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한 사내가껌을 밟고 섰듯 우렁차게 먼 이야기를 하지만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눈보라에 이것 저것 다 내어주고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으나부러울 것 없네 손자 손녀도 우습게 매달리고때론 사이클 탄 이가 우주로 떠오를 듯 달려나가기도 하니언덕에 섰는 갈참나무나 느티나무도 마음이 연해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고청설모며 족제비가 종갓집을 이루는 터내가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산을 내려오자산은 슬며시 나의 옷깃을 잡으며곧 볍씨 뿌리는 들판이 될 것이라다정(多情)으로 귀띔을 하는 좋은 날낮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산이 더 오래된 산이고 조용한 산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마음 속 산은 어머니라는 산이다. 히말라야처럼 폼나고 수려한 산은 아닐지 모르지만 갈참나무나 느티나무를 키우며 청설모나 족제비가 종갓집을 이루는 편안하고 안온한 산, 그게 바로 우리네 어머니 같은 산이 아닐까. 언제나 넉넉한 사랑과 정성과 헌신이 늘려있고 늘 다정으로 귀띔을 해주는 그런 어머니라는 산 말이다.시인
2013-01-16
아버지 속 아프고 어지러운데 소주 마셨다. 마셔도 아프다 하면서 마셨다. 한 해에 한 사흘, 마셔도 많이 아프면 소주병 문밖에 찔끔 내놓았다. 아버지 쏟고 싶은 건 다 쏟고 살았다. 망치고 싶은 것 다 망치고 살았다. 그러다 하루 소주 한 댓병으로 천천히, 자살했다. 조용한 아버지가 좋다 죽은 아버지가 좋다 아. 그러나 텅 빈 지구에 돌아온 달처럼 덩그러니 앉았노라니, 살았던 아버지가 좋다. 시끄럽게 부서지던 집이 좋다. 아버지 평생 농사 헛지었다. 나는 어두워져 허공을 갈고 다녔다. 달 하나로 살았다. 문득문득 겨울 들판처럼 글자를 다 잊어버린 어머니가 있다. 공구 같은 손이 또 시집 그 거칠고 어지러운 것을, 고와라고와라 쓰다듬는다. 점자를 읽듯,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호두나무 가지에 찔려 오도 가도 못 하는 , 똥그런 보름달 헛배.돌아가신 아버지의 한 생을 보름달에 투영하면서 시인은 평생 술을 좋아하시며 농사지으시다 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달 아래서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멋지게 한 생을 사셨던 아버지. 비록 못배우고 가진 것 별로 없지만 달처럼 욕심없이 유유자적하게 살다가신 아버지. 이 땅의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 아버지가 그리운 아침이다.시인
2013-01-15
허기져 찾아온 식당생선뼈로만 차린 밥상을 받는다먼저 온 누구 이토록 정갈하게 살을 발라 먹었나더 이상의 식객은 없으리라생선뼈 하나씩 덥석 집어 들고 핥아댄다진정한 미식가가 아니어도온몸이 혀인 듯 소름 돋게 하는이토록 눈물 같은 맛, 비밀은내가 마지막 식객이라고 믿는데 있다그러므로 내 뒤엔 아무도 없다엔딩 크레디트의 자막처럼 나는 산을 오르고음악은 식탁 위로 흐른다느릴수록 아름다워 어제로 구겨지는 오늘내 발꿈치가 마지막 음표처럼 산등성의 꼭짓점을 찍으면기척도 없는 집엔 문득 불이 켜지고나는 성공적으로 사라지리라죽은 애인의 손가락에서 완벽한 각도로 빛나는쓸쓸한 겨울 속으로지난 가을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 숲에서 시인은 부재의 정점을 본다. 성장(盛裝)의 시간도 있었지만 겨울숲은 텅빈 충만으로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생의 시간들이 다 그렇다.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 산정에 오르지만 거기엔 또다른 부재와 상실과 부딪히게 된다. 인생의 과정들을 돌아보고 쓸쓸한 겨울을 생각해 볼일이다.시인
2013-01-14
늦가을이면 부쩍 등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참을 수 없는 가려움겨울이 어서 가길 학수고대하면서시원하게 긁고 싶지만 등은 멀기만 하고등이 가려울 때마다살아가고 있는가사라지고 있는가시무룩해져 간다삶은 연명이야등이 가려워지기 시작하면서볼혹인가, 부록인가 시달리게 되었고가까이 있지만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해더디 오는 봄에 대해 골몰하게 되고이게 삶이냐고치워라, 손!숱한 가려움의 나날이 삶이라고치워라, 몸!등이 가렵다고 말하는 시인의 속내는 등이 가려운 것보다, 힘겹고 지난한 한 생을 지겨워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 아니, 어쩌면 누구의 부록 같이 살아온 삶일지 모른다는데 생각이 이르고 있다. 가까이 있지만 닿을 수 없는 생의 목표랄까 행복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을 더디오는 봄으로 여기면서, 숱한 가려움으로 다가오는 나날에 대해 시인은 쓸쓸한 속내를 털어내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3-01-11
몹쓸 병이 돌아서, 생매장돼지들이 떠난축사 앞에서 주인이 눈물을 훔친다조금 있으면 내다 팔 것인데다 컸는데 -----돼지들은 대개 동갑일 것이다뉴스 끝에는 내 동갑도 나왔다고시원 옥상에서 몸을 던진 사람흑룡강에서 온 사람나이를 짚어보니 돼지띠세상에 내다 팔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잘 가라, 동갑네야복 있으라.사해(四海)의 돼지들아!구제역으로 집단으로 생매장 당하는 돼지들을 보면서 돼지띠인 시인은 묘한 끈 하나를 생각한다. 동갑(同甲)이라는 말에는 묘한 연대의식이랄까 연민이 묻어난다. 흑룡강성에서 와서 이 무시무시한 자본의 세상에서 못 견디고 고시원 옥상에서 뛰어내린 사람도 어쩌면 돼지띠 동갑인지 모른다는데 이르러서는 어떤 참담함을 느끼고 있다. 씁쓸한 강복 기원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시인
2013-01-10
네모 상자 속 엄마의 유품인 반지 하나어둠에 묻혀있다뚜껑 열자 그녀의 닳고 가녀린 몸스며드는 한 줌 햇살 껴안는다시간들이 멈춰 버린 곳층층이 쌓인 고요가허공의 먼지처럼 쓸쓸하다늘 분주했을 일상들손마디 안쪽 삶이 전부인 듯언제나 종종걸음이었을 어머니레일처럼 일정한 간격이 내 흔적들은지문처럼 닳고 환한 동그라미 하나 그린다대합실 막차 기다리는 촌부처럼손마디 밖에서 서성이는그녀의 멈춘 일상 속으로내가 들어간다 꼭 맞는 노란 반지낡은 옷 걸치듯 편한 그녀와의 동행어머니가 끼시다 유품으로 남긴 반지 하나. 어머니의 한 생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그 반지를 껴보며 시인은 어머니의 시간들을 느끼고 있다. 오직 가족들을 위한 희생과 헌신으로 일관해온 어머니의 삶을 `손마디 안쪽 삶이 전부였다`고 표현하는 시인은 어머니의 멈춘 일상 속으로, 그 아픈 시간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것이 이 땅의 어머니들의 삶이다.시인
2013-01-09
베어보면그 속은 새벽이다엊저녁 달빛아직은 젖은 채갈잎 더미 밑에 있고그 달빛에 미쳐울던 풀벌레 소리여운으로 날아다니는데그래도 여명의 소근거림은시간의 옷자락에푸르스름 물들어저 언덕을 넘고 있나니흐르는 물소리에는 달빛도 햇빛도 스며있으며, 달빛에 미쳐 울던 풀벌레 소리도, 여명의 소근거림도 다 담겨져 있어서 시인은 그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싱그러운 생명의 색깔과 소리를 보고 느끼고 있다. 그 속에 그런 푸르게 살아가는 생명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착하게 열심히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 그 물소리는 더 정겨운 것이다.시인
2013-01-08
빗물이 길을 잃고 헤맨다어디로 가야할 지 아스팔트 위에 우왕좌왕바퀴에 깔려 온몸이 으스러진다흰 피를 토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라검은 바닥에 컥 고꾸라져 쳐 박히고작은 구덩으로 몸을 피하기도 한다숨돌릴 틈도 없이 후려 내친다바람에 쓸려 추위에 웅크린 늙은 이파리 하나하늘 향해 마지막 숨구멍을 연다보드라운 흙내를 그리워하며그들은시멘트 하수관으로 몸을 섞는다한 때 푸르른 이파리로 햇빛에 빛나고, 바람에 흔들리며 한껏 생명의 아름다움을 발산했던 이파리, 이제는 바람에 쓸려 추위에 웅크린 늙은 이파리가 차가운 빗물에 젖고 있다. 끝내는 그 빗물과 함께 시멘트 하수관 속으로 휩쓸려들고 말 것이다. 시인은 그리 주목받을 것 없는 평범한 한 풍경 속에서 인생의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툭 건네고 있다. 지난 시절 청춘의 시간 그렇게 빛나고 아름다웠던 우리네 한 생도 결국은 떨어져 뒹구는 낙엽처럼 그렇게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시인
2013-01-07
일생 꽃이 되지 못한 잎들은생애 마지막 단 한 번새가 되는 것일까잎새잎의 새라는 말저문 숲에서갈참나무 마른 잎들우수수우수수바람에 흩어진다잎의 새들시린 허공으로날아오른다갈참나무 마른 이파리들이 허공에 흩어지는 모양을 보면서 새로운 인식에 이르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은 갈참나무 낙엽을 푸르른 목숨을 다하고 떨어져 흩어지는 이파리로 인식하지 않고 살아서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로 표현하면서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잎새` 라는 말, `잎의 새`라는 생각을 하면서 시린 허공을 날아오르게 하는 시안이 깊고 새롭다.시인
2013-01-04
신문을 읽는다`임기말 ----- 권력 언저리 풍경`검찰도국정원도수족 같던 의원들도그러나 무엇보다보수 언론들조차낯 뜨겁게 달라졌다고그나저나모를 일이다나는 왜 `임기말`이 자꾸만`암말기`로 읽히는지세상의 모든 것에는 시효가 있다. 시작하거나 들어섰을 때가 있으면 반드시 마치고 나갈 때가 있는 것이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그 엄청난 힘의 시작을 우리는 느꼈다. 그러나 레임덕 현상이라고 일컫는 임기말의 권력누수 현상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단순히 임기말이 아니라 암말기로 표현하는 시인의 인식에 묻어나는 우리 정치의 이러한 기현상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아침이다.시인
2013-01-03
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백무선 철길 위에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화물차의 검은 지붕에연달린 산과 산 사이너를 남기고 온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어쩌자고 잠을 깨어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눈 내리는 북방의 산악 지대를 달리는 열차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를 바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시인은 눈 내리는 고향에 그리움의 심정을 아주 단순하고 쉬운 독백의 형식을 빌려 절실하게 내뱉고 있다. 어쩌자고 잠을 깨어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는가에 서린 시인의 진솔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시인
2013-01-02
계절을 타는 줄만 알았습니다아는 병(病) 같다는 안집할머니 말씀이무슨 뜻인지도 몰랐습니다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손님인줄 알았습니다나른하게 설핏 잠이 들었습니다예쁜 접시에 탐스럽고 먹음직스런복숭아 두 알이 있었습니다할머니의 측은한 눈길이 어서 먹어보라고다정하게 재촉합니다그 계절의 고통은 평생 기쁨이었습니다퉁명스런 여의사의 불친절도가슴 뛰는 기쁨이었습니다축하한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할 줄 모르는의사도 용서가 되었습니다한 생명이 생겨나는 거룩한 일은 태몽 같은 신호로 다가오는 것이리라.옛 어른들은 느낌과 감각으로 혹은 어떤 신비로운 기운이나 힘에 의해 태기를 알아차린다고 한다. 퉁명스런 여의사의 불친절 마저도 가슴 뛰는 기쁨이고, 누구에게서 축하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평생의 가장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렇게 태어난 것이 우리 인생들인 것이다.시인
2012-12-31
진달래 붉은 기운 토해낼 때당신은 아셨을까마지막 날이라는 것을사랑하는 아내 벚꽃구경을 보내놓고진달래 한 아름 꺾어다 항아리에 치장하고아내 기다리며 밭고랑 이불처럼 곱게 개어 놓으시고마지막 이승의 밥술 딱딱하여 넘어나 갔을까살포시 마지막 수저 놓고 먼 길 떠나실 때목숨보다 더 아끼던 아내 눈에 밟히어이승의 부질없는 껍질들 훌훌 벗으시고땅거미 지는 저녁노을 따라먼 길 휘적휘적 떠나셨네진달래꽃 붉게 피어나던 날 먼 길 서역으로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시인의 눈도 가슴도 젖어있다. 아픔과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오신 아버지. 그 질곡의 터널과 강을 건너 수많은 상처를 품고 먼 길 휘적휘적 떠나신 아버지. 우리 시대의 모든 아버지들이 이런 거칠고 팍팍한 길을 걸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쓸쓸하게 진달래꽃그늘에 묻혀 한 생을 마감하고 떠나시는 것이다. 경건하게 거수경례를 하고 싶은 아침이다.시인
2012-12-28
나무는 길을 잃은 적이 없다허공으로 뻗어가는잎사귀마다 빛나는길눈을 보라나무는 길을 잃지 않는다. 나무는 길을 가지만 길을 잃지 않는다는 말은 어렵게 들릴지 모르나 분명 나무도 길을 가고 있다. 물을 마시며 음식을 섭취하면서 길을 간다. 아주 정직하게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물이 풍부한 시냇가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먹을 것이 풍부한 산자락이나 서 있기 편한 평평한 평지를 탐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을 만족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 갈 뿐이다.잎사귀마다 푸르게 빛나는 저 나무들의 길눈을 보라.시인
2012-12-27
보고 싶고 보고 싶었지만보고 싶은 것도 죄될까말없이 다가갔다가소리 없이 돌아간다많고 많은 당신을 보아 왔지만진정 보고 싶은 당신은 보지 못하고이 대지 저 하늘 기웃거린 만큼젖고 젖어서목마른 몸만 끌고 돌아간다보고 싶어서 내리는 비가 보슬비일까. 시인은 내리는 보슬비를 바라보며 말없이 다가왔다가 소리 없이 돌아가 버린 사랑을 떠올리고 있다. 수많은 인연들 속에서 살아가지만 진정으로 보고 싶은 사랑은 어쩌면 저 내리는 보슬비처럼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더 아쉽고 그립고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시인
2012-12-26
내 젊어서는 동해를 관리하며아는 시인들에게 수천 수만 평씩 나눠주고는 했다평생 그렇게 펑펑 쓰다 보니삶이 곤궁해서요즘은 영 넘어가는 달이나울산바위를 몰래 등기해 놓고혼자 바라보고는 한다속초의 시인 이상국의 시에는 진한 강원도가 묻어난다. 속초바닷가에 살면서 푸른 바다를 그리는 시인들에게 그는 수없이 많은 속초바다를, 아니 푸른 동해를 퍼 날랐는지 모른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그 물통 노릇을 했었다. 아니 지금도 그의 시에는 진한 해연풍의 물빛과 바람소리와 향기가 스며있고 설악과 미시령 산내음이 진하게 배어나고 있어 늘 푸르디 푸르다.시인
2012-12-24
처마 끝에 잡혀 온 산그늘뒤뜰 대숲 지나온 바람 깃 잡고가마 아궁이로 숨는다옹기막골 아궁이 붉은 혓바닥뒷걸음으로 다가온 뉘우침처럼빗장뼈 사이를 날름대며 드나들고도공은 제 맘 하나로 기와를 구울까속 내 감춘 불이 구울까토판에서 일그러진 흙가래들이제각기 문양을 두르고 몸을 차린다보이지 않는 것들, 잃어버린 것들눈 감고 모여 앉아 뜨거워 오는저 하늘대는 혓바닥에 젖는다동틀 녘 수막새 울음소리에졸던 대숲바람 새털처럼 일어선다도공이 정성껏 빚은 옹기를 가마에 넣고 불질을 하는 풍경이 선명하다. 천 도가 넘는 뜨거운 불길 속에서 연단되어 나온 옹기는 더 이상 토판에서 일그러진 흙가래들이 아니다. 제각기 문양을 두르고 몸을 차린, 도공의 영과 혼이 표출된 새로운 한 세상을 열어젖히며 태어나는 것이다. 그 엄숙하고 경이로운 순간 졸던 대숲바람도 새털처럼 일어선다고 표현한 시인의 시안이 참 밝다.시인
2012-12-21
영천 큰 장설 대목 두고 좌판 흰 상어 몸값이 오른다소괴기는 안 써도 돔베기는 올리야제할매들 양재기 찾아 장터 돌며대가리도 없고 지느러미도 없는바다 한 토막장바닥을 따라 돈다전기톱으로 자른 토막고기, 한 돔베기저 큰 몸의 마지막 집이향 타는 차례상이란 건 마땅한 일이다골라 낼 가시도 없는 몸포 떠진 한 토막 살에 새겨 넣은 파도무늬납작하게 지진 돔베기 산적이차례상에 오르면바다는 이 먼 내륙의 영남까지사통팔달명절날 상 위에 오르는 산적 중에 맛나기로는 이 돔베기 만한 것이 또 있으랴. 돔베기가 상어고기라는 걸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으리라. 비린내 없이 담백한 그 맛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시인은 포 떠진 그 돔베기 토막에서 푸른 바다 파도무늬를 보고 있다. 출렁이는 그 물결 한 자락과 물 치는 소리를, 그 푸른 바다를 이 먼 내륙의 영남에서 보는 것이다.시인
2012-12-20
지금쯤 축산 앞바다에눈 펑펑 내리거나제 살 밤새도록 삭인 보름게삭신 후줄근해져서 떠나거나외상장부 들고 쉰 목소리로 나대는기실댁 몰래 눈치껏 항구를 빠져나온채낚기 어선들 불 밝히기 시작했거나오호츠크 해에서 청진 원산을 지나온명태 떼 헤매는도무지 섬이 보이지 않는 바다닻줄 끌어매 애달픈 가슴 풀지만등 시린 바람 피할 데 없는달도 새벽 이울 녘까지 뒤척이다가푸석한 얼굴로 깨어나는외진 항구 축산눈 펑펑 내리면 모두 불러 둘러앉혀술잔 권하고 노래로 다독인다영덕대게의 원조마을이라고 불리우는 경정마을 산굽이를 틀면 죽도산 아래 조그마한 항구가 나온다. 바로 축산항이다. 물가재미 회가 일품이기도 한 이 작은 항구에서 시인은 질긴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풀어내고 있다. 도무지 보이지 않는 바다라고 말할 만큼 흉어의 바다가 원시의 몸짓으로 뒤척이고 있는 것이다. 건져 올릴 것 별로 없는 감감한 바다에서 사람도 마을도 고립되고, 한 때 풍어의 상징이었던 축산항도 참으로 쓸쓸한 섬으로 돌아앉은 풍경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시다.시인
2012-12-19
향기 없는 꽃이슬도 담지 못하는 꽃느낌으로 만족해야할 숙명인 것을연분홍과 보랏빛붉고 잔인한 주홍너는 누구의 씨앗인지 몰라 황량한 가을울면서 방황일 때도 있었노라죽지 못하여 살아있어야 했고영혼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었다연잎을 길러내려는 손끝이내 영혼의 씨방인 것을 이제 말해주마세상의 수많은 꽃보다 무향의 널 사랑한다뜨거운 여름의 뒷자락에서 피어나기 시작해 이른 가을의 첫머리까지 곱게 꽃피우는 연꽃을 바라보며 시인의 인식은 무향의 그 꽃이 피어나기까지 힘들었던 시간들을 떠올리고 있다. 연잎을 길러내려는 손끝이 내 영혼의 씨방이라고 인식하는 시인은 아름다움 그 눈부심 뒤에서 그 눈부심을 떠받쳐주는 보이지 않는 손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누군가의 희생과 정성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성취가 있는 법이다.시인
2012-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