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天葬)이 끝나고일제히 날아오르는 독수리 떼허공에 무덤들이 떠간다쓰러진 육신의 집을 버리고휘발하는 영혼아또 어디로 깃들일 것인가삶은 마약과 같아서끊을 길이 없구나하늘의 구멍인 별들이 하나 둘 문을 닫을 때새들은 또 둥근 무덤을 닮은알을 낳으리인류의 역사는 삶과 죽음의 연속선에서 이뤄진다. 영혼이 휘발해 깃들일 곳이 없어도 인간의 삶은 끊을 길이 없이 이어진다. 주검을 포획하는 독수리는 또 죽음을 전제로 새로운 생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힘들다고 벗어 던져버릴 수도 없는 것이며 피할 수도 없는, 짊어지고 가야할 운명이고 업보인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게는 무상감과 허무감이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가고 또 오는 것이리라.시인
2011-04-28
파란만장한 사내가방안으로 들어와머리맡을 밟는다산목(山木)을 베러 떠났던 지아비자진모리를 안고 살아가는아낙의 머리채가 풀어져진양조로 흘러내린다기다려도오지 않던 이홀로 떠나가선돌아오지 않던 사내가아낙의 풀어진 가슴을 쓸어모아방안으로 들어온다`올해 처음 본 나비`(2002)해방 전 후, 그 이후에도 상당 세월동안 우리는 이러한 가슴 아픈 일들을 봐왔다. 지아비는 벌목하여 돈 벌러 함경도 강원도 떠나고, 홀로 남은 아낙네가 그 지아비를 기다리며 자진모리 가락 같은 가파르고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의 풍속도 하나를 우리는 이 시에서 본다. 환청으로 들리는 지아비가 돌아오는 소리는 결국은 밤비내리는 소리일 뿐이지만 그러나 끝끝내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낙의 눈물겨운 삶이 감동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시인
2011-04-27
시립박물관에 갔습니다아직 삼월이 덜 끝난 자리에 목련의 낙화가대숲으로 발길을 이끌었습니다....(중략)........한쪽 팔을 길게 뻗어석탑 속에 숨겨진 적요를훔칩니다손바닥에 안겨드는 먼지 속 기억들이열두 대문 사랑채의 문설주에서그를 불러내고 있었습니다`키 작은 나무의 변명`(2001)따스한 봄날 시립박물관에서 쓴 이 시는 삼월의 시린 풍경에 머물러 있지 않다. 시인은 `석탑 속에 숨겨진 적요`를 훔쳐내고 `그`를 불러내고 있다. 시인이 불러내고있는 그는 누구일까. 아마도 그이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사물이거나 어떤 이념이거나 정신일 수 있다. 그와 소통하고 싶은, 그와 사랑을 이루고 싶은 조용한 열망이 시 전체에 흐르고 있다.시인
2011-04-25
바닷가에 매어둔작은 고깃배날마다 출렁거린다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중얼거리려고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사노라면많은 기쁨이 있다고그렇다. 우리네 한 생은 출렁거리는 바다 위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의 삶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때로는 풍랑에 뒤집히는 어렵고 힘든, 고통의 삶을 살 때도 있고 때로는 순풍의 바다에서 많은 어획의 기쁨을 누릴 때도 있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닐까. 우리의 인생은 늘 질풍노도의 어려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꽃피는 봄날의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기쁨과 행복이 찾아 올 때도 반드시 있는 것이다.시인
2011-04-22
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있지만후회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어차피 마지막은 너무 빨리 다가오고아직은 뒤돌아보며 살 때가 아닌데그리움의 땅으로 자꾸만 이끌리는내 영혼을 잡으며아직은 살아보자고 다짐을 한다어느 젊은 수도자의 고뇌에 찬 표정머릿속에 닮으며나의 길을 지키고 섰다`홀로서기 5`(1998)우리네 인생을 길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대한 일종의 미련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더 좋은 길 더 나은 길에 대한 미련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더 나은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더 행복해지지 않았을까하는. 그러나 시인은 미련과 후회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남은 삶의 길을 당당히 충실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시인
2011-04-19
돈 없으면 서울 가선용변도 못 본다.오줌통이 퉁퉁 불어 가지고시골로 내려오자마자아무도 없는 들판에 서서그걸 냅다 꺼내들고서울 쪽에다 한바탕 싸댔다이런 일로 해서들판의 잡초들은 썩 잘 자란다서울 가서 오줌 못 눈 시골 사람의오줌통 불리는 그 힘 덕분으로어떤 사람들은 앉아서 밥통만 탱탱 불린다가끔씩 밥통이 터져 나는 소리에들판의 온갖 잡초들이 귀를 곤두세우곤 한다.자본주의 실상과 모순이 확연히 드러나는 비정하리만큼 서늘한 공간 서울이라는 냉엄한 공간을 대상으로 이분화 된 세상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시이다. 야유와 조롱이 뒤섞인 시인의 어투가 매우 직설적이고 직선적이다. 지방 소외, 서울 집중이라는 왜곡된 시대적 가치를 거부하고 반기에 드는 재미있는 시이다.시인
2011-04-14
오랫만의 나들이에 어머니는 밤 내 가슴을 뒤척였다몇 년 동안 옷장에 걸려있던 투피스를 입기위해 스타킹을 신는데문득 어머니의 종아리에 마른 길이 생겼다그 때 마다 어머니는 조심해서 신어야겠다고 살살 잡아 올리지만스타킹엔 다시 새 줄이 늘어났다스타킹에 자꾸만 길을 내는 어머니를 위해나는 어머니의 발에 풋크림을 발라준다풋크림을 바르고 맛사지를 해준다그 때마다 손바닥에 걸리는 어머니의 발바닥어머니의 굳은 발바닥에 길을 내는 동안어머니의 종아리 살은 더욱 더 마른 길이 되고내 손도 그 길을 따라 마른길이 되고 있었다몇 켤레의 스타킹을 더 버리고서야 비로소길 위의 길이 된 어머니의 발그 샛길 위로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세상에 가장 위대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희생과 정성과 사랑이 아닐까. 늙은 어머니가 거친 한 생을 건너오시면서 만들어온 길. 그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들을 함께하면서 시인은 그 길을 보고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끼고 있다. 아니 자기 자신도 어느덧 그 비슷한 길을 만들며 그 길을 걸어오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는 길 위의 길이 된 어머니, 둥근 보름달로 떠오른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눈물이 잔잔히 흘러오는 시이다.시인
2011-04-13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환한 산 하나가 되네등불 둘이 걸어오네둥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환한 바다 하나가 되네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넣고 다녔다.2002등불이 자신의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산` `바다`가 되는 곧 사물과 자신이 근원적으로 하나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시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막힘과 폐쇄라는 답답한 상황으로부터 뚫림과 열림, 소통의 현실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네 사람 사이에도 이런 화창(和唱)과 소통이 이뤄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가 될까.시인
2011-04-12
행운은 토막이라는 생각행운은- 고작한 뼘 길이라는 생각누군가 이제는 아주 끝장이라고한 그루 삶의밑동이며 가지를 잘라 내던졌을 때행운은 거기에서 잎이 나고 싹이 나는 거라는 생각잎이 나고 싹이 나는 걸발견하는 거라는 생각그리하여 울며 울며 그 나무를 다시 삶의 둑에 옮겨 심는 거라는 생각행운은, 토막이라는 생각행운은- 집집마다수반 위에 올려놓은 토막이라는 생각 사람은 늘 행운이 따라주길 바란다. 행운과 불운은 상두마차로 사람에게 찾아온다고 한다. 만남과 헤어짐. 태어남과 죽음. 토막토막의 행운이 사람의 앞길에 계속 놓여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복권 한 장의 행문처럼 말이다. 해설 하재영·시인
2006-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