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으면 선명히 각인되는 얼굴이 있어금지된 경계의 시선을 전당포에 맡긴다집 장만하느라 결혼 예물을 전당포에 맡기고가난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거짓말을 한다시를 가지고 논 적 있었다고 변명한다, 나는시답잖은 잔챙이 글만 되고 말고 뿌려놓는다살면서, 맡겼다 혹은 찾아와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겠냐만그래도 축축한 재생의 추억들 전당포에서 찾아와야겠다젊은 날 전당포에 뭘 맡기고 돈을 빌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시인도 집 장만하느라 결혼예물을 맡겼다가 찾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살면서 맡겼다 혹은 찾아와야하는 것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돈 되는 물질이 아닐지 모른다, 젊은 시절 험산준령을 넘겠다던 의욕과 삶의 열정. 퍠기와 정의로움. 혹은 생의 의기 같은 것들. 비록 지금은 축축한 재생의 추억들로 오랜 기억의 저편에 놓여있을 지라도 꼭 찾아와야할 것들이 분명 있다는 말이다.시인
2012-12-17
식탁에 올라오는 밥과 반찬이매일 거기서 거기라고 불만을 표시하자아내는 왠 밥투정이냐고 받아친다수십 년 동안 밥을 해왔으니 지겨울만하다는 생각도 들지만그래본 적이 없는 아내가 그러니 나는 서운했는데그러면서도 투정 이후에 식탁이 좀 달라졌는데식탁만 그렇겠나싶다투정 없는 관계투정 없는 사랑도맨송맨송 싱거워서 곧 물리고 말 것이다지난 세월 한때 지역에 함께 문학활동을 한 적 있는 공광규시인의 짧고 미미한 일화 속에는 사람의 온기가 묻어나서 따스하다. 그런지 모른다. 매일 먹는 밥, 매일 차리고 준비하는 밥상. 지겹고 지겨워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시인은 아내에게 밥투정을 했지만 그것은 밥투정만 아니었다. 가까이 있고 늘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 사랑의 소중함 같은 것에 대한 일깨움이 가끔은 있어야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의 밥상도 사랑도 예전 같지 않았다는 고백을 들어보면.시인
2012-12-14
마름 열매 까만 별처럼 물속에 가라앉은가을 늪에 이르렀다읽지 못하고 덮어둔 책처럼가을 늪은 어둡다그러나 쇠물닭 날갯짓하던 물길은 어디엔가 있으리라고눈을 열면 어두운 늪 속에 하늘이 열린다어두운 게 아니라 맑은 것땅과 함께 하늘이 열린다푸드득푸드득, 살아온 날의 소리가을은 잎사귀를 떨구며뿌리마다 마음을 갈무리하고 있다뿌리마다 마음을 닦고 있다닦은 마음이 거울 되어 쇠물닭의 물길을 열면읽지 못한 책들이푸드득푸드득, 날개치며 살아나맑은 페이지를 펼친다마름 열매 별빛에도 글자들이 매달린다까만 마름 열매가 별처럼 물 속에 가라앉는 우포늪의 가을은 충만한 생명들을 저장하고 갈무리하는 시간들이다. 수많은 생명의 꼭지들과 끈들, 씨앗들이 겨울을 견디고 다시 새로운 하늘을 열기위해 새로운 생명의 향연을 열기위해 단단히 자기를 단속하고 잠그고 관리하는 시간들이다. 새물길을 여는 새물닭의 비상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이 참 밝고 희망차다.시인
2012-12-13
해맑은 하늘과 맞닿은 능선선 하나로 가르고노점상을 또아리 틀어 던져놓고는오색저고리 단풍잎 엮어청자 물줄기내린다산 정상사람들의 냄새로한 점 한 점 찍어보면화폭은 가을화색을 더하고퀘퀘한 곰팡내음과 파삭거리는칼칼한 가을바람그림에 쌓여마침내붓 끝에 사람 하나 묻어 나온다비록 글로 지리산의 풍광을 그린다고 하지만 시인의 눈과 발은 생생하게 그 풍경 속을 밟고 보고 느끼고 있으리라. 가을 산의 정취와 함께 그 정취에 흠뻑 빠져있는 사람들의 가슴까지도 그려내는 시인의 시안이 깊고 그윽하다.시인
2012-12-12
탄광으로 잘 나가던 시절만 원짜리 물고 다니던 개들은 보이지 않고하루 수백 명씩 내리고 타던구절리역은 청량리행 열차가 끊긴 지 오래고식당들은 줄줄이 문을 닫아서밥 사먹기가 금 사기보다 어려운 곳그래도 꽃웃음이 있다구절리 계곡 흐드러지게 피는진달래.한 때 석탄 채광으로 성업을 이뤘던 구절리. 사람들이 모여들고 경제가 활성화되어 시인의 말처럼 잘 나갔던 구절리. 이제는 폐광에 따라 사람들도 떠나고 을씨년스런 풍경 속에 밥 사먹기도 어려운 곳이 되어버린 곳. 그 폐허 위에도 깊이 쌓였던 눈이 녹고 새봄이 와서 진달래꽃이 피어나고 있음을 노래하는 시인의 짧은 시 속에는 허망함과 함께 새로운 희망으로 번져오는 봄의 기운과 향기가 있어 참 좋다.시인
2012-12-11
저산에홀로 피어발길 붙드는 꽃들이쁘다저 빈집에홀로 피어발길 붙드는 꽃들눈물 난다아무도 와 닿지 않고 눈길 주지 않는 산에 홀로 피어나는 꽃들이란 얼마나 자연스럽고 이쁜지 모른다. 시인이 빈집이라고 지칭하는 텅 빈 산에 홀로 피어나 솔바람에 흔들리다가 여우비에 젖고, 맑은 새소리와 햇살에 젖는 꽃들을 보면 그저 수수하게 이 땅의 변방에 살다 스러지는 민초들 같아서 눈물겹다. 시인은 텅 빈 산에 피어나는 꽃들에서 그런걸 본 것이다.시인
2012-12-10
파도소리 구슬피 들려오는밤하늘 아래인적이 드문 백사장을 외로이 거닐 때면오늘도 어김없이 파도는밀려오지만떠나버린 너는 돌아오지 않네이 밤도 달빛이 비치는 바다는잔잔히 흐르지만여기에 뿌려진 너의 마음은한 송이 꽃이 되어밤하늘에 피어나리어김없이 파도가 밀려오는 달빛 비치는 바닷가에서 떠나버린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잔잔히 흐르는 편안한 시다. 그 바닷가 백사장에서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아름다웠던 시간들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바닷가에서 그 사람이 뿌려놓은 마음의 한 자락을, 한 송이 꽃이 되어 밤하늘에 피어나는 그이의 목소리를 모습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시인
2012-12-07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고양이 한 마리가 아파트 베란다에 일자로 엎드려늙어가는 지구의 시절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습니다사람들의 낙엽 밟는 바스락 소리에 놀라벌레들은 땅밑에서 또 깜빡,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지구는 아름다운 초록색의 별이라고 한다. 뭇 생명체들이 유기적으로 어울려 그들의 생을 꽃피다 스러져간다. 그게 순리고 진리다. 우주를 아니 지구별 점령 지배하고 있는 인간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걸 이 시를 통해 느낄 수 있다. 고양이 한 마리도, 사람도, 떨어져 딩구는 낙엽도, 땅 밑의 벌레들도 다 저들의 한 생을 최선을 다해 살다 스러져가는 것이다. 아옹다옹 싸우고 집착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툭 던지는 시인의 목소리가 허허롭고도 맵다.시인
2012-12-06
바람 부는 날은 이 방이 저 방이다. 이 방에 있던 내가 갑자기 저 방에 있고 이 방을 주먹으로 한 대 갈기면 저 방이 웃는다. 가을바람 으스스한 저녁 방마다 비어서 누가 등을 때린다바람 부는 날이면 소소한 소리들이 그 바람 소리에 잠겨든다. 소리뿐 아니라 그 허허로움이 집안에 가득 들어차서 온 데가 빈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을 시인은 그 섬세한 감관을 세워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그 바람 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우주의 소리 자연의 온갖 소리들이 들릴 것이다. 가을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소리들이 들릴 것이다.시인
2012-12-05
버스 종점부터 장발과 어깨에 눈 잔뜩 이고 와 환하게 웃는 둘째형의 이마, 카시미롱 이불 속 발가락에 차이는 스뎅 밥그릇 더듬으려고 늘어나는 손길, 얼른 부엌으로 나가 석유풍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달각거리는 팔각 성냥통 그으면 치이익 금세 야근하고 돌아온 밤을 둥글게 휘감는 불꽃,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고 입 다무는 부엌창, 마술 같은 밤, 처음 와 본 듯한 골목길, 먹빛 발목 두고 망명하는 시대, 울 엄니 전성기.눈 내리는 도시 변두리 서민들의 골목안 풍경이 정겹다. 야근 마치고 들어온 형제들 구둘목의 한 그릇 밥과 부엌의 거친 반찬을 찾고 챙겨주는 식구들의 따스한 온기가 진한 감동에 이르게 하는 시이다. 도시 빈민들의 일상이다. 그래도 거기에 새 세상에 대한 열망과 꿈이 자라고 있으며 현실을 비웃지 않는 건강한 사람들의 진지한 생의 한 과정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2-12-04
105동 앞 이팝나무가 앞산에 내려앉은 하늘도 함께 툭하고 잎을 떨구는데, 애초부터 거기 있던 앳된 가을이 터져버린 봇물처럼 푸르게 푸르게 밀물져 오는데이런 날은 다 쓸데없다 입 꼭꼭 다물어야지 콩이니 팥이니 무슨 말을 하는 것도 다 미친 짓이다 무엇이든 결국은 슬픔으로 차오르는 이런 날은 아파트 엘리베이터도 쓸데없다 한 계단 한 계단 힘주어 딛고 올라야지툭 하고 떨어져 가는 곳 모를 저 나뭇잎처럼, 지는 잎 때문에 끝간데 없이 깊어지는 저 하늘처럼, 한 발 한 발 더 깊게 꼭꼭 눌러 디뎌야지그렇게 살아야지 막막한 어둠도 닦고 또 닦으면 환한 달이 오르듯 그렇게 저 슬픔도 이팝나무 가지 끝 다시 맺히는 이슬이게아니면 차라리 저 이팝나무처럼 까짓 슬픔도 더 단단히 뿌리 내리도록어느 봄날 우리 곁에서 하얀 이밥처럼 꽃을 피워올렸던 이팝나무. 시인은 아파트 안의 이팝나무에 들어서는 가을을 본다. 거기서 차오르는 슬픔을 느끼고 있다. 머지않아 툭 하고 떨어져 어딘가로 가버리는 나뭇잎 같은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에 닿아서는 오히려 그 슬픔이나 허망함, 절망감을 견디고 이겨내려는 단단한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슬픔도 더 단단히 뿌리 내리도록….시인
2012-12-03
가을날 오후의 아름다운 햇살 아래노란 들국화 몇 송이한지에 정성들여 싸서비밀히 당신에게 보내드립니다이것이 비밀인 이유는그 향기며 꽃을 하늘이 피우셨기 때문입니다부드러운 바람이 와서 눈을 띄우고차가운 새벽 입술 위에 여린 이슬의자취 없이 마른 시간들이 쌓이어산빛이 그의 가슴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는 정작의 이유는당신만이 이 향기를간직하기 가장 알맞은 까닭입니다한지같이 맑은 당신 영혼만이꽃을 감싸고 눈물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하늘이 추워지고 세상의 꽃이 다 지면당신 찾아가겠습니다누군가에게 소포를 보내는 일도 받는 일도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설레임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가을에 노란 들국화 몇 송이를 사랑하는 당신께 부쳐보내는 시적 화자의 마음은 한 없이 행복하다. 한지 같이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부쳐보내는 것은 노란 들국화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의 향기로운 마음이고 사랑이리라.시인
2012-11-30
보도블럭 갈라진 틈새로개미들이 어디 이사라도 하는지그들을 방해할 수 없어서이리저리 피하다 보니비틀거리는 걸음걸이오오,세상을 바로 산다는 것은이렇게 비틀거리며 걷는 것이라고?넓게 쭉 뻗은 길로 다니지 않고 비좁은 틈새로 부지런히 내왕하며 일하는 개미들의 습생을 내려보며 시인은 삶에 대한 한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반듯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바람직한 삶일까하는 물음이다. 주어진 규율과 질서를 잘 지키며 살아가는 인생이 반드시 성공하고 선하다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보도블럭의 틈새로 다니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들에게서 어떤 깨달음에 이르러고 있다. 개미처럼 인생의 틈새를 다니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않는 것도 바람직한 삶이 아닐까하는 깨달음 말이다.시인
2012-11-29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소년은 단풍잎 떨어지는 가을날 자기가 남몰래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사랑의 감정에 젖어들고 있다. 가을의 고운 하늘과 붉은 단풍잎은 이러한 소년의 마음을 잘 담아내고 있다. 언젠가 바람이 불고 단풍잎이 떨어지고 가을이 가고나면 그가 사랑한 순이도 멀어지지 않을까하는 불안하고 아쉬운 마음이 몰래 묻어나는 참 깨끗한 시인의 마음을 넘겨다 볼 수 있다.시인
2012-11-28
나는 은행나무가 쓴 자서전의 108쪽을 읽던 중이었는데, 그 가운데 부분에 이르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강아지나 버스나 할 것 없이 잠깐 잠깐씩 던져준 그대들의 눈길이 내 몸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대들과 내 눈길 사이에 어떤 길이 나 있기에 나의 눈길도 그대들의 몸속으로 스며듭니까” 또 몇 줄을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눈빛이 스미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나는 지금 너무 몸이 가벼워 콩새 한 마리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 기억만을 품을 뿐입니다” 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은행나무가 `품을 수 없다`라고 하는 말에 걸려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지금 나는 `품을 수 없다`라는 은행나무의 말 내부로 들어가 그 말이 마련해준 노란 벤치에 앉아 며칠씩 굶어가며 그 의미를 캐고 있다.가을이 깊다. 이 시에서 마련해주는 은행나무의 아름다움에 깃든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늦가을 은행나무 아래서 그 은행나무가 마련해준 노란 벤치에 앉아서 며칠씩 굶어가면서 깊은 사색에 빠져들고 싶어하는 시인의 고백에, 그 낭만의 시간에 깊이 동의하고, 시 속에서 시인이 캐고자하는 의미는 제쳐두고라도 비처럼 날리는 노란 은행나무 아래서 우리들 자신의 존재와 인생에 대한 사색에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시인
2012-11-26
박용래 울보성님!접시잔을 던지며북망산천이 먼줄 알았드니송유하 불알동무!저승으로 그대 올래어한이 넘자 너 - 노안중삼 막내동생!어서, 어서 오세요이승삶은 꿈이로세꽃구름 타고 두둥실사별(死別),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이별이다. 그런데 이런 사별을 시인은 작은 이별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어쩐 까닭일까.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추어보면 잠시잠깐 이 땅에 살다가는 인생이란 짧디짧은 시간이다. 누구나 필연적으로 맞이해야하는 죽음. 고통과 절망, 단절과 소멸의 의미를 가진 답답한 일이지만 우주의 한 이치가 자연스레 이뤄지고 있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사별이란 시인이 말하는 작은 이별이 아닐 수 없지 않을까. 인생을 통찰하는 시인의 심안을 느낄 수 있다.시인
2012-11-23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겄네저것 봐, 저것 봐네보담도 내보담도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겄네해질녘 쓸쓸히 흘러가는 차가운 가을 강물에서 시인은 적막하고 가슴 아픈 친구의 사랑이야기, 그 서럽고 한스러운 사랑이야기기 풀려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랑의 상처가 깊은 친구와 저녁 노을이 번지는 고향마의 강언덕을 내려오면서 같이 울어주고 있는 자신과 강물을 그려내고 있다. 전통적인 우리 정한의 세계가 그려진 감동적인 시가 아닐 수 없다시인
2012-11-22
바다의 푸른 색조가커튼처럼 드리운 횟집고향 사투리 같은 갖가지 어족이꿈틀거린다가지런히 놓인 신발들이 입을 벌리고 있다주인 사내의 재빠른 손길이 도마의 지문을 쪼는데 매번 지워지는 것은 도회 사내들의 입맛뿐 바다의 혀는 팔팔하게 살아서 매운탕같이섞여 끓는 객지의 어족을 삼켜버린다영원의 색조와 소리로 우리 곁에 살아있는 바다. 그 바다의 생명력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깊고 푸르다. 호수면 처럼 잔잔함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던져주기도 하고 갈퀴를 세운 파도로 우리를 일깨워놓기도 하는 바다. 그 영원한 생명의 보고를 바로 곁에 두고있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시인
2012-11-21
세월이란 놈이 참 밉단 말이야내 몰래 와선뭔가를 훔쳐가는 듯한얄미운 놈 같아서 말이야방금도 머리칼에 흰 페인트를몰래 칠하다 쏜살같이또 달아나버리는….걸음걸이도 아주 빠른저기 저 놈 말이야.쏜살같다고 했던가, 세월의 흐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시인은 그 빠른 세월의 흐름을 온 몸으로 느끼고 허망함을 절감하고 있다. 붙잡아 두고싶지만 잡아둘 수 없는 시간들, 푸르른 청춘의 시간들이 어제 같았는데 어느새 희끗한 머리카락이 덮여오는 세월을 어찌할거나. 핑 핑 스쳐지나가 버리는 세월이라는 화살을 다시 본다.시인
2012-11-20
모량역은 종일 네모반듯하다면 소재지 변두리 들녘 낯선 풍경을가을볕 아래 만판 부어놓는다저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개 때문에저기서부터 시작되는 너른 논들을논들에 출렁대는 누런 벼농사를더 널리 부어놓는다, 개는비명도 없이 사라지고논둑길을 천천히 걸어나오는 저 노인네는 또 누구신가누구든 상관없이시꺼먼 기차소리가 무지막지 한참 걸려 지나간다요란한 기차소리보다아가리가 훨씬 더 큰 적막을다시 또 적막하게 부어놓는다 전부똑같다, 하루에 한두 사람누가 떠나거나 돌아오거나 말거나모량역은 단단하다더도 덜도 아니고 딱, 한 되다시속 300km로 달리는 고속철의 시대에 이제는 폐역이 되어버린 모량의 쓸쓸한 정경과 거기에 담긴 오랜 역사를 들여다보는 시인은 세월의 무상함도 생의 덧없음도 느끼고 있다. 평소에도 그리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았던 조그마한 시골 간이역은 그야말로 수난의 민중사가 기록되어 있는 곳이라 해야할 것이다. 연기처럼 사라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저 바람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리라.시인
2012-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