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뿌리고거대한 브러쉬가 돌아가는데아파트 공터무궁화 담장 위로 솟아오르는하얀 배드민턴 공비누거품을 씻어내려고또다시 물을 뿌리는데내려갔던 공고개 돌려 다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라하얀 깃털을 활짝 펴고바람으로 물기를 날리고접었던 백미러를 펴는데급히 오르던 공하얀 속옷을 펼치며 내려가고차선으로 접어들려 핸들을 돌리는데공이 오가는 거리나와 나 사이햇살에 반짝이고자동세차장에 들어가 차에 앉은 채, 바로 옆 아파트 공터에서 누군가가 치는 배드민턴 하얀 공이 튀어오르는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물을 뿌리며 차를 닦는 브러쉬는 돌아가고. 센 바람이 풍겨나와 차를 말리는 자동세차의 공간에서 목격하는 자연스럽고 평화스런 한 풍경이 시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따스한 햇살이 반짝이는 풍경이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시인
2013-02-14
1.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2.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영원한 사랑에의 갈망을 차분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피력하고 있다.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나의 마음을 비록 알아주질 못한다 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라고 고백하는 시적 자아의 사랑은 참으로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의 불변성,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생각게 해주는 울림이 큰 시다.시인
2013-02-13
폐차장에서 너를 보았다찌그러지고 뭉개진 너를쪼그라들고 망가진 내가 보았다폐차장 한쪽에서너는 빈껍데기인 채로 비를 맞고 있었다십년도 넘게 동거 동락했던 너를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 갈이 없어더는 갈 수 없었던 곳까지 함께 했던 너를그리도 쉽게 잊고이제는 버림받아 이름표까지 뜯긴 너를무심하게 바라보는첫사랑의 기억마저 폐기처분한 나를너는 용서할 수가 있겠느냐닦고 어루만지던 첫사랑의 애무를이제는 잊어다오나는 너의 단단한 외피처럼 굳세지가 않구나오랜 세월을 타고 다녔던 자기의 승용차를 폐차시키고 이제는 번호판도 떼어지고 온기도 남아있지 않는 고철덩어리 폐차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정들었던 차에 있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첫사랑의 그 설레임과 달콤함도 이제는 다 식고 변해서 가만히 몸도 마음도 늙어가는 자신을 처지를 들여다보며 회한에 젖어있다. 인생, 쌩쌩 소리내며 힘차게 질주하던 때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저 폐차처럼 쓸쓸히 지워져가는 것이리라.시인
2013-02-12
어머니에게 목디스크가 왔다 하필이면 오른손에 왔다새벽기도 20년 만에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되었다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깜깜 어둠이 악수를 건네려는 건지사방이 인적 끊긴 놀이터가 되었다이제 단풍놀이 가는 버스 안에서 막춤을 출 수도고스톱 치며 상대가 싼 거 먹을 때마음의 박수를 대신해서 따귀소리를 올려붙일 수도 없게 되었다어머니에게 목디스크가 왔다행주 잡은 손으로 콘센트를 뽑은 것처럼스치기만 해도 저릿저릿하다고 한다처음 집 앞 놀이터로 아버지가 찾아왔던57년 전과 똑같다고, 그때 스친 손끝 같다고 한다다소곳한 고개를 다시 들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첫사랑. 그 얼마나 고귀하고 깨끗한 아름다움인가. 목디스크가 와서 여러 가지가 불편해진 어머니를 통해 57년 전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던 어머니의 첫사랑을 가만히 들춰보는 시인의 가슴에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우리에게도 지나가버린 먼 시간의 언덕 너머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첫사랑이 있었다. 따스하고 아름다운 첫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시이다.시인
2013-02-08
바람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는다어둠 속을 더 잘 보려고 눈을 감는다눈은 얼마나 많이 보아버렸는가사는 것에 대해 말하려다 눈을 감는다사람인 것에 대하여 말하려다가 눈을 감는다눈은 얼마나 많이 잘못 보아버렸는가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 같은 감각기관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습관에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실이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다 진실이고 진리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 이 시는 감감을 통해 느끼고 판단되는 것을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한 해석과 언어행위를 해 버리는 우리의 이러한 습관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지적하는 반성적 성찰이 깔린 작품이다.시인
2013-02-07
꽃들은 제 욕망을 아름다움으로만 드러내는 게 문제다.향유고래가 깊은 물 아래서 스스로에게 혀를 차서 저를 드러내듯,짝을 향한 面目이 환하다그러니까, 제 막무가내로고운, 죄의 얼굴들어찌 꽃들의 자연 그대로 드러나고 보이는 `아름다움의 표출`이 문제가 될까마는 그에 비해 인간세상의 욕망들이 만들어 내는 불구의 모습들에 야유를 하는 시안을 발견한다. 향유고래처럼 깊은 물속에서 혀를 차서 저를 드러내듯 은근하고 제어되고 조절된 자기 표출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야말로 큰 아름다움이 아닐까.시인
2013-02-06
비가 오고 있다안개 속에서가고 있다비, 안개. 하루살이가뒤범벅되어이내가 되어덫이 되어(며칠째)내 木양말은젖고 있다눈물의 시인 박용래의 특징이 잘 드러난 시이다. 안개 속에서 자욱하게 오며 가는 비와 안개 하루살이의 이미지를 묶고 그것을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이내의 이미지와 연결시켰다가 덫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인식이, 섬세한 시적 인식이 재밌다. 며칠째 목양말이 젖는다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서 젖고 있는 것은 목양말만 아니라 우울한 그의 마음과 생활의 결이라 느껴지는 시이다.시인
2013-02-05
담장 위 철망에 걸린 셔츠 조각은손에 닿지 않았다담장 너머에서 들리는 언어는 모두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읽혀진다요추를 타고 흐르는 마취 액이 몸속에 허물어졌다뒷골목 커피숍 창문에 스케치하던얼굴은 증명사진처럼 누군지 알 수 없게한 장으로 남고,떠난 사람은 항상 돌아오는 자였다담장 밖 신호등이 켜질 때사이렌은 비로소 울리기 시작했다익명성의 두려움 혹은 공격성, 익명 그 자체에 내재된 은폐된 폭력성이랄까 피해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깊이 전제된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담장이라는 자기 울타리 밖의 어떤 풍경도 소리도 확정되지 않는 가변적 실체로서 언제든지 있거나 언제든지 존재하지 않는 이중적인 존재다. 확고한 진정성을 열망하는 시인의 마음은 현대인 모두의 마음은 아닐까.시인
2013-02-04
저 혼자 가는 길에 빛들은 그림자 곁으로 모이고 생의 것들이 속인 잠들만이 자정을 넘는다 이것이 우리를 둘러 싼 것이라면 바람의 입에 재갈을 물리리라 목구멍으로부터 혹은 폐로부터 울려 올라오는 잔뿌리들은 의자며 계단이며 간판을 움켜잡은 채 저녁에 웅웅거리고 있다 산 것들만이 죽은 것들이 두려워 불을 켜는 밤 또 누군가는 옥상에 올라 아득한 추락의 깊이에 앙상한 눈을 감는다주름은 생성되는 현상에 불과하다. 누군가가 주도하거나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다. 극히 개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주름을 지난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고립과 단절의 의미를 품고 있다. 나와 시간의 고립 나와 타인의 단절을 끌어들이고 있다. 결국 인간은 홀로가는 외롭고 쓸쓸한 존재라는 인식이 시 속에 깊이 뻗어있다.시인
2013-02-01
내 키보다 높은 담장 위에 내 얼굴을 드러내어보이지 않던 그리고 보지 못하던세계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노릇입니까저 담 넘어가며저 담 위에서담보다 더 높이 핀 넝쿨 장미를 보십시오꽃송이를 보십시오꽃송이가 아니라 샘이지요몽실 몽실 공중에 솟는 샘빨간 빛깔로 솟고 노랑 빛깔로 솟고오 맘대로 하얀 빛깔로도 솟습니다얼마나 얼마나오 눈물겹도록 신나는 노릇입니까넝쿨장미가 담 너머를 향해 뻗어가는 것은 어쩌면 아직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담장을 가로막고 제어하는 억압의 장치로 본다면 차가운 겨울 창 너머 저 쪽을 보는 것은 치열한 자기반성과 함께 새로운 봄을,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리라. 또한 담을 넘어가는 것이 넝쿨장미가 아니라 샘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인식에는 새로운 탄생, 생성, 지속적인 영원한 탄생이라는 것이 바탕에 깔려있다.시인
2013-01-31
허공도 평탄하지 않은 듯새들도 머뭇거리며 날고이 걸음 맞는지 몰라서성이며 바라보는 길 위에개미들은 줄지어 앞만 보고 가는데믿음으로 가는 길은굴곡도 보이지 않나 보다새들도 개미들도 제각각 저들의 길을 잘도 간다. 머뭇거림 없이 허공을 날아가는 새들이나 끝없이 줄지어 앞으로 나아가는 개미들의 행렬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우리가 가고 있는 한 생의 길을 생각하고 있다. 믿음으로 가는 저들의 길에 어찌 굴곡이 없겠냐 마는 그래도 오직 목표를 겨냥해 강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들의 길을 부러워하고 있다. 우리도 저 새들이나 개미들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길을 가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봄직하지 않는가.시인
2013-01-30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나는 이별의 말을 한 웅큼, 한 웅큼, 호흡한다먼 곳이 생겨난다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새로 돋은 첫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 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 곳에 앉아 있다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먼 곳은 생겨난다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나목 앞에서, 황량한 계절 깊숙한 곳에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이별을 말하면 먼 곳이 생겨난다고 말하는 시인은 새로 돋은 첫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 새로운 출발이고 시작이며 의욕과 생명감이 넘치는 시간들을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먼 곳이라고 시인이 말하는 결별의 시간, 공간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인간이란 운명적으로 먼 곳을 만들고 먼 곳을 그리워하고 아파하는 것은 아닐까.시인
2013-01-29
쇳가루 펄펄 날리는 작업장고철더미에 꽃 피었다언제 날아든 것일까생의 절박함을 아는지 모르는지하필이면 H빔 틈바귀에 뿌리 내린꽃긴 목 하늘을 우러른다쑥부쟁이, 연보랏빛 꽃이 피기 전에 그 덤불은 그야말로 아무데나 뿌리를 내린다. 척박하고 버려진 땅에도 뿌리내리고 가을이면 고운 꽃들을 피워 올린다. 쇳가루 펄펄 날리는 작업장 고철더미에도, 생의 절박함이 묻어나는 H빔 틈바구니에도 뿌리내리고 고운 꽃을 피우는 그 강한 생명력은 우리 인간들이 본받음직한 것 아닐까.시인
2013-01-28
냇가에 백 살 먹은 아카시아 한 그루 서 있다 밤길 걷는데 꽃향기 흐드러진다자세히 보니 허리춤에 나팔을 달았다 동네에 초상나면 제일 먼저 부고를 전했다꼭두새벽 새마을 노래를 불렀고 가끔 육자배기를 부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몸의 반이 고사목인데 나머지 반은 꽃이다 낮에는 꿀벌들이 다녀갔다 인생의 달콤함을아는 애인들이다 냇가에는 한낮의 격정이 흥건하게 흐른다 꼭대기부터 말라죽기 시작했지만세월의 기품이 살아 있다 소신공양 중에도 향기 가득한 것 백 년은 살아야 할 것 같은데동네에 백 살 넘은 사람이 없다 백 년 동안 쉬지 않고 꽃을 피워 본냇가에 서 있는 백년 묵은 아카시아 나무.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은 유령같은 존재이다. 한 때는 왕성한 생산과 결실에 이른 청춘의 시간들이 있었으나 이제 죽음의 방향으로 서서 고사목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때마다 남은 몸의 건강과 열정을 다 바쳐 향기로운 꽃을 피워 올리며 최선을 다해 그의 생을 살아가는 아카시아 나무를 통해 시인은 우리네 인생도 그리 살아가야하지 않겠느냐 라는 암시를 툭 던지고 있다.시인
2013-01-25
저 소리에 어떤 것이 씻겨 내려가길 바라면서저 소리에 어떤 것이 씻겨 내려갈까 염려하면서새벽 잠 속에서 오래 빗소리가불길한 기별이한 동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보았다가능과 불가능이 함께 쓸려나간매운 연애여걸었던 길이, 밥집이, 나무가몰라영화처럼, 소설처럼세 시는 두시를 몰라, 동은 서를 몰라그리하여 한 동네가느닷없는 작별이그 시간 거기 나무가 서 있기나 했을까거침없이 쏟아져 휘몰아가 버리는 폭우와 그 물줄기의 흐름을 보면서 시인은 한 생의 사랑과 영화처럼 소설처럼 꿈 꿔왔던 것들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빗물에 휩쓸려 가버리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 느닷없는 작별과 부재의 순간들이 닥쳐오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고 느끼면서 사랑과 한 생의 쓸쓸함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시인
2013-01-24
입동이 지난 뒤, 추위가 시퍼렇게 깔린 날이었다 잿빛구름이 머리를 덮었다쿵 쿠앙 콰아아아아쿵아 쿵야 쿠아아아아집 옆 등성이 너머 계곡이 흔들렸다 산이 흔들렸다 집이 흔들렸다 나도 흔들렸다달아나는 멧돼지가 보였다 새끼들도 서너 마리 보였다 땅을 콱콱 찍으며 내달린다생과 사의 경계선을 타고 질주하는 멧돼지들나무들도 팽팽 긴장하며 비켜선다 튀어라 생각이고 뭐고 무조건 뛰어라총알이 비켜간다 바람이 휜다 죽음을 향해 달려라먼 산이 아니어도 집 가까운 야산을 오르다보면 흔히 목격되는 풍경 중에 하나가 멧돼지들이 지나간 흔적이다. 거칠게 땅을 헤집고 파헤치고 나무와 풀섶을 짓이기고 쓰러뜨리고 지나간 그들의 흔적을 볼 때마다 시인의 말처럼 죽음을 향해 달리는 그들을 떠올린다. 생각이고 뭐고 무조건 뛰어 나아가는 그들에게서 생사의 가파른 경계를 느낀다.시인
2013-01-23
내 스스로가아닌어떤 힘으로내 몸이끌어 올려졌다가끌어 내려졌다가결국 내 일생은그렇게다해가는 게 아닐까사실이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보턴만 누르면 직벽의 그 높은 높이를 오르내리는 우리 현대인들은 얼마나 편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스스로가 아닌 그 어떤 힘으로 오르내린다는 건 이상한 현상이고, 더더욱 우리네 한 생이 이와 비슷하게 어떤 힘이나 작용에 의해서 이리 저리 끌려다닌다는 것은 뭔가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이 시 전체에 흐르고 있다.시인
2013-01-22
나무 속에서 바이올린을 본다저 나무를 자를 수 있을까잘라서 다듬을 수 있을까침묵이 부르르 몸을 떤다답답하다나무 앞에 서서 나무를 생각한다남루한 하루가 바이올린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치욕이 별처럼 반짝거린다걸어온 길도 걸어갈 길도지금 여기에서는아득하다너무 멀다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 건지 모른다. 그리도 아름다운 바이올린의 선율은 나무속에 있는 건지 모른다. 나무 앞에서 그 참한 소리를 들으려하는 시인의 겸허하고 심오한 자세가 경건하다. 우리의 한 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비록 남루한 하루라 할지라도 그 속엔 아름답고 가치로운 그 무엇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버릴 수 없으며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게 인생이다.시인
2013-01-21
수평선 가득히 누에들이 뽕잎을 갉아먹고 있다곰실곰실거리는 누에의 몸 마디마디를햇살이 오므렸다 폈다 한다바다 한 켠에는 누군가 쉴 새 없이 물레질을 하며명주실을 뽑아낸다희디흰 실오리들이 얽히고 설켜서흰 천을 만들어 둘둘 말아서모래벌에 늘어 놓는다명주 옷 한 벌 입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바다는 진혼곡을 부른다물 속에 누워있던 혼령들이 일제히 일어나서바다를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한다바다는 하늘로 올라가는 다리이다수평선이 하늘에 닿아있다흰 명주 옷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바다를 밟고 하늘로 올라간다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그것을 하늘로 오르는 계단으로 표현하고 있다. 끝없이 하얀 물거품을 만들며 밀려왔다가 밀려나가는 포말을 가만히 보고있노라면 누군가가 하얗게 누에 실을 뽑아내 명주 옷을 만들어 입고 하늘에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결이 끝없이 왔다가 멀어져가는 바닷가에 한번 나가보자. 물 속에 누워있는 혼령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하늘로 올라가는 성스러운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시인
2013-01-18
누군가 문을 두드렸기에 나는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문의 안쪽에는 나와 기원이 있었다나는 기원을 바라보며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지 물었다기원은 내게 잘못된 일은 없다고 말해주었다그렇다면 다행이다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올 여름의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했다아무런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뜨거운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무더운 여름이었다여기에 나오는`기원`은 누구일까. 이 시를 읽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나와 마주보고 있는 그 어떤 실체일수도 있고, 나와 마주보고 있는 또 다른 나 일 수 있다. 그러니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일 수 있다. 문 안의 세계와 문 밖의 세계. 아주 추상적인 공간이다.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 바탕을 이룬 작품이다.시인
2013-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