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은행나무가 쓴 노란색의 자서전을가을이 다 갈 때까지 읽어내지 못했다

등록일 2012-11-26 21:45 게재일 2012-11-26 22면
스크랩버튼
정 유 화
나는 은행나무가 쓴 자서전의 108쪽을 읽던 중이었는데, 그 가운데 부분에 이르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강아지나 버스나 할 것 없이 잠깐 잠깐씩 던져준 그대들의 눈길이 내 몸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대들과 내 눈길 사이에 어떤 길이 나 있기에 나의 눈길도 그대들의 몸속으로 스며듭니까” 또 몇 줄을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눈빛이 스미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나는 지금 너무 몸이 가벼워 콩새 한 마리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 기억만을 품을 뿐입니다” 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은행나무가 `품을 수 없다`라고 하는 말에 걸려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지금 나는 `품을 수 없다`라는 은행나무의 말 내부로 들어가 그 말이 마련해준 노란 벤치에 앉아 며칠씩 굶어가며 그 의미를 캐고 있다.

가을이 깊다. 이 시에서 마련해주는 은행나무의 아름다움에 깃든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늦가을 은행나무 아래서 그 은행나무가 마련해준 노란 벤치에 앉아서 며칠씩 굶어가면서 깊은 사색에 빠져들고 싶어하는 시인의 고백에, 그 낭만의 시간에 깊이 동의하고, 시 속에서 시인이 캐고자하는 의미는 제쳐두고라도 비처럼 날리는 노란 은행나무 아래서 우리들 자신의 존재와 인생에 대한 사색에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시인>

김만수의 열린 시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