연간 311t, 초미세먼지(PM-2.5)가 연간 135t이 발생했다. 총발생량의 30%를 저감하는 것이 구체적인 목표다. 앞서 밝힌 8개 사업 외에 5등급 경유차 운행제한시스템을 운영하고 미세먼지 전광판 활용 주민대응, 미세먼지 오염도와 재난관리시스템 연계 대응, 비상저감조치 시 읍면사무소 방문인 마스크 배포 등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올해 군정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추진할 계획인가?△주민과 함께 하는 더 가치 있는 주민자치시대를 실현하고 ‘에코힐링 블루시티 영덕’을 구현하겠다. 영덕이 가진 역사, 문화, 해양자원을 관광콘텐츠로 개발하고 민간투자를 적극 유치해 2천만 관광시대를 열어가겠다. 농산어촌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농산물 유통과 수출, 6차산업화, 어촌뉴딜300사업과 수산자원 보존정책을 적극 추진해 경쟁력을 갖춘 농산어촌을 만들겠다. 현재 3개 권역 발전계획 실행방안을 마련해 두고 있다. 균형개발을 촉진하며 에코힐링도시 영덕을 만들 것이다. 사회복지 및 보건서비스를 확대해 소외 없는 복지영덕을 만들고 신재생에너지 융복합단지 지정을 정부에 지속적으로 건의하고 해양자원을 활용한 미래신산업 육성에 매진하겠다.-재작년에는 ‘콩레이’, 작년에는 ‘미탁’으로 2년 연속 태풍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봤다. 자연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대책도 추진돼야 할 것 같다.△지난해 태풍 미탁으로 피해가 대단히 컸다. 피해규모는 298억 원 정도였고 1천754억 원의 복구비를 확보했다. 응급복구를 조기에 완료했고 원상복구사업은 올해 우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완료할 계획이다. 다만, 근본적인 위험요소를 제거해 피해재발을 막는 배수펌프장, 화전천에서 삼사리 해안까지의 배수터널 등 개선복구사업이 중요한데 대규모 사업들이라 다소 시간이 걸린다. 이와 함께 배수펌프장, 우수저류시설 등 재해예방시설을 강화하고 침수방지 톤백마대 비치, 월류방지 옹벽설치, 하천준설 및 퇴적물 제거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형양수기 확대 설치, 가정용 차수판 설치 등 침수예방 설비도 보강하고 있다. 2018년부터 풍수해보험 가입홍보를 집중 했다. 지난해 소상공인 가입률 전국 1위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태풍안전지대가 아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 안전한 영덕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2천만 관광시대의 기반은 광역교통망과 지역교통망 아니겠는가?△2016년 상주~영덕 고속도로와 동해중부선 철도 개통으로 1천만 관광시대를 열었다. 영덕군이 2천만 관광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교통망 확충이 완비돼야 한다. 2023년에는 포항~영덕 고속도로와 2022년 영덕~삼척 철도(전철화)가 개통된다. 이에 따른 지역 교통망도 확충하겠다.-신재생에너지 융복합 단지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말이 갖는 의미와 함께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밝혀 달라.△풍력과 수소산업 등 돈이 되는 신재생에너지사업은 도시보다 농어촌이 유리하다. 우리에게 유리한 것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특별히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했고, 탈원전 대안에 따른 정부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책임선상에서 탈원전이 갖는 의미로 정부는 반드시 영덕에 신재생에너지융복합단지를 확정해 줘야한다. 이것은 책임의 문제이다. 신재생에너지융복합사업은 지역의 구조적 문제에 대응할 수 있고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영덕군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다. 지난해 에너지신재생융복합단지 지정을 신청했으나 선정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미흡했던 부분을 꼼꼼히 점검하고 보완해 다시 도전할 계획이다.작년 준공된 영덕 제2농공단지와 원전 예정 부지를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기반시설 건립, 에너지공급시설, 에너지 특화기업 등을 유치해 신재생에너지산업 혁신단지로 조성하는 등 경북도와 힘을 모아 에너지산업 융복합단지로 지정되도록 하겠다./박윤식기자 newsyd@kbmaeil.com

2020-01-22

간편하고 여유로운게 좋아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지난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다. 해가 바뀌는 그 시점을 기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설날’을 가장 큰 명절 중 하나로 여겨왔다. 설날이 되면 각지에 흩어져 있던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설빔을 입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떡국 역시 빠질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은 잘 찾아볼 수 없지만, 연날리기·윷놀이·널뛰기 등의 놀이문화도 설날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가족끼리 새로운 해를 맞이하고 덕담을 나눈다’란 본질 자체는 설이 생긴 처음부터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겠지만,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처럼 설날을 맞이하는 풍경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달라져 왔다. 설날이라는 명칭만 하더라도 지금은 익숙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사라졌다가 1989년 노태우 정부에 접어들어서야 제 이름을 찾았다. 기술의 발전만큼 세대 간의 인식 변화가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요즘, 달라진 설 문화에 대해 짚어본다.인터넷·전화 차례상 주문 서비스 인기주부들 괴롭히는 ‘명절증후군’은 그만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떡국이다. 예전에는 떡국에 쓰일 가래떡을 집에서 직접 만들어 뽑아냈었다고도 하지만, 지금은 상품으로 사서 끓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요즘은 가래떡뿐 아니라 떡국 자체를 직접 끓이지 않고 조리된 것을 사 먹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는 비단 설만이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차례상 역시 점점 간소화되거나 없어지는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해 차례상을 주문하는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유통업체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간편식 제수용품’의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고된 명절 노동을 대신해 ‘모두가 즐거운’ 명절을 보내자는 마음가짐이 점차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것으로, 해당 분위기를 받아들이는 기성세대도 늘고 있다.주부 손모(41)씨는 “몇 년 전 시부모님께서 먼저 차례상을 없애고 명절을 간소하게 보내자고 제안하신 뒤로 큰 스트레스 없이 명절을 맞이하고 있다”면서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니 명절이 참 다르게 느껴진다”고 전했다.부모님은 미리 찾아뵙고 연휴엔 꿀휴식‘재충전 기회’ 해외여행객도 해마다 늘어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 주부 고모(35)씨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올해는 설 명절을 맞아 친정에 혼자 내려오게 됐다”며 “명절을 앞두고 며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낸 뒤 설 연휴에는 다시 본가로 들어갈 예정이다”고 올해 일정을 밝혔다.구미에 사는 박모(39)씨도 “직장 특성상 연휴 기간 계속 업무를 봐야 한다”면서 “평소 명절 연휴에는 아내와 아이들만 친정에 보내고 양가 부모님은 나중에 시간을 내 따로 인사를 드린다. 굳이 명절 당일날 찾아뵙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민족의 대이동’이 남의 이야기인 가정들도 많다. 바쁘고 팍팍하게 돌아가는 세상 탓에 설날에도 업무를 놓지 못하는 인구가 늘고 있고, 나름의 사정으로 설날 당일에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학생이나 청년들이 입시 및 구직활동 등의 이유로 설날 가족과 동떨어진 채 자기만의 일정을 보내는 것 역시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설날 당일 부모·자식을 찾지 않는 다른 이유도 있다. 명절을 자신 혹은 가족과의 시간으로 보내고자 외국을 찾는 인원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해마다 증가하고 있기 때문인데, 올해 역시 설 연휴기간 인천공항을 이용하는 여객이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영화 보거나 외식 즐기는 가족 늘어“편리한게 최고” 선물 택배 전달 선호설 명절 온 가족이 함께 모이더라도 예전과 같이 연을 날리거나 윷놀이를 하는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대신 온 가족이 영화를 보러 가거나 외식을 하러 나가는 경우가 늘고 있다.특히, 아이들은 또래끼리 모여 스마트폰을 이용하거나 PC방을 찾아 게임을 즐기는 것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발달한 기술 역시 설날 풍경을 바꾸고 있다. “편리하면 편리할수록 좋은 거 같다”는 인식이 명절을 거치며 확연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세뱃돈이나 용돈 등을 모바일을 통해 송금하는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고, 귀성길 열차표 예매나 실시간 교통정보 등의 서비스를 모바일 앱을 통해 이용하는 사례도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 있다.두 손 가득 설 선물을 들고가던 모습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불편하게 직접 사들고 옮겨가며 전달하기보다 인터넷 주문을 통해 바로 배달지로 보내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관련해 한 시민은 “요즘은 무엇이든 편리한 게 최고인 것 같다. 마음만 잘 전달된다면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경북도내 전통놀이 체험 다양하게 준비관광지·유적지 등 무료입장 서비스도명절을 맞아 먹거리와 볼거리를 찾는 가족단위 여행객이 늘어나며 이들을 붙잡아두기 위한 지자체들의 홍보전이 치열하다. 경북도 역시 설 연휴 귀성객과 관광객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연휴가 시작되는 24일부터 27일까지 포항시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내 신라마을에서는 전통 민속놀이 체험과 양말목 직조체험을 할 수 있고, 영주시 선비촌 일원에서는 민속놀이 등 선비촌 세시행사가 진행된다. 의성군 조문국박물관에서는 전통놀이체험, 무료영화 상영 및 SNS 인증 이벤트가 실시되며 의성컬링센터에서는 무료 컬링체험을 해볼 수 있다.설 다음날인 26일 경주 황리단길 일원에서는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경주국악여행을 주제로 국악버스킹이 펼쳐질 예정이다. 청도군에서는 청도박물관 설맞이 한마당 행사와 한국코미디타운 플리 마켓이 열린다. 연휴기간 중 도내 방문객에게는 다양한 무료입장과 할인혜택도 주어진다. 경주 대릉원, 동궁과 월지, 김유신 장군묘, 포석정 등에서는 설 연휴 내내 한복을 착용한 방문객에게 무료입장 혜택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도산서원·봉정사, 영주 소수서원·소수박물관·선비촌, 고령 대가야박물관에서는 설날 당일 무료입장이 가능하다.이밖에 자세한 관광 프로그램 일정은 경북나드리 홈페이지(tour.gb.go.kr) 또는 SNS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상철 경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은 “설 명절, 지역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이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며 “2020년은 대구경북 관광의 해로서 보다 친절하고 다채로운 관광프로그램으로 관광객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20-01-22

간절한 마음, 간절한 기도와 함께 먼 길을 가다

블라디보스토크 행 페리를 타기 이틀 전 아침, 소파에 앉아 가족사진을 찍었다. 매번 긴 여행을 떠날 때마다 이렇게 사진을 찍었다. 몇 개월 동안 보지 못할 테니 사진 한 장쯤 남겨두는 편이 좋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평소처럼 아내와 아이들은 집을 나섰고, 홀로 남아 집안 정리를 끝내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짐을 싣고 로시(오토바이 애칭)의 시동을 걸었다. 드디어 출발…◇무사귀환 고사 지내고 동해로블라디보스토크 행 페리를 타기 이틀 전 아침, 소파에 앉아 가족사진을 찍었다. 매번 긴 여행을 떠날 때마다 이렇게 사진을 찍었다. 2013년 7개월 동안 배낭여행을 떠날 때도 2015년 오토바이를 타고 일본 책방 여행을 떠날 때도 그랬다. 불안감 같은 것은 없었지만 먼 길을 떠나기 전 기록을 남겨야한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몇 개월 동안 보지 못할 테니 사진 한 장쯤 남겨두는 편이 좋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평소처럼 아내와 아이들은 집을 나섰고, 홀로 남아 집안 정리를 끝내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짐을 싣고 로시(오토바이 애칭)의 시동을 걸었다. 드디어 출발이었다. 하지만 바로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엔진은 힘있게 돌았지만 충전잭이 작동하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충전하지 못하면 길을 찾을 수도, 숙소를 예약할 수도,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을 수도 없으니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해결해야 했다. 며칠 전 필요 없는 선들을 정리하며 충전잭 커넥터를 연결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결국 공구를 빌려 쓸 수 있는 회사(수머신테크)에 가서 다시 카울을 벗기고 빠진 곳을 찾아 연결하고서야 문제를 해결했다. 오토바이 여행에선 아주 사소한 문제가 이렇게 발목을 잡고 시간을 뺏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리 사전 준비를 꼼꼼하게 해도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터지고 몸도 마음도 지칠 때가 있다. 이럴 땐 조바심 내지 않고 느긋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걸림돌이 정확하게 무언지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을지 바라볼 필요가 있다. 괜히 서두르다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오히려 복잡하게 꼬일 수가 있으니까.충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수 씨 회사에 갔더니 앞마당에 ‘무사귀환 고사상’이 차려져 있었다. 오랜 지기의 배려였다. 여행을 준비하며 오토바이를 정비하면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떠나는 날까지 이렇게 깜짝 선물을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여행을 준비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더 멀리 더 많이 보고 오는 것이 도움을 주신 분들이 내준 숙제라 생각했다. 막걸리 한 잔 부어놓고 절을 하며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나도 로시도 잘 버티게 해달라고 빌었다.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이렇게 여행기를 쓸 수 있게된 것도 어쩌면 고사상 앞에서 엎드려 기원한 간절함의 결과가 아닐까. ‘신을 믿지 않지만’ 세상일은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계산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 여행하며 필연 같은 우연을 만날 때면 그런 생각이 흔들릴 때도 있다. 어쨌거나 신의 존재한다는 사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나로선 증명할 수 없지만 간절함이 긍정의 인과(因果)와 연결되어 있다는 건 굳게 믿는다. (신을 향한 것이 아닐지라도) 간절한 기도만큼 인간의 의지를 강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어딨으랴.다시 시동을 걸고 강원도 양양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양양에 사는 아우 성진네였다. 하룻밤 묵고 강릉에서 형주 씨와 그의 친구인 정운 씨를 만나 추암해수욕장까지 함께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파주 쉼표게스트하우스를 운영 중인 형주 씨는 함께 성수공고에서 진행했던 오토바이 정비 과정을 함께 듣기도 했고 그 인연으로 게스트하우스에서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에 대한 강연도 했었다.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파주에서 강릉까지 배웅하러 온 것이다.언젠가 유라시아 횡단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형주 씨도 가지고 있었고 먼저 떠나는 나를 응원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 형주 씨와 헤어지고 추암해수욕장 근처 한적한 공원 구석에 자리 잡고 모든 짐을 내려서 다시 쌌다. 자주 쓰이는 물건은 꺼내기 편한 곳으로. 자주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사이드박스에 나눠 넣었다. 지갑에 있던 돈은 가까운 은행에 가서 모두 입금하고 남은 3천 원으로 우유와 빵을 사고 아까 봐둔 자리로 노숙하기 위해 돌아왔다. 텐트 치기도 귀찮아 해수욕장 공원 정자에 매트리스와 침낭만 깔고 잠을 청했다.◇D데이, 드디어 페리를 타다드디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날.(지난해 5월 13일) 아침 일찍 동해여객선터미널로 이동했다. 출발 시간이 되자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나는 라이더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 오토바이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라이더는 6명, 일본, 러시아 라이더까지 포함하면 모두 9명이었다.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기간은 4월 말에서 9월 초까지. 그 전이나 그 이후에는 추위가 때문에 오토바이 여행은 힘들다. 대부분 6월에서 7월까지 시베리아 날씨가 온화해질 쯤 예약이 몰린다. 일주일에 한 번 블라디보스토크 행 페리가 출발하고 오토바이는 5~10대 정도만 실을 수 있어 최소한 두 달 전에는 예약을 해야만 배를 탈 수 있다.2019년이 아니라 2018년 5월에 떠나려고 준비를 끝냈지만 예약조차 하지 못하고 포기했었다. 2018년엔 모스크바 월드컵이 열렸고 평소보다 더 많은 여행자들이 몰렸던 탓이었다. 3년 동안 준비했던 여행 계획이 예약조차 못하고 수포로 돌아가자 낙심했고 꽤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다.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오로지 떠날 생각에 부풀어 있었는데 “9월까지 예약이 불가능합니다”란 선사 담당 직원의 답변을 들었을 때 기분이란. 1년에 시베리아를 횡단하려는 오토바이 여행자는 100명 내외, 그들 사이에 내가 낄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혹시라도 빈자리가 생길까 대기자 명단에 올려달라고 했지만 결국 연락이 오지 않았다.그렇게 1년을 기다리고 동해항 세관에서 짐 검사를 끝내고 페리에 오르고서야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예약조차 하지 못했던 지난해의 불운은 끝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바로 현실이 되었다.오토바이 여행자들은 객실 요금을 더 내지 않는 이상 2층 침대가 있는 객실에서 묵는다. 객실 키를 받아 문을 여니 샤워실까지 갖추고 넓은 침대가 있는, 바다가 보이는 1등실이었다. 말로만 듣던 ‘객실 업그레이드’였다. 한 푼이라도 여행 경비를 아끼려 어제만 해도 노숙했던 가난한 여행자의 초발심은 아늑한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봄눈 녹듯 사라졌다. 어떤 불편도 감수할 수 있다는 결심이 푹신한 침대에 눕자마자 흔들렸다. 사람 마음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지. 이렇게 편한 숙소에서 지내며 여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하지만 이 편안함은 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끝날 터였다.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처지에 맞지 않는 편안함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내일 일은 내일, 모레 일은 모레 걱정하면 되니까.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함께 배에 오른 여행자들과 이야길 나누었다. 여행을 준비한 과정도 목적도 모두 달랐지만 함께 출발선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각자 유라시아 횡단을 위해 각자 수집했던 정보들을 풀어놓았다. 앞서 횡단 여행을 떠난 사람들과 뒤이어 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오토바이나 차량을 이용한 유라시아 횡단 여행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으로도 찾을 수 있지만 역시 이렇게 직접 들으니 생생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정보들도 많았다. 목적지도 관심사도 비슷하다보니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사소한 여행 팁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게 페리에서의 밤은 깊어갔다.◇시베리아 횡단의 출발선, 블라디보스토크에 서다꼬박 24시간 동안 동해를 가로지르고서야 배는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도착했다. 갑판에 서서 군함들이 정박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보며 여기에 오기까지 준비했던 지난 4년이 주마등처럼 흘렀다.아니 오토바이를 타고부터 꿈꾸었던 여행이었으니 그보다 기억을 더 과거로 돌려야 했다. 2013년 1년 동안 중국 칭다오에서 포르투갈 포르투까지 가겠다 떠났던 배낭여행에서 7개월쯤 떠돌다 싱가포르에서 돌아와야 했던 그때부터 언젠가는 다시 포르투를 향해 갈 거라 결심했었다. 머무는 곳마다 서점을 찾고 앞으로 책방지기로서 식견을 넓히겠다고 다짐했던 못다한 여행의 마지막 장을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이곳에도 봄이 왔지만 바람에선 시베리아의 찬 기운이 스며있었다. 지난 시절 떠났던 긴 여행의 출발지, 칭다오와 시모노세키에 내렸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거칠고 아득한 시베리아가 곧 내 앞에 펼쳐질 거라 생각하니 묘한 긴장감이 밀려왔다.    /조경국

2020-01-21

“군민·출향인 힘 모아 진정한 경북중심도시 도약할 것”

김학동 예천군수는 올해 사자성어로 ‘초심불망(初心不忘)’을 선정했다. 처음 가졌던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잡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의미다. 김 군수는 이 의미를 새기며 군정운영에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처음 열정과 자세로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고 밝혔다.민선 7기 반환점을 도는 올해도 군민소통과 화합을 바탕으로 지역경기 활성화와 2020예천세계곤충엑스포 성공 개최에 초점을 맞추고 역동적 군정, 변화를 희망하며 군민이 꿈꾸는 새로운 예천을 만들기 위한 정책을 촘촘히 챙겨나갈 계획이다.원도심 지역경제 활성화와 명품신도시 정주여건 조성, 농가소득 증대, 기업 투자유치 및 일자리 창출, 복지예천 실현 등 6가지 군정 역점사항도 추진하고 있는 김 군수를 만나 시정성과와 운영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쉼 없이 달려온 지난 한 해 성과를 평가한다면.△군정 각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으며, 중앙이나 경북도로부터 38개 분야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한국공공자치연구원 주관 지자체 경쟁력 평가 ‘최우수상’ 수상에 이어 국민권익위원회 청렴도 평가에서 5년 연속 2등급을 받았다. ‘청렴 도시 예천’의 명성을 대내외적으로 각인시켰던 특별한 해로 가슴이 뿌듯했다.그 외에 70억원이 투입되는 신활력플러스사업, 42억 원 예산의 새뜰마을사업 등 총 68건이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이로 인해 782억원의 재원을 확보해 지역발전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예천읍을 원도심 신경제중심지로 만들겠다고 했다. 복안은?△예천읍 남산공원과 폐철도 부지를 주민친화 공간으로 개발하겠다. 개심사지 5층석탑 역사공원 등도 조성해 쾌적한 원도심을 만들겠다. 올해 상반기에 23억원을 들여 시가지 전선지중화를 하고, 주차문제 해소 및 보행자 편의를 위한 도심 일방통행로 운영을 신중히 검토해 예천읍 원도심의 도시경쟁력을 다져나갈 계획이다.도시미관 정비를 위한 시가지 가로간판 정비와 소상공인 특례보증 및 경영안정 지원, 청년창업 지원, 상설시장 시설현대화사업 추진, 예천사랑상품권 30억원 발행, 적극적인 스포츠 마케팅 및 종합스포츠타운 조성 등으로 원도심 경기활성화는 물론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도청 신도시 개발계획이 늦어져 정주여건이 부족하다는 여론이 있다.△도청신도시 인구가 증가하는 것에 비해 정주여건이 부족하다. 올해도 교육, 문화 명품도시 조성에 최선을 다하겠다.신도시민의 정주여건 개선과 편의증진을 위해 33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복합커뮤니티센터를 건립하겠다. 오는 7월 착공할 복합커뮤니티센터는 아동, 청소년, 어른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체육·문화공간을 비롯한 호명면출장소, 지역아동센터, 체력단련실, 다함께 돌봄센터, 건강생활지원센터 등을 갖추게 된다.공동주택 단지를 연결하는 테마숲과 테니스장을 조성하고, 직장여성들이 경력단절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다함께 돌봄센터’ 5개소를 개설하겠다.-부자농촌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정책도 소개해 달라.△경북도 농정대상 평가 9년 연속 수상에 걸맞게 농업 경쟁력을 키우는 인프라 구축과 농업인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전체 예산의 20.1%인 893억원을 농업분야에 투자해 부자농촌 만들기에 집중할 계획이다.참외를 비롯한 5개 시설원예 전략품목의 현대화 사업을 확대 지원하고, 농축산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예천한우 우수성과 브랜드 가치를 높여가겠다. 참깨·들깨 등 지역전략 향토사업과 농촌자원복합화 사업, 농산물가공센터 건립 등을 통해 지역농업의 6차산업화에 속도를 내겠다. 특히, 지역 농산물 유통·판매를 위한 적극적인 마케팅을 이어가고, 70억원이 투입되는 신활력플러스 사업을 본격 추진해 특화산업인 곤충의 고부가가치 상품개발로 농가소득을 향상시켜 부자농촌, 희망농촌을 만들어 가겠다.-올해 예천세계곤충엑스포의 관전 포인트는.△5월 1일부터 17일까지 개최될 ‘2020예천세계곤충엑스포’는 효자면 곤충생태원과 예천읍 시가지 일원이 주무대로 곤충 산업화의 새 지평을 열고 지역경기 활성화에 초점을 맞춘 완성도 높은 축제가 되도록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곤충생태원 전체가 주제관으로 ‘살아있는! 곤충세상 속으로~’라는 주제에 걸맞게 관람객들이 다양한 종류의 살아있는 곤충을 직접 보고, 잡아보는 체험, 나비관찰 체험, 반딧불이 체험, 수서곤충 체험, 사슴벌레 체험 등 다양한 곤충 체험공간으로 관람객에게 곤충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학생들에게 더 없이 좋은 학습의 장이 될 것이다.예천읍 시가지 일원은 세계희귀곤충관, 곤충산업관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공연과 미디어 파사드 쇼, 거리퍼레이드, 유명 셰프들의 식용곤충 쿠킹쇼, 곤충요리 경연대회, 어린이뮤지컬, 애완곤충 경진대회, 벅스 올림픽, 드론 활용 곤충비행 퍼포먼스, 불꽃 퍼포먼스 등 흥미 있는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한다는 복안이다.이번 곤충엑스포를 통해 곤충이 식용, 약용, 사료용, 애완용 그리고 기능성 식품으로 산업화에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곤충산업 활성화에 물꼬를 터 신성장동력 산업의 중심지, 곤충축제의 중심지로 입지를 다져나갈 것이다.-권역별 테마상품 개발로 관광인프라 확충과 관광객 유치 계획은.권역별 관광테마 상품개발을 위해 크게 3개 권역으로 나눠 추진하고 있다.회룡포·삼강 권역은 삼강주막과 삼강문화단지, 회룡포, 용궁역 관광테마 사업을 연계한 체류형 관광벨트를 구축한다. 모노레일 설치와 회룡포 힐링정원 테마공원 등 관광 시너지 극대화를 위해 관광인프라를 확충할 예정이다.백두대간 권역은 백두대간 정기를 간직한 금당실 전통마을과 초간정, 국보로 승격된 대장전과 윤장대를 품고 있는 천년고찰 용문사, 명봉사, 사찰주변의 태실, 하늘자락공원 등과 둘레길을 연계해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겠다.내성천 권역은 곤충생태원을 중심으로 천문우주센터, 예천박물관, 석송령, 예천온천, 내성천 등과 연계해 체험관광 상품으로 개발할 예정이다.천하명당 금당실 전통마을을 활용한 ‘금당야행’과 백두대간 인문캠프, 위기의 삼강주막 등 체험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하고 주말 시티투어와 팸투어 등 다양한 방문객 참여형 관광상품 개발로 관광도시의 위상을 높이고 관광객 유치에 적극 나서겠다.-군민 안전과 복지예천 실현을 위한 방안은.△현장중심의 복지 실현으로 독거노인 공동거주의 집, 노인 전담 간호제, 행복한 출산을 위한 산후조리원 운영과 장애인 활동지원 등 맞춤형 복지서비스를 확대 시행하고, 보훈대상자 명예수당 범위 및 금액 증액, 보훈종합복지회관 건립 부지 매입 등 보훈 가족의 사기 앙양에 힘쓰겠다.노인인구 증가에 따른 대책으로 어르신들이 많이 이용하는 노인복지회관을 리모델링해 공간 확장과 함께 기능 보강을 해서 노인복지 정책을 늘려나가고 낙후한 지역의 생활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을 지난해 3개 면에 이어 올해도 3개 면을 추가해 기초생활 거점육성사업을 추진하겠다.군민의 안전의식 함양을 위해 마을순회 안전교육, 교통약자 친화적 대중교통 구축, CCTV 증설 등 안전한 예천을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하고 군수실의 문턱을 낮추고 다양하게 전달되는 군민의 작은 목소리에도 더욱 귀를 기울이는 활기찬 군정을 추진하겠다.예천은 경북도청 이전과 신도시 조성으로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성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고 호기를 잡아 진정한 경북 중심도시 실현을 위해 5만5천여 군민과 40만 출향인의 힘과 지혜를 결집해 힘차게 나가야겠다. 소통과 화합으로 도농이 상생하는 경북의 중심도시로 우뚝 서기 위해 ‘변해야 산다’란 신념으로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을 이어가면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소득증대를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 군정 추진을 가속화해 나가겠다./정안진기자 ajjung@kbmaeil.com

2020-01-21

영화 역린(逆鱗)의 주인공들

‘정조시해 미수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는 정유역변은 1777년 정유년에 있었던 반역 사건을 일컫는다. 홍지해(洪趾海)를 귀양 보낸 정조에게 불만을 품은 그의 아들 홍상범이 주축이 되어 정조를 시해하고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 사건이다.이 사건 역시 경상도 장기현을 비껴나갈 수는 없었다.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될 무렵 홍상범의 처 정희순(鄭喜順)이 연좌되어 장기현으로 유배를 와 관노가 되었던 것이다. 한때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누렸던 ‘역린(逆鱗)’은 자객이 왕의 거처인 경희궁 존현각에 침투했던 이 실화를 배경으로 픽션을 곁들여 만들어진 것이다.사건의 기원은 홍상범의 할아버지인 홍계희(洪啓禧)에게서 비롯된다. 홍계희 부인은 영조 때 노론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김상로의 조카였다. 때문에 홍계희는 1762년 임오화변 때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홍인한과 처삼촌인 김상로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 중 한 명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도 홍계희는 각 조의 판서 등을 두루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운 좋게도 정조가 즉위하기 5년 전인 1771년(영조 47)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까지 제수하였다.홍계희에게는 형조판서를 지낸 홍지해,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홍술해, 지제교를 지낸 홍경해, 선공감 감역을 지낸 홍염해, 진사 홍찬해 등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들 뿐 아니라 홍상간을 비롯한 손자들까지도 모두 벼슬이나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집안의 자손들은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의 노선을 따라 홍인한·정후겸 등과 더불어 정조의 즉위를 극구 반대하는 무리에 앞장섰다. 이게 집안의 화를 불러왔다.1776년, 25세의 나이에 정조가 즉위했다. 즉위하자말자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했다. 이무렵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재직 중이던 윤약연(尹若淵)이 임금의 하교에 따라 홍인한 일당의 상소들을 검토하게 되었는데, 이때 윤약연은 대역죄인으로 판정되었던 홍인한의 편을 들어 그를 충신으로 묘사해서 임금에게 보고를 올렸다. 정조는 이를 보고 진노하여 ‘대역죄인을 비호한다’는 죄목으로 절도(絶島)에 유배보내 버렸다. 이들 무리와 같이 사사건건 정조를 비방했던 홍상간도 ‘왕권에 도전했다’는 혐의로 잡혀와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홍상간의 아버지 홍지해도 아들 사건에 연관되어 국문을 받고 귀양을 갔다. 홍상간의 삼촌이자 홍지해의 동생인 홍찬해는 흑산도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뿐만 아니었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홍술해에게는 장전(臟錢 옳지 못한 짓으로 얻은 돈) 4만 냥에 대한 혐의와 조(租) 2500석, 소나무 260주를 개인적으로 빼돌린 혐의를 적용해 흑산도에 위리안치시켜버렸다. 그야말로 정조의 반대편에 섰던 남양 홍씨 일가는 풍비박산이 된 것이다.이에 홍계희의 후손들은 정조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이 일에 홍지해의 아들 홍상범이 앞장섰다. 그는 천민출신 장사꾼 전흥문(田興文)을 포섭했다. 전흥문은 궁성호위군관 강용휘를 끌어들여 20여 명의 무사들을 준비했다.1777년 7월 28일, 드디어 홍상범은 암살단을 궁중에 침투시켜 정조를 살해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궁중별감 강계창(강용휘의 조카)과 궁중 나인 강월혜(강용휘의 딸)의 길 안내로 정조가 머물고 있는 경희궁 존현각까지 별 어려움 없이 당도할 수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강용휘와 전흥문은 존현각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 잠든 정조를 살해하는 게 그들의 최종목표였다.그러나 존현각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하나씩 들어내는 순간, 때마침 독서 중이던 정조가 수상한 기척을 감지했다. 정조가 호위내관들을 불렀지만 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객들은 낌새를 채고 달아났다. 호위병들이 지붕 위에 올라가 보니 기와가 뜯겨지고 자갈·모래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숙위(宿衛 경호) 군사가 대궐 담장과 금중(禁中 궁궐) 수색에 나섰으나 어두운 밤이었고 수풀이 무성해 범인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이튿날 새벽, 정조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대신들에게 경비가 허술함을 꾸짖으면서 비상 경호 대책을 수립하게 했다. 위장(衛將)이 하룻밤에 다섯 교대로 순찰하던 옛 제도를 부활시키고 내시부에 속한 하인들 중에서 근본이 불분명한 인물들을 교체했다. 범인을 잡기 위해 엿새 동안 도성문을 닫고 수색하였으나 끝내 범인들을 잡지 못했다.정조는 존현각이 너무 노출돼 있어 경비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속명의록. 이 책은 정조 즉위초 홍상범(洪相範) 등의 역모사건을 1777년 7월부터 1778년 2월까지 순차적으로 사건의 처결사항을 상술(詳述)한 다음 정신(庭臣)들의 이에 대한 의견을 적은 것이다. 당시 정조의 즉위를 둘러싼 왕실과 외척 사이의 암투와 그 실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1777년 8월 11일 밤이었다. 정조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지 닷새가 지난 시점이었다. 수포군(守鋪軍)이 잠든 것을 확인한 한 무리가 창덕궁 서문(경추문) 북쪽 담장을 넘으려다가 마침 문을 지키던 군사 김춘득(金春得) 등에게 붙잡혔다. 특별경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대담하게 다시 대궐 담을 넘던 사람은 바로 십 수 일 전 존현각으로 침입했던 그 전흥문이었다.정조가 전흥문을 친국한 결과 그 배후가 드러났다. 바로 홍상범이 주범이었고, 그 뒤에는 흑산도에 유배가 있던 아버지 홍술해가 있었다. 홍술해의 종 최세복이 서울과 흑산도를 오가며 홍술해의 지시를 전달했던 것이다. 이들은 최세복을 배설방 고지기로 삼아 도승지 홍국영을 제거하고 정조까지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 배설방은 궁중 행사 때 여러가지 기구를 설치하는 관청으로 배설방 고지기는 궁궐 편전(便殿) 앞 차비문(差備門)까지 드나들 수 있었다. 이때 기회를 봐서 자객들이 정조를 시해하기로 작전을 짰던 것이다.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 집안의 또 다른 추가 역모사실이 함께 발각되었다. 홍상범의 어머니인 이효임(李孝任·홍술해의 부인)이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녀 점방(占房)과 그 무녀의 남편 김흥조를 끌어들여 정조와 홍국영을 대상으로 ‘저주의 굿판’을 벌였던 것이다. 이효임은 홍술해가 귀양갈 때 부적(符籍)을 베개 속에 넣어 보낼 정도로 무속을 신봉했다고 한다.효임의 의뢰를 받은 무녀는 오방(五方)의 우물물과 홍국영의 집 우물물을 구해 홍술해 집 우물물과 섞어 한 그릇으로 만든 다음, 그 물을 홍술해의 우물에 쏟았다. 홍국영의 기를 빼앗고자 함이었다. 홍국영이 대상이 된 이유는 홍국영이 정조를 목숨을 걸고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녀 점방은 붉은 안료(朱砂)로 정조와 홍국영의 화상(畵像)을 그렸다. 이들은 쑥대화살에 그 두 화상을 얽어매고 공중에 쏘면서 둘은 반드시 죽는다고 저주했다. 홍국영의 집에는 저주의 부적까지 만들어 붙였다.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들과 연관된 또 다른 사실이 발각되었던 것이다. 홍계희의 8촌에 해당하는 홍계능(洪啓能)이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과 모의하여 정조를 암살하고, 사도세자와 경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전군 이찬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다.홍상길은 예문관 청지기 이기동(李奇同)의 친족 나인인 궁비(宮婢) 이영단(李永丹)을 시켜 한밤중에 정조의 침실에 들어가 살해하려고 계획했다. 여기에는 내시 안국래(安國來)도 관련됐다. 국왕의 호위군관부터 궁중의 나인·내시까지 임금을 보호해야 하는 모든 직책의 궁인이 연루된 사건이었다.이런 홍계희 후손들의 역모사건은 한 달간 국문을 한 결과 정리가 되었다. 1777년 8월 14일, 홍상범은 광진(廣津)에서 책형(磔刑)으로 처단되었다. 책형은 시체를 저자에서 찢어 죽이는 형벌로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홍계능도 주모자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홍필해는 장형을 맞아 죽고, 유배지에서 이를 배후 조종한 홍술해·홍지해·홍찬해 형제 등은 능지처사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 홍씨 가문으로 처형된 주동자가 23명이나 된다고 한다. 은전군 이찬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미 죽고 없는 홍상범의 할아버지 홍계희도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이들의 가족과 친척들도 연좌되어 처벌을 받았는데, 이때 홍상범의 처 정희순이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장기현(長䰇縣)의 노비가 되었다.한편, 이 사건으로 희순이 장기현으로 옴으로 인해 이 가문은 2대에 걸쳐 장기현에 유배당하는 기이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아시다시피, 임오화변 때 홍문관 교리로 있던 홍지해가 화를 입고 1762년 윤 5월 14일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사실이 있었다. 홍지해는 바로 희순의 시아버지였다. 불행하게도 희순은 장기에 도착한 이튿날 자살하였다. 어제까지 양반집 젊은 규수로 있다가 극변(極邊) 연해(沿海)고을의 관노비로 전락했으니 그 충격이 어떠했겠는가. 희순은 동래 정씨이고 1748년(甲戌)생이라고 한다. 장기에 유배올 당시 그녀의 나이는 29세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좌의정 정존겸(鄭存謙)의 친딸이라는 것이다. 정존겸은 1776년(정조 즉위년) 시파(時派)로서 우의정에 발탁되었고, 사건 당시에는 좌의정으로 있었다. 아버지가 현직 좌의정이었지만 딸이 역적의 연좌인으로 몰려 노비로 전락되고, 유배지에서 자결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1908년(융희2년) 9월에 전라북도 장수군 수남면 용계리에 살고 있던 홍술해의 6대손은 정유역변에 희생된 정희순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각사등록(各司謄錄)에 실린 이 청원서를 읽어보면 파란만장했던 이 집안의 삶이 마치 한편의 영화인 양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가 사라진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1-21

기본을 지키고 기본에 충실한 ‘해피 투게더 김천’ 도약

지난해 시승격 70주년을 맞았던 김천시는 경북에서 가장 오랜된 도시의 경륜과 품격에 걸맞는 명품도시의 위상을 위해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을 비롯해 시민들의 의식문화를 변화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정책을 추진했다. 또 미래전략산업과 신성장 동력을 발굴·육성하고, 혁신도시 활성화, 도시재생사업, 산업단지조성, 남부내륙철도 건설 등 대형 프로젝트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김천시는 이러한 성공적 신 성장동력 사업을 발판으로 2020년을 새로운 김천, 미래 100년을 여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에 본지는 김천의 미래를 디자인하고 이끌어가고 있는 김충섭 시장을 만나 시정 성과와 운영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지난해는 김천시의 특별한 한 해였다. 소감은.△김천은 경북에서 가장 먼저 시로 승격된 도시다. 역사와 전통, 경제, 교통, 문화의 중심지인 김천이 시 승격 70주년을 맞은 뜻 깊은 해였다.그 자부심으로 시민들과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미래 100년을 담보할 수 있는 큰 성과를 거뒀다. 김천∼거제간 남부내륙철도 건설 확정, 국가혁신클러스터(RD) 지정, 일반산업단지 3단계 조성, 지역 맞춤형 일자리 창출시스템 구축, 부항댐 관광자원화(출렁다리, 짚와이어, 스카이워크) 등 주요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여기에 롯데푸드(930억원), 대하산업(126억원), 다솔(530억원), 태진(195억원), 대정(165억원), 에이치티엘(150억원) 등 54개 기업으로부터 총 3천202억원의 투자를 유치하는 실적도 올렸다. 이러한 큰 성과 중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의식개혁운동으로 정착한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이 가장 특별하고 최고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시민들 덕분에 지난해 하루 하루가 행복했다.- ‘Happy Together 김천’ 운동이란?△시승격 70주년을 맞아 70년 된 도시의 경륜에 걸맞은 시민의식과 새로운 도시문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시작한 운동이다. 사실 김천은 경북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했다.새로운 미래 100년을 위해서는 이런 부정적인 도시 이미지부터 바꿔야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생각을 바꾸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는 말처럼 시민 한 분, 한 분이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도시가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시민의식개혁운동을 생각했고,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을 전개했다.이 운동은 △친절 △질서 △청결 △참여 △양심 △예절 △배려라는 7대 실천 목표로, 김천을 전국에서 ‘가장 친절한 도시로, 가장 질서 있는 도시로, 가장 깨끗한 도시’로 만들자는 것이다.한마디로 ‘기본’을 지키고 ‘기본’에 충실한 도시로 거듭나 기업과 사람이 찾아오게 만들자는 운동이다. 모든 시민들이 이 기본을 충실히 지킨다면 지역 공동체사회는 더욱 따뜻해 질 것으로 믿는다. 지금 정착 단계에 있는 이 운동이 김천사회에 완전히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시민들의 더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한다.- 올해 김천경제의 큰 변화가 있다면.△산업단지 200만평 시대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35만평 규모에 총 사업비 1천841억원을 투입해 2021년 준공예정인 김천1일반산업단지 3단계 조성사업이 현재 공정률 50%를 넘으면서 지난해 3월 중순부터 용지분양에 들어갔다.3단계 산업단지는 접근성이 뛰어나 많은 기업들이 찾아 올 것으로 기대 된다. 이 곳은 전국에서 가장 싼값으로 용지를 공급해 평당 44만원으로 분양하고 있다. 인근의 구미5 국가공단은 분양가 평당 86만원에 비해 반값에 공급하는 것으로 3단계 사업부지 준공 전에 100% 분양될 것으로 예상된다. 3단계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되면 4천100명의 고용효과와 2조8천억원의 경제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시는 좋은 일자리 3만개를 창출해 양극화 심화현상을 완화시켜 나갈 계획이다. 민선7기 지역일자리 목표공시제 종합계획에 의하면 고용률 63.5%달성, 일자리 3만개 창출을 목표로 지역 고용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 지역특성에 맞게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총 사업비 1천470억원을 투입해 직접일자리창출, 고용서비스, 직업능력훈련, 창업지원 등 공공부문에 2만6천개, 민간부문에 4천개로 총 3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다.- 김천∼거제간 남부내륙철도 건설은 어떻게 되고 있나.△김천∼거제간 남부내륙철도가 정부의 ‘2019년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에 포함돼 지난해 1월 29일 국무회의 의결로 예비타당성 면제 사업으로 확정됨에 따라 사업이 조기 착수하게 됐다. 김천과 거제를 연결하는 남부내륙철도는 총 172㎞에 4조7천억원의 사업비가 국비로 투입돼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 중이며 올해 기본계획을 실시할 것이다. 철도가 개설되면 김천은 서울까지 1시간 30분, 거제까지는 1시간 10분에 도달할 수 있어 수도권과 남해안권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김천은 광역 철도망 확충으로 신성장 동력산업을 육성하고 국가균형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또 김천∼문경간 전철화 사업도 예비타당성조사 시행사업으로 선정됐다.- 정주여건 개선을 위한 사업은.△혁신도시 내 문화시설 확충을 위해 도서관과 다목적 강당이 포함된 복합혁신센터 건립을 2022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 중에 있다. 지난해 4월 중앙투자심사 통과로 이들 사업들의 추진에 탄력을 받고 있다. 그 외 생활체육시설 확충을 위해 한국도로공사 수영장이 일반 시민들에게 전격 개방됐다. 수영장 이외에도 이전 공공기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축구장, 테니스장 등 청사 내 체육시설을 사회적 가치 실현 차원에서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자족도시로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종합병원유치도 해결되고 있다. 혁신도시 내 170병상 규모의 연합병원이 착공에 들어가는 등 정주여건이 개선되고 있다.이밖에도 관광산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부항댐권역은 물소리 생태숲, 산내들 오토캠핑장, 물 문화관, 둘레길 등에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전국 최초 왕복형 레인보우 짚와이어(최고높이 93m), 전국 최초 완전 개방형 스카이워크(높이 85m), 전국 최초 하늘 그네, 출렁다리(256m) 등이 체험과 모험의 관광지로 변신했다. 부항댐 배면과 산내들공원에 대대적으로 층층이꽃, 숙근아스타, 배롱나무를 심어 새로운 볼거리를 조성,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체류형 관광휴양 인프라 구축을 위한 생태체험마을도 조성하고 있다. 총 사업비 90억원을 투입해 부항면 지좌리 일원에 3만3천㎡ 부지에 관광펜션 24동, 카라반 7동 등 특색 있는 숙박시설, 생태체험공원으로 자연학습장, 숲모험놀이터, 별전망원을 설치하는 공사가 2021년 완공될 예정이다. 가족단위 관광객을 타켓으로 체류형 생태휴양도시의 기반이 다져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요즘 모두 힘들다, 어렵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 같다. 시민들의 그 어려움을 덜어드리는데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김천의 시정목표가 바로 ‘시민중심의 행정’이다.이는 시민 한 분, 한 분까지 살뜰히 챙기겠다. 이를 위해 ‘경제, 소통, 복지, 신뢰’라는 핵심 가치를 밑거름 삼아 ‘시민행복’이라는 꽃을 피우도록 하겠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도 함께 하면 능히 해낼 수 있다고 했다.시민들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자신이 있다. 어렵고 힘든 길은 시장인 내가 먼저가고, 좋은 길은 시민들이 먼저 밟을 수 있도록 하겠다. 항상 믿고 지지해 준 시민들에게 지역 발전으로 보답하겠다./나채복기자 ncb7737@kbmaeil.com

2020-01-20

‘쇠같은 뜨거운 오열의 노래’로 민족혼을 일깨우다

‘백조’ 동인으로 함께 활동한 박종화는 이상화의 등단작인 ‘말세의 희탄’에 대해, “강한 백열(白熱)된 쇠같이 뜨거운 오열(嗚咽)의 노래”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비단 그의 시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그의 몸 안에 흐르는 뜨거움이 없었다면, 42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 많은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문인을 넘어 사회활동가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3.1 운동을 비롯한 여러 독립활동에 참여하여 수감되기도 하였고, 신문사 총국을 운영하거나 교사로 재직하며 청년교육에 열과 성의를 바치기도 했다. 이상화의 열정적인 삶을 말하는데 있어 몇 번에 걸친 그의 뜨거운 연애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그의 문학적 업적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생전에 한 권의 시집도 출판하지 않았고 60여 편의 시를 남겼을 뿐이지만, 그는 한국시사에서 대체 불가능한 자신의 자리를 구축하였다. 이상화는 한국 근대시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며 병적 낭만주의의 시들을 발표하였다. 대표작 ‘나의 침실로’에는 3.1운동의 실패와 상징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비애와 절망, 퇴폐와 죽음의지 등이 격정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이후에는 파스큘라(PASKYULA)와 카프(KAPF) 등의 진보적 문인단체에서 활동하며 날카로운 사회의식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명시를 통해서는 미적 감동을 동반한 저항시를 발표하였다.1901년 대구 서문로에서 이시우와 김신자 사이의 4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이상화에게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은 거의 생래화 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조부 이동진이 설립한 우현서루(友弦書樓)에서 교육을 받았다. 우현서루는 단순한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대구를 비롯한 전국에서 온 독립지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곳이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조부나 백부 등의 영향으로 이상화는 항일의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다.그러나 프랑스 상징주의의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백조’ 시기 작품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상화에게는 민족정신으로만 해명되지 않는 모더니티 지향적인 성격도 분명하게 보인다. 그것은 그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상화는 젊은 시절 고향 선배 박태원을 통해 영어와 서구 문학 등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는다.이 무렵 보들레르를 비롯한 베를렌느 랭보 등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관심이 모아져 이상화는 파리로 가기 위한 중간경유지로 도쿄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2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상화는 일본에서 첨단의 서양문학을 공부하는 것과 더불어 함흥 출신의 신여성인 유보화와 깊게 사귄다. 그의 도쿄 체류 시기는 근대(서구)지향이 첨단에 이른 때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시간들은 ‘마돈나’를 애타게 찾는 ‘나의 침실로’를 통해 문학적 열매를 맺는다.그러한 근대지향은 자의든 타의든 이상화의 삶을 이끄는 절대적인 힘이 되지는 못한다. 그가 일본에서 경험한 관동대지진은 그가 결국에는 조선인일 수밖에 없음을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폭력적 사건으로 작용한다. 1923년 9월 일본 간토지방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폭도로 몰아 끔찍한 학살극을 벌였다. 죽음을 코앞에 둔 이상화도 죽음의 문 앞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이러한 체험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관동대지진 이전에도 이상화는 맹목적으로 일본이나 유럽을 지향하는 성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이 다 되도록 일본의 서울을 헤매어도/나의 꿈은 문둥이 살기 좋은 조선의 땅을 밟고 돈다”로 시작되는 ‘도-교-에서’(1922년 가을 창작. 1926년 1월 발표)라는 시를 보면, 새로운 것을 향해 일직선으로만 달려가기에 이상화의 몸에 흐르는 고향과 고국에 대한 애정은 너무나 뜨거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아시아의 모더니티를 대표하는 도쿄에서 누군가는 문명의 찬란함에 압도당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 모조품적 성격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그 모던의 성채 앞에서 이상화는 문둥이 살갗 같은 ‘조선의 땅’과 ‘조선의 하늘’을 그리워했던 것이다.1924년 귀국한 이상화의 시세계는 크게 변하여, 민족과 국토에 대한 애정이 전면화된다. 그것은 서양과 근대 문물에 대한 충분한 세례를 받은 후의 애정이기에 한층 미학적으로 정련된 결과물을 낳았다. 마치 2년 동안의 일본 체류 기간 동안 담아놓았던 고국과 고향에 대한 애정을 쏟아놓기라도 하려는 듯, 이상화는 자신이 평생 남긴 작품의 절반 이상을 1925년과 1926년 사이에 맹렬하게 발표한다.이상화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6)가 쓰여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김학동이 쓴 ‘이상화 평전’(새문사, 2015)에 따르면,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구상한 것은 연인 유보화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얼마 뒤 서울 교외의 푸른 보리밭을 거닐 때였다고 한다. 이상화는 해가 지도록 쉬지 않고 걸었지만 제목만을 간신히 얻어서 돌아왔다.결국 이상화는 이 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대구로 갔으며, 그 중에서도 대구 근교의 수성 벌판에 광활하게 펼쳐진 보리밭을 걷고 또 걸으며 명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명작이 육화(肉化)된 차원의 진실에서만 비롯된다는 예술일반론을 증명하는 사례인 동시에, 시인 이상화에게 대구가 얼마나 중요한 시적 모태인지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이 시는 좋은 시가 갖추어야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시에는 이상화의 시를 일관하는 ‘쇠같이 뜨거운 오열(嗚咽)’이 선명한 이미지와 공감력이 최대치에 이른 비유 등을 통해 아름답게 시화되고 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서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간결하지만 단단한 고발이 담겨 있으며, 그럼에도 생명의 순환 법칙처럼 오고야 말 광복을 에둘러 토로하고 있다. 그러한 견결한 메시지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원융무애의 상상력과 우리 국토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 바탕한 것이기에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1927년 초봄에 대구로 돌아온 이상화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대구를 떠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작품 창작은 뜸해지지만, 그 뜨거운 정신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사회활동은 계속 된다. 이러한 활동들은 모두 개인적인 영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려는 공익이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대구’라는 지명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시 ‘대구행진곡’(별건곤, 1930.10)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4연 16행의 이 시에는 비슬산, 팔공산, 금호강, 달구벌, 도수원과 같은 대구의 상징과도 같은 지명이 그대로 등장한다. “넓다는 대구감영 아무리 좋대도/웃음도 소망도 빼앗긴 우리로야/임조차 못 가진 외로운 몸으로야/앞 뒷들 다 헤매도 가슴이 답답다”라는 부분에서는, 시인의 지사적 정신에서 비롯된 ‘쇠같이 뜨거운 오열’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일제의 탄압이 심해질수록 이상화의 삶도 힘겨워진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친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고 왔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는가 하면, 무보수로 일하던 교남학교(현 대륜중·고교의 전신)에서 더 이상 우리말 수업이 불가능해져서 그마저도 그만두게 된다. 결국 그 뜨거운 오열을 가슴에 품은 이상화의 몸은 더 이상 일제의 무지막지한 칼날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일까?위암이 발병한 이상화는 1943년 4월 25일 숨을 거두고 만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대구가 낳은 또 한 명의 걸출한 문인 현진건이 별세한 날이기도 하다. 현진건은 어린 시절을 대구에서 함께 보낸 죽마고우일 뿐만 아니라 이상화를 백조에 소개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가능케 했던 문우였다.지금 수성벌은 대구를 대표하는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여, 이상화가 노래했던 “가르마 같은 논길”, “종다리”, “삼단 같은 머리를 한 보리밭”, “착한 도랑이”, “나비 제비”, “맨드라미 들마꽃”,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흙”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의 봄도 나름의 아름다움으로 상춘객의 마음에 “봄 신령”을 지피게 한다.다행히 수성 못가에는 시의 전문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봄날의 우리 들판을 누구의 강압도 없이 맘껏 즐길 수 있게 된 지금, 그 아름다움에 한번이라도 도취되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쇠같은 뜨거운 오열의 노래’로 민족혼을 일깨운 이상화를 위해 시비 앞에서 한번쯤은 모자를 벗고 예의를 표할 일이다. 나부터 봄이 오면 만사를 제쳐 두고 대구행 기차에 오르고 싶다.작가 이상화는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앙고보를 수료하고 일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박종화와 더불어 ‘백조’ 동인으로 활동한 그는 1922년 시인으로 데뷔했다. ‘빈촌의 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등의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대구 교남학교 교사 시절엔 독특하게도 복싱부를 만들어 주목받았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1-20

“변화와 혁신의 시정 운영… 예산확보 9천억 시대 박차”

고윤환 문경시장은 최근 2020년 신년인사와 함께 시정운영 방향을 제시했다.고 시장은 “예산 9천억 원 시대에 도전하겠다. 처음 시정을 맡았을 때 예산 4천493억 원의 2배가 넘는 엄청난 금액이다”며 “지자체의 세입은 급락하고 있어 어려운 상황이지만 문경시는 일반회계와 특별회계 채무 제로를 달성해 건전한 재정을 운영하겠다”고 말했다.이어 “더 많은 국·도비 예산을 확보해 시민들에게 필요한 시책사업들을 추진해 나가겠다”며 “민선 7기, 1년 6개월 동안 착실하게 준비한 주요사업들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시민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한다”고 했다.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문경시의 올해 시정 운영 방향을 알아 본다.-6차 산업 활성화와 청년 농업인 육성, 생산에서 판매까지 걱정 없는 부자농촌에 대한 구상은.△귀농·귀촌·귀향자들의 초기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조금 더 쉽게 조기 정착할 수 있도록 읍·면·동별 전원주택 최적지를 발굴해 놓았으며, 귀농귀촌 1대1 멘토, 문제해결팀도 상시 가동 중에 있다.청년 및 초보 농업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시설원예 시범단지 조성 및 체험형 농장 임대사업을 과감하게 추진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 나가겠다.생산과 체험, 관광을 접목하고 타 시군과는 차별화된 행정 지원과 민간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 6차 산업의 성공 비지니스 모델을 만들겠다.문경 로컬푸드 문화센터와 오미자테마공원을 활성화해 체계적인 유통 시스템과 판매망을 구축하고 미나리, 체리, 만감류 등 새로운 소득 작목을 발굴해 농가에 실질적 수입이 늘어날 수 있도록 지원 할 계획이다.-문경시 발전 100년을 앞당길 미래 성장 동력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은.△중부내륙고속철도 건설사업은 올해 건설 예산 3천700억 원을 확보해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으며, 경북선 단선전철(문경~김천선) 사업도 예비타당성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서산~울진간 중부선 동서횡단 철도 건설사업은 조기 착공을 위해 제4차 국가철도망구축계획에 반영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국가철도망 확충에 따른 우량기업 유치로 지역경제의 역동성을 살려 나가겠다. 찾아가는 맞춤형 기업유치 활동으로 첨단 및 친환경기업 등 일자리 창출 우수 기업을 유치하고 신기 제2일반산업단지 및 산양 제2농공단지 분양을 조기에 완료해 지역 고용 여건을 개선해 추진 할 계획이다.‘한국 경제 발전의 초석’이었던 (주)쌍용양회 문경공장이 경제기반형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돼 UNKRA 근대화산업유산파크로 조성할 수 있도록 모든 행정력을 집중하겠다. 가은읍 구(舊) 원경광업소 부지 일원에는 암벽등반, 스카이점프 등의 모험과 체험시설을 갖춘 국립산림레포츠진흥센터를 반드시 유치해 산악인들이 꼭 가봐야 할 명소로 만들 계획이다.침체된 점촌 지역의 경제와 관광 활성화를 위한 랜드마크 조성사업은 지난해부터 분야별로 빠르게 추진하고 있으며, 영강 보행교, 송진산 힐링공원, 청정식물원 등 볼거리와 먹거리, 체험거리로 가득 채우려 한다.세계명상마을 조성사업, 하늘재 옛길 복원사업, 고요아리랑 민속마을 조성사업, 흥덕 행복주택 건립사업, 농촌신활력플러스사업 등 현안사업들도 차질 없이 추진해 나아갈 계획이다. 소상공인들에게는 시설 및 경영개선지원 사업과 융자금 대출이자 보전을 확대하고 주차비 지원사업도 시행해 경영안정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도록 하겠다. 경북신용보증재단의 특례보증제도를 활용해 담보 제공 능력이 없어 금융기관 대출에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들의 근심도 다소나마 덜어 줄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해 나가겠다.-아이 낳고 키우기 더 좋은 도시 만들기 방안은.△신혼부부를 위한 전·월세 이자 지원, 전입세대 이사비용 및 주택수리비 등도 기존 자격조건을 완화하고 확대 지원하고, 출산 가정이나 다자녀 가구에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출산장려금과 장학금을 지원함으로써 출산 친화적 사회분위기를 확산하고 경제적 부담을 줄일 계획이다. 인구밀집지역인 점촌5동 지역에 육아종합지원센터 분소인 놀이체험실을 개소했으며, 맘 편한 돌봄 공부방도 리모델링해 운영 중에 있다.영유아 자녀들을 위한 맞춤형 놀이인프라 구축으로 아이들의 인지·정서 발달능력 향상 및 건강한 성장을 지원하고 아이 돌봄 서비스도 확대해 나가겠다.-명품교육도시의 위상 향상과 글로벌 인재 양성의 방향은?△지난해 11월 지역 내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제1회 영어·수학 챌린지 대회를 개최해 학생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으며, 참여한 학생들과 학부모님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문경시 장학회 기금으로 장학 혜택을 확대하고 각종 경시 대회, 로봇 및 코딩 교육, 드론 활용법 등 아이들의 창의성과 사고력 개발을 위한 교육활동에 지원을 강화해 나가겠다. 지금 AI(인공지능)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인재는 문제를 해결하고 혁신을 이끌어갈 ‘창의융합형 인재’다. 문경에서 글로벌 리더로 성장할 인재를 키워 나가겠다.-관광객 1천만명 시대 위한 관광 인프라 확충계획은.△2021년 고속철도가 개통되면 문경시는 사계절 체류형 관광도시로 변모하게 된다. 문경새재, 에코랄라 등 기존 체험형 관광지는 다양하고 매력적인 콘텐츠 발굴과 색다른 테마를 개발해 ‘다녀보니 좋은 문경, 다시 오고 싶은 문경’을 만들도록 노력 하겠다.오는 3월 준공을 앞두고 있는 단산모노레일을 비롯해 별빛 전망대, 사계절 썰매장, 캠핑장 등 단산권역 개발사업은 타 지역과는 차별화된 아이템으로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겠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문경 돌리네습지는 생태관광의 메카로 조성하기 위해 국비를 지원받아 사업추진에 박차를 가하겠다.올해에는 문경새재와 고요 아리랑 민속마을, 문경새재 미로공원, 반려동물 힐링공원 등 주변 관광지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아이들과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어린이 중심 체험관광코스도 개발해 나가겠다.문경찻사발축제, 사과축제, 약돌한우축제, 오미자축제 등 기존 축제의 불필요한 행사성 경비는 줄이고, 내실 있는 운영으로 관광객 수와 농·특산물 판매액이 증가돼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는 축제가 되도록 하겠으며, 문경관광진흥공단에 위탁한 사업장에 대해서도 경영 타당성을 검토하고 재정비해 새롭게 단장할 것이다.-시민 모두가 행복한 복지도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있는지?△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흥덕종합사회복지관과 통합건강증진센터가 지난해 건립돼 운영 중에 있다. 장애인종합복지관도 증축 및 리모델링을 완료했고 8개 단체, 1천600명의 보훈단체 회원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보훈회관 건립도 공모 사업에 선정돼 2021년 준공을 목표로 차질없이 준비할 계획이다.어르신들의 휴식 쉼터인 경로당에 행복도우미를 파견해 노인적합형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시설환경 개선 및 운영비를 지원해 어르신들이 건강하고 풍요로운 노년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겠다. 읍·면·동의 지역사회 보장협의체 운영을 강화하고 민간단체와 연계협력을 확대해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복지정책이 수립될 수 있도록 시민 한분, 한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전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위기대응 능력이 뛰어난 도시 문경 건설을 위한 방안은?△지진과 수해, 태풍, 폭염 등 각종 재해로부터 소중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시설을 확충하고 테러, 화재, 침수 피해 등 다양한 유형의 실질적인 재난대비 훈련을 실시해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CCTV 스마트 관제센터와 타임솔루션을 구축하고 마을무선방송시스템 및 방범용 생활안전 CCTV를 더 촘촘하게 설치해, 자연재해를 예방하고 친수 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영강천, 초곡천, 조령천 등 하천재해예방사업과 신북천 풍수해생활권종합정비사업, 금천, 보림천 등 생태하천복원사업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소통행정과 혁신이 필요하다.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시민들과 출향인들의 목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지난해 10월 고향 쉼터와 기록문화관을 개소해 많은 출향인과 시민들이 다녀가는 등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시민들이 고향의 발자취를 따라 추억하고 미래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올해 본격적으로 실시하게 될 ‘더 잘합시다 문경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시민운동의 완성형이다. 지역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는 시민 소통의 연결고리가 되도록 하겠으며, 연두순시부터 현장에서 나오는 시민들의 새롭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 할 계획이다.-덧붙일 말이 있다면.△‘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민선 7기 취임 초부터 ‘내가 변해야 문경이 산다’ 라며 변화와 혁신을 강조해 왔다. 언제나 시민들과 함께 하며 힘들고 어려운 일에 가장 먼저 앞장서왔다. 지난 7년 6개월 동안 약속대로 인구를 늘리고 예산 7천270억 원을 달성하는 등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해 왔다. 올해는 문경시 발전 100년을 앞당길 수 있는 더욱 중요한 해다. 문경이 더욱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내실을 튼튼히 다지는 한 해를 만들겠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0-01-19

그리운 고향, 무엇이 우리를 위로할까?

인간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일까?자신이 첫울음을 터뜨린 잊을 수 없는 땅, 단순히 말과 글만으로는 명확하게 정의될 수 없는 이상향, 끝끝내 돌아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 곳….나이를 먹을수록 그렇다. 입술을 오므려 “고향”이라고 조용히 발음해 볼 때면 쓸쓸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 밥 짓는 냄새 풍겨오던 어두운 부엌, 벌거숭이 어린 친구들과 달려가던 흙길이 동시에 떠오른다. 그림자 같은 궁핍보다는 빛나는 햇살의 기억으로.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한국 사람이나 외국인이나 유사한 듯하다. 다음 주면 바로 그 고향을 찾아가는 행렬이 도로마다 장사진을 이룰 것이다. 우리나라도, 중국도, 베트남도. 유럽과 미국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부모 사는 고향을 방문할 때처럼.기자가 아직 젊었던 30대 중반. 이와 유사한 풍경을 저 멀리 ‘타지마할’과 ‘바라나시’의 땅 인도에서도 본 적이 있다. 아래는 그때의 에피소드다.▲‘고향’ 찾는 인도인들 때문에 구할 수 없었던 버스표석양의 아름다움이 심장을 뒤흔드는 인도 서부의 해변 여행을 마치고 이슬람과 힌두 유적이 곳곳에 산재한 흥미로운 내륙 도시 함피로 가기로 결정한 날.느지막이 인도식 카레라이스와 삶은 달걀로 아침을 먹고 함피로 떠나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을 향했다.그런데 이건 뭔가? 버스표가 없단다. 아니, 함피행 버스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무슨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여행자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생겨도 절대 놀라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떠도는 나라가 인도라지만. 듣고 보니 갑자기 버스가 사라진 사연은 이랬다.요 며칠 사이 함피 인근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이 대거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 갑자기 그 노선의 버스만을 증차하기가 사정상 어려워 하루나 이틀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승차가 힘들다는 것.터미널 직원이 미안한 표정으로 이런 궁여지책을 알려줬다. “사설 여행사 버스표는 있을 테니, 더 늦지 않게 근처 여행사로 가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조언에 따라 근처 여행사 사무실을 서너 군데나 돌아다녔다.하지만, 거기서도 “지금은 당신이 왕이라 해도 함피로 떠나는 버스표를 구하기 힘들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익숙지 않은 사태에 난감하고 화가 났다. ‘왜 하필 내가 버스 티켓이 필요할 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라는 혼잣말로 분을 삭이며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차가운 맥주를 몇 잔이고 거푸 들이켰다.그때였다. 할머니-어머니-딸로 보이는 인도 여자들이 눈에 들어온 것은.함피가 고향이라는 그들은 2년 만에 이제나저제나 눈이 빠지도록 피붙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할머니는 여동생을, 어머니는 오빠를, 딸은 또래의 사촌들과 만날 생각에 마음이 들떠 2~3시간 후에나 도착할 버스를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선량해 보이는 조모와 모녀, 그 다정한 3대만이 아니었다. 많은 인도인들이 몇 시간의 지겨운 기다림에도 자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로 간다는 설렘에 세상 누구보다 환하게 웃는 낯으로 터미널 주위를 서성거리는 모습이 그제서야 제대로 보였다.다른 어딘가에서도 본 듯한 낯설고도, 낯익은 풍경에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 상황에서 정지용(1902~1950)의 목가적인 시 ‘향수’가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모든 사람이 슬픔이 아닌 기쁨을 안고 귀향하길정지용은 타고난 시적 감수성에 일찌감치 공부한 인문학적 근대 지식까지가 더해져 일제강점기 ‘조선의 시왕(詩王)’으로 불렸던 천재 문사(文士)였다. 20세기 초반 한국에선 드물게 모던함으로 무장한 세련된 시인.당대의 문학평론가들은 “이미지의 새로움은 물론이고, 절제된 시어(詩語)의 사용으로 조선 문단의 또 다른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는 최상급의 찬사를 정 시인에 바치곤 했다. 감히 누구도 그런 평가에 “아니다”라고 나서며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런 정지용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일자무식의 농부나 날품팔이 일꾼과 다르지 않았다.시의 제목처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아련한 ‘향수(鄕愁·고향을 기리며 시름함)’를 행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커다란 얼룩소 곁에서 뛰놀던 철없던 유년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언제나 그리운 아버지가 힘겨운 농사일에 가끔은 깜박깜박 졸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동네의 어떤 여자아이보다 머리칼 색깔이 새까맣고 고왔던 어린 누이가 맨발로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곤궁한 살림을 이어가던 가난한 지붕 밑이지만, 어떤 부잣집보다 화목했던 식구들이 살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이처럼 자신이 태어난 곳을 ‘낙원’으로 생각하며 아프게 그리워했던 정지용은 한국전쟁 와중에 동료 문인 김기림·박영희 등과 함께 형무소에 수감됐고, 이후 납북돼 다시는 고향인 충청북도 옥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시인은 비극적 한국 현대사에 고향을 뺏겼다.한 주 후면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는 설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사람들만이 아닌 중국인, 베트남인, 인도인도 제 생명의 뿌리가 잉태된 땅을 찾아 연어를 흉내내 거꾸로 헤엄쳐 오를 터.이 ‘고향 회귀(回歸)’가 눈물겨움이 아닌 웃음과 반가움만으로 가득하기를 미리 빌어본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16

“환경 아끼고 생명 중시하는 안전한 울릉건설에 온 힘”

김병수 울릉군수는 “올해는 미래 울릉에 대비한 전략 수립과 자연친화적인 개발, 자연환경보존, 생명을 중시하는 안전한 울릉건설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겠다”고 군정운영방향을 밝혔다.또 “주민복리증진을 위한 시책추진과 관광산업, 농업·임업·수산업의 동반성장, 소통행정 구현을 통해 군민이 행복하고 꿈이 있는 친환경 섬을 건설하겠다”고 말했다. 김 군수의 2020년 울릉군정방향을 들어본다.-울릉 미래를 열 대형 사업부터 소개해 달라.△울릉도는 독도와 함께 우리나라 동해의 유일한 섬이다. 울릉도는 작은 섬이지만 다른 섬과는 달리 물이 풍부하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다.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자연이 아름다운 대표적인 섬이다. 미래 가치가 높다.울릉도의 3대 숙원사업인 하늘길(공항건설), 땅길(섬 일주도로 완공), 바닷길(대형쾌속 여객선 유치)의 인프라가 2025년이 되면 모두 구축된다. 이에 따라 울릉도 전체를 아우르는 마스트플랜과 중·장기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해 2030년 관광비전을 제시하겠다. 지역별 균형발전과 특화사업 개발, 도시 재생 뉴딜사업 및 생활형 SOC 사업발굴에 중점을 두고 개발과 보존의 조화를 이룰 체계적인 장기로드맵을 마련하겠다.육지와의 울릉도의 접근성 개선은 울릉주민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하늘, 땅 바닷길이 모두 열리면 대한민국 랜드마크 섬, 세계적인 친환경 생태관광 섬으로 발돋음 할 것이다.-자연친화적인 개발과 천혜의 자연환경 보전에 중점을 둔다고 했다. 어떤 계획이 있는가?△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보석 같은 자연경관과 풍부하고 맑은 물과 공기는 울릉의 자랑이며 든든한 자산이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및 세계지질공원 등재도 적극 검토해 추진하겠다.이를 위해 국립 울릉도·독도 생물다양성센터 및 국립 울릉도·독도 자생식물원 천연기념물 센터를 유치해 소중한 문화재 보존은 물론 이를 통해 관광객 유치에도 한몫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농업유산 자원 발굴 및 해양환경 보전 청정바다 가꾸기에도 힘쓰겠다.울릉도 개척사 옛길 둘레 길 등 천혜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울릉도의 옛 모습을 아우르는 울릉해담길을 더욱 체계적으로 조성 정비하겠다. 이와 연계한 전국 트래킹대회 개최 등 자연을 체험하면서 관광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겠다.환경의 보전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가장 경쟁력 있는 정책이자 키워드다. 탄소제로, 플라스틱제로, 쓰레기제로 등 3제로 생태섬을 위해 친환경 정책 추진을 확대하겠다. 지금도 추진 중인 전기차를 지속적으로 보급해 미래 세대들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환경을 지키고 가꾸겠다.-생명을 중시하는 안전한 울릉도를 건설하겠다고 했는데 복안은.△지난해 발생한 독도 해상 구조헬기 추락 사고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다. 어떠한 희생도 다시는 안 된다. 군민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응급헬기 울릉도 상주 및 의료시설, 의료진 개선을 위해 더욱 전력하겠다.울릉소방서는 반드시 유치, 군민의 안전과 생명, 재산보호에 든든한 기반이 되도록 하겠다. 자연재해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인재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는 안전한 울릉 만들기에 최선을 다하겠다.울릉도와 독도 근해에는 많은 국내외 어선들이 조업하고 있다. 선원들의 안전사고의 1차 진료기관은 울릉군 보건의료원 뿐이다. 이 같은 열악한 의료 환경을 정부에 소상히 알려 응급헬기 상주와 의료시설이 확대되도록 노력하겠다.-주민복리 증진을 위한 시책추진은.△정부의 사회복지 확대 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낙도인 울릉주민이 더 많은 혜택을 받아야 한다. 복지예산의 적정한 배분과 행정집행으로 제대로 된 예산이 꼭 필요한 곳에 사용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그동안 시행해 온 복지시책은 더욱 공고히 하겠으며 기존의 문화·복지·사회시설은 더욱 확충·개선해 나가겠다. 군민 안전보험 가입, 농촌지역 대중교통 편의 제공 등 주민생활 구석구석까지 살피는 알찬 복지행정이 되도록 힘쓰겠다.올해 울릉군 내 4개 중학교가 통합해 울릉중학교로 거듭나게 된다. 미래 울릉도를 짊어질 청소년 교육에도 최대한 투자해 공부하기 좋은 울릉도를 만들겠다.인구증가정책의 하나로 도시청년 울릉도 유치에 힘을 모으고, ‘아기는 부모가 낳고 기르는 책임은 울릉군이 진다’란 정책을 추진해 아기 낳기 좋은 울릉군을 만들겠다.무엇보다 군민 개인의 삶이 더욱 풍성하고 보람 있는 삶이 되도록 공공의 이익과 혜택을 함께 나누고 누리도록 하겠다. 문화적 수준을 높이고 교육의 기회는 보장되고 사회적 활동을 함께하는 건강한 사회조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관광산업 및 농업·임업·수산업의 동반성장을 위한 복안은.△관광산업은 울릉군의 핵심 산업이며 미래성장의 중심이다. 울릉군의 기반산업인 농업·임업·수산업은 지역경제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관광산업과 기반산업이 서로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정책사업 추진에 심혈을 기울이겠다.어촌뉴딜 300사업은 어업인의 경쟁력 강화와 동시에 아름다운 미항(美港) 및 레저 기반시설 조성으로 관광객 유입의 효과가 기대된다. 어촌 뉴딜 사업은 울릉 천부 항에 147억원 투자에 이어 태하항 100억원, 웅포항 90억원 등 모두 337억원이 투입된다.울릉군은 앞으로 학포, 구암, 통구미항 등 울릉도 전역의 소규모항구를 어촌뉴딜 300사업에 응모, 선정되도록 노력하겠다. 농촌 신 활력 플러스 사업 또한 마찬가지다. 지역 농촌, 어촌의 경쟁력이 곧 관광산업의 경쟁력이 되리라 확신한다.이와 같은 정부 공모사업을 최대한 유치해 정부 투자를 유도해 자금을 확보하고 분야별 특화된 환경을 조성하면서 관광산업과 농업·임업·수산업이 서로 시너지 효과와 동반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또한 올 7월부터 경북도민들의 울릉도 독도방문에 경북도가 50% 선박운임을 지원한다. 이로인해 많은 경북도민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민족의 섬 독도탐방객 유치를 위해 전국민 독도밟기 운동을 더욱 활성화하고 전국공무원을 대상으로하는 독도아카데미를 확대하겠다. 그러면 보다 많은 국민들이 독도를 방문할 것이고, 울릉도 경제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마지막으로 군민이 함께하는 열린 행정, 소통행정을 적극적으로 구현해 나가겠다고 했는데.△1991년 지방자치제가 부활된 뒤 많은 발전을 이뤄왔다. 특히 민선 7기를 맞아 새로운 변화로 큰 발전을 해 왔다고 자부한다. 이 같은 발전을 가능케 한 것은 울릉군민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한다.울릉군은 새로운 발전의 출발점에 서 있다고 본다. 울릉주민들의 숙원인 대형 SOC사업이 대부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울릉군은 군민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겠으며 군민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겠다.군정의 주요 정책사항은 주민 공청회 및 설명회 개최를 의무화하겠다. 마을별 사업은 마을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전설명회를 여는 등 주민과 함께하는 행정이 되도록 하겠다.지방분권화가 되고 지방자치가 성숙해질수록 주민 참여와 역할이 더욱 중요시 되고 있다. 군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를 소중히 여기며 소통과 섬김의 행정으로 지방자치 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20-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